서장(書章) 序章 소년은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고싶지 않았 다. 놈들에게 최소한 욕설이라도 하거나 돌멩이라도 던지고 죽어 야 했다. 놈들이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라도 소년은 살아남아야 했다. "빌어먹을 놈들..." 소년은 달리고 또 달렸다. 폭풍한설(暴風寒雪)이 몰아치는 가파 른 산기슭이었지만, 온 몸뚱어리가 난도질당한 상태였지만, 소년 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얼어붙은 손은 동상(凍傷)으로 인해 푸르 죽죽해 졌으며, 등에서, 팔에서, 가슴에서 흐르던 피는 고드름이 된지 오래였다. 상처를 입은 짐승과 같이 필사의 노력으로 소년은 산봉우리를 향 하여 기어올라갔다. 갈증으로 인하여 목구멍이 타 들어가는 듯했 다. 눈을 한 덩어리 집어서 자신의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상반 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고통으로 정신은 더욱 맑아 졌다. 소년의 주위로 피 냄새를 맞은 승냥이들이 푸른 안광을 발하며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겨울철 먹이 감이 부족했던 승냥이들 에게는 생존을 위한 절호의 기회일는지 모른다. 소년은 자신의 손목 만한 나뭇가지를 꺾고는 자신의 너덜거리는 옷가지를 찢어 손에 단단히 묶었다. 그의 손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픔은 없었다. "이 놈들! 덤빌 테면 덤벼봐!" 나무토막을 휘두르며 고함을 치자 승냥이들은 끄응, 끄응 거리기 만 할 뿐 쉽게 접근을 못하였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높이 쳐들어 승냥이들을 견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벼랑이 있고 그 벼랑에는 조그마한 구름다리가 있다. 그 곳은 이 마을을 벗어 날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非常口)였다. 이 사실을 다른 마을에 전해지기만 한다면 관군이 그 악마들을 소탕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탈진(脫塵)하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 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소년은 자신의 아랫입 술을 콱 깨물었다. 피가 튀었다.아무런 느낌도, 아픔도 없었다. 단지 아랫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따뜻하다고 느꼈다. 소년은 난생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고 대 덕(大德)하신 부처님! 이 세상의 모든 설령(仙靈)들이시여! 저는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야 할 자들은 따로 있단 말입니다. 그들을 벌(罰)하게 하옵소서... 구천지옥(九天地獄)에 떠돌게 하옵 소서.... 소년의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벼랑으로 오르는 동안 승냥이들은 소년을 덮치지 않았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소년의 행동을 지켜 보기만 했다. 아마 소년이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소년 은 그것을 알고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 다. 저 멀리 소년의 두 눈에 벼랑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드디어 해 내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한 순간에 보 상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악마들의 최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 고, 자신을 대신해 죽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녕 자신의 눈앞에 펼쳐 진 광경이 사실이란 말인가? 내가 너무 지쳐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년은 도저히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 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구름다리는커녕 나무 한 그루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번 폭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 다. 소년은 풀썩 주저 않고 말았다. 그나마 나뭇가지로 몸을 지탱 할 수 있어 쓰러지지는 않았다. 소년이 주저앉자 승냥이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으 르렁, 거릴 뿐덤벼들지는 않았다. 놈들은 냉정했다. 배고픔이라 는 본능보다 안전을 더 우선하는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승냥이들의 푸르스름한 안광에서 저 녁 무렵, 산 어귀에 올라가서 바라봤던 마을의 풍경이 생각났다. 한 집, 두 집, 불 이 켜지고 아궁이에서 밥 짖는 연기가 솟아오르 던 모습....그 때쯤 개들은 컹컹 짖고, 일 손을 끝낸 남정네들은 사 랑하는 자식과 아네 가있는 보금자리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백가 촌(百家村), 얼마 전까지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마을,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자, 밥줄이었던 마을 ...가난하지만 인 정이 넘치던 우리 마을에 백 여덟 명의 사나이들이 말을 타고 나 타났다. 그들은 약탈자였으며, 침략자였다. 그들의 손아귀에 살아남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에서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짐승들까 지 학살해버리는 악마들 이였다. 우리들은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기에, 행동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 도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연민의 정을 아끼지 않았다. 악마들의 습격에 어쩔 줄 몰라하던 막내 연아(蓮兒), 결국 머리 가 두 동강이 난 채 죽었다. 바보 웅아(熊兒)는 자신의 팔, 다리가 잘려나가자, 엄청 울었다. 그 녀석에게는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보 다 아프다는 것에 현실감을 느끼는 그런 녀석이니까... 뚱보 전 삼(全 三)은 구걸 할 때마다 살찐 돼지새끼라고 욕을 들 어야 했다. 큭큭큭... 생각 해 보라. 그 뚱뚱한 몸으로 뒤뚱뒤뚱 걸 으며 구걸하는 모습에 누가 동정심을 갖겠는가? 하지만, 전 삼은 살찐 돼지가 아니었다. 그는 몸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희기병에 걸 린 환자였고, 시한부 인생이었다. 전 삼은 쏟아지는 자신의 창자 를 주워 담으며 그렇게 죽어갔다. 우리 거지 촌의 대형인 용대가(龍大家) 그 미끈한 얼굴을 무기 삼 아 제일 많은 수입을 올리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착한 사 람이었다. 너무 착해서 항상 손해보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 다. 그는 무덤 속에 숨어있었다. 겨울철에는 거지들이 몸을 녹이 기 위해 토굴을 쌓는다. 모습이 무덤하고 똑같이 생겨 그냥 무덤 이라고 부르곤 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는 왜 내 밀었을까? 그렇게도 바깥이 궁금했던가? 놈들이 칼을 들이대자 그 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않았다. 자신이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크크크! 소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끝내 자 신의 얼굴은 지킬 수 있었지만, 자신의 하체는 지킬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런 순간에도 얼굴을 감싸 않다니...자신의 죽음보다 더 대 단한 것이 있었던가?...그는 그렇게 죽었다. 무덤 안에서....소년 은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푸하하하핫!!!" 승냥이들은 소년의 웃음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승냥이들 사이에 서 자그마한 파문(波文)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파문은 점점 커 져가 거대한 해일(海日)이 되어나갔다. 승냥이들이 몹시 당황하 는 것 같았다. 승냥이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놈들의 눈빛은 공포로 일렁거렸 으며, 급기야 한 놈, 두 놈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 돌연한 사태에 어리둥절해 졌다. 설마 자신의 웃음소리 에 놀라 도망치는 것일까? 아님 미친놈은 안 먹는다는 불문율(不 文律)이라도....에이 설마....소년의 궁금증은 곧 풀리고 말았다. 땅 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곧 우렁찬 굉음(轟音) 과 함께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힘겹게 일어나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산이 무너지 고 있었다. 거대한 눈덩어리들이 엄청난 함성과 함께 세상을 쓸 어 내리고 있었다. 소년의 웃음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가 되어 산사태를 촉발 시켰던 것이다. 소년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승냥이들의 식사거리가 되느 니 자연 속에 파묻히는 편이 나으리라... 소년은 자신에게로 쏟아 져 내려오는 눈덩어리들을 향해 두 팔을 쫙 펼쳤다. 죽음을 반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아 잘 있어라.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어... 하지만 잘 있다 간 다!" 소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한 조각 빛무리가 진리의 세계를 둘러싸고, (一片光輝周法界) 이도 저도 다 잊고 고여하고 맑으면 가장 영험하고 텅빈다. (雙忘寂淨最靈虛) 텅 빈 공간이 살 비치게 밝은데 천심이 고요히 빛나니, (虛空朗徹天心耀 깨달음조차도 선정으로 돌아가 버리면 둥근 달만 외롭다. (慧歸禪定月輪孤) 생겨남도 아니요 없어짐도 아니며, (不生不滅) 가는 법도 없고 오는 법도 없다. (無去無來) 구름이 스러져 푸른 하늘에 산색이 깨끗하고 (雲散碧空山色淨) 바닷물 맑고 맑아 호수에 달이 녹아 내린다. (海水澄淸潭月溶) 동빈(洞賓)은 호흡(呼吸)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태껏 경 험하지 못한 또 다른 경지(境地)에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공허(空 虛)한 가운데 황금 빛 찬란한 한 송이의 금화가 떠오르며 상단전 으로 들어오자 자신이 우주의 한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동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미소는 부처의 미소요, 진리를 머금은 미소였다. 동빈은 곧 자신의 신체에 엄청난 변화가 오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변화는 절대적인 것이고 불가항력인 것이다. 신(神)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동빈은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자신이 수 백년 동안 가꾸어 온 기화이초(奇花異草)와 과실(果實)들을 이젠 자신의 손으로 없었 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상(地上)에서의 인과 (因果)의 사슬을 하나도 남기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것에 대 한 안타까움이나 미련은 없다. 자신의 스승이 걸었을 이 길을 그 또한 걸을 뿐이다. 그가 잠시 감상에 젖어있을 때 그의 영혼으로부터 메아리가 들려 왔다. 그 것은 애통 이였고, 슬픔 이였고, 고통의 메아리였다. 동빈은 그 심령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직접 가꾸어 온 개울가였다. 그 곳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진 한 덩어리의 살 점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이미 얼굴의 형체는 알 수 없는 지경이 었으며, 남녀의 구분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히 그 살덩어리는 숨을 쉬고 있었으며, 울부짖고 있 었다. 억울하다고.......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1 비선과 함께 유유로이 노닐다. 숨바꼭질! 술래들은 귀면(鬼面)을 뒤집어쓰고 안광(眼光)을 희번덕거리 며꼭꼭 숨어있는 생명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초라한 거지새끼들을 찾아내었다. 술래에게 잡힌 그들에게 당연한 벌칙이 내려진다. 그들은 시퍼런 빛을 내뿜는 귀두도(鬼頭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팔을........ 다리를....... 그리고 머리를..... 서걱! 서걱! 서걱! 두 거지새끼들은 그렇게 처형당했다. 마치 푸줏간의 돼지처럼...... 어느덧 귀면의 사나이들은 또 다른 생명체를 찾아 어슬렁거리 기 시작했다. 어둡고 음습한 바위굴, 소년은 구석진 곳에 쳐진 거미집을 찾아 내고 한 주먹 거미줄을 긁어모아 깊숙이 베어진 살 속으로 집어 넣었다. 몹시 쓰리고 아팠지만 출혈은 즉시 멈추었다. 그래서일까. 소년의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정 신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살고싶다라는 욕망, 놈들의 잔혹한 학살과 도륙, 그리고 주검.....주검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주위에 널려있는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인 간은 물리적인 위협을 받을 때, 분노와 증오를 느낄 때 주먹을 쥐 게 된다. 무엇이든 무기가 될만한 것을 쥐게 되면 더욱 좋다. 소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놈들은 피에 굶 주린 악귀들이었으며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살인귀들인 것이다. 순간, 한 놈의 악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놀란가슴을 억제하 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움츠렸다. 들킨 것은 아닐까? 설마.....이 무덤 안이 얼마나 어두운 곳인 데......소년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 놈이 살기를 번뜩이며 자신이 숨은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소년은 정신이 아찔해 지며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제 삶을 포기하여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아니! 삶 을 강탈당할 때가 온 것인가? 소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돌멩이를 더 욱 세게 쥐었다. 돌멩이! 자신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勸)을 가진 절대권력을 지닌 자들에 게 저항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이자 가련한 발악인 것이다. 그 돌멩이를 손에 쥔 채 덜덜 떨려오는 무릎을 감싸 앉고 소년 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만간 찾아올 잔혹한 죽음을 기다리 며......소년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어깨를 집는 손이 있었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 려보았다. 주름으로 가득찬 새까만 얼굴.....공씨(孔氏)성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숨어든 바위굴에 먼저 와서 숨 어든 사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공노인은 거지촌의 최고 고령자로 나병환자였다. 그래서 아무도 공노인 곁으로 가까이 가지도 않았으며 그 또한 결코 동냥질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 그 누가 나병환자에게 동정심을 갖 으려 하겠는가? 노인은 그저 산 속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러한 노인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 다. 항상 자신이 동냥해온 밥을 반으로 나누어 노인에게 건네주었 다. 그리고 자신이 굶을지언정 공노인을 굶게 하진 않았었다. 공노인의 주름투성이의 손이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와도 같이 그의 손 길은 따뜻했으며 부드러웠다. "........." 소년은 서러움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공노인은 그 런 소년을 자신의 품에 앉으며 머리를 다독거렸다. 소년은 너무 나 억울한 것이다. ......나, 난 죽고싶지 않아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 데...... 왜 죽어야 하나요?...... 노인은 소년을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놓았다. 소년이 무 어라 말을 하려하자 노인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한 사람이 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죽이려는 자와 죽 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의 잔혹한 유희(遊戱)에서 최대의 무 기는 돌멩이가 아니라 침묵과 은폐(隱蔽)인 것이다. 노인은 그러 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의 늙은 거지와 한 명의 어린 거지......세상에서 최 하류층 의 신분으로 멸시와 질타를 받고 살아온 인생들이었지만 그들에 게도 숭고한 정신이 있었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공노인은 그동안 소년의 희생으로 하루세끼 거르지 않고 허기 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희생하여야 할 차례인 것 이다. 노인은 소년의 귓가로 나직이 속삭였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으라고......그 동안 힘들게 살았으니.....한 번이라도 행복이란 것을 느끼고 죽으라고......그러기 전까지 죽어 도 죽지 말라고....... 그리고 노인은 무덤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 는 마치 승리를 하고 돌아온 개선하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기 그 지없었다. 소년은 소리를 질러 공노인을 잡으려 했지만 목이 막 혀 음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터져 나온 것은 두 줄기의 눈물이 었다. *** "아이야. " 꿈결처럼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마치 대지의 숨결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소년은 공노인이 돌 아와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바라보 자 공노인의 투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물가물한 시 선 속으로 청수한 젊은 도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 소년은 잠에서 반쯤 깬 상태에서 이곳이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승일까? 아니면......저승일까? 이 중년의 도인은 누구일 까? 저승사자일까?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과는 달리 두려 움은 없었다. 단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동빈은 소년의 혼미한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 었다. 한 겨울 눈바람 속을 헤치고 피어난 꽃송이처럼, 두껍게 깔 린 청석판로(靑石坂路)를 뚫고 자라나는 잡초들처럼, 소년은 그렇 게 소생했다. 기적과 같은 삶을 이루어 낸 것이다. 삼 개월 간의 처절한 생과 사의 투쟁 끝에서 생명의 불씨를 피어 올렸으며 아 무리 짓밟혀도 다시 소생하는, 너무나 억울하여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그런 끈질긴 생명력을 소년은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소년 을 두고 어찌 한 순간의 기다림을 아까워하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소년은 정신이 드는지 아무런 말이 없 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은근한 빛을 뿜어내는 구슬들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삼면의 벽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마감 되어있어 결코 범상한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이야." 다시 한 번 동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 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노소의 눈길이 허공 에서 부딪혔다. "......." "......." 소년은 동빈의 눈길에서 깊고 그윽한 심연(深淵)을 볼 수 있었 다. 그의 젊고 주름살 없는 얼굴에는 부처와 같은 미소가 어려있 었는데 결코 30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 지 않아 보였다. 소년은 더 이상 젊은도인의 강렬한 눈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힘겨운 듯이 입술을 움직였 다. "저....아저씨는....누구세요?" 동빈은 소년의 어린아이다운 질문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노부는 회도인(回道人)이라고 불리우는 늙은 도사일세." 소년은 이 수려한 용모의 도인이 스스로 노부라고 칭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것을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회...도...인..." 동빈은 소년이 자신의 호를 뇌까리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 다. "본래의 이름은 여암(呂　)이라 하며 자(字)는 동빈(洞賓), 호 (號)는 순양자(純陽子)라고 한단다." 소년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소년은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돌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은..... 어디죠?" 그러자 동빈은 웃으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이 곳이 어딘들 어떤가? 자네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존 재하고 있는 이상 이곳이 저승인들 어떠하며 이승인들 어떠한 가?" 소년은 동빈의 깊은 말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설사 이곳이 저승이든 이승이든 말이다. "감사합니다... 저를..." 동빈은 고개를 흔들며 소년의 말을 끊었다. "고맙긴.... 자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 순간,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 친절하고 신비스럽고 고 귀한 풍모를 지닌 젊은 도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줄 용기 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의 떳떳한 이름 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거지였다. 거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어쩌면 소 년은 태어날 때부터 거지였을지도 모른다. 얼마전에도 거지였고,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에도 거지였다. 아마 그 이전에도- 기억은 안 나지만- 거지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추개(醜　)라고 불렀 고, 진짜이름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동빈은 아련한 슬픔이랄까? 알 수 없는 감정이 전이(轉移)됨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유쾌한 사람이었으며 농담과 장난을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쯧쯧! 추개라니.... 인간의 이름이 아니로구나. 이제부터 너의 이 름은 백리향(百里 香)이다. 너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 하니 가장 적당한 이름이리라 생각되는구나. 하하하!" 소년은 깜짝 놀라며 동빈의 얼굴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이 도사 는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지 않은가! 소년의 놀라움과 달리 회도 인의 얼굴은 여전히 장난기가서장(書章) 序章 소년은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죽고싶지 않았 다. 놈들에게 최소한 욕설이라도 하거나 돌멩이라도 던지고 죽어 야 했다. 놈들이 형장의 이슬로 살아지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라도 소년은 살아남아야 했다. "빌어먹을 놈들..." 소년은 달리고 또 달렸다. 폭풍한설(暴風寒雪)이 몰아치는 가파 른 산기슭이었지만, 온 몸뚱어리가 난도질당한 상태였지만, 소년 은 멈추지 않았다. 이미 얼어붙은 손은 동상(凍傷)으로 인해 푸르 죽죽해 졌으며, 등에서, 팔에서, 가슴에서 흐르던 피는 고드름이 된지 오래였다. 상처를 입은 짐승과 같이 필사의 노력으로 소년은 산봉우리를 향 하여 기어올라갔다. 갈증으로 인하여 목구멍이 타 들어가는 듯했 다. 눈을 한 덩어리 집어서 자신의 목구멍으로 쑤셔 넣었다. 상반 신에서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 고통으로 정신은 더욱 맑아 졌다. 소년의 주위로 피 냄새를 맞은 승냥이들이 푸른 안광을 발하며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겨울철 먹이 감이 부족했던 승냥이들 에게는 생존을 위한 절호의 기회일는지 모른다. 소년은 자신의 손목 만한 나뭇가지를 꺾고는 자신의 너덜거리는 옷가지를 찢어 손에 단단히 묶었다. 그의 손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픔은 없었다. "이 놈들! 덤빌 테면 덤벼봐!" 나무토막을 휘두르며 고함을 치자 승냥이들은 끄응, 끄응 거리기 만 할 뿐 쉽게 접근을 못하였다. 소년은 나뭇가지를 높이 쳐들어 승냥이들을 견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벼랑이 있고 그 벼랑에는 조그마한 구름다리가 있다. 그 곳은 이 마을을 벗어 날 수 있는 마지막 비상구(非常口)였다. 이 사실을 다른 마을에 전해지기만 한다면 관군이 그 악마들을 소탕할 것이다. 그러나 소년의 의식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너무 많은 피를 흘려 머리가 어지러웠으며, 탈진(脫塵)하여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 다. 흐릿해져 가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소년은 자신의 아랫입 술을 콱 깨물었다. 피가 튀었다.아무런 느낌도, 아픔도 없었다. 단지 아랫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따뜻하다고 느꼈다. 소년은 난생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고 대 덕(大德)하신 부처님! 이 세상의 모든 설령(仙靈)들이시여! 저는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죽어야 할 자들은 따로 있단 말입니다. 그들을 벌(罰)하게 하옵소서... 구천지옥(九天地獄)에 떠돌게 하옵 소서.... 소년의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벼랑으로 오르는 동안 승냥이들은 소년을 덮치지 않았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소년의 행동을 지켜 보기만 했다. 아마 소년이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소년 은 그것을 알고있기에 잠시도 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 다. 저 멀리 소년의 두 눈에 벼랑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드디어 해 내고 말았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한 순간에 보 상받는 그런 느낌이었다. 악마들의 최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 고, 자신을 대신해 죽은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소년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정녕 자신의 눈앞에 펼쳐 진 광경이 사실이란 말인가? 내가 너무 지쳐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소년은 도저히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 다. 그 곳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구름다리는커녕 나무 한 그루 남아있지 않았다. 지난번 폭풍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 다. 소년은 풀썩 주저 않고 말았다. 그나마 나뭇가지로 몸을 지탱 할 수 있어 쓰러지지는 않았다. 소년이 주저앉자 승냥이들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으 르렁, 거릴 뿐덤벼들지는 않았다. 놈들은 냉정했다. 배고픔이라 는 본능보다 안전을 더 우선하는 것 같았다. 소년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승냥이들의 푸르스름한 안광에서 저 녁 무렵, 산 어귀에 올라가서 바라봤던 마을의 풍경이 생각났다. 한 집, 두 집, 불 이 켜지고 아궁이에서 밥 짖는 연기가 솟아오르 던 모습....그 때쯤 개들은 컹컹 짖고, 일 손을 끝낸 남정네들은 사 랑하는 자식과 아네 가있는 보금자리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백가 촌(百家村), 얼마 전까지 존재했지만, 지금은 존재하지 않은 마을, 우리들의 삶의 터전이자, 밥줄이었던 마을 ...가난하지만 인 정이 넘치던 우리 마을에 백 여덟 명의 사나이들이 말을 타고 나 타났다. 그들은 약탈자였으며, 침략자였다. 그들의 손아귀에 살아남는 것 은 아무것도 없었다. 노인에서 어린아이들까지, 심지어 짐승들까 지 학살해버리는 악마들 이였다. 우리들은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없는 어린 나이였기에, 행동이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거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 도 그것을 알고 우리에게 연민의 정을 아끼지 않았다. 악마들의 습격에 어쩔 줄 몰라하던 막내 연아(蓮兒), 결국 머리 가 두 동강이 난 채 죽었다. 바보 웅아(熊兒)는 자신의 팔, 다리가 잘려나가자, 엄청 울었다. 그 녀석에게는 공포라는 원초적 본능보 다 아프다는 것에 현실감을 느끼는 그런 녀석이니까... 뚱보 전 삼(全 三)은 구걸 할 때마다 살찐 돼지새끼라고 욕을 들 어야 했다. 큭큭큭... 생각 해 보라. 그 뚱뚱한 몸으로 뒤뚱뒤뚱 걸 으며 구걸하는 모습에 누가 동정심을 갖겠는가? 하지만, 전 삼은 살찐 돼지가 아니었다. 그는 몸이 점점 부풀어오르는 희기병에 걸 린 환자였고, 시한부 인생이었다. 전 삼은 쏟아지는 자신의 창자 를 주워 담으며 그렇게 죽어갔다. 우리 거지 촌의 대형인 용대가(龍大家) 그 미끈한 얼굴을 무기 삼 아 제일 많은 수입을 올리는 그런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착한 사 람이었다. 너무 착해서 항상 손해보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 다. 그는 무덤 속에 숨어있었다. 겨울철에는 거지들이 몸을 녹이 기 위해 토굴을 쌓는다. 모습이 무덤하고 똑같이 생겨 그냥 무덤 이라고 부르곤 했다. 가만히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머리는 왜 내 밀었을까? 그렇게도 바깥이 궁금했던가? 놈들이 칼을 들이대자 그 는 자신의 얼굴을 감싸 않았다. 자신이 제일 자랑스러워하는 부분이었으니까... 크크크! 소년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끝내 자 신의 얼굴은 지킬 수 있었지만, 자신의 하체는 지킬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런 순간에도 얼굴을 감싸 않다니...자신의 죽음보다 더 대 단한 것이 있었던가?...그는 그렇게 죽었다. 무덤 안에서....소년 은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푸하하하핫!!!" 승냥이들은 소년의 웃음소리에 잠시 멈칫했다. 승냥이들 사이에 서 자그마한 파문(波文)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파문은 점점 커 져가 거대한 해일(海日)이 되어나갔다. 승냥이들이 몹시 당황하 는 것 같았다. 승냥이들은 물러나기 시작했다. 놈들의 눈빛은 공포로 일렁거렸 으며, 급기야 한 놈, 두 놈 도망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이 돌연한 사태에 어리둥절해 졌다. 설마 자신의 웃음소리 에 놀라 도망치는 것일까? 아님 미친놈은 안 먹는다는 불문율(不 文律)이라도....에이 설마....소년의 궁금증은 곧 풀리고 말았다. 땅 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곧 우렁찬 굉음(轟音) 과 함께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소년은 힘겹게 일어나 소리의 진원지를 바라보았다. 산이 무너지 고 있었다. 거대한 눈덩어리들이 엄청난 함성과 함께 세상을 쓸 어 내리고 있었다. 소년의 웃음소리가 산 전체에 메아리가 되어 산사태를 촉발 시켰던 것이다. 소년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승냥이들의 식사거리가 되느 니 자연 속에 파묻히는 편이 나으리라... 소년은 자신에게로 쏟아 져 내려오는 눈덩어리들을 향해 두 팔을 쫙 펼쳤다. 죽음을 반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세상아 잘 있어라.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어... 하지만 잘 있다 간 다!" 소년의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한 조각 빛무리가 진리의 세계를 둘러싸고, (一片光輝周法界) 이도 저도 다 잊고 고여하고 맑으면 가장 영험하고 텅빈다. (雙忘寂淨最靈虛) 텅 빈 공간이 살 비치게 밝은데 천심이 고요히 빛나니, (虛空朗徹天心耀 깨달음조차도 선정으로 돌아가 버리면 둥근 달만 외롭다. (慧歸禪定月輪孤) 생겨남도 아니요 없어짐도 아니며, (不生不滅) 가는 법도 없고 오는 법도 없다. (無去無來) 구름이 스러져 푸른 하늘에 산색이 깨끗하고 (雲散碧空山色淨) 바닷물 맑고 맑아 호수에 달이 녹아 내린다. (海水澄淸潭月溶) 동빈(洞賓)은 호흡(呼吸)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여태껏 경 험하지 못한 또 다른 경지(境地)에 다다르는 순간이었다. 공허(空 虛)한 가운데 황금 빛 찬란한 한 송이의 금화가 떠오르며 상단전 으로 들어오자 자신이 우주의 한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 동빈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미소는 부처의 미소요, 진리를 머금은 미소였다. 동빈은 곧 자신의 신체에 엄청난 변화가 오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변화는 절대적인 것이고 불가항력인 것이다. 신(神)이 된다는 것은 그러한 것이다. 동빈은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자신이 수 백년 동안 가꾸어 온 기화이초(奇花異草)와 과실(果實)들을 이젠 자신의 손으로 없었 던 것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지상(地上)에서의 인과 (因果)의 사슬을 하나도 남기지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 것에 대 한 안타까움이나 미련은 없다. 자신의 스승이 걸었을 이 길을 그 또한 걸을 뿐이다. 그가 잠시 감상에 젖어있을 때 그의 영혼으로부터 메아리가 들려 왔다. 그 것은 애통 이였고, 슬픔 이였고, 고통의 메아리였다. 동빈은 그 심령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자신이 직접 가꾸어 온 개울가였다. 그 곳에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진 한 덩어리의 살 점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이미 얼굴의 형체는 알 수 없는 지경이 었으며, 남녀의 구분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확실히 그 살덩어리는 숨을 쉬고 있었으며, 울부짖고 있 었다. 억울하다고.......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1 비선과 함께 유유로이 노닐다. 숨바꼭질! 술래들은 귀면(鬼面)을 뒤집어쓰고 안광(眼光)을 희번덕거리 며꼭꼭 숨어있는 생명체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두 명의 초라한 거지새끼들을 찾아내었다. 술래에게 잡힌 그들에게 당연한 벌칙이 내려진다. 그들은 시퍼런 빛을 내뿜는 귀두도(鬼頭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팔을........ 다리를....... 그리고 머리를..... 서걱! 서걱! 서걱! 두 거지새끼들은 그렇게 처형당했다. 마치 푸줏간의 돼지처럼...... 어느덧 귀면의 사나이들은 또 다른 생명체를 찾아 어슬렁거리 기 시작했다. 어둡고 음습한 바위굴, 소년은 구석진 곳에 쳐진 거미집을 찾아 내고 한 주먹 거미줄을 긁어모아 깊숙이 베어진 살 속으로 집어 넣었다. 몹시 쓰리고 아팠지만 출혈은 즉시 멈추었다. 그래서일까. 소년의 온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두려움으로 정 신은 하얗게 탈색되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 살고싶다라는 욕망, 놈들의 잔혹한 학살과 도륙, 그리고 주검.....주검들! 소년은 무의식적으로 주위에 널려있는 돌멩이를 주워 들었다. 인 간은 물리적인 위협을 받을 때, 분노와 증오를 느낄 때 주먹을 쥐 게 된다. 무엇이든 무기가 될만한 것을 쥐게 되면 더욱 좋다. 소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놈들은 피에 굶 주린 악귀들이었으며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살인귀들인 것이다. 순간, 한 놈의 악귀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놀란가슴을 억제하 지 못하고 서둘러 몸을 움츠렸다. 들킨 것은 아닐까? 설마.....이 무덤 안이 얼마나 어두운 곳인 데......소년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살짝 고개를 들어 보았다. 그 놈이 살기를 번뜩이며 자신이 숨은 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모 습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 소년은 정신이 아찔해 지며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이제 삶을 포기하여야 할 때가 온 것인가? 아니! 삶 을 강탈당할 때가 온 것인가? 소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아귀에 있는 돌멩이를 더 욱 세게 쥐었다. 돌멩이! 자신의 생사여탈권(生死與奪勸)을 가진 절대권력을 지닌 자들에 게 저항할 수 있는 최대의 무기이자 가련한 발악인 것이다. 그 돌멩이를 손에 쥔 채 덜덜 떨려오는 무릎을 감싸 앉고 소년 은 고개를 푹 수그렸다. 조만간 찾아올 잔혹한 죽음을 기다리 며......소년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어깨를 집는 손이 있었다. 소년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 려보았다. 주름으로 가득찬 새까만 얼굴.....공씨(孔氏)성을 가진 노인이었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숨어든 바위굴에 먼저 와서 숨 어든 사람이 있었음을 깨달았다. 공노인은 거지촌의 최고 고령자로 나병환자였다. 그래서 아무도 공노인 곁으로 가까이 가지도 않았으며 그 또한 결코 동냥질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세상 그 누가 나병환자에게 동정심을 갖 으려 하겠는가? 노인은 그저 산 속에 돋아난 풀을 뜯어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러한 노인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 다. 항상 자신이 동냥해온 밥을 반으로 나누어 노인에게 건네주었 다. 그리고 자신이 굶을지언정 공노인을 굶게 하진 않았었다. 공노인의 주름투성이의 손이 소년의 헝클어진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마치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와도 같이 그의 손 길은 따뜻했으며 부드러웠다. "........." 소년은 서러움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공노인은 그 런 소년을 자신의 품에 앉으며 머리를 다독거렸다. 소년은 너무 나 억울한 것이다. ......나, 난 죽고싶지 않아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 데...... 왜 죽어야 하나요?...... 노인은 소년을 자신의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놓았다. 소년이 무 어라 말을 하려하자 노인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한 사람이 라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침묵이 필요한 것이다. 죽이려는 자와 죽 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자들의 잔혹한 유희(遊戱)에서 최대의 무 기는 돌멩이가 아니라 침묵과 은폐(隱蔽)인 것이다. 노인은 그러 한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 명의 늙은 거지와 한 명의 어린 거지......세상에서 최 하류층 의 신분으로 멸시와 질타를 받고 살아온 인생들이었지만 그들에 게도 숭고한 정신이 있었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공노인은 그동안 소년의 희생으로 하루세끼 거르지 않고 허기 진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제는 자신이 희생하여야 할 차례인 것 이다. 노인은 소년의 귓가로 나직이 속삭였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으라고......그 동안 힘들게 살았으니.....한 번이라도 행복이란 것을 느끼고 죽으라고......그러기 전까지 죽어 도 죽지 말라고....... 그리고 노인은 무덤 밖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 는 마치 승리를 하고 돌아온 개선하는 장수처럼 위풍당당하기 그 지없었다. 소년은 소리를 질러 공노인을 잡으려 했지만 목이 막 혀 음성이 터져 나오지 않았다. 터져 나온 것은 두 줄기의 눈물이 었다. *** "아이야. " 꿈결처럼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마치 대지의 숨결처럼 포근하고 따뜻한 목소리에 소년은 공노인이 돌 아와 자신을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바라보 자 공노인의 투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가물가물한 시 선 속으로 청수한 젊은 도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었다. "........." 소년은 잠에서 반쯤 깬 상태에서 이곳이 어디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이승일까? 아니면......저승일까? 이 중년의 도인은 누구일 까? 저승사자일까? 그러나 이런 무시무시한 생각과는 달리 두려 움은 없었다. 단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동빈은 소년의 혼미한 정신이 맑아질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 주 었다. 한 겨울 눈바람 속을 헤치고 피어난 꽃송이처럼, 두껍게 깔 린 청석판로(靑石坂路)를 뚫고 자라나는 잡초들처럼, 소년은 그렇 게 소생했다. 기적과 같은 삶을 이루어 낸 것이다. 삼 개월 간의 처절한 생과 사의 투쟁 끝에서 생명의 불씨를 피어 올렸으며 아 무리 짓밟혀도 다시 소생하는, 너무나 억울하여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그런 끈질긴 생명력을 소년은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소년 을 두고 어찌 한 순간의 기다림을 아까워하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소년은 정신이 드는지 아무런 말이 없 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 크다고 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은근한 빛을 뿜어내는 구슬들이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삼면의 벽은 매끄러운 대리석으로 마감 되어있어 결코 범상한 곳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아이야." 다시 한 번 동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돌 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두 노소의 눈길이 허공 에서 부딪혔다. "......." "......." 소년은 동빈의 눈길에서 깊고 그윽한 심연(深淵)을 볼 수 있었 다. 그의 젊고 주름살 없는 얼굴에는 부처와 같은 미소가 어려있 었는데 결코 30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 지 않아 보였다. 소년은 더 이상 젊은도인의 강렬한 눈길을 감당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힘겨운 듯이 입술을 움직였 다. "저....아저씨는....누구세요?" 동빈은 소년의 어린아이다운 질문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노부는 회도인(回道人)이라고 불리우는 늙은 도사일세." 소년은 이 수려한 용모의 도인이 스스로 노부라고 칭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지만 그것을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회...도...인..." 동빈은 소년이 자신의 호를 뇌까리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 다. "본래의 이름은 여암(呂　)이라 하며 자(字)는 동빈(洞賓), 호 (號)는 순양자(純陽子)라고 한단다." 소년은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이름이 붙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소년은 휘둥그레진 눈동자를 돌려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 곳은..... 어디죠?" 그러자 동빈은 웃으며 명랑한 어조로 말했다. "하하하! 이 곳이 어딘들 어떤가? 자네는 지금 존재하고 있고 존 재하고 있는 이상 이곳이 저승인들 어떠하며 이승인들 어떠한 가?" 소년은 동빈의 깊은 말뜻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설사 이곳이 저승이든 이승이든 말이다. "감사합니다... 저를..." 동빈은 고개를 흔들며 소년의 말을 끊었다. "고맙긴.... 자네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 "....." 순간, 소년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이 친절하고 신비스럽고 고 귀한 풍모를 지닌 젊은 도사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줄 용기 가 생기지 않았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내세울 정도의 떳떳한 이름 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소년은 거지였다. 거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지만, 어쩌면 소 년은 태어날 때부터 거지였을지도 모른다. 얼마전에도 거지였고,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에도 거지였다. 아마 그 이전에도- 기억은 안 나지만- 거지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추개(醜　)라고 불렀 고, 진짜이름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동빈은 아련한 슬픔이랄까? 알 수 없는 감정이 전이(轉移)됨을 느꼈다. 하지만 그의 천성은 유쾌한 사람이었으며 농담과 장난을 즐겨하는 사람이었다. "쯧쯧! 추개라니.... 인간의 이름이 아니로구나. 이제부터 너의 이 름은 백리향(百里 香)이다. 너의 몸에서 나는 악취가 천지를 진동 하니 가장 적당한 이름이리라 생각되는구나. 하하하!" 소년은 깜짝 놀라며 동빈의 얼굴을 멍청히 쳐다보았다. 이 도사 는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지 않은가! 소년의 놀라움과 달리 회도 인의 얼굴은 여전히 장난기가 묻어나 있었다. "왜 그렇게 놀라는 것인가? 자네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말도 듣지 못했는가? " 소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대답하는 것일까? 그러자 자신을 구해준 이 은인의 정체가 궁금해 졌고, 여기가 어디이며, 자신이 어떻게 이 곳으로 오게되 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소년의 마음과 달리 그는 장난스러운 얼굴을 지우고 소 년의 어깨를 도닥거리며 일어섰다. "너무 깊은 생각은 도리어 해로우니, 마음 편히 쉬도록 하게나." 동빈은 알 수 있었다. 조금 있으면 이 소년은 많은 것을 물어올 것이다. 이 곳으로 온 배경이나,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이나, 특히 백가촌에 대하여...그 어떤 것도 소년이 알아서 좋을 것은 없었 다. 지금 이 소년에게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이 중요했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할 때 소년의 작은 목소리 가 들려왔다. "저..." 동빈은 왜 진작 일어서지 못하였는가 자문하고 싶었다. "....." "우리 마을, 백가촌이 산적의 습격을..." 소년은 감정이 격해져 뒷말을 흐렸지만 동빈은 그가 무엇을 말 하고 싶어하는지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 불행한 아이에게 사실대 로 말하기에는 현실은 너무 잔혹했다. 잠시 사실을 감추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이 아이에 대한 기만일 뿐이며 언 젠가는 진실은 밝혀지는 법이었다. 동빈은 갑자기 한 숨을 내쉬며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휴우~나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있지...잠시 전에 너의 마음을 읽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것을 영통개안(靈 通開眼)이라고 한단다. 그러니까, 이 곳이 개안되는 것을 말한다." 동빈은 자신의 상단전(上丹田)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소년 의 두 눈은 슬픔 반 호기심 반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옛날 삼목불(三目佛), 삼목천왕(三目天王)이라고 하는 불가의 단어들도 모두 영통의 개안을 두고 이르는 말이란다.이른바 제 삼의 눈(三眼), 마음의 눈(心眼)이라고 하는 것이지. 너를 치료하 는 도중 노부는 많은 것을 너의 마음을 통해 볼 수 있었으며 알 수 있었단다. 아!" 동빈은 갑자기 한 숨인지 탄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천장 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소년의 기억에서 보았던 참상은 그야말로 한 편의 지옥도 이었던 것이다. 그의 눈은 측은지심으로 일렁이 고 있었다. "노부는..... 직접 백가촌을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런 생존자도 발 견 할 수 없더구나. 그 후에도 백가촌에 수많은 관군들이 찾아와 조사를 벌였지만.... 그 들 또한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 하고 철수하고 말았지. 지금으로부터 삼 개월 전의 일이란다. 자네는 삼 개월 동안 생사의 기로에 있었던 게야." 순간 소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어저께 같던 일이 벌써 삼 개월이 지난 일이라니.... 그리고 백가촌의 모든 사람이 죽어버렸다니.... 공노인, 연아, 웅아, 전삼, 용대가.....그 모두가 죽었다니......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을 것을...... 개, 돼지로 태어날 것을..... 죽어도 죽음을 모를 잡초로 태어날 것을.... 소년은 비분에 휩싸여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러자 소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동공이 급격히 축소되기 시작했다. 동빈은 얼른 다가서서 소년의 백회혈(百會穴)에 진기를 주입하 여 끓어오르는 화기(火氣)를 억제 시켰다. 자칫 화기에 침범 당 해 심마(心魔)에 빠져들기 십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혈(睡 穴)을 짚어 수면을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소년은 실신하는 와중에도 계속 눈물을 멈추질 못 하고 있었다. 동빈은 소년의 곁에 앉아 손수건으로 소년의 눈물을 닦아내었다. "휴우~ 천지는 정이 없어 만물을 추구(芻狗)로 삼았고, 성인은 정이 없어 백성을 추구로 삼는구나!" 동빈은 나직이 읊조리며 한 숨을 쉬었다. 추구란 옛날 신에게 제사지낼 때 사용하던 개 모양의 인형을 말 한다. 보통 짚이나 풀을 엮어서 만드는데, 제사지낼 때에는 정중 히 받들다가 제사가 끝나면 길가에 버린다. 모든 역사의 주인공들은 백성들이었지만 그 역사를 장식하는 것 은 몇몇의 영웅들 뿐 이었다. 그 들의 성공담 뒤에는 항상 버림받 고 소외 받는 백성들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들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들은 추구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 다. 백가촌 주민들이 모두 몰살당했다 하더라도, 아니 수 만 수천 만 명이 몰살당할지라도 천지자연(天地自然)의 법칙은 무심히 흐 를 뿐, 직접 관여하는 법은 없다. 인간 또한 만물의 일부분이고 천 지의 추구일 뿐이므로.... 동빈은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 소년을 거지라고 욕 할 수 있겠는가? 이 소년은 용감했으며 자신이 해 야 할 일을 잘 알고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으로 눈바람을 헤치며, 죽음의 공포 로부터 승리했다. 진정한 영웅이었고,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이 소 년을 추구로 삼을 자격이 없을 것이다. 동빈은 조심스레 일어나 문을 열었다. 자신은 곡식을 끊은 지 오 래 되었지만, 소년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년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 두 가지였다. "저어...." 어느새 소년이 깨어난 모양이다. 순간, 동빈에게 소년의 진심 어 린 마음이 전이되어 왔다. 소년의 마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이름도 마음에 들어요." 두 노소(老少)의 눈 길이 마주쳤다. 이 번엔 소년의 마음속으로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들어왔다. 그 기운은 몹시 포근하고 따뜻 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다고, 알고있다고, 열심히 살라고.... 동빈이 나가자 소년은 다시 한 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여동빈(呂洞賓)- 당(唐)나라 말기(798~?)의 도사(道士) 경천(京 天)사람이라는 는 설도 있으며 하중부(河中府) 영락현(永樂縣)사람이라는설도 있습니 다. 원(元)나라 때에 '순양연정경화부우제군(純陽演政警化孚芋帝君)에 봉하여 졌으며, 전진도(全眞道)에서는 북오조(北五祖)의 한 분으로 받 듭니다. 상단전(上丹田)- 미간과 미간사이에 있는 혈 제 일장 대종사(大宗師)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2 좋든 나쁘든 세월은 무심히 왔다가 무심히 지나간다. 남는 것은 세월의 흔적 뿐. 동빈이 스승의 손에 이끌려 도문(道門)의 제자가 된지도 어언 수 백년이 흘렀다. 일심(一心)으로 수련하고 세상에 몸을 드러내어 선행을 베풀고 백척간 두(百尺竿頭)에 경진일보(更進一步)하며 깨달음을 얻기를 수 백여 성상. 하늘위로 하늘 아래로 오로지 홀로 임을 깨달았을 때 그 얼마나 고독했던가?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도 비 온 뒤의 무지개도 지저귀는 새들도 꽃과 나비들 도 산과 개울과 강들도 모두 허상임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고독했던가? 얼마전 황금꽃 하나가 심상에 들어오고 문득 참다운 진리를 깨우치고 보니 이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모든 것이 자신과 둘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시공간 의 모든 경계가 일 순간 무너져 버렸을 뿐 아니라 스스로가 신이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곧 자연과 하나가 되어 조물주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 이었다. 하지만 심령의 소리에 이끌리어 소년을 구하게 되고 그 인연은 사슬이 되어 동빈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과연 소년과의 만남은 우연인가, 인연인가! 만약 하늘을 보고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때 날아가던 새를 보았다면 그것은 우 연일 것이다. 하지만 자연과 하나가 되는 찰나에 소년을 만났다는 것은 결코 우연일수 없는 것이다. 동빈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서산마루에 앉은 태양을 바라보았다. 수 억 년 동 안 계속되어진 일몰의 광경이건만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다가서고 있었다. 마 치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의 모습을 본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고 아름다 워 보였다. 동빈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 았다. 퀑! 퀑! 퀑! 어디선가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에 소년은 눈을 떴다. 짚으로 얼기설기 엮은 허름한 지붕사이로 강렬한 태양 빛이 쏟아져 나와 소년의 눈을 어지럽혔다. 소 년은 자신의 눈을 비비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위의 환경은 너무나 낯익은 것 이었다. 고약한 냄새와 더불어 진흙으로 만든 허름한 토담집! 이곳은.....!! 소년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마을을 습격한 백 여명의 악귀들.....그들 을 피해 음습한 암석 굴로 피신하고 공노인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도망치다 눈 사태를 맞고 죽었던 모든 것이 꿈이었단 말인가? 회도인과의 만남도 한 낮 꿈 에 불과했단 말인가? 소년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푸훗! 그래 꿈이었어. 한 편의 무서운 악몽이었던 거야. 크크크!"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자조석인 웃음을 지었다. 바로 그때 였다. "우, 아아악!" "사람 살려! 으악!" 밖으로 참담한 비명소리들과 함께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그의 귀로 들어왔 다. 소년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악마의 형상을 한 백 여명의 사나이들이 마을 주민들을 닥치는 데로 도살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신음소리와 더불어 이곳 저곳에서 피가 튀고 살점이 뜯 겨져 나오고 있었다. 멀리 장씨 아저씨가 자신의 뜯겨져 나간 오른팔을 들고 이리저리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었고, 옆의 한씨 아주머니는 자식들을 보호하려 보듬자, 그 들 모자가 한꺼번에 창에 꾀어 뚫리는 모습이 보였다. "추개야! 도망쳐!!" 산기슭에서 연아가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한 쪽 팔이 없었다. 그녀는 그러한 사실도 알지 못하는 듯 했다. "빨리 도망치란 말이야! 빨리.." 그녀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사이에 뒤에서 칼이 날아와 그녀 의 목을 가르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의 목은 튀어 올랐고, 곧장 소년에게로 날 아 왔다. 엉겁결에 받아든 소년은 공포로 얼룩진 두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소 녀의 두 눈은 절망에 차 있었으며,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순 간, 소녀 의 두 눈이 끔벅거렸다. "아악! 아아악!" 소년은 그 머리통을 던져 버렸다. 데굴데굴 구르는 연아의 머리에서 원망의 눈초리를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소녀는 자신의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는 것 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소년의 영혼 속으로 소녀의 목소리가 메아리 치기 시작했다. ' 왜 날 버리는 거지? 같이 데려가 줘....' "으아 아아! 그만해! 그만 하란 말이야!" 소년은 머리를 감싸 않은 채 벌떡 일어섰다. "흑흑흑, 제발 그만 하란 말이야. 제발... 흑흑흑!" 소년은 두 무릎사이로 얼굴을 파묻은 채 오열을 터트렸다. 공노인과 연아의 죽음이 모두 자기 탓인 것만 같았다. 소년은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으 며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자기를 원망하고 나무라고 있었다. 소년은 아직 인격적으로 완성되지 못하였기에 모든 사건을 자기 중심적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 것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이로든 말이다. '나는 최선 을 다했어...더 이상 어떻게 하란 말인가?' 라는 식의 자기방어에 조금이라도 능했더라면, 소년은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외 향적(外向的)인 성격이 아니었다. 어리다는 것은 성숙하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성숙하지 못하기에 어른들의 보 호가 필요한 것이다. 어린 소년으로서 그 동안의 삶은 너무나도 거칠었다. 동 빈은 소년의 투박하고 거친 삶을깎아내고, 다듬어서 둥글둥글한 삶으로 만드 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악몽을 꾼 게로구나." 동빈은 소년의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거리며 말했다.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 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 일사일생(一死一生)에 교정(交情)을 알고, 일부일빈(一富一貧)에 교태(交態) 를 안다고 했다. 위급한 상황에 떨어져 구사일생이 되어야 비로소 인간의 정 을 알게 되고 빈궁한 상황에 처해야만 비로소 겸손을 알게 된다는 말이다. 하 물며 험하데 험한 경험을 격은 소년에게 어찌 마음의 평화가 깃들 수 있겠는 가! 동빈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노부가 악몽을 쫓는 주문(呪文)을 가르쳐 주마." 그러자 소년은 반응은 대단한 것이었다. 눈이 동그래지다니... 그만큼 절박했 다는 의미이리라. "정말인가요? 그 주문만 외우면 악몽을 꾸지 않아도 되나요?" "물론 이 구 말 구. 날 믿어 보렴." "얼른 가르쳐 주세요.?" 소년의 눈빛은 간절했다. "이 주문은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신주(神呪)이니 너만 알고있거라. 우선 심신 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집중하여 임병투자개진열전항(臨兵鬪者皆陣列前行)을 몇 번이고 불러라. 그럼 모든 악한 것들의 항복(降伏)을 받아낼 것이다." 이 주문의 뜻은 무기를 두른 무신들의 힘을 빌어 악귀들을 물리친다는 의미 이며, 보통 입산수도(入山修道)하는 자들이 마귀들을 쫓기 위해 부르는 주문이 다. 임병투자개진열전항의 아홉 글자는 모두 전투적(戰鬪的)이고 호전적(好戰 的)인 단어들로 구성되어있다. 계속 외우다보면 다분히 용기가 생길 뿐 만 아 니라. 적극적인 사고를 가질 수 도 있을 것이다. "임, 병, 투, 자, 개, 진, 열, 전, 항?" "그래. 바로 외웠구나?항상 마음이 불안 할 때 이 신주(神呪)를 외우거라. 효 능이 엄청날 것이다. 소위 이 주문을 가리켜 육갑(六甲)의 비축(秘祝=비밀스러 운 주문)이라 한단다." "임병투자개진열전항! 임병투자개진......." 소년은 동빈의 말에 따라 열심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핼쑥하던 소년의 얼굴이 화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동빈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물었다. 주문이란 믿음을 근거로 한다. 아무리 신비하고 영험한 주문이라고 해도 믿음 이 없다면 개 짖는 소리와 다를 바 없으며 아무리 개 짖는 소리라도 진심으로 믿고 의지한다면 이보다 영험한 주문은 없을 것이다. 소년은 동빈을 의지했으 며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결코 주문이 영험해서 이루 어진 성과는 아닌 것이다. 그 이후로 소년은 몸의 상처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상처까지도 나름대로 잘 극 복해 나가고 있었다. 동빈 또한 틈틈이 찾아와 옛날의 고사(古事)와 비사(秘 事)들을 들려주었다. 대부분이 소년에게 용기와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런 내용 들이었다. 워낙 소년의 학문이 일천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나름대 로 그 중요한 의미는 파악할 수 있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소년의 병세는 많이 호전되었고, 어느 정도 걸어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침상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 는 기회가 생겼다. 그 가 바라본 바깥 풍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별유천지(別 有天地)라든가, 도원경(桃源境)이라든가, 소년이 알고있는 최고의 고급단어를 모두 구사해도 모자람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꽃들이 있었고, 화사한 나비들이 날아 다니고있었다. 빨 갛고 노란 먹음직스런 과일들이 주렁주렁 달린 과실수(果實樹)하며, 개울가를 따라 올라가면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데 그 곳에는 아름다운 물고기들이 노닐 고 있었다. 그 때였다. "아이야! 순양별부(純陽別賦)에 온 것을 환영한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소년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동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회도인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옆에 있지 않느냐?" "힉!" 소년은 깜짝놀라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어느 사이에 왔는지 동빈이 자신의 옆에서 싱글싱글 웃고있었다. 오늘은 평상시와 달리 등에는 장검이 메어져 있 었는데, 한 눈에 보기에도 아름다운 수실이 가득 달린 것이 꽤 고급스러워 보 였다. "저를 놀래 키시는군요." "하하하! 많이 놀랬느냐?" "아..아니요."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회도인에게는 보통사람이 범접 할 수 없는 그런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수 백년 이래로 이 순양별부에 발을 들인 사람은 너 가 처음이란다." "아!~ 꽤 오래된 곳이군요." 소년은 수 백년 이래로 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오래 되었지.... 하지만, 내가 잠시 머물다 갈 곳이란다. 그래서 별부인 것이 야." '이분은 정말로 부자인가 보구나?' 하고 생각하는 소년이었다. 그러자 동빈 은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이야. 난 그렇게 부자가 아니란다." "헉!" 잠시 잊고 있었다. 회도인이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 이다. "하하하! 그만, 점심이나 먹자꾸나" 동빈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저 멀리 앞서 걸어가는 동빈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야...' 그러자 동빈의 발걸음이 멈추더니 뒤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앗!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소년은 사냥꾼보고 놀란 사슴 마냥 후닥닥 동빈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백척간두(百尺竿頭)에 경진일보(更進一步)- 다 올라간 백자나 되는 막대기 끋에서 다시 한 걸음 내어 디딘다는 뜻으로 그 비약에 깨우침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3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이 곳 순양별부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인공으로 만든 여러 곳의 동굴이 별 부의 전부였다. 동굴의 바닥과 양 벽면은 잘 다듬어진 대리석이 깔려있어 태 양 빛을 반사시켜 채광효과를 극대화하였고, 동굴위쪽으로는 여러 개의 비스 듬한 창문을 뚫어놓아 직접 채광도 가능했다. 천장에는 여러 개의 야광주(夜光珠)가 달려있었는데, 낮에는 태양 빛을 흡수 하였다가 밤에는 찬란한 빛을 발산하도록 되어있어, 항상 밝음을 유지할 수 있 었다. 그리고 모두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층, 삼층의 구조도 똑같이 되어 있었다. 또한 이러한 구조를 가진 별부가몇 게 더 있었고, 옛 선인(仙 人)들이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순양별부는 회도인이 직접 만든 것은 아니라고 했다. 전에는 그의 스승들이 살고 있었고, 그 전에는 스승의 스승들이 살았다고 했다. 원래는 천연의 동굴 이었지만, 수 천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이러한 구조가 되었다고 했다. 여러 동부에는 수많은 서적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진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 다. 고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서적이 즐비했는데, 거북이 등 껍질의 갑골문자(甲骨文字)에서 양피지(羊皮紙)로 된 서적도 있었으며, 금문 (金文)이라는 글자로 된 서적도 있었다. 심지어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 때 소실되었다고 여겨지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죽책(竹冊)들도 고스란히 보 존되어 있었다. 어떤 동부에서는 이상한 도형이나 그림 같은 것들이 벽면에 가득 그려져 있 었는데 인골(人骨), 동물의 뼈 등을 이용한 주술적인 모형물도 많았다. 아마, 상고(上古)의 선인들이수행했던 곳이었을 것이다. 또 다른 동부에는 진귀한 약재가 가득했는데, 옛날 약왕가(藥王家)의 선인들 이 수행했던 곳이라고 했다. 그 이 외에 갈선공파(葛仙公派)라든지, 점복가(占 卜家), 천문가(天文家), 묵가(墨家), 신선가(神仙家), 도가(道家), 유가(儒家), 불 가(佛家)등 상고(上古)의 선인들이 이곳에서 수행을 했던 모양이었다. 소년은 몰랐겠지만, 이 곳은 세인들로부터 '천외천(天外天)'이라고 불리고 있 었으며,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어하는 그런 곳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 게냐!" "힉!" 언제 나타났는지, 동빈이 바로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정말이지 저를 자주 놀래 키시는군요." "강장체질인데도 자주 놀라는 것을 보니, 시호가룡골모려탕(柴胡加龍骨牡蠣 湯)을 먹어야 갰구나. 안과 밖의 사기(邪氣)를 해방하고, 상충을 완화하고, 정 체되어있는 기를 소통시키는데는 이것만한 것은 없지." 정말이지 어이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나서 깜짝 놀라게 해놓고, 약을 지어주겠다고 하니 이 것이야 말로 병 주고 약 주는 격이었다. '어이구! 도사 님, 과연 그 정도 같고 될까요? 아무리 훌륭한, 약이라도 자꾸만 깜짝 놀래 키 신다면, 그 약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왜? 소용이 없겠느냐! 최소한 화병은 막아 줄 수 있단다. 껄껄껄!" "어휴~" 소년은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어느덧 이러한 동빈의 장난에도 만성이 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야. 할 말이 있단다." "무슨..." "나는 잠시 별부를 비워야 될 것 같구나. 그 동안 너 가 이곳을 지켜다오." "네?! " 갑작스러운 동빈의 말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왜? 어렵겠느냐?" "아, 아니요..." 소년은 자신이 내 뱉은 말과는 달리 홀로 된다는 것이 두려웠다. "한 보름 정도 걸릴 것 같구나. 혼자서 심심할 터이니 간단한 내공심법(內攻 心法)을 가르쳐 주마. 그 동안 열심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내공...심법이요? " "그렇다. 비록 간단하다고는 하였지만, 천지만물의 오의(奧義)를 품고있는 심 오한 심법이란다. 아직 글귀를 깨우치지 못해 어려운 점이 많겠지만, 그냥 구 결(口訣)을 암송하기만 해도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소년은 동빈의 등에 메 달린 검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들어 동빈은 외출도 잦았고, 검을 들고 다닐 때가 많았던 것이다. "저...싸움, 하러 가시는 거 아니죠?" 동빈은 소년의 너무나 순진한 질문에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푸 하하핫! 세상의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검선(劍仙)이라 부른단다. 이 자전 검(紫電劍)은 나의 신물일 뿐이며, 내 스스로의 마음을 여의 이었는데 무슨 검 이 필요하겠느냐? 그리고 한 번도 이 검을 드러내 본적도 없거니와 사용할 필 요성도 느끼지 못 했단다." 소년은 동빈의 의기양양한 말에 자신이 너무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싶어 얼굴이 붉어졌다. 어리다고는 하지만 사나이 대장부가 아닌가?소년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말했다. "잘 다녀오세요.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음, 다녀오마. 그전에...." 동빈은 손은 소년의 백회혈(百會穴) 위로 향했다.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소년은 뇌전(雷電)을맞은 사람처럼 퍼덕거리며 쓰러졌다. 동빈은 천지자연의 기를 양손으로 모았다. "태을혼원일기신공(太乙混元一氣神功)! 흡자결(吸字訣)!" 그러자, 소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석자 정도 올라 왔을까? 동 빈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에 따라 소년의 몸도 저절로 움직였 는데, 가부좌(跏趺坐)를 튼 자세가 되었다. 동빈은 왼손을 자신의 상단전(上丹 田)에 오른손은 소년의 상단전을 향하게 하였다. "아이야. 이는 미라심혼대법(彌羅心魂大法)의 소리이며, 나의 말(言)이기도 하느니라. 두려워도 말며, 신비하게도 여기지 말 것이며, 의아히 여기지도 말 고 순응하노라면 커다란 복이 될 것이다. 비록, 태어날 때는 온전한 몸이었으 나, 자라면서 음(陰)한 신(神)에 속하고 닫혀서 열리지 않게 되는데, 이를 기경 팔맥(奇經八脈)이라 한다. 내가 잠시 수고하여 양한 기운으로 이를 뚫으려 함 이니 너의 고통도 크리라." 동빈의 두 팔을 휘둘러 태극 문양을 만들더니 곧 왼손은 자신의 중단전에, 오 른손은 소년의 회음혈을 향하게 하였다. "태을혼원일기신공!취자결(取字訣)!" "임맥(任脈)은 회음혈(會陰穴)에서 일어나, 음부(陰部)를 지나 뱃속을 거슬러 인후(咽喉=목구멍)에 이른 후, 거기에서 턱 밑으로 나와 얼굴을 지나 눈 속으 로 들어가느니라. 회음(會陰), 곡골(曲骨), 중극(中極), 관원(關元), 석문(石門), 기해(氣海)...." 동빈이 회음에서 시작해서 임맥이 끝나는 승장혈(承裝穴)까지 손끝으로 차례 차례 가리키자 놀랍게도 퍽! 퍽! 퍽! 하며 막혔던 혈들이 뚫리기 시작했다. 소 년의 내부에서는 충격이 심한지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고, 막혔던 혈들이 뚫릴 때에는퍼덕거리기도 했다. 이는 일반적인 격공섭물 이라든가, 무형지기와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었다. 자 신의 본원지기(本元之氣)를 허공을 격하고 전하는 것도 전무후무한 일이었지 만, 타인의 경맥 속을 자유로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동빈은 여세를 몰아 계속해서 팔맥을 뚫어나갔다. 독맥(督脈), 충맥(衝脈), 대 맥(帶脈), 음교맥(陰　脈), 양교맥(陽　脈), 음유맥(陰維脈), 양유맥(陽維脈)까 지 모두 소통시키는데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빈은 전혀 피곤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태어나기 이전의 온전한 신체를 지니게 된 소년은 더욱 총명해 질 것이 고 건강해 질 것이고 장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동빈은 미라심혼대법으로 수행방법과 구결을 전수하고 소년을 침상에 눕혔다. 용감하고 순수한 이 소년을 위해 동빈은 한 가지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소년 의 신체적인 결함으로 인해 불행해지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에 는 어떻게 될까? 이 것으로 소년과의 인연은 끝나는 걸까?그것은 동빈으로 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무소불능의 능력을 지녔다하더라도, 미래 는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다.설사 옥황상제라도 한 개인의 미래를 예측한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항상 변하며, 불변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신조차도 변하며,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유한한 삶을 살아가고 있 는 것이다. 몇 억 겁이지나 이 우주전체의 삶이 끝나는 날 신들의 삶도 끝나 는 것이다. 그러나 파괴는 또 다른 창조를 잉태하는 것, 무에서 유가 생겨나듯 이 마치 이 세상이 탄생하던 그 때처럼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와 새로 운 신들이 태어나, 또 몇 억겁의 세월을 지내리라. 운명결정론자(運命決定論者=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으며, 벗어날 수 없다고 믿는...)들에게는 믿어지지 않을 런 지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운명이라는 잘 짜 여진 틀이 있고, 싯달타가 부처가 된 것도 운명에 의한 것이었다면, 부처란 존 재는 정말이지 너무 공허할 뿐이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동빈은 잠들어 있는 소년을 한 번 본 후 총총히 길을 나섰다 **************************************************************************** 약왕가(藥王家)- 옛날 의약을 다루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시조는 삼황오제중 신농(神農= 농사법, 의료, 교역등을민중에게 가르쳤다고 함.)씨로서 화타나 편작등이 활동했습니다. 갈선공파(葛仙公派)- 도가의 한 맥으로 시조는 갈홍으로 불로장 생을 회구하는 파로서 도가의 한 갈래입니다.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4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따뜻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소년은 일어났다. 온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며 상 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저께의 일을 기억해 내고는 다시 우울해지는 소 년이었다. '순양별부는 이제 나 혼자 뿐이겠지?' 하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회도인의 기대에 져버리지 않도록 이 곳을 잘 지켜 나갈 것이다. 소년은 자신의 의지를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얏!" 하며 기합을 넣으며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어느 때보다도 마음과 몸이 가벼웠을 뿐 아니라, 상처 또한 다 나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미미하나마 허리에 서 약간의 통증을 느껴졌지만, 그리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어저께에 비하 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치유상태 이었던 것이다. 식탁에는 몇 개의 연산홍과 스무개 남짓의 연공단이 놓여져 있었다. 아마, 회 도인이 차려 놓고 간 듯 했다. 소년은 그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하며 연산홍 하 나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달콤하고 시고 씁쓰레한 액즙이 목구멍을 타고 내 려왔다. 아무런 향기도 없는 이 과일에게서 이런 다양한 맛이 난다는 것은 정 말이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연공단이라고 불리는 이 환약은 회도인 스스로가 만들었다고 했다. 단사(丹 砂). 제지(諸芝), 웅황(雄黃), 송백지(松柏脂)....등을사용하여 만들었다고 했 는데, 소년으로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약재였고, 맛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연공단을 먼저 입에 넣고, 연산홍과 같이 먹노라 면, 나름대로 독특한 맛이 나오는 것이었다. 간단히 식사를 끝마친 소년은 다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해 보았지만, 마 땅히 해 야 될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때였다. 그러니까 소년이 뭔가를 해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신의 내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친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환청(幻聽)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 지만, 그 것은 틀림없는 회도인의 목소리였다. '아이야, 이는 미라심혼대법의 소리이며 나의.......' 처음에는 몹시 당황하였지만, 곧 차분히 귀를 기울일수 있었다. 소년은 회도인의 바램을 져버리지 않고, 잘 적응해 나갔다. 목소리가 이끄는 데로 가부좌를 틀고,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의식은 하단전에 두도록 하나, 거기에 얽매여서는 아니 되느니라. 흡기(吸氣-숨을 들이쉼)는 유화(宥和)하고 가늘며 조용하게 이루어 져야하며 너무 많이 들이쉬면 안 돼 느니라. 호기(呼氣-숨을 내쉼)는 면면세세(綿綿細細)하게 내쉬어야 하며, 결코 지나치 게 의식해서는 안 되느니라." 아직 운기행공(運氣行功)이라 불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간단한 호흡법만으로 도 상당한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평생 이런 자세로 앉아 본적이 없 는 소년으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전혀 뜻을 알 수 없는 구결을 암송하는 것도,- 그 것도 음률(音律)에 맞혀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이고, 더 이상 못 참겠다." 소년은 두 다리가 절여와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뭐 때문에 이런걸 해야 하지?아휴~ 죽겠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어느 정도 다리절임이 없어지자 다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어느덧 십 여일이 지나자 하단전(下丹田)이 묵직해 지기 시작했으며, 소주천 (小周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기경팔맥이 뚫린 소년으로서는 매 우 느린 행보였다. 소년은 그리 뛰어난 자질을 소유하고 있지 않았으며, 평범 했고, 내향적인 편이었다. 동빈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소년에게는 남과 다른 장점이 단점보 다 많았다. 그 중에 하나는 순수하다는 것 이였다. 순수하다는 의미는 도와 일 맥상통하는 것이었고 순수한자에게 도는 쉽게 접근한다. 의심과 고집과 편견 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또는 도를 닦는데 있어서 극약과 같은 것이다. 그 리고 소년은 열심히 수련을 했고,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 세속의 무당들이나 불가의 고승들이나 도가의 명사들은 타인의 길흉을 점치 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를 하기마련이다. 세숫대야에 맑은 물을 담아 자신을 비춘다거나 탁자 위에 쌀이나 동전을 던진다. 이러한 모든 행위는 조짐 또는 징조를 보기 위함이다. 나쁘거나 좋거나, 혹은 기쁘거나 슬프거나...... 예를 들어 하나의 국가가 흥성 하려고 하면 청년들의 의기가 충만하거나 백 성들의 인정이 돈독하거나 애국심이 고취되거나한다. 국가가 쇠퇴하려고 한다 면 그 때에는 반드시 요사스러운 징조가 보이는 것이다. 가령 관리가 부패하거 나 요사스러운 종교가 퍼져 백성을 미몽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 든 일에는 이처럼 징조가 생긴 다음에야 큰일이 터지는 법이다. 고래로부터 현자(賢者)는 천기를 헤아리고 자신의 나아갈 바를 정했다. 평범 한 사람들 눈에는 수 없이 많은 별들이 그저 반짝임으로 보이겠지만 현자는 그 속에서 어떠한 조짐을 발견하는 것이다. 구처기(邱處機)는 요 근래 하늘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뭇 별들의 우두머리 격인 이십팔수(二十八宿)의 기운이 요기를 내뿜고 있었으 며 커다란 전란의 조짐마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답답한 심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길다란 회랑을 지나 앞마당으로 발걸음 을 옮겼다. 시원한 밤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다. "무량수불! 삼계(三界)가 피에 흥건하구나. 이를 어이할꼬!" 구처기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바라보았다. 별들의 운 행을 관찰하던 구처기의 눈이 문득 반짝이기 시작했다. 북두칠성의 기운이 용 문(龍門)땅을 비추지 않는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뒷짐을 진 채 도관을 빠져나와 빗자루를 쥐어들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앞마당을 쓸어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나가던 늙은 도학자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깜짝 놀라며 자신 의 스승 앞으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태사조님! 어찌하여 손수 빗질을 하십니까?" "그 비를 저희들에게 넘겨주십시오. 제자들이 쓸겠습니다." 구처기는 어린 제자들의 만류에도 결코 빗자루를 놓지 않았다. "됐다. 내일 저녁 무렵에 귀중한 손님이 이 곳으로 왕림하실 것이니 너희들 은 미리 나가 마중하거라." "귀한 손님이라니요?" 여러 제자들은 구처기의 말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이 곳 용문파 (龍門派)는 황실의 비호아래 대강남북제일의 도관이었다. 하물며 하루에도 수 십 명의 귀한 손님들이 왕래하였으며 그 중에는 왕후장상의 권력자도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태사조였다. 얼마나 귀한 손님이 오건 대 직접 비질을 하신 단 말인가? *** 소년은 회도인이 돌아올 날자가 다가오자, 점점 초조해 지기 시작했다. 알고 보면 자신은 이 곳의 불청객 이였으며, 회도인에게는 번거로운 존재였던 것이 다. 소년은 또 다시 홀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동가식서가숙하며, 세 상과 부디 껴야 한다는 것이 두려웠다. 무엇보다도 더 이상 거지로서의 무책임 한 삶은 살지 않으리라는 능동적인 삶을 가르쳐준 동빈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 이 더 괴로웠다. 동빈과의 만남은 육 개월 정도에 불과 했지만, 이미 친부모와 도 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운기행공을 마치고 개울가 작은 연못에서 물고기들이 노니는 모습을 보며 울 적한 심정을 달래보려 했지만, 그럴수록 더울 비관적인 생각만 들 뿐 이었다. 그는 생명의 은인이며, 자신을 인간으로 대하여준 몇 안 되는 사람이기에 더 이상 그를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은 연못의 물고기를 구경하다가 자신의 모습을 비쳐보게 되었다. 소년자 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리저리 일그러지고 찢겨져 나간 악마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소년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역시 악마의 모습 이었다. 원래 그리 잘생긴 모습은 아니었지만, 못생긴 편도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모습은 .... 소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 봤다. 그러자 연못 속의 자신도 똑같은 행동을 했다. 확실히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마 눈사태에 파묻히고 이리저리 부딪히고 뭉개져서 생긴 상처일 것이다. 그의 두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흉측한 몰골에 실 망해서 우는 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일그러지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모습에도 인상한번 찡그리지 안고 보살펴준 회도인에게 대한 감사의 눈물이기 도 했다. 그 날 밤, 소년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슬픔에 펑펑 울어야 했다. 평생을 거 지로서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고 살아오다가 이제야 평범한 삶을 어느 정도 이 해하게 되었고, 다시는 예전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소년이었 다. 하지만 이제는 괴물 취급을 당하며 사람들의 냉대와 싸워 나가야 했다. 이 제 앞으로의 생활은 이전의 생활보다 훨씬 고달프고 힘든 생활이 될 것이다. 회도인의 섬세한 옥면(玉面)과 자신의 흉물스러운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 을 것 같았다. 그리고 순양별부의 아름다운 풍경과도 거리가 멀어 보였다. '처음부터 나 같은 거지가 살기에는 과분한 곳이었어.' 심한 자괴감(自塊感)까지 드는 소년이었다. 소년은 회도인이 돌아오기 전에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원래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홀가분하게 떠나 면 그만 이었다. 이튿날, 아침 소년은 막상 이 곳을 떠나려 하자,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시선 속으로 순양별부의 전각이 들어왔다. '회도인 감사합니다. 이대로 떠나는 저를 용서해 주세요. 하지만이 은혜 잊 지 않고 꼭 보답하겠습니다.' 순양별부는 한 면은 절벽이었고, 나머지 삼 면은 울창한 숲과 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 빙 둘러쳐져 있었다. 잠시 어디로 가야할까 망설였지만, 곧이어 태양 이 뜨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태양을 향해 걷는다면 최소한 길은 안 잃 어버릴 자신은 있었기 때문이다. ***************************************************************** 구처기(邱處機) - 자(字)는 통밀(通密)이며 호(號)는 장춘자(長春子)이다. 등주 서하 사람으로 구장춘(邱長春) 혹은 장춘진인(長春眞人)으로불리는데 북칠 진(北七眞)의 한 사람.왕중양을 스승으로 모시고 대법을 전수 받아 용문파 (龍門派)의 시조가 된다. 용문파(龍門派) - 북오조(北五祖=왕현보,종리권,여동빈,유해섬, 왕중양)를 모 시고 청정한 수행을 근본으로 하는 단정파. 후에 명나라때에 207세의신선 오 충허(吳沖虛)와 청나라 때에는 유화양(柳華陽)이라는 신선을 배출하여 오류파 (吳柳派)라고도 불리운다. 삼계(三界) - 즉 중생이 사는 세계. 색계(色界), 욕계(欲界), 무색계(無色界).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5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어느덧 해가 지기시작하자 온 산하가 붉은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으나 골 짜기는 점점 어두워오고 있었다. 용문산(龍門山)은 그리 높거나 절경을 자랑하 는 산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람객들에 찌든 명산과는 달리 천연림으로 둘러싸 여 평화로운 광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종달새들이 숲속에서 샘가로 내려오고 메추리 떼들도 달려 내려와 한데 어울 려 서로 부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장관이었으며 자연만이 가지고 있는 색깔이었다. 여동빈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자연의 정취에 취해 큰 소리로 시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대작하노라면, 산에는 꽃이 피누나. 한 잔, 한 잔, 또 한잔, 내가 취하여 잠들고자 하니 그대는 잠시 돌아가시라. 내일 아침 생각 있다면 거문고 안고 오시라." 그 때였다. 동빈의 고상한 정취를 일순간 무너트리는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 다. "어이! 거기 시끄럽게 떠드는 놈! 게 섯거라!" 동빈은 자신의 발걸음을 묶어놓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기 위해 뒤돌아 섰다. 저 멀리 오솔길사이로 세명의 거한이 뛰어오고 있었는데 모두 대도를 들고 있 었다. 발걸음이 둔탁하고 날렵하지 못해 무공을 익힌 자들 같지는 않았다. 하 지만 저들이 자신을 멈추게 한 이유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도적이 었다. "허어, 참! 정의가 쇠퇴하면 창칼이 앞서는 법. 명망 있는 도장이 선 자리에 어 찌 도적이 들끓는단 말인가!" 동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사이 세 명의 도적들은 땀을 뻘 뻘 흘리며 동빈 앞에 서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동빈은 안쓰러운 듯이 그들을 지켜보다가 슬며시 말을 건넸다. "여러분들이 소생을 불렀소이까?" 세명의 도적 중 우두머리인 듯 회의단삼(灰依單衫)을 걸친 자가 숨을 헐떡이 며 간신히 말했다. "학! 학! 이곳에 너 놈말고 또 누가 있느냐?" 그러자 동빈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당신들도 있지 않소." 동빈의 능글맞은 대답에 예의 우두머리인 듯한 회의 중년인이 고함을 버럭 질 렀다. "이놈아! 그럼 우리가 우리를 불렀단 말이냐! 헉! 헉!" "소생은 가끔가다가 미친놈들을 보오. 어떤 이는 나를 보고 아버지라고 부르 지...하물며 스스로 자신을 부르는 미친놈들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요." 그러자 좌측의 사나이가 대도를 흔들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럼, 우리가 미쳤단 말이냐?" 동빈은 그가 내뱉는 고함에 잠시 움찔하더니 도리어 따지듯 물었다. "안 미쳤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거요?" "뭐, 뭐야! 이 놈이!" 동빈의 반박에 우측의사나이가 덤벼들 기세를 보이자 중간의 회의중년인이 말 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흐! 너 놈은 그 주둥아리 때문에 선택의 폭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동빈은 의아한 듯 물었다. "선택? 무슨 선택 말이오?" 그러자 회의중년인이 자신의 가슴을 쭉 피며 말했다. "돈을 모두 뱉어내고 죽던가, 죽은 후에 우리가 털던가, 이 두 가지의 선택 말이다." "전에는 또 다른 선택이 있었소?" "암! 있었지. 돈을 뱉어내고 자결하는 것!" 동빈은 이들의 어이없는 행동에 헛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또 한편으 로는 장난을 즐겨하는 동빈의 천성이 발동되어 조금 더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 고 싶었다. "아니! 소생이 죽는 것은 똑같지 않소. 꼭 날 죽여야 갰소? 나를 보시오. 내가 큰돈을 지닐 사람으로 보이시오?" 그러자 회의를 걸친 사나이가 동빈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 다. "전혀 그렇지 않군. 마치 냄새나는 도사 나부랭이 같아. 하지만 털다 보면 한 푼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동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그 한 푼 때문에 나를 죽일 셈이요?" "물론! 티끌 모아 태산이니까. 그리고 너 놈을 살려주면 관가에 고발할 것이 고 그러면 관군이 우리를 토벌하러 올 것이 아니냐? 차라리 너 놈이 실종되는 것이 우리의 밥줄을 연명하는 길이 되는 것이지." 동빈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정말로 옳소. 하지만 당신들은 나를 죽이지 못할 거요. 도리어 나에 게 목숨을 구걸하여야 할 걸?" 그러자 세명의 도적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건 왜지?" 동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들의 대도가 나의 목을 치기 전에 그대들은 땅바닥에 엎어져 뒹굴고 있 을 테니까!" 동빈의 말은 절대로 거짓이 아니었다. 하찮은 그들의 능력으로 어찌 무소불위 의 동빈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 뿐 아니라 그는 또 다른 생명이 이 근처에 숨어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동빈은 세명의 도적들보다 근처에서 들리는 숨 소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빈의 심오한 뜻과는 달리 그의 광오한 말에 참다못한 세명의 무리 중 청의를 걸친 사나이가 갑자기 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흥! 개소리!"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청의사나이의 도가 동빈의 목을 향해 지쳐 들어왔 다. 하지만 그의 도에는 살기가 전혀 묻어 나오지 않아 위협을 위한 허초임을 동빈은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세 개의 돌멩이가 날아오더니 세 명의 녹림도적들의 머리 를 강타했다. 퍼버벅! "어이쿠!" "크악!" 그와 동시에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며 숲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튀어나왔다. "천하에 개잡종들! 단 돈 한푼에 사람의 목숨을 취하려 하다니!" 이 세 명의 자신만만한 녹림인들은 자신들의 머리를 감싸않으며 동빈의 발 밑 으로 나뒹굴기 시작했다. 동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소!" 숲속에서 튀어나온 인형은 이십대 초반의 도사였는데 흰색도포에 등에는 커다 란 팔쾌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그는 곧 정색을 하고 동빈에게 공수의 예를 취 해 보이며 말했다. "빈도는 창림(創林)이라고 하며 자(字)는 운송자(雲松子)라고 하는 범부입니 다. 이 곳 용문파의 오대제자(五代弟子)이지요." 동빈은 창림의 헌앙한 자태와 기개에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히 두손을 맞잡으 며 고개를 숙였다. "소생은 구주(九州)을 떠도는 이름 없는 자로서 덕분에 한 목숨 부지할 수 있 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창림은 도리어 황송하다는 듯이 더욱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희 용문파의 땅에서 이런 험한 일을 겪으시고도 이리도 겸손해하시니 도리 어 빈도가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창림의 겸손함에 동빈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과연 구처기는 구처기로다! 호부(虎父)아래 견자(犬子)없다더니.....' 그러나 그의 생각일 뿐 아무런 내색 없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도적 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이들을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창림은 자신의 검을 빼들며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외쳤다. "흥! 이런 말종들은 당장에 죽여야지요! 아무리 세상이 혼탁하기로 단 돈 한푼 에 사람의 목숨을 취하려 하다니, 이 놈들을 살려주면 또 다른 백성들이 피해 를 입을 것입니다!" 창림의 내지르는 소리에 세 명의 도적들은 그만 사색이 되었으며 온 몸을 부 들부들 떨었다. 동빈 또한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지만 저 들은 무공을 할 줄 모르오. 그리고 산채를 거느린 것 같지도 않 고.... 앞에서 길목을 막은 것이 아니라 뒤에서 나의 큰 목소리에 즉흥적으로 뛰어온 것으로 보아 결코 녹림인들이 아닙니다. 녹림인들이 되려고 시작한 작 자들이지...약간의 혼 줄을 내는 것만으로 그 들을 벌하셔도 될 것입니다." 창림 또한 도문의 제자로서 함부로 살생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동빈의 일리 있는 말에 목소리가 약간 삭으로 들어갔다. 그는 땅바닥에 쓰 러져있는 도적들을 향해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사실인가!" 삼인의 도적들은 완전히 죽을상이 되어 넓죽 엎드리며 말했다. "아이쿠! 저분 대협의 말씀이 완전히 옳습니다요. 삼년에 걸친 기근 때문에 먹 고살기가 막막하여....그만...흑흑흑!" 그들은 그나마 동정심이 많을 것 같은 동빈을 향해 애원하기 시작했다. "대협! 제발 저희들의 미천한 목숨을 살려 주십시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저 희 삼형제는 무슨 짓이든 다하겠습니다." 동빈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확인하려는 듯이 되물었다. "정말이오? 정말로 소생의 말을 따르시겠소?" "물론입니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동빈은 그들에게 시선을 거두어 창림을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다. "창림진인(創林眞人)께서 허락하신다면 이들을 잠시 소생이 가르쳐 볼까 합니 다. 부디 허락하여 주십시오." 창림은 고개를 숙이며 황공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이쿠! 빈도에게 진인(眞人)이라 하심은 가당치 않습니다. 소협의 뜻대로 하 소서. 하지만 이들은 간악한 무리로서....." 창림은 더 이상 말을 내뱉을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들자 자신 앞에 있던 청 수한 몰골의 유생이나 세명의 도적들까지 모두 사라져버리고 없었던 것이다. 깜짝 놀라 주위를 살펴보았지만 마치 연기처럼 사라진 그들의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꿈을 꾼 것은 아닐까? 요괴에 홀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러나 창림은 곧 동빈의 자태와 언행을 생각해내고는 탄성을 내지르며 고개 를 흔들었다. "허어~! 이런....이런 괴사(怪事)가 있나! 진정한 고인을 앞에 두고도 몰라보았 다니....." *** 숲은 얼마나 울창한지 한 점의 빛조차 스며들지 못하고있었다. 전인미답(前人 未踏)이라고 할까? 태고(太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하기는 수 백년 동안 인적이 끊긴 곳이니 오죽 하겠냐마는 이러한 숲을 헤치며 산행 을 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소년은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후회도 해보았다. 하지만 회도인에게 더 이 상 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다시 걸음을 옮기는 소년이었다. 거의 반나절은 걸었을까? 소년은 너무 지치고 피곤하여 잠시 쉬어가기로 했 다. 소년은 쉴만한 곳을 찾던 중 어느 한 곳을 목격하고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커다란 소나무아래 새겨진 화살표! 그것은 얼마전 소년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 기 위하여 새겨 넣은 표식이었다. 소년은 반나절 동안 같은 곳을 배회하고 있 었던 것이다.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6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뎅! 뎅! 뎅! 저녁 무렵. 청정하기로 유명한 용문산 태화대덕궁(太華大德宮=용문파의 본 산)에 때아닌 종소리가 들려왔다. 급박하게 울리는 종소리에 용문파의 제자들 은 저녁식사를 하다말고 각자의 무기를 들고 조사전(祖師殿)앞으로 뛰쳐나가 기 시작했다. 두 번의 긴 종소리와 다섯 번의 짧은 종소리는 조사전에 변괴(變 怪)가 일어났다는 의미인 것이다. 용문파의 장문인이 기거하는 태을전(太乙殿)을 지키고 있던 창림과 그의 사 제들 또한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조사전 앞. 근 백 여명에 달하는 제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으며 다들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조사전 지붕 위였다. 창림도 얼떨결에 지붕 위를 바라 보게 되었는데 확실히 변괴는 변괴였다. 세 명의 우락부락한 장한들이 벌거벗 은 채 시위 아닌 시위를 벌이고 있는게 아닌가! 창림은 이 웃지 못할 기이한 사태에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허어~ 참! 말세로다. 말세...." 그런 여유로운 창림과 달리 다른 용문파의 제자들은 몹시 당황해하며 분노에 차있었는데 문득 한 명의 젊은 도인이 튀어나오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기 시 작했다. "이보시오! 빈도는 곡정(曲精)이라 하오! 당신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오! 어떤 분들이건대 이런 괴상한 일들을 벌인단 말이오!" 그러자 세 명의 사나이 중에 가운데 자리한 사나이가 한 걸음 나서며 외쳤다. "우리는 용문삼살(龍門三殺)이라.......기보다는 용문삼정(龍門三正)이라 하오! 본인은 일정(一正) 허일보(許一保)라는 사람이오! 우리도 도사가 되고싶소!" 창림은 허일보라는 사나이의 목소리가 귀에 매우 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들을 자세히 보자 놀라웁게도 얼마전 자신의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세 명의 도적들이 아닌가! 창림의 두 눈에 비쳐진 그들은 단돈 한푼에 사람을 죽 이는 흉신악살이었으며 벌거벗고도 수치심을 모르는 파렴치한이었다. 창림은 놀랍기도 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여 목소리에 공력을 실어 외쳤다. "야이! 미친놈들아! 존엄한 조사전 지붕에서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이냐! 얼른 내려오지 못할까!" 그러자 도적들의 맏형인 허일보는 어림없다는 듯이 말했다. "흥! 우리도 도사가 되게 해주시오! 그러기 전까지 어림없소이다!" 뻔뻔하기 그지 없는 허일보의 말에 그만 울화통이 터진 창림은 주위에 선배들 과 사백, 사숙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쌍소리를 아낌없이 뱉어내었다. "뭐, 뭐라고!! 야이 도적놈들아! 얼마전까지만 해도 도적질을 하던 놈들이 무 슨 배짱으로 감히 도사가 되겠다는 것이냐! 냉큼 내려오지 못할까!" 오는 말이 고아야 가는 말도 곱다라는 속담을 신봉하는 허일보의 입에서 존대 어가 튀어나올 리 만무했다. 그는 삿대질까지 하며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말이 맞다. 얼마전까지 우리는 도적이었다. 하지만 우리를 이끄신 분(= 여동빈)이 말씀하시기를 과거를 쫓지 말라! 미래를 바라지 말라! 무릇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이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씀하 셨다. 이 시각이후부터 우리는 청렴결백하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던 놈들에게서 반말까지 듣자 창 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똑 같이 삿대질을 해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이 무식한 놈들아! 그렇다면 정중히 부탁할 일이지 감히 조사전위에서 뭔 지랄들이냐!" 허일보는 삿대질과 아울러 코웃음을 치며 외쳤다. "흥! 무식한 것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닷! 우리를 이리로 이끄신 분이 이렇게 말하라 하셨다. 도란 마음이지 석상 나부랭이에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 다! 그리고 우리가 벗은것은 의복이 아니라 허울이다! 당신들은 무엇이 두려 워 우리를 끌어내지 못하는가! 결국은 계율이라는 허울 때문이 아닌가!" 창림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누가 저 미친놈들을 끌어내려라!" 그러자 창림옆에서 느긋하게 사태를 관망하던 중년의 도인이 그의 소매를 흔 들며 조용히 속삭였다. "이보게 사질(師姪). 저들은 조사전 지붕 위에 있네. 도문의 제자로서 어찌 조 사님들의 머리 위를 오르겠는가? 자네는 어찌 저들보다 상식이 덜 한가?" 그제야 창림은 저들이 자신앞에서 당당해 질수 있는 이유와 다른 분들이 그토 록 당황해 하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조사전에는 왕현보, 종리권, 여동빈, 유 해섬, 왕중양 다섯 분의 석상이 모셔져있으며 태사조를 위시한 일대제자들이 매일아침 예배를 드리는 곳인 것이다. 조사전이 서있는 방향으로는 침도 뱉지 못하는 현실에서 어찌 조사님들의 머리위인 지붕으로 올라설 수 있겠는가! 자신의 경박함을 깨달은 창림은 얼굴을 붉히며 사숙인 양춘자(陽春子)에게 조 용히 물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저들의 광망한 행위를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 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돌을 던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돌을 던져 떨어트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춘자는 창림의 말에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이곳엔 수많은 사숙과 사백님들이 계시네. 그 분들이 보는 가운데 어찌 조사 전을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하물며 어찌 손바람(掌風)으로 저들을 공격 할 수 있으며 검을 휘둘러 떨어트릴 수 있겠는가? 저들의 행동은 몹시도 괴이 한 것이기는 하나 언변은 진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네." 창림은 양춘자의 뜻밖의 말에 깜짝 놀라며 말했다. "예엣! 진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다니요?" 양춘자는 시선을 허공에 두며 뇌까리듯 말했다. "내가 율법원의 원주로서 해서는 안되는 말이네 만, 무릇 검의 달인이 되기 위 해서는 그 검을 잊어야 하며 도를 닦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자는 무릇 도를 잊 어야 한다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수많은 율법과 계율이 우리를 족쇄처 럼 얽매이게 하지 않는가 말일세.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나 또한 수행 을 하기보다 율법을 외우고 지키는데 한 평생을 보내야 했다네. 계율 때문에 저들을 끌어내지도 못하는 형편에 어찌 도를 이룰 수 있겠는가?" "........." 창림은 사숙의 번뇌를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저들을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타 방파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된다면 우리는 한 동안 고개를 들 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서둘러 방법을 모색하심이...." 그러자 양춘자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도를 닦는 자가 어찌 명성에 연연해 하는가? 궁(窮)하고 통함에는 각각의 운 명이 있는 법. 조금 더 기다려 보세. 저들도 인간 우리도 인간! 배고프면 내려 오겠지. 후후후!" 창림은 장춘자의 도량에 감탄하였으며 어찌 이런 분이 계율원에 머물러 계시 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울러 자신의 작은 도량에 한 숨을 터져 나왔다. *** 한 편 여동빈은 용문파의 제자들과 세명의 도적형제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 이 아무도 지키지 않은 태을전 안으로 유유히 들어서고 있었다. 동빈이 세 명의 어리석은 도적들을 데리고 사라졌던 곳은 조사전이었다. 그들 은 어리석으나 순박하였고, 무식하였으나 도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동빈은 그 들이 가지고있는 도의 씨앗을 발아시켜주고 싶었다. 비록 엉뚱한 방법이긴 하 였으나 계율에 얽메여 자유롭지 못한 용문파의 제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틀림 없다. 만약 그들 중에 깨친 자가 있다면 도적들은 훌륭한 스 승을 얻게 될 것이다. 한 자의 글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도 시의(詩意)가 있는 사람은 시(詩)의 극의 (極意)를 얻을수 있고, 한 마디의 교리도 듣지 않고서도 도근(道根)이 있는 사 람은 도(道)의 현묘한 진리를 깨칠 수 있는 것이다. 동빈은 그들이 벌거벗고 소리치는 모습을 상상하니 그만 폭소가 터져 나왔다. "푸 하하핫! 훌륭한 사부를 얻기 위해서는 그 정도의 성의는 보여야지....하하 하!" 그 때였다. 동빈의 웃음소리가 커서일까 저 멀리 회랑 끝의 문이 열리며 백발 백염의 노도관이 몸을 드러내었다. 흰색 도관을 걸치고 황의 법복에 검은색 불 진을 손에 쥔 노도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는 동빈을 향해 넓 죽 엎드리며 말했다. "도문소자(道門小子) 구처기가 감히 조사님을 배알하나이다." 동빈은 서둘러 달려가 노구의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탄하듯 말했다. "구처기. 자네가 이렇게 늙었구먼." 구처기는 이미 신선에 오른 하늘과 같은 사조를 배알하는 것만도 황공한 입장 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직접 일으켜 세워주시니 가슴이 떨려오고 벅차 올라 무 어라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조사님....." 동빈은 구처기의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쥐고는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군 그래." 구처기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어젯밤 문득 천기를 헤아려보니 북두성이 저희 용문땅을 비추고 있었지요. 몸을 일으키심에 천기가 따라다니는 분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분이라고 소인 은 스승(= 곧 왕중양)을 통해 알고 있었답니다. 어찌 전갈을 주시지 아니하고 불현듯 굉음소리를 내며 나타나시었습니까?" 굉음소리란 자칭 용문삼정이 여동빈의 사주를 받고 일으킨 소란이리라. 동빈 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공허한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전갈을 주기에는 이 곳 용문파의 문턱이 너무 높더구나." 동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자네를 보기 위하여서는 매우 높은 신분이어야 하 며 불필요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것은 지나친 권의의식이 아닌가. 서민들에게 다가서지 아니하고 어찌 권력에 의존하는가라는 간접적인 질책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구처기는 얼굴을 붉히며 괴로운 듯 노안을 찡그리며 말했다. "젊은 날 문득 조그만 깨달음을 얻어 그 것을 미몽에 휩싸인 백성들에게 골고 루 나누어주려 했었더랍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는 침묵하고 몽매한 자들만 떠 들 뿐.....이 모든 것은 소인의 뜻과는 다른 것이옵니다." 구처기의 처연한 말에 동빈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구처기의 처 지를 어찌 이해 못하겠는가? 젊은 날 펴 보이고 싶었던 이상들은 점점 퇴색되 어가고 곡해되고 오해되어 상업주의로 물들어 가는 과정에서 구처기의 심정 은 오죽하였으랴. 차라리 사람들과의 인연을 끊고 싶었으리라. 동빈은 구처기 의 손을 놓지 아니하고 조용히 말했다. "이보게. 구처기! 일심(一心)이 정해지면 만물(萬物)은 복종한다네. 만물이 복 종하지 않음은 자네의 일심이 부족한 터! 더욱 일심정진(一心挺進)하시게." 동빈의 말은 모든 것이 자신의 수양이 모자람을 탓하라는 뜻이었다. "화, 황송하옵니다. 조사시여! 소인의 불찰을 이렇듯....." 동빈은 그의 떨리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어찌 자네의 잘못이 노(老)씨와 장(張)씨의 잘못과 비견될 수 있겠나! 가세. 가서 지난날의 회포를 풀어보세. 그리고 받을 물건도 있고......." 노씨와 장씨란 곧 노자와 장자를 말한다. 도가의 대조종으로 도교의 근본이 된 다. 하지만 그들의 사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잘못되고 외곡된 해석으로 사이비 종교를 낳게되고 수많은 민초들이 수난을 격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의 교리로 백성을 다스리려하는 자는 자신의 뜻이 잘못 전파되어 질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하물며 노자와 장자 또한 이러한 실정인데 구처기야 말로 말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차라리 하루를 배우고 하루를 깨달을 뿐....! 구처기는 동빈의 한 마디에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 있었다. 여동빈은 이미 노 자와 장자를 훨씬 뛰어넘어 자연과 합일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7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태양의 눈부신 햇살은 산마루를 넘 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소년 위에 떨어졌다. 소년의 의복은 나뭇가지에 갈기갈 기 찢어져 있었고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에는 거미줄과 나뭇잎 조 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산을 헤매기 시작한지도 어언 오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허기로 인해 소년의 양 뺨은 핼쑥했으며 두 눈은 움푹 들어가 버렸다. 갈증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입술사이로 소년의 갈라진 혀끝이 내다보였다. 소년은 겨우 일어나 상반신을 바위에 의지한 채 고개를 젖혀 구름 한 점 없 는 창백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십 여 마리의 독수리들이 시원한 푸른색의 하늘 위로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저들은 소년을 먹고 싶어했고 소년 또한 저 독수 리들이 먹고 싶었다. 소년은 뜨거운 햇살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두 눈을 감았다. 움직여 걸어 야 했으나 그럴 힘도 없을 뿐 아니라 그러고 쉽지도 않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 었을까? 그의 귓가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득 두 눈을 뜨고 눈동 자를 돌려보니 조그마한 날다람쥐가 슬쩍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 고 있었다. 평상시의 소년이라면 돌멩이를 집어 던져 작살내버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 었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년은 슬그머니 오른손을 움 직여 주위에 널려있는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날다람 쥐를 끝까지 지켜보던소년의 두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사라락하 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날다람쥐를 덥석 물어버리는 것이 아 닌가! 날다람쥐는 몇 번 퍼덕거리다 그만 구렁이의 목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렸 다. 구렁이는 포만감을 느꼈는지 아니면 날다람쥐를 소화하기 위함인지 한 동안 꿈쩍 않고 그대로 똬리를 틀어 버렸다.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엉금엉금 기 어 구렁이를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팔을 들어 구렁이 머리 쪽으로 뻗었다. 구렁이는 먼저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 하지만 위협을 당하고 있다 고 생각되어지면 가차없이 물어 버린다. 구렁이는 소년의 팔을 물었고 소년도 구렁이를 물었다. 단지 소년은 구렁이와 는 달리 씹어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행이 구렁이는 독을 가지고 있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피는 달콤했으며 살은 질겼으나 맛있었다. *** 양춘자는 계율원의 원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바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 신의 마음은 공허했으며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저들의 말과 행동은 당당하며 옳았다. 단지 자신들이 구태의연하고 고루했을 뿐이다. 사조(=구처기)께서 처음으로 용문파를 창건하셨을 때만 하더라도 낡고 오래 된 구습을 타파하시고 오로지 청정한 수련을 목적으로 교리를 펴나가셨던 것 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옛날의 개혁을 부르짖던 청년들은 구순의 장로가 되자 개혁 또한 늙은 듯 구습이 되어 버렸다. 순수한 열정으로 도를 구하고 찾아 나서던 운유수련도 하나의 형식이 되어버 렸고 시련과 인내를 통해 구도자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았던 선각자들도 지금 은 한 곳에 안주하여 변화를 바라지 않게 되었다. 모든 것이 정체되어 버린 지금, 옛날 구습을 답습하는 지금! 변화는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양춘자는 문득 고개를 들어 조사전의 지붕에서 당당한 세명의 사 나이들을 보았다. 비록 도적이라는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순수 한 열정으로 도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수치심도 잊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 락질에도 그들은 위풍당당했으며 활기에 넘쳐있었다. 양춘자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비록 실소이기는 하나 그 웃음이 갖는 의미 는 큰 것이었다. 갑자기 실소를 터트리는 양춘자를 바라보며 창림은 의아한 듯 물었다. "사숙께서는 어찌 웃으십니까? 혹시 좋은 방도라도 생각 나셨는지요?" 양춘자는 고개를 돌려 창림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장로(長老)가 되는 것인가?" 양춘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창림은 어안이 벙벙해짐을 느꼈다. "네? 무슨 말씀이신 지......" 양춘자는 고개를 돌려 조사전의 지붕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이가 들었다고 다 장로가 되는 것은 아닐세. 웅덩이에 고인 물은 썩게 되 어 마실 수가 없지. 한 곳에 안주해버린 장로는 고인 물과 같다네." 양춘자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뛰어 올렸다. 그리고 번천화운(　天花雲)의 신 법으로 몸을 허공에서 뒤집더니 그대로 조사전의 지붕위로 내려앉았다. 그의 돌연한 행동에 조사전 앞에 모인 수많은 제자들과 창림은 입을 다물지 를 못했다. 한 순간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한 가운데 양춘자는 의연하게 서 있었 다. 모든 사람이 당황해하건 말건 양춘자는 근엄한 표정으로 자칭 용문삼정을 바 라보며 꾸짖듯 말했다. "이보시오. 시주님들! 이제 어떻게 하시겠소? 빈도가 밑으로 떠밀어 드리오리 까 아니면 직접 내려가시겠소!" 그제야 정신을 차린 허일보는 얼굴에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소인들이 직접 내려가야 합지요. 그러기 전에 사부님! 절부터 받으십시 오." 허일보와 형제들은 양춘자를 향해 넓죽 엎드렸다. 그러자 양춘자는 당황하여 서둘러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허일보는 자신의 사부에게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를 이끌어 주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조사전의 지붕위로 오르는 사람이 있거든 그 분은 확실히 깨치신 분이니 사부로 모시라고 말입니 다." 양춘자는 이 기막힌 사태에 어이없어 하며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을 이끈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 누구이건대 당신들은 그를 이 토록 신임하는 것이오?" 허일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분은 조사전 안에 계십니다. 조사전안의 모셔진 다섯 분의 석상중 한 분이 십니다." 양춘자는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뭐, 뭐라고!" **************************************************************************** 운유(雲遊) - 도가의 도사들이 세상을 유랑하며 도를 구하는 수행을 말한다. 특히 청정한 수련을 지향하던 전진도와 정을도에서 많이 행하여 졌는데 고행 을 통해 도에 이르는 수련의 한 방법이다.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8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그 옛날 진시황제는 태청신단(太淸神丹)을 얻기 위해 깊은 삼천(三泉=깊은 샘) 을 팠다고 전해지나 그 진위여부야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지. 하지만 지 금으로부터 백 여 년 전에 태청신단이 다시 출몰하여 중원을 뒤집어 놓은 적 이 있었다네." 동빈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당시를 회상하듯 두 눈을 감았다. "아비규환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탐욕은 정말 끝이 없더군. 수 없이 많은 무림 인들이 죽었으며, 부모와 자식간에 불신이 생기고, 형제간에 죽고 죽이는 혈투 가 일어나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고........당시 이루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 일 어났다네. 태청신단을 손에 쥐게 되면 신뢰는 땅에 떨어지고 불신의 골은 깊어 져 급기야 한 집안의 몰락으로 연결되더군. 급기야 보다못한 내가 직접 나서 지 않으면 안되었다네." 동빈은 슬그머니 눈을 뜨고 구처기를 바라보았다. 구처기의 표정은 더없이 평 안하기만 했다. 동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처기는 탐욕을 넘어 서 깊은 도락(道樂=도를 즐김)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젊은 도사가 있었네. 그는 도에 대한 갈망으로 천하를 정처 없이 떠돌 고 있었지. 난 그 젊은 도사에게 태청신단을 맡겼네. 대신 그 도사에게 한가지 비법을 전수해 주었는데........ 바로 태을금화비선도인심법(太乙金花飛仙導引 心法)일세" 그러자 구처기는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떴다. 동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네. 그 젊은 도인이 바로 자네의 스승 왕중양일세! 내가 이 곳에 온 이유 는 바로 왕중양의 석상 안에 숨겨진 태청신단을 회수하려 함이라네." ".......!!" 구처기는 처음 들어보는 비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태청신단이 스 승의 석상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니........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 빈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태청신단이 그 주인을 만났으니 몸을 드러내어야 할 터! 이제 슬슬 일어 나세. 조사전의 위 아래가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니로군! 후후후!" ".......?" *** 비록 조사전의 높은 지붕 위라고는 하나 이미 늦은 밤이었고 양춘자의 돌연 한 행동에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대화를 똑똑 히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용문파의 제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놀라 움, 혹은 불신의 표정이 되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였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창노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와 함께 술렁이던 용문파의 제자들이 일순 정숙해지 며 밀물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사이로 십 여명의 황의 법복을 걸치고 황 색의 불진을 손에든 노도사들이 나타났다. 신태(身態)가 비범할 뿐 아니라 은 은한 위엄을 풍겨 결코 낮은 신분의 도사들이 아님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 다. 그들이 나타나자 누구 나가 할 것 없이 옷매무새를 고치고 두 손을 맞잡고 허 리를 깊숙이 숙였다. "제자들이 삼가 대장로님을 배알하나이다!" 그렇다. 그들이야말로 용문파의 현 실세(實勢)들이었으며 구처기의 직계제자 들로서 현 대장로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용문파를 상업적으로 이용하여 거 대한 세력으로 만든 실력자들이었으며 그 와중에 도관의 순수성을 잃어버리 게 한 장본인들이기도 했다. 제일장로 현청자(玄淸子)는 주위의 제자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은채, 허씨 삼형제를 근엄한 표정으로 쳐다보며 꾸짖듯 말했다. "어찌 전대의 조사님들이 아직 현존해 계실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무슨 일로 이 청정한 용문파의 제자들을 현혹시키려 하는가! 얼른 조사전에서 내려와 용 서를 구하라!" 그는 허씨형제들에서 양춘자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추상 같은 어조로 꾸짖었 다. "일양(一陽=양춘자의 字)은계율원의 원주로서 율법을 수호하지 아니하고 어 찌 저 도적놈들과 한패가 되려하느냐! 사조님들을 경멸한 죄가 얼마나 큰 지 알고나 있는게냐!" 양춘자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결코 조사전의 지붕 아래로 내려설 마 음은 없었다. "대장로님! 제자 불민하여 여러 조사님들에게 커다란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죽음으로 그 죄를 청하옵니다!" 양춘자는 자신의 등에서 검을 뽑아들고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그의 표정은 단호했으며 굳은 의지가 넘치고 있었다. 결코 살아서 내려서지 않겠다는 결의 를 행동으로 보인것이다. 장로들은 양춘자가 뜻밖의 강경한 자세로 나오자 잠시 당혹스러웠으나 그것 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자를 한 번도 용 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허일보와 그의 형제들은 당황하여 넓죽 엎드리며 말했다. "이제야 저희 형제를 미몽에서 깨우쳐 주실 사부님을 만났는데 어찌 죽으려 하십니까! 죽어야 한다면 소인들이 죽어드리오리다!" 그들의 충정 어린 마음에 양춘자는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다. 낯설기만 하던 그들이 어느새 그의 가슴 한복판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양춘자는 한 숨을 내쉬 며 타이르듯 말했다.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법이라오. 그러기에 빈도는 죽 어도 여한이 없소. 단지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다른 분들의 깨달음으로 연결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 뿐! 당신들은 이 일과 무관하니 어서 떠나시 오." 그렇다. 양춘자는 애초부터 자신의 죽음으로서 개혁을 부르짖으려 했던 것이 다. 어떻게 사는가하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어떻게 죽어야 하는 것도 중요 한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용문파의 제자들이 깨달음을 얻었으면 하는 것 이 그가 죽고자 하는 동기인 것이다. 모든 일체의 인간들은, 남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마음가짐을 가진 인간에 대 하여서는 존경과 두려움을 느낀다. 이것은 교리나 가르침의 문제만은 아니다. 소아(小我=작은 나.)를 탈각(脫却=벗어남.)한 경지이며 곧 부처의 마음인 것이 다. 허씨 세형제들의 어깨가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급기야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들뿐만 아니라 용문파의 모든 제자들도 숙연해 지 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장로 현청자는 이런 숙연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 다. 그는 죽으려면 죽어 보라는 식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흥!" 양춘자가 비록 조사전 지붕에 오르는 커다란 불경을 저질렀지만 죽을죄는 아 니었다. 하물며 스스로 죽음을 자청하고 나섰던 것은죽고자 하는 마음이 없 으면 안 될 말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던질 말은 현 체제 (體制)를 부정하고 장로들의 실책을 나무라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들 어 목에 두고는 비장한 어투로 말했다. "삼가 여러 장로님과 사숙님께 계율원 원주 일양이 한 말씀 올리옵니다. 무릇 도란 깨달음인데 어찌 석상에 절을 올려 찾으려 하십니까! 도관 밖으로는 굶주 리고 헐벗은 백성들이 허다한데 어찌 수십 가지의 진귀한 음식으로 조석(朝夕 =아침과 저녁.)마다 공과(功課)를 지내며 도를 구하려 하십니까! 옛 선인(仙人) 들께서는 모든 종교적 의례를 버리고 오직 스스로에게 귀의하라 하셨거늘 어 찌 계율로서 스스로를 억압하려 하십니까!" 양춘자는 잠시 말을 중단하고 대장로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들의 표정에는 분노로 가득 차있었으며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 외 자신의 말 에 공감하는 젊은층의 제자들의 맑은 눈동자를 볼 수 있었으며 안절부절못하 고 불안해하는 사숙과 사백들의 창백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개중에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부의 미소를 볼 수 있었으며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늙 은 도사들의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양춘자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큰 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용문파의 젊은 제자들은 들어라! 앞으로 도에만 귀의하라! 도는 그대들을 일 체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 말을 끝으로 양춘자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검으로 자신의 목을 치려했다. 그 순간 하늘이 진노한 것일까? 엄청난 굉음과 함께 지진이 일어난 듯 조사전 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르르릉! 용문파의 젊은 제자들과 장로들은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괴이한 사태에 당황하 기 시작했다. "지, 지진인가?" 창림은 지진일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해보았지만 용문산은 수 천년동안 한 번도 지진이 일어나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어찌 조사전만 저토록 진동을 일 으킨단 말인가! 조사전을 뒤흔들던 진동도 어느덧 멈추자, 용문산 전체가 쩌렁쩌렁 울리는 중 후한 목소리가 메아리쳐 들려왔다. 마치 태양의 햇살이 내려꽂히듯, 사면 팔방 에서 퍼져 오는 목소리는 사자후(獅子吼)를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다! 이제 본조(本祖)가 손수 다섯 조사들의 석상을 없 애리니 장로들은 더 이상 우매한 행사를 거행치 말라! 내가 벌이는 일에는 항 상 큰소리가 나느니 나를 가리켜 검선(劍仙) 여동빈이라 하느니라! 하하하!" 웃음소리가 끝나자 동빈의 말대로 펑하는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조사전의 문 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다섯 개의 석상이 파편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피, 피해라!" 용문파의 제자들은 하늘높이 치솟아 올랐다가 떨어지는 석상의 파편들을 피 해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그러나 대장로 현청자는 결코 피하려 들지 않았으 며 놀라움과 경악으로 정신이 하얗게 탈색되어버린 듯 했다. 어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일이........ 정녕.....여동빈조사님이시란 말입니까? 당신은 어느 때의 분이신 데..... 어떻게 지금껏 현존해 계실수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조사님일리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 조사시라면 제자들을 이렇게 대하실리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당신을 위해 항상 일심으로 예배를 올리고 조석으로 진귀한 음식으 로 정성을 다해 모셨거늘.......어찌 이렇게 우리를 내치실수 있단 말입니까? 당신은 우리를 칭찬하고 보듬어야 할 분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조사님일리 없습니다. 어디선가 석상의 파편이 떨어져 현청자의 머리를 강타했다. 다른 장로들은 호 신강기(護身剛氣)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하였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만큼 그가 느끼는 정신적 충격은 커다란 것이었다. 문득 현청자의 이마에서 주르륵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는 무심결에 손을 이마에 얹었다. 무엇인가 미끈한 느낌이 들어 손을 바라보자 그제야 자신 의 피임을 알았다. 아니 그제야 자신도 피를 흘리는 인간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 그의 귓속으로 스며 파듯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석은 자여! 부처도 중생이며, 깨달으면 중생도 부처인 것이다. 도 앞에서 만물이 동등하거늘.....너와 내가 동등하거늘 어찌 조석으로 나에게 예배를 올 려 스스로를 망치려 했는가!' 순간 현청자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그렇군..... 그런 것이군요...... 도란....그런 것이군요... 현청자는 한 모금의 피를 울컥 토해내고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더 이 상 정신적인 충격을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가물거리는 그의 귓가로 사제들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앗! 사형!" "대장로께서 쓰러지셨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모시지 아니하고!" 다급한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그리고 아우성!현청자는 아우성을 뒤로하 고 흐릿해지어 가는 의식 속으로 한 가지 의문이 치솟아 올라왔다. '나는 과연 이 나이가 되도록 몇 번이나 도를 캐어물었던가?' 현청자는 사제들과 제자들에게 둘러 싸여 옮겨지고 어수선하던 장내도 조용 히 가라앉았다. 이러한 급박한 상황을 어리둥절한 채 지켜보던 양춘자의 어깨 로 따뜻한 손길의 느낌이 전해져 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의 옆으로 사조 구처기의 모습이 보였다. "사, 사조님......." 구처기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손(師孫=사문의 후손)이여. 정말로 네가 자랑스럽다. 그만 내려가자꾸나. 여조(呂祖=여동빈 조사)께서 용서하셨거늘 그 누가 너의 죄를 추궁할 수 있으 리요!" 구처기의 마지막 말은 일부러 공력을 실어 말하였기 때문에 용문파의 모든 제 자들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이 놀라움으로 탄성을 질렀으며 양춘 자 또한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그, 그렇다면......!!" 구처기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그 분은 틀림없는 여조이시라네. 빈도도 그 어렸을 적 스승과 함께 한 번 뵈었을 뿐이었지......그 분은 이미 시공간을 허무셨는지 더욱 젊은 모습 으로 나타나시었다네. 내려가세. 내려가서 그 분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자세 히 들려줌세. 무량수불!" 양춘자는 하늘과 같은 사조 구처기의 따뜻한 보살핌에 그만 감정이 격해짐을 느꼈다. "사, 사조님......" 구처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양춘자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허일보와 그 의 형제들을 바라보며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들과 일양은 여조께서 맺어준 사제지간이니 마땅히 조사님을 공경하고 스승에게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야!" 허씨 삼형제는 기쁜 마음에 허리를 굽실거리며 말했다. "네. 네. 암요! 그럼요!" ".........." 구처기는 허씨 삼형제의 몰골을 한 참 바라보다가 어이없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양춘자를 이끌고 경공을 펼쳐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갔다. 그러자 다급해진 허일보는 큰 소리로 사부를 불렀다. "사, 사부님!" 그러나 돌아오는 건 메아리뿐, 더욱 다급해진 허일보는 조사전 아래에 있는 제 자들에게 부탁하듯 말했다. "이보시오! 우리는 무공을 배운 적이 없어 경공을 펼치지 못하오! 그러니 사다 리라도 갖다 주시오. 그래야 이곳에서 내려갈 것이 아니오. 후후후!" 그러나 제자들의 행동은 냉담한 것이었다. 어찌되었건 이 사건의 중심에 그들 이 있었던 것이다. "이보시오! 시주님들! 조사전에는 조사님들의 석상이 없으니 이제 부터는 마음 껏 있어도 되오! 그러니 천천히 있다가 내려오시구려!" 그들은 더 이상 조사전에는 볼 일이 없는 듯 하나 둘씩 사라지고 드넓은 앞마 당에는 오직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바로 창림이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본인에게는 어찌 부탁을 하지 않는 게냐? 부탁을 한다면 사다리를 갖다줄 용 의가 있는데......." 허일보는 아직까지 감정이 있는 듯 삿대질 을하며 고함을 질렀다. "흥! 어림없다. 그러니 꺼져라!" 창림은 새끼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후벼파며 여유로운 듯 말했다. "너희 허씨 삼형제는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당신들의 사부이신 양춘자께서 는 나의 사숙이 되신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의 사형이 되는 셈이지.....흐흐흐! 약속하건대 사제들의 앞날이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을 걸. 흐흐흐!" 창림은 즐거운 듯 휘파람을 불며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허씨 삼형제 는 사색이 되어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 공과(功課)- 도문에 들어선 도사들이 매일 아침과 저녁에 신선들께 드리는 제 사 제 일장 협비선이오유(挾飛仙以敖遊)-9 비선과 함께 유유히 노닐다. 새벽이 오고 차가운 이슬이 몸을 적시자 소년은 추위와 고통으로 인하여 눈 을 떴다. 구렁이에게 물린 팔이 퉁퉁 부풀어올라 이미 염증을 일으키고 있었 다. 의술에 대하여 알리 없는 소년은 몇 날 몇 칠을 그대로 방치하다보니 이제 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것이 있으면 좋으련만......소 년의 눈에는 모든 것이 둥글어 보였다. 자신의 몸 일부분이 썩고 있다라는 기분은 결코 좋은 감정이 아니었다. 갑작스 럽고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소년은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삶은 결코 어리지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자신의 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힘껏 깨 어 물었다. 역하고 진득한 이물질이 입안으로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소년은 입안의 이물질을 뱉어내고 또 다른 손으로 쥐어짜듯 허연 고름을 푹푹 파냈 다. 고통으로 소년의 입이 쩍 벌어지고 그보다 더한 슬픔에..... 개처럼 흐느껴 울었다. *** 동빈은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양춘자의 행동은 약간 과격한 것이기 는 했지만 그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으리라. 그리고 허씨 형제들 또한 훌륭한 스승을 두게 되어 올바른 가르침을 얻게 될 것이었다. 이제 양춘자를 중심으 로 새로운 젊은이들이 용문파를 이끌어 나갈 것이며 변화시킬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왕중양의 석상에서 꺼낸 태청신단으로 소년의 일그러진 얼굴을 되 돌리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동빈은 무엇보다도 소년의 밝고 헤 맑은 웃음 을 보고 싶었다. 평생을 아픔으로 살아온 소년에게 그러면서 순수함을 잃지 않 고 살아온 소년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이었으며 마지막 이별의 선물이 될 것이었다. *** 소년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비탈길을 내려서고 있었다. 가파른 산기슭이었 고 땅은 진흙으로 미끈거렸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현기증으로 머리는 어지러 웠다. 하지만 소년은 입술을 악물며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저 아래만 지나 면 마을이 나타날 것 같았다. 순간 소년의 발이 미끈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소 년은 중심을 잃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산 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소년의 몸이 아래로 한없이 추락하기 시작했 다. 그리고 평평한 바위에 몸을 부딪혀서야 소년의 몸이 멈추게 되었다. 깜짝 놀란 종달새들이 푸드득거리며 날아 올랐고 소년과 함께 굴러 내려온 풀잎과 나뭇잎들은 소년의 몸을 덮기 시작했다. *** 순양별부에 들어서자 동빈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숲, 나무, 꽃....그리고 아름다운 나비와 새들, 이 모든 것이 변함이 없건만 무엇 인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그의 가슴을 짖누르는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소년 을 찾아보았지만 이미 그의 흔적은 지워지고 없었다. 동빈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듯 말했다. "갔는가? 소년은 떠났는가?" 어차피 소년과는 오랜 인연을 지속할 수 없었다. 자신은 천명을 받아 곧 우주 의 일부분이 되어 육체를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에서 말하는 해탈 (解脫)의 경지이며 도가에서는 득도선경(得道仙境)을 말함이다. 그러나 막상 순양별부에 소년의 모습이 보이지 앉자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동빈 의 마음을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동빈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쥐여진 목갑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 속에 는 소년에게 줄 태청신단이 있었다. *** 차가운 밤이슬이 내려앉고 움직일 것 같지 않던 소년이 조금씩 꿈틀거리기 시 작했다. 그리고 한 참이 지나서야 소년은 입술을 악물며 뒤로 누울 수 있었다. 온 몸이 시큰거리고 아파 왔지만 그 고통으로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휘영청 밝은 달이 소년의 눈에 아른 거렷다. 회도인이 언젠가 이런 말을 한 적 이 있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푸르고 맑은 달님에게 소원을 빌어 보라고....... 정성을 다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소년은 두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 다. '달님에게 빕니다. 부디 죽여주세요. 너무나 힘드니 이제는 편안하게 해 주세 요.' 문득 공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을 대신해 죽어가면서 한 번이라도 행복 을 느끼고 죽으라고 했는데......소년은 툴툴거리며 웃었다. 슬픔과 고통이 극 에 달하면 도리어 웃음이 나오는 법이다. 소년은 힘겹게 일어나 바위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팔에서 등에서 허리에서 극 심한 고통이 전해져 왔다. 소년은 신음소리를 입안으로 삼키며 고개를 들어 주 위를 살펴보았다. 주위에는 커다란 관목과 더불어 보기에도 기분 좋은 계수나 무와 떡갈나무들이 즐비했다. 그러다가 저 멀리 달빛에 번들거리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발견하였다. 너무나 낯익은 풍경에 소년은 억지로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었다. 마치 뱀처럼 휘어진 소나무.......소년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소나무는 십 여일 전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소년이 뾰족한 돌로서 화살표를 그려 넣은 그 나무였던 것이다. 소년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해 짐을 느꼈다. 저 나무가 발이 달려 자신을 뒤쫓아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니면 어찌 저 나무 가 이 곳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 당시 저 나무에 화살표를 표시 할 때에는 주위에 관목도 계수나무도 떡갈나무도 없었다. 덩그러니 홀로 있던 나 무인데..... 소년은 심한 좌절감에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혼란스럽고 두려워 져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자신이 미친 것이 아니라면 세상이 미친것이리라! 그 때였다. 쾌활하고 한없이 자상한 목소리가 자신의 귓전으로 울려 펴졌다. "하하하! 이제야 너를 발견하였구나. 어찌 별부에 기다리지 아니하고 절진에 갇혀 노부를 이리도 고생시키는 것이냐?" 소년의 두 눈이 번쩍 뜨여졌다. 틀림없는 회도인의 목소리였다. 소년은 아픈 것도 잊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회도인은커녕 그림자조차 볼 수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환청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하고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소년의 귓가로 또 다시 울리는 회도인의 목소리.... "아이야! 노부를 보려 하거든 '태화의 아래 백골이 낭자하다.'(太華之下,白骨狼 藉)라는 말을 기억하라." 소년은 그제야 환청이 아님을 깨닫자 마음이 진탕되기 시작했다. 틀림없는 회 도인의 목소리였다. 아! 회도인께서 나를 찾으러 오시다니....... 소년은 온 몸에 전율이 일며 들뜬 마음으로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걷기 시작했다. 비록 몸은 엉망이었지만 용기와 희망 앞에서는 아무 런 걸림돌이 될 수 없었다. 그는 우선 힘겹게 오른발을 먼저 내밀었다. 그 다음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다 시 오른발을 내민 다음, 왼발을 오른발에 합쳤다.그 다음 오른발을 앞으로 내 밀고, 왼발을 앞으로 내민 다음, 오른발을 왼발에 합쳤다.또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오른발을 앞으로 내민 다음, 왼발을 오른발에 합쳤다. 소년은 이런 식 으로 반복하여 계속 전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태산(泰山)과 화산(華山)의 아래에는 백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라는 것 은 전에 회도인이 해준 도가의 속담이었다. 깊은 산중을 오르는 사람들은 전란(戰亂)을 피하기 위해서든, 입산수도(入山 修道)를 하기 위해서 든, 깊은 골짜기 약초를 캐기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가지 고 산행(山行)을 하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올라가다간 낙상하여죽던가, 맹수들에게 공격을 당한다던가, 가끔 신령에 홀려 깊은 산중에 자살했다는 소 리도들리기 일수다. 그래서 천하의 명산인 화산과 태산에는 수많은 도인들 의 백골이 여기저기 흩어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태화지하 백골낭자라는 여덟 글자를 아는 사람은 그래서 우보(遇步)의 법이라 고 하여 소년과 같은 걸음을 걸으며, 산행에 임하는 것이다. 우보의 법이란, 심신을 수양하기 위해 명산을 오를 때 행하는 보법으로 악귀 를 물리치는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귀문둔갑이나, 음양, 팔쾌를 비 롯한 모든 절진(絶陣)에도 도움이 되는 걸음이기도 했다. 이 세상 만물에는 생명이 아닌 것이 없고 신이 아닌 것이 없다. 작게는 오래 된 나무에는 목신(木神)이 있고, 오래된 집에는 가신(家神)이 있고, 오래된 명 산(名山)에는 산신(山神)이 있다. 크게는 마을의 수호신이 있고, 더 크게는 현 이나, 성이나 국가의 수호신이 있다. 그러한 이치를 모르고 오래된 나무에 방뇨를 한다거나, 타인의 집에 무례한 언사를 늘어놓는다거나, 명산에 오를 때 추태를 부린다거나 쓰레기나 불을 놓 거나 할 때에는 마땅한 응분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태화지하, 백골낭 자'의 여덟 글자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얼마쯤 걸었을까?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자신 앞에 당당히 서있는 절벽을 바 라다보았다. 다시 회도인의 목소리가 절벽을 넘어 들려 왔다. "이제 내말 대로 걸어라. 우로 칠보, 앞으로 삼보, 좌로 이 보, 다시 앞으로 삼 보를 걷는다면 나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거대한 절벽이 가로막고는 있었지만 소년은 회도인을 절대적으로 신임 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의심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거대한 절벽은 온데 간 데 없어지고 저 멀리 청의를 나부끼며 뒷짐을 진 채 서있는 회도인의 모습이 보였다. 소년은 애써 굳건한 표정을 지으려 두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 았다. 소년의 두 어깨가 떨리며 양볼 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회도 인이 다가와 그를 않아 주자 그만 서러움을 억누르지 못하고 엉엉 울고 말았 다. "죄송해요...." "괜찮다. 아가야." 동빈은 소년을 보자마자 그가 가슴속에 지녔던 모든 마음을 읽을 수 있었 다. 소년이 이런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이면에는 자신에 대한 사랑이 숨겨 져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누가 될까봐 떠나려 하는 소년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쯧쯧! 그만 하렴. 남자가 이렇게 울어서 되겠니?" 소년은 가까스로 울음을 멈춘 듯 하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죽음과 삶 의 고비가 끝났다고 느끼는 순간 마음의 정신력의 끈이 끊어지고 만 것이다. 동빈은 소년을 품에 않으며 순양별부로 걸음을 옮겼다. 원래 순양별부 주위에는 상고로부터 내려오는 절진(絶陣)이 펼쳐져 있었는 데, 약초를 찾아 헤매는 산사람들의 잦은 출입이라든가, 맹수들의 출몰을 막 아 수도(修道)에 지장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소년이 들어간 숲속에도 '보보 건곤금라대진(步步乾坤金　大陣)'이라는 심오한 절진이 펼쳐져 있었지만 살생 을 싫어하여 동빈이 사로(死路)를 없애고 생로(生路)만으로 고쳐 놓았기에 진 속에 빠지더라도 인명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동빈은 소년을 침상에 눕힌 후, 한 가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 만, 그의 고뇌는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그는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려놓은 상 태였다. 동빈은 그 어떠한 삶에 있어서라도,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아 본적이 없었다. 비록 꿈에서도 염원하던 자연과 우주와의 합일을 앞둔 시점에서라 도......말이다. "아! 이 아이와의 끈질긴 인연의 고리는 천명(天命)마저 어찌 할 수 없게 만 드는 구나." *** 그 날 저녁 동빈은 흰옷으로 갈아입고, 제단(祭壇)앞에 섰다. 향을 올리고 천 지조화신(天地造化神)들에게 간단히 제사(祭祀)를 치른 다음, 경건한 마음으 로 꿇어 않았다. "도문소자(道門小子) 동빈이 삼가 호천금궐무상지존자연묘유미라지진옥황상 제(昊天金闕無上至尊自然妙有彌羅至眞玉皇上帝)께 감히 고하나이다. 일찍이 가장 높으신 스승이신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께서 세 상의 진리를 바로 세우시고,뒤로 자부소양군(紫府少陽君)께서 진리를 전하 여 받으시어, 다시 차례로 내려와 이 어리석은 동빈에게까지 이르게 되니, 밖 으로는 천지와 통하고 안으로는 태어나기 이전의 참다운 진리를 닦고 본성을 깨달을 수 있게되었나이다. 이에 미천하나마 천명(天命)을 받들게 되었사오 나, 세상 법도가 어지러워지고 본래의 진리는 퇴색되어 미몽(迷夢)에 휩싸여 있는바, 도문의 소자로서 이를 안타깝게 여겨 새로이 제자를 받아 이를 전하 려 하나이다. 부디 동빈의 뜻을 가엽게 여기시어 허락을 청하나이다." 동빈은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곧 심신은 평정의 상태가 되었다. 얼 마 전 스승들조차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경지를 이루어지고서 부터는 자신의 뜻이 곧 천심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자신이 가고자 한다면 못 갈곳도 없으 며, 하고자한 면 못 이룰 것도 없으리라.... 굿이 자신을 낮추어 제사를 지내고 천의(天意)를 묻는 것은 앞으로 자신의 제 자가 될 백리향의 미래를 위해서였고, 제자를 축복하고, 천지신명(天地神明)들 의 가호를 받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제자와 같이 있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 후 에는 스스로의 길을 가야 한다. 자신이 걸어온 그 길을, 그 험난하고 지옥같 은 그 길을 제자는 걸어야 하는 것이다. *** 깊고, 깊은 허하고 텅 빈 한가운데 황금 꽃 이 피어올랐다. 그 황금 꽃이 날아 올라 자신의 심상(心想)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멀리서 백 여명의 동자를 이끌 고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務),를 거느린 도덕천군(道德天君)의 모습이 보였다. 도덕천군은 자신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 다. 곧이어 구룡(九龍)과 십 이 백호(十 二 白虎)를 앞세운 태을원군(太乙元君) 의 모습도 보였다. 그 또한 자신을 향해 웃고있었다. 그 뒤로 많은 신들의 모습 이 보였는데 모두가 백리향과의 인연을 반기고 있었다. **************************************************************************** 호천금궐무상지존자연묘유미라지진옥황상제(昊天金闕無上至尊自然妙有彌羅 至眞玉皇上帝) - 곧 옥황상제를 말합니다. 여기서는 동빈이 제를 올리고 있기 때문에 정식명칭을 사용한 것입니다. 태상노군혼원상덕황제(太上老君混元上德皇帝) - 곧 노자(老子)를 가리킵니 다. 도덕천군(道德天君)이라고도 하지요. 너무나 유명하여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합니다. 자부소양군(紫府少陽君) - 춘추시대의 사람이라고 하고, 한(漢)나라때의 사람 이라고도 합니다. 이름은 왕현보(王玄甫), 호는 동화자(東華子)인데, 동화제군(東華帝君)이라고 불립니다. 전진도에서는 북오조의 첫째인 데 후에 종리권에게 도를 전하였다고 합니다. 태을원군(太乙元君) - 노자의 스승이라고 하며 황제(黃帝)또한 이 신선에게 비 기를 전수 받았다고 합니다. 모든 신선들이 이 신을 따른다고 전해지는 대신선. 제 이장 심검비혜동천하(心劍飛兮動天下)-1 심검(心劍)이 하늘을 나니 천하가 진동하도다. 생면부지(生面不知)에다가, 혐오스러운 외모를 지닌 자신에 대한 동빈의 편 견 없는 행동은 항상 존경심을 갖도록 했다. 또한, 생명의 은인이며 항상 자상 했으며 따뜻했으며 매우 쾌활한 사람으로서 소년은 일찍이 그런 그에게 친부 모와 같은 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은 천애고아(天涯孤兒)에다 오 갈 데 없는 처지로서 동빈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소년은 얼른 구배(九 拜)를 올렸다. "사부님! 절 받으세요." 알배, 이 배, 삼배를 올리다 보니 평생 처음으로 친인이 생기는 일이라 눈물 이 핑 돌았다. 마지막 구배를 올리자 소년의 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향아, 그만 일어나거라." 소년은 사부가 자신의 새로 생긴 이름을 불러주자 더욱 감격스러움을 느꼈 다. 동빈은 어린 제자의 감정이 추슬러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어찌 제자의 마음을 스승이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백리향의 복받친 감정이 어느정도 추스 려지자 동빈은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구배를 함으로써 스승과 제자의 예는 어느 정도 갖추어졌다고 할 수 있 지만, 완벽한 것은 아니다. 무가(武家)의 극히 비밀스럽고, 한 평생 이루어낸 업적을 전수 받는 제자들은 예로부터 피로서 맹세를 하고 전수하여 주었는데 하물며 선인지로(仙人指路)의 술을 전수 받는 도가의예(例)는 오죽 하겠는 가?마땅히 제자의 도리로서 지극한 근면과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다." "명심하겠습니다. 사부님." "옛날 선인(仙人)들은 문자를 배척하고 깨달음을 중요시하였지만, 무릇 학문 이 낮은 사람은 그 허(虛)와 실(失)을 분별 할 수 없어편협하고 시비를 가르 지 못해 커다란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하니 우선은 글자를 익히고 학문 에 열중하도록 하여라." "네. 사부님." 백리향은 한 번도 글자를 익힌 적은 없었다. 그냥 귀동냥으로 배운 간단한 글 자 몇 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사제의연(師第之緣)을 맺은 증표로 너에게 줄 것이 있단다. 근래 사 부가 순양별부를 비운 것도 이 것을 구하기 위함 이였던 것이야." 동빈은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놓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매우 진귀하고 고급 스러워 보였다. 덮게는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든 것으로하늘로 승천하는 용 이 양각(陽刻)되어 있었고, 용의 입에 물려있는 여의주는 무슨 보석을 박아 넣 은 듯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덮개를 열자 온 방안에 상쾌한 향내로 가득해 졌으며, 그 향기만으로도 정 신이 청정(淸淨)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것이 바로 태청신단(太淸神丹)이란다." 백리향으로서는 이 푸르스름하고 투명한 유리구슬 같은 것이 얼마나 신묘하 고 영험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빈의 얼굴에서는 무한한 자부심으 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태청신단은 그 가치를 메길 수 없는 인류의 보물이란다. 세인들은 소림사(少 林寺)의 대환단(大環丹)과 그 위치를 같이 놓고 있지만, 그것은 무지한 사람들 이 떠드는 소리일 뿐이야. 상고시대 태을원군에 의해 전해졌다고도 하는데 그 실상은 알 수 없는 일이며,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근래 화산(華山=즉 화산 파)에서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하는데 그 것은 태청신단의 이름만 도용하였을 뿐이며 그 신묘함은 달과 반딧불의 차이보다 크단다. 신단을 구성하는 약재도 진귀하여 구하기가 어려울 뿐 만 아니라 비법 또한 유실되어 세상에는 오직 세 알의 신단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 것이 그 중의 하나이며, 나머지 두 개 의 신단은 나로서도 알 수가 없구나. 전설에 의하면 태을신군이 깊은 삼천(三 泉)아래 가라앉혀 놓았다고 하는데 아무도 그 진실은 알지 못한다. 이 태청신 단은 묘하고 영험하여 그냥 복용하면 도리어 화를 입게 되는데 백일동안 절곡 (絶穀=곡식을 끊음. 또는 피곡(　穀),단곡(斷穀)이라고도 함,)을 행한 후, 복용 하여야 하며, 그 동안 항상 깨끗한 것만 볼 것이며, 깨끗한 생각을 가져야 하 며, 깨끗한 말만해야하는데, 그러기에는 이 순양별부만큼 좋은 곳은 없을 것이 다. 이 태청신단만이 너의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아 줄 수 있기에 더욱 명심하 여 이행하도록 해야한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전, 이런 모습이라도 상관없어요. 열심히 수련 하라는 신의 뜻인지도 모르죠." 동빈은 어린 제자의 마음씀씀이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향아의 갸륵한 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는 사제간으로서 증표인 것이다. 친구간에도 서로의 우정을 알리는 증표를 주고받으며 부부간에도 서 로의 증표로서 믿음을 확인하는데 사제지간에 어찌 아무런 증표가 없을 수 있 겠느냐?" 동빈의 태도는 단호했으며 확고한 것이었다. 백리향도 더 이상 아무런 말없 이 스승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이튿날 백리향은 목욕 재계를 하고 천지신명과 모든 선신들에게 도문의 소자 가 되었음을 고한 뒤 동빈과 정식으로 사제의연을 맺었다. 절차가 몹시 까다롭 고 엄숙하여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넘치고 있었다. 이로서 백리향은 진정한 선인지로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태청신단을 복용하 기 위해 단식수행을 하게 되었다. 동빈은 올해 가장 음(陰)기가 강한 날을 선 택하여 백일 단식을 시켰다. 원래 태청신단이 양(陽)한 기운이 강하여 서로 화 합하고 상충을 일으키지 않아야 했던 것이다. 백일간의 단식 수련을 거치는 과정에서 백리향은 많은 것을 배워 나갔다. 웬 만한 글자는 읽고 쓸 수 있게 되었으며 운기행공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되 었다. 또한, 생활습관도 바뀌어 독서를 즐겨하게 되었고, 유치한 수준이지만 철학적 인 사색도 가끔 하게 되었다. 육례에 관해 남다른 관심을 보였고 그 외에 여 러 잡기(雜技)에도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나 배운다는 것에 커다란 기쁨을 느꼈고, 그 기쁨을 위해 수면을 기꺼이 포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단식으로 오는 고통 또한 만만치 않았다. 비록 연산홍과 연공단 한 알 에 불과 했지만, 하루 세 끼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는데, 이제 그 마저 먹 을 수 없게 되자 흙이라도 파먹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단식은 자기 자신의 원초적 욕구와의 싸움이며, 자아(自我)로서 그 욕구를 억 압하고자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원초적 욕구에 의해 가려졌던 또 다 른 자아(超自我=眞我)를 찾는 수련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보통 백일연공은 사십 여 일간의 단식 과정에서 성패여부가 결정 난다. 심마 가 찾아와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며, 환상과 환청을 듣기도 하여, 심하 면 미치거나 굶어 죽기도 한다. 그래서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여야하며, 움 직임을 자재하고, 운기행공을 통하여 영성이 깨어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 다. 다행히 사십 여 일이 지나면서 백리향의 얼굴에 다시 살이 붙기 시작하였고 눈에는 영기가 서리며 많은 욕구들도 사라져 마치 해탈한 듯, 마음과 머리가 더 없이 맑아졌다. ***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아 흔적을 남기지 아니한다. 나라가 망해도, 흑발이 백 발이 되어도 청산은 변하지 않는 것은 세월이 무심히 흐르는 물과 같기 때문 일 것이다. 어느덧 백 여 일이 지나 백리향의 단식수련도 끝나게 되었다. 보름달이 휘황 히 빛나는 절벽위로 두 사제는 가부좌를 틀고 서로 마주보며 앉아 있었다. "이제 신령한 약물을 복용함에 있어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을 설명하도록 하 겠다. 우선, 하단전이 콱 찬 듯, 느껴지며 더 이상 오 갈데 없는 이 기운들은 전 신을 타고 다니는데 그 때 느껴지는 기분은 마치 구름 위에 떠있는 듯 하고 온 몸이 짜릿하여 황홀경에 접하게 되는데 이때 정신을 놓으면, 무병장수 할 수는 있어도 너 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는 없을 것이다. 정신을 놓지 아니 하여 그 기운들을 임맥과 독맥에 모은다면 그 두 기운은 질풍노도(疾風怒濤) 와 같은 기세로 달려드는데 마치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하고 화산이 폭발하는 듯 하여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동빈은 잠시 말을 끊고 어린 제자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자신에 대한 믿음 하 나로 백일간의 단식을 훌륭히 해 낸 제자였다. 하지만, 앞으로 찾아올 고통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쓰러운 것이었다. "임맥은 정수리로부터 앞쪽으로 몸의 한가운데를 따라서 회음까지이며, 독맥 은 회음으로부터 등쪽으로 몸의 한가운데를 따라서 정수리까지이다. 또한 독 맥은 양한 기운이 흐르며, 임맥은 음 한 기운이 흘러들기 때문에 임, 독양맥을 타통하는 것을 가르켜일(日),월(月)의 화합이라고도 하며, 천지가 합일했다 고 말하는 이유가 이때문인 것이다." 동빈은 품에서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놓았다. 달빛을 받 아서인지 뚜껑에 양각된 천룡도(天龍圖)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뚜껑이 열리자 청아한 빛을 뿌리며 태청신단이 드러났다. 그윽한 향기 가 퍼져 나오고 푸르스름한 빛이 백리향의 눈을 통해 들어왔다. "선천의 기운이 혼원히 조화를 이룬다. 태을혼원조화결(太乙混元造化缺)!" 동빈의 두 팔이 태극문양을 그리자, 태청신단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 고 곧바로 산화하기 시작하더니 한 줄기의 연기가 되어 백리향의 콧구멍 속으 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윽한 연기가 자신의 콧속을 통해 온 경락으로 퍼져나가자 하늘로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기운의 흐름은 수태음페경(手太陰肺經)에서 시작하여 수양명대장경(手陽明大腸經), 족양명위경(足陽明胃經),등 각 정맥과 장부를 지 나 족궐음간경(足厥陰肝經)에 이르러서, 다시 수태음페경으로 돌아갔다. 이러한 운행이 두어 번 이루어지자. 전신의 모든 세포가 춤을 추는 듯하고 황 홀하여 그 기분을 이루 형용할 수가 없었다. "향아야 얼른 기경팔맥으로 기를 모으거라." 백리향의 귓가로 동빈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순간 자신의 실 책을 얼른 깨닫고 서서히 12정맥에 흐르는 모든 기운을 기경팔맥으로 이끌었 다. 기경팔맥은 정맥과는 독립된 경맥으로, 기가 흐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에 동 빈이 기경팔맥을 소통시켜주고 난 후부터는 기가 운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태청신단의 기운이 기경팔맥으로 향하자 말 그대로 그 기세는 질풍노도(疾風 怒濤)와 같았고 천군만마(千軍萬馬)가 휘몰아쳐 오는 듯 했다. 하나의 거대한 폭풍같이 거센 기운은 임맥과 독맥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고 막힌 혈과 충 돌을 일으키자 엄청난 충격이 정수리로부터 터져 나왔다. 뇌전(雷電=번개)을 맞으면 이러한 충격이 올까?백리향의 온 몸에서 식은땀 이 베어 나오고 있었고, 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청신단의 기운은 이미 자 신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고,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충돌해 나갔다. 머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모든 신경 조직이 뜯겨져 나가는 듯한 고 통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백리향이 겪는 고통은 경락이 커지고 넓어지면서 겪 는 고통이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경락의 크기가 정해져 나오는데 그 크 기와 넓이만큼 기가 흐르는 것이다. 인위적으로 크기를 조절할 수는 없는 것인 데, 백리향의 경우에는 워낙 강력한 태청신단의 기운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12정맥은 살 속을 가며, 혈에서 외계와 이어져 있다. 또한, 12경근은 12정맥과 관계가 있는 피부와근육부분이고 보면백리향이 겪는 고통을 미루어 짐 작 할 수 있을 것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백리향의 몸이 모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천지 합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백리향은 더 이상의 충격을 이기지 못 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빛이 있어 태어난 뒤로 막혀 버린 그 구멍(祖窺)으로 돌아오면, 온몸의 신(神)이 편안하여지고, 약(藥)이 몸에 흐르는 강물의 근원에서 생겨나니, 하나의 기가 솟아 나온다. 가려진 막을 뚫으면, 변화가 일어나서 금빛(金光)이 찬란하며, 한 덩어리 둥그런 해가 변함 없이 붉게 빛난다. 光回祖竅萬神安 藥産川原一氣出 　幕變化有金光 一輪紅日常赫赫 제 이장 심검비혜동천하(心劍飛兮動天下)-2 심검이 하늘을 나니 천하가 진동하도다. 사람들은 체질을 바꾼다고는 하지만, 산성이 중성으로 바뀌거나 태양인이 태 음인이 되는 경우는 없다.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체질이 바뀐다는 의미는 죽는다는 의미이며, 남성이 여성으로 바뀔 수도 있다 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태어나기 이 전의 완벽한 신체로 돌아갈 수는 있다. 어긋나고 삐뚤어 진 골격이나, 근육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일그러지고 벗겨진 피부조직이 다시 소생할 수는 있다는 것이다. 환골탈태(換骨奪胎)가 바로 그 것인데, 마치 뱀이 허물을 벗 듯, 예전의 피부조 직은 갈라지고 새로운 피부조직이 형성되며, 뼈는 선골(仙骨)로 바뀐다고 한 다. 하지만 백리향에게는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태청신단을 흡수하고 난 후 변화 된 것이 있다면, 머리가 더없이 맑아졌고, 영 통(靈通)이 개안되어 자연의 소리를 가끔가다 이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 고 한 달여 동안 몸에서 심한 악취를 풍겼는데, 사기(邪氣)와 몸의 독소가 빠 져나가는 현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피부조직이 조금씩 바뀌 고 있었다. 거친 부분은 맨들맨들 해지고 있었고, 불룩 튀어나온 혹 같은 것들 이 가라않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는 갑자기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일어나는 변화였다. 오년 이 지난 후에도 이러한 변화는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았다. 오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백리향도 어느덧 청년의 티가 조금씩 나기 시작했 다. 그 동안 수련에 임함에 있어 최선을 다해 왔기에 꽤 높은 단계로 비약적 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동빈에게서 시, 서, 예, 화를 비롯한 여러 잡 기를 배워 한 곳에 머무는 편협된 지식으로 빠지지 않도록 했다. 불자와 유생 이 만나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인데, 서로 편협된 지식을 갖고 있기 때 문이다. 도를 이룸에 있어 편협된 마음은 독과 같아 가장 금기시 해야 될 덕목 인 것이다. 그러나 백리향에게도 문제는 있었다. 도를 닦음에 있어 너무 청정함에 치우쳐 정(靜)과 동(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있었다. 정과 동이 화합하지 못하면 심신(心身)이 합일되지 못한다.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만한 노력과 수련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향아야. 오늘부터는 검법을 익히자 꾸나." 백리향은 사부의 뜻밖의 말에 의아심을 감추지 못하였다. "검...법을 말입니까?" 사실 그는 무공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검이란 그에게 있어서 사람을 상하 게 하는 흉기일 뿐이며, 세상에서 살아져야 할 물건들 중에 하나였다. "그렇다. 너에게 가장 기본적인 검법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천십이검(頂天十二 劍 )을 가르쳐 주마. 하나 하나가 모두 기본적인 검의 오의를 담고 있어 나중 에 상승검법을 익힐 수 있는 뿌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스승의 말을 거역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빈은 목검 두 자루를 꺼내어 한 자루를 백리향에게 던져주었다. 검을 받아 든 백리향의 모습은 참으로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검을 겨누 고 있었는데, 마치 원숭이가 나뭇가지를 들고 서있는 듯 했다. 동빈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자 한 번 공격해 보아라." 백리향으로서는 여간 껄끄러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감히 하늘과 같은 스승에 게 어떻게 검을 들이밀 수 있겠는가? 비록 검을 겨누고는 있었지만, 그 정도 도 민망스러울 정도였다. 백리향이 자신에게 감히 덤벼들지 못하자 동빈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화두(話 頭)를 던져 백리향의 호기심을 자극해 보려는 것이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수수 께끼는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아닌가? "허어! 어찌 공격을 하지 않는 게냐?" "소, 소자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한 푼의 공력을 일으키지 않고 공격해 볼 터이니 잘 방어해 보 아라." 동빈의 말에 백리향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빈의 검은 아주 느리게 접 근하고 있었다. 그리고 슬쩍 백리향의 검을 건드리는 것으로 공격을 끝내는 것 이었다. 하지만, 그의 간단한 행동에 비해 결과는 엄청난 것이었다. 백리향은 자신의 손아귀에 심한 진동이 일어난다 쉽더니 어느 사이에 검이 저 멀리 퉁겨 날아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앗!" 동빈은 저 멀리 날아가는 백리향의 검을 바라보며 통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하하! 기특한 것. 어느 사이에 조화경을 이루어 비검(飛劍)을 체득한 모양 이구나! " 백리향은 다분히 조롱 섞인 사부의 말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동빈에게 물었다. "진정으로 공력을 일으키지 않으셨습니까?" "왜?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느냐?" "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백리향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조아렸다. 스승의 말을 의심한다는 것은 커다란 불경이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사부님. 감히 여쭈어 보겠습니다. 제 검이... 그러니까...비검이 된 까닭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동빈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아니! 그 것을 나한테묻다니... 네가 정녕 조화경을 이룬 것이 아니었더냐?" 동빈의 의도적인 놀림에 백리향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제자가 어찌 그런 경지를 논하겠습니까? " "하하하! 내가 금방 사용한 검법을 가리켜 여의심검(如意心劍)이라고 한다. 찰 나의 순간에 너의 검을 백 여덟 번을 두드렸던 것이야." "아!" 백리향은 그제야 자신의 검이 훌훌 날아간 까닭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궁금증 을 만족 시켜주지는 못했다. "어찌하면, 공력을 사용하지 않고 찰나의 순간에 백 여덟 번을 두드리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동빈은 얼굴에 미소를 베어 물며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향아야, 너의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말고 단계적 으로 배워봄이 어떠하냐?" 백리향은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았다. "제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록, 목검에 불과 했지만, 평생 처음 잡아보는 검이라 두려움이 치솟았다. 자 신이 살던 백가촌도 검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던가? 검법을 수련하자면 먼저 자신 속에 잠재되어있는 그러한 악몽부터 없애야 했다. 정천(頂天)이란 삼십삼천(三十三天) 가운데 무색계(無色界)에 있는 하늘 가운 데 가장 꼭대기에 있는 하늘 곧 비상비비상처천(非常非非常處天)을 가리킨다. 도가의 단학에서는 상단전을 가리키기도 한다. 백리향은 동빈으로부터 기본자세와 기본초식을 배워 나갔다. 그리고 틈틈이 무가에 관한 서적을 잃으며 부족한 이론을 탐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곳 순양별부에는 곳곳에서 무가에 관한 서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일반 십팔반무기(十八般武器)에 관련된 서적 뿐 만 아니라, 보법, 장법, 지법등 그 종류가 너무 다양하고, 모든 무공이 일가를 이룰 만큼 심오해 아직은 쉽게 접 근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수준 높은 무가의 서적을 잃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잘 못된 편견을 가 지고 있었는지 깨 닳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도가 아닌 것이 없고, 도 를 벗어난 것도 없다' 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동안, 백리향은 청정함과 수신에 의해 도를 이루려고 했다면, 무는 좀더 적 극적이고 기를 발산함으로서 도를 이루려는 방법이었다. 이렇게 정적인 수련 과 동적인 수련을 병행하다보니 마음과 몸이 하나가 되는 경지를 이룰 수 있 는 토대가 되었다. 그 다음 익힌 검법은 태극양의검(太極兩儀劍)이었다. 동(動)과 정(靜)을 잘 배 합한 검법이라는 평을 스승에게서 들었지만, 역시 백리향이 원하는 수준의 것 은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찰나의 순간에 백 여덟 번의 칼질을 할 수 있는가?' 이다.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허사였다. 문제 의 핵심은 빠름(快)에 있다고 생각한 백리향은 모든 검법서(劍法書)를 탐독하 기 시작했다. 가장 기초적인 발검(發劍)에서부터 회검(回劍)에 까지, 연구를 거 듭하였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했다. 동빈은 자신의 어린 제자가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지 잘 알고있었다. 하지만,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설사 십 년이 걸리든 백년이 걸리든 스스로 자각하 고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하루에 한 번씩 비무(比武)를 가져 백리향의 실전경험과 깨달음을 얻도록 도와주기로 했 다. 세월은 무상하여 다시 오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백리향의 검은 상당 히 날카로워져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그 동안 얼마나 검법에 심취되어 있는지 잘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빈의 그 무적검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제 이장 심검비혜동천하(心劍飛兮動天下)-3 심검(心劍)이 하늘을 나니 천하가 진동하도다.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인내하면서 살아온 인생. 모질고 독한 그런 인생을 살아 오면서 백리향은 한 번도 포기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머리 를 짓누르는 화두 앞에서 백리향은 사부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사부님. 도저히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 여쭈어 보겠습니다." 동빈은 좌정을 한 채 실눈을 뜨며 말했다. "그래.... 무엇이 알고싶은 것이냐?" "어떻게 하면 찰나의 시간에 백 여덟 번의 칼질을 할 수 있습니까?" 동빈이 오년 전에 내린 화두였다. 자신의 제자가 얼마나 이 화두에 매달려 왔 는지 동빈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스스로 풀어야 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초식에 얽매여서는 상승검도에 도달하지 못 할 뿐 아니라 스스로 옭 아매는 족쇄가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천지(天知), 지지(地知), 자지(子知), 아지(我知)니라" 동빈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리고 백리향은 더욱 알 수 없는 미몽에 휩싸인 채 돌아와야 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네가 알고, 내가 안다 라니....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세속에서 공공연한 비밀을 말할 때 사용하던가, 누구 나가 다 아는 일 반적인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의 질문에 해답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누구 나가 알고 있는 사실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 가? 아니면 평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나를 질책하시는 것은 아닐까? 아~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백리향은 깊은 한숨을 내리 쉬었다. 자신이 여태껏 수련해왔던 방법론에 회 의가 들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잘못된 시작일는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맨 처음 문제의 해답을 극쾌(極快)로 보았다. 하지만 그 것이 해답이 되지 못했다.쾌속하게 검을 빼어든들 어찌 섬광보다 빠를 수 있으 며 시간보다 빠를 수 있단 말인가? 다음으로 연구한 것이 선천지기와 심법이었다. 선천지기와 심법이 잘 배합이 되면 무엇인가 이루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러 무학서(武學書) 를 뒤적이며 연구의 연구를 해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얻어진 것은 하나 도 없었다. 아무리 막강한 공력을 일으켜 자신의 팔에 주입시켜 본 들 시간 의벽을 허물고 찰나의 순간에 백 여덟 번의 검을 휘두른다는 것은 역부족이 었다. 여태껏 자신이 수련해왔던 무서(武書)들을 돌이켜 봤다. 무황경(武黃經), 호천 복마검결(昊天復魔劍缺), 선검증론(仙劍證論), 검경해(劍經解)등 모든 무학들 이 파괴력이 엄청날 뿐만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찾고자 하는 해답을 주지는 못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되어진 걸까? 나에게 어떠한 편견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물고기가 물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듯, 너무 평범하여 그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 는 것은 아닐까? 내가 알고 사부가 아는 일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순간 백리향의 뇌리로 번개가 일듯 어떠한 영감이 떠올랐다. 자신의 정수리를 파고드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깨달음! 백리향은 곧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말았 다. 천지가 알고 땅이 알고 사부님이 알고 내가 알듯이 자신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때로는 바람이 되어 또는 푸른 바다가 되어 우주 가 되어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과 검이 하나가 된다면 찰나의 순 간에 백 팔번이 아니라 천 팔백 번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검과 하나가 될 수 있지? 어떻게 물질과 정신이 하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 깨달음의 기쁨도 잠시, 어느 사이에 또 다른 화두가 백리향의 마음을 짓눌러 버렸다. 각(覺)이란,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이제까지 알지 못하던 것을 환히 알 게 됐다는 의미이다. 이 각을 깨우치는 방법으로 돈법(頓法)이라는 것이 있는데 얕음에서 깊음으로 의 차례를 밟아서 수행하여 나아가지 아니하고 한꺼번에 갑자기 진리를 깨닫 고 공부를 이루어버리는 방법이다. 그와 반대로 점법(漸法)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이 수행을 통하여 마치 초목이 점차 자라듯이 시간과 과정을 거쳐 도를 이루는 방법이다. 백리향은 돈법보다 점법에 의한 수련을 해왔기에 약간의 각을 이루어도 깊은 곳까지 이끌어 내지 못 하고 있었다. '불가에서 말하길 '이 묘한 법을 찾지 아니하고는 끝내 깨달음의 지혜를 이루 지 못한다' 라고 하였는데 네가 그러한 꼴이로구나. 아~ 어떡하면 물여일체(物 如一體)의 모든 법을 깨달을 수 있단 말인가?, 안다는 것과 깨닫는다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또한 깨달음에도 얕고 낮 은 것에서부터 깊고 높은 것까지 수 없이 많은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신 기루(蜃氣樓)와 같아서 손에 잡힐 듯 하면서 잡히지 않는 참으로 고약한 것이 다. 백리향은 짙은 고뇌와 번뇌를 벗어나기 위해 하나의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는 결심을 굳힌 후 사부에게로 갔다. 동빈은 고요한 가운데 정좌 한 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치 성스러운 부처 를 연상케 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스승은 신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날지 모른 다고 생각했다. 어렴풋이 나마 그러한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그러한 날 이 온다면 자신의 가슴은 매우 아플 것이다. "향아, 왔느냐?" "네. 사부님." 어느 사이에 사부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부의 눈은 그 전보다 더욱 맑아져 있었고, 은근한 미소가 어려 있었는데 여간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었 다. 세월이 지날수록 동빈에게서는 성스러운 기운이 짙어져 어쩔 때는 감히 쳐 다보기도 힘들었다. "오늘은 내가 우주가 되어 여러 이십팔숙을 굽어보았느니라. 참으로 묘하고 묘한 가운데 우주와 함께 운행하다보니..... 태양이 뜨는 것이 보이더구나. 그러 자 나는 태양이 되어 몸을 불사르고 있었단다. 그때 저 멀리 달이 다가오더구 나. 이 번에는 달이 되었단다. 온 우주에 오로지 나 혼자 있는 듯하고... 지금 에 이르러서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구나. 향아야 가르쳐 다오. 내가 누 구인지......" 백리향은 온 몸에 전율이 일며 두 눈에서는 눈물이 고여 들었다. 지금 사부님 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경지는 속된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었다. "제, 제자로서도...알 수가 없습니다." 백리향은 사부의 모습이 성스러워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눈 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향아의 모습에서 빛을 발하는 것을 보니 작은 깨달음이라도 있었나 보구나." "사부님의 도움으로 약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미몽 에 휩싸이고 어지러워 견딜 수 가 없습니다." "어찌 하면 좋겠느냐?" "제 스스로의 마음을 여윌 때까지 면벽수련(面壁修鍊)을 할 까합니다." 동빈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느꼈다. 백리향은 이제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 스로의 길을 갈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도 스스 로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다. 면벽수련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든 것인지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제자 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만큼 제자의 심정은 절박했고, 이 것 외에 다른 방 법을 찾지 못하였을 것이다. 자식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이러할까? 동빈은 마 음이 아려옴을 느꼈다. "허락.... 하겠다." 백리향은 사부에게 큰절을 올린 다음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빛 한 점 들어오 지 않는 깊숙한 동굴을 찾아 떠났다. 제 이장 심검비혜동천하(心劍飛兮動天下)-4 심검(心劍)이 하늘을 나니 천하가 진동하도다. 태초(太初)와 같은 텅 빔(太虛)이 아름답고 종용하여, 어떠한 조짐도 녹아 들어가 버리고, 성과 명으로 들어가는 곳에서 의식을 잊어버린다. 의식을 잊은 뒤에야 본래의 참된 진리가 나타나는 것이니, 물이 맑으면 구슬이 보이되 깊이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太虛穆穆朕兆捐) (性命關頭忘意識) (意識忘後見本眞) (水淸珠現玄難測) 어둡고 컴컴하기 만한 동굴, 어느덧 나를 잊고 가만히 있노라면, 똑, 똑, 똑, 떨 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한없이 크게 들려온다. 그러다 보면, 언제부터인가, 한 방울의 물이 떨어지는 속도가 느리게 느껴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 삼매경(三昧境)을 이루고 난 뒤, 정신을 차리면, 그 것이 일수유(一須臾=아주 짧은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임을 알게 된다. 잠깐 동안 꾸는 꿈일지라도, 그 속에서 우리는 몇 날 몇 칠을 보낼 수 있으며, 평생을 그 곳에서 지낼 수 있지만, 깨어보면 단 몇 수유사이에 꾼 꿈에 불과하 다는 것을 알게 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고, 일각의 시간이 몇 천년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이 서있는 이 공간도 본래는 텅 비고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알게된다. 공간을 쪼개고 쪼개어 보라. 무엇이 보이는가? 눈에 보이는 나무와, 숲과, 강과, 산들이 과연 진실일까.? 혹시, 자신이 만지고 느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물들이 기나긴 꿈의 소품들이 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진실은 또 다른 세상에서 우리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고는 생 각지 않는가? 오로지 혼돈과 암흑뿐인 공간! 하나의 찬란한 빛을 뿌리며 황금의 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검은 중천에 이르러 빙글빙글 돌더니 천천히 백리향의 심상으로 들어 왔다. 그 순간 정수리가 활짝 열리는가 쉽더니 짜릿짜릿한 전류가 온 전신을 타고 내려 왔다. 온 몸이 황홀하여 지고 가뿐하여 하늘도 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그러자 실제로 자신의 몸이 붕 떠올랐다. 그 황홀하고 벅찬 기분을 어찌 말로 형용할 수 있겠는가? 백리향의 몸은 점점 높이 떠올라 멀어져 가는 자신의 육체가 보였다. 그리고 순양별부의 모습과 사부의 모습도 보였는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백 리향의 영혼과 자신의 육체는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신비스러운 줄로 연결되 어 있었는데, 배꼽에서 뻗어 나와 한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백리향은 그 것이 신령스러운 탯줄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것이 끊어진다면 자신의 생명이 끊 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신의 육체는 신비스럽고 오색찬란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는데, 사부의 몸에 서 뿜어져 나오는 성스럽고 하얀 광채와는 비교가 안되었다. 그는 두 팔을 벌리고 하늘위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저 멀리 산과 강이 보이 고 바로 밑으로는 새들이 활기차게 비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산을 건너 고 강을 건너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 나타났다. 가끔 광채가 나는 사람도 보 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의 모습은 어둡고 침침하게 보였다. 시기와 질투, 거짓말과 폭력이 난무하고 욕심과 욕설이 백리향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듯했다. 계속 가다보니 조그맣고 허름한 집에서 한 무리의 빛이 가 득 둘러 싸여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여인이 엄청난 산고를 겪으며 하 나의 생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여인의 몸에서 아름다운 빛이 흐르고 있었으며 갓 세상에 태어난 아이의 몸에 서도 순수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백리향이 그 아이의 미래를 축복하자 집안 가득히 아름다운 빛으로 둘러싸이 게 되었다. 그 때 자신의 심혼(心魂) 속으로 무언가가 자신을 이끄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 다. 그것은 곧 사부의 소리였다. 어느덧 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제자가 하나의 검이 되어 하늘을 날아오르 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자는 드디어 심검(心劍)을 터득한 것이다. 동빈은 때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은 천명을 받들어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그 곳은 자신이 원래 있었던 자리였고, 앞으로 영원히 있어야할 자리 인 것이다. 백리향이 눈을 뜨자밝은 동굴 내부를 볼 수가 있었다. 더 이상 어두움이 자 신을 방해하지 못 할 것임을 그는 알 수 있었다. 문득 사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직감적으로 사부가 떠날 때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심전심이랄까? 사부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백리향은 일 어섰다. 사부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구 년만에 보는 사부는 더욱 신령스러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리향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부는 자신을 거두기 위해 20년이란 세월을 희생하였다. 그 동안 마음 고생도 크셨으리라... "이제 때가 된 것 같구나." "사, 사부님..." 백리향의 목소리가 어느덧 격앙되어 있었다. 동빈은 진심으로 자신의 제자가 자랑스러웠다. 비록 기재나 천재는 아니었지 만, 오로지 순수한 열정만으로 오늘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백리향은 구 년 전 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미 시간의 벽을 허물고 있다는 의미인 것 이다.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느니라. 비록 시작은 유쾌하지 못하였지만, 이 사부는 향아와의 인연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러자 백리향의 뇌리에 사부와의 첫 인연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이 주마 등처럼 지나갔다. 사부는 자신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주었다. 한 미천하고 흉측한 몰골의 거지소년에게 생명이상의 것을 주었던 것이다. "크게는 창천의 하늘과 산하에, 작게는 한 그루의 나무와 한 덩어리의 돌멩이 에도 나의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을지니 항상 향아의 주위에 내가 있음을 잊지 말도록 하여라." "사부님......." "내가 떠나면.... 앞으로 무엇을 할 생각이냐?" 백리향의 입가로 얇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농사나 지을까 합니다." "하하하! 정말 멋진 일이로구나." 동빈은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구 년만의 웃음이었고 그 동안의 근심을 한꺼 번에 털어 버리는 그런 웃음이었다. 자신의 제자는 스스로를 잊었고, 도(道)또 한 잊어버렸다. 어느덧 제자는 자연을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동빈은 자신의 무릎에 얹혀져 있던 검을 백리향에게 전하여 주었다. "이 검은 내가 수 백년동안 지니던 것이다. 이미 심검을 얻어 이 자전검(紫電 劍)을 사용할 일은 없을 테지만,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오욕칠정과 모든 사악 한 것들을 단 번에 끊어버리거라." 백리향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앗! 소자는 받을 수 없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 사부님의 은혜가 하해와 같사 온데 어찌 이런 진귀한 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허허! 이 검은 나에게 더 이상 필요가 없느니라. 이 검을 받아 의로운 일에 사 용한다면 그 만큼 나에게 효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까지 농사만 지으 며 살수는 없을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산 속에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란 다. '깨달은 자는 장터로 나간다.' 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이유인 것이다. 세상에 나가면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진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네가 세상 에 몸을 나투게 될 때 이 검의 진정한 위력이 뿜어 질 것임을 확신하느니." 백리향은 동빈이 진심으로 이 검을 물려받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이 스승과 제자는 말이 필요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그 뜻을 전할 수 있었 고, 마음만으로도 충분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럼 명을 받들도록 하겠습니다." 백리향은 두 손으로 자전검을 받들었다. 이 검은 사부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 다.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는가? "....." "....." 스승과 제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짧은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서로의 신뢰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럼 나가보도록 해라." 드디어 동빈의 입에서 축객령이 떨어졌다. 백리향은 찢어지는 아픔을 애써 참 으며, 동빈에게 구 배를 올렸다. 마치 투명한 유리구슬을 보는 듯, 동빈의 몸이 점차 투명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동빈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었는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였고, 성스러웠다. 그리고 이제는 충분하니 그만 가보라고 말하는 듯 했 다. 백리향은 다시 한번 스승의 마지막 모습을 본 후 쓰라린 가슴을 않고 총총히 자리를 떴다. 바깥의 풍경은 주인이 떠남을 아는지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얼마나 흘렀을까? 크르르릉! 하는 굉음과 함께 천지가 진동하듯 순양별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빛이 뻗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주위의 버드나무 가지가 휘어지는 듯 수그러들었다. 그 빛이 얼마나 강렬한지 백리향 스스로도 한 동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는 얼른 엎드려 스승의 가는 길을 축원하여 주었다. 얼마나 지났을까?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빛은 모두 삭으러 들고 원래의 모습 으로 돌아왔다. 백리향이 동빈의 연공실로 다시 들어가 보니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여러 기물들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다. 탁자와 의자들은 깨어지고 부서진 채 나뒹 굴고 있었고, 주단(朱丹)은 이리저리 찢어져 이곳, 저곳 널려 있었다. 하지만, 동빈의 자취는 어느 곳에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사부님은 육체마저 짊어지고 가셨구나." 동빈은 육체마저 자연과 하나가 된 것이다. 백리향은 다시 한 번 사부의 도력 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단하게 사부의 연공실을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온 천지만물에서 사부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 날밤 백리향은 꿈속에서 사부를 볼 수 있었다. 사부는 하얀 학창의(鶴　衣) 를 입고 있었으며, 여러 제신 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여러 동자, 동녀들이 꽃 을 뿌리면, 사부는 그 곳을 밟아 나갔다. 사부는 자신을 보며 웃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껄껄껄 하고 웃는 듯 했다. 사부는 한 참이나 자신을 보며 웃 더니, 하늘로 올라갔다. 모든 제신 들은 사부에게 허리를 숙여 깊은 공경심을 표현했다. 멀리서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사부는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향아는 천천히 오려무나...하하하!" 제 삼장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1 인간세상이 아닌 곳에 별유천지가 있노라. 둥! 둥! 둥! 원시림으로 둘러싸여진 대소천태산(大小天台山) 기슭에서 이 십여 명의 몰이 꾼들이 북을 두드리며 전진하고 있었다. 그 들의 목적지는 동일했으며 목적 또 한 같았다. 바로 산짐승들을 한 가운데의 무대로 몰아 많은 귀인(貴人)들이 지 켜보는 가운데 오락의 일환으로서 학살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다. 인간들의 잔인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오락은 은(隱)나라 때 이미 매 사 냥을 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오래되었고, 일부 왕족들이나 부유층들의 오락 수단이었다. 육합문주(六合門主) 장양(張楊)또한 오락을 즐겨하는 사람으로 오순 생일을 기리기 위해 여러 육합문도들과 친우들을 불러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장양은 원래 봉화주(奉化州)사람으로 양(楊)은 그의 호이고 이름이 주(週)였 다. 무림에서는 그를 가리켜 일검차천(一劍遮天)이라 불렀는데 일 검으로 능 히 하늘을 막는다고 해서 생긴 외호(外號)였다. 성격이 호방하고 궁도에도 능 하여 사냥을 즐겨하였으며, 짐승들의 생피를 즐겨 마셨다. 특히, 매를 좋아하여 고려에까지 사람을 보내어 해동청(海東靑)을 구하여 오기 도 했는데, 해동청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따로 관리를 하는 해동각을 두기 도 했다. 육합문은 절강성(浙江省), 최고의 무가(武家)로 천태현(天台縣)에 본거지를 두 고 있었다. 자신의 문도 중에서 무장원(武壯元)이 두 명이나 나왔으며 모두 고 위관직에 발탁되어 육합문의 위세는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였다. 거 기다 여러 가지 사업에도 손을 대어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꽃들이 만발한 넓은 들판에 수 십 명의 남녀노소가 천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있었고 뒤로는 여러 깃발이 나부끼는 천막이 둘러져 있었다. 그 중 가 장 크고 화려한 천막 위에 세워져있는 깃발에는 육합진천하(六合進天下)라는 글귀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아아! 벌써 해가 지려 하는데 어찌 쥐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가?" 반백의 수염을 가슴까지 드리우고 녹색비단으로 몸을 두른 호안(虎眼)의 노인 이 몹시 짜증스러운 듯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평상시라면 벌써 서너 마리의 짐승들을 잡아도 너끈히 잡았을 시간대였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 마 리의 짐승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이 십대 후반의 매우 훤칠한 용모의 건장한 청년이 말을 했다. "사부님! 제자가 잠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아마도 몰이꾼들이 개으름을 피우 나 봅니다" 용안의 노인은 짜증이 나서인지 냉담한 어투로 청년에게 말했다. "아서라. 그럴 필요까지 없다." 반백의 노인이 바로 육합문주 장양이었으며, 이 십대 중반의 남자는 그 의 제 자인 정명검(精明劍) 주화룡(周華龍)이였다. 장양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육합오호검(六合五虎劍)라고 불 리고 있었다. 첫 째가 정명검 주화룡 이였고, 둘 째 제자가 추호검(趨虎劍) 강 백지(姜白志), 세 째 제자가 철사검(鐵獅劍) 백우산(伯雨山) 넷째 제자는 미모 의 여인으로서 옥수낭랑(玉手朗朗) 전원월(全元月) 마지막 제자는 장양의 아 들인 소소검(小素劍) 장지충(長至忠)이었다. "앗! 아빠! 저기 좀 봐요. 노루 에요. 노루!" 장양은 자신의 막내딸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역시 그 곳에는 노루 한 마리가 숲을 헤치고 튀어 나와 있었다. 노루는 더 이상 숲이 이어지지 않 고 넓은 들판이 나타나자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활을 다오." 그러자 강백지는 자신의 품에 짊어지고 있던 활을 장양에게 건네어 주었다. 활 은 전체가 묵빛을 띠고있어 꽤 무거워 보였고 양끝은 상아로 마무리 되어있 어 상당히 고급스러워 보였다. 장양은 천천히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활을 잡는 그 순간부터 이미 그의 마음은 명경지수처럼 맑아 있었다. 활은 정확히 조준되었고 그 가 활시위를 놓 을 때, 이미 자신의 활이 노루의 가슴에 박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피~웅! 활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노루의 가슴으로 곧장 날아갔다. 하지만 아슬 아슬하게 화살은 노루의 등을 지나 반대편 나무에 꽂히고 말았다. 노루는 화들 짝 놀라며 숲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다. 주위에서 안타까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검차천(一劍遮天) 장양에게는 또 다른 외호(外號)가 있었는데, 그 것은 바로 낙백신궁(落魄神弓)이었다. "아~ 정말 아까워요. 아빠. 그 것이 살짝 빗나가다니...." 그러나 장양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아니다. 나의 화살은 정확했다." 장양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거의 직선으로 뻗어나가던 화살이 노루의 전면에 서 살짝 휘어 올라가는 모습을....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해 보았지만, 그 의 눈 은 정확했다. 그 증거로 나무에 박힌 화살의 끝이 약간 아래고 쳐져있었던 것 이다. 장양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는 본신지기를 극한으로 끌 어 모아 주위의 둘러보았다. 어떠한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고 인위적으 로 방사된 기의 흐름도 감지 할 수 없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백지는 사부의 얼굴색이 어둡게 변하자 깜짝 놀라며 안위 를 물었다. "사부님. 어디가 편찮으신 지요?" "으음~괜찮다. 걱정하지 말아라. 그 대신 나무에 꽂혀 있는 화살을 빼어 오너 라" "존명!(尊命=명을 받들겠습니다)" 그 때서야 안심을 한, 강백지는 말을 몰아 화살이 꽂힌 곳으로 다가갔다. '사부께서는 겨우 노루 한 마리를 놓친 것을 두고 너무 심기를 쓰시는 구나.,라 고 생각하며 간단히 넘겨 버리고 말았다. 화살은 나무에 깊숙이 박혀 있었는데 무려 일곱 치나 되었다. 강백지는 사부 의 완력에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무에 박힌 화살을 빼내어 사부에게 갖다주었다. 장양은 화살을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그리 이상한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내공이 강한 일류고수들 중에는 나뭇잎이나 솔잎, 혹은 작은 돌멩이를 암기로 사용하는 예는 많이 있었다. 하지만화살은 아무런 물리적인 영향을 받은 흔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순수한 진기로서 날아가는 화살의 방향을 바꿨다는 말 이 되는데, 당금 무림에 이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 다. '흐음!' 장양의 입에서 나지막한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다시 한 번 화살을 메겼다. 이 번에는 기존의 화살촉보다 가늘고 길었는데 화 살의 깃이 바람개비형태로 되어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슴 한 마리가오른쪽 숲을 헤 치며 나타났다. "오!" 주위에서 간단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기대에 찬 눈으로 장양의 화살 과 사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피를 원하고 있었다. 가녀린 사슴이 화살에 맞 아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번에는 자신들 의 기대를 장양이 져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장양은 자신의 모든 진원지기를 모아 화살을 당겼다. 곧이어 엄청난 회전을 일 으키며 굉음과 함께 화살이 날아갔다. 그러자 사람들에게서 놀라움과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 선풍뢰(旋風雷)다!" 선풍뢰는 장양이 말년에 깨달음을 얻어 창안한 무공인데 화살촉 모양이 나선 형으로 되어있어 회전하기가 용이 할 뿐 아니라 진원지기를 실어 발사하기 때 문에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무공이었다. 사람들은 일단 그 속도에 놀라워했고,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파공성에 한 번더 놀라야 했다. 아마 저 화살의 회전력 때문에 스치기만 해도 엄청난 구멍 이 뚫려 즉사 할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사람들의 그러한 기대를 져버리고 사슴과는 거리가 먼 쪽으로 흘러가 꽂히고 말았다. 화살을 맞은 나무는 펑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구멍 이 뚫려 쓰러졌고 사슴은 깜짝 놀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사람들은 우선 선풍뢰의 위력에 감탄을 터트렸지만 장양의 또 다른 실패에 안 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장양은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이 번에는 확실히 볼 수 있었다. 자신의 화살 이 심하게 굴절되던 모습을..... 망연해 있는 장양의 곁으로 오 순의 노인이 다가왔다. 한 손에는 고색 창연한 부채를 들고있었는데, 그 부채와 대조적으로 몰골은 꾀죄죄하기 그지없었다. 소선풍(小仙風) 양정(楊程)이란 노인으로 장양과는 막역지우 였다. "이보게. 장양.... 어찌된 건가? 화살이 심하게 휘던데, 혹시 일부러 그런 게 아 닌가?" "그럴 리가 있겠나? 아마도 누군가의 장난 같네." 그제야 양정의 얼굴색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장양의 말이 사실이라면 상대는 엄청난 고수일 것이다. 간단한 장난이라면 좋겠지만, 만약 악의에 찬 행동이라 면 무서운 적수와 피를 보는 혈전으로 번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아야. 이리 오너라." 강백지는 사부의 부름에 일절 주저함이 없었다. "사부님. 부르셨습니까?" "음. 이 번엔 너 가 활시위를 당겨 보아라." 장양의 다섯 제자 중에 그나마 활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은 둘 째 제자인 강백 지뿐이었다. 강백지는 내심 의아스러웠지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강백지는 자신의 등뒤에 매어져 있는 활을 풀고 화살을 매겼다. '만약 내가 조 그마한 토끼라도 맞힐 경우 사부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구나.'싶어 굳이 신경 을 쓰지 않았다. 양정은 장양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이 보게 장양. 내가 숲 근처에 있다가 놈을 추적하여 볼 테니 자네는 놈의 시 선을 차단하여 주게." 장양은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무공이라면 모를까 경공은 자신보다 양정 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하세 나. 그러나 몸조심 해야하네." 양정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공력을 극도로 끌어올린 다음 조금씩 숲을 향 해 다가섰다. 한 식경이 지났을까, 이 번에는 멧돼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멧돼지 는 덩치가 크고 그리 빠르지 않아 강백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맞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강백지는 활시위를 약간 높이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장양은 강 백지에게 전음을 보냈다. '백지야. 지금은 사사로이 예법을 찾을 때가 아니다. 그러니 정조준 하여 멧돼 지를 잡도록 하여라.' 강백지는 사부의 심상치 않은 전음에 사태가 엄중함을 깨닫고 다시 한 번 활 시위를 고쳐 잡았다. 화살은 활을 떠나 곧장 멧돼지를 향에 날아갔다. 하지만 화살은 또 다시 나무 를 맞혔고 멧돼지는 꾸엑, 꾸엑 소리를 지르며 숲속으로 도망쳤다. 양정은 오른쪽 숲속에서 어렴풋이 나마 기의 파장이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옳거니. 저 쪽이로구나." 그는 두발을 박차고 오른쪽 숲속으로 날아올랐다. 두 어 번 땅을 밟았을까, 그 의 신형은 순시간에 숲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의 제자 와 친우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들려왔다. "앗! 사부" "숙부님, 어디가세요!" 제 삼장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2 인간세상이 아닌 곳에 별유천지가 있노라. 대소천태산의 기슭은 원시림으로 뒤 덮여 있어 경공을 발휘하기가 쉽지 않았 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 있었고 온갖 엉겅퀴나 잡초들 때문에 보통 사람은 걷기조차 힘들었다. 양정은 숲을 헤치며 한 참 달려나가 보았으나, 이미 종적을 놓친 상태였다. 그 는 어렴풋이 나마 희끄무레한 인형이 북동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 고 그 물체를 쫓아 한 참이나 달려 왔던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그 인형을 뒤 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새삼스레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바닷가의 모래알만 큼이나 많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아! 정말 귀신같은 신법이로구나. 이런 울창한 숲을 유유히 빠져나가다니... 내 보니 악의가 있어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은데......." 그는 무림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여 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 동안 유명 한 은거기인(隱居畸人)이라는 사람들을 찾아 배움을 청하기도 하고 대화도 나 누어 보았다. 거의 대부분의 기인들은 허울만 좋을 뿐, 얇은 무공으로 백성들 을 현혹하여 자신의 실리만 챙기는 그런 족속들이었다. 그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저와 같은 기인을 만나 볼 수 있게된다면, 삼생의 영광이리라." 얼마나 걸었을까? 이 정도 걸었으면 이미 숲을 빠져 나왔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양정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자신은 더욱 깊숙한 산림 속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런. 길까지 잃어버리다니, 오늘 망신을 톡톡히 당하는 구나." 양정은 귀를 쫑긋 세우고 몰이꾼들의 북소리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들리는 것 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소리뿐. 양정은 할 수 없이 숲을 헤치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걸을 수 없어 가는 곳마다 가지를 꺾어 표 시를 해 두었다. 그래야 왔던 곳을 또 다시 헤매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고, 마음은 점점 조급해져 가고 있었다. 양정 은 무턱대고 걷는다는 것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는 가장 높은 나무 를 골라 경공을 펼쳐 꼭대기에 올라섰다. 안력을 최대한 높인 후, 주위를 살펴 보았다. 온통 나무와 숲들 뿐, 갈증을 달래줄 냇가도, 자신을 집으로 인도해줄 길도 보 이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왼쪽 숲 사이로 황토빛 흙이 보였다가 사라졌다. 아 마 나뭇잎에 가려졌던 흙이 바람 때문에 보인 것 같았다. 양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큼 달려갔다. 역시, 조그마한 길이 나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아주 작은 오솔길 이었다. 막상 길을 찾고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어느 쪽으로 가야한담? " 그의 선택이 항상 빨랐으며, 한 번도 선택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 이 선택한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걷기에 잘못되더라도 조금도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는 산등성이의 아래쪽 과 위쪽의 길 중 아래쪽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산등성이를 얼마 걷지 않아 조그마한 마을이 눈 아래 펼 쳐졌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은 너무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거리는 깨끗한 석판이 깔려져 있었고, 집집마다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으며, 단아하고, 신비스럽고,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없었다. 아니, 개 한 마리조차 보 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것일까?" 양정은 자신의 몸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이해가 불 가능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심령현상이나, 불가사의한 현상에 있어서사람들 은 호기심보다 두려움을 먼저 느끼는 것이다. "이 보시오. 아무도 없소?!" 공력을 돋구어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메아리만 들릴 뿐 아무런 대답도 들리 지 않았다. 마을길을 쭉 따라 가다보니 넓은 논밭이 나왔다. 바둑판 모양의 정 리가 상당히 잘되어 있는 논밭이었지만, 그 곳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허어~ 이런 괴이한 일이 있나!" 양정은 신경을 곤두세운 채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그 때였다. "댁은 누구 시요?" "헉!" 그는 깜짝 놀라며 뒤를 쳐다보았다. 이십 여세 정도의 젊은 청년이 곡괭이를 어깨에 매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아무리 긴장하고 있었다지만, 이렇게 지척에 이르도록 몰랐다니....' 양정은 은근히 진기를 끌어올리며, 청년을 다시 한번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선 촌부(村夫)답지 않게 새하얀 피부를 지니고 있었고, 걸쳐 입은 흰색장삼 은 너무나 깨끗했다. 눈꼬리가 약간 쳐져 있어 꽤 순진해 보이는 얼굴이기는 하였지만 별로 특징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냥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무공을 익힌 흔적은 없었다. 양정은 적 이 안심이 되었지만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놀라게 했다면 용서하십시오." 청년은 고개를 약간 숙여 보였다. 그러자 장양은 손을 내저으며 천만부당하다 는 듯이 말했다. "아, 아닐세. 자네 잘 못이 아니네. 그런데... 이 마을에는 사람들이 안 보이는 구만. 다들 어디 갔나?" "이 마을에는 오로지 저 혼자 있을 뿐입니다." 청년의 말에 장양은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뭐? 혼자라고? 어찌......" 양정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잘 조성되고 백 가구는 충분히 되어 봄직한 마을에 청년 혼자 살고 있다니....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 곳은 나 혼자 살고 있고, 나 이외에 아무도 살지 않는 답니다." 양정은 이 청년이 참으로 신비하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는 높지도 작지도 않은 은근한 목소리였는데, 마음이 푸근해 지는 것을 느꼈다. 행동 또한 비굴하지 도 거만하지도 않은 자연스러운 품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 미안하네. 의심한 것이 아니라...후후! 사실 믿어지지 않는 구면." 솔직히 양정은 조금 겸연쩍어짐을 느꼈다. 청년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이해합니다. 어르신." 양정은 갈증도 나고 어색하기도 하여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어험! 갈증이 나서 그런데 마실 물과 음식을 얻을 수 있을까? 내 충분히 사례 함세." "저의 집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따라 오시지요." 청년의 집은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아름다운 마을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 다. 앞마당의 커다란 느티나무주위로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었고 잔 뒤가 곱 게 깔려 있는 바닥에는 들꽃들이 풍성하게 자라 있어 보는 이의 눈을 즐겁게 했다. 집을 보면 그 주인의 성품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젊은이는 상당히 단아하고 고 아한 성품의 소유자일 것이라고 장양은 생각했다. "이 곳에 잠시 않아 계십시오. 곧 먹을 것을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초면에 폐를 끼치는 구먼." 청년은 잡방(雜房=창고)인 듯한 곳으로 들어가서 곡괭이를 내려놓고 집안으 로 들어갔다. 평민들은 보통 주방과 침실이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얼마 안 있어 마실 물과 먹을 것을 들고 와 탁자에 내려놓았다. 비록 채소와 보관된 과일이 전부일 망정 양정은 맛있게 먹었다. 양정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다. 집안의 몰락으로 하루아침에 거지신세 가 되어 동냥질도 해 보았으며, 만두를 훔쳐먹다 엄청 얻어맞은 적도 한 두 번 이 아니었다. 그러한 신세는 가전무공인 오류선풍장(五流仙風掌)을 어느 정도 익힐 때까지 계속되었다. 탐욕스러운 무림인들의 눈을 피해 익히다보니 나이 이십이 넘어서야 무림에 뛰어 들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러한 어린 시절의 불행 을 잊지 않고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꺼억! 정말 잘 먹었네." "잘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청년은 그릇을 깨끗이 치우고 차를 들고 와 손님에게 대접했다. "음~ 화차(花茶)로군. 재료는 무엇인가?" "국화입니다" "오! 그런데 향기가 약하군." "사람들은 향기를 강하게 하기 위해 용뇌(龍腦)와 고(苦)를 첨가하여 마신다 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차란 그 자체의 향기가 참다운 맛이 아닐까하 는 생각에.....맛이 덜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양정은 나직이 감탄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옳아! 정말 옳은 말일세." 양정은 이 고상하고 예의바른 청년의 정체가 궁금했다. 틀림없이 농부는 아닐 것이다. 차라리 유학자나 도사라면 믿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내 자네를 보니 농부는 아닌 듯한데, 어쩌다가 이 곳에서 혼자 살고 있는 것 인가?" 청년은 양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도 전혀 동요함이 없었다. 그러한 질문을 들을 줄 알았다는 듯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소생은 원래.... 거지였습니다. 이곳 저곳을 떠돌며 동냥질을 하곤 했지요. 그 러다가 저의 은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글을 가르쳐 주시고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농사나 지으며 살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곳으로 와서 농사를 짓고 있답니다." 양정은 이 젊은 청년에게 그러한 사정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동병상련이랄까?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과 청년의 삶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 했다. "이 마을은 어떤 곳인가? 나도 오랫동안 유랑을 많이 한 사람이네만, 이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을은 본 적이 없네. 마치 이 세상의 풍경이 아닌 것 같 아." 문득, 청년의 얼굴에 아련한 슬픔이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에는 이 마을을 백가촌이라고 불렀지요." 양정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뭣! 이 곳이 그 백가촌이란 말인가? 그 옛날 백팔수라귀(百八修羅鬼)들한테 몰살을 당했다는 그 마을이 이 곳이란 말인가?" 그 엄청난 사건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당시 이 곳은 시체가 산을 이루 었고,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고 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앗아간 저주의 장소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 곳을 귀곡촌(鬼哭村)이라고 불렀다. 억울한 원혼들이 떠도는 그 런 마을이라고 했다. 자연히 사람들의 발길도 끊어지고 길도 없어져 유령 마을 이 되었다. 사람들의 뇌리에도 언젠가부터 사라지고 전설이 되어 버린 그런 마 을이었다. "지금..... 백팔수라귀라고 하셨습니까?" 청년의 얼굴에 약간이나마 동요가 일어났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 정을 되찾는 것이었다. 양정도 청년의 그러한 태도에 뭔가 사연이 있을 것이 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그들을 만난 사람은 모두 죽었기 때 문이지... 그 들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와 한 마을을, 또는 무림의 방 파들을 또는 관청들을 몰살시키고 사라진다네. 그들이 거쳐간 곳은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살아남지 못한다고 들었네. 그야말로 악귀들이라고 할 수 있지.... 십 년 전에도 이러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네.......태호(太湖) 서안(西岸)에 자 리잡은 조그만 촌락이었지.....헌데 그 중에 생존자가 있었네. 그의 말에 따르 면 쇠 갑옷을 걸친 말들이 악귀들을 태우고 홀연히 나타나 사람들을 죽였다 고 하더군.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모르고 고혼이 되어버린다는 것일세. 당 시 그는 반미치광이 상태였기에 사실여부는 가릴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 은 그 악귀들은 백 여명 남짓하다는 것일세. 그래서 사람들은 백팔수라귀라고 칭하게 된 거라네." 양정은 일부러 말을 흐리며, 청년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 리 청년의 안색은 평온하기만 했다. 약간 실망하며 양정은 말했다. "이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일세. 그런데 자네는 어쩌다가 이 곳으로 오게 되었 나?" 청년은 자신의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 마을에는 약간의 인연이 있어.... 찾아와 보았지만, 벌써 폐허가 되어 있더 군요. 그래서 이 곳에 거주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사당을 짓고 억울한 혼령들 을 위해 위령제(慰靈祭)를 지냈습니다. 그리고 곡식과 채소를 지어 생산되는 모든 곡식으로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답니다. 틈틈이 구천에 이르지 못하고 떠도는 혼령들을 위해 집들을 수리하고 꽃을 심어 한 곳에 머물도록 한 것입 니다. 이곳에 거주한지도 벌써 삼년이 흘렀군요." 청년의 한마디 한마디가 놀랍기 그지없었다. 사람은 살지 않고 귀신들만 산다 는 귀곡촌에 홀로 사는 담력도 담력이려니와 억울한 영혼에 대한 마음 씀씀이 가 놀라울 정도였다. 이 곳 백가촌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각조차 하기 싫은 곳이었다. 사람들은 이 곳 주민들을 불쌍히 여기기 보다 자신의 마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 은 것에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리고 철저히 외면하기 시작했으며 그 누구 도 이 곳에 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만약 혼령이라는 것이 진짜로 있다면, 자신들을 죽인 원흉보다 무관심한 사람들에 의해 더 상처를 입 었을 것이라고 양정은 생각했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 자네는 이 곳에 계속 머무를 생각인가?"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떠나야 하겠지요." 양정은 청년에게서 상당한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릴 적 비슷한 고생을 했다 는 동병상련의 감정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신뢰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 다. 만난 지는 얼마 안되었지만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처럼 편안한 기 분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들을 빨아 당기는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나를 따라가지 않겠나? 좋은 곳을 내가 소개하지." "어디를 말입니까?" 양정은 그제야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자신의 이마를 치며 말했다. "어이쿠! 내 정신 좀 보게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구먼. 본인의 형양(滎陽)사 람으로 성은 양(楊)이고 이름은 곡정(曲釘), 자는 정(程)이라 하네. 사람들은 흔히 소선풍(小仙風) 양정(楊程)이라고 부르고는 하지." 청년은 일어나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 원래 양대협이시군요. 소생은 백리향이라고 합니다." 제 삼장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3 인간세상이 아닌곳에 별유천지가 있노라. 백리향이라는 청년이 예의를 차려 말하기는 하였지만,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 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양정은 씁쓰레한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여기서 멀지 않은 장소에 내 친구가 몸담고 있는 육합문이라는 곳이 있네. 거 기서 그의 일을 도와 주면 섭섭지 않게 대접할 걸세." "소생의 능력이 워낙 미천하여 각하의 번거로움만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백리향은 양정의 배려를 잘 알기에 최대한 예의를 차려 거절의 뜻을 표했다. 그러자 양정은 안타까운 듯이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세상의 풍진을 싫어하는 자네의 고아한 성품은 잘 알겠네만, 진주가 시궁창 에 있다고 그 빛이 발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네. 나중에라도 어차피 세상에 몸 을 드러낼 것이라면 지금인들 어떻단 말인가? 이 곳에서 귀신들과 어울리는 것 보다 훨씬 나을 것이야." 백리향은 어차피 세상에 나가야 한다. 세상과 동떨어진 도는 허무하고 공허할 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스승도 변화를 여윈 뒤부터는 항상 세상과 함께 해왔 었다. 또한 그에게는 풀어야할 업이 있었다. 그 업을 풀기 위해서라도 세상에 나가야 했다. "너무 과하신 말씀이십니다. 소생은 그렇게 거창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잘 생각해보고결정하도록 하겠습니 다." 백리향이 약간 유보의 뜻을 비추자 양정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만난 지 얼 마 안된 이 청년에게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만 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조차 갖추지 못한 덕을 이 청년이 가지고 있었 다. 양정은 그 것을 이 청년에게서 느꼈다. 이런 덕을 지닌 사람이 이런 산골 에 썩게 할 수 없었다. 세상에 나가 큰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덕(德)이란 용서와 아량이라는 뜻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덕이 란 있는 듯 없는 듯 하나 확실히 보이며, 모자란 듯 보이나 콱 차있고, 허한 듯 보이나 실한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덕장(德將)은 스스로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나 보이고. 명령하지 않아도 군대가 저절로 움직인다. 어수룩하게 보이나 만인이 사랑하고 그를 위해 목숨을 받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자네가 결정할 때까지 이 곳에서 묵어야겠네. 설마 쫓아내지 는 않겠지?" 양정은 실눈을 뜨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생이 어찌...... 다만 누추하여 송구스러울 따름이지요." "그럼 됐네. 달빛도 청정한데, 이야기나 더 나누어 봄세."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대화는 밤이 새도록 계속 되었다. 양정은 청년의 박학다식함에 여러 번 놀라야 했다. 그는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유능한 인재를 세 상에 선보여야 갰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인 장양에게도 커다란 도 움이 될 것이다. 현재 육합문은 이름만 절강성의 제일 방파이지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이류 문 파로 통하고 있었다. 그것은 무장원을 배출하기 위해 현실적인 무공만 가르치 다보니 깊이를 잃어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육합문 안에 진정한 고수는 장양 한 사람뿐이었다. 그의 제자들은 또래의 무림인들한테는 통할지 모르지만 역사 를 갖추고 있는 화산파라든지 소림사(少林寺)라든지 하는 구파일방의 제자들 에 비하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 젊은가 그를 도와준다면 이러한 현실 을 탈피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의 국가를 보더라도 용맹한 무장은 국경을 튼튼히하고, 학식있는 선비는 내실을 튼튼히 하는 것이다. 양정은 이 청년이라면 상업성에 물든 육합문을 새 롭게 변화 시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양정은 오랜만에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항상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 로 바쁜 일정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다보면, 얻은 것만큼 잃어버린 것도 많은 법이다. 요즘 들어서 자신이 예전 같지 않음을 자주 느끼곤 했다. 검은 머리카 락보다 흰 머리카락이 더 많아진 지금에서야 자신의 삶이 성공적인 것만이 아 니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백가촌의 아침은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뽀얀 안개가 춤을 추듯 넘실거 리고 이슬을 머금은 꽃들은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양정은 꾸미지 않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만끽하고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렇게 상쾌한 기분 을 만끽한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양정이 온 몸을 뒤틀며 활짝 기지개를 켜고 있을때였다. "일어나셨군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니 백리향이 곡괭이를 들고 바로 앞에 서있는것이 아 닌가. '아니! 이 친구의 발걸음은 어찌 이리 가벼운가? 이토록 가까이 접근하도록 몰 랐다니...벌써 두 번째가 아닌가?' 그는 생각과 달리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양정은 아직까지 이 청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듯 마져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 할 수 있었다네. 자넨 밭에 나갈려는 모양이로군." "그렇습니다. 아직 개간해야 할 땅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땅을 개간해서 어쩌려고? 홀로 살기에는 조그마한 땅덩어리면 충분할 터." 청년의 얼굴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저를 위해서 개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인가 찾아올 이 땅의 새로운 주인들 을 위해서 개간하는 것입니다." 백리향의 말에 장양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허~ 자네라는 사람은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야." 양정은 평생을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귀어 보았지만, 백리향 같은 부 류의 인간은 처음이었다. 모든 사람이 행동할 수 있는 동기는 '나에게 어떠한 이익이 될까?'이다.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것도 평화가 가져다 주는 이익 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고, 멋진 말을 해서 호감을 사려는 것도 그 만큼 이익이 기 때문이다. 거지에게 연민의정을 느껴 적선하는 것도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이익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젊은 친구의 동기도 이익 때문일까? 누가 될 지 모르는 사람을 위해 밭을 일구면서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친구일까? 귀신들을 위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면서 커다란 만족감 을 느끼는 그런 친구일까? 양정은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짐을 느꼈다. "이보게. 자네는...." 양정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백리향은 이미 저 멀리밭을 향해 나 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이! 기다려! 같이 가자고!" 양정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양정은 나무 그늘아래 풀잎을 뽑아 질겅질겅 씹으며 백리향이 밭을 일구는 모 습을 보고 있었다. 평상시의 자신이라면 지금쯤 목구멍으로 죽엽청(竹葉淸)이 가득 넘어가고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곳은 백가촌이었다. 그런 아쉬움을 풀잎으로 대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논밭에 나가 일하기보다 시원한 나무그늘아래에서 한 숨 푹 자고 싶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다. 하지만 저 백리향이라는 젊은 친구는 한 번 도 쉬지 않고 두 시진이나 곡괭이 질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땀 한 방울 흘리 지 않고.... 원래 땀을 흘리지 않은 체질이던가, 내공을 수련하여 신체기능을 조절할 수 있 는 경지이던가 둘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저 친구는 내공을 닦은 흔적이 보이 지 않는다. 그렇다면 오기조원이나 삼화취정 같은 절정의 단계에 올라섰단 말 인가? 양정이 알고 있는 한 저 정도의 나이에 그러한 일이 생긴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면 알수록 신비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 문득, 백리향은 곡괭이 질을 멈추고 오른쪽 언덕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마치 득도한 고승 마냥 눈을 감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하기도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듯 하기도 했다. 양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백리향에게 큰 소리를 내었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건가?" 그러자, 백리향이 눈을 뜨며 양정을 바라보았다. "저 십리 밖에 있는 산등성이너머에 누군가가 위험을 겪고 있습니다. 한 명은 노인이고 한 명은 묘령의 여인인 것 같은데...무공이 강합니다. 하지만, 상대 의 무공은 더욱 강하군요." "말도 안 돼! 자네는 지금 십리 밖의 소리가 들린다는 건가?" 백리향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세상에서 십리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순간, 양정은 백리향의 기이한 행동에 어떠한 의미를 찾으려고 했던 자 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리고 심한 허탈감에 성이 나서 견딜 수 가없었다. 양정은 벌떡 일어났다. "자네...정말 미쳤구먼. 내가 자네를 잘못 보았어. 한 마리의 잠룡(潛龍=숨은 용)인줄 알았는데 미친 개새끼에 불과 하지 않은가!" 백리향은 한 숨을 터트리며 안타깝다는 듯이 양정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고 그 윽한 눈길을 받자 양정은 눈이 시려와 마주 볼 수 없어 그만 회피하고 말았다. "양대협. 고정관념을 버리고 마음을 한 곳에 묶어두면 나의 참 모습이 드러나 는데, 이 세상이 좁쌀보다 더 작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물며 십리가 아니 라 이 나라 밖의 소리인들 못 듣겠습니까? 마치..... 신령이 있어 내 귓가에 소 곤소곤 들려주는 듯하고,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 명확하게 들리기도 하는 데, '이 소리가 십리 밖에서 들리는구나?' 하고 저절로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무공의 높낮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세상 밖의 소리(우주가 운행하 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양정은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는 듯 했다. 그는 너무 놀라 속으로 '나무아미타 불관세음보살'하며 수없이 되뇌었다. 그는 확실히 미친 자가 아니라면 진리를 머금은 자일 것이다. 그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백리향이 가리키는 곳 으로 가보아야 했다. 제 삼장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4 인간세상이 아닌곳에 별유천지가 있노라. 얼마나 달렸을까? 양정은 나뭇가지에 자신의 의복이 찢어져 너덜거리는 것도 못 느꼈으며 여기저기에 긁혀 생채기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양정은 그 가 미친 자이기를 바랐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너무나도 큰 불경을 저지른 것 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을 보고도 반딧불이라고 여겼으며, 큰산을 보고도 무덤이라고 여겼 던 것이다. 자신 바로 앞에 기인이 있었음에도 몰랐던 우둔한 자였고, 자신의 인생 앞에 얼마나 많은 기인이 스쳐 지나갔을는지도 모르는 바보가 되는 것이 었다. 어느덧 산등성이를 두어 개 넘자 그 의 귓속으로 검끼리 부딪치는 파열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가슴은 쿵쾅 쿵쾅 뛰기 시작했다. 저 멀리 작은 구릉이 보이자 부운등천(浮雲登天)이라는 신법을 발휘해 뛰어 올랐다. 그러자 양정의 눈 아래로 널따란 공터가 펼쳐지며 십 여명의 흑의복면 인들이 육십을 훨씬 넘어 보이는 노인과 묘령의 여인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모 습이 보였다. 그 뒤로 세명의 비단옷을 걸친 복면인들이 멀찌감치 떨어져 구경 을 하고 있었는데 매우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양정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않고 말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을까? 이런 일 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정말로 이 세상은 좁쌀 보다 작은 것일까? 그는 도저 히 당면한 상황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넓고 넓은 세상을 좁쌀보다 작 다고 느끼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드넓은 세상에 비하면 모래알 보다 작은 백 가촌이란 곳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그때였다. 양정의 상념을 깨는 날카로운 여인의 단발 마가 들려왔다. "아악!" 묘령의 녹의 소녀가 팔을 감싸않으며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팔에는 어 느덧 붉은 피가 베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육순의 청의노부도 당황했는지 손 발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묘령의 여인은 입술을 악물며 소리치듯 말했다. "소녀는 괜찮아요. 노옹께서는 신경 쓰지 말고 적들을 상대하세요." 하지만, 괜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힘들게 적들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불과 몇 합을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양정은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두 발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공중에서 회전을 일으켜 머리를 밑으 로 하고 팔을 뻗어 녹의 소녀를 공격하려는 흑의복면인의 머리를 잡아 비틀었 다. 으드득하는 소리와 함께 흑의복면인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쓰러지고 말 았다. 이 돌연한 사태에 흑의복면인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기습공격의 묘미를 잘 아는 양정이 이러한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아직도 어리둥절해 하는 복 면인의 가슴에 재빨리 손바닥을 붙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복면인은 칠공 에서 피를 쏟아내며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엇! 발경(發勁)이다." 양정은 과장되게 웃으며 복면인들을 휩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흑의복면 인들은 더욱 당황하기 시작했다. "푸 하하핫! " 노옹(老翁)이라 불리는 노인도 산전수전 다 겪은 몸으로 어찌 이런 기회를 놓 칠 수 있겠는가? 순 식간에 두 명의 복면인들이 쓰러졌다. "누구 신지 모르겠소 만, 인사는 차후에 올리겠소." 양정은 노옹의 뒤편에 서서 그를 엄호하며 말했다. "사해가 동도요. 그런 말 마시구려." 다섯 명밖에 남지 않은 복면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죽어나가자 이미 전의 를 상실해 있었다 그 들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파파파팍!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구의 시체가 사지가 절 단된 채 날아올랐다. 바로 뒤에서 관전하고있던 청의복면인이 한 걸음 내딛으 며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 물러서면 나에게 죽는다!" 청의복면인은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두 팔을 펼치며 외쳤다. " 천존(天尊)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신다. 옴~ 아가로다라가라미사예나모사바 하!" 그들의 수장인 듯한 자가 외치자 나머지 네 명의 복면인들의 눈에는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들은 마치 합창하듯 외쳤다. "옴~ 아가로 다라가라 미사예 나모 사바하!" 네 명의 복면인들은 마치 딴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들의 눈에서는 살기가 치 솟기 시작했으며, 악귀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리어 당황하기 시작 한 쪽은 양정 쪽이었다.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자들을 상대하기 란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치 흉신악살처럼 공격해 왔는데 왼팔이 잘려나가면, 오른팔로 공격 했으며, 다리가 잘려나가면 기어서라도 공격해왔다. 양정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로서도 평생 이런 잔인한 싸움은 처음이었다. 양정은 될 수 있는 데로 그들의 목을 공격했다. 마지막 한 명의 복면인이 쓰러지자, 양정과 노옹 그리고 녹의 미소녀는 상당 히 지친 상태가 되었다. "헉, 헉," 양정은 어느 정도 참을 만 했지만, 노옹과 미소녀는 그렇지 못했다. 이 들의 수장인 듯한 세명의 복면인들은 자신의 수하들이 모두 죽었음에도 불 구하고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네 놈은 소선풍 양정이라는 늙은 놈이렷다." 세 명의 복면인 중에 청의를 입은 복면인이 말했다. 양정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껄껄껄! 그래도 내가 이름을 날리긴 했나보구나. 개새끼들도 내 이름을 알다 니..." 청의복면인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유명하지. 개뼈다귀로 소문이 나있더구나." "이 몸이 뼈다귀로 보이는 것을 보면, 개새끼들이 틀림없지 않은가! 하하하!" 그 들은 기세싸움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한치의 양보도 허용하지 않았다. 서 로 비슷한 수준의 승부에서는 기세싸움에서 승부가 결정 날 때가 많았다. 이 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 사람과는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우선 기세싸움에서 양정이 우위를 점한 것 같았다. 청의복면인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 것은 일대일의 승부에서의 우위였고 삼대 삼의 경우라면 문 제는 달라진다. "좌사(左使)와 우사(右使)는 삼천홍몽검진(三天鴻　劍陳)을 펼 치라!" "존명!" 청의복면인의 양쪽에 있는 회의복면인들이 날아올랐다. 그 두 사람 중의 하나 는 동북방향을 점했고, 나머지 한 명은 북서방향을 점했다. 그리고 청의복면 인은 남쪽을 점했는데, 품에서 조그마한 방울을 꺼내어 흔들며 중얼거리기 시 작했다. "오옴, 차크라바르티라자카르파크세트라니스파다야티!" 그러자 나머지 두 흑의복면인들도 따라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옴, 차크라바르티라자카르파크세트라니스파다야티!" 그러자 그 들의 눈에서는 살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 들은계속해서 중얼 거리며 양 정 일행을 중심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 것을 본 양 정 일행은 온 몸 에 한기가 들며 섬뜩해짐을 느꼈다. 마치 악마의 굴레에 온 몸이 휩싸여진 듯했다. 복면인들의 중얼거리는 주문과 방울소리는 그들을 신경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의 폐부 깊숙한 곳으 로부터 울려 퍼지는 심령의 소리처럼 온 몸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그 들중 비교적 공력이 약한 녹의 소녀는 이미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양정의 안면 또한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자 복면인들은 더욱 큰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때였다. 온 천지사방에서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령~입백살잠장강옥내급주복장(　入百殺潛藏　獄內急走伏藏)!" 장중한 목소리가 온 산하에 울려 퍼지자 양정 일행은 심신이 맑아지는 듯한 기운이 들어왔으며, 복면인들은 정신이 아찔해 짐을 느끼며 모든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언제 부터인가 한 명의 청년 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고 중앙 한 복판에 서있는 것이 아닌가! 청년이 언 제,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찌보면 애초부터 그곳에 있 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백리향의 콧속으로 진하고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져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 기저기 팔 다리가 널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을 터트 렸다. 인간은 과연 얼마만큼 잔인해질 수 있는 걸까? 또한 이러한 살생을 어찌 진작에 막지 못했단 말인가! 그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하지만 백리향은 신이 아니었으며 단지 구도자일 뿐이었다. 하물며 어찌 무림인들의 속성을 알고 미래를 예측하여 살생을 막을 수 있겠는가! 청의비단을 두른 복면인이 경의에 찬 눈으로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어찌되었 든 자신의 귀령섭혼대법(鬼鈴攝魂大法)을 일거에 소멸시킨 장본인인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약관의 청년이 중앙에 서있자 그는 실소를 터트리며 냉랭한 어 조로 말했다. "귀하는 누군가!" 백리향은 복면인의 말을 무시하고 양정에게로 갔다. 복면인은 자신이 무시당 했다고 생각하자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이 일었다. 지금까지 아무도 그를 무시하 지 못했으며 스스로의 지위에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하물며 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젊은이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어찌 참고만 있겠는가. "흥! 건방진 놈!" 청의복면인은 대갈일성을 터트리며 백리향의 뒤통수를 향해 느닷없이 검을 휘 둘러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것으로 무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을 본 묘령의 소녀와 노인은 깜짝 놀라 며 소리쳤다. "아니!" "공자! 조심...." 그러나 그들이 경악을 토해내기도 전에 백리향은 회류일엽(回流一葉)이라는 신법으로 몸을 뒤집으며 나뭇가지를 쭉 뻗었다. 그러자 창! 하는 경쾌한 소리 를 내며 검과 나뭇가지가 서로 부딪혔다. 순간 청의복면인의 손아귀가 터지며 검이 하늘로 날아올랐고 그의 몸은 땅바닥에 쓰러져 뇌려타곤(腦驢打袞)의 형 상으로 뒹굴었다. 그러자 양옆에서 지켜보던 두 명의 회의복면인들이 괴성을 지르며 검을 찔러 오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그들의 검세가 지척에 다다르도록 가만히 있다가 싱 긋 미소를 베어 물었다. 그 옛날 백리향은 스승에게 "심검(心劍)을 얻으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하 고 물었다. 그러자 사부는 크게 웃으시며 말하기를 "하하하! 개미가 천 걸음 을 걸어도 인간의 한 걸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검이 곧 마음이 니....마음이 동(動)하는 곳에 검도 동(動)하여 따르리라." 백리향은뒷짐을 진 채 한 손만으로 그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비록 가 느다란 나뭇가지일망정 백리향의 손에 쥐여지자 신검(神劍)보다 더욱 단단해 진 것이었다. 챙! 차차창! 햇빛에 반사된 검광이 불꽃같이 일고 경쾌한 금속성은 산 속에 메아리가 되 어 돌아왔다. 백리향은 이제야 사부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검이 매우 느리게 느껴졌으며 검을 휘둘러도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사부와 검을 나눌 때 와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순간 백리향은 호통을 치며 나뭇가지를 횡으로 쳐 올 렸다. "도(倒=쓰러져라.)!" 까강! 순간 불똥이 튀며 두 자루의 검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회의복면인들은 자신의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반탄력이 밀려와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의 찢어진 손목을 부여잡으며 경악에 찬 눈빛으로 백리향을 올려 다보았다. 특히 청의복면인의 놀라움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떨리고 있었다. "다, 당신은 누군가?중원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백리향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들을 지나 양정에게로 다가섰다. "괜찮으십니까?" 양정은 백리향을 보자 온몸의 힘이 빠짐을 느끼며 털썩 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다, 당신은 도를 얻은 자요?"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양정을 일으켜 세웠다. "아닙니다. 단지 도를 보았을 뿐입니다." 제 사장 무인안락득유정(武人安樂得有靜)-1 무인에게 어찌 안락과 고요함이 있으랴. 태양이 서쪽으로 지자 달이 온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태양과는 달리 달 은 은근하게 세상을 지배하려 든다. 약간 서늘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한 낮의 무더위에 비하면 사람들은 달의 지배가 더 고마울 것이다. 백가촌에도 예외 없이 달은 침략해 왔고 당연히 복종했다. 부엉이는 이를 환영 한다는 듯이 울었고 찌르레기와 개구리는 덩달아 울었다. 바람소리, 개구리 울음, 찌르레기 소리 이 모든것은 진리의 구결(口訣). 꽃빛깔, 풀빛은 깨달음의 명문장(名文章)! 마음을 비우고 영롱히 하여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이 성인의 가르침이요, 깨달음 이니 어찌 회심의 미소를 짖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리향은 미소를 지으며 금창약(金瘡藥)을 잘 일게여 죽통(竹筒)에 담았다. 바 로 앞에 앉아있던 양정은 백리향이 갑자기 미소를 베어 물자 불쾌한 듯 나직 이 코웃음을 쳤다. "흥!" 백리향은 금창약을 꼭꼭 눌러 담은 뒤 덮개를 씌웠다. 그리고 이리저리 살펴보 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양정은 그제야 때가 왔다는 듯이 재빨리 말했다. "이보시오. 백리공자. 그들을 순순히 보내준 것은 뭔가 잘못된 일인 것 같은 데...." 언제부터인가 백리향에 대한 그의 태도는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백리향이 복 면인들을 순순히 풀어주자 양정은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거의 한 시진 동안 투덜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양정의 푸념을 들은 척, 만 척 하며 그를 지나 육순의 노옹에게 다가섰다. "노옹께서는 괜찮으시겠습니까?" 노옹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저었다. "허허. 공자께서는 더 이상 늙은 몸에 신경 쓰지 마시구려. 어차피 얼마 안 남 은 인생. 어제 죽으나 이제 죽으나 매일반이요. 그러니 우리 아가씨 병세나 더 살펴주시구려." 백리향은 그의 충정어린 마음에 나직이 감탄을 터트리며 말했다. "노옹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는 내일이면 완쾌되실 겁니다. 무리하 게 근육을 사용했고 잠시 그들의 장난에 놀란 것뿐이니까요." 백리향은 녹의 소녀에게로 갔다. 그녀는 이십 세 가량의 아름다운미모를 지니 고 있었는데, 몸가짐이 단정하고 언행에 있어서 전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 다. 그리고 하얗고, 깨끗한 피부를 지니고있어 결코 보통 가문의 여식이 아님 을 여실히 증명하고있었다. "아가씨의 몸을 함부로 만질 수 없어 내상만 치료하는데 그쳤습니다. 여기 이 금창약(金瘡藥)을 드릴 터이니 스스로 치료 하셔야 겠습니다." 녹의 소녀는 침상에 누워있다가 백리향 다가오자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금창 약을 받아들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공자의 구명지은을 입고 또한 이렇게 진귀한 의술로 치료까지 해주시니 그 고마움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다만, 공자께서 베푸신 은혜를 언젠가는 보답 할 날이 있을 것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그녀의 표정에는 진심이 우러나와 있었다. 백리향은 약간의 쑥스러워짐을 느 끼며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잠시 기다리시면 약간의 과일과 채소를 내오겠습니 다." 그제야 백리향은 양정에게로 갔다. 양정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의자에 않아 서 애꿎은 탁자를 두드리고있었다. 백리향이 자신의 말을 들은 척, 만 척 하자 더욱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그런 그의 모습을 보자 웃 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하! 그런 악전고투를 겪으시고도 이렇게 위풍당당해 하시니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자 양정의 불만이 순식간에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공자! 내 말 좀 들어보시오. 난 한번도 의롭지 않은 싸움은 해 본적이 없소. 비록 소녀와 노인을 두고 다수의 복면인들이 공격하는 것이 불공평하여 싸움 에 끼여들었지만, 그들이 의인(義人)인지 악인(惡人)인지 낸들 어떻게 알겠 소? 물론 그들이 사술(邪術)을 부리는 것으로 보아 질이 안 좋은 집단이라는 것은 알겠소. 하지만 내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러운 것인지 부끄러운 일인지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단 말이오." 사실 양정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악한일지라 도 하나의 인간이었다. 사람을 추궁하고 고문을 하여 원하는 말을 듣고자 하 는 것에 찬성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러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 았다. 백리향은 지긋이 양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양대협께서는 그들의 눈동자를 보셨는지요?. 그들이 죽음을 도외시하 고 덤비던 모습을 보셨는지요? 그런 그들을 사로잡아 고문하고 억압한다고 무 엇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설사 그들이 자백한다고 해도 그들의 말을 믿을 만한 근거를우리는 갖고있지 못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럴듯하게 꾸며 거짓 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 거짓말을 믿던가 아니던 가인데둘 다 우리에게 이로 울 것이 없습니다." 백리향의 논리정연한 말에 양정은 어느 정도 수긍을 하는 듯 했다. 그렇다고 아쉬움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계속해서 추궁을 한다면 사소한 것이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오. 난 그렇게 확신하오." 백리향은 어린아이같이 투덜거리는 양정을 달래지 않으면 자신이 피곤해질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이든 미련을 가지고 있으면 마음이 피곤한 법이다. 백리 향은 한 숨을 쉬며 양정에게 물었다. "양대협께서는 그들에게서 무엇을 알아내고 싶으신 것입니까?" "최소한 그들이 무얼 하는 놈들인지, 어느 파의 사람들인지, 무엇 때문에 복면 을 하고 노인과 소저를 핍박하였는지는 알아야겠소. 그것조차 모른다면 피를 흘리며 싸운 의미가 없을 것이오." 양정은 상당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만큼 불만이 많았던 것이다. 백리향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정도라면 제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자, 양정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백리향을 바라보았고 그것은 노옹과 녹의 소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대협께서는 그 들이 중얼거리던 주문을 기억하십니까?" "글쎄요. 워낙 이상한 말들이라... 놀라기도 했고....그 들이 주문을 외우자 어디 서 그런 힘이 생기는지 마치 악귀처럼 덤벼듭디다. 그러니까, 확실히 기억하 는 건 '천존께서 우리를 굽어살피신다. 옴 아가로 다라, 다라.... 다라.... 그 이 상은 생각이 나지 않는 군요" 양정은 생각날 듯 하면서 생각이 않나 자,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백리향 은 웃으며 양정을 진정 시켰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더 이상 심력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아마, 이런 주문이었을 것입니다. 옴 아가로 다라가라 미사예 나모 사바하!" 양정은 이제야 기억이 나는 듯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탁 치며 말했다. "맞소! 맞는 것 같소." "이 것은 관세음보살구시철구수진언(觀世音菩薩俱尸鐵鉤手眞言)이라는 주문 입니다. 보통 용왕(龍王)과 선신(善神)이 와서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비는 진언이지요. 혹시, 양대협께서는 복면인들이 쓰는 말과 억양이 어느 지방의 사 투리인지 아십니까?" "그거야 동쪽지방 사투리지요? 어! 그렇다면 그들이 동해사람이라는 말이 되 는 군요? 바닷가 사람이 아니고서는 용왕의 보호를 바라지 않을 테니까요." 양정은 뭔가 발견한 어린아이 마냥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백리향은 고개 를 끄덕이며 다시 말했다. "그들이 또 다른 주문을 외웠는데, 그것은 기억하십니까?" 그러자 양정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당시 그들이 사용했던 방울소리가 아 직도 귀에 생생하게 메아리치는 듯 했다. 양정은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흔 들었다. "아~ 정말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그 주문은 소생도 들었는데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옴! 차크라바르티라자카르 마크세트라니스파라야티!'라는 범어(梵語)였습니다. 범어란 불존이 생존하던 당시 사용하던 고대 천축어(天竺語)를 말합니다. '차크라바르티라자'라는 말 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륜성왕은 고대천축의 가장 이 상적인 왕을 가리키는데 세존(世尊=부처)과 같이 삼십이대장부상(三十二大丈 夫相)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카르마'는 겁(劫)이라고 하며 무한히 긴 시간 을 말합니다. '크세트라'는 국토를 말하며 '니스파라야티'는 완성하다, 성취하 다, 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들을 종합해 보건대 전륜성왕이 다스리 는 불국정토를 건설하려는 종교집단으로 보여집니다. 또한 사술(邪術)을 쓰는 것으로 보아 밀교(密敎)에 그 뿌리를 두고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아무렇게 나 방울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규칙적이고 운율을 지니고 있었으며 악귀의 힘을 비는 주술적인 손짓을 행하고 있었지요. 밀교 중에서 아수라를 모시는 종파가 천축에 있는데, 그들은 아수라를 모실 때 방울을 사용한 답니다. 복면인이 나에게 말하길 '중원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라고 하였는데, 아마 대륙사람이 아니고 동해의 섬지방 어딘가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 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신은 전륜성왕이고 교주는 천존이라고 불리 는 자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이 복면을 착용한 점과 이곳 대소천태산까지 와 서 싸움을 할 정도라면 이미 중원 곳곳에 지부를 두고 포교활동을 벌이고 있 을 것입니다. 어쩌면 양민들한테 많은 신망을 얻은 자일지도 모릅니다. 만약, 양대협께서 그들의 본거지를 찾고자 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 다." 양정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한 편으로는 백 리향이 가지고 있는 지식의 끝은 어디일까하고 생각했다.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 노옹과 녹의 소녀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마도 저의 추측입니다만, 아가씨와 노옹께서는 그 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 을 것입니다. 소생의 말이 틀렸습니까?" 노옹과 소녀는 한 참 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모르다가 한 숨을 쉬었다. 그 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공자의 말은 한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해 해왕도(海王島)라는 섬 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모시는 신은 전륜성왕으로, 하늘로부터 윤보(輪寶)를 받아 온 나라를 다스리면 빈부의 격차도 없으며, 귀하고 천한 것도 없는 평등 한 세상을 만들게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주를 천존 이라 부릅니다만, 예전의 교주들은 법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의 교주는 스 스로를 천존이라고 높게 고쳐 부르도록 했으며, 자신이 전륜성왕이라고 우기 고 있답니다." 순간 노옹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얼굴은 부르르 떨렸으며, 두 눈에서 살기가 흘러 나왔다. 아마도 천존과는 양립할 수 없는 관계이리라... "천존의 밑으로 금륜법왕(金輪法王), 은륜법왕(銀輪法王), 동륜법왕(銅輪法 王), 철륜법왕(鐵輪法王)의 사대법왕이 있으며, 얼마전에 양대협과 검을 나누 던 자는 금륜법왕의 팔대사자중 금강사자(金剛使者) 이철생(李鐵生)이라는 자 입니다. 그들 팔대사자에게는 다시 좌사와 우사라는 자들이 있어 모든 활동을 벌입니다." 노옹은 잠시 말을 끊고는 백리향과 양정을 애처로운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여러분들이 더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신다면, 노부는 자결을 하는 수밖 에 없습니다." 그러자 백리향은 웃으며 공수의 예를 취해 보였다. "소생이 장담하건데 노옹께서는 자결하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 사장 무인안락득유정(武人安樂得有靜)-2 무인에게 어찌 안락과 고요함이 있으랴. 은자(隱者)가 즐거운 것은 자연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 데 있는 것이 다. 따라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도 승패를 따지지 아니하며, 음악을 들어도 교묘함과 졸렬함을 묻지 않는다. 만남이 있어도 재회를 기약하지 않음으로써 손님을 영접하거나 전송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다.백리향은 어느덧 노옹과 묘령의 여인을 잊었다.양정도 그들에 대하여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았으 며 노옹과 묘령의 여인도 그들의 그러한 태도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이 백가촌에 온 지도 어느덧 이틀이 지났다.그들은 백가촌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터트렸다. 무엇보다도 백리향의 친절함에 감동했으며 만약 전륜성왕 이 재림하여 불국정토를 만든다면 백가촌 같은 따뜻한 인심과 아름다운 풍경 의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여뉘날과 다름없이 백리향은 아침 일찍 일어나 밭을 일구고 있었다. 평상 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노옹이라는 조력자가 한 사람 붙었다는 것뿐이었다. 노 옹은 진심으로 밭을 일구는 것을 좋아했고,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밭을 일구면서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뜻 밖에도 노옹은 음률에 조예 가 깊었으며 백리향 또한 음률을 동빈에게 배운 적이 있으므로 대화가 막힘 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치 백년지기를 만난 듯했고, 이제야 만난 것을 아쉬워 했다. 문득, 노옹은 맑디맑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휴~ 어렸을 적, 나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오. 아버지는 새벽 에 나가 저녁 늦게라야 돌아오셨소. 그렇게 열심히 일하셨음에도 우리는 겨우 입에 풀칠하며 살았지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땅이 우리가 먹고살기에는 너 무 작았던 게요. 하지만 ........아버지는 항상 자부심을 잃지 않고 사셨소. 작지 만 자신의 땅이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꼈던 거요. 내가 장성하자 이러한 현실 이 정말이지 못 마땅했소. 나에게는 장대한 꿈이 있었고, 그러한 꿈은 이루어 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노부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작은 모험이 필요했다오. 그 날밤 나는 우리 집 땅문서를 들고 대도시로 떠났소. 휴~ 공자 도 알다시피 세상이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더군요. 모든 것을 다 잃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 형편이 말이 아닙디다.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아버지 는 병환에 홀로 누워 계셨던 거요.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방에는 벌써 거미줄 이 가득 차 있었고 아버지는 벌써 몇 일째 아무것도 못 드시고 계셨던 거요." 노옹은 감정이 격해졌는지 잠시 말을 끊고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공자는 내 기분 이해하시겠소?" 백리향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곡괭이 질을 멈추지 않았다. 마 치 무심한 듯....... 어쩌면 듣기 싫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옹은 자신 의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아니 평생 앓아온 가슴의 멍에를 이 때가 아니면 뱉을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 평생 그렇게 울어본 적이 없었소. 아버지는 내 손을 꼭 잡으며 말씀하시 더군요. '애야 나는 항상 자부심을 갖고 살았다. 그것은 너에게 물려줄 땅이 있 어서였다. 이미 그 땅을 너에게 물려주었으므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단다. 그것은 너의 어머니도 같은 생각이었어.... 다만, 너의 모습을 못보고 가버린 집사람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버지는 삼일 후에 돌아가셨소. 그 후 나의 꿈은 농부가 되는 것이었소. 자식에게 물려줄 그 땅을 일구며 평생을 살고 싶었 소." 노옹의 눈가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그 에게 있어서 땅이라는 존재는 어떤 의 미일까?어쩌면 그가 전륜신교를 믿고 의지하려는 것도 어쩌면 자신과 같이 조그마한 땅덩어리에 만족해하고 욕심과 사리사욕이 없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 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공자에게도 꿈이 있었소?" 그제야 백리향은 일손을 놓은 채 노옹을 바라보며 말했다. "있었습니다. 따뜻한 밥 한 공기 먹는 것이 내 소원이었습니다." 노옹은 믿어지지 않는다는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말이오?"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려서는 거지였기에 항상 차갑고 냄새나는 것을 먹어야 했지 요. 그러다 사부를 만나게 되고......그 후로는 수련을 위해 곡식을 끊고 생식(生 食)을 해야 했답니다. 지금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 되어 버리고 말았지요." 노옹은 백리향의 말에 대소를 터트렸다. "푸, 하하하! 내 듣고 보니 공자도 참으로 어려운 꿈을 갖고 있었구려. 하하하. 공자보다 내가 낮소. 나의 꿈은 실현 가능하니까 말이요." "후후후!" 청운의 거대한 꿈을 안고 강호행(江湖行)을 하는 무리들이 어찌 이들의 소박 한 꿈들을 이해 할 수 있겠는가! 적은 꿈을 꾸고 적게 가짐으로 해서 생기는 자유를 어찌 이해 할 수 있겠는가! 검을 휘둘러 이름을 드러내고 지위(地位) 를 얻음이 즐거움인 줄 알고 있으나, 이름 없고 지위 없는 즐거움이 가장 참 즐거움인줄 어찌 알겠는가! 따뜻한 아침의 햇살이 하나의 외로운 노인과 하나의 외로운 젊은이를 비추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멀리서 녹의 소녀가 밥과 간단한 요리를 바구니에 담아 왔다. 비 록 야채뿐일망정거대한 느티나무아래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식사는 어느 산 해진미보다 맛있는 법이다. 백리향은 이미 오래 전에 곡식을 끊었기 때문에 과 일과 야채만 조금 집어먹었을 뿐 일절 다른 곡식은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자 녹의 소녀는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공자께서는 소녀가 만든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 가요?" 백리향은 당황해 하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아직도 수련에 임하고 있는 중이므로 곡류와 기 름진 음식을 먹을 수 없답니다. 정말이지 아가씨께서 손수 만드신 요리를 먹 지 못한다는 것은.....소생으로서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자 소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양정은 놀랍다는 듯이 백리향을 바라 보며 말했다. "허~ 놀라운걸. 공자의 입에서 이런 달콤한 말이 나오다니...나에게도 그 구강 공(口腔功)좀 가르쳐 주시오." 노옹은 양정의 행동이 못마땅한지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쯧쯧! 다 늙은 몸으로 그런걸 배워서 뭐에 쓰려하오? 차라리 나에게 하늘을 나는 법을 배우시오." 양정은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으로 노옹에게 물었다. "하늘을 나는 무공도 있소? 그건 어떤 무공이오? 나에게 방법을 알려 주시오." "간단하오. 절벽에서 뛰어내리시오. 잠시나마 하늘을 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오. 분위기도 모르는 늙은이한테는 딱 어울리는 무공이지." "푸 하하하!" 모두에게 오랜만에 웃을 수 있는 그런 날이었다. 특히 노옹과 녹의 소녀에게 있어서 오늘은 더욱 특별한 날일는지 모른다. 그동안 그들의 삶은 아슬아슬한 살얼음판의 연속이었고,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 세계로 뛰어들어야 했으므로.... * ** 여덟 개의 향로에서는 울금향(鬱金香)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서른 여섯 개 의 기둥은 용각(龍刻)이 되어 거대한 대전(大殿)을 떠받들고 있었다. 곳곳에 진귀한 기진이보들로 치장이 되어 있었으며 바닥은 용강의 대리석으로 그 빛 을 발하고 있었다. 용이 승천을 하는 모양이 양각이 된 거대한 지존좌에 흑의를 단정히 받쳐입 은 중년의 사나이가 푹 파묻혀 있었다. 그 여덟 계단 아래로는 열 두 명의 선 풍도골의 노인이 양쪽으로 나뉘어 시립해 있었다. 흑의중년인은 곱슬거리는 머리카락들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채 잔잔한 눈길 로 자신의 애검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은 마치 득도한 고승의 그것인 양 깊고 그윽하여 무심히 바라보노라면 심연의 한가운데 있음을 알 것이다. 그의 검은 붉은 색을 띄고 있었다. 길이는 석자 두치, 폭은 두치반. 검의 가운 데로 길다란 혈선(血腺)이 그어져 있어 보기에도 섬뜩한 혈광(血光)이 흘러나 오고 있었다. 원래 묵빛을 띄고 있었으나 구백구십구명의 피가 그 검에 묻어나 자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천명의 피가 채워지자 완전한 핏빛으 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마지막 천명을 채운 피는 바로 전대 전륜신교의 교주인 단백천(丹白天)의 것이었다. 검명(劍名)은 천인혼(千人魂)! 바로 단백천을 죽이고 새로운 전륜신교의 교주 가 된 문인백령(文人白鈴)의 신물(神物)이었다. 흑의를 받쳐입고 천인혼을 지그시 바라보던 문인백령의 입에서 냉랭한 목소리 가 터져 나왔다. "십이 대장로는 말하라!" 그러자첫 번째 시립해있던 노인이 한 걸음 걸어나와 부복을 취하며 말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만세토록 누리시오소서!) 일대장로 노유명(老儒明)이 지 엄하신 제천강림전륜성황(諸天降臨轉輪聖皇)께 감히 아뢰나이다!" 중년인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더니 떨어지지 않을 것 같던 입술을 움직였다. "윤허한다!" 노유명은 고개를 조아리며 침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금 중원은 오랜 기근과 원나라의 폭정으로 민심이 흔들리고는 있사오 나......중원무림은 유사이래 최 전성기를 누리고 있사오며, 수없이 많은 무림 의 명사들이 배출된 이때에 거사를 명하심은 삼가 부당한지 아옵니다. 부디 거 두어 주시옵소서!" 노유명의 목소리는 몹시 격앙되어 있었으며 그의 얼굴에서 절대적인 충정이 어려 보였다. 하지만 문인백령의 대답은 그에 비해 참으로 허무한 것이다. "안들은 걸로 하겠다! 또 다른 장로는 말하라!" 그러자 두 번째 시립해있던 장로가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저희 십이 대장로의 뜻은 모두 하나이옵니다!" 문인백령의 눈이 움찔거렸다. 그의 입에서 더욱 차분하고 냉혹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런 늙어 쓸모 없는 것들....... 늙었다고 다 현명해 지는 것은 아닐 터." 문인백령의 몸에서 지독한 살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살기가 얼마나 지독한지 전륜신교의 십이 대장로의 온 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 다. 문인백령은 지존좌에서 일어나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위로는 우리 전륜신교를 지켜주는 불존(佛尊=석가모니)이 있고 아래로는 제 천강림전륜성황인 본 좌와 삼백 만 명에 달하는 충정 어린 교도들이 있다! 무 엇이 두려워 꽁지 내린 개새끼 마냥 움찔거리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또 다시 한 걸음..... "본 좌는 천하를 바꾸고자 한다. 그것은 하늘의 뜻이기도 하며 본 좌의 뜻이기 도 하다!" 계단에 오연히 선 문인백령의 위풍은 가히 천신과도 같았다.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패기와 위엄은 가히 일국의 황자의 풍모에 비 할 수 있었다. 그 때 였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청아한 웃음소리가 대전을 뒤흔들며 백라의(白羅衣)를 나풀거리며 미모의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순간, 문인백령의 눈꼬리가 치솟아 올랐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 녀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문인백령으로서 결코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그 러나 십이 대장로들의 얼굴에는 안도의 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러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모의 여인은 싱글거리며 다가와 무릎을 살짝 굽히며 예를 올렸다. "보현전(普賢殿) 대사령(大師領) 문인옥령(文人玉鈴)이 성황께 문후(問候) 올 립니다." "흥!" 문인백령은 코웃음을 치며 다시 자신의 지존좌(至尊座)로 돌아가 푹 파묻히 듯 앉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의 생글거리는 얼굴 을 보자 언짢은 기분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래 무슨 일이냐." 문인옥령은 계단에 비스듬히 앉으며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의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들고 왔지요. 성황께서는 어떠한 소식을 먼 저 들으시려는 지요?" 문인백령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나쁜 소식부터 말하라." "방금 중원으로부터 온 전갈이 온데 단소청이 저희들의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하옵니다." 순간, 문인백령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냐?" "단소청을 구해낸 자의 무공이 가히 절대적이라 하옵니다." 그제야 문인백령의 눈이 생기가 돌며 말했다. "그래? 그 자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다 하더냐?" 제 사장 무인안락득유정(武人安樂得有靜)-3 무인에게 어찌 안락과 고요함이 있으랴. "그래 좋은 소식이란 무엇이냐?" "단소청을 구해낸 자의 무공이 가히 절대적이라 하옵니다." 그제야 문인백령의 눈이 생기가 돌며 말했다. "그래? 그 자의 무공이 그렇게 대단하다더냐?" 문인옥령은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렵하기가 용이 하늘을 날 듯, 용맹하기가 호랑이가 포효를 하듯, 빠르기는 전광석화와 같으며, 날카롭기가 막사의 검과 같다고 합니다. 만약 성황께서 그 사람과 일 검을 나누게 된다면 그 승패를 감히 점칠 수 없다고들 합니다." 문인옥령의 말에 그는 몸이 달아오르고 피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천하에 더 이 상 적수가 없다고 여겼거늘......그래서 외로웠거늘.....어디서 그런 무인이 나타 났단 말인가? 어느덧 문인백령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령아야. 그 자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거라. 본 황은 조만간 중원무림을 얻 을 것이다. 그 전에 그 자부터 만나보아야 갰다. 그와 검을 나누어 쓸만한 자라 면 나의 오른쪽에 두어 영화를 같이 누리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 줌의 흙 이 되어 강물에 뿌려질 것이야." 문인옥령은 다소곳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성황의 올바르신 판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옵니다." 문인옥령은 고개를 슬쩍 돌려 일대장로 노유명을 바라보며 한 쪽 눈을 찡긋거 렸다. 그것을 본 노유명은 한 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후우~ 교언(巧言), 영색(令色)이면 족한 것인가!' 노유명의 말뜻은 문인옥령의 교묘한 언변에 주장을 바꾸어 버린 주군(主君) 의 못남을 한탄하는 것이었다. 교묘한 언변과 겉과 속이 다른 표정이면 충분 히 주군을 설득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장로들이 그렇게 하지 않음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인 것이다. 가히 군자다운 풍모라 아니할 수 없 다. '우리의 주군은 폭군으로서 천 세의 이름을 날리겠지만 결코 성군이 되실 분 은 아닌 게야! 차라리.......' 노유명은 전대교주와 함께 죽은 자신들의 스승이자 전대장로들의 모습이 떠올 랐다. 십 오년전 젊은 문인백령의 편에 서서 반역을 도모한 것은 새로운 세계 가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노유명은 그만 눈시울이 뜨거 워지며 한 탄이 절로 나왔다. '휴우~ 옛날의 젊은 영웅은 어디 가고 광자(狂者)가 옥좌를 지키고 있는가!' *** 만월(滿月)이 수줍은 듯 구름사이로 숨어버리자, 세상은 적막에 휩싸여갔다. 가끔 풀벌레 소리만 들릴 뿐 온 산하가 침묵하는 듯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이보시오. 형님. 점잔은 체면에 이런 얍삽한 수를 쓰다니...부끄럽지도 않소? 이번 바둑은 무효입니다." 양정은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이 바둑판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자 노옹은 어 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이보시게 동생. 자네는 불리할 때만 얍삽한 수라고 그러는데, 세상사람 들한테 물어 보게. 이것을 얍삽한 수라고 하나 신기묘수라고 하나." 이미 그들은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호탕한 무림인들 사이에서 만남 의 길고 짧음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중요한 것은 상호간의 존경과 신 뢰였다. "형님! 진정한 신기묘수란 귀신도 모르게 싸다구 때리는 것을 말합니다. 형님 처럼 왼쪽을 때릴듯하다가 갑자기 오른쪽을 갈기는 것을 얍삽이라고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동생! 허허실실이라는 병법도 모르나? 상대에게 왼쪽 뺨을 내밀어 공격해오 기를 기다렸다가, 잽싸게 피한 후, 뒤통수를 냅다 갈기는 것은 정공법일세. 자 네가 그런 묘한 이치를 알겠나?" "좋습니다. 형님. 나도 이제 얍삽한 수로서 상대할 터이니 그리 아십시오. 한 판 더합시다." 양정은 투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좋네. 자네와 나는 서로가 2승2패이니 이번 한 판으로서 진정한 고수를 가려 보세." 노옹 또한 투지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만월은 수줍음을 벗어 던지고 구름을 해치며, 온 세상을 향해 활짝 웃 고 있었다. 백리향은 널따란 암반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흡을 가다듬고 삼매경에 접어들 때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그마한 인영(人影)이 숲을 헤치 며 들어서고 있었다. 백리향이 고개를 돌려보니 녹의 소녀가 들어서고 있었다. 녹의 소녀는 백리향 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자 깜짝 놀라며 뒤로 돌아섰다. 무림에서는 타인이 운 기행공(運氣行功)할 때 큰소리를 내거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커다란 금기였 다. 백리향은 한 편으로는 삼매경을 이루지 못함이 아쉬웠지만 그렇다고 본 것을 못본척 할 정도로 여물지 못했다. "늦은 밤에 이런 구석진 곳까지 오시다니 뜻밖입니다." 녹의소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공자님께서 수련을 하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다만, 다만, 양아저씨(=양정)께서 공자님이 심심해 할거라면서 이곳으로 가보라기 에....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닙니다. 마침 운기행공도 끝나고 심심해하던 참이었습니다. 단지, 아가씨께 서 나 같은 놈에게 말벗이 되기 위해 오셨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제서야 돌아선 녹의 소녀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공자께서는 너무 겸손하신 것이 탈이 십니다." 백리향은 자신의 옆자리를 내밀며 말했다. "부디 부탁하건대 소생의 말벗이 되어 주십시오." 녹의 소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숙이고 다소곳이 백리향의 옆에 앉았다. 그러 자 백리향은 코 속으로 여인의 향취가 전해져 왔다. 처음으로 접해보는 일이 라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묘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 "....." 두 남녀는 막상 대화를 나누려고 하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약간의 어색한 가운데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백리향이었다. "노옹께서는 항상 아가씨에 대한 근심이 크십니다." "소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소녀는 그 분에게 있어서 항상 큰 부담감일 뿐이랍 니다." 녹의 소녀는 우울한 듯 말했다. 백리향은 그녀가 침울해 하자자신이 말을 잘 못 꺼내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습니다. 노옹께서는 그와 반대로 항상 아가씨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버릇인양 자신의 손가락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가늘고 길 다란 손가락이 참으로 아름답다고 백리향은 생각했다. "그 분은 원래 아버지에게 신임을 못 받고 계셨지요.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모 든 사람들은 아버지를 배신했어도 끝까지 저를 보살핀 사람은 노옹이었어요" 백리향은 어렴풋이 나마 복면인들과 노옹과 녹의 소녀의 관계를 짐작해 낼 수 있었다. "괜찮다면 이 곳에서 한동안 머무시도록 하십시오. 소생이 장담하건대 이 곳 에서 만큼은 그 누구도 아가씨를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백리향의 말에 녹의 소녀는 기쁜 듯 미소를 베어 물었다. "공자님의 따뜻한 배려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녀에게는 달리 해야할 일이 있 습니다. 지금의 교주는 무림의 커다란 해악이 될 인물입니다. 어떻게든 중원각 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규합해서 그를 막지 않는다면 소녀는 죽어도 눈 을 감지 못할 것입니다." "......" 백리향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옛날 그 자신도 이러한 절박한 심정으로 폭설 을 헤치며 산을 오른 적이 있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세상사람들 누구 나 가 아직은 죽어서 안 될 이유가 있으며 아직까지 자신이 해 야할 일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결코 죽을 수 없다라는 의지도 생기는 것이다. "공자께서는 우리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으신 가요?" 녹의 소녀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백리향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왜 궁금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세상에는 알아야 될 일도 있고 몰라야 될 일도 있지요. 소생이 알아야 할 일이라면 자연적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 이 자연의 법도이니까요." "........." 두 사람사이에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기는 하였으나 곧 이어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소녀의 성은 단(丹), 자는 소청(小淸), 이름은 숙방(淑芳)이라 합니다. 소녀의 부친은 엄청난 부를 이어받으신 분이셨지요. 하지만 항상 근면함을 잃지 않으 셨습니다. 밥상에 세 가지 이상의 요리를 올리지 못하게 하셨고, 한 그릇이상 의 밥을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마음속에는 항상 굶주리고 억압받는 백 성들이 있었고, 그런 분들을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전륜성왕께 제사를 올리셨습 니다. 하루 속히 강림하시어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삶을 살도록 불국정토(佛國淨 土)를 이루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단소청은 둥그런 만월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길다란 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하늘은 그런 분을 데리고 가셨을 까요? 어째서 하늘은 사악한 인간 을 벌하지 않았을 까요?우리 전륜신교(轉輪神敎)는 예로부터 전륜성왕이 강 림하여 불국정토를 이룩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신금(神金=신에게 받치는 금) 을 걷어들이는 교칙이 있답니다. 삼백 여 년 동안 모인 신금의 액수는 거의 천 문학적으로 불어났고, 한 나라를 살 정도의 거금이었습니다. 그 것이 아버지를 망치게 한 원인이었죠. 아버지가 아끼는 자들 중에 반역의 무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강한 분이셨습니다. 대대로 법왕만이 익힐 수 있는 전륜복마검결(轉輪伏魔劍訣)과 전륜심공(轉輪 心功)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가 더 있는데, 정종밀밀대법총결(正宗密 密大法總結)이라는 것입니다. 이 것은 밀교의 대법술서로 너무나 귀중하여 항 상 법왕과 다음 대 법왕사이에 은밀히 구술로서 전해지는 법서 입니다. 그런데 문인백령이란 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정종밀밀대법총결을 들고서 정통 성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답니다. 저는 당시 어린아이로 노옹의 품에 안 겨 해왕도를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들에게 비참한 최후 를 맞으셨답니다. 지금 해왕도에서는 불국정토를 이룩한다는 미명아래 강호통일을 부르짖고 있 습니다. 강호의 무벌(武伐)이나 무가(武家), 그리고 무림고수들의 힘을 앞세우 고 전륜교도들을 이용해 나라를 전복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제천강림전륜 성황으로서 다스린다는 계획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중원은 핏속에 잠기게 될 것입니다. 유가와 도가뿐만 아니라 모 든 종교인들이 탄압을 받을 것이 명확합니다. 또한 문인백령이란 사람은 여기 서 야망을 그칠 사람이 아닙니다. 온 세계를 전란에 휩싸이게 만들 그럴 사람 입니다." 단소청은 상당히 격정에 휩싸인 듯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핍박받고 억울한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 서는 앞으로 일어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한 한 숨이, 두 귀에서는 참혹한 죽음 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온 몸을 떨고 있었다. 단소청을 통해서 백리향은 참된 종교의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소녀는 복수 나 원한보다는 어리석은 자들이 일으키는 전란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삶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에 멍들어 가는 사람 들,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삶에 구원이 될 수가 있다. 신과 가까워지기 위하여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아픈 사람에게는 약이 되 어주고, 지친 사람들에게는 편히 쉴 수 있는 휴식처가 되며, 냉대를 받는 사람 들한테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 주는 것이야말로 신과 가까워지는 길이다. 불존께서는 자신에게 천만금을 봉양하는 것 보다, 굶주린 사람들에게 십만 금 을 쓰는 사람을 더 사랑하실 것이다. 탑을 세우고 불상에 금칠을 하는 사람보 다, 불상의 금칠을 벗겨 내여 삶에 멍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을 더 사 랑하실 것이다. 전륜성왕도 자신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보다 한 사람, 한 사 람이 전륜성왕이 되어 나누고 베푸는 자들을 더욱 사랑하실 것이다. 어느덧 안정을 되찾은 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소녀가 너무 말이 많았나 봅니다." 백리향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말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단 아가씨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잘 알 수 있었습니 다. 무릇 역사 속의 모든 영웅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용맹을 자랑하는 자들뿐이 었습니다. 나라를 일으키고, 정의라는 명분을 앞세워 침략하는 자들의 성공 뒤 에는 수 백만 명의 백성의 피가 묻어있는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 은 자들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입니다. 하루아침 에 없어질 성질의 것도 아니며 역사가 계속되는 한 이러한 수레바퀴는 계속되 어질 것입니다. 결코 단 아가씨 혼자서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백리향은 단소청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간간이 몸을 떨고있는 모습이 참으로 애처로워 보였다. 그는 나지막이 한 숨을 토해내며 말을 계속했다. "아가씨는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강대한 적 앞에 두려움을 느끼 고 있습니다. 그 들을 저지하지 못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할까 두려워 떨 고 계신 겁니다. 눈앞에 벌써 억울한 영혼들이 보이고 참혹한 비명소리가 들리 십니까? 꿈속에서 자신을 도와주던 모든 사람의 절규가 보이십니까? 무엇부 터 해야 할지 막막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의 뿌리부터 자르십시 오. 심근을 자른다면, 자신이 해야 될 일이 눈앞에 보일 것이며, 더 이상 두려 움도 걱정도 없게 될 것입니다" 단소청은 자신의 고통을 깊은 혜안으로 바라다보는 백리향에게 경이감이 들었 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서 감수해야 하는 마음 의 병을 그는 꼬집어 내고 있었다. 백리향의 말대로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적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하지만 자신 을 믿고 의지하는 수많은 충신들이 있었다. 자신은 그들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 였다. 이러한 모든 상황을 거부하고 싶지만,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다. 자 신의 나약한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수 백 명의 동지들을 규합한다 고 해서 무엇이 달라 질 것인가? 그 동안 자신을 위해 희생한 동지들의 피를 어떻게 보상한단 말인가? 소녀의 두 뺨에 물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의 뿌리를 뽑아 낼 수 있죠?" 백리향은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불경을 한 권 드리겠습니다. 그 것을 보신다면 심근을 일 거에 끊어 버 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 사장 무인안락득유정(武人安樂得有靜)-4 무인에게 어찌 안락과 고요함이 있으랴. 하루살이들에게는 하루가 마지막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모든 생물들은 오늘 의 태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아직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하늘에 감사하고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것이다. 백리향과 노옹은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씨뿌리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만 물이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녘이었지만, 그들은 한 철의 농사를 위해 그렇 게 땀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배추든, 당근이든, 혹은 감자든 모든 작물에는 시기가 중요하다. 씨를 뿌리는 시기, 물을 뿌리는 시기, 수확하는 시기 등 모든 것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 면, 최상의 품질을 보장받을 수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적절한 시기를 맞추 지 못하면 최상의 삶을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공자, 헤어져야 할 때가 된 것 같소." 노옹은 씨를 뿌리며 무심하게 말했다. 백리향은 듣는 둥 마는 둥 별말이 없이 그저 흙을 덮는데 열중하고 있었다. ".........." "진작 떠나야 했지만 아가씨의 모습을 보니...차마 떠날 수가 없더구려. 그렇 게 즐거워하는 모습은 평생 처음이었소. 잠시나마 행복을 느끼고, 사람 사는 맛을 보고, 서로간에 신뢰의 정을 쌓고, 이곳에서 열흘 간의 삶은 아가씨로서 절대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요. 이 늙은이가 자꾸만 주절주절 거리는데.... 진정으로 하고싶은 말은 이것이오. 공자 고맙소!" 순간, 백리향의 손이 멈칫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옹을 바라보았다. "........" "........." 잠깐의 침묵 뒤 백리향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천진난만 한 그의 웃음에 노옹은 덩달아 웃었다. 그 두 사람의 웃음은 어딘지 많은 부분 에서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씨를 뿌리기 시 작했다. 세상에는 한 번의 웃음이 백마디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한 번 웃어주면 그만이다. 삶이 뭐냐고 물으면 한 번의 미 소로 끝낼 일이었다. 그들은 떠나고, 보낼 시기를 잘 아는 사나이들이었고 미 련은 없었다. 백리향의 처소는 깨끗했다. 그다지 청소하는 것 같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 주위는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단 소청은 매일같이 쓸고 닦았다. 그의 손길이 다 앗을 법한 곳에는 직접 만져보기도 했다. 이불, 그가 덮고 잤을 이불은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시 잘 개어 놓는 그녀였다. 그는 용맹하거나 사나이다운 풍모를 지니고 있지도 않았으며, 누구보다 잘생 기지도 않았다. 엄청난 부를 축적하지도 않았고, 권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 다. 하지만 그만 보면 자신이 작아지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얼굴은 붉어진다. 그녀는 그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손에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들 고 천신처럼 우뚝 서서 호통치던 모습을....자신의 가슴이 뛰기 시작한 것은 아 마 그때부터 엿을 것이다. 이제 헤어지고 나면 다시는 못 만날지도 모른다. 그녀의 상대는 한 국가와 맞 먹는 권력과 능력을 지닌 자였다. 자신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십중팔 구 놈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품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내 놓 았다. 그 것을 풀자 조그마한 금창약이 나왔다. 자신에게 바르라고 주던 약, 그 것을 받을 때 느껴졌던 백리향의 손길의 감촉을 그녀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 고 있었다. 금창약을 몇 번이고 쓰다듬다가 자신의 품에 갈무리했다. 그 대신 손수건을 백리향의 침상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손수건 한 장뿐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 있으면 이 몸을 부르시오. 언제든지 달려가리다." 양정은 노옹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진심 어린 마음으로 말했다. 비록 짧은 시간 의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정이 들대로 들어있었다. 원래 마음이 맞는 사람끼 리 만나면 만남의 시간과 관계없이 깊은 정을 나누는 법이다. "이 우형(愚兄)의 이름은 여일지(呂逸志)라고 하네. 동해노옹(東海老翁)이라고 도 하지. 부디 잊지 말아주게."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여일지는 양정의 손을 흔들며 다짐하듯 말했다. "노파심이네만, 다시 한 번 부탁함세. 그 누구에게도 우리를 만났다는 이야기 를 말아주게. 놈들은 귀가 아주 예민한 자들일세." "제 무덤까지 같고 갈 터이니 걱정 마십시오." "이것은 제가 전에 말하던 불경입니다. 열심히 읽기만 해도 단 아가씨의 심근 (心根=마음의 뿌리)을 자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백리향은 붉은 보자기를 단 소청에게 건네주었다. 받아든 그녀의 손이 약간 떨 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공자님의 보살핌을 안고 소녀는 떠날까 합니다. 다시 만날 그 날까지 부디 몸 을 보중하시기 바랍니다." 백리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소생은 단 아가씨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어 의 심치 않습니다." 순간, 단 소청의 눈에서 눈시울이 붉어지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제가 드린 선물은 이곳에서 오십리 떨어진 다음 펴 보도록 하십시오." 그녀는 차마 그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대로 몸을 돌리며 말했다. "잊지..... 않겠습니다." 단소청과 여일지가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자 백리향은 양정에게 말했다. "양대협 우리도 떠나야 할 때가 되었나 봅니다." 양정은 의아한 듯 물었다. "어디로 떠난다는 말씀입니까?" 육합문의 장양이라는 분께 잠시 몸을 의탁할까 합니다." 양정은 펄쩍 뛰며 말했다. "정말, 가시려 하오?" "아니! 그 사이에 마음이 바뀌셨소?" 양정은 백리향은 미심 적은 듯이 한참을 바라보았다. "당신 같은 분이 왜 남의 밑에 들어간단 말입니까?. 당시에는 공자의 능력을 잘 몰라서 그랬다고 칩시다. 지금은 아니오. 당신은 절대 그곳으로 가서 안되 오." 백리향은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지, 양대협께서는 소생을 너무 높게 평가하십니다. 저는 항상 거지의 신분임을 잊지 않고 있답니다. 제 스스로 높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 말이지 나라는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양정은 한 숨을 쉬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오? 어떤 경지에 오르셨기에 이렇게 겸손해 질 수 있단 말이오? 내가졌소. 갑시다." ***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넓은 대로를 활주하는 마차가 있었다. 마차는 항주와 통 하는 길을 접어들고 있었는데,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마차임 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공주님께서 상당히 우울해 보이십니다." 여일지는 단소청을 바라보며 근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우울하네요. 가슴은 찢어질 듯하고, 알 수 없는 눈물이 납니다." 여일지는 한 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녀도 알고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 였다. 다만 삶이 그녀를 평범하게 살지 못하도록 했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떠난 곳에서 오십리가 넘지 않았나요?" "오십리가 훨씬 넘었지요. 왜 그러십니까?" 그녀는 백리향이 준 보따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백리공자께서 저에게 마음의 뿌리를 끊을 수 있는 불경을 주셨지요. 단, 오십 리 밖에서 풀어 보라 하셨답니다." 여 일지는 감탄을 토하며 말했다. "오! 그런 불경이 있었습니까? 오십리가 넘었으니 한 번 풀어보도록 하지요." 원래 전륜신교는 밀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불교와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귀중한 불경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커다란 행복이 자 수 억만금을 얻는 것보다 소중했다. 단소청은 조심스럽게 붉은 보자기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 권의 고풍스러 운 경서가 드러났는데 표지에는 금강반야바라밀경해(金剛般若波羅密經解)라 고 적혀 있었다. "금강반야바라밀경해이라니..... 설마....금강경을 풀어 해설한.....?" " 여일지는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그만 실망하고 말았다. 물론 금강경이란 인류 의 위대한 서적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불교에 귀의한 사람 치고 안 읽어 본 사 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인 서적이었다. "허허~ 백리공자께서도 장난을 즐겨하시는지 몰랐군요?" 여일지는 그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소청은 기 분이 상했는지 아미를 찡그리며 상당히 날카로운 음서으로 말했다. "금륜사자(金輪使者), 여일지는 들으세요! 금강경은 우리 전륜신교에서도 상당 히 존중하는 서적입니다. 그 뜻이 깊고 넓어 항상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 가오는 심법과도 같아 항상 외우도록 하는 그런 귀중한 책입니다. 어떻게 그 런 망언을 지껄일 수가 있지요?" 여일지는 깜짝 놀라며 무릎을 꿇었다. 그는 평생을 단소청을 받들면서 한 번 도 자신의 옛 직책인 금륜사자라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도 지껄인다든가, 망언이라든가 하는 저속한 언어가 나온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도 단소청이 지금 보여주는 위엄은 옛날 공륜법왕(空輪法王) 단백천 (丹白天)에게서 느꼈던 위엄과 흡사한 것이었다. "소신. 전륜사자 여일지는 공주님께 무례한 죄를 범해 죄를 청하옵니다." 여일지는 자신의 머리를 땅에 박았다 단소청은 순간 자신이 너무 지나쳤음을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노옹께서는 그만 일어나도록 하십시오. 소녀는 그대의 죄를 추궁할 뜻이 전 혀 없습니다." "공주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여일지는 일어나 원래의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참으로 뜻밖이 었다. 여태껏 그녀의 언행은 대지의 여신처럼 온화하며 따뜻했으며 부드러웠 다. 그런 그녀에게 이러한 위엄이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에 여일지는 무척이나 고무적(鼓舞的)인 것이다. 단소청은금강반야바라밀경해를 조심스럽게 한 장 한 장 읽어나가기 시작했 다. 첫 문장인 여시아문(如是我問)에서부터 마지막 진언(眞言)까지 읽고 그녀 는 다시 첫장을 넘겨 읽기 시작했다. 문득,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금강경을 잃자니 그 동안 알 수 없었던 심득을 깨 닫기 시작했다. 백리향이 말한 일거에 심근을 자른다는 뜻을 어느 정도 알 수 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새롭게 다가서는 금강경을 지겨움 없 이대 여섯 번을 읽어 나갔다. 그러자 두둑 소리와 함께 겉 표지가 떨어져 나 갔다. 안타까운 마음에 그 표지를 다시 이어 붙이려고 했다. 그러다 그녀는 금 강경해의 표지 안에 또 다른 표지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통 서적을 만들 때 먹물로 인쇄하기 때문에 길다란 종이에 한쪽과 또 다른 한 쪽을 찍어 반으로 접으면 한 장이 되도록 책을 만드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 지만 이 책은 한 장안에 또 다른 한 장이 겹쳐 있었던 것이다. 단소청은 조심스레 겉 표지를 뜯어내었다. 그러자 검제심결주해(劍帝心訣註 解)라는 표지가 다시 나타났다. 단소청은 여일지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여 일지는 마차의 벽면에 머리를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여 일지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노옹! 노옹, 일어나 봐요." 여일지는 여전히 머리를 벽면에 붙인 채 잠에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으음~말씀하십시오." 단소청은 두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노옹. 검제심결이란 책에 대해서 아십니까?" 노옹은 비몽사몽간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검제심결.... 검제심결이란 한나라 시대 때 살았다고 하는 검제(劍帝) 요광문 (曜廣文)이 썼다는 검결입니다. 그는 젊어서 더 이상 적수가 없자 평생을 외롭 게 지냈다는 전설의 검객이지요. 늙어서는 천외천에 들어가 자신의 심득을 글 로서 옮겼는데 그 것이 바로 검제심결입니다. 하지만 전설이지 실제로 알려진 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자 단소청은 두 눈을 크게뜨고 들 뜬 목소리로 말했다. "노옹 여기에 검제심결주해(劍帝心訣註解)가 있어요." 여 일지는 여전히 잠이 덜 깬 상태로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후후! 정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검제심결은 단지 전설입니다. 하물며 해석 서인 주해라니요." 단소청은 몹시 화가 난 듯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갔다. "금륜사자 여일지는 얼른 일어나 이 책을 보아라!" 머리를 벽면에 처박고 있던 여일지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일어나 장읍을 취했 다. "앗! 조, 존명(尊命=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일지는 두 손으로 책을 받들고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눈 이 점점 부릎 떠지기 시작하더니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아! 진본입니다. 진본이 확실합니다! 진본 뒤에 누군가가 주해를 달아 놓았군 요! 이 검결만 공주님이 익히신다면 문인백령의 무공과 견주어 손색이 없으실 것입니다." 단소청 또한 놀라웠지만 억지로 내색하지 않았다. "정말인가요?" 여일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아~ 물론입니다 정말이지... 정말이지 백리공자는 신인이십니다." 단소청의 기쁨을 어찌 말로서 형용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 로 저으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노옹의 말씀이 옳습니다. 앞으로 소녀를 따르는 모든 전륜신교들에게 그 분 에게 은혜를 입었음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소녀를 위한 것이 아니 며 오직 정의를 위한 것입니다. 이 비급으로 인해 쓸데없는 살생이 일지 않도 록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노옹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성을 질렀다. "아! 정말이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백리공자께서는 공주님께 직접 전하 지 아니하고 어찌 난해한 행동을 보이셨을 까요?" 그녀는 검제심결주해를 품에 안으며 두 눈을 감았다. "아마도..... 이 검결을 익히기 전에 저의 마음자세를시험한 듯 합니다. 만약 내가 노옹처럼 귀중한 서적을 읽지 않고 무시하는 행동을 했다면 어찌 이런 기연을 얻을 수있었겠습니까?" 여일지는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그는 어색한 듯 헛기침을 한 후 조심스레 말했다. "오십리 밖에서 이 책을 펴보라고 주문하신 뜻은 무엇일까요?"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감은 채 미소를 지으며 꿈 꾸듯 말했다. "그것은....... 다시 찾아뵙고 인사드리기에는 너무 먼 거리이니까요. 우리 의 번거로움을 배려하신 듯 합니다." 여일지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백가촌이 있는 방향을 향해 대례를 올렸다. 제 오장 사기돌출만인혈(邪氣突出萬人血)-1 사악한 기운이 돌출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를 뿌리니..... 장양은 자신의 화려하고 깔끔한 의복처럼 항상 위엄이 있었고 격식과 예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사에 신중했으며 결코 실수를 용납하 지 않았다. 경망된 것을 싫어했으며 불필요한 행동과 말을 싫어했다. 사람이 자상하면 법도를 행할 수 없고, 위엄이 적으면 하극상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사 람이었다. 그런 그가 양정이 돌아왔다는 소리에 맨발로 대문까지 뛰어나갔다. "아니! 왜 이제야 오는 겐가? 나를 비롯해 조카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나?" 양정은 그의 두 손을 잡으며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럴 이유가 있었지. 그 대신 깊은 산중에서 소신선(小神仙)한 분을 모시고 왔다네." "소신선이라고?" 양정은 의기양양하게 백리향을 소개했다. "공자 이쪽은 내 친구이자 육합문주인 장양이라 하오." 백리향은 공수의 예를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소생 백리향이라 합니다." "반갑소. 노부는 장양이라 하오." 장양도 두 손을 맞잡고 흔들기는 하였으나 의아심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있는 양정은 자존심이 강한 남자였다.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법이 없었으 며 상당히 오만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절대로 젊은이한테 존대를 할 인물 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양정은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젊은이 에게 공경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목구비가 수려하지도 않았고, 무공을 연마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으며, 귀태 (貴態)가 흐르는 귀골지상(貴骨之像)도 아니었다. 도무지 어느 한 구석 비범 해 보이는 곳이 없었다. 양정이 스스로 낮출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것이다. 장 양은 불가사의하고 해괴한 일에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그렇다고 손님을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일. "오! 잘 왔소. 이리 들어오시구려. " 비록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듯 했다. 그러한 점을 양정이 느꼈는지 한 숨을 내쉬었다. '기인(奇人)을 어찌 산 속에서만 찾으려 하는가? 바로 눈앞에 있음을 어찌 모 르는가! 휴우~ 이 친구도 나만큼 어리석은 게야....' 양정은 답답한 마음에 장양에게 은근슬쩍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장양, 자네는 나한테 술 한잔 사야 될 것이야. 백리향이라는 공자는 제자백가에서 천문지리까지 통달한 귀재라네. 집안에 앉아서 천리를 볼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무공 또한 신묘하여 자네한테는 문왕(文王)이 강태공(姜太公) 을 얻은 거와 같고, 한왕(漢王=유방)이 장량(張良=장자방)을 얻은 것과 같단 말일세." 그러나 아무리 다시 높게 보려고 해도 글께나 읽은 비실비실 한 유생으로 밖 에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장양은 친구를 실망시키고싶지 는 않았다. 그는 대소를 터트리며 호쾌하게 말했다. "하하하! 한잔의 술뿐이겠나. 삼일 밤낮으로 마시세 나. 하여튼 안으로 들어가 이야기하세" 흔히들 육합문을 가리켜 절강제일무문(絶江第一武門)이라고 하며, 사람들 은 '달이 천태산에 떨어지면 해가 육합문에 떠오른다.(月落天台山, 日出六合 門)'라고 칭송하는데 그 만큼 육합문의 위용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 규모만도 일전(一殿), 삼각(三閣), 육방(六房)으로 나뉘며 지붕은 채색된 황 개와(黃蓋瓦)로 이었고, 모든 문은 도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한참 문도(門徒) 들이 많이 몰려드는 봄철이면 근 이백 여명의 숙식이 제공되어도 남음이 있었 다. 일전인 태의전(太義殿)으로 들어가자 이미 작은 술상이 마련되어 있었고 서 너 명의 젊은 남녀가 양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버지!" "사부님!" 아버지라 부르며 양정의 품에 뛰어든 소녀는 그의 여식으로 소교(小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맑고 커다란 눈망울과 양정의 꾀죄죄한 얼굴과 달리 꽤 귀여워 보였다. 뒤이어 장대한 체구에순박한 얼굴을 지닌 사나이는 오고 산(吳高山)으로 양정의 첫 째 제자이며, 약간 마른 듯한 체구에 호남형의 얼굴 을 지닌 사나이는 추풍장(秋風掌) 안유(安柳)로 양정의 둘 째 제자였다. 백리 향은 양정을 통해 그 들과 일일이 통성명을 나눌 수 있었다. "아버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그 동안 소식도 없이...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양소교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양정의 팔을 붙잡으며 투정을 부렸다. 원래 무가 의 자손은 유가의 자손보다 예의에 구해 받지 않았다. 그러나 신의와 충효는 유가의 자손보다 뒤지지 않음을 옛 문헌이나 설화를 보면 알 수 있다. 양정은 어린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하! 미안하구나. 애야. 나는 이 백리공자와 함께 천태산에서 신선놀음을 하 고 왔단다." 그러자 장양이 발을 구르며 나무라듯 말했다. "예끼! 이 사람아. 얼마나 재미있었으면 세상을 잊고, 이제야 나타난단 말인 가!" "하하하!" "하하하!" 스승을 제외하고 한 명의 친인도 없는 백리향에게 가족이란 상당히 낮선 단어 였다. 양정과 양소교를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가슴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것은...... 부러움이었다. 그 들은 한 참이나 웃고, 떠든 후에 장양이 정색을 하며 은근히 물어왔다. "그래 숲속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나?" 그러자 양정은 꽤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면 자신이 백가촌 에 가게된 사연도 그 괴인을 추적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동안 많은 놀라움 을 겪었기에 원래의 목적을 까 막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백 리향의 저지른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살생을 싫어하는 천성으로 보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추론이었다. "그게 말이야. 내 평생 그렇게 빠른 신법은 처음 봤다니까? 흰 그림자가 어른 거린다고 느끼는 순간, 북동쪽으로 사라져 버리더군. 나도 필사적으로 뒤쫓아 갔지만, 그 신비인의 종적은 묘연해지고.... 그래서 다시 돌아가려고 했지만, 길 을... 길을...쭈욱 따라가다 보니 백리공자가 사는 마을이 아니겠나? 그렇게 된 거야. 하하, 하하." 양정은 제자들이 듣고 있는 곳에서 자신이 길을 잃어버렸노라고 차마 실토 할 수 없었다. 그 와는 달리 장양의 얼굴이 약간 무거워 지는 듯 했다. "만약 그 사람이 정파의 사람이면, 무림의 커다란 복이겠지만, 만약 사파의 사 람이라면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네." 양정은 백리향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내 보니 악의가 있는 행동은 아닌 듯 하더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산 속 의 은거고인이 짐승들의 죽음이 안타까워 한 행동일 수도 있네. 원래 대소천태 산에는 비선(飛仙)이 산다고 옛 문헌에도 나오지 않았는가 말일세. 은거고인이 라고 없다고 할 수는 없지?" 장양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말했다. "약간 황당하기는 하지만, 억측만은 아니로군.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 는 비밀로 해야 될 게야. 이 이야기가 밖으로 유출되면 고인을 만나 보기 위 해 세상의 온갖 사람들이 온 산을 헤집고 다닐 거란 말일세. 이해하겠나?" 양정은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제자들에게 추상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들도 잘 새겨듣고 이 말을 절대로 꺼내서는 아니 되느니라." "예. 잘 알겠습니다." 지금 이들이 하는 말이 모두 자신에게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은 백리향은 고소 를 금치 못했다. 양정의 말대로 산짐승들이 인간의 오락수단으로서 희생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영통으로서 동물들과 감응을 시도 하여 몰이꾼들에게서 도망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몇 몇의 동물들은 무형지기 을 이용해 화살을 방향을 바꾸어 구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영통(靈通)이란 보통 상단전을 가리키는데, 이 문이 열리면 신령과 통하게 된 다. 백리향은 어렸을 적에 복용한 태청신단 덕에 이미 영통이 개안되어있었고 지금은 수많은 깨달음으로 인해 그 능력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었다. 영통은 수련을 통해 깨달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무당들이 그러한 예인데 그 들은 믿음이나 어떠한 정신적인 충격에 의해 영통이 조금 열리는 경우이다. 비록 신령과는 통할 수는 없지만. 혼령이나 잡귀정도는 눈으 로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양정을 비롯한 일행은 늦은 밤까지 환담을 나눈 뒤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 다. 백리향은 임시로 그 들과 같은 숙소에 머물게 되었는데 오 고산과 안 유, 그리고 백리향은 한 방을 썼다. 두 사형제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으나, 새로운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까지 말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 들은 백리향이 무공에 문외한이라고 느꼈던지 무공에 관 한 이야기보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상당히 늦은 밤까지 대화는 계속되었는데 백리향의 박학다식함에 상당히 놀라 는 듯했다. 그러면서 거만하지 않고 겸손한 백리향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양소교였다. "아니! 늦은 밤에 여자애가 겁도 없구나! 사부님이 아시면 큰일날 게야." 아무거리낌 없이 위풍당당하게 들어서던 그녀는 대사형인 오 고산의 질책성 발언에 순식간에 애교로 돌변했다. "대사형. 심심하단 말이 예요." 육척장신 오 고산도 양소교의 귀여운 애교에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허헛참! 이 것아 여기 백리공자께서 비웃으시겠다." 그녀는 그 때서야 백리향을 의식한 듯 얼굴이 붉어졌지만, 천성이 애교로 똘 똘 뭉쳐진 것 같았다. 양소교는 포권을 하고 고개를 연거푸 수그리며 말했다. "백리공자, 아니 백리대협 절대로 비웃거나 아버지에게 이르시지 않겠지요?" 백리향은 그녀의 아부가 짖은 발언에 피식 웃으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그녀는 만족한 듯 매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대사형도 들었죠? 이제 모든 문제가 사라졌어요." 그러자 침상에 누워서 자신의 코를 후비던 안유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장담하건대 내 입이 결코 무겁지만은 않거든?" 양소교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이사형은 신경도 안 써. 저 번 중양절 때 수련동(修鍊同)에서 술 냄새가 풍기던걸 그 것도 여자목소리와 함께..." ".......!!!!" 안 유는 한 참을 아무 말 없이 있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 다. "휴우~ 장담하건대 내 입은 무거워질 꺼야. 그것도 철옹성과 같이 단단하 게........" 양소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낄낄 거리며 웃었다. "히히! 모든 문제가 없어졌어요. 대사형." "너라는 아이는...그건 그렇고 사제는 어쩌자고 수련동에 여자를 끌어들였는가?" 안유는 억울하다는 펄쩍 뛰며 말했다. "그때 사형도 같이 있었잖아요." 오 고산은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그랬던가? 하도 술을 먹어서....기억이 없는걸..." 양소교는 마치 엄청난 것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앗! 대사형도 거기에 있었어요?" "........." 그러자 오 고산은 양소교에게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교아야. 오늘 재밌게 놀자. 하루종일..." 정말 재미있는 사제매간이라고 백리향은 생각했다. 그 에게도 이러한 형제가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백가촌의 거지형제들...그 때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는 데....백리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들을 생각하면 아픈 기억도 함께 떠오르 는 것이었다. "사형, 우리 내일 대소천태산에 올라가 봐요? 네? 거기서 은거고인을 찾아보 자고요. 기연이라도 얻게될지 누가 알아요?" 오 고산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뭐? 안 돼! 거기는 원시림이라 위험해. 사부님조차 길을..........길을...따라 쭈 욱 백리소협이 사는 마을로 가셨는데, 위험해서 안 돼!" 양정은 제자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총명하다는 것을 진작에 알았 어야 했다. "아버지는 원래 길 치라서 그래요. 아마 그러한 병만 없으면, 천하제일경공이라고 불리 실걸요." 양정은 자신의 딸이 얼마나 총명한지 알면 놀라 까무러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안 돼! 사부님이 이 사실을 알게되면 우리는 패대기쳐지는 개구리 신 세가 될 거야." 안유가 두렵다는 듯이 온 몸을 떨며 말했다. "어떻게 아시겠어요. 모두 같이 가게 될 텐데, 안 그래요? 백리소협?" 백리향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심상치 않았다. 쉽게 말해 백리향은 비밀 을 위해 볼모가 되어 같이 산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소천태산에는 더 이상 고인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장담하지요." 백리향은 진실을 이야기하였지만, 욕심에 눈먼 사람에게는누런 메주도 황금 으로 보이는 법이다. "아니! 어떻게 장담을 하신다는 거죠? 소협께서는 대소천태산을 모두 돌아보 셨다는 말씀인가요?" 백리향은 이 아가씨의 저돌적인 말에 더 이상 고집을 꺾기에는 이미 늦어 버 렸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며, 설사 믿 는다 하더라도 미련이 남아 산행을 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제가 실수를 하였나 봅니다. 용서하십시오." 백리향이 사과의 뜻을 표하자, 오 고산과 안 유가 동시에 질책했다. "아니! 교아야, 이게 무슨 무례한 말버릇이냐?" "별로 안 좋은데..." 원래 양소교는 성격이 활달한 편이지만, 자신의 실수는 인정할 줄 아는 소녀였 다. "백리대협, 제가 그만 무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그만 울상이 되어 버렸다. 백리향은 터져 나오는 한 숨을 억지로 참았 다. 이 소녀는 내일이면 사라질 것이다. 백리향의 심상에 이 맹랑한 소녀는 그 러고도 남아 보였던 것이다. "여러분, 이 산의 곳곳은 제가 잘 아니 내일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양소교의 얼굴이 기쁨으로 백 팔십 도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참 으로, 희비가 변화무쌍한 안면을 지닌 소녀였다. "어머! 정말이십니까? " 오 고산과 안 유 사형제도 덩달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소협께서 수고를 해 주신다면 더 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요." "암! 그렇고 말고...." 사실 그 들이라고 호기심이 왜 없겠는가? 오로지 사매의 안전이 우선 했기에 말렸던 것이다. 그 들의 잡담은 한 동안 지속되었다. 시간이 꽤 지난 다음에 내일을 기약하며 헤어졌는데, 그 들은 백리향만 빼고 아무도 몰랐다. 이 대소천태산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백리향은 침상에 누워 숨을 가다듬고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 것을 앙와 식(仰臥式)이라 하는데 천장을 보고 누워서 행공을 한다는 의미이다. 이미 백리향은 걸을 때나 뛸 때나 혹은 생각할 때나 호흡이 일정하게 유지되 도록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항상 행공에 임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보폭을 일정하게 하고 세 걸음을 걸을 때 숨을 들이마시고, 두 걸음 을 걸을 때 참는다. 그리고 두 걸음을 걸을 때 내쉬면서 행공에 임하는 것이 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들을 때 상단전을 의식하며 듣고, 말을 할 때에는 하단전 을 의식한다. 앉으면 좌상이고 서있으면 입상이다. 이런 식으로 그의 모든 일 상생활은 행공으로 시작해서 행공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어느덧 일월합벽(日月合壁)의 경지에 올라선 그는 몸이 짜릿해지는 황홀감을 느꼈다. 두 다리에 힘을 주어 쫙 피려하니 자신의 몸이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또다시 영체이탈이 이루어 진 것이다. 잠들어 있는 오 고산과 안 유의 모 습을 뒤로하고 한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드넓고 높은 산야를 굽어보며 아무 런 마음도, 생각도 없이 자연그대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 하늘은 이불, 땅은 자리, 산을 베개삼고 달 촛불, 구름은 병풍 삼아, 바다로 술 빚었네. 거연(遽然)히 크게 취해 일어나 춤을 추나니, 긴소매는 곤륜산에 왜 이리 걸리는가? (天衾地席山爲枕) (月燭雲屛海作樽) (大醉遽然仍起舞) (却　長衫掛崑崙) 여유 있고 한가로운 가운데, 동쪽으로부터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 다. 먹구름은 온 산하를 뒤덮으며 몰려들었는데, 문득 시커먼 구름이 갈라지 고 찬란한 빛이 내려와 한 곳을 비추었다. 그러자 그 빛 속으로 수백의 엄청 난 불빛들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 영혼의 불빛은 모두 고통과 절망으로 아우성 치고 있었는데, 백리향이 그 곳으로 전진하자 미미한 마기가 느껴졌다. 그 마기는 백리향이 다가갈수록 강하게 다가왔다. 자신의 숨통을 조여 오는 듯 한 느낌이었으며, 나중에는 마치 자신이 지옥에 와있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 도 였다. 처절한 비명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온통 저주에 찬 울부짖음, 윙윙거리 며 방황하는 영혼의 소리들..... 하나의 영혼이 백리향에게 다가왔다. 일곱 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공포에 물들어 있었으며, 손을 자신에게 내 밀었다. 백리향은 그 손을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실체가 없 는 한 점의 빛이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하늘로 빨려 올라갔 다. 소녀는 그 것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끝내는 사라져 버리고 말 았다. 백리 향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수많은 영혼을 보았다. 모두가 시장에서나 길거 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자신에게 살려달라고 아우성 치 고 있었다. 백리향은 그 들에게 다가가려고 했지만, 강력한 마기가 자신을 가 로막고 있었다.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자신을 죄어 들어왔다. 백리향은 그들에 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이 드는 순간 울컥하고 피를 토해 내고 말 았다. 백리향이 눈을 뜨자, 자신의 옷자락과 이불자락에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것 이 보였다. 자신의 영혼이 상처를 받자 육체에서 반응이 일어난 것 같았다. 달 은 청정하고, 사방은 고요하여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침상에 걸터앉아 한 참이나 멍하니 있었다. 항상 반짝이던 그의 두 눈동자는 풀려 있었으며 초점을 잃고 있었다. 마치 백치가 된 듯 마냥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다 왈칵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는 한 참 동안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그들은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참혹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어린 소녀는 자신이 왜죽어야 하는지 모르는 듯 했다. '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내가 왜 죽어야 하죠?' 소녀는 자신에게 그렇게 물으며 빛 속으로 이끌려 올라가야 했다. 어떤 영혼들은 빛만 있고 형체가 없었다. 아마 태아의 몸으로 죽임을 당한 것 같았다. 자신이 죽은 것도 모르고 자식을 찾는 영혼도 있었다. '내 아들 못 보았소?' 하고 물어오던 할아버지, 엄마를 찾는 어린 영혼 들.... 백리향은 아직도 그 들의 슬픔이 느껴지고 있었다. 백리향은 다시 한번 피를 왈칵 쏟아내며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제 오장 사기돌출만인혈(邪氣突出萬人血)-2 사악한 기운이 돌출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를 뿌리니..... 태양의 불꽃이 산마루를 넘어 퍼져와 대소천태산의 곳곳에 떨어져 내렸다. 오 고산과 안유가 관제묘(關帝廟)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막 천태산위로 떠오를 무렵이었다. 관제묘에서 양소교를 만나기로 한 것은 그 쪽으로 올라가야 최대 한 빨리 산등성이를 넘을 수 있다는 백리향의 말을 따른 것이다. 비록 백리향 의 갑작스러운 변고로 산행을 같이 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서 약간은 부담스러 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한 참 동안이나 천태현으로 통하는 소로 위에서 허허로이 보이는 먼 들판을 바라보았다. 오고산이 갑자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필......." 안유는 사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백리향의 안부가 걱정되었 던 것이다. 그를 뒤로하고 산행을 하려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은 것이다. 그 것은 안유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이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 멀리 양소교가 손을 흔들며 뛰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색바지와 단삼을 입고있었는데 스스로도 산행에 단단한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심정일 순 없겠지?" 기쁜 듯, 촐랑거리며 뛰어오는 양소교를 바라보며 안유가 갑작스럽게 내뱉은 말이었다. 오고산은 사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들의 사매는........" 안유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너무나 단순하지요." * ** 백리향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이었다. "공자. 괜찮으십니까?" 백리향이 고개를 돌려보니 양정의 근심 어린 표정이 보였다. 백리향은 어저께 자신이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것을 기억해내고 쓴웃음을 지었다. "소생은 괜찮습니다. 잠시 화기(火氣)가 뻗쳐와 일어난 현상일 뿐입니다. 양대 협께 심려를 끼쳐 드렸군요." "도대체 어찌된 일이오?"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한 참을 멍하니 있더니 어 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저께 수많은 죽음을 보았습니다. 엄청난 마기(魔氣)가 뻗쳐 나와 양민을 학 살하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너무나도 슬퍼 피를 토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양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런 일이 있었소?혹시, 공자께서 잘못보신 것이 아니오?" 백리향은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마기가 너무도 강해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 지만 그 사악한 기운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는 소생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 이었습니다. 아마도 짐작하건대 백팔수라귀들의 소행 같습니다." 양정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따지듯 물었다. "어, 어디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여기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동쪽으로 백리쯤 되는 곳이었습니다. 호수 변의 조그마한 마을이었습니다." "....!!" 양정은 백리향의 능력을 인정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어저께의 일 을 말한 것은 주의를 주기 위해서 였다. 실제로 백팔수라귀를 만난 것은 그로 서는 두 번째 였다. 어려서는 몰랐지만, 오랜 수련을 통해 견성(見性)을 이룬 지금의 자신조차 그들의 사악한 기운을 뚫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강한 응집력을 갖고 있었다. 개개인의 마기가 모여 하나의 커다란 덩어리를 형성하 고 있었다. 그 마기는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으며, 자신과 다른 기운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공자! 그 곳이 어느 마을인지 확인하고 오겠소. 자세한 말은 다녀와서 들려주 리다."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게 하십시오." 양정은 서둘러 나가 버렸다. 백리향은 양정이 나가자 천장을 직시하기 시작했 다. 위로 대들보가 보였고, 여러 서까래와 지옥의 입구처럼 어두컴컴한 천장 이 보였다. 과연 자신은 희노애락(喜怒哀樂)의 네 가지 마음의 뿌리를 잘랐던 것일까? 백 팔수라귀들이라고 느끼는 순간 미움이라는 감정이 솟구쳤던 이유는 무엇일 까? 그들의 죽음을 보고 분노라는 감정이 솟구쳤던 이유는 무엇일까? 청정심 (淸淨心)을 잃고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대들보와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빙글빙글 도는 지도 몰랐다. 백리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도 빙글빙글 돌고있는 자신을 느꼈다. 문득, 옛날에 자신에게 스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무위이위(無爲而爲)함을 배우면 응신(凝神)이 기혈(氣穴)로 들어간다. 유월(六月)에도 갑자기 휜 눈이 날리는 것을 보게 되고, 삼경(三更=한 밤중)에도 둥근 해가 이글거림을 보게 된다. 물 속에서도 거센 호흡과 눈빛의 힘을 빌리고, 하늘 위로 헤엄치듯 돌아갔다가 다시금 내려와서, 대지의 공덕으로 먹여 키우라(食坤德). 아직도 가르침에 걸맞은 한 마디가 있으니 현중현(玄中玄) 이라, 무하유향(無何有鄕)이야말로 진리와 통하는 나의 집(眞宅)이다.' 백리향은 지금까지의 수련에 막연한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자 연대로 그러함(無爲而爲)을 깨달았을까? 한 여름에 흰눈이 내리고, 한 밤중에 태양을 보는 경지란 어떤 것일까? 현묘한 가운데 현묘 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대지의 덕을 먹으라는 말은 무엇인가? 무하유향이란 무슨 의미일까? *** 산 속에서는 해가 중천까지 와야 비로소 해는 산협을 뚫고 들어간다. 그 들이 언덕을 넘자 산 속은 컴컴한 어둠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들은 이미 온 머리카 락에 거미줄이 붙어 하얗게 빛나고 있었으며, 거추장스러운 옷이 나뭇가지에 걸려 서너 군데가 찢겨져 있었다. 산행을 한지 한 시진도 안되어 양소교는 그 만 울상이 되고 말았다. 오고산과 안유는 양지바르고 평평한 곳을 찾아 그녀 를 쉴 수 있게 하였다. "어휴~ 정말 난감하네. 이렇게 찾다간 평생을 가도 그 고인을 못 만나 보겠 네." 그녀는 자신의 아픈 다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리 무공을 닦았다고 할 지라 도 아무런 길도 없는 산 속을 헤집고 다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아가 은거고인(隱居高人)을 만나기 전에 은거고인(隱居故人)이 되면 어떡하지?" 안 유가 마른 건 량을 먹으며 놀리듯 말하자, 양소교는 혀를 낼름거리며 코웃 음을 쳤다. "흥! 걱정 말아요. 사형이 뻣뻣해지는 모습을 본 후에 고인이 될 테니까?" 오 고산이 약간 나무라는 듯이 말했다. "허~얼, 여자아이가 말버릇이 그게 뭐냐? 뻣뻣(　硬)이라니..." 그러자 양소교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더 좋은 단어도 알고 있어요. 대사형. 빳! 빳(　尸)!" *** 양정은 평생 이렇게 잔혹한 장면을 본 적이 없었다. 걸음, 걸음마다 시체였고, 피였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 다리가 흩어져 있었고, 그 주인을 알 수 없는 머리통이 나 뒹굴고 있었다. 이 곳에서 온전한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관군(官軍) 백 여명이 마을을 봉쇄했다. 그 뒤로 희생자의 친인척이거나, 혹은 호기심에 모여든 사람들로 꽉 차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백 여명의 관군은 사태 수습을 위해 마을로 들어섰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질 못 하고 있었다. 개 중의 병사들은 북방호족들과의 전란에도 참가했던 사람들도 있었고, 산중 의 도적들의 토벌대에 참가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목불인견의 참상 을 겪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병사들은 털썩 주저 않는 병사도 있었 고, 구역질을 토해내는 병사도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실 생각이오?" 양정이 답답하다는 듯이 묻자, 젊은 군관은 새파란 얼굴이 더욱 파래지면서 어 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당황해 하고 있었다. "소, 소관(小官)도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아! 정말이지 이런 참상 이란...." 이렇게 젊고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이 어떻게 절강성(浙江省)의 황암진(黃巖 鎭)의 부병관(副兵官)이라는 직책을 맡을 수 있었을까?양정은 참으로 답답 한 노릇이었다. 이 젊은 군관은 자신과 인사를 나누었을 당시만 해도 자신만만 해 했으며, 거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자신만만함과 거만함은 이곳 괄 창산(括蒼山 )기슭, 양정촌(良丁村)의 시체들과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고 없 었다.양정은 젊은 군관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먼저 술과 고기를 내오시오!" ".......?" *** "진의(眞義)란 본래 정성을 다한 마음으로 지켜 머무르고 흩어져 어지럽 게 되지 않도록 하는 마음이며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진리를 깨닫는 순간.) 처음 깨닫는 심정을 이르니라. 대저 동(動)함이 없는 것은 원신(元神)의 체 (體)이고, 감(感)하여 통(通)하는 것은 진의의 용(用)이니라." 백리향은 무위이위 함으로서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무위의 영역 안에 있 는 자신의 고향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찾아가도록 모든 인위적인 것(듣고, 느끼고, 보고, 말할 수 있는 감각기관을 버렸다. *** 술이란 정신적, 육체적 감각기관을 무디게 만든다. 평상시에 도덕성이 눈곱만 치도 보이지 않던 사람도 술기운에 철저한 도덕주의자가 되며, 애국심에 똘똘 뭉치던 사람도 갑자기 나라를 욕해대기 시작한다. 겁쟁이라고 불리던 사람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기는지 주먹질을 해대며, 평상시 인간의 모습으로 살다 가 변신술을 일으켜 개가되기도 한다.결코 즐겨 마시면 안 돼지만, 필요에 따 라선 많이 마시면 좋을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럴 때 였다. 병사들이 술기운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들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겠지만, 마시면 마실수 록 정신이 더욱 또렷해지는 것이었다. 병사들은 상관들의 지시에 따라 시체들을 운반했다. 될 수 있는 데로 잘려나 간 부분을 찾아 줄려고 노력은 했지만, 워낙 많은 시체들이 뒹굴다보니 생각만 큼 되지 않았다. 그 들은 될 수 있는 데로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해야 했다. 이, 삼일후면 시체들 이 부패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부패과정이 일어나기 전에 연고자들을 찾아 인계하여야 한다. 연고자가 없는 시신들은 별도로 화장을 하고 강물에 흘 려 보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알아내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범인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의무감이라든지, 진급을 위 한 욕심이라든지 하는 차원을 넘어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는 인간애 였다. 산 속으로 대대적인 수색대를 파견하고, 현상금을 걸고, 마을에 수상한자들을 찾아내어 조사를 벌려야 한다. 양정도 술을 한 사발 들이키고 뭔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무엇 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양정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 시체들을 살펴보기로 했다. 수많은 시신들을 살펴 본 결과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그들 은 기마병들이었다. 곳곳에 말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백 여 구가 넘는 말들과 함께 이동하려면 상당한 주의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들은 어떤 식으로 아무 소리 없이 이동할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은 아주 쉽 게 풀 수 있었다. 솜뭉치가 가득 담긴 보자기를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말발굽 에 씌었을 것이고 재갈을 입에 물려 이 곳 가까운 곳까지 끌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런 번거로움을 자초했을까? 한 마을 습격하는데 굳이 말 들을 동원할 필요가 있었을까? 양정은 고개를 들어 주위의 산세를 살 펴 보았 다. 서, 남쪽으로는 대소천대산이 접해있고, 그 반대에는 곤륜산(崑崙山)과 산 맥이 자리잡고 있다. 만약 그 들이 산에서 산으로 이동한다면 그 종적을 찾기 가 쉬울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매우 날카로운 도와 창과 활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체들의 절단 면이 깨끗하고 확실했으며, 모든 시체에서 상처라는 것이 없었다. 그 들은 한 번의 칼질에 모든 것을 잘라내었고, 확실하게 꿰뚫었으며, 정확하게 맞추었 다. 그들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양정은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말을 타고 있고, 도망치는 사람을 향해 칼질을 한 다면 이런 솜씨를 발휘할 수 있을까? 물론 두동 강이 내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이들처럼 정확하고 완벽하게 자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살기 위해 몸 부림 칠 테니까....이들은 완벽한 살인귀들이었으며, 진짜로 살인을 즐기는 그 런 족속들이었다. 하얀색 옷이 걸쳐진 팔이 하나 뒹굴고 있었다. 손에 주름이 가득 진 것으로 보 아 노인의 것이었으리라. 얼마 걷지 않아 또 다른 팔이 하나 나타났다. 아마 그 들은 노인의 팔을 자르고, 도주하는 노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즐기는 듯 뒤따라 갔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팔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두 다리는 성 했으므로 계속해서 도망쳤을 것이다. 얼마안가 역시 다리가 하나가 뒹굴고 있 었다. 그 들은 다리를 하나 자르고 꿈틀거리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양정은 더 이상 바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보지 않아 도 다음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지 쉽게 상상이 갔다. *** '깊숙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견성(見性=본성을 봄)에는 팔식(八識)이 함께하 고 있기 때문이며, 참으로 돌아갈 곳이 없는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최후에는 이러한 상태조차 단 번에 깨트려 버려야 진정한 견성(眞見性)을 얻을 것이며, 진정한 돌아갈 곳이 없는(眞不還) 나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백리향은 눈을 떴다. 더 이상 천장은 돌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백리향은 벌떡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전에 사부에게 받았던 자전검을 집어 들었 다. 맑고 청량한 소리와 함께 검이 뽑혀져 나왔다. 온 방안이 검광(劍光)에 휩 싸일 듯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저에게 이 검을 주실 때 말씀하셨습니다, '오욕칠정과 모든 악한 것을 베어버려라' 문득 저의 고향을 찾고 보니 이 세상의 악하고, 더럽고, 추 한 것이 모두가 나의 심상(心象)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이 자 전검으로 스스로를 자르려 합니다." 팔식이란 오관과 몸을 통하여 인식할 수 있는 여덟 가지의 작용을 말한다. 안 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분별식 (分別識), 장식(藏識)이 바로 그것이다. 백리향은 검을 높이 치켜올렸다. 그리고 팔식과 자신을 베어버렸다 제 오장 사기돌출만인혈(邪氣突出萬人血)-3 사악한 기운이 돌출하여 수많은 사람이 피를 뿌리니..... 양정은 부식토와 사암으로 이루어진 산로를 따라 올라가며 거미줄이 파괴되었 거나, 꺾여진 풀이 있는지, 부러진 나뭇가지가 있는지, 혹은 말들의 배설물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놈들은 용의주도하였으며, 전혀 빈틈을 찾을 수가 없었 다. 말을 다루는 기술 또한 중원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섬세한 것이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포기를 하거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돌렸을 것이다. 하 지만, 양정은 보통의 사람과는 틀렸다. 그는 막연하고 자신감은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 길 외에는 말들이 다닐만한 곳이 없다라는 것이었다. 양정은 단순한 사람이지만 단순한 만큼 집요했다. 그는 단서를 찾 는 것을 포기했다. 그 대신 경공을 펼쳐 걸음을 빨리 했다. 놈들은 말들을 이끌 고 절대로 빠른 행보를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그가 향하여 달리기 시작한 산로(山路)는 바로 대소 천태산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이었음을..... *** 태허(太虛)의 상태가 이러할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으며, 중 력도, 시간도 없는 오로지 공간만이 있는 적막의 세계. 그 곳에서 하나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찬란한 아름다움이 태초의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태양이 중천(中天=상단전)에 오르자 엄청난 굉음과 함께 폭발하기 시작했다. 폭발한 태양의 파편은 곧 별들이 되어 백리향에게 쏟아졌 는데 보이는 것이 모두가 불꽃이요 별들이었다. 그 것은 환희의 극치였고 쾌락 의 정점이었다. 점차 그 것들은 속도를 잃어 가며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는 데 마치 별들이 눈송이가 된 것처럼 떨어져 내렸다. 백리향은 황홀감에 도취되 어 그 눈송이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송이들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머리에 서, 어깨에서 삭으러 들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러자공간이 열리며 현실의 세계 가 드러났다. 그에게 무엇인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백리향으로서는 너 무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 백리향은 깜짝 놀라며 경악을 터트리고 말 았다. "엇! 이, 이런..." ***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한 기운을 양정은 느낄 수 있었다.왈칵하고 두려 움이 솟구쳐 올랐다. 이런 것을 마기(魔氣)라고 해야 하나? 양정은 평생 처음 으로 이러한 기운을 느껴보았다. 목이 타 들어가는 듯하고 식은땀이 비 오듯 솟구쳤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근처에 놈들이 있는 것이다. 진원지기를 끌어 모으고 한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보호하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기 시작했다. 그의 귀에 말들의 푸드득거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왔다. 그는 긴장하며 살짝 엎드린 채 나지막한 구릉을 타고 올라갔다. 얼 마나 올라갔을까? 말울음소리가 바로 앞에 들리는 듯했다.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기고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넓은 공터가 나오며 백 여 필의 말들이 풀 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말들은 두 눈과 입을 제외하고는 얇은 철로 만들 어진 악마의 모습을 한 가면이 쉬어져 있었고, 전투용 마갑(馬甲=기마병들이 전투시 말들에게 입히는 갑옷)이 걸쳐져 있었다. 순간, 양정의 목덜미로 차갑고 섬뜩한 바람이 스치듯 지나갔다. 자신의 입에 서 입김이 날 정도로 주위의 공기가 갑자기 냉랭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 의 뒤에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그 만큼 추웠고 두려웠다. 양정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수 십 명에 달하는 악마들의 모습 이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탈을 뒤집어쓴 놈들의 모습이었다. 마면(魔 面)속의 두 눈은 회색빛으로 감돌았으며, 무심한 듯 양정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의 살기어린 눈도 아니었다. 마 치 영혼을 잃어버린 듯한 그런 눈이었다. 그 들중 한 명이 천천히 귀두도를 들 어올렸다. 양정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전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쉭!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퍼런 섬광이 자 신의 목을 향해 날라 왔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였다. 갑자기 말들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떤 말들은 뒤집어지 기도 하고 거품을 입에 물고 숲속으로 뛰어들어가기도 했다. 백 여 필이나 되 는 말들이 괴성을 지르며 미쳐 날뛰자 마면의 사나이들이 당혹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양정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만월도가 자신의 일촌 앞에 빛을 번뜩 이고 있었다. '양대협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 양정의 머릿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퍼뜩 정신을 차린 양정은 자신 의 부채로 만월도를 쳐내며 자신이 왔던 길을 다시 뛰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대 부분의 마면인들은 자신들의 말들을 돌보는데 여념이 없었고, 두 세명의 마면 인들만 자신을 뒤쫓고 있었다. 양정은 자신의 경공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의 별명이 소선풍 이라는 것에 항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림을 종횡무진 하였지만, 자신 보다 빠른 발을 가진 사람을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길 치였다. 양정은 이리저리 숲을 헤치며 다녔지만 자신이 왔던 길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 어느 정도 쉬고 난 오고산과 안유, 양소교일행은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걷는 오솔길은 암흑색의 부식토로 덮여 있었으며 사암(砂巖)들과 나뭇 잎들이 뒹굴고 있었다. 산길을 굽이돌아 내려가자 험한 내리받이가 나오며 조그마한 냇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햇살을 받은 냇물은 차갑고 반짝거리자 그들은 고인을 찾겠다는 집 념은 이미 사라지고 수려한 경치에 빠져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 다. 어느덧 해는 중천에서 서서히 산등성이로 향하고 있었다. 이제는 산행을 멈춰 야 할 때가 왔다. 이 곳은 다른 산과 달리 원시림으로 가득 차 있어 밤이 빨리 찾아온다. 자칫 늦게 출발했다간 길을 잃고 헤매기 십상이었다. 오는 길은 오고산과 안유가 앞장섰지만, 가는 길은 양소교가 앞장섰다. 무엇 이 그리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활기차게 걷고있었다. 산등성이를 두어 번 넘었을까? 항상 앞서가던 양소교가 보이지 않았다. 오 고 산과 안 유는 양소교가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어 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제야 그들은 불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꺄아아악!" 어디선가 여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틀림없는 양소교의 목소 리였다. 안유는 깜짝 놀라며 오고산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고산은 이미 그 곳에 없었다. *** 백리향은 제발 자신이 늦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영체이탈(靈體離脫)을 한 상 태라 영통으로 말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었지만 백팔수라귀들에게는 물리적이 든, 정신적이든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가 없었다. 그 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을 방어하고 있었다. 오로지 살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영체(=영혼과 육체)를 합일하고 벌떡 일어났다. 그 가 뜻을 일으키자 어느새 그의 몸은 대소천태산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양소교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커다란 짐승들은 뭐란 말 인가?지독한 살기를 흘리며 크르렁 거리는 이 괴물들은 뭐란 말인가! 마치 지옥에서 금방 튀어나온 듯한 귀면(鬼面)을 하고 붉은 전포(戰袍)로 몸을 두 른 채 자신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이 괴물들은 뭐란 말인가! 양소교는 조그만 산로를 걷다가 말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야생마를 포획 하여 자랑삼으려는 욕심에 그녀는 소리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러다 냇가에 물 을 먹는 말들을 발견할 수 있었으나 백팔수라귀들이 자신들의 애마를 찾기 위 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음을 그녀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차갑고 섬뜩한 한기(寒氣)가 양소교를 덮쳐왔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하 였으며 머리는 공포로 텅 빈 듯 하였다. 여러 마리의 괴물들이 다가서기 시작 했다. 양소교는 신음인지 울부짖음인지 모를 괴성을 토해내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가 채 세 걸음을 걷기도 전에 거대한 느티나무에 막혀버리고 말았 다. 쥐가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도 무는 법. 양소교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 다. 그러자 괴물들의 손가락 관절도 따라서 구부려졌다. 양소교는 괴물들의 붉 디붉은 눈동자에서 귀두도를 쥐어 들어 자신의 목을 자르려는 욕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손이 등뒤의 검으로 점점 다가설수록 놈들의 눈은 흥분이 이는 듯 눈망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그녀의 귓가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멈추어라! 안 그러면 네가 죽는다!" 양소교는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저 멀리 오고산이 자신 의 뒤에서 괴물들을 노려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이미 검이 들려 져 있었으며 추호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악귀들은 오고산을 발견하고는 이채로운 눈빛을 발하였다. 그것은 새로운 먹 이를 발견한 맹수의 눈빛이었다. 그러자 그들의 살기가 더욱 짙어지며 주위의 바람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우연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은 요동을 치며 잎사귀들을 떨어트려 휘날리 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까마귀가 까악 까악 거리며 푸드득 날아올랐다. 살기(殺氣)란 무섭고 거친 기운을 말한다. 타인을 살해할 의도가 있으며 독살 스럽고 악랄한 기운이다. 때려눕히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오체분시하고 갈가 리 뜯어 죽여야 갰다는 의지의 기운이다. 오고산은 그들이 내뿜는 지독한 살기를 통해서 살인의 욕망을 읽을 수 있었 다. 사람들은 살인에는 그에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 사 랑, 질투, 금전, 정신질환, 분노, 객기, 고의성 없는 우발적 살인....... 하지만 살 인마(殺人魔)들에게 이유란 있을 수 없다.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단지 그것을 즐길 뿐이다.오고산은 그들의 눈빛에서 더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오고산은 흘낏 양소교를 바라보았다. 한 참이나 그녀를 처연히 바라보다가 그 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교아야. 얼른 떠나거라! 만약, 사부님께서 나를 찾으시거든 멀리 여행을 갔다 고 이르거라." ".........!!" 오랜 수련을 거친 무인은 방사(放射)되어 나오는 기세만으로도 상대의 능력 을 감지할 수 있다. 오고산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자신의 혼자만으로 족할 것이다. 그는 양소교를 뒤로하고 천천히 검을 들어 올 렸다. 그것은 양소교를 끝까지 지키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그 때였다. "사람이 의(義)를 버리면 오래 살수 있을 지는 몰라도 금수(禽獸)와 같이 될 것 임을 사형은 어찌 하겠습니까?"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며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사, 사형!" "사제!" 안유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오고산 옆으로 다가와 섰다. "비록 태어난 씨(種)는 다를지라도 한날 한시에 죽기로 맹세하였거늘 어찌 먼 저 가시려 합니까?" "..........." 오고산은 아무런 말없이 안유를 바라보았다. 안유도 놈들의 무서운 살기를 느 꼈을 것이며 결코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을 알 것이었다. 두 사람 모두 천애고아로서 일찍부터 사부의 눈에 뛰어 제자가 된지도 어언 이십 여 년......그들은 무언(無言)으로서 충분히 서로의 신뢰와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고산은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눈썹이 파르르 떨 려왔다. 그러나 그의 그런 내면과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냉랭하게 말했다. "이제야 말하겠지만...... 난 자네가 싫어. 그때 맹세한 것은 전부 거짓말이야." 자신이 사매를 데리고 떠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폭언(暴言)을 하고 있음을 안유가 어찌 모르겠는가. 안유는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소제도 이제야 말하겠지만...... 사형의 그 못생긴 얼굴이 내내 못마땅했었소." 그러자 뒤에서 양소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말하겠지만...... 소매도 두 분 사형이 싫었어요. 형편없는 무공에 의기 양양한 얼굴이라니....." 양소교는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공포란 상대적인 것이다. 충신은 주군을 위 해서, 효자는 부모를 위해서, 열녀는 자신의 지아비를 위해서 아무런 두려움 없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죽고자 다짐한 사람들에게 공포가 어찌 스며들겠는 가! 또한 그들의 뜨거운 우애 앞에 어찌 두려움이 설자리가 있겠는가! 양소교는 당당하게 안유의 옆에 섰다. 그러자 괴인들의 눈빛은 더 이상 광기로 번득이지 않았다. 그것은 무인의 눈이 었으며 이글거리는 전사의 눈이었다. 그들의 안면이 실룩거렸는데 마치 웃는 것처럼 생각되어진 것은 단지 양소교의 착각이었을까? *** 백리향이 괄창산의 산맥을 따라 올라가 악귀들이 머물렀던 조그마한 구릉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팔수라귀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가 확인할 수 있 었던 것은 양정이 남기고 간 흔적뿐이었다. 그 흔적은 대소천태산자락으로 이 어지고 있었다. *** 깎아지른 듯한 절벽, 양정은 손을 뻗어 절벽의 차가운 감촉을 마음껏 느꼈다. 녹색의 이끼에서 느껴지는 습한 느낌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생전에 마지막 으로 느낄 수 있는 감촉이었기에.... 양정은 뒤돌아보며 자신의 독문병기(獨門兵器)인 팔방풍우선(八方風雨扇)을 어루만지듯 꺼내며 말했다. "덤벼라!" 그러자. 자신을 그렇게 뒤쫓아오던 악귀들의 눈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마 면이 실룩거리는 것이 마치 그들이 웃는 것 같았다. 그 들의 눈빛은 더 이상 영혼을 잃어버린 그런 회색빛의 눈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전 사의 눈빛이었다. 그들도 자신의 도를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 돌연히 악귀하나가 귀두도를 휘두르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러자 쉬익하 는 파공음과 함께 태양 빛에 반사된 도광(刀光)이 번뜩이며 안유의 머리로 날 아왔다. 오고산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안유를 밀치며 자신이 도신(刀身)을 받아내었 다. 까강! 순간, 불똥이 사방에 튀어 오르며 오고산의 한 쪽 무릎이 굽혀졌다. 그만큼 악 귀의 도세(刀勢)는 무거웠고 강력했다. 역발산기개세의 힘을 소유한 오고산이 한 쪽 무릎을 꿇을 정도일진데 안유가 어찌 악귀의 도를 받아 낼 수 있었으랴. 오고산의 임기응변은 옳았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수 없는 일. 안유와 양소 교는 악귀를 향해 맹공을 퍼붓기 시작했다. "맹호과격(猛虎過激)!" "난화분검(亂花分劍)!" 그러나 악귀의 몸이 회전을 하며 한 바퀴를 돌면서 도신을 쭈욱 내뻗었다. 그 러자 오고산이 소리치듯 말했다. "부딪치지 마라!" 오고산의 말에 안유는 정권(正拳)을 서둘러 회수하였으나 비교적 무공이 낮 은 양소교는 안유에 비해 공수의 전환이 늦었다.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양소 교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에 뒹굴고 말았다. "악!" 양소교가 쓰러져있는 곳으로 몸을 날린 악귀는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한번 도 를 내리쳤다. 엄청난 파공음과 함께 악귀의 귀두도가 양소교의 머리를 가르려 는 순간, 하나의 검광이 뻗쳐오며 '까강!'하는 파열음과 불똥이 튀었다. 오고산 이 몸을 날려 악귀의 귀두도를 다시 한 번 받아낸 것이었다. 악귀는 순간 의외라는 듯한 눈빛으로 오고산을 바라보았고 오고산은 무릎을 꿇은 채 충격에 못 이겨 검을 쥔 두 팔을 덜덜 떨고 있었다. 안유는 악귀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를 이용해 다시 한 번 정권을 날렸다. 그것 은 안유의 모든 내공을 쏟아 부운 것으로 장중했으며 빨랐다. 뒤늦게안유의 정권을 발견한 악귀는 잠시 놀라며 피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퍼억!" 안유의 정권은 그대로 악귀의 면상을 갈랐다. 안유는 자신의 공격이 적중했음 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두 번째 공격을 가하려는 순간 그만 멈칫거리고 말았 다. 바위도 부술 수 있는 자신의 주먹을 맞고도 악귀는 간지러운 듯 씨익 웃고 있 는 것이 아닌가! 안유는 그만 놀라기도 하고 가슴이 진탕되어 잠시 정신을 놓 고 말았다. 안유는 그제야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알았다. 다수의 악귀들을 상 대로 싸우려했던 자신이 참으로 비참했다. 비록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만 사형과 사매와 합심해도 한 놈의 악귀를 이기지 못하다니....... 망연자실해 있는 안유를 향해 악귀의 도가 빛을 뿌리며 날아왔다. "안돼!" 오고산은 발작적으로 안유를 밀치려 했지만 그의 팔은 이미 탈골이 된 상태였 다. 그 때였다. 어디선가 수십 개의 빛이 악귀의 주요 경혈을 향해 날아왔다. 그 빠 르기가 마치 전광석화와 같아 악귀는 그만 대경실색을 하며 도를 회수하고 몸 을 뛰어 날아 올렸다. 쉬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암기는 무심히 땅속 으로 박혀들고 말았다. 그러나 암기는 한 번에 그치지 아니하고 또 다시 비 온 뒤의 무지개처럼 빛을 뿌리며 악귀의 몸으로 날아들었다. 쉬식! 악귀는 다시 한번 대경하여 몸을 회전시키며 암기를 피하려 했으나 이미 그 의 몸은 수십 개의 암기로 고슴도치가 되어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악귀는 그만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그러자 짧은 경악성과 함께 멀찌감치 사태를 주시하던 네 명의 백팔수라귀들이 날아와 땅 바닥에 뒹구는 악귀의 주위를 엄중호위하며 사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순간 숲속에서 뿌연 안개가 스며들더니 온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안개는 보 통의 안개보다 더욱 짙었으며 무거워 바람이 불어도 한 치의 움직임이 없었 다. 결코 자연발생적인 안개가 아니라 인위적인 안개인 것이다. 악귀들은 눈빛 을 번뜩이며 호흡을 멈추고 촉각을 곤두세우기 시작했다. 얼마나 있었을까?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하였다. 숲은 여전히 고요했으 며 냇가는 햇빛에 반짝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나 단지, 오고산과 안유, 양 소교가 감쪽같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때 끄응하는 소리와 함께 땅에 곤두박질쳤던 악귀가 일어났다. 그의 몸을 덮 친 암기는 다름 아닌 솔잎이었으며 솔잎들은 정확하게 한치정도의 깊이로 몸 에 꼽혀져 있었다. 네 명의 백팔수라귀들은 상대의 무공에 경악을 금치 못하 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팔방풍우란 동북쪽으로는 염풍(炎風)이 불며, 동남으로는 경풍(景風)이, 서남 으로는 양풍(凉風)이, 서북으로는 여풍(麗風)이, 동방으로는 조풍(條風)이, 남 방으로는 거풍(巨風)이, 서방으로는 요풍(　風)이, 북방으로는 한풍(寒風)이 부 는 것을 말한다. "흐흐흐! 나의 차가운 바람 맛이 어떠냐?" 양정의 팔방풍우선이 마면의 사나이의 어깨에 꽂혀 있었다. 마면인의 얼굴이 실룩이고 있었다. 무엇인가 말하려는 듯 했다. "괜찮군! 중원인치고는 ...." 음성의 고조를 느낄 수 없는 탁한 목소리 였다. 그 한마디를 내뱉는데 상당히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얼굴이 또 다시 실룩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변방에 부는 바람에 비할 바는 못되지..." 마면의 사나이의 도가 양정의 배를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정은 자신의 아 랫배를 관통한 도와 마면인을 번갈아 보았다. 양정은 상대의 어깨를 가격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배를 상대에게 허락하고 만 것이다. 이런 것이 죽는다는 걸까? 양정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죽음과 삶이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나지 않음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에 백리향이 자신에게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란 참으로 비참합니다. 평안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영원히 죽지도 살 지도 못하며 이생에서 후생으로 윤회를 반복해가며, 자신의 업을 치러야 하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땅 밑에서 지옥을 찾지만 사실은 눈앞의 광경이 지옥입니 다. 이러한 업을 가르고 윤회의 법칙을 벗어난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 합니 다.' 그래서 일까? 자신의 죽음이 실감나지 않는 것은..... "허허! 나는 이제 가겠구먼? 나는 가야 할 곳이 있지만, 자네는 과연 어디로 갈 텐가?" 양정은 쓰러지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죽음을앞 두고 보니 저들이 참으로 불쌍했다. 그 들이 뿜어내는 마기가 얼마나 어이없 는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 들이야 말로 참으로 비참한 사람들이었다. 양정은 눈꺼풀이 무거워짐을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제 육장 요간노검광망한(腰間老劍光芒寒)-1 허리에 찬 고검은 차고 날카롭도다. 아버지! 지상(地上)은.... 너무나 춥고 어둡습니다. 그 곳은 어떠한 지요. 지상은.... 참으로 웃기는 세상입니다. 소자의 손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이제 타인의 손에 제가 죽는군요. 죽일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니.... 얼마나 웃기는 세상입니까? 아버지! 이제 소자는 아버지 곁으로 갈려 합니다. 이곳은 소자가 살기에는..... 너무 춥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양정의 감겨진 두 눈에서 두 줄기의 물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자신의 하복부에서 느껴지던 고통은 사라지고 온 몸이 상쾌해지며 날 아오를 듯 가벼워짐을 느꼈다. 그가 감겨졌던 눈을 뜨자 저 멀리 하늘이 열리 며 다섯 색깔의 아름다운 빛이 내려오고 있었다. 양정은 그 빛을 바라다보며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오! 아름답구나!" 양정은 그 아름다운 빛이 자신을 부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 빛 이 영혼의 세계와 현실을 잊는 징검다리라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주저 없이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자신의 걸음은 하나의 빛 덩어리에 의해 저 지되고 말았다. 그 빛은 하나의 인형으로 변하였는데, 자신이 열 두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그 인형은 양정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양정에게 다가와 그를 꼬옥 안아주었다. "아, 아버지...." 자신의 아버지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또한 자신의 아버지를 보듬어 안았다. "정아야....보고싶었다." "저, 저도 보고싶었어요. 아버지." 어느덧 양 정 또한 열두 살의 어린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양정은 옛날 어 린 시절의 아버지의 까칠까칠한 볼의 느낌을 느끼며 한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한없이 우는 양정을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며 그의 헝클어진 머리카 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정아야...세상은 그리 춥고 어두운 곳만은 아니란다. 네가 진실로 따뜻한 세상 을 찾고자 한다면 현생에서 찾아야 할 것이야. 저승은 현생만큼이나 춥고 어둡 단다." 아버지는 어린 양 정을 아련히 쳐다보며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오색의 빛 속으로 걸어갔다. 그제야 하늘에서 쏟아진 그 빛은 자신의 것이 아 닌 아버지의 것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양정은 아버지를 그렇게 보 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항상 하 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아버지를 저승으로 보 내고 말았던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아버지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양정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빙그레 웃어주었 다. 양정은 아버지의 웃음 속에서 많은 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알고있다고.... 자신도 항상 사랑하고 있었다고..... 아버지는 그렇게 양정의 곁을 떠났다. 아버지가 오색으로 가득한 빛 속으로 살 아지자 갑자기 우르릉하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빛이 휘몰아쳐 왔다. 양정은 그 찬란한 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양정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빛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고, 시커먼 천 장만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하복부에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으며 그의 귓가 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비록 도(刀)가 복부를 관통하기는 하였지만, 오장육부 에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양대협께서는 무사하실 겁니다." 양정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인가?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금방 자신이 겪었던 아버지와 의 만남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앗! 아버지가 깨어나셨어요!" 양소교는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는 양정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부친에게 로 달려왔다. 그녀의 얼굴은 불안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부친의 손을 꼬옥 잡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기분은 어떠셔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참으려는 듯 매우 신중하였다. 양정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양소교를 바라다보았다. 그제야 양정은 아버지가 꿈에서 현신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한 사람의 아버지이기도 한 것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를 사 랑하는 만큼 자신의 외동딸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정은 자신의 외동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보면 모르겠냐?....죽다 살아난 기분이지......" 양소교는 그제야 얼굴에 안도감이 흘렀고 웃음이 피어올랐다. "헤헤헤~" 양소교의 뒤로 오고산과 안유의 근심 어린 얼굴도 보였다. 양정은 제자들을 바 라보자 새삼스러운 정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 람만이 느끼는 그런 감정이었다. 양정은 따뜻한 미소를 베어 물며 제자들을 찬 찬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의 미소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동안 뭔 짓을 저질렀는지 오고산의 팔에는 부목이 붙여진 채 붕대로 팔을 칭칭 감아놓고 있었고 안유의 얼굴에는 심하게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이 아닌 가! 새삼스러웠던 감정은 말끔히 사라지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산아야, 그리고 유아야. 내 배에 구멍이 뚫렸을 텐데, 잘 틀어막았느냐?" 양정의 심정을 알 길이 없는 오고산과 안유는 상쾌한 농담으로 사부를 즐겁 게 하려 했다. "아교(阿膠=풀)로 대강 붙여놨는데 나중에 어찌될지 장담할 수 없습니다. 후후 후!" "떨어지면 다시 붙이면 되지요. 후후후!" 그러나 사부의 얼굴은 절대로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거의 살기마저 내비치고 있었다. 오고산과 안유의 웃음이 점점 삭으러 들기 시작했 다. 그들의 웃음이 완전히 삭으러 들자 이번에는 양정이 괴소(怪笑)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만약 내 몸이 부실해진다면, 네 놈들의 몸 또한 부실하게 될 것이다. 약속하지!" 오고산과 안유는 사부의 살기 어린 괴소에 갑자기 핼쑥해지며 두 손을 맞잡 고 허리를 숙였다. "사부님의 원기를 회복할 약재를 준비해 올릴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 오." 그리고 그들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씁쓰레하게 바라보던 양정은 자신의 딸을 바라보며 말했다. "교아야 잠시 쉬고 싶구나. 가서 사형들이 뭔 짓거리들을 하는지 알아보고 오 너라." 양소교는 망설이는 듯 하더니 부친의 말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그녀가 문밖으 로 사라지자 게슴츠레한 눈으로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백리향은 그가 무엇이 궁금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이유 가 궁금했던 것이다. "소생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양대협께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귀면(鬼面)의 사 나이들은 양대협의 몸에서 도를 빼어내고 있었지요." 그러자, 양정은 무엇이 그리 통쾌한지 박수를 치며 크게 웃었다. "크,하하! 보셨소? 나도 그놈의 어깨에 부채를 쑤셔 넣었지요. 카카카!"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봤습니다. 그 들중 한 명이 자신의 어깨에서 부채를 뽑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더군요." 그러자 양정은 몹시 분개한 듯 소리를 질렀다. "이런 도둑놈들!" 백리향은 양정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도를 양대협께 드리더군요. 제가 그 도를 받았습니다." ".....!" 양정은 매우 어리둥절해 졌다. 무인에게서 자신의 무기는 곧 생명과도 같은 것 이었다. 자신의 부채는 그들에게 있어서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신에게 도를 건네줄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도둑놈들이야! 내가 그것을 얼마나 힘들게 만들었는데...그건 그렇고 공자께서는 그들과 접전(接戰)을 벌이지 않으셨소?" 백리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들에게는 싸울 의사가 없어 보였습니다." 양정은 참으로 딱하다는 듯이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살생을 싫어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도 놈들에게 혼 줄을 내 줘야 했습니다. 놈들의 천인공노할 짓을 보지 못하셨소?" 양정은 아직도 분에 못 이기는지 씩씩거리고 있었다. "소생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들의 만행에 피를 토한 사람입니다. 하 지만 양대협께서는 당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린 상태라 잠시도 지체할 수 없 었을 따름입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지 씩씩거리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감격이 흐 르고 있었다. "이 늙은 목숨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내가 양대협을 안고 떠나려 할 때, 그들이 말하더군요. 다시 만나게 될 때에 는 머리를 자르겠다고 말입니다. 나에게 그렇게 말하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정은 이빨을 으드득 갈며 분노를 터트렸다. "건방진 놈들! 난 그들과.......아니 그 들중 하나와 백 여 합을 싸웠소! 그 놈은 운이 좋았을 뿐이오!" 백리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들은 협박의 의미로서 한 말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들은 양대협에게 도를 들이 되기 싫으니 다시는 자신들을 뒤쫓지 말라는 의미 로 들렸습니다. 양대협께서는 죽음도 두려워않고 통쾌하게 싸우셨으며, 당당 히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러한 점이 그들에게 존경을 갖게 했나봅니다. 그 들은 양대협을 전사로서 인정한 것입니다." 양정은 '끄응'하는 신음소리를 내며 모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마치 중얼거리 듯 말했다. "그들은 전사가 아니오. 그냥 살인귀일 뿐이지....." 백리향은 양정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적에게 목숨을 구원받다 니....차라리 그들에게 목숨을 잃는 것이 나았으리라. 하지만 백리향으로서는 이보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양정은 명예 를 잃어버렸지만 새로운 생명을 얻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자리에서 일어나 양정에게 말했다. "소생이 나가서 원기를 보충할 수 있는 약재를 구해볼 터이니 그 동안 푹 쉬도 록 하십시오." "........" 양정은 아무 말 없이 멍하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그가 고통스러운 것 은 외상(外傷)이 아니라 마음의 상처일 것이다. 백리향은 한 숨을 내쉬며 문 을 열고 밖을 나섰다. 객방을 나서 전원(前院=객방들 앞에 놓여있는 넓은 마당.)에 나서자 양소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수줍은 듯 다가오더니 장읍(長揖)을 올렸다. "소녀가 경망스러워 이제야 인사를 드리는 점 용서하세요. 저희 사형제를 구 해주시고 부친까지 구해주시니 무어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양소교가 남자처럼 장읍을 취하자 백리향은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똑같이 장 읍을 올렸다. "양대협께서 건재하심은 천운이 보살핀 것으로 소생이 한 일은 극히 적습니 다. 부디 예를 거두십시오." 양소교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백리공자님은 뛰어나신 무공만큼이나 겸손하세요." 그녀의 얼굴은 어느덧 홍조(紅潮)를 띄우고 있었다. 백리향도 예를 거두며 말 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런데 두 분 사형께서는....." "대사형과 둘 째 사형은 아버지가 드실 약재를 구한다고 천태현으로 향하셨습 니다." "오! 정말 잘 되었습니다. 소생이 직접약재를 구하려 하였는데.....두 분이 가셨 다니 자칫 불필요한 걸음을 할 뻔하였습니다." 그러자 양소교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두 분 사형은 의학(醫學)에 문외한(門外漢)이라 절대로 믿을 수 없어요. 백리 공자께서 직접 약재를 조제해 주신다면 아버지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듯 한 지라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소생이 직접 나서 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백리향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성큼 걸음을 옮기자 양소교는 당황해 하며 말 했다. "잠깐, 소녀가 공자님을 안내하겠습니다. 천태현의 곳곳은 소녀가 잘 알고 있 답니다." "아! 그러십니까?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살인 후의 기분이란 참으로 더럽다. 죽어 가는 자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되며, 수 없이 반복되는 악몽에 시달려야 된다. 그래서 그는 살인이 이루어지기 전날 과 후에는 몽혼향(夢魂香)을 피워 정신을 정화시킨다. 그러고 보면 살수라는 직업은 참으로 고약한 것이다. 타인의 죽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으니 말이다. 이 험난하고 혐오스러운 세상에서 자신의 한 몸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그는 오늘 또 다른 생명을 앗아가야 한다. 이러한 현실이 그는 슬펐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것 외에는 없었다. 그 는 어려서부터 길러진 살수였고, 그 외에 일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최대한 편하게 몸을 누이며 눈을 감고 호흡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스스로 에게 최면을 걸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쫓아내기 시작했다. '그는 죽은 자이다. 그는 죽은 자이다. 그는 죽은 자이다........" *** 장터에서 울리는 사람들의 호객(豪客) 소리, 값을 흥정하는 소리, 어린아이들 의 떠드는 소리 그 모두가 생생한 삶의 소리였고,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였다. 백리향은 이런 왁자지껄한 소리에서 생명이 꿈틀거림을 느꼈다. 역동적인 삶 이 살아 숨쉬는 공간, 시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 백리향을 즐겁 게 하고 있었다. 장터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 극한 무리는 곧이어 군중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백리향과 양소교도 궁금증 을 참지 못하고 군중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군중이 생성되는 원인을 알고자 한다면 군중의 한가운데를 보면 될 것이다. 모 든 군중의 눈이 쏠려있는 곳, 그리고 군중의 모든 응집력이 모여 있는 곳, 그곳 을 바라보면 군중이 왜 모여있는지 알 수 있다. 그 곳에 지금 살벌한 기운을 쏟아내며 두 명의 사나이가 검을 겨누고 있었다. 이 두 사나이가 군중을 생성 시킨 장본인들이었다. 백리향과 양소교는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머리를 기웃거리며 두 사나이들 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소교는 '엇!'하는 탄성과 함께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들을 알고 계십니까?" 백리향이 의아한 듯 묻자 양소교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중년의 검사는 소녀로서도 모르겠으나 저 자식은........저 공자는 바로 장백부 님(=장양)의 친자(親子)이지요." "......?" 검을 쥔 젊은이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은 온 통 땀으로 뒤범벅되 어 있었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와 반면 삼십대 중반의 무사는 검을 빼어들 생각도 없는 듯 팔짱을 끼고 있 었으며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마치 쥐 앞에선 고양이처럼 당당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백리향의 눈에 비친 중년의 무사. 그의 눈은 작았지만 강렬했다. 얼굴에는 온 통 구레나룻이 가득했고 의복은 남루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는 야수와도 같은 맹렬함이 있었다. "내, 내가 누군지 아는가! 육합문의 소소검 장지충이 바로 나다." 장지충은 자신의 상대가 육합문의 위명(偉名)앞에 무릎을 끓기를 바랬다. 아 니, 그냥 돌아가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비릿한 조소는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상대의 검수는 질문인지 되새김인지 알 수 없는 억양으로 말했다. 장지충은 검 을 고쳐 잡으며 입술이 마르는지 혀로 입술을 적시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대는 육합문이 두렵지 않은가?" 중년의 무사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려 지기 시작했다. "애송이! 너의 손이 떨리고 있구나. 왜 그러지? 두려운가? 사람한테 처음으로 검을 들이밀어 보는 건가?" 장지충은 자신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나, 나는 너같이 떠돌이 무사를 수 없이 겪어보았다." 그러자 중년의 검사는 정말로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한 걸음을 크게 내딛으 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애송아! 그렇다면 징징거리지 말고 찌르란 말이다! 내 가슴은 넓다! 너의 칼자 국을 이 곳에 남겨보란 말이다!" 30대의 중년검사는 신경질적으로 자신의 옷깃을 젖혔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칼자국이 종횡으로 나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뱀들이 기어다니 는 듯한, 징그럽기 그지없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혈전을 치른 자였고 그리고 살아남은 자였던 것이다. 장지충의 얼 굴은 사색이 되어버렸으며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의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 중년의 검사는 장지충을 한 참 동안 바라보다 자신의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 었다. '챙'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날카롭고 푸른 검신(劍身)이 드러났다. 그리고 검을 늘어뜨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장지충에게 다가섰다. 그의 표정은 한 마리의 벌레를 바라보는 듯했고 단숨에 그 벌레를 없에버릴 기세였다. 장지충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수록 강렬한 살기에 온 몸이 졸아붙는 듯한 느 낌을 받았다. 장지충은 온 몸을 떨며 천천히 검을 내렸다. 그의 다리는 조금씩 굽혀 들어가고 있었다. 상대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려는 것이다. 살려달라 고 애걸복걸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부지하고 싶었다. 가랑이 사이로 기라고 하면 그렇게 할 것이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자신 이 죽어버리면 육합문의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자신의 명예가 무 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버지의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때 그의 팔을 부축하는 손이 있었다. 그 손은 마치 어린아이 마냥 깨끗하고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결코 여성의 손은 아니었다. 장지충은 고개를 들어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태양을 등지고 있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지만, 얼굴이 낮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다, 당신은?" "오공자(五公子)께서 이런 곳에 어인 일이십니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온화했다. 마치 지금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 듯...... "나, 나는..... 지, 지금..." "당신은 누군가?" 중년의 검사는 돌연한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느 사이에 다가와 애송이 를 부축하고 있는 것일까? 비록 자신이 방심하고 있었다지만, 애송이에게만 눈이 향하고 있었다지만, 상식적으로 이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생은 육합문에서 잠시 식객(食客)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중년검객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뻗어 나왔다. "지금 진검승부를 겨루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죽고싶은가!" 백리향은 중년의 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승부는 났습니다. 그것은 소생도 알고 대협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소생의 말 이 틀렸습니까?" 순간 중년검사의 눈에서 파르르 잔 떨림이 일어났다. 중년의 검사는 상대방 의 눈에서 태양을 바라보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그는 수백 번의 악전고투를 벌이며 한 번도 상대의 눈에 제압 당해 본 적이 없 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기에....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중년 검사는 자신이 패했음을 알았다. 그리고 수백 번의 싸움에서 터득한 본능이 말 하고 있었다. 서생과 싸워서는 안 된다고.... "장양이라는 사람은 알 수 없는 자로군. 개새끼를 아들로 두고 용을 식객으로 두고있다니..." 중년의 검사는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군중 속을 헤치 며 사라져갔다. 그러나 그의 음성은 우렁차게 들려왔다. "조만간 육합문을 찾아갈 것이다!애송이의 무례함은 그때 다시 따지기로 하 지..... 그리고 식객! 내 이름은 강자단(姜子端)이다. 기억해라!" 순간, 장지충의 얼굴이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는 털썩 주저앉으며 망연자실 한 듯 중얼거렸다. "마, 맙소사! 철혈마검(鐵血魔劍) 강자단(姜子端)!" 제 육장 요간노검광망한(腰間老劍光芒寒)-2 허리에 찬 고검은 차고 날카롭도다. 철혈마검(鐵血魔劍) 강자단(姜子端). 잔혹한 마음과 차가운 피를 지녀 패왕(覇王=항우)조차 놀란다고 하여 사람들 은 그를 가리켜 잔심냉혈경패왕(殘心冷血驚覇王)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의 괴팍한 성격을 아는 자라면 결코 대화를 길게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 어느 때 욕설과 검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과거를 아는 자라 면 결코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잔심냉혈경패왕이라는 칭호를 얻 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그의 검 아래 사라졌는지 충분히 알 것이기 때문 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는 광적으로 불필요한 것을 싫어했다. 필요한 만큼의 걸음만 걸었으며 필요한 만큼의 말만했다. 필요한 만큼의 검을 휘둘렀으며 필 요한 만큼의 살인을 했다. 양심의 가책, 명예, 명성, 협(峽), 옳음과 그름, 백도 (白道)와 흑도(黑道), 선(善)과 악(惡)......이러한 단어들은 그에게 있어서 불필 요한 것들이었으며, 이해타산(利害打算), 이해득실(利害得失)만이 필요한 것들 이었다. 백리향은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통해 이지러지고 일그러진 인 간의 단면을 직시할 수 있었다. 파리가 모여들어 흰 것을 물들이는 법이다. 아무리 백색의 고운 마음을 지니 고 있은들 주위의 환경이 좋지 못하면 그 스스로 청백(淸白)의 몸으로 지내기 힘든 것이다. 과연 강자단이란자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기에 지금의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 백리향은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인간의 심성(心性)은 원래가 깨끗한 것인데, 모든 과오(過誤)가 심성을 더럽 히는 것이리라." *** 천태현은 상당히 큰 도읍으로 항주(抗州)와도 인근에 접해있어 물자도 풍족 할 뿐 아니라, 대소천태산의 석교(石橋)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시인묵객이 많 아 기루나 홍루가 많이 번성한 편이었다. 토지도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 수준 도 넉넉하여 특히 음식문화가 발달한 곳이었다. 백리향과 양소교는 필요한 약재를 충분히 구해서 돌아올 수 있었으며 백리향 은 서둘러 약재를 약탕기에 넣고 다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태양은 서산마루에 앉고 사방은 조금씩 어두움에 휩싸여가기 시작할 무렵이 되자 소건중탕(小建中湯)이 곧잘 다려졌다. 복벽(腹壁)의 찢어진 틈 사 이로 소장과 대장이 복막에 쌓여 빠져나왔던 양정에게 이보다 좋은 약재는 없 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다리고 있는 계지복령환(桂枝茯笭丸)과 같이 복용하 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백리향은 해가 지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다. 그 러나 삶은 인간 자신의 의지대로 살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법이다. "어이! 이봐!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검술을 닦아야할 장소에서 부채를 들고 뭐 하는 거냐고?" 매우 당차고 씩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백리향의 귀로 들어왔다. 매우 당차 고 씩씩한 목소리이기는 하되 남아(男兒)의 목소리가 아닌 여아(女兒)의 목소 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십칠, 팔 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어 이없다는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백리향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 좋아 보 이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약을 다리고 있습니다. 검을 들고 약을 다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 까?" 그러자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뭐! 약을 다려? 당신 제 정신이야. 육합문에는 약왕각(藥王閣)이 있어 모든 약 재는 그 곳에서 다려야 한다는 소리도 못 들어 봤나? 도대체 당신 정체가 뭐 야?" 약왕각이 있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백리향은 찔끔하며 말했다. "소생은 얼마전에 식객으로 오게된 백리향이라 합니다." 그러자 소녀는 눈빛을 반짝이며 이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당신이 바로 양백부의 소개로 왔다는 그 사람이로군? 소문에 듣자 니 기문둔갑(奇門遁甲)과 음양을 통달했다며? 그래서 양백부님의 존경을 받 고 있다며? 좋아! 기문둔갑이 강한가, 나의 검술이 강한가, 나하고 한 번 겨루 어보자고!" 소녀는 등뒤로 손을 뻗어 검을 빼어들었다. 다짜고짜 검을 빼어들며 결투를 신 청하는 천방지축의 소녀를 보자, 어이가 없어진 그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고 다시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침묵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것이다. "....." "어이!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만!" "......" 소녀는 얼마나 화가 올랐는지 발을 동동 구르고 얼굴을 붉히며 검을 휘둘렀 다. 그러자 부채 날개가 반이나 싹둑 잘려 나갔다. 소녀는 의기양양하게 웃으 며 말했다. "깔깔깔! 어떠냐?본 장취취(張翠翠)의 무적검법이...." "........" 반쪽이 되어버린 부채.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바람을 만들 수 있었 다. 백리향은 부채의 남은 부분을 가지고 바람을 일구어 화로(火爐)의 강약을 조절했다. ".......!! 뭐, 뭐야 아직 정신 못 차렸나!" 장취취는 다시 한 번 검을 휘둘러 부채의 손잡이 부분만 남기고 싹둑 잘라버 렸다. 가느다란 대나무 손잡이만 남고 부채가 몽땅 잘려나간 셈이었다. 아무 리 천하의 백리향으로서도 이 것을 가지고 부채질을 해서 바람을 만들 수는 없었다. "휴~ 그렇게 부채와 혈전을 벌이고 싶다면 내가 양보하리다." 백리향은 부채의 손잡이를 던져주며 자신이 머무는 객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절(寺)이 싫으면 절을 떠나면 그만이다. ".....!" 백리향의 돌연한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장취취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 다 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월량문(月亮門)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탄식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취취야~ 취취야. 너는 어찌하여 어렵게 배운 무공으로 부채와 싸워 양패구상 (佯敗毆傷)한단 말이냐?" 얇은 녹의(綠衣)를 펄럭이며 섬세한 미모를 지닌 여인이 걸어왔다. 누가 보더 라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이었으나 창백한 얼굴에 눈이 가늘고 길어 차가 운 성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장취취는 그 여인을 보자 상당히 당황해하기 시작 했다. "어, 언니! 그게 아니라...." 녹의여인은 가는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 "이 언니는 실망했다. 그렇게 열심히 무공을 가르쳐주었는데 겨우 부채와 씨 름하는데 쓰다니....쯔쯧!" "........" 그녀는 장취취를 바라보더니 그만 한숨을 내쉬며 백리향이 들어간 객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장취취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서둘러 객원을 빠져 나갔다. 백리향은 창가에 심어져 있는 난초의 잎사귀를 걸레로 닦고 있었다. 그는 꽃 과 난초를 좋아했다. 백가촌에 들어서게 되면 꽃이 만발해 있음을 볼 것이고 바위틈에 수줍게 피어난 난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덕 위에 자리잡 은 그의 초가(草家)안으로 들어서면 이런 글귀의 편액(扁額)을 볼 수 있을 것 이다. "우리 집엔 보물이란 없나니, 있다면 오직 난초와 꽃뿐이다(吾家無賓物 資物惟蘭花)" 결코 크다고 할 수 없는 발자국 소리에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 문안으로 들어 서는 그녀를 보았다. "공자께서 이 번에 양어르신과 같이 오신 식객이시지요?" 백리향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인은 사뿐히 걸어오더니 대례(大禮)를 올리기 시 작했다. 돌발적이고 당황스러운 사태에 백리향은 깜짝 놀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만 일어나십시오. 어찌하여 소생에게 절을 올리시는지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조아리며 일어섰다. "공자께서는 소녀의 절을 받으시기에 충분합니다. 오늘 오후의 일을 기억하시 는지요. 공자님께 구은(求恩)의 은혜를 입은 자가 소녀의 사제랍니다. 그리고 사부님의 친자이기도 하지요" 그녀는 바로 육합문주 장양의 제자인 옥수낭랑(玉手朗朗) 전원월(全元月)이었 다. 아름다운 미모를 지녔으되 그녀의 마음은 차갑기 그지없다하여 사람들은 옥수낭랑빙심월(玉手朗朗氷心月)이라는 시구(詩句)를 붙여 주었다. 양정을 통 하여 한 번 들어본 적이 있기에 백리향은 탄성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대례를 올린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아! 오공자(五公子)님의 일을 말씀하시는 군요. 그렇다면 소생으로서는 감당 하기 어렵습니다. 오공자께서는 의기로우셨고 소생이 참견한 것이 실로 부끄 러웠을 따름입니다." "공자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십니다. 사실은... 죄송합니다. 진작에 말씀드려 야 했는데, 그 장소에 소녀도 있었답니다. 소녀가 나서려는 찰나에 공자님이 뛰어드셨고 공자님의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사제 의 수치스러운 행동으로부터 구하셨으며. 아울러 생명까지 구하신 영웅이십니 다." 그녀의 끊임없는 칭찬에 백리향은 쑥스러움을 느꼈다. "제가 부지불식간에 뛰어들기는 했습니다만, 단지 오공자님의 옆에 있었을 따 름입니다. 그리 높게 평가하지 마십시오." 전원월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휴~ 공자께서는 어찌 그리 겸손하십니까? 저의 사제는 원래 경망된 자입니 다. 육합문을 등에 업고 우쭐하여 안하무인으로 행동해 왔지요. 이 번 기회에 그에게 혼 줄을 내줄 생각으로 지켜보고 있었지만, 소녀로서도 상대가 철혈마 검 강자단일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답니다. 강자단은 웬만해서는 검을 뽑지 않 는 자입니다. 그러나 한 번 뽑으면 꼭 살인이 이루어지지요. 사제가 그에게서 살아남은 것은 그야말로 공자님의 의기가 하늘을 감동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 습니다." 백리향은 이쯤에서 대화를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코 칭찬이나 감 사를 받기 위해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장지충과의 만남은 우연이었으며 어쩌 면 장지충의 행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은 우연으로 끝낼 일이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 보다 강자단이라는 자가 육합문에 다시 방문한다고 합니다. 그것에 대한 준비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 또한 걱정이 앞서는지 고운 아미(蛾眉)를 찡그리기 시작했다. "소녀 또한 잘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형들과 의논하여 방법을 모 색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자께 한 가지 부탁의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오늘 일 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주십시오. 이 일이 사부님께서 들으신다면 아마 도 사제는 더 이상 이곳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친부자의 관 계입니다만 사부님께서는 명예를 더럽히는 행동에 대하여서는 무척 완고하신 편이십니다."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강 자단이라는 자의 살기는 그야 말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자칫 잘못 판단하시 게 된다면 큰 화를 당하시게 됩니다." "그것은 저로서도 불안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제를 생각하면 이렇게 라도 하 지 않으면 안되겠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도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많이 뉘우치고 있답니다." 전원월의 얼굴에 깊은 수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로서는 이것이 최선의 방법 이었으리라...... "그런데.... 아가씨께서 이 곳까지 찾아오신 목적이 소생의 혀가 두려워서 입니 까?" 그제야 전원월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알고 보면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이 백리향의 입막음을 위해 온 것처럼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그것이 그녀의 본 심은 아니었을망정 행동과 말은 그러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공수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사실은 사부님께서 백리공자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 그는 꿈을 꾸지 않는 사람이다. 드러누우면 바로 잠에 빠져드는 그런 사람이기 도 했다. 그러나 간혹 꿈을 꾸게 되면 지독한 악몽에 시달린다. 무덤에서 스물 스물 기어 나오는 시체들의 꿈이었다. 그럴 때면 그는 술을 병째 들고 마셨다. 그는 살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살인을 좋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다. 그래서인지 붉은 것을 혐오했다. 낮보다는 밤이 좋았으며 화창한 날씨보다 흐 린 날이 더 좋았다. 비가 오기라도 한다면 마음은 항상 들뜨기 마련이었다.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고독은 그의 하나뿐인 친구였으며 언제나 같이 있었 다. 아무도 모를 은밀한 곳에서 암살대상자를 기다린다는 것은 고독과 긴밀한 유대감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지금도 고독은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는 살수(殺手)였다. 언제나 모든 육감이 살아있도록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하며 약간의 양심의 가책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살인에 대한 합리 화를 이루어야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타인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살 수의 법칙이다. 아니 세상의 법칙일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번 이것이 마지막 임무라고 생각했다.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한 금전을 모았으니 당당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자고 생각했다. 하지 만..... 그는 오늘도 어둠에 묻혀 이 번 임무가 마지막이다라고 되뇌고 있었다. *** "양정이 말하더군. 자네는 학문뿐만 아니라 기문둔갑과 음양오행에 밝다고 들 었네. 전에는 무슨 일을 했었나?" '전에 무슨 일을 했었냐고? 후후후!' 장양의 질문에 백리향은 웃음이 터져 나 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사실대로 말했을 때 장양의 표정은 어떠할까? "농사를..... 지었습니다." 순간 장양은 할 말을 잃은 듯 지그시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기 시작하였는데, 노골적인 비웃음이 묻어 나오고 있었 다. "허~ 농사라....무공 또한 뛰어나다 들었는데....사문(師門)은 어디인가?" 그러고 보니 자신에게는 스승은 있으되 사문이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여동빈 파의 순양별부문? 백리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사문은.....없습니다. 스승께 주로 학문과 무위의 법을 전수 받았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옳다고도 할 수 있고 그르다고도 할 수 있었다. 백리향의 목적은 깨 달음이었고, 방법론으로 무공을 택하였다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는 도가의 사람이었군. 대단하네!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웠 을 텐데... 도가의 불노불사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은 현실과 많은 괴리감(乖離 感)이있지. 많은 사상가들이 무위자연을 외치며 산으로 오르고 있지만, 누구하 나 신선이 되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네. 대부분 백골이 되어 산에서 내려오거 나, 미쳐서 내려오기 일쑤지. 화산에서 도를 이루었네, 무당산에서 삼십 년 간 도를 닦았네, 하는 사람들을 보게. 돈이나 받고 점을 봐주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지 않는가? 세속에서는 여동빈과 종리권에게 구결을 전수 받았네, 허진군 (許眞君)으로부터 비서를 전해 받았네 하지만 알고 보면 백성들을 미혹하기 위해 꾸며낸 술수이고, 나라의 권력을 등에 업고 기생하는 작자들이 대부분일 세. 그런 곳에서 몸을 빼어 현실로 돌아온 것은 자네에게 있어서 참으로 잘된 일일세." "....." 장양은 노골적으로 도가를 비판하고 있었다. 자신의 사부와 종리권(鐘離權)에 게 구결을 전수 받았다는 것은 금(金)나라 때 중양진인(重陽眞人) 왕철(王喆= 왕중양)이 종리권에게 신선술을 입으로 전해듣고 세종(世宗)의 대정(大政)7년 에 산동성 영해(寧海)에서 전진암(全眞庵)을 짓고 교세를 확장한 것을 말한 다. 그리고 허진군에게 비서를 받은 사람은 하진공(何眞公)인데 남송(南宋) 고종 (高宗)의 소흥(紹興) 연간에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 서산(西山)의 옥륭 만수궁(玉隆萬壽宮)에서 허진군에게 비선도인경정명충효대법(飛仙度人經淨明 忠孝大法)과 정명대법(淨明大法)을 내려 받아 정명교(淨明敎)를 창시한 것을 말한다. 후에 모두 남종과 북종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장양은 그들 모두를 사이비라고 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이 모두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나라에서 는 도교를 적극 장려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종파가 일어나 스스로 정 종(正宗)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또한 대부분의 교파는 어려운 수련보다는 부적 과 주문을 숭앙하고 신단을 만들어 일거에 신선을 이룬다는 황당무계한 교리 를 설파하고 있었다. 이 곳 대소천태산에도 북송(北宋)의 희령(熙寧) 8년에 자양신군(慈陽神君) 장 백단(張伯端)이 동한(東漢)시대의 선인 위백양(魏 伯陽)을 시조로 하여 수련 을 위주로 하는 단정파(丹鼎派)를 만들었는데, 흔히 남종지시(南宗之始=남조 의 시작)라고 부른다. "자네는 무공보다는 학문에 힘썼다고 하니, 외당(外堂=대외적인 업무)쪽의 일 보다 내당(內堂=대내적인 업무. 금전출납이나 노비의 관리 등)쪽의 일이 수월 하겠군." 그는 백리향에게 말할 여유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만서각(萬書閣)의 일을 보아주게. 내가 가장 신경 쓰는 분야 에다 자네의 학문에 견주어 가장 합당한 직책이리라 믿네. 자세한 업무의 일 은 노총관에게 물어보면 잘 가르쳐 줄 걸세. 그리고 이미 자네의 거처를 만서 각으로 정했네. 오늘부터 그곳에서 거하도록 하게." 그러고는 더 이상 백리향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육각으로 된 창문을 통해 먼 산을 바라다보았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직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닌가? 장양과의 만남은 그냥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었던 것이다. "......" 장양은 백리향에게서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앉자, 호기심어린 눈으로 고개 를 돌려 백리향을 바라다보았다. 백리향은 의자에 앉아 득도한 고승 마냥 눈 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마치 명상에 잠겨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이보게! 자네 지금 뭘 하는 겐가?" 장양의 질책 어린 목소리에 눈을 뜬 백리향은 의자에 일어나며 말했다. "이 곳에 살심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 는데....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그는 장양에게 간단한 목례만 한 뒤 이 곳 태의전(太義殿)을 총총히 걸어 나갔 다. 태의전의 안과 달리 밖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백리향의 어둡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식혀 주었다. 그는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은하수를 이 루며 세상의 하늘에 수놓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저 별들처럼 빛을 반짝일 수 없는 것일까? 장양이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자신이 도문의 제자임을 밝혔음에도 노골적으로 도가를 비판하는 무례함은 어 디서 나오는 것일까? 자신의 의견도 물어보지 아니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거처를 옮겨버린 무례함 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러한 선민의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백리향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터트렸다. "사부님! 당신께서는 도대체 어떠한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까?" 제 육장 요간노검광망한(腰間老劍光芒寒)-3 허리에 찬 고검은 차고 날카롭도다. 자신이 상상했던 세상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정이 넘치고 물 질적으로도 풍요로운 세상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식이 통하는 그런 세 상을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상식 밖의 일들이 곧잘 일어나고 있었 다. 한 그릇의 밥과 한 그릇의 죽을 얻으면 살고, 얻지 못하면 죽을 정도의 허기진 여행자라도 거친 말로서 적선(積善)을 하면 아무렇게나 받아먹지 않으며, 발 로 차면서 주면 걸인(乞人)도 고마워 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장양은 중요 한 직책을 수여하면서 어찌 거지 동냥 주듯 하는 것일까? 문득, 백리향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어린 시절은 거지였지 않은가. "후후후!"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저벅거리는 발자국소리와 함께 걸걸한 목소리가 백 리향의 귓가로 들려왔다. "여어~ 반갑네. 반가워~" 문득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청수한 외모의 중년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푸른색 비단으로 만든 장삼에 머리에는 문사건(文士巾)이 두르 고 있어 꽤 단아한 유생(儒生)처럼 보였다. 백리향은 한 번도 그를 본 적이 없 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너무나 친숙한 듯 다가서고 있었다. "........." 중년의 유생은 헤벌쭉 웃으며 공수(空手)를 취하며 말했다. "본인은 노군행(盧群行)이라 하네. 이 곳 육합문의 총관(總管)직을 맞고 있지." 백리향 또한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백리향이라 합니다. 혹시 소생을 아시는지요?" 그의 과도한 친절에 한 번 물어본 말이었다. 그러자 노군행은 싱긋 웃으며 고 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 전혀 몰라.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나도 알지." "........." 그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걸세. 백리서관(百里書管)!" ".........." 서관(書管)이란 만서각(萬書閣)에서 책을 정리하고 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육합문주 장양은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단지 책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것이다. 육합문의 역사는 고작 이십 년에 불과하다. 장양은 육합문을 유서(由緖)있는 무가로 만들고 싶어했다. 신흥문파(新興門派)로서 정도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싶어했으며, 누구 나가 그렇게 느끼기를 바랐다. 그래서 만서각이 필요했던 것 이다. 노군행은 만서각의 곳곳을 직접 안내하며 백리향이 해야 할 일들을 설명했 다. 그는 친절했으나 예의에 구애받지는 않았다. 어찌 보면 실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어찌 보면 능구렁이처럼 능글맞아 보이기도 했다. 백리향은 그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들었고 충분히 숙지(熟知)할 수 있었 다. 노군행은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만서각 을 나서기 시작했다. "이보게. 이 곳은 무가(武家)라네.....단지, 무가(武家)일 뿐이지...." 백리향은 그의 뜬 금 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 백리향이 아무런 말이 없자 그는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단지, 힘세고 머리가 텅 빈 놈들만 있는 곳이란 말일세." 그제야 백리향도 웃었다. "후후후!" 백리향의 얼굴에 웃음이 번지자 그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세상에는 두 가지의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네. 현명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 람일세. 현명한 자들은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가난에서 벗 어나지 못하지......자네는 어떤 부류의 사람인가?" 백리향은 한 번도 자신이 현명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의 주머니에는 일전 한 푼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려하기 도 전에 노군행이 앞서 말했다. "현명한 자는 알아도 모른 척! 오직 어리석은 자만이 떠들 뿐이라네. 이 말 꼭 명심해야 될 거야." 그리고 그는 백리향의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고는 만서각을 벗어나기 시작 했다. 백리향은 그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과연 그 는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결코 현명함에 대한 자신의 지론 을 설파하려 함은 아닐 것이다. 백리향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새로이 거쳐가 된 만서각으로 들어섰다. 만서각에는 특별히 대단한 서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특별히 형편없는 서 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런 책들만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나 백리향 은 종이로부터 퍼져오는 캐 쾌한 내음이 좋았고, 질그릇 같은 투박한 종이질 이 좋았다. 그는 손을 뻗어 문장집요(文章集要)라는 서적을 빼어들었다. 수 없이 많은 명 사들의 시류(詩類)들과 서류(書類)들을 기대하며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서는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펴나갔다. 그러나, 문장집요(文章集要)에는 문장(文章)이 없었다. 고금(古今)의 명문장 대신 고금을 통틀어 유래가 없는 화류도(花柳圖=춘화도)가 그려져 있을 뿐이 었다. "........." *** 장양은 매우 대담하고 냉철한 사람이었다. 그는 육합문을 일으키기 위해 수없 이 많은 투쟁을 벌여왔고 승리를 이루어 왔다.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수법이 매우 잔혹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보다 적들이 더 많은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암살을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자신의 무공을 믿었고 무엇보다 자신을 경호하는 호위무사들을 믿었다. 그는 항상 정열적이었으며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특히 집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그의 모든 신경은 책상에 수북히 올려진 장부(帳簿)와 보고서에 날이 선 칼날처럼 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하루를 꼬박 세우기도 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평상시와 달리 유난히 피곤했으며 머리가 무거웠다. 정확히 말 하면 저녁을 먹고 난 뒤부터 쏟아지는 잠을 억제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 이 늙었음을 한 탄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신이 흐트러질 때는 머리의 경락 을 풀어 주는 것이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지자 다시 의자에 앉아 장부를 뒤적이기 시작했지만, 얼 마 있지 않아 다시 두 눈이 무거워지며 글자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장양은 한 숨을 내쉬며 침상에 누워 잠시동안이라도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 가 거주하는 태의전은 총 스물 네 칸의 방으로 되어있었다. 동, 서, 남, 북으로 열 여덟 명의 호위무사가 주야(晝夜)를 번갈아 가며 지키고 있었으며, 그 중 그가 머물 가능성이 있는 침실은 여덟 군데나 되었다. 오늘 그가 묵게될 침실 은 정방을 중심으로 우측 네 번째의 침실이었다. 그것은 극히 비밀스러운 일이 었으며 자신의 측근들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지 못하고 침상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고 보니 혁 화(革靴=가죽신)도 벗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리도 거꾸로 누워버렸다. 장양은 고소를 지으며 다시 자리를 바꾸어 누우려 할 때 자신의 다리에 엄청 난 고통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크악!" 그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침상의 벽 위에 걸린 자신의 애검(愛劍) 인 혈루(血淚)를 집어드는 동시에 몸을 굴려 침상에서 벗어났다. "누군가!" 그의 포호성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 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빠져나오는 듯 하더 니 흰 섬광이 번뜩이며 날아왔다. 부지불식간의 일이라 그는 흰 섬광을 검으 로 쳐냈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운무가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 했다. "독(毒)!" 순간 장양은 기겁을 하며 호흡과 모공(毛孔)을 닫았다. 흑의 인영은 한 손으로 는 또 다른 암기를 던지고 다른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둘러 장양의 목을 노렸 다. 장양은 기겁하며 창공비연(蒼空飛燕)이라는 수법으로 몸을 낮게 펼치며 암 기를 피한 후 검을 치켜올려 상대의 검을 막았다. "창!"하는 금속성이 일며 상 대의 검은 뒤로 퉁겨져 나갔다. 그러나 장양의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암기에 의 해 한 움큼 베어져 나가는 수모를 면하지 못하였다. 흑의 인영은 자신의 공격이 모두 아깝게 실패하자 아무미련도 없이 지붕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쿠앙! 하는 소리와 함께 기와장의 파편이 떨어져 내렸다. 장양도 코웃음을 치며 지붕을 박차고 날아오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지와 는 달리, 다리의 힘이 풀리며 도리어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상 대의 검에 다리를 관통 당했음을 깨달았다. 장양은 분한 듯 주먹으로 바닥을 쳤지만 부서지는 것은 바닥에 깔린 판자였고 아픈 것은 자신의 주먹일 뿐이었 다. 그 때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장지충이 뛰어 들어왔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그 뒤로 그토록 신임해 마지않던 열 여덟 명의 호위무사들이 몰려들어 왔다. 지붕이 부서지는 소리를 듣고나서야 비로소 사태가 터진 것을 알고 달려온 것 이다. "문주님!" 그는 울화통이 터져 아픈 다리도 잊은 채 바닥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놈들아! 나에게 살수가 붙었느니라! 얼른 횃불을 준비하고 사람을 불러모으 거라!"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장지충은 달려가 종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 차가운 감촉과 함께 무서운 살기. 백리향이 그에게서 받은 첫 번째 느낌이었다. 백리향은 자신의 손에 쥐여진 문장집요를 슬쩍 내려놓으며 두 손을 치켜들며 말했다. "소생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 그는 결코 강도가 아니었다. 그는 살수였으며 그에게 죽은 자만도 부지기수였 다. 자랑은 아닐지라도 삼류 강도로 오해받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강도가 아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어찌하여 검을 겨누고 계십니까?" ".........." 흑의복면인은 이 멍청하게 생긴 사내를 위협하기 위해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만만하게 보이는 사내는 전혀 공포를 느끼고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변성술 (變聲術=목소리를 바꿀 수 있는 살수들의 기술)을 하였음에도 자신이 여자임 을 환히 꿰뚫고 있지 않은가. 이 녀석을 죽여버릴까? 그녀는 순간적으로 피어오르는 살심을 억제하며 자신 의 마음을 추슬렀다. 얼마 있지 안아 이곳까지 놈들은 들이닥칠 것이다. 그것 은 자신이 이곳으로 올 수밖에 없었고, 그들이 찾아오지 않을 수밖에 없기 때 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숨을 곳을 찾으려 왔지 방향을 노출시키려 온 것은 아 니었다. 그녀는 하나마나한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시키는 데로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 때였다.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들려왔 다. 흑의복면인은 잠시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백 리향에게 검을 겨누며 말했다. "만약 허튼 소리라도 내뱉는다면 다시 와서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겠다!" 흑의 복면여인은 바닥을 박차고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이 사라 진 직후, 열 대여섯 명의 사나이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그들이 표정은 하 나같이 딱딱하고 살벌하기 그지없었으며 백리향을 바라보는 눈길은 살기마저 뛰고 있었다. "이곳에 아무 일도 없었소?" 정명검(精明劍) 주화룡(周華龍)은 방안 곳곳을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눈길은 하나도 빼놓지 않겠다는 듯 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백리향은 아무 일도 없었 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소생은 여러분들이 이곳으로 찾아온 연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에 서생 같은 풍모의 사나이가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귀하는 이 번에 새로 부임하신 백리향이란 분이시지요? 반갑습니다. 소생 추 호검(趨虎劍) 강백지(姜白志)라고 합니다. 백리서관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사 부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있었습니다. 자객은 지붕을 통하여 빠져 나갔다 고 합니다. 백리서관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육합문은 동북서의 깎아지른 절 벽을 병풍 삼아 만들어진 요새와도 같은 곳입니다. 자객이 향할 곳은 오로지 남쪽밖에 없지요. 지금 남방의 모든 가옥을 수색중입니다." 백리향은 놀랍다는 듯 탄성을 터트렸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주화룡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공수를 취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육합문에 자객이 들었다는 것은 커다란 수치입니다. 지금은 몹시 도 경망중이니 인사는 차후에 올리리다. 우선 이 곳을 수색하고자 하니 협조 를 부탁합니다. 결코 백리서관을 의심해서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순간, 백리향은 그가 상당히 냉철한 사람이며 현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그는 무례한 듯 보였으나 예절바르고, 강경해 보였으나 부드러운 면이 있 었다. 그것은 도(道)의 성질과도 흡사한 것이다. "이해.....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두 눈을 부릎 뜨고 만서각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화룡은 남들과 달랐다. 그는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무척 한가로이 경치를 감상하듯 주위를 슬쩍 들러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화룡은 무엇을 발견했는지 안광(眼光)을 발하며 육 각의 창문을 향해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 창문은 바로 흑의복면녀가 숨어든 곳 이었다. 그녀는 결코 멀리 도주하지 못하였으며 근처의 숲속에 엎드려 있음을 백리향은 알고 있었다. 백리향의 입에서 문득 한 탄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쫓아가듯......" 순간, 주화룡의 발걸음이 멈추어지며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목이 마르 다하여도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백리향은 만서각에서 자 객을 찿는것이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서관께서는...... 저희들에게 남기실 말씀이 있는지요?" 백리향은 미소 띈 얼굴로 주화룡을 바라보았다. "소생은 여러분들의 충의 어린 마음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답니다. 하지 만!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객이 주군(主君)을 범하려 하였 다면 신하된 자들은 주군의 주위를 물샐틈없이 감싸고 볼일 일 것입니다. 그리 고 주변을 살핍니다. 그 다음에야 자객이 도망칠 곳을 찾아보는 것이 정석인 것입니다. 만약 자객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리하여 자 객이 아직 주군의 주위에 아직 있다면 어떠하시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내가 자 객이라면 어찌 여러분들이 예상하고 올 곳으로 도망하겠습니까?"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행동이 멈추었다. 모든 사람들이 백리향의 말에 수긍하 는 눈치였다. 그리고 강백지가 백리향에게 다가오며 탄성 어린 목소리로 말했 다. "귀하께서 기문둔갑과 음양에 통달하셨다는 이야기를 양어르신께 듣고 반신 반의했습니다만, 오늘에서야 그 말을 믿겠습니다. 부디 사형께서 올바른 판단 을 내려주시겠지요." 강백지는 일렁이는 눈빛으로 주화룡을 바라다 보았다. 주화룡은 복잡한 시선 으로 백리향을 바라보았고, 백리향은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강백지를 바라다 보았다. 이 세 사람의 시선은 모두 달랐으며 마음속에 품고 있는 심계(心計) 또한 달랐다. "........." "........." ".........."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주화룡의 손이 들려지고 그의 입에서 경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모두 철수한다. 그리고 이사제(二師弟)는 태의전을 호위하는 무사의 수를 배 로 늘리는 한 편 사부님의 허락을 얻어 태의전 곳곳을 수색하여 주게. 그리 고사매는 동북서의 절벽과 숲을 수색해 주게. 삼사제는 남방을 좀더 수색해 주게나." 그러자 그들은 들어 왔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각자의 위치로 사라지기 시작했 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백리향과 주화룡이었다. 주화룡은 창문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야심한 시각에...... 밤바람도 서늘하건만 창문이 열려있군요?"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시를 읊조리듯 말했다. "창문이 열려있어야 천지의 속삭임이 들릴 것입니다." "......." 문득, 주화룡의 고개가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천지의 속삭임이라......참으로 고상하십니다. 지금까지의 결례를 부디 용서하 여 주십시오." 주화룡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를 표하자 백리향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뜻한 바를 이루십시오." 주화룡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백리향은 아무런 일도 없 었다는 듯이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주위를 대강 정리하고 의자를 다시 당겨 앉으며 문장집요를 들고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한 시진이 훨씬 넘어 섰건만 백리향은 한 장 의 책장도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보고자 하는 것은 문장집요가 아니라 지붕 위로 숨어든 주화룡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의 파장 이었기 때문이었다. 주화룡의 심기는 정말로 치밀했으며 집요했다. 그는 약간의 의심스러운 점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으며 상대가 방심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인내와 용기 를 갖추고 있었다. 사실 주화룡은 무척 한가로이 주위를 둘러보는 듯 하였지만, 줄곧 백리향을 예 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는 백리향의 눈이 만서각 곳곳에 향하여도 한곳만은 절 대로 바라다보지 않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 곳이 바로 창문 이였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총명한 자였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백리향이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어느덧 등잔의 기름도 다되어 촛불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지붕 위에서 조그마한 한숨소리와 함께 주화룡의 기운이 점점 멀어짐 을 느꼈다. 그제야 백리향은 문장집요를 덮고 창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도 이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그러자 창문 밖에서 코웃음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가 솟아오르며 담 밖으 로 사라졌다. 그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백리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 며 중얼거렸다. "몽혼향(夢魂香)이라...." *** "이 곳에 살심을 품은 자가 있습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 는데....그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가 없군요. 부디 몸 보중하십시오." 장양은 얼 마전 자신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지며 사라져가던 백리향이란 젊은이를 생각했 다. 그리고 스스로 자문(自問)해 보았다. 이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음모일까? 그는 어떻게 살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자신이 평상시와 달리 졸음이 쏟아진 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자객은 어찌 자신이 묵을 방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만약 거꾸로 눕지 아니하고 평상시처럼 누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보나 마나 자신의 몸에 구멍이 뚫린 것은 다리가 아니라 심장이었을 것이다. 장양은 자신의 모든 의심을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그는 우선 마음의 안정이 필요했다. 모든 것은 내일 아침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결코 충동적이지 않았으며 항상 한 박자를 늦추어 생 각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과 틀린 점이었고 그런 그의 능력 이 지금의 장양으로 만들 수 있게 하였다. *** 흑의 복면녀는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며 내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가 벼웠으며, 매우 규칙적이었으며, 신중했다. 이러한 보법은 오랜 기간 수련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는 천태현의 청석판대로(靑石板大路= 넓고 평평한 돌 을 깔아놓은 큰길)를 피해 골목사이를 누비며 다니더니 일장정도 되어 보이 는 담벼락 앞에 멈추어 섰다. 복면녀는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며 담을 뛰어 넘었다. 그녀가 담 안으로 사라지자 하나의 인형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바 로 백리향이었다. 그는 어떠한 이유에서이든 살생을 원치 않았으며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싶 지 않았다. 그녀를 도와준 행위가 잘한 것인지 그른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 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그녀가 장양을 죽이려 했다면 그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담벼락에 손바닥을 붙이고 온 정신을 하나로 묶었다. 그리고 주위의 모 든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무 위에서 지붕 위에서 땅속에 서 미미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만약 멋모르고 담을 뛰어넘었다면 금 방 발각되고 말았으리라. 백리향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곳을 떠났다. 그것은 그의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 때나 이곳을 방문할 수 있는 그런 곳이 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홍화루(紅花樓)라는 기루였다. 제 칠장 劍客出現山降雨(검객출현산강우) 검객이 나타나니 산에는 비나리고.... 전(全)노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새벽의 첫닭이 울기 전에 일어나 만서각으로 향했다. 원래 나이가 들면 새벽잠이 없어진다지만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길들 여진 습관일 뿐이었다. 노비신분으로 열심히 일한다고 인정을 받는 것도 아니 었고, 그렇다고 생활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부지런함은 어쩔 수 없는 그 의 천성이었다. 만서각으로 들어서자 전노인은 그만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말았던 것이다. 떨어지는 낙엽들, 바람에 실려온 티끌 과 잡풀의 부스러기들이 전혀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다. 누가 무어라 해도 그것 들을 치우는 것은 자신의 할 일이었으며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는 할 일이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서둘러 만서각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누군가가 열심히 바닥을 쓸고있 는 모습이 보였다. 어둡고 눈이 침침하여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흰색 옷을 걸친 약관의 젊은이였다. 하얗고 고운 피부로 보아 결코 노비는 아닌 것 같았 지만, 싸구려 옷차림으로 보아서는 관리자급의 사람도 아닌 것 같았다. 도대 체 누구일까? 전 노인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 고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젊은이는 그제야 허리를 피며 전 노인을 바라보며 웃었다. 젊은이의 웃음이 참으로 발랄하다고 전노인은 느꼈다. "소생은 며칠 전 이 곳으로 발령 받은 사람입니다.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 다." 그의 기억으로 며칠 전 발령 받은 사람은 딱 한사람 밖에 없었다. 바로 만서각 을 관리하는 서관인 것이다. 전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땅에 닿을 듯 수 그리며 말했다. "어이쿠! 늙은이가 몰라 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오랜 노비생활에서 얻어진 보호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허 리를 숙이면 숙일수록 자신의 삶이 편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한테는 통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혹시, 전대야(全大爺= 전씨 아저씨)가 아니십니까? 노총관에게 들었습니다. 소생은 백리향이라 합니다." "어이쿠, 이 늙은이한테 전 대야라니요. 당치않습니다. 그냥 전 노대(老大= 윗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부르는 호칭)라고 불러주십시오." 백리향은 전 노인을 부축하며 말했다. "하하! 전씨 아저씨! 차를 따뜻하게 끓여 놓았답니다. 얼른 몸을 녹이도록 하십 시오." *** 장양은 이른 새벽과 늦은 저녁이면 어김없이 자신의 애검인 혈루(血淚)를 피 혁(皮革)으로 갈고 닦는다. 그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었으며 하루를 시작하 고 하루의 모든 것을 정리하는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었다. 비록 다리에 커 다란 상처를 입었지만, 그것이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검은 자신의 생명이었고 제일 믿을 만한 동반자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기들 중에서도 특히 백련정강(百鍊精鋼)으로 제련된 혈루를 무 척 아꼈다. 정강(精鋼)에 자신의 피를 흘려 넣어 만들었기에 더욱 애정이 많 이 갔다. 혈루를 매만지는 그의 모습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구도자의 모습이었으며 첫날밤을 치르는 새색시 마냥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때만큼은 그 누구도 장양을 방해할 수 없었다. 천장검(穿腸劍) 백일청(伯一淸)도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그런 그의 마음을 충 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장양이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중의 하나였으며, 종 남파(終南派)의 대천강검법(大天鋼劍法)을 익힌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다. 백일청은 아직 창창한 삼십대 중반의 나이였으나 그의 얼굴은 그동안의 고난 을 말해주듯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잔주름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양은 혈루를 검집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일청은 자신의 부하였으 며 부하를 갈고 닦는 것은 검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그는 다리를 심하게 절룩 거리며 태사의에 앉았다. "몇 일전, 태의전에 자객이 들었네."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 장양은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독백하듯 말했다. "이제는 육합문 사람들을 믿을 수 없게 되었어." "........" "본인은 말일세. 자객 따위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네. 단지, 누가 나의 목숨 이 필요한지 궁금할 뿐이야." 장양은 복수란 부질없는 짓이라고 늘 말해 왔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권 위에 도전해 온다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그 점을 백일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노총관을 불러주게. 그에게 시킬 일이 있네." 장양의 명령은 늘 간단명료했으며 어떠한 실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 어서 명령이란 이 방법이외에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질 때 내리 는 용단(勇斷)이었기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장검 백일 청은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대이상의 성과 를 가지고 오기 일쑤였다. 백일청 또한 불가능이란 단어를 싫어했다. 그에게 있어서 불가능이란 능력부 족이란 단어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돈 이 절실히 필요했으며 장양은 항상 그를 풍족하게 했었다. 백일청은 허리를 숙 이며 말했다. "명을 쫓겠습니다." *** 소녀는 강백지의 손을 이끌어 귀엽고 작은 향로(香爐)를 쥐게 했다. 두 손으 로 향로를 받쳐든 강백지의 얼굴은 뽀얀 연기로 휩싸여 가기 시작했다. 소녀 는 그 연기의 맛을 보려는 듯 빨갛게 무르익은 혀로 강백지의 얼굴을 핥아 나 갔다. 강백지는 짜릿한 기분에 도취된 듯 입술을 벌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소녀는 옥 구슬이 구르듯 청아한 웃음과 함께 강백지의 얼굴을 벗어나 향로 앞에 섰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가자 행복한 얼굴로 향로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조그마 한 단합 속에서 향료를 꺼내어 향로 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풀잎을 태우는 듯한 냄새가 온 방을 채워나갔다. 그들은 향로에 얼굴을 갖다 붙이고 그 향기를 즐겼다. 그들의 얼굴은 기쁨으 로 넘쳐나고 있었고, 황홀감에 도취되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눈 을 뜨자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고 있었고 아름다운 학이 우아한 자 태를 뽐내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웅장한 폭포위로 무지개가, 푸른 하늘에 구름 이 자신들을 축복하고 있었다. 강백지가 향로를 떨어뜨리며 즐거운 듯이 웃기 시작했다. 소녀는 강백지의 얼굴을 감싸며 그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강백지는 소녀의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기대에 찬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강백지의 가슴을 풀어헤치고 자신의 얼굴을 묻 었다. 남자의 고동치는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생명의 소리, 자신이 아직까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소리, 이 소리에 소녀는 자극된다. 그리고 둘은 하나가 되었고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 백리향이 만서각의 서관으로 일하게 되었음을 말하자, 양정은 천장을 바라다 보며 안타까운 듯 말했다. "그 사람도 참으로 딱하오. 어찌 그리 보는 눈이 없단 말이오? 내가 누누이 언 질을 주었건만, 그렇게 옥석(玉石)을 구분 못하다니...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오." "소생을 항상 높게 보아주시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내가 세상에 나온 것 은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직 끊어야될 업이 있고, 산중수행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비록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 많은 진전 을 이루었답니다. 저는 참으로 만족하고있습니다. 그리고 항상 책과 가까이 할 수 있어 행복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산 속의 기인을 괜한 욕심에 세상의 풍진 속으로 내몰아 버린 것 같아 그 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었다. 하지만 백리향이 이렇게 말해주자 한 결 마음 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도 이번의 고난을 통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죽음을 앞두고 보니, 생 명의 소중함과 덧없음을 깨달았다오. 그동안 평생을 명예와 명성을 쫓아다니 다가 보니 어쩔 수 없이 많은 살생을 저지르게 되었지요. 물론 죽어 마땅한 자 들 이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충분히 구제할 수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소. 휴~ 이 번에 돌아가면 그들을 위해 위령제를 올리고 집안 밖으로 밭을 갈며 수 신(修身)에 힘쓸까 합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람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는 부와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갈고 닦아 참다움을 찾으신다 면 생로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양정은 호탕하고 호기로운 기질이 많이 쇠퇴하여졌지만, 삶의 질은 늘어가고 있었다. 문득 그는 백리향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공자! 만약에 말이오. 이것은 만약이오.... 내가 죽더라도 이 늙은이의 어리석 은 제자들을 보살펴 주시겠지요?" 백리향은 그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했다. 그러자 양정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오고산과 안유는 무식하고 대가리가 텅 비어서 그렇지 우직한 편이지요. 그 리고 교아는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 천방지축이지만, 가끔가다가 영특한 짓을 곧잘 부린 다오. 과연 내가 저놈들을 제대로 키우고 있는 것인지,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있는 것은 아닌지...두려울 때도 있소. 문득 죽음을 경험하고 보니 삶 과 죽음의 차이가 아주 얇은 것임을 깨달았소. 부디 이 늙을 것이 죽더라도 저 놈들을 끝까지 보살펴 주시오." 백리향은 한숨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문득 사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사부 도 자신을 키우면서 두려움을 느끼셨을까? 스승이란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지, 아버지란 얼마나 숭고한 존재인지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백리향도 그의 손 을 붙잡으며 말했다. "양대협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 힘이 닫는 한 열심히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건대 양대협이나 그분들 모두 장수하실 상이십니다." *** 그녀는 한 마리의 자유로운 새다. 그는 그녀의 자유로움이 두려웠다. 자신에 게 따뜻한 미소를 베어 물지 않을까 두려웠고, 자신 곁을 훨훨 날아갈까 두려 웠다. 그는 담담한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자유로운 척 해보지만 그것은 자신 에 대한 기만일 뿐이었다. 강백지는 아직도 그녀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고 있었다. 커다란 만월이 석교를 비추던 날.비취색(翡翠色)긴 소매를 하늘거리며 붉은 속옷위로 얇은 망사의로 어깨를 덮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천상의 선녀와도 같 았다. 그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에게도 사랑의 열병이 찾아왔음을..... 순간, 강백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그 가벼움 때문에 발작적으로 구토를 하 기 시작했다. "우엑! 우엑! 컥컥!" 그는 몸서리를 치며 배설물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결코 술 때문에 구토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구역질 날 만큼 쾌락을 맛보았으며 구역질 날만큼 의 사랑을 나누어 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사랑을 원했으나 그녀는 그의 다른 것을 원했다. 그는 무조건 적인 사랑을 원했으나 그녀의 사랑에는 항상 조건이 따랐다. 그것이 아무리 부 당한 것이라도 그는 그녀를 위해서 무엇이든 다했다. 그 대가로 그는 환락을 경험했으며 때때로 그것에 침몰되어 가는 자신이 참을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으액!! 컥! 컥!" 그의 입에서 토해진 배설물들은 곧 구더기가 되어 꿈틀거렸다. 강백지는 기이 한 눈빛으로 자신의 배설물들을 바라보았다. 아! 내 뱃속에서 나온 구더기! 구더기가 내 뱃속에서 기생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 면 내가 벌레이기 때문에 구더기를 잉태한 걸까? 어쩌면.... 나는 인간의 탈을 쓴 벌레일지 모른다. 인연의 끈도, 도덕적 규범도, 사회적 규약도 더 이상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벌레일지 모른다. 나는.....그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마리의 벌레가 된다면 어쩌면.....그 를.... 죽이게 될지도 모르겠다. 순간, 강백지의 두 눈이 강렬히 빛나기 시작했다. *** 백리향이 만서각으로 돌아오자 언제 왔는지 노총관이 평생지기를 만난 듯 반 갑게 맞이했다. 그는 친절한 사람도 아니었으며 친절이 그의 좌우명도 아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향에게는 더 없이 친절했다. "어서 이리 앉으시게." 노총관은 백리향에게 자리를 권했다. 백리향은 아무런 내색 없이 그가 가리키 는 의자에 앉았다. "........" 언제 준비했는지 백리향에게 찻잔을 권하며 말했다. "자네는 육합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벌써 유명인사가 되어 있더군. 육 합문 사람 치고 자네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네. 단지 자네가 그들을 몰라서 그 렇지......자네는 양정어르신의 추천으로 왔으며 기문둔갑과 음양에 통달하고 무공 또한 겸비한 인재라고 말일세. 정말 대단하네. 대단해......" 백리향은 그가 자신에게 친절한 이유와 이렇듯 추켜세우는 이유를 잘 알고 있 었다. 그것은 그가 문장집요를 펼칠 때부터 알게된 사실이기도 했다. 백리향 은 대단히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노총관님! 소생은 그리 대단한 자가 아니올시다. 그러니 소생을 찾은 용건을 말하여 주십시오." 백리향의 무표정한 얼굴과 사무적인 어투를 대하는 순간, 노총관의 눈빛이 변 하기 시작했다. 뜻밖이었는지 아니면 불쾌한 것인지는 자신만이 알 것이었다. "........" "........." 노총관은 한 참을 백리향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품에서 커다란 서첩(書帖)을 꺼내어 내밀었다. 서첩의 표지에는 만서총요(萬書總要)라고 적혀 있었다. 백리 향은 천천히 서첩을 펼쳐 보았다. 그 곳에는 수 백 여권에 달하는 책이름이 나 열 되어있었다. 하나같이 희귀본(稀貴本)이었으며 진본(眞本)이었다. 그리고 이 곳 만서각에는 없는 책들이기도 했다. 이 곳 만서각에는 하나같이 저질의 값싼 서적이 대부분이었고, 내용도 황당무 계하거나 삼류유생들이 아무렇게나 적은 휘갈긴 내용도 없는 그런 책자가 대 부분이었다. 그러나 책의 표지만큼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쉽게 말해 값싼 저 질서적을 포장만 그럴 듯 하게 꾸며놓은 것이었다. "서첩 뒷면에다가 자네의 이름과 만서각인(萬書閣引= 만서각의 관리자임을 뜻 하는 도장)을 찍어주게." 백리향은 그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동조(同調)였으며 묵 인(默認)이었다. 그 동안의 노군행이 만서각을 관리하면서 저지른 부정을 동조 하고 묵인해달라는 것이었다. 백리향은 서첩을 덮고 노총관에게 디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노총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의 품에서 봉투 한 장을 꺼내어 밀었다. "만성전장(晩成錢莊)에서 발행한 전표(錢票=지금의 수표)일세. 자네 같은 사람 은 평생 벌어도 구경하기 힘든 액수이지. 그만 하면 만족할걸세. 전에도 말했 듯이 현명한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네." "그래도 할 수 없습니다." 백리향은 전표도 확인하지도 않은 채 노총관에게 디밀었다. 노총관은 오래된 여우답게 그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다. 즉, 돈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 다. "무엇을 원하지? 여자? 진급? 말해보게. 나의 능력 선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라면 뭐든 들어주지." 백리향은 고개를 들어 노총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노총관은 아무런 빛도 발하지 못하는 회색인간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불쌍한 인 간이었다. 그의 삶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까? 어렸을 적 삶이 가난했을까?가난한 삶에 지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까? 노총관은 백리향의 눈길을 받자 눈이 시려옴을 느꼈다. 도저히 그의 청명한 눈 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 눈길이 싫었다. 동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노군행의 얼굴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아보지만, 그 손조차 덜덜 떨리고 있었다. 노총관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숨이 턱턱 막혀 오기 시작했다. 그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악을 쓰듯 말했다. "자, 자네는 후, 후회하게 될 거야! 바, 반드시...." 노총관은 문을 부수듯 열어제치며 나가 버렸다. 백리향은 긴 한숨을 내쉬었 다. 이 세상에는 저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그 렇게 힘든 일일까? 그는 왜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그가 만약 많은 것을 얻는다면 행복해 질까?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만서각 구석진 곳에서 사람이 걸어나왔 다. 장양의 둘 째 제자인 추호검 강백지였다. 그의 손에는 웬일인지 술병이 들 려져 있었고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비틀 비틀거리며 용케 백리향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큭큭큭. 미안하게 돼군.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야. 술을 먹고한 숨 자려는데 노총관이 온 거야." 얼마나 마셨는지 그의 혀는 심하게 꼬여 있었다. 그는 노총관이 않았던 자리 에 털썩 주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않은 자리에는 의자가 없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널브러졌다. "어이쿠. 머리야. 히히히. 의자가 두 개로 보이네?" 그는 넘어지면서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친 것 같았다. 그는 안간힘을 쓰 며 겨우 의자에 않았다. 그리고는 백리향을 향해 고함치듯 말했다. "이봐! 네가 그렇게 잘났어? 네가 노총관에 대해서 알기나 해? 너는 왜 사회 와 타협을 못하는 거지? 왜 쉬운 삶을 못사는 거지? 왜 그렇게 어렵게 사냐고 오~? 나 같은 놈을 보면 한심해 보이겠지? 말해봐! 네가 나를 알기나해? 왜 나 같이..... 으응~ 음냐." "........." 강백지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어느덧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탁자 위 에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백리향은 슬며시 일어나 강백지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고 혈을 눌러 지혈 (止血)을 시켰다. 그는 강백지를 한 참이나 쳐다보았다. 그 는 강백지가 잠들 기 직전 흐릿하게 내 뱉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과연 그의 말이 사실일까? 과연 그는 악마와 손을 잡았을까? 백리향이 알고 있는 한 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악마는 없다. 악마란 동전 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파괴(破壞)가 있어야 그 속에서 새로운 창조가 있듯 이, 죽음이 있어야 윤회의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듯이, 악과 선은 이분법적 인 존재가 아니라 절대선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과연 강백지가 말하는 악마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의 몸에서 몽환향이 풍기는 이유가 무엇일까? 몽환향은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약재가 아니었다. 서천(西天)의 밀 교에서 무아지경을 경험하기 위해 은밀히 사용하던 약제였던 것이다. 중독성 이 강하여 약재로도 쓰이지 않는 것을 백리향은 벌써 두 번이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문득 백리향은 며칠전 자신의 거처로 숨어 들어온 자객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만서각을 벗어나 천태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제 칠장 劍客出現山降雨(검객출현산강우) 검객이 나타나니 산에는 비나리고.... 홍화루(紅花樓)의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나이들이 들어왔다. 멀리서 왔는 지 옷들은 온통 먼지 투성이었고, 모두들 병장기를 휴대하고 있어 무림인들이 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표정은 몹시 지쳐 보였지만 발걸음 은 놀랍도록 가벼워 무공의 깊이가 매우 상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홍화루의 총관 장노삼(張老三)은 수많은 인생의 굴곡을 통해 이 들이 위험한 인물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 는 무림인이 싫었고 지겹기까지 했다. 이럴 때에는 계산대에서 잠든척하는 것 이 최고였으며 나머지는 아랫놈들이 알아서 다 할 것이었다. 그의 재빠른 위기관리는 곧 실행에 옮겨졌고 그의 입에서 나지막한 코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삶이 어찌 그의 생각 되로 이루어 질 것인가. 그의 얼굴이 계산대에 파묻히자 말자 그의 귓가로 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시오. 노인장 말씀 좀 물어봅시다." "........." "장사 안 하실 겁니까? 일어나 보십시오." ".........." "이보시오. 노인장!" 장노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탁자를 치며 벌떡 일어났다. "왜 그러시오!" 장노삼의 거칠고 갑작스러운 음성에 백리향은 잠시 움찔거리더니 다시 웃으 며 말했다. "노인장은 어째서 손님이 왔는데도 잠든척하고 있는 것이오?" 장사를 위하여, 돈을 위하여 손님에게는 항상 각별한 심정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지만, 이런.....손님에게는 해당사항이 아니었다. "그게 궁금해서 날 깨웠소?" "아! 그런 것은 아닙니다. 기녀를 만날까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오?" "돈만 주면 되오!" 백리향은 움찔거렸다. 그는 한 번도 돈을 가지고 다녀본 적도 없거니와 물건 을 사거나 판 적도 없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장노삼에게 말했다. "이곳에는 몇 명의 기녀가 있습니까?" "다섯 명!" "그녀들을 모두 만나게 해주십시오." 그제야 장노삼은 청년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초저녁부터 다섯 명이나! 손님께서는......너무 자신만만한 게 아니오?" 자신만만이라니...... 무슨 뜻일까? 백리향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무슨 말이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일. "그건...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을 꼭 만나야 겠습니다." 장노삼은 다시 한 번 다짐받듯 말했다. "우리 홍화루에 수많은 손님들이 오고가지만 손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꼭 전부를 만나야 하겠습니까?" 백리향은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꼭 전부를 만나야 하겠소!" "아! 놀랍습니다. 소인이 이곳의 총관인 장노삼이라고 합니다. 손님께서는 위 층을 이용해 주십시오." 어느 사이에 장노삼의 언행이 바뀌어져 있었다. 존경심이란 약자가 강자에게, 또는 미숙한 사람이 완숙한 사람에게 표하는 감정이다. 초저녁부터 다섯 명의 기녀를 모두 불러달라는 청년에게 어찌 고개가 숙여지지 않을 수 있으랴! 백리향은 한 번도 기루를 출입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 옛날 거지 촌의 아이들 에게 이야기만 들어보았을 뿐,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 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노삼의 극진한 안내를 받으며 이 층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백리향은 귀빈대접을 받으며 들어선 곳은 이층 복도 맨 끝 방이었다. 들어서 자 말자 풍겨오는 여인들의 지분냄새와 찌릿한 술 냄새가 섞여 묘한 느낌이 들었다. 붉은 색 주렴과 벽에는 공손씨의 검무도가 걸려있었으며 다양한 악기 들이 모퉁이에 세워져 있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주렴이 걷히고 다섯 명의 꽃 같은 아가씨들이 들어왔다. "소녀는 연백화(蓮白花)이라 하옵니다. 공자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소녀는 한단홍(漢丹紅)이라 하옵고 공자를 배알하게 되었음을 영광으로 여기 고 있답니다." "소녀는 ....온천향(溫天香)이라 하옵고 공자를 모시게 되어 기쁩니다." 그 때 백리향은 손짓을 하며 말했다. "여러 소저들께서는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소생은 온씨 성을 가지신 아가씨 와 단둘이 할 말이 있으니 모두들 나가 주십시오." 그러자 총관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손님! 모두를 불러달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지만 온소저(小姐)만 마음에 드오!" 장노삼은 잠시 꺼림칙한 표정을 짓더니 한 숨을 쉬며 말했다. "허~ 공자께서는 진실로 안목이 뛰어나십니다. 온천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저 희 홍화루의 최고의 기녀이지요. 청아한 목소리와 뛰어난 비파(琵琶)의 연주 는 과히 일류중의 일류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그녀는 한 번도 몸을 판 적 이 없는....그러니까.....그녀를 설득하기가...." 장노삼의 낯뜨거운 말에 백리향은 질겁을 하며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험! 무, 무슨 소리! 그러한 일에는 신경 쓰지 말아 주십시오." "아! 물론입니다. 술과 안주는...." "적당히!" "아, 알겠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장노삼이 물러가자 백리향은 온천향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온 소저께서는 이리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공자" 그녀는 사뿐히 걸어와 백리향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요염하고 지나칠 정도 의 아름다움! 그것은 그녀에게서 받은 두 번째 느낌이었다. "아가씨도 짐작하였겠지만 소생은 풍류를 즐기러 온 것도, 술을 마시러 온 것 도 아닙니다." "소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리다. 그 날밤 소생은 당신을 미행했소. 그리고 당신의 몸에서 풍기는 몽환향을 통해서 당신을 알아 볼 수 있게 된 것이라오. 냉랭한 자객(刺客)아가씨!" ".......!" 순간, 온천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백리향이 손님 으로 온 것을 보는 순간 이러한 사태를 우려하였다.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 타나자 알 수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리향과의 첫 만남은 그리 유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쁜 감정은 아니었다. 어찌되었든 그의 도움으로 무사히 탈출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로 서 그와는 공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냉랭하다 못해 날 카롭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작에 당신의 당당한 행동을 보고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눈치 챘어야 했는 데.... 당신은 누구지?" 백리향은 공수를 취하며 싱긋 웃었다. "소생은 육합문의 서관으로 일하고 있는 백리향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온천향은 코웃음을 쳤다. "흥! 거짓말! 당신과 같은 능력을 소유한 자가 어째서 하찮은 서관 일을 한단 말인가?" 백리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소생은 남과 다른 코와 발을 지닌 것뿐이니 너무 높게 평 가하지 마십시오." 온천향은 의자에 자신의 몸을 깊숙이 파묻으며 기이한 눈으로 백리향을 바라 다보기 시작했다. "당신....정말 무서운 사람이로군!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이야."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의도적으로 무례하고 도전적인 언사를 사용 함으로서 그의 감정을 건드려 보았지만 백리향에게서 전혀 감정의 기복을 느 낄 수 없었다. 도리어 더욱 겸손해 지는 것이 아닌가? 온천향이 잠시 침묵하는 동안 이번에는 백리향이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육합문주와 원한이 있소?" "없다!" "그럼 왜 그를 죽이려 하오?" "살수(殺手)가 나의 직업이다! 이해가 되었나?" 백리향은 이해가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누가 사주했소?" "당신 바보인가? 그런 것을 묻다니...." 백리향은 강백지와의 관계 또한 묻고 싶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질문이라 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의 강경한 어조에서 더 이상의 정보를 얻는다 는 자체가 불가능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의 모든 궁금증이 이 곳에서 풀려지리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단 지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또한 충분히 그녀를 흔 들어 놓았으니 다음에는 그녀에게서 답변이 올 것이었다. 그것이 폭력을 동반 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이제 이 곳에서 벗어나 육합문으로 향해야 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이곳의 기녀들의 몸값은 얼마입니까?" ".....은자 한 냥!" "당신은?" "값으로 따질 수 없지." "술값은 얼마요?" "그건 술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그런 것을 왜 묻는가?" 백리향의 쓸데없는 질문에 온천향은 부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리향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소생은 돈이 없소. 후후후!" 그러자 온천향은 경악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앗! 그렇다면 당신은 큰일났어! 아마.... 죽음으로 보상해야 할걸!" 그와 동시에 온천향은 소매에서 단도(短刀)를 꺼내어 백리향의 목을 노리며 찔러왔다. 그 빠름이란 전광석화와도 같은 것이었다. 백리향은 발작적으로 목 을 비틀어 그녀의 단도를 피해버렸다. 그녀의 단도는 허공을 그리며 다시 백리 향의 목을 베어나가기 시작했다. 찌르고 베는 순간동작이 몹시도 유연했으며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백리향은 그녀의 민첩한 손놀림에 가벼운 탄성을 내지르며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 미끄러트리며 그녀의 공세를 피했다. 그녀는 두 번의 공세가 모두 실패로 끝나자 즉각적으로 몸을 날려 뒤로 피하 려는 백리향을 향해 단도를 뻗었다. 그러자백리향은 재빨리 손을 들어 그녀 의 완맥(緩脈)을 잡았다. 그녀는 자신의 완맥이 잡히자 다른 팔을 들어 백리향 의 천령개(天靈蓋)를 향해 내리쳤다. 백리향은 고개를 제치고 그녀의 정권(正 拳)을 피하며 그녀의 오른쪽 완맥마저 낚아채었다. 그러자 허공에 뜬 그녀의 몸이 기우뚱거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백리향과 그녀는 땅바닥에 쓰러져두어 번 뒹굴었다. 그녀는 악 착같이 백리향의 목숨을 노렸으며 백리향도 단도가 쥐여진 그녀의 손을 감히 놓지 못하였다. 장노삼과 점원들이 문을 열고 음식을 가지고 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순간 백 리향과 온천향의 혈전도 멈추어 졌다. ".........!" "..........!" 모든 점원들과 장노삼은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도도하고, 냉랭하기 그지없던 온천향이 젊은 남자를 악착같이 덮치는 모습을..... 점원들은 얼굴을 붉혔지만 장노삼은 백리향을 향에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며 존경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리향은 싱긋 웃어주었고, 온천향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점원들은 온천향 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자 그들은 무슨 생각에서인지 서둘러 음식과 술을 올려 놓기 시작했다. "........." "........" 그리고 점원들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서둘러 문 밖으로 사라져갔고, 그들 로 인해 잠시 멈추어 졌던피 튀기는 혈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시작이 있으면 항상 그 끝은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전쟁이든, 생명이든, 그리 고 싸움이든.......온천향의 진기는 고갈하였고 드디어 자신의 손아귀에 쥐여진 단도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돌아누우며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그녀의 머리는 산발하였으며, 의복은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고갈된 진기(眞氣)탓인지 두 눈은 몽롱한 듯 공허하게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리향도 그제야 그녀의 완맥을 놓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아무런 말 없이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할 때 온천향의 살기 어린 목소리가 백리향의 귓전으로 들어왔다. "네 놈이 나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상 우리 조직은 네 놈을 죽이는데 온 전력 을 다 쏟을 것이다. 장담하건대 조만간 네놈의 심장에 나의 검이 박히게 될 것 이야!" 백리향은 단순한 궁금증이 불러온 대가치고는 너무 비싼 것이 아닌가 생각했 다.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생의 목숨이 필요하시거든 언제든 육합문으로 찾아오시구려. 하지만......술 값은 아가씨께서 대신 내어 주십시오. 소생의 목숨에 비하면 헐값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후!" 백리향이 웃음을 머금으며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여러 명의 무림인들도 식사 를 막 끝마쳤는지 자신들의 행장을 챙기고 있었다. 그 들중 수장인 듯한 사나 이가 장노삼에게 다가가 동전을 꺼내어 내밀며 물었다. "노인장 이것은 용돈으로 쓰시구려. 하지만 하나만 물어봅시다. 이곳에서 육합 문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오?" 장노삼은 손을 내밀며 최대한 예의를 차려 그들에게 답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그때였다. "그곳의 위치는 소생이 잘 알고 있습니다. 소생은 육합문에서 서관 일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장인 듯한 사람은 장노삼의 손아귀에 있는 자신의 동전을 거두어 품속에 다 시 집어넣으며 백리향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오! 저희들은 무림맹(武林盟)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런 곳에서 서관 님을 만나 뵙게 되다니 정말로 다행한 일입니다." 백리향도 계단을 내려오며 공수를 취했다. "여러분들은 육합문의 귀중한 손님들이십니다. 부디 겸양치 마시고 소생을 따 라오십시오." 장노삼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행운이 백리향에게 가로막히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 백리향은 무림맹의 사자(使者)들과 인사를 나눈 후 육합문으로 그들을 안내하 였다. 장노삼은 서슴없이 떠나려 하는 백리향에게 외쳤다. "이보시오. 손님! 계산은 하고 가셔야지요?" 백리향은 그제야 장노삼을 돌아보며 말했다. "소생의 술값은 온천향아가씨가 대신 계산하기로 하였답니다." 장노삼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정말이요?" "물론입니다." 장노삼은 그제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정말이지....굉장한 신통력이십니다." 그것은 여태껏 지켜보고 있었던 무림맹의 무사들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들은 백리향이 다섯 명의 기녀를 요구하는 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으며, 우당탕하 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의복이 흐트러진 채 계단에서 내려오는 백리향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 보다 더욱 놀라운 점은 한 푼의 돈도 지불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무림맹의 귀빈들께서 어쩐 일로 육합문을 찾으셨습니까?" 백리향이 그들의 수장인 듯한 사람에게 묻자 그는 도리어 쑥스럽다는 듯이 말 했다. "하하! 귀빈이라니요. 우리는 일개 전령일 뿐이올시다. 너무 겸손해 하지 마십 시오. 그리고 본인은 성은 방(方)이라 하옵고 이름은 범정(凡貞), 자는 각정(殼 頂)이라 합니다. 무림의 친구들은 흔히들 무산철권(巫山鐵拳)이라 부르지요." 그들은 백리향의 신위를 경험해서인지 무척 친절한 행동을 보였다. 그들은 말 을 타고 왔지만 백리향을 배려해서 모두들 걷기 시작했다. "그동안 저희 무림맹(武林盟)에서는 백팔수라귀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온 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그 악귀 같은 놈들에게 당한 무림방파가 얼마 나 많으며, 얼마나 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해야 했습니까? 무림맹주께서는 이 를 통탄이 여기시고 의연히 일어나시어 구파일방의 종주들, 그리고 뜻 있는 무 림의 명숙(名宿)들과 함께 그들을 토벌하려고 하신 답니다. 우리는 여러 군소 방파(群小幇派)에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는 임무를 뛰고 있지요." 백리향은 그의 눈을 통해 무림맹주에 대한 충성심과 신뢰를 읽을 수 있었다. 무림맹주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부하들의 신망이 이토록 대단한 것일까? 본래 두 마음을 품으면 한 사람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한 마음으로서 백 사람 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틀림없이 무림맹주는 뛰어난 사람일 것이라 고 생각했으며, 이 회색빛 세상에도 어쩌면 오색으로 빛을 뿜어내는 사람을 만 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백리향은 생각했다. "그 백팔수라귀들이 출몰하기 시작한 것이 삼십 년이 넘었으니 아마도 대를 이어가며 싸우는 것일 겁니다. 그들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해서 그 자손들까지 말살하지 않으면 혈풍(血風)은 이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산철권 방각정은 투지에 불타오르는 듯 목소리가 격앙되어 있었다. 그런 그 의 기분과 달리 백리향의 마음은 어눌하기만 했다. 이 세상은 또 다시 피바람 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저...혹시 서관께서는 백가촌의 백리향이라는 고인을 알고 계십니까?" 백리향은 뜻밖에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의아심을 감출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를 어찌 아십니까?" "아! 저희 무림맹의 좌군사(左軍師)이신 백의신녀(白衣神女) 단 소청아가씨의 서신을 갖고 왔습니다. 듣자하니 그 분은 기문둔갑과 오행에 통달하시어 방안 에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시는 분이랍니다. 그리고 천외천에서 나오신 분으로 무공이 과히 입신의 경지에 오르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신녀께서는 무림맹 의 총사(總師)로 적극적으로 추천하셨지요. 만약 그분의 말이 사실이라면 백팔 수라귀의 최후가 눈에 보이는 일이겠지요." 백리향은 단소청에게 무림맹의 군사라는 또 다른 신분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 혀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백리향의 얼굴은 금새 어두워지며 한 숨 섞인 한 탄이 터져 나왔다. "아! 그는 피를 싫어하여 절대로 문밖을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제 칠장 劍客出現山降雨(검객출현산강우) 검객이 나타나니 산에는 비나리고.... 무림맹의 사신들은 사전의 통보도 없이 불쑥 찾아온 것에 비해 육합문주 장양 이 직접 나와 영접할 정도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들은 그것이 당연하다 는 듯이 받아들였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림맹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백리향은 그들과 헤어져 만서각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었다. 어느덧 가을초입 으로 들어서 그가 걷는 걸음마다 사각사각하는 낙엽 소리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조잘거림을 들을 수 있었다. 문득, 백리향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앞에 월동문이 보이고 그 문을 넘으 면 바로 만서각인 것이다. 만서각을 가기 위해서는 이문을 넘지 않으면 안되었 고, 이 문을 넘고싶지 않다면 월장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백리향은 문을 앞에 두고 담을 타고 싶지는 않았다. "이보시오. 어찌 살아 숨쉬는 사람이 땅속에 있단 말이오?" 백리향의 뜬 금 없는 말에 사방의 을씨년스러운 바람만이 그에게 대답했다. 한 참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백리향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생이 인기척을 내오리까? 사람들이 몰려오도록 말입니다." 그제야 월동문 바로 앞의 땅이 흔들리며 한사람이 튀어 올라왔다. 그는 흑의 를 걸치고 검은 복면을 걸친 자였는데 온천향이 입었던 복장과 똑같은 것이었 다. 그 흑의복면인은 백리향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며 자신의 의복에 묻 은 흙을 털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문득 하늘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우측 버드나무 위에서 쪼그리고 앉아 계신 분과 좌측 지붕 위에서 납작 엎드 리고 계신 분들도 마찬가지요! 계속 웅크리고 계실 거라면 소생은 말리지 않으 리다. 하지만 그 무슨 추태요?" 그러자 백리향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두 명의 흑의인형이 날아 올랐다. 그와 동시에 수십 개의 암기(暗器)도 동시에 날아왔다. 차라락! 달빛에 반사되어 날아오는 암기는 마치 수십 개의 섬광(閃光)처럼 쏘아져 나 와 한 편의 장관을 연출하였다. 이에 질세라 흙을 털던 복면인도 양손을 번뜩 였다. 그러자 열 개의 비엽도(飛葉刀)가 튀어나오며 백리향의 열 군데 전신사 혈(全身死穴)을 향해 폭사되어 왔다. "쉬익! 백리향은 그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유운행보(流雲行步)라 는 신법으로 몸을 뒤로 회전시키며 양손을 교차시켰다. "여의심(如意心), 여의만물(如意萬物)!" 그러자 섬광(閃光)처럼 날아오던 수십 개의 암기와 비도(飛刀)가 속력을 잃어 버리고 백리향의 손아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암기들은 백리향의 양손사 이에서 회전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었다. "돌아가라(回去)!" 백리향의 양손이 쭈욱 뻗어나가자 손아귀에서 빙글빙글 돌던 가지각색의 암 기들이 하늘로 빛을 뿌리며 휘날리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수놓으며 날아오르 던 암기들은 후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수십 개의 유성들이 떨어지듯 원래 의 있던 곳으로 낙하(落下)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두 명의 사나이들이 땅으로 곤두박질 쳤으며 한 명의 사나이가 펄쩍 뛰어올랐다. "크윽!" "컥!" 그러자 펄쩍 뛰어올랐던 흑의복면인은 두 눈을 부릎 뜨며 망연자실해 지고 말 았다. 자신의 손을 떠난 열 개의 비엽도가 어느덧 그의 발 밑으로 꽂혀 있었 던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이러한 무공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본 적도 없 었다. 그는 수많은 무공의 이름과 위력을 떠올려 보았지만 그 어떤 것도 자연 의 법칙이 이처럼 무시되지 못했다. 그의 그런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리향은 땅에 떨어진 두 명의 복면인들 을 바라보며 냉엄하게 꾸짖었다. "살의(殺意)를 품지 않은 자에게 암기를 날리다니.....! 어리석은 검사(劍士)에 게는 현검(賢劍)이 드러나지 않고, 비겁한 검사에게는 용검(勇劍)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신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생사가 지루할 뿐! 다음에 현검과 용검을 지닌 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들의 지루한 목숨은 여지없이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 ".......!" 땅바닥에 뒹굴던 흑의복면인들의 두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자신들 을 어리석고 비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언젠가 현명한 자들과 용맹 한자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삶은 끝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생사가 지루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만큼 형편없는 삶이며 할 일 없는 인생이라는 뜻일 게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자신들 의 삶은 괴로움과 번뇌로 가득찬 세월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그들은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왔지만 이렇듯 수치스럽고 두려워지기 는 처음이었다. 백리향의 말을 듣자 죽음이 당연한 듯 느껴졌으며 자신들의 삶 이 비천하게 느껴졌다. 백리향은 그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자 그만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 는 무림인도 아니었으며 독하고 매몰찬 성격도 아닌 단순한 구도자일 뿐이었 다. 백리향은 뒷짐을 진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하늘에 그나마 빛을 뿌리는 것은 별들이다. 그러나 어둠을 헤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빛이었다. 저 별들은 마치 자신의 모습과 흡사했다. 잘못된 길 을 걷는 자들을 바른길로 인도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깨달음을 지니고 있었 다. 그는 별들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백리향이 뒷짐을 지고 먼 하늘을 바라보자 그들은 곧 그의 뜻을 알 수 있었 다. 즉, 못본척 하겠으니 얼른 떠나라는 뜻이었다.그들은 백리향에게 공수의 예를 취해 보이고는 비참한 패잔병처럼 비틀거리며 사라져 갔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보통 사람의 어리석은 행동을 관대하게 보아주 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양편이 모두 손상을 입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들은 자신을 죽일 계획을 또 다시 세울지도 모르는 일이며 다른 사람을 해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결국 백리향의 관대함은 또 다른 악행을 불러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백리향도 그러한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굴레였 다. 폭력을 물리치려고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굴레는 자신 만의 것이 아니라 강호무림의 어두운 단면이기에.... 깨달은 무인은 강호를 비 웃으며 은거(隱居)를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백리향은 그만 한탄을 터트렸다. "아! 온천향아~ 온천향아! 그대의 살심은 어찌 이리도 독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가? " *** "바로....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다!" 이것은 전원월에게 강자단과의 일을 전해 듣는 순간 처음으로 느낀 주화룡 의 감정이었다. 만약 자신이 그 악명 높은 강자단을 죽일 수만 있다면....그의 원대한 포부는 확실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기에는 철혈마검 강자단이라는 악명은 너무나 거대했다. 과연 자신이 철혈마검 강자단이라는 거인을 쓰러트릴 수 있을까? 아마도 그것 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뛰어난 사제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 께라면 양패구상은 할 지라도 패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 었다. 몇 명의 사제들이 부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을 것이지만, 패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는 자신을 믿었고, 무엇보다도 육합문의 무공보다 더욱 위력적인 가전무공 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에 확신했다. 그는 철혈마검 강자단을 쓰러트릴 수만 있 다면 사제들이 희생당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철혈마검 강자단의 죽음! 그것이 그에게 가져다 주는 의미는 그만큼 큰 것이었다. 육합문을 절강제일무 문에서 천하제일무문으로 일으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명검 주화룡이라는 이름에 천하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의 가슴은 어느덧 두근거리기 시작했으며, 앞으로 다가올 찬란한 미래에 벌 써부터 환희를 느끼고 있었다. *** 어느덧 가을이 다가와 새벽녘이 되면 상당히 쌀쌀한 날이 되었다. 백리향으로 서는 그다지 날씨의 변화에 대하여 구애를 받지 않았지만, 전 노인이나 다른 식구들한테는 매우 추운 아침이 될 것이었다. 그는 그들을 위해 차주전자를 화 롯불 위에 얹어놓았다. 차가 어느 정도 끓었을까? 백리향은 차주전자를 들고 찻잔에 부었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며 향긋한 차 냄새가 백리향의 코를 즐겁게 하였다. 순 간 백리향은 차 냄새 속에 뭔가 다른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음을 깨달았다. "지령초(地靈草)?" 지령초(地靈草)란 지독한 음기(陰氣)를 발하고 있어 잘만 사용하면 뛰어난 약 효를 발휘할 수 있는 명약이었다. 하지만 차주전자에 있는 지령초의 양은 한 모금만으로도 한 사람의 목숨을 거뜬히 끊어 놓을 수 있는 정도였던 것이다. 백리향은 예전에 의학을 배울 때 여러 가지 약초에 대한 연구도 같이 겸하였 을 뿐만 아니라 태청신단을 복용한 후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신령한 기운 이 있어 자신의 오감을 극대화 할 수 있었다. 결코 자신이 잘 못 알고 있는 것 은 아니었다.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아마도 살인멸구를 원하는 살수집단의 소행이 확실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독을 풀 수 있었을까?백리 향이 알고 있는 한 만서각에서 자신의 일을 돕는 자들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독을 풀 수 있는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자신의 일을 옆에서 조언해주는 부서관(副書官) 나관중(羅關中). 그에 대하여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다만 태원(太原)사람으로 학구열이 높을 뿐만 아니라 특히 소설을 좋아하여 일부러 만서각의 일을 돌보고 있다고 알려 져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내력이 알려지지 않은 만큼 의심의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주육(周六), 주칠칠(周七七)남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었다. 천태현 장가촌에서 노비로 팔려와 신분은 확실하지 만, 어린아이들이기에 지령초를 넣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약간의 유혹에 도 아무것도 모른 채 넣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전노인. 백리향은 그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주화룡이 육합문의 제자로 들어 올 때 그와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노비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들 어 육합문의 안팎을 청소나 하며 지내지만 실제로는 그가 제일 유력한 용의자 였다. 그것은 육합문의 모든 곳을 돌아다닐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기도 했 으며 이곳 만서각도 예외가 아니었다. 백리향은 일단, 모든 의심을 접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는 차 주전자 속의 내 용물을 모두 버리고 새롭게 끓여 놓았다. 모르는 사람은 이차를 마실 것이고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차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즉, 이 차를 마시는 사람은 범 인이 아니며 마시지 않으려는 자들 중에 범인은 있을 것이었다. *** 강자단은 새까맣게 밀려들어오는 먹구름을 바라보았다. 저 먹구름은 어떠한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에 이토록 우울한 색을 띄우고 있는 것일까? 어둡고, 침 침하고, 음습한 자신의 마음과 먹구름은 어쩌면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어쩌면 비가 올지도 모르겠군.' 비가 내린다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누구의 피가 될지 모르지만, 몸에 묻은 피를 비가 말끔히 씻어내려 줄 테니까... 강자단은 하늘에서 시선을 떼며 육합문을 바라보았다. 일장(一丈)이나 되는 담 벼락 위로 육합진천하(六合進天下)라고 쓰여진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 었으며 검은색 옻칠이 되어있는 대문위로 절강제일무문(絶江第一武門)이라고 적힌 현판이 걸려있었다. 순간 그의 입가에는 비릿한 조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비추어진 육합문은 절강제일무문이라는 현판을 달기에는 자격미달이었다. 그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 문을 박차고 들어섰다. '쾅!'하는 소리와 함께 대문 이 활짝 열렸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집인 냥서슴없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육합문 넓은 마당에 수십 명의 소년들이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고 그들은 뜻 밖의 방문객을 분노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호랑이는 수백 마리의 토 끼에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법이다. "이놈들! 무엇을 보는 게냐!" 진원지기가 실린 그의 음성은 육합문전체에 메아리 가되어 울려 퍼졌으며 육 합문의 어린 수련생들은 그의 패기(覇氣)에 눌려 얼굴이 허옇게 질려 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강자단은 만족한 듯 대소를 터트리며 발걸음을 옮 겼다. "껄껄껄!" 그가 넓은 마당을 벗어나 커다란 이원에 도착했을 때였다. 십여 명의 무사들 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들은 육합문의 삼대제자들로 강자단의 공력이 실린 음성에 놀라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 중의 수뇌인 듯한 자가 무리를 헤치며 나 타났다. 그리고 거만한 표정으로 강자단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본인은 번자개(番紫改)라는 사람이오. 다른 이름으로는 반철룡(班鐵龍)이라 고도 부르지... 귀하는 누군가? 누구기에 감히 육합문에 난입을 한 것인가?" 반철룡(班鐵龍) 번자개(番紫改)는 소림남종문하(小林南宗門下)로 강시권(　尸 拳)에도 일가견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자였다. 장양은 그를 어렵게 초빙 하여 육합문의 외가무공의 대사부로 모셨던 것이었다. 그러나 강자단은 그를 알지 못했다. 번자개의 사나운 언성에도 강자단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누가 뭐래도 자신이 걷고자 한다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는 무언의 자신감과도 같았다. 번자개는 자신의 위명에도 일절 동요함 없이 그대로 걸어오는 사나이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흰색 천으로 아무렇게나 묶여져 있 었고 덥수룩한 수염은 정리가 안되어 있어 지저분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의 검 은 그렇지 않았다. 비단 화려했을 뿐 아니라 넉자(약 120Cm)나 되는 검집에 날아갈 듯한 용이 양각되어 있었다. 번자개가 알고있는 한 중원무림에서 이러한 용자검(龍姿劍)을 들고 다니는 사 람은 오직 한 사람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눈이 틀리길 빌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사신(死神)을 맞이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나이는 어느덧 번자개와 일장 정도의 거리로 좁혀져 왔다. 번자개는 그가 누 구인지 깨닫자 온 몸이 얼어붙은 듯 꿈쩍할 수 없었다. "호, 혹시, 귀, 귀하는....."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어느덧 강자단의 손이 자신의 이마 에 와 있었던 것이다. "비켜!" 강자단은 그의 이마를 살짝 밀었건만 번자개는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서야 신 형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자신의 제자들 앞에서 엄청난 치욕을 당했음에도 그는 전혀 분노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이 마에 손이 아니라 검이 다아 있었다면 그의 목은 여지없이 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자단은 번자개를 철저히 무시하며 그의 옆으로 지나쳤다. 번자개의 제자들 또한 그가 내뿜는 패기에 기가 질려 감히 마주보지 못하고 길을 열어주었다. 그때였다. "무림의 영웅께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어 주십시오!" 멀리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강자단 앞으로 비단옷으로 몸을 감싼 청수하 게 생긴 중년의 사나이가 다가왔다. 그 중년의 사나이는 생긴 모습과 달리 정 중했으며 지나칠 정도로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소인은 육합문의 총관인 노군행(盧郡行)이라고 합니다. 혹시 철혈마검 강대 협이 아니 신지요?" "........." 강자단은 그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노총관은 그의 시 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겸손한지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듯 연 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대협께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소인이 문주님께 전갈을 올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장양한테 이렇게 전하시오. 강자단이 아들의 빛을 청산하러 왔다 고....." 그야말로 안하무인이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언사였다. 하지만 노총관에게는 결코 무례하게 들리지 않았다. "네, 네, 알겠습니다." 노군행은 고개를 돌려 여러 제자들과 번자개를 바라보며 말했다. "번대선생(番大先生)과 여러 제자 분들은 이만 물러가심이 좋을 듯 합니다." 번자개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아무런 말 없이 제자들을 이끌고 사라져갔다. 그가 진실로 수치스러운 것은 강자단에게 당한 모멸 때문만은 아 니었다. 그는 노군행보다 못한 담력을 지녔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은 것이었다. 제자들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지만 번자개는 행낭(行囊)도 챙기지 아니하 고 그 길로 고향인 진주(進洲)땅으로 낙향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 평생을 진주 땅을 벗어나지 않았으며 나중에 이자성이 봉기하였을때 그를 찿아와 도움을 청할지라도 거절하고 땅을 일구며 살았다. "그럼 강대협께서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노총관은 평상시의 발걸음 보다 세배는 빠르게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장양 이 있는 태의전으로 향하지 아니하고 대공자 주화룡의 거처로 향했다. 낭인무사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들은 뛰어난 무공을 갖추고 있음에도 사회 적 제도나 관습에 얽매여 그늘 속에 숨어사는 불쌍한 존재들이었다. 출신성분 이 나쁘거나, 한 번쯤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거나하여 무관에 오를 수 없는 자 들이었다. 그렇다고 사업에 손대기에도 학문이나 재능에서 뒤떨어지고, 일가 를 이루기에도 무공이 안 따라주거나 무공이 따라 준다하여도 평판이 좋지 안 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오로지 검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었고 때에 따라서는 강도가 되기도 하고, 산적이 되기도 했다. 오늘은 아군이었다 가도 내일은 적군이 되기도 하 는 용병들이었고, 돈에 움직이고 돈이 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는 것이다. 물론 선행을 베풀며 천하를 유랑하는 낭인들도 있다. 하지만그들을 가리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파(邪派)라고 규정한다. 충효예의를 지향하는 정파의 사 람들의 눈에는 그들의 비천한 신분과 자유분방한 삶을 이해 할 수 없었기 때 문이었다. 철혈마검 강자단 또한 평생을 혼자 일해온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는 육합문은 그저 꽤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그런 곳에 불과했다. "사형들! 저 놈입니다. 저놈이 강자단이란 놈입니다." 문득, 정신을 차린 강자단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눈을 돌려보니 전에 장터에 서 보았던 애송이가 또 다른 애송이 네 명을 끌고 오고 있었다. "허어, 참! 애송이들이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불 속에 뛰어드는 나방의 모습이 저러할까? 과연 저들은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자신들에게 닥칠지 알고는 있을 까? 강자단은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더 많은 사례금을 장양 에게서 받아 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철혈마검 강자단이오?" 주화룡의 말투는 존경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는 건방진 것이었다. 강자단은 웃었다. 아니 웃긴다고 해야 옳았다. "애송이! 장양은 어디에 쳐 박혀 있느냐?" 강자단의 다분히 의도적인 발언에 아니나 다를까 애송이들은 발광을 하기 시 작했다. "뭐, 뭣! 감히 더러운 입으로 사부님의 존함을 입에 담다니..." 섬전검 백우산이 검을 빼어들고 달려들려고 하자, 주화룡은 그를 재빨리 제지 하며 강자단을 노려보며 말했다. "강자단! 나가서 해결합시다." * ** 새벽부터 지금까지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만서각에 출입을 하였지만 아무 도 자신이 끓여놓은 차에 손을 되는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어찌된 일일까? 이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백리향은 복잡한 생각을 접고 불현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지막한 목 소리로 말했다. "이 것 보시오! 온아가씨! 지치지도 않으시오? 그 좁은 곳에서 쭈그리고 않아 있기를 한 시진 째이지 않소. 그만 내려오시구려." 그러나 천장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아가씨가 내뿜는 살기가 나의 정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은히 퍼 져오는 사향 냄새는 내 코를 마비시킬 정도입니다." 그러자 어두운 청장 대들보 위에서 코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흥! 거짓말! 살수가 어찌 향수를 뿌리겠는가!." 그러자 백리향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하고 대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그렇습니다. 살수는 절대로 향기를 머금지 않지요." 온천향은 그제야 백리향에게 속은 것을 알았다. "쳇! 진실로 여우같은 놈이로구나." 그녀는 천장 대들보에서 뛰어 내려 왔다. 그리고 백리향을 노려보며 권하지도 않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복면을 벗고는 물을 벌컥 들이켰다. 그 녀는 남자처럼 머리를 끈으로 묶어 놓았는데 아마도 성별을 감추려는 의도일 것이었다. "........ " 그녀는 물병을 내려놓고 입술을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당신은 어떻게 나의 정체를 쉽게 파악해 버리는 거지?" "인간에게는 누구 나가 잠재되어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 힘을 빌리는 것입니 다. 무공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지만 그 끝은 같습니다." "........." 온천향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백리향이란 존재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지? 솔직히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당신 같은 사 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어.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역사가 있 게 마련인데 당신은 그것조차 없더군.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 같아." 그녀의 당돌한 질문에 백리향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아가씨가 옳게 보신 것입니다. 소생은 하늘에서 뚝 떨어졌지요. 깨어나고 보 니 육합문이더군요." "........." 그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백리향을 쳐다보다가,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큭!...." 그 실소는 점점 커져가 커다란 웃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녀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자신의 배를 움켜쥐고 허리를 숙이며 폭소를 터트렸다. "큭큭큭!....깔깔깔!....당신 웃겼어!" 순간! 그녀의 틀어 올려진 상투 속에서 번쩍하며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슈욱! 슈욱! 그녀는 직감적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연기(演技)는 완벽했을 뿐만 아니라 이 만한 거리에서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암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곧 썩은 벌레라도 씹은 듯한 표정으로 바뀌고 말았다. 죽어 널브러져 있어야할 백리향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지 않은가? 그것도 자신의 암기인 기황적(機黃笛=피리의 형태를 지닌 암기를 발사하는 장치)을 흔들며..... 그녀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뒷머리를 만졌다. 역시나 기황적은 없었다. 그녀 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망연히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빠른 암기를 피하기에도 급했을 터인데 어느 사이에 기황적을 빼어낼 수 있었을까? 백리향은 그녀의 경악에 찬 표정을 무시하고 기황적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것으로 지난번 외상값은 갚았다고 칩시다. 하지만 다음에 또 이런 짓을 한 다면 당신의 볼기짝을 때려주겠소." "흥! 정말로 잘났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분해 죽겠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백리향을 쏘아보았다. 그러다 무엇을 떠올렸는지 곧 미소로 바뀌며 말했다. "좋아! 하지만 내가 좋은 정보를 하나 주지. 이 곳으로 오다 보니 육합문의 다 섯 멍청한 제자들이 철혈마검 강자단과 같이 나가던걸? 지금 빨리 가보지 않 으면 그들의 목숨은 없을 거야! 당신은 나에게 또 다시 빚지고 말았어!" 백리향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온천향은 백리향의 눈길을 받자 마 치 자신이 발가벗기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소저의 심기는 보면 볼수록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소생에게 중요한 정보 를 주는 것이라고는 하였지만.....강자단의 힘을 빌려 소생을 죽이려는 차도살 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아니오? 그러면서도 소생에게 또 다른 빚으로 떠넘 겨 버리다니.....휴우~ 하였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온 아가씨께 또 다시 빚졌소. 이 빛은 차후로 갚겠습니다." 백리향은 온천향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자 그의 몸이 흐릿해 지기 시작했다. 그 리고 급기야 그의 몸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온 천향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세, 세상에 저런 경공이 있다니....!!!" 제 칠장 劍客出現山降雨(검객출현산강우) 검객이 나타나니 산에는 비나리고.... 드디어 대소천태산에 세우(細雨=가는 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비 는 여름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슬픈 눈물일지 몰랐다. 빗물이 고여 질척이는 땅 을 밟으며 강자단은 여유롭게 산세를 구경하였다. 푸른 산은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고, 푸른 나무는 산등성이에 어우러져 있었 다. 땅은 충분히 수분을 머금었으며 하늘은 더욱 많은 비를 뿌릴 것이다. 강자 단은 모든 것이 흡족했으며 놈들을 때려눕히기에는 적당한 날씨라고 생각했 다. "철혈마검 강자단! 당신의 대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소. 막내 사제와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고 하던데?" 주화룡의 당돌한 목소리에 강자단은 문득 고개를 돌려 애송이들을 바라보았 다. "약간의 오해.......그런 것은 없었네. 단지 애송이가 내 머리위로 술을 부었을 뿐이지." 순간 장지충을 제외한 육합오호검은 당황했다. 그들이 장지충에게 들었던 내 용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강자단이 육합문을 모욕했으며 장지충은 발 끈하여 결투를 신청한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 그건..." 그러나 주화룡은 그들의 수장답게 금방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오해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소. 당신 같은 낭인무사들은 항상 무엇인가 요구 하려 하지. 그렇지 않소?" 강자단은 이외라는 눈빛으로 주화룡을 바라보았다. 강자단은 틀림없이 그럴 의사가 있었다. 애송이들의 팔과 다리를 가볍게 부러트린 다음 장양에게 가서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자네는.... 특별하군. 이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드럽고 순서 있는 대화 를 원하는데 말이야. 자네는 마치 나와 일전을 겨루려는 자 같아. 그렇지 않 나?" 주화룡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그럴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러고 보면 주화룡과 강자단은 성격에서 많은 부분이 닮아있었다. 직설적이고 결코 두려움을 몰랐다. "........." ".........." 주화룡은 강자단이 자신이 상상했던 것 보다 더욱 무서운 자라는 것을 깨달 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 서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목표는 다 이루었으며, 지금 자신을 만족시켜줄 목표 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은가! "당신은 나를 알고, 나는 당신을 알고 있소.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한 것 같은 데?" 그러자 전원월은 깜짝 놀란 듯 주화룡의 소매를 흔들며 말했다. "대, 대사형! 지금...." 주화룡은 강자단을 상대로 감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긴장한 듯 비장한 목소 리로 말했다. "사매. 자네에게 알리지 않음은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미 결심을 세우고 있었다네. 남아(男兒)로 태어나서 큰공(功)을 이루고 부귀와 명예를 다하는 것 은 하늘이 주신 소명(召命)일세. 전원월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제와 사형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두 눈을 칼날처럼 세우고 전의(戰意)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자신들의 무기 를 꺼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미, 미쳤어! 모두.... " 강자단은 애송이들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과 대화를 통해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다만 형식적인 절차만 밟아온 것이었다. 애송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목이었다. 아니, 자신의 목을 베어버림으로 해 서 얻어지는 명성이었다. 강자단은 주화룡의 눈에서 불같은 야망을 읽을 수 있 었다. 그는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욕심에 형제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었다. 강자단의 입가로 끈적끈적한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흐흐흐! 나는 자네를 알지만, 자네는 나를 몰라. 만약 알았더라면 이런 행동 은 결코 하지 않았을 거야." 강자단은 넉자나 되는 자신의 검만큼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웬만하면 검 을 뽑지 않지만, 한 번 뽑으면 절대로 상대를 살려두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비 참한 방법으로 살해하였다. 그런 그의 검이 드디어 뽑혀져 나오고 말았 다. '창!'하는 맑은 금속성과 함께 그는 하나의 검으로 화한 듯. 무서운 예기(銳 氣=날카로운 기운)가 전신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그토록 자신만만해 하던 육합오호검들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본 래 사수(射手)는 활이 쥐여져야 비로소 그의 능력을 알 수 있고, 검수(劍手)는 검이 쥐여져야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다. 막상 강자단이 검을 뽑아들자 그 기세(氣勢)는 가히 엄청난 것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에게 잔심냉혈경패왕 (殘心冷血驚覇王)이란 시구를 붙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자단은 검을 내려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일촉즉발의 긴장감으로 그들 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강자단은 그만 실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 고 그의 두 눈은 옥수낭랑 전원월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기묘 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전원월을 한 참을 바라보다가 먹음직스럽다는 듯이 입 을 다시며 말했다. "흐흐흐! 나는 결코 손해보는 장사는 하지 않아. 사례금은 포기하도록 하지. 하지만 저 여인을 데려가겠다. 너희들을 다 죽이고...." 강자단의 눈길을 받자 전원월은 자신의 온 몸에 벌레가 지나가는 듯한 혐오 감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의 가늘고 길다란 두 눈이 더욱 길어지기 시작했으 며 손에서 삼척장검이 뽑혀져 나왔다. 그녀는 분노했으며 강자단을 상대로 싸 우기를 원했다. 육합오호검은 주저하던 전원월이 합세하자 잠시 흐트러졌던 용기가 솟아오르 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호복마진(五虎伏魔陣)을 형성하며 강자단 앞으 로 다가섰다. 강자단은 그들이 포진한 진세를 보자 곧 매우 공격적인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진식에는 어떠한 변화가 숨어 있을까? 강자단은 궁금증을 참지 못 하고 성급히 말했다. "장양이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보겠다. 덤벼라!" 그러자 주화룡이 섬전같이 검을 휘두르며 강자단의 복부를 공격하였다. 그러 자 전원월이 동시에 뛰어오르며 등천이기검(登天二起劍)이라는 수법으로 정수 리를 내려치는 것이었다. 강자단은 감탄을 터트렸다. "좋아! 매우 좋아!" 그와 동시에 강자단은 자신의 장검을 휘두르며 그들의 공세를 차단했다. 그러 자 강백지가 야호횡조(野虎橫爪)로서 그의 어깨를 쓸어갔다. 그리고 백우산은 검휘단천(劍揮端川)으로 강자단의 목을 베어나갔다. 오호복마진(五虎伏魔陣)이란 팔괘진(八卦陣)과 달리 적을 둘러싸지 않고 퇴로 를 열어두는 칠성진(七星陣)과 유사한 진법이었다.그 만큼 공격적이고 다양 한 변화가 깃들어 있었다. 전후좌우 그리고 위와 아래에서 신속하게 공격하는 육합오호검의 검세에 강 자단은 잠시 밀리는 듯이 보였다. 그들은 강자단이 조금씩 뒷걸음치자 용기를 얻었는지 더욱 활발한 공격을 이루고 있었다. 차앙! 창! 창! 창! 사방으로 불똥이 튀고 검들의 바람 가르는 소리가 난무하였다. 어느 한 순간 강자단이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어지자 그들은 회심의 미 소를 지으며 마지막 한 수를 펼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룡봉환원(龍鳳還元)!" "구룡종횡(九龍縱橫)!" "마각퇴호(馬脚退虎)!" 사방에서 불어오는 검풍을 바라보며 강자단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자 신의 검을 종횡무진으로 휩쓸어갔다. 엄청난 금속음이 터지며 사방에서 돌풍 이 불 듯 맹렬한 기세가 몰아쳐 왔다. 차앙! 창! 창! 창! 그때였다. 주화룡의 소매에서 무엇인가 번쩍하며 한 무리의 빛이 뻗어 나왔 다. 그 빠름이란 상상을 불허하는 것으로 강자단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헛바 람을 집어 삼켰다. 그는 한 손으로 파천대팔식(破天大八式)중 제 삼초 화우난검(花雨亂劍)이라 는 초식으로 응수하며 그 검광을 향해 또 다른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펑!' 하 는 굉음소리와 함께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헉!" 주화룡의 몸이 삼장이나 날아가 뒹굴었고 나머지 육합오호검들은 강자단의 화 우난검이란 초식에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연거푸 뒷걸음치 며 물러났다. "크윽!" "헉!" 육합오호검은 손아귀의 고통도 잊은 채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들은 분명 선기 를 제압하고 있었고 강자단은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연신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들은 강자단의 한 수에 여지없이 무 너지고 만 것이다. 그제야 그들은 절실히 느끼기 시작했다. 그가 어째서 철혈 마검이라고 불리어지는지를..... 강자단은 그들의 표정에는 아랑곳없이 주화룡을 바라보며 놀라운 듯 말했다. "너는 탈혼무혈검광비(奪魂無血劍光飛) 주정천(周頂天)의 자식이로구나!" 주화룡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으며 일어섰다. 그의 입술사이로는 실핏줄이 흐르고 있었으며 두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자신의 일검이....아니 가전무공 이 강자단의 단 한 수에 뚫려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그의 마음과는 달리 강자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독백하듯 말했다. "주정천은 은퇴를 선언하고 곤륜산에 처박혀 있다고 들었는데....그 자식이 어 찌 육합문의 제자로 있단 말인가?" 주화룡은 지극히 냉정한 심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 때 만큼은 불같이 노하 며 외쳤다. "사부님과 아버님은 막역지우니라! 더러운 입으로 함부로 존함을 올리지 말 라!" 그러자 강자단도 불같이 화를 내며 말했다. "이놈아! 그렇다면 나의 목에 칼을 쑤셔 넣으면 될게 아니냐!" ".......!" 순간, 주화룡의 두 눈에서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주화룡은 자신의 검을 더욱 힘주어 쥐고는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제들에게 외쳤다. 아니 자신에게 외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도 인간의 자식, 우리도 인간의 자식! 똑같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어차 피 죽으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터! 오늘 본인은 강자단이라는 자에게 죽음 을 당할 터이지만, 그도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 저승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만 약 한 목숨 살고자 하는 자는 지금이라도 좋으니 떠나라!" 주화룡은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무인은 항상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려 한다. 좀더 높은 경지를 위하여 무공을 수련하며, 명예를 높게 떨쳐 가문과 자신을 빛내려 한다. 그것이 바로 무인들의 본질이었다. 비록 무모한 도전으로 그 끝 을 맺게 되었으나 무인으로서 당당한 죽음을 맞을 준비는 되어있었다. 육합오호검들은 항상 주화룡을 존경했으며 그를 따랐다. 그리고 주화룡의 말 뜻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그들은 검을 다시 한 번 고쳐 잡고 임전 (臨戰)의 태세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다시 한번 투지에 불타기 시 작했고 전의를 일 사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결코 강자단을 쓰러트릴 수 없음 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인이었기에 죽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지충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조심스레 전원월에게 다가서더니 나지 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힘만으로 역부족인 것 같습니다. 제가 육합문도들을 이끌 고 오지요." 장지충은 그녀의 대답이 날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날아온 것은 그녀의 손이었 다 쫘악! 장지충은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몇 걸음 물러났다. 전원월은 그를 거들떠보지 도 않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소매는 여러 사형들을 만나 그 동안 행복했습니다." 전원월의 비장한 목소리에 누구하나 입술을 떼지 못했다. 모두가 똑 같은 심정 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강자단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껄껄껄! 정말 네가 마음에 드는구나. 아무렴 강자단의 마누라가 되려면 그 정 도는 되어야지! 하지만 다른 놈들은 용서할 수 없어!" 그 말을 끝으로 강자단은 자신의 검을 종횡으로 가르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 의 용자검(龍姿劍)은 폭은 세치, 길이는 넉자나 되는 장검이었다. 하지만 그이 손아귀에서 뿌려지는 검광은 마치 얇은 연검(軟劍)처럼 수십 개의 빛을 뿌리 고 있었다. 차앙! 창! 창! 창! 육합오호검은 진정으로 강함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강자단의 검은 자신들 이 상상했던 이상의 것이었다. 그의 검을 막을 때마다 찾아오는 찢어지는 듯 한 손아귀의 아픔을 뒤로하고서라도 그의 빠름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소나 기가 퍼 붙는 듯한 공격을 다섯 사람이 골고루 막아도 그칠 줄 몰랐다. 그제 야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으며, 얼마나 보 잘 것 없는 인간 들이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파천대팔식! 일검참운(一劍慘雲)!" 순간 강자단의 검에서 미묘한 떨림이 일더니 그것은 하나의 뇌전처럼 사방으 로 폭사되어 왔다. 까! 가강! 육합오호검들은 자신의 검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아울러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잘려나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크악!" "으악!" 순간 백우산의 오른팔이 날아가고 주화룡의 오른쪽다리가 날아갔다. 강백지 의 가슴은 갈라지고 장지충의 얼굴에 지울 수 없는 검상을 남겼다. 그들은 진흙 속에 나뒹굴며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하더니 몇 번 꿈틀거리다가 그만 침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나마 미약한 상처를 입은 장지충은 자신의 얼 굴을 감싸않으며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곧 강자단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망연 자실한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죽음의 공포로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였으며 그 어디에도 무인다운 면모는 보이지 않았다. 강자단은 장지충과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는 애송이들을 외면하고 전원월에 게 다가섰다. 그리고 경악에 차있는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너는 다치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죽이지도 않으마. 너는 나의 전처(前妻)와 참으로 닮았구나! 그녀도 너처럼 고운 피부와 아름다운 얼굴을 지녔단다. 키 가 크고 말랐기 때문에 항상 사람들한테 동정을 받았었지...." 그는 전원월의 요대(腰帶=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질겁을 하 며 강 지단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강자단은 너무나도 수월하게 그녀의 손 목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약간 비틀자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검 을 떨어뜨렸다. 검을 멀리 치워버린 강자단은 순 식간에 그녀의 요대를 낚아채 어 버렸다. 그러자 그녀의 하얀 내복이 드러났다. "무, 무슨 짓을..." 그녀의 경악성에 강자단은 도리어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다 장지충을 의식하 고는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왜? 부끄러운 것이냐? 걱정하지 말아라. 어차피 저놈은 나에게 죽을 목숨이 다." 그는 괜찮다는 듯,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듯 말하며 전원월의 흰색 내의를 벗 기려 다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손을 제지하는 또 다른 손이 있었다. 마 치 어린아이의 피부 마냥 때묻지 앉고 새하얀 손! 강자단은 뒤돌아보지 앉아 도 그 손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장터에서 한 번 부딪친 적이 있었기 때문이 었다. "또...너냐?" "바로 나요 강자단!" 가늘게 흩날리던 비는 어느덧 굵은 빗줄기가 되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며 온 산하를 적시기 시작했다. 그 동안의 열기 탓인지 산림은 자욱한 안개를 뿜 어내며 오랜만에 뿌려지는 빗줄기를 반기는 듯 했다. 백리향은 부상당한 자들을 응급조치를 하고 산하로 내려보냈다. 주화룡을 제 외한 육합오호검들은 스스로 내려갈 수 있었지만 한 쪽다리가 잘려나간 그는 장지충의 부축이 필요했다. 그들의 얼굴은 초췌했으며 그 어디에도 생기를 찾 아볼 수가 없었다. 전원월은 백리향에게 무엇인가 말할 듯 하다가 한 숨을 쉬 며 내려갔다. 백리향은 그들의 뒷모습이 완전히 숲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고개 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핏덩이가 빗물에 녹아있었으며 누런 황토 와 섞여 대지를 붉게 물들였다. 문득 저 멀리 주화룡의 다리가 보였다. 얼마전 까지 신경이 살아서 팔딱거리던 것이 지금은 고요히 잠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것을 보자 백리향의 눈꺼풀이 심하게 떨려왔다.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이란 이렇게도 공허한 것일까? 타인의 고귀한 생명을 하찮게 여기며 아무렇지 않게 팔 다리를 잘라내어도 되는 것일까? 인간들이 가지는 잔인함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백리향의 눈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분노를 느꼈으며 더 이상 자신 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분노를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자. 슬픔을 인정하고 그대로 놓아두자. 자신의 모든 감정을 인정하고 잠시만이라도 그대로 놓아두자. "너의 눈을 보고 알았지... 절대로 보통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강자단의 눈빛은 차가웠으나 그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 흥분으로 뜨겁게 달구 어져 있었다.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리향은 주위에 널려있는 나뭇가 지 하나를 주워들고는 돋아난 잎새를 뜯으며 그를 질책하듯 말했다. "당신은 너무 심하셨소.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었을 텐데..." 그러자 강자단은 한 걸음 내딛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도 애송이들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그들의 눈빛을 보았나? 탐욕에 절 인 눈들을 보았나? 저들이 원하는 것은 나의 목이었네. 나의 목을 통해 명성 을 얻으려는 작자들이었네. 자네가 나의 기분을 알 수 있을 것 같은가? 수많 은 사람들이 나의 목을 원하고 있고 그들은 갖은 방법을 다 써서 나의 목을 베 려하지....단순히 무림에 이름을 떨쳐보고자 온갖 수단을 다 쓴다네. 나 같은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 그래서 가정을 갖지 못하고 자손을 낳지 못하 는 걸세... 내 후손에게까지 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저들이 나의 목을 취할 권리는 있고 나는 그들의 목숨을취할 권리는 없다는 말인가?" 백리향은 마지막 잎새하나를 뜯어내고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무심 한 듯, 어눌한 듯 말했다. "당신은 멍청하오. 남의 눈을 들여다보기 전에 자신의 눈을 들여다봤어야 됐 소.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얼마나 바보 같은 삶을 살았는지... 알았어야 했 소.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목숨을 얻고자 하는 것만큼, 당신도 남의 목숨을 취 해 이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어야 됐소. 당신도 저들만큼이나 명예 욕에 도취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했는지 기억이 안 나오? 오늘만 큼 당신을 두들겨 패줘야 갰소. 잔말말고 덤비시오." 백리향은 나뭇가지를 내려뜨리고 손을 끄덕거렸다. 마음놓고 던 비라는 듯 이..... "........!" 강자단의 입술이 바싹 타들어 감을 느꼈다. 저 육합문의 식객이라는 자는 가 늘고 연약하기 그지없는 나뭇가지를 들고 덤비라고 손짓한다. 다른 사람이 저 런 행동을 보였다면 그는 비웃었을 것이다. 아니 한 주먹에 그의 머리를 짓이 겨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비웃을 수 없었다. 백리향의 두 눈은 어느덧 무심히 가라앉아 있었고 사물을 초월한 듯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강자단은 비웃을 수 없는 것이다.그의 본능 은 그가 무서운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이 런....감정을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일까? 강자단은 자신의 모든 내공을 끌어올려 검에 집중시켰다. 그러자 그의 검이 울기 시작했다. 찌~잉~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단 한 수! 오로지 단 한 수로서 승부가 판가름 날것이라 는 것을..... "파천대팔식! 용비단천(龍飛斷天)!" 그는 마치 용이 승천하듯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팔방을 점하며 검을 휩쓸 어 갔다. 그러자 하늘이 갈라지기라도 한 듯 '쉬이익!' 거리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와 더불어 종횡으로 검풍이 휩쓸어져 왔다. 강자단은 자신의 진원지기를 모두 쏟아내었으며 검식은 완벽하게 펼쳐졌다. 팔방을 완벽하게 점했으며 상대는 그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었다. 그러나 백리향의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천 진난만하게 나뭇가지를 흔들 뿐이었다. 그의 행동에 비해 결과는 결코 천진난 만하지 않았다. 강자단의 검과 백리향의 나뭇가지가 부딪치자 엄청난 파공음이 퍼지며 강자단 의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자신의 검이 하늘로 훨훨 날아오르 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 어떻게! 이, 이런..." 그는 믿을 수 없는 현실에 경악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다. 세상에는 보 고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간혹 있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믿지 않겠 다는 것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강자단은 후자에 속했다. 그는 지금 당면한 현 실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백리향은 나뭇가지를 버리고 망연해 있는 강자단에게로 다가갔다. "당신은 그런 사람인가? 강하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렇게나 검을 휘두 르는 그런 사람인가?" 강자단은 벌려진 입을 다물 사이도 없이 날아오는 주먹을 보아야 했다. 강자단 은 얼른 고개를 숙여 백리향의 주먹을 피했다. 아니 그것은 그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다. "퍽!" "크악!" 강자단은 자신의 머리에서 전해져 오는 엄청난 충격에 거의 기절할 뻔했다. 그 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않으며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었다. "당신은 자신보다 무공이 약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죽이려 하는 그런 사람인 가?" 백리향의 발은 그대로 강자단의 복부에 꽂혔다. "퍼벅!" "컥! 그, 그만!" 강자단은 숨도 쉴 수 없는 고통을 느끼며 겨우 한 마디의 말을 내 뱉을 수 있 었다. 백리향은 코웃음을 치며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왜? 아픈가? 당신도 아픈 줄 알면서...그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으면서 그렇게도 많은 사람의 눈물과 생명을 앗아갔었나?" 백리향의 주먹이 또 다시 강자단의 면상에 내리 꽂혔다. 퍽! "크악!" *** 이 것은 애초부터 싸움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검이 식객의 나뭇가지에 얻어맞자 말자 퉁겨져 날아올라가 버리고 그러한 현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날 아온 것은 식객 놈의 주먹이었다. 자신은 피한다고 했어도 주먹은 눈이라도 달린 듯 날아와 정수리에 꽂혔다. 그 충격이란 그야말로 하늘이 노랗고 별들이 눈에 아롱거릴 정도였다. 그 다음 부터 주먹과 발이 무차별적으로 온 몸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누군가? 그래도 이 바닥에서는 '내가 나다'하면, 다들 나인 줄 알고 알 아서 도망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철혈마검이라는 별호는 주사위를 던져서 따낸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혈전을 치러가며 얻은 것이다. 생과 사를 오가며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얻은 것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자신을 보라! 육합문이라 는 이류정도의 무관에서 식객질이나 하는 놈한테 그야말로 묵사발 되고 있는 것이다. 이왕 자신을 팰 거라면 비영십육권(飛影十六拳)이나 벽력참절각(霹靂斬截脚) 같은 전설적인 무공을 사용해준다면 체면이나 서련만 이놈은 그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주먹과 발길질로 난타를 하고 있어 어디에 하소연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 식객 놈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자신의 가슴에 와 닫는 것 은 무슨 이유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복받쳐 오르고 슬픈 걸까? 이런 것이 동 병상련의 아픔이라는 걸까? 나는 절강성(浙江省) 구주(衢州)사람으로 한 때 무과에 응시하여 무장원에 오 른 적도 있었다. 절토사(折討使) 부병관(副兵官)이라는 벼슬도 제수 받았다. 하 지만 한족출신으로 오랑캐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싫었고 출세의 길도 멀기만 했다. 특히 놈들의 만연된 부정부패에 신물이 났다. 나는 술에 취한 김에 총병관(總兵官)의 머리를 베어버리고 그 길로 낭인의 길 로 들어섰다. 그 옛날 사부는 나를 보고 천하의 도적놈이 되지 않으면 대협객 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나는 전자 쪽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한 동안 쫓기는 신세가 되고 보니 나쁜 짓도 하게 되었고 살인도 하게 되었 다. 내가 죽인 포두((捕頭=범인을 잡으러 다니는 포교)만도 열 명이 넘었다. 빌 어먹을.....강호라는 세계.... 이제 염증이 생긴다. 나는 살아남고 싶어서 죽였 을 뿐이었다.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했고 처참하게 죽일 수록 더욱 두려워했다. 그만큼 나에게 도전해오는 사람도 줄어들었고 생활은 편해졌다. 철혈마검이라는 칭호는 정말이지 싫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사 람들은 나를 가리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진짜로 잔심냉혈경 패왕을 만났다. 이놈은 정말이지.... 사람을 오뉴월 개 패듯 하는 잔혹한 놈이 었다. 이놈은 틀림없이 미친놈일 것이다.! 자신을 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 다. 이놈의 귓속으로 나의 비명소리가 요란한 북소리로 들릴지 모르는 일이었 다. "졌다! 이제...그만! 그만 때려.......항복!" *** "푸하하핫! 쿨럭! 쿨럭! 크크큭!" 강자단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그의 두 눈 에서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애송이라고 생각했다. 애송이가 애송이들을 밟다가 진정한 고수 한테 덜미가 잡히고 만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온 몸이 쑤시고 아파 왔지만, 가슴 밑바닥 속에서 뭔가 알 수 없는 통쾌함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자단 은 가끔씩 이렇게 속이 후련하도록 얻어터지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라 고 생각했다. "강자단! 그만 가십시다. 소생이 잠시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 백리향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사심도 없어 보였고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 듯 했다. 강자단은 백리향이라는 인물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는 수많 은 사람을 만나 보았으나 이처럼 통쾌한 사람은 만나보지 못하였다.그러나 자 신의 그러한 내심과는 달리 불만스러운 듯이 백리향을 노려보았다. "어이! 내가 너한테 항복한 것은 사실이야! 그렇다고 내가 시키는 데로 할 것 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천만에! 내가 시키는 대로해야 할거요. 육합문에서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소. 대협에게는 그리 이로운 일이 아닙니다." 이 친구의 능력이 어디까지란 말인가? 자신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이 친구는 듣 고 있는 것일까? "그럼, 어쩔 수 없군. 살긴 살아야 되겠고....그 대신 나를 업어주어야 할거요. 삭신이 쑤셔서.... 뼈가 부러진 듯 하오! 도통 움직일 수가 없구려" "그렇게 합시다." 강자단은 그제야 백리향의 손을 잡았다.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 져나기 시작했다. 손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를 확인하는 의미이다.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간에도 두 손을 콱 잡으며 서로간의 우정을 느끼며, 사랑하는 연인사이에도 두 손을 잡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다. 아들이 늙은 노모의 손을 잡고, 동생이 형님의 손을 잡고, 스승과 제자가 두 손 을 맞잡으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하는 것은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간단한 신체적인 접촉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참으로 큰 것이 다. 제 팔장 一劍老怪剃白髮(일검노괴체백발) 일검으로 노괴의 백발을 잘라내다. 육합문의 모든 제자들과 식솔들은 당혹스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우상이자 영웅이었던 육합오호검들이 패했다는 것에 놀라워했고, 그들의 처참 한 모습에 당황했다. 그들의 상대가 철혈마검 강자단이었다는 것에 경악했다. 제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들에게 철혈마검이란 이름이 던 져주는 의미는 바로 공포였기 때문이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무공께나 한다 는 식객들중에서도 벌써부터 떠나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의리를 지 키기에는 철혈마검 강자단이라는 이름이 너무 거대하게 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의 악명(惡名)은 장양에게도 매우 당혹스러운 것이기는 하였지만, 그가 두 렵지는 않았다. 장양은 담대한 사람이었고 그 어떤 시련에도 꺾이지 않을 불굴 의 의지가 있었다. 그는 육합문의 경비를 강화하는 한 편 문안에서 일어나는 소요들을 진정시켜 나갔다. 그리고 별도의 인력을 차출하여 강자단의 뒤를 쫓 도록 하였다. 육합문의 역사는 비천하여 직계제자(直系弟子)는 육합오호검이 전부였으며 나머지는 속가제자들이었다. 장양은 육합오호검이 성장하여 다른 제자들을 받 아들이고 많은 파(派)와 류(流)를 만들어 주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그의 본심만 은 아니었다. 아들인 장지충은 얼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며, 제일 총애하던 강백 지는 가슴이 갈라진 채 돌아왔다. 그리고 주화룡과 백우산은 불구의 몸이 되었 지만 오히려 장양은 웃고 있었다. 그것은 기분 좋은 웃음이었으며 한 편의 희 극을 보고 난 듯한 느낌의 경쾌한 웃음이었다. *** 강자단은 지독한 음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흥얼거림은 끊이질 않았 으며 백리향은 그 노랫소리 때문이라도 걸음을 빨리 할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 공자. 수고스럽겠지만조금만 더 수고해 주시구려. 옥수촌에만 다다 른다면 내 아우가 경영하는 사업장이 있다오. 그 곳이라면 이 한 목숨 부지할 수가 있을 거요. 흐흐흐!" "........." 백리향의 등을 신세진 그의 목소리는 매우 미안하다는 듯한 것이었지만 그 의 표정은 절대로 미안한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의 웃음소리는 만만히 들어 줄 만한 것이 못되었다. 깊은 산 속을 헤치며 어느덧 어둑해질 무렵에서야 백리향과 강자단은 천태 현 옥수촌(玉樹村)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비는 그쳤고 자 욱한 안개만이 옥수촌을 뒤덮고 있었다. 옥수촌의 거리는 깨끗했으며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어느덧 비무방(飛武邦)이 라는 현판이 보이고 그들이 다가서자 두 명의 호위무사가 가로막았다. 그러자 강자단이 다짜고짜 고함을 내질렀다. "이 놈들아! 얼른 정가문(鄭家文)에게 알려라. 내가왔다고!" 두 명의 호위 무사는 상대가 강자단이라는 것을 알고는 황급히 대문을 열었 다. "아! 강대협!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리고 한 명의 무사가 쏜살같이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삼십대 초 반의 건장한 사나이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그는 네모진 얼굴에 정미(整美) 한 옷차림이었으며 두 주먹에 굳은살이 많아 꽤 오랜 수련을 했음을 알 수 있 었다. 그는 바로 추운수(追雲手) 정가문이라는 사람으로 현재 비무방의 방주였다. 약관의 나이로 방주에 추대 되어 10년이 넘도록 장문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젊었지만 여느 노강호(老江湖)들보다 노련했으며 사업적 수완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니! 형님.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정가문은 자신의 의형의 행색을 보며 깜짝 놀라며 말했다. 강자단은 아무렇지 도 않다는 듯이 히죽거렸다. "조금 맞았네." "감히 어떤 놈이.....!" 강자단은 어이없다는 듯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동생! 이 보좔 것 없는 비무방이라도 오래 지속하고자 한다면, 말조심해야 할거야. 여기 그 장본인이 있지 않는가?" "....!" 강자단은 젊은 서생을 눈짓하여 말했지만 정가문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철혈마검 강자단이 누군가! 모든 낭인들의 우상이었으며 흑도무림의 전설적 인 존재가 아닌가! 아무리 보아도 특별한 구석이 없는 그야말로 평범하다 못 해 비범해 보이기까지 하는 청년이 어찌 철혈마검을 쓰러트릴 수 있단 말인 가?정가문은 강자단이 농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은 백리향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두 손이 자유롭 지 못해 말로서 인사를 드리는 점 널리 양해 하여주십시오." 그제야 정신을 퍼득 차린 정가문이 어색한 표정으로 공수를 취했다. "아! 실례했습니다. 본인은 비무방을 이끌고 있는 정가문이라는 사람입니다. 형님을 보살펴 주시어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강자단은 이러한 낯간지러운 인사에 체질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사람이 었다. 그는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환자를 앞에 두고 뭐 하는 수작들인가!" "아! 죄, 죄송합니다. 형님. 여봐라! 얼른 강대협을 모시지 않고 무엇을 꾸물거 리는 게냐?" 그러자 여러 무인들은 강자단을 자신이 업으려 서로 밀치며 나섰다. 그 들에 게 있어서 철혈마검 강자단은 신과 같은 존재였으며 그런 전설적인 사나이를 한 번 본 것만으로 커다란 영광이리라. 그러나 불같은 성격의 강자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백리향의 등에서 내려 와 호위무사들의 뒤통수를 갈기기 시작했다. "에라! 이놈들아! 허리에 검을 둘렀다고 다 무사가 되는 것이냐? 한심한 놈들 같으니라고......" 뒤통수를 감싸 앉고 뒹구는 호위무사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며 당당하 게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디에도 부상의 흔적은 없었으 며 결코 뼈가 부러진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경쾌한 것이었다. 순간 백리향은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하하하!" "......?" *** 육합문주 장양에게는 적이 많았다. 그 만큼 그의 죽음을 바라는 사람도 많은 것이다. 천장검(穿腸劍) 백일청(伯一淸)은 그 모든 사람을 조사할 수는 없었 다. 단지 살수를 부를 만한 자금력을 가진 사람들과 그 만한 세력을 지닌 사람 들을 조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수가 장양의 처소에까지 침입할 수 있었던 것은 육합문내부에 첩자 가 있다는 의미였다. 백일청은 그 첩자를 가려내기 위한 조사도 아울러 시작했 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지금에서야 속속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근 수십 여 통에 가까운 전서구(傳書鳩)가 매일같이 날아왔다. 모두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었지만 붉은 색 매듭의 붉은 용지의 내용만큼 중요한 것은 아 니었다. 왜냐하면 붉은 전서구는 장양이 직접 보내온 전서구이기 때문이었다. 백일청은 서둘러 매듭을 풀고 서신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의자에 푹 파묻히며 망연해 지고 말았다. 백일청(伯一淸)은 세심한 사람이었으며 깔끔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이 깔끔하 게 이루어지기를 바랬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간혹 뜻밖의 지저 분한 일들을 맞닥뜨리고는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붉은 색 매듭의 붉은 색종이의 서신. 그 한 장의 쪽지에는 수많은 기호(記號) 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그 기호들은 이런 글자들을 형성하고 있었다. '주화룡(周華龍). 살(殺).' *** 비무방(飛武邦)은 절강성내의 수많은 군소 방파 중에서도 오죽림(五竹林)과 더불어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는 방파였다. 기존의 군소 방파는 이익에 따라 서, 또는 무력에 눌려 강제로 합병하기도 하고, 따로 독립하기도 하여 역사가 오래가지 않는데 비해 비무방과 오죽림은 거의 백 여 년 동안 지속된 방파였 다. 오죽림은 산 속을 지배한다면 비무방은 천태현의 밤을 지배했다. 강자단이 안내된 곳은 풍축원(豊畜園)이라고 하는 작은 정원이 딸린 가옥이 었는데 강자단이 가끔가다가 들를 때 사용하게끔 정가문이 특별히 만든 곳이 었다. "이보시오. 공자. 나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있지 않았소?" 강자단이 침상에 편안히 누워 오리를 통째로 구운 것을 한 입 물어뜯으며 말 했다. "아! 진실로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강대협이시라면 아실 것입니다. 얼마전 육 합문에 살수가 들었습니다. 그 살수는 육합문주 장양을 살해하려다 실패하자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숨어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소생이 거주하는 만서각이었 습니다." 그러자 강자단은 술을 홀짝이다 칵 하고 내뱉고 한탄하듯 말했다. "허어~ 여우 굴을 피해 호랑이 굴로 들어선 격이구나!" 그 모습을 지켜 본 백리향은 문득 신기한 듯 강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대협께서는 먹고 마시고 내뱉는 행위를 누워서 하시는 군요?" "나는 웬만하면 검을 뽑지 않소. 하지만 뽑게되면 살인을 하지. 그리고 웬만 하면 일어나지 않소. 하지만 일어나게 되면 먼 길을 가게되오. 그것보다 계속 말해 보시오." "아! 그 자객은 여인이었는데....몽혼향을 풍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꽤 체계 적인 훈련을 받은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반월모양의 표시가 요대에 있었습니 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발견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 있었지요. 소생은 그녀를 미행하여 그들의 본거지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의 미움을 사 게되었답니다. 후후후! 그 후부터는 그들은 소생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데...... 여간 번거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반월모양의 표식을 삼는 문파가 있는지 요? 있다면 어떤 문파인지 알고 싶습니다." 그러자 강자단은 매우 시큰둥하게 말했다. "이보시오. 백리공자! 그렇게 번거롭다면 검을 뽑아 한 번 휘두르면 될게 아 니오?" 백리향의 얼굴이 딱딱해지며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철혈마검 강자단!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게요? " 강자단은 찔끔하면서 말했다. "아니면.....당신의 그 구타신공(毆打神功)이라도....흐흐흐!" "........." 백리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단지 인상을 찡그릴 뿐. 때로는 침묵이 수많은 말보다 효율적일 때가 있다. 강자단은 침묵을 좋아하 는 사람이었지만 백리향의 침묵은 달갑지 않았다. "허~ 철혈마검 강자단이 당신 앞에서면 순수선검(純粹善劍) 강자단이 되어버 리니.... 좋소! 말하리다. 그들은 은살막(隱殺幕)이란 단체요. 살인대행업체이 자 정보를 캐내어 파는 그런 쥐새끼 같은 자들이요. 그들은 자신들의 고객을 위해 반월을 남기지요." 강자단은 거위의 다리를 뜯어 백리향에게 권했다. 백리향이 거절을 하자 멀 리 내팽개치며 말했다. "공자! 내가 맛있는 것을 권해도 공자가 싫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 은 살막의 놈들은 쥐새끼들과 같아 아무리 맛있는 것을 던져주어도 약간의 위험 이나 눈곱만치라도 실패의 가능성이 있다면 쳐다보지도 않는다오. 흐흐흐!" 백리향은 그의 어투가 왠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 은살막이라는 쥐새끼들은 안전하게 먹을만한 것이 아니면 그대처럼 꿈쩍 도 안 하오. 흐흐흐! 누군가가 그들을 사주했을 것이요. 그것도 엄청난 부를 쌓 은 자가 말이요. 장양의 목은 무척 비쌀 뿐만 아니라 은살막의 쥐새끼들이 쉽 게 청부를 맡을 만한 것이 아니라오! 차라리 그들을 쫓기보다는 나처럼 거위다 리를 내놓을 만한 사람을 찾아보는 것이 편할 거요. 흐흐흐!" "........" 강자단이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웃음 짓는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 았다. 은근히 은살막을 비유로 자신을 쥐새끼라고 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 가? 백리향은 알면서도 아무런 말도 할 수 가없었다. 강자단이 폭력으로 말하 려 하지 않고 말로서 폭력을 행하는 것만도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찌되 었건 그는 그의 방식대로 업을 풀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한 명의 사나이가 방으로 뛰어올라왔 다. 비대한 몸에 비해 날렵하기 그지없는 사나이였다. 그는 정가문에게 공수 의 예를 표하며 허리를 숙였다. "방주! 그들이 왔습니다." 순식간에 낯빛을 싸늘히 바꾸며 정가문은 비대한 사나이에게 말했다. "지금 가겠다. 괜히 부화내동 하지말고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라!" "명을 받들겠습니다." 비대한 사나이는 왔던 것만큼 순 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강자단은 정가문을 의미 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생이 나를 천태현으로 청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 어쩐지 접대가 융숭 하다 고는 생각했지만...." 그러자 정가문은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소제가 섭섭합니다. 소제는 다만 형님을 성의껏 모 시는 것이 즐거울 뿐입니다." "흥! 수작부리지 말아. 내 귀에는 딸랑 딸랑거리는 종소리로 밖에 안 들려. 그 나저나 무슨 일인지 말이나 꺼내봐." 강자단의 너무나 직설적인 말에 정가문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침착함을 되 찾아갔다. "사실은 말입니다. 요 근래 오죽림의 청풍채(淸風砦)와 사소한 마찰이 있었는 데, 그들이 약간 억지를 부리는 군요." "이상한데? 오죽림 전체라면 모를까. 그깟 청풍채 따위가 무엇을 믿고 청림방 에 시비를 일으킨단 말인가?" "사실은 이 번에 오죽림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귀산노괴(鬼山老怪)가 혈면 마(血面魔) 임호(林虎)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버렸지요. 청풍채는 귀산노 괴를 믿고 있는 모양입니다." 강자단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귀산노괴(鬼山老怪) 하대봉(河大封)! 그 늙은 뼈다귀를 말하는 것인가? 그 는 오년 전에 용문파(龍門派)의 중황일검(中黃一劍) 용백현(龍伯賢)과 일장 혈 투를 벌인 후 둘 다 사라졌다고 알려져 있었는데...그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 다면 용백현이 죽었단 말인가?"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는 일이지요. 그 당시 혈전 끝에 두 사람 모두 강호에 서 활동을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 번에 귀산노괴의 출현으로 보아 용백현 의 죽음도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강자단은 참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탄식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그는 나의 가슴에 다섯 번이나 칼질을 하고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자였는데.... 하늘은 나의 적수를 데리고 가버렸구나! 지금 귀 산노괴도 와있나?" "그렇습니다. 하대봉 그자가 나머지 다섯 채주들을 이끌고 온 모양입니다." "그렇다면 얼른 나가보아야 하겠군.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 가 보도록 하게." 강자단이 자신을 도와줄 의사를 보이자 정가문의 얼굴이 활짝 펴지기 시작했 다. "알겠습니다. 형님." "소생도 같이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리향이 의자에서 일어서자 강자단의 어둡던 얼굴도 밝아졌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고마울 따름입니다." 백리향과 정가문이 문을 나서자 강자단은 침상에 누운 채 용백현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비록 적수이기는 하였지만 그가 있었기에 자신의 삶이 지 루하지 않았었다. 아마 용백현도 자신과 똑같은 심정이었으리라. 만약 정말로 그가 죽은 것이라면........강자단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용백현.....당신이 만약 죽었다면 나에게 고마워 해야 할거야. 그나마 내가 있 었기에 삶이 즐거웠잖아?" 백리향은 정가문을 따라나서며 말했다. "오죽림이란 무엇입니까?" 결코 궁금해서 물어본 말은 아니었다. 단지 정가문의 얼굴이 너무나 굳어 있 기에 내밷은 말이었다. 그는 귀산노괴란 자에게 상당한 부담감을 느끼고 있음 이 확실했다. "오죽림은 대소천태산 북쪽과 곤륜산맥을 잇는 근방에서 활동하는 다섯 산채 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대나무로 서로의 표식을 삼는데, 북로는 청풍채가, 남 로는 벽산채(碧山砦)가, 동로는 풍림채(風林砦)가 서로는 송림채(松林砦)가 장 악하고 있지요. 그 중앙에 홍운채(紅雲砦)가 있는데 그곳이 오죽림주가 다스리 는 산채입니다. 그들은 가끔가다 출몰해 지나가는 행인의 물건을 털거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해 재산을 약탈해 가곤 하지요. 그러나 요 근래 백팔수라귀들이 출현으로 관군의 단속이 심해져 활동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정가문은 자신이 이러한 설명을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지만, 이런 상식적 인 질문을 서슴없이 던지는 젊은이가 못마땅했다. 의형은 어째서 이런 서생 같 은 자에게 그토록 쩔쩔매는 것일까? 실제로 이 청년에게는 남과 다른 능력이 라도 있는 것일까? 어느덧 이원(離院= 정방 앞에 있는 널따란 마당)에 도착하니 살벌한 분위기 가 사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네놈들의 주인은 어찌하여 나오지 않는 것인가? 이 하대붕이가 눈에 차지 않는단 말인가!" 몹시 분노한 듯 소리치는 사람은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었는데 꾀죄죄한 몰 골과는 달리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있었다. 쩌렁쩌렁 울리 는 목소리로서 그의 높은 공력을 미루어 짐작하게 했으며 용두장(龍頭丈)을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노인의 독문병기(獨門兵器)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하하하! 이 정모가 어찌 하대협을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일이 있어 영 접이 늦은 것뿐이니 널리 양해하여 주십시오." 정가문은 정방으로 걸어 들어오며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 보이고 자신의 결 례에 대한 사과를 표했다. 귀산노괴는 자신의 용두장을 땅에 찍으며 몹시 불쾌한 듯 말했다. "흥! 옛날 네놈의 사부도 내가오면 맨발로 뛰어나왔느니라! 어찌도 어린것이 이렇게 방약무인하단 말인가?" 정가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아무리 대 선배이지만 지켜야할 도리가 있는 것 이다. 그도 일문의 방주, 귀산노괴도 일문의 존장으로 서로간의 신분은 똑같 은 것이었다. 하지만 정가문은 한 방파의 방주라는 직책이 거저 얻은 것이 아 니라는 듯, 귀산노괴의 도발적인 발언에 휘말리지 않았다. "림주께서 청림방을 방문하여 주심은 삼가 영광이 아니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좋은 뜻에서 방문하심이 아닌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클클클! 노부는 좋은 뜻에서 방문했다. 오늘 이후로 오죽림과 비무방은 한 식구가 될 터인데 어찌 기쁜 소식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좋은 소식이구려. 림주께서 저의 비무방에 귀속하시겠다니 쌍수 를 들고 환영하는 바요. 하하하!" 귀산노괴는 여전히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지. 그와 반대지. 비무방이 오죽림에 귀속하는 것이다. 노부가 너의 사부 의 안면을 봐서 후한 대접을 해주마." 정가문이 응수를 하려고 할 때였다. 그의 어깨를 집고 어둠을 헤치며 나타나 는 사람이 있었다. "영감!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 그지없군 그래! 오년 전에 용백현한테 박살이 난 후 종적이 묘연하여 땅 속에 묻혀있는지 알았는데..... 여전히 지팡이에 몸 을 의지하며 살아가다니 용하다. 용해!" 귀산노괴 하대봉은 평생동안 한 번도 이런 무례한 언사를 들어보지 못하였 다. 그는 분노를 금치 못하였지만, 그 무례한 자가 철혈마검 강자단이라는 것 에 분노가 말끔히 사라지고 놀라움이솟아올랐다. "가, 강자단?" "어이. 영감! 함부로 내 이름을 부르지마! 기분 더러워!" "네놈이 이곳에.... 비무방과는 어떠한 관계인가?" "관계는 무슨... 단지 늙고 미친 개뼈다귀가 뭔 지랄을 떠는지 보러 왔지." 하대붕은 자신의 용두장으로 땅을 내려치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 버릇없는 주둥아리는 여전하군! 내 오늘 네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다!" "당신은 원래 인간이 아니었어!" "뭐, 뭐라고? 오너라. 강자단! 오늘 사생결단을 내자!" 하대붕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오르자 이성을 잃고 으르렁거리기 시작 했다. 그러자 강자단은 도리어 즐거운듯 싱긋 웃으며 말했다. "불가(不可)! 철혈마검 강자단이 미친 늙은 개와 싸웠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무슨 창피스러운 일이겠나? 그리고 당신과 싸운다면 나도 똑같은 개가 될 것 인데... 이곳은 그야말로 투견장이 되어버리는 격이 될 것이야!" 정가문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대소를 터트렸다. "푸, 하하하! 형님말씀이 백 번 지당하오." 그러자 주위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대붕의 뒤에 서있던 일백 여명의 무인들 중에서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하대붕 은 얼굴을 붉히며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괴성을 지르며 용두장을 휘둘렀다. 그 러자 순식간에 두 명의 사나이가 머리가 으깨어지며 비명한 마디 없이 고혼 이 되고 말았다. 일 순 장내가 찬물을 끼얹듯 살벌해 졌다. 오죽림의 산적들은 공포에, 청림방의 사람들은 그의 잔악한 살수에 치를 떨었다. "또 누가 웃겠느냐!? 두 채주 놈들처럼 되고 싶은 자는 얼른 나서라!" 그러고 보니 죽은 두 사람은 벽산채주와 송림채주였다. 쟁쟁한 이름을 날리 던 사람들이 손 한번 쓰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귀산 노괴 하대붕의 무공은 빠르고 강했다. 정가문의 얼굴에도 웃음이 사라지고 두 려움이 생겨났다. 백리향은 강자단이 왜 그렇게 저 노인에게 무례한 언사를 쓰며 싫어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가 보기에도 저 노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백리향이 강 자단에게 말했다. "강대협께서 허락하신다면 소생이 개가되어 저 노인과 한 번 으르렁 되어 보 리다." 강자단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공자는 너무 겸손하시군요. 장과로(張果老= 중국의 팔선중 일인)가 어떻게 미친개를 잡는지 한 번 구경하도록 하지요." 백리향은 정 가문에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문주께서는 저에게 검 한 자루를 빌려 주셨으면 합니다." 정가문은 이 서생 같은 청년이 무엇을 믿고 나서는 걸까하고 의아심이 들었 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괜한 죽음을 만들지 않을까 두려움이 생기기도 하였 다. 그는 이 청년에게 검을 주어도 될까하는 의구심을 품으며 강자단을 쳐다보 았다. 강자단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명검은 아니지만 그래도 쓸만하실 것입니다. 부디 이 검을 사용하십시 오." 정가문은 자신의 검을 빼어 백리향에게 주었다. 백리향은 검을 받아 들고는 손 가락으로 가볍게 퉁겨 보았다. 그러자 탱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울기 시작했 다. 소리가 청명하고 여운이 상당히 길게 이어 지자, 백리향은 감탄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좋은 검입니다! 검광이 푸르고 맑고, 소리의 여운이 깊고 그윽한 것 이.... 혹시 홍도(洪都)에서 제작된 검이 아닙니까?" "어찌 아니겠습니까. 공자의 말씀이 한 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제야 정가문은 적이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백리향이 보여준 간단한 행동 은 검에 대한 상당한 조예가 없이는 할 수 없는 경지였기 때문이었다. "무슨 개수작들이냐? 아무나 덤벼라! 해가 뜨려 한다." 귀산노괴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으로서는 철혈마검 강자단 은 약간 버거운 상대였다. 그것은 강자단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은 서로의 간섭을 피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제 팔장 一劍老怪剃白髮(일검노괴체백발) 일검으로 노괴의 백발을 잘라내다. "기우(杞憂)에 불과하겠지만, 부디 조심하시오. 귀산노괴의 용두장에는 극독 이 묻어있어 스치기만 해도 생명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오." 강자단의 걱정스런 조언에 백리향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주 었다. 귀산노괴는 백리향이라는 청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강자단을 대신해 싸우 고자 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고, 잘 생기지 않은 그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다 닭 모가지 하나 비틀 힘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 더더욱 마음에 들게 했다. 일수(一手)로서 간단히 쳐죽이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백리향이 사 랑스럽기까지 했다. 백리향은 경쾌한 걸음걸이로 걸어 내려와 검을 거꾸로 쥐며 두 손을 맞잡아 보였다. "소생은 백리향이라 합니다. 작은 재주나마 보여 드릴 터이니 노인장께서는 비웃지 말아 주십시오." 귀산노괴는 백리향이 고개를 숙이자 다짜고짜 용두장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놈아! 싸움박질에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으냐?" '쇄~액!'하는 파공음과 함께 노괴의 용두장은 그대로 백리향의 뒤통수를 향 해 날아왔다. 그의 예의를 벗어난 기습적인 공격에 백리향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대로 미끄러지듯 물러나 공세를 피했다. 헛되이 허공을 가르던 용두장은 어느덧 방향을 바꾸어 나선형을 그리며 다 시 백리향의 머리로 뻗어왔다. 그의 용두장을 놀리는 무공은정말로 빠르고 신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백리향은 귀산노괴의 공세를 막을 생각이 없는지 검을 비스듬하게 누 이며 하단전을 찔러나갔다. 순간 노괴는 괴성을 지르며 용두장을 회수하며 뒤 로 다급히 물러났다. "으헉!" 공격은 노괴가 먼저 시작하였으나 백리향의 검은 자신의 공세보다 더욱 빨랐 던 것이다. 노괴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하단전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조그마 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조금만 늦게 용두장을 회수했어도 뚫리는 것은 비단 자신의 의복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제야 노괴는 저 형편없어 보이는 청년이 자신에 비해 결코 하수가 아님을 알았다. 그의 등으로는 식은땀이 흘렀으며 더 이상 청년이 마음에 들지도 사랑 스럽지도 않았다. 그는 정신을 새롭게 가다듬고 온 공력을 끌어 모아 두 손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커다란 고함을 지르며 철우가 산을 붕괴시키는 듯한 기세 로 용두장을 휘둘러 공격하기 시작했다. "철우붕산(鐵牛崩山)!" 그러나 백리향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여유 있게 그의 공세를 풀어나가기 시 작했다. 차! 창! 창 육중한 용두장은 맞이하고서도 백리향의 검은 전혀 위축이 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도리어 빠른 쾌검으로 노괴의 공세를 완벽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문득 백리향은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사교송서(蛇咬松鼠)라는 일반적인 초식 으로 용두장을 비껴 귀산노괴의 머리로 휘몰아쳤다. 그러자 사각하는 소리와 함께 노괴의 백발이 잘려나가며 허연 피부가 드러났다. "헉!" 노괴는 괴성을 내지르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망연한 채 자신의 머리 를 쓰다듬었다. 푹신하고 수북한 느낌이 들어야 할 부분이 꺼칠꺼칠하고 시원 한 느낌이 들었다. 노괴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온 몸을 떨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당연히 있어야 할 곳에 없으면 화가 나는 법이다. 하물 며 자신의 머리카락이야 오죽하겠는가. 게다가 늙으면 머리의 털이 빠지기 시 작하고 한올, 한올이 아까울 때가 아닌가? 백리향은 노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뒷짐을 지며 꾸짖듯 말했다. "이것은 노인장의 잔악한 행동에 대한 경고요." 무인들에게 있어서 상투가 잘린다는 것은 자신의 머리를 잘리는 것과 진배없 었다. 노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악을 쓰듯 덤볐다. "마각압곤륜(馬脚壓崑崙)!" 노괴의 용두장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곧장 백리향의 머리로 돌진해왔 다. "흥!" 백리향은 코웃음을 치며 그대로 돌진해갔다. 용두장이 자신의 머리로 내려치 기 일보직전에 몸을 돌려 가볍게 피한 다음에 손을 뻗어 노괴의 수염을 움켜 쥐고 그대로 뽑아버렸다. 그리고 마치 새가 비행하듯 가볍게 뒤로 물러났다. 으드득! "크악!" "이것은 저기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경고요." 그러자 강자단은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늙은 개의 털을 모두 뽑았으니 그저 두들겨 삶는 일만 남았구나!" 하대봉은 아픔도 아픔이려니와 평생 이런 수모를 당하기는 처음이라 그의 노 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러나 귀산노괴가 정신을 차리고 반격의 기회를 찾 기도 전에 수직으로 내려 지르는 검광을 보아야 했다. 까가강! 하는 파열음과 함께 불똥이 사방으로 튀며 용두장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노괴는 또 다시 괴성을 지르며 용두장에서 손을 떼었다. 자신의 독문병기가 중요하기 는 하지만 자신의 손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것은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요. 더 덤비시겠소?" 노괴는 말 그대로 일도양단된 자신의 용두괴장을 바라보았다. 잘 단련된 현철 로 만들어졌으며 무게만도 삼십 근이 넘은 것이었다. 전설 속의 신검이 아닌 이상 이렇게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 노괴는 그 누구보다도 도망칠 때와 싸울 때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 의 장점이자 지금까지 강호를 활보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자신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깨달은 즉시 백리향을 노려보 며 말했다. "내 비록 분패하고 떠나오 만! 강산이 변하지 않는 한 우리는 또다시 만날 수 있을게요." 귀산노괴 하대봉이 이대로 떠날 빛을 보이자, 강자단은 다급해 졌다. 그는 다 른 사람이라면 모르되 하대봉만큼은 결코 이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는 백리향 에게 다급히 외쳤다. "잠깐! 공자 그를 이대로 보낼 생각이오?" "그는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자 강자단은 짐짓 안타깝다는 듯이 한숨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나의 말을 들어보시오 공자. 그는 십 오년 전 기련산에서 백 여명의 양 민들을 학살 한 적이 있소. 그리고 자신의 친구의 아내를 범했으며, 한 마을을 습격해 재산을 강탈하고 아녀자들을 끌고 가 기루에 팔아 넘기는 일도 했었다 오. 그 뿐인지 아시오? 그가 강제로 첩을 삼은 규수만도 서른 명이고, 그의 부 인이 된 여인도 스무 명을 헤아리오! " 백리향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두 눈이 붉게 달 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자단은 백리향의 붉은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팰 때도 저런 눈이 아니었던가. 강자단은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계속 노괴의 잔학성을 과장되게 부풀려 소개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때 노괴는 강자단을 바 라보며 어이없다는 듯이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크, 하하핫! 강자단! 어째서 나의 업적들을 일일이 소개하는 것이냐? 그것들 은 그저 나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일 뿐이니라!" 노괴는 어깨를 쫙 피며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강자단의 말은 꽤 과장되어 있었 지만, 사파의 세계에서는 악한 것이 자랑인 셈이라 노괴는 크게 기뻐하였던 것 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몇 명의 사람을 죽였는지,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 는지에 따라 그 사람의 무게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본래가 입은 화(禍)를 일으키는 문이며, 혀는 자신의 몸을 자르는 칼인 법이 다. 그는 자랑삼아 떠든 말이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때 무엇인가가 번쩍하고 날아들자 하대봉은 자신의 눈에 불똥이 튀는 것을 느꼈 다. 퍼, 버벅! "크악! " 귀산노괴는 무엇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땅에 뒹굴었다. 그 리고 벌떡 일어서려는 순간, 또 다시 무엇인가가 날아왔다. 퍽! "칵!" "도적(盜賊)도 오랑(五娘)의 문 앞은 그냥 지나친다는데 당신은 어찌 이리도 인면수심(人面獸心)의 마음을 지녔는가! 짐승도 배가 차면 사냥을 하지 않고, 하찮은 미물도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숨거늘..... 당신은 어찌 이리도 당당한 가! 내 오늘 당신의 죄업을 이곳에서 풀리라!" 오랑(五娘)의 문 앞이란 다섯 딸을 둔 집이란 뜻이다. 아무리 흉악한 도적도 딸이 다섯이나 되면 그 집은 가난하여 질 것이므로 도적질을 삼가 한다는 말 이다. 백리향은 귀산노괴를 그냥 보내어 준다면 그에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영 혼들을 볼 낮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악을 악으로서 응징할 수는 없는 일 이다. 하지만 죄악을 보고도 가만히 있다면 그 또한 인간의 도리가 아닌 것이 다. 백리향은 악을 벌하되 악으로서 하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자단은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박수를 치 며 통쾌하게 웃었다. "푸 하하하! 용백현! 당신은 구천에서나마 나에게 감사해야돼!나의 세치 혀 가 아니었다면, 당신의 복수를 어떻게 했겠는가 말이야! 크 하하하! 통쾌하다. 통쾌해!" 강자단은 보기 드문 악인이었지만, 한사람의 무인으로서 적수를 존경하고 이 해할 줄 아는 사나이이기도 했다. 그의 이런 즐거움과는 달리 정가문과 그 외 의 사람들은 이런 황당한 일은 처음이라 벌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유약해 보이는 서생이 귀산노괴를 간단히 물리친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더 욱 놀라운 것은 현철로 이루어진 용두장을 철검으로 무를 베듯 갈라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 니었다. 퍼! 퍽! "크악! 사, 살려줘!" *** 아직 달은 뜨지 않았다. 하지만 천태산의 밤은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석교 를 지나 조그만 소로를 향해 오르면 하나의 정자가 나타난다. 그 정자는 그렇 게 크지는 않지만 주위로는 우아한 숲을 형성하고 있었고 천태산의 중턱에 자 리잡고있어 천태현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 두 명의 사나이들이 그 곳 에서 밝은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호리호리한 몸매에 얼굴은 창백하여 마치 송장을 보는 듯 했으 며, 매처럼 굽은 코와 역팔자로 솟은 눈썹은 그의 날카로운 성격을 증명하는 듯 했다. 그는 검은 야행의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에 찬 고검을 제외하고는 별 다른 장신구는 없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백일청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달이 뜨기를 기다렸건만 달은 좀처럼 뜨질 않았다. 백일청 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보게. 우리가 사귄 지 얼마나 됐지?" 그러자 검은 야행의를 걸친 사나이가 퉁명스레 말했다. "우리가 친구였던가?" "........." 백일청은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나의 품속에는 삼천 냥의 거금이 들어있네." 그러자 검은 야행의를 걸친 사나이가 즉시 대답했다. "한.... 십 오년 됐지?" 백일청은 시선을 돌려 시커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로서 부탁할 일이 있네." ".........." 한 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백일청은 다시 그를 바라보 며 말했다. "삼천 냥을 걸고 부탁하는 것일세." 그러자 검은 야행의를 걸친 사나이가 즉시 대답했다. "친구의 부탁이라면..... 들어 주어야 하겠지?" ".........." 백일청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을 죽여주게!" "........." 또 다시 상대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자 백일청은 화가 난 듯 큰소리 로 말했다. "오천 냥을 주겠네!" 사나이는 처음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아니야......아직 달이 뜨지 않았어." 그제야 백일청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청월등천 유일살(靑月登天唯一殺)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의 달에 하나의 죽음을 보태는 그런 사람이었다. *** 귀산노괴는 자신들의 부하들에게 실려 나가야 했다. 아마도 삼 개월 정도는 침상에 누워 있어야 할 것이다. 비무방의 사람들은 잔혹한 참극이 벌어질 줄 알았건만 이토록 쉽게 해결되어 다행이라고 여겼으며 오죽림의 산적들도 이 일로 인하여 가슴이 후련해지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뿐만 아니라 백리향에게 존경의 표시로 장읍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백리향의 마음은 어둡기만 했다. 그는 무림인이 아니라 구도자 일 뿐이건만, 삶은 자꾸만 강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의든 타의든, 그는 강호무림에 한 걸음 내딛게 되었으며 이 사건은 점점 강호로 퍼져나가 기 시작했다. 어느덧 오죽림의 인물들이 모두 사라지고 장내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자 백 리향은 검을 정가문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소생은 이만 가볼까 합니다. 그 동안 폐를 끼쳐 송구스럽습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린 정가문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의 말을 꺼냈다. "공자께서 보여주신 신위로 저의 청림방이 커다란 환란으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니 이루 말할 수 없는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떠 나시다니요. 안됩니다! 저희에게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게 하여 주십시 오." "소생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검을 몇 번 휘두른 것에 불과 합니 다. 그리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실은 공자께 드릴 말씀도 있답니다. 그것은 은살막에 관한 것입니다." "..........!" 사파의 사람들은 오로지 힘으로 말한다. 힘은 생존의 절대적 필요요소이며 강 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현장이기도 했다. 정방에 거창한 주안상이 마 련되자 정가문은 널따란 쟁반에 은자들을 수북히 담아 백리향에게 주었다. "이것은...." "저희들의 조그마한 성의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아! 성의는 고마우나 소생은 받을 수 없습니다." 사파의 사람들은 모두 돈으로 성의를 표시한다. 그러한 문화는 자연스러운 것 이고 일상화된 관례였다. 그러니 정가문으로서는 의혹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 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이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일까?' 강자단은 백리향의 소탈한 성격을 조금 알고 있는지라 정가문에게 넌지시 말 했다. "공자는 재물을 돌덩이 보듯 한다네. 그러니 은자는 저리 치우고 은살막에 대 하여 장황히 늘어놓아 은혜를 갚으라." 그제야 정가문은 은쟁반을 옆으로 치우며 말했다. "아! 형님말씀에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흐흠! 공자께서도 아시겠지만, 저희들 은 그다지 올바른 일을 하는 자들은 아니올시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은 밀히 이루어지며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지 않으면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지요. 하지만 백리대협께서 저의 비무방의 위기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시 고 도와주시니 말씀을 드리지 않으면 이 또한 부도덕한 일인 것 같아 말씀드 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작에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십시오." 강자단이 하품을 하며 말했다. "본론은 언제 부터인가?" 정가문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사실은 육 개월 전에 은살막으로부터 서신이 전달되었습니다. 은살막주가 직접 쓴 서신이었는데 많은 협조를 당부하는 그런 서신이었습니다. 내용을 살 펴보니 우리에게 막대한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 흔쾌히 수락했지요. 어차피 그 들과 우리는 업종이 다르고 은살막 따위가 감히 우리를 속이지 않으리라는 확 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다스리는 기루 중하나를 임대하여 달라고 했 답니다." 그러자 백리향이 나서며 말했다. "그곳이 바로 홍화루이군요." "맞습니다. 바로 보셨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꽤 많은 은자를 지불하였는 데... 액수가 무려 홍화루를 두 채나 지을 수 있는 금액 이였습니다. 그들이 무 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온 전력을 이곳으로 다 쏟아 붇는 듯 했습니 다. 그리고 그 들은 우리에게 몽환향을 별도로 주문하였는데 그것도 커다란 이 익이 남는 장사였지요. 중원에서는 보기 힘든 약초라 멀리서 겨우 밀수(密輸) 할 수 있었답니다. 저희 비무방은 기루도 운영하지만, 도박과 밀수도 손을 되 고 있답니다." 강자단은 귀가 매우 솔깃한 표정이었다. 그는 돈과 여자는 다다익선(多多益 善)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명예 는 이익과 실리에 항상 뒷전으로 밀려나버리고 말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그들이 악명을 날렸겠는가? "공자.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 같소. 단지 장양의 암살을 위해서 이러한 일을 벌인다고는 도저히 생각 할 수가 없구려. 장양을 위해서라면 세 명의 자 객이면 족할 것이오. 그들에게는 뭔가 또 다른 일이 있는 것 같소. 놈들은 허가 받지않은 백정들이오. 결코 명리를 위하여 검을 들지 않지요. 그들은 거대한 이익이 될만한 것이 아니면 이렇게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소."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희들로서도 한 몫 챙길 수 있는 일이라 은밀히 조 사를 벌였지요.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아마 들으시면 깜짝 놀라실 것입니다. 육합문에서 중요인물이 은살막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그 사 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강백지!" 백리향이 짤막하게 던지듯 말하자 정가문이 도리어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백리대협께서 그것을 어떻게....!!" 그러자 강자단도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놀랍다! 놀라워....백리공자도 다 아는 사실을 가지고 마치 커다란 비밀인양 말하다니....동생의 뻔뻔함이 더 놀랍네!" 그러자 정가문은 얼굴이 붉히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후후!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소생도 우연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은살막의 살 수에서 풍겼던 몽환향을 강백지에게서도 풍겨 왔던 것입니다. 그 동안 의심은 있었지만 확신이 서지 않았던 점을 오늘 이곳에서 풀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 스러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방주! 저의 부탁입니다만, 육합문은 소생이 몸을 의지하고 있는 곳이니 너무 깊게 관여하지 말아주십시오." "아! 물론입니다. 어찌 저희가 대협의 뜻을 어기겠습니까. 육합문보다 은살막 을 족치기로 하겠습니다. 원래 뒤가 구린 놈들이라 족치면 내 뱉게 되어 있지 요." 강자단이 눈을 빚내며 말했다. "동생! 내가 선봉에 서마!" 정가문 또한 눈을 빚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형님!" 백리향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사파의 세계란 이러한 곳이로구나 하고 처음으로 실감했다. 철저한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자신의 이익 을 위해서 배반을 밥먹듯이 하는 세계였다. 비무방은 은살막과 거래를 트기 시 작하자마자 배반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먼 산을 바라다보듯 창가로 눈을 돌리더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강백지 당신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자들과 손을 잡았구려..." 제 구장 深夜劍客生死難(심야검객생사난) 깊은 밤 검객의 생사는 어려우니... 백리향은 비무방을 뒤로하고 어두운 천태현의 골목을 배회하고 있었다. 정가 문은 백리향이 좀더 머물러 주기를 원했지만 그곳은 그가 머물 자리가 아니었 다. 또한 정가문은 백리향을 위하여 마차를 준비했지만 그는 극구 사양하고 홀 로 걷기를 원했다. 그는 도문의 사람이었으며 구도자로서 결코 심신의 편안함 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리향은 불가의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청빈(淸貧)과 절제(節制)를 통하여 도 를 구하려 하였다. 세상을 떠돌며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며 정처 없이 강호를 떠돌며 고행(苦行)을 통하여 인내와 시련을 배우며 구도의 길을 걷고 자 했던 것이다. 화산(華山)에서 바람(風)을 수련하고, 노산(虜山)에서 소리(音)를 수련하고, 장백산(長白山)에서 눈(雪)을 수련하고, 나부산(羅浮山)에서 비(雨)를 수련하 며 황산(黃山)에서 안개(霧)를 수련하고, 봉래산(蓬萊山)에서 신기루(蜃樓)를 수련한다. 아침에 일어나 향기로운 목란(木蘭)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 하늘을 이불을 삼고 땅을 자리 삼아 누우 며 달을 촛불 삼고 구름을 병풍으로 삼는다. 세속을 잊어버리고 청순(淸純)한 생활로서 하루의 진리를 깨닫기를 바랄 뿐으로 비록 몸은 빈곤하고 구차한 중 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도를 즐기는 것이다. 이렇게 강호를 운유(雲遊)하며 구도를 하는 것은 새로운 수련방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고, 진인(眞人)을 만나 가르침을 받기 위한 것이며 세상의 진리를 탐 구하기 위함이었다. 백리향이 세상에 몸을 나투게 된 것도 하나의 수련이었으며 그것은 스승의 바람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진리가 숨어있으며 백리향이 그것을 깨닫기를 스승은 바랐던 것이다. 문득 백리향은 걸음을 멈추고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새 벽바람이 불어와 백리향의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다. 초가을 새벽의 밤하늘만 큼이나 백리향의 마음속은 쓸쓸하고 황량하기만 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너무나도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비단 산중생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 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본성에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욕심과 탐욕, 야망, 질투 등 모든 것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고 슬프게 만들었다. 그러한 모든 것이 그를 변하게 하였고 스스로도 그러한 점을 느끼고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주먹질을 해보았고, 사람을 다루는 법도 저절로 익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변화인지, 부정적인 변화인지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 는 일이었지만, 자신이 변해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산중에서는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즐거운 모든 감정이 사라지고 오 로지 청정함만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인연이든 우연이든 양정과 만나게 되고 세상에 몸을 드러내자, 사라졌다고 느꼈던 모든 감정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 다. 그 동안 백리향은 그러한 감정들을 억지로 억제하고 삼켜왔었다. 하지만 지금 은 아니었다. 강자단을 통해 분노를 인정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터 득했다. 그 동안 인내하고 억제하던 마음의 감정들을 물 흐르는 듯이 자연스럽 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이제부터 그는 자신의 감정을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분노를 애써 외면 하지 않을 것이며 슬픔을 애써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백가촌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생기지 않도록, 육합오호검들처럼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도 록....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백리향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내가 아니면 누가 지옥에 갈 것인가?" 그 때 어디선가 낮선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는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어찌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려 하오?" 달도 뜨지 않은 사방은 칠흑같이 어두웠으며 목소리는 사방에 메아리 치며 들려왔다. 하지만 백리향은 천천히 몸을 돌려 좌측의 조그마한 골목을 바라보 며 말했다. "소생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타인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어 쩌면 귀하가 될 수도....." "........" 한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대신 한 사람이 골목 속의 어둠을 헤치며 걸어나왔다. 그의 걸음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였으며, 큰 걸음도 작은 걸음도 아닌 적당한 보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박수를 보내야 하겠군. 그 숭고한 정신을 위하여...." 그는 걸어오면서 진짜로 박수를 쳤다. 어느덧 어두운 골목을 벗어나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얇은 입술, 작고 길다란 눈, 조그마한 코. 그의 이목구비는 그 어느 것 하나 큰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커다란 얼굴을 지니고 있었으 며 큰 키를 지니고 있었다. 어두운 밤 골목을 지나가다 마주치면 그대로 기절 해 버릴 듯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백리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공수를 취하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소생은 백리향이라 합니다. 혹시 소생과는 초면이 아니신 지...." "당신과는 초면이 아니며 별로 반갑지도 않소!" 그는 품속을 뒤지며 한 부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펼쳐 보였다. 그 두루마리에 는 한 사람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백리향의 모습을 그린 듯 하건만 전혀 닮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나마 닮은 점이 있다면 지극히 평범한 외모라는 점이 었다. "........" 백리향이 아무런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그는 자신이 펼쳐 보인 초상화 를 흘낏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당신과 닮지 않았소. 그 때문에 이제야 당신을 만나게 된 것이고....." 그는 신경질적으로 두루마리를 찢어 발겼다. 잘못 그려진 초상화 때문에 그 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속이 시원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화공(畵工)들이 제일 좋아하는 인물은 이목구비가 불안정한 사람일게요. 그 야말로 못생긴 사람이지...... 얼굴에 특징이 뚜렷하여 표현하기가 수월하기 때 문일 것이오. 화공들이 제일 싫어하는 인물은 오관이 반듯한 사람이오. 얼굴 에 특징이 없기에 표현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지. 당신은 결코 잘생기지 않 았음에도 화공들이 치를 떨게 만들었소. 너무 평범하게 생겼거든....." "........" 백리향은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았 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언행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백리향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귀하는 화공들로부터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겠구려. 그렇지 않 소?" ".........." 그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리향의 말이 옳은 모양이었다. 백리 향은 싱긋 미소를 흘리며 말했다. "소생은 유명한 영웅호걸이 아닌데 어찌 저를 찾으려 하셨습니까?" "영웅호걸은 아닐지라도 전륜신교에서만큼은 당신은 유명한 사람이오." 순간, 백리향의 아미가 가볍게 찡그려졌다. 그 전날 단소청과 노옹 여일지를 자신의 손으로 구해내지 않았던가? 이들은 자신에게 복수를 하고자 함일까? 그러나 백리향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결코 살의(殺意)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 다. "본인은 전륜신교의 나한당(羅漢堂)소속 흑무상(黑無常) 양소천(梁小天)이 오. 제천강림전륜성황의 성지(聖旨)를 받들어 그대를 모시고자 하오." 그의 뜻밖의 말에 백리향은 순간 의아심을 금치 못했다. 복수를 목적으로 온 것이라면 이해가 되겠으나 자신을 모시고자 하고자 한다니.... "이유를.....물어도 되겠습니까?" "제천강림전륜성황께서는 인재를 아끼시는 분이지. 비록 당신이 전륜신교에 망령된 행동을 하였지만 성황께서는 드넓은 아량으로 그대를 용서하시었소. 나와 같이 갑시다." 그러자 백리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재차 묻겠습니다. 나를 동해까지 초청하는 이유가 무 엇입니까?" 순간, 양소천은 당황하는 듯 했다. "그것은......가면 알게 되오." 백리향은 담담하게 말했다. "꼭 가야 하오?" "꼭 모셔야 하겠소." "소생이 거부한다면.....?" "물론, 끌고 가야지." "자신 있소?" 그러자 양소천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자신 없소. 얼마전 강자단과 귀산노괴를 쓰러트리는 모습을 숨어서 보았소. 당신의 일검(一劍)은 나로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소." 백리향은 그는 어쩌면 솔직하고 거짓말을 못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백리 향은 생각했다. 그의 호의적이지 못한 어투도 어쩌면 솔직한 자신의 감정일 것 이다. "그렇다면 소생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이오?" 양소천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순식간에 자신의 검을 뽑아 들고는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검식을 펼쳐 백리향에게 열 두 번의 검을 퍼부었다. 그의 검은 귀산노괴의 용두장만큼이나 흉맹하고 강맹한 것이었으 며 강자단의 용자검만큼이나 빠르고 날카로웠다. 백리향은 그의 검을 서둘러 피하며 말했다. "무기도 없는 사람에게 검을 휘두르다니 너무한 게 아니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소천은 뻔뻔스럽게 말했다. "당신은 검보다 주먹이 더 무섭다는 것을 이미 보아 알고 있소." 그의 검은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며 공격해 들어왔지만 결코 백리향의 옷자락 조차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것 은 하루가 지나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백리향은 도무지 양소천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무공을 따를 수 없음 을 알면서 이토록 악착같이 공격을 강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백리향은 문득 몸을 멈추고 양소천을 바라보았다. 그 때 양소천의 검은 번개 처럼 백리향의 목으로 지쳐오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향은 피하려 하지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마치 죽음을 당당히 받아들이려는 사람 처럼 보였다. "헉!" 양소천은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검을 멈추었다. 그의 검에 가속도가 붙었을 터인데도 그의 검은 백리향의 목에 세치앞에 멈추어 섰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백리향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귀하는 전륜성황으로부터 나를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했지요?" "그렇소!"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없으며 소생이 자살하더라도 당신은 말려할 입장인데 구태여 당신의 검을 막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순간, 양소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다, 당신......" 백리향은 자신의 생각이 적중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검은 흉맹 하였으나 살기가 없었고 날카로웠으나 예기를 내뿜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였다. 양소천의 뒤로 또 다른 낮선 음성이 들려왔다. "양소천! 당신은 그를 결코 죽일 수 없지. 하지만 그를 데려가지 않으면 당신 은 죽을 거야. 성황께서는 그리 너그러운 분이 아니니까!" 제 구장 深夜劍客生死難(심야검객생사난) 깊은 밤 검객의 생사는 어려우니... 어둠을 헤치고 한 명의 금의(錦衣=비단옷)를 걸친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자 신의 의복만큼이나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으며 매우 세련된 장신구들로 치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자신감 넘치는 미소로 가득 차있었으며 그 것은 도리어 지나쳐 오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양소천은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독심랑(毒心狼) 풍남천(馮南川)! 성주(星州)의 노독문(老毒門)출신으로 용독술(用毒術)에 있어서 열 명의 고수 중 한사람이었으며, 집법당(執法堂)소속의 집법팔위(執法八衛)의 수장이 그였 다. 양소천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가 이곳까지 어인 일인가?" 풍남천은 그의 냉랭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별것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우리의 성황께서는 의심이 많은 분이지. 그 분은 당신을 믿지 않으셨어. 아 니, 그 분은 누구도 믿지 않으시지..... 나는 성황의 성지에 따라 당신을 항상 감시했으며,지금도 당신을 감시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야." ".......!" 양소천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한 참을 지나서야 양소천은 힘없이 말했다. "그래서?" 풍남천은 돌연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그래서라니.......? 당신은 비단 그를 죽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설득할 수 도 없지. 당신은 거짓말을 못하니까." ".........." 풍남천은 웃음을 멈추고는 의미심장은 눈빛으로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도와준다면.......저 친구를 사로잡아 끌고 갈 수는 있을 거야." ".......!" 양소천은 어쩌면 그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자가 그런 말 을 했다면 코웃음을 치고 흘러 넘겼을지 모르겠지만, 풍남천의 말이었기에 결 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용독술의 대가이고 신기묘산(神技妙算)이 뛰 어난 자였으며 그가 누군가를 죽이려한다면 상대는 살기를 바라지 말아야 했 다. 또한, 그는 풍남천이란 인물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남을 도 와주려 할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아무런 대가없이 일을 하 지 않으며 그 대가는 상당히 비싼 것이었다. 양소천은 풍남천을 바라보았고, 풍남천도 양소천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두 사 람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찾아낼 수 없었다. ".........." ".........." 질식할 듯한 오랜 침묵을 깨고 양소천이 말했다. "자네는 무엇을 원하지?" 풍남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바로 당신." "그렇다면 자네는 실망할 걸세. 나의 가치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거든." "사람의 가치는 항상 변하지. 몇 년 전만 해도 당신은 별 볼일 없었으나 지금 은 아니야. 어떻게 하겠어?" "자네는 내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나?" "당신은 나한당의 수많은 정보를 알고 있으며 그 중에 성황에 관련된 몇 가 지 정보만 넘기면 돼." 그제야 양소천은 이채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는 장로파(長老派)인가?" 풍남천은 자신의 부채를 흔들며 말했다. "아니. 장로파도 성황파(聖皇派)도 아니야. 단지 실리를 위해 움직이지. 다시 말해 나는 장사꾼이야. 그것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난 장사꾼이 아니야!" "물론 당신은 장사꾼이 아니야.....하지만 아무런 파벌도 갖지 못하는 회색인 간이기는 마찬가지지." "자네는 어떻게 그것을 확신하나?" "그것은 당신이 너무 고지식하기 때문이야. 당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며 정 직하지. 그런 사람에게 누가 비밀을 털어놓으며 접근하겠어? 지금의 당신을 보라구. 장로파도 성황파도 당신에게 손벌리려는 사람이 없잖아? 하지만 나 와 장사를 하게 되면 파벌을 초월하여 커다란 재미를 보게 될 것이야." 양소천은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만큼의 재미를 보게 될까?" 풍남천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당신 스스로의 가격은 당신이 얼마나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항상 달라지지. 그리고 지금 당신의 상황은 그런 것을 물을 때가 아닐텐데..." 그의 말은 옳았다. 그에게는 언뜻 선택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세상에 는 막다른 골목은 없는 법이었다. 하물며 천지가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고 하지 않은가? "......." 양소천은 충분히 생각했으며 풍남천은 그것을 참지못하고 말했다. "빨리 결정해." 그의 재촉에 양소천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 은 비장했으며 어떠한 아픔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은....정말로 나를 따라가지 않겠소?" 백리향은 그제야 양소천이 그토록 검을 휘둘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만큼 그 는 절박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남을 속 이지도 못하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애초부터 전륜신교의 교주는 백리향의 능력을 과소평가 했다. 그가 만약 신중 하게 생각했더라면 양소천 혼자 임무를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백리향은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소생이 꼭 가야할 이유가 있다면 따라나서리다." 그러자 양소천의 얼굴에 알듯 모를 뜻 기이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 고 그의 미소는 곧 함박웃음이 되어 있었다. "당신이 따라나서야할 이유는.......없소!" '없소!'라는 말과 동시에 그의 검이 번득거리며 하나의 유성처럼 남천문의 가 슴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며 백리향조차 어 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만큼 그의 검은 빨랐으며 지금까지 백리향에게 펼 쳐 보였던 검식과는 수준이 달랐다. 남천문은 너무나 돌연한 사태에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불신에 찬 눈으로 양소천과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쇳 소리처럼 하나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왜......?"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죽일 수 없는 사람이 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이 있어야 그의 목 숨도 부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니 뭐니해도 자신은 성황이 직접 파견시킨 자가 아닌가? 자신의 죽음은 곧 양소천의 죽음이었다. 양소천은 핏물이 튀지 않도록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검을 뽑으며 말 했다. "사람들은 항상 나를 과소평가하지. 그것은 내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생 각하기 때문이야. 그것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인지 자네는 알 지 못했어. 이제야 말하겠지만 난 성황파 사람일세. 성황께서는 나를 감시하라 고 자네를 파견시킨 것이 아니야. 자네를 감시하라고 나에게 보내준 것이 지......그 이치를 알겠나?" 남천문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양소 천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자신은 죽어 마땅하 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 는 대지와 하나가 되었고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리고 한 참 후에야 그 의 가슴에서는 뭉클거리며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양소천은 그의 주검을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보게. 이 세상에는 진정으로 정직한 사람은 없네. 모두가 정직 하려고 노력 할 뿐이며, 정직을 가장하려 할 뿐이지.....' 양소천은 고개를 돌려 백리향을 바라다보았다. 백리향은 아미를 찡그리고 있 었으며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소천은 피 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백리향과 강자단의 결투를 보았고 귀산노괴와의 결투도 보았다. 백리향 은 진정한 군자였으며 그 어떠한 이유에서든 살생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의 주군이 문인백령이 아니라 백리향이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만약 백리향이 자신의 주군이라면 그는 백리향을 위해 서 골백번 죽어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절실한 전륜신교의 교도였다. 언젠가는 전륜성황이 나타난 자신들을 구 제하고 온 세계가 평등한 날들이 오리라 믿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 줄 진정한 전륜성황을 앞에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는 그 앞에서 살 인을 저질렀으며 그 만큼 백리향과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처량한 웃음을 지으며 장검을 거두어 자신의 팔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 다. 백리향은 돌발적인 사태에 경악하며 재빨리 그의 검을 빼앗으려 했지만 이 미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팔을 갈랐으며 그의 팔은 속절없이 하늘 로 날아올랐다. "앗! 이게 무슨 짓이오!" 양소천은 재빨리 자신의 팔에 혈도를 눌러 피를 지혈시켰다. 그리고 처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성황께서는 결코 너그러운 분이 아니오. 귀하를 모시고 가지 못하면 죽음만 있을 뿐! 나 스스로의 생명과 스스로의 팔 하나를 바꾸었으니 손해는 없는 장 사요. 후후후!" 그러나 백리향은 안타까운 듯 발을 구르며 말했다. "소생은 가야할 이유가 있다면 따라나서겠다고 말했소. 그런데 어찌 스스로 자해를 한 단 말이오!" 그는 문득 한 걸음 내딛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백리향! 당신은 나를 따라나설 이유가 없소. 단지 내가 당신을 모 시고 가야할 이유가 있을 뿐. 그것은 나의 이유지 당신의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이오!" "........!" 그는 한 숨을 내쉬며 먼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 다. "당신은.....나의 목숨을 거두어 버릴 수 있는 무공을 지니면서도 결코 공격을 하려하지 않았소. 그리고 나의 사정을 알고서는 무조건 따라나서려 했소. 당신 이라는 사람은......정말 좋은 사람이오." "........" "당신도 들어 알겠지만, 지금 전륜신교는 내분이 일어나고 있소. 장로들은 지 금의 성황을 불신하고 있으며 이것은 거대한 불씨가 되어 전륜신교를 휩쓸게 될지 모르오. 만약 대란이 일어나 그 화(禍)가 나에게까지 미칠지라도 그대의 고마운 마음씨 결코 잊지 않겠소. 그럼.... 실례하겠소." 그는 백리향에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 돌아서서 다시 골목으로 사라지기 시 작했다. 그의 걸음은 더 이상 적당한 보폭의 걸음이 아니었으며 초라해 보이기 까지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그는 걸음을 멈추고는 백리향을 돌아보며 말했다. "성황께서는 당신과 비무를 하고 싶어하시오. 그분은.....그 분은 제천강림전 륜성황임에 앞서 한 사람의 무인이라오. 아마 당신의 일검을 막을 자가 있다 면 아마도 성황 한 분일 것이오. 그 분은 결코 당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요. 다 음에는 나보다 더욱 고강한 사람들이, 더욱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길을 막을 거요. 부디 보중하시구려." 무릇 모든 대공(大功)을 논하는 사람은 소과(小過=조그마한 잘못)를 들먹이 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뛰어난 자가 천 번을 심사숙고하여도 하나의 실수는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성황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일까? 어떤 사람이기에 부하의 조그만 잘못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한 자신과 싸워 무엇을 얻 고자 하는 것일까? 백리향은 자신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을 접고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당신도 보중하시구려." 그도 아련한 미소를 베어 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백리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어두운 골목 안에는 세 명의 사나이가 있었다. 한 사람은 떠났고 한 사람은 남았다. 그리고 한 사람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백리향은 자 신의 손수건을 꺼내어 시체가 되어버린 사나이의 얼굴을 덮어주었다. 설령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 중 최악의 악인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으면 그 또한 부처로서 일체의 죄악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장작 이 자신의 몸을 불사름으로 해서 밝게 빛나듯, 깨달음이라는 빛은 일체의 죄악 을 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백리향은 가슴속으로 그가 죽기 전에 깨달음을 얻었기를 간절히 빌었다. *** 그는 육합문의 문주라는 신분에 앞서 한 집안의 가장(家長)이었다. 그는 항 상 가정적인 사람이었으며 자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줄 아는 따뜻한 아버지 였다. 사랑하는 아내가 자신의 곁을 떠난지도 어언 십 년이 흘렀지만 결코 다른 여 인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아내는 죽어가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줄 것 을 당부했으며 그녀와의 약속대로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 그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육합문이라는 사업에 대한 열정으로, 사랑스런 자 녀에 대한 애정으로 전환시킬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실이자, 모진 산고의 고통으로 탄생한 아들. 항상 절대 적 사랑을 보내고 걱정과 근심이 늘 함께 했던 아들이며, 자신의 피를 이어받 았고 그 피를 대대손손 이어나가게 할 아들. 장양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볼 때 마다 가슴이 저린 것을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허약한 체질을 갖고 있어 항상 잔병치레를 해 왔었고, 그래서 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은 남달랐건만 장지충은 자신의 바람 되로 자라주질 못했다. "아버지! 저,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아들은 지금 불안에 떨고 있었다. 자신이 저지른 조그마한 실수가 엄청난 결 과를 몰고 오자 두려움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장양의 입에서 한 숨이 흘러 나 왔다. "충아야!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이 육합문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 다." "하지만, 무서워요. 아버지! 대사형이나 여러 사형들을 뵐 면목이 없어요. 그, 그들은 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자 장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그들은 걱정할 것 없다. 오히려 너에게는 더욱 잘된 일인지 모른다. 이 아비는 주가의 자식이 아니라 이 장가의 자식이 이 육합문을 이어받기를 원한 다. 내가 이룩한 사업을 어찌 남에게 내어 줄 수가 있겠느냐? 백지와 원월은 충성스러운 아이들이나 화룡과 우산은 속을 알 수 없는 놈들이다. 지금 내가 죽으면 이 육합문은 누구의 손에 떨어지겠느냐? 아마도 나의 죽음을 제일 먼 저 바라는 놈이 주화룡일 것이야!" 장지충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의자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서, 설마...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 대사형은 그러실 분이 아닙니다." "흥! 못난 놈! 자객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특히 나 장양의 목은 그렇게 싸구려가 아니란 말이다! 과연 내가 죽어 이득 볼 사람이 누구며, 그 만 한 자금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느냐? 절강땅에서 육합문을 쓰러트 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주가장(周家莊)이외에는 없다." "....." 장지충은 거의 사색이 되어 벌벌 떨고 있었다. 그러한 아들의 모습에서 장양 은 가슴이 아파 옴을 느꼈다. 불쌍한 녀석! 어려서 모친의 정도 못 받고 자란 불행한 놈! "충아야. 모든 것을 이 아비한테 맡기고 상처나 치료하며 쉬고 있거라.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 제 구장 深夜劍客生死難(심야검객생사난) 깊은 밤 검객의 생사는 어려우니... 하늘은 알까? 오늘도 한 사람이 죽었음을.... 죽음이란 때로는 태산(泰山)보다 무겁고, 때로는 팔랑이는 잎새보다 가볍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생, 예로부터 누군들 죽음이 없을 까 마는......남 천문은 결코 그렇게 죽어서는 안되었다. 아니! 그 누구도 그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언제고 죽는다. 백살을 채우기가 힘들며, 설령 그 보다 오래 산다고 하여도 언젠가는 늙어 죽는다. 이 세상에서 그나마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귀 천(貴賤)을 불문하고 누구든지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다. 고귀한 황제도 비천 한 거지도 어김없이 백년이 지나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며 그렇기 때문에 하루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아름답게 꾸며나가야 한다. 아무리 혹독하고 거친 삶일지라도 죽음보 다는 값진 것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의 삶을 포기해서도 안되며 남의 삶을 강탈 해서도 안 된다. 무릇 최하(最下)의 무사는 자신의 검으로 일신을 지키는데 사용하고, 중상(中 上)의 무사는 전쟁을 막는데 사용한다. 최상(最上)의 무사는 자신의 검을 녹 여 쟁기를 만들고 밭을 일군다. 무인이라면 모름지기 최하의 검을 버리고 최상의 검을 얻어야 할 것이다. 최 상의 검은 활검이라 이르며 타인의 생명을 자신의 생명처럼 아끼고 생명을 두 루 키우는데 있는 것이다. 결코 남천문과 양소천의 검처럼 서로 죽이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늘은 무심하고 대지는 정이 없다. 그렇기에 남천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수많은 억울한 영혼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백리향은 한숨을 내쉬며 무거 운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을 이른 새벽. 백리향은 육합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객 방, 잡방, 약왕각, 등 모든 방들과 창문은 꼭꼭 닫아걸려 있었으며 사방은 고요 하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마치 천지간의 모든 운행이 일시 정지된 듯한 적막한 느낌이었다. 문득 백리향은 발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어 있 을 때 홀로 깨어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백리향은 늘 외로웠으며 고독했다. 산중에서 홀로 살아갈 때에는 결코 느껴보 지 못한 감정이 도리어 수많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에 나와서야 느껴지 는 것이다. 모두 꿈속에 있고 홀로 깨어있는 듯한 막연한 고독감! 하늘아래 땅 위로 오로지 홀로 있는 듯한 절대고독(絶代孤獨)! 문득 저 멀리 하나의 불빛이 보였다. 오로지 홀로 깨어있다고 생각하였는데 또 다른 사람이 잠들지 못하고 있는가 보다. 백리향은 그 불빛이 흘러나오 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 걷지 못하고 걸음을 멈춘 채 쓴웃음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바로 주화룡의 거처인 추풍원(秋風園)이었기 때문이 다. 백리향이 비무방을 나설 때 강자단은 그의 옷소매를 흔들며 넌지시 이런 말 을 하였다. "이보시오. 공자. 나에게 다리가 잘린 애송이를 한 번 찾아가 보아야 할거요. 그가 자꾸만 걸리는구려. 그 애송이는 단단한 자요. 그래서 부러지기가 쉽 지....." 백리향은 그에게서 삶의 변화를 보았다. 그 것은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강자 단의 닫혀진 마음에 타인이라는 개념이 생성되고 있는 것이었다. 강자단에게 과연 어떠한 깨달음이 있었을까? 자신에게 난타 당할 때 동병상련의 아픔이라 도 느꼈던 걸까? 백리향은 당시의 강자단을 생각하니 그만 터져 나오는 웃음 을 멈출 수 없었다. "후후후!" *** 목발이라는 것! 참으로 황당하고 슬픈 물건이다. 남의 다리가 없어져야 비로 소 이용가치가 생기는 고약한 물건인 것이다. 주화룡은 자신의 목발을 죽일 듯 이 쏘아보며 한 잔의 술을 마셨다. 술잔을 떼어내자 주화룡의 입가에 술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술은 자 신의 턱을 정점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 내려 그의 공허한 한 쪽다리를 적 시기 시작했다. 아직도 붉은 혈흔이 가득한 그의 옷자락은 흘러내린 술로 이 미 흥건히 적셔져 있었다. 주화룡은 실체가 없는 자신의 한 쪽다리를 노려보았다. 그의 두 눈은 증오와 분노로 얼룩져 있었으며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강자단은 그 의 다리와 더불어 영혼까지 잘라버렸던 것이다. 주화룡은 정신적으로나 육체 적으로 더 이상 완전한 인간이라고 불리울 수 없는 인간의 단편이었다. 아직도 잘려나간 부분의 마디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술을 마시면 안되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나서 맨 처음 찾은 것이 바로 술이었다. 그는 우선 취하고 싶었다. 취하여 잠들고 다시 일어나 취하였다. 취하지 않고 서 그 기나긴 고통과 서글픔, 분노와 증오를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그는 이미 충분히 취했지만 그의 손은 어느덧 술병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 세 개로 겹쳐 보이는 술병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겨우 술병을 잡았으나 반은 흘러 내렸고 반만이 술잔에 부어졌다. 주화룡은 킬킬거리며 자조석인 음 성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벌써 취한 것인가. 아니면 다리 한쪽만큼..... 주량이 줄어든 것인가?" 그의 목소리는 매우 허무하고 어눌했다. 그는 달아난 한 쪽다리만큼 주량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삶의 희망이 줄어든 것이었다. 그의 귓가로 낯설지 않은 음성이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렇지 않을 거요. 주화룡! 혹시 당신은 항상 취해 있지 않았소? 야망에 취해 있었으며, 자만에 취해있지 않았소?" "......!!" 주화룡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문틀에 몸을 기대어 팔짱 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자신들을 구하고 일약 영웅 으로 떠오른 나쁜 놈이었으며, 자신이 누려야할 영광을 빼앗아 가버린 개자식 이었다. ".........." 주화룡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돌려 다시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 곳에는 무슨 일인가? 고맙다는 인사라도 듣고자 왔는가? 그렇다면 꿈 깨 고 돌아가!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을 뿐 더러 도리어 자네를 원망하고 있 어....." "강자단이 말하더군. 당신의 눈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불태웠던 불같은 야 망을 볼 수 있었다고.....그래서 나보고 한 번 가보랍디다." 순간, 그의 입가로 가져가던 술잔이 멈추었다. ".....!" 그의 눈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산처럼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억제하며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강자단을 증오해. 하지만 자네만큼 증오하지는 않아! 강자단은 나의 다리를 잘랐지만, 자네는 무인답게 죽을 권리를 빼앗아갔기 때문이야. 너만 아 니었으며 이러한 수모는 격지 않았을 거라고!" 백리향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명예가 자신의 삶보다 중요하오? 강자단의 죽음이.... 자신의 목숨보다, 사제 들의 목숨보다 중요했던 거요? 명성이 그렇게 절실했었소?" 주화룡은 그의 말을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 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공을 위해 달려나간다. 그 또한 최 고가 되기 위해 열심히 무공을 갈고 닦았으며 기회가 왔던 것이었다. 단지 그 는 실패하였을 뿐이었다. 꿈을 꾼 것이 잘못이란 말인가? 꿈을 향해 달려간 것 이 그렇게 잘못이란 말인가? 주화룡은 어깨를 들썩이며 괴이한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자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구나. 마치 그런 것에 해탈이라도 한 듯 한 말투가 아닌가.....? 건방진 자식!" 백리향은 주화룡의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고정관념에 한숨이 흘러나옴을 느꼈다. 왜 사람은 성공을 이루려 할까? 성공이라는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 걸 까? 과연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실패일까? "휴우~하루살이는 내일을 알지 못하고, 쓰르라미는 봄, 가을을 알지 못하 지..... 어리석은 자는 먼 곳은 알아도 가까운 곳에 진리가 숨어 있음을 알지 못 한다네." 순간, 주화룡은 고개를 획 돌리고 잡아먹을 듯이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뭐? 하루살이? 쓰르라미? 한 쪽다리가 없다고 장기판의 졸로 보고 있구나!" 백리향은 크게 웃었다. 그것은 경멸이었으며 비웃음이었다. "하하하! 그대한테는 그것도 과하다." "개자식!" 주화룡은 자신의 술병을 백리향에게 던졌다. 그는 비록 술에 취해 있을망정 내공이 실린 그의 술병은 결코 취하지 않았다. 쉬잉~하는 소리와 함께 술병은 곧장 백리향의 면상으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주화룡이 바라는 어떠한 물리적 인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술병은 백리향의 면전 앞에 둥둥 떠있을 뿐이었 다. ".....!!" "이보시오. 주화룡 세속에는 엎어진 물은 주워담을 수 없다는 말이 있소." 백리향이 오른손을 기묘하게 비틀자 둥둥 떠있던 술병이 옆으로 기울며 술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술병의 술이 모두 바닥에 쏟아지자 백리향의 말이 다시 이 어졌다. "하지만 말이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한다면 쏟아진 물도 다시 주워담을 수 있 을게요." 백리향의 손이 다시 비틀어졌다. 그러자 땅바닥에 쏟아졌던 물이 뽀얀 연기로 화하더니 술병 속으로 들어와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 "마음을 일심으로 묶어두고 간절히 원한다면, 없던 곳에 산이 생기며 새로 생 긴 산도 허물어트려 평지로 만들 수 있는데, 하물며 당신의 하찮은 다리인들 오죽하겠소?" 백리향의 손이 다시 움직이자 술병은 다시 주화룡의 탁자로 가더니 그의 앞 에 내려앉았다. 이것이 꿈일까?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은 사술이 아닐까? 혹시 자신이 너무 취 해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화룡은 자신 앞에 일어난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망연자실해 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를 망연자실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 었다. "주화룡! 당신은 비록 한 쪽다리는 잃어버렸을망정 그것은 작은 상실(喪失) 에 불과하오. 커다란 상실은 지혜를 잃어버리는 것이지.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 지 말고 새롭게 얻은 것을 즐기시오. 당신은 분명 커다란 것을 얻었소." 순간! 주화룡의 머리에 강렬한 그 무엇인가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 리향이 보여준 경지는 그 무엇에도 비교 할 수 없는 거대한 가르침 이였던 것 이다. 그는 본래가 총명한 자였으나 잠깐의 시련이 그의 총명함을 가리고 있었 던 것이다. "......!" 세상에는 죽음의 법칙만큼이나 확실한 한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일실일득(一 失一得)의 법칙이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게 된다. 그것이 육체적이든 정 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깨달음이란 언제 어느 때고 일어난다.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넘어져 깨달음 을 얻기도 하고, 한 방울의 물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지저귀는 새소 리, 흐르는 냇물소리, 밭을 가는 소의 울음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깨달 음이란 결코 멀리 있는것이 아니었다. 깊은 번뇌와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다. 문득 깨어보면 한 편의 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앞은 수천 길의 벼랑이오, 뒤는 수 백 마리의 호랑이가 득실대는 진 퇴양난의 수렁 속에서 두려움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다가 문득 삶을 깨닫고는 웃으며 호랑이에게 다가선다. 주화룡의 얼굴에는 어느덧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으며 두 눈은 맑게 깨어나 고 있었다. 제 십장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비 오는밤 방울소리에 끊어지는 듯한 단장의 슬픔 이른 아침, 세상은 더 없이 빛났다. 풀과 나무, 그리고 화사하게 핀 꽃들은 제각기 태양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있었고 낯익은 새들 의 지저귐은 하늘 높은 곳에서 들려왔다. 백리향은 기분 좋게 일어나 천태현시내로 가기 위해 간단한 행 장을 차린 후 만서각을 벗어나고 있었다. 가을의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이 육합문의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공자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백리향이 고개를 돌려보니 양소교가 활달한 발걸음으로 뛰어오 고 있었다. "아! 양 아가씨로군요. 소생은 천태현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그러자 양소교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어머! 잘됐네. 나도 그곳으로 향하던 중이었는데……. 우리 같이 가요." 지난날 양정 때문에 침울한 모습의 소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 로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백리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죠." 육합문을 벗어나면 천태현시내로 연결된 커다란 길이 나있는데 마차 두 대는 충분히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잘 닦인 길이었다. 그 만큼 육합문의 재력(財力)은 대단한 것이었다. 길을 걷다보면 천 태현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데 마침 아침이라 그런지 짙은 안개 가 산하의 논밭을 휘몰아 감싸고 있었다. "공자께서는 무슨 일로 가시는 길입니까?" 양소교가 오랜 침묵 끝에 먼저 내뱉는 소리였다. "아! 천태현에는 세 군데의 서포(書鋪)가 있는데 모두 만서각과 거래를 트고 있지요. 그곳의 노판(老板= 상점의 주인. 또는 지배 인.)들과 인사도 나누고 새롭게 출간된 서적들을 살펴보고 구입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소생의 중요한 업무 중의 하나입니다." 양소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 그렇게 된 것이군요." "아가씨께서는 무슨 일로 천태현으로 향하십니까?" 양소교는 당황스러운 듯 말을 더듬거렸다. "나, 나는…….나는 남극을 보러 가는 중입니다." "남극이라고 하셨습니까?" 백리향은 걸음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항상 조용 한 성품의 그에게서 이러한 표정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네. 왜 그러시는 거죠?" 백리향의 뜻밖의 과민반응에 도리어 양소교가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남극(南劇)이란 원나라 당시에 유행하던 악극(樂劇)을 말함인데 양자강을 사이에 두고 남극과 북극(北劇)으로 나뉜다. 서민들의 음악이 극의 형태를 뛴 것이다. 이러한 잡극은 단순한 형태로 공 연되고 있었는데 공연자가 탈을 뒤집어쓰고 대부분이 영웅들의 전설이나,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사람들을 놀리거나 우롱하는 내용이 많아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후에 이것은 청나라 중엽에 생성되는 경극(京劇)의 모태가 되기도 한다. "아가씨! 소생과 같이 가십시다. 저도 보고 싶군요." "정말이십니까?" 어느덧 천태현에 접어든 양소교는 언제 샀는지 당호로(糖葫蘆= 산사자, 해당화의 열매를 대꼬챙이에 꿰어, 꿀을 발라놓은 음식.) 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규중(閨中)의 처녀로서 지녀야할 정숙한 행 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았으며 백 리향 또한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한테는 이러한 발랄한 행동이 어울린다고 느끼고 있었다. 양소교는 사실 상당히 흥분되어있었다. 백리향과 있으면 왠지 모 르게 기뻤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그러한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는 당호로 만큼 적당한 것은 없었다. 달고 맛있다는 감각 이 그녀의 흥분을 감추고 손과 발을 자연스럽게 하기에는 그지없 이 적당한 것이다. 그러나 당호로 만큼이나 그녀의 가슴을 식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어이! 사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찾았다고?" “…….” 상당히 짜증 섞인 목소리. 뒤돌아보지 않아도 목소리의 주인공 을 알 수 있었다. 바로 오고산이었다. 그녀는 뒤 돌아 보며 못마땅 하고 불쾌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형이 나를 왜 찾는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안유가 말했다. "사부님이 드실 탕약을 가지러간 사매가 이런데서 뭐 하는 거냐 고? 우리가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알아?" 양소교는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앗!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백리공자께서 오해하겠네. 나는 아 버지께 탕약을 갖다드리고 오는 길이에요." 오고산은 안유를 바라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어! 이상한데. 그럼 우리가 갖다드린 탕약은 뭐지? 사부께서 말 씀하시길……." 백리향은 오고산의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그것은 양소교가 얼 굴을 붉히며 질러대는 고함소리에 묻혀버렸기 때문이었다. "닥쳐!" *** "마, 말도 안돼! 내가 사부를 시해하려고 살인청부를 했단 말이 냐? 이것은 음모다!" 주화룡은 분노에 차서 탁자를 내리 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한 쪽다리가 없는 그는 몸이 기우뚱해지며 탁자와 함께 쓰러지 고 말았다. 우당탕! "크윽!" 백우산은 얼른 일어나 쓰러지는 주화룡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잘려나간 팔은 공허하기만 했다. 그는 자신의 잘려나간 한 쪽 팔이 너무나 저주스러웠다. 그는 쓰러져있는 주화룡에게 다가 가 아직까지 존재하는 한 팔로 부축하려 하였다. "대사형! 괜찮으십니까?" "사제 나는 괜찮다." 주화룡은 손을 들어 백우산의 부축을 뿌리치며 스스로 일어서 고 있었다. 그는 비록 한 쪽다리를 잃어버려 불구의 몸이 되어버 렸지만, 그의 강한 정신력만큼은 결코 불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술에 만취한 상태였고 아직까지 외다리로서 적응 이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몇 번이나 다시 쓰러져야 했다. 하지 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으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섰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백우산은 자신의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주화룡은 숨을 돌린 후 매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이런 헛소문을 뿌리고 다닌단 말이냐?" 백우산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 소문이 설득력 있다고 믿 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소제가 소문의 근원을 조사하려 하였지 만 다들 함구하려 하고 있으며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습니다.” “.........” 하나의 결과가 있다면 그것은 그에 따른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 관한 헛소문이 나돌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영웅들은 헛소문을 퍼트려 자신의 정적(政敵)을 없애거 나 반란을 일으키는 대의명분(大義名分)으로 삼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것은 훌륭한 병법일 것이나 주화룡으로서는 하나의 의혹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누가 무슨 목적으로 자신을 모함하려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주화룡은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를 바라보는 육합문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는 않겠 군.” “..........” “어쩌면 경멸할지도......” “.........” 주화룡은 자신 앞에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지 충분히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백우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음~ 사부님은?” 이 세상에서 자식을 아는데 부모를 따르지 못하고, 제자를 아는 데 스승을 따르지 못할 것이다. 사부라면 자신의 결백함을 능히 알 것이다. 그러자 백우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한 참을 머뭇거린 다 음에야 힘없이 말했다. “사부님은……. 사부님은 이 소문과 함께 사형을 육합오호검에서 제외시키셨습니다.” 순간, 주화룡의 두 눈이 한껏 치켜떠졌다. “……!” “그리고 강백지를 대사형으로 임명하고 속가제자 중에서 무공 이 걸출한 자를 새로이 편입시키셨지요. " "……!" 백우산의 말을 들은 주화룡은 망연자실한 채 허공을 바라다보았 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심한 현기증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상 이 빙글빙글 도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이럴 수가…….이럴 수가……." 주화룡의 동공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곧 상체를 흔들면서 실성한 사람 마냥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왜……? 그럴 리가 없는데…….” 백 우산은 그의 심상치 않은 행동에 벌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형! 무슨 일이십니까?" 그의 모습은 정상이 아니었으며 마치 혼을 잃어버린 듯 실성한 사람과 같았다. 백우산은 직감적으로 주화룡이 심마(心魔)에 들었 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서둘러 주화룡의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사형! 정신 차리십시오! 사형!"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충격이 올 때 심마는 찾아든다. 기가 역류하여 얼굴이 창백해지고 정신을 잃어버리거나 심할 경우 피 를 토하고 죽는 경우도 있었다. 얼마나 흔들었을까? 주화룡의 풀려있던 동공이 제자리로 돌아오 며 흔들거리던 몸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 나는 괜찮아. 그, 그만……." 백우산은 그제야 그의 몸에서 손을 떼었다. "사형……." 주 화룡은 한 참을 멍하니 있더니"아! 이럴 수가…….사부는 나 를 죽이려 하는구나!" 하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앗! 사형!" 백우산은 서둘러 주화룡을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젖은 수건으 로 그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주화룡은 침상에 쓰러진 채 처연한 눈길로 백우산을 바라다보았 다. 그의 시선 속으로 백우산의 초췌한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의 펄럭이는 한 쪽 팔이 못내 가슴이 아팠다. 그것도 알고 보 면 자신의 야욕 때문에 희생이 되어진 것이 아닌가? 주화룡은 하 마터면 눈물을 벌컥 쏟을 뻔했다. 그는 침상에서 손을 뻗어 백우 산의 하나 뿐인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아! 사제…….그 동안 못난 우형(愚兄)을 믿고 따라주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네.사슴을 쫓는 사람은 산을 보지 못하고, 돈을 움키는 사람은 사람을 보지 못하는 법일세. 그 동안 나는 야망에 도취되어 사람을 잊었고, 명예를 움켜지려다 보니 인정을 잃어버 린 것일세! 나는 강자단만 죽일 수 있다면 자네들을 희생해도 좋 다고 생각지……." "……!" "누가 말하더군. 한 쪽다리를 잃어버렸지만 더욱 큰 것을 얻었다 고……. 이보게, 사제! 나에게는 술 한 동이가 있고 끼니를 이을 양 식이 있는데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설사 남들이 우리를 업신여긴 들,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들, 마음만은 어느 왕후장상보다 화려 하고 평안한 것이야. 나는 이제부터라도 잃어버린 것에 연연해하 지 않고 새롭게 얻은 것을 즐길 생각이네. 앞으로 자네가 많이 도 와주어야 할 것이야." "사, 사형……." 백우산의 두 눈에서 눈물이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사형은 쓰러지 지 않는다! 결코 쓰러질 수 없는 분이다! 그는 주화룡의 모습에서 결코 쓰러지지 않는 위대한 거인을 보았던 것이다. 주화룡은 마치 먼 산을 바라다보는 듯 얼굴을 돌려 사부가 거주 하고 있는 충의전을 향하여말했다. "사부! 당신의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가르쳐 주시렵니까?" *** 남극(南劇)이 공연하는 장소는 청석판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널 따란 공터였다. 사람들은 이미 입추의 여지도 없이 콱 들어차 있 었고 도저히 앉아서 구경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소교가 무공을 펼쳐 발길질을 몇 번 하자 사람들은 괴 성을 지르며 앞 다투어 자리를 피해 옮기기 시작했다. 오고산과 안유는 얼굴을 붉히며 먼 산을 바라다보았고 백리향은 얼굴을 찡 그리고 있었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양소교는 양씨 집안 의 비법인 안면몰수공(顔面沒收功)을 사용하여 뻔뻔스럽게 말했 다. "참으로 좋으신 분들입니다. 자리를 양보하여 주다니……. 얼른 이리로 앉으세요. 두 분 사형은 저만치 떨어져 앉아주세요. 우리 와 일행이라고 착각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그러면서 은근슬쩍 주제를 바꾸고는 험상궂게 생긴 오고산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자 안유가 능청스레 말했다. “철면낭자(鐵面娘子) 양소교! 대단하다. 대단해…….” 오고산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거들고 나섰다. “그녀의 철면신공은 어떠한 신병이기라도 뚫기 어렵지.” 그들의 야유에도 양소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같잖 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흥!” 극의 내용은 그다지 볼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억압받고 설움 받 는 서민들의 욕구불만을 시원스럽게 긁어주고 있었다. 권선징악을 바탕으로 욕심 많고 탐욕스러운 지주에게 자신의 애 인이 첩으로 들어갈 상황이 되자 기지를 발휘해 지주를 약 올리 고 사람들에게 망신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의 활약이 보일 때면 사람들은 별것 아닌 것에도 기뻐하면서 박수를 쳤다. *** "앉거라.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을 터인데,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온 게냐? 하인을 시켜 나를 부르지 아니하고……. 쯧쯧!" 장양의 표정이나 어투는 그야말로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진하 게 묻어 나오고 있었다. 주화룡은 싱긋 웃으며 스승이 권하는 의 자에 앉았다. "어찌 제자가 그런 망령된 행동을 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 자리 에 오게 된 것은 사부님께 한 가지 여쭙고자 왔습니다." 주화룡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장양은 고개를 끄덕 였다. "음~ 그래 무엇이냐?말하여 보거라." "제자를 정녕 죽이시렵니까?" “........!” 주화룡의 갑작스럽고 당돌한 질문에 장양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 작했다. 그리고 노기 어린 음성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무슨 해괴한 말이냐!" 주화룡은 그의 노기 어린 음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미심장 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어깨를 으쓱거렸다. “후후후! 제자는 육합문을 얻을 욕심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자 가 문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결코 불순한 생각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부께서 당연히 저에게 육합문 을 물려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보 시다시피 불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언감생심! 더 이상 꿈조차 꾸 지 못할 일이지요. 그런데도 제자를 죽이시렵니까?" 옛말에 큰 것을 얻기 위해 먼저 작은 것을 주라는 말이 있다. 주 화룡은 자신의 본심을 먼저 드러내었고그것은 장양의 본심을 듣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장양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으며 무 심히 주 화룡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 주화룡의 얼굴은 항상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그것은 그의 커다 란 무기였다. 때로는 무표정한 얼굴보다, 또는 분노한 표정보다 미소가 더욱 상대를 압박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럴 때 인 것이다. "얼마 전, 약간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면 사부님이 내리신 조 치에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제자는 자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하며, 승부욕과 명예욕이 강하였기 때문입 니다. 다리한쪽이 잘려나가고 거기다 암살을 사주했다는 오명과 더불어 육합오호검에서 쫓겨 나버리고 말았으니까요. 틀림없이 제자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결로서 결백을 증명하였을 것입 니다. 그리고 사부님은 의도적으로 제자를 벼랑으로 몰고 가셨습 니다. 제자의 말이 틀렸습니까?" 그제야 장양은 자신의 몸을 의자에 깊게 묻으며 침음을 터트렸 다. "으음! 룡아는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욱 총명하였구나! 만약 룡 아가 내 아들이었으면…….하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 단다. 항상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너는 내 아들이 아닐뿐더러 주 씨가문의 장자라는 것이었지……. " "......." "너는 충실할지 몰라도 주가장의 사람들은 너와는 다를 것이다. 특히 주정천(周頂天)그 사람도 너와는 뜻이 다를 것이다. 주정천 그 친구는 자네가 육합문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을지도.....어 차피 그는 자네의 부친이 아닌가? 얼마 전 나에게 살수가 붙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지. 죽어야 할 자는 죽어야 한다고……. 누 가 나의 목을 노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육합문 내부인의 소행이며 그만한 능력이 있는 자가 벌인 일임에는 틀림없기 때문 이지." “.........!” 순간 주화룡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사부에게 자신과 주가장은 자객들과는 무관하다고 토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 어떠한 말로서도 사부를 납득시키기에는 이미 늦 어 버렸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 아들 충아는 불쌍한 아이란다. 비록 모자라는 놈이지만 나의 피를 이어받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게야. 그놈에게 육합문을 물 려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말하더구 나. 다음 대의 문주는 주화룡 네가 되어야 한다고……. 너를 추천 할 때마다 나는 웃어 넘겼지만 가슴은 너무나 쓰라렸단다. 만약 살수를 청부한 자가 자네나 주가장의 소행이 아닐지라도 충아를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장양은 문득 자신의 제자를 바라다보았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는 과분한 제자 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그를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 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었다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없었으리 라……. "내가 죽은 후, 너로 인해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사부는 안심 할 수 없구나. 너는 청렴하나 주위의 사람이 불순하기 때문이야." “.........!” 장양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 았다. "이 사부는……. 이 사부는……. 네가 이 세상에서 사라져 주었으 면 한다. 미안하다. 룡아야……." "........" 주화룡은 자신의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비록 예상은 하고 있었지 만, 사부에게 직접 들으니 말 할 수 없는 비애가 휘몰아쳐 왔던 것이다. "사, 사부님의 뜻……. 잘 알겠습니다." *** 남극이 끝나갈 무렵 양소교는 지루함을 억지로 참고 있다가 드 디어 머리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요란한 박수소리 가 들리자 깜짝 놀라 일어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정말 감동적이네요. 그렇지 않나요 공자님!"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곳에는 백리향이 없었다. 전후좌우를 살 펴보아도 그의 종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사형! 백리공자가 없어졌어요.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글쎄다. 모르겠는데?" 오고산과 안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말했다. 바로 전까지 자신들의 앞에서 남극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감쪽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며 경공을 펼쳐 사라질 리도 없으며 그렇더라도 자신들이 모를 리 없었다. 오고산 과 안유는 머리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무지 화가 난 듯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휴! 신경질 나!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 때 여러 명의 소년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공수의 예를 취하며 바구니를 흔들었다. 그러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 바구니에 동 전을 몇 푼 던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냥 일어나 자신의 일터 로 향했다. 양소교도 동전을 던져주었다. 그러나 그녀가 던진 동전의 목표 는 바구니가 아니었다. 쾌액! 하는 비명과 함께 바구니를 들고 있던한 소년이 자신의 머 리를 잡고 뒹굴기 시작했다. “하여튼 얄미워 죽겠어!” *** 주화룡은 목발에 자신을 의지한 채 쓰라린 가슴을 참아가며 문 을 나섰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제자의 발걸음을 바라보는 장양 의 가슴도 메워지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을 생각하면 제자는 사라져 주어야만 했다. 비록 주화룡은 언감생심이라는 말을 하였지만, 인생은 자신의 의 지대로 살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주화룡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 언젠가는 주머니를 뚫고 드 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자가 숨기려 해도 숨겨질 수 없 는 영웅다운 성품과 총명함이었다. 그것이 있는 한 장지충은 결 코 자신의 기업을 물려받을 수 없을 것이다. 주화룡이 충의전을 벗어나자 지붕에서 하나의 인형이 뛰어내려 왔다. 그의 표정은 몹시도 침통하였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주 화룡은 그를 바라보며 다짐받듯 말했다. "사제! 모두 들었겠지?" "네!들었습니다. 사형!" 백우산은 지붕위로 올라가 사형과 사부의 대화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자네가 보고들은 모든 것을 백리서관에게 그대로 전 하게. 그렇게 된다면 이 우형의 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야." "그……. 만서각의 그 책벌레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주화룡은 뜻밖이라는 듯 백우산을 바라보았다. "책벌레? 후후후! 그러네. 바로 그 사람에게 전하게. 그는 우리의 생명의 은인일 뿐 아니라 철혈마검 강자단이 열 명이 모인 것보 다 강한 자일세." "........!" 무슨 뜻으로 하신 말일까? 진짜로 그 책벌레가 그렇게도 강하단 말인가?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형! 차라리 본가인 주가장(周家莊)에 알리는 것 이 옳은 방법이 아닐까요?" 주화룡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말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네. 그리고 이 한목숨 부지 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추호도 없네! 아마도……. 그 사 람이라면……." 주화룡은 말을 잊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태양은 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가고 있었고 온 세상은 검은 그림자가 짙 게 드리워져 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 사람이라면……. 자신과 사부와의 일그러진 인연을 책 임져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육합문을 사랑했으며, 사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 리고 이대로 육합문을 떠나고 싶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부 또한 자신을 순순히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백우산은 석양을 등지고 서있는 사형의 뒷모습에서 막연한 슬픔 을 느낄 수 있었다. "......." "무얼 하는 겐가? 어서 떠나지 아니하고!" 그제야 정신을 차린 백우산은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사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 동안 부디 몸 보중하시기 바랍니 다." 백우산은 땅을 박차며 날아올랐다. 제 구장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비 오는밤 방울소리에 끊어지는 듯한 단장의 슬픔 포노인(包老人)은 오늘도 무사히 공연을 마치게 된 것에 안도의 한 숨을 쉬며 탈이나 여러 가지 무대도구 등을 저장하는 천막으 로 돌아왔다. 그는 관객의 무서움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채찍질하고 약간의 방만함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로인해 자 신을 따르는 단원들에게 많은 원망을 들었지만 그의 결벽증적인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노인의 그러한 결벽증 때문에 수준 높은 공연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입 을 올리고 있다는 것에 누구하나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한 젊은이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 다. 얼굴은 그리 잘생기지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피부를 지니고 있 었고. 옷은 싸구려 흰색 장삼이지만 티끌하나 없는 깨끗함을 지니 고 있었다. "젊은이는 누구요?" "소생은 백리향이라 합니다. 탈에 관심이 많아 이 곳에 들러본 것 입니다. 경계하지 마십시오." 노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경계하는 것이 아니요 단지 뜻밖이었을 뿐이지…….나는 가면 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넘었다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되었지요. 젊은이의 얼 굴을 보니 참으로 묘하군, 묘해. 허허!" 포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그제야 안심 을 한 백리향은 곳곳을 둘러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다양하고 멋진 가면들이 많이 있군요? 정말이지 놀랍습니 다." 포노인은 싱긋 웃으며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펴며 말했다. "그것들은 나의 인생과 같은 것들이지. 거의 사십여 년 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수집하고 만든 것이요. 하나같이 나에게는 소중 한 것들이지요." "방방곡곡이라면........ 멀리 변방까지 가보셨습니까?" "물론이지요. 말이 통하는 곳이라면 안가본데가 없지." 백리향은 두 눈을 빛내며 포노인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매우 조 심스럽게 말했다. "저..... 혹시 이런 가면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모양은 악마의 형상인데, 양쪽에 뿔이 달리고 전체적으로는 붉은 색을 뜁니다. 얼굴에는 기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는데 새 같기도 하고 구름 같 기도 합니다. 눈은 둥그렇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그려져 있습니 다. 그리고 무척 위협적인 느낌의 가면인데 섬뜩함마저 느끼게 한 답니다." 포노인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말았다. "모르겠소. 젊은이가 말한 대로 그러한 가면을 보았다면 내가 모 를 리가 없소. 하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소이다." "아~ 그렇군요." 백리향은 실망을 금할수 없었지만, 공손히 두 손을 맞잡으며 작별 을 고했다. "참으로 실례가 많았습니다. 더 이상 어르신을 귀찮게 할 수가 없 군요." 백리향이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뒤에서 노 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잠깐만! 그런 가면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가면을 쓰고 다니는 부족에 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소.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들은 거라 확실한지는 장담 못하오 만, 아마도 그들은 귀두도를 들고 다닌다지?" 백리향의 얼굴에 회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그들은 귀두도를 들고 다니며, 기마 민족이기도 하지 요. 말을 무척 사랑하는 민족이랍니다. 산 속을 걸을 때도 말들을 끌고 다닐 정도로 말입니다." "오! 그렇다면 그 들이 맞는 것 같소. 그 들은 말들을 가장신성시 하며 모두 용맹하기도 하지. 하지만 전설이 된 민족이요." "......!" *** "서관님께서는 일찌감치 천태현으로 떠나셨습니다. 그곳에 있는 여러 서포들을 들러 보신다고 말입니다." 만서각의 부서관(副書官)인 나관중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백우 산에게 말했다. 백우산은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백리향이라 는 책벌레를 찾아 천태현으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주가 장으로 향하여 도움을 청할 것인가? 그는 원래 백리향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과소평가하고 있었으며, 그다지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자신이 그에 게 구은의 은혜를 입기는 했지만, 고맙다는 감정보다 수치스럽다 는 감정이 앞선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가장으로 향하기에는 주화 룡의 명을 어기게 되는지라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머뭇거릴수는 없는일.....그는 한 가지 중대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는 충분히 생각하였으 며 경공을 펼쳐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내 달리기 시작한 방 향은 결코 천태현방향이 아니었다. *** 밤은 이미 깊었고 십오야 둥근 만월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주화룡은 추풍원의 석교위에서 만월을 지켜보고 있었다. 만월은 차갑고 도도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매료시킨다. 그래서 그 런지 사람들은 곧잘 만월을 여인의 아름다움에 비유하기도 하며 신성시하여 소원을 빌기도 한다. 하지만 주화룡은 남들과 달리 만 월보다는 반월이 좋았다. 둥근 만월은 정점에 도달해 있으며 그 끝에 있는 것이다. 그래 서 이지러지는 것이다. 그에 반해 반달은 만월이 되기 위해 달려 가고 있다. 사람들도 정점에 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설사 정점에 도달 하더라도 영원히 그곳에 머무를 수는 없다. 정점에 이르러서는 저 만월처럼 다시 내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상에 있는 사 람은 위태로운 것이다. 주화룡은 둥근 만월이 되고 싶지 않았으 며 영원히 반달로서 남고 싶을 뿐이다. 그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주화룡 은 문득 자신 말고도 다른 또 다른 사람이 둥근 만월을 바라다보 고 있음을 발견했다. 검은 야행의(夜行衣)에 창백한 얼굴의 사나이. 약간 왜소해 보이 는 몸과는 달리 그의 눈은 칼날같은 예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사나이도 주화룡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천천히 고개를 돌리 며 싱긋 웃었다. 주화룡도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 “...........” 주화룡은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웃고 있었지만 그것은 비웃음이라는 것을……. 쥐를 바라다보는 고양이의 웃음 과 같은 것이었다. 주화룡은 아무런 내색 없이 고개를 돌려 달을 바라다보았다. “달이 참으로 밝구려.” 그러자 흑의 야행의를 걸친 사나이가 무심히 대답했다. “아니오. 달은 밝지 않소. 그래서 달 인거요. 결코 태양이 될 수 없지.” “그렇지. 태양보다 밝지는 않지……. 하지만 별보다야 밝지요. 달 은 충분히 밝소.” 그는 뜻밖이라는 눈으로 주화룡을 바라보았다. 그는 불구자의 몸 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이 세상에 낙관적이 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며 사는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 는 지금까지의 비웃음을 지우고 새삼스럽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시오. 본인은 연삼랑(嚥三郞)이오. 귀하는 주화룡이라는 분이시지요?” 주화룡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반갑소. 틀림없는 주화룡이오. 귀하는 청월등천유일살(淸月登天 唯一殺), 청월검객(淸月劍客)이 아니요?” “어? 귀하는 원래부터 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군.” 주화룡은 담담히 말했다. “대명이 자자한 청월검객을 어찌 모르겠소? 하나의 달에 하나의 목숨을 취한다는.......본인을 찾아온 목적은 달이 떴기 때문이오?” “그렇소. 달이 떴기 때문이지. 이제 당신의 목숨만 취하면 되오. 많은 협조 부탁하오.” 그의 협조라는 말에 주화룡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나의 목이 필요한 사람은 당신 뿐만은 아니지. 하지만 달 밝은 밤, 나의 목을 취하기에는 당신의 대명은 너무나 높은 게 아니 요?” 주화룡의 말은 당당히 무림에 위명을 떨치는 자가 어찌 이름도 없으며 불구자인 자신을 죽이려 하는가하는 놀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놀림에도 불구하고 연삼랑은 담담하게 말했다. “달 밝은 밤, 그대의 목숨을 취하기에는 삼천 냥이라는 돈은 결 코 적다고 할 수 없지.” 주화룡은 그제야 연삼랑과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며 사부가 고용 한 살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번에는 주화룡의 얼굴에 비웃음 이 떠올랐다. 그는 마치 한 마리의 벌레를 보는듯한 시선으로 그 에게 말했다. “당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감추기에는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액 수구려. 당신은 거지인가?” 순간, 연삼랑의 얼굴이 싸늘히 식어버렸다. 그는 냉랭하기 그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화나게 만들 목적으로 말한 것이라면 당신은 성공했어!” 그의 말이 끝나자 말자 그의 팔이 번뜩였으며 검은 이미 검집에 서 뽑혀져 나와 주화룡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쉬익! 과연 청월등천유일살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그의 검은 쾌속했으 며 날카로웠다. 하지만 최고의 검법이라고 불릴 수는 없었다. 그 는 분노했으며 상대를 너무나 과소평가했기에 전력을 기울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주화룡의 표정에서 언뜻 미소가 어리더니 쓰러지듯 허리를 숙였 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소매에서 창! 하는 맑은 금 속성과 함께 강렬한 검광이 흘러나오며 연삼람의 목으로 지쳐 들 어갔다. 연삼랑의 검은 확실히 빠른 것이었고 주화룡보다 먼저 공격을 하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와는 상반된 것이었다. 그의 검은 주화룡의 어깨 사이로 빗나가 있었고 주화룡의 손에 는 조그마한 소검이 쥐여져 있었으며 연삼랑의 목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연삼랑은 믿을 수없다는 듯이 주화룡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의 목에 검이 박혀있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주화룡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담 담하게 말했다. “사람들은 내가 육합문의 대사형(大師兄)인 것을 알지만, 곤륜 주 가장(周家莊)의 대공자(大公子)인 것은 알지는 못하지. 사람들은 청월검객의 검이 빠르다고 알고 있으나 주가장의 탈혼십이검은 그보다 빠르다는 것은 알지 못하지.” 순간 연삼랑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나를 향한 당신의 비웃음을 보았소. 당신은 내가 주가장의 사람 임을 진작 알았더라면 결코 그런 웃음을 짓지 않았을 것이며 방 심하지도 않았을 거요. 그렇다면 결과는 이와 반대가 되었겠 지……. 한 푼의 돈에 사람목숨을 취하려는 당신 같은 사람은 죽 어 마땅하오!” 그제야 연삼랑은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상대를 과소평가했으며 그 때문에 이성을 잃고 분노 한 것이었다. 연삼랑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뒤로 쓰러지고 말았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목에서 붉은 혈화가 무럭무럭 피어나오기 시작했다. 주화룡은 한숨을 내쉬며 부릅떠진 그의 두 눈을 쓸어 감겨주었다. 죽은 자는 당연히 두 눈을 감아야 한다. 두 눈이 감겨있지 못하면 죽어서 구천에 떠돌 뿐 천상으로 오르 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화룡은 일어나 다시 만월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한탄어린 목 소리로 염원하듯 말했다. “사제……. 죽음의 손길은 시시각각 다가오건만 자네는 지금 무 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 "이미 전설이 되었다는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백리향은 너무 성급하게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팔 수라귀의 정체일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장백산(長白山) 기슭에 웅족(熊族)이라는 부족이 있었다고 하더 군요. 아마도 젊은이가 본 것은 마면이 아니라 곰의 가면이었을 것이요. 그리고 양쪽의 뿔은 귀였을 것이고……. 모두들 활에 능 하고 말을 다루는 기술이 특히 뛰어나다고 합디다. 사람들은 호기 롭고 새의 깃털을 장식하고 다니지요. 음주가무를 즐기고 사냥을 통해서 먹고사는데 옛날 삼황시대 이전부터 존재했던 부족이라 고 합디다.” 백리향으로서도 그런 부족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 다. 산해경(山海經)이라든가 우본기(禹本記)등의 수많은 신화적 지리서를 읽어보았어도 웅족에 대한 글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 다. “그 옛날 몽고군은 중원을 차지하고 주변의 소국들에게도 침략 을 감행했는데 고려(高麗)라는 나라만큼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지 요. 장장 40여 년의 전투 끝에 결국은 고려의 항복을 받아내고 말 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오. 장백산 기슭의 웅족이 반기를 들고일어난 것이지요. 몽고군은 중원인들을 앞세워 그 들을 소탕 하려 했지만 그들의 저항이 어찌나 거세든지 삼천 여명으로 이루 어진 웅족이 십만의 대군에도 끄덕도 안 했다니 얼마나 용맹한 부족입니까? 후에 세조(世祖=쿠빌라이 칸. 원나라의 초대황제)께 서 직접 명령하여 끝내는 섬멸할 수 있었는데. 장장 십여 년간의 항쟁이었지요.” “아! 정말이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상에 그렇게 오래되고 용맹 한 부족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백리향의 놀랍다는 표정에 노인은 싱긋 웃으며 더욱 열변을 토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복당하자 모두 모두 오체분시 당하고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가 조각내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 다. 정말이지 끔찍한 종말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백성들 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용맹성을 반이라도 있었다면 지금처럼 몽 고의 지배를 받지 않아도 될 것이요. 휴~" “.........!” *** 달이 환하게 웃었다. 환하게 웃는 달이 흔들린다. 그러고 보니 달 뿐만 아니라 온 천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강백지는 자신이 취한 것이 아니라면 세상이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흔들리는 것 일까? 어, 어, 세상이 쓰러진다......! 쿵! 어이쿠! 머리야. 세상이 쓰러진 것이 아니고 내가 쓰러진 것이었 군! 빌어먹을! 큭큭큭! 그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리며 힘겹게 일어나 다시 걷기 시작 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몹시 불안하였으며 위태로워 보였다. 삼보를 전진하면 이보를 후퇴하였으며 좌로 삼보를 걸으면 다 시 우로 삼보를 걸었다. 문득 하나의 벽이 그를 가로막았다. 강백 지는 벽을 더듬거리며 문을 찾기 위해 한 참을 걸었다. 하지만 아 무리 더듬거려도 도통 문은 나오지 않았다. 그가 거대한 느티나무를 더듬거리며 빙빙 돌고 있었음을 안 것 은 한 참후의 일이었다. *** 백리향은 어떠한 알 수 없는 열기가 자신을 휩싸여 감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 당시의 수많은 죽음이 눈에 보이는 듯 하였으 며, 아비규환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백리향은 숨을 깊게 내쉬 며 자신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지만, 그리 고 역사에도 남아 있지 않은 전설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 실이라고 믿고 있소. 왜냐하면 그 전쟁에 참가했던 나의 친구가 해준 말이기 때문이요. 그 당시에는 그러한 말조차 꺼내는 것은 멸족에 해당하는 벌이었소. 하지만 친구는 너무나도 괴롭고, 지치 고, 힘든 나머지 나에게 이런 말을 합디다. 그들을 소탕하고 나자 모두들 미친 듯이 행동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광기가 얼마나 무 서운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이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지만, 그 친구는 그 당 시 그들과 같이 동조한 행동 때문에 평생을 술로서 지내야 했다 오." 노인 또한 전율을 느꼈는지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면서 다시 말 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 친구 말에 의하면 그들이 곰의 가면을 쓰고 머리에는 깃털 장식을 하고 말들을 몰아치며 나타나면 수만의 군사는 아무도 진 격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고 하오. 그들이 지나가면 길을 비켜주 고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바빴다고…….그 용맹함을 미루어 짐 작할 만하지요." 백리향은 노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부족이었다. 그러한 위대 한 역사가 어째서 감추어 질 수 있었을까? 어째서 그 전쟁에 참여 한 사람들조차 쉬쉬하며 살았을까? 그것은 그들이 웅족에게 자행 한 만행이 너무나도 끔찍하여 쉬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 까? 위대한 왕국을 건설한 몽고군도 고려를 정복하는데 40년이 란 세월이 지나야 했다. 그리고 원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형성시 킨 세조 또한 같은 뿌리를 둔 웅족을 섬멸하는데 십년이라는 세 월을 보내야 했다.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이 아닐까? 백리향은 포노인과 작별을 고하고 천막을 벗어나 교교로운 달빛 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분출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은 자신의 목구멍으로 순식간에 터 져 나오고 말았다. "으! 아아아아!" ***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어린시절로 돌아가 맨 처음부터 다시 시작 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것은 주화룡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 만 그것은 천지가 뒤바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화룡은 자신의 소중한 삶을 이따위 부질없는 생각으로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더 많은 사람이었 다. 지금까지의 삶은 과거였다면 앞으로의 삶은 미래였다. 그는 새로운 삶을 통해 새롭게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미래를 찬란하게 꾸며나갈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 명경지수와도 같이 맑아 있었다. 자신 은 야망과 욕망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고, 조급함과 편협함에서 그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규칙적이지 못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주화룡은 은근히 긴장을 하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잠 시 후, 주렴이 걷히고 하나의 인형이 방으로 들어섰다. 바로 강백 지였다. 그는 몹시 취한 듯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었으며 강한 술 냄새가 풍겨와 주화룡의 코를 자극시켰다. 주화룡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후후! 자네 많이 취하였군." 강백지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비틀 거리며 걸어 왔다. 그러다 주화룡 바로 앞에서 다리가 풀린 듯 풀 썩하고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주화룡은 깜짝 놀라며 팔을 뻗어 그를 부축하였다. 강백지는 허 우적거리듯 주화룡의 팔을 잡았다. "괜찮으신가? 자네답지 않게 술을 과하게 마신 게로군." 주화룡의 걱정스런 질문에 돌아온 것은 감사의 말이 아니라 시퍼 런 단도였다. "헉!" 그는 헛바람을 내뱉으며 몸을 피하려 하였지만, 이미 그에게 팔 이 붙잡혀있었으며 소매 속에 숨어있는 소검조차 격발시킬 수 없 었다. "크윽!!" 그는 자신의 하복부에 화끈한 통증을 느끼며 기이한 눈빛으로 그 를 바라보았다. "왜....?" 주화룡의 질문에 그는 단도를 한 번 더 깊숙이 찔러 넣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커억!" 창자가 가닥가닥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지만, 그의 얼굴에서 시선 을 떼어놓지는 않았다. 주화룡의 두 눈은 계속해서 강백지에게 묻 고 있었다. 꼭 이래야 했냐고……. 이럴 수밖에 없었냐고....... 강백지의 얼굴은 어느 사이에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주화룡만큼이나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며, 아픔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나, 난……. 당신을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고 있었습 니다. 하, 하지만,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사부님의 말을 거 역할 수가......" 그제야 주화룡은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백지가 이런 행동을 하지않으면 안 되는 사실을.....그는 고아로 어려서 부터 사부의 손에 길러진 제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사부는 아버지 이상의 존재 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불쌍한 녀석!' 주화룡은 팔을 뻗어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미소로 그의 슬픔을 해소시키려 했 지만, 자신의 입 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점점 자신의 신경이 죽 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주화룡은 자신의 몸에서 사그라지어가는 마지막 한줌의 공력과 한모금의 숨을 아껴서 입술을 움직이는데 사용하였다. "용서....한...다." 그 말을 끝으로 그의 팔이 축 늘어졌다. 그는 죽으면서도 못내 아 쉬웠다. 백리향에게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한 것이 말이다. 하지 만 그 사람이라면...그 사람이라면.... 자신의 무례를 이해하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백지는 무릎을 꿇고 한 참이나 오열을 터트렸다. 그의 눈물은 평생을 흘려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으며 죄책감과 번뇌는 평생토 록 없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자 그제야 주화룡 의 주검 앞에 대례를 올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리고 그의 발 걸음은 더 이상 비틀거리지 않았다. 제 십장 夜雨聞鈴腸斷聲(야우문령장단성) 비 오는밤 방울소리에 끊어지는 듯한 단장의 슬픔 이튿날 육합문은 거대한 폭풍이 한 바탕 휩쓸고 간 듯 혼란스럽 기 그지 없었다. 주화룡의 죽음! 그것은 경악이었으며 충격이었 다. 그의 죽음을 들은 전노인은 그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탈색되었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화룡은 전노인이 오랫동안 모셔오던 주인이었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을 것이다. 백리향 또한 전노인을 위로하는 한 편,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놀라 움을 감추지 못하였다. 주화룡이 자살을 하였다니……. 몇 일전 에 만나보았던 주화룡은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모습이기도 하였 으나 거대한 불씨를 품은 숨은 잠룡의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주화룡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수 있으리라 확신 했었다. 그런 그가 자살을 하다니……. 도데체 몆 일 사이에 주화룡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자신 이 천태현 시내에 있었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었 을까? 그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단지 관만 보았 으며 위패를 보았으며 향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화룡의 죽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주위의 정황적인 상황은 그가 자살하기에는 충분한 요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뇌리속에 있는 주화룡(周華龍)은 기재중의 기재였으 며 용중의 용의 모습이었다. 육합문의 모든 제자들은 그의 늠름 한 모습과 기백, 너그러움을 존경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주화룡 은 우상이었으며 영웅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야만 그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야만 그 인품 이 드러난다. 그가 죽기 전 수많은 헛소문이 있었지만, 주화룡의 죽음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으며 그 어떠한 것도 그 의 인품을 흩트리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자 들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육합문의 모든 문 도들 사이에 파장이 일듯 누구 나가 머리에 흰 띠를 두르기 시작 했다. 비록 육합문주 장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소 견을 따랐으며 아무도 그들을 막지 못하였다. *** 가느다란 세우(細雨)가 아무런 소리 없이 곤륜산하(崑崙山下)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 주가장에 마령(馬鈴= 말의 목에 달 린 방울)소리가 스산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주화룡이 죽은 지 십 여 일이 되어서야 그의 관이 마차로 인도된 것이었다. 주가장의 사람들은 그 즉시 신발을 벗고 맨발로 그 관을 맞아들 였다. 그리고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그 관 앞에 엎드렸다. 주가장의 장주인 주정천(周頂天)은 아들의 열정 어린 눈빛에서 주가장의 영광을, 위대한 무인의 모습을, 다음 육합문을 짊어지 고 나갈 장문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들을 누구보다도 사랑 했으며, 그리고 아낌없는 애정을 베풀었다. 그런 그가 싸늘한 시 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었다. 주가장의 미래가 죽었으며, 자신의 절대적인 사랑이 죽은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누워있을 관을 붙잡고 오열을 터트리기 시작 했다. 그 관속에는 자신의 모든 것이 있었고, 절대적인 사랑이 싸 늘히 굳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슬퍼한 사람은 그의 동생인 주화운(周 華雲)이었다. 그는 언제나 형을 자랑스러워했다. 어려서는 형처 럼 되고 싶어 했고, 커서는 형처럼 될 수 있었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도 겸손했으며,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도 냉정했으며, 총명 함을 지니고서도 그것을 자랑하지 않았다. 언젠가 주가장의 아들 로서, 육합문의 대제자로서 무림에 우뚝 서는 그 날까지 형의 그 림자가 되리라! 하지만 자신의 자랑인 형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주화운은 형의 관을 바라보며 애검인 용호(龍虎)를 쓰다듬고 있 었다. 언젠가 이 검으로 원수를 갚겠다는 그의 굳은 신념은 깊은 슬픔을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그의 복수심은 주화룡의 죽음보다 강했다. 검과 창이 아닌 편견(偏見)과 아집(我執)으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 수 있을까? 백우산이 백리향에 대하여 아무런 편견이 없었다면……. 백우산 이 스스로의 고집에 의존하지 않고 주화룡의 명령에 따라주었다 면....... 결코 이와 같은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결 국 백우산의 편견과 아집은 자신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은 주화룡을 죽음으로 내몰았던것이 었다. 백우산은 주화룡의 관 앞에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어리석 음을 통탄해 했으며,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에 참담함을 느꼈다. 백우산이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복수 밖에 없 었다. 그 복수를 위해서 아집과 편견에 대한 반성을 잠시 미루기 로 하였다. 자신의 복수가 끝나는 날! 자결로서 자신의 실수를 반 성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주정천은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배고프 고 헐벗은 사람에게 식량과 의복을 주었으며 어려운 곤경에 빠 진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주가장에는 항 상 손님이 끊이질 않았으며 주정천은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차 별 없이 극진히 보살펴 주었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활선인(活仙 人)이라고 불렀으며 존경하고 복종했다. 주가장은 언제나 활기로 넘쳐나는 곳이었지만, 주화룡의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그라지고 있었다. 주가장은 더 이상 손님을 받 지 않았다. 그리고 머물러 있던 식객들조차 보내어 버렸으며 그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주정천은 지나친 슬픔으로 피폐해진 모습으로 주화운을 바라보 며 말했다. "화운아. 부디 이 아비의 한을 풀어다오. 너의 형을 죽음으로 이 끈 자들에게 똑같은 아픔을 느끼게끔 해다오. 그리하여 그들에게 아들을 잃은 아비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느끼게 해다오." "아, 아버지……." 주화운은 아버지의 초췌해진 모습을 통해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형을 사랑했으며 그 또한 형을 사랑했다. 하 지만,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린 고통은 자신보다는 아버지가 더욱 크셨으리라! "아버지! 약속드립니다. 그들에게 소자의 아픔이……. 아버지의 고 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어질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가 장에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며, 아버지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주정천 그의 눈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결코 자식을 잘 못 기르지 않았음을 느꼈고 그런 자신의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 운 것이다. "화운아!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들에게 이 아비가 느 낀 고통을 백배로 돌려주어라. 그리하여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어라. 지금 떠나라! 하루빨리 그들에게 고통을 선사하여 주어 라!" 주화운은 아버지의 말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말보다는 행동이 중 요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슴없이 일어 나 아버지에게 대례를 올린 후 당당히 걸어 나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나갈 때였다. 그의 귓가로 아버지의 가느다란 음성이 들려 왔다. "화운아! 네가 자랑스럽다. 그리고 화룡이 만큼 널 사랑한단다." 물론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한 마디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아버 지……. 소자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주화운은 아무런 말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갔다. 자신의 속마음은 복수가 끝난 후 표현해도 늦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는 그렇게 주가장을 떠났으며 부친 곁을 떠났다. 주화운은 주가장을 나선 후 곧장 형의 묘소로 향했다. 어느덧 해 는 뉘엿뉘엿 지려하고 있었으며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 리지 않았다. 주화룡의 묘소에는 이미 백우산이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는 아 직 상복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주화운은 그에게 다가가 공수를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 곳까지 오시게 하여 송구스럽습니다.” 백우산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주가장을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사형을 뵈올려고 했습니다. 너 무 괘념치 마십시오.” 주화운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장읍을 취하 며 말했다. "백형(百兄)의 진실 된 말씀으로 저희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습 니다. 그 점 널리 감사드립니다." 주화운은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하였다. 그러자 백우 산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저로서는 주형의 예를 받을 수 없는 몸입니다. 부디 거두어 주십 시오." 주화운은 당황스러워하는 백우산을 바라보며 웃었다. "후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는 곧 차가운 안색으로 얼굴을 바꾸며 말했다. “하지만 소제는 백형의 죄 또한 묻고자 합니다." "그, 그것이 무슨……." 주화운은 지금까지의 예의바른 말투에서 벗어나 위엄 있고 당당 한 목소리로 꾸짖듯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형님의 말을 무시하시었소? 육합문과 본가(本 家)의 거리는 이틀을 꼬박 달려야 하는 거리요. 형님께서 본가보 다 백리향이란 분을 찾은 것은 그만큼 급박했기 때문일 것이요. 그런데도 형님의 뜻을 져버리고 본가로 향하였다니……. 당신은 정말로 멍청하오! " "......!" “형님은 충분히 한 몸을 지키실만한 무공과 지략을 지니고 계신 분이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향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 할 정도라면 얼마나 급박한 상황인지 계산해 보지 않으셨소?” “그, 그것은.....” 주화운은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은 전쟁을 원치 않으셨지만 형님의 죽음과 관계된 모든 자 는 커다란 고통을 당하게 될 거요. 그것은 당신도 예외일수 없소!" ".....!" 순간, 백우산의 눈이 역팔자로 올라갔다. 주화운의 지나친 발언 이 그를 분노케 한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줄 아는 사나이였으며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잘 아는 사나이였다. 그 는 치솟아 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 맞소. 사형은 소생의 어리석음에 해를 입으셨지요. 인정하 오. 사형의 복수를 끝낸 후 무덤 앞에서 자결함으로서 죄를 씻겠 소." "안되오! 당신은 그렇게 편하게 죽을 수 없소." ".....!" 백우산은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질 않았다. 방법이 잘못되었을 뿐 자신은 사형을 위해 헌신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억울하였으며 그만큼 분노도 컸다. "당신……. 당신! 정말로 너무 하지 않은가!! " 그러자 주화운을 피식웃으며 말했다. "왜? 억울하오? 나는 당신의 싸구려 감정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소! 단지 결과만이 중요할 뿐이지. 당신의 어리석음이 형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으며, 그 때문에 당신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어야 마땅하다는 것이지.장담하건데 당신은 죽지도 살지 도 못하게 될거요." 백우산은 이를 부드득 갈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결과라고? 오냐! 이 검으로 결과를 말해 보자!" 주화운은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백우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자신의 비천한 능력에 비해 너무 자신만만한 게 아니 오? 내가 보기에 당신은 검으로 결과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오." 그러자 백우산은 괴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흐흐! 건방진 것! 사형조차 나와의 비무(比武)에서는 평수를 이루 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주화운은 팔짱을 끼며 비웃음을 터트렸다. "후후! 형님은 원래 겸손하신 분이요. 형님께서 양보한 것이지 당 신의 검이 뛰어난 것은 아니오. 그러지 말고 검을 휘둘러 확인해 보시구려." 백우산은 울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는지 버럭 고함을 질렀 다. "주가장의 개새끼들은 어떤지 모르나 육합문의 제자는 무기를 들 지 않은 자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는다! 검을 뽑아라!" "하하하! 주가장의 개들조차 당신보다 검술이 뛰어나오. 그리고 주가장의 사람들은 벌레를 잡는데 검을 사용하지는 않는다오. 그 러니 안심하고 덤비시오." 백우산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본 래 일류의 검도를 지닌 자는 결코 노하지 않는 법이며, 검을 아 는 자는 상대를 하나의 상대로 취급하지 않는 법이다. 백우산은 이성보다는 감정이 앞서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검 또한 그랬다. 그러나 주화운은 검을 아는 자로서 상대를 상대로 취급하지 않음 으로서 이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으아아아!구성점멸(九星點滅)!" 백우산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괴성을 터트리며 뛰어올랐다. 하지 만 그의 검은 성급했으며, 감정이 실려 둔탁했다. 구성점멸은 단 한번의 도약으로 상대의 가슴에 아홉 군데의 혈을 점하는 수법이 었다. 하지만 그는 다섯 번을 점하는데 그쳤을 뿐만 아니라 그 조 차도 주화운의 구중연환벽(九重連環壁)이라는 수비자세에 막혀 버리고 말았다. 주화운은 백우산의 공세를 막는 한 편, 몸을 회전시켜 등선선풍 권(登仙旋風拳)이라는 평범한 초식으로 그의 안면을 공격하였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백우산은 입에서 피 분수를 내 쏟으 며, 저 멀리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크억!!" 주화운은 다시 팔짱을 끼고는 어슬렁어슬렁 쓰러진 백우산에게 다가갔다. 백우산의 입은 뭉개져 있었으며 쉴 새 없이 피를 쏟아 내고 있었다. "후후! 내가 뭐라고 했소. 당신은 아직 이르오." "크윽! 인정 할 수 없다. 절대로 인정 할 수 없다!"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백우산은 너무나 억울했다. 감정에 휘말려 자신의 능력을 반도 채 펼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만약에 자신이 감정에 휩쓸리지 않았으면 이렇게 어이없는 패배는 당하지 않았 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주화운의 언변에 이성을 잃었으며 그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 다. 그는 단 한 주먹에 패배를 당햇으며 죽음보다 더한 수치였다. "역시.... 이 번에도 당신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는군.쯧쯧! 이보시오. 백우산. 본래 영웅은 사람을 속이 는 법이라오. 영웅은 재지와 술책, 그리고 교묘한 언변으로서 사 람의 의표를 찌르는 행위가 많지요. 너무 억울해하지 마시구려. 후후후!" "너, 너 놈은 영웅이 아니다! 퉷!" 백우산은 자신의 입안에 고여 있는 핏덩이와 이빨조각을 주 화 운에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핏덩이는 주화운의 재빠른 몸놀림 에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당신이 멍청한 것만큼은 불변하오. 하하하!" 주화운은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약간 숙이며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시오. 백우산! 나의 세 치의 혀가 아닐지라도 당신은 나의 적수가 될 수 없소. 삶이란 이런 것이요. 한 번 놓치면 다시는 되 돌릴 수가 없지요. 마치 당신의 다리처럼 말이오." 주화운은 천근추(千斤墜)의 수법으로 백우산의 오른쪽 다리를 밟아버렸다. 우두둑!!! "크아악!!" 백우산은 자신의 오른쪽 다리가 짓이겨지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절규를 터트렸다. 주화운은 백우산의 고통스런 몸부림에 아랑곳 없이 다시 한번 왼쪽다리를 밟아버렸다. 우두둑!!! 하지만 더 이상 백우산의 비명은 없었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기절하고 만 것이다. 이제 그는 평생 두 다리를 사용할 일은 없 을 것이다. 모든 일을 앉아서 해야 할 것이며, 그 만큼 그의 시선 은 낮은 곳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주화운은 한 참이나 백우산의 모습을 바라다본 후 어눌한 어조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자들은 들어오너라!" 그러자 약속이라도 되어 있다는 듯이 다섯 명의 무사들이 주위 의 숲을 헤치며 나타났다. "형님의 무덤 옆에 초가(草家)를 지어라 그리고 이 자를 그 속에 가두어 평생을 형님의 묘소를 지키게 하여라. 그리고 죽지 않을 만큼의 음식을 주어라. 만약 형님의 묘소를 지킴에 있어 약간의 게으름이라도 보인다면 열대의 곤장으로 죄를 다스려라. 자살을 하고자 한다면 스무 대의 곤장으로 벌하여라. 그리하여 평생을 죽 지도 살지도 못하게 하여라." "대공자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다섯 명의 장한은 백 우산을 들쳐 메고 유유히 사라졌다. 그들 이 모두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주 화운은 한 동안 꿈쩍 할 수 없 었다. 대공자? 내가 대공자? 아! 그렇지. 형님은 돌아가셨지. 자꾸만 잊어버린다. 형님이 돌아가셨음을.... 지금이라도 형님께서 나의 어깨를 치며 껄껄껄 웃을 것만 같은데. 돌아가셨다니.... 아직까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주 화운은 하늘을 우러러 장탄식을 터트렸다. "아! 형님....소제는 형님처럼 될 수 없나 봅니다. 형님은 적에게 너 그러우셨고 아량을 베풀었지만, 소제는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하 겠습니다. 형님은 슬플 때는 껄껄껄 웃으셨고, 기쁠 때는 도리어 걱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소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습니다. 치밀 어 오르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겠으며, 피어오르는 살심을 억누 르지 못하겠습니다. 형님은 아셨어야 했습니다. 죽음이란 형님 개인의 것이 아니었음 을.....형님의 죽음으로 소제와 아버지의 정신은 날로 피폐해져 가 고 있으며 덩달아 수많은 인생들도 망가져 가고 있음을.....아셨어 야 했습니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은 죽은 자의 고통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아 셨어야 했습니다." 주화운의 그림자가 옆으로 길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양 이 서산너머로 사라지고 그림자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두 운 밤이 다가와서도 주 화운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는 그렇게 얼 어붙은 듯 그 자리에 있었다. 제 십일장 今日殘花昨日開(금일잔화작일개) 오늘 지는 꽃도 어제 핀 꽃일 뿐. 만남의 기쁨이 있으면 반드시 이별의 슬픔이 뒤 따른다. 그러므 로 별로 반갑지 않은 만남일지라도 슬퍼할 필요는 없다. 반드시 반가운 이별은 있게 마련이므로……. 이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이 별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이며 그 누구도 어길 수 없 다. 그러나 유쾌한 만남이든, 불쾌한 만남이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은 중요한 일이며 소중한 인연인 것이다. 길을 걷다가, 또는 잠을 청하려할 때 문득 아련히 떠오르는 얼굴 들……. 그것이 반가운 얼굴이 아닐지라도 그를 기억하고 떠올린 다면 상대방도 언젠가는 자신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자신의 백 년도 채 못 되는 짧은 생애를 누군가가 한 번쯤 기억해 준다고 생 각하면 결코 나쁜 인연이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양정과 백리향도 언제나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었 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짧고 즐거운 만남보다는 길고 아름다 운 작별을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삶의 경험 과 깨달음으로서 얻어지는 교훈과도 같은 것이다. 특히 양정은 말 년의 노인으로서 인연의 중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비 록 짧은 만남의 긴 이별이 될 것이지만 담담히 받아들였으며 소 중하게 여겼다. 양정은 본래 휘주부(徽州府) 휴녕현(休寧縣) 손전향(蓀田鄕)사람 으로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휘주부에는 수많은 세가(勢 家)와 명망 있는 가문이 많은 곳이지만 그 중 상산(常山)의 양가 (楊家)는 휘주부 오대세가의 하나로 당당히 위세를 떨치고 있었 다. 한 때 몰락했던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양정은 수없이 많은 혈전을 치러야 했으며 투쟁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 구도 넘볼 수 없는 아성을 이루었으며 이전의 양가보다 더욱 위 세를 떨치고 있었다. 이제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막역지우인 장양 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다가 예상치 못한 일로 오랫동안 머물게 되었지만, 그는 언제나 집안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할 때가 많았 다. 이미 몸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고 주화룡의 관도 주 가장으로 인도되어진지도 오래였다. 이제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많은 없는 것이다. 양정은 백리향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 동안 백리공자와의 인연. 내 마음속에 고이 담아 가리다.” 그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고 이별을 진 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는 듯 했다. 백리향도 그의 손을 흔들며 작별을 아쉬워했다. “조심해 가십시오. 휘주부까지는 먼 길입니다.” “상산으로 한 번 놀러 오시구려. 상산은 가을의 풍경이 몹시 아름 답지요. 공자께서 오실 때까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겠소.” “아! 말씀만으로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꼭 찾아뵈오리다.” 양정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백리향도 웃었다. 양정의 뒤편으로 양소교와 오고산, 안유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 또한 서운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으며 진심으로 작별을 슬퍼 하고 있었다. 백리향은 그들을 멀리 까지 배웅하고 싶었지만. 장양이 그들을 배웅하기로 한 이상 육합문을 비울 수가 없었다. 양정 일행이 육 합문을 떠나 그 모습이 아련해 보일 때까지 지켜보다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만서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가을은 성큼 다가와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백리 향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푸른 가을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송이 처럼 새하얀 구름이 저 멀리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주화룡의 관이 주가장으로 인도 된지도 보름이 흘렀다. 인생은 마치 아침이슬과 같아 태양이 뜨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다. 그 옛날 천군만마를 호령하며 천하를 평정한 진시황(秦始皇) 도, 그를 죽이려했던 자객 형가(刑家)도 지금은 한줌의 흙일뿐이 다. 본래가 청산(靑山)은 움직이지 않는데 구름이 오갈뿐이며, 자 연만물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나고, 죽는 것뿐이다. 백리향은 황량한 가을의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도 가을 과 같구나하고 느꼈다. 구름이 둥실 흘러가듯 그도 저렇게 흘러가 고 싶었다. 그는 육합문을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진리 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자(求道者)로서 그동안 너무 안락한 생활 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육합문을 벗어나 더 넓은 세상에 나아가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기며 수많은 진리들을 깨우치기를 바랐고, 그것은 사부의 염원이기도 했다. 이제 스승이 걸었던 길을 자신 도 서서히 더듬어 밟고자 하는 것이다. 육합문을 떠남에 있어 미련은 없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주화룡의 의혹 많은 죽음 뿐……. 백리향은 더 이상 그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은 의혹으로 가 득 차 있으며 주화룡은 수많은 죽음 중에 하나 일뿐이다. 그 어 느 죽음인들 안타깝지 않으며 슬프지 않겠는가? 백리향은 하늘에서 시선을 거두고 만서각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 무나 짧은 인연이라 그런지 삭막하고 허허로워 보였다. 그는 문 득 이곳에 꽃을 심으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울러 채소 도 같이 심어놓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신이 육합문을 떠나더라 도 꽃은 삭막한 이곳의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이고 채소는 사람들의 입을 즐겁게 할 것이다. 토양도 좋아 어쩌면 기대 이상 의 수확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유달리 꽃을 좋아했으며 난(蘭)을 사랑했다. 아니, 무엇이 든 생명을 가꾸기를 좋아해 백가촌에서 홀로 농사를 지었으며, 채 소를 심었고, 나무를 가꾸었다. 그는 부서관인 나관중에게 곡괭이 한 자루를 주문하였다. 나관중 은 항상 백리향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그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소 엉뚱한 주문이기는 하였으나 아무런 말없이 잡방(雜房=지금의 창고)에 들어가 곡괭이 한 자루를 가져 다주었다. 백리향은 그에게 곡괭이를 넘겨받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고 땅이 여물지 않고 잡초가 무성히 자란 곳을 정하여 땅을 파헤 치기 시작했다. 나관중은 묵묵히 백리향의 행동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는 항 상 조용하며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지극히 평 범한 외모를 지닌 보통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며 간혹 엉뚱하여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솔 직히 곡괭이를 들고 다짜고짜 만서각 주위의 땅을 파헤치기 시작 하는 그를 어찌 평범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지라도 아무도 백리향을 싫어하지 않았다. 도리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와 친 구가 되고 싶어 하였으며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백리향 또한 누구든 친구로 여겼으며 대화를 걸어오는 자들을 결코 거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의 높으신 분들은 서관을 그리 좋은 눈으로 바라보 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절대로 노비라고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 며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 하여 존경을 표하지도 않았다. 봉건주의 사회에서 그러한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평등이란 봉건사회의 몰락을 의미하므로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백리향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 면서도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는 아마 그러한 특별한 행동 때문일지 모른다. 나관중은 문득 그의 행동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도대체 땅을 파헤쳐 무엇을 찾고자 하는 것일까? 또는 무엇을 얻고자 함 일까? 지금의 그가 하는 행동은 지금까지 보여 온 기이한 행동 중 에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한참이나 지켜보더니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백리향에게 물었다. “저.... 서관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땅을 일구고 있지요.” “..........” 나관중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거창한 생각과는 달리 백리 향은 이곳에 땅을 일구려 하는 것이다. 한 참후 다시 그에게 물었 다. “땅을 일구기에는 논과 밭만큼 좋은 곳은 없으며 책을 읽기에는 만서각만큼 좋은 곳은 없지요. 서관께서는 어찌 이곳에다 땅을 일 구려 하십니까?” 나관중의 말은 땅을 일구려면 논과 밭을 찾을 일이지 어찌 책을 읽는 만서각에 땅을 일구려하는가? 하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러 나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씨 뿌리고 수확하면 그곳이 논과 밭이고, 책한 권에 촛불하나면 그곳이 만서각인데 그 경계를 굳이 나눌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 까?” “...........” 나관중은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무책임 한 말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의 말은 한 사람을 두들겨 패놓고 맞는 것과 때리는 것은 경계가 없으니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하 고 우기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에 경계가 아닌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아버지 와 자식도 하나의 경계이며, 하늘과 땅도 하나의 경계이다. 남녀 가 구별되며, 음양이 나뉘고, 죽음과 삶이 다르거늘 어찌 경계가 없다고 한단 말인가? 나관중은 그의 말은 궤변(詭辯)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 경계가 없다면 어찌 법이 들어설 것이며 무엇을 기준으로 선악을 구별한 단 말인가? 나관중은 이러한 궤변에 답하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 했다. 그러나 백리향은 그의 마음이라도 읽고 있기라도 한 듯 곡괭이 질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은 참으로 애매모호하며 불가사의합니다. 거짓 속에도 항 상 진실은 숨어있으며, 실상처럼 보이나 허상이기도 하지요. 오늘 의 앙상히 가지만 남은 꽃들도 어제는 활짝 만개한 꽃이었지요. 어떤 모습이 꽃의 진면목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 집니다. 눈(眼) 을 뜰 때에는 모든 것이 명확하지만 눈을 감으면 오로지 암흑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도(道)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의심 을 합니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하여 싶게 판별해 낼 수 없기 때문이지요. 황금과 돌은 본래 같은 것인데 인간이 만 들어낸 기준으로 귀하고 천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에게 그러한 인지능력이 없다면 황금과 돌은 동등하게 여겨질 것입니 다. 이러한 애매모호한 세계가 현실의 세계이며 그렇기에 오로지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스스로를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문득 깨 달음을 얻고 세상을 바라보노라면 천하에 오로지 홀로 있음을 알 게 됩니다. 어느 곳에, 무슨 일을 하던 자신이 주(主)가 되면, 자신 이 서있는 곳이 바로 진(眞)이 되는 것이지요.” “.......!” 나관중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짜릿함! 백리향의 말에 자신의 신체가 어떻게 이리도 극심 한 반응을 일으키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상은 불가사의하며 애매모호하다. 진실도 없으며 거짓도 없 다. 진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도(道)이며, 도를 깨우친 사람은 세상의 주(主= 주체, 주인)가 되어 어느 곳 무슨 일을 하 던 진(眞= 진리)이 되는 것이라고 서관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관중은 어려서부터 항상 분별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 배웠다. 모든 사물은 확고부동하며 눈으로 보고 느낄 수 있어야 진실이 며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거짓이라고 배웠고 그것이 올바른 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리향은 이 세상은 확고부동하지 않으 며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순종을 배웠다. 어버이에 순종하고, 스승에게 순종하 고, 주군에게 순종하고....... 그것이 올바른 삶이라고 여겼다. 하지 만 백리향은 스스로에 순종하라고 말하고 있다. 나관중은 상당히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관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그러한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혹시 서관께서는 도를 얻으셨습니까?” 그러나 백리향에게서 어떠한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단지 그의 웃음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의 웃음은 어린아이의 웃음이었으며 그의 눈은 어린아이의 눈빛이었다. 나관중은 그의 두 눈에서 묘 한 충동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드넓고 푸른 바다를 보았을 때 그 속에 뛰어들고 싶다는 그런 충동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얼른 회피하고는 따지듯 물었다. “만약, 도를 얻은 자가 살인을 해도 그것이 진(眞)입니까?” “만약, 살인을 저지른 자가 도를 얻었다고 하면 그것은 믿겠습니 다만, 도를 얻은자가 살인을 했다면 그것은 도를 얻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나관중의 질문을 끊임없이 이어졌다. “도란 무엇입니까?” 하며 나관중이 물었다. 그러자 백리향은 아무런 말없이 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었다. 나 관중은 자신의 질문이 성급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질문을 달리해 서 물었다. “도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삼년유포(三年乳哺)나 구년면벽(九年面壁)이면 족합니다.” “..........” 말이 구년면벽이지 인간이 어찌 구년간 벽만 바라보며 살수 있 겠는가? 나관중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꼭 삼년동안 젖을 먹어야 하며 구년 동안 면벽수련을 해야 합니 까?” 그러자 백리향이 말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가운데 도를 깨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 번에는 어찌 그리 쉽습니까?” 백리향은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밥 먹고 배설하는 가운데 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 나관중은 서관이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 서는 도를 얻는 것이 어찌 이리도 어려울 수 있으며, 이 토록 쉬 울 수가 있으며, 더러울 수가........! 그는 순간 억! 하는 소리를 내 뱉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느낌이 그를 강하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알 듯 모를 듯, 있는 듯 없는 듯......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었지만 그는 무엇인가 느끼고는 있었다. 그러자 백리향이 미소를 베어문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확실 히 도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앞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한 것 이다. 그는 비록 도를 느꼈지만 느낌 정도로는 안 된다. 끊임없이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도의 발자취를 발견 할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은 이 정도에서 도를 얻은 듯 행동하지만 그것은 단 지 발자취일 뿐이다. 이 것을 가리켜 심마에 빠져든다고 한다. 그 심마를 이겨낸 사람은 드디어 도를 볼 것이다. 하지만 도란 천방 지축이라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도를 항 상 자신의 곁에 두고 다스려야 한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도를 즐기는 때가 오는 것이다. 항상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도를 잊어야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모든 것이 무일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 다음 경계인 참된 경지를 바라다 볼 수 있 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깨쳤다면 원래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이다. 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백리향의 스승인 여동빈은 이러한 경계조차 허물어트리고 육신까지 짊어질고 간 것이다. “곡괭이를 한 번 내려치고 들어올리는 순간에도 도를 깨칠 수가 있습니다. 서관께서도 땅을 일구어 보시렵니까?” 백리향의 말에 언뜻 정신을 차린 나관중은 무의식적으로 말했 다. “땅을 일군다구요?” “땅을 일군다는 것.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는 의미이지 요. 땅은 씨앗을 품고 그것을 생명으로 바꾸어 놓는답니다.” 나관중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어느덧 백리향의 행동에 비웃음을 던지던 그도 곡괭이질을 하 기 시작했다. 백리향만큼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그는 진지했 으며 결코 요령을 피우려 하지 않았다. 그는 백리향의 곡괭이질 을 배우려 노력했고 얼마 있지 않아 그는 제법 자세가 잡히기 시 작했다. 그는 아무런 의심도 없으며 잡념도 없이 오로지 곡괭이질 에만 열중했다. 어느덧 땅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이 백리향과 닮 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전염병이었다. 그의 눈을 보는 순간, 아니 그와 대 화를 나누는 순간 전염병처럼 그를 닮아가는 것이다. 자신이 그동 안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하찮게 느껴졌고, 하찮다고 느 꼈던 모든 것들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농사꾼이 땅을 일구는 것은 풍요로운 수확을 목적으로 하지만, 백리향과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소중한 것이다. 나관중 은 평생처음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노동을 해보았으며 타인을 위 해 아무런 보상 없이 곡괭이질을 해보았다. 어느덧 나관중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으며 힘든 줄 모르 고 두 시진이나 계속해서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백리향은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는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뜬금없는 말이 기는 하나 그의 목소리는 옛날이야기를 꺼내듯 편안하기 그지없 었다. “얼마 전 누군가가 소생을 독살하기 위해 찻주전자 속에 다량의 지령초를 집어넣은 적이 있었지요. 지령초는 아주 은은하고 일반 풀냄새와 비슷해 찻잎 속으로 녹아들지요. 특별한 능력이 없고서 는 감지해 내기 힘듭니다. 다행이 소생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으 며 찻주전자속의 지령초도 구별해 내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지 요. 그런데 부서관의 땀내음속에 지령초의 향기가 흘러나오는 것 은 어찌된 연유입니까?” “.........!” 순간, 나관중의 어깨가 움찔거렸으며 하마터면 곡괭이를 떨어트 릴 뻔 하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으며 아무렇지도 않다 는 듯이 여유 만만하게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말씀인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부서관께서는 서투른 곡괭이질에도 불구하고 벌써 두 시진 째 땅을 일구고 계십니다. 어찌 평범하다 하겠습니까? 필히 특별한 훈련을 받은 분이 틀림없습니다.” 나관중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단지……. 남과 달리 체력이 조금 강할 뿐이지요.”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소생은 오래전부터 부서관의 눈길이 저에게로 향해있음을 알 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나로서도 부서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본의 아니게 당신의 많은 부분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 정보를 은살막에 알렸겠지요? 소생은 당신이 비둘기를 키우고 있음을 압니다. 비둘기는 결코 애 완용 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 순간, 나관중의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무어라 말 을 하려 했지만 더 이상 아무런 말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의 놀람과 달리 백리향의 표정에는 여전히 미소가 어려 있었 다. “소생은 결코 부서관을 원망하고자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소생이 안타까운 것은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지식이 넘치시는 분 이 어찌 살수의 길로 접어드셨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소생은 당신 이 서적을 가까이 할 때, 두 눈이 열정으로 빛나고 있음을 보았습 니다. 간혹 멍한 시선으로 책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의 공허한 눈 길도 보았습니다. 이를 안타까워 드리는 말입니다.” “..........” 나관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一去手一鬪足)을 꿰뚫어 보고 있는 그에 게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정말이지 한 편의 희극이었 다. 자신은 완벽하다고 느꼈었는데 도리어 백리향에게 관찰당하 고 있었다니…….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면 얼마 전 지붕위에서 당신을 암살하려 암기를 던진 자 중에 나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겠군요.”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튿날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따라 부서관은 한 번도 의자에 일 어서려하지 않더군요. 아마 나에게 상처를 입어 절룩거리는 모습 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였겠지요?” 이번에는 나관중의 고개가 끄덕거렸다. “바로 보았습니다. 이튿날 만서각에 출근하지 않으면 도리어 의 심을 살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왜 지금까지 모른 채 잠자코 계셨소?” “당시에는 부서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지금도 부서관에 대하여 별로 아는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는 알게 되었지요. 당신은 결코 악인이 아닙니다.” “.......!” 백리향은 탄식하듯 말했다. “당신 같은 분이 어찌 살수가 되었는지 알 수 없군요.” 나관중의 얼굴에 고통이 스치듯 지나갔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살 아가는데 있어서 나름대로의 고통과 아픔을 짊어지고 산다. 그에 게도 떠올리기 싫은 과거가 있으며 그것은 타인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몰라도 되는 일도 있지요. 서관께서는 모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백리향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꼭 알아야 될 일이라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몰라도 될 일이라면 그 어떠한 방법을 써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미련 을 오래가지면 추하게 되는 법. 끊고 맺음은 확실한 것이 좋은 것 이다. 백리향은 더 이상 캐어물을 뜻이 없는 듯 아무런 미련 없이 다 시 곡괭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관중은 감탄할 수밖에 없 었다. 사나이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의 배포는 있어야 되는 것이 다. 어린시절 나관중은 문학을 숭상하는 사람이었다. 어려서의 꿈은 훌륭한 문인이 되는 것이었고 주위의 사람들도 그렇게 될 것이라 고 믿어 의심치 않았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의 꿈을 받아주지 않았으며 아울러 학문도 접어야 했다. 그의 어린시절은 유달리 불운과 고난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항상 사물을 바라봄에 있어 하나의 원칙을 두고 있었다. 그 것은 한 번쯤은 의심해 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훌륭한 친구라도 한 번쯤 의심해 본 다음에 야 친구로 받아들였으며, 아무리 명확한 진리의 말이라도 한 번 쯤 의심해 본 다음에야 받아들였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며 특히 여자의 말은 더더욱 믿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성격 을 두고 냉혈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배신과 좌 절에서 얻은 교훈이었고 극심한 고통과 피눈물을 쏟으며 얻은 경 험이었기 때문이었다. 나관중은 결코 정직한 사람이 아니었으며 좋은 사람도 아니었 다. 하지만 백리향에게만큼은 솔직하고 싶었다. 그는 백리향을 똑 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나는 계속해서 살수로 살 아야 하며 은살막에서 당신을 암살하라고 지시가 내려오면 난 그 렇게 할 거라는 것이요.” “.............” 그러나 백리향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말도 없었다. 자신의 말 을 못들은 것일까? 그는 다시 또박또박 말했다. “나를 죽여 땅 속에 묻으면 당신의 삶은 편할지 모르오.” 그제야 백리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생활은 편할지 모르지요.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나의 영혼 도 같이 묻히게 될 거요.” 나관중은 백리향의 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결국 지금은 그 와 싸울 때가 아닌 것이다. 나중에야 어찌 될지 장담할 수 없지 만 지금 당장은 땅을 일굴 때인 것이다. 그제야 나관중도 곡괭이를 들어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러나 스스로의 마음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만약 상부에서 백리향을 암살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과연 자신은 검을 들이 될 수 있을 까? 그것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으며 부디 그런 일은 없기 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호기심어린 눈으로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봅시다. 정말로 내 땀 속에 지령초의 향기가 묻어나오?” 그러자 백리향은 도리어 반문했다. “응? 말도 안 됩니다. 사람이 어찌 그런 예민한 후각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그 때가 언제인데.....” 그러자 나관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푸, 하하하! 난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후후후! 전 날 온천향소저 또한 저의 거짓말에 속아 지붕에서 내 려온 적이 있었지요.” “하하하!” *** 육합문주 장양은 그와는 막역지우인 양정을 정문관(淨門關)까 지 나가 배웅하였다. 말위에 앉아 그들의 모습이 저 멀리 아스라 이 사라질 때까지 섭섭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며 바라보았다. 앞으로 긴 여정이 될 것이지만 그들은 무사히 귀향할 것이다. 날 씨는 화창하고 한 동안 비는 올 것 같지 않았다. 혼자서 먼 여정 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딸과 제자들이 있는 한 그 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장양은 한 숨을 터트리며 말머리를 돌려 육합문으로 향했다. 전 날 자객의 습격을 받고부터는 그의 주위에는 항상 호위무사가 따 라 붙었다. 그들은 경험이 풍부한 자들로 장양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으며 민첩했고 무공도 훌륭했다. 지금도 그의 주위에는 네 명의 호위무사가 사방을 지키고 있었 으며 그가 말머리를 돌리자 그들은 어느덧 장양의 전후에서 눈 을 부라리고 있었다. 장양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 달에 백 냥이 라는 거금이 소비되는 것에 결코 아까움을 느낄 수 없었다. 어느덧 드넓은 평야는 황금색 벼들로 가득 차 있었고 농부들은 곧 있을 추수를 앞두고 매우 바쁜 듯 보였다. 그는 문득 탄성을 터트렸다. “완벽해! 저 황금의 벼들처럼 모든 것이 완벽해!” 그가 육합문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무렵.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대로 완벽하게 이루어 졌다고 생각했 다. 육합문의 문하들이 주화룡의 죽음을 슬퍼하여 머리에 흰 띠를 두르고는 있었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내일이면 완전히 사라질 것 이었다. 왜냐하면 현 무림맹주인 군자검(君子劍) 상관일운(上官一 雲)으로부터 친필서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서한의 내용은 백팔 수라귀을 무림의 공적으로 선포하고 일망타진하여 무림의 정의 를 이룩하자는 것이었다. 장양은 무림맹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 았으며 그는 즉시 기쁜 마음으로 답신을 썼다. 그 내용은 자신이 직접 삼십 명의 육합문도들을 이끌고 무림맹으로 향하겠다는 내 용이었다. 이 서찰은 내일 무림맹의 사자들에게 전달될 것이며 육합문도들 에게 선포할 것이다. 육합문은 떠들썩해질 것이며 그 누구도 주화 룡의 죽음을 입에 담지 않게 될 것이었다. 한 동안 육합문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강자단도 어느덧 잊혀져가 고 있었다.그 뿐 아니라 주화룡의 죽음으로 육합문도들은 강자 단에 대하여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복수심으로 불 타게 되었다. 장양은 도리어 그런 점에서 강자단을 고마워했다. 하늘은 그를 돕고 있었으며 그도 하늘을 고마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마음은 자신의 서재로 들어서자마자 깡그리 잊혀지고 말았다. 자신의 탁자위에 놓여진 붉은색 봉투! 눈이 시 리도록 새빨간 봉투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석양을 받아 더욱 붉 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의 서재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 었다. 그 곳에서 나누는 비밀스러운 대화는 그 누구도 들을 수 없 었으며 서재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 다. 비록 자신이 호위무사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우기는 하였지만 결코 내부인의 소행이 아니라면 은밀히 자신의 서재까지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봉투를 개봉하였으며 그 속에 는 한 편의 시가 적혀있었다. 龍本聰明 楊欲殺知 (룡본총명 양욕살지) 龍依雨山 懶惰故愚 (룡의우산 나타고우) 十月之交 朔日辛卯 (시월지교 삭일신묘) 鬼哭響天 此何人哉 (귀곡향천 차하인재) 룡은 본래 총명하여 양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룡은 우산에게 의지하려하나 그는 더없이 게으르고 어리석을 뿐. 시월이 바뀌는 초하루 신묘일 에, 귀신의 곡소리가 하늘에 울리리니 이 것은 누구 때문인가?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써 내려간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는 장양 의 얼굴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 리기 시작했으며 학질(?疾=말라리아)에 걸린 사람 마냥 두 손 은 벌벌 떨기까지 했다. 장양은 아직도 떨리고 있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의 경락을 주무 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대한 사안이 생길 때 정신을 맑게 하려 는 그의 버릇과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서신이 자신의 탁자에 놓여져 있는지, 누가 갖다 놓았는지, 무슨 이유로 이러한 시를 보냈는지 지금으로서는 중요 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자신과 주화룡의 관계를 알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살인 이 일어날 것임을 예고하는 경고장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시구 로 보아 초하루 신묘일에 누군가가 죽을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친인척이거나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서둘러 서랍속의 붉은 색 종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작을 수 없는 세필로 무수한 기호를 적기 시작했다. 그 기호들 은 모두 아홉 글자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글이었다. ‘危急存亡之秋, 急急來(위급존망지추, 급급래)’ 제 십일장 今日殘花昨日開(금일잔화작일개) 오늘 지는 꽃도 어제 핀 꽃일 뿐. 서늘한 가을 햇살이 창가로 비치는 이른 아침. 강백지는 포근하고 낯설지 않은 손길에 눈을 떴다. 머리는 숙취 로 깨질 듯 아팠으며 정신은 몽롱하여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웠 다.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가슴을 쓰다듬고 있는 손을 바 라 보았다. 누가 보아도 감탄할 만큼 섬세하고 아름다운 손이었 다. 그는 그 손길의 주인공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온원원(溫園鴛).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여인. 그녀가 연민과 동정으로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 다. 그녀는 흰색의 부드러운 비단으로 어깨에 두르고 있었으며 삼 단으로 묶은 머리는 마치 전설속의 선녀를 보는 듯 아름답기 그 지없었다. 그리고 맑고 빛나는 두 눈은 대지신모(大地神母)의 자 상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선녀도 아닐뿐더러 대지신모도 아니라는 것을 그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사랑에는 항상 조건이 따랐으며 그 조 건이 가볍지도 않았다. 또한 그녀의 사랑은 다분히 정략적이었으 며 강백지도 그 정도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강백지는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그녀를 한 참 바라보더니 억지 로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은 이곳으로 오면 안 되오." 온원원은 그윽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공께서 매일 술로서 지새우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그녀의 말대로 강백지는 하루라도 술에 취해있지 않은 날이 없 었다. 주화룡의 죽음과 더불어 그의 마음도 죽어버린 것이다. 주 화룡에 대한 죄책감, 사부에 대한 원망을 그는 술로서 삭히고 있 었다. 취하지 않고서는 미칠 것만 같았으며 스스로를 망가트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를 찾으려면 주점으로 가면 될 것이 었고, 그의 방은 항상 온갖 음식물쓰레기와 술병들로 가득 차 있 었다. 그의 준수한 용모는 핼쑥하게 변해있었고 그의 맑고 빛나던 눈 빛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천장 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육합문은 당신에게 너무나 위험한 곳이오." 강백지의 목소리는 너무나 공허해 온원원은 무어라 말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이상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도 나는 올 거예요. 당신은.... 나를 원하나요?" 원하고 있냐고? 강백지는 그 누구보다 절실히 그녀를 원하고 있 었으며, 사랑하고 있었다. 그 사랑으로 인하여 자신이 상처를 입 게 될 지라도 그녀를 원했으며 갈망했다. 강백지가 그나마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녀가 이유일 것이다. "그렇소." 온원원은 생글거리며 강백지의 품에 안겼다. “정말, 다행이에요.” “무엇이 말이오?” “아직도 나를 원한다니.....” “당신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구료.” "소녀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이 아니에요. 당신 앞에만 서 면 그만 어린아이가 되고 말지요." 사랑은 그런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릴 수 있는 강 력한 마술인 것이다.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상 그 무 엇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요.” 그녀는 한 참이나 강백지의 가슴을 쓰다듬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 이 있다는 듯이 말했다. "소녀가 무엇을 가지고 왔는지 알아 맞혀 보세요." 강백지는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가지고 왔소?"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붉디붉은 입술을 움직였다. "아마……. 상공께서는 틀림없이 놀라실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인데 그러오?" 그녀는 자신의 옆에서 기다란 상자를 꺼냈다. 넓이가 반 뼘 정도 인 기다란 상자였는데 마치 여인의 귀중품이 담겨져 있을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있는 것은 상자처럼 귀 중한 것이었을망정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여인이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속에서 묵 빛을 뛰고 있는 뾰족한 화살이이 나타 났다. "이, 이것은 화살이 아니오?" 강백지의 놀람과 달리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아니겠습니까? 이 화살이 제대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면 우 리는 영원히 자유롭게 살수 있지요." 순간, 강백지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그것 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얼굴은 어느덧 미소를 베어 물 고 있었다. 이 화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 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의 계약이었으며 이제 그 계약을 실행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강백 지는 사랑을 얻기 위해 악마들과 계약을 해야 했으며 조건은 한 사람의 목숨이었다. 강백지는 내심과 달리 부드러운 표정을 지우 지 않고 다정하게 말했다. "장담하건대 이 화살은 전광석화처럼 과녁에 꽃히게 될 것이요." "소녀는 당신을 믿어요. 이 화살은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징검다 리가 될 것이 틀림없어요." "후후! 진정한 사랑에는 징검다리가 필요없지. 이것은 단지 보통 의 화살일 뿐이요." 그는 손을 뻗어 묵색의 화살촉을 집으려 했다. 그러자 그녀는 화 들짝 놀라며 조그만 상자를 덮으며 벌떡 일어섰다. "안돼요! 우리의 징검다리는 예사 물건이 아니랍니다. 아주 귀하 고 귀한 것이 묻어 있지요. 잘못 만져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소녀 는 그대로 청산과부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녀는 상자를 탁자위에 내려놓고는 자신의 몸을 감싼 흰색 비 단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드러났다. 강백지 는 한 숨을 쉬며 안타깝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언젠가는 죽소. 우리가 결합한다고 하여도 당신이 떠나 든 내가 먼저 떠나든 죽음의 굴레는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오." 그녀는 강백지를 돌아보며 방긋이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덧 요염하게 변해 있었고, 강 백지는 당혹 감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아! 나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소. 환자는 편안한 휴식이 필요 하지……." 여인은 동그란 눈을 뜨며 강백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 정 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과연 그럴까? 그녀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유혹 덩어리였다. *** 장양은 자신의 서랍에서 한 장의 붉은 종이를 꺼내어 백일청에 게 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백일청의 얼굴은 순식간에 싸늘해 졌 고 온 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듯 했다. 이것은 누가 무어 라 해도 한 편의 시를 가장한 고상한 협박장이었다. 백일청은 그 종이를 장양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누구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까지는 알 수 없지.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백우산이 실종되었습니다. 혹시.....” 장양은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한 동안 곰곰이 생각 하는 듯 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아니야. 우산은 비록 용맹하기는 하나 총명한 아이는 아닐세. 시 구에도 거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제 삼자일 가능성이 크지.” “......” 백일청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백 우산이 이처럼 고상한 방법을 사용할리가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상대방의 정체를 궁금해 할 처지가 아니야. 중요한 것은 상대는 어둠 속에 숨어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지. 틀림없 이 내부사람들 중에 첩자가 있을 거야.” “그렇다면 우선 첩자를 찿아내는 것이 급선무 일것입니다.” 장양은 고개를 저었다. “틀렸네. 피라미를 잡아 무엇에 쓰겠나? 차라리 피라미를 미끼 로 대어를 낚아야지.” “........” 문득, 장양은 고개를 들어 백일청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낚시를 해 보았나?” “해본 적이 없습니다.” “낚시를 하다보면 미끼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기를 잡을 가능성 도 높아진다는 것을 알게 되지.” “.........” “주화룡은 자살한 것이 아니라 강백지의 손에 죽은 것이라는 소 문이 난다면..... 이 소문이 그자의 귀에까지 들어간다면..... 틀림없 이 모습을 드러낼 것일세. 그때까지 육합문 내부의 첩자는 그대 로 두는 것이 좋아.” “그렇다면 강백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면 되겠군요.” "자네는 또 틀렸네." "......." "영리한 물고기는 한 입에 덥썩 물지 않는 법이라네. 몇 번 입질 을 하게 마련이지. 강백지를 결코 주시해서는 안되네. " "그렇다면....." 장양의 입에서 더 이상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있을 뿐이었다. 백일청은 이미 그가 모든 계획을 세우 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계획은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장양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딱딱 두드리며 말했다. 그것은 그가 진실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낼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미끼가 될 걸세.” 백일청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찌! 어르신께서 직접.....” “시월 초하루에 나는 육합문도들을 이끌고 천태산으로 오를 생 각이네. 그야말로 육합문은 텅 비게 되지. 그 하루 동안은 내부의 첩자도 육합문에서 활동할 수 없을 거야. 나와 천태산을 오르게 될 테니까. 자네의 할 일은 삼십 여명의 호위무사들을 이끌고 내 아들놈과 딸아이들을 지켜주기 바라네. 이왕이면 자네와 육합문, 그리고 주가장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자들로 호위무사로 두면 더 욱 안심할 수 있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나?” “.........” 백일청은 순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서운 법이다. 놈은 결코 내부첩자의 도 움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삼십여명의 인원이라면, 이 예고된 살인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백일청은 자신의 어깨가 무거워 짐을 느꼈다. 그리고 이토록 막 중한 임무를 자신에게 맡기는 장양이 더없이 고마웠다. 그만큼 자 신을 믿으며 실력을 인정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굳은 마음으로 그에게 보답할 뿐인 것이다. “이보게. 나는 그자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 나 장양이 어떤 사람인지.” *** 자객이란 철저하게 어둠 속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고, 그 누구도 자신을 알 수 없어야 한다. 그래서 온천향은 항상 냉랭한 표정을 지었으며 어투 또한 차가웠다. 어설픈 웃음보다는 냉랭한 표정이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신 념은 옳았다. 그 누구도 그녀가 자객임을 알지 못했으며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그녀 또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냉정해야 했으며 그 누구 에게도 정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사랑, 우정, 행복, 동정……. 이 러한 것들은 자객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감정일 뿐이었다. 자객이 실수했을 때 돌아오는 것은 죽음뿐인 것이다. 온천향은 그동안 죽 음을 수 없이 많이 보아왔으며 동료들의 죽음도 수없이 보아왔 다. 살수는 상대를 일격에 격살 시켜야 했지만, 실패하여 잡히는 경우가 될 때에는 모진 고통과 고문 속에서 천천히 죽어야 한다. 그렇기에 살수는 스스로 죽을 수 있을 때 미소를 지으며 죽는 것 이다. 온천향은 갑자기 두려움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도 언젠가는 붙잡 혀 온갖 고문을 당하다 죽을지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어쩌 면 생각도 하기 싫은 치욕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동안 타인을 살해한 대가로 많은 금전을 모을 수 있었 다. 이제 은퇴를 한다고 하여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도 있었 다. 이 번 일을 끝으로 그녀는 이 더러운 세계에서 벗어나 조용 히 살고 싶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그 때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언니는 너무 부지런 한 것이 탓이야. 기녀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 는 것은 좋은 게 아니야.” 몹시 청명하고 그윽한 음성. 온천향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음 성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어찌 이십여 년 간을 동거 동락한 친동 생의 목소리를 모를 수 있겠는가? “기녀로서는 일찍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 는 점심시간일 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냉랭했으며 그것은 그녀의 친동생이라 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온천향의 쌀쌀한 음성에도 불구하고 온 원원은 웃었다. 그녀는 언니의 냉랭한 표정 뒤에 숨어있는 끈끈 한 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온천향의 침 상으로 쓰러지듯 누우며 말했다. “아아! 오늘은 언니와 싸울 생각 없어. 오늘은 피곤하다고...” 순간, 온천향은 동생의 눈동자가 흐릿해져 있음을 발견했다. 그 녀의 눈이 탁해 있을 경우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그 것은 바로 몽혼향이었다. 온천향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온원원은 오랫동안 검을 잡지 않 았다. 그것은 그녀가 항상 몽혼향에 취해있었으며 취하지 않을 때 에는 그녀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음을 누구나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상부에서조차 그녀에게 임무를 맡기지 않았으며 맡 긴다고 해도 이번 임무처럼 미인계에 사용할 뿐이었다. 그런데 온 원원의 입에서 상상도 못할 말이 튀어나왔다. “언니……. 나에게 임무가 떨어졌어.” 온천향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누군데?” “강백지.” “......!” 온천향은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온원원이 대낮부터 몽 혼향에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강백지는 너무나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에 틀림없이 제거 되어야 한다. 하지만 동 생에게는 가혹한 시련일 것이다. “너는 그를 죽일 수 없어.” “언니가 그것을 어떻게 단정하지?” “너는 그를 사랑하니까.” “.......” 온원원은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정이라 도 하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아. 단지 이용할 뿐이야.” “휴우~ 나에게 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속이려하지 말아라. 이 언 니는 알고 있어.” “무엇을 알고 있다는 거지?” “다른 것은 알 수 없을 지라도 한 가지는 알고 있어. 너는……. 그 사람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 “......!” 순간 온원원의 눈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녀의 두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나도 한 가지는 알아. 이 번 임무를 실패하면 나는 상부에서 제 거될 거야. 그 동안 나 같은 폐인이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 던 것은 언니 때문이었지. 하지만 나는 선택할 수밖에 없어. 내 뱃 속의 아이를 위해서…….” 온천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을 위하여 아무것 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사 는 삶 일지라도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이 아닌가? 그 때만큼은 처절 한 절망감으로 그녀는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한 번도 남자를 이성으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항상 살인의 대상만 존재했다. 그가 죽는 모습, 아니면 자신이 실수하여 그에 게 죽는 모습. 그런 것만을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여 동생이 겪는 일들이 더 이상 바보스러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 다. 문득, 한사람의 영상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그녀의 뇌리 속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어수룩한 행동 속에 칼날 같은 지혜가 숨어있으 며, 평범한 외모 속에 비범한 능력이 숨겨져 있는 사람. 자신을 죽 이러온 살수에게조차 웃음을 던지는 사람. * ** 황혼이 내려앉고 백리향의 손길도 어느덧 멈추어 있었다. 이미 야국(野菊)은 충분히 심어져 있으며 이제 불필요한 가지만 치면 되는 것이다. 불필요한 가지는 야국의 수분과 영양분을 빼앗을 것 이며 성장을 방해할 것이다. 불필요한 것은 최대한 빨리 없애는 것이 좋다. 그것은 야국에만 해당되는 사항은 아닐 것이다. 잘못된 생활습관 이나, 비뚤어진 가치관, 지나친 욕심, 가볍기 그지없는 말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영양분을 낭비시키는 불필요한 가지인 것이 다. 백리향이 조그만 소도를 집어 들 때였다. 저 멀리 요란한 발자 국 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사나이들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무 산철권 방각정과 무림맹의 위사들이었다. 방각정의 표정은 몹시 어두워 보였으며 근심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결코 육합문에서 일 어난 일련의 불행한 사태 때문은 아닐 것이다. 방각정은 두 손을 맞잡고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백리향도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덕분에……. 여러분들도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그러자 방각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휴우~ 결코 안녕하지 못합니다. 저희는 그만 떠나야 하겠기에 작별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무림맹으로 귀향하신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 런데 어찌 안녕치 못하다고 하십니까?” “귀향이야 기쁘기 이를 데 없지요. 하지만…….” 방각정은 슬쩍 나관중을 바라보며 말을 얼버무렸다. 백리향은 그 의 뜻을 알아차리고 방각정을 만서각 안으로 안내하였다. “방형께서 괜찮으시다면 소생이 차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만…….” “마침 잘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갈증이 나던 참이었는데.....” 백리향은 그를 만서각안으로 안내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만서각 은 한적했다. 육합문의 사람들은 책을 싫어했으며 한 번쯤 호기심 으로 찾아온 자들도 곧 실망하고 돌아가기 일쑤였다. 무관이라면 그래도 어느 정도의 무서가 소장되어야 마땅했지만 만서각은 결 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각정은 안으로 들어서자 말자 백리 향을 자리에 앉히며 말했다. “예전에 말씀드렸듯이 저희는 무림맹의 전령으로서 육합문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대소천태산에 머 물고 계시다는 귀인을 만나 뵙고 백의신녀 단소청아가씨의 서신 을 전달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육합문에 머물며 대소천태 산을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백가촌은커녕 도리어 낭패만 당하고 말았답니다. 더 이상 육합문에 머물 수도 없고 이대로 어찌 돌아 가야 할지……. 휴우~" 방각정은 짐짓 한 숨을 내쉬며 백리향을 슬쩍 바라보았다. 백리 향은 그제야 방각정이 자신을 찾아온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예전 에 홍화루에서 육합문으로 안내할 때 천태산에 은거하는 기인을 알고 있다고 대답하지 않았던가. 방각정은 자신의 힘을 빌리러 온 것이었다.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자신의 품에서 서신을 꺼내어 방각정에 게 내밀었다. "그렇지 않아도 소생은 오늘 중으로 여러분들을 찾아뵈려고 했답 니다. 이 서찰은 백가촌의 백리라는 성을 가진 분이 보내온 것입 니다. 귀하께서는 부디 좌군사이신 백의신녀 단소청아가씨께 전 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방각정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 서관께서는 그 분을 만나 보셨습니까? 저희들은 그 동안 얼 마나 헤맸는지…….” "후후후! 백가촌은 기이한 절진이 펼쳐져 있어 진정한 인연이 아 니면 찾기가 매우 힘든 곳이지요. 오로지 소생만이 그 길을 알고 있답니다. 그러니 수고하실 것 없이 이 서찰을 가지고 가신다면 여러분들의 죄는 추궁 당하지 않을뿐더러 커다란 상까지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방각정은 선뜻 그 서찰을 받을 수 없었다. 밀봉이 되어 진 서찰을 뜯어서 확인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백리향의 말을 그대 로 믿고 높으신 분에게 선뜻 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정말 난감합니다, 서관님의 말씀을 못미더운 것이 아니라 소관 의 직무는 너무나 막중하여 직접 찾아뵙지 않고는 안심할 수 없 는 것입니다. 부디 수고스럽겠지만 본인을 백가촌으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백리향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 소생도 그럴 수 없답니다. 그 사람은 워낙 게을러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지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백리향은 서찰을 자신의 품으로 집어넣으려했다. 그러자 방각정 은 황급히 일어나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앗! 자,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정말로 천태산의 기인께서 보내신 서찰이 확실하겠지요?” 자신이 직접 쓴 서찰인데 어찌 확실하지 않겠는가. 백리향은 웃으 며 말했다. “후후후! 그거야 틀림없는 일이지요.” “그렇다면, 서관의 말씀을 믿으리다. 그것을 저에게 주십시오.” 방각정은 빈 손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서찰이라도 들고가는 편 이 나으리라 생각했다. 백리향도 그의 다급한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서찰을 건네주며 말했다. “그 분께서 노옹에게 안부를 전하라 하시더군요. 부디 부탁드립 니다.” 그러자 방각정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게 되 었다. "오! 이제야 확실히 믿겠습니다. 노옹이라는 분은 신녀님의 충실 한 노복이시지요. 그 분을 아신다니 저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 집 니다.사실 무림맹을 떠날 때 동해노옹께서 저의 소매를 붙드시 고 안부를 전하라 하셨지요. 그동안의 결례를 용서하여 주십시 오! 귀하를 의심하고자 함이 아니라 단지 소관의 업무에 충실하다 보니……." 방각정은 두 손을 맞잡고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백리향에게 고 마움을 표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신녀의 지시를 이행하지 못하고 돌아갈 뻔한 것이었다. 그러니 서관이라는 청년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가?백리향 또한 맞절을 하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귀하의 충심에 깊은 감복을 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백리향은 이 하나의 서찰로 인해 자신이 얼마나 번거롭 게 될지 알지 못했다. 만약 알았더라면 이러한 서찰을 결코 보내 지 않았을 것이다. 그 서찰에는 자신이 알아낸 백팔수라귀들의 모든 것이 적혀 있 었던 것이다. 제 십삼장 斷魂只有曉寒知(단혼지유효한지) 넋읽은 혼을 새벽의 차가움만이 알아주는구나. 철면호(鐵面虎) 도무방(到無妨). 그는 사천(四川)사람으로 그렇게 명성을 얻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낭인무사로서 드물게 부지런한 사람이었고 충실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추천하는 사람도 많았으며 그를 원하는 곳도 많았다. 이 곳 천태현은 그로서는 처음으로 방문하는 고장이었다. 음식 과 문화가 사천지방의 것과는 사뭇 달라 적응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분타주(分舵主) 노충(老忠)의 추천이 아니었으면 그는 결 코 이런 곳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는 노충에게 빚이 있 으며 그것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천태현 접경의 야산을 휘돌 때였다. 저 멀리 허름한 노상주 점을 보았으며 그 주점위로 마파두부(麻婆豆腐)라고 펄럭이는 깃 발을 보았다. 도무방은 일순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사천지방의 요리를 이곳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파두부(麻婆豆腐)란 간장, 고추장, 참기름, 마늘, 파, 생강 등을 기름에 볶다가 한 입에 들어갈 만큼 잘게 썬 두부를 넣고 마지막 으로 전분을 넣어 만든 걸쭉한 사천지방의 매운 음식을 말한다. 도무방은 너무나 반가워 한걸음에 내달렸다.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초라한 주점 안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가 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 초라하다는 것이 이 주점만의 특색 인 모양이었다. 그가 의자를 끌어당겨 앉자 초라하기 그지없는 노파가 주방에 서 나왔다. 조그마한 인정이 넘쳐 보이는 노파(老婆)는 곱게 늙어 서인지 굵은 주름 외에는 잔주름을 찾아 볼 수 없었으며 매우 순 한 얼굴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법 없이 살사람이라면 이런 노파 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는 가격도 물어보지 않고 마파두부 한 그릇을 주문하였다. 돈 은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었으며 결코 금전으로 인하여 자신 의 반가운 마음을 퇴색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손놀림은 매우 익숙했으며 순식간에 한 그릇의 마파두부 는 완성되어 나왔다. 그녀가 만든 마파두부는 정말 매웠으며 고소 하고 담백했다. 그는 이미 점심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그릇 의 마파두부를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하고 토할 것 만 같았다. 그는 자신이 너무 과식했다고 생각했으며 더 이상 미 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할머니. 두 그릇 먹었습니다. 얼마죠?” 지독한 사천지방의 사투리였으나 노파는 충분히 알아들었으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자네는 철면호 도무방이지?” 도무방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엇! 그것을 어떻게…….” 그때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듯 하더니 그의 목구멍에서 무엇 인가가 치솟아 오름을 느꼈다. “우웩!”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새빨간 피였다. 노파는 그 모습을 바라보 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자네는 마파두부를 먹고 어찌 붉은 것을 토해내는가? 오호라~ 내가 붉은 고추를 너무 많이 넣은 것이로구나?” 도무방도 어리둥절한 채 자신의 입가를 닦고 그것을 바라보았 다. 그것은 붉은 고추가 아니라 틀림없는 자신의 피였다. 그는 그 제야 깨닫고 불같이 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빌어먹을 할망구! 독을 넣었구나!” 노파는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절혼독수랑(切魂毒手狼)이 만든 음식에 독을 넣지 않으면 무엇 을 넣어야 한단 말인가?” 도무방은 자신이 중독당한 것도 잊은 채 노파의 목을 자르려 하 였으나 그가 채 검을 뽑기도 전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진 그는 쉴 새 없이 피를 내뿜기 시작하였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할 수 있 었다. 그제야 절혼독수랑은 일어나 쓰러진 도무방에게로 다가섰다. 도 무방은 그녀를 올려다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마디의 말을 내뱉었다. “왜?” 그는 노파에게 많은 것을 묻고 싶었으나 단 한마디 이외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네가 도무방이기 때문이야.” 도무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도무방이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니....... 노파파는 그를 내려다보며 소곤거리듯 말했다. “너는 노충에게 빚이 있지? 그리고 빚을 갚으러 이곳까지 온 것 이고, 하지만 너는 알아야 했어. 노충의 빚은 우리가 다 갚았다는 것을……. 자네는 친구를 잘못 사귄 것일세.” 그제야 그는 분타주 노충이 자신을 이런 먼 곳으로 보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동감하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하 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죽어야하는 진짜이유를 알지 못했 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궁금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그는 이미 시체였기 때문이었다. 절혼독수랑은 그의 주검을 한참 바라보더니 그의 품속을 뒤지 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한 장의 봉투를 찾아 낼 수 있었다. 그 봉투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철면호(鐵面虎) 도무방(到無妨). 추천인(推薦人) 사천(四天) 맹호팔기회(猛虎八旗會) 분타주(分舵 主) 노충(老忠). *** 곡씨부인(谷氏婦人)은 그리 예쁜 편도 아니었고, 성격이 좋은 편 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좋은 남편감을 만나 시집 갈 수 있었으며 두 아이를 낳아 오순도순 살수 있었다. 특히 남편인 곡장생(谷長生)은 가난한 집안의 자손이었지만 성 실했으며 훌륭한 가장이었다. 그녀는 그런 남편을 사랑했으며 언 제나 남편과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요리솜씨를 숨기려 하지 않았 다. 그녀의 요리솜씨는 일품이었다. 가끔 그녀의 집에 손님이 오게 되면 그녀가 만든 어향육사(魚香肉絲)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은 결코 일상적인 예의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녀 의 음식솜씨는 그 마을에서 정평이 나있었다. 곡장생은 원래 마른체형을 지니고 있었지만 부인을 만나고부터 살이 오르게 되어 중년이 되어버린 지금은 도리어 비만을 걱정해 야 했다. 친구들이나 마을의 어르신들은 항상 음식솜씨가 뛰어난 부인을 둔 것을 부러워했으며 그것은 곡장생 또한 자랑스러운 것 이었다. 그날은 유달리 별들이 반짝였으며 곡장생의 기분도 좋았다. 그 는 근처의 냇가에서 어린 두 아들을 깨끗이 씻기고 집으로 향하 는 중이었고, 마씨 부인도 그날따라 서너 가지의 과분한 음식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여덟 살배기 아들의 생일을 위하여 충분한 선 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끼는 순간 한 명 의 불청객은 찾아왔다. 환갑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 노인은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유달리 튀어나왔으며 눈매가 독 수리처럼 날카로웠다. 그의 두 손에는 정강(精剛)으로 만든 두개 의 철환(鐵丸)이 쥐여져 있었으며 그것은 서로 부딪혀 청명한 소 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철환이 쥐여진 손은 햇볕에 그을린 갈색 이었으며 뼈마디가 심하게 불거져 나와 마치 단단한 묵철(墨鐵) 처럼 보였다. 곡씨 부인은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이 느껴져 입술이 바르르 떨 려왔다. “노인께서는 누구시죠?” 노인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연곡진(嚥曲珍)이라는 부인이지요?” 연곡진은 곡씨 부인의 처녀 때의 이름이었다. 곡장생과의 혼인 후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한 이름이며 스스로도 이미 낯설게 느 껴지는 이름이기도 했다. 그녀는 놀라움에 입술을 떨며 한 참후 대답했다. “그, 그래요. 당신은 누구세요?” “나는 비환천심마불위(飛丸穿心馬不偉)라고 하오. 그렇기 때문 에 부인은 나의 손에 심장이 뚫려야 하지.” 그녀는 너무나 놀라 들고 있던 그릇을 떨어트렸다. 쨍그랑하는 소 리와 함께 그릇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평상시라면 몹시 속 상해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지, 지금…….” 지금 무어라 하셨지요? 라고 묻고 싶었으나 그녀의 목구멍에서 더 이상의 말은 튀어나오지 못했다. 마불위는 그녀를 위해 친절하 게 다시 말해주었다. “나의 비환은 당신의 심장을 뚫을 거라고 말했소.” 그녀는 그를 몰랐으나무림에 몸담고 있는 강호인들은 비환천 심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지 않았다. 또한 그의 두 비환 을 모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십 년 전, 그의 비환에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심장에 꽤 뚫렸는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마불위는 차가운 표정에 친절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 남편도 함께 보내어 드릴 터이니 가시는 길이 적적하지는 않을게요.” 그녀는 정신이 하얗게 탈색되어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 아이들, 우리아이들…….” 그녀의 말은 자신에게 아이들이 있으니 살려달라는 말일 것이 다. 하지만 마불위에게 그녀의 말은 호소력을 갖지 못하였다. “당신의 자식이 이곳에 있소?” 연곡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 들었다. “없어요! 아이들은 친정에 가고 없어요.” 과연 모정은 자신의 죽음보다 강했다. 그녀는 그러한 순간에도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했으며 더 이상 더듬거리지도 않 았다. 그러나 그녀의 바람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문이 덜컥 열리며 곡장생이 자신의 자식들의 양손을 쥐고 들어 선 것이었다. “여보. 저녁준비는 다 되었겠지?” 순간, 연곡정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안돼!” 곡장생은 아내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자 의아스럽다는 듯이 마불 위와 연곡진을 번 갈아가며 쳐다보았다. 곡장생의 눈길에도 아랑 곳하지 않고 마불위는 그의 양옆에 서있는 두 명의 아이들을 보 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부인 축하하오! 두 명의 길동무가 더 생겼소.” *** 무림맹의 사자들이 떠나자 육합문은 다시 한번 술렁이기 시작했 다. 그것은 무림맹으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으며 육합문은 육십 여명의 무사를 지원하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까닭이었 다. 무공을 닦는 자 치고 이름을 날리려 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무 림에 자신의 명성을 드날리고자 하는 것은 모든 무림인들의 소망 이며 목표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드러내지 않고는 이름 을 드높일 수 없기에 강호에 많은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명성이란 자 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며 뼈를 깎는 고통이 뒤따르는 일 이다. 그러나 비교적 쉬운 방법이 있다면 이름이 알려진 무인에게 결 투를 신청하거나 명망 있는 무관에 들어가 비무를 신청하는 일이 었다. 하지만 어중이떠중이 모든 사람들의 비무를 받아 줄 리도 없을 뿐 아니라 드넓은 중원에 유명인사들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고수를 만나 결투를 신청한다고 하여도 결투를 받아줄 리 없었으며 그에게 모욕을 주어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그들의 검 아래 고혼이 되기 일쑤였다. 지금 육합문의 모든 문도들에게 지금 자신의 무공과 용맹함을 천하에 알릴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그것은 평생에 한번 있을 까 말까한 기회였으며 자신의 명성을 날릴 가장 손쉬운 방법인 것이다. 장양의 뜻대로 더 이상 주화룡의 죽음을 입에 오르내리는 사람 은 없었으며 모든 사람들의 귀추가 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장 양은 항상 주도면밀했으며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적절하게 이용 할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계책을 세울 때도 두 가지 이상 을 병행했으며 한 번도 실패는 없었다. 그는 붓을 들어일필휘지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무릇 정파의 사람이라면 선악을 구별하고, 나아가 간악한 자들 을 척결하는 것이 마땅한 소임일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사마외도 가 창궐하여 천하를 어지럽히니,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이를 안타 깝게 여기고 있던 바이다. 무림맹의 맹주께서 의기롭게 일어나시 어 육합문으로 사자를 보내어 그 뜻을 전하니 어찌 받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육합문은 절강제일무문으로서 육십 명의 의로운 자 들을 무림맹으로 파견코자 하니 뜻있는 자들은 삭월신묘일에 천 태산으로 모여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라.” 장양의 이 글은 육합문도들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곳곳에 붙여졌 으며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앞으로 열릴 파견단의 선발과정에 집 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합문이 이렇게 떠들썩하게 움직여도 항상 조용하며 평온한 곳이 있었다. “당신 참 이상한 사람이야.” “.......” 조용하며 평온하기만 하던 만서각에 여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들 려왔다. 백리향은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가전무공인 육합검진결(六合劍眞訣)이 무림최고인줄 아 는 여자, 육합문이 무림 최고의 방파인줄 착각하는 여자, 장취취. 육합문주 장양의 철부지 막내딸이었다. 백리향의 얼굴에는 씁쓰 레한 고소가 떠올랐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육합문의 우월성 을 잔소리 삼아 떠들다가 제풀에 지쳐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백 리향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외로워서 그런 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단 한명의 친구도 없었다. 하긴, 아무렇게나 검을 빼 어들고 싸움을 걸려하는 그녀에게 누가 감히 다가설 수 있으랴? “당신 여기가 어디인줄 알아? 여기는 육합문이야. 무공을 갈고 닦아 입신양명(立身揚名)한다거나, 무림에 이름을 널리 떨치기 위 해 오는 곳이란 말이야. 당신처럼 만날 꽃이나 다듬고, 책이나 정 리하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 알겠어?” “…….” 백리향은 아무 말 없이 꽃만 다듬고 있었다. 그가 침묵을 지키 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녀는 꽤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기 일쑤였 다. 오늘도 아니나 다를까백리향 뒤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애꿎 은 개를 발로 뻥 찼다. 개는 깨갱하며 성질 더러운 그녀를 피해 달아났다. “어이, 이봐.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백리향은 저 멀리 사라지는 개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가씨, 나는 이 꽃을 갈고 닦아 입신양명하고 무림에 이름을 떨 칠 것이니 이 몸에 더 이상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녀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쳤다. “허, 참. 기가 막혀, 누가 당신같이 못생긴 사람한테 신경 쓴다는 거야.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백리향은 그녀의 말투를 흉내 내어 중얼거리듯 말했다. “누가 당신같이 못생겼다고 합니까? 남들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장취취는 백리향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고 있다가 자신이 못생겼다는 말임을 깨닫고 길길이 날 뛰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너 오늘 나한테 죽었어.” 그녀는 미친 듯이 날뛰며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장검을 뽑으려 했 다. 그러나 장검은 검집에 철썩 붙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 는 것이 아닌가? “어? 어? 이놈의 검이 왜 꿈쩍도 안 하는 거지?” 그 때 그녀의 등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취취야. 어디서 함부로 검을 빼려 하느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왔는지 옥수낭랑 전원월이 자신의 장검 을 누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찔끔하며, 전원월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언니! 저 놈이 날 희롱해요.” “내가 다 보았다. 어디서 거짓말을 하려는 거야.” “…….” 장취취가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전원월일 것이다. 왜 냐하면 그녀는 무공을 가르치는 스승이기도 했지만, 전원월의 차 갑고 냉철한 성격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기도 했다. 백리향은 일어서서 그녀에게 공수를 취해 보이자, 그녀도 가벼 운 목례로서 인사를 대신했다. “백리서관(百里書管), 소녀의 사매가 만나 뵙기를 간절히 바란답 니다. 취화소축으로가보시렵니까?” “전아가씨의 사매라 하심은…….” 그때 전원월의 옆에 시립 해있던나이 어린 시녀가 한 걸음 나 서며 말했다. “곧 문주님의 큰따님을 말합니다.” “.....?” 비록 시녀라고는 했지만, 의상이 화려하고 미모 또한 뛰어나 시 녀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아가씨는 누구 시며, 어찌하여 큰아가씨께서 소생을 찾는단 말 입니까?" 그러자 어린 시녀는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소비에게 아가씨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앞으로 그저 화아(花 兒)라고 불러주십시오. 소비뿐만 아니라, 저의 큰아가씨께서도 공 자님의 대명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그녀의 몸가짐은 보통의 노비에서 볼 수 없는 정숙함과 예절이 있었다. 백리향은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으나 겉으로는 난처하다 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도 보시다시피 상당히 경망히 없습니다. 소생이 나중에 필히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솔직히 상당히 뻔뻔스러운 거절이었다. 한가롭게 야국이나 가꾸 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백리향은 웬만 하면 사람들과의 접촉이 싫었다. 워낙 산중생활에 익숙하다보니 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념(思念= 사사로운 느낌)이 쏟아져 들어 와 본래의 청정함을 잃고 번뇌가 찾아오는 것이었다. 피한다고 해 결될 문제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 적응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가 없었다. 백리향의 뻔뻔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는 이대로 돌아갈 뜻이 없는 듯 했다. “서관님은 저를 난처하게 만드시는 군요. 소비가 서관님을 모시 고 가지 못하면 그 만큼 소비의 주인에게 불충하는 것입니다.” “.........” 백리향은 어린 소녀의 말이 상당히 당돌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언행은 몹시 타당했고 백리향의 마음을 끌기에 적당했다. “허~ 아가씨의 말씀은 참으로 지당하십니다. 안내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녀의 표정은 밝아졌고 백리향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하지만 백리향은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꽃을 손질하던 화도(花 刀)나 부삽 등을 깨끗이 닦아 바구니에 담고서야 일어났다. 백리 향은 다시 한 번 전원월에게 가벼운 목례를 하고 화아라는 소녀 를 따라 취화소축으로 향했다. 전원월은 백리향과 화아가 멀리 살아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 다. “꽃을 갈고 닦아 입신양명하고 무림에 이름을 떨칠 것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후후후.” 백리향이 멀리 월동문(月同門)으로 사라지자, 그녀는 장취취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취취야, 오늘 수업은 나와의 비무로 결정하자꾸나.” 순간, 장취취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취화소축(醉花小畜)은 말 그대로 가을에 피는 꽃으로 만발해 있 었다. 노란색의 금불초, 자주색의 용담, 흰색의 고귀한 물매 화……. 걸음걸이마다 풍겨오는 향기에 취하고, 자연의 아름다운 색깔에 취했다. 백리향은 장영령(張靈靈)이라고 불리는 큰아가씨를 보고 두 번 을 놀라야 했다. 하나는 그녀가 맹인(盲人)이라는 것에 놀랐고, 두 번째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백리공자님이시지요? 자 이쪽으로 앉으십시오.” 그녀는 좌측의 태사의(太師椅)를 가리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백리향은 그녀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언제 준비했는 지 어린 시녀가 뜨거운 차와 당과를 내어왔다. 그리고는 다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물러났다. 이 모든 것이 절도가 있 고 예의에 전혀 어긋남이 없어 백리향은 속으로 가벼운 찬사를 보냈다. “공자께서는 소녀가 들은바 그대로 이십니다.” 백리향은 장영령의 뜬 금 없는 소리에 의아심을 감추지 못했다. 들은바 그대로라니?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었단 말인가? “소생이 우둔하여 아가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소녀는 비록 보지는 못하지만 들을 수는 있답니다. 그 동안 공자 의 영웅담은 소녀를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 “소녀는 선천적으로 맹인입니다. 그래서 취화소축을 한 번도 나 서 본적도 없으며 오로지 듣는 재미이외는 없지요. 그래서 그런 지 많은 분들이 나에게 그런 즐거움을 안겨준답니다. 특히 소교 나 양백부(伯父=양정)께서 이 곳을 들르실 때면 백리 공자의 이 야기로 나를 즐겁게 해 주셨습니다. 소교는 백리공자의 인품이 나, 어떻게 소교를 구하였는지, 그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공자 님에 대한 열정 등을 들려주었답니다. 양백부께서는 어떻게 공자 를 만났으며 어떠한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지, 얼마나 많은 깨달음 을 얻으신 분인지 저에게 말씀해 주셨지요. 그리고 얼마 전 저의 동생을 강자단이라는 마인(魔人)으로부터 구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형들의 목숨을 구하신 무용담을 전언니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답니다. 그 뿐 아니라 이곳은 온통 공자님의 이야기뿐입니다. 공자께서는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나 구분 없이 예의를 지키 시며 절대로 명령하는 법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뵙 고 싶었습니다. 공자께서는 부디 소녀의 천박함을 꾸짖지 말아 주 십시오." 이렇게 과분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일이었다. 백리향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다. “소생이 어찌……. 다만, 그 분들께서는 소생을 어여삐 보아 말씀 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면 안 됩니다. 소생은 그렇게 대단 한 자가 아닙니다.” 장영령은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맨 처음 나도 반신반의했답니다. 죄송합니다. 실례의 말씀인줄 은 압니다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에게는 선천적으로 앞을 볼 수가 없는 천형을 타고났지요. 그 대신 다른 감각을 발달 시킬 수 있었답니다. 듣는 것과 느끼거나, 냄새를 맡는 것 이외에 도 또 다른 감각인데 공자님이 발휘하시는 영통과 비슷합니다. 예 를 들어 나를 해하려고 오는 자에게는 차갑고 서늘한 느낌이 듭 니다. 그와 반면 나를 사랑하여 오시는 분들에게는 따듯하고 온화 한 느낌이 든답니다. 공자께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자연과 같 은 은근함으로 다가오시어 마치 행동하심이 보이는 듯하고 생각 하심이 들리는 듯 합니다. 작은 개미에게는 인간의 소리가 천둥같 이 들리겠지요? 하지만 작은 듯 속삭이는 소리가 개미에게는 더 욱 잘 들리는 이치와 같지요. 공자께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하지만 나에게는 확실하게 들리는걸요.” 백리향은 감탄하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참으로 귀하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의 사부님께 서는 도를 얻는데 빈부와 귀천이 따로 없으며 남녀노소의 구분조 차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경계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울 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사부님께서 수련에 임함에 있어서 그러한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것에 원칙을 두셨습니다. 오늘 아가씨를 보 니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훨씬 낮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가 씨는 비록 앞을 못 보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것을 볼 수 있 음이 이를 증명합니다.” 장영령은 백리향의 감탄 어린 말에 잠시 얼굴을 붉히다가 조심 스럽게 말을 꺼냈다. “소녀가 공자님을 모신 것은 진리의 말씀을 듣고자 함입니다. 소 녀는 맹인이라 글자를 읽을 수가 없어 항상 시녀에게 읽게 하고 저는 그것을 듣는답니다.” 백리향은 그제야 일개의 노비의 신분인 화아가 그토록 예의범절 을 이해하고 몸소 실천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화아는 장영령 을 위하여 글을 깨우쳤으며 자신이 읽고 그녀에게 말로서 전하 는 과정에서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요 근래 마음이 답답하고 두려워져 글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지요. 어째서 소녀가 이러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소녀의 마음이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그 런 심법이 있다면 부디 가르쳐 주십시오.” 그녀의 말속에는 절실함과 간절한 바람이 깃들어 있었다. 백리향 은 약간의 부담감을 느끼며 헛기침을 토했다. “흠! 아가씨.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은 경험을 통해 들어옵니 다. 듣거나, 보거나, 생각해야지만 눈물을 흘리며, 웃기도 하는 것 이지요. 아가씨께서 답답함을 느끼셨다면 그 만한 경험을 하셨다 는 뜻일 것입니다. 소생에게 심법을 캐어묻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 어보심이 옳을 듯 합니다.” “......” 장영령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녀의 입술이 가끔 움찔거리는 것으로 보아 내면에 심한 갈등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러다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기 시 작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소녀에게는 말 못할 사정이 있답니다. 그래 서 답답한 것이겠지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를 얻고 싶습니다. 불가나 도가에서는 여러 가지의 방법을 통해 잡념 을 극복한다고 들었습니다. 소녀에게 부디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 오.” 답답함이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제약을 받을 때 느끼는 감 정이다. 답답함은 어느 대상에 발산하면 깨끗이 사라지는 것이기 도 했다. 손발이 묶여 답답하다면 그 묶인 것을 풀어버리면 그만 이었고 억울한 일을 당해 답답한 것이라면 누군가에게 속 시원하 게 털어놓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침묵하고 있으며 전혀 발산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백리향은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그녀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 을 바보며 말했다. “저……. 소생이 한 가지 여쭙고자 합니다. 아가씨께서 느끼시는 답답함과 두려움은……. 혹시 대공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습 니까?” 순간,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 그것도 잠시 어느덧 그녀의 고개가 숙여지며 처연한 한숨이 흘 러나왔다. “아! 공자께서는…….사람의 마음을 훔쳐보는 재주를 가지신줄 몰랐습니다. 이러한 것도 영통의 힘인가요?” 백리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생의 스승과 달리 저는 그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못합니다. 단지 오다가 보니 대공자의 처소인 풍축원이 보이더군요. 풍축원 을 가기위해서는 이곳 취화소축을 지나야 하지요. 그리고 아가씨 께서 근래에 답답해하시고 두려워하실만한 사건은 대공자의 의 문스러운 죽음밖에 없음을 알고 있답니다. 그래서 예측을 한 번 해 본 것입니다. 아가씨께서 부인하셨다면 소생은 믿었을 것입니 다.” “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백리향은 그녀를 지 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무언가 듣고, 느끼셨다면 그것은 아가씨혼자만 알 고 계시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가씨는 누군가의 도 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분이니까요.” 장영령은 얼굴을 상기시킨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이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음을 백리향은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침묵으로 일관하였지만, 백리향은 언 제까지라도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 “..........”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한 숨이 흘러나왔다. “휴~ 공자님의 말씀 한 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주사형이 타계 하시던 날 밤 소녀는 화아와 함께 화원(花園)을 거닐고 있었지 요. 그 때 소녀의 귀로 비틀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요. 그와 더불어 지독한 술 냄새가 풍겨져 왔는데…….” 그녀는 무엇인가 말을 할 듯하다가 약간의 여유를 가진 다음 다 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 발자국소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대사형이 거주하고 있는 육 방이었습니다. 당시 소녀는 가볍게 흘려버리고 말았지만, 이튿날 대사형이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 대 사형이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은 소녀로서도 상상도 못했 답니다." 백리향은 그제야 장영령이 않고 있는 불안감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불안감은 막연한 것이 아니고 구체 적이고 실제적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시각이 사라진 대신 청각과 후각에 매우 발달해 있어 야심한 밤일지라도 그녀를 피해갈수 없 었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화아의 입을 통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으리라. 그녀는 그가 주화룡의 죽음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하 고 있었던 것이다. 백리향으로서도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폭풍전야라고 여겼던 육합문은 폭풍 속으로 벌써 들어 와 있었던 것이다. 장영령은 오해의 여지가 있는 이러한 사실을 남에게 알리고 싶 지 않았다. 백리향은 그녀가 걱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더 이상 캐어묻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마음고생이 안타까울 뿐이 었다. “큰아가씨! 만약, 세존께서는 기쁘고, 분노하고, 슬프고, 즐거움을 버리셨다면, 그것은 목석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불문 의 사람들은 목석같이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 닙니다. 세존도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다만, 그것에 방해를 받 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세존께서는 모든 감정을 자연그대로 놓아두시고 인정하셨습니다. 모든 감정이 자신의 심상에서 비롯 된 것임을 아시고 오히려 그 분 자신의 마음의 뿌리를 뽑지 않으 시고 널리 기르셨던 것입니다. 기쁨을 느끼지만 노여움은 사라지 고, 즐거움을 느끼지만 슬픔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저 또한 근래에 들어 이러한 심법을 깨우쳤답니다. 도에 이르는 길은 세상 을 건너는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사람과 단절하고 세상을 도피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심성을 명료하게 깨닫는 심법은 속세 에 섞여서 이것저것 다하는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욕망과 감정을 단절하여 마음을 식은 재처럼 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어깨가 잔잔한 떨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자신 이 세상과 단절한 채 살고 있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숨어있기 보다는 세상에 나가 이것저것을 해보라 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욕망과 감정을 애써 숨기지 말고 발산하 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 정말이지……. 정말이지 너무나 좋으신 말씀입니다. 소녀가 느끼는 답답함과 두려움을 더 이상 회피하지 않고 깨달음의 길이 라 여기고 순순히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취화소축에 은둔하지도 않으렵니다.” “후후후! 아가씨께서는 과연 총명하십니다. 옛날 유마거사(維摩居 士)가 드러누워 계시자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병문안을 가셨지 요. 그러자 유마거사께서는 이런 말을 하셨답니다. <일체의 모든 중생이 병들기 때문에 나도 병든 것이라네.> 후후후! 아마도 아가 씨께서 답답하고 두려우시다면 지금쯤 유마거사 또한 답답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장영령 또한 어느덧 밝은 얼굴이 되어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공자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나에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종종 들 러서 나에게 힘이 되는 소리를 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백리향은 그렇게 대답하기는 하였지만, 그의 마음은 벌써 다른 사람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강백지였다. 제 십사장 歡樂極兮愛情多(환락극혜애정다)-1 환락이 극진하니 애정이 많도다. 어느덧 시월이 바뀌고 십일월 초하루가 되었다. 만물이 깨어나 지 않은 이른 새벽, 만서각의 커다란 책장들을 정리하고 아래층 계단으로 내려와 밖을 나서보니 차가운 가을바람이 낙엽을 떨어 뜨리며 온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백리향은 쏟아질 듯 반짝이는 은하수를 바라다보며 두 팔을 벌 려 시원하고 상쾌한 새벽바람의 기운을 마음껏 즐겼다.차가운 새벽 바람이 백리향의 온 몸을 누비고 다녔다. 이 바람이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필요 는 없을 것이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온 것을 깨달았으면 그만 인 것이다. 문득, 바람 속에서 기이한 기운이 실려 흘러감을 느낀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월동문 바로 앞에 흑색장삼의 검은색 머리띠 를 두른 사나이가 팔짱을 낀 채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향의 얼굴에 싱그러운 가을의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 자 흑의장삼의 사나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이기 시 작했다. "......." "......." 뜨거운 차라도 한 잔하고 가면 좋으련만 흑의장삼의 사나이는 그대로 몸을 돌려 월동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이 월 동문으로 완전히 사라지자 백리향 또한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 이 싱그러운 새벽바람을 다시 즐기기 시작했다 비록 낮선 이방인을 만났다고 하더라도 그 인물이 어떤 사람인 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 번의 미소 로 인사를 주고받으면 그 뿐이었고, 눈빛으로 정감을 주고받으면 그 뿐인 것이다. 침묵으로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으며 서로간의 존 경과 신뢰를 확인하면 그 뿐인 것이다. 형님께서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자 맨 처음 찾은 사람이 백리향 이라고 한다. 형님이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과연 어떠한 사 람일까? 철혈마검 강자단이 열 명이 모인 것 보다 강하다는 사람 은 어떤 사람일까?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서관일 이나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주화운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볼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하 늘을 보았던 것이다. 두 팔을 펼치고 바람과 교감을 이루는 그의 모습을 보았을 때 의 충격이란……. 낮선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다보며 천진난만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 순간이란……. 그 어떠한 감정이 실리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받았을 때의 그 느낌이란……. 문득 주화운은 걸음을 멈추고 아직 영글지 않은 새벽하늘을 바 라다보았다. 형님! 아침에 깨달음을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지요? 어린아 이의 눈을 지닌 자를 만나보니 복수심이 퇴색되어짐을 느낍니다. 소제가 너무 감상적인 것일 까요? 관속의 형님은 너무나 평온한 기색이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형님은 어떠한 깨달음을 얻으 셨습니까? 살아남은 사람은 이토록 원통하고 애석한데 형님은 어 떤 깨달음을 얻으셨기에 그리도 평온한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입 니까? 형님! 아침에 깨달음을 이루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지요? 어린아이의 미소를 지닌 자를 보니 소제는 참으로 공허해집니다. 만약, 형님의 복수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아버지의 염원이 이루 어지지 않더라도 좋을 것입니다. 아침에 깨달음을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니까요. 강백지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자신의 삶을 이어온 육합문을 둘러보았다. 주춧돌 하나에도 서까래 하나 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송골송골 맺혀 있는 것이다. 강백지는 그 아름답고 행복했던 추억을 자신의 기억 속에 각인 이라도 시키려는 듯 어렸을 적 자신이 직접 심은 나무를 손으로 만져보기도 했으며 한 줌의 흙을 두 손 가득히 담아 냄새를 맡아 보기도 했다. 태양이 중천에 이르면 그는 더 이상 육합문의 땅을 밟지 못하게 되리라! 정겨운 나무들, 건물들, 사람들……. 모든 것을 잊어 버려 야 하리라! 강백지는 별들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컴컴한 새벽하늘을 바라보 았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아니면 그릇된 일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작은 올바름에 집착하 지 않고, 작은 그름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다.그는 다시 한번 자 신의 마음을 다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가시밭길인지, 아니면 평탄한 대로인 지 일단은 두려워 말자! 무협(巫峽)의 거센 풍랑에 두려워 말며, 태행산(太行山)의 험난한 길을 두려워 말자! 우선 현실에 집착하 자!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걷자! 복수! 누군가가 자신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그가 누구인지 지금으로 서는 알 수가 없다. 주가장의 사람일 수도 있고 감쪽같이 사라진 백우산일 수도 있다. 아니면 제 삼의 인물일수도 있다. 장양은 고개를 저었다.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시기상조이며 어리석은 망상이라는 것을 너 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질문은 자신이 내어야 하며 상대가 대답을 하도록 만들 어야 한다. 우선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던졌다. 만약 놈이 그 미끼 를 물려고 한다면 모든 궁금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장양은 더 이상 생각도 하기 싫다는 듯이 머리를 도리질을 하며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저 수 많은 별들 중에 자신이 그토록 사랑 해 마지않았던 아내의 별도 있을 것이다. "여보! 오늘이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이요! 만약 당신이 하늘 에서 지켜보고 있다면 부디 충아와 령아와 취아를 악마의 손길에 서 구해 주시구려. 간절히 부탁하오." 장양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그의 어깨가 서서히 들썩 이기 시작한 것은 한 참 후의 일이었다. 그 또한 누군가가 간절 히 그리울 때는 애타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울 줄 아는 그런 사 람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하늘을 올려다보는 네 명의 사나이가 있었 다. 비록 그들의 두 눈은 같은 곳을 바라다보고 있었지만, 그들이 가야할 길은 너무나 다른 곳이었다. *** 시월이 바뀌고 십일 월 초하루의 해가 뜨자 육합문의 문도 들은 비장한 눈빛으로 육합문을 나서기 시작했다. 오늘이 바로 무림맹 에 파견될 인원을 선출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갈고 닦은 자신의 모든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날일뿐만 아니라 어쩌면 인 생의 전환점이 될지도 모르는 날인 것이다. 육합문도들이 천태산으로 떠나자 수 십 명의 또 다른 무사들이 육합문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으며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더 없이 경쾌하였으며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결코 하찮은 삼류무사들은 아니었다. 그 들은 마치 먹이를 찾아다 니는 늑대들 마냥 차가운 눈을 희번덕거리며 출, 입객들을 철저 히 통제하기 시작했으며 육합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감시의 눈길 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백일청은 그들 중에서 철면호 도무방이란 자가 특히 마음에 들 었다. 마음에 든 정도가 아니라 심지어 친구로 사귀고 싶다는 충 동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도무방은 사람들을 잡아끄는 매 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능력도 썩 훌륭한 편이었다. 아울러 농담 도 즐겨해 다른 무사들과 화합을 잘 이루어내고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품속에서 한 장의 서찰을 꺼내었다. 그 서찰 의 겉봉투에는 철면호(鐵面虎) 도무방(到無妨)이라는 여섯 글자 와 그 아래 추천인(推薦人) 사천(四天) 맹호팔기회(猛虎八旗會) 분 타주(分舵主) 노충(老忠)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봉투 안에는 노충의 소견서과 도무방에 관한 신상명세가 적혀있었다. 아울러 분타주 노충의 직인과 함께 말이다. 그것을 다시 확인하자 백일청 은 도무방이 더욱 마음에 들기 시작하였다. 백일청이 봉투를 다시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었을 때였다. 육합문 의 거대한 대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 다. 저들은 오늘 하루 동안 육합문에 일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신원이 확실했으며 신분이 깨끗한 자들 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신원이 확실하다고 하여도 육합문 안으로 들어서 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신분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백 일청은 완벽하고자 했으며 항상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선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 깡마른 체구 의 육순의 노인과 곱게 늙은 노부인도 끼어 있었다. 그들도 다른 낮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방명록에 자신의 이름 앞에 수결(手 決)을 찍어야 했는데 그들의 이름은 곡장생(谷長生)과 그의 부인 연곡진(嚥曲珍)이었다. *** 붉은 태양이 동쪽하늘에 떠오르자 백리향은 낮선 이방인들을 맞 아 들여야 했다. 그들은 강건했으며 매우 강압적인 자세로 만서각 의 곳곳을 헤집고 다녔다. 그다지 이상한점을 발견하지 못한 그들 은 그제야 백리향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육합문의 모든 문도들은 오늘하루 천태산에 올라야 하오. 이것 은 장양어르신의 명령으로 그 누구도 어길 수 없소. 그러니 서관 께서도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에 육합문을 떠나기 바라오.” 그들은 백리향의 대답을 듣기위해 꺼내놓은 말이 아니므로 자신 의 할 말을 한 후 그대로 만서각을 물러났다. 그제야 비로소 백리향은 육합문의 많은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비록 육합문의 모든 수련생들이 자신들의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 천태산으로 향했다고 하지만 그 들과 달 리 육합문에 남아서 일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들까지도 사라졌던 것이다. 노총관의 모습도, 부서관의 모습도, 전노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 고 있었다. 주방(廚房)에서 일하는 아삼(阿三)의 모습도, 마구간에 서 일하는 이노대(李老大)의 모습도 볼 수 없었다. 평상시 하루 에 대 여섯 번씩 마주치던 그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모두 사라지 고 없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뭔가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어떠한 일이 지금 육합 문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걸으며 육합문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이 엄격하고 냉철한 무사들은 모 두 다양한 복장을 하고 있어 어떠한 단체에 가입된 사람들은 아 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들은 상호간의 대화가 적을 뿐 아니 라 어색함 마저 보이는 것으로 보아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집단 인 것이다. 그들은 주로 장지충과 장영령, 장취취 세 사람을 위주로 경호하 고 있었으며 결코 외세로부터 육합문을 지키려는 의도는 아니었 다. 장양은 왜 이러한 일을 벌이는 걸까? 꼭 외인들을 사들여 자식들 을 경호할 필요가 있었을까?장양이 굳이 외부의 사람들을 끌어 들여 자식들을 경호하는 것은 육합문의 사람들을 못 믿고 있다 는 것이다.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어떠한 일이 있었기 에 육합문도들을 이끌고 천태산으로 올랐으며 외인들을 시켜 경 호케 한 것일까? 백리향은 깊은 사색에서 깨어나 보니 어느새 만서각 앞에 서있 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리향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만서각으로 들어갔다. 성큼성큼 들어가던 백리향의 발걸음이 장벽에라도 부딪친 것처 럼 꼼짝하지 못하였다. 만서각에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 은 비단 아름다울 뿐 아니라 젖은 걸레로 열심히 탁자를 닦고 있 었다. 백리향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던 것은 그녀 가 아름다워서도, 그녀가 젖은 걸레로 탁자를 닦고 있어서도 아니 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온천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온천향은 더 이상 흑의복면의 모습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요 염한 기루의 여인의 복장도 아니었다. 머리는 뒤로 넘겨져 간결하 게 묶여 있었고 옷은 밝은 경장 차림의 수수한 모습이었다. 청순 하며 발랄함, 백리향이 그녀에게서 받은 세 번째의 느낌이었다. 온천향은 백리향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열심히 닦던 걸레질을 멈 추고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어 보 며 걸레를 자신의 몸 뒤로 감추었다. 백리향 또한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 “........” 그녀는 걸레를 탁자 위에 놓으며 사뿐히 걸어와 백리향에게 공 손히 장읍(長揖)을 올리며 말했다. “소녀가 백리공자께 빛을 청산하러 왔나이다.” 백리향은 상당히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빛이란 저 번에 강자단과 육합오호검의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 그의 눈길을 그녀도 의식해서인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공자께서는 소녀에게 진 빚을 청산하시렵니까?” 빚 또한 업이다. 그녀의 속셈이 옳든 그르든 그녀의 한 마디의 말에 귀중한 목숨들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리향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물론이오. 말씀하여 보십시오. 그러나 도리(道理)에 한 치의 어긋 남이 있다면 그대의 빚은 다음기회로 미뤄야 할 것입니다.” 백리향의 말에 온천향의 얼굴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아! 물론입니다. 부디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하여 주십시오.” "........?" *** “이, 이게 정말……. 빨리 안 비켜? 너 죽고 싶어?” “.........” 장취취는 분하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나는 천태산으로 가야 한단 말이야! 빨리 비켜!” 그러나 그녀의 살벌한 협박에도 불구하고 문 앞을 가로막고 있 는 무사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듯 했다. 오히려 무 사는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기 시작 했다. “........” 장취취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하자 느닷없이 검을 빼어들 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너! 이제 죽었어! 호위무사나 하는 주제에 감히 나를 무시해? 너 는 오늘 끝장이야!” 그제야 무사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이 조그만 말괄량이 아가씨 를 쳐다보며 말했다. “작은 아가씨! 진정하십시오. 소인은 육합문의 사람이 아니라 아 가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용병입니다. 그러니 너무 무례 한 말씀은 삼가 주십시오.” 그러나 그런 말에 기가 죽을 장취취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이없 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더니 무사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를 패겠다는 거냐?” 무사는 한 동안 장취취를 바라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렇게 해서라도 아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있다면 소인은 마땅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녀는 무사의 말에 자극이 되었는지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뭐, 뭐야! 너 오늘 다 살았어. 덤벼!” 폴짝폴짝 뛰며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는 그녀를 보자 무사는 어 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소인은 아가씨와 싸울 의사가 없습니다. 그러니 정신 사납게 하 지 마시고조용히 앉아서 책이나 잃으십시오.” 다분히 무시하는 어투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책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라며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질렀다. 그리고 뒤로 물러나 며 검을 휘둘렀다. “말도 안 돼! 책이라니……. 책은 화장실 갈 때나 사용하는 거라 고! 무적신녀(無敵神女) 장취취는 책 따위는 보지 않아! 오로지 검 으로 말할 뿐! 오늘 너 놈과 사생결판을 내겠다!” 그러자 무사는 놀랍다는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그 유명한 무적신녀 장취취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사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나오자 그녀는 도리어 어리둥절해졌 다. “그렇다! 내가 바로 무적신녀 장취취다!” 무사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겸손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 소인이 결례를 범했군요? 천하제일 무적신녀님을 몰라 뵈었 다니……. 용서하십시오.” 무사가 자신이 직접 지은 별호를 듣고 고개를 숙이자 장취취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활짝 피며 의젓 하게 말했다. “그대 같은 삼류무사도 내 이름을 알고 있다니……. 기특하구나!” 그러자 무사는 기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다 뿐입니까? 신녀님의 이름을 모르고서는 강호에서 활동할 생각을 말아야 하지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신녀님은 그 귀중 한 책을 화장실에나 갈 때 사용한답니다. 그리고 책만 보면 경악 을 금치 못하고 괴성을 지른답니다. 그야말로 놀라우신 분이 아닙 니까?” “........” 장취취는 할 말을 잊은 채 얼굴이 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러 다가 드디어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하였는데, 마치 터지기 일보직전의 활화산과 같은 것이었다. 무사는 그러한 그녀의 모습 이 귀엽다고 느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무적신녀님은 천하절색이시며 신비하기 이를 데 없는 검술을 지니고 계시기도 하지요.” 순간, 활화산 같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백 팔 십도 일변하더 니 흐뭇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암! 그렇고 말구……. 후후후!” 장취취는 무사의 다분히 아부적인 발언에 흡족해 하며 자신의 원래 목적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오면 당신에게 후한 포상을 내리도록 하지. 당신 의 이름은 뭐지?” 그러자 무사는 고맙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리고 강렬 한 눈빛을 발하며 말했다. "소인은 철면호 도무방이라고도 부르며, 복수무정객(復讐無情 客) 주화운이라고도 부르지요." "……?" *** 사람들은 누구 나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픈 욕구가 있다. 타인 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며, 자신은 결코 평범하지 않음 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무공을 배우고 익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목표는 강함이 다. 그냥 강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무시할 수 없으며 최고 라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이다. 육합문도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 다. 그들의 목표인 최고가 되기 위해, 문주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 해, 자신들이 배운 바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었으며 기량이상의 것 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장양은 제자들의 무공에 대하여 아무 런 관심이 없었다. 그의 얼굴은 매우 어두웠으며 깊은 수심에 차 있었다. 새벽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계획에 자신이 있었으며 곧 놈의 정체를 밝힐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일청의 능력을 의심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고용한 무사들을 믿었다. 최소한 육합문도들보다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자신의 심장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의 책상 앞에 놓인 서찰이 의도적인 것이었다면? 자신이 이러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보낸 의도적인 서찰이었다면? 장양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것은 최악의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우려가 단지 우려로 끝나기를 빌었다. 그렇지 않으면 상상 도하기 싫은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소녀의 동생은 온원원이라고 불리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우리 집 은 너무나 가난하여 하루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였답니다. 당 시에는 오랜 기근으로 굶어죽는 자가 부지기 수였지요. 오히려 살 아남아 있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저희 자매는 은살 막주의 눈에 뛰어 팔려 가는 신세가 되었지요. 그 후부터 저희자매는 살수로서 길러지게 되었답니다. 수련은 혹 독하였지만, 하루세끼를 모두 챙겨먹을 수 있어서 행복했답니다. 배고픔은 무엇보다도 참기 힘든 일이니까요. 우리 자매가 처음으로 살수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소녀의 나 이가 십오 세 때의 일입니다. 우리들의 첫 살인대상은 평범한 문사였습니다. 그는 정말로 착 한 사람이었지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지요. 그래서 저의 은살막 으로 살인 청부가 들어 왔으며 소녀는 그를 죽였답니다. 아! 그 때 의 참담한 기분이란…….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그의 두 눈이 아직 도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원원이 몽혼향에 심취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습니다. 마음 이 가녀린 원원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였으며 항상 죄책감과 불 안감을 안고 살게 되었답니다. 지금 그 아이는 하루라도 몽혼향 이 없으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아이지요.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장양의 죽음을 사주한 자가 나타났습니다. 엄청난 거금을 제시하였지요. 그가 누구인지 소녀 는 알지 못합니다. 오로지 막주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지요. 은살막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석 달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성공가능성을 면밀히 검토한 후에 청부를 받아들였지요. 그리고 다시 세밀한 계획을 세웠답니다. 우선 육합문에 은살막의 첩자를 심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장양 의 습관이나 버릇은 물론이고 일거수일투족 모든 정보를 우리 은 살막으로 보내왔습니다. 그것은 장양뿐만 아니라 그들의 제자들 과 자식들까지 방대한 정보를 보내 왔지요. 은살막주가 주목한 것은 강백지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어려 서 어머니가 병으로 죽자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다가 장양의 눈 에 뛰어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은살막주는 그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강백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미 인계로 접근하였지만, 어느덧 둘 사이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것 이었지요. 강백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달성하든 그렇지 못하든 애초 부터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입 니다. 그 역할을 소녀의 동생인 원원이 맞고 있습니다. 하지만 원 원은 그를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아이를 갖 고 있으며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원원까지 목숨 이 위태롭게 된 답니다. 은살막주는 매우 잔인한 자입니다. 동생은 이미 몽혼향에 의해 폐인이 되어 아무런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은살막에 대하여 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결코 원원을 살려두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쩌면 원원에게 이러한 임무룰 맞긴것도 그 아이를 제거하려는 수작일 것입니다. *** 강백지는 사부의 얼굴에 짙은 구름에 휩싸인 듯하자 의아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부께서는 자신의 앞날을 알고 계시는 걸까?' 강백지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맑디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 상의 모든 일들이 저처럼 맑은 하늘처럼 푸르러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커다란 검은 물체가 날아오르더 니 숲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보였다. 숲 속 커다란 소나무 가지 위에서 종달새 한 마리가 자신의 짝을 찾는지 아름다운 목소리 로 지저귀고 있었고 독수리가 그것을 발견하고 포획에 나선 것이 었다. 강백지는 안타까움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살을 메겼다. 그리 고 독수리를 향해 정조준을 한 다음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은 일 직선을 그리며 독수리에게로 날아갔다. 하지만 독수리와 일장정 도의 거리에서 갑자기 꺾이더니 소나무 가지에 꽂히는 것이 아닌 가? 그러자 종달새는 깜짝 놀라며 숲 속으로 모습을 숨어버렸고, 독 수리 또한 위기의식을 느꼈는지 쏜살 같이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백지는 아연해 하며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화살이 저 토록 심한 굴절을 일으킬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자신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얹혀지는 것을 느꼈다. 강백 지는 화들짝 놀라며 옆을 돌아보았다. “당신은……?” “그대는 종달새의 죽음이 안타까워 활을 날려 보냈지만, 소생은 독수리의 죽음이 안타까워 화살을 돌려놓았소. 강백지! 자연은 자 연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요. 그리고 종달새의 죽 음이 안타까워 독수리를 죽이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오. 진 작 소나무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면 소생이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 아니요?” 강백지는 기이한 표정이 되어 백리향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놀 라움과 경이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이 평소에 알고 지 내던 서관이 분명하단 말인가? 책이나 정리하고, 꽃이나 돌보며, 세월아 내월아 하며 지내던 그 서관이 맞단 말인가? “다, 당신은 누구요?” 강백지는 그가 서관임을 안다. 하지만 그가 서관이기 앞서 진정 한 실체를 알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백리향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녕 나를 몰라서 하는 말이오?” 강백지는 머리를 흔들며 말했다. “모르겠소. 얼마 전까지 당신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 오.” 백리향은 강백지에게 눈을 돌려 천태산기슭의 넓은 공터에서 열 심히 자신들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는 젊은 육합문도들을 바라보 았다. “강백지. 저들의 눈과 당신의 눈은 별반 다름이 없소. 저들의 눈 에 비친 나는 만서각의 서관일 뿐이며 실제로도 그 이상도 그 이 하도 아니오.” 강백지 또한 고개를 돌려 백리향이 바라다보는 곳으로 눈을 돌 렸다. 그리고 강백지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으~음! 그대는 음양오행과 천문지리에 달통 하다는 소리를 들어 서 알고 있지만 무공 또한 그러한지 몰랐습니다.” 백리향의 입에서 어눌하면서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그대는 어리석은 자요. 어째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자 하는 게요? 당신의 손에서 주화룡의 피 냄새가 나오. 그리고 그 손에 또 다른 피를 적시려 하고 있소.” 강백지는 자신의 뇌리에 벼락이 치는 듯한 놀라움으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 당신! 당신은 누군가!” “그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취미요?” “…….” 강백지는 자신의 오른손을 들어 왼쪽의 소매 속으로 가져갔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왼쪽 소매 속에 감추어진 비수로 백리향의 가슴에 쑤셔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백리향은 그러한 그의 의도 를 눈치 챈 것인지 강백지에게 넌지시 말했다. “나 같으면 그러지 않을 거요. 소생의 손이 당신어깨에 얹혀져 있 다는 것을 잊은 게요?” 강백지는 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팔을 내렸다. 확실히 백리향 의 손이 자신의 비파골에 얹혀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마음만 먹 는다면 자신의 비파골은 으스러질 것이다. 문득, 강백지는 전 날 주화룡을 죽일 때 그의 팔을 붙잡은 때와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꼈다. 당시에는 대사형의 팔을 붙잡아 소매 속에 숨겨진 검을 뽑지 못하게 만들었다면 지금은 자신이 검을 뽑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과연 인과응보라는 것이 존재하는 걸까? 강백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이제 어떻게 할 셈이요?” "글쎄……. 나로서도 아직은......." 강백지의 질문에 백리향 또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였 다. 강백지는 깊은 숨을 들이 쉬며 애원하듯 말했다. “믿어주시오. 더 이상 종달새를 위해 독수리를 겨냥하는 일은 없 을 것이오. 당신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장담하건 데 그들이 원하는 데로 일은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요.” “..........” 백리향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듣고 싶은 대답을 그는 들었다.그러나 과연 그의 말을 믿어도 될까? 옛말에 기우(杞憂)라는 말이 있다. 기(杞)나라의 어떤 사람은 하늘이 무너지면 몸 둘 바가 없을 것 이라고 걱정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있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다 른 사람이 “하늘은 기운으로 가득 차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무 너져 떨어지리오.”라고 깨우쳐 주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해와 달은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이 에 그 조언자는 “해와 달도 기운이 쌓여 있는 가운데 빛이 있는 것이고, 설사 떨어지더라도 맞아서 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라 고 깨우쳐 주었다. 그는 다시 땅은 무너지지 않겠느냐고 걱정했다. 그는 “땅은 기운 이 뭉쳐서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무너지는 것을 근심하리요.”라 는 말을 듣고서야 안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지고 걱정하는 기나라 사람 도 어리석지만 미래의 일을 확정지어버리는 조언자 또한 어리석 은 사람이다. 미래의 가능성은 넓고도 넓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그 누 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백리향은 강백지를 믿고 싶었다. 그 누구도 미래의 일을 장담하 지 못하며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백지의 어깨에서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리고 그를 보며 싱긋 웃어 주었다. “가보시오. 당신의 종달새인 온원원이 기다리고 있소.” 강백지는 기가 질린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도대체 이 사람 의 정체는 무엇일까?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백리향이 사람들 사이로 모습을 완전히 감추자 강백지 그 자신 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자신의 애마(愛馬)인 운설(雲雪)위로 올 라섰다. 육합문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중앙의 무대위로 쏠려 있 었기에 그 누구도 강백지를 눈여겨보지 않고 있었다. 말을 몰아 어느 정도 나아갔을까? 강백지는 여느 화살과 다른 차 가운 묵색을 띄고 있는 기다란 화살을 꺼냈다. 그는 착잡한 심정 을 감추지 못하고 한 참을 그 묵색 화살을 쏘아 보았다. 이 무정 한 화살하나가 자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강백지는 터져 나오는 한 숨을 억제하지 못하고 활에 화살을 메 겼다. 그리고 아무런 주저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피융! 하는 파공 음과 함께 화살은 조금의 굴절도 없이 날아갔고, 그대로 장양의 가슴에 꽂혔다. 퍼억! “크윽!” “악! 사부님!” 장양은 활을 가슴에 않고 그대로 의자 밑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이 돌연한 사태에 사람들은 경악했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누 구도 이러한 사태를 짐작했던 사람은 없었으리라. 그의 호위무사 들은 순식간에 장양의 주위를 에워 쌓으며 화살이 날아온 방향 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 강백지가 있었다. “앗! 사형! 이게 무슨 짓이오?” 강백지는 그 들에게 씁쓰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여유롭게 말 을 휘몰아쳐 내딛기 시작했다. 자신의 뒤로 사제들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하는 게냐? 얼른 저 배역무도한 자를 잡아들이지 않고!” 검을 빼어들고 호통 치는 사람은 응조검(應爪劍) 동곽(桐槨)이 란 자로 주화룡과 백우산의 뒤를 이어 육합오호검으로 편입된 자 였다. 비록 돌발적이고, 당황스러운 사태이기는 하였으나 그것을 자신 의 행운으로 돌릴 줄 아는 매우 영리한 사람이었다. 사부의 생사 여부와 관계없이 이 번 일을 선봉에 나서 이끌어 해결해 나간다 면 모든 육합문도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며, 육합오호 검 이상의 자리를 얻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러한 동곽의 이해타산과 관계없이 정신이 번쩍 든 한 무리의 사나이들이 말에 올라타고 강백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제 십삼장 歡樂極兮愛情多(환락극혜애정다)-2 환락이 극진하니 애정이 많도다. “...........그래서 그는 동네에 이런 벽보를 붙일 수밖에 없었지 요. ‘마누라가 강아지를 들고 도망갔음. 찾아 주시는 분에게 후한 사례를 할 예정임. 단, 강아지만 사례함!’ 이라고 말입니다. 후후 후!” 장취취는 그의 말이 끝나자 말자 자신의 배를 움켜잡으며 폭소 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깔깔깔! 당신 정말 재미있는 사람이야! 재미있는 이야기 좀더 해 봐!” 장취취는 평생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 리고 이렇게 통쾌하게 웃어 본 적도 없었다. 그 동안 그녀의 삶 은 무료했으며 단순하였다. 주화운은 그녀의 웃음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짐짓 묘한 표 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한 가지 이야기를 더 해드릴 까요?” 장취취는 너무나 웃어 뻐근해진 턱을 어루만지면서도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응! 얼른 해줘! 재미없으면 알아서 하라고.” 주화운은 그녀의 무례한 언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는 싱 긋이 웃으면서 말했다. “얼마 전에 우리 마을에 마희단(馬戱團= 지금의 서커스)들이 와 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들 중에 마술(魔術)을 부리는 자가 있었는데, 그 마술이란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화운은 자신의 두 손바닥을 장취취에게 보여주었다. “아가씨, 소인의 손바닥을 잘 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그녀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주화운의 손바닥을 쳐다보았 다. “아가씨께서 보셨듯이 소인의 두 손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 지만!” 주화운의 손바닥이 한 번 뒤집자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손에 시퍼런 날이 선 조그마한 단도가 두 개 쥐어져 있지 않은 가? 장취취는 신기함을 감추지 못하고 박수를 쳤다. “와! 대단해, 대단해!” 장취취의 박수에 고무돼서인지 주화운은 자신의 손에 잡혀있는 두 개의 단도를 하늘로 날려 올렸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두 개 의 단도는 사라지고 빈손만 있을 뿐이었다. 장취취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야! 정말 잘하는데? 어떻게 한 거지? 가르쳐 줘!” 장취취의 찬사에 주화운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후후!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 술사가 소인과 같은 기술을 펼쳐 보이자 관객들 중에 중년의 사나이가 벌떡 일어나 아가씨와 같 은 말을 하였지요. <이보시오. 술사(術士)양반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 나에게도 가 르쳐 주시구려!> 그러자 마술사가 말했답니다. <으음~ 그것은 가 르쳐 드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 술사의 세계에서는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켜야 하는 법칙이 있답니다. 만약 손님께서 이러한 비밀 을 알고 싶으시다면 그 비밀을 가르쳐 드립지요. 하지만 손님의 목숨은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은 어떠한 일이 있어서 라도 발설되면 안 되는 것이니까요.> 그러자 그 중년의 사나이는 서슴없이 말했지요. <그렇다면 내 마누라에게 가르쳐 주시오!>” 그러자 장취취는 또 다신 자신의 배를 움켜잡고 뒹굴기 시작했 다. “깔깔깔! 아이고 배야. 깔깔깔!” 주화운은 폭소를 금치 못하고 뒹구는 장취취를 은근히 바라보 며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는 이 마술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으십니 까?” 장취취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 “깔깔깔! 아니. 전혀 궁금하지 않아. 나는 죽기 싫으니까.” 그러자 주화운의 입에서 조용하면서도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 왔다. “소인은 아가씨께 꼭 가르쳐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담담한 듯 말했으나 서늘한 한기를 품고 있 어 듣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장취취는 웃음을 멈추 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화운의 두 눈에서 피어오르는 싸늘 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 사람이 이처럼 순식간에 바뀔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익살스러 움과 다정함은 더 이상 주화운의 모습이 아니었다. 장취취는 평생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 며 억지로 입술을 떼었다. “시, 싫어.” 그러자 주화운은 살기를 번뜩이며 냉혹하게 잘라 말했다. “안됩니다! 아가씨는 이 비밀을 들어야 하며 소인은 말해야 합니 다.” 어느 사이에 주화운의 손에는 공중에서 사라졌던 두 개의 단도 가 쥐여져 있었다. *** “나는 괜찮다.” 장양이 일어서자 그와 함께 그의 가슴에 꽂혀 잇던 화살도 같이 떨어졌다. 화살에는 화살촉이 없었던 것이었다. “백지가 무엇 때문에 이런 장난을 한 걸까?” 장양은 떨어진 화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의 말을 들었는지 동곽은 몹시 분개하며 말했다. “비록 촉이 없는 화살이지만, 사부님께 활을 겨눈 것은 죽어 마땅 한 죄입니다. 그 놈은…….” 짜악! “크윽!” 순간, 동곽은 어찌된 영문이지 알지도 못한 채 장양의 손바닥에 맞아 땅에 뒹굴고 말았다. “흥! 무례한 놈! 백지는 아직 너의 사형이다! 앞으로 또 다시 이러 한 망발을 일삼는다면 이 정도로 끝내지 않을 것이야!” 동곽은 벌겋게 달아오른 자신의 뺨을 쓰다듬으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장양은 그에게 시선을 떼고는 착잡 한 심정으로묵 빛이 흐르는 화살을 주워들었다. 화살은 무정하며 생명을 모른다. 활이 정해준 방향으로 무심히 날아다닐 뿐이다. 그것이 과녁이든, 짐승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백지는 이 화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자신을 죽이려는 의도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화살촉을 빼어 버릴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에 대한 원망인가? 자신에 대한 원망이 이리도 컸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한 장양은 나직이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옛날의 충성스러운 제자는 아니 보이고 교활한 놈들만 남아있 구나.” 두 두 두! 말발굽소리가 천태산에 울려 퍼지며 지축을 흔들고 있었다. 강 백지는 열심히 채찍질을 가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자신 을 뒤쫓는 이십 여기의 말들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들은 자신을 존경했으며 자신도 그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아닌가?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강백지는 자신 의 입술을 악물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대소천태산의 높은 등성이가 자신을 덮쳐왔다. 강백지는 주저 없 이 말을 몰아 산 등성이를 타기 시작했다. 순간, 뭔가 알 수 없는 흰 물체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감을 어렴풋이 느꼈다.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건만 그의 얼굴은 어느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백리향? 강백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가 어떻게 이곳에 있 는 것일까? 설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또한 이리로 도주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더라도 어떻 게 말보다 빨리 산을 탈수가 있단 말인가? 백리향은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 의 눈을 의심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없었다. 백리향 은 없었다. 역시 내가 잘못 본 것일 게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 려 하였다. 하지만 그가 고개를 채 돌리기도 전에 엄청난 광경을 목격하여야만 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 다. 그 거대한 나무는 급기야 쾅! 하는 굉음을 터트리며 쓰러지고 말았다. 강백지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 신은 사제들의 추적으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강백지 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끼며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뇌까리기 시작했다. “고맙소! 백리향! 끝까지 믿어주어 고맙소!” 그의 그런 뇌까림이 백리향에게 전해졌는지 그의 뇌리에 웃음소 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하하하! 당신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 취미요?” *** 주화운은 공포에 떨고 있는 장취취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 갔다. 그의 양손에 들려진 두 개의 단도는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 빛에 반사되어 더욱 찬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주화운의 손이 번 쩍 치켜들었다. 이제 그녀의 목에 이 단도를 쑤셔 넣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잘라 장양의 서고에 갖 다놓으면 자신이 계획한 일부분이 완성되는 것이다. 장양은 서고 에 놓여진 자신의 딸의 머리를 보며 자신이 느꼈던 고통을 고스 란히 느끼게 될 것이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입에 문 채 공포에 떨고 있는 장취취의 얼굴 을 보았다. 그녀가 느끼는 공포만큼 자신의 만족감은 더 한층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려움과 공포에 젖어 동공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확대되어 있었고, 얼굴은 새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그때,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는 순간,주화운의 몸이 잠시 움찔 거렸다. 그리고 어렸을 적에 형님이 즐겨 하시던 말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환청처럼 주화운의 뇌리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화운아! 무(武)란 과(戈=창, 싸움, 전쟁)와 지(止=멎다, 멈추다. 발)가 합쳐진 말이다. 창과 전쟁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무(武)인 것이야!” “복수(復讐)란 불(火)과 같은 것이란다. 나중에는 자신을 태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야! 지더라도 정정당당하게 패했음을 인 정하라!” 단도가 들려진 주화운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마에 송골송 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으며, 참을 수 없는 욕지기가 솟구치 는 것 같았다. 드디어 그의 입에서 짤막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음~” 그 순간, 그의 뇌리에 아버지의 한 맺힌 목소리가 솟구쳐 올라왔 다. “화운아. 부디 이 아비의 한을 풀어다오. 너의 형을 죽음으로 이 끈 자들에게 똑같은 아픔을 느끼게끔 해다오. 그리하여 그들에게 아들을 잃은 아비의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 느끼게 해다오.” “화운아!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그들에게 이 아비가 느 낀 고통을 백배로 돌려주어라. 그리하여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 주어라. 지금 떠나라! 하루빨리 그들에게 고통을 선사하여 주어 라!” “독하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 독하지 않으면…….” 주화운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포효를 내지르며 그녀의 머리를 내 리쳤다. “으, 아아아!”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간단한 몇 초식의 권법만 가르쳐 주었을 뿐 검 법은 일절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다. 열다섯이 되던 해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따져 물었다. “올해로 소자의 나이 열다섯입니다. 아버지는 어찌하여 가전검법 (家傳劍法)인 탈혼십이검(奪魂十二劍)을 형님에게만 가르쳐 주시 고 소자에게는 가르쳐 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무(武)란 무엇이냐?”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잠시 당황하기는 하였지만, 평상시 에 가지고 있던 소신을 밝혔다. “무(武)란 강(强)입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힘이지 요.” 그러자 아버지 말했다. “재고(再考)하여 보아라.” 한 달 후 다시 아버지에게 말했다. “무(武)란 도(道)입니다. 도를 이루어 생로병사로부터 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재고(再考=다시 생각하라!)!” 또 다시 한 달 후 아버지에게 말했다. “무(武)란 생(生)입니다. 검법을 익히는 것이 두렵습니다. 소자는 검법을 익히지 않으렵니다. 몇 가지의 권법에 만족할 것입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무기로서는 사람마음처럼 무서운 것 은 없다. 명검(名劍)이나 신검(神劍)일지라도 그것에 따르지 못한 다. 너의 마음속에 이렇듯 생(生)이 들게 되었으니 오늘부터 검법 을 익히자 꾸나.” 그 후부터 검을 익히고 상대와 결투를 벌이더라도 여유가 있었 다. 타인을 해 할 마음도, 이기려는 마음도, 명성에 동하지 않다 보니 검이 그렇게 여유로 울 수 없었다. 한 번도 패하지도 않았 던 이유가 남을 해 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주화운은 살심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피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장양의 비통어린 얼굴을 상상만 해도 짜 릿한 쾌감을 얻을 수 있었으며 장취취의 두려워 몸을 떠는 모습 을 보기만 해도 자신의 차가운 피가 뜨거워 지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사람 좋아 보이는 노파가 들어왔다. 그녀는 항상 웃고 있었으며 그 웃음은 이웃집 자상한 할머니의 웃음과 다르지 않았다.무언가 포근하고 따뜻한 인상을 지닌 노파. 하지 만 사람들은 그녀가 왕년에 절혼독수랑(切魂毒手狼)이라고 불렸 으며 한 번에 수십 명을 독살한 적이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주화운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유모(乳母). 그들은 식사중인가?” “응. 식사중이지. 맛있게 먹더군.” 사람들에게는 때가 중요하다. 잠을 잘 때와 일어날 때. 혹은 식사 를 할 때와 배설을 할 때. 그리고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지금은 점심을 먹을 때였으며 당연히 사람들은 식당으로 향했 다. 그리고 육합문을 지키는 호위무사들도 식사를 해야 했으므로 그들에게는 특별히 식사가 배달되었다. 그들은 배달된 식사와 함 께 자신들이 죽어야 할 때가 왔음을 알지 못했다. “모두 삼십 오명! 이제 어떡하지?” “소림사의 승려들은 죽은 후 화장을 한다고 하더군. 나는 이보다 깨끗한 방법을 알지 못해.” 절혼독수랑도 웃으며 말했다. “후후! 나도 이보다 깨끗한 방법을 본 적이 없지.” “백일청은?” “지금쯤 마불위가 그를 만나고 있을걸.” “그를 죽여서는 안돼.” “너의 말대로 그는 살아있어. 하지만 아쉬워……. 그에게도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이고 싶었는데.” 주화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내 손에 죽어야 돼.” 절혼독수랑은 장취취를 흘끔 쳐다보며 말했다. “왜 저 아이를 죽이지 않았지?” 주화운은 한 동안 아무런 말이 없다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때로는 삶이 죽음보다 못할 때가 있지. 앞으로 그녀는 자신의 삶 이 저주스러울 거야.” 절혼독수랑은 잠시 장취취의 몰골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 다. “맞아. 내가 저 아이라면 자결하고 말았을 거야.” 제 십삼장 歡樂極兮愛情多(환락극혜애정다)-3 환락이 극진하니 애정이 많도다. 홍화루 내원(內院)의 상방(上房)! 이 곳은 홍화루의 주인이 거처 하는 거실이자 그 누구도 주인의 허락 없이는 들어 올 수 없는 그 러한 곳이었다. 하지만 강백지는 거침없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그 의 모습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가 들어서자 그곳에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문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동경 앞에서 자신의 비단결 같은 머리를 빗질하고 있었다. 그녀 손은 희고도 아름다웠으며, 매우 섬세하였다. 온원원 은 동경에 비춰진 자신의 요모조모를 살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어떻게 된 거죠?” 그녀는 동경에 비춰진 강백지를 원망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결코 추궁하는 음색은 아니었다. 강백지는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 며 말했다. “나는 당신과의 약속을 지켰소. 화살은 전광석화처럼 과녁을 향 해 날아갔지.”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강백지를 바라보았다. 창가로 쏟아지 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청순하며 순결한 그녀의 용모 는 뭇사람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화살촉을 빼고 말이죠? 그 화살에 묻은 독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아깝게 그것을 빼버리다니…….” 강백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 다. “나에게는 전혀 아까운 게 아니었소.” 그러자 온원원은 자신의 서글서글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 했다. 그녀의 눈은 더 없이 서글퍼 보였다. “아시나요? 그것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게 되었 어요. 그리고 소녀는 더 이상 몽환향에 취할 수 없게 되었지요. 그 것은 저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저는 한시라도 몽환향 에 취하지 않으면 살수 없답니다.” 강백지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알고 있소. 떠나시오. 이 정도면 은살막의 눈을 피해 몽환향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것이오.” 강백지는 자신의 품에서 묵직한 은자를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 어주었다. 그것은 강백지의 모든 재산이었다. 그녀의 손이 가늘 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은자덩어리를 바라 보며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급기야 은자덩어리로 눈 물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상공께서는 제가 미우시겠지요?” 강백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소.” 온원원은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이며 강백지를 와락 껴안 으며 말했다. “어째서 그렇죠? 난 당신을 이용했어요. 당신의 인생을 망쳤고, 다시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도록 했지요. 그런데도 제가 밉지 않 나요?” 강백지는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릿결을어루만지며 자상한 목소 리로 말했다. “그것은 내가 원했기 때문이요. 당신이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리 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하지만 그대가 내 곁에 남아 있을 동안이 라도 모든 것을 주고 싶었소. 그것이 다요.” 그녀는 처연한 눈물을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강백지는 모 든 것을 이해한 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공께서는 제가 떠나기를 바라시나요?” 그녀는 애처로운 눈길로 강백지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그렇지만 강백지의 눈길은 자상하기만 했다. “진정으로 그러기를 원하오. 나와 있으면 당신은 커다란 고통을 받을 것이요. 은살 막으로부터, 육합문도들로부터, 수많은 인간사 냥꾼들에게 까지 고통을 당할 것이요. 은살막으로 돌아가시오. 나 와 함께 죽을 필요는 없소.” 온원원은 그 누구보다도 그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 신에 대한 희생이며 헌신이며 지고한 사랑이었다. “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강백지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의 웃음 속에는 무엇이든 이해 한다는 깊은 포옹력이 깃들어 있었다. “.......” 그녀는 강백지의 품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그녀 는 한 참 동안 그렇게 울다가 강백지에게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방을 나섰다. 강백지는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모 습이 문 뒤로 사라지자 그제야 깊은 한 숨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 다. “이별의 슬픔이 장강의 물결과 비교하여 어느 것이 더 깊고 넓 은 것일까?” 강백지는 씁쓰레한 고소를 입에 문 채 어두컴컴한 천장을 바라 보았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이 경험하지 못할 수많은 일들을 경험 했다. 온원원과 불같은 사랑을 나누었으며, 강자단과의 혈투도 겪 어보았다. 배반이라는 것도 해보았다. 몽환향을 피어 환락을 경험 하기도 했으며, 살수가 되어 사형을 암살하기도 했다. 강백지는 허무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백지야, 백지야 너는 참으로 많은 것을 해보았구나! 이제 더 이 상 할 것이 없다면 강태공이 되어 세월을 낚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강백지는 홀가분한 심정이 되어 문을 나섰다. 비록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을지언정 그에게는 아름다 운 추억이 있었다. 그에게는 그것만 있으면 충분했다. 온원원과 의 아름다운 추억만 있으면 평생을 강가에 낚시로 낙을 삼으며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도 한은 없는 것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밖으로 향하는 순간 자신의 눈에 한 여인의 모습 이 들어왔다. “다, 당신!” 그 여인은 두 눈에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강백지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상공께서 소녀의 옆에 계시다면 몽환향은 없어도 좋을 것입니 다. 가난하여 한 끼의 식사를 하더라도 상공께서 옆에 계시면 그 또한 만족할 것입니다.” 강백지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어깨가 떨 리기 시작했다. “당신…….” “만약 은살막으로부터 죽음의 손길이 온다고 하여도,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하여도 상공께서 소녀의 옆에 계신다면 그 또한 반가울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소녀보고 떠나라는 말씀 은 말아주세요.” “........” “........” 그녀는 한 마리의 자유로운 새다. 너무나 사랑하여 새장 안에 가 두어 놓았지만, 새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할 수 없이 그녀를 날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날개를 퍼덕이며 자신 의 머리위로 날아가 버렸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새는 죽어가 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한 번 날아보고 싶었을 뿐이라는 것 을…….그 새는 울면서 말한다. 같이 날아보자고…….그러면 죽어 도 좋으리라고……. *** 은살막에서의 실패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동안 그는 수많은 살인청부를 맡아왔고, 단 한 번도 실수도 없었다. 실수란 곧 죽음 인 세계에서 그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증명한다. 그 동안 살인의 대가로 꽤 많은 돈을 만질 수 있었고 이 정도의 돈이라면 은퇴 후에도 떵떵거리며 살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정체 는 막주만 알 것이고 그 누구도 알 수 없기에 떳떳이 태양을 바라 보며 살수도 있었다. 더 이상 살인을 하지 않고도 은살막에서 중간간부로 아이들을 지도하거나 지시만 내리고도 살수도 있었다. 무엇이 어떻게 되었 든 살인을 하지 않고도 살수 있다면좋은 것이다. 은살막에서의 배신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 스스로도 배신자 는 용서할 수 없었다. 여태껏 자신이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 던 것은 은살막 때문이었다. 자신의 일자리인 은살막의 존재를 흔 들어 놓는 자는 죽어 마땅했다. 이제 곧 배신자는 후회하게 될 것 이다. 그 것은 그들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느끼는 감정이 될 것 이다. 그는 천천히 등 뒤의 검을 뽑았다. 그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공격 하면 그들은 당황할 것이고 그때 양쪽 창문에서 동료들이 뛰어들 어 그들의 목을 취할 것이다. 아니 동료들과 함께라면 암습이 필 요 없었다. 다만 완벽한 죽음을 원할 뿐이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이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자기체면을 걸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체다. 그들은 시체다. 크크크! 그래 저들은 시체일 뿐이 야.” “과연 그럴까?” “헉!” 그가 헛바람을 내 쉬며 뒤를 돌아보자 백의를 걸친 청년이 자신 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호각을 불 어 동료들에게 알리려 하였지만, 어느새 청년은 자신의 명문혈을 지그시 누르며 귓가로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도와주지 못할 것이오. 내가 장담하오. 자, 그들 의 사랑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고 나와 같이 갑시다. 은살막주가 있는 곳으로…….” 홍화루 내원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부처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홍화루의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홍화 루 사람뿐만 아니라 손님들까지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기도 하 는 극히 대중적인 곳이었다. 하지만 그 부처 뒤에 또 다른 비밀 문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열 평 남짓한 어둡고 음습한 공간, 은살막의 살인은 이 곳에서 시작한다. 은살막주는 신비하여 한 번도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 어 본 적도 없었고 은살막의 살수들조차도 그의 정체를 알지 못 했다. 그는 오로지 두꺼운 석벽(石壁)을 사이에 두고 살수들에게 명령을 하달하고 정보를 얻었던 것이다. 석벽의 양쪽에 십여 명 의 살수들이 검을 가슴에 품고 살기를 띄우며 백리향을 바라보 고 있었다. “무엇을 원하나?” 장중한 음성이 석벽을 사이에 두고 양 사방에서 울려 퍼져 왔 다. 그의 목소리로 보아 남자가 확실했으며 젊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석실의 벽을 타고 메아리가 울려 더 한층 신비롭 게 하였다. “강백지, 온원원의 목숨과 당신의 목숨을 교환하고 싶소. 그리고 누가 장양의 죽음을 바라고 있는지 알고 싶소.” 백리향의 목소리는 너무나 진지했으며 단호했다. 그러나 은살막 의 살수들은 그렇게 들리지 않는 듯 했다. "흐흐흐!" "크크크!" 석벽 사이에서 웅장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크크크! 당신이 무공이 고강 하다는 것은 정보를 들어 알고 있 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자네를 암살하려다 몇 번 실수한 적도 있고……. 하지만 이곳은 은살막이야! 당신 옆에 있는 살수들이 허수아비로 보이나? 다행이 그 들을 물리친다고 하여도 이 곳에 는 서른여섯 가지의 암기가 장치되어 있단 말이다. 이 세상 그 누 구도 이 곳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야! 카카카!" 양옆의 살수들조차 어이가 없는지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 다. 하긴 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은 재미있는 한 편의 희극 일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리향에게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백리향은 한 숨을 내쉬며 자신의 등 뒤에 걸쳐져 있는 자전검(紫 電劍)을 뽑아들었다. 푸르스름한 검광이 은살막의 내부를 비추었 다. 그제야 그들은 웃음을 멈추고 자전검을 탐욕의 눈길로 바라보 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그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자전검을 천천히 동서남북 천지의 모든 육방을 검으로 점하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너무나 느려 모든 사람들은 똑똑히 볼 수 있었으며 어떠한 위력도 담기 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마(魔)가 극에 달하면 도리어 정 (正)이 되며 극도의 빠름은 극도의 느림과 같다는 이치를 몰랐 다. 순간, 어둠이 찾아오고 아무런 소리도 빛도 느끼지 못하는 잠깐 의 적막이 찾아 왔다. "일기지여열(一氣之餘烈)! 무상도(無常道), 무상수(無常數), 무상 행(無常行), 무상결(無常訣)!" 어디선가 주문을 외우는 듯한 울림과 함께 엄청난 폭발음이 울 렸다. 콰콰쾅! 그와 동시에 여러 명의 사나이들의 다급한 신음소리가 들려왔 다. "허억!" "으악!" 서서히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하고 뽀얀 먼지가 가라앉자 인공적 으로 만들어진 동굴의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리 향의 좌우에 시립해 있던 살수들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사방에 쓰러져 있었으며 은살막의 내부를 가리고 있던 석벽은 가루가 되 어 날아가고 없었다. 그 뒤로는 커다란 공간이 형성되어 있었고 조그마한 인형이 쓰러져 나뒹굴고 있었다. 그 인형은 경악에서 두 려움으로 표정을 바꾸며 말했다. "다, 당신의 요구조건은 합당하오. 그, 그렇게 합시다." 백리향은 그 조그마한 인형을 바라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고맙소. 장노삼!" 은살막주의 정체는 홍화루의 총관 장노삼이었다. 백리향은 주위 에 쓰러져있는 십여 명의 복면인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복면 또 한 은살막주와 같이 이미 걸레가 되어있었다. "이곳에 노총관께서 계실 줄 몰랐소. 만서각의 책을 횡령하고도 모자람이 있었던 모양이오?" 노총관은 경악에 차 있다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자 한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흐흐!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하지만 서관께서는 청렴 결백하실 뿐만 아니라 높은 무공을 지니신지 알고는 있었소만, 이 토록 경세지공일지는 꿈에도 몰랐소." 그의 수려한 용모와 걸맞지 않은 능글맞은 목소리에서 뭔가 생 각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지난 번 월동문 앞 땅속에서 저를 기다리신 분이 아니오?" 노총관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왜 아니겠소. 육합문에서 유유히 걸어 나갈 사람이 내가 아니면 누가 있겠소?" 아마 천지가 개벽을 일으키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이 런 부류의 사람들이리라.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세 상에 몇이나 될까? 백리향은 오랜만에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오늘 소생은 여러분들과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야 할 것 같습니다." *** 불은 엄청난 파괴 욕을 지닌다. 한 번 불이 난 후에는 그 무엇이 든 전과 같을 수 없다. 욕심 또한 끝이 없어 모든 것을 소멸시키 기 전까지 멈추려 하지 않는다. 불은 전염성이 강하다. 순식간에 다른 곳으로 옮겨 다닌다. 불은 대식가이다. 무엇이든 집어삼킨다. 아무리 집어삼켜도 만족 할 줄을 모른다. 불은 엄청난 성장욕구를 지닌다. 그것은 무절제 하며 무제한성장을 지속하려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이 멈추는 순간 불은 스스로 와해되고 만다. 모든 것을 다 태웠으므로……. 장양은 육합문이 불타오르는 모습을 보며 망연자실해 질 수밖 에 없었다. 자신의 거처인 태의전과 육방이 불에 타 소실되어 있 지 않은가? 그리고 아직까지 육합문 곳곳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 르고 있었다. 그는 순간 자신의 막연한 불안감이 현실에 되어 돌 아오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한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어르신! 정말이지 면목 없습니다.” 백일청은 장양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말했다. 장양은 백일청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보기 드물게 완벽한 사람이었으며 그 누구보다도 그를 신임하고 있었 다. 십년 전 공과교(功果橋)에서 노산산서(怒山山西)의 인물들로 부터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그 후 그와의 인연은 남달 랐으며 자신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든 달려와 해결해 주고는 했었 다. 그래서 그에게 자식들의 신변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 번 일은 그의 실책이라기보다 자신이 놈의 술책에 놀아난 것이었다. 장양은 한 동안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겨우 한마디 던질 수 있었 다. “인명피해는?” 백일청은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집어삼키며 말했다. “호위무사 전원이 몰살당했습니다. 사인(死因)은 독살로 여겨집 니다. 모두들 태의전과 함께 화장당했습니다.” 장양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자네는 그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저는 자객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검은 복장에 두개의 철환 을 쓰는 자였는데 손속이 악랄하고 경공 또한 대단한 자였습니 다. 그를 쫓다보니……. 잠시 육합문을 비우고 말았습니다.” 순간 장양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지금 두 개의 철환을 쓰는 자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얼굴은 복면을 하여 확인할 수 없었지만, 두 눈 은 매우 무서워 보였지요.” 순간, 장양의 뇌리 속으로 한 사람의 영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현 재 강호에서 철환을 쓰는 사람은 단지 세 사람뿐이었다. 한사람 은 대막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동해에서 활동하 고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비환천심마불위(飛丸穿心馬不偉)! 장양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은?” 백일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힘없이 말했다. “장공자와 큰아가씨께서는 무사하십니다. 하지만 작은 아가씨께 서……." 순간, 장양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려왔다. 그가 제일 듣고 싶은 것 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의 자식들만 안전하다면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을 타인 앞 에서 표현을 못할 뿐이다. "취취가 어찌되었단 말인가?"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나, 그것이……." 백일청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들어 장양을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그는 그곳에 없었다. 은은한 우유빛이 감도는 휘장너머로 한 소녀가 온 몸을 부들부 들 떨며 침상에 누워 있었다. 본래 화색이 감돌던 그녀의 안색은 마치 시신처럼 창백해져 있었으며 크고 장난기로 넘치던 그녀의 두 눈은 광채를 잃고 탁하게 보였다. 봉두난발의 그녀의 머리카락 은 모조리 잘려 나가 마치 무덤에 솟아난 잡초더미와 같았다. 무엇보다도 장취취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아무것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녀는 아무것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다보는 장양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으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애가 찾아왔다. 백일청은 처참한 심정으로 장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 아가씨께서 너무 놀란 나머지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계 십니다. 급히 의원을 불러 치료는 하였지만……. 소인의 책임이 큽니다. 어르신!" 장양은 자신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두 눈은 살기로 이글거리고 있었으며 복수심으 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불끈 쥐며 더 이상 차가울 수 없는 냉랭한 어투로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부터 자네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동원하여 샅샅이 수색하여 강백지를 끌고 와.” 순간 백일청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범인들을 수색하는 것이 아니라 강백지를 끌고 오라니……. 어르신이 잠시 이성을 잃 고 헛소리를 내뱉은 것은 아닐까? 장양은 결코 반문을 허락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때만큼은 다시 한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강백지라면, 어르신의 제자분이 아니신지요?” 그러자 장양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끌고 오라면 끌고 올 것이지 뭔 잡소리가 그렇게 많은가!” 백일청은 더 이상 아무런 말이 필요 없음을 깨달았다. 그는 누구 보다 장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냉정했으며 한 번도 이성 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가 강백지를 끌고 오라면 그만한 이 유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한 번도 번복한 적이 없었으며 한 마디의 말을 던져도 항상 적절한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용 하였다. 확실히 그가 사용하는 언어 중에 잡아오라는 단어와 끌 고 오라는 단어는 다른 것이었다. 끌고 오라는 단어는 살아있는 생명체든 아니면 죽은 시체든 관계가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이 이번에 죽은 호위무사들은 모두가 타지의 낭인들이었으 며 자신의 부하는 한 명도 없었다. 즉 그는 조금의 타격도 입지 않았으며 강백지를 끌고 오는데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그는 말위에 올라 천태현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전문가였으며 그것은 그의 부하들 역시 마찬 가지였다. *** 장강의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 흘러도 강물에 비추어진 산 그림 자는 흐르지 않는다. 강물에 비추어진 산자락은 변하지 않으나 사 람은 변한다. 옛날의 사람은 간 데 없고 어제의 소년은 어느새 허 연 백발의 노인이 되어 산하를 바라보며 추억에 젖어 눈물을 흘 리는 것이다. “아! 전노(全老)도 그새 많이 늙었구나.” 주화운은 드넓은 산자락을 굽어보며 장탄식을 터트렸다. 그러자 전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많은 여름날을 보내고, 수많은 겨울날을 보내었더니 어느새 소인의 머리에 허연 가을의 서리가 내립디다. 이제 몇 번의 가을 을 더 보내게 되면 소인은 무덤으로 가야 합지요. 허허허!" 전노의 웃음소리가 산에 메아리가 되어 공허하게 울려 펴졌다. 주화운은 고개를 돌려 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삶에 지치 고 찌든 주름투성이의 촌노의 얼굴이 그의 동공 안으로 들어왔 다. 이 노인은 어릴 적 자신을 업어주고 놀아주었던 그 노인이 확실 하건만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모습은 아니었다. 커다란 시름 과 고생으로 백발이 삼천장이 되어 있는 것이다. 언제나 부지런하며 항상 상대보다 더 깊게 허리를 숙이던 착하 디착한 노인!젊어서 부인과 사별한 후에 자식도 없이 평생을 홀 로 긴긴밤을 지새우며 지내던 불행한 노인!형님이 육합문의 제 자가 되어 주가장을 떠날 때 형님을 보필해야 한다며 굳이 따라 나섰다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했던 충성스러운 노인! 주화운은 전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전노…….그 동안 고마웠어.” 순간, 전노의 눈가에 얇은 이슬이 맺히는 것을 주화운은 볼 수 있었다. "형님의 복수를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장양의 서가에 서찰을 놓아두어 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드디어 전노의 두 눈에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그 어떠한 물질적인 보상보다 주화운의 이러한 한마디가 커다란 행 복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소인이 너무나 모자란 놈이기에 아무도 주시하지 않았 기에 가능한 일이었습죠.” “어릴 적, 형님과 나를 업어주고, 길러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곧 잘 들려주었는데도……. 우리는 전노를 못살게 굴었어. 바보 같다 고 때려도 전노는 웃어 넘겼고, 침을 뱉어도 웃어 넘겼지. 미안했 어. 용서해 줘.” 전노인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소인같은 비천한 노비에게 용서를 빌다니요. 그건 안 되고 말 굽 쇼. 비록 소인은 육합문에 얽매여 있는 몸이지만 마음은 항상 주 가장에 있었습니다. 소인은 영원히 주가장의 사람이지요.” 주화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노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전노는 바보 같았어. 언제나 웃고만 있었는걸. 그렇게 즐 거웠었나?" 전노인은 자신의 눈물을 닦으며 주화운을 바라다보았다. 그 순진무구하고 귀여웠던 갓난아기가 어느새 훌쩍 커버려 그 누 구보다도 당당하고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나 있는 것이다. 전노인 은 주화룡과 주화운이 언제나 자랑스러웠으며 삶의 기쁨이었고, 행복이었다. '그건 말이지요. 두 분 공자님들이 소인의 자식처럼 느껴지는 것 이었지요. 아니, 어렸을 적 두 분은 소인의 자식이었습지요. 소인 은 두 분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항상 자랑스러워했었습니다. 그 것은 소인에게 있어서 더 없는 즐거움이었지요.' 하지만 전노인은 그러한 심정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신분 의 격차는 그 말을 뱉어내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며 커다란 불경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주화운은 그의 그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웃으며 말했다. "전노. 이제 가보아야 할 것 같다. 강백지란 자를 만나보아야 하 겠어. 전노가 말한 소문대로 강백지가 형님을 암살했는지 알아보 아야지." 전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말했다. "물론이 굽쇼. 꼭 만나야 되고 말 굽쇼." 주화운은 빙긋 웃으며 잡고 있던 전노인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의 두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잘 있어야 돼. 전노와 나는 앞으로 할 일이 많으니까." 전노인도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고말고요. 공자님과 소인은 앞으로 할 일이 많지요. 장양의 죽음을 보기 전까지 소인은 죽을 수가 없습지요." 주화운은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 그럼 며칠 후에 보자고!" 주화운은 그렇게 전노인 곁을 떠났다. 전노인은 마음속의 아들 인 주 화운의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지신명의 가호가 그에 게 깃들기를 빌었다. 전노인은 주화운의 모습이 저 멀리 살아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급기야 주화운의 뒷모습이 시야에 서 가물가물해지자 안타까운 마음에 중얼거리듯 말했다. "부디 몸조심해야 하오. 자랑스러운 나의 아들……." 그때였다. 저 멀리 성큼성큼 걸어가던 주화운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는 뒤돌아서서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이봐! 전노! 어렸을 적, 형님과 나는 당신을 어떻게 불렀는지 알 아? 우리는 항상 전노를 가리켜 호호파파(好好??=좋아, 좋아 아 버지)라고 불렀어! 전노는 항상 '좋아요.' '좋습니다.' 라는 말 밖에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 문득 생각해보니 전노에게 한 번도 써먹 어 보질 않은 것 같다! 이제야 말하겠지만, 잘 있어야 돼! 호호파 파!" 주화운은 저 멀리서 손을 흔들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순간 전 노인의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리고 그의 조그마 한 두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바랄게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의 인생은 행복했었냐고 물어 온다면, 자신 의 인생이 성공적이었냐고 물어 온다면 그는 서슴없이 말할 수 있었다. "황제도 부럽지 않아!" *** "모든 것이 잘 되었어요." 온천향은 자신의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손은 길 고 아름다워 결코 살수의 손이라고 믿어져지지 않았다. 이 아름다 운 손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갔을까? 백리향은 나직이 한 숨 을 내쉬고 씁쓰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생이 보기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녀는 찻잔을 들어 살포시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그들의 앞날은 행복하겠지요?" 백리향은 자신의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글쎄요~ 이 세상 만물은 모두가 변한답니다. 불변은 없지요. 사람 의 감정 또한 변합니다. 사랑과 증오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차이 입니다. 물고기는 물의 고마움을 모르게 되며 하늘을 나는 새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게 되지요. 어쩌면 강백지도 온원원 아가씨 의 소중함을 모르게 될 때가 있겠지요. 그것을 망각의 폐단(弊端) 이라고 합니다." 온천향은 뜻밖이라는 듯이 백리향을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공자께서는 너무 현실적이시네요?" 그러자 백리향 또한 차를 한 모금 마시다 말고 뜻밖이라는 듯이 온천향을 바라보았다. "온아가씨께서는 너무 감성적이시군요? 살수로서 그러한 감성은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 아닌가요?" 그녀는 자조석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후후후! 그래요. 하지만 살수들도 인간이랍니다. 인간이기에 완벽 할 수가 없지요. 참! 그들이 공자께 전해 달랍니다. 너무나 감사하 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한 번 찾아와 주시면 감사하 겠다고 합니다. 만약 그들의 거처가 궁금하시다면 소녀가 가르쳐 드리지요." 그러자 백리향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말하지 않으셔도 소생은 알 수 있답니다." 온천향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어떻게!" 백리향은 그제야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오는 것을 아는 이치와 같습 니다. 만약에 온 아가씨께서도 이러한 이치를 깨달으신다면 앉아 서 능히 천리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온천향은 뚫어지게 백리향을 바라보다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으 며 말했다. "후훗! 사람은 누구 나가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가을이 왔음 을 알지요. 한데 소녀는 어째서 십리 밖도 못 보는 걸까요?" 백리향은 웃었다. 그녀의 해맑은 질문은 그녀와 전혀 어울려 보 이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울릴 질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목을 감쪽같이 딸 수 있을 까요? 아니면 어떻게 하면 죽은 시체를 은밀 히 묻을 수 있지요? 이런 질문이 어울렸던 것이다. "후후! 사람이 아무리 큰소리를 외쳐보아도 고작 천 걸음 안팎으 로 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은 천리까지도 닿는답니 다. 그것은 오로지 한 글자로 귀결되는데 바로 마음 심(心)자입니 다.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바로 조짐(兆朕)이라고 하며 이 조짐 을 헤아리는 것은 마음 심(心)자입니다." "마음 심(心)이라……." 온천향은 두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심 자를 되뇌었다. 그러자 백 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온아가씨. 그 한글자만 기억해 두시면 어느 때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답니다. 깨달음이란 한 조각의 돌멩이를 보고도,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도, 하늘의 별을 보고도 순식간에 깨우쳐 진답니다. 그때가 되면 정수리가 열리며 온 몸이 짜릿해지며 더 없는 황홀 감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이는 그 황홀감에 도취되어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며 어떤 이는 옷을 홀딱 벗고 거리를 달려 나가기 도 하지요. 후후후!" 그러자 온천향은 질겁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마음 심 자를 가슴에 새겨두지 않겠어요. 소녀가 깨달 음을 얻어 벌거벗고 거리를 뛰쳐나간다면 그 무슨 망신이겠어 요?" 그 순간 백리향은 마시던 차를 뱉어내며 커다랗게 웃었다. "푸 하하하" *** 구룡곡! 천태산 남단에 자리 잡고 있는 제법 커다란 계곡이었다. 그 계곡 에 한 대의 마차가 질풍처럼 내달리고 있었다. 그 마차는 두 쌍 이 말을 끄는 꽤 커다란 마차인 것만 빼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마차였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으며 창문 또한 굵은 천 으로 덮여있어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결코 범상한 사람이 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 하고 있었다. "사, 상공…….추, 추워요. 아!" 강백지는 자신의 청색장삼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며 꼭 감싸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창백했으며 설빙(雪氷)처 럼 차가웠다. "부탁하오. 참아 주시구려. 여기서 무너지면 결코 몽환향으로부 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오. 앞으로 태어날 우리들의 아기를 위해서 라도 부디 용기를 잃지 말아주시오. 원원!" 그녀는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면서도 손을 들어 강백지의 얼 굴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미소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으며 강백지를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상공……. 소녀가 늙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해 주시겠지요?" 강백지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이오!" 그녀의 섬섬옥수는 어느덧 강 백지의 얇은 입술을 쓰다듬고 있었 다. "느, 늙어 주름이 많아지고 미웁게 변하더라도……. 사랑해 주시 겠지요?" "무, 물론이오. 원원!" 그녀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소녀는 참을 수 있어요." "원원……."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천태현을 뒤로하고 마차는 한 시도 쉼 없이 달렸다. 마차가 구룡곡을 막 벗어나기 시작하자 구룡곡 위 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뒤로 수십 기 의 말들이 은밀히 마차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제 십사장 香魂夜逐劍光飛(향혼야축검광비) 향혼은 밤에 검광을 따라 날아가고..... 벽옥천금당(碧玉千金堂)은 절강성 최대의 도박장이다. 이 곳의 사람들은 하나를 얻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으려 하며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무섭고도 두려운 실존적 투쟁을 벌인다. 투쟁의 방법은 간단하다. 바로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올바 른 선택을 할 경우에는 대박을 터트릴 수 있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되면 쪽박을 차게 된다. 이러한 법칙은 도박에서만 통용되 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도박에 비유하는 것도 이 러한 이유일 것이다. 휘황찬란한 등불아래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 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밖은 쌀쌀한 가을밤이건만 이 곳은 수많 은 사람들의 체온에 아직도 한 여름처럼 후끈거렸다. 땀에 번질거리는 얼굴을 닦으며 주사위를 돌리는 전주(錢主)의 외침과 함께 시끌벅적거리며 돈을 잃은 사람의 탄식과 딴사람의 환호가 어울린다. 패구(牌具)를 즐기는 사람, 음양(陰陽)을 즐기는 사람, 대소(大小) 를 즐기는 사람 등 수많은 도박꾼들이 내뱉는 소리에 시끌벅적 한 시장 통을 연상시키는 것과는 달리 한 쪽 화려한 주렴이 달린 방에서 열리는 도박은 이 들과는 사뭇 달랐다.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커다란 탁자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사나이 가 앉아 있었다. 모두 풍채가 좋고 의상이 화려하여 결코 평범하 지 않은 신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들 옆에는 붉은 주머 니를 찬 홍의대한이 매서운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면서 승리한 사 람으로부터 고리를 떼고 있었으며, 서너 명의 여인들이 싸구려 지 분을 풍기며 교태를 부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밖의 풍경과 는 사뭇 다른 엄숙함이 있었다. 장지충의 옆에는 전은(錢銀) 일만 냥이라고 적힌 전표가 수북이 쌓인 채 무거운 철주에 눌려 있었고, 서너 명의 소녀들이 몰려들 어 그에게 술을 따라주거나 패를 봐주거나 하면서 그의 환심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허어~ 오늘 장노제(張老弟)의 날인가 보네. 재신(財神)이 붙어도 단단히 붙었구먼. 허허! 부러우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천태현에서 열 두 곳의 포목점과 미곡상회 를 가지고 있는 팽림(彭林)이라는 사람으로 그 또한 도박장에서 수 없이 굴러먹은 자였다. 그의 앞에는 대략 삼십만 냥 정도의 전 표가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좌, 우측에 앉아 있는 중년인들의 앞 에는 고작일, 이천 냥뿐이라 상당히 많은 차이를 두고 있었다. "후후! 감사합니다. 뭐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이 세계에서는 아무 도 자신의 돈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요. 언젠가는 소제의 돈이 팽 형님에게로 돌아 갈 것입니다." 장지충은 제법 의젓한 소리를 하며 그를 위로하였으나 그의 표정 은 말과는 달리 득의만만하였다. 팽림은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시작하지. 이 우형이 선을 잡을 차례인가?" 그러자 장지충은 이미 이십만 냥을 따고 있는 상태였으므로 여유 롭게 말했다. "팽형님의 차례가 맞습니다." 장지충은 우선 천문(天門)에 자신의 오천 냥을 걸었다. 이미 돈 을 따고 있었기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지 못하는 두 명의 중년인 들을 떨쳐내기 위해서였다. 고작 일, 이천 냥이 밖에 남지 않은 두 명의 중년인들로서는 그러한 장지충의 행동은 상당히 무례한 것 이었으며 실례되는 행동이었다 . 팽림을 제외한 두 명의 중년 사나이들은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장지충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검패(劍牌=도박의 일종, 도 구)를 내던지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가버렸다. 팽림도 약간 눈살을 찌푸리기는 하였지만 어차피 도박의 세계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모든 돈을 다 잃어 고작 천 냥, 이천 냥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 돈은 따도 그만, 안 따도 그만이었지 만, 운이 크게 작용하는 도박의 세계에서는 일, 이천 냥에 자신의 수십만 냥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떨거지들 은 떨쳐내는 것이 현명한 방법인 것이다. 팽림은 두 개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들은 또르르 구르며 멈 추었는데, 나온 숫자는 오와 육! 합쳐 십일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팽림이 첫 번째의 패를 가지고 장지충이 두 번째의 패를 손에 쥐 었다. 장지충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패를 열어보기 시작 했다. 한 장은 인(人), 또 다른 한 장은 천(天)! 바로 천공(天控)이 었다. 장지충은 자신의 패가 천공임을 확인하는 순간 자신이 승리할 것 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 패로서 얼마나 많은 금 액을 차지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절 동요함 없이 침착하게 사태를 주시하기로 했다. 팽림은 장지충의 침착한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장지충 의 침착함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내면을 들여다보려는 것이다. 불안감이라든가, 아니면 자신감, 승리에 대한 확신 같은……. 한 참을 장지충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장노제(張老弟), 우리 이러지 말고 이 번 한 판으로 끝내세. 자네 가 가진 돈이 전은(錢銀) 삼십만 냥 정도 되겠군! 나 또한 삼십만 냥이 전부라네. 어떤가? 자네는 따라 올 텐가?" 장지충의 잠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는 팽림이라는 인물에 대하 여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웬만한 패를 잡지 않고는 이렇게 무모 하게 승부를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천공이라는 패 였다. 그리 쉽게 나올 수 없는 그런 패인 것이다. 그는 팽림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팽림의 두 눈동자는 쉴 세 없이 움직이고 있었 고 그의 오른손은 박자 없이 무의미하게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 다. 그 순간 장지충은 자신의 승리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는 표정을 전혀 변화시키지 않고 말했다. "으음~ 오천 냥이 아까워서라도 따라 가야겠지요?" 그는 자신의 전 재산을 한 쪽으로 모두 밀어 넣었다. 그러자 험상 궂게 생긴 회의대한이 팽림의 돈과 장지충의 돈을 섞기 시작했 다. 도합 육십만 냥! 장지충이 모든 것이 마무리되었음을 확인하고는 자신의 패를 탁 자에 놓았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띠며 말했다. "하하! 소제의 패는 천공입니다. 만약 형님께서 오천왕(五天王)이 나 연환검(連環劍)을 가지고 계신다면 소제의 돈을 드십시오." 그러자 주위의 사람들이 가벼운 탄성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들은 장지충의 승리를 낙점 하는 것 같았다. 장지충은 자신이 이겼음을 확신하였다. 그러나 도박에서는 확신 은 금물이다. 상대가 큰 액수로 모험을 걸때는 그만큼 믿는 패가 들어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명한 도박꾼은 아무리 자신의 패 가 좋더라도 이런 때는 한 수 양보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지충은 어리석은 자였고 욕심이 많은 자였다. 그랬기에 어설픈 팽림의 표 정연기에 속고 말았던 것이다. 팽림은 야릇한 웃음을 머금으며 자신의 패를 내보였다. 똑같은 문 양을 가진 두 개의 패! 그것은 단순히 문양만 똑같은 패와는 틀렸 다. 장삼대자(長三大子)! 장지충은 벌떡 일어났다가 그만 현기증을 느끼며 의자에 주저앉 고 말았다. 순간, 장내는 떠나갈 듯한 박수가 터지며 팽림의 곁으로 사람들 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팽림은 홍의 대한에게 삼만 냥의 고리를 떼어주고 자신의 곁에 시중을 들어주던 소녀들에게도 얼마씩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개 평으로 장지충에게 얼마를 던져준 후 말했다. "후후! 나에게 장삼대자란 패가 들어올 줄 상상도 못했다네. 하지 만 아무리 좋은 패인들 상대가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자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니 전혀 표정의 동요가 없더군! 자네 가 무표정할 때에는 좋은 패가 들어올 때이지.....이보게. 도박은 패를 읽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읽는 것이라네. 나는 자네를 읽었 고, 자네는 나를 읽지 못한 것일세." 팽림은 수북이 쌓인 전표들을 자신의 품에 갈무리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장지충의 말을 흉내 내며 말했다. "후후후! 이런 도박장에서의 돈은 돌고 도는 것이 아니겠나? 이 돈은 우형이 잠시 맡아 두고 있겠네. 그럼 다음에 다시 봄세!" 팽림은 장지충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주렴을 걷고 나가버렸 다. 장지충은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끼며 머리를 감싸 앉고 말았다. 그 동안 도박장을 돌아다니며 벌써 얼마나 잃었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그는 이 번 도박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었다. 하지 만 그 대가가 너무 큰 것이었다.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 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육합문으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최소한 본 전이라도 찾아가야 했던 것이다. 벽옥천금당의 총관인 마영달은 장지충이 자신에게로 다가오자 눈살부터 찌푸려다. 웬만하면 그만 두었으면 좋으련만 저 도박에 미친놈은 한 번 시작하면 그만둘 줄을 모르는 악귀와도 같았던 것이다. 장지충은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이면서 말했다. "이보게 마영달 나에게 십만 냥만 더 빌려주게." 마영달은 눈살을 찌푸리며 애원하듯 장지충에게 말했다. "공자님! 그만 하시지요. 벌써 얼마나 잃으셨습니까? 그만 돌아가 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그러자 이미 이성을 잃은 장지충에게는 그것이 조언으로서 들리 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혀 눈 알을 부라리며 마영달이 멱살을 잡으며 잡아먹을 듯이 외쳤다. "이 더러운 놈아! 내가 얼마나 많은 돈을 이 곳에 흘려 넣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마영달은 켁켁 거리면서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말했다. "소인이 공자님께 얼마나 많은 돈을 빌려 드렸습니까?하지만 공 자님은 반도 못 갚고 계십니다. 소인으로서도 더 이상 안 되겠습 니다." "그래 받자 다시 너 놈의 수중으로 다시 떨어졌지 않느냐? 과연 너 놈의 손해가 얼마란 말이냐?" 그때였다. 장지충의 귓가로 낯설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여어~! 이게 누군가! 애송이!" 장지충은 낯익은 음성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고개를 돌려보았 다.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나이를 보는 순간 장 지충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히익! 다, 당신은....철혈마검 강자단!" 장지충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도박장의 모든 사람들 의 귀에는 철혈마검 강 자단이라는 일곱 글자가 엄청난 굉음처 럼 들려왔다. 주위는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 졌으며 누구하나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점을 강자단도 느꼈음인지 주위를 찬찬히 돌아보 았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눈길을 피하며 땅을 쳐다보거 나 천장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예전에는 껄껄껄 웃고 말았을 상황이었지만 요즈음 심경의 변화 가 일어난 이후이기에 약간의 미안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강자단은 무안한 가운데 헛기침을 터트리며 자신이 취할 수 있 는 수준이상의 예를 갖추어 말했다. "뭘 꼬나보는 거요! 본인은 도박을 하러 왔을 뿐이오! 그러니 신 경 끄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하시오!" 그의 말이 끝나자 말자 우당탕! 퍼석! 우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도 박꾼들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우당탕은 탁자와 의자가 넘어지는 소리였으며, 퍼석은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창문으로 뛰 어내리는 소리였고우자작은 무공을 익히지 못한 사람들이 문 을 부수고 뛰어나가는 소리였다. "........이, 이런!" 강자단의 예의 바른 행동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겁을 집어먹고 사 라지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남아 있었다. 오십 대의 초로의 노인이었는데 구석에 서서 어정쩡하게 서있는 것이 었다. 강자단은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그에게 친절한 어투로 물었 다. "영감은 뭐요?" 그러자 오십대의 노인은 슬금슬금 강자단에게 다가오더니 조그 마한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 노인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이, 이것은 잠시 전 소인이 강대협께 딴 돈입니다." "그런데?" "다시 돌려 드리려굽쇼." 강자단은 고함을 버럭지르며 말했다. "영감! 노망들었소? 당신이 딴 돈인데 나에게 왜 돌려준단 말이 오? " 노인은 슬금슬금 문 쪽으로 뒷걸음치며 말했다. "돈이 좋기는 하지요. 하지만 생명보다 좋지는 않습지요." 노인은 그 말을 남기고 그 누구보다 쌩하니 도망치고 말았다. "......." 강자단은 그만 한 숨을 쉬고 말았다. 자신의 악명을 다시 한 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손에 참으로 많은 생명 이 살아졌다. 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에게 검을 뽑아 든 적 은 없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그는 고개를 돌려 새파랗게 질려있는 장지충을 바라다보았다. "그 묘한 표정은 뭔가? 자네도 나만큼 반가운 것인가? 그런 것인 가? 껄껄껄!" 강자단은 이 도박장에 홀로 남겨진 장지충의 얼굴을 귀엽다는 듯 이 가볍게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강자단의 친근한 행동과는 달 리 장지충의 얼굴은 순식간에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자네는 나만큼 도박을 좋아하는 게로구나. 하하! 도박장에서 두 번이나 마주치다니……." 강자단은 다시 한번 장지충의 귀를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 자 장지충은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얼굴에 식은땀 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끄윽!" "멀리서 듣자하니 자네는 이곳에 도박 빚이 많은 것 같은데, 과 연 얼마나 되기에 그러는 건가?" 그러면서 강자단은 그의 시원스런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퉁겼 다. 그러자 딱!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이마에 커다란 혹이 생기 기 시작했다. 장지충은 자신의 이마를 감싸않으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크윽! 그, 그건 마, 말할 수 없소!" 장지충이 말할 뜻이 없음을 내 비치자 강자단은 그의 코를 잡고 살짝 비틀며 속삭이듯 말했다. "자네는 나의 애무(愛舞)를 더 받고 싶은 모양이지?" 그러자 장지충은 질겁하며 코방맹이 소리를 내며 말했다. "사, 삼백만 냥!" "뭐, 뭐라고? 삼백만 냥!" *** 달빛 청청한 밤. 가을의 서늘한 밤공기가 하나의 달과 한 대의 마차를 휩쓸고 지 나갔다. 강백지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청정하고 황금빛 만월을 올 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열리며 온원원이 사 뿐히 걸어 내려 왔다. "상공. 밖의 날씨가 춥습니다. 어찌 밖에서 서성이고 계시는 것인 가요?" 온원원의 얼굴은 상당히 핼슥해져 있었다. 몽혼향의 금단현상이 그만큼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리라. 마르고 여위어진 그녀의 얼굴 을 바라보는 강백지의 표정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강백지는 나직이 한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멀고 험하오. 말은 지쳐있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이 때에 산중의 도적들이라도 나타난다면 우리는 꼼짝없 이 일전을 불사해야 할 거요. 어찌 한가롭게 있을 수 있겠소?" "상공. 그렇지 않답니다. 추위를 피하려면 털옷을 겹쳐 입는 것 이 좋고 걱정을 그치려면 웃음만 한 것은 없지요. 이 맑은 달빛아 래 어찌 산중의 도적을 걱정하십니까?" 온원원이 하고자 하는 말은 모든 걱정을 털어 버리고 이 아름다 운 밤을 즐겁게 맞으라는 뜻이었다. 걱정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풀 리지는 않는 법이다. 그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 도 있지 않은가? 하늘이 그들을 돕는다면 그들은 행복한 미래를 맞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뿐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강백지는 최선을 다했으며 그것이 중요한 것 이다. 강백지는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원원의 말이 맞소. 이 달빛이 청정한 밤을 어찌 걱정으로 헛 되이 하겠소. 당신과 함께라면 산 속의 도적들에게 목숨을 잃는 다해도 원이 없을 것이오. 후후!" 이때였다. 강백지의 뒤에서 엄청난 검기(劍氣)와 함께 싸늘한 목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 강백지!" 강백지는 뒤에서 쏘아져 나오는 날카로운 검기에 뒤통수라도 얻 어맞은 듯 멈칫하고 말았다. 온원원 또한 일순 긴장하며 감히 경 거망동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꿈쩍 하지 않았다. 강백지는 뒤돌아보고픈 강한 욕구가 들었지만 차마 뒤돌아 볼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로 쏘아져 오는 날카로운 검의 예기(銳氣) 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백지 또한 평범 한 무인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평정을 유지하며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이 틀렸다는 말이오?" "당신은 확실히 나의 검 아래 고혼이 될 것이지만,나는 산적이 아니오!" 강백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절대로 친구가 아니 며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적인 것이다. "그대가 진정한 일대영웅이라면 기꺼이 나의 목을 드리리다. 그 러니 정체를 밝혀 주시오." 강백지가 호기롭게 말하자 뒤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과연 장양어르신의 제자답게 통쾌하구나!" 순간, 강백지의 귓가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대가 검을 열어 놓는 소리임이 틀림없다. 강백지의 무거우면서 탄성어린 어 조로 말했다. "아직 검을 뽑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런 예기를 보낼 수 있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감탄하오!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본인이 청 산에 뼈를 묻게 되더라도 억울하지 앉을 것이오!" "후후! 이 사람도 사람의 아들일 뿐! 이 푸른 산 속에 누구의 뼈가 묻히게 될지는 검을 나눈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앉다. 그대는 뒤돌 아서라!" 그렇다. 그도 하나의 인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강백지는 검의 예기가 점점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뒤돌 아섰다. 그러면서 자신의 검을 엄지손가락을 퉁겨 약간 열어 놓았 다. 그가 뒤 돌아 서자 약, 삼장(三丈)정도 앞의 거대한 느티나무 뒤 로 한 사나이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덥수룩한 수염과 검 은 죽립 사이로 번뜩이는 눈매가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를 연상 케 하는 사나이였다. 그의 모습을 본 강백지는 피가 싸늘해지고 입안이 타들어 가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 했다. "귀하는 혹시 천잔검(天殘劍) 백일청이 아니오?" "나를 아는가?" “어찌 항주삼검(抗州三劍)의 대명을 모르겠소.” 그러자 백일청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이제 더 이상 항주삼검이라 불릴 수 없게 됐지. 얼마 전 청월검 객 그 친구가 죽었거든.” “헌데 당신 같은 사람이 어찌 소인의 목을 취하려 하시오?" "글세~ 장양어르신의 뜻이라고 할까? 개인적으로는 자네와는 아 무런 원한이 없네." 순간, 강백지의 두 다리가 풀리며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 다. 그는 한 동안 멍하니 있더니 둥그런 만월을 바라다보며 처연 한 탄식을 터트렸다. "사부께서는 대사형의 목숨을 원하더니, 이제는 나의 목숨마저 원하는 구나!" 천잔검 백일청은 그러한 강백지의 참담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자신의 검을 빼어들고는 이리저리 살펴보며 무심히 말했다. 그 러한 그의 행동은 강백지를 안중에도 없다는 무언의 표현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 주위에는 모두 삼십 명의 부하 들이 포위하고 있다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품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러자 그 동안 지켜보고만 있던 온원원이 탄식을 터트리며 말 했다. "휴우~우리는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어요." 그녀의 표정은 안타까움은 묻어 있었으나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 다. 그녀에게는 강백지가 있었고, 강백지에게는 그녀가 있었다. 무 엇이 두렵겠는가? 이심전심이랄까? 강백지는 눈웃음을 지어 보이 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소. 당신은 자유로울 것이오." 순간, 그녀는 강백지의 말에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것은 무슨 의미지요? " 지금 그녀의 망막 속에 맺힌 강백지의 얼굴은 너무나도 행복해 보였고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강백지의 손이 번뜩이는 순간 그녀 의 망막 속의 영상은 점점 어두움에 묻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녀 는 "안돼!"라는 짤막한 말과 함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적막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다. 강백지는 온원원의 수혈(睡穴)을 짙고 쓰러지는 그녀를 부축한 채 애절한 눈빛으로 천잔검 백일청을 바라보았다. 백일청은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백일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도 여인을 해하려는 마음은 없네. 뜻대로 하게나." 강백지는 그에게 가벼운 목례를 한 후 온원원을 앉고 마차로 향 했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살아남는다면 그녀와의 사랑은 이 어지겠지만 그렇지 못하다 하더라도 미련은 없었다. 그는 온원원 의 헝클어진 머릿결을 쓰다듬으며 잔잔한 미소를 입에 베어 물었 다. 어쩌면 마지막으로 보게 될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차 의 문을 조심스럽게 닫고 백일청에게로 향했다. 어느덧 그의 손에 는 자신의 장검이 뽑혀져 나와 빛을 뿌리고 있었다. 백일청의 입에서도 잔잔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 의 검을 한 번 휘두르며 말했다. "이제 우리 둘만 남았군. 그럼 시작할까?" 그 때였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당신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소! 천장검 백일청!" 백일청은 사방에서 울리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동남쪽 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언제부터인지 한 사나이가 팔짱을 끼고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도도하게 서 있었다. 백일청은 잠시전의 상황과 똑같아 짐을 느끼며 피식 실소를 터 트리며 말했다. "무엇이 틀렸다는 말이오?" "둘 만 남게 되는 것은 강백지와 본인이지 당신은 아니오!" 백일청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허허! 당신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 것이 아니요?" "당신은 나를 지나치게 과소평가 하는군." "........." 백일청은 예사롭지 않은 그의 목소리에 다시 한번 그를 바라보 았다. 나무의 그늘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청의잠삼에 매 우 날렵한 신체를 지니고 있어 그가 매우 젊은 사람임을 알 수 있 었다. "무명소졸(無名小卒)은 아닌 듯한데.....당신은 누구요?" "무명소졸 주화운이라 하오." 그러자 백일청의 여유롭던 표정은 사라지고 놀라움으로 가득하 게 되었다. "불패검(不敗劍) 주화운!" "그렇소. 바로 나요." 주화운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수려한 외모 가 달빛을 받으며 나타났다. 제 십사장 香魂夜逐劍光飛(향혼야축검광비)-2 향혼은 밤에 검광을 따라 날아가고 “다, 당신은......!” 백일청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패검 주화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를 익히 알고 있었으며 이곳에서 자신과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 이었다. 그는 불에 타 죽었으며 지금쯤 하늘에서 공자나 진시황 을 만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백일청의 놀라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화운은 가벼운 웃음을 던졌 다. “후후후! 나는 불패검 주화운이기도 하지만 사천에서 온 철면호 도무방이기도 하지요.” “.......!” 백일청은 그제야 사건의 많은 부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장양의 서가에 놓여진 서찰, 호위무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죽음, 불태워 진 육합문의 전각들……. 자신은 주화운의 계책에 철저하게 우롱 당한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부분은 그로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불패검 주화운은 분명히 신비로 점철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 는 곤륜산(崑崙山)에서 두문불출 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거의 몸 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라 그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사람은 드 물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주화룡이 장양의 손에 목숨을 잃었음 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자신의 부하들이 펼쳐놓은 포 위망을 뚫고 나타날 수 있었을까?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주화 운에게 물었다. "이 주위로 나의 부하 삼십 명이 매복 하고 있었을 텐데……." 주화운은 애매모호하며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 백일청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질문은 한 번이면 족한 것이다. 그 대신 그는 아무런 말없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로 대등한 실력을 지닌 자들의 결투에서는 유리한 장소를 먼저 점하는 것 은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제일 좋은 자리는 아 무래도 달을 등지고 서는 것이리라. 달빛에 가려 자신의 표정이 나 행동이 상대에게 노출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와 반면 상대는 달빛에 노출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불패불승(不敗不勝)! 한 번도 패하지도 않았지만, 한 번 도 이겨 본적도 없다고 들었는데…….사실이오?" 주화운 또한 백일청의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걸으며 말했다. "그렇소! 남을 해하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지." "또한 당신은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사 실이오?" "그렇소! 단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지. 살인은 이 세상에서 가 장 혐오스러운 일이오." 백일청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울 이유가 없겠구려. 그렇지 않소?" 백일청은 결코 그와 검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젊어서 불패 의 신화를 남긴 인물인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질 것이라고 생각하 지는 않았지만,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그런 상대는 아니 었다. 또한 주화운과 생명을 걸고 싸울 만큼 깊은 원한도 없었다. "당신은 나에 대하여 잘 알고 있군. 모두 맞는 말이오. 하지만 당 신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소." "무슨 의미인지……." "나 같은 사람도 언제든 살인을 할 수 있지. 잠시 전, 삼십 명의 쓰 레기들을 고혼으로 만들고 오는 중이라오. 마불위! 그렇지 않나?" “킥킥킥! 아무렴 그렇고 말고!” 그러자 괴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좌측의 숲에서 무엇인가가 날아 왔다. 그것은 정확하게 백일청 앞에 떨어져 떼굴떼굴 굴러와 그 의 발 앞에 멈추어 섰다. 순간 백일청의 발걸음이 멈추었으며 주화운의 발걸음도 멈추었 다. 대지 위의 공기가 갑자기 싸늘히 얼어붙는 것 같았으며 무서 운 한기가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 "........" 두 사람사이에 기나긴 침묵이 찾아 왔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비록 자신의 부하가 주화운의 손아래 모두 죽었다고 한들, 또한 자신이 제일 신임하던 부하의 머리통 이 굴러왔다고 한들, 그것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인 것이다. 그 과거에 분노하여 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주위는 무서운 살기로 소용돌이치고 있었으나 두 사람의 표정은 상대를 죽이려는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득도한 고승 마냥 신색(身色)이 편하기 그지없었다. 강백지 같은 무사로 서는 도저히 흉내를 낼 수 없는 그런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무서운 기세는 강백지로서도 처음으로 겪어 보는 것으로 온 몸에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 신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백일청은 사부의 사주를 받았다고 쳐도 저 주화운이라는 사람은 어째서 이 자리에 끼어든 것인가? 그러나 그의 생각은 더 이상 이 어지지 않았다. 창! 하는 청명한 금속성이 울리더니 주화운의 소 매 속에서 가느다란 소검(小劍)이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가 검을 손에 쥐자 무서운 속도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의 서글 서글한 눈매는 잔혹한 야수와 같았으며 그의 몸에서 풍기던 여유 로움은 사라지고 흉맹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백일청은 그의 갑 작스러운 변화를 보자 경악했다. 그가 내뿜는 검기와 살기는 그 의 상상을 초월했던 것이다. 순간 주화운의 몸이 갑자기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신형은 마치 한 마리의 독수리 마냥 빠르고 맹렬함이 있었다. 주화운은 섬전과 같이 날아오면서 연속으로 십이 검을 날렸다. 십이 검은 모두 백일청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으니 강백지로서는 처음으로 보는 최고의 수법이었다. "허억!" 백일청은 너무 놀라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가볍게 몸을 띄워 뒤 로 몸을 비틀고는 그대로 삼장을 물러났다. 그러나 이미 그의 머 리와 의복은 본래의 상태가 아니었다. 너덜해진 의복은 둘 째 치 고라도 그의 머리카락은 모두 잘려나가 공중에 산산이 흩날리고 있었다. 백일청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가 진 것이다. 주화 운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으면 잘려나가는 것은 옷자락과 머 리카락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패배와 죽음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는 패배했을망정죽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은 다시 한 번 기회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검을 고쳐 잡고 주화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비추어진 주화운은 마치 살인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 럼 보였다. 자신의 급소만 노렸으며, 찌르고 베는 데 있어서 그의 손놀림은 매우 절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만큼의 공력만 사 용하는 깔끔하고 아름다운 검법이었으며 무엇보다도 그의 검은 너무나 빨랐다. 백일청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검에 실었다. 일류라고 자칭하는 모 든 무사들에게는 누구에게나 한 수가 있게 마련이다. 그 한 수는 가장 위급할 때가 아니면 쉽게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구명절초 (求命絶招)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백일청은 일류였으며 당연 히 구명절초는 있었다. "손속에 사정을 두어 고맙소. 당신이 왜 불패불승(不敗不勝)으로 불리는지 이제야 알겠소!" "고마울 것 없소. 당신을 편하게 죽이고 싶지 않았을 뿐이오!" "......!" 주화운의 냉혹한 말에 백일청은 어쩌면 이곳에 자신의 뼈를 묻어 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화운이 자신에게 무슨 원한 관계 가 있어 이토록 잔인하게 대하는 것인지 궁금하였지만 꼭 알 필 요는 없는 것이다. 원래 강호라는 세계가 그러한 곳이었다. 약간 의 오해나 이해타산에 의해 수많은 목숨이 사라져 가는 그런 곳 이 바로 무림이라는 곳이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죽어야 되는 이유를 알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시다면 다행이오! 아무런 부끄럼 없이 공격하겠소!" 백일청은 대명이 자자한 무림의 고수로서 손색이 없었다. 그의 마 음은 명경과 같았으며 자신의 몸 상태를 순식간에 최고로 끌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상대가 누구이던 간에 전혀 흔들림 없이 최선 을 다해 싸울 줄 아는 무인이었다. "하앗!" 백일청은 두 발을 박차고 뛰어 오르며 연속으로 세 번의 검을 베 어왔다. 위세가 몹시도 맹렬해 보였으나 실상은 허초였다. 주화운은 백일청의 맹렬한 검세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뒤 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백일청의 모든 공력이 검에 집중이 되어 있었고 마치 폭죽과도 같이 이곳저곳을 노리며 덤벼와 그 변화 를 예측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일청은 순식간에 열여덟 번의 검을 날렸고 모두가 실초를 가장 한 허초였다. 주화운의 표정에 감탄의 기색이 엿보였으나 그것은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하앗!" 챙! 챙! 챙! 검과 검끼리 부딪치는 파열음과 함께 수많은 불똥들이 어두움 밤 에 아름답게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까강! 챙! 챙! 챙! 강렬한 검광이 난무하고 그 파편들이 어두운 밤에 폭죽처럼 쏟 아져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공격과 수비가 얼마나 빠른지 달 빛에 반사되는 검광(劍光)만이 허공을 누비고 있어 마치 수 십 자 루의 검들이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마주치는 검의 광채가 하나 로 얽혀서 누가 백일청이고 누가 주화운인지 알 수조차 없었다. 강백지는 거의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로서는 거 대한 충격이었으며 새로운 개안(開眼=눈을 뜸)이었다. 과연 자신 은 그동안 무엇을 배웠으며 무엇을 익혔던가? 그의 입에서 한 숨 이 터져 나왔다. 주화운이 백일청의 공세에 밀려 뒤로 물러나자 백일청의 공격 은 더욱 빠르고 대범해 졌다. 주화운 또한 수세에서 공세로 바꾸 는가 하면 다른 한 손으로 장력을 쏟아내 검의 진로를 바꾸어 놓 기에 바빴다. 백일청은 갑자기 연속으로 삼십육 검을 휘몰아쳐 오기 시작했 다. 주화운은 그의 막강한 공력이 실린 검을 감히 맞받아치지 못 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백일청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발작적 으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르더니 자신의 죽립을 던졌다. 그리고 연 속으로 허공에서 무수한 검화(劍花)를 만들어 내며 공격하기 시 작했다. 드디어 그의 구명절초인 유성산화(流星散花)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이다. 피~ 잉! 차라락! 죽립은 엄청난 회전력과 공기의 저항으로 굉음을 일으키며 주화 운에게 날아왔다. 그 뒤로 마치 유성처럼 쏘아져 수많은 검화가 뒤따르고 있었다. 그러자 주화운의 얼굴에 놀라움과 감탄의 표정이 어리기 시작했 다. 그러나 그는 전혀 피하려 하지도 막으려 하지도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날아오는 죽립을 바라보았다. 다만 한 걸음을 내 딛었을 뿐이었다. 촤라락! 죽립은 나선형을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주화운의 머리카락을 스 치며 날아갔다. 단 한 걸음의 절묘한 수비! 강백지는 그만 탄성을 터트리고 말았 다. 주화운은 죽립이 자신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감과 동시에 검을 정중방을 향해 밀어 올리듯 두 손으로 치켜들었다. 자신에게 쏟아 져 오는 검화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었 던 것이다. 강백지는 그만 놀라 괴성을 지르고 말았다. 그의 무모 한 행동에 비단 자신만 놀란 것은 아니었다. 백일청의 표정은 거 의 경악에 가까운 것이었다. "헉!" 순간, 백일청은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의 유성산화를 회수했다. 그리고 서둘러 그대로 주화운의 검을 찍고는 반탄력을 이용해 뒤 로 날아갔다. 주화운은 상대의 행동을 미리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번개같 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횡으로 검을 베어 나갔다. 이 번의 검은 불가사의할 정도로 빨라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의 검을 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특히 공중에서 떨어지고 있는 상태임에야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크악!" 참담한 비명과 함께 하나의 팔과 하나의 검이 하늘로 날아올랐 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백일청이 떨어져 내렸다. 너무나 놀란 백 일청은 떨어지자 말자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주화운의 두 번째 검이 또다시 휩쓸기 시작했다. 번쩍 하는 순간, 백일청은 하나의 섬광을 보아야 했다. 그 섬광은 기다란 회전을 그리며 자신의 목으로 지쳐들어 왔다. 백일청은 자 신의 최후라고 생각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의 목에 아무런 아픔과 이상을 느끼지 못 하자 백일청은 슬며시 두 눈을 떴다. 주화운의 검은 자신의 목에서 세 치 정도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 의 검은 번개처럼 빠른 것이었으나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자연스럽 게 멈추어져 있었다. 두 사람의 눈길은 허공에서 마주쳤다. 한 사람은 승리자로서 한 사람은 패배자로서의 눈길일 법도 하건만 그들의 눈길은 똑같이 무심했다. 만약, 그가 유성산화의 공격을 계속 감행하였다면, 주화운의 목숨 을 충분히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 또한 주화운의 검 에 죽음을 면치 못할 상황이었다. 주화운이 들어올린 정중방의 검 의 위치는 가속도가 붙어 떨어지는 그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 던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리 없는 강백지는 어째서 백일청이 검식(劍式) 을 펼치다 말고 거두어 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 얼마의 정적이 흘렀을까? 백일청은 자신의 팔을 지혈을 하고 잘 려나간 팔과 검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신경이 살아있는지 피를 콸 콸 내 쏟으며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 동안 자신의 팔과 검에 얼마 나 많은 사람의 목숨이 사라졌던가? 잠깐의 절망감이 그를 사로 잡았다. 하지만 죽을지언정 적 앞에 나약한 모습은 보여주기 싫었 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화운을 노려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가 묻고자 하는 것은 어째서 자신의 팔을 잘랐느냐는 원망의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째서 동귀어진(同歸於盡)의 수법을 썼 느냐는 것이었다. 서로 간에 철천지원수 지간도 아니었으며 자신 에 비하여 결코 하수가 아닐 터인데 이러한 수법은 너무 지나치 고 야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주화운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겠소? 이것은 하나의 깨달음이오." "........." "이 세상에는 검이나 창보다 무서운 것이 있소. 그것은 사람의 마 음이지요. 당신은 나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 의 목숨도 걸어야 할 상황이었소. 하지만 당신은 자신의 삶을 위 해 마지막 한 수를 기꺼이 포기하였소.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란 말이오!타인의 목숨을 많이 앗아간 자일수록 자신의 목숨에 미련이 많은 법이라오. 나는 당신이 결코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소. " "........!" 백일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화운의 말은 옳 은 것이다. 타인의 목숨을 취하고자 하는 자는 무릇 자신의 목숨 도 내어놓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졌소! 얼른 나의 목을 베시오!" 그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말했다. 자신이 죽는다면 몇 명의 무림 의 친구들은 슬퍼하며 애도를 표하겠지만, 대다수의 강호인들은 기뻐할 것이 틀림없다. 솔직히 그는 친구보다는 적이 많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화운은 가볍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간단히 죽어서는 안 되오." 순간, 백일청은 살기어린 눈으로 주화운을 노려보았다. 고양이는 한 번에 쥐를 죽이지 않는다. 쥐 또한 고양이 앞에서 곧잘 죽은 척을 한다. 고양이는 발톱을 세워 쥐를 이리저리 굴려 보지만 쥐는 고양이가 속을 때까지 결코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쥐에게 점점 실증을 내기 시작한 다. 하품을 하기도 하며 쥐 앞에서 등을 보이기도 한다. 이때 쥐 는 삶의 희망을 품기 시작하며 고양이는 한 때나마 쥐에게 삶의 희망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비로움과는 별개의 문 제이다. 고양이의 해이해진 감시와 빈틈은 의도적인 것임을 쥐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쥐는 성급히 뛰쳐나가는 것이다. 더욱더 깊 은 절망의 늪을 향하여....... 백일청은 고양이가 쥐를 다루듯이 자신을 다루려 한다는 것을 깨 달았다. 그는 주화운에게 강한 반발심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을 느꼈다. 그가 고양이가 아니듯 자신 또한 쥐가 아닌 것이다. 백 일청은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죽는 것에도 간단한 것과 복잡한 것이 있소?" 주화운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가 웃을 때에는 눈 꼬리 가 살짝 내려와 그 누구보다도 순진해 보였다. "후후! 물론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지요. 하지만 고통스러운 죽음 과 편안한 죽음은 있다오." ".........!!" 주화운은 자신의 검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을 사용하는 무 인이 오른손이 사라졌을 때에는 더 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그를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기도 했다. 주화운은 팔짱을 끼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귀하의 가죽을 벗겨낼 생각이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어느 정도 벗겨내면 새빨간 핏줄과 근육이 드러나는 데 내가 준비한 소금을 적절하게 뿌릴 생각이라오." 주화운은 잠시 말을 중단하고 백일청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백일 청은 애써 의연한 척 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은근한 공포 로 일렁거리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주화운은 만족한 듯 다시 말 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 가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뒹굴며 박박 긁 어 될지도 모르오. 약간의 시원함을 맛볼 수 있겠지..... 하지만 당 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오. 내가 당신의 하나뿐인 팔을 잘라 버릴 테니 말이오. 이것으로 일차과정은 끝나지요. 그 다음 이차 과정은....." "그만! 귀하는 나와 무슨 원한 관계라도 있는 게요?" 주화운의 말투는 더없이 부드럽고 은근한 것이었지만, 그 내용 은 더없이 잔인하고 전율스러운 것이었다. 백일청의 시선 속에 주 화운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마였으며 살인귀였다. 백일청 은 자신의 몸이 부르르 떨려 옴을 느꼈다. "백일청! 당신은 정말로 어리석은 자요. 원래 파리는 스스로의 힘 으로는 멀리 날지 못하지만 준마(駿馬)의 꼬리에 붙으면 천리도 갈 수 있는 법이오. 당신은 어째서 준마의 꼬리에 붙지 아니하고 장양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의 하수인이 된 거요? 그것이 당신이 고통스럽게 죽어야할 이유요! 장양과 관계된 사람은 모두 당신처 럼 고통 속에 죽게 될 거요." ".........." 백일청의 입에서 가느다란 한 숨이 세어 나왔다. 그제야 주화운 의 장양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 리고 그 사이에 자신이 놓여지게 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가 보기에는 주화운의 정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만약 정상이라면 장양의 하수인이란 이유만으로 이런 잔인한 고문을 상상할리 없 기 때문이었다. "자 시작합시다. 백일청! 당신의 머리를 약간 잘라놓아야 하겠소." "..........." 순간, 현실로 돌아왔는지 한 동안 아무 말 없이 무심히 주화운 을 바라보았다. 주화운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 왔 다. 그러자 문득 웃음이 솟구쳐 올라왔다. "크, 크큭!" 백일청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미친 듯이 대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주화운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귀하는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 그렇게 기쁘오?" 그러자 백일청은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허리를 숙이며 손을 흔 들며 말했다. "하하! 나도 인간! 어찌 기뻐서 웃을 수 있겠소? 단지 귀하의 어리 석음에 웃었던 것이오. 당신은 스스로 총명하다고 생각하겠지? " "........." 백일청은 웃음을 멈추고 주화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비웃 음이 역력했다. "흐흐흐! 세상을 다 안다는 듯한 일그러진 눈을 해 가지고 는……. 당신은 나의 생명을 주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주화운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장담하오. 당신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죽게 될 거요." 주화운은 백일청이 자신의 생사여탈권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 하게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주화운은 고양이가 아니었으며 백 일청 또한 쥐가 아니었다. 주화운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자신만만하던 표정 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경악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엇!" 백일청의 미소를 띤 입술사이로 한 줄기의 핏물이 흐르기 시작 한 것이다. 진홍색 핏줄기가 백일청의 턱을 정점으로 땅바닥에 뚝 뚝 떨어져 내렸다. 그러다 그의 몸이 잠시 흔들거리더니 앞으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쿵! 주화운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재빨리 다가가 그의 몸을 뒤집 었다. 백일청의 얼굴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실룩이며 경련을 일 으키고 있었다. "독?" 주화운의 놀람과 달리 백일청은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후후! 세상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라오. 주화운! 나의 검에 수많 은 목숨이 사라졌듯이 나 또한 타인의 검에 죽을 것을 알고 있었 소. 그래서 항상 입 속에 독을 숨기고 다니지........쿨럭! 쿨럭!" 백일청의 입에서 한 덩어리의 핏덩이가 튀어 나왔다. 그 핏덩이 는 그의 의복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백일청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허억! 헉! 헉! 나, 난 그만큼 비장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았던 거 요. 후후. 주화운 당신은 영웅처럼 행동하려 하지만 당신은 영웅 이 아니오. 그냥 나와 같은 부류의 불쌍한 인간일 뿐이지....허헉! 기대가 되는군......헉! 염라대왕 앞에선 당신의 표정이 어떨지..... 흐흐,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있겠소. 당신은.... 천천히 오시....." 백일청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둥근 만월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리자 세상의 모든 것이 적막에 휩싸인 듯 했다. 주화운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하고 목석같이 백일청의 주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 와 그의 옷자락을 흔들어 놓았다. 어느덧 구름 속에 숨어 있던 만 월이 다시 온 세상을 비추자 그제야 주화운의 입에서 한탄 어린 한 숨이 세워 나왔다. "아! 당신은 너무 편하게 죽었구나! " 제 십사장 香魂夜逐劍光飛(향혼야축검광비)-3 향혼은 밤에 검광을 따라 날아가고 주화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백지를 바라보았다. 의연하게 서 있는 강백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당신은 혈전을 벌이는 틈을 이용해 도주하지 않았소?" 강백지는 피식 웃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도주해야할 이유가 있소?" "본인은 주가장에서 왔소. 내 이름이 주화운임을 상기하여 보시 오. 어떻소. 도주해야할 이유가 생기지 앉겠소?" 강백지는 그제야 그의 정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 고 보니 그의 모습은 대사형 주화룡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강백 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업보를 해소할 때가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강백지는 웃었다. 이제야 자신의 삶을 짓누르던 죄악에서 벗어 날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온 원원과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그것이 자신의 인생과 직결된 문제라 할지라 도 피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는 당당한 육합문의 제 자였으며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비굴한 일류보다 당당한 삼류로 서 생을 마감하고 싶었다. 윤회가 있어 새로운 삶을 살더라도 그 는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래도 본인은 도망가지 않소!" "당신은 형님의 죽음과 무관하다는 소리요?" "그렇지 않소. 대사형은 나의 비수아래 돌아가셨소." “.....!” 순간, 주화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로서도 강백지가 주화 룡을 살해한 흉수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지 하나의 가 능성만 가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강백지는 너무나 수월 하게 인정해 버린 것이다. 주화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 작했다. "다, 당신……." "……." 주화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냉랭한 목소리로 고함을 버럭 질렀 다. "강백지! 검을 들어라!" 강백지는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그럴 필요가 없소. 주형(周兄)은 그냥 나의 가죽을 벗겨내고 소 금을 뿌리시오.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을 수 있도록……."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은 별개의 문제 가 아니었다. 그는 수없이 많은 육체적인 고통을 주화운에게 당하 면 당할수록 그만큼 대사형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을 것 같았 다. 또한 그래야만 자신이 죽어서 대사형을 만나더라도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평생을 대사형을 살해하였다는 죄책감과 그것을 사주한 사부에 대한 원망을 품으며 비참하게 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그렇게 원하던 온원원의 사랑을 얻었으며 더 이상 아무런 여한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으아아!" 그러자 주화운의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 괴성소리와 함 께 유성과 같은 검광이 나선형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러한 절체절 명의 순간에도 강백지는 무심히 밤하늘을 바라볼 뿐 아무런 미동 도 하지 않고 있었다. 검광은 그의 인후혈(咽喉穴) 한 치 앞에서 멈추었다. 그의 목덜미에 가느다란 실핏줄이 터져 피가 흐르기 시 작했다. 비록 검은 그의 인후혈 한치 앞에 멈추었지만 검풍에 약 간의 외상을 입은 것이었다. 달빛을 받은 검광은 강백지의 얼굴 에 반사되어 창백하고 아무런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 이래도 검을 들지 않겠는가!" 주화운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 의 검 끝도 떨리기 시작하였다. 목석같기만 하던 그의 평정심 이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강백지는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 다. "나는 결코 검을 들지 않을 것이오. 그러니 마음대로 죽이시오." 순간 주화운의 검미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하였다. 주화운은 검을 내려트리며 강백지를 노려보며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당신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되지. 당신은 우리가 격은 고통을 똑같 이 당해야 돼!" 주화운은 고개를 돌려 마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 다. 그의 행동은 명백했다. 바로 온원원을 죽임으로 해서 강백지 에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었다. 깜 짝 놀란 강백지는 달려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무, 무슨 짓이오! 그녀는 이 번 일과는 무관하오!" 순간 주화운의 손이 번득이자 무수한 검영(劍影)이 소매에서 뿜 어져 나와 강백지의 어깨와 앞가슴 등에 피 구멍을 만들었다. 파, 파, 팟! "크윽!" 강백지의 몸에서 붉은 선혈을 내뿜으며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그는 힘겹게 일어서며 미친 듯이 부르짖었다. "제발 부탁이야! 그녀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단 말이다!" 강백지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주화운은 살기를 번뜩이며 마차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다. 마차 앞에선 주화운은 신경질적으로 마차의 문을 열어 젖혔다. 그 순간! ‘파악!’거리는 공기의 파열음과 함께 두 개의 물체가 마차 안에서 쏘아져 나왔다.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주화운은 발작적으로 뒤로 물러나며 소매를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소매에서 검이 튀어나오 며 자신에게로 쏘아져 들어오는 두 물체를 베어버렸다. 투두둑! 주화운의 놀라움에 비해 두 개의 물체는 너무나 싱겁게 조각나 며 떨어져 내렸다. 주화운은 자신의 발밑에 떨어져 뒹구는 물체 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람의 머리였다. 하지만 너무 나 낯익은 사람의 머리였다. 주화운은 두 눈을 부릅뜨며 부르짖었 다. “유모! 마불위!” 두 사람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 에서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고 악행을 일삼아 왔었 다. 그런 그들을 주정천은 받아주었고 감화시켰다. 실제로 그들 이 주가장에 머물면서부터 한 번도 살인을 하지 않았으며 한 번 도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악인들이었을 망정 주가장에서의 그들은 너무나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주화룡, 주화운을 자신 의 자식처럼 돌보아 주었으며 무공도 전수해 주었다. 때로는 유모 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주화운의 곁에는 항상 그들이 있었으며 그 들이 있는 곳에 주화운이 있었다. 주화룡이 죽었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의 자식이 죽은 것처럼 슬퍼 하였으며 아파했다. 그들은 주화운을 도와 복수를 맹세했으며 또 한 그들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검 아 래 조각난 채 뒹굴고 있는 것이다. 주화운은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런 행동 도 취할 수 없었다. 애초부터 주화운은 자신의 검을 믿었으며 자신의 능력을 과신했 다. 그것은 사소한 것이지만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고는 한 다. 두 사람의 목을 보는 순간 그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어야 했 다. 하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공허해 졌으며 그것은 또 다 른 결과를 낳고 말았다. 콰콰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 무리의 빛 덩이가 마차 안에서 쏘아져 나 와 주화운의 하복부를 뚫고 지나갔다. "커억!" 주화운은 피분수를 뿜으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주화운은 믿 을 수 없다는 듯이 자신의 뻥 뚫려진 하복부와 마차 안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이 돌연한 사태에 강백지 또한 어리둥절하여 마 차를 주시했다. 그러나 마차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기척도 들리 지 않았다. ".........." 얼마나 있었을까? 주화운의 몸이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이러 한 돌발적인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그의 표정에 는 경악과 불신으로 가득했다. 그의 부릅떠진 동공에 하나의 만월 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화운은 쓰러지기 직전에 밝디 밝은 만월을 바라도 볼 수 있었 다. 만월은 너무나 따뜻하게 자신을 반기는 것이다. 형의 얼굴이 달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형은 밝은 얼굴로 자신에게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었다. 주화운은 손을 들어 형의 손을 잡으려 하였 지만, 잡을 수 있을 것 같던 형을 끝내 잡을 수 없었다. 쿵! 주화운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그는 몇 번이고 몸을 부르르 떨더 니 급기야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죽은 것이다. 강백지는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가 죽은 것일까? 그렇게 대단한 사람 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는 것일까? 강백지는 어디서 그 런 힘이 솟아났는지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또 다시 엄청난 굉음과 함께 한 줄기의 빛 덩이가 자 신에게로 쏘아져 왔다. 강백지는 피하기 위해 몸을 날리려다가 그 빛 덩이의 실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피하려는 마음 을 버리고 빛 덩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화끈거리는 하복부의 통증이 몰려왔다. 파팟! "크윽!" 강백지는 억지로 신음소리를 자제하고 자신의 하복부를 바라보 았다. 뻥 뚫려 있는 자신의 배가 보였다. 이 상처는..... 역시 사부 의 선풍뢰였다. 사부께서는 언제 오신 걸까? 아마도 주화운과 남강이 혈전을 벌 이고 있을 때 온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강백지는 믿어지지 않는 다는 눈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마차 안에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고아인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학문을 일깨워주 신 고마운 분, 바로 자신의 사부인 장양이었다. 강백지는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었는데……. 너무나도 행복해 죽고 싶었는데……. 참으로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강백지의 머리가 커다란 나선형을 돌면서 쓰러져 버리고 말았 다.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둥그런 만월이 너무나도 눈부시다고 느꼈다. 그런 마음이 전하여 졌을 까? 서서히 하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만월을 가렸다. "헉! 허! 사, 사부님……." 만월을 등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장양이었다. 장양은 고통 스러워하는 제자의 모습을 바라다보며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아야. 미안하구나. 나는 너를 충아 만큼이나 사랑했단다. 하지 만 충아는 나의 핏줄이다. 그 아이를 위해 어쩔 수 없구나." 강백지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해한다는 듯, 잘 알고 있다는 듯 그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었다. 주화운, 백일청, 그리고 자신……. 누가 고양이였으며 누가 쥐였던 가? 막상 죽음을 앞두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도 고양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백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 설사 자신의 사부인 장양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언젠가 사부 또한 한 마리의 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의 이치란 복잡한 듯이 보여도 그 진실 을 꿰뚫고 보면 너무나 간단명료한 것이다. 강백지의 얼굴이 실룩 이기 시작했다. "사, 사부님......부, 부탁이.....허억!" 장양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의 뜻을 받아들이마. 절대로 저 여인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강백지는 편안한 얼굴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반길 준비가 되었다. "부디 행복하시오. 원원" 강백지의 감겨진 두 눈에서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 다. 장양은 한 참을 강백지의 주검을 바라보더니 서서히 걷기 시작 했다. 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되었다. 그는 계책을 꾸밀 때 항 상 두세 가지의 계책을 복합적으로 사용하였다. 하나의 사건에 한 가지의 계책을 사용하는 것보다 여러 가지의 계책을 나란히 사용 하는 것이 현명한 행동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처참하게 변한 백일청의 시신을 내려다보았 다. 그는 한 숨을 내쉬며 둥근 만월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다보는 달은 틀림없이 하나의 달이련만 그것을 바라다보는 시각은 모두 틀린 것이다. 주화운, 강백지, 백 일청등이 바라다보는 시각도 모두 틀렸다. 그 시각의 차이만큼 인 생의 방향도 틀렸다.그는 한탄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미끼가 많으면 많을수록 고기를 낚을 확률이 높다고 자네에게 말했었지? 그것은 거짓말이네. 원래부터 자네가 미끼였지. 나는 자네를 구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네. 내 딸아 이를 지키지 못한 죄를 이렇게 묻는 것일세.” 그는 백일청의 시신에 침을 뱉으며 말했다. “자네는 죽어 마땅해!”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한 참 지난 이튿날 아침이었 다. 마차 속으로 강렬한 햇살이 들어와 그녀를 포근히 감싸는 것 같았다. 그 햇살이 지나가는 자리에 온원원은 말없이 일어났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마차 안 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강백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온원원은 처연히 한 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자신 이 잠들었던 자리에 강백지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녀 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강백지를 발견했을 때는 그는 이미 하나의 시신에 불과 했다. 처참한 몰골을 한 세 구의 시체 중에 유독 행복한 듯 미소 를 머물고 누워있는 강백지........ 그녀는 한참이나 울었다. 울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그녀는 그 렇게 울었다. 절규나 통곡보다 더욱 애절한 것은 소리 없는 울음 이다. 너무나 슬퍼 더 이상 발산할 수 없는 그런 울음인 것이다. 그보다 더욱 슬픈 것은 눈물 없는 울음이다. 너무나 애통하여 슬 퍼할 수조차 없는 슬픔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울다 지쳐 강백지의 품속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또 다시 이튿날 밤이었다. 그녀 는 자신의 품에서 조그마한 보석 상자를 꺼내었다. 조심스럽게 상 자를 열자 그 속에 묵빛을 발하는 화살촉이 보였다. 그녀는 조심 스레 화살촉을 꺼내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문득 지난 날 강백지와 나누던 속삭임이 주마등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 나갔다. "이, 이것은 화살이 아니오?" "왜 아니겠습니까? 이 화살이 제대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면 우 리는 영원히 자유로울 수 있지요." “장담하건데 이 화살은 전광석화처럼 날아갈 것이오.” “소녀는 당신을 믿어요. 이 화살은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징검다리 가 될 것이 틀림없어요.” "후후! 진정한 사랑에는 징검다리가 다리가 필요 없지. 이것은 단 지 보통의 화살일 뿐이오." "안돼요. 우리의 징검다리는 예사 물건이 아니랍니다. 아주 귀하 고 귀한 것이 묻어 있지요. 잘못 만져 상처라도 입으신다면 소녀 는 그대로 청산과부가 될 것입니다." 당시 장양을 살해하라고 준 화살이었건만 강백지가 화살의 대 와 촉을 분리하는 바람에 화살촉만 남은 것이었다. 그런 화살촉 이 진짜로 강백지와의 가교역할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온원원은 당시의 추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손에 꼬옥 쥐었다. 그러 자 그녀의 불끈 쥔 주먹 속에서 가느다란 핏물이 새어나오기 시 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그녀는 심한 현기증과 온몸에 경련을 느낄 수 있 었다.. 고통은 생각보다 심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잠시 후에 만날 강백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는 것이었다. 그녀의 의식이 점점 흐려져 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졸 음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그녀의 귀에 너무나 도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러한 것이 아니었소." 온원원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곳에 강백지가 온몸에 환한 빛을 뿌리며 서 있었다. "아! 당신이군요. 당신을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꼭 이렇게 해야 했소?" "소녀는 하루라도 그대와 빨리 만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 어요." "이 손을 잡으시오. 원원....." 그녀는 그의 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행복 한 미소를 머금으며 강백지의 손을 잡았다.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 주정천이 주화운의 죽음을 안 것은 한 참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주화운의 시신이 주가장으로 인도된 것은 더욱 한 참후의 일이었다. 아들의 시신을 바라다보는 그의 눈은 짙은 절망감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주화룡이 죽었을 때와는 달리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그는 우선 절강제일의 목수를 불러 견고하고 튼튼한 관을 만들었으며 부패될 대로 부패된 주화운의 시신을 직접 염(殮)했다. 그리고 절강제일의 향료상인 천향원(天香園)에서 특별히 향료를 주문하여 주화운의 관안에 집어넣었다. 그는 또한 주화룡이 묻힌 옆자리에 주화운의 무덤을 만들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 또 하나의 구덩이를 팠다. 그것은 자신이 묻힐 자리였다. 만약 자신이 죽는다면 이곳에 묻혀 아들들을 굽어볼 것이었다. 모든 일을 직접 주관하면서도 그는 시종일관 무덤덤하였다. 그의 표정은 침통하기는 하였으나 어떠한 슬픔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두 아들의 무덤 주변에 고운 잔디를 깔아놓았으며 크고 웅장한 비석(碑石)을 세웠다. 그리고 두 아들을 지켜줄 신상(神像)을 세워 극락왕생을 빌었다. 두 아들의 무덤은 여느 왕후장상의 무덤처럼 하려하고 웅장했지만 그가 묻힐 구덩이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한 참이나 주화운과 주화룡의 무덤을 배회하더니 하인들을 시켜 간단한 술상을 장만하도록 시켰다. 그는 술을 즐겨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취하고 싶었다. 이런 날 취하지 않으면 언제 취한단 말인가? 그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은 아들들과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가을의 막바지에 이르러 매우 차가운 날씨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얼마 있지 않아 하인들은 자그마한 탁자와 식합(食盒), 그리고 술 주전자를 들고 왔다. 그들은 그것들을 햇볕이 잘 드는 곳에다 차려놓고는 조심스레 물러났다. 사람들은 보통 모든 것을 이루어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느낄 때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와 반대로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권태로움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던 두 아들을 모두 잃고 나니 모든 것이 권태로웠다. 삶의 목적과 희망을 잃어버렸는데 무엇을 향해 달려 나가겠는가? 그는 모든 일상이 귀찮고 하찮게 느껴졌다. 살아있으되 그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연거푸 석잔의 술을 들이키고는 갓 만들어진 주화운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잔디도 잘 깔려 있었으며 볼록 솟아난 모양새가 썩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잔의 술을 마셨다. 그때 어디선가 서걱서걱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정천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였다. 그곳에 한 명의 괴인이 두 팔을 집고 다가서고 있었다. 그는 틀림없는 인간이었지만 인간이라고 불리기에는 모자람이 있었다. 그는 우선 앉은뱅이였다. 그리고 반백의 머리카락들은 쥐가 파먹은 듯 듬성듬성 자라있었으며 피골이 상접한 얼굴은 시커멓게 타들어가 있었다. 주정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외부의 방해 없이 자식들과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은 누군가?” 앉은뱅이는 그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계속해서 서걱서걱 거리며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묻지 않는가! 당신은 누군가!” 그가 언성을 높이자 뒤에 시립해있던 하인 중 한 사람이 다가서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백우산이라는 자입니다. 주화운도련님의 명으로 지금 벌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그제야 주정천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 괴인이 바로 백우산이라고!” 그는 다시 한번 백우산을 바라보았다. 그가 백우산을 처음 보았을 때 용맹하며 무쇠 같은 강인한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지난날 백우산의 영기 발랄하던 모습을 그 어느 곳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고통으로 인하여 주름이 얼굴에 가득했으며 눈은 흐릿하여 썩은 생선의 눈알과 흡사했다. 주정천은 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화운은 어찌하여 그를 저렇게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그의 목소리를 들어서일까? 백우산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쇠 소리 같은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주께서는 어찌하여 두 분 아드님의 무덤 앞에서 술을 즐기십니까? 어찌하여 무덤 앞에서 통곡을 하지 않으십니까?” 주정천은 한 잔의 술을 다시 들이키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은 참으로 공허해 보였다. “그것은 복수를 끝낸 후, 두 아들을 만나러 갈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자 백우산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하나의 구덩이를 보았다. 백우산은 그가 왜 주화운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자에게 슬픔이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다. 문득 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웃음을 웃음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것은 회한이었으며 지독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주정천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웃는 것인가?” 백우산은 웃음을 뚝 멈추며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친 사람 마냥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힘은 산뿌리를 뽑고, 기개는 천하를 뒤덮었다. 때를 얻지 못해서 추(騅=항우의 애마.)는 달리지 않네. 추 달리지 않네. 어찌하나, 우(虞= 즉 우미인.)야, 우야, 너의 젊음을 어찌 하나!” 백우산의 부르는 노래는 그 옛날 항우가 유방의 군대에 패하여 사면초가에 빠지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던 우에게 들려준 시였다. 백우산의 노랫소리는 명백한 뜻이 있었다. 그것은 조롱이었다. 항우가 일대영웅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말로는 자살이었다. 주정천 또한 강호의 일대영웅이었으나 그의 말로 역시 자살인 것이다. 주정천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신의 술잔을 백우산에게 던졌다. 술잔은 그대로 날아가 백우산의 머리에서 산산이 부서져 파편이 되어 날아올랐다. 백우산의 머리에서 금세 피가 솟구쳐 올라왔다. “너,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백우산은 고통도 못 느끼는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가 한신에게 연전연패하고 팔백기의 기마병으로 후퇴하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결한 것은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장주께서는 어찌 항우와 같은 우를 똑같이 범하려 하십니까? 장주께서는 아직 창창하시어 처첩(妻妾)을 얻어 이세(二世)를 얻으면 대를 이을 수 있을 것이며, 인망이 두터워 장주를 위하여 죽으려는 자가 부지기수입니다. 무공 또한 높아 이미 삼십의 나이로 탈혼무혈일검향이라는 칭호를 얻은 분이 어찌 자식과 더불어 자결을 생각하신단 말입니까?” 그러자 주정천이 몸을 벌떡 일으키며 고함을 질렀다. “자네 같은 자가 어찌 자식을 낳고 기른 아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참담함을 어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릴 적 아이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쥐었을 때 그 기분을 자네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백우산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한 번도 자식을 낳아 길러보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저는 알고 있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장래가 촉망받는 젊은이였지만.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결할 수도 없으며, 복수를 꿈꿀 수도 없게 되었지요. 그는 하루 종일 자신이 존경하던 사형의 무덤가를 맴돌며 귀신처럼 살아야 했답니다. 갈증과 기아에 허덕이며 겨우 살만큼의 먹을 것과 살만큼의 물만 마실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실수만 있어도 심한 매질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죽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죽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죽을 수 없도록 항상 감시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는 자결하고 싶어 합니다.” “......!” 주정천은 순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으며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삶과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삶의 차이를 느꼈으며 자신이 그에 비해 얼마나 행복한가를 깨달은 것이다. 사람은 항상 밑을 보면서 살아야한다. 아무리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이르렀어도 자신보다 못한 삶이 있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백우산은 자신을 조롱할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삶에 대한 한 가닥 미련이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비로서 주화운의 죽음을 통찰하게 되었으며 끊어지는 듯한 단장의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주정천은 백우산을 바라다보았다. 백우산은 언제나 그랬듯이 주화룡의 무덤을 맴돌며 잡초를 뽑고 있었으며 그것이 자신의 할 일 이냥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주정천은 한 참이나 백우산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자네는 더 이상 화룡의 무덤 곁에서 머물 필요가 없네.” 그러자 문득 백우산은 어깨가 움찔거리며 믿기지 않은 듯 주정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제가 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까?” 주정천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자네는 죽을 필요가 없네. 단지 나머지의 생을 즐겁게 보내기만 하면 되네.” “저에게는 죽음이상 즐거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한 가지의 일에 매달리게 되면 편집증으로 변하게 된다. 백우산은 죽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으며 어느 사이에 그것이 삶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다. 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최대의 소망처럼 되어버렸으며 그 어떠한 다른 삶도 상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주정천은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고는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차후에 생각하면 될 것일세. 자네가 죽고자 한다면 언제든 기회를 마련하지. 그것은 자네의 자유이니까 말일세. 하지만 나의 바람은 자네가 조금 더 내 곁에 머물러 있어 주었으면 하네.” “......!” 한동안 꼼짝없이 얼어붙어 있던 백우산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말랐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자유! 그 두 글자는 확실히 죽음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지금 하늘아래 땅위로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 두 사람은 만났고 서로의 아픔을 나누워 가졌다. 그 결과 두 사람모두 죽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 나뭇잎 한 장이 위태롭게 달랑거리다가 매서운 가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렸다. 이미 말라비틀어지고 부석부석해진 잎사귀는 풍력에 의해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살랑거리며 대지위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가을은 참으로 비장한 계절이다. 다음의 세대를 위하여 과감하게 죽어 가는 계절이며 새로운 세대를 위하여 축복하는 계절인 것이다. 가을은 묘한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을 수확하고 결실을 가져다주지만 또 한 편으로는 깊은 몰락의 길로 향하는 것이다. 풍성한 과실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과실수를 보라! 먹음직스럽고 풍요한 과일 옆에 물기를 흡수하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잎사귀들이 같이 있다. 결실과 몰락은 빛과 그림자처럼 항상 같이 있는 것이다. 백리향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심어놓은 야국(野菊=들국화)을 바라보았다. 사군자의 하나인 국화와는 달리 마치 버림받은 자식 마냥 산이나 들의 양지바른 곳에 아무렇게나 자라나는 꽃이다. 그래서 백리향의 눈에 띄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삭막한 늦가을에 그나마 연분홍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에서 회색빛 세상에서 어떠한 희망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리향이 야국의 정취에 흠뻑 빠져 있을 때였다. 자신의 등 뒤로 가냘프면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십 여 일이 지나도록 취화소축에 찾아주시지 않으시기에 소녀가 오고야 말았습니다. 천박하다 욕하지 않으시겠지요?” 그가 고개를 돌려보니 장영령이 화아의 부축을 받은 채 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그렇게 서있었다. 그녀의 화사한 웃음과 고혹적인 자태를 보는 순간, 그녀만큼 가을과 잘 어울리는 여인은 드물 것이라고 백리향은 생각했다. 백리향은 가벼운 목례로서 그녀를 맞았다. “용서하십시오. 나름대로 바쁨이 있었습니다.” 백리향의 어설픈 변명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 들어오다 보니 소녀의 코를 자극하는 향기가 풍기더군요. 소녀로서는 처음으로 맡아보는 향기였습니다.” 백리향은 그녀의 뛰어난 후각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두 눈을 잃은 대신 그녀는 결코 범상하지 않은 오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야국을 말씀하시나 봅니다. 한 참 꽃을 피우고 있지요.” “야국이라 하셨나요? 이름이 그다지 곱지 않네요? 하지만 공자님이 키우셨다니 평범한 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야국의 향기를 처음 접해 본다니……. 백리향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평범한 것입니다. 너무 평범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뇌까리듯 말했다. “너무 평범하여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못하는 꽃이라…….한 번 만져 보아도 될까요?” 백리향은 그녀의 얼굴에서 강한 호기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의 호기심은 단순히 야국의 향기에 매료 되어서는 아니었다. 자신의 모습뿐만 아니라 세상의 사물을 눈으로 확인 할 수 없는 그녀로서는 야국과 같은 처량한 신세라고 생각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물론입니다. 야국도 아가씨를 좋아 할 것입니다." 백리향의 말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녀는 백리향이 자신을 즐겁게 하려고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농담이시겠지요. 꽃이 어찌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닐 수 있겠습니까?" 백리향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닙니다. 야국은 살아서 숨쉬고 있습니다. 야국뿐만 아니라 이세상의 모든 것은 살아있고, 소생은 그 숨결을 느낄 수 있답니다." 백리향의 차분한 음성에 그녀는 웃음을 멈추고 나즉이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 군요. 하지만 공자님의 말씀을 믿고 한 번 만져보겠습니다. 화아야?" 그녀가 시비의 이름을 부르자 시비는 그녀를 야국이 풍성하게 자란 곳으로 인도했다. "꽃의 속삭임을 들으시려면 우선 자신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꽃을 살아있는 생명으로 인정하셔야 합니다. 인간과 같이 호흡을 하며 영혼이 살아 있음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꽃에게 인사를 보내십시오. 그럼 꽃들은 아가씨에게 분명히 화답을 보내 올 것입니다." 그녀는 야국의 가지와 잎사귀와 꽃잎들에게 손길을 주며 백리향의 설명에 따라 자신을 낮추고 꽃들이 하나의 생명체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녀는 어떠한 기운이 자신의 손끝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영롱한 방울소리 마냥 은근한 속삭임이 그녀의 심상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점점 환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꽃이 살아있어요. 나한테 말하는군요. 반갑다고...." 백리향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식물들은 생명을 지니고 있다. 수백만 년을 이어온 것이기에 인간들의 역사보다 더욱 오래된 것이고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식물들이 어찌 인간처럼 말할 수 있으랴. 그녀는 단지 야국에서 솟아나오는 기운과 합일 되었으며 그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반사람보다 영적인 능력이 강한 편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영령은야국을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말했다. "소녀는 바라본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자 백리향은 애틋하면서도 한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차라리 소생은 장님이고 싶습니다. 삶을 살다보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게 되어 괴로움을 느끼게 되며, 듣고 싶지 않은 것을 듣게 되어 슬픔을 느끼게 된답니다. 소생이 세상에 나와 수많은 허구와 진실을 보게 되었답니다. 부를 축척한사람, 명예를 가진 사람, 야망을 이루려는 사람, 모두가 저에게는 불행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 장영령은 백리향을 말을 한 참이나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공자 이 꽃을 보십시오. 공자의 말씀대로 이 꽃은 너무나도 평범하여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꽃입니다. 다행히 공자께서 이 꽃의 아름다움에 이끌리어 이곳에 심으셨지요. 그 하나만으로 야국이 존재해야 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의 모든 것이 더럽고 추악하다 할지라도 단 한 가지라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눈을 뜨고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백리향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의 웃음은 기쁨으로 가득한 것이었다. "참으로 옳으신 말씀입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 백리향의 칭찬에 장영령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못난 식견을 그렇게 칭찬하여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자께서는 야국을 사랑하시듯 저의 말을 귀담아 들으셨을 것입니다." 이 말은 백리향이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야국을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가엽게 여겨 칭찬하는 것이 아니냐는 겸손을 뜻하고 있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자신을 너무 비하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소녀는 보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드린 말씀일 뿐인걸요. 세상만물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겨울철 내리는 눈이라는 것, 봄에 새싹이 트는 것. 여름철 비가 내리는 것, 가을에 낙엽이 지는 것 누구 나가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소녀에게는 느낌만 올 뿐 상상은 불가능하답니다. 소녀가 꾸는 꿈조차 암흑의 세계에서 소리만 들린답니다." 그러자 백리향은 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틀림없이 백색의 신비로운 눈과 칠 채의 아름다운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소생이 아가씨께 마지막인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조만간 소생은 육합문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장영령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떠나....신다고요?" "세상은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생자필멸, 회자정리(生者必滅, 會者定離) 살아있는 자는 언젠가는 죽고, 만난 자는 언젠가 해어지게 되어 있지요. 저로서도 조만간 이곳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그녀는 곰곰이 백리향의 말을 되새겨 보더니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공자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만난 자는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지요. 그리고 헤어진 자는 언젠가 다시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하나의 자연의 법칙일 것입니다. 소녀는 그리 알고 공자께서 다시 한 번 육합문을 찾아 주시리라 믿고 있겠습니다. 공자께서는 부디 저의 작은 소망을 잊지 마십시오." "........." 그러나 백리향은 아무런 말이 없다. 스스로도 지금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데 어찌 머나먼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는가? 단지 푸르고 드넓은 창천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날 밤 백리향은 꿈을 꾸었다. 찬란한 빛무리 속에서 두 사람의 선남선여(善男善女)가 하얀 옷 곱게 차려입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들의 몸에서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나 백리향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교감이란 그런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으며 듣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두 연인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마치 행복에 겨운 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리고 자신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그들의 마음이 백리향에게 전하여져 왔다. 그러자 하늘이 열리며 성스러운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들은 그 빛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해맑게 웃으며 빛이 유도하는 데로 올라갔다. 새벽의 찬 기운이 방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백리향은 문득 잠에서 깨어나며 슬그머니 일어났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창문이 활짝 열려져 있었다. 백리향은 창문을 닫기 위해 침대에서 벗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 밖으로 어두컴컴한 새벽의 밤하늘이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백리향은 아름답게 수놓아진 별들을 바라다보며 강백지와 온원원을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꼭 듣고 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백리향의 입에서 애절한 한 숨이 흘러나왔다. 실제의 달은 하나이지만, 그 그림자는 수 없이 많은 것이다. 달을 바라보는 자신의 눈동자 속에도, 조그만 술잔에도, 우물 속에도, 드넓은 창해(滄海)에도 똑같이 달은 떠오른다. 백리향은 눈이 시릴 정도로 밝은 만월을 바라다보며 어쩌면 강백지와 온원원도 하나의 허상일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허상으로 살다가 본래의 상으로 돌아가 또 다른 차원의 은밀한 곳에서 자각과 각성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이 실상(實相)이라고 어떻게 증명 할 수 있단 말인가? 《남화경(南華經)》〈제물론(齊物論)〉에 보면 이러한 글이 있다. "어느 날 장자(莊子)는 꿈에 나비가 되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다. 너무도 기분이 좋아서 자신이 인간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꽃 위에서 잠시 잠이 들다가 불현듯 꿈에서 깨었다. 깨고 보니 자신은 나비가 아니라 인간이 아닌가? 장자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 꿈에 나비가 되었을 때는 나는 내가 장자인지 몰랐다. 지금 꿈에서 깨고 보니 나는 분명 장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장자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장자가 된 것인가? 지금의 나는 과연 진정한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나로 변한 것인가?" 이 세상 그 무엇이 실상(實相)이고 허상(虛相)인가? 夢踏萬境夢無形 (몽답만경몽무형) 月照千江月無心 (월조천강월무심) 無形無心是實相 (무형무심시실상) 夢覺天下月長明 (몽각천하월장명) 꿈에 만 가지 형상을 밟아도 꿈은 형상이 없고 달이 천개의 강을 비치되 달은 마음이 없더라. 형상이 없고 마음도 없는 것이 실상이나니 꿈을 깬 천하에는 달만이 길이 밝더라. 백리향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깨끗한 흰색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두 남녀의 극락왕생을 바라며 향을 피워 올렸다. 그리고 만서각을 벗어나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백리향은 붉은 불꽃을 바라다보며 지전(紙錢)을 태우기 시작했다. 지전들은 순식간에 시커먼 재가 되어 하늘로 둥실 떠올랐다. "서관님께서는 누구를 위하여 지전을 태우시는 지요?" 백리향의 뒤에서 창노하며 낯설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구태여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전씨 아저씨로군요. 그 동안 모습을 뵐 수 없어 궁금해 하던 참이었습니다. 이리로 앉으십시오." 백리향이 자신의 옆자리를 권하자 전노인 슬그머니 다가와 앉았다. 순간 백리향의 콧속으로 심한 술 냄새가 풍겨져 왔다. 전노인은 술을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술을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술을 마셨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이 지전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전노인은 다신 한번 물었다. 백리향은 한 움큼 지전을 집어 불에 던지며 말했다. "강백지와 온원원!" 그 지전들도 자신의 몸을 순식간에 태우고는 시커먼 재가 되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노인은 백리향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애절한 슬픔이 묻어나 있었다. "그렇다면 소인의 도련님을 위해서 지전을 태워 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서관님!" 백리향의 손이 멈칫했다. 그 또한 전노인을 바라다보며 말했다. "도련님....이라니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화룡, 주화운 도련님이지요.!"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2 운수대통2003-05-22 13:18:02, 조회 : 2, 추천 : 0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 정심관(精深館)은 장양이 마음 놓고 무공을 수련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래서 그가 정심관으로 들어설 때는 누구를 막론하고 출입을 엄격히 차단되어진다. 특히 육합문 곳곳이 불타고 난 후로 정심관은 철옹성처럼 변하고 말았다. 정심관 주위로 항상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가 십팔 방위를 지키고 있었으며 네 명의 특별히 훈련된 무사가 지붕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양 또한, 이 곳에 들어서기만 하면 마음의 고요함을 이룰 수가 있었다. 장양은 자신이 말년에 만든 철궁(鐵弓)을 기름을 먹인 종이로 닦아내고 있었다. 백팔수라귀와의 대 결전에 자신의 철궁은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어차피 대규모의 전투에서는 검보다 화살이 더 유용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한 달 후면 자신과 육십 여명의 제자들은 육합문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 출정하게 된다. 강호는 놀라게 될 것이다. 자신들의 제자들의 용맹과 육합문의 무공에 찬사를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당당히 무림의 정파로서 인정받고 커다란 세가를 이루는 교두보가 될 것이다. 그의 입에는 어느덧 행복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영광되고 찬란한 미래를 확신했다. 그 때였다. “문주. 소생 백리향입니다.” 장양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정심관의 문을 등지고 백리향이 서 있었다. 달빛조차 스며들지 못하는 이곳에 호위무사들의 이목을 속이고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을까? 그는 한 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동안 흔들리는 마음을 겨우 추스르며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밖을 지키고 있던 자들이 서관을 통과시켜 주던가?” “글쎄요.” 그의 질문에 적당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장양은 더 이상 캐어묻지 않았다. 단지 신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짧은 침음성만 내뱉었다. “음~” 장양은 그동안 이 젊은 서관을 너무 과소평가 해왔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꼈다. 하지만 그것은 조그만 실수에 불과했다. 그가 어떻게 정심관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쉽게 돌아가지는 못하리라는 것은 확신했다. 그는 철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소생은 이만 육합문을 떠날까 합니다.” 장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쉽게 경거망동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며 위엄이 있었다. “떠날 사람은 떠나야 하겠지……. 그 말하려고 이 늦은 시각에 온 것인가?” “아닙니다. 문주께 한 가지 여쭈고자 합니다.” “무엇인가?” “왜 그러셨습니까?어째서 주화룡을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까? 어째서 강백지를 죽음으로 몰고 가셨습니까?” 순간 장양의 어깨가 움찔하며 두 눈가로 짙은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더 이상 이 전의 호탕하고 근엄한 육합문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자네……. 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어떻게 알게 되었나.” 백리향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양은 고개를 돌려 철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자랑스러운 기물(奇物)을 소중하게 쓰다듬으며 그는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철궁으로 쏘아 되는 선풍뢰는 한 번도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늘 또한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강한 자심감이 있었다. “그것은 내 아들놈 때문이라네. 그 놈은 주화룡처럼 지도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백지만큼 훌륭한 자질도 갖지 못했으며, 백우산 만큼이나 담대하지도 못한 놈이네. 그런 그 놈이 나의 대를 이어 육합문을 이어받을 수 있을 것 같은가? 모든 사람이 나에게 말하더군. 다음대의 육합문주는 주화룡이 되어야 한다고……. 룡아는 영웅다운 풍모와 총명함을 갖춘 기재였지. 애초부터 나의 제자가 되기에 아까운 놈이었어. 육합문은 나의 청춘이 받쳐진 곳이네 이런 소중한 것이 장씨의 후손이 아니고 주씨의 후손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없었다네. 그래서 그랬던 것일세.” “강백지는 왜 죽어야 했습니까?” 장양은 머뭇거리더니 한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은 많은 사람과 의논하지 않으며, 비밀은 한 사람만이 알고 있으면 족한 것이지.” 자신의 죄악을 숨기기 위해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다니……. 백리향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자네는 내가 주화룡을 죽였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어찌되었든 당신이 입김이 작용한 것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장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은밀히 선풍뢰를 집어 들기 시작했다. 주위는 어두웠으며 백리향은 장양의 등 뒤에 있었다. 결코 그가 하려는 행동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음~ 자네는 참으로 총명한 사람일세. 그를 죽인 것은 강백지일세. 백지는 고아로서 내가 어릴 때부터 기른 제자였네. 참으로 충성심이 강하고 착한 아이였는데…….” 순간 그의 말속에 비애가 깃들어있는 것을 백리향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 장양이 얼마나 강백지를 총애했는지 알 수 있었다. “주화룡은 명예와 무인으로서 자긍심이 강한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네. 애초에 나는 주화룡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그를 자극하고자 했네. 헛소문을 퍼트렸으며 사람들을 선동했으며, 살수를 불러 그를 살해하려 했지. 하지만 그는 죽지 않았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네.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주화룡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일세. 그는 총명하였고 무공이 고강하였으니 말일세.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지. 그것은 바로 신뢰(信賴)일세. 그는 아직 젊어서인지 아직 사람을 신뢰하고 있더구먼. 그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강백지뿐이라고 생각했지. 강백지는 주화룡을 존경하였고 주화룡은 강백지를 누구보다 신뢰하고 있었으니까.” 순간, 백리향은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신뢰란 인간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다. 서로를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이 유지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불신만이 팽배하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중요한 감정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그는 커다란 절망감을 느꼈다. 그의 절망감과는 달리 장양은 의기양양하게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강백지를 이용하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고 느꼈네. 그 아이는 오랫동안 고뇌를 했을 거야. 하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네. 그 아이는 나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거든……. 나의 바람대로 그는 실수 없이 주화룡을 죽이더군. 한 가지 알 수 없는 건 강백지가 나에게 화살을 겨누었다는 걸세. 왜 그랬을까? 나에 대한 원망이 그만큼 큰 것이었을까?” 그러자 백리향은 큰소리로 말했다. 마치 똑똑히 들으라는 듯이……. “그것은 당신에 대한 강백지의 신뢰이며, 사랑 때문이었소!” 장양은 비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사람을 신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지 자네는 모르고 있구먼. 장담하건데 자네는 주화룡처럼 단명(短命)하게 될 걸세.” 백리향은 그의 말에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그가 묻고 싶은 말을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모든 것을 이루었소?” 장양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서 손에 쥔 선풍뢰를 철궁에 장전하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은밀했으며 그 어떠한 허점도 드러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주화룡의 복수를 꾀하는 자가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네. 또한 그자가 주화운의 동생이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네. 나는 노총관을 시켜 강백지가 주화룡을 죽였다고 소문을 퍼트리도록 했지. 그리고 하나의 미끼를 내세웠다네. 그가 바로 백일청이었네. 원래가 진정한 미끼는 자신이 미끼인지 몰라야 하네. 그래야 물고기는 안심하고 미끼를 덥석 물을 것이기 때문이지.” 백리향은 그제야 자신이 모르는 또 다른 죽음이 있음을 깨닫고 성급히 물었다. “백일청은 어떻게 되었소?” 장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스스로 자결했네! 그는 죽어 마땅해! 내 자식들을 지키기에는 충분한 인력을 제공했으며 충분한 돈을 주었네. 하지만 내 막내 딸아이를 지켜주지 못했네.” 백리향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장취취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장양은 인상을 찌푸리며 힘들게 말했다. “그 아이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으며 볼 수도 없게 되었지. 그리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네.” 백리향은 가슴이 아련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이 결코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씨가 매우 고약한 여자아이였으며, 자신을 매우 귀찮게 했고, 열심히 일궈놓은 꽃밭을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가 아무런 친구도 없이 외로이 지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양도 격정이 일었는지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백일청을 통해 비환천심마불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네. 그래서 모든 음모의 뒤에는 주가장이 있음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지. 나는 주화운을 이 화살로 죽였네. 그리고 강백지도 이 화살에 의해 죽음을 당했지……. 아! 그 아이는 나의 화살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더군. 그는 즐거운 듯 웃고 있었어. 나를 바라보며 한 점의 원망도 없이…….” 장양은 목이 메는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백리향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장양을 바라보며 말했다. “문주께서는 주가장의 복수가 두렵지 않소?” 장양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렵지 않네. 숨어있는 적은 두려워도 밖으로 드러난 적은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그리고 육합문은 무림맹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네. 주가장은 함부로 경거망동할 수 없을 것이네.” 백리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육합문은 무림맹의 사신을 맞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무림맹은 육합문의 재력과 공권력이 필요했을 것이며 육합문은 그 뜻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로서 동맹은 확실히 맺은 것이었다. 육합문은 무장원을 두 명이나 배출하지 않았던가? 주가장은 결코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장양은 차가운 눈빛으로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만족한 해답이 되었나?” “만족하오.” 백리향의 목소리는 몹시 딱딱하게 변했다. 그래서일까? 장양의 목소리 또한 몹시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왜 자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지 자네는 아나?” “살인멸구(殺人滅口)!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말이요.” 장양은 자신의 모든 공력을 끌어올리며 말했다. “역시 총명해! 예로부터 지나치게 총명한자는 단명하기 마련일 법일세!” “만약 당신의 그 쓰레기 같은 화살을 믿고 있다면 후회할 거요.” 장양은 자신의 자랑이자 분신과 같은 것을 쓰레기라고 치부하자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천만에 후회는 자네가 할 걸세!” 그는 전광석화같은 몸놀림으로 철궁을 들어올려 백리향을 향해 화살을 당겼다. 그리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선풍뢰는 백리향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백리향과의 거리는 이 장 정도에 불과 했으며 실수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맹렬한 기세로 날아가던 화살은 어이없는 방향으로 꺾이며 날아가 벽에 꽂혔다. 쿠앙! 그 위력이 얼마나 강렬한지 벽의 일부가 부서져 나갔다. 자욱이흙먼지가 피어오르며 백리향의 모습을 가려버렸다. 장양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예전에도 있었다. 자신의 생일잔치를 겸한 사냥터에서였다. 지금 그때의 상황과 너무나 흡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대소천태산에는 진실로 기인이 살고 있었으며 그 기인은 오랫동안 자신의 주위에 같이 있었으나 자신은 전혀 깨닫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말이다. 순간 그는 친구인 양정이 한 말이 떠올랐다. “이보게 내가 소신선 한 분을 모시고 왔네. 껄껄껄!” 그의 놀람도 잠깐, 등 뒤에서 냉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후회할거라고…….” 장양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까지 정심관의 문 앞에 서 있던 자의 목소리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장양이 본 것은 백리향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 가 본 것은 커다란 주먹이었다. 퍽! “크악!” 그의 앞니가 부서져 나가며 피가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는 뒤로 넘어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은 당신의 파렴치한 행동에 대한 죄 값이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양은 다시 한번 주먹을 보아야만 했다. 퍽! "칵!" 그는 자신의 코뼈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야 했으며, 그 고통으로 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뭉개진 코에서 피가 쉴 새 없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머리채를 잡히며 백리향의 무릎에 얼굴을 다시 한번 강타 당해야 했다. "이것은 주화룡의 몫이오!" 퍽! 으드득! "크악! 크으....!" 그의 턱이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백리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은 주화운의 몫이지. 그리고 이 것은 온원원과 강백지의 몫이라오." 백리향의 주먹은 사정없이 그의 면상에 작렬했다. 퍼억! 그러자 장양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려 했으나 백리향은 용납하지 못했다. 그의 머리채를 잡아 쥐며 자신의 무릎으로 그의 면상을 강타했다. 퍽! “크악!” 장양의 몸은 그제야 뒤로 넘어지는 것이 용납되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백리향은 쓰러져 숨을 헐떡이는 장양을 바라보며 한 숨을 내쉬었다. “당신은 강백지가 왜 화살촉도 없는 활을 쏘았는지 궁금할 거요. 또한 누가 당신을 목숨을 노리고 있는지도 궁금할 것이오. 확실히 당신의 목숨이 간절히 필요한 사람은 있었소. 그는 은살막이라는 살수집단에 어마어마한 금액을 지불하며 당신의 목숨을 청탁했었소. 문주는 그가 누구인지 궁금하시겠지요?” 장양은 쉴 세 없이 피를 쏟아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지금까지 주가장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리향은 그를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할 말만 했다. “당신이 강백지를 이용한 만큼 은살막주 또한 강백지를 이용하려 했소. 당신을 죽일 유일한 대안으로서 말이오. 그러나 강백지는 애초부터 당신을 죽일 마음이 없었소. 다만 한 마리의 아름다운 새를 잡아두기 위해 그들과 손을 잡은 것뿐이지……. 그는 일부러 화살촉이 없는 화살로서 당신에게 조심하라고 경고를 한 거요. 당신은 정말로 멍청하오. 당신에게 약간의 신뢰라는 것이 있었다면 강백지의 뜻을 금방 알아 낼 수 있었을 것이오! 강백지는 마지막까지 당신에게 충성을 다했소. 그 하나의 화살로 인해 은살막은 당신의 암살을 포기했다면 믿겠소? 강백지는 죽으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은 진정한 사랑을 얻었기에 죽어도 좋았을 것이오. 당신 같은 파렴치한 사람은 죽어도 깨닫지 못하는 성질의 것이기도 하지요.” 백리향은 쓰러져 있는 장양의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피범벅이 되어있는 그의 얼굴에 놀람과 후회의 표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그러나 후회란 아무리 빨리해도 늦는 법이다. 백리향은 안쓰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예전에 비무방(飛武邦)의 방주인 정가문이 나에게 약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지요. 그는 어떠한 식으로라도 은혜에 보답하길 원했으며 나는 그에게 당신의 목숨을 사주한자를 조사해 달라고 했었소. 비무방의 정가문이 주목한 제일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당신의 아들 장지충이었소. 왜냐하면 비무방은 절강성에서 몇 개의 큰 도박장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장지충은 그들에게 너무나 많은 빚에 쪼들려 왔기 때문이었지요. 그 때문에 철혈마검 강자단은 오랫동안 장지충을 따라다녀야 했소. 그리고 얼마 전 강자단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당신의 목숨을 사주한자는 장지충이 확실하다고……. 그는 자신의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스스로가 육합문주가 되려 한 것이오. 당신의 아들은 당신만큼이나 어리석은 자요. 그는 도박으로 많은 가산을 탕진했으며, 엄청난 거금을 은살막에 쏟아 부었소. 노총관은 당신의 땅과 사업장을 하나 둘씩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그 문서들은 가짜로 대체되어 나갔소. 쉽게 말해 얼마 전까지 당신은 대부호(大富豪)였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오. 지금 당장 만서각으로 가보시오. 어떠한 책들이 그곳에 있는지……. 그 싸구려 책들이 가득한 만서각처럼, 당신은 이제 유명무실한 사람이오! 믿고 싶지 않더라도 믿어야 할게요. 모든 것은 소생이 직접 은살막주에게 확인한 사실이오.” 장양은 경악에 찬 눈으로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허공에 허우적거렸다. "어으으! 마, 말도 안돼!" 장양은 얼마 전 자식과의 대화에서 주화룡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하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두려워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한 자신이 살수에게 공격을 당하자 맨 처음 나타난 것도 자신의 아들 장지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은 것이다. “미, 믿을 수 없다!” 백리향은 문 밖으로 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어떠한 인영의 멱살을 잡고 끌고 들어왔는데 바로 자신의 아들 장지충이었다. 아들의 모습 또한 그 아버지와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이리저리 멍이 들어있었고 코에는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는 혈도가 제압당해 있었는지 두려움이 가득한 눈만 끔벅이고 있었고 온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백리향은 장양의 옆으로 장지충을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오늘밤 두 부자(父子)께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오. 그럼 소생은 물러갈까 하오.” 백리향은 그들을 뒤로하고 정심관을 빠져 나왔다. 얼마쯤 걸었을까? 장양의 울부짖음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그것은 회한의 소리였고, 후회와 절망의 소리였다. 고어(枯魚)는 강물을 지나면서 운다. 사람들이 던진 미끼를 경솔하게 물어버린 물고기는 곧 후회하게 된다.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으며 욕심이 많았는지 뒤늦게 후회를 하는 것이다. 잡힌 물고기는 전에 살고 있던 강물 위를 배로 운반되어 갈 때, 일찍이 강 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면서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며 눈물짓는다. 장양의 절규는 이미 바싹 말라버린 고어(枯魚)의 눈물과도 같은 것이다. 백리향은 장양의 절규를 뒤로한 채 정심관을 나섰다. 그의 걸음걸이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싸늘한 겨울바람이 백리향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걸음을 멈춘 백리향은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세상에 달은 어찌 저리 밝은 것일까? 아무런 빛도 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저 많은 별들은 어찌 저리 반짝이는 것일까? 세상은 어찌 이리도 부조리 한 것일까? 백리향은 밤하늘을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역사를 보게 되면 성공을 이룬 자는 반듯이 타락하게 되어있고, 명성을 얻은 자는 반듯이 이지러지는 것이다. 성공과 명예를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장양은 명예를 잊고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다. 그리하여 얻어진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한 번 성공을 맛본 사람은 결코 거기서 헤어나질 못한다. 분명 장양은 재기를 노릴 것이며 더욱 악한 길로 들어설지 모르는 일이다. 문득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백리향의 귓전에 들려왔다. 찬찬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저 멀리 구부정한 허리를 한 인형이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전노인이었다. 백리향은 전노인에게 주화룡과 주화운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노인에게 있어서 두 사람은 친아들이상의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으로 전노인의 마음은 식어버린 재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인간은 삶의 기둥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노인을 바라다보며 백리향은 중얼거렸다. "불쌍하신 분……."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고통을 느꼈을까? 전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를 한 채 다가와 백리향을 바라다보았다. 백리향은 전노인의 노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서관님.......고맙습니다. 소인은……." 백리향은 전노인에게 미소를 보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감사를 받아야 할 일도 감사를 해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이 정도라도…….만족하시겠습니까?" 백리향의 말은 장양에 대한 원한을 이 정도에서 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묻는 말이었다. 백리향의 말에 전노인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피를 피로서 갚는다면 장양과 다를 바가 없습지요. 소인은 아무것도 배운바 없지만, 이러한 이치는 알고 있습지요." 백리향은 전노인의 주름투성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의 손은 눈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험난한 태행산(太行山)의 길은 능히 마차의 바퀴를 부수어 놓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악한 마음에 비하면 평탄한 길이라고 할 수 있지요.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것은 스스로 악의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것과 같습니다. 피는 피를 부르고 죽음은 죽음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라고 하며 이러한 인과의 사슬을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선행해야 할 몫이지요. 전씨 아저씨께서 이러한 이치를 알고 계신다니 정말 훌륭하십니다." 전노인은 자신의 손을 빼어 내고는 다시금 백리향의 손을 꼬옥 쥐며 말했다. "어느덧 흑발이 백발이 되고 보니 죽음이 보입니다. 이제 소인에게 남는 것은 추억뿐 입지요. 소인에게는 도련님들과 같이한 추억이 무엇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소인은 지금 죽더라도 아무런 여한이……." 전노인의 어깨가 다시금 들썩이기 시작했다. 백리향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든 사람이 이 노인과 같은 마음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조그만 것에 만족해하며 아무런 사심 없이 살아 갈 수는 없는 것일까? 백리향은 전노인과 맞잡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전씨 아저씨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러자 전노인의 얼굴에 미세하나마 미소가 어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눈물을 적시며 미소 짓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 어눌한 것이었다. "농사를 지을 생각입니다. 두 분 도련님들의 묘소 근처에 조그마한 논을 일굴 생각입지요." 백리향의 고개가 다시 한 번 끄덕거렸다. 사람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회귀본능이 가리키는 최종적인 안착치는 땅이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의 땅인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전원으로 돌아가 흙을 파고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노인의 굵은 주름살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주름살에 대지의 포근함이 어느덧 깃들기 시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기운이 다가온 사람에게는 길어야 2~3년 이상의 삶을 이어가기가 힘든 것이다. 그것은 대지가 자신을 부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인연이 있어 다시 만나더라도 전노인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리라……. "……." "……."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사이를 지나갔다. 전노인의 회색빛 얼굴에 어렴풋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백리향의 얼굴에도 천진난만한 웃음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별의 아쉬움을 굳이 말로서 표현할 필요는 없다. 눈빛을 통해, 또는 가벼운 고개의 끄덕임으로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전노인은 아무런 말도 없이 구부정한 허리를 뒤로하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전노인의 조그맣고 초라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백리향의 마음이 아려왔다. 어쩔 때는 모르는 것이 좋을 때가 있다. 하지만 알지 않으면 안 되는 것도 있는 것이다. 백리향은 전노인이 느끼는 심적 고통을 몰랐으면 이렇듯 가슴이 아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않고는 전노인의 장양에 대한 복수심을 잠재울 수 없었을 것이기도 했다. 이처럼 세상은 부조리 한 것이다. 전노인의 모습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백리향은 시선을 거두지 못하였다. 백리향은 전노인의 허허로운 뒷모습에서 문득 조그마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한탄해야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가 부조리함으로 생기는 인과(因果=원인과 결과)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신이 아닌 이상 인간은 완벽해 질 수 없다. 완벽하지 못한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부조리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달이 밝으면 밝은 데로, 별들이 반짝이면 반짝이는 데로 놓아두면 그만인 것이다. 세상이 부조리할 수밖에 없다면, 부조리 또한 자연의 법칙이라면……. 그대로 놓아두면 그만 인 것이다. 백리향은 두 팔을 벌려 드넓은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별들을 자신의 심상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으며, 휘황한 달빛과 아름답게 휘날리는 눈송이, 가을에 이는 붉은 단풍의 고운 색채, 여름에 쏟아지는 장대비, 봄에 피어오르는 파릇파릇한 풀잎들.......이 모든 삼라만상의 조화를 백리향은 심상에 차곡차곡 쌓아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심상을 한 곳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뜨겁고 붉은 불덩이가 광활한 푸른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면은 붉게 달아오르며 은빛 반짝임으로 출렁거렸다. 장영령은 한 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그것이 태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중천에 이르고 저 멀리 푸른 수평선을 바라보니 하늘과 바다가 둘이 아니라 하나였다. 태양이 산자락 뒤로 서서히 몰락하고 그 뒤를 이어 둥그런 만월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나둘씩 반짝거리는 불빛들......별이었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온 하늘을 수놓기 시작한 것이다.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들의 속삭임...... 가슴 떨리듯 아름다움에 장영령은 울컥 눈물이 치밀어 올라왔다. 본다는 것! 이 얼마나 거룩한 신의 축복이란 말인가? 새는 공기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듯, 물고기는 물이 있어 헤엄을 치며 살수 있다는 것을 모르듯, 눈을 가지고 있는 모든 동물은 자신이 볼 수 있음에 감사할 줄 모른다. 어두움은 장영령에게 있어서 피할 수 없는 굴레였다. 하지만 지금 장영령은 일출과 일몰, 월출의 광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별들의 속삭임을 들었고 은하수의 출렁임을 보았다. 잠깐의 적막이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이 열리며 하나의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들..... 흰색의 후선초, 노란색의 정빙화, 붉은색의 노고초, 자주색의 필용담, 수많은 꽃들이 만발했다. 저 멀리 농부는 밭을 갈고 아낙네는 씨를 뿌린다. 새들은 지저귀고 어느덧 아지랑이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뜨거워지는 오후의 햇살. 농부는 커다란 느티나무아래 오수를 즐기고 아낙네는 빨래터에 나와 빨래를 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양 엄청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번쩍하며 번개가 내리치고 곧이어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하늘은 개이고 농부들이 추수를 한다. 처절한 몸부림으로 잉태한 찬란한 수확인 것이다. 바람이 불자 벼들은 황금빛 물결이 되어 출렁이기 시작한다. 붉게 물 들어가는 산하, 알알이 영글은 과실수들, 모든 가을의 풍경이 장영령의 시야에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갑자기 추워지며 하나의 흰 물체가 나선형을 그리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장영령이 그 것을 손으로 받자 그것은 곧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것이 바로 눈이로구나!"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지던 눈들은 드디어 폭설이 되어 온 산하를 순백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장영령이 걸음을 내딛자 뽀드득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장영령은 자신의 족적을 남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걸이마다 생기는 눈발자국이 매우 재미있다고 느꼈다. 그러다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월동문을 바라다보았다. 흰 장삼을 두르고 어린아이의 피부를 지닌 한 남자 자신을 바라다보며 서 있었다. "........" 그 사나이는 가벼운 미소를 입에 물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뒤를 돌아서 월동문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장영령은 그 사나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녀는 꿈쩍할 수 없었다. 누굴까? 문득 그녀의 육감이 말하기 시작했다. "저 남자를 붙잡아야해." 하지만 장영령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자는 어느덧 멀리 사라져가고 있었고, 그녀의 발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적막이 찾아왔다. 문득 잠이 깬 장영령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잠시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그녀는 천성적인 맹인으로 한 번도 영상으로 이루어진 꿈을 꾸어 본적이 없었다. 그녀의 꿈은 항상 어두움 속에서 촉감과 청각을 통한 꿈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실상의 꿈을 꾸었으며 아직도 자신의 뇌리에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것이다. 문득 예전에 백리향이 자신에게 해주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가씨께서는 틀림없이 백색의 신비로운 눈과 칠 채의 아름다운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도 그때는 소생이 아가씨께 마지막인사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순간, 왠지 알 수 없는 서글픔과 아쉬움이 장영령의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나마 왜 그를 잡지 못하였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녀의 두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그녀의 두 가녀린 어깨가 떨리며 자신의 무릎사이로 얼굴을 파묻었다. *** 장취취는 갑자기 찾아온 적막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화운의 돌연한 태도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주화운은 줄기줄기 살기를 흘리며 자신에게 단도를 내리칠 때 그녀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오로지 암흑과 정적만이 있었다. 너무나 두려워 고함을 지르려 하였으나 자신의 성대(聲帶)에 고통만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그녀는 한 동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은 현실에 있으며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천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는 절망했으며 좌절했으며 미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나 많은 해가 뜨고 졌을까? 어쩌면 몇 달이 지났을 지도 모르며 몇 년이 지났을 지도 몰랐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그녀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다가와 그녀의 입속으로 음식을 넣어주었다. 누군가가 그녀를 부축하여 걸음을 걸으려 하면 그녀는 몇 걸음 걷지 못해 주저 않고 말았다.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무엇인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으며 깊은 나락 속으로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간혹 가다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손길일까? 아니면 언니의 손길일까? 그녀가 더더욱 참을 수 없는 것은 외로움과 고독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가족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어렸을 적 장취취는 하녀들과 장님놀이라는 것을 한 적 있었다. 놀이의 방법은 간단했다. 그녀의 눈을 가리고 하녀들은 박수를 치며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그녀는 팔을 휘저으며 소리에 따라 발걸음을 옮겨 술래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취취는 백걸 음도 채 걷지 못하고 안대를 풀어버려야 했다. 그것은 왈칵 두려움이 치솟아 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단 한 번도 장님놀이를 하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장님놀이를 영원히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녀의 현실이었으며 실존이었다. 또한 아침과 저녁이라는 현실적시간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자고 싶을 때 잠을 청했으며 깨어나서는 온갖 상상과 공상을 통해서 처절한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야 했다. 오늘도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야심한 시각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시간에 불과했다. 그녀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공상과 상상, 그리고 추억을 기억해 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의 손길을 느꼈다. 장취취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움츠려 들었으나 어쩌면 전원월의 손길인지도 몰랐으며 하녀의 손길인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 사람의 손길은 따뜻했으며 어린아이의 손처럼 부드러웠기 때문에 느낌이 아주 좋았고 편안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장취취는 손바닥이 간질거린다고 느꼈다. 장취취는 하녀가 또는 전원월이 자신의 손바닥으로 장난을 치는 것이라 여기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은 그녀를 행복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자 간질거리는 느낌 속에 규칙적인 움직임이 숨어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순간, 그녀는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온 신경을 손바닥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로 한 획, 밑으로 한 획 그리고 날렵하게 꺾여져버리는 한 획! 그것은 틀림없는 글자였으며 계집 여(女)자였다. 그녀는 온 몸을 떨며 모든 신경을 자신의 손바닥에 집중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그가 자신의 손바닥에 쓴 문자를 해독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두 개의 단어를 연속해서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 두 글자는 바로, 호아(好啊:안녕.) 그녀는 그만 왈칵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녀는 비록 볼 수도 없으며, 들을 수도 없으며, 말 할 수도 없는 정적과 암흑의 세계에서 고립되어 있다가 처음으로 타인과의 대화를 이루게 된 것이었다. 갈증에 허덕이며 사막을 횡단하는 자가 녹주(綠州:오아시스)를 발견한 기분이 이러할까?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떨쳐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리 없는 울음은 결코 멈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도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온 신경을 손바닥에 한 참이나 쏟은 다음에야 비로소 글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한 글자가 많은 세 개의 글자였다. 곡심마(哭甚麽?:왜 울어?) 장취취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웃었다. 그리고는 상대방의 손바닥위로 그녀는 손가락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상대방은 한 번 만에 그녀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상대방도 금방 대답해 왔다. “사람.” “어떤 사람?” “좋은 사람.” 그러자 장취취는 웃으며 그의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번에는 제법 긴 문장이었다. “뻔뻔스럽군.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니!” 그 사람도 웃었다. 하지만 그는 장취취의 손바닥에 긴 문장은 쓸 수 없었다. 그녀는 아직 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야.” “뭐가?” “나는 뻔뻔하지.” 그러자 장취취가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울려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공허한 웃음을 바라보며 그 사람은 한 숨을 쉬며 그녀의 손바닥에 글을 썼다. “이제 가야 돼.” 순간 장취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는 또 다시 홀로되는 것이 두려웠으며 암흑과 정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마도 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장취취의 손바닥에 다시 글을 썼다. “다시 올 거야.” 그리고 마치 글을 지우듯 그녀의 손바닥을 닦고는 다시 글을 썼다. “그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은 똑같은 방법으로 다시 글을 썼다. “결투를 받아 줄께.” 그제야 장취취는 그 사람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에게 결투를 신청했으며 사람들은 그녀의 특별한 신분 때문에 결투에 응했고 일부러 져주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계속해서 무시당해 왔었다. 그래서 그녀는 줄곧 그를 괴롭혀 왔다. 그가 자신을 무시하면 할수록 더욱 귀찮게 굴었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으며, 그가 심어놓은 꽃밭을 엉망으로 짓밟기도 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어느덧 다시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그에게 했던 모든 행동이 후회스러웠으며 저주스러웠다. 그녀는 한 방울의 눈물을 떨어트리며 백리향의 손을 꼬옥 잡았으며 백리향또한 그녀의 손을 꼬옥 쥐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심상으로 따뜻한 한 마디의 말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용기를 잃지 마.” 그녀가 화들짝 놀라기도 전에 백리향은 그녀의 수혈을 짚었으며 장취취는 의식을 잃어버리고 침상에 쓰러지고 말았다. 백리향은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더니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육합문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3 운수대통2003-05-26 00:01:35, 조회 : 419, 추천 : 1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3 열여섯에 잃어버린 빛과 소리. 장취취의 삶은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아무런 발악도 해보지 못한 채,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밟고 지나가 버렸다. 더욱이 백리향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녀를 지탱해줄 육합문이 몰락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백리향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그는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리향이 방문을 나서자 차가운 한풍(寒風)이 괴성을 토하며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작은 나뭇잎들은 풍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파도를 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백리향의 마음도 덩달아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린 잎사귀가 백리향의 발에 밟혀 사각거리는 소리를 터트렸다. 어느덧 육합문의 육중한 대문앞에 선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육합문의 정경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단지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감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육합문의 육중한 대문을 열었다.끼이익 거리는 듣기 고약한 마찰음을 내뱉으며 육합문의 정문이 열렸다. 그가 육합문을 나서자 양 쪽에 서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가 백리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고생이 많으시군요?” 두 명의 문지기들은 백리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육합문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관께서는 야심한 시각에 어디를 가십니까?” 백리향은 기지개를 활짝 켜며 말했다. “이제부터 소생은 서관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관님이 서관이 아니면 누가 서관이란 말입니까?” 그의 말에 백리향은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지금과 잠시 후가 다른 것입니다. 어저께의 소생은 서관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한 명의 구도자일 뿐이지요.” “.......?” 백리향의 말에 두 명의 문지기는 알 수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백리향의 말을 잠시 후면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었다. 백리향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더욱 수고하십시오.” 새벽의 찬 공기가 하얀 입김을 뿜어내었다. 귀뚜라미는 육합문의 구석진 담 속에 숨어 울어대고 있었고, 꽉 찬 만월은 백리향의 발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발걸음으로 육합문과 천태현을 이어주는 산비탈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육합문의 전경이 가물거리고 백리향이 거대한 느티나무를 돌때였다. 그 느티나무에서 백의 인영이 나타나 백리향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의 스침이었지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인연(因緣)의 파편이 백리향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백리향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 인영 또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흰색장삼을 걸친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과의 우연히 마주친 눈길이 한동안 떨려왔다. 노인의 깊은 눈길 속에서 처절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눈동자에도 심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백리향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왔다. 한 번쯤 상대의 신분을 의심해 볼만도 하련만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걸었다. 그는 그, 나는 나. 인연이란 이렇듯 밀물처럼 생겼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노인은 저 젊은이의 눈길을 받는 순간 식어버린 자신의 가슴에 따뜻한 훈풍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젊은이는 어린아이의 눈을 지녔다. 노인의 가슴속에 멍울진 한의 잔재들이 저 청년의 눈길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노인은 얼른 그의 눈길을 회피하여 버렸지만, 지금이 아닌 평상시의 만남이었다면 삼일 밤낮을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와의 만남을 어느새 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지나자 화려한 육합문의 전경이 보이고 높은 전각의 지붕들이 담벼락 넘어로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노인은 어느덧 육합문의 대문에 다다랐다. 지나치게 매서운 가을의 한풍이 노인의 손을 얼어붙게 하였다. 노인은 자신의 식어버린, 너무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앙상한 뼈마디에서 우두둑하는 마찰음이 일어났다. 그가 육합문에 다다르자 두 명의 문지기가 잡담을 나누다 말고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하지만 노인은 유유자적 걸으며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려하지 않았다. 어느덧 노인은 그들과 삼장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긴장하며 자신들의 장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누구……!”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였다. 저 멀리 있던 노인이 어느새 그들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인의 팔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하나의 검광을 보았다. 파파팟! 두 문지기는 아무런 비명도 없이 그대로 대문에 몸을 기댄 채 쓰러지고 말았다. 밝은 달 빛 아래 그들의 표정은 경악에 차 있었으며 그들의 이마 한 가운데서 한 방울의 피가 형성되더니 주르륵 옆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노인은 가벼운 한 숨을 내쉬었다. 한 방울의 피! 그것이 노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강호를 종횡하고 다닐 때 사람들에게 얻은 별호가 탈혼무혈(奪魂無血)이었다. 사람의 혼을 빼앗되 피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긴 별호였다. 그런데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지 않는가? 그만큼 자신의 검이 녹슬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노인은 육합문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곤륜산에서부터 이곳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 왔다. 그는 승마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걷기보다 마차를 애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번도 쉬지 앉고 걸어온 것이다. 그는 걸어오면서 충분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볼 수도 있었다.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주위로 불타버린 충의전의 전각이 보였다. 그리고 완전히 소실된 몇 채의 건물도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이 태의전을 지나 조그마한 소로를 따라 한 참을 걸었다. 쉼 없이 걷기만 할 것 같던 그의 발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노인의 앞,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먼저 정심관을 다녀간 것이다. 널브러져 있는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들.......그 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 수혈이 점해져 쓰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고요한 점으로 보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혈이 찍혔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과연 이러한 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의 능력으로 이들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들을 죽이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혈을 점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서둘러 정심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을 때 장양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동설한에 차가운 구정물을 만지며 빨래를 하는 아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청렴결백함이 그 무엇보다 저주스러웠다. 그때 문득 자신의 머리를 때리던 깨달음……! ‘부를 얻고 싶은가? 부를 얻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호화로운 생활을 안겨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수치심을 감추고 전력을 기울여라. 친구와의 사귐을 끊고 의리를 배반하면 될 것이다!’ 장양은 이렇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태고의 정적을 깨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장양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다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안락함보다 더욱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권력을 얻고 싶은가? 권력을 얻어 그 테두리 안에 가족을 보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축적한 부를 이용하라. 자존심을 버리고 개가 되어라. 그리하면 틀림없이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양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무장원에 합격시킬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울 것을 부탁하였을 때 장양은 그녀에게 그렇게 할 것임을 다짐했다. 그것은 도저히 어길 수 없는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한 느낌으로 살아있는데,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데, 어찌 약속을 어길 수 있겠는가? 장양은 아내와의 약속대로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으며 현명한 가장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자라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누구를 위하여 의를 배반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개가 되었던가? 자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인과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칼로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란 이런 것일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절망감이란 이런 것일까? 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후후후! 장양의 두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 일검차천(一劍遮天 ) 장양(張楊)! 이십년 전 탈혼무혈 주정천과 함께 용호쌍검(龍虎雙劍)으로 불리며 무림을 종횡 하던 그가 지금 목 놓아 통곡하고 있었다. 그에게 어떠한 슬픔이 있었기에 통곡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주정천은 잘 알 수는 있었다. 그도 저러한 통곡을 터트려 보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을 읽고서 터트린 눈물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주저앉아 있는 장양 앞에 서서 넌지시 말했다. “장형! 소제 주정천이오.” 순간, 장양의 두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촛불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더없이 괴기스러워 보였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주정천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지만, 전보다 훨씬 늙어버린 얼굴이었지만, 틀림없이 그였다. 탈혼무혈 주정천! “…….”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을 격하고 마주쳤다. 근 10여 년 만에 만난 막역지우이건만 두 사람의 눈길 그 어디에서도 반가움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장양의 눈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떠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정천은 그의 회색빛 눈을 통해 슬픔에 찌든 자신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들에 대한 늙은 아비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이었다. 주정천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빈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한탄을 하듯 말했다. “소제가 두 아들의 무덤을 직접 만들고, 곤륜산을 벗어났을 때 장형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 한 참을 올려다보던 장양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양 또한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런 먼 곳까지 어떻게 오시었소!” “물론 소제의 두 아들놈 때문이지요.” 그러자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냉랭한 장양의 말이 이어졌다. “소제와……. 관계가 있소?” 주정천은 그가 참으로 뻔뻔스럽다고 느꼈다. 이지경이 되고서도 발뺌을 하려하다니……! 그가 알고 있는 장양은 이런 후안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20년 전 그는 정도의 길을 걸으며 의를 알고 협을 행하고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했으며 삼일 밤낮을 술을 마시며 세상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자신의 아들인 주화룡을 그에게 제자로 보낸 것은 그에게 무공을 배우게 함이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덕을 배우게 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식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동안 그의 인품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사람이 어찌 이리도 퇴색되어 버렸단 말인가? 주정천은 분노로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만 말하리다. 주화룡 그놈이 죽던 날 백우산이 우리 주가장으로 왔소! 그에게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오.” 그래……. 그렇게 된 것이로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후후후! 장양은 혹시나 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만 씁쓰레한 고소를 입에 물었다. “그럼……. 말이 필요 없겠군!” “그렇소!” 장양은 모든 것에 해탈한 듯 천천히 일어섰다. 잠시 장지충과 눈길이 마주쳤다. 장지충은 감히 눈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장양의 두 눈도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엔 알 수 없는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 순간의 일일뿐 다시 냉철한 표정이 되어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주정천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 “…….” 비록 20년 지기일망정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에 검을 겨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착잡한 심경을 말해주듯 촛불이 갑자기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장양은 철궁을 내던지고는 벽에 매달려 있는 애검인 혈루(血淚)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쾌검의 달인이다. 그의 발검(拔劍)은 전광석화와도 같았으며 회검(回劍)은 더욱 빨랐다. 접근전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주정천의 발걸음도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장지충을 중점으로 빙글 도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소제는 주형이 홀로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나는 왔소!” “홀로오신 것은 무림맹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오?” “장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소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소. 설사 당신이 지옥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옥으로 갔을 것이오.” 장양은 냉철한 눈빛으로 주정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당장이라도 육합문도들을 불러 모을 수 있소.” 하지만 주정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순간, 장양은 깨달았다. 확실히 주정천과 자신은 달랐다. 그는 주정청만한 배포가 없었으며 이처럼 저돌적이지도 못했다. 저 용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홀로 육합문을 들어서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장양은 다시 한 번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주화룡과 주화운은 너무나 주정천을 닮아있었던 것이다. “주형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요?” “장형은 확실히 죽소. 육합문에 얼마나 많은 문도들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오!” “........” 어쩌면 주정천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는 확실히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 옛날 강동(江東)의 맹호방(猛虎邦)을 상대로 홀로 싸웠던 그였다. 그리고 끝내는 맹호방의 괴멸시켰던 그였다. 하지만 그도 옛날의 주정천은 아니었으며 자신도 옛날의 장양이 아니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세월은 극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틀림없는 용이긴 용이되, 늙은 용일뿐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예초부터 육합문도들을 불러 그를 처치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장양은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었다. 장양에게 있어서 주정천은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그것은 주정천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와의 결투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장양은 자신의 애검인 혈루를 뽑아들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소제의 검이 주형의 검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하더이다. 실제로 그러한지 소제는 항상 궁금했었소.” “오늘 장형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요.” 주정천의 팔이 밑으로 향함과 동시에 그의 소매에서 조그마한 소검이 맑은 금속성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창!” 그 순간 장양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주정천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단아래 서른 개의 촛불이 무형의 기운에 의해 거세게 흔들거렸다. “…….” “…….” 장양은 저 조그마한 검에서 얼마나 커다란 위력을 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두려움이란 사치일 뿐인 것이다. 장지충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긴장감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결투는 비단 그들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도 결정되어 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만약 사라져 준다면! 만약 주정천이 자신의 부친을 죽여만 준다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지며 두 사람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까가강! 챙! 챙! 챙! 찰나와 같은 순간에 무수한 검광이 허공에서 스치며 지나갔다. 주정천은 한 순간에 서른여섯 검을 찔렀으며 장양은 그중 서른다섯 검을 막을 수 있었다. “헉!” 장양의 입에서 답답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서로의 자리가 바뀐 채 지면으로 내려섰다. 장양은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양이 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결투는 승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인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끝을 맺는 그런 싸움이었다. 주정천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양의 얼굴에 짖은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어깨에 스며들어오는 쓰라린 고통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인의 본능을 일깨우고 있었다. 호랑이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다. 피를 보는 순간 그 옛날 강호를 종횡 하던 야성이 각성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장양은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인에게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두 가지의 숙명(宿命)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인 것이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기합성을 내지르며 두 발을 박차고 천장으로 몸을 솟구쳤다. “흥!” 주정천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자신의 신형을 뛰어 올렸다. 비록 장양이 먼저 신형을 날렸지만 지붕을 뚫고 올라온 것은 두 사람 동시였다. 주정천은 쾌검을 구사하는 만큼 신법도 날렵했다. 두 사람 모두 지붕위로 내려서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들었다. “하앗!” 창창창! 밝은 달빛아래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으며 검광은 더욱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주정천의 검이 예전과 같은 빠름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극쾌의 검을 구사하는 무사들은 안정된 자세를 필요로 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사진 지붕에서 안정된 자세를 취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쪽다리가 굽혀들게 되어 올바른 자세를 유지 할 수가 없었다. 검이 느려진 것이다. 그제야 장양이 갑자기 지붕위로 뛰어오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은 갑자기 떨어지며 또 다시 누군가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헉!” 이번엔 주정천의 어깨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양의 입에서 야릇한 미소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 이 번에는 주정천이 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패배자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일승일패를 나누어 가졌다. 또한 통쾌하게 싸웠으며 이 순간만큼 복수라는 단어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주정천은 순간이나마 그것을 느꼈으며 그래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주정천은 그 동안 무인으로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잊고 살아왔으며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인으로서 웅지와 호연지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양 또한 주정천의 마음과 다르지 앉았다. 그는 이십 년 전 강호가 좁다고 느끼며 종횡하던 웅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또한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살아왔다. 그 동안 스스로 무인임을 잊고 너무나 안락하게 지내온 날들이 아쉬울 뿐인 것이다. 산속을 호령하던 호랑이가 늙었다고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눈을 보라 다시 옛날의 호목(虎目)과 용목(龍目)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부귀영화가 과연 무엇이고, 복수란 무엇이란 말인가? 무인은 다만 검 끝에 자신의 혼을 맡기면 그만인 것이다. 두 늙은 무인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들의 눈빛은 혈기로 빛나고 있었다. 이 번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생과 사, 승과 패! 어쩌면 양패구상으로 두 사람모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서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의 실수가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 “…….” 얼마나 그들이 그렇게 있었을까? 갑작스런 한풍이 세차게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정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 움큼 흩날리며 그의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순간 장양의 팔이 번뜩이며 찰나의 순간에 아홉 방향으로 아홉 번의 검을 펼쳐냈다. 그는 초식은 현란했으며 검이 일으키는 검풍은 마치 둥근 만월도 쪼갤 듯 했다. 일순간, 시야를 놓친 주정천은 도저히 그의 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것이 허초이고 실초인지 가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자신의 빠른 검으로 구검을 모두 막았겠지만 지금의 삐뚤어진 자세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주정천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자신의 팔을 내리고 흔들었다. 그러자 소검이 스르렁 소리를 내며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푸욱! 하는 느낌과 동시에 장양은 검 끝을 통해서 주정천의 살을 파고드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장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주정천의 손이 그의 검을 와락 잡았다. 장양의 얼굴이 경악에 휩싸이며 그는 힘을 다해 검을 뽑았지만 검 날은 이미 주정천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그가 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주정천의 팔이 번뜩이고 있었다. ‘창’하는 밝은 파열음과 함께 푸른 검광을 장양은 보아야 했다. “헉!” 장양은 쿵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연거푸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야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주정천의 한 쪽 손을 서둘러 지혈시키며 자신의 의복을 찢어 손을 묶었다. “…….” “…….” 싸늘한 겨울바람이 두 사람사이를 지나갔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라 여겼거늘……. 확실히 주형의 솜씨는 소제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 “주형! 소제가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리다. 들어 주시겠소?” 주정천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고맙소. 소제의 아들은 불쌍한 놈이오.” “그것이라면 걱정 마시오. 이것으로 모든 은원을 잊었소.” 그러자 이번엔 장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오. 그 놈은 몹시 모자란 놈이지요. 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거요. 내 아들 충아를 죽여주시오. 저승에서나마 그 놈을 보살필 수 있도록 말이오.” 그 말과 함께 장양의 몸이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쿵! 장양의 이마에 가느다란 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그런 혈선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주정천의 입가에 가느다란 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밝은 달을 쳐다보며 무심히 뇌까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말은 틀렸소! 강호의 소문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되오. 당신은 소제보다 두 수는 아래였소.” 천장에 솟구쳤던 두 명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장지충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서 내심쾌재를 불렀다. 그는 모든 것은 해결되리라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은살막을 통해서 부친을 살해하려 했음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바로 백리향과 아버지, 그리고 은살막주! 그 중에 백리향은 떠났고 아버지는 죽었다. 은살막주는 이러한 사실을 떠벌릴 일이 없으니 당연히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질 것이다. 자신은 이제 떳떳하게 생활하면 그만이었다. 장지충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어가 주정천의 발에 입을 맞추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주정천의 손에 쥐여져 있는 검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제 십오장 龍虎爭鬪一斷腸(용호쟁투일단장)-3 열여섯에 잃어버린 빛과 소리. 장취취의 삶은 그렇게 정해져 버렸다. 아무런 발악도 해보지 못한 채, 운명의 수레바퀴는 그녀를 밟고 지나가 버렸다. 더욱이 백리향을 안타깝게 하는 것은 그녀를 지탱해줄 육합문이 몰락해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백리향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당장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그는 한 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백리향이 방문을 나서자 차가운 한풍(寒風)이 괴성을 토하며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작은 나뭇잎들은 풍파를 이겨내지 못하고 파도를 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바라보는 백리향의 마음도 덩달아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떨어져 내린 잎사귀가 백리향의 발에 밟혀 사각거리는 소리를 터트렸다. 어느덧 육합문의 육중한 대문앞에 선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육합문의 정경을 한 동안 바라보았다. 미련은 없었다. 어차피 빈 몸으로 왔으니 빈 몸으로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단지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을 더 많이 가지고 감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육합문의 육중한 대문을 열었다.끼이익 거리는 듣기 고약한 마찰음을 내뱉으며 육합문의 정문이 열렸다. 그가 육합문을 나서자 양 쪽에 서있던 두 명의 호위무사가 백리향을 지켜보고 있었다. 백리향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여전히 고생이 많으시군요?” 두 명의 문지기들은 백리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육합문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서관께서는 야심한 시각에 어디를 가십니까?” 백리향은 기지개를 활짝 켜며 말했다. “이제부터 소생은 서관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서관님이 서관이 아니면 누가 서관이란 말입니까?” 그의 말에 백리향은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지금과 잠시 후가 다른 것입니다. 어저께의 소생은 서관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한 명의 구도자일 뿐이지요.” “.......?” 백리향의 말에 두 명의 문지기는 알 수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백리향의 말을 잠시 후면 진정으로 깨닫게 될 것이었다. 백리향은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더욱 수고하십시오.” 새벽의 찬 공기가 하얀 입김을 뿜어내었다. 귀뚜라미는 육합문의 구석진 담 속에 숨어 울어대고 있었고, 꽉 찬 만월은 백리향의 발길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발걸음으로 육합문과 천태현을 이어주는 산비탈을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육합문의 전경이 가물거리고 백리향이 거대한 느티나무를 돌때였다. 그 느티나무에서 백의 인영이 나타나 백리향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순간의 스침이었지만,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인연(因緣)의 파편이 백리향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어왔다. 백리향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그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 인영 또한 걷던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고 흰색장삼을 걸친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 노인과의 우연히 마주친 눈길이 한동안 떨려왔다. 노인의 깊은 눈길 속에서 처절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노인의 눈동자에도 심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백리향도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도 깨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한 사람은 떠나고 한 사람은 왔다. 한 번쯤 상대의 신분을 의심해 볼만도 하련만 그들은 아무런 말이 없이 자신이 가야할 길을 걸었다. 그는 그, 나는 나. 인연이란 이렇듯 밀물처럼 생겼다가 썰물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노인은 저 젊은이의 눈길을 받는 순간 식어버린 자신의 가슴에 따뜻한 훈풍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젊은이는 어린아이의 눈을 지녔다. 노인의 가슴속에 멍울진 한의 잔재들이 저 청년의 눈길에 녹아 들어가는 것이다. 노인은 얼른 그의 눈길을 회피하여 버렸지만, 지금이 아닌 평상시의 만남이었다면 삼일 밤낮을 술을 마시며 인생을 논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그와의 만남을 어느새 잊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산비탈을 지나자 화려한 육합문의 전경이 보이고 높은 전각의 지붕들이 담벼락 넘어로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그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면만 바라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노인은 어느덧 육합문의 대문에 다다랐다. 지나치게 매서운 가을의 한풍이 노인의 손을 얼어붙게 하였다. 노인은 자신의 식어버린, 너무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앙상한 뼈마디에서 우두둑하는 마찰음이 일어났다. 그가 육합문에 다다르자 두 명의 문지기가 잡담을 나누다 말고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하지만 노인은 유유자적 걸으며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려하지 않았다. 어느덧 노인은 그들과 삼장가까이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긴장하며 자신들의 장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누구……!” 그들은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였다. 저 멀리 있던 노인이 어느새 그들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노인의 팔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으며, 하나의 검광을 보았다. 파파팟! 두 문지기는 아무런 비명도 없이 그대로 대문에 몸을 기댄 채 쓰러지고 말았다. 밝은 달 빛 아래 그들의 표정은 경악에 차 있었으며 그들의 이마 한 가운데서 한 방울의 피가 형성되더니 주르륵 옆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노인은 가벼운 한 숨을 내쉬었다. 한 방울의 피! 그것이 노인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강호를 종횡하고 다닐 때 사람들에게 얻은 별호가 탈혼무혈(奪魂無血)이었다. 사람의 혼을 빼앗되 피는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생긴 별호였다. 그런데 한 방울의 피가 흘러내리지 않는가? 그만큼 자신의 검이 녹슬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노인은 육합문의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치 걷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는 곤륜산에서부터 이곳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걸어 왔다. 그는 승마에 대하여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으며 걷기보다 마차를 애용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한번도 쉬지 앉고 걸어온 것이다. 그는 걸어오면서 충분한 생각을 가질 수 있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볼 수도 있었다. 걷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인지 그는 처음으로 알았다. 그의 주위로 불타버린 충의전의 전각이 보였다. 그리고 완전히 소실된 몇 채의 건물도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 그를 막아서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이 태의전을 지나 조그마한 소로를 따라 한 참을 걸었다. 쉼 없이 걷기만 할 것 같던 그의 발이 갑자기 우뚝 멈추었다. 노인의 앞, 전혀 예상치 못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그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먼저 정심관을 다녀간 것이다. 널브러져 있는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들.......그 들은 죽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 수혈이 점해져 쓰러져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고요한 점으로 보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혈이 찍혔음을 알 수 있었다. 누가 과연 이러한 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노인의 능력으로 이들 열여덟 명의 호위무사들을 죽이려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혈을 점할 수는 없었다. 노인은 서둘러 정심관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그토록 갈망해 마지않던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을 때 장양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동설한에 차가운 구정물을 만지며 빨래를 하는 아내를 보았을 때 자신의 청렴결백함이 그 무엇보다 저주스러웠다. 그때 문득 자신의 머리를 때리던 깨달음……! ‘부를 얻고 싶은가? 부를 얻어 사랑하는 아내에게 호화로운 생활을 안겨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수치심을 감추고 전력을 기울여라. 친구와의 사귐을 끊고 의리를 배반하면 될 것이다!’ 장양은 이렇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태고의 정적을 깨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장양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지 다하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금전적인 안락함보다 더욱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권력을 얻고 싶은가? 권력을 얻어 그 테두리 안에 가족을 보호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자신이 축적한 부를 이용하라. 자존심을 버리고 개가 되어라. 그리하면 틀림없이 권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장양은 이렇게 하여 자신의 제자들을 무장원에 합격시킬 수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며 자식들을 훌륭히 키울 것을 부탁하였을 때 장양은 그녀에게 그렇게 할 것임을 다짐했다. 그것은 도저히 어길 수 없는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한 느낌으로 살아있는데,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는데, 어찌 약속을 어길 수 있겠는가? 장양은 아내와의 약속대로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자 노력했으며 현명한 가장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아이들도 훌륭하게 자라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자신은 무엇을 위해 살아왔던가? 누구를 위하여 의를 배반했으며 누구를 위하여 개가 되었던가? 자신의 방법이 잘못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신에게 돌아온 인과치고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칼로 창자를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란 이런 것일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절망감이란 이런 것일까? 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은 무엇이란 말인가? 후후후! 장양의 두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오늘에서야 알았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 일검차천(一劍遮天 ) 장양(張楊)! 이십년 전 탈혼무혈 주정천과 함께 용호쌍검(龍虎雙劍)으로 불리며 무림을 종횡 하던 그가 지금 목 놓아 통곡하고 있었다. 그에게 어떠한 슬픔이 있었기에 통곡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얼마나 커다란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주정천은 잘 알 수는 있었다. 그도 저러한 통곡을 터트려 보았기 때문이다. 두 아들을 읽고서 터트린 눈물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하염없이 주저앉아 있는 장양 앞에 서서 넌지시 말했다. “장형! 소제 주정천이오.” 순간, 장양의 두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일렁이는 촛불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더없이 괴기스러워 보였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돌려 주정천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였지만, 전보다 훨씬 늙어버린 얼굴이었지만, 틀림없이 그였다. 탈혼무혈 주정천! “…….”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을 격하고 마주쳤다. 근 10여 년 만에 만난 막역지우이건만 두 사람의 눈길 그 어디에서도 반가움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장양의 눈은 더 이상 살아있는 자의 눈이 아니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떠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정천은 그의 회색빛 눈을 통해 슬픔에 찌든 자신의 자화상을 볼 수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간 아들들에 대한 늙은 아비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오는 것이었다. 주정천은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빈 허공으로 눈을 돌리며 한탄을 하듯 말했다. “소제가 두 아들의 무덤을 직접 만들고, 곤륜산을 벗어났을 때 장형의 이런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소.” “…….” 한 참을 올려다보던 장양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양 또한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런 먼 곳까지 어떻게 오시었소!” “물론 소제의 두 아들놈 때문이지요.” 그러자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은 냉랭한 장양의 말이 이어졌다. “소제와……. 관계가 있소?” 주정천은 그가 참으로 뻔뻔스럽다고 느꼈다. 이지경이 되고서도 발뺌을 하려하다니……! 그가 알고 있는 장양은 이런 후안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20년 전 그는 정도의 길을 걸으며 의를 알고 협을 행하고 불의에 맞서 싸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존경했으며 삼일 밤낮을 술을 마시며 세상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자신의 아들인 주화룡을 그에게 제자로 보낸 것은 그에게 무공을 배우게 함이 아니었다. 그의 인품과 덕을 배우게 함이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가식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동안 그의 인품이 바뀌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순수함과 열정으로 가득 찼던 당시의 사람이 어찌 이리도 퇴색되어 버렸단 말인가? 주정천은 분노로 더욱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한 가지만 말하리다. 주화룡 그놈이 죽던 날 백우산이 우리 주가장으로 왔소! 그에게 모든 것을 들을 수 있었다오.” 그래……. 그렇게 된 것이로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후후후! 장양은 혹시나 하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자 그만 씁쓰레한 고소를 입에 물었다. “그럼……. 말이 필요 없겠군!” “그렇소!” 장양은 모든 것에 해탈한 듯 천천히 일어섰다. 잠시 장지충과 눈길이 마주쳤다. 장지충은 감히 눈길을 바라보지 못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장양의 두 눈도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가엔 알 수 없는 고통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한 순간의 일일뿐 다시 냉철한 표정이 되어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주정천도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들였다. “…….” “…….” 비록 20년 지기일망정두 사람은 서로의 심장에 검을 겨누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착잡한 심경을 말해주듯 촛불이 갑자기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장양은 철궁을 내던지고는 벽에 매달려 있는 애검인 혈루(血淚)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대는 쾌검의 달인이다. 그의 발검(拔劍)은 전광석화와도 같았으며 회검(回劍)은 더욱 빨랐다. 접근전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주정천의 발걸음도 천천히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그에게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으로 장지충을 중점으로 빙글 도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소제는 주형이 홀로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나는 왔소!” “홀로오신 것은 무림맹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오?” “장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소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소. 설사 당신이 지옥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옥으로 갔을 것이오.” 장양은 냉철한 눈빛으로 주정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지금당장이라도 육합문도들을 불러 모을 수 있소.” 하지만 주정천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시오.” 순간, 장양은 깨달았다. 확실히 주정천과 자신은 달랐다. 그는 주정청만한 배포가 없었으며 이처럼 저돌적이지도 못했다. 저 용맹함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홀로 육합문을 들어서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장양은 다시 한 번 부전자전(父傳子傳)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주화룡과 주화운은 너무나 주정천을 닮아있었던 것이다. “주형은…….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하는 거요?” “장형은 확실히 죽소. 육합문에 얼마나 많은 문도들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당신이 죽는 것은 기정사실이오!” “........” 어쩌면 주정천의 말이 맞을지 모른다. 그는 확실히 그런 능력이 있었다. 그 옛날 강동(江東)의 맹호방(猛虎邦)을 상대로 홀로 싸웠던 그였다. 그리고 끝내는 맹호방의 괴멸시켰던 그였다. 하지만 그도 옛날의 주정천은 아니었으며 자신도 옛날의 장양이 아니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세월은 극약과도 같은 것이다. 그는 틀림없는 용이긴 용이되, 늙은 용일뿐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예초부터 육합문도들을 불러 그를 처치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한 번만이라도 장양은 정정당당하게 싸우고 싶었다. 장양에게 있어서 주정천은 그런 존재였다. 어쩌면 그것은 주정천 또한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는 장담할 수 있었다. 그와의 결투는 죽기 전 마지막으로 멋지게 할 만한 일이라는 것을.... 장양은 자신의 애검인 혈루를 뽑아들며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길 소제의 검이 주형의 검에 비하면 한 수 아래라고 하더이다. 실제로 그러한지 소제는 항상 궁금했었소.” “오늘 장형은 뼈저리게 느끼게 될 거요.” 주정천의 팔이 밑으로 향함과 동시에 그의 소매에서 조그마한 소검이 맑은 금속성 소리를 내며 튀어나왔다. “창!” 그 순간 장양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주정천의 발걸음도 덩달아 멈추었다. 두 사람의 몸에서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연단아래 서른 개의 촛불이 무형의 기운에 의해 거세게 흔들거렸다. “…….” “…….” 장양은 저 조그마한 검에서 얼마나 커다란 위력을 발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에게는 두려움이란 사치일 뿐인 것이다. 장지충의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터질 듯한 긴장감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이 결투는 비단 그들만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도 결정되어 지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만약 사라져 준다면! 만약 주정천이 자신의 부친을 죽여만 준다면!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순간, 누군가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지며 두 사람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까가강! 챙! 챙! 챙! 찰나와 같은 순간에 무수한 검광이 허공에서 스치며 지나갔다. 주정천은 한 순간에 서른여섯 검을 찔렀으며 장양은 그중 서른다섯 검을 막을 수 있었다. “헉!” 장양의 입에서 답답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고 서로의 자리가 바뀐 채 지면으로 내려섰다. 장양은 허탈한 심정으로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의 어깨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양이 패한 것이다. 하지만 이 결투는 승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인 것이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그 끝을 맺는 그런 싸움이었다. 주정천의 입가로 가느다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장양의 얼굴에 짖은 살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어깨에 스며들어오는 쓰라린 고통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무인의 본능을 일깨우고 있었다. 호랑이는 결코 길들여지지 않는다. 피를 보는 순간 그 옛날 강호를 종횡 하던 야성이 각성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장양은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인에게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두 가지의 숙명(宿命)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죽거나 아니면 살거나 인 것이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기합성을 내지르며 두 발을 박차고 천장으로 몸을 솟구쳤다. “흥!” 주정천은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 자신의 신형을 뛰어 올렸다. 비록 장양이 먼저 신형을 날렸지만 지붕을 뚫고 올라온 것은 두 사람 동시였다. 주정천은 쾌검을 구사하는 만큼 신법도 날렵했다. 두 사람 모두 지붕위로 내려서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달려들었다. “하앗!” 창창창! 밝은 달빛아래 두 사람은 하나가 되었으며 검광은 더욱 화려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점이 있었다. 주정천의 검이 예전과 같은 빠름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이다. 원래 극쾌의 검을 구사하는 무사들은 안정된 자세를 필요로 한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사진 지붕에서 안정된 자세를 취하다보니 자연스레 한 쪽다리가 굽혀들게 되어 올바른 자세를 유지 할 수가 없었다. 검이 느려진 것이다. 그제야 장양이 갑자기 지붕위로 뛰어오른 이유를 알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의 신형은 갑자기 떨어지며 또 다시 누군가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헉!” 이번엔 주정천의 어깨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양의 입에서 야릇한 미소가 베어 나오기 시작했다. “…….” 이 번에는 주정천이 졌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패배자로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일승일패를 나누어 가졌다. 또한 통쾌하게 싸웠으며 이 순간만큼 복수라는 단어는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주정천은 순간이나마 그것을 느꼈으며 그래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주정천은 그 동안 무인으로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잊고 살아왔으며 이제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무인으로서 웅지와 호연지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장양 또한 주정천의 마음과 다르지 앉았다. 그는 이십 년 전 강호가 좁다고 느끼며 종횡하던 웅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그 또한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잊고 살아왔다. 그 동안 스스로 무인임을 잊고 너무나 안락하게 지내온 날들이 아쉬울 뿐인 것이다. 산속을 호령하던 호랑이가 늙었다고 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눈을 보라 다시 옛날의 호목(虎目)과 용목(龍目)으로 돌아오지 않았는가! 부귀영화가 과연 무엇이고, 복수란 무엇이란 말인가? 무인은 다만 검 끝에 자신의 혼을 맡기면 그만인 것이다. 두 늙은 무인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들의 눈빛은 혈기로 빛나고 있었다. 이 번의 공격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생과 사, 승과 패! 어쩌면 양패구상으로 두 사람모두 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서로를 직시하기 시작했다. 한 순간의 실수가 바로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 “…….” 얼마나 그들이 그렇게 있었을까? 갑작스런 한풍이 세차게 불어와 그들의 옷자락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주정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한 움큼 흩날리며 그의 시야를 가리고 말았다. 순간 장양의 팔이 번뜩이며 찰나의 순간에 아홉 방향으로 아홉 번의 검을 펼쳐냈다. 그는 초식은 현란했으며 검이 일으키는 검풍은 마치 둥근 만월도 쪼갤 듯 했다. 일순간, 시야를 놓친 주정천은 도저히 그의 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것이 허초이고 실초인지 가름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자신의 빠른 검으로 구검을 모두 막았겠지만 지금의 삐뚤어진 자세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주정천은 모든 것을 포기한 듯자신의 팔을 내리고 흔들었다. 그러자 소검이 스르렁 소리를 내며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푸욱! 하는 느낌과 동시에 장양은 검 끝을 통해서 주정천의 살을 파고드는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장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의 가슴 깊숙이 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나 바로 이때, 주정천의 손이 그의 검을 와락 잡았다. 장양의 얼굴이 경악에 휩싸이며 그는 힘을 다해 검을 뽑았지만 검 날은 이미 주정천의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그가 손을 놓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주정천의 팔이 번뜩이고 있었다. ‘창’하는 밝은 파열음과 함께 푸른 검광을 장양은 보아야 했다. “헉!” 장양은 쿵쿵쿵 발자국 소리를 내며 연거푸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야했다. 그리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주정천의 한 쪽 손을 서둘러 지혈시키며 자신의 의복을 찢어 손을 묶었다. “…….” “…….” 싸늘한 겨울바람이 두 사람사이를 지나갔다. “강호의 소문은 믿을 것이 못되는 것이라 여겼거늘……. 확실히 주형의 솜씨는 소제보다 한 수 위에 있습니다.” “.........” “주형! 소제가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리다. 들어 주시겠소?” 주정천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고맙소. 소제의 아들은 불쌍한 놈이오.” “그것이라면 걱정 마시오. 이것으로 모든 은원을 잊었소.” 그러자 이번엔 장양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아니오. 그 놈은 몹시 모자란 놈이지요. 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거요. 내 아들 충아를 죽여주시오. 저승에서나마 그 놈을 보살필 수 있도록 말이오.” 그 말과 함께 장양의 몸이 뒤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쿵! 장양의 이마에 가느다란 혈선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지 않고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그런 혈선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마에서는 한 방울의 피도 흐르지 않고 있었다. 주정천의 입가에 가느다란 한 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밝은 달을 쳐다보며 무심히 뇌까리기 시작했다. “당신의 말은 틀렸소! 강호의 소문은 도무지 믿을 것이 못되오. 당신은 소제보다 두 수는 아래였소.” 천장에 솟구쳤던 두 명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장지충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을 하고서 내심쾌재를 불렀다. 그는 모든 것은 해결되리라 확신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은살막을 통해서 부친을 살해하려 했음을 아는 사람은 단 세 사람뿐이었다. 바로 백리향과 아버지, 그리고 은살막주! 그 중에 백리향은 떠났고 아버지는 죽었다. 은살막주는 이러한 사실을 떠벌릴 일이 없으니 당연히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질 것이다. 자신은 이제 떳떳하게 생활하면 그만이었다. 장지충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주정천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어가 주정천의 발에 입을 맞추고 경의를 표하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주정천의 손에 쥐여져 있는 검이 자신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제 십육장 欲問後期何日是(욕문후기하일시) 훗날을 묻고자 하나, 그날이 언제일런가..... 쏴아아! 향기로운 흙내 음을 않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며 비는 추락한다. 초록의 땅을 위하여 내리꽂히는 순백의 물줄기를 바라보는 백리향의 마음도 축축이 젖어가고 있었다. “백리공자께서는 들으셨소?” 백리향은 입에 가져가던 찻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의아한 듯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강자단은 죽엽청을 홀짝이며 말했다. “며칠 전, 장양이 죽었소. 그 아들과 함께 말이오. 모두 주정천의 손에 죽었다고 하더군.” “…….” 결국은……. 그렇게 되었구나. 그렇게 되고 말았구나! 화(禍)는 함부로 오지 않는다. 복(福)도 터무니없이 오지 않는다. 악과(惡果=악의 열매)가 아직 익지 않는 동안은 악인은 그래도 운이 좋다. 악과가 익을 때가 되면 악인은 악을 당한다. 백리향은 아무 말 없이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격자무늬가 아로새겨진 창문 밖으로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쏴아아! 그래서 저리도 비가 쏟아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더러운 피를 씻어내기 위해……. 오갈 데 없는 영혼들을 씻김을 하기 위해……. 비는 높은 곳을 싫어하여 떨어지는 것이다. 장양의 심성이 비를 닮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백리향은 창가에서 시선을 떼고 강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주정천은 어떻게 되었다 합니까?” 강자단은 술을 홀짝이고는 말했다. “그가 장양과 장지충을 죽이고 나왔을 때는 이미 주위로 수십 명의 육합문도들이 쫘 악하고 포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정천은 일말의 두려움 없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더니 주위를 슬쩍 바라보며 대소를 터트렸지요. 그러자 육합오호검에 새롭게 편승한 동곽이란 놈과 멍청한 몇 놈이 그에게 검을 빼어들고 덤볐다고 합니다. 주정천은 코웃음을 치며 팔을 내뻗자 갑자기 검광이 일며 그들을 고혼으로 만들었지요. 그러자 놀란 육합오합지졸들은 스스로 길을 만들어 주고는, 주정천이 사라질 때까지 눈만 껌뻑이고 있었답니다. 껄껄껄!” 강자단은 통쾌한 듯 대소를 터트리며 한 잔의 술을 홀짝였다. 그러나 백리향은 그와는 달리 웃을 수가 없었다. 며칠 전 밤, 그는 허무에 지친 한 노인을 만났으며 그 노인이 바로 주정천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백리향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말 할 수 없는 비애를 느꼈다. 그리고 백리향은 강자단에게 넌지시 말했다. “소생은 이만 떠날까 합니다.” 강자단은 깜짝 놀라며 닭다리를 뜯다말고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 한 참을 그렇게 바라보더니 어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소. 초겨울의 갑작스러운 비는 몹시 차갑지.” 쌀쌀한 초겨울의 비가 내리고 있으니 떠나지 말라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백리향은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가고 옴에 어찌 비가 방해가 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좋지요. 소생의 흔적을 감추어 줄 테니......” “.........” 백리향은 찻잔을 다시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차는 이미 식어 온기를 잃고 있었다. “그전에 강대협께 부탁이 있습니다.” 강자단은 닭다리를 신경질적으로 내어 던지고 죽엽청을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아무런 이익이 없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겠소!” 그렇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강자단은 백리향을 위해 많은 일을 해주고 있었다. 백리향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알기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커다란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소생이 장담하지요.” “........” “육합문을 잠시 부탁합니다.” 평생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강자단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흥! 이미 망해버린 육합문을 맡아 무엇이 이득이 된단 말이오!” 백리향은 강자단의 신경질적인 행동에 빙그레 웃으며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커다란 이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소생이 장담하지요. 소생에게는 그만한 정보가 있습니다.” 강자단은 다시 드러누우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만두시오! 필요 없소!” * * * “빌어먹을!” 강자단은 갑자기 발을 구르며 욕설을 내뱉었다. 옆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서있던 정가문은 깜짝 놀라며 강자단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들은 천태현을 벗어나는 길목을 점거하고 한 대의 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강자단의 괴팍한 성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비에 흠뻑 졌더라도 결코 강자단의 몸에 한 방울의 빗방울도 침범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었으며 그 어떠한 불쾌한 일도 저지르지 않도록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가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화를 낼 이유가 없는지라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찌 그러십니까. 무슨 언짢은 일이라도......” 그러나 강자단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애꿎은 하늘을 쳐다보며 욕설을 뱉어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 빌어먹을! 이제야 정을 줄 친구를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무심히 떠나버리다니……. 평생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줄 알았는데....... 그런데, 하늘은 왜 이렇게 어두컴컴한 거야! 빌어먹을! 빌어먹을! ** * 장노삼은 서두르기 시작했다. 서둘러 이곳 천태현을 벗어나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백리향에게 호되게 당한 후, 육합문에서 빼돌린 재산을 모두 황금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특수한 마차에 실었다. 그는 절대로 표국을 믿지 않았다. 그도 한 때는 살수의 길로 접어들기 전에 산속에서 노략질을 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놈들아! 달려. 달리란 말이다!” 이렇게 외치고 있었지만 자신이 탄 마차는 더 이상 속력이 늘지 않았다. 이미 최고의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노삼은 균형을 잃고 내동댕이쳐지며 머리를 마차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어느덧 마차는 멈추었고 그제야 균형을 되찾은 장노삼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않으며 고함을 질렀다. “이, 이놈들! 마차를 어찌 이따위로 모는 게냐!” 그때 마차 밖에서 부하의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막주님!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자들이 나타났습니다.” 장노삼은 화를 벌컥 내며 말했다. “이놈아! 가로막으면 죽이고 밟고 지나면 될 게 아니냐!” 그러자 예의 침착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런데......저희들을 가로막는 자가 철혈마검 강자단과 정가문입니다.” “뭐, 뭐!!!” 그는 너무 놀라 벌떡 일어서다가 천장에 다시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퍽! “크윽!” 장노삼은 그만 주저 앉아버리고 말았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들이……. 그들이 어떻게 알고 길목을 지키고 있단 말인가? 그가 정신도 차릴 사이도 없이 우렁찬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들려 왔다. “이보게! 장노삼. 비도 부슬부슬 오는데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 잠시 나와 보게 얼굴 좀 보세나!” 틀림없는 강자단의 목소리였다. 장노삼은 얼굴이 창백히 변하기 시작했다. “혹시 지금 말하시는 분은 철혈신검 강자단대협이 아니시오?” 장노삼은 철혈마검이라는 외호를 감히 사용하지 못하고 철혈신검이라 높여 불렀다. 강자단은 어이가 없는지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철혈신검이라니……. 감당하기 어렵네. 얼른 나와 보시게.” 장노삼은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며 이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소인이 몸이 부자연스러워 나가지 못하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 장노삼은 결코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자신들을 막아 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렇기에 나가면 그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차 안은 안전했다. 무려 서른 가지의 기관장치와 암기가 숨어있어 자신의 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이보게! 자네 죽고 싶나? 우리에게는 상당량의 화탄이 준비되어 있단 말일세.” 장노삼은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후닥닥 뛰쳐나가 공손히 읍을 하며 말했다. “소인 장노삼 인사 올립니다.” 저 멀리 강자단과 정가문이 우산을 받쳐 든 채 싱글벙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단 두 명뿐이 아닌가? 그제야 장노삼은 자신이 속은 것을 알아채고는 탄식을 터트렸다. 장노삼은 다시 마차 안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상대는 두 명이고 자신은 수하들과 합쳐 열 명이나 되니 적이 안심도 되고 자신의 목숨만은 부지 할 수 있겠다 싶어 그대로 있기로 했다. 어느덧 강자단은 가까이 다가와 장노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가운 듯 말했다. “새삼스레 인사는.....그 보다 자네가 은살막의 막주라니 놀랍기 그지없네 그려.” 장노삼은 빗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줄기를 흘리며 고개를 굽실거렸다. “그, 그것은……. 소인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 지요.” 강자단은 팔짱을 끼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귀한 물건을 싣고 간다기에 구경이나 하러 왔지.” 장노삼은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어찌 이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의 의구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백리향과 강자단의 관계를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의구심만을 품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소, 소인에게 무슨 귀한 물건이 있겠습니까?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강자단은 갑자기 버럭 고함을 지르며 말했다. “귀한 물건이 아니라면 어찌 육합문이 하루아침에 몰락했겠는가! 어찌 장양과 그의 아들이 죽었겠는가!” 장노삼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장양과 장지충의 관계마저 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장노삼은 늙은 여우였다. “아! 이제야 생각이 났습니다. 하지만 그 귀한 물건은 이미 표국에 맡겨 놓았기에 지금으로서는 보여 드릴수가 없군요. 정말이지 죄송스러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소인의 옷자락 속에는 십만 냥의 전표가 있답니다. 그것은 보여 드릴수가 있습지요.” 쉽게 말해 십만 냥이라는 거금을 줄 테니 이쯤에서 해결을 보자는 말이었다. 하지만 강자단은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쯧쯧!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는군. 자네는 어찌 이리도 통이 작은가?” 뭣! 이 순 날강도 같으니라고.......에이 도적놈들아! 그것은 장노삼의 생각일 뿐 행동은 그와는 달랐다. “그러고 보니…….소인의 소매 속에 십만 냥의 전표가 더 있군요. 후후후!” 강자단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보게. 장노삼! 철혈마검 강자단이 겨우 이십만 냥에 꼬리를 내리고 돌아갔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찌 강호에 얼굴을 들고 다니겠나? 차라리 자네의 목숨을 거두어 명성이나 올려야 하겠네.” 비록 살수의 집단이라고는 하나 그도 일문의 종주였다. 자신의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굽실거리는 것도 부끄러운 일인데 이러한 수모까지 당하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마차가 있었다. 자신의 수하들과 저들이 싸우는 동안 자신은 마차에 몸을 실어 떠나면 그만인 것이다. 수하들이야 다시 만들면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자신의 재산으로 떵떵거리며 살수도 있었다. 장노삼은 강자단의 손길을 뿌리치며 뒷걸음질 쳤다. “흥! 당신은 나를 너무나 핍박하는구나! 은살막의 정예고수가 눈에 차지는 않겠지만 당신들과 동귀어진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강자단은 뜻밖이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자네 미쳤나?” 장노삼은 검을 빼어들며 당당하게 외쳤다. “흥! 좋다 애들아! 너희들도 당당한 무림인이라는 것을 저들에게 보여주어라! 한 번 멋지게 싸워보자!” 그리고는 정작 자신은 두어 걸음 물러났다. “..........” “..........” “..........” 아무리 기다려도 부하들의 호기로운 목소리가 들리지 앉자 장노삼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 왜 아무 말 없는 게냐?” 부하들은 하늘을 보거나 땅을 보거나 하면서 자신의 눈길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만 당황하기 시작한 장노삼은 자신의 오른팔인 노군행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노군행은 다른 살수들과 같이 그의 눈을 피해 먼 하늘을 바라다 볼 뿐이었다. 장노삼은 그만 정신이 하얗게 되고 온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너, 너희들…….” 그 모습을 곁눈으로 바라보던 노군행은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막주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소인들은 살수입니다. 밤새도록 땅 밑이나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뒤통수에 검을 찌르고 도망치는 것이 소인들의 직업이지요. 어쩔 때는 음식에 독을 풀기도 하며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암기를 날리기도 하지요. 그런데 어찌 저희 같은 자들이 백주 대낮에 무림에 위명이 자자한 분들과 검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막주께서는 저희들을 사지로 내몰고 계십니다. 그런 명령을 소인들이 어찌 쫓을 수 있겠습니까?” “뭐, 뭐라고!” 장노삼은 분노로 펄쩍 뛰었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강자단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군행에게 다가와 어깨에 팔을 걸고는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푸하하핫! 자네. 마음에 드는군! 정말 마음에 들어......” 노군행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강대협.” “자네라면 이야기가 통할 것 같구먼. 안 그런가? 신임막주!” 순간 노군행의 몸이 움찔거렸다. 강자단이 자신을 부를 때 신임막주라고 하였다. 그 말의 의미는……. 노군행은 미소를 가득 베어 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후후후!” 강자단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원한다면 내가 자네의 후견인이 되어 주도록 하지. 하지만 그 전에 우리가 온 것은…….” 강자단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건만 노군행은 마차의 바퀴를 가리키며 말했다. “대협께서는 마차가 어찌 이리도 무거운지 의심이 안가십니까?” 그가 가리키는 대로 바퀴를 보니 말 그대로 진흙 속에 바퀴가 푹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황금은....... “너, 이 더러운 배신자!” 장노삼은 검을 흔들며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그러자 강자단이 신경질적으로 정가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보게 아우! 저 늙은 것을 그만 묻어 버리게!” “네. 형님!” 정가문이 한 손을 번쩍 들자 양쪽 숲 속에서 근 백 여명의 무사들이 검과 도를 흔들며 튀어 나왔다. 모두가 일사불란했으며 걸음걸이가 가벼워 오랜 수련을 거친 자들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을 본 노군행과 은살막의 살수들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백 번 잘한 것임을 깨달았다. 강자단은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신임막주! 우리는 자네의 부하들과 더불어 술이라도 한 잔하자고. 은살막주의 취임식 겸 말일세!” “물론입니다. 후후후!” 나관중은 적당한 만큼의 술을 마셨으며 적당한 만큼 취했다. 그의 기분은 최고였으며 어떠한 일을 벌이더라도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으며, 그 누구를 막론하고 실수없이 죽일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날씨는 차가웠으나 술기운으로 인해 오히려 시원하다고 느꼈다. 그는 술에 만취한 노군행을 수행하며 자그마한 둥근형태의 석교를 지나고 있었다. 자신의 옆에서 비틀거리던 노군행이 갑자기 석교의 난간을 잡더니 하천(河川)을 향해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술을 마셨으며 지나치게 많이 취해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기분은 나관중 만큼이나 좋을 것이었다. 오늘부터 그는 은살막의 신임막주가 되었으며 강자단이라는 거물을 후견인으로 두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노군행은 몇 번이나 더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일시에 토해내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모든 삶을 토해내고 새로운 삶을 들이마시려는 행위인지도 몰랐다. 그는 한참을 석교 아래에 쏟아 붓고는 온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 춥다! 정말로 차가운 날씨야.” “정말로 차가운 날씨 입니다. 막주.” 하며 나관중은 그의 말에 동조했다. 그러자 막주라는 말이 듣기 좋았는지 노군행은 씩 웃으며 말했다. “세상은 정말로 공평해.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회는 찾아오거든. 그 기회를 얻은 자는 성공하지만 그렇지 못한 자는 패배자로 남게 되지.” “그런 거 같습니다. 막주!” 노군행은 석교의 난간에 몸을 의지한 채, 무심히 나관중을 응시했다. “나는 오랫동안 자네를 보아왔네. 그리고 의심했네. 왜냐하면 자네는 결코 살수와는 거리가 먼 친구라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지금은 아닐세. 자네를 믿을 뿐만 아니라 나의 오른팔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자네는 어쩌다 살수의 길을 걷게 됐나?” “글쎄요…….” 하며 나관중은 말끝을 흐렸다. “내가 자네를 가르칠 때만 하더라도 자네가 이렇게 훌륭하게 성장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네.” 나관중은 쑥스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후후! 그런가요?” “자네에게 스무 번의 임무가 주어졌으며 스무 번 모두 훌륭하게 성공시켰지. 그리고 앞으로 더욱 많은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야.” “감사합니다. 막주!” 노군행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다가 갑자기 한탄을 터트렸다. “아! 어쩌면......” “.......” “어쩌면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을 수도 있겠지. 그것이 살수들의 운명이니까.” “......” 나관중은 그가 지나치게 솔직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술을 먹은 탓이리라.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드는 법이 아닌가? 그는 절대로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술은 사람의 정신을 흩트려 놓으며 이성을 읽게 만든다고 생각하는 치밀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항상 진실을 숨겨둔 채 사실만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진실과 사실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진실은 거짓이 없지만 사실은 거짓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지금 너무나 솔직해 지고 있었다. “살수라는 삶은 큰 돈을 만질 수 있을지언정. 항상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하지. 나도, 자네도, 그 두려움만큼은 벗어날 수 없어.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막주!” 나관중은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수그리며 석교의 난간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나는 이 고약한 삶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어.” “.......” “그래서 한 여인을 만나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돌보며 그렇게 살고 싶어.” “......” 노군행은 나관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시선에는 일종의 부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젊다는 부러움. 젊음이라는 것은 새로 시작하기 좋은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네는 젊으니 어쩌면 그런 삶이 가능할지도 모르네.” “.......” 여전히 나관중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눈은 무심했으며 차가웠다. 노군행은 그의 다분히 직업적인 표정에 피식웃었다. 그리고는 먼 하늘을 쳐다보며 몽롱한 어투로 말했다. “나도 한 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지. 그녀는 정말이지 정숙했으며 아름다웠다네.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꼈지. 그리고 그녀를 취했네.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지. 그녀가 집안의 모든 보물들을 들고 나에게 찾아왔더군. 자신과 함께 도망치자고. 그 때 도망쳤으면 지금쯤 나의 인생은 바뀌었을 텐데…….” “그녀와 함께 도주하지 않았습니까?” “응! 그녀는 유부녀였거든. 그녀가 가지고온 보물만 챙기고 그녀를 내버렸지.” “왜.... 그러셨습니까?” “당시의 나는 청운의 꿈을 앉고 있었거든. 나의 미래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고 믿고 있었네. 당시에는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몰랐지만, 요즘 들어 그녀가 무척 그리워.” “그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노군행은 주먹을 폈다 쥐었다하며 한 참을 뜸들이더니 나직이 말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녀는 자살했다고 하더군. 내가 떠난 직후!” 그러자 나관중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정말 안타까운 사연이군요.” 그때, 노군행은 또다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배설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미 그의 뱃속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 참이나 헛구역질을 하더니 온 몸을 떨며 말했다. “크으~ 이보게 정말로 싫은 것이 무엇인지 아나?” 나관중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젊은 남편일세.” “무슨 말씀이신지…….” “그것은 자네 같은 젊은이들의 문제점일세. 젊은것들은 쓸데없는 곳에 모든 정력을 다 낭비해 버리고 정작 필요한 가정에는 비실비실하다는 것이지. 그녀의 남편은 문인으로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었지.그러나 정작 가정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았네! 만약 그자식이……. 그자식이 약간의 정력을 가정에 쏟아 부었던들 나 같은 놈이 끼어들 자리도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녀가 자살할 필요도 없었을 테지. 그녀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녀의 남편이야!” 그러자 나관중은 노군행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나는 화가 났소. 그것 때문에 견딜 수 없었지. 그래서 복수를 꿈꾸며 살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오. 당신과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려고 십년을 기다려 왔소.” “.......!” 순간. 노군행은 깜짝 놀라며 나관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관중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자신이 가르쳐준 일검필살의 검법이었다. 차가운 감촉이 그의 이마를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가는 의식을 찾으려 하였지만 그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노군행은 두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나관중은 그의 시신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그의 부릅뜬 눈을 감겼다. “당신의 말대로 그녀는 자살했소. 한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지. 그 유서에는 당신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했소. 나는 그 유서에서 당신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지. 당신은 나에게 모든 잘못을 돌리려 했지만 그것은 억지요. 나도 그녀를 사랑했었소. 단지 그녀가 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 그때였다. 둥근 석교를 밟으며 한 여인이 나타났다. “정말이지. 당신이 그를 살해할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나관중은 그녀의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나도 이런 기회가 오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어. 그만큼 그는 자신의 신변에 대하여서는 완벽했으니까.” “그렇지 그는 애초부터 술을 마시지 말아야했어. 강자단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하겠군.” 나관중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강자단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어. 하지만 네가 이곳에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온천향은 다리의 난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솔직히 은살막을 떠나며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노군행을 죽이는 일이었지.” 나관중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노군행은 의외로 적이 많군. 그는 항상 인간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것은 그렇지. 하지만 여자문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못했어. 그는 내 여동생을 겁탈했거든. 그것도 열여섯 어린 나이 때 말이야.” “.........” 그녀는 비록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관중은 그녀의 기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나관중 또한 그런 아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담담함은 너무나 낯익게 다가오는 처절함이었다. 순간, 비합조(飛鴿組: 정보담당.)인 그만이 알고 있는 사실을 영원히 무덤까지 가지고 가야하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강백지와 온원원의 죽음이었다. 그들의 죽음을 알아서 온천향이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동생의 행복했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는 것이 죽음을 기억하는 것보다 좋을 것이다. 문득, 나관중은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앉고 사는 사람이 이외로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꾸만 끌리는 자신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관중은 그녀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것 봐. 너와 나는 어딘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 “무슨 말이지?” “너도 숫처녀는 아닐 거 아니야? 나는 서른, 너는 스물다섯. 이정도면 알만한 것은 다 아는 나이고. 나 또한 총각은 아니지. 이미 한 번의 실패도 있었고 말이야. 우리는 제법 잘 해나 갈수 있을 것 같지 않아?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온천향은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청혼하는 거야?” 나관중은 고개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또는 그렇게 생각해도 무방하겠지.” “미안하지만 나는 남자에게는 취미 없어. 하지만……. 한 사람에게는 예외지.” “그 사람이 누군데?” “있어. 그런 사람이…….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한 사람이지. 그는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지. 그리고 수려하지 않은 외모를 지녔음에도 수려한 풍모를 지니고 있지.” 그러자 나관중도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런 사람을 알고 있지. 바로 만서각의 서관이 아닌가?” “그래. 당신도 알고 있군. 하지만 놀라운걸. 당신같이 지독한 냉소적인 사람도 그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도 있다니.” 나관중은 지난날 백리향과 땅을 일구던 때를 회상하면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어느덧 잔잔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오로지 세 가지 부류의 사람만이 있지. 첫째는 나쁜 놈! 둘째는 아주 나쁜 놈! 그리고 셋째는 정말로 나쁜 놈! 하지만 그는 이 세 가지 부류에서 벗어났어. 그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야.” 온천향은 웃었다. 그는 어쩔 수 없는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후후후! 그래. 그래서 한 번은 그를 찾아가 볼 생각이야. 그리고 나의 마음을 고백하고 싶어.” 그러자 나관중은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그는 이미 육합문을 떠났어.”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 “듣고 싶군.” “그것은 마음 심자 하나야.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그를 찾을 수 있을 거야.” “........?”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한 참을 생각했다. 역시 아무런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바람만으로 그를 찾을 수 있다고?” “응. 그가 그렇게 말했어. 그는 그 한 가지만 알고 있으면 도를 이룰 수 있다고 말했지.” 나관중은 머리가 아픈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래. 그는 내가 만난 인물 중에 믿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지. 그리고 그런 유치한 말을 서슴없이 던진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라면…….”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녀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어쩌면 그라면 너의 단점을 이해하고 너를 평범한 여자로 만들어 줄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온천향의 눈꼬리가 올라가며 냉랭하게 말했다. “어이! 이것 봐. 단점이라니 말조심해!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나는 숫처녀야. 자꾸만 이상한 소리하면 화낸다!” 나관중은 뜻밖이라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온천향은 쑥스러운 듯 그의 시선을 피해 졸졸거리는 하천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옆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나관중은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녀의 행복을 기원했다. “부디 네가 뜻하는 바를 이루기를 바라.” 온천향도 미소를 베어 물며 말했다. “고마워. 당신은 이제부터 무엇을 할 생각이지?” “음~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었어. 그것은 옛날에 있었던 모든 이야기들을 글로서 옮기는 것이었지. 그래서 백성들에게 알리고 싶어. 중화의 역사가 얼마나 위대했었는지, 얼마나 많은 영웅호걸들이 있었는지……. 그런 것들을 글로서 옮기고 싶었어. 그리고 몽고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의 민중들이 각성하기를 바라. 아마도 그 글이 완성될 즈음은 내가 육순의 노인이 될 때이겠지만 말이야.” 온천향은 헛바람을 불어내며 말했다. “휴우! 생각보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었군. 당신은......” 그러자 이번에는 나관중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했다. “이봐! 너야말로 말조심해! 나는 그래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야. 자꾸 무시하는 소리하면 화낸다!” 그러자 온천향은 웃었다. 나관중도 웃었다. 그들은 정말로 오랜만에 아무런 사심 없이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후후후!” “후후후!” 그들의 웃음은 곧이어 어색함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헤어져야 할 때가 왔음을 인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온천향은 어색한 듯 애꿎은 난간을 발로 차며 말했다. “그럼…….” 나관중도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래. 넌 저쪽으로 가. 나는 이쪽으로 갈 테니……. 아니면 네가 이쪽으로 가던가. 내가 저쪽으로 갈 테니…….” 그는 몹시 당황해하고 있었으며 그런 모습은 온천향으로서도 처음으로 보았다. 온천향은 그가 매우 귀엽다고 생각하며 풋 하고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아냐. 내가 이쪽으로 갈께.” “그래.” “그럼.” 온천향은 자신이 왔던 그 길을 향해 걸었으며 나관중도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이 가려던 그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그렇게 사라지자 휘영한 밝은 달빛은 그들이 가는 길을 비추고 있었으며 매서운 새벽바람은 한 구의 시체를 훑고 지나갔다. 제 십칠 장 兩雄西湖劍較量(양웅서호검교량) 두 영웅이 서호에서 일검을 겨루니... 사람들은 항주(杭州)를 말할 때, 서호(西湖)를 빼놓지 않으며 서호를 말할 때 항상 항주를 같이 언급한다. 서호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이름 높은 백낙천(白樂天)과 소동파(蘇東坡)가 쌓은 백제(白堤)와 소제(蘇堤)에 의해 세 지역으로 구분된다. 서호 안에는 모두 네 개의 섬이 있는데, 가장 큰 섬인 고산(孤山)은 백제에 의해 육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짙은 서호의 안개가 넘실거리는 새벽. 육지와 서호를 끼고도는 조그마한 소로위로 한 명의 흑의인이 나타났다. 그는 의복뿐만 아니라 유달리 새까만 머리카락과 피부 지니고 있었으며 새까만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챙이 비교적 넓은 흑립(黑笠)을 비스듬히 쓰고 한 손에는 보기에도 화려한 장검을 들고 있었다. 그가 한 걸음 걸을 때마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검수(劍首)에 매달린 붉은 수실이 팔랑거렸으며, 검병(劍抦:검의 손잡이.)에 박힌 일곱 개의 굵은 진주가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그의 어깨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듯 보였으며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는 몹시 권태로워 보였다.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리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하는 평범한 농부들의 모습처럼 묘한 동정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축 늘어진 어깨를 보고 결코 동정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 축 늘어진 어깨에서 발산되는 검은 그 누구보다 빨랐으며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소로의 끝, 제방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수선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은이 걸음을 잠시 멈추시게.” 그러자 흑의 청년은 말잘 듣는 어린아이마냥 우뚝 섰다. “.......” 흑의 청년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다보았다. 그의 뒤로는 어느 사이에 삼십 여명의 황의를 걸친 사나이들이 나타났다. 삼십 여명의 사나이들의 손에는 붉은 수실로 장식된 삼십여 자루의 도(刀)가 쥐여져 있었다. 연령층도 다양해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람은 흰 백발에 백염을 휘날리고 있었으며 나이가 제일 어려보이는 사람은 이제 고작 십오륙 세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육순가량의 늙은 노인이 날카로운 안광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철기성(鐵其星)이다! 자네는 혹시 흑랑(黑狼)이 아닌가?” 흑랑이라 불리는 사나이는 그것을 인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고갯짓은 몹시 지쳐보였다. 철기성은 만족한 듯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는 청정도(淸淨島)에서 왔다.” 청정도! 흑랑은 청정도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청정도의 십이수룡방(十二水龍幇)을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대도(大都)의 연춘각(嚥春閣:원의 대칸이 머무는 곳.)은 천하를 지배하고, 청정도의 십이수룡방은 강을 지배했다. 흑랑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십이수룡방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잘 안다는 것은 그만큼 불필요한 대화를 줄여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지긋지긋해.” 흑랑의 허무감이 짙게 베어있는 말투에 철기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뭐가 지긋지긋하다는 거지?” “살인! 살인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해.” 철기성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됐어! 자네는 이제부터 더 이상 지긋지긋한 살인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야!” 흑랑은 그를 찬찬히 흩어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기대해도 될까?” 그러자 철기성은 단호하게 말했다. “기대해도 돼!” 그 말을 끝으로 철기성의 뒤편에 서있던 삼십 여명의 사나이들이 흑랑의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흑랑도 자신의 검을 뽑았으며 마치 섬광처럼 상대의 목구멍으로 쏘아 들어갔다. “으악!” “켁!” 두 명의 십이수룡방의 사나이들이 자신의 무기를 뽑기도 전에 목과 몸이 분리되고 말았다. 십이수룡방의 무사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어버리자,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벌 떼같이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너무 믿었다. 아니 삼십여 명이라는 인원을 너무 믿은 것이다. 흑랑의 검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듯 화려했으며 빨랐다. 한 번의 검에 하나의 생명이 떨어졌으며 하나의 목숨에 두 번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으악!” “크아악!” 이것은 일방적인 싸움이었으며 격렬하고도 잔인한 학살이었다. 십이수룡방의 무공은 그리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진용이 흐트러진 데다 흑랑의 검세가 생각보다 더욱 대단하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으악!” 흑랑의 검은 빨라도 너무나 빨랐다. 그들은 검의 번뜩임을 보는 순간, 동료의 머리도 같이 떨어지는 는 것을 보아야 했다. 어느덧 열명의 생명이 땅에 떨어졌다. 비명이 난무하고 피가 튀었으나 그것은 학살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흑랑은 마치 춤을 추듯 몸을 휘돌며 수적(水賊)들의 사이로 헤집고 다녔다. 그는 살인이 지겹다고 했으나 아무도 그에게서 목숨을 부지 할 수 없었다. 번쩍이는 검영은 유성처럼 하늘을 수놓아 마치 폭죽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흑랑이 서른 두 번의 검을 휘둘렀을 때는 이미 서른 두 명의 시체와 함께 한 명의 생존자만 남았다. 마지막 남은 한 사람. 철기성은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소문보다 그의 검은 더욱 무서웠으며 잔인했다. 그의 몸은 덜덜 떨리기 시작했으며 두 눈은 공포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하지만 흑랑의 검은 무정했으며 무심했다. 그의 손이 번뜩이는 순간 철기성은 목에서 붉은 선혈을 토해내야 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제야 흑랑은 자신의 검을 검집에 넣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삼십여 명이 내뿜은 피는 이미 대지를 붉게 물들이기에 충분했으며 피비린내가 사방에 진동시켰다. 사람은 무언가 답답함을 느낄 때 한 숨을 쉰다. 그것으로도 답답한 가슴이 풀리지 않을 때 거친 숨을 몰아쉬게 된다. 흑랑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지긋지긋해…….”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랑의 검은 빠르고 잔인하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군.” “......” 흑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서호의 차가운 안개를 헤치고 한 사람이 유령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아니 그 사람은 애초부터 그곳에 줄 곳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매우 청수한 얼굴이었지만 한가운데로 길게 검상이 나있어 그의 준수한 용모를 가리고 있었다. 체구 또한 크지도 않았으며 마르지도 않은 평범했으나 그의 눈만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흑랑은 안광을 번뜩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문은 단지 소문일 뿐이지요.” 그의 조심스러움에 비해 상대는 너무나 여유로웠으며 편안해 보였다. 어쩌면 그도 십이수룡방의 수적들처럼 방심하고 있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네는 살인이 지겹다고 했나?” “그렇소.” “그렇다면 지겨운 살인을 왜 피땀 흘려 하는가?” “아무도 나의 목숨을 거두어 가지 못했기 때문이지.” 사나이는 입안가득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자네는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갈 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로군.” 흑랑은 아무런 대답 없이 사나이의 검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좋은 검을 가지고 있군.” “평범한 철검일 뿐이네.” “다른 사람 손에 쥐여져 있으면 평범한 검일지 몰라도 당신 손에 쥐여진 이상 평범한 검이 아닐 것이오. 그렇지 앉소?” 사나이의 입에서 더욱 짙은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얼굴 한가운데로 나있는 기다란 검상이 꿈틀거렸다. “자네는 나와 겨루고 싶은 것인가?” 흑랑은 그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혹시 당신이라면 이 지겨운 목숨을 거두어 줄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사나이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자네는 너무 서두르는군. 나는 용백현이라 하네. 용문파 출신이지. 자네와 겨루어 볼 수도 있으며 자네를 체포해서 더 이상 지겨운 살인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네. 그리고 때려눕힐 수도 있지.” 그제야 흑랑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뜻을 깨닫고 경의에 찬 표정을 지었다. 흑랑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줄곧 존경해 왔었다. 중황일검(中黃一劍) 용백현(龍伯賢)! 그의 이름을 부를 때는 항상 천하제일명포(天下第一名捕)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의 이름대로 그의 검은 중황에 우뚝 서 있으며, 용문파의 현 장문인 일양진인(一陽眞人)의 제자가 바로 그였다. 그는 현재 대칸(황제)인 카이샨을 도와 아유르바르와다의 야욕을 색출해 내었으며 수많은 악인들을 잡아들였다. 특히 철혈마검 강자단과의 화산에서의 일대결투는 하나의 전설이 된지 오래였다. 떠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철혈마검 강자단을 십년간을 뒤 쫓았으며 강자단이 유일무이하게 그만은 피했다고 전해진다. “자네의 표정을 보니 나를 아는 듯 하군. 하지만 나또한 자네를 알고 있지” 흑랑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당연히 내가 흑랑이라는 것을 알고 있겠지요.” “아니! 자네는 흑랑이기도 하지만 청성파(靑城派)의 흑면객(黑面客) 방국진(方國珍)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흑랑은 깜짝 놀라며 용백현을 바라보았다. “......!” 그의 놀람과 상관없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용백현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자네는 무슨 일로 십이수룡방과 이토록 처절한 혈투를 벌이는 것인가? 그것도 본명을 숨기고 말일세.” “그것은 사적인 일이오.” “살인이 일어난 이상 결코 사적인 일이 될 수 없네.” “......” 흑랑은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는 용백현과 겨루고 싶었으며 상황 또한 그 쪽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용문십삼검은 천하무적이라고 들었소. 사실이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도전적이었으며, 더 이상 피곤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용백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나는 자네를 체포할 생각은 없네. 자네가 죽인 자들은 십이수룡방의 수적들이지. 도리어 상을 내려야 할 상황이라네.” “상을 내려주신다니 고맙게 받겠소.” 하지만 용백현은 자신의 검을 뽑으며 말했다. “자네의 상은 나와 일검을 겨누는 것이지. 나는 자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고 싶네. 상으로 말일세.” “.....” 순간 흑랑은 그의 눈을 바라다보았다. 그리고 청명하기 그지없는 맑은 눈을 보았다. 그로서는 이처럼 예측불가한 사람은 처음으로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검 또한 그러할 것이다. 순간 그는 결코 용백현의 적수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네의 몸이 굳었군. 나에 대하여 너무 두려워 말게. 솔직히 나의 용문십삼검은 천하무적이 아니네. 철혈마검 강자단의 검은 나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으며, 귀산노괴 하대붕과도 결판을 낼 수 없었지. 그리고 요 근래 중원에 무서운 고수가 출현했네.” 그러자 흑랑도 짤막하게 내뱉었다. “백의신검 백리향!” 용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보았네. 그는 철혈마검 강자단을 쓰러트렸을 뿐만 아니라 귀산노괴 하대붕의 철장을 자른 자라고 들었네.” “........” “하지만 소문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지. 왜냐하면 인간은 영웅을 만들고 싶어 하거든, 하나의 절대적 영웅을 만들어 자신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네. 어쩔 때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가공의 인물이 영웅이 되고는 하지.” “.......” 흑랑은 아무 말 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며 용백현은 말했다. “자네는 그와도 겨루어 보고 싶은 것인가?” 흑랑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나는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소.” “나 또한 그의 적수가 될 수 없지. 하지만 만나보고 싶어.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기도 하고……. 과연 철혈마검 강자단을 쓰러트린 자는 어떤 자일까?” 흑랑은 자신의 검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가 누구이던 간에 한 가지는 틀림없을 거요. 그도 인간일 뿐이지.” “맞아 그도 인간일 뿐이지.” 하며 용백현도 자신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 * * 그들이 어떠한 싸움을 벌였는지 알려고 하지 말자. 그들은 충분히 검을 나누었으며 승패는 갈렸다. 하지만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에 굳이 그 승패를 알려는 것은 짓궂은 행위일 것이다. 사나이대사나이의 싸움은 이루어 졌으며 그들은 결과에 만족했을 따름이었다. 그들은 서호의 수많은 배들 중에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배를 한 척 전세내고는 그곳에서 술을 마셨다. 술은 가장 고급스러운 소흥주(紹興酒)였으며 음식은 가장 유명한 팔선대어향육(八仙大漁香肉)이었다. 그들은 호기로운 사람이었으며 씀씀이 또한 대담했다. 용백현은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말했다. “자네는 어쩌다 십이수룡방과 적대관계가 되었나?” “말하고 싶지 않소.” 그렇게 말하는 흑랑의 얼굴에는 곳곳에 시퍼런 멍자국이 물들어 있었다. 용백현은 잠시 그의 얼굴을 보더니 실실 웃으며 말했다. “수룡왕(水龍王) 적운강(狄雲剛)은 그리 녹녹한 인물이 아니야. 그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네.” “나또한 그리 녹녹한 사람은 아니오!” “자네는 그를 이길 수 없어. 그는 한 성에 맞먹는 병력을 지니고 있으며 물에서 만큼은 그는 왕이라 불리는 자일세.” “.......” 흑랑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짊어지고 않으면 안 될 업보였으며 그가 치러야할 과제였다. 용백현은 그를 한 번 흘려보더니 자신의 빈 잔에 술을 가득 부우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가 정중히 부탁을 한 다면 나는 자네를 도와줄 용의가 있네.” 그러자 흑랑은 웃었다. 그의 웃음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구석이 있었다.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이었으며 비웃는 듯한 웃음이기도 했다. “후후후!” 용백현은 눈을 날카롭게 세우며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왜 웃는 것인가? 정말이지 불쾌하군!” “선배가 이렇게 후안무치한 사람인줄은 꿈에도 몰랐소.” “더욱 불쾌해 지는군.” “선배와의 만남이 과연 우연일까요? 안타깝게도 나는 우연을 믿지 않소.” 그러자 용백현은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것은 자네가 몰라서 하는 말일세. 세상에는 우연의 연속이고 그것이 모여 인연을 이루는 것이지.” “그럴지라도 흑랑이 동정호에서 천하의 중황일검 용백현을 만날 확률이 얼마라고 생각하오?” 그러자 용백현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갑자기 놀랍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오! 그렇게 생각하니 자네와 나는 기연일세!” “후후후!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선배가 서호에 온 이유는 어떠한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며, 그것은 십이수룡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오. 그리고 흑랑과 십이수룡방의 관계를 알게 되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요? 나에게 도움을 주는 척하지만 솔직히 나의 도움을 받고 싶은 게 아니오?” 흑랑의 말은 옳았다. 모든 것이 명백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용백현은 뻔뻔스러웠으며 적절한 시기에 말을 돌릴 줄 아는 지혜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과연! 내가 자네를 잘못보지 않았군. 정말 총명해! 그런 의미에서 자네가 술값을 지불할 수 있도록 양보하지.” 그러자 흑랑은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멍해있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하면 그의 수중에는 한 푼의 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술자리는 선배가 마련한 걸로 아는데?”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재신처럼 보이나? 이보게. 나는 박봉에 시달리는 공직자일세. 거기다 청렴결백하기도 하여 빈곤하기 이를 데 없지.” “선배가 빈곤한 만큼 나또한 빈곤하오!” 그러자 용백현은 흑랑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자네의 검은 빈곤하지 않지.” 확실히 그의 검은 용백현의 검과 달리 싸구려가 아니었다. 흑랑은 자신의 검을 들어 보이며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큰소리로 말했다. “이검은 우리집안의 가보요! 어찌 하찮은 술값으로 대신하겠소. 선배는 기어코 나를 모독하고 말았구려!” 이번에는 용백현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 “왜 웃는 것이요? 선배는 나의 말을 믿지 앉소?” 용백현은 손을 흔들며 말했다. “하하! 나는 알고 있네. 그 칠성보검(七星寶劍)은 자네 집안의 가보가 아닐뿐더러, 십이수룡방의 삼협기(三俠旗) 진총용(晋悤勇)을 죽이고 얻은 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네.” “.....” 흑랑은 화를 더 이상 낼 수 없었다. 그의 말은 한 치의 거짓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검을 다시 내려놓았다. “선배는 확실히 중원제일이 명포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후후후! 그 뿐 아니라 자네가 적운강을 죽이려는 이유도 알고 있네.” “.......!” “자네는 적운강에게 몰살당한 수룡방 방득청(方得淸)의 아들이지. 그렇지 않은가?” “.......” 그는 얼굴을 굳히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무언은 곧 긍정을 뜻할 때가 많다. 용백현은 일부러 상대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셨다. 용백현이 한 잔을 마시면 흑랑도 한 잔 마셨다. 용백현이 두 잔을 마시면 흑랑도 두 잔을 마셨다. 마치 새벽의 결투를 앙갚음하기라도 하듯이 흑랑은 용백현을 자극시켰으며 용백현도 흥쾌히 또 다른 식의 결투를 기꺼이 응해주었다. 그리고 초저녁부터 시작한 술판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그러나 그들의 승부는 판가름 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두 사람모두 이튿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취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흑랑은 자신의 칠성보검을 보며 한 숨을 쉬었다. 아니 이제부터 그 검은 칠성보검이라 불릴 수 없었으며 육성보검이라 불려야 했다. 술값으로 북두성의 진주를 빼어 주인에게 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보게. 빨리 안내려오고 무얼 하는 건가?” 배 밑 선창에서 용백현이 손을 흔들며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흑랑은 고개를 저었다. “중원에 저런 뻔뻔한 사람이 또 다시 있을까?” 흑랑은 아쉬움을 달래며 배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몸을 한 번 뒤집더니 용백현앞으로 내려섰다. 그것을 본 용백현이 감탄을 터트렸다. “히야! 자네의 신법은 내가본 중에 최고 일세!” 흑랑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신법의 변화로 보자면 상산의 양정을 따르지 못하고, 빠르기로 본다면 백면신투(白面神偸)를 따르지 못함을 나도 잘 알고 있소.” 용백현은 그런 그를 보며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고강한 무공에 겸손까지 갖추었으니 무림의 대들보임에는 틀림없구먼. 장하네.” 흑랑은 코웃음 치며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선배가 내 육성보검의 진주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라면 후회하게 될 거요.” 용백현은 그의 구박에도 굴하지 않고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자네는 여자도 아니면서 곧잘 삐지는군.” “선배는 개도 아니면서 개처럼 컹컹 짖어대더군요.” 그러자 발걸음을 멈추고 흑랑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흑랑은 미묘한 눈으로 용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젯밤, 기억이 안 나오? 선배는 개처럼 컹컹 짖었소. 선배의 엉덩이에 있는 커다란 점도 보았지.” “.......” 용백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억이 안 나지만 확실히 그는 만취했을 때 그런 버릇을 보이곤 했다. 그래서 그는 타인과 술을 마실 때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또 다시 걷기 시작했다. 문득, 용백현은 무엇인가 떠올랐는지 흑랑을 바라보며 미묘한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흐!” 흑랑은 용백현을 바라보며 의심쩍은 듯 물었다. “흐흐흐 라니……. 무슨 웃음이 그렇소?” “어젯밤, 급한 김에 나는 술병에다 약간의 실례를 저질렀지. 자네는 그것을 술인지 알고 술잔에 따르고는 건배를 청하더군. 그래서 건배를 했지. 자네는 벌컥 들이키고는 이렇게 말했어. ‘과연 소흥의 소흥주는 정말 일품이로군!’” 흑랑은 걸음을 멈추었다. 용백현도 걸음을 멈추었다. 흑랑은 얼굴을 허옇게 뜬 채 용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 사실이오?” 그의 목소리는 어느덧 떨려 나왔다. “나는 거짓말 할 줄 모르네.” 흑랑은 속이 뒤집어 지며 무엇인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심호흡으로 복부를 안정시키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일지언정 거짓말이라고 말해주시오. 제발 부탁하오!” 흑랑의 입에서 제발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정도로 그는 절박했다. 그의 기분을 충분히 이해한 용백현은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사실이네. 자네는 그 한 병을 다비우고는 또 달라고 했어.” “.....!” * * * 청성파(靑城派)의 시조는 청성진인(靑城眞人) 유해섬(劉海蟾)으로 다른 경전파(經典派)와 달리 쌍수법방중술(雙修法房中術)의 대표적인 파로 별로 비전을 공개하지 않아 많은 부분에서 신비로 점철된 파였다. 무공 또한 괴이하고 방중술로 원기를 보양하기 때문에 다른 파의 제자들보다 내가공력은 높은 편이었다. 그래서 청성파의 사람들은 다른 도가계열의 사람들과 달리 혼인이 허락되었다. 청성파(靑城派) 장문인(掌門人) 진양대협(眞陽大俠) 조비(曺飛)가 사십여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노가촌(老家村)에 도착한 것은 원단(元旦)을 십일 앞둔 때였다. 그는 노가촌과 깊은 인연이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을 이곳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워 조비의 마음을 한 순간 사로잡았으며 급기야 매파를 통해 청혼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 조비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그녀의 부친은 그를 흔쾌히 사위로 맞아들였으며 그것은 그의 청성파 장문인이라는 지위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비의 스승은 청진자(淸眞子)로 조비의 나이 이십여 세 때 타계하였으므로 그의 수발을 든 조비가 차대 장문인으로 선출된 것이다. 그 후 그는 사부의 유지를 받들어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하였으며 청성파를 시대의 조류에 맞게 개편하여 많은 제자들과 신도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청성파 역대 장문인중 최고였으며 그를 추종하는 세력이 불어나 그를 진양대협이라는 영광된 칭호를 붙여주었다. 현재 그이 나이 서른여덟. 그는 아직도 살아온 날들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많은 중년의 젊은 장문인이었다. 그가 사천 청성산을 떠나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무림맹의 회합과 더불어 백팔수라귀들의 토벌을 위해서였다. 조비가 노가촌에 첫발을 들여 놓았을 때, 어디선가 일진의 풍악이 울리며 수십 명의 무사들이 달려 나와 길 양쪽으로 도열했다. 그리고 장읍을 취하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청성파(靑城派) 장문인(掌門人) 진양대협(眞陽大俠)께 삼가 문안드리옵니다!” 조비는 생각지 않은 환대에 적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길 한가운데로 반백의 금의장포를 걸치고 문사건을 쓴 장대한 체구의 노인이 걸어왔다. 육순의 나이임에도 노인의 눈에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신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인의 성은 노(魯)이며 이름은 여평(如平)이었다. 바로 조비의 장인이었으며 당당한 호족세력인 노가보(老家堡)의 보주였다. 그 노인을 발견한 조비는 얼굴에 회색이 돌며 말에서 뛰어내려 한 걸음에 달려가 장읍을 취하였다. “장인어르신.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노여평은 조비의 두 손을 맞잡으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사위. 잘 왔네. 정말 잘 왔어. 이게 얼마만인가?” “작년 장인어르신의 생신 때 이후로 처음입니다.” “아! 그렇구먼. 이제 나이가 들다보니 기억력이 예전과 같지 않아.” 조비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아버님은 정정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아마도 손자에 증손자까지 보시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노여평은 그의 말에 무엇인가 깨닫고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했다. “혹시……. 자네!” 조비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내가 드디어 득남(得男)을 하였답니다.” 노여평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껄껄껄! 정말 기쁜 일이야! 얼른 노가보로 들어가세. 오늘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시세!” “좋습니다. 하하하!” 조비는 자신의 품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어 두 손으로 올렸다. “이것은 소자의 작은 정성입니다. 보좔 것 없는 것이기는 하나 받아주십시오.” 노여평은 가벼운 이채를 발하며 상자를 받아들였다. “새삼스럽게 무슨…….” 노여평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화려하기 그지없는 상자 속에는 볼품없어 보이는 진정(秦鼎:고대에 왕후가 사용하던 세발 달린 술잔.)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노여평의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진황실의 문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황제가 상용했던 술 잔일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보존상태가 좋아 그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노여평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아니! 자네가 이런 귀한 것을 어찌 구했단 말인가?” 조비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역시! 어르신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한 눈에 그 가치를 알아보시다니…….” “예끼 이사람! 신안(神眼) 노여평이 바로 날세. 자네는 그것을 잊으면 안돼! 하하하!” “하하하!” 그들은 노가보로 발걸음을 옮겼으며 그들 뒤로 창검을 든 근 백여 명의 무사들이 뒤따라 일대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제 십팔장 일월만형천강월(一月萬形千江月) 천태산(天台山). 이름도 알 수 없는 거대한 봉우리에 백리향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으며,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보았으며 은하수를 보았다. 유성(流星)이 하늘을 가르는 것을 보았으며, 구름처럼 출렁이는 새벽의 짙은 안개를 보았다. 그는 산하를 굽어보며 자연이 토해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에는 어떠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았고 똑같은 소리를 반복해서 내지도 않았다. 순간, 순간이 틀렸으며 불협화음이 모여 거대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속에는 풀벌레들의 소리도 있을 것이며 바람에 나부끼는 메마른 잎사귀의 소리도 있을 것이다. 사각거리는 동물들의 발자국소리도 있을 것이며 새들의 날갯짓소리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였으며 하나가 아닌 개체(個體)였다. 백리향은 그 곳에서 이틀을 그렇게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자연은 하나의 형상이 아니며 살아있는 생명체임을 알았다. 자연은 확실히 살아있었다. 그는 자연의 숨소리를 들었으며 움직임을 느꼈다. 그는 만고의 위대한 생명체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어느덧 달이 저물고 태양이 능선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두 눈을 감고 태양의 광활한 빛을 상단전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 옛날 세상의 모든 영적스승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나의 성스러운 의식을 치르듯 자신의 모든 의식을 상단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부처의 그것인 냥 하나의 밝은 빛이 한 점 생기더니 번쩍이며 사라졌다. 백리향은 두 눈을 감았음에도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저 멀리 산야를 뒤로하고 드넓은 대지위로 지평선(地平線)에 붉은 빛 선이 그어진다. 그 선은 점점 넓어지며 대지가 황금빛으로 변하고 태양은 조금씩 솟아올라 둥그렇게 될 즈음 둥근 태양이 대지에 비쳐 붉게 달구어 놓았다. 태양이 지평선 위로 완전히 솟아오르면 붉게 달아오른 대지는 식어버리며,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때 즈음은 대지는 다시 녹색의 빛깔로 돌아왔다. 백리향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두 눈은 더 없이 맑아 있었고 더욱 깊어져 있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찬란한 태양을 반겼으며 물결치듯 반짝이는 대지의 숨결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한꺼번에 발산하기 시작했다. “우아아아아!”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산 밑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의 걸음걸이마다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으며 새롭게 다가서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잎사귀들의 속삭임, 철새들의 분주한 날갯짓, 익을 대로 익어 더 이상 자신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는 도토리, 밤송이, 대추알 등. 이러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사물은 항상 주위에 있었으나 그는 보았으되 느끼지 못했었다. 이제 그는 느꼈으며 보았다. 그는 산을 내려오며 여러 사찰(寺刹)들을 들러보았다. 천태산은 천태종(天台宗)의 발원지로서 예로부터 수많은 고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리향은 사찰들을 순례하며 석가의 가르침을 들었고 예불을 드리기도 했다. 그는 비록 도가(道家)의 사람이었지만 애써 유가(儒家)와 불가(佛家)를 따로 두지 앉았다. 방법이 다를 뿐 얻고자하는 궁극의 목표는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유문의 선비에게도 물었고 불가의 사미승에게도 물었다. 지나가는 거지에게도 물었으며 코흘리개 어린아이에게도 물었다. 그는 하나를 알기위해 결코 질문을 서슴지 않았고, 그 경계 또한 두지 않았다. 그의 의문은 단순한 것이었으며 질문 또한 단순명료했다. 그래서 그의 질문을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의아해하기 마련이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보면 모르오? 밤송이를 까고 있지 않소.” “밤송이를 무엇 때문에 까고 계십니까?” “그거야 물론…….” 이쯤 되면 사람들은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도리어 짜증을 내기 일쑤였다. 간혹 친절한 사람은 “그야 물론……. 밤이 맛있고, 장에 팔면 돈도 벌수 있고…….”하며 성급한 답변을 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밤이 떨어질 무렵 매년 일어나는 연래 행사와 같은 것이었다. 그들은 매년 이곳에 와서 밤을 줍는다. 그것은 그의 부모가 그래왔고 그의 조상이 그래왔다. 한 번도 이런 일을 하는 자신을 의심해 보지 않았으며 궁금해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똑같은 일을 반복하게 되면 생각을 멈추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고 식사의 요령을 가르친다. 아이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노력 끝에 어느 정도 요령을 알게 되고 소년이 되어 완전히 습관으로 고정되면 아무런 생각 없이 저절로 젓가락질을 하며 식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밤 줍는 사람들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매년 해왔던 일이었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와서 밤을 줍고 돌아간다.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집에 돌아와서는 그제야 고심하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하지? 구워먹어? 삶아먹어? 아니면 팔아?” 간단한 질문일수록 대답의 폭은 넓고 하나로 정의 내릴 수 없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무엇 때문에 밤을 줍고 계십니까?” 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질문일수록 인간은 한 번 더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백리향은 끝없이 탐구하고 진리를 분석하는 그런 사람이었으며 가장 근본적인 것일수록 도에 가까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어느덧 저녁 무렵이 되자 백리향은 하룻밤 유숙할 만 한곳을 찾아야 했다. 산속의 밤은 일찍 찾아온다. 초겨울 야숙할 수도 없었으며 찬 이슬을 맞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백리향이 그 광승(狂僧)을 만난 것은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것은 우연이기도 하며 필연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백리향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백리향은 하룻밤 유숙할 암자를 찾아 나섰으나 무일푼인 그를 받아들인 암자는 아무 곳도 없었다. 대부분의 스님은 평범하고 초라해 보이는 백리향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질문이 많은 그를 귀찮아했다. “이미 시주님들이 가득 차 더 이상의 손님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마 저쪽 산 귀퉁이에 폐찰(廢刹)이 있을 것이오니 그곳에서 유하도록 하십시오.” 백리향은 어쩔 수 없이 폐찰을 찾아 나섰으며 깊은 골짜기 무성한 산림으로 뒤덮여 아무도 찾지 않을 구석진 곳에서 폐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첨탑(尖塔)이 보이고 반쯤 허물어진 담벼락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백리향은 다가서자 그의 귓가에 장작 패는 소리가 울려왔다. 백리향은 의아심을 금치 못하고 한 걸음에 내달렸다. 불회사(不回寺)라고 적힌 조그만 현판 밑으로 보기에도 가련할 정도로 산문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땅바닥의 청석은 여기저기 깨어져있었고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나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폐찰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위로 부처를 모신 대웅전이 있고 좌우로 서너 칸의 방이 고작인 조그마한 암자였다. 백리향은 우선 대웅전을 향해 합장을 하고 장작패는 소리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그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광경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곳에는 백염(白髥)을 휘날리며 한 명의 노승이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었는데 그 나무가 바로 대웅전의 모셔져 있어야 할 목불(木佛)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리향은 깜짝 놀라며 노승에게 다가가 말했다. “아니! 스님, 섬기고 모셔야할 목불을 어찌 도끼로 부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자 노승은 백리향을 힐끗 쳐다보고는 계속해서 도끼로 목불을 내려 쳤다. 노승의 체구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장대했으며 나이에 비해 완력이 대단해 한 번의 도끼질에 거대한 목불은 여지없이 부셔져 나가고 있었다. 백리향은 이채를 띠우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스님. 불문의 제자로서 어찌 이토록 불상을 훼손하십니까?” 그러자 노승의 입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겨울철 땔감이 없어 이러고 있네.” “이 주위가 모두 나무인데 어찌 땔감이 없다 하십니까?” “이 주위의 나무는 모두 살아있네. 살아있는 것에 어찌 도끼질을 한단 말인가?” 백리향은 눈을 빛내며 노승을 한 참 바라보았다. 다 헤어진 승복은 몇 번이나 기웠는지 모를 일이었으며 나떨어진 초혜는 발가락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러나 노승의 눈만큼은 태양보다 강렬했으며 달보다 그윽했다. 백리향은 적이 놀라며 노승을 향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스님이 아닙니까? 대웅전(大雄殿)의 불상을 땔감으로 쓰신다면 어떻게 조석으로 예불을 드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자 얼마 전까지 부처가 앉아있던 연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이 곧 살아있는 부처인데 무엇을 따로 모시겠나? 자네가 저 연단(蓮壇)에 앉아있게 매일 공양을 할 테니…….” 순간, 백리향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푸, 하하핫!” 그리고 노승의 도끼를 빼앗아 손수 목불을 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노승의 입에서도 기쁜 듯 웃음이 흘러나왔다. “헐헐헐!” 그날 밤, 백리향은 따뜻하게 데워진 방에서 노승과 함께 한 잔의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노승의 저녁 식사대신 독한 죽엽청을 마셨으며 안주로는 뜨끈뜨끈한 개고기였다. “자네도 식기 전에 들게.” 백리향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소생은 아직 수련 중이므로 육류와 주류를 먹을 수 없습니다.” “거참 안됐군. 얼른 수련을 끝내기를 바라네.” 그렇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노승의 얼굴은 전혀 안타까운 기색이 아니었으며 도리어 회심의 미소마저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 명이 먹기에는 조금 부족한 양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승은 개다리를 잡기 전에 잠시 합장을 하였다. “이놈아! 죽으려면 북망산에 올라 죽을 일이지, 어찌 이런 청정한 곳에서 혀 내밀고 죽어버렸느냐? 어차피 이미 뻗뻗해진 인생, 내세에는 부디 인간으로 태어나 거라.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는 우악스럽게 개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백리향은 개다리 대신 한 잔의 뜨거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소생이 듣기로는 이곳은 폐찰이라고 하던데, 어찌 스님 홀로 계십니까?” “무슨 소리! 내가 이곳에 거한지도 벌써 이십년이 넘었건만, 어떤 후레자식이 폐찰이라고 하던가?” 불가의 사람으로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욕설이 나오자 백리향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사찰의 모양새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게 어때서? 비도 막을 수 있으며 눈도 막을 수 있네. 간혹 태풍이 불게 되면 날아간 문짝 주우러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지만…….그럭저럭 살만은 하네.” “.......” 백리향은 한 참을 생각하다가 노승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세속에 말하기를 천태산에 광승이 한 명 살고 있는데, 행색은 초라하고 행동은 미친 듯 하나, 언변은 도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다고 합니다. 혹시 그 광승(狂僧)이 노스님이 아니십니까?” 그러자 광승은 개다리를 뜯다말고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사람이 미쳤고, 나만 정상인 것 같네! 별 미친놈들!” 그러자 광승의 입에서 무수한 음식물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왔다. 백리향은 미소를 띠우며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광승의 입에서 튀어나온 파편은 반탄력에 의해 도로 튕겨나가 광승의 얼굴을 덮치고 말았다. “........” 광승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파편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을 손으로 닦으며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자네……. 여동빈과 어떤 사이인가?” 백리향은 깜짝 놀라며 광승을 바라보았다. “스승님을 알고 계십니까?” 광승은 손에 들려진 개뼈다귀를 내려놓으며 의자에 몸을 묻고는 백리향을 직시했다. “랑음비과동정호(朗吟飛過洞庭湖)의 여동빈을 그 누가 모르겠나? 자네의 기도는 여동빈 그분과 너무 비슷할 뿐 아니라, 자네가 펼친 천수연환벽(千手連環壁)은 그분이 직접 만든 무공이지.” 순간 백리향은 광승의 정체가 궁금해 졌다. 왜냐하면 그가 알기로는 스승은 말년에 들어서 한 번도 세상에 몸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스님은 사부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광승은 먼 옛날을 회상하듯 두 눈을 감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분은 가끔 나를 찾아와 술을 마시고 가고는 했네. 그리고 가끔은 무공을 겨루기도 했지……. 그 분을 만나보지 못한지도 벌써 오십년이 다 되어 가는군.” 백리향은 눈에 이채를 띠우며 광승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노승의 정체가 무엇일까? 오십년 전이라니……. 그의 나이가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인가? 광승은 말끝을 흐리며 백리향의 등 뒤로 삐죽 튀어나온 기다란 물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전검을 물려받았나?”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광승은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좋아! 밖으로 나가자!” 초겨울 조그마한 산사에 광승과 백리향은 마주보고 서있었다. 광승은 자신의 허리춤을 잡고 흔들자 요대에서 하나의 연검이 뽑혀져 나왔다. 가늘기는 머리카락처럼 얇고 날카롭기는 눈이 시릴 정도였다. 광승이 연검에 진기를 주입하자 하늘거리던 연검은 차라랑 소리를 내며 더 이상 단단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졌다. 달빛을 받은 검은 몹시도 차가워 보였으며 창백해 보였다. 광승은 자신의 연검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자네는 이검의 이름을 알겠나?” 백리향은 고개를 저었다. 광승은 지난날을 회상하듯 연검을 이리저리 바라보더니 지나치듯 말했다. “이검의 이름은 우래사군불감망(憂來思君不敢忘)이라 하네.” 순간 백리향은 두 눈을 번쩍 떴다. 이제야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리향이 어렸을 적 침상에 드러누워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때 스승은 곧잘 강호의 비사나 역사적인 영웅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고는 했다. 당시 스승은 백리향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간혹 애절한 이야기도 곧잘 들려주었다. 그 중에 하나가 한 자루의 검에 얽힌 사연이었다. 백리향은 탄식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 검은 백 년 전, 역대 마교교주(魔敎敎主)중 최고라고 불리는 신도백(申屠柏)이 연인이었던 하설연(夏雪燕)에게 선물한 검이었지요. 신도백이 교내의 반란으로 쫓겨나자, 그의 연인 하설연은 그 검의 이름을 우래사군불감망이라고 짖고 정절을 지키다가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신도백이 다시 마교를 탈환하고 그녀를 찾았을 때는 이미 한 구의 시신에 불과 했지요. 신도백은 한 통의 피로 쓴 혈서만 받았습니다. 혈서에는 낭군을 걱정하는 애절한 여인의 한이 시(詩)로서 표현되어 있었지요. 그리고 신도백은 그녀를 못내 잊을 수 없어 자신의 이름을 신도불망(申屠不忘)이라고 바꾸었습니다.” 광승은 눈을 파르르 떨더니 그만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후우~ 그러네. 나는 신도불망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지.” 백리향은 그의 신분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기에 놀라움은 없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하게 한 수의 시를 읊었다. “외로운 천첩이 홀로 빈 방을 지키자니, 그대 생각에 근심스러워 감히 잊지를 못하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옷을 적시고 거문고 잡고서 줄을 퉁기며 청상곡을 노래한다. 짧은 노래 소리 죽여 불러도 오래 부르지 못하는데, 달빛은 교교히 내 잠자리 비춰들어 은하수 서편으로 흐르는데 밤은 아직 깊지 않구나. 견우와 직녀 멀리서 서로 바라보노니 그대들만 무슨 잘못으로 은하수 다리에 멈춰 있느냐.” 문득 광승은 지난날의 처절한 삶과 엇갈린 애욕을 느꼈는지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하설연은 한 줌의 진토가 되어 날아가고, 일대의 영웅은 광승이 되어 천지를 떠돌 뿐!” 백리향으로서는 전설의 신도불망을 이렇게 만나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사부는 신도불망이 광승이 되어 천하를 유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숨겼기 때문이었다. “.......” “당시 내가 마교에서 쫓겨나 심한 부상으로 죽어갈 때 그 분이 나타나 나를 살려주었지. 다시 마교를 탈환하기는 하였으나 삶이 지겹더군. 정말 권태로웠네. 그때 불가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더군. 그래서 마교를 빠져나와 이름을 숨기고 중이 되었네. 그러기를 벌써 칠십여 성상, 내가 어디에 머물고 있든 자네의 스승은 곧잘 찾아와 나에게 힘이 되어 주었지. 그리고 삼주야를 술을 마셨으며 삼주야를 검을 논했네. 문득 자네를 보니 다시 피가 끓어오르는구먼. 나하고 일검을 나누어 보세!”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흰 천으로 둘둘 말린 채 등 뒤에 메어져 있는 자전검을 뽑았다. 푸른 달빛을 받은 자전검은 더없이 맑게 빛났다. “좋아! 역시 명검이야!” 광승은 우래사군불감망을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나의 일월만산(日月滿山)이라는 검법은 자연으로 가득 찬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였네. 자네는 심검을 익혔을 것이라고 믿고 아무런 의심 없이 시현(示現)하겠네. 괜찮은가?” 그러자 백리향은 자신의 자전검을 거두고는 말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자 광승은 깜짝 놀라며 두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자, 자네…….” 백리향은 미소만 지을 뿐. 한 동안 멍하니 있던 광승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검을 밑으로 내리고 두 다리를 곧게 편 다음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검법은 일월만형천강월(一月萬形千江月)이라고 하네. 하늘에 뜬 달은 수만 가지의 형상을 지니고 있네. 달은 하나이건만 천개의 강에 천개의 달이 떠오르는 것과 같지.” 그제야 백리향은 미소를 짓고는 자전검을 세우며 말했다. “만족합니다.” 전설은 말한다.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신선들의 싸움이 있었다고……. 그리하여 천지가 개벽하고 산이 허물어 졌다고…….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들은 조용히 검을 겨누었으며 아무런 파괴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승패의 결과는 백리향의 승이었다. 그것은 단 삼초 만에 일어난 결과였다. 광승이 일월만형천강월이라는 초식을 발휘하자 하나의 검이 둘로 나누워 지고 두개의 검이 곧 세 개로 나누워 졌다. 그리고 세 개의 검은 수만 가지의 변화를 가지며 천지를 가득 메웠다. 백리향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세상은 검강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백리향은 알 수 있었다. 비록 일월만형천강월이라고는 하나 실제의 달은 하나라는 것을 말이다. 모든 것은 허상이며 오로지 하나의 달이 실상인 것이다. 그 실상이 모든 허상을 만들어 내고 미몽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어리석음을 만들어 내었고 두려움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들은 삼주야동안 담소를 나누었으며, 삼주야동안 검을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광승과 백리향은 나이를 떠나 돈독한 우의를 나눌 수 있었다. 광승은 백리향을 친동생처럼 느꼈으며 백리향은 그를 친형님처럼 모셨다. 천애고아로 자라난 백리향에게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생긴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기쁘게 한 것이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것이 못되었다. 삼일 후, 백리향은 광승과 작별을 고하고 천태산을 기점으로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며 마음 또한 가볍기 그지없었다. 그에게도 가족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문득 백리향은 자신의 허리에 메어진 우래사군불감망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 여인의 한이 서려있는 검이었으며, 한 남자의 고뇌와 우정이 서려있는 검이었다. “이보게. 동생! 비록 마교를 떠나 불교로 개종하기는 하였지만, 세상이 모두 허(虛)하고 허한 것일세. 문득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 지난날들의 일들이 업이 되어 나를 괴롭히는구먼. 마교의 모든 일신 무공을 가지고 무작정 떠나와 교단은 많은 쇠퇴 일로를 걷고 있을지 모르네. 부디 이 무공비급을 현 교주에게 전해 주게. 만약 자네가 판단하여 교주로서의 자격이 미흡하다고 판단되어 진다면, 자네가 직접 마땅한 인물을 골라 전해주게나. 이것은 그 증표로 자네가 가지고 다니게.” “아니! 이것은……. 받을 수 없습니다!” 광승은 직접 우래사군불감망을 백리향의 허리에 메어주며 말했다. “그녀의 영혼이 항상 나와 같이 있다고 믿고 있다네. 나는 이 길로 자네가 가르쳐 준대로 순양별부에 몸을 의지할 생각이네. 그곳에서 참진리를 찾아보아야 하겠지. 그러니 자네가 이검을 가지고 있게나.” 백리향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숨을 내쉬며 광승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형님의 말씀을 따르오리다.” “만약 마교의 문규가 문란하고 어지럽다면 이 검으로 그들을 처단하시게. 살생은 아니 되겠지만, 혼찌검 정도는 위에 있는 그 높은 분도 이해하시겠지.” “후후후!” 그렇게 광승은 순양별부로 떠났으며 백리향은 운유수련을 위해 길을 떠났다. 그는 아무런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으며 발길이 닫는 곳이 곧 목적지였다. 그는 가흥(嘉興),소흥(紹興),금화(金華)를 지나 항주(亢州)에 다다라 서호(西湖)의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호수속의 호수라고 일컬어지는 삼담인월(三潭印月)을 보았으며, 용정차(龍井茶)가 재배되고 있는 용정촌에서 한 잔의 차를 얻어 마셔보기도 했다. 백리향에게 한 잔의 차를 건네준 육순의 노인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인심 좋고 산수 좋은 항주에서 태어나, 소주(蘇州)의 미인과 결혼하였네. 이제는 음식 맛이 좋은 유주(柳州)에서 살며 유주의 나무 관에 묻히려 하네. 허허허!” 백리향은 친절하기 그지없는 노인의 여생이 그렇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랐다. 그는 곧 용정촌을 떠나 어느덧 진화(鎭華)에 이르렀다. 절강성 동쪽, 수많은 섬들 중 가장 큰 섬인 보타산(普陀山)으로 향하기 위해서였다. 보타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섬으로 산서(山西)의 오대산(五臺山), 사천(四川)의 아미산(峨眉山), 안휘(安徽)의 구화산(九華山)과 함께 불가의 사대성지였다. 그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며 고승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제 십팔장 일월만형천강월(一月萬形千江月)-2 저 멀리 서호의 아름다운 풍광이 보이고 인근으로 넓게 자리한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로에서 백리향의 발걸음은 멈추었다. 문득 한 그루의 홰나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수령이 몇 백 년이나 됨직한 거대한 나무였다. 홰나무는 겉으로 보기에는 삼십년이나 오십년 동안 죽은 듯 위장 하다가도 새싹이 밑동에서 나와서 다시금 생명을 잇고는 했다. 그 홰나무의 지름은 반장이나 되었고 이미 밑동은 썩어 수많은 벌레들의 안식처가 되어 있었다. 백리향은 벌레들의 안식처가 되어버린 홰나무를 바라보며 인생무상의 진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깊은 사색에 빠져들었다. 이 나무는 인간들과 달리 죽음조차 다른 벌레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 나무는 어쩌면 테무친(철목진:징기스칸)을 보았을지 모르며, 당나라 때에는 이세민을 보았을지 모른다. 온갖 풍상을 그렇게 이겨내고 마지막 자신의 몸을 벌레들의 안식처로 제공하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백리향의 입에서 문득 한 숨이 흘러나왔다. 인간은 어찌하여 자연을 닮으려 노력하지 않을까? 이 나무는 최소한 자신의 몸을 벌레들에게 헌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돌연 저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한 필의 말이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백리향은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무심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 말은 질풍처럼 달려오더니 쏜살같이 백리향을 지나 저 멀리 사라져갔다. “.......” 인간은 꼭 무엇인가를 남기고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인마(人馬)는 백리향에게 뽀얀 먼지를 남기고 사라졌다. 백리향은 소매로 코를 틀어막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 정도 먼지가 가라앉았을까? 또 다시 말발굽소리가 들리며 백리향을 지나갔던 한 필의 인마가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쏜 살같이 달려오더니 백리향 앞에서 돌연 멈추어 섰다. 너무 갑작스럽게 멈추어서 일까? 말이 앞발을 치켜들더니 히히잉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백리향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것을 본 마상(馬上)의 인물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호호호!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선비께서는 상당히 겁이 많으시군요?” 뜻밖의 가녀린 목소리에 백리향은 고개를 들어 마상의 인물을 바라보았다. 대략 이십, 사오세정도 되었을까? 취의경장 차림에 붉은 천으로 허리를 묶고 있었다. 백리향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말이 나를 덮칠 것 같아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놀라게 될 사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요.” 그러자 그녀는 의아한 듯 말했다. “선비께서는 무엇을 근거로 하시는 말씀이지요?” 백리향은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아가씨 오른쪽 어깨에 있는 거미를 근거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발작적으로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어깨 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백리향은 웃으며 말했다. “후후후! 놀라게 해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는 상당히 겁이 많으시군요?” 그제야 백리향에게 속을 것을 깨달은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으나 곧 한 숨으로 바뀌며 공수의 예를 취했다. “소녀가 공자께 결례를 한 것 같군요.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녀의 뜻밖의 사과에 백리향은 내심 감탄했다. 모든 것이 그녀처럼 명백한 것이 좋은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려들지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그녀는 확실히 여느 대장부보다 호쾌했다. 백리향은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부디 소생의 결례 또한 용서하십시오.” 그녀는 백리향의 위아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소녀는 형양(衡陽)의 북성표국(北星標局)의 표두(標頭) 왕약수(王若水)라고 합니다. 선비께서는 이근처의 사람이신지요?” 그녀의 그러한 눈길은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표두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이해하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잠시 세상을 유람하고 있지요.” 그녀는 백리향의 평범한 모습에 안심을 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매우 고상하십니다.” 그녀는 자신의 말안장에 매달려 있는 활과 화살을 집어 들더니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화살은 삐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그러자 저 멀리 굽어진 모퉁이의 길에서 이십여 기의 말들이 서너 대의 마차를 호위하며 나타났다. 그 선두의 젊은 기수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한 마리의 용맹한 독수리가 금색실로 수놓아져 있었다. 젊은 기수(旗手) 뒤로는 세 명의 중년인이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한명은 화상으로 구리빛 피부에 몹시도 건장했으며, 한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팔소매를 동동 걷어 있었다. 또 다른 한 명은 비쩍 마른 사람으로 가슴에 태극문양이 수놓아진 도복을 걸치고 있었고 등 뒤로 기다란 장검이 메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각진 얼굴에 구레나룻을 길러 모습이 사뭇 위맹해 보였으며 옆으로 장창(長槍)을 비껴 차고 있어 그 옛날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 익덕 장비(翼德 張飛)를 보는 듯 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그들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었으나,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모두 허리에 붉은 천으로 허리를 묶고 있다는 것이었다. 왕약수는 더 이상 백리향에게 시선을 두지 않고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덧 표물을 실은 마차가 지척에 다다르자 왕약수는 구렛나루의 사나이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진노표두(陣老漂頭)께 고합니다. 소녀가 저 모퉁이를 돌아보았으나 그다지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구레나룻의 사나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왕대소저(王大小姐)께서는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러자 좌측의 중년화상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이번 표행은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으며, 특별히 저희들이 도와드리고 있는 이상 그다지 우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외다.” 그러자 왕약수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소녀도 일묘(一妙)스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일묘는 본래 소림사(少林寺) 장좌문하(掌座門下)의 팔대나한(八大羅漢)중 하나인 복호나한(伏虎羅漢)이었다. 무승(武僧)으로 불법은 그다지 정통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무공의 조예는 이미 천하에 자자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왕약수는 고개를 돌려 백리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비께서는 부디 보중하십시오.” 백리향도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왕소저께서도 보중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약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몰아 나아갔다. 그들은 곧장 앞으로 나가다가 무성한 숲가의 굽어진 길로 들어섰다. 이러한 숲가의 굽어진 길은 산채의 도적들이 매복하기 일쑤이므로 표물을 운송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해야할 곳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 왕약수가 미리 살펴보고 온 것이었다. 얼마나 갔을까? 갑자기 비쩍 마른 도사가 탄식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놀랍다. 놀라워…….” 그러자 일묘라는 스님이 그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무엇이 그리 놀랍다는 말이오?” “조금 전 우리와 지나쳤던 서생(書生) 말입니다.” “그가 어때서 그렇소?” “빈도(貧道)는 수많은 사람을 경험해 보았지만, 평생 저렇게 평범하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봅니다. 체형도 마르지도 않고 뚱뚱하지 않으며, 얼굴도 수려하지도 못생기지도 않았소. 피부가 백설같이 희다는 점 빼고는 어느 한구석 비범한 곳이 없어, 지나친지 얼마 되지 않았건만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려하니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군요.” 그러자 일묘스님이 탄식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 놀랍다. 놀라워…….” “스님은 뭐가 놀랍다는 말입니까?” “귀하의 머리통이 놀랍소. 귀하의 머리통은 어찌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오?” “뭐, 뭐요!” 옆에서 듣고 있던 왕약수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호호호! 두 분 노선배(老先輩)님 모두가 놀랍습니다. 어찌 매일같이 싸우려 하십니까?” 그러자 진노표두는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껄껄껄! 그런 일로 두 분이 다투신다면 그것이야 말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산하를 쩌렁쩌렁 울리는 폭 갈이 울려 퍼졌다. “북성표국의 형제들! 진정한 놀라움은 이제부터라오! 하하하!” 그 목소리는 공력이 실려 있어 거대한 메아리가 되어 산속을 울리고 있었다. 왕약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굉장한 공력을 지닌 자임을 알아차리고 긴장을 감추지 못하며 서두러 붉은 깃발을 흔들며 외쳤다. “모두 경계태세를 취하라!” 그러자 북성표국의 표사들은 얼굴을 싸늘히 굳히며 동시에 몸을 날렸다. 그들은 신속하게 움직이며 순식간에 마차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놀림은 비록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절도가 있었고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수한 수련을 받은 것이 틀림없었다. 진노표두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침중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어느 고인께서 왕림하셨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쪽 숲 속에서 “히히힝!” 거리는 말울음 소리와 함께 열 필의 말이 뛰어올라왔다. 마치 천마가 지상에 강림하듯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말들은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그들의 전면을 막아서며 내려앉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산로였음에도 불구하고 말들은 순식간에 대열을 정비하고 일렬로 나열해 섰다. 표국의 무사들은 그들의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에 화들짝 놀라며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인마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백색의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화려하기 그지없는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당당한 위세는 대단하여 조금도 위축됨이 없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크고 건장했으며 한 눈에 보기에도 백에 하나 날까 말까한 한혈마(汗血馬)들임을 알 수 있었다. 진노표두는 그들의 유려한 복장과 열명이라는 인원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산채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으며 백주대낮에 표물을 털 것 같은 모습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복면만 벗는다면 어느 왕후장상의 행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노표두는 냉철히 그들을 쓸어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본인은 철창번천(鐵槍翻天) 진창렴(陣倉廉)이라 하오. 여러 제위(諸位)께서 이곳에 나타나 길을 막아선 이유를 알 수 없군요?” 그러자 열명의 무리 중 한 가운데의 인마가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그는 호피(虎皮)로 만든 피풍의(避風衣)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새하얀 담비털목도리를 하고 있어 매우 존귀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복면인은 어느 정도에서 말을 멈춰 세우더니 진노표두를 바라보며 말했다. “후후후! 우리가 복면을 한 이유를 아직까지 모르시겠소?” “.......” 진창렴은 그의 여유로운 웃음 속에서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낄 수 있었다. 복면인의 웃음은 자신감이었으며 확신이었다. 그는 수많은 표행길을 다녀 보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듣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유명한 녹림십팔채(綠林十八砦)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이름 석자를 듣고 양보하지 않은 녹림채들은 드물었다. 그것은 그가 그 만큼 많은 표물을 운송하고 녹림도와 수많은 혈전을 치러 얻어진 명성이기에 더욱 자부심이 강했다. 하지만 복면인들에게 있어서 그의 이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진노표두는 더욱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러 제위께서 표물을 원하여 오신 것 같습니다만, 이 귀물(貴物)에는 주인이 따로 있으니 그만 물러가심이 좋을 듯 합니다.” 담비털목도리를 한 사나이가 말안장에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그 주인이 바로 우리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으며 그 모습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진창렴의 뒤편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일묘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몰아 다가섰다. “시주는 너무 오만한 것이 아니요?” 그러자 호피를 걸친 복면인은 일묘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이것은 오만이 아니요. 단지 자신감이지!” “자신감이 너무 과하구려. 귀하는 여기에 모인 영웅들을 무시해서는 안 되오!” 복면인은 비웃음을 던지며 말했다. “후후! 그 어디에 영웅이 있단 말이요? 내 눈에는 안 보이는걸.” 일묘는 순간 불같이 화내며 말했다. “눈 뜬 장님이로고!”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자신의 팔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흥! 귀하는 다른 사람은 무시할 지라도, 이 문신(文身)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돼!” 일묘의 팔은 항상 동동 걷어 올려져 있었다. 그것은 겨울인 지금도 마찬가지였으며 여름에는 더욱 팔을 걷어 올렸다. 그 어떠한 태풍이 몰아치더라도 그의 소매를 흘러내리게 할 수 없었으며 그러한 그를 두고 그 누구도 왈가왈부 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팔에는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새긴 문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문신은 소림사의 팔대나한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며 소림사를 대표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누구나가 그의 문신에 고개를 숙였으며, 경의를 표했으며, 감탄을 터트렸다. 그것은 문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도 일묘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아니었다. 누구나가 인정하듯 무구한 역사를 지닌 소림사에게 존경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복면인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일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일묘의 기대와는 달리 상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복면인은 비웃음까지 내뱉고 있었다. “후후후! 이보게. 대머리! 나에게 그림 자랑하러 온 것이라면 실수한 걸세!” 일묘는 분노로 온 몸을 떨며 고함을 질렀다. “이, 이런 막되어 먹은 자가 있나!” 그러자 복면인의 입에서도 냉혹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용이 승천하듯 대머리 자네도 그만 승천하시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리며 하나의 빛무리가 날아왔다. 퍽! 순간, 일묘의 머리통이 퍼덕 거렸다. 그리고는 그의 몸뚱이가 좌우로 흔들거리더니 말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땅바닥에 대자로 누워 버렸다. 그의 이마에는 하나의 수리가 깊숙이 꽃 혀 있었고 수리에 매달린 붉은 천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렸다. 더욱이 그의 눈은 불신과 경악으로 가득 차 있어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진창렴은 일묘의 뒤에 있었기에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이 수리도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어떻게 격발 되었는지 그 누구도 보지 못했으며 알 수 없었다. 일순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한 사람 만은 예외였다. “불공평해! 정말 불공평해!” 비쩍 마른 도인이 말을 끌고 다가서며 말했다. 담비털 목도리를 한 사나이가 호기심어린 눈초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이 불공평 하다는 말이요?” 비쩍 마른 도사는 일묘의 시신을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복호나한 일묘는 그리 약한 자가 아니요. 그는 소림 칠십 이종 절예중 이십여 종의 절예를 익혔으며 철사장(鐵砂掌)과 철포삼(鐵布衫)의 대가이기도 하지. 하지만, 그는 너무 불공평하게 죽고 말았소.” 담비털 목도리를 한 사나이가 말안장에 몸을 바싹 당기며 말했다. “어째서 불공평하다는 것이요?” 비쩍 마른 도사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일묘의 단순한 심정을 흔들어 이성을 잃고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그의 시선을 오로지 당신에게 향하게 한 다음, 뒤에서 수리를 던지게 한 것이 공평하다는 거요? 다른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나 묘유자(妙酉子)의 눈은 속일 수 없지!” 순간, 복면을 쓴 사나이의 눈이 묘하게 휘여 졌다.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공평한 것이지?” 그러자 묘유자의 입에서 회심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오른손에 선천지기를 끌어 모으며 장심까지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장력을 일격에 땅으로 격발시켰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장력에 의해 공기의 파장을 일으키자 땅바닥에 뒹굴던 마른 낙엽들이 하늘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묘유자는 순식간에 검을 뽑아 십팔매화검법(十八梅花劍法)중 최후 초식인 매화난분(梅花卵粉)을 시전 했다. 그는 허공을 격하고 서른여섯 번의 검을 찔렀으며 서른여섯 개의 나뭇잎들을 검에 꽂았다. 순식간에 서른여섯 번의 검을 찌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는 말을 타고 있었으며 약간의 바람에도 흔들리는 낙엽을 검에 꽂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결코 일, 이년 수련해서 얻어질 수 있는 무공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검에 꽂혀있는 나뭇잎들을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와 같이 할 수 있으면 당신을 인정하겠소!” 묘유자는 화산파에서 십팔매화검법(十八梅花劍法)을 완벽히 익힌 몇 안 되는 사람이었으며 장공(掌功)과 지공(指功)을 완벽하게 시현해내는 제자중의 한사람이었다. 특히 그의 십팔매화검법은 장문인조차 인정하기에 이르렀으며 강호에서는 그를 가리켜 매화검객(梅花劍客)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그러나 호피의 복면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후후후……. 그게 뭐요? 그것도 무공이요?” 묘유자는 눈 꼬리를 치켜세우며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이것이 무공이 아니면 귀하는 이게 무어라 생각하시오?” “기술(技術)! 그것은 기술이지 결코 무공이 아니오. 무공이란 이런 것이지!” 그 말을 끝으로 호피 복면인은 순식간에 말을 몰아 달려들었다. 그러자 “흥!”하는 코웃음소리를 내며 묘유자는 자신의 검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검은 복면인의 머리를 스쳤을 뿐이며 그 순간 복면인의 팔이 순식간에 번뜩였다. 그러자 어느 사이엔가 그의 손에는 기다란 장검이 쥐여져 있었고 그 장검은 묘유자의 이마에 꽂혀 있었다.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로서 그가 어떻게 손을 썼는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복면인은 묘유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당신을 살려주겠소.” 그러나 묘유자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시체였기 때문이었다. 복면인은 묘유자의 이마에 꽂혀 있는 장검을 뽑자 그제야 그는 모로 쓰러져 말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말았다. 복면인은 눈웃음을 짓고는 묘유자의 싸늘히 식은 시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 말 없는 것을 보니 당신은 삶을 포기한 걸로 믿겠소.” 왕약수는 그의 무공을 보자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 번도 이런 쾌검을 본 적이 없으며 시체에게 말을 거는 사람조차 본 적이 없었다. 장내는 이미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어떠한 움직임도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진창렴은 놀라움과 더불어 한 탄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무공이 일묘의 무공을 따르지 못하고 일묘는 묘유자의 무공을 따르지 못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묘유자가 단 한 수에 죽어버린 것이다.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있으며 얼마나 많은 고인들이 있단 말인가? 순간 진창렴은 깨달을 수 있었다. 일묘와 묘유자가 죽은 이상 북성표국의 스무 명이나 되는 표사들이 모두 덤벼도 저들 열명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북성표국을 위해 몸 받쳐 왔건만 이 번 일로 인해 그 명성이 하루아침에 떨어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이 번 표물운송은 귀중한 물건이 실려 있어 꽤 많은 인원을 파견했다. 그리고 각기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산채에 미리 예물을 보내어 협약을 맺어 무사히 산로를 지날 수 있도록 했다. 그것도 모자라 수많은 금전을 소비하며 소림사와 화산파의 두 절정고수들을 초빙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앞길에 이런 엄청난 고수가 도사리고 있으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우선 표물은 둘째치고라도 북성표국의 장녀인 왕약수의 생명을 보존시키는 것을 노력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히고는 호피의 복면인을 향해 말했다. “각하의 놀라운 무공을 이미 보았소. 이 표물은 이미 각하의 것이 틀림없을 것이오. 그러나 나도 한 명의 무인! 이대로 돌아 갈수 없을 것 같소. 최소한 각하의 대명이라도 알고 가야겠소.” 그러자 호피의 복면인은 눈에 이채를 띠우고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오. 현명한 사람은 결코 만용(蠻勇)의 우(愚)를 범하지 않지! 다른 분들은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북성표국으로 되돌아가 왕늙은이에게 웅패십왕기(雄覇十王旗)를 만났노라하고 전하면 되오!” 순간, 진창렴은 온 몸의 피가 싸늘히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북성표국의 모든 표사들 또한 마찬가지로 거의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웅패십왕기! 그들은 열개의 깃발을 증표로 삼고 있었다. 일반적인 산채의 사람들과 달리 어느 한 곳에 본거지를 두지 않고 있었다. 강동에 출몰하는가 하면 이튿날은 강서 쪽에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했으며 항상 복면을 하고 있어 그 누구도 그들의 진면목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름석자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야말로 신비집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웅패십왕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었다. 대하남북(大河南北)에 걸쳐 가장 흉악무도했으며 근 십년간 강호를 진동시킨 많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벽린산장(碧燐山莊)의 괴멸, 협서(俠西)의 기주상단(寄住商團)의 약탈, 안휘(安徽)의 양행중서성(兩行中書省)에 잠입해 수많은 관군을 살해하고 관물(官物)까지 털기도 했다. 그들은 그야말로 만인의 공적으로서 커다란 악명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름 높은 부호의 집들과 상단, 원나라의 관물을 털었기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들은 영웅이기도 했다. 진창렴은 그들의 악명이 생각보다 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명과 달리 될 수 있는 대로 살생을 줄이려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웅패십왕기를 만나 표물이 털렸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능한 면도 있기에 다시 북성표국을 재건할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성표국의 후계자이자 장녀인 왕약수의 의견은 그와 달랐다. 그녀는 느닷없이 장검을 내뽑으며 고함을 질렀다. “진노표두께서는 어찌 이리도 순순히 물러나신단 말입니까? 이 표화물은 북성표국의 모든 것이 달린 임무였습니다!” 그것을 어찌 진창렴이 모르겠는가? 하지만 재물보다 더 소중한 것은 젊음이다. 그녀는 젊지 않은가? 젊음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재물을 모을 수 있으며 떨어진 북성표국의 명성을 되찾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그런 마음도 모른 채, 왕약수는 말을 몰아 복면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귀하가 표물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의 검에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웅패십왕기의 호피를 두른 사나이가 이채로운 눈길을 빛내며 말했다. “소저는 생명보다 표물이 중요한 것이요?” 그러자 왕약수는 검을 쭉 내밀며 말했다. “그렇지 않다! 생명보다 명예를 더 소중히 할 뿐이다!” 그러자, 호피를 두른 사나이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아!” 왕약수의 명예라는 말에 그 사나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의 의기는 높이 살 뿐만 아니라, 존경할만하오.” 그러나 곧 한 숨을 쉬고는 왕약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모르는 것이 있소. 아가씨의 의기는 매우 위험천만한 것으로 간혹 대량 살상으로 번지는 수가 있지. 나는 그런 경우를 많이 보아왔소. 아가씨와 같은 사람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어 검을 뽑아들게 만들지. 그리고 불속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달려들게 만드오. 하지만 항상 결말은 똑같았소. 대량살상으로 이어지지! 어쩔 수 없이 어린아이를 죽여야 했으며 나이든 노인도 죽여야 했소. 그들이 왜 죽어야 하지? 당신 같은 사람이 나서지 앉고, 그들에게 용기를 심어주지만 않았던들 지금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을 거요.” “.....!” 순간, 그녀의 가치관에 혼란이 찾아왔다. 어쩌면 그럴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되어진 까닭이었다. 과연 자신은 의기를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면 만용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복면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는 살려둘 수 없는 선동자이며 불순분자였다. 복면인의 입에서 부드러우나 냉엄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죽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군!” 그와 동시에 검을 빼어들어 그녀의 미간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그것은 너무나 빨라 왕약수는 번쩍하는 섬광만 보았을 뿐이었다. 그녀는 두 눈을 무의식적으로 질끈 감았다. 진창렴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장창을 비껴들어 그의 검을 막으려 했으나 복면인의 검은 이미 왕약수의 미간 앞에 있었다. 왕약수의 죽음을 직감하며 진창렴도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이곳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소. 그 뿐 아니라 당신은 표화물을 얻을 수 없을 거요.” 조용한 목소리와 함께 왕약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시퍼렇게 날이 선 검 날이 보였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말에서 뛰어내려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확인하려 장내를 주시하는 순간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라야 했다. 서생! 얼마 전, 그는 말발굽에 놀라 뒤로 물러서던 겁 많은 서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얇고 가늘기 그지없는 연검이 쥐여져 있었고 그 연검은 복면인의 검을 뱀처럼 휘어 감고 있었다. 왕약수는 연검에 저런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백리향은 왕약수가 무사히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공력을 풀었다. 그러자 연검은 “핑!”하는 파공음을 내며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복면인도 자신의 검을 회수하며 백리향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사실 그로서도 백리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예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 않았나 하는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그러나 백리향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는 조금 전의 신기에 가까운 연검술을 펼친 자라고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왕약수는 문득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닫고는 그만 한 숨을 내쉬었다. 백리향을 겁 많은 서생쯤으로 여겼던 그녀로서는 자신의 비천한 안목에 한 숨을 터트리고 만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다가서며 장읍을 취했다. “공자께서 적절한 시기에 현신하여 소녀의 생명을 구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을 올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백리향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두 구의 시체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시기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지요. 조금 더 빨리 왔더라면 이곳에서 살인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복면인은 코웃음을 치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을 거요. 귀하가 조금 더 빨리 왔다하더라도 살인은 일어났을 거요. 그 첫 번째 시신이 바로 귀하였겠지.” “.......” 백리향은 아무런 말없이 복면인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웃음을 바라보는 복면인은 순간 무엇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웃음은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을 때, 또는 어린아이들이 장난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할아버지들의 웃음과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복면인은 냉철하고 분별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 때 만큼은 이성을 잃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손에 진기를 끌어올려 발검을 하려 할 때였다. “귀하는 손을 멈추는 것이 좋을 게요!” 우렁찬 목소리가 숲 뒤쪽에서 들려 왔다.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다. 숲에서 천천히 걸어오는 두 사람. 한 사람은 황의를 걸친 중년인이었고 한 명은 흑의를 걸친 약관의 청년이었다. 그중 황의를 걸친 중년인을 발견한 진창렴은 얼굴에 화색을 일으키며 잽싸게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오랫동안 대협을 뵙지 못해 근황이 궁금하였는데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용백현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또한 이곳에서 진노표두를 만나게 될 줄 상상도 하지 못했소. 총표두께서는 별래 무양하시겠지요?” 진창렴은 은근슬쩍 곁눈질해 보이며 말했다. “그야 물론입니다. 왕총표두께서는 무고하시지요. 하지만 이곳의 사정은 그다지 무고하지 못합니다.” 용백현은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이미 보아 알고 있소.” 백리향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용백현과 흑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호피의 복면인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그가 흑랑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묘한 일렁임이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고뇌일지 모르며 아픔일지 모른다. 용백현은 진노표두에게서 시선을 떼고 호피의 복면인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장담하건대 웅패십왕기는 오늘을 기점으로 강호에서 사라질 거요.” 문득 정신을 차린 복면인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을까?” 용백현은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들을 전문적으로 두드려 잡는 것이 내 직업이요.” 그러자 복면인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무슨 천하의 용포두(龍抱頭)라도 된단 말인가?” “그렇소. 내가 바로 용백현이요. 이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앉소?” “......!” 순간, 복면인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한 참을 침묵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높이 치켜들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하제일명포 중황일검 용백현! 당신이라면 자격이 충분하지. 하지만 당신은 결코 나에게 접근할 수 없소! 왜냐하면 그 전에 죽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접근할 수 없다니? 무슨 말인가? 용백현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개의치 앉고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은 한 두 명이 아니지. 수많은 악인을 처단했으며 수많은 악인들이 나로 인해 교수형을 당했으니……. 하지만 당신만큼은 꼭 붙잡을 생각이요!” 순간 용백현의 단호하기 그지없는 말에 복면인의 눈이 차갑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는 수많은 살인을 했으며 수많은 재산을 강탈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어쩌면 용백현도 그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만큼은 꼭 붙잡아야 되는 이유라도 있소?” 용백현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귀하의 목에는 일만 냥의 현상금이 붙어있지.” “......” 복면인은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는 “차라리 내가 일만 냥을 줄께. 그러니 꺼져!”하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상대는 천하의 용백현이었다. 결코 경거망동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나의 목에 고작 일만 냥이라니……. 형편없이 작은 게 아니오?” “미안하지만, 웅패십왕기는 모두 열명이라 따지고 보면 당신의 목은 천 냥에 불과하오!” “......” 복면인은 또 다시 울화통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용백현과 맞서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력을 알 수 없는 젊은 선비도 그러하거니와 철창번운 진창렴 또한 부담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검을 높게 치켜들며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로군. 귀하는 어떻게 죽을 것인지 생각해야 할 거요!” 그러나 용백현은 실실 웃으며 말했다. “항상 생각하고 있소. 늙어서 죽는 것이지. 아주 편하게!” 그리고는 흑랑에게 말했다. “이보게. 흑랑. 자네가 검을 뽑을 일이 생겼는데 어찌 한숨을 쉬며 지겨워, 지겨워하고 한탄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흑랑은 고개를 떨어뜨리며 말했다. “그것은 저들이 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 용백현은 순간 자신의 목덜미에 차가운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흑랑은 검을 빼어들고 용백현의 목덜미에 겨누고 있었다. 용백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인가!” 흑랑은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선배. 미안하오. 나도 이렇게 밖에 할 수없음이 원망스럽소.” 그러자 호피의 복면인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내가 무어라 했소? 그나 저나, 아무래도 웅패십왕기의 운도 다된 모양이요. 이런 한 적한 곳에서 두 분의 고인을 만나다니……. 오늘은 이만 실례하겠소. 그럼 보중하시구려!” 그가 말고삐를 잡아 떠나려 할 때 다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은 떠날 수 없소. 귀하는 죄를 지었으며 마땅한 죗값을 치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용백현이 통쾌하다는 듯이 대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하하하! 귀하의 그 말씀! 참으로 좋소. 좋아!” 그러자 복면인은 신경질적으로 뒤돌아보며 말했다. “당신 혼자 우리를 감당할 수 있겠소?” “충분하오!” “정말……. 광오한 자로다!” 그 말과 함께 검을 빼어들었다. 그때, 흑랑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보시오! 젊은 친구! 귀하는 그들이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 또 다른 시체가 늘어날 거요!” 백리향은 고개를 돌려 흑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렁거리는 그의 눈을 보았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는 어쩌면 애절한 부탁일지 모른다고 백리향은 생각했다. 그리고 용백현을 바라보았다. 용백현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아마 흑랑의 말에 따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백리향은 한 참을 생각하더니 그만 한 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복면인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는 백리향을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보게 젊은 친구! 다음에 만나게 될 때 자신이 얼마나 광오한지 알게 될 걸세!” 그 말을 끝으로 말을 몰아 왔던 곳으로 다시 뛰어올라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말발굽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앉게 되자 그제야 흑랑은 검을 거두며 말했다. “선배,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소.” 그러나 그때의 용백현은 흑랑의 사과를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한 동안 계속되고 있었다. “.......” 백리향은 흑랑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그에게 미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흑랑은 몸을 돌려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요?” 백리향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는 저들을 일부러 내버려 두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정체를 이미 파악했으니까요.” 순간, 흑랑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 그것이 무슨 말씀이오?” 그때 흑랑의 뒤에 서있던 용백현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말이 맞네. 나는 이미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네.” “......!” 용백현은 흑랑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그들은 치명적인 실수를 했어! 호피의 복면인은 말할 때마다 검을 높이 치켜 올렸지. 자신의 검을 보라는 듯이……. 왜 그랬을까? 그것은 자네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자네에게만은 자신의 정체를 알리고 싶었겠지.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나의 목에 검을 들이대는 순간,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네.” “......!” 백리향은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그들은 용포두가 자신들을 죽일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겠지요. 그들이 검을 빼어들고 말할 때 용포두를 보는 듯 했지만 사실은 용포두 옆에 있던 당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소생은 이미 알고 있었소.” “.....!” 이번에는 용백현이 말했다. “그는 나를 보며 이상한 어투로 말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말이로군. 당신은 어떻게 죽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거요” 라고 말일세. 사실은 나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자네에게 한 말이지. 자네에게 나를 어떻게 죽일지 선택을 하라고 말일세. 그렇지 않은가?” “.......” 백리향이 말했다. “그때 당신의 고개는 미미하게나마 좌우로 흔들었지요. 용포두를 죽이지 않겠다고 그들에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자 복면인은 그 자리를 서둘러 떠나려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붙잡아 두려 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결코 용포두를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백현은 말했다. “이보게. 자네와 나는 이미 친구일세. 그래서 자네의 뜻을 존중해 그들을 보내주었지만, 언제까지 그들의 범죄를 묵과할 수는 없네. 무엇 때문이지 모르지만 저들은 해서는 안돼는 짓을 하고 있어!” “.......” 순간, 흑랑의 가슴속에 무엇인가 알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친구!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 얼마나 가슴을 뛰게 하는 말인가? 그는 흑랑이었다. 이 세상에 오직 홀로이며, 외롭고, 고독했으며 그에게는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적들은 너무나 많았다. 그에게 있어서 친구란 단어는 무척이나 생소했으며 낮선 단어였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용백현은 아쉽다는 듯이 입을 적시며 말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까워!” 문득 정신을 차린 흑랑이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용백현은 말했다 “일만냥!” 제 십팔장 산중행로고난다(山中行路苦難多) 산 속의 행로에는 고난이 많도다. 용백현에게는 많은 의문점이 그대로 남았지만 흑랑에게 그 어떠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것을 잊은 듯 흑랑에 대한 그의 행동은 평상시와 비교해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것은 그 뿐만이 아니라 백의를 걸친 신비한 서생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점에 있어서 흑랑은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북성표국의 세대의 마차는 두 구의 시체를 새로이 실고 다시 출발하기 시작했다. 북성표국의 표사들은 믿고 있던 일묘와 묘유자가 비록 죽었지만, 불안해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용백현과 흑랑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대협(大俠) 용백현이 끝까지 도와주리라 믿고 있었다. 백리향은 비록 왕약수의 생명을 구해주기는 하였지만, 그들과 달리 강호인이 아니었다. 그는 한 명의 구도자로서 그들의 일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용백현이라는 고수가 있기에 더더욱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행렬의 끝부분에 끼여 느긋하게 걸었다. 용백현과 흑랑은 화물을 실은 마차에 걸터앉았다. 덜컹거리는 마차는 이리저리 그의 몸을 흔들어 놓았지만, 걷는 것 보다는 좋았다. 그는 청명하기 이를 때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고는 문득 허리에 찬 호로병을 꺼내어 독한 죽엽청을 꿀꺽꿀꺽 삼켰다. ?정말 맑은 하늘이야!? 그리고 주위의 숲들을 둘러보았다. 비록 겨울이기는 하였으나 산은 나름대로의 정취를 토해내고 있었다. ?정말 운취가 있어!? 그러더니 다시금 한 모금의 술을 마셨다. 그리고 그는 다시금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저 멀리 서호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정말 아름다운 호수야!? 그는 또다시 한 모금의 술을 마시고 먹이를 찾는 이리마냥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옆에 앉아있는 흑랑과 눈이 마주 쳤다. 그러자 그는 술맛이 떨어진다는 듯이 나무마개로 호리병의 뚜껑을 닫고 다시 허리에 찼다. ?..........? 흑랑은 아무 말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흑랑의 기분과 달리 용백현은 뱃속이 화끈거리며 기분이 더없이 유쾌해 지기 시작했다. 마차의 바퀴와 말발굽들은 마른땅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계속 전진해 나갔다. 문득 그의 시선에 저 멀리 뒤 떨어져 걸어오는 백리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흑랑과 웅패십왕기와의 관계보다 저 평범한 서생의 신분이 더 궁금했다. 그는 어렴풋이나마 웅패십왕기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었지만, 저 서생의 정체를 유추해 낼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그의 이름을 물어 볼 수도 없거니와 그가 이름을 사실대로 말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가명을 쓴다. 옆에 앉아있는 흑랑만도 하더라도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 얼핏 보아서는 그저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서생처럼 보였으나, 잠시 전에 보여준 그의 안목(眼目)과 지혜, 그리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무공은 이미 그 어떠한 노강호(老江湖)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문득 마차에서 뛰어 내려 백리향에게 다가섰다. ?당신은 어디까지 가는 중이시요?? ?집. 집을 찾아 가고 있습니다.? 예부터 도(道)를 가리키는 말들이 많았다. 소(牛)라고 비유하기도 하며, 곡신(谷神)이라고도 불렀으며, 고향, 집 등으로 비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리향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용백현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의 집은 어디요?? ?내가 누우면 그곳이 바로 내 집입니다.? 그러자 용백현은 백리향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말했다. ?당신은 결코 걸개(乞?:거지.)처럼 보이지 않는데?? 백리향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쩌면……. 걸개일수도 있지요. 나는 걸개처럼 동가식서가숙하며, 때로는 일반 가정집에 들어가 잠자리를 청하기도 합니다. 걸개와 약간의 다른 점도 없습니다.? ?........? ?........? 그들은 몇마디의 말도 나누지 못했지만, 벌써 어색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한 참후, 이번에는 백리향이 물었다. ?당신은 포두라고 들었습니다. 평상시에도 그렇게 관대하게 일을 처리하십니까?? 백리향의 질문은 웅패십왕기를 순순히 보내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용백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소. 하지만 이것만은 알 고 있소. 죄 많은 인간일수록 죄 많은 인간에게는 관대해 진다는 것이지. 나는 악인을 처단한다는 미명아래 젊어서 수많은 살인을 저질렀소. 그리고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범죄자도 가차 없이 압송하여 교수형에 처하게 만들었지. 나이가 이미 불혹을 넘어서다 보니 지난날들의 모든 것이 얼마나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 찼었는지 깨달았을 뿐이요. 그리고 항상 한번은 용서하게 되었소.?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실히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소. 짐승이 사냥을 하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지. 하지만 인간이 살인을 하는 이유는 대부분이 욕심 때문이오.? 어느덧 백리향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을 만나 보았지요.? ?.......? 서생은 몹시 차분하고 고요했으나 어쩌면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용백현은 생각했다. 노인들이 젊은이를 무시하는 것은 그것은 인생의 경험이 자신들보다 적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오십년을 통해 경험해야할 일을 고작 이십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모두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평범하고 신비하고 알 수 없는 내력을 지닌 서생도 어쩌면 그런 부류의 사람일지 몰랐다. 용백현이 무어라 말을 하려는 찰나, 북성표국의 행렬이 갑자기 멈추어서고 말았다. 용백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옆의 표사에게 물었다. ?마차가 왜 멈추었나?? 그 젊은 표사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선두의 기수에서 붉은 깃발이 오른 것으로 보아 앞에 장애물이 나타난 모양입니다.? 순간, 용백현은 서둘러 달려 나갔다. 흑랑도 무엇인가 낌새를 느꼈는지 용백현의 뒤를 따랐다. 그곳에는 확실히 장애물이 있었다.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장애물이기도 했다. 다섯 명의 노인! 다섯 명의 노인이 다섯 필의 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백발(白髮)은 정갈하게 상투로 매여져 있었으며 백염(白鹽)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다. 흰색의 금의(錦衣)에는 팔괘(八卦)의 문양이 수놓아져 있었고 등 뒤에 삐죽 튀어나온 검에는 기다란 검수가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속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들……. 그들의 모습이 용백현의 망막에 맺히는 순간, 그의 안색은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다. 그는 그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은세오현(隱世五賢)께서 이곳까지 어인 행차십니까?? 용백현의 입에서 은세오현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사람들의 얼굴은 놀람과 존경의 표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순식간에 긴장을 풀어버리고 병장기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은세오현(隱世五賢). 정수(淨水), 정목(淨木), 정토(淨土), 정금(淨金), 정화(淨火)가 바로 그들이었다. 원래 그들은 호북(湖北) 균현(鈞縣)의 무당산(武當山) 전기봉(展旗峯)에서 수련을 하다가 십 년 전, 절강땅으로 남하에 은거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덕을 칭송하였으며, 그들의 정의로움에 존경을 표했다. 그들에게 배움을 청하러 오는 도학자들도 있었고, 그들의 오행조화검(五行造化劍)의 견식 하러 오는 자들도 많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은세오현이라는 이름에 경탄을 하게 될지라도, 용백현은 그들을 경멸했다. 그는 은세오현의 진면목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들이 어떠한 악행을 저질렀는지 알 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의 악행이 일반 사람들에게 알져져 있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신망에 위협되는 그 어떠한 것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비록 세상사람들의 신망을 얻고 있지만, 욕심이 많고 간악하여 무당산에서조차 쫓겨난 자들이었다. 진창렴은 존경의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서더니 장읍을 취했다. ?말학후배 진창렴이 삼가 은세오현께 문안드립니다.? 그러나 은세오현은 나직이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흥!? 그러자 진창렴은 무엇이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알 수 없어 당혹스럽기만 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용백현의 고개는 안타까움으로 절래절래 흔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은세오현의 진면목을 밝힐 아무런 증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때, 한 가운데의 정토도인이 말을 몰아 나오며 냉랭한 어투로 말했다. ?너희들 참으로 대담하구나! 이곳까지 와서 소란을 피우다니!? 그러자 정목도인이 말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어!? 정수가 말했다. ?마땅한 벌을 받아야해!? 정금이 말했다. ?그 벌은 아주 무겁지.? 정화가 말했다. ?너희들은 죽어 마땅해!? 순간 진창렴은 깜짝 놀라며 어리둥절하고 말았다. 그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북성표국의 표사들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다. 소란을 피웠다니? 무슨 소란을 피웠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들과 달리 용백현만은 이미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냉소를 짓고 있었다. 왕약수는 몹시 당황해 하며 서둘러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소란이라니……. 후배들은 말학 무식하여 도저히 깨달을 수 없나이다. 은세오현께서는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주시길 바랍니다.? 정토가 말했다. ?흥! 너희들은 더러운 재물을 가지고와 청정(淸淨)한 이곳을 더럽혔다!? 정목이 말했다. ?너희들의 죄 많은 몸을 이끌고 와 지순(至純)한 이곳을 더럽혔다!? 정수가 말했다. ?너희들의 불결한 마음은…….? 그 때 용백현은 더 이상 참고들을 수 없어 한 걸음 나서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이 청정하고 지순이란 말이요? 지금 양 숲 속에서 울리는 소란스러움은 어찌 책망하시려 하오?? 그러자 진창렴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양 숲 속의 소란이라니? 이렇듯 조용하기만 한데......? 그러자 옆에 서있던 흑랑이 조용히 말했다. ?주위는 조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소란스럽기 그지없소.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미루어 보아 근 백여 명이 이곳에 매복해 있소.? 그러자 왕약수와 진창렴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백여 명이라는 숫자가 이곳에 매복해 있다면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숫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스스로의 비천한 무공에 한 숨이 터져 나왔다. ?흑랑의 귀에는 들리는 소리가 우리들에게는 어찌 들리지 않는 것인가?? 그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하게 백 여섯 명이 지금 매복해 있습니다. 그 중에 여섯 명은 무공이 매우 고강합니다. 부디 조심하지 않으면 낭패를 면하기 힘들 것입니다.? 흑랑과 왕약수, 진창렴은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왔는지 그들의 뒤에 백리향이 조용히 서있었다. 그들 중 흑랑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파악하기 위해 모든 공력을 쏟아 주위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리향이 지척에 이르도록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사람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정수도인의 입에서 다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빈도의 친구들이지.? 정목이 말했다. ?우리는 친구를 벌하지는 않는다네.? 정토가 말했다. ?그들은 의협심이 강할 뿐 아니라 매우 용맹하네.? 정금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친구가 되기로 했네.? 정화가 말했다. ?자네는 나의 친구들을 모욕했으니 죽어야 돼!? 용백현은 기가 막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버젓이 도적들을 매복시켜 놓고 친구들이라니……. 거기다 용맹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기로 했다니……. 용백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는 어떠한 악행도 참을 수 있지만, 저런 경박스러운 것들은 참을 수 없어.? 그는 솔직한 것을 좋아했다. 저들처럼 성인군자의 행세를 하며, 일반 시민들의 신망을 얻고 재물을 빼앗는 행위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성을 이용해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살수 있다는 한 가닥의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그리고 치료를 위해서 신비한 약재가 필요하니 돈을 준비하라고 시킨다. 또는 불노불사의 비법을 가르친다고 떠벌이기도 했으며, 신선계에 들어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교리를 설파하기도 했다. 용백현은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은세오현께서는 여러 친구 분들을 대동하고 오셨다면, 어찌 저희에게도 소개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정토가 말했다. ?물론이지. 소개시켜 주고말고. 아마 자네도 그들을 보면 반가워 할 것일세.?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숲을 헤치며 다섯 명의 사나이와 비단옷에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다섯 명의 사나이는 모두가 신체가 건장할 뿐 아니라, 신광을 번뜩이고 있어 매우 사나워 보였다. 한 명의 노인은 시골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촌노의 모습이었으나 그가 걸치고 있는 의상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청색의 비단옷은 붉은 수실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고 머리에는 비단 수건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에게는 묵철로 만든 용두장이 들려져 있었는데 그 무게만도 엄청나 보였다. 그들을 확인하는 순간, 용백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 ?당신은.....?? 노인의 입이 씰룩거리자 그의 목구멍에서 쇠를 깎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정말 오랜만이지 않은가? 벌써 오년만이로군. 당시 자네와 일검을 겨룬후, 갑자기 사라져 죽었는지 알았네만 이렇게 살아있다니 반갑기 그지없네.? 용백현은 어느덧 평정심을 되찾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산노괴 하대붕! 정말 반갑소. 당신 또한 오년간 소식을 들을 수 없어. 몹시 궁금해 하던 차였소. 그래 그간 별래 무양하셨겠지요?? ?끌끌끌! 나야 잘 있었지.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좀더 젊어진 것 같지 않나?? 비록 용백현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가슴속은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은세오현정도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겠지만, 하대봉과 오죽림이 합세한다면,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를 부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라, 북성표국의 표사들도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은세오현과 귀산노괴 하대봉이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백로와 까마귀가 친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은세오현이 어떻게 자신들의 표물을 빼앗으려 한 단 말인가? 그들은 믿음만큼이나 실망했으며 분노했다. 그리고 아무런 명령도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다시 병장기를 꺼내들고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전투태세를 취했다. 용백현의 입에서 갑자기 웃음이 흘러나오며 비꼬듯 말했다. ?후후후! 얼핏 듣기로는 당신은 새파란 젊은 후배에게 주먹질을 당했다고 들었소. 그래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소?? 그것은 하대봉에게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오점이었으며, 제일 큰 상처였다. 그것을 용백현이 들먹이자 온 몸에 소름이 돋고 얼굴이 붉어지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빨을 으드득 갈고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하던가! 우리는 결코 승부를 가를 수 없었네!? 용백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당신은 원래 정강으로 만든 용두장을 들고 다니지 않았소? 지금은 어찌 평범한 묵철로 만든 용두장을 들고 다닌단 말이요?? 그러자 귀산노괴는 그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 그건……. 내 맘이다! 자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물론 참견할 일은 아니지. 미안하오. 당신의 아픈 과거를 건드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 그런데 젊은 후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며?? 귀산노괴는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달려들 듯 용두장을 휘둘렀다. ?그것은 헛소문이다. 귀산노괴 하대봉에게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그때 조그만 목소리가 귀산노괴의 귓가로 들려왔다. ?아직 강산이 변하지 않았건만, 노괴는 체백발(剃白髮:백발을 자르다.)의 교훈을 벌써 잊었는가!? 그 목소리는 은근하고 속삭이는 듯 했지만, 귀산노괴의 귀에는 더 없이 확실하게 들렸다. 귀산노괴는 화들짝 놀라며 두 걸음이나 물러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전음을 보내왔다. 그는 전음술에 놀란 것이 아니라 그 목소리에 놀란 것이었다. 용백현은 그가 갑자기 말하다 말고 실성한 사람처럼 두리번거리자 의아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보시오! 노괴! 무엇을 그리 찾으시오? 정 급하다면 아무 곳에나 쪼그려 앉아 볼 일 보시구려.? 하지만, 귀산노괴의 귀에는 용백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 은근하고 조용한 목소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철검으로 자신의 용두괴장을 가르고, 자신의 모든 털이 뽑던 그 목소리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무지막지한 주먹질과 발길질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두리번거리던 하대봉의 시선이 갑자기 멈추었다. 그리고 하대붕은 볼 수 있었다. 북성표국의 표사들의 틈 속에 서있는 백삼의 청년을 ……. 순간 그의 얼굴은 창백히 변하였으며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대봉은 복수라는 단어를 좋아했으며 손해라는 단어를 제일 싫어했다. 그는 항상 복수하기를 좋아했으며 한 번 손해를 보면 열배로 받아내고는 했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 그 예외로 인정한 장본인이 저기에 서있는 것이다. 당시 그는 손도 발도 써보지 못했다. 그는 고양이 앞에 쥐였으며 호랑이 앞에 고양이에 불과 했다. 그의 주먹과 발길질은 공포였으며 악몽이었다. 그는 석 달간을 누워있어야 했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상은 세 가지 부류의 사람만이 있었다. 만만한 사람과 만만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 백리향은 그 중에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은세오현도 그를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아니 그 누구도 백리향을 건드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는 한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혹시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잘못 본 것이 아닐까하는 일말의 기대감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망막 속으로 백리향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얼떨결에 귀산노괴도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 그는 그의 잔잔한 웃음이 싫었다. 그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외모도 싫었다. 싫으면 떠나면 그만 인 것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대봉은 웃음을 더욱 진하게 지으며 은세오현을 향해 말했다. ?은세오현의 친구들, 친구들과 같이 즐거운 신간을 보내려 했소만, 바쁜 일이 있어 이만 실례해야 할 듯 하오. 미안하게 됐소. 그럼 수고하시구려.? 하대붕이 갑자기 떠나겠다고 말하자 은세오현은 그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장내의 모든 사람이 의아해 했으며, 혼란스러워 했다. 귀산노괴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용백현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그는 틀림없이 노괴가 망령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라면 노괴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한단 말인가? 정토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이보시오. 하형! 어찌 이대로 떠난다는 말이요? 저 앞의 보물이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찌 떠나려 하시요?? 하대봉은 자신이 떠나지 못하게 늘어지려는 그들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배신에 대한 약간의 미안한 감정도 있는지라 조용히 말했다. ?저 표물 속에 있는 용천검(龍泉劍)도 당신들이 가지고, 황금으로 만든 미륵존불(彌勒尊佛)도 당들이 가지시요. 됐소?? 그리고 그는 손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애들아!? 그러자 숲 속에 매복해있던 일백 여명의 산적들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쏟아내며 나타났다. 그리고 살기를 번뜩이며 도를 치켜들고는 위협적인 자세를 취해보였다. 하대봉은 다시 한 번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철수!? 그러자 백여 명의 산적들은 어안이 벙벙한 채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장내는 순식간에 묘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일단 명령이 떨어진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진짜로 하대봉이 부하들을 철수 시키자 은세오현은 얼굴을 하얗게 변색시키며 말했다. ?하형이 바쁘시다면 더 이상 붙잡아 둘 수 없지요. 하지만 바쁘신 것은 하형이고 부하들은 한가한 것 같으니 수십 명이라도 남겨두고 가신다면 그에 적당한 사례를 하리다.? 그러자 하대봉은 약간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은세오현과 자신의 수하들을 합세하면 백리향을 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생각하나 마나였으며, 결론은 하나였다. ?나의 수하들도 바쁘오!? 그러자 정토가 펄쩍 뛰며 고함을 질렀다. ?이보시오. 하형! 우리는 친구요.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이요?? 그러자 귀찮다는 듯이 하대붕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이제부터 절교요!? 정토가 불같이 화내며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배은망덕하군! 우리가 당신에게 쏟은 황금이 얼마인데……. 당신은 협의심이 강하다고 생각했거늘……. 어찌!? 그러자 하대붕이 천천히 뒤돌아서며 말했다. ?협의심이 무척강해서 당신들에게 충고하겠는데……. 당신들도 얼른 도망치시오!? 그런 후 하대붕은 백리향을 향해 공수를 취해보이며 더없이 야비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백리향도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공수의 예로서 화답했다. 하대봉이 백리향에게 공수를 취한 것은 이대로 떠나도 되겠느냐는 물음이었고, 백리향은 그것을 화답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다섯 명의 채주를 이끌고 숲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자 북성표국의 표사들이나 용백현과 흑랑등은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부담감을 느낀 백리향은 겸연쩍은 듯 미소를 베어 물고 말았다. 백리향의 입장으로서는 그냥 단순한 인사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가 인사를 하지 않는가? ?........? ?........? 그들도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은 저 평범한 서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때 정수가 얼른 말했다. ?생각해보니, 저들은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닌 것 같군.? 그러자 정목이 말했다. ?소란을 피운 것이 아니라. 단지 표물을 운송하는 것이었어.? 정토가 말했다. ?우리가 상관할 일이 전혀 아니야.? 정금이 말했다. ?그럼 돌아가자고.? 정화가 말했다. ?빠를수록 좋겠지?? 그들은 그렇게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용백현은 그들을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여러 선배들께서는 소인과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누어야 할 것 같소만, 어찌 이대로 떠나려 하시요?? 정토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어색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우리가 오해했네.? 정수가 말했다. ?오해는 오해로 끝내야 하지.? 그 다음 정목이 말하려 했으나 용백현은 그들의 말을 일일이 듣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정목선배 닥치시오!? 정목은 그만 찔끔거리며 웃었다. ?아무 말......? ?닥쳐!? ?........? 이 후로 은세오현은 더 이상 강호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외에는 모른다. 일설에 의하면 용백현은 그들을 죽이려 하였지만, 백리향이 극구 말렸다고 한다. 하지만 은세오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얻어 맞은것 보다 그 짧은 시간안에 얻어 맞은것이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은세오현은 아직도 중원 어디인가에 살아있다. 하지만 그 당시를 목격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은세오현이 다시 강호에 나타나 이상한 교리를 펼쳐 혹세무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은세오현이 서로를 부축하며 저 멀리 사라지는 것을 흥겹게 지켜보다가 용백현은 느닷없이 고함을 질렀다. ?도대체 표물운송을 어떻게 했기에 무림의 쟁쟁한 고수들이 연거푸 나타난단 말인가?? 왕약수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글쎄요? 그것은 소녀로서도 도저히 알 수가 없습니다.? 진창렴이 힘없이 다가서며 말했다. ?저희로서는 철저한 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이토록 소문이 났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용백현은 혀를 차며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그 때 조용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소생이 보기에는 표물운송은 적절히 잘 이루어 졌으며, 문제는 다른데 있는 것 같습니다.? 용백현은 고개를 들어 백리향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슨 의미 입니까?? 백리향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나의 계략을 세울 때는 실패할 것인가, 성공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웅패십왕기는 실패를 염두에 두어 또 다른 안배를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소생은 예전에 그러한 사람을 만나보았습니다.? 백리향은 장양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하나의 계책에 여러 가지 작은 계책을 아울러 사용합니다. 그것은 은세오현을 끌어들여 북성표국의 여러분들이 맞붙게 만든 다음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입니다. 그들도 이 수많은 표물을 모두 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용백현은 말했다. ?단 두 가지! 용천검과 황금으로 만든 미륵존불이겠지. 그 정도면 다른 표물은 약탈할 필요가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 두 가지 만으로도 엄청난 부를 축척할 수 있을테니 말이오. ? 그러나 곧 그는 머리를 내저으며 다시 말했다. ?하지만, 귀하의 말씀은 가능성이지 확실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체계적이고 그에 합당한 논리를 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백리향은 천천히 몸을 돌려 주위를 돌아보며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웅패십왕기 여러분! 소생의 말이 틀렸습니까!? 그의 느닷없는 말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모든 사람이 그를 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주위의 숲에서는 고요한 적막만 들릴 뿐이었다. ?.........? 한 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백리향은 싱긋 웃더니 좌측의 고송을 쳐다보며 말했다. ?어찌 대답이 없습니까?? 그러자 좌측의 고송에서는 코웃음 소리가 들리며 순식간에 한 사람이 날아올라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다른 아홉 방향에서 아홉 명의 옷자락 나부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용백현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지금까지 웅패십왕기가 패주(敗走)하여 돌아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뒤를 미행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으며 더욱이 또 다른 안배를 마련했으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할 수 없었다. 용백현은 그만 무거운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웅패십왕기의 무공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고강한 것이었으며 평범해 보이던 젊은 서생의 능력도 과소평가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미행을 오로지 서생만이 눈치 채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백리향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리향은 쑥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 * * 청성파 장문인 조비가 아홉 명의 사제들을 이끌고 노가보로 돌아온 것은 해가지지 않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의 걸음걸이는 어느 때보다도 여유로워 보였으며 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을 하였으며 입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지어져 있어 결코 권위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번지고 있어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미소선안(微笑仙顔)이라고 부르고는 했다. 또한, 그의 미소는 은근하고 부드러워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청성파의 장문인이라는 신분에도 불구하고 남녀노소 불문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그를 대했으며 그 또한 그러한 점에 있어서 만족스러워 했다. 그는 마구간에서 일을 하는 구씨부인(俱氏婦人)에게 은전 한 닢을 주며 말들을 특별히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의 친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구씨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내가 듣기로 자네는 병든 남편을 대신해 이곳에 일한다고 들었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순간, 그녀는 눈물로 눈앞이 가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주인이 친절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장인이 된다는 사실에 감격해 했다. 조비는 그녀의 부지런함을 칭찬하였으며 아낌없는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자신이 임시로 거주하고 있는 추약헌(秋葯軒)으로 들어섰다. 그의 부드러운 미소와 눈매는 그가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바뀌고 말았다. 그리고 온 몸을 떨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았다. 그는 매번 일을 치를 때마다 의상을 바꾸어 입었다. 그리고 똑같은 의상을 두 번 다시 입지 않았다. 그는 그만큼 치밀한 사람이었으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그의 조심스러움은 거의 결벽증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서 십년간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오랫동안 이 번 일을 준비했으며, 서른 가지의 만일에 대한 사태를 준비해왔다. 관군과의 만남, 생각지도 못하는 천재지변(天災地變), 매복(埋伏)과 함정 등, 모든 준비는 철저했으며 완벽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북성표국의 인마들을 보았을 때, 그 표물들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까지 했었다. 왜냐하면 천재지변도, 관군도, 매복과 함정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흑랑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의 옆에 용백현이 있으리라고는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맨 처음 평범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문사가 나타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숨은 복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변수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진정한 변수는 흑랑과 용백현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외의 변수는 항상 엉뚱한 곳에서 일어나기 마련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생각했던 변수는 흑랑도, 용백현도 아니었다. 바로 하찮게 여겼던 젊은 서생이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미행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으며 귀산노괴를 떠나게 만들었다. 그의 정체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어떠한 신분을 지니고 있기에 귀산노괴가 허리를 숙이고 떠났단 말인가? 그는 강호무림의 젊은 영웅들을 일일이 떠올려 보았다. 오독궁(五毒宮)의 젊은 궁주, 마교(魔敎)의 십삼태랑(十三太郞), 전륜신교(轉輪神敎)의 옥면호리(玉面狐狸) 공손혼(公孫魂.)... 수많은 젊은 세력가들을 떠올려 보았지만, 백리향의 평범한 모습과 부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것으로 끝낼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무어라해도 청성파의 장문인 조비였기 때문이었다. 조비는 입술을 악물고는 두 눈에 핏발을 세웠다. 그리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흐느끼듯 말했다. ?그가 누구이든 절대로……. 용서 못해!? 第二十一章 영웅불설당년용(英雄不說當年甬) 영웅은 지나간 과거를 말하지 않는다 노가촌(魯家村)은 조용했으며 거리는 깨끗한 석판으로 곱게 포장되어 있었다. 길 양쪽에 심어져 있는 가로수는 버드나무였으며 넓디넓은 농토는 끝이 없어 보였다. 사실 노가촌은 촌이라고 불리기에는 너무나 넓은 땅이었다. 이미 현이라 불려야 했지만 어쩐 일인지 오랫동안 촌이라는 단위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조차 순박한 듯 북성표국의 표사들이 거리를 지나쳐도 일절 경계함이 없었다. 비록 알려진 명소(名所)하나 없는 마을이었지만, 노가촌은 그 어느 곳보다 유명한 곳이었다. 그것은 바로 대대로 내려오는 지방호족의 노가보(魯家堡)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가촌은 모를지라도, 노가보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또한 노가보는 모를지라도 노가대보주(魯家大堡主) 신안(神眼) 노여평(魯如平)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는 그만큼 부호였으며 상업적으로 대단한 명성을 얻은 사람이었다. 또한 노가검법(魯家劍法)은 강호에서도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노가촌의 제일 번화가라고 할 수 있는 소항대로(燒沆大路)에 북성표국의 표사들이 도착한 것은 원단(元旦)을 오일 앞둔 때였다. 노가촌에서 가장 크다는 안락객잔(安樂客殘)에 그들은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튼튼한 두 개의 관을 사서 일묘와 묘유자의 시신을 안치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죽음을 북성표국의 총호(摠護)에 알리는 한 편, 두 구의 시신을 사람을 시켜 소림사와 화산파로 이송시켰다. 두 구의 시신이 마차에 실려 떠나자 용백현은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림의 복호나한과 화산의 매화검객의 죽음이라……. 잠잠하던 강호에 어쩌면 한 바탕 피바람이 불지도…….? 그들이 안락객잔으로 들어서자 한산했던 그곳은 활기로 넘치기 시작했다. 난로를 옆에 끼고 꾸벅꾸벅 졸던 점소이가 왁자지껄한 소리에 두 눈을 비비며 그들을 맞았다. 용백현과 흑랑, 그리고 백리향은 밖의 풍경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았다. 점소이는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자꾸 눈을 깜박거리며 탁자를 닦는 둥 마는 둥 하며 비몽사몽을 헤매는 목소리고 말했다. ?손님…… 주문…… 하십시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용백현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잘래잘래 흔들며 말했다. ?삼배계(三杯鷄) 한 접시, 그리고 어향육사(魚香肉絲) 한 접시, 그리고 술은…….? 순간 용백현은 무엇이 떠올랐는지 흑랑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소흥주(紹興酒)로 주게. 흐흐흐! 소흥땅에서 빚어진 소흥주는 과연 일품이지!? ?……!? 순간, 흑랑의 얼굴이 창백히 변하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결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 것이다. 그때 왕약수와 진창렴이 객잔에 들어서 합석하게 되었다. 진창렴은 의자를 끌어 당겨 앉으며 말했다. ?휴~, 이제야 겨우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용백현은 점소이가 따라놓은 차를 들이키고는 말했다. ?표물은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놓았소?? 그러자 왕약수가 대답했다. ?표물은 객실에 옮겨 놓았으며 다섯 사람이 번갈아가며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흑 소협께서는 안색이 좋지 못하시군요?? 그러자 흑랑은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말했다. ?나는 괜찮소.? 그러자 용백현이 말했다. ?가끔 흑랑(黑狼)은 백랑(白狼)이 되고는 하지. 특히 소흥주를 마실 때면 더욱 하얗게 변한다네.? 그러자 왕약수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정말이신가요?? ?그, 그렇소.? 백리향의 뒷좌석에서는 이미 표사들의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었으며 그들이 나누는 대화가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소문에 의하면 무림맹에서 천태산으로 사신을 보내 그를 모시고자 했다고 하네. 그것은 백팔수라귀들을 척살하고자 하는 뜻에서였지. 하지만 그는 신출귀몰하여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사신들은 한 통의 서찰만 받아왔다고 하네. 그런데 그 서찰 속에는 그 동안 정체불명으로 남아있던 백팔수라귀들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적혀있지 않겠나? 무림맹은 그야 말로 발칵 뒤집어 졌다고 하네. 무림맹 좌군사인 단소청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고 하네. ?그는 본래 앉아서 천리를 보며 천리 밖의 모든 일은 그의 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약간의 기연을 얻고자 그 사람을 찾기 위해 천태산을 헤집고 다닌다더군.? 순간, 백리향은 아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듣고 보니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가? 당시 무림맹의 사신으로 찾아온 무산철권 방각정에게 서찰을 넘겨준 것은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방각정의 임무는 육합문과의 동맹도 맺기 위함이었지만, 자신을 찾아 무림맹으로 초빙하기 위해서기도 했던 것이다. 백리향은 그만 탄식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어째서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자에게 번거로움이 찾아오고 악을 싫어하는 자에게 악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가 백의신검이라고 불리는 것도 전설의 천강검(天强劍 )을 지녔기 때문이라는군.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귀산노괴의 철장을 자를 수 있었으며 철혈마검 강자단을 꺾을 수 있었겠나?? 그러자 또 다른 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들은 바로는 약간 다릅니다. 절강오죽림(絶江五竹林)과 비무방(飛武房)의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귀산노괴를 맨주먹으로 떡을 쳤다고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의 입에서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말이 나왔다. ?정말이야?? ?정말입니다. 당시 그곳에 있던 비무방의 사람 수만 해도 백여 명에 이르렀으며, 오죽림에서 나온 자들 또한 그 정도였다고 합니다.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라도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말이지요.?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정말로 백리향이라는 사람은 앉아서 천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일까?? 그러자 백리향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진창렴이 언성을 높이며 말했다. ?이보게! 장노이(張老二), 연삼(燕三)! 쓸 때 없는 소리 작작하고 어서 식사나 하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자 백리향의 뒤편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백리향은 그만 씁쓰레한 고소를 지으며 문득 주화룡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명성을 얻기 위해 사제들마저 희생하려 했지만, 얻어진 것은 불구자라는 신분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가? 결코 명성을 의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지 않은가? 도대체 명성이란 무엇인가? 유명해진다는 것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자신의 이름을 떨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저 사람들은 또 뭐란 말인가? 강자단이나 귀산노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왜 그들을 이야기 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패했으며 어떻게 쓰러졌는지가 왜 궁금한 것인가? 백리향은 그만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먹을 것 걱정 없고, 잠잘 곳 걱정 없다면 한적한 산골에서 노니는 것이 신기루 같은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욱 값진 것이라는 것을 저들은 어찌 모를까?" 그의 말이 들렸는지 용백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 멋진 말이오. 명성이란 하룻밤의 꿈과 같은 것이지.? 문득, 정신을 차린 백리향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삼십년간이나 명성을 이어온 벽력신창(霹靂神槍) 매이선생(梅二先生)도 당시의 젊은 후기지수였던 탈혼무혈 주정천에게 일패를 당한 뒤, 그만 자살하고 말았지. 정말 어리석다고 아니할 수가 없소.?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이선생이라는 사람도 장양도 어리석은 사람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그때, 안락객잔의 문이 ?쾅!?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려졌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곳으로 삼베로 된 백의(白衣)를 걸친 사나이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허리에는 상문검을 차고 있었고 머리에는 백색의 띠를 두르고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哀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느덧 왁자지껄하던 주위의 분위기는 차갑게 냉각되어 있었고 매우 무거워졌다. 술을 마시려고 잔을 들어올리던 표사들은 잔을 슬그머니 내려놓으며 허리에 찬 검을 잡았으며 웃고 떠들던 표사들은 안면을 바꾸며 그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용백현은 백리향의 옷자락을 흔들며 속삭이듯 말했다. ?당신은 저들이 누군지 아오?? 백리향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용백현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들을 가리켜 양행사랑(兩行四狼)이라고 하오. 곤륜파의 후기지수들로 매우 뛰어난 무공을 소유하고 있소. 그들은 또한 금정현의 현령(縣令) 임정영(林政永)의 조카들이지. 임정영은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은 자였소. 그것을 내가 적발하여 그를 삭탈관직(削奪官職)시켜 버렸지. 저들이 상복을 입은 것으로 보아 그가 아무래도 작두에 처형당한 것 같소.? 그의 말이 끝나자 말자 양행사랑 중 둥근 얼굴에 조그만 눈을 지닌 자가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소인은 양행사랑 중 흑랑(黑狼) 임평(林坪)이라 하오. 이곳에 용 포두께서 납시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달음에 달려온 것이요. 용 포두께서는 그만 일어나 보시오!? 그는 매우 무례했으며 몹시 오만하기까지 했다. 순간, 북성표국의 표사들과 진창렴, 왕약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용백현은 술을 한 잔 마시고는 여유롭게 말했다. ?내가 용백현이요. 당신들은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었소?? 흑랑 임평은 용백현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다가섰다. ?당신이 그 천하제일명포 용백현이요?? 용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백부의 죄를 물어 백부께서는 억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소. 이제 그 죄를 우리가 물으려 하오!? 용백현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그러자 임평이 말했다. ?그것은 당신이 알 필요가 없소!? 그러자 용백현은 그들을 무시하고 우측의 흑랑에게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저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흑랑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누군가가 알려 주었겠지요?? 용백현이 말했다. ?왜 그랬을까?? 그러자 백리향이 말했다. ?소문을 퍼트리면 용포두와 흑랑에게 원한이 있는 자들이 몰려들 테고 그만큼 북성표국의 발걸음을 느리게 할 수 있을 테니까!? 용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았어! 바로 그거야! 하지만 꼭 원한을 가지고 나에게 덤벼들지는 않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다른 이유로 덤벼든다네. 그것은 바로 명성일세. 나를 죽이면 하루아침에 명성을 얻을 수 있지.? 임평은 용백현이 자신들을 계속해서 무시하자 상당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용백현! 내말이 들리지 앉는가! 백부의 죽음을 당신에게 물으려한다!? 그러자 용백현은 짜증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죄를 지었어. 죄를 지은 사람은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하지.? 그러자 임평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흥! 우리에게도 죄를 한 번 물어 보시지.? ?무슨 죄를 지었지?? ?살인! 당신을 죽이게 될 테니까.? ?그래 보았자 살인미수가 될 거야. 그러니 그만 꺼져!? 임평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은 왜 검을 뽑지 않지? 천하의 용백현이 이렇게 겁쟁이일 줄은 상상도 못했는걸!?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용백현은 검을 뽑아들었으며 그의 말이 끝났을 때는 이미 용백현은 검을 다시 집어넣고 있었다. ?……!? 임평은 자신이 말하는 사이에 용백현의 검이 자신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음을 깨닫고 얼어붙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공을 믿었으며 충분히 용백현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용백현의 무공은 그들의 상상을 넘어섰으며 그제야 미몽에서 깨어나 무서운 현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용백현은 양행사랑의 멍한 얼굴을 외면하고 술을 한 잔 마셨다. ?흥! 복수니 어쩌니 하지만 자네들은 명성을 얻고 싶어 온 것이 아닌가? 무어라 해도 이 용백현을 죽이면 단 번에 큰 명성을 얻게 되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으며, 더 이상 무례한 언사도 사용하지 않았다. ?네.? 임평은 단지 그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에 또다시 나에게 접근하면 바지 끈을 자르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게 될 거야!? ?네.? 그때였다. 잠자코 있던 흑랑이 임평을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의 아호가 흑랑(黑狼)인가?? 임평은 고개를 돌려 흑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검은 죽립에 검은 장삼을 걸치고 한 자루의 보검을 든 사나이를……. ?……!? 흑랑은 순식간에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말했다. ?다시 말하겠다. 당신이 정녕 흑랑(黑狼, 검은 늑대)인가!? 순간, 임평은 등골이 오싹해지며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로서는 흑랑의 살기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임평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며 떠듬거리듯 말했다. ?아니요. 저, 저는 흑랑(黑?, 검은 사마귀)인데요.? 그러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폭소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푸, 하하핫!? 그러나, 백리향은 웃지 않았다. 정말이지 가련하지 않은가? 얼마나 이름을 날리고 싶었으면, 얼마나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으면 자신들의 능력을 가늠해 보지도 않고 용백현에게 결투를 신청한단 말인가? 주화룡아, 주화룡아! 당신은 살아서 이 모습을 봐야했어! 원래 웃음은 전염된다. 세상에 전염시켜 좋은 것이 있다면 바로 웃음일 것이다. 흑랑은 결코 크게 웃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 번도 크게 웃어볼만한 일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백현을 만나고부터는 그는 곧잘 웃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보다 크게 웃고 있었다. ?하하하!? 용백현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이보게. 진작 당랑검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검은 사마귀라고 말했으면 어찌 흑랑이 저토록 화를 냈겠는가? 하여튼 반갑네. 자네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흑수무정검(黑手無情劍) 흑랑일세.? 검은 사마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아, 네.? ?그리고 이 쪽은…….? 용백현이 왕약수를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소녀는 철접(鐵蝶) 왕약수라고 합니다. 당랑검법의 대가이신 검은 사마귀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임평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의 명호는 검은 사마귀도 아니었으며 당랑검법이라고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어느덧 그의 명호는 검은 사마귀로 바뀌기 시작했으며 당랑검법의 대가로 발돋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죽는 것보다 당랑검법의 대가가 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은가? ?나는 철창번천 진창렴이라 하오.? ?아, 네.? 진창렴이 자신을 소개하자, 용백현은 눈을 빛내며 백리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 소협께서는…….? 원래 그가 여러 사람들을 임평에게 소개시켜 주려는 것은 그가 마음에 들어서도 아니었으며 그를 놀리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것은 백리향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한 포석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호의 경력이 많은 노강호답게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상대방의 이름을 알아내려 했던 것이다. 백리향은 잠시 가명을 쓸까 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어차피 이들과는 곧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강호인들과 어울려 잠시라도 번거로운 일에 휘말려 들고 싶지 않았다. ?소생은 백리향이라 합니다.? 순간, 장내는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동안 배꼽을 잡고 웃어대던 표사들도, 흑랑도, 용백현도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아니 그 누구도 웃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백리향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장내는 더욱 큰 웃음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무도 그, 백리향을 백리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단지 검은 사마귀를 놀리기 위해서 내뱉은 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백리향도 씁쓰레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짧은 시간이나마 인생의 묘한 단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결코 명성에 연연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명성을 얻었으며 실제로 자신의 명성을 밝히자 아무도 믿지 않았다. 이 얼마나 묘하고 묘하단 말인가? 그의 미소는 명성에 찌들어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비웃음이었으며 은근한 질타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과 같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용백현이었다. 그는 비단 웃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리향이 왕약수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 때 그의 경공을 본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어떻게 연검을 뽑아 웅패십왕기의 검을 막았는지 본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 그는 비단 신중할 뿐만 아니라 경건하리만큼 조심스럽게 말했다. ?귀하가 천태현의 백리향이요??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생은 틀림없이 천태현에서 왔습니다.? 용백현이 다시 물었다. ?귀하는 철혈마검 강자단과 귀산노괴 하대봉을 알고 있겠지요?? 백리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장내는 조금씩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용백현은 다시 한 번 물었다. ?귀하는 귀산노괴의 철장을 잘랐으며 그의 머리카락을 잘랐다고 하던데?? 그러자 백리향은 말했다. ?나는 그의 철장을 잘랐으며 머리카락을 잘랐고, 그의 수염을 뽑기까지 했소.? 장내는 순식간에 냉각되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나 조용해진 분위기에 백리향은 진창렴을 바라보았다. 그는 입술을 벌린 채 꿈쩍 않고 있었으며 왕약수 또한 마찬가지로 백리향을 직시하며 두 눈을 끔벅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귀산노괴가 갑자기 떠나버린 것이 결코 기적이 아니며, 당연한 귀결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일거에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만은 그렇지 못했다. 용백현은 자신의 얼굴에 난 기다란 검상을 매만져 보이며 말했다. ?지금 강자단은 어디 있소!? 너무나 조용한 분위기에 용백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들려왔다. 백리향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쯤 천태현 육합문에 머물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