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왕 1 ☞ 차 례 ☜ ■ 작가 서문 ■ 序章 ▶ 제1장 도강(渡江) ▶ 제2장 북행(北行) ▶ 제3장 화우(花雨) ▶ 제4장 삭풍(朔風) ▶ 제5장 난설(亂雪) ▶ 제6장 분하(汾河) ▶ 제7장 암중가(暗中歌) ▶ 제8장 황운(黃雲) ▶ 제9장 천잠로(天潛路) ■ 작가 서문 배교(拜敎)의 부활(復活)을 꿈꾸며…… 한 일 년 배교도(拜敎徒), 배교의 교주(敎主)로 광분하며 살았습니 다. 무협(武俠) 고서(古書)의 귀퉁이 여기저기서 들었던 그 이름에 대한 향수와 앙그라 마이뉴, 명교(明敎), 백련교(白蓮敎) 등을 만나 며 이루고자 했던 배교의 부활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교주의 몫으로 하고 '심판의 날'은 독자들에게 맡기겠습 니다. 암왕(暗王)을 쓰며 내내 잡고 있었던 말이 있습니다. 첫 작품 철검 무정(鐵劍無情)을 쓸 당시 용대운(龍大雲) 선생께서 들려주신 말씀입 니다. - 현실과 합리의 추구가 너의 장점이자 가장 큰 단점이다. 배교라는 이상한 종교(宗敎)를 만났기 때문에 그 말을 극복할 절호 의 기회라 생각했습니다. 노력은 무척 했는데 결과가 어떨지는 모르 겠습니다. 교단(敎團)을 해체할 이 즈음에 이르러 문득 선생의 다른 말도 생 각납니다. - 무리하게 단점을 극복하겠다고 생각하지 마라. 장점을 극대화하 여 단점을 가려라. 욕심이 많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만족하겠습니다. 아직 남겨 둔 다른 일도 많습니다. 금강 대선배님의 편히 읽힐 수 있는 무협, 좌백의 신강호인, 몽강 호의 화려한 무대 장치, 운중행의 해학, 진산의 천재성, 이재일의 인 물의 깊이, 하상민의 촌철살인(寸鐵殺人)……. 모두 배우고 싶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일이 힘은 들어도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어려운 시절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상황 속에 선뜻 책을 내어 주기로 결정해 주신 출파사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두 행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바닷가에서 장경(長鯨)이 썼습니다. ■ 序章 성녀(聖女)여! 우리 교(敎)의 귀여운 딸이여! 나는 예언(豫言)한다. 교를 천 년 동안 밝히던 성령(聖靈)의 불이 그대의 대(代)에서 꺼지게 됨을……. 초대(初代) 명옹(明翁)께서 천산(天山) 험로(險路)를 지나 중원으 로 들어오며 봉인(封印)했던 암가(暗家)의 힘! 그 힘이 암왕(暗王)의 이름으로 전모를 드러내게 될 것이다. 어찌 나백(拿魄)과 탈명(奪命)의 힘에 비교하랴! 세상은 피에 잠기고 교는 성령의 불을 모두 끈 채 사악(邪惡)의 구 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부르던 마교(魔敎), 바로 그 이름으로……. 나는 묻는다. 누구인가? 암왕의 봉인을 풀자! 안타깝구나. 우리 교의 귀여운 딸, 성녀여! 그 봉인은 바로 그대의 피에 의해 풀릴 것이다. 두려워 마라! 그것이 그대가 걸어야 할 운명(運命)……. 나는 또 다른 예언으로 약속한다. 그대의 피로 천 년 배교의 역사(歷史)가 끝을 맺듯이 그대의 피로 다시 천 년 배교의 영화(榮華)가 시작되리라. 그대의 피로 암왕의 봉인이 풀리듯 그대의 피로 다시 암왕은 영면( 永眠)의 잠에 들 것이다. 두려워 마라! 두려워 마라! 낮과 밤의 공전(空轉)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 라. 우리 교의 귀여운 딸, 성녀여! - 얼굴 여기저기에 허옇게 핀 저승꽃과 주름살은 풍화(風化)에 시 달린 이끼 낀 바위를 보는 듯했다. 천 년 배교(拜敎)의 비밀을 간직한 자, 광명신장(光明神將)! 영원한 시간 속에 침묵하며 성녀를 제외한 일체 교도(敎徒)들의 접 근을 불허하는 그는 긴 한숨을 쉬며 굳게 입을 닫았다. 제1장 도강(渡江) 거미줄로 칭칭 감긴 좌상(坐像)은 장강(長江)을 지키는 용왕(龍王) 이나 하백(河伯)의 상(像)인 듯했다. 사람의 발길이 오래 전에 끊긴 수신당(水神堂)! 허물어진 나무 벽 사이로 장강의 물굽이가 보였다. 강물을 떠다니는 배는 띄엄띄엄했고 마른 갈대만이 삭풍(朔風)에 흔들렸다. 지독한 추위, 지리한 통증……. 사위는 조용했고 적(敵)의 종적은 한동안 찾을 길이 없었다. 은형술(隱形術)을 펼치는 데도 상당한 기(氣)가 소모된다. 그는 적의 추적(追跡)이 끊겼음을 확인하자 은형술을 풀기로 했다. 츠츠츠츠……. 수신(水神)의 상(像)이 경미하게 흔들리며 희뿌연 그림자가 피어올 랐다. 그림자는 곧 사람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그는 수신의 그림자에 기대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제단(祭壇)을 내려와 삐꺽거리는 나무벽에 몸을 기댔다.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피로가 몰려왔다. 악양(岳陽)에서 무당파(武當派)의 제자 두 명의 처치하고 양신(陽 新)에서 또 한 명의 무당 제자를 처치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까 지 수 차례의 싸움을 더 벌여야 했다. 잠깐의 쉴 틈도 없었다. 그를 둘러싼 그물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서둘러 강을 건너려 했으나 배가 보이지 않았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은 강변에도 쳐져 있었고 배는 적들에 의해 모 두 발이 묶인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포위망은 좁혀지고 적들은 늘어날 것이다.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한다. 오늘밤 그는 강을 건널 생각이었다. 별 싸울 마음은 없었으나 배를 뺏기 위해서라도 또 한 판의 싸움은 각오해야 했다. 어둠이 내리려면 한두 시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그는 허리에 묶인 신장도(神將刀)를 풀었다. 그가 신장도를 무릎에 놓으며 나무벽에 길게 몸을 기댔다. 잠깐 동안의 잠이었다. 그러나 수신당에는 벌써 낙조(落照)가 비치고 있었다. 그는 무심결에 품속을 뒤졌다. 그의 손에 삼각형의 작은 깃발이 드러났다. 전교영기(傳敎令旗)! 점점이 피가 묻어 있는 그 작은 깃발은 신장도와 함께 그의 사부가 죽음으로써 건네 준 물건이다. 사부! 최초로 사람의 정(情)을 느끼게 해 준 분! 그는 천애 고아로 태어났다. 철이 들 때까지 세상의 온갖 구박 속에 떠돌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그에게 두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준 사람이 바 로 그의 사부다. 그는 신장도와 전교영기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사부의 체취(體臭)가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 체취는 그를 지탱하는 두 가지 힘 중의 하나였다. 전신에 팽팽한 긴장감이 끌어 올랐다. 그는 전교영기를 품속에 감추고 신장도를 찼다. 어둠은 낙조를 몰아내며 사위를 맹렬히 잠식해 갔다. 기다리던 밤이 온 것이다. 움직여야 했다. 휘-잉! 휭! 삭풍은 점점 거세 지고 나뭇가지들이 서로를 부딪히는 소리가 천지 (天地)를 진동하며 요란했다. 그는 수신당을 나서 잠시 밤하늘을 우러렀다. 유성(流星) 하나가 흘렀다.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장강의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이 뛰어들었다. * * * 북풍(北風)은 이미 기러기까지 멀리 날려 보내 살아 있는 것의 흔 적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는 너른 들판이었다. 서릿발이 허연 이빨을 들이 밀고 있는 그 들판에 작은 인영(人影) 하나가 손을 호호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작은 인영은 땟물이 줄줄 흐르는 십삼사세 정도의 소년으로 손에 든 달랑거리는 밥그릇과 더덕더덕한 옷으로 보아 새끼 거지임이 분명 한 듯했다. 어린 거지가 달려가는 곳은 들판에 높다랗게 세워진 짚더미였다. 그가 짚더미를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노개(老　)! 노개! 큰일 났어!" "뭐? 큰일!" 짚더미에서 겔겔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 놈이냐? 빌어먹을 네 밥그릇을 깬 놈이!" 노인이 다짜고짜 고함을 질렀다. "밥그릇이 깨진 것은 아니고……." "밥그릇이 깨진 것이 아니라고? 그럼 뭐냐? 우리에게 쪽박 깨지는 일 말고 무슨 놀랄 일이 있지?" "문이나 좀 열어! 거지에게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다고 조잘거린 자가 누군데. 추운데 빌어먹으려 돌아다니고 왔으면 얼굴부터 비쳐야 지." 어린 거지가 짚더미 앞에서 눈을 흘겼다. "그놈 참! 아무 곳이나 쑤셔 박고 들어오며 될 것을……." 투덜거리는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짚더미가 들썩들썩 움직이며 그 사이로 머리 하나가 쑥 빠져 나왔다. 회색 봉두난발(蓬頭亂髮)의 머리칼에 팔순(八旬)은 족히 되어 보이 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은 땟물로 졸졸해 때가 더 이상 앉을 곳 이 없어 울며 피해 갈 거지 중의 상거지였다. "으…… 춥다! 어서 들어오너라." 늙은 거지가 짚더미를 열었다. "이놈아! 이게 뭐냐? 밤늦게 오지 않기에 돼지 대가리라도 하나 얻 어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이거냐? 에잇!" 늙은 거지가 어린 거지의 밥그릇에 담겨 있는 먹다 남은 만두 하나 를 덥석 집어들며 면상을 구겼다. "먹기 싫으면 그만 둬! 그것도 내가 먹으려다 불쌍해서 가져 온 것 이라고!" 어린 거지가 눈을 흘기며 짚더미 속에 몸을 파묻었다. 짚더미 속은 안온(安穩)했고 자리도 제법 넓었다. 늙은 거지는 그 짚더미에 알몸으로 턱 버티고 앉아 있었다. 때와 주름살로 이그러질 대로 이그러진 쌍통과 달리 노인의 몸은 젊은이들 못지 않게 건장했다. 군살 하나 없었고 피부 색깔도 잘 익은 대추처 럼 붉었다. 연신 옷을 뒤적이고 있는 양이 노인은 아마 이를 잡고 있 었던 모양이었다. 늙은 거지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이를 한 마리 잡아 만두 속에 넣 었다. "이놈아! 큰일났다니? 또 무슨 큰일날 일을 본 게냐? 저번에는 남 자가 여자를 때려죽인다고 관부인(官府人)까지 불러들여 난리를 피우 더니……." 그가 만두를 깨작거리며 말했다. "흥! 그때 일이야……. 남자는 여자 배 위에서 치도곤을 놓고 여자 는 나 죽겠다고 엉엉 우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 그것이 남녀간의 우…… 운우(雲雨)…… 무엇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 어린 거지가 얼굴을 붉혔다. "이놈아! 봄날의 개구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일을 안다. 뿐이냐! 그 일을 하기까지 하지. 그런데 네놈은…… 낄낄낄! 나는 네놈의 모자람을 한 눈에 알았다." 늙은 거지가 만두를 입안에 털어 넣으며 웃었다. "쳇! 모자란 게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거지의 모자람은 밥그릇을 넘치게 하는 덕목(德目)이라고 했잖아!" 어린 거지가 도끼눈을 뜨며 소리쳤다. "아무렴! 그건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슨 큰일날 일을 보 았다는 게냐?" 늙은 거지가 입맛을 쩝쩝 다시며 물었다. "시전(市廛)에 목이 걸렸어. 세 개나……." "흐흠! 요즘 저자에서 인두(人頭)까지 파는 줄 몰랐다. 아무리 먹 을 것이 없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이다지만……." "배교 놈들의 목이라던데." "배교?" 늙은 거지의 안색이 변했다. "또 그들인가? 목이 잘린 자들의 이름은 들었느냐?" "듣긴 들었는데 오는 길에 다 까먹었어. 음……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한 놈은 호남(湖南)의 마두(魔頭)라는 소리는 들었다." "호남의 마두?" 늙은 거지가 얼굴을 찌푸렸다. '유마(柔魔), 여양의(呂陽義)! 결국 그도 목숨을 잃고 말았구나. 배교에 아까운 별 하나가 또 졌군.' 그가 가는 한숨을 쉬었다. 각 성(省)을 책임진 수뇌(首腦)를 배교에서는 명두(明頭), 정파(政 派)를 자처하는 자들은 마두라 부른다. 정파인들에게 유마로 더 잘 알려진 여양의는 호남을 책임진 배교의 명두였다. "누가 그들을 죽였다고 하더냐?" "유향…… 유향……." "유향경천문(柳香驚天門)?" "맞았어!" 어린 거지가 이마를 쳤다. "그들의 기세가 날로 커져 가는 구나. 앞으로 구대문파(九大門派) 도 그들에게는 큰소리 치기 힘들겠군." 늙은 거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노개, 물어 볼 말이 있어. 가만히 생각하니 배교 놈들의 시신(屍 身)을 본 것이 오늘만은 아니잖아. 도대체 그들은 뭐 하는 놈들인데 그렇게 죽어야 하지? 시전에서 듣기로 사람의 간을 예사로 빼먹는 식 인귀(食人鬼)라 하던데 맞아?" 어린 거지가 물었다. "그들은 식채사마(食菜事魔)하는 자들이지." "무슨 말이야?" "채소(菜蔬)만 먹고 모여서는 마(魔)를 꾀하는 자들이란 뜻이다. 채소만을 고집 하는 자들이니 네놈은 생간을 뺏길 걱정은 하지 않아 도 된다." "아하! 다행이군." 어린 거지가 가슴을 쓸었다. "명왕(明王)이라는 신(神)을 받든다. 명왕의 전언(傳言)을 알리는 여자를 성녀, 성녀를 지키고 교를 수호하는 자를 호교신장 (護敎神將 ) 혹은 명옹(明翁)이라고도 부르지. 지금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가 혈안(血眼)이 되어 찾고 있는 자가 바로 그 자다. 그리고 각 성을 책 임진 수뇌들은 명두……. 그 외에도 명사(明使), 명전(明傳)이라는 자들도 있고…… 정파에서 그들을 부르는 말은 '명(明)'자 대신 '마( 魔)'자를 붙이면 된다." "정파에서 그렇게 부른다면 마귀(魔鬼)들의 작당이 맞는 모양이군. " "글쎄다. 내가 보기에 제단에 쌓인 세상의 재물(財物)은 요교(妖敎 ), 사교(邪敎)라 불리는 배교 보다 구대문파가 더 많더구나. 그리고 육개 월 전에 태호(太湖)에서 죽은 배교의 전대 명옹은 나와 조금 안 면이 있지. 기억하기로 고집은 셌지만 그렇게 나쁜 친구는 아니었어. 끙!" 늙은 거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입으나 마나 한 바지를 걸쳤다. "잉? 마귀들의 수괴가 노개의 친구? 나…… 나는 가야겠어." 어린 거지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간을 빼먹기 전에 앉아라!" 늙은 거지가 소리쳤다. "추운 날, 먹여 준 대가가 고작 간을 빼먹는 것이었어!" 어린 거지가 입을 삐죽이며 짚더미 구석에 몸을 기댔다. "참으로 더러운 육신(肉身)이로다. 이 나이가 되도록 한낱 미물(微 物)에게 피나 빨리는 신세라니…… 소개(少　)야, 이리 와서 등이나 좀 긁어다오." 늙은 거지가 등을 돌리고 앉았다. "싸움을 그렇게 잘 한다더니…… 아직도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되 지 못한 게야?" 어린 거지는 손톱을 세웠다. "젊었을 때는 이를 잡고 가려운 곳을 긁는 것도 재미 중의 하나였 지. 하지만 늙으니 이 일도 귀찮아 지는 구나. 이렇게 이가 귀찮은 놈인 줄 알았다면 네놈 말대로 진작 금강불괴를 꿈 꾸었을 것이다." 늙은 거지가 어린 거지에게 몸을 맡기며 중얼댔다. 어린 거지가 고양이 발톱으로 늙은 거지의 등짝에 붉은 줄을 쫙쫙 그어댔다. 늙은 거지가 몸을 건들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개야, 나는 스스로를 사교(邪敎)라 칭하고 다니는 교를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결국 사교, 마교에 대한 판단은 세상의 몫! 믿 을 것은 결국 세상의 판단이지만 노부의 경험으로는 그 판단이 언제 나 옳은 것은 아니었다." "노개는 배교가 마귀들의 작당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게지."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강호인들이 그들을 사교, 요교, 마교라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배교는 그렇게 불릴 만한 일들도 했다. 이미 오래 전 일이지만……." "나이가 들면 왔다갔다한다더니 도대체 좋은 놈들이라는 게야 나쁜 놈들이라는 게야!" 어린 거지가 늙은 거지의 등짝을 치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낄낄낄! 이놈아, 알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배교! 이상한 곳이 지. 강호의 귀퉁이를 천 년 이상이나 지키고 있으면서 아직 자신들의 비밀을 제대로 보여 준 적이 없는 곳이다." "배교의 역사가 천 년이나 된다고? 우리 개방(　幇)만큼 역사가 길 잖아!" 어린 거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세월이 길다는 것에 놀라는 것을 보니 전혀 바보는 아닌 모양이구 나. 하지만 그 천 년 역사도 이번에는 지켜 나가기 힘들겠어. 세상이 온통 배교 척결(剔抉)을 위해 일어났으니…… 컴!" 늙은 거지가 널부러진 마의(麻衣)를 들었다. "왜? 배교 놈들이 이번에도 큰일을 저지른 게야?" "모르겠다." "개방이 모르면 누가 알아? 그리고 노개는 용두방주(龍頭幇主)도 두려워하는 궁신(窮神)이라고 했잖아. 궁신도 모르는 일이 있어? 설 마 앉아서 밥을 얻어먹으려는 생각으로 궁신이니 뭐니 하는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겠지?" 어린 거지가 수상쩍은 눈으로 노개를 힐끗거렸다. "내가 궁신임을 믿든지 말든지는 네 맘대로 하라. 모르는 일은 모 르는 일! 너는 알아야 한다. 세상이 술렁거린다고 따라서 술렁거리지 마라. 알지 못하는 일에 쓸데없이 참견하다 피의 대가를 몇 십 배 이상 받게 되는 게 강호다." "오늘, 내일 하는 곳이 배교라며? 그런 곳에서 어찌 훗일을 이야기 할 수 있겠어? 늙었으니 당연히 노파심(老婆心)은 늘어나겠지만…… 쯔쯧!" 어린 거지가 혀를 찼다. "배교가 분명 어렵기는 한데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야. 이미 두 번이나 같은 경험을 겪은 적도 있고…… 그건 그렇고 이번 에는 유향경천문도 구대문파도 약이 오를 대로 올랐군. 배교도의 목 을 저자 거리에 걸 정도니……." 늙은 거지가 옷을 걸치며 중얼댔다. "솔직히 나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지은 죄야 살아서 지 은 죄지 죽어서 지은 죄는 아니잖아. 목까지 내걸 필요가 있었을까?" 어린 거지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늙은 거지는 어린 거지를 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두방주가 이 어린 거지를 개방의 후개(後　)로 키워 달라고 부탁 했을 때 선뜻 수락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방금 같은 어린 거지의 마 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새로이 등극한 배교 젊은 명옹의 명(命)이 생각보다 길구나. 명이 길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무당파(武當派)의 세 제자까지 해치웠다. 태호에서 전대 명옹, 이정인(李正仁)이 죽고 난 후, 강호인들은 모두 이제 배교는 끝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죽기는커녕 저렇게 날뛰고 있 으니 유향경천문이고 구대문파고 독이 오를 수밖에……." "헉! 무당파의 세 제자를 죽였어? 배교의 젊은 명옹이 도대체 누구 야?" 이제 갓 강호의 일에 귀를 기울이는 처지였지만 어린 거지도 무당 파의 그 빛나는 명성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당파 제자를 세 명 이나 죽인 자라니……. "이름까지 모른다면 정말 네놈은 나를 네놈의 밥이나 축내려는 자 로 알겠지. 명강량(明彊良)! 전대 명옹, 이정인으로부터 명옹의 자리 를 넘겨받은 자다. 듣기에 아직 약관의 애송이라 하던데." "노개도 그 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구나." "모른다. 적염날수(赤髥捺手)에게 잠시 들은 이야기는 있지." "적염날수는 또 누구야?" "정사(正邪) 양도(兩道) 간의 인물로 배교의 전대 명옹 이정인과 절친한 사이였지. 이정인과 마찬가지로 나와는 안면 정도가 있고…… 언젠가 만날 일이 있을 것이다." "젠장! 강호란 문파와 사람 이름 외기에도 바쁜 곳이군. 그건 그렇 고 적염날수가 노개에게 뭐라고 하던데? 명강량이란 자에 대해서…… ." "……." 늙은 거지는 어린 거지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별반 이야기 할 거리도 못되었고 다시 생각하면 특별한 이야깃거리임에는 분명하나 이야기 해 봐야 어린 거지가 알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명강량이라는 아이는 무골(武骨)도 준재(俊才)도 아니라고 한다. 이정인은 단지 그 아이가 가진 특별한 기운에 끌려 후계자 자리를 넘 겨주었다고 적염날수에게 말했었다. '특별한 기운이라…….' 초극(超克)한 고수(高手)들 만이 느낄 수 있는 감(感)! 이정인의 평소 성격으로 보건대 여하히 특별한 느낌이 아니었다면 적염날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늙은 거지는 그 말에 갑자기 신경이 쓰였다. 배교는 가끔 세상이 놀랄 만한 힘을 가진 자를 배출시켰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작금 배교의 운명은 천강성(天　星)이나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을 가진 자가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회복될 국면은 아니었다. 그리고 천 시(天時)는 인시(人時)와 합쳐져야 비로소 힘을 발하는 법! 명강량이 라는 아이는 사부, 이정인을 잃은 후 자기 몸을 지키기도 바쁜 처지 였다. "적염날수가 뭐라고 했는지 말해 달라니까!" 어린 거지가 고함을 질렀다. "알 것 없다! 강호의 일이라면 죽지 못해 듣던 놈이 오늘따라 별일 이구나." "헤헤헤! 그건 그랬지. 하지만 명강량이라는 자에게는 이상하게 관 심이 쏠린단 말이야. 언젠가 만날 것 같고……." 어린 거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 늙은 거지는 어린 거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제 배운 항룡장(抗龍掌)이나 펼쳐 봐라!"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 * * 활활활! 화르르! 말라붙은 갈대는 한 번 불이 붙자 천지(天地)를 불태울 듯 기세 좋 게 타 들어왔다. 강변(江邊)에는 십 여명의 무사들이 '일(一)' 자로 쭉 도열해 있었 다. 그 뒤로 불타는 갈대를 따라 포위망을 좁히며 십 여명의 무사들 도 움직였다. 창의문(蒼義門)! 무당의 속가제자(俗家弟子)인 신충(申忠)이 세운 방파(幇派)……. 불타는 갈대를 사이에 두고 움직이는 이십 여명의 무사들은 창의문 의 무사들이었다. 창의문주(蒼義門主), 신충은 십 여명의 수하들과 함께 강변에 서 있었다. 그가 긴장된 표정으로 수실이 길게 늘어진 자신의 검을 잡았 다. 강변에 늘어 선 수하들도 그를 따라 일제히 칼을 잡아갔다. 사사삭! 사삭! 화염(火焰)으로 포위된 갈대숲이 경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불에 놀란 뱀이 살길을 찾아 이리저리 기어다니는 모습 같기도 했고 서너 마리의 들쥐들이 우왕거리는 모습 같기도 했다. 그 경미한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여러 군데의 갈대를 흔들며 점점 강변으로 다가왔다. 신충은 미간을 좁혔다. '사행술(蛇行術)…….' 정동(靜動)을 거듭하며 상대로 하여금 자신의 위치를 현혹하게 만 드는 배교의 신법(身法) 중 하나! 신충은 갈대밭에서 대망(大　) 한 마리가 곧 아가리를 불쑥 내밀며 달려들 것을 직감했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그의 검을 붉게 물들였다. 배교의 수괴, 마옹의 도강(渡江)은 예측된 것이었다. 운이 좋았다고 할까? 이 넓은 장강의 굽이 중 마옹이 하필 그가 지키고 있는 곳에 나타 난 것을……. '아직 운을 말하기에는 이르지!' 상대는 무당 본산(本山)의 제자를 세 명이나 처치한 자다. 운의 좋 고 나쁨은 결과를 보고 난 후에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충은 검을 치켜들며 안광을 빛냈다. 강변을 지키던 수하들의 칼 도 정연하게 도신(刀身)을 벗어났다. 화르르! 확! 활활! 불은 바람을 따라 점점 거세지고 팽팽한 긴장감은 숨을 멎게 할 정 도였다. 사삭! 싹! 사삭삭! 갈대의 움직임도 커졌다. "조심하라!" 신충이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갈대가 쫙 열렸다. 갈대숲에서 푸른 인영(人影) 하나가 도약(跳躍)하고 있었다. 신충은 반사적으로 그 인영을 향해 검을 날렸다. 속가제자라 하나 신충의 실력은 한 문파를 열 정도다. 무당 본산( 本山)의 제자들과 비교 신충의 실력이 손색없었다는 이야기다. 그의 실력이 전혀 아니었다면 무당의 스승들은 그가 문호를 다는 것을 허 락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파파파팟! 신충이 검이 연천섬광(連天閃光)으로 뻗어 갔다. 챙! 챙! 챙! 챙! 챙! 허공에서 풍뢰(風雷)가 휘몰아 쳤다. 갈대밭에서 튀어나온 푸른 인영은 잠깐 사이에 신충과 수 합을 겨 룬 후, 강변에 발을 디뎠다. 신충이 그를 본 것은 그때였다. 배교의 수괴, 마옹! 중키에 손에 들린 칼은 언월도(偃月刀)와 유사했다. 얼굴은…… 그 러나 배교의 수괴는 신충이 한가하게 자신의 얼굴을 감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그제야 달려드는 창의문의 수하들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신충이었다. 마옹의 푸른 옷이 흐릿하게 변해 갔다. 신충은 마옹이 잠깐 사이에 자신을 육박하자 세류표(細柳飄)를 밟 으며 음양획분(陰陽劃分)으로 맞섰다. 쩡! 신충의 검과 마옹의 칼이 거칠게 얽혔다. 마옹의 접도술(　刀術)은 신충이 보기에도 절묘했다. 그의 검은 마옹의 칼에 한 번 얽힌 후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내력(內力)의 대결이라면 자신하지 못할 바가 아니었고 내력의 대 결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더 더욱 좋았다. 신충은 폭죽(爆竹)으로 장강 주변에 포진해 있는 다른 자들에게 이 미 마옹의 출현을 알린 터였다. 그가 검에 내력을 실으며 서서히 마옹의 칼을 눌렀다. 수하들도 달려들고 있었다. 악마성전(惡魔聖殿) 배교의 수괴, 마옹을 처치하는 일! 수하들의 협공(挾攻)을 비겁하다고 할 이유가 없었다. 마옹은 신충의 검에 저항하며 투명하게 눈빛을 빛냈다. 그의 입술이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재빨리 열렸다. 가느다 란 떨림 같은 움직임이었다. 순간! 신충은 미간을 좁혔다. "신충!"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 와와와! 요란한 함성도 들렸다. "신충! 신충!" "죽여라!" "모두 없애라!" 함성 속에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더욱 다급했다. 누구의 목소리인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귀에 익은 자였다. '배교 놈들이 응원을…… 앗!' 신충은 다급히 고개를 들었다. 마옹의 입가에 한가닥 웃음이 번져 갔다. '환청술(幻聽術)! 내가 이따위 잡술(雜術)에…….' 마옹의 환청술은 일반 하오문(下五門)의 환청술에 비교할 바는 아 니었다. 귀에 너무도 생생했고 한둘도 아닌 수백의 목소리를 동시에 내었었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시 정신을 팔았다. 그러나 어쨌든 환청 술은 정파인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잡술이다. 신충은 잡술 따위에 잠시 정신을 뺏겼다는 자괴심(自愧心)에 입술 을 깨물었다. 하지만 마옹에게는 종종 그 잡술도 유용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약간의 시간이다. 환청술에 정신을 빼앗길 잠깐의 시간! 더 이상의 고수에게는 먹히지도 않을 수법이었지만 신 충 같은 자들을 상대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촤락! 마옹은 칼로 신충의 검을 영사(靈蛇)처럼 휘감으며 신충과의 거리 를 성큼 좁혔다. 신충은 마옹이 코앞으로 육박해 오자 크게 놀라 면 장(綿掌)을 날렸다. 마옹도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장영(掌影)을 뿌렸 다. 타닥! 탁! 퍽! 격렬한 타격음(打擊音)과 함께 신충과 마옹은 어깨를 휘청이며 각 자 서너 걸음 물러났다. 물러난 거리는 비슷했으나 보다 큰 충격을 받은 쪽은 신충인 모양이었다. 신충의 얼굴은 붉었고 눈은 튀어나올 듯했다. 마옹의 출수는 환청술에서 장영을 뿌리기까지 미리 준비된 출수였 고 환청술에 잠시 정신을 판 신충은 마옹의 출수를 받아 내는데 급급 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마옹이 비호(飛虎)처럼 몸을 날리며 신충을 향해 일도(一刀)를 그 었다. 단칼에 끝장을 볼 기세였다. 신충의 기혈(氣穴)은 제멋대로 들끓고 있었다. 머릿속도 열기로 텅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고 마옹의 칼에 반 사적으로 맞섰다. 팟! 두 줄기 검풍(劍風)이 서로를 스쳐 가며 피가 확 솟구쳤다. 승 부는 장(掌)을 주고받는 순간, 이미 끝나 있었다. 마지막 칼부림은 그 결과를 확인시켜 준 것 뿐! 신충은 가슴에서 피분수를 쏟으며 서 있었고 마옹은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문주!" 창의문의 수하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중의 몇은 신충 주위로 몰 렸고 나머지는 이를 갈며 마옹을 쫓았다. 혹독한 추위로 잘 얼지 않는 장강도 강변에는 제법 두터운 얼음이 얼어 있었다. 그 강변에는 나룻배 한 척이 얼음 사이에 꽁꽁 묶여 있 었다. 마옹은 그 배를 향해 달려갔다. 악양에서 두 명의 무당 제자를 처치하고 다시 양신에서 무당 제자 한 명을 죽이는 사이 유향경천문과 무당파의 포위망은 점점 좁혀져 가고 있었다. 장강을 서둘러 건너야 했다. 그러나 배가 없었다. 유향경천문과 무당파에 의해 포위망 안에 든 나루터는 모두 장악 당하고 배들은 수거(收去) 되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한 척의 배가 있었다. 뻔히 보이는 함정이다. 그러나 마옹은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충을 죽이고 그 배를 뺏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런 저런 것을 가릴 시간적 여유가 그 에게는 없는 모양이었다. 나룻배가 놓인 곳에 이르러 마옹은 허공으로 몸을 솟구쳤다. 그가 신형을 하강하며 천근추로 두터운 얼음을 눌렀다. 콰직! 지지직! 콰곽! 두터운 얼음이 산산이 부서지며 얼음 조각들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부서진 얼음들 사이로 핏물이 쫙 번지며 두 구의 시신이 물살에 떠올랐다. 어갑(魚甲)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얼음장 아래로 갑자기 전해진 수천 근의 압력을 견디지 못 하고 순식간에 압사(壓死) 당한 것이다. 두 명의 어갑인들을 해치우고 난 마옹은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수중인(水中人)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얼음이 끝나는 자리에서 다섯 명의 흑의인(黑衣人)이 소리 없이 물 속을 빠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물속을 기어 나오자마자 입을 쫙 벌리며 입 속에서 무엇인 가를 꺼냈다. 기름 종이에 두텁게 싸여진 것은 묵환(墨丸)이었다. 그 들이 허공으로 치솟으며 묵환을 뿌렸다. 마옹은 그 묵환이 무엇인지 아는 듯했다. 그도 흑의인들을 따라 다 급히 신형을 뽑았다. 사천(四川) 당가(唐家)의 비기(秘器), 벽력탄(霹靂彈)! 쾅! 쾅! 쾅! 쾅! 폭발음(爆發音)이 천지를 진동(震動)하며 마옹이 위험을 무릅쓰고 얻으려던 배는 한순간에 박살나 물기둥, 얼음 조각들과 함께 하늘로 치솟았다. 그 순간, 흑의인들은 소매를 뿌렸고 마옹도 허공에서 쌍장(雙掌)을 휘둘렀다. 흑의인들의 소매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역시 사천 당가의 암기 백 호정(白虎釘)이었다. 마옹은 교룡(蛟龍)처럼 꿈틀대며 백호정을 비켜 갔다. 순간, 흑의인들도 무엇인가 반짝이는 물체가 자신들을 향해 날아오 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가슴이 뜨끔하다는 것은 그 물체를 피하지 못했다는 증거! "크억!" "악!" 흑의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속으로 떨어졌다. 그들의 가슴에 꽂혀 피에 물들고 있는 물체는 얼음 조각이었다. 마 옹은 물기둥과 함께 치솟던 얼음 조각을 흑의인들에게 날린 것이다. 울분을 터뜨리며 달려들던 창의문의 수하들은 신충과 일곱 명의 수 중인(水中人)들을 단숨에 처치하는 마옹의 무위에 질려 발걸음을 멈 추었다. 도저히 싸울 맛이 나지 않는 듯했다. 마옹은 창의문의 수하들을 여전히 개의치 않았다. 그는 창의문의 수하들을 등진 채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배는 조각만 남아 암습자(暗襲者)들의 핏물에 섞여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때였다. "온다!" 신충의 시신을 붙잡고 있던 창의문의 수하 중 하나가 갑자기 고함 을 질렀다. "온다!" "온다!" 나머지 수하들도 반색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횃불을 줄줄이 앞세운 수십 명의 무사들이 강둑을 따라 좌우를 압 박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신충이 터뜨린 폭죽을 보고 달려오는 자들 이었다. 마옹은 창의문의 수하들을 등진 채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은 부서진 배의 나무 조각에 머물고 있었다. 그가 긴 나무 조각 하나를 주웠다. 그는 칼로 그 나무를 노처럼 다듬으며 강변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발걸음을 멈춘 곳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얼음판 위였다. 마옹은 칼로 얼음판을 누른 채 좌우로 달렸다. 얼음판에는 사각의 굵은 도흔(刀痕)이 그어졌다. 그는 그 도흔을 따라 가며 얼음을 깼다. 주위를 둘러싼 얼음이 부서지며 얼음판은 곧 작은 배가 되었다. 마 옹은 앞을 가로막는 얼음을 모두 깬 후, 노를 저었다. 사각형의 얼음 판이 배처럼 장강의 수심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이런!" 창의문의 수하들은 발을 굴렀다. 그들은 얼음판을 깨기 위해 쇠뇌를 날리고 철퇴(鐵槌)를 던졌으나 마옹의 칼에 막혀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마옹의 신형이 장강의 물결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갔다. "으헤헤! 으헤헤헤! 정말 엽기적(獵奇的)인 살인(殺人)이군. 얼음 조각으로 사람을 죽이다니……. 당예(唐藝)라는 놈이 펄쩍 뛰겠어. 당가(唐家)의 귀한 식솔들이 한낱 얼음 조각에 다섯이나 죽은 것을 알면 얼마나 화가 날까. 벽력탄도 무척 아깝겠지. 헤헤헤!" 강물에 뜬 흑의인들의 시신을 뒤적이던 청년이 메기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땅딸한 체구에 얼굴이 아이처럼 붉은 청년이었다. 청년의 허 리에는 유엽도(柳葉刀)와 묵편(墨鞭)이 걸려 있었다. 소면각저(笑面角猪) 팽해만(彭海滿)! 유향경천문의 사대당주(四大堂主) 중 청룡당주(靑龍堂主)를 맡고 있는 자였다. 그는 오호단혼도법(五虎斷魂刀法)으로 유명한 하북(河 北) 팽가(彭家) 출신이다. 소면각저라는 별호는 항상 웃는 얼굴에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끝을 볼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려드는 성격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그는 신충의 신호를 받고 다급히 달려온 터였다. "팽(彭) 당주(堂主), 웃고 있을 때가 아니오. 마옹이 얼음 조각을 타고 장강을 건너려 하고 있소." 창의문의 총관(總官)이라고 자신을 밝힌 자가 이마를 좁히며 말했 다. "으헤헤! 알고 있소. 알고 있어." 각저 팽해만이 총관이라는 자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었다. "명강량이 급하긴 급했던 모양이오. 장강을 얼음 한 조각으로 건너 려 하다니……. 아니면 무당 제자 몇을 죽이더니 간이 부었던가. 달 마(達磨)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지. 장강은 달마가 건너기에도 그렇 게 좁은 곳이 아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송주(誦呪)했다. "당주, 유성탄(流星彈)을 쏠까요?" 팽해만의 수하 한 명이 물었다.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자였다. 유성탄은 신호용(信號用) 폭죽이다. "아직 쏘지 않았어? 제발 각저의 수하들은 역시 돼지새끼다 라는 말을 듣지 않게 해 줘! 으헤헤! 돼지새끼 같은 놈아!" 팽해만이 메기입을 씰룩거리며 소리쳤다. 구레나룻은 팽해만의 욕에 익숙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쇠뇌에 유성탄을 걸었다. 만약을 대비 배로 마옹을 추적할 자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구레나룻이 유성탄에 불을 붙이고 쇠뇌를 당기려 할 때였다. "잉?" 팽해만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깜깜하던 장강에 귀화(鬼火) 같은 횃불이 휘휘 돌고 있었다. "이봐! 이봐! 우리 아이들 중에 누가 장강에 배를 띄운 자가 있어? " 팽해만이 유성탄을 쏘려는 수하에게 다급히 물었다. 구레나룻은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자식! 고개는 유성탄을 쏘고 나서 흔들어도 된단 말이야. 어! 어! 네놈 코앞에서 터지겠다. 빨리!" 유성탄의 심지가 제법 남았는데도 팽해만은 호들갑을 떨었다. 경망 스러움은 그의 천성(天性)인 모양이었다. 구레나룻이 쇠뇌를 당겼다. 피- 잉! 유성탄이 허공을 날며 장강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그럼 저기 횃불을 깜박인 자는 우리편이 아니라 이 말이지? 배교 놈들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창의문의 총관이라는 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이고! 아깝군! 아까워! 강 건너편에 있는 놈은 누구냐?" 팽해만이 발을 구르며 물었다. "당(唐) 당주(堂主)입니다." "뭐야? 당예가 지키고 있다고? 잘못하면 명강량의 목을 당예에게 넘기겠는데. 그래서는 안되지. 으헤헤! 그 계집 같은 놈에게 공을 빼 앗길 수 없다. 이봐! 뭐하고 있어?" 팽해만이 구레나룻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몇 번 말해야겠어? 배를 가지러 갔어야지! 배를! 아직도 꾸 물거리고 있어! 돼지새끼 같은 놈!" 그가 구레나룻을 향해 눈을 흘겼다. 구레나룻이 팽해만에게 포권을 한 후, 몇 몇의 수하와 함께 배를 가지러 다급히 달려갔다. "으헤헤! 명강량, 정말 끈질긴 놈이군. 아이고! 이 추위에 무슨 고 생이야. 놈을 잡기만 하면……." 팽해만이 눈을 게슴츠레 뜬 채 뼈마디 꺾는 소리를 냈다. "어이!" 그가 고개를 돌려 창의문의 총관이라는 자를 불렀다. 수하들을 지휘 시신을 치우던 창의문의 총관이 팽해만의 곁으로 다 가왔다. "명강량의 얼굴은 보셨소?" 팽해만이 물었다. "아까부터 명강량, 명강량 하던데 명강량이 누구요?" 총관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하! 그렇지. 그렇지. 놈은 얼굴은커녕 이름조차 세상에 알려지 기를 싫어했지. 마옹! 으헤헤! 명강량이 바로 마옹이오." "그렇군요. 마옹의 얼굴은……." 총관이 고개를 빼고 자신들의 수하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옹의 얼굴을 보았다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못 보기는 마찬가지다. "어둠이 지천이고…… 마옹이 워낙 빨라……." 총관이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 변명했다. "됐소! 됐소!" 팽해만이 손을 저었다. "으헤헤! 대무당(大武當)의 속가(俗家) 무문(武門)인 창의문의 식 솔들께서 마옹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니 의외외다."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가뜩이나 문주를 잃고 심기가 편치 않은 판에 팽해만의 조소까지 듣자 창의문의 총관은 속이 확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치솟는 울화를 꿀꺽 삼켰다. 근자에 유향경천문의 세(勢)는 구대문파도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 런 판에 창의문 정도야……. 팽해만은 총관의 마음을 긁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 "총관께서는 하시던 일이나 계속 하시지요." 그가 점잖게 말했다. 총관은 시신을 치우고 있었다. 말은 점잖았으나 팽해만의 말투는 당신은 평생 시신이나 치우고 있으라는 말과 비슷했다. 총관이 그 눈치를 못 챌 리 없다. 하지만 한 번 기가 꺾인 자는 다 른 조소를 듣는다 해도 달려들지 못하는 법이다. 그가 냉랭한 표정으 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팽해만은 장강을 바라보며 팔을 벌렸다. "육개월이나 죽자고 따라다녔는데 아직 명강량이라는 놈의 얼굴조 차 모르다니! 팽해만이여! 팽해만이여! 웃기나 좋아하는 뿔난 돼지, 팽해만이여! 누가 너를 팽가의 후손(後孫)이라 말할 것인가! 아아! 팽해만이여!" 그가 짐짓 비탄에 빠진 표정으로 소리쳤다. * * * 횃불로 신호를 보낸 곳은 나룻배 한 척을 꼬리에 달고 있는 작은 범요선(帆橈船)이었다. 범요선에는 흑의(黑衣) 중년인이 타고 있었다. "명왕출세(明王出世)! 배교일세(拜敎一世)! 명옹광휘(明翁光輝)! 적기명사(赤旗明使)가 명옹을 뵙습니다." 그가 횃불을 강물에 던지며 부복했다. 명강량은 자신이 타고 있던 얼음판을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 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궁색(窮色)함을 숨길 길이 없었다. 팍! 그가 얼음판을 발로 깨며 범요선에 뛰어들었다.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 명옹께서 부르기 전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명사의 직분을 잊었습니다." 적기명사라는 자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배교에는 다섯 명의 명사가 있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명옹의 영(令)을 각지로 이어주는 자들이 다. 따라서 그들은 명옹을 제외하고 교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 었다. 때문에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신분을 적들로부터 철저히 감추는 일이다. 각 성의 명두들에게도 영만 전할 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명옹 앞 에도 직접 찾지 않는 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적기영주라는 자는 지금 명강량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명강량은 신장도를 타고 흐르는 핏물만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呂) 명두(明頭)…… 여 명두께 서 광명계(光明界)로 입적(入寂)하셨습니다." 적기명사가 고개를 떨구었다. 신장도를 든 명강량의 손에 순간적으로 심줄이 꿈틀했다. 탁! 탁! 탁! 그가 신장도로 뱃전을 쳤다. 신장도에 묻은 핏물이 튀며 뱃전을 점 점이 붉게 물들였다. 배교대척살령(拜敎大刺殺令)이 떨어진 후, 교도들이 가장 피를 많 이 흘린 곳은 강남(江南)이다. 연일 교도들의 시신이 거리를 뒹굴었고 살아 남은 명두들도 여 명 두를 포함 네 명에 불과했다. 교도들의 한(恨)은 뼈 속까지 사무쳤고 머리에 든 생각은 복수밖에 없었다. 결국 강남의 명두들과 교도들은 그에게 적들을 향한 건곤일척(乾坤 一擲)의 승부를 요구해 왔다. 그들은 명옹이 신장도를 치켜들어 적들에 대해 복수의 명을 내리기 를 바랬다. 그러나 눈에 보지 않아도 뻔한 싸움! 천하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교의 힘은 너무도 약했다. 강남의 교도들도 그 사실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복수에 눈이 먼 교도들은 이왕 죽을 것 화끈하게 싸워 보고 죽을 것을 원했 다. 강남 교도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명강량은 그들 의 뜻대로 선뜻 호교의 칼, 신장도를 치켜들 수 없었다. 그의 어깨에 메여진 짐은 그로 하여금 항상 교를 지킬 최대한의 방 도를 묻고 있었다. 자칫 신장도를 잘못 치켜들면 선대(先代)에까지 자신의 죄를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는 적과 싸우는 일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일이 있었다. 무모한 싸움은 몇 번이라도 재고(再考)해야 했다. 명강량이 강을 건넌 것은 그 때문이었다. 살아 남은 강남의 명두들을 만나 그들의 심경을 듣고 마지막으로 여 명두를 찾았다. 호남 명두, 여양의! 교의(敎義)에 한치의 어긋남이 없고 성품이 물처럼 잔잔해 강남 교 도들의 신망(信望)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자! 명강량은 여 명두에게 해법(解法)을 찾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십여 일 전 장사(長沙)에서 그를 만났다. 교의 환란은 외부(外部)의 적들이 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싸움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 한 여 명두라고 해서 무슨 해법 (解法)이 있을까. 여 명두는 교가 처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그를 위로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약속했다. 강남의 명두들을 만난 그들의 분노를 설득하겠다는 것! 여 명두는 자신의 약속이 생각할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 했었다. 그 시간 안에 교의 활로(活路)를 찾지 못하면 강남 교도들의 분노 는 다시 폭발하고 말 것이다. 명강량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른 방도가 없었기에 시간을 버는 것으로 만족하며 강남의 일을 여 명두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누구입니까?" 명강량이 낮고 투박한 목소리로 물었다. "유향경천문! 그놈들입니다. 여 명두께서는 강남의 명두들을 만나 러 다니느라 적들에게 자신을 너무 노출시켰습니다." 적기명사가 비분(悲憤)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유향경천문…….' 명강량은 흐르는 강물에 시선을 던졌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심했다. 신장도가 칼끝을 떨며 주인의 분노를 대신할 뿐이었다. "이제 여 명두까지 돌아가셨으니 강남 교도들의 분노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 명강량은 말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다. 찰싹! 찰싹! 그 사이 범요선은 유유히 흘렀다. 긴 침묵의 끝에 명강량은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시오." 그가 잠에 깬 사람처럼 말했다. 적기명사는 긴 한숨을 쉬었다. "강 저편에도 적들이 있을 것입니다. 조심하십시오." 그가 범요선에 달린 나룻배에 몸을 실은 후, 범요선과 나룻배를 이 어주던 줄을 끊었다. 명강량은 돛을 조절했다. 그를 태운 범요선이 바람을 맞아 빠른 속 도로 강물을 질주했다. "명옹이시여! 부디 몸을 살피시어 성녀와 교를 지켜 주소서!" 적기명사가 장강의 물결 속에 사라져 가는 범요선을 바라보며 부복 했다. * * * 처음에는 몰랐었다. 그가 몸 담고 있는 곳이 강호에 그렇게 흉명(凶名)을 떨치고 있는 곳임을. 배교! 지금 그가 몸 담고 있는 곳! 사부의 정(情)에 끌려 사부를 따르는 사이 어느 틈에 그는 배교의 교도가 되어 있었다. 호교신장은 교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자다. 교도들은 호교신장을 명옹이라 부르며 떠받들고 적들은 마옹으로 이를 갈았다. 사부가 교의 호교신장임을 안 것도 훗일이었다. 본교의 흉흉한 세평(世評)을 귀에 담았을 때는 이미 그는 교도들에 게는 명옹의 제자로 적들에게는 마옹의 제자로 교에서 더욱 벗어날 수 없는 신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사부는 없다. 상처 입은 육신을 말끔히 뜯긴 채 이미 광명계로 자 리를 바꾸어 있었다. 구대문파의 집요한 공세를 피해 다니다 결국 저 들이 마모(魔母), 마녀(魔女)라 부르는 성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더욱 더 교를 떠날 수 없는 자가 되었다. 사부는 죽음과 함께 신장도와 전교영기를 넘겨줌으로써 당신이 맡 았던 짐을 고스란히 남겨 주고 떠난 것이다. 호교신장,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명옹이라는 칭호, 저들이 성 녀와 함께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자, 마옹! 이제 그 칭호들은 모두 그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그는 죽음을 일상으로 넘나들며 강호를 행각(行脚)했다. 교도들도 적들도 그의 명(命)이 그렇게 길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 을 것이다. 교도들은 그를 새롭게 바라보았고 적들은 다시 공세에 박 차를 가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갔다. 한 손에는 호교의 칼! 한 손에는 전교의 영기! 상처를 돌 볼 틈도 없었다. 그럼에도 교는 점점 어려움을 더했다. 교도들은 묻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풀어 나가야 할 일들이 태산(泰山)이었고 앞이 보이지 않기는 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그 물음에 깊이 침잠(沈潛)할 수 없었다. 마땅히 답해 줄 말도 없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부가 죽음으로써 내린 명(命)! 그 명은 교를 지키는 것 보다 앞서 지켜야 할 호교신장의 임무였다 . 그 명이 아니었다면 그는 강남 명두들의 뜻을 조금 더 쉽게 받아들 일 수 있었을 것이다. 죽는다는 것은 별 두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죽음으로도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었다. 횃불이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명강량은 강변으로 돛을 돌렸다. 그가 손끝으로 신장도를 가볍게 놀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포위망이 구축되기 전에 강변을 돌파(突破)해야 했다. 제2장 북행(北行) "으헤헤! 으헤헤헤! 당예도 별 수 없군." 팽해만이 메기입을 씰룩이며 웃었다. "당예도 명강량을 놓쳐 내 체면이 조금 서긴 섰다만……. 정말 대 단한 놈이군." 그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갈대숲은 완전 엉망이었다. 꺼멓게 거슬린 갈대숲은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었고 그 주위는 온통 피투성이였다. "창의문 놈들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데……. 여기에 왔으면 문주 한 명 죽었다고 울고 짜는 난리를 피우지는 않았을 테지." 팽해만이 갈대를 발로 헤치며 허리를 굽혔다. 그가 갈대숲 사이에서 팔 하나를 주워 들었다. 잘려진 팔은 아직도 칼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쯔쯔! 불쌍하게도…… 어이!" 팽해만이 팔을 휙 던졌다. 시신을 수습하던 수하가 그 팔을 받아 갈대 더미에 올렸다. "내가 아버지에게 듣기로 배교는 잊을만 하면 한 번씩 개세마두(蓋 世魔頭)를 낸다고 하던데…… 혹시 명강량이란 놈도 그 마성(魔性)을 이어받지 않았을까?" 팽해만이 머리를 긁적대며 중얼댔다. "마성을 이어 받았으면 이어 받은 것이고…… 나는 세상이 시끄러 울수록 좋다네!" 그가 노래를 부르듯 흥얼거리며 키가 장대 같이 큰 사내를 향해 걸 어갔다. 칠척 장신의 사내는 백호당(白虎堂) 당주인 당예의 수하였다. "당예가 뭐라고 했어?" 팽해만이 유엽도로 장신 사내의 엉덩이를 툭 치며 물었다. "당주께서는 마옹을 계속 추적하고 계십니다. 팽 당주께 서둘러 황 하(黃河)로 가 달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예, 그놈은 명강량을 신나게 쫓고 나는 놈의 퇴로(退 路)나 지키라고?" "장강에서는 당주께서 퇴로를 지켰으니 황하에서는 팽 당주께서 퇴 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으헤헤! 당예가 그렇게 말했어? 당예라는 놈은 원래 직접 싸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추적 운운하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열 받 은 모양이군." "마옹의 칼에 피해를 본 자들은 하토문(遐土門)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백호당도 상당한 피해를 보았습니다. 당주께서 대단히 화가 나 셨죠." "그래? 어쩐지 화약(火藥) 냄새가 진동 하드라니……." 팽해만이 히죽 웃었다. "현무당(玄武堂)은?" "마옹이 너무 빨리 움직여 포위망을 전혀 좁히지 못하고 있다고 합 니다. 섣불리 포위망을 좁히다 마옹이 그 쪽으로 달아날 수도 있기 때문에……." "헤헤헤! 죽을 맛이겠군. 그래도 우리는 마옹의 그림자라도 보는데 . 잘못하면 현무당은 중원을 종단(縱斷)하는 여행이나 해야 될 것 같 다. 어이! 그건 그렇고 이제 문주를 무슨 면목으로 보지. 장강을 건 너 버렸으니 놈을 잡기 위해서는 또 최소한 삼 개월은 허비해야 할 것 아냐! 전대 마옹, 이정인의 목을 베는 데도 육개 월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팽해만이 어깨를 으쓱이며 한숨을 쉬었다. "당주께서도 그 일을 걱정하셨습니다. 특히 마옹, 그놈이 황하를 건너 하북(河北), 산서(山西)의 험산준령(險山峻嶺)으로 숨어 버리면 ……." "하북은 내가 놀던 곳이니 별 걱정이 없다만…… 산서를 통해 새외 (塞外)로 달아나버리면 정말 귀찮겠어. 여기도 추운데 몽고(蒙古)의 대사막(大沙漠)이나 초지(草地)는 얼마나 춥겠어? 으…… 생각만 해 도 그것이 얼어붙는 것 같다." 팽해만이 사타구니에 손을 끼며 몸을 움츠렸다. "어이! 어이! 시신은 태워 가면서 찾으란 말이야! 내가 얼어죽어 그 위에 놓이겠다!" 그가 갈대 더미에 시신을 올리고 있는 구레나룻을 향해 소리쳤다. 구레나룻이 읍을 하며 팽해만의 명을 받았다. 그가 조각난 시신들 이 이리저리 엉킨 갈대 더미 위에 불을 짚였다. 불길이 기세 좋게 타오르며 시신을 감쌌다. 팽해만은 종종 걸음으로 불 곁으로 다가갔다. "으헤헤!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가 손을 비비며 조잘댔다. 키가 장대 같이 큰 당예의 수하도 팽해만을 따라 어쩔 수 없이 불 곁에 섰다. 지지직! 지직! 퍽! 시신은 마른 갈대 더미에서 맹렬하게 타올랐다. 당예의 수하는 매스꺼운 냄새에 속이 뒤집어 질 지경이었다. 그러 나 팽해만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불을 쬐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주께서는 마옹이 새외로 빠져나갈 것을 우려 주작당(朱雀堂)에 급히 서신을 보냈습니다." 당예의 수하가 숨도 쉬지 않고 재빨리 말했다. 팽해만은 등을 돌리며 엉덩이를 내밀었다. "언가(彦哥) 놈에게는 무슨 일로?" 그가 엉덩이를 불에 쬐며 물었다. "마옹의 도주를 막기 위해 주작당이 나서 각 파에 협조를 구하는 서신을 보내라 한 것 같습니다." "협조를 구할 파라면?" "구대문파가 아니면…… 누가…… 있겠습니까?" 당예의 수하는 역겨운 냄새 때문에 말도 잘 못했다. 그는 토악질을 참느라 연신 침을 삼켰다. "구대문파? 젠장!" 팽해만이 인상을 그리며 코끝을 훔쳤다. "헤헤! 개 같은 기분이군. 구대문파, 그 잘난 체 하는 놈들과 또 같이 다녀야 한다 이 말이지? 응?" 그가 당예의 수하에게 묻듯이 소리쳤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너희 백호당 놈들이 이곳을 잘 지켰다면 구대문파, 그놈들을 다시 안 볼 수 있었던 것 아냐!" 퍽! 팽해만이 당예의 수하를 발로 걷어찼다. 정강이가 차인 당예의 수하는 입만 딱 벌린 채 펄떡펄떡 뛰었다. "아이고! 목이야. 갑자기 목이 왜 이렇게 아프지. 그렇군. 저놈의 상판을 쳐다본다고 목이 아팠던 게야. 으헤헤! 앞으로 네 놈은 나와 이야기 할 때 무릎을 꿇고 조잘대라. 무릎을 꿇고 이야기하는 것이 싫다면 다리를 싹둑 자르고 오던가. 헤헤!" 팽해만이 목을 저으며 말했다. 키가 장대 같이 큰 당예의 수하는 찍 소리 못하고 한 편으로 물러 났다. "킁! 킁!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야. 젠장! 모두 무엇을 처먹었기에 이런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게야. 하긴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는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을 테니 마구 처먹기야 했겠지." 팽해만은 그제야 시체가 타면서 내뿜는 메케한 냄새를 맡은 모양이 었다. "어이!" 그가 자신의 수하 구레나룻을 불렀다. 구레나룻이 서릿발이 허옇게 돋은 갈대밭을 달려왔다. 그가 팽해만 앞에 머리를 숙이며 섰다. "돼지새끼 같은 자식! 이 추운 날 왜 뛰어다니고 난리야?" 팽해만이 구레나룻에게 눈을 흘겼다. "방금 부르지 않았습니까?" "부른다고 달려와? 천리전음술(千里傳音術)은 펼치지 못하더라도 네놈이 서 있던 곳까지 고함을 지를 능력은 된단 말이야!" "죄송합니다." 구레나룻이 고래를 숙였다. "뒷정리는 당예의 수하들에게 맡기고 빨리 출발을 준비하라! 한 달 음에 개봉(開封)까지 달려간다. 알겠어?" 팽해만이 괜스럽게 고함을 질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 놈들은 어떻게 할까요?" 구레나룻이 강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다 섯 명의 사내에 여자 한 명이었다. 그들의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남 자들은 모두 윗통이 벗겨진 채 오라에 칭칭 감겨 있었고 여자는 손만 묶인 채 산발(散髮)로 앉아 있었다. 묶여 있는 자들은 배교의 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장강에 치솟는 불길을 보고 교를 수호하는 신장, 명옹의 도 강(渡江)을 짐작했다. 명옹의 도강을 돕기 위해 급히 교도들을 끌어 모아 달려왔으나 그때는 이미 명옹은 포위망을 벗어난 후였다. 명옹 의 도주를 알았어도 그들은 유향경천문의 백호당과 하토문에 싸움을 걸었다. 급히 모은 교도들이라 숫자도 십 여명에 불과했고 칼질을 제대로 하는 자도 별반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백호당과 하토문에 달려든 이유는 명옹으로 하여금 한 발이라도 더 멀리 달아날 촌음(寸陰)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였다. 싸움이 벌어졌고 그 결과 명옹에게 촌음의 시간은 벌어 주었을 것 이다. 그러나 대가가 너무 컸다. 교도들은 죽거나 모두 포획 당했다. 하지만 묶여 있는 배교도들은 명옹의 도주를 조금이라도 도왔다는 사실에 자신들이 한 일을 만족해하는 듯 했다. 팽해만은 그 사실이 기분 나빴다. 머리를 굽실거리며 살려 달라고 빌어도 기분이 풀릴까 말까 한데 자신을 당당히 바라보고 있는 저 눈! 마옹을 놓친 데다 그 꼴 보기 싫은 구대문파의 제자들과 만나야 할 처지, 배교도들을 보는 순간 그의 심사는 더욱 꼬였다. "어쩌기는 단칼에…… 아! 잠깐!" 손칼로 목을 자르던 시늉을 하던 팽해만이 문득 손을 들었다. "헤헤헤! 계집도 있네." 그가 묶여 있는 여인을 보며 씩 웃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내가 본 배교의 계집들은 모두 반반하더라고. 제 계집도 마찬가지군. 배교 계집들은 주안술(駐顔術)을 배우는가?" "배교의 계집들 중에는 기루(妓樓)에서 몸을 팔다 배교에 몸을 담 은 계집들이 제법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럴 것입니다." 구레나룻이 말했다. "헤헤헤! 그래서 그렇구나." 팽해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코를 매만졌다. "당주께서 원하신다면 저 계집을……." "뭐야?" 짝! 팽해만이 구레나룻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헤헤헤! 심난(心亂)한 소리 그만해라. 문주를 만나는 순간, 마음 을 잡았다고. 나는 예전 팽가의 개망나니가 아니다. 하지만…… 하지 만…… 헤헤헤! 그 계집이 살려 달라고 말한다면…… 살려주는 방도 를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지? 헤헤헤! 여자를 죽이는 일은 정말 협사( 俠士)가 할 짓이 아냐!" 그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구레나룻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교도들을 향해 걸어갔다. 팽해만은 불가로 가 등을 돌리고 섰다. "으악!" "성녀시여! 명왕을 불러 주시어 악을 몰아내고 교도들을 지켜 주소 서! 악!" "명옹이여! 성녀를 지키고 교를…… 아악!" "으악!" 배교도들의 비명이 강가를 울렸다. 팽해만은 안색을 찌푸렸다. 비명 속에는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도 있었다. "헤헤헤! 배교 놈들을 죽이는 건 정말 재미없어! 죽여도 벌벌 떠는 놈들을 죽여야 재미있지. 으…… 춥다!" 그가 손을 비비며 등을 돌렸다. 배교도들을 단숨에 처치하고 난 구레나룻이 칼에 묻은 피를 털며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목생(張木生)!" 팽해만이 구레나룻을 불렀다. 구레나룻은 팽가에서부터 그를 따라온 가신(家臣)으로 그가 이끄는 청룡당의 수석향주(首席香主)였다. "네놈은 네놈의 목숨이 뻔히 사라짐을 알면서도 나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느냐?" 구레나룻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모르겠습니다." 그가 난색(難色)을 표하며 말했다. "헤헤헤! 모르기는…… 네놈이 나를 위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다 고 말했다면 나는 네놈의 입을 찢었을 것이다. 목숨을 내 놓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 떠날 준비나 해!" 팽해만이 구레나룻에게 말했다. "출발을 준비하라!" 구레나룻이 청룡당의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명강량이라는 놈이 부럽군." 팽해만이 코를 훌쩍이며 하늘을 우러렀다. "아! 아! 팽해만이여! 너는 이제껏 무엇을 했던가? 저 하오문의 명 강량이라는 놈도 저 대신 죽어 줄 자들이 줄을 서며 기다리고 있는데 팽가의 자랑스런 후손인 너는 대신 죽어 줄 사람 하나 없다니……. 팽해만이여! 팽해만이여! 으…… 춥다!" 그가 몸을 떨며 주절댔다. * * * "늙은 거지야! 도대체 어디를 가는 거야?" 어린 거지가 늙은 거지를 종종 걸음으로 따르며 소리쳤다. "따라 오라고 하지 않았다." 늙은 거지는 발걸음을 더 빨리 했다. "제사(祭祀)를 지낸 집이나 제당(祭堂)을 눈여겨봐 두었다면 나만 손해 아냐." "눈여겨봐 둔 곳은 없다. 그리고 눈여겨봐 둔 곳이 있다고 하더라 도 네놈처럼 혼자 먹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먹을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꼭두새벽부터 무슨 일이야? 해가 뜨려면 멀었다고." 어린 거지가 하늘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직 별들이 총총했다. "이렇게 부지런을 떨 요량이면 왜 거지가 되었어? 걸인의 낙은 떼 굴떼굴 구르다 늦게 일어나는 데 있다고 했잖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다. 지금 그 일을 처리하러 가는 길이다." "무슨 일?" "여양의라는 자의 목을 수습해 주어야겠다. 그의 목이 사람들의 조 롱거리로 구경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 여양의는 죽어서도 조롱을 받을 만큼 악랄한 자는 아니지. 그리고 여양의의 목을 수습해 주는 것은 이정인에 대한 나의 의리를 조금이라도 지키는 셈이다." "잉? 돼지 머리도 아닌 사람 머리를 구하기 위해 새벽길을 나섰다 고? 나는 이해할 수 없어. 노개가 왜 그렇게 배교를 감싸고 도는지… …. 배교도들에게 금으로 된 밥그릇이라도 얻었어?" "그 이상 신세진 일이 있지. 이정인에게……." 늙은 거지가 미간을 좁혔다. "이정인이라면 전대 마옹의 이름이지?" "그렇다. 강호의 풍파(風波)가 거세 결국 나는 이정인을 돕지 못했 다. 이정인을 도우면 개방 전체가 강호의 적으로 몰릴 판이었지. 하 지만 이유야 어쨌든 의리를 져 버린 것은 분명했기 때문에 그 일이 계속 가슴에 남는구나." 늙은 거지가 한숨을 쉬었다. "이정인은 어떤 사람이었어?" "뛰어난 학자였지. 들리는 소문으로 양명학(陽明學)에 대해서는 그 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사교의 수괴가 되었을까?" "배교도들은 자신이 배교의 교도가 된 것을 모두 운명(運命)이라 생각한다. 명왕의 뜻에 의한……." "무공은? 아! 무공은 물어 볼 필요도 없겠군. 제자를 보면 사부를 알 수 있으니……. 들었어?" "무엇을?" "어제 장강이 완전 피바다가 되었어. 마옹이 도강을 하며 강 양안( 兩岸)을 지키던 자들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거야." "명강량이라는 아이가 또 한 고비를 넘겼구나. 강을 넘기 힘들 줄 알았는데." "멋진 자지? 한 자루 철검(鐵劍)에 의지해 천하를……." 어린 거지가 입을 합 닫았다. 늙은 거지가 발걸음을 멈추고 어린 거지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 늙은 거지는 무엇인가 한 소리 하려다 그냥 발걸음을 옮겼다. 어린 거지가 목을 움츠린 채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노개, 강호인들은 왜 배교를 그렇게 싫어하지? 노개의 말 을 듣자면 배교는 나쁠 것도 없잖아. 이정인도 괜찮은 자고 여양의도 그렇고……." 어깨를 움츠린 채 걷고 있던 어린 거지가 문득 말했다. "어떤 곳의 좋고 나쁨은 개인의 좋고 나쁨과 반드시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네놈은 일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배교 는 사교, 마교로 불릴 만한 그런 일을 했다는……." "무슨 일을 했는데?" 어린 거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호인들은 먼저 그들의 이상한 풍습(風習)을 싫어한다. 중원과 는 너무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지. 식채(食菜), 풍장(風葬), 환술… … 그들의 뿌리가 대식국(大食國) 너머 저 먼곳에 있었기 때문일 것 이다. 그러나 풍습은 풍습이고 강호인들이 그들을 싫어하는 보다 큰 이유는……." 늙은 거지가 잠시 말을 끊고 안색을 찌푸렸다. "배교는 기억하기 싫을 정도의 개세마두를 출현시켰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나…… 그들은 칼로 배교천하(拜敎天下)를 꿈꾸 며 세상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들었지." "헉! 배교에 그런 무서운 자들이 있었어? 나는 배교가 그저 그런 자들이 모인 곳인 줄 알았는데." 어린 거지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저 그런 곳에서 왜 그런 자들이 나타났는지 나는 모른다. 강호 인들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모두 하나의 사실은 알고 있지. 배교에 다시 그런 자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 강호인들이 배교를 하오 문으로 취급하면서도 은근히 두려움을 가지는 이유다. 때문에 강호인 들은 배교 척결하면 칼부터 찾지." "강호인들이 배교를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군. 아! 노개, 배교 는 잊을만 하면 개세마두를 출현시킨다며? 혹시 지금이 그때가 아닌 가? 듣기로 배교는 지금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다고 하던데." 어린 거지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따름 이다." 늙은 거지가 미간을 좁혔다. 배교의 이상한 힘에 대한 은근한 두려 움은 늙은 거지도 가지고 있었다. "노개, 여양의라는 자의 목을 수습해 주는 일을 그만 둬! 갑자기 배교에 대한 정이 싹 떨어져 버렸어!" 어린 거지가 돌을 툭 차며 말했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의 이야기…… 배교가 개 세마두를 부를 힘이 있다면 벌써 불렀지 않았겠느냐? 보이는 것이 배 교도들의 시신이다. 이 소란이 언제까지 가려는지." 늙은 거지의 얼굴에 굵은 주름살이 잡혔다. "네놈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 성시(城市)가 어둠 속에 희뿌옇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새벽부터 사람 머리를 보면 하루종일 재수가 없다구! 나는 짚더미 로 돌아가 한숨 더 자야겠다." 어린 거지가 툴툴대며 등을 돌렸다. 늙은 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늙은 거지의 신형은 바람처럼 빨랐다. 그가 삽시간에 성벽(城壁)에 이른 후, 벽호공(壁虎功)으로 성벽을 넘었다. 구결(九結)은 개방의 최고 신분인 용두방주를 나타낸다. 그 아래가 팔결(八結)! 여덟 마디의 매듭은 방주가 천거(薦擧)하고 장노회의(長老會議)에 서 승인된 후개만이 맬 수 있다. 준비된 자는 있는지 몰라도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된 후개는 개방에 없었다. 따라서 개방에는 팔결을 한 자가 없다. 그러나 늙은 거지는 팔결을 하고 있었다. 후개? 그렇게 보기에는 늙은 거지는 너무 나이가 많아 보였다. 최소한 그 의 나이는 용두방주에 비해 삼사 십은 더 많을 듯했다. 칠결(七結)인 장로(長老)들 보다 한 결이 더 많고 용두방주 보다 한 결이 적은 팔결을 한 늙은 거지! 그는 후개가 아니라 바로 용두방 주의 사백(師伯), 궁신 원상(袁相)이었다. 원상은 정파의 고수를 논할 때 당연히 손가락에 꼽히는 고수다. 개 방에서 그의 정식 지위는 태상장노(太上長老)! 방주나 장로들이 그를 예우 십결(十結)을 매라 했으나 원상은 방주 위의 결을 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며 칠결을 고집했다. 하지만 작금 칠결을 매고 있는 자들은 원상과 한 배분이 낮은 제자들…… 그들은 대사백과 같은 결을 맬 수 없다며 결을 풀고 날뛰는 바람에 결국 원상은 후개만이 할 수 있는 팔결을 하게 된 것이다. 성을 넘어 시전에 발을 들인 원상은 얼굴을 찌푸렸다. 여양의와 배교도들의 수급은 온데 간데 없고 목을 매달아 놓았던 장대는 토막토막 잘려져 있었다. 어지러운 발자국과 핏자국!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음이 분명했다. 핏자국이 아직 생생한 것을 보면 싸움이 벌어진 때는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 '배교도들이 왔던 모양이군. 여양의의 목을 가져가기 위해…… 목 을 매단 자들도 여양의의 목을 찾기 위해 배교도들이 올 줄 알고 있 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한 판 싸움이 벌어졌겠지.' 원상은 전후를 짐작했다. 그가 핏자국과 발자국을 쫓았다. 핏자국은 성벽을 넘어 수풀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성을 나서자 배교도들은 추적자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 모양이었 다.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꺾여 있었고 피는 더욱 낭자했다. 원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몇 구의 시신을 발견했다. 창의문도와 경장을 한 자들의 시신이었다. '배교도들은 경장을 잘 하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군. 눈가에 사기( 邪氣)도 끼어 있고…….' 원상은 고개를 갸웃했다. '쫓아가 보면 알겠지.' 수풀을 지나 작은 언덕에 이르렀을 때 원상은 칼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으쓱한 곳에 이르자 추적자와 추적을 당하는 자들이 본격적 인 싸움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원상은 그곳을 향해 날렵하게 신형을 날렸다. 나뒹구는 시신! 질퍽한 피! 창의문의 문도들과 경장인들은 한바탕 싸움을 벌인 후, 잠시 서로 를 노려보고 있었다. "흐흐흐! 목 하나 때문에 피차 너무 많은 피를 흘리는 게 아닌가? 외당당주(外堂堂主), 나리! 이쯤에서 그만 싸움을 멈췄으면 하는데." 눈가에 굵은 도흔(刀痕)이 그려진 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에는 푸르스름한 수급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호남의 명두 , 여양의의 목이었다. "개소리 마라! 배교 놈들과 무슨 말을 한단 말이냐! 네놈들의 뼈와 살을 발라 문주의 복수를 할 것이다!" 관자놀이가 불쑥한 중년인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소리쳤다. 그는 창 의문의 외당당주를 맡고 있는 자였다. "낄낄낄! 우리가 배교라……. 우리가 배교도가 아니라면 길을 비켜 주실 건가?" 도흔이 그려진 자가 박도(朴刀)에 묻은 피를 털며 물었다. "추잡한 놈! 별 수작을 다 부리는 군! 쳐라!" 창의문의 외당당주가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굳이 싸우기를 원한다면…… 모두 죽여라!" 도흔이 그려진 자도 고함을 쳤다. 그가 여양의 수급을 한편에 툭 던진 후, 창의문의 외당당주에게 달려들었다. 챙! 챙! 챙! 창의문의 문도들과 경장인들이 다시 어울렸다. 백중지세(伯仲之勢)의 싸움이었다. 누가 이긴다고 하더라도 살아남 을 자는 많지 않을 듯했다. 원상은 멀찍이 서서 그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배교도들이 아니다. 저놈이 배교의 교도라면 여양의의 수급 을 저렇게 함부로 다룰 리 없지. 가만있자. 저놈들이 사용하는 도법( 刀法)이…….' 그가 안광을 빛내며 얼굴에 도흔이 새겨진 자의 도법을 유심히 살 폈다. '흑룡방(黑龍幇)의 무공인 듯 한데 흑룡방 놈들이 여양의의 수급은 왜?' 그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룡방은 장강을 무대로 활약하는 흑도(黑道) 제일(第一)의 방파다 . 같은 사파로 분류되기는 하나 배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곳! '알 수 없다. 저놈에게 직접 물어 볼 수밖에…….' 원상은 주위에 굴러다니는 돌 몇 개를 주었다. 그가 한바탕 뒤엉켜 싸우고 있는 자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아악!" "악!" 경장인들은 물론 창의문의 수하들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원상이 던진 돌이 어깨, 다리, 머리 가릴 것 없이 그들의 전신을 정확히 격 중시키고 있었다. "뭐야?" 창의문의 외당당주가 놀라 고함을 질렀다. 도흔이 새겨진 자도 급히 칼을 거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순간, 그는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를 들었다. "헛!" 그가 반사적으로 휘청 몸을 눕혔다. 돌이 간발의 차이로 그의 머리칼을 스치며 지나갔다. "누구냐?" 도흔이 새겨진 자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제법이군.' 원상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며 연이어 세 개의 돌을 던졌다. 도흔이 새겨진 자가 다시 철판교(鐵板橋)를 발휘 원상의 돌을 피하 려 했다. 두 개는 피하고 마지막 한 개를 피하려 할 때 작자는 눈앞 이 깜깜해 지는 기분이었다. 철컹! 그가 박도를 떨구며 땅바닥을 굴렀다. "컴!" 원상은 목청을 가다듬었다. "감히 본 귀왕(鬼王)의 잠을 깨우는 놈들이 있었다니……. 여기는 본 귀왕의 영역(領域)이다. 썩 꺼져라! 우물거리는 놈들은 본 왕과 동행(同行) 귀부(鬼府)를 구경하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흐흐흐!" 그가 목소리를 변조(變造)해서 소리쳤다. 지옥(地獄)에서 들리는 듯한 낮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원상은 더해서 몇 개의 돌을 날렸다. 콰쾅! 쾅! 콰르르……! 아름드리 나무가 벼락을 맞은 듯 쓰러졌다. 창의문도들과 경장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기담(奇談)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범인(凡人)들 보다 강호인들이 더했다. 기인(奇人)과 괴사(怪事)를 접할 일이 범인들 보다 더 많았 기 때문이다. "흐흐흐! 본 귀왕의 인내(忍耐)를 더 시험하지 마라!" 원상이 한 소리 더 내지르자 창의문의 외당당주는 물론 그 수하들 과 경장인들도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달아났다. 귀왕이 아니더라도 싸워서 이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돌에 맞아 울상을 짓던 자들도 팔, 다리를 만지던 후닥닥 그 뒤를 따랐다. 싸움이 벌어지던 언덕에는 삽시간에 침묵이 흐르고 살아서 남은 자 는 얼굴에 도흔이 새겨진 자 뿐이었다. 그는 어떻게 하던 달아나려 했으나 이미 마혈(麻穴)이 찍혀 꼼짝할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 '아이고! 이젠 죽었구나.' 작자는 절망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원상은 여양의의 수급과 나머지 배교도들의 수급을 걸랑에 담은 후 , 작자의 곁에 섰다. "눈을 뜨지 마라.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하라. 그렇게 하지 않는다 면……." "악!" 도흔이 새겨진 자는 정강이뼈가 부서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네놈은 모태명(毛太明)의 수족이겠지?" 모태명은 흑룡방의 방주다. "마…… 맞습니다." 얼굴에 도흔이 새겨진 자가 이마에 식을 땀을 흘리며 말했다. "여양의의 수급을 필요로 한 이유가 무엇이냐?" "그것은 모…… 모릅니다. 방주께서 시킨 일이라…… 저는 저…… 정말 모릅니다. 살려주십시오!" 작자가 울상을 지었다. '하긴 모태명이 수하에게 자초지종을 떠벌리며 일을 시켰을 리는 없겠지.' 원상이 노안을 찌푸렸다. '모태명의 음흉함은 강호에 정평이 나 있다. 그가 이유 없이 여양 의의 목을 원했을 리는 없고…… 왠지 기분이 좋지 않구나.' 그의 표정은 찹찹했다. 그는 어떤 이유든 배교의 일에 흑룡방이 불 거진 자체가 기분 나빴다. 배교를 둘러싼 강호의 풍파가 줄어들기 보 다 점점 확대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후개나 키우며 말년을 보내려 했더니…… 그 동안 강호의 일에 너 무 무관심했다. 방주를 찾아 작금의 사태에 대해 좀더 자세한 이야기 를 들어보아야겠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유향경천문이 어떤 곳인지도 궁금하고……." 원상은 여양의와 배교도의 수급이 담긴 걸랑을 어깨에 맸다. 그가 냉랭한 한파(寒波) 속을 걸어갔다. * * * 하토문의 부문주(副門主), 성곤(成昆)은 허도(許都)의 외곽에서 우 연히 한 청년을 마주쳤다. 핏자국과 칼자국으로 엉망이 된 청의, 금색으로 빛나는 언월도 모 양의 칼을 허리에 찬 청년이었다. '마옹!' 성곤의 추측은 직감(直感)에 가까웠다. 순간, 성곤은 황금빛 빛무리가 자신을 향해 쏜살 같이 날아오는 것 을 보았다. 언월도 모양의 칼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었다. 성곤은 쾌도(快刀)로 그 빛에 대항했다. 손에 가벼운 감촉이 왔다. 상대의 살을 갈랐을 때 느껴지는 감촉! 성곤은 이겼다고 생각하며 그 감촉을 즐겼다. 하지만 그 감촉은 이내 가슴에서 이는 화끈한 통증에 덮여 버렸다. 성곤은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피가 장포를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전신에 맥이 풀리며 다리에도 힘이 빠졌다. "으악!" "악!" 아득해져 가는 의식 속에 수하들의 비명이 들렸다. '맞았어. 마옹…….' 갑자기 암천(暗天)이 찾아왔다. 때를 같이하여 그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명강량은 손등으로 질퍽하게 흐르는 피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하토문의 부문주를 상대하다 입은 상처였다. 하토문의 부문주는 상 대하기에 그렇게 어려운 자는 아니었다. 성시가 너무도 가까워 주위 의 이목이 걱정되었다. 때문에 서둘러 처치하려다 보니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하필이면 정면으로 마주치다니…….' 운이 나쁜 자들은 이미 그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하토문의 수하들뿐 만이 아니었다. 그도 그들을 만난 것을 자신의 운이 나빴던 탓으로 돌렸다. 하토문의 수하들만 아니었다면 그는 하남(河南)에서 어느 정도 자 신의 종적을 숨길 수 있었다. 장강에서 이곳까지 잠도 자지 않고 초 인적(超人的)인 힘으로 달려왔기 때문이다. 허도에 들린 것은 황기명사(黃旗明使)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어쩔 수 없구나.' 명강량은 황기명사를 통해 하남의 명두를 만나려던 생각을 포기했 다. 하남의 명두는 만나기는 만나야 할 자였다. 사부는 죽기 전에 말했었다. 어려운 일에 처하면 세 명의 명두에게 조언(助言)을 구하라고……. 교가 내부 문제로 흔들릴 때는 호남의 여 명두를 찾으라 했다. 여 명두는 성격이 부드러워 교도들의 내홍(內訌)을 잘 수습해 줄 적임자 라고 말했다. 교가 교의(敎義)를 잃고 우왕좌왕 흔들릴 때는 산서(山西)의 주(朱 ) 명두(明頭)를 찾으라 했다. 산서의 주 명두는 어떤 상황에서도 교 의를 고집하는 고집통이라는 것이 사부의 평이었다. 마지막으로 사부가 조언을 구하라 한 사람이 하남의 양(陽) 명두( 明頭)……. 세상은 교의만을 고집하며 살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교의 활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실에 손을 내밀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만나라 고 한 자가 바로 양 명두다. 양 명두는 현실에 대한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자였다. 명강량이 계획을 잡고 각 성을 순회(巡廻)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사부로부터 호교신장의 자리를 넘겨받은 후, 쫓겨다니는 데 바빠 각 성을 둘러볼 생각도 못했었다. 강남이 웅성거리고 교가 점점 어려움에 처하자 결국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순회를 결심했다. 당연히 그의 첫 순행지(巡行地)는 강남의 각 성이었고 여 명두였다 . 그리고 내친 김에 산서의 주 명두와 하남의 양 명두도 만날 생각을 했다. 교도들은 어떤 형태로 든 호교신장이 결단을 내려주기를 원했고 명 강량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강남 순회 길에 여 명두, 주 명두, 양 명두도 만나 교의 진로 (進路)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하남에 발을 들였으니 당연히 양 명두를 만나야 했다. 하지만 그는 황하를 건너 바로 산서로 들어가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하토문에 의해 종적이 드러났고 적들의 추적도 거셌다. 양 명두를 만나는 사이 포위망은 구축될 것이고 그 포위망을 뚫기 위해서는 다 시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해야 할 것이다. 일부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하남을 그 냥 지나칠 생각도 하고 있었던 터였다. 산서는 원래 그의 순행지의 최종 목적지였고 출발지이기도 했다. 그곳에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성녀…….' 사부가 죽음으로써 지켰고 그도 죽음으로써 지켜야 할 여자! 순회 때문에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다. 하루하루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그는 산서로 바로 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하남의 양 명두는 다른 명두들과 달리 발 넓게 움직일 수 있는 자 다.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것도 가능했다. 명강량은 비문(秘文)을 적었다. 황기명사에게 보내는 비문이었다. 황기명사는 그 비문을 다시 청기명사(靑旗明使)에게 보낼 것이다. 비문은 청기명사에게 전하는 그의 명이 적혀 있었다. 명강량은 황기명사에게 그 비문을 남기기 위해 재빨리 성중(城中) 으로 들어갔다. 그는 손등을 타고 핏물이 쉬지 않고 흐르고 있음도 잊고 있었다. 빨리 황하를 건너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녀를 곁에 두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 * * '쾌풍(快風)'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유선(遊船) 한 척이 쏜살 같이 동정호(洞定湖)를 나아갔다. 돛을 조절하는 자들은 뱃길에 이골이 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장강의 물길을 종횡(縱橫)하는 흑룡방의 수하들이었다. 흑 룡방의 수하들은 강풍(强風) 속에서도 배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유선은 군산(君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군산이 지척에 보이는 곳에 이르자 두 척의 배가 다가왔다. 역시 흑룡방의 배였다. 오색(五色) 깃발로 치장한 두 척의 배는 용두(龍頭)를 틀며 유선을 호위하는 형국으로 섰다. 둥! 둥! 둥! 둥! 그들이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유선을 환호(歡呼)했다. 유선에는 흑룡방의 귀빈(貴賓)이 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두 척의 배와 합류한 유선은 갈대숲을 지나 군산의 움푹한 호변에 뱃머리를 들였다. 아름드리 나무로 촘촘히 세운 목책(木柵), 펄럭이는 깃발, 날렵함 을 자랑하는 수십 척의 배……. 유선이 돛을 내린 곳은 사파 제일방이라 불리는 흑룡방의 본채(本 寨)였다. 유선에서 부교(浮橋)가 내려지자 한 무리의 무사들이 유선 주위로 모여들며 시립했다. 부교를 밟고 먼저 발을 디딘 자들은 박도(朴刀)를 찬 십 여명의 흑 의인들이었다. 그들이 흑룡방의 무사들을 마주보며 도열했다. 곧이어 유선에서 사인교(四人轎)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인교를 맨 자들의 행색은 쌍둥이처럼 유사했다. 칠척 거한에 검 푸른 피부, 허리에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짤막한 칼과 주머니가 달 려 있었다. 그들은 찬 겨울 바람 속에서도 윗통을 벗고 있었다. 그들이 맨 사인교 위에는 왜소한 중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가슴이 드러나는 옷에 머리칼과 수염을 찾을 길 없는 맨드라한 얼굴, 중늙은 이는 사인교에 몸을 파묻은 채 주위의 소란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 았다. 둥! 둥! 둥! 사인교가 나타나자 다시 북과 피리 소리가 흑룡방을 진동했다. 사 인교에 탄 중늙은이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번거로운 짓거리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상(尙) 회주(會主)! 삼 년만에 뵙습니다." 사인교를 기다리고 있던 흑룡방 무사들 중 금포를 걸친 자가 중늙 은이를 맞았다. 사인교에 탄 중늙은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방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금포를 걸친 자가 수하들로 하여금 길을 열게 했다. 북과 피리 소리, 함성에 묻혀 사인교가 움직였다. "핫하하! 어서 오시오. 상 회주!" 금사(金絲), 은사(銀絲)로 수놓은 화려한 대전(大殿), 그 대전에 어울릴 만한 화려한 복장의 중년인이 짜랑하게 소리쳤다. 오십 대 초반 정도의 나이에 딱 벌어진 어깨, 넉살좋은 얼굴로 중 늙은이를 맞는 자는 흑룡방의 방주, 흡룡곤(吸龍鯤) 모태명(毛太明) 이었다. 강호인들에게 칼은 무엇인가? 대다수 강호인들에게 있어 칼은 바로 호구(糊口)다. 그런 면에서 모태명은 칼의 용도를 가장 잘 아는 자 였다. 흑룡방의 전신(前身)은 장강십팔수채(長江十八水寨)다. 갈대밭의 수적(水賊)들에 불과하던 장강 열여덟 수채들을 일약 물 위의 상단(商團)으로 변모시킨 인물, 모태명! 하지만 겉만 그럴 뿐 암중(暗中)에서는 여전히 칼을 앞세운 채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 불 가리지 않는 자가 바로 그였다. "오랜만이오." 왜소한 체구의 중늙은이는 고개도 까딱하지 않은 채 입으로만 인사 를 했다. 모태명은 중늙은이의 냉랭한 태도를 개의치 않았다. "먼길을 오라 가라 해서 미안하오. 자! 앉으시지요." 그가 자리를 권했다. 대전에는 이미 술판이 쫙 차려져 있었다. 중늙은이가 모태명을 마주보며 앉았다. "삼 년만에 보는 것인가요? 상 회주께서는 세월을 거슬러 사는 분 같소. 삼 년 전 보다 기력이 더 출중해 보이니……." 모태명이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가 연신 웃음을 흘리며 반가움을 표하는 데도 중늙은이의 안색은 여전히 냉막했다. '쯔쯔…… 울화질 놈의 얼굴은 여전하군.' 모태명은 내심 고소(苦笑)를 흘렸다. "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 기념으로 내가 먼저 석 잔의 술을 마시 겠소!" 그가 내심(內心)과는 달리 환하게 웃으며 석 잔의 술을 연이어 들 이켰다. 중늙은이는 냉기만 흘리며 여전히 꼼짝 않았다. "백인회(白刃會)는 요즘 어떻소? 날로 번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소만……." 모태명이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백인회는 성시(城市)와 거상(巨商)의 배후에 숨어 어둠을 횡행 하 는 자들이다. 회원(會員)이 스스로를 회의 노예(奴隸)라 칭할 정도의 엄격한 규율(規律), 적들에 대한 가차없는 피의 보복, 회에 손해가 가는 일이라면 관부인은 물론 동료까지 죽여 없애는 잔혹성……. 흑룡방이 물길 위의 흑사회(黑社會)라면 백인회는 육상(陸上)의 흑 사회다. 두 곳 모두 강호인들이 듣기만 해도 치를 떠는 곳! 모태명을 마주 대하고 있는 왜소한 체구의 중늙은이가 바로 그 백 인회의 회주였다. 왜수(矮　), 상유(尙裕)! 원래 상유는 밀염(密鹽)을 업으로 삼는 염노(鹽奴)들의 총수(總帥) 였다. 그가 밀염을 바탕으로 흑사회에 점차 세력을 넓혀 가자 당시 흑사회의 맹주(盟主)라 할 수 있는 흑사련(黑社聯)의 련주(聯主), 북 명왕(北溟王)이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러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북명왕의 무참한 패배! 상유는 그의 절기 백골박조(白骨剝爪)로 북명왕의 시신을 난도질 한 후, 독염(毒鹽)에 절여 다시 관(棺)에 넣고 천하의 밤거리를 끌고 다니게 함으로써 자신의 이름을 과시했다. 독염에 저려진 북명왕의 시신이 돈 밤거리의 주인이 상유로 바뀌었음은 물론이다. 상유는 그렇게 백인회를 세웠고 첫 출도가 화려하고 잔인했던 만큼 강호에 감히 그의 비위를 거슬리는 자는 없었다. 가장 유서 깊은 흑도의 전통을 이었다는 흑룡방의 방주, 모태명도 이미 상유의 잔인성은 볼만큼 봤음으로 되도록 시비를 피하는 처지였 다. "동정호의 바람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들지 않군. 무슨 일로 부 른 게요?" 상유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쯔쯔…… 여전히 성미가 괄괄 하십니다. 술도 아직 한 잔 들지 않 았는데." "술은 우리 백인회에도 많이 있소!" 상유가 차갑게 소리쳤다. 그의 냉랭한 성품은 나이가 들수록 더 빛 을 발하고 있었다. "아! 그렇군요. 내가 잠시 잊었소. 백인회에 단혼주(斷魂酒) 같은 좋은 술이 있다는 것을……." 모태명이 이마를 쳤다. 백인회의 단혼주는 회의 배신자들에게 내리는 벌주(罰酒)로 마시면 칠공(七孔)에서 피를 흘리며 하루 동안 단장(斷腸)의 고통 속에 시 달리다 죽게 만드는 술이었다. "언제 한 번 오시오. 단혼주 중에서도 특별한 것을 맛 보여 드리리 다." 상유가 한 줌의 독염을 탁자에 주르르 쏟으며 말했다. 모태명은 독염을 보자 괜히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를 끌고 싶지도 않았다. "근자의 소란에 대해 상 회주께서는 알고 계시오?" 그가 정색을 하며 본론(本論)을 꺼냈다. "근자의 소란이라 함은?" "배교!" "배교?" 상유가 이마를 좁혔다. "배교의 젊은 영웅께서 용맹무쌍(勇猛無雙) 단신으로 장강을 건넜 다고 하오. 무당파의 세 제자도 해치웠고 창의문주…… 근자에는 허 도에서 하토문의 수하들을 상대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허, 그것!" 모태명이 짐짓 경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배교의 애송이가 천하를 상대로 싸우든 말든 그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오? 설마 한가하게 그 이야기나 하자고 나를 부른 것은 아니겠 지?" "그 일 때문에 불렀소." "……." 상유가 모태명을 음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모태명은 여전히 넉살 좋은 얼굴이었다. "배교의 일은 배교의 일! 백인회의 일은 백인회의 일! 흑룡방의 일 은 흑룡방의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소. 내가 보기에 지금 처한 배교의 어려움은 남의 문제가 아닌 듯 하오. 내가 상 회주를 부른 것은 그 문제에 대해 의논을 구하고자 함이오." 그가 술잔을 들었다. "내가 길게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으셨소?" "좋소. 길게 말하지 않으리다. 내가 의혹을 가지는 곳은 유향경천 문이라는 곳이오." "유향경천문?" 상유가 눈살을 찌푸렸다. 근자에 가장 자주 듣게 되는 이름이 있다 면 바로 배교와 유향경천문일 것이다. "도대체 나는 알 수 없소.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 지……." 모태명이 잔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상유의 안색이 점점 흐려졌다. 그가 가장 싫어 하는 자들은 말을 느물거리는 자들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지금 그가 만나고 있는 모태 명은 말을 느물거리며 빙빙 돌리는 것을 재미로 아는 자였다. 마음 같아서는 저 나불거리는 혀를 독염에 저려 바짝 구워 먹고 싶은 심정 …… 모태명은 흑도인들이 흑도인을 더 싫어함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 년여쯤 강서(江西) 여산(廬山) 기슭에 홀연히 뿌리를 내렸지. 그들이 가고 있는 곳은 보고 있는 바와 같소. 배교 척결…… ." 상유가 울화를 꿀꺽 삼키며 말했다. "어느 날, 어느 순간, 사대세가(四大勢家)의 네 기린(麒麟)들이 한 자리에 모였소. 유향경천문이라는 이름 아래…… 그것도 남의 수하 가 되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소?" "필요에 의해서라면 적들과도 손을 잡는 곳이 강호! 그들이라고 못 모일 이유가 없지!" 상유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대세가는 구대문파 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자들인데 이상한 일 아니오?" "사대세가 전부가 유향경천문의 수족이 된 것은 아니오. 사대세가 의 몇몇 애송이들이 식솔로 있을 뿐!" "상 회주께서 사대세가의 전통에 대해 그렇게 무지할 줄 몰랐소. 이제껏 당가의 후손이, 팽가의 후손이, 다른 문파에 기식(寄食)했다 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소?" 모태명이 태사의에 등을 기대며 몸을 건들거렸다. 상유는 입을 닫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방주의 말을 들으니…… 유향경천문의 문주라는 자는 대단한 자임 에 틀림없을 것 같군. 사대세가의 식솔들을 수하로 두다니……." 그는 결국 모태명의 말을 시인했다. 쓸데 없는 고집으로 이야기를 끌어 나갈 일은 분명 아닌 듯했다. "동감이오. 대단한 자일 것이오. 배교 타파를 외치고 그 일에 구대 문파를 비롯한 정파 무림의 협조를 받고 있소. 그것을 보면 사파인은 아니겠지. 그런데도 문주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니……. 정파를 자처하는 무리들 중 문주가 암약하는 문파를 본 적이 있소?" 모태명이 유향경천문에 대한 의혹을 불렸다. 상유가 팔짱을 꼈다. 눈빛만 흉흉히 빛내고 있는 양이 모태명의 이 야기에 점점 빨려들고 있음이 분명한 모양이었다. "사대세가의 자제들을 불러모으고 구대문파의 조력(助力)을 당당히 얻어내고…… 신생(新生) 문파 치고는 위세가 너무 당당하오. 무엇 인가 있소. 유향경천문의 배후에……." 모태명도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 정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을 것이오. 방주께서는 그 배후를 누구라 생각하시오?" 상유가 단도직입 적으로 물었다. "전혀…… 수소문은 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소. 하지만 한 가 지는 분명한 것 같지 않소? 유향경천문은 결코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 모태명이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상유를 쳐다보았다. 상유는 탁자 위의 독염을 매만지며 전후를 따지기에 분주했다. "구대문파는 사실 우리에게 편한 존재였소. 그들은 고고한 척 하느 라 우리를 아예 진흙밭이라 생각하고 상대도 하지 않으려 했으니…… . 하지만 유향경천문은 다를 것이오. 그들의 행적을 보건대 언제든지 우리를 넘볼 생각을 할 것이오." "조금 걱정은 되는군. 유향경천문, 너무 커고 있어." 상유가 비로소 자신의 내심을 드러냈다. 유향경천문에 위기감은 전 혀 느끼지 못 하고 있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하하! 다행이오. 상 회주와 이야기가 잘 통해서……." "무엇이 다행이란 말이오?" "방금 말하지 않았소? 유향경천문! 너무 위험한 자들이오. 그들을 약화시키거나 더 커기 전에 제거해야 하오." 모태명이 안광을 번뜩였다. 그가 탁자를 쥐었다. 탁자가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날렸다. "생각은 좋소.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원래 발등에 떨어진 불이 아 니면 잘 움직이지 않소. 유향경천문이 어떤 놈들인가는 계속 알아 볼 수는 있지." 상유가 한 발 뺐다. 손익(損益)에 대해서는 철저히 따지는 자들이 흑도인들! 원래 이런 일은 언제나 조급한 자가 손해를 보게 되는 법 이다. "나도 앞서 싸울 생각은 없소. 다행히 지금 배교가 유향경천문과 싸워 주고 있으니……. 배교를 도울 생각은 해 보지 않으셨소?" "도울 생각도 않았지만 배교 놈들이 도움을 받으려 하기는 하겠소? 우습게도 그놈들은 세상 모두가 사교라 하는데 자신들은 사교가 아 닌 줄 알고 있거든……. 이정인도 끝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 소." "이제 배교는 몰릴 만큼 몰렸소. 마음이 달라졌겠지. 대혈전을 주 장하는 자들도 있다고 하오." "쯔쯔…… 이제야 그런 목소리를 내다니. 이정인이 살았을 때 그 같은 결심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때는 유향경천문의 세가 저렇게 커지도 않았는데." 상유가 긴 주름살을 그리며 아쉬움에 혀를 찼다. "어쨌든 배교가 힘을 내서 우리 대신 싸워준다면 그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다행히 배교의 젊은 영웅께서 기대 이상으로 잘 싸워 주니……. 한 팔의 힘만 거든다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을 것 이오. 일단 그를 한 번 만나 볼 생각입니다." "방주가 배교의 애송이와 안면이 있었다니?" 상유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없소! 하지만 만날 방법은 있소. 배교도 사람이 모인 곳인데 어찌 한 명의 친구가 없겠소. 그를 통해 배교의 젊은 영웅을 만나 볼 것 이오. 이왕 좋은 일로 만나자는 것! 선물도 좀 준비하려 했는데……. 여양의의 목으로…… 하지만 아쉽게도 여양의의 목을 다른 자에게 뺏겨 버렸소." "어느 놈이?" "목을 뺏긴 놈의 말로는 귀왕이 그랬다고 하더군요. 너무 어이가 없어 그놈을 아예 귀왕에게 보내 버렸소." "정파 놈이라면 굳이 귀왕으로 행세하며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을 텐데……. 배교도라면 더욱 자신의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고…… 알 수 없는 일이군." "여양의의 목이 필요한 자가 있었겠지요. 그 일은 그 일이고…… 나는 일단 배교의 젊은 영웅을 도울 생각이오. 그래도 힘들다면 옛 벗을 불러 들여야지!" 탁! 모태명이 탁자를 치며 기세 좋게 소리쳤다. "옛 벗?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노조(老祖)!" "철심흑사(鐵心黑邪)! 그 늙은이를……." 상유의 맨드라한 얼굴에 주름살이 그어졌다. "그렇소! 철심흑사를 부를 생각이오." "유향경천문이 그렇게 두렵소? 그 늙은이를 끌어들일 생각까지 하 다니……. 그 늙은이는 욕심이 많은 자요. 당연히 우리를 수하로 만 들려 들겠지. 유향경천문이라는 여우를 쫓아내려다 자칫하면 호랑이 를 끌어들이는 꼴이 될 것이오. 나는 아직 용의 꼬리 보다 뱀의 머리 가 좋소!" 상유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정파인들은 사파의 다섯 거두(巨頭)를 가리켜 오흉(五兇)이라 부른 다. 철심흑사 곽부(郭扶), 마옹 이정인, 무외도(無畏刀) 심여덕(心餘德 ), 흡룡곤 모태명, 왜수 상유! 그중 가장 흉명을 떨친 자가 철심흑사 곽부다. 한때 사파인들이 노 조(老祖)로 부르며 흑도의 조종(祖宗)으로 떠받들던 자! 같은 오흉에 들어 있기는 하나 곽부의 명성에 비하면 모태명이나 상유는 어린아 이에 불과했다. 곽부의 명성에 버금가는 자가 있다면 배교의 호교신 장, 이정인이나 정사 양도간에 있던 적염날수, 소림(少林)의 무태상 인(無台上人), 무당의 자허진인(慈虛眞人), 개방의 궁신 정도……. 곽부는 정파인들도 두려워 하는 개세의 무공을 지닌 자다. 그는 그 힘으로 강호 제패를 노리다 결국 정파인들의 공적(公敵)으로 찍혀 새외로 도주했었다. 벌써 십 여년 전의 이야기! 하지만 그가 언젠가는 중원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 었다. "철심흑사 곽부! 정파 놈들보다 더 신중을 기해야 할 자지. 나도 용의 꼬리 보다 뱀의 머리가 좋소. 목숨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 한 그 를 불러들일 이유가 없지. 하지만 이야기하지 않았소. 유향경천문! 너무 위험한 곳이오. 상 회주께서는 아직도 목숨의 위험을 느끼지 못 하고 있는 모양이군요." 모태명의 말투에는 다분히 조롱기가 섞여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했 는데도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느냐는 투였다. "음……." 상유는 생각에 잠겼다. 모태명의 조롱기 섞인 말투에 시비를 걸 여 유도 없었다. 모태명은 유향경천문에 대해 자신 보다 더 깊게 알아보 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저렇게 노심초사(勞心焦思)할 정도면 사태가 자신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는 뜻! 상유는 모태명의 태도에서 유향경천문에 대한 위기감을 재삼 느꼈 다. 맞는 말이다. 배교 다음의 희생양(犧牲羊)이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 유향경천문에 모인 자들이나 그들의 행보를 볼 때 그것은 어쩌 면 필연적 수순일 수 있을 것이다. 사대세가는 그 자체로 원래 강호 의 패권(覇權)에 관심이 많은 자들이었다. 단지 사대 가문이 각자의 생각으로 분산되어 있어 그 뜻을 이루지 못했을 뿐! "상 회주의 말대로 유향경천문에 대해 더 알아는 볼 것이오. 하지 만……. 상 회주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금 우리의 힘이 유향경천문 보다 강한 것 같소?" 모태명이 말을 돌렸다. "직접 싸워보지 않고는 아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지!" 어려운 상대임을 알고 있으나 진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나는 배교와 우리가 힘을 합쳐 들이칠 때만 유향경천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오. 그것도 한 번에…… 구대문파와 사대세가가 구원 의 손길을 뻗칠 여유를 줄 틈도 없이 말이오." "그래서 배교와 손을 잡고 여산으로 몰려가자는 말이오?" "나는 배교에 도움을 주자는 말만 했을 뿐이오. 사실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도 아닌데 전력(全力)을 다해 도와주기는 너무 억울하지 않 소? 자칫하면 타초경사(打草驚蛇)의 우도 범할 수 있고…… 나는 배 교가 죽든지 말든지는 별 상관없소. 단지 그들이 유향경천문을 물고 늘어져 유향경천문의 힘을 빼기만 바랄 뿐! 우리에게 싸움을 걸지 못 할 정도만……." 모태명이 술잔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상회주, 이것을 염두에 두시오. 만약 배교의 애송이가 죽고 유향 경천문의 세가 커진다면 살기 위해 철심흑사의 종을 자처하는 상황도 올 수 있을 것이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배교의 애송이는 어쨌든 도와야 하오. 내 말에 동감하지 않소? 하하하!" 팍! 그가 손가락으로 술잔을 깨뜨리며 웃었다. 상유는 생각에 잠겼다. 모태명의 말을 부정할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배교의 애송이를 만난다고 하니……. 그 후에 다시 한 번 자리를 만들어 봅시다." 그가 깊게 주름살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제3장 화우(花雨) 진금구(陳金龜)는 우울했다. 사방이 산으로 막힌 이곳 월평(月平)의 한적함이 우울했고 다리를 간신히 뻗을 수 있는 좁은 방이 우울했다. 하루 내내 산을 뒤졌건만 그럴듯한 약초(藥草) 뿌리 하나 발견하지 못한 것이 우울했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친구 때문에 우울했다. 걸핏하면 천공(天空)을 휘날리 는 눈발 또한 그의 우울을 배로 늘였다. 진금구는 우울함을 떨구기 위해 방바닥을 이리저리 굴렀다. 그러나 우울함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쉽게 떨칠 수 없는 우울함이었다. 사실 친구가 갑자기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일들은 별반 우울 증을 느낄 일도 아니었다. 진금구에게는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울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우울증의 뿌리가 있었다. 배교! 교를 생각하면 진금구는 모든 일이 우울했다. 진금구에게 있어 교는 어머니와 같았다. 교는 그를 키워주었고 그 에게 놀 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며 지치고 피곤할 때 쉽게 기댈 수 있 는 곳이기도 했다. 그도 교에 대한 흉흉한 세평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남들이 천하다고 말한다고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닌가! 오히려 주위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천대 받기 때문에 그는 그의 어 머니인 교를 더욱 아꼈다. 아직까지 교를 떠나지 않은 교도들의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교의 어려움에 대해 안타깝기만 할뿐 정작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적었다. 그래서 우울했다. 진금구는 쌓여 가는 우울함을 견딜 수 없어 방바닥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가 갓 캐어 온 칡을 한 입 가득 물었다. 그가 자신의 우울함을 칡을 질겅질겅 씹는 것으로 달래고 있을 때 였다. 쾅! 갑자기 문이 열리면 팔척 장신의 사내가 불쑥 방문 앞에 모습 을 드러냈다.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칡 씹던 것을 멈추며 진금구는 거한(巨漢)에게 눈을 흘겼다. "헤헤헤! 벌써 왔어." 덩치가 집채만한 청년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방문으로 들어섰다. 거한의 얼굴은 그가 입은 흑의 만큼이나 검었다. 눈도 퉁명스럽게 튀어나와 마치 곤륜노(崑崙奴:흑인)를 연상시켰다. 칠 척 거한에 검 은 얼굴, 군중(群衆) 속에 섞여 쉽게 잊혀질 만한 얼굴은 못 되었다. 사실 그랬다. 산서에 뿌리내리고 활동하는 웬만한 강호의 인물이면 칠척 거한의 얼굴은 모르지 않았다. 흑면호(黑面虎) 전우삼(全又三)! 배교 산서 향당(鄕黨)에 적(籍)을 둔 자였다. 진금구도 역시 배교 산서 향당의 교도다. "이곳 월평은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된다구. 헤헤……." 전우삼이 방바닥에 털썩 앉으며 중얼댔다. 그는 연신 진금구의 눈 치를 살피고 있었다. "어디 갔다 왔느냐고?" 진금구가 고함을 질렀다. "그저 그런 곳이야. 아이고! 다리야." 전우삼이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그가 다리를 뻗었다. 순간, 흙벽이 부서지며 전우삼의 발바닥이 바 깥으로 쑥 나갔다. 그의 키에 비해 방이 너무 좁았다. "아이고! 그래서 조심하라 했건만!" 진금구가 땅을 쳤다. "으…… 시원하다. 발을 쭉 뻗을 수 있으니 좋군. 배는 따뜻하게 해도 발은 차게 해서 자야 한다구. 흐흐흥!" 전우삼은 손으로 방바닥을 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명두께서는 왜 하필 이런 놈과 함께 있으라고 ……. 명두에게 모두 말해 버릴 것이다! 밖을 싸돌아다니다 왔다고!" 진금구가 소리쳤다. "친구, 그러지 말라구. 명두의 장대에 맞으면 얼마나 아프다는 것 을 너도 알잖아." 전우삼이 진금구를 껴안았다. 그가 진금구를 껴안고 슬쩍 눌렀다. "으악! 악! 켁켁!" 진금구가 숨을 헐떡거렸다. "말할 거야? 말하지 않을 거야?" 전우삼이 아이를 잠재우듯 진금구를 껴안고 물었다. "아이고! 아이고! 켁! 이…… 이것부터…… 놓고……." 진금구는 주먹으로 전우삼의 가슴을 쳤다. 그러나 전우삼은 진금구 의 주먹질에도 끄떡 않았다. "아…… 알았어! 마…… 말하지 않겠다!" 진금구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전우삼이 진금구를 놓아주며 웃었다. 진금구는 호흡을 가다듬느라 한동안 씩씩거렸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그가 분노로 주먹을 불끈 쥐며 다시 물었다. "화정(花精)에게 다녀왔다. 보고 싶어 죽겠더라구. 헤헤헤! 네놈도 여자가 생겨 봐라." 화정은 전우삼의 정혼녀(定婚女)다. "그 사이를 못 참아서? 명두께서 꼼짝 말라고 했잖아!" "이곳 월평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방안에만 있자니 미칠 지경 이라구." 하루에 백 리를 걷고 백 가지 일에 간섭을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 리지 않는 전우삼이다. "흥! 미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진금구가 입을 삐죽였다. "네놈이야 약초(藥草)라도 캐러 다니니 바깥바람이라도 쐴 수 있지 . 나는 뭐야? 방안에서 꼼짝 말라고 했잖아. 나는 모르겠다. 명두가 네놈까지 붙여서 나를 이곳에 묶어 둔 이유를……." 전우삼이 머리를 방바닥에 쿵 찍으며 말했다. "네놈이 하도 사단을 일으키고 다니니까 그렇지!" "요즘은 조용히 지냈다구. 그리고 아무리 사단을 일으키고 다녀도 그렇지 월평이 뭐야? 차라리 철옥(鐵獄)에나 가두지 그랬어." 전우삼이 투덜댔다. 월평은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줄기를 타고 산서를 넘어 하북에 위 치한 곳이다. 전우삼은 월평까지 그를 보낸 명두의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이상하긴 이상해. 분명 이유가 있긴 있을 텐데." 진금구도 고개를 갸웃했다. "여하튼 그 늙은이가 벌이는 짓은 이해할 수 없어. 금구, 요즘 바 깥 세상 돌아가는 것은 어때?" 전우삼이 몸을 뒤척이며 물었다. 방의 흙벽이 무너지며 더욱 넓게 구멍이 뚫렸다. "나라고 어찌 알겠어? 월평에 갇혀 있기는 나도 마찬가지인데. 그 러나 보지 않아도 뻔한 것 아니겠어? 교도들의 피가 거리와 들판을 적시고 있겠지. 킁!" 진금구가 안색을 찌푸리며 코를 풀었다. "헤헤헤! 죽일 놈들! 찢어 죽일 놈들! 갈가리 찢어 육젓을 만들어 도 시원치 않을 놈들…… 헤헤!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구." 전우삼이 다리를 까딱거리며 중얼거렸다. 순박해 보이던 그의 얼굴 은 순식간에 살기(殺氣)로 가득했다. 적들에 대한 분노로 이가 갈리 는 모양이었다. "명옹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시지? 구주(九州))의 전 교군(敎軍) 을 일으켜 놈들의 목을 댕강 베어 버리면 되잖아!" 진금구도 분통을 터뜨렸다. "그래서 명옹은 나 같은 놈이 해야 한다구.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의 명옹은 너무 겁이 많은 것 같다." "뭐야? 그렇다고 명옹을 모독하는 말을 해! 이런 개자식! 명옹께서 얼마나 고군분투(孤軍奮鬪)하고 계신데! 명두로부터 명옹의 어려운 처지를 모두 들었잖아! 에잇!" 진금구가 전우삼의 머리를 사정없이 처박았다. 머리 하나는 진금구의 단단함을 능가할 자가 없다. "앗!" 전우삼은 눈물을 찔끔거렸다. "미안! 미안! 입에서 그냥 나온 소리일 뿐이다. 내 주둥이야 원래 개주둥이잖아. 헤헤!"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금구, 하지만 정말 화가 난다구. 놈들의 목을 닭모가지 비틀 듯 전부 비틀어 버리는 방법이 없을까?" "있지!" "뭐야?" 전우삼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흙벽은 아예 사람이 드나들 만 한 뻐끔한 구멍이 생겨났다. "에이…… 네놈이 무슨!" 전우삼은 다시 털썩 방바닥에 누웠다. "들은 이야기가 있다. 화(華) 노인(老人)에게……." 진금구가 찢어진 눈을 빛냈다. "화 노인에게…… 그래 화 노인이 뭐라고 하던데?" 전우삼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화 노인이 한 이야기라면 별 귀기울 일 이야기도 없을 듯했다. 화 노인은 나이가 들어서도 주책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영감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마. 교도들 사이에 쉬쉬하며 전해져 내 려오는 이야기라고. 화 노인도 홧김에 나에게 이야기한 것이다. 특히 명두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면 나와 너는 물론 화 노인까지 엄한 문책을 당할 것이라고." "그런 이야기였어?" 전우삼이 진금구의 말에 약간 관심을 표했다. "초대 명옹께서 성녀와 교도들을 이끌고 처음 중원에 발을 들였을 때의 일이지. 그분들은 모두 벽안(碧眼)의 사람들이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원래 우리 교의 뿌리는 대식국 저 너머에서 천축(天竺)으로 천축에서 천산을 지나 중원으로 왔다고 하잖아." "맞아. 그런데 그 교도들 중에는 암왕(暗王)을 추종(追從)하는 일 파(一派)도 있었다고 해." "암왕? 명왕이 아니고 암왕?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전우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암왕이라는 말이 왠지 강에게 그를 자극했다. "화 노인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더라고. 우리 교에 어떻게 해서 암 왕을 추종하는 파가 있었는지……. 명두라면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처음 우리 교는 명왕과 암왕을 같이 모셨던 것이 분명해." "알았어! 빨리 이야기나 해 보라고!" 전우삼이 진금구의 말을 독촉했다. "암왕을 추종하던 일파는 중원에 발을 들이며 칼로 배교 천하를 이 루려고 했나 봐. 칼로 천하의 제패를 주장할 만큼 엄청난 힘도 가지 고 있었다고 해." "칼로? 헤헤헤……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잖아." 전우삼이 눈을 반들거렸다. "칼로 천하를 제패하려 한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지. 가만히 생각 해 보라고. 불교도 도교도 모두 위대한 왕의 칼 아래서 융성을 거듭 했잖아. 벽안의 이족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공공연히 칼 다 음에 보권(寶券:경전)을 이야기하지." "알았다니까! 금구, 네가 똑똑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빨리 이야기나 해!" 전우삼이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했다. "그래서 교는 두 파로 나누어졌지. 칼을 앞세우는 파와 보권을 앞 세우는 파로…… 전자는 물론 암왕을 추종했고 후자는 명왕을 추종했 지.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결과는 보다시피 명왕을 추종하는 파의 승리로 끝났다. 초대 명옹이 명왕을 추종하는 파를 이끌었으니 당연 한 결과지." "그럼 암왕을 추종하던 파도 별 볼일 없잖아. 결국 그들도 명옹에 게 무릎을 꿇었으니……. 쩝!" 전우삼이 쓴맛을 다셨다. "그때야 어디 명옹이라고 했겠어? 호교신장! 명왕의 추종자와 암왕 의 추종자를 모두 거느린 실권자였다. 따라서 두 파의 무공도 모두 지니고 있었을 테고……. 명옹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암왕의 추 종자들이 제거되고 나서라 들었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쨌든 초대 명옹은 두 파의 무공을 모두 가지고 있었잖아. 그러면 차기 명옹에게도 그 무공을 전수했을 텐데……. 암왕을 추종하던 자들의 무공은 엄청나다고 했는데 왜 우 리 전대 명옹들은 쫓겨만 다녔지? 지금의 명옹도 쫓겨다니기는 마찬 가지고." "그 큰 싸움이 있고 나서 초대 명옹은 암왕의 무공을 봉인해 버렸 어. 차기 명옹에게도 암왕의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았고. 암왕의 추 종자들이 부활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겠지. 화 노인에게 그렇게 들 었다." "젠장! 아쉽군." 전우삼이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봐! 우삼,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어. 이야기는 지금부터라 고! 잘 들어." 진금구가 전우삼에게 바짝 다가왔다. "암왕의 일파는 모두 제거되지 않았어." "뭣?" 전우삼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초대 명옹께서 봉인한 암왕의 봉인을 누가 풀었는지 모른다. 아니 면 암왕의 일파 중 살아남은 자가 있었든지……. 그것도 아니면 암왕 의 일파 중 죽기 전에 자신의 무공을 남긴 자가 있었을 수도 있지. 어쨌든 암왕 일파의 무공은 그 이후에도 다시 살아났어!" "……." "나백염왕(拿魄閻王)! 탈명마효(奪命魔梟)!" "그…… 그들이 누군데?" 전우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칠 백여년 전과 삼 백여년 전의 명옹! 배교 천하를 위해 세상을 시산혈해로 만들었다고 하더군. 강호인들은 나백과 탈명에 대한 이야 기만 나오면 아직도 치를 떤다고 한다." "우리 교에 그…… 그렇게 위…… 위대한 분이 있었어?" 전우삼은 흥분으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단한 분이었지. 특히 나백은…… 구대문파 놈들도 태반이 죽었 지. 결국 적들의 협공에 죽었지만…… 탈명도 그렇게 죽었고." "어디야? 그분들이 죽은 곳이?" 전우삼이 느닷없이 진금구에게 매달렸다. "알아서 무엇 하려고?" "그분들이 그냥 죽기야 했겠어? 분명 무엇인가를 남겼을 것 아냐!" "웃기는 놈이군! 벌써 수 백년 전의 일이다. 네놈 같은 생각을 한 교도들이 한둘이겠어. 적들도 그냥 두지는 않으려 했을 것이고. 그러 나 나백과 탈명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람은 아직도 없다. 차라리 암 왕의 봉인이나 열 방도를 찾지." 진금구가 비아냥거림의 투로 말했다. "암왕의 봉인을 열 방도?" "광명신장께서는 교의 천 년 비밀을 모두 알고 계시잖아. 그분에게 물으면 아마 가르쳐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네가 궁금해하는 교의 비 사(秘事)까지도 모두……." "금구, 이 자식! 광명신장은 명옹도 볼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알 고 있잖아! 솔직히 나는 우리 교에 그런 분이 있는가도 의심이 간다. 빨리 두 분이 죽은 곳이나 이야기해 달라니깐!" "우삼, 너 정말……." 진금구는 전우삼이 진지하게 매달리자 미간을 좁혔다. "내가 분명 이야기했지. 나백과 탈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 교의 금기(禁忌)라고." "알았어! 알았다구! 걱정하지 마! 입을 꼭 닫고 있을 테니…… 빨 리 어디서 죽었는지 이야기나 해 달라니깐!" 전우삼이 진금구를 붙잡고 놓아 줄 생각을 않았다. 진금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탈명마효께서는 서역(西域)의 당랍산(唐拉山)에서 죽었다. 절벽에 떨어져서…… 나백염왕은 어디서 참사(慘死)를 당했는지 잘 몰라." 그가 마지못한 듯 말했다. "헤헤헤! 당랍산…… 언젠가 찾아가 볼 것이다. 그곳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있을 거야. 그것을 손에 넣기만 하면……." 전우삼의 전신에 살기가 넘쳤다. "아이고! 미련한 놈! 찾을 수 있었다면 벌써 다른 사람이 찾았을 것이라고 했잖아!" 진금구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전우삼은 진금구의 말이 귀에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입 가에 미소를 지은 채 연신 흉흉한 살기를 뿌렸다. 진금구는 한숨을 쉬었다. 탈명마효의 유물(遺物)에 매달리는 전우 삼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다. 산과 들에 넘치는 교도들의 피! 복수를 위해 실낱같은 희망에라도 몸을 걸고 싶었을 것이다. 진금구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전우삼의 살기는 그에게도 번져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때려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명왕이시여…….' 그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 * * "미치겠군." 팽해만의 입가에는 그 흔하던 웃음이 싹 말라 있었다. 얼굴은 푸석했고 입술도 건조하게 타 들어갔다. 그의 앞에는 세 구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심장이 깨끗하게 양단(兩斷)된 시신들이었다. 시신은 물에 흠뻑 젖 어 있었다. 물에 떠다니고 있는 것을 당예의 수하들이 건져낸 것이다 . "황하도 건넜어! 황하도!" 팽해만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잠은 도주하던 자만 못 잔 것이 아니었다. 팽해만도 장강을 넘어 이곳으로 오기까지 눈 한 번 제대로 못 붙였었다. 신경이 곤두설 대로 곤두서 있었다. 그가 그 정도이니 수하들의 상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충 혈된 눈으로 비슬거리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기회가 닿으면 적당한 곳에서 눈을 붙이기 위해서였다. 수하들의 어슬렁대는 태도가 팽해만의 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으헤헤헤!" 그가 비로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 웃음은 소면(笑面)에 어 울리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웠고 얼굴 근육은 부들부 들 떨리고 있었다. "너 이리와 봐!" 팽해만이 하품을 하고 있는 자 한 명을 가리켰다. 작자는 하토문의 수하로 오 일여 전에 허도에서 합류했었다. 처음 부터 추적에 참가했던 자들에 비하면 나았으나 그도 오 일 동안 눈을 붙이지 못해 연신 입을 쩍쩍 벌렸다. 그는 팽해만이 자신을 부르자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걸어왔다. 발걸 음을 떼는 것도 귀찮은 듯했다. "으헤헤! 어지간히 잠이 오는 모양이군. 편히 쉬게 만들어 줄까?" 팽해만이 작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며 물었다. 하토문의 수하는 불쾌한 기색으로 얼굴을 비켰다. 순간, 소면각저의 두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쉬익! 쉭!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팽해만의 허리에 걸려 있던 묵편이 날 았다. "아악!" 하토문의 수하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개자식! 어디서 입을 함부로 벌리고 있어!" 파팟! 팟! 팟! 팽해만이 악귀(惡鬼) 같은 얼굴로 묵편을 영사(靈蛇)처럼 꿈틀거렸 다. 하토문의 수하가 입고 있던 옷은 잠깐 사이에 걸레가 됐다. 그의 전신에 핏물이 쫙쫙 베어 났다. "아악! 악! 살려 주십시오! 악!" 하토문의 수하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애처롭게 소리쳤다. "살려 달라고? 개자식!" 팽해만은 채찍질을 멈추지 않았다. 묵편을 휘두르는 그의 눈에는 광기(狂氣)뿐이었다. 찌직! 찍! 찌직! 묵편이 하토문의 수하를 알몸으로 만들었다. 하토문의 수하가 채찍 질에 검붉은 고기 덩이로 변해 갔다. 그는 이제 비명조차 못 지르고 '끄억!' '끄억!' 신음만 내뱉었다. 그가 결국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 고 축 늘어졌다. 혼절을 했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이 있다면 팽해만의 주변을 건들거린 죄 뿐!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도 참혹했다. 촤악! 팽해만이 쓰러진 작자의 목에 묵편을 감았다. 휙! 그가 작자를 물 속으로 내던졌다. "으헤헤헤! 으헤헤!" 팽해만이 묵편을 두 손으로 잡고 짝짝 잡아당기며 메기입을 씰룩거 렸다. 광기 서린 그의 눈빛이 점차 평정을 찾아갔다. 그의 주변에는 백 여명의 무사들이 있었다. 자신이 데리고 온 청룡당의 수하 사십 여명, 당예가 남기고 간 백 호당의 수하 삼십 여명, 나머지는 모두 허도에서 합류한 하토문의 수 하들이었다. 장강의 일전에 참가했던 여러 문파의 무사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 간 상태였다. 장강의 일전으로 대오가 흐트러졌고 각자의 자리에서 배교도들을 처치해야 할 임무도 있었기 때문이다. 하토문의 수하들을 이끌고 있는 자는 하토문의 내당당주(內堂堂主) 다. 부문주는 죽고 문주는 장강에서 큰 부상을 당했기에 그가 마옹의 추적에 나선 것이다. 하토문의 내당당주를 비롯한 수하들은 팽해만의 광기에 모두 해쓱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팽해만에 대한 공포(恐怖)는 특히 하토문의 수하들이 더했다. 그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들의 상관(上官)에게 쏠렸 다. 내당당주는 자신의 수하를 함부로 건드린 팽해만에 대해 무엇이라 한마디해야 했다. 그러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뿔난 돼지는 뿔난 돼지구나. 돼지는 한 번 화가 나면 미친 듯이 달려들기만 한다더니…… 내가 네놈이 두려워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 니다. 사람이 돼지와 놀 수는 없지!' 하토문의 내당당주는 그런 생각으로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하려 애 썼다. 팽해만이 씨익 웃으며 그런 내당당주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토문의 내당당주를 향해 공손히 포권하며 어깨를 으쓱거렸 다.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이었다. 하토문의 내당당주는 안색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죽었는지 알아보아라!" 그제야 그가 수하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토문의 수하들이 묵편에 만신창이가 되어 강물에 내던져진 자신들의 동료를 향해 우르 르 몰려갔다. "장목생!" 팽해만은 구레나룻을 불렀다. 구레나룻이 칼을 철컥이며 달려왔다. 그도 지친 표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예라는 놈이 뭐라고 하면서 황하를 건넜다더냐?" 팽해만이 짜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당 당주께서는 백호당의 향주 세 명만 데리고 황하를 건넜습니다. 백호당의 수하들을 여기에 둔 것은……." "또 나보고 황하나 지키고 있으라는 뜻이겠지!" 팟! 팽해만이 얼어붙은 땅에 묵편을 신경질적으로 휘둘렀다. "그런 모양입니다. 수하들이 너무 지쳐 있기도 하고.……." 구레나룻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놈!" 묵편이 사정없이 날았다. 얼어붙은 땅이 일어나며 흙과 돌 조각이 이리저리 날았다. "당 당주께서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고 합니다. 이왕 마옹이 황하 를 넘은 것! 한숨 돌리고 갈 수도 있는데 바로 황하를 넘은 것을 보 면 당 당주의 기분이 어떻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내 기분은?" 팽해문이 고개를 치켜들며 뱀눈을 했다. "내 기분은!" 그가 와락 고함을 질렀다. 구레나룻은 아무 소리 못하고 자세를 뻣뻣이 했다. "으헤헤…… 어쩌면 잘 됐는지도 모르지. 당예, 네놈은 명강량의 뒤나 실컷 쫓아라. 나는 이곳에서 오랜만에 때나 벗기겠다. 헤헤헤!" 팽해만이 체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옹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 고 악에 받쳤다. 자신이 직접 마옹을 추적 놈을 잡아 살을 저미고 뼈 를 부수고 싶었다. 그러나 황하를 건넌 자는 이미 당예! 그는 퇴로를 지킬 도리밖에 없었다. "당예, 그놈은 어디로 갔다고 하더냐?" "비응보(飛鷹堡)를 찾아간다고 했습니다. 비응보는 산서의 패주(覇 主)를 자처하는 놈들이지요." "알고 있다!" 팽해문이 꽥 소리쳤다. "현무당은?" 그가 끊임없이 치솟는 울화를 삼키며 물었다. "산동(山東)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서(西)로 압박해 들 어오겠죠." "남궁기(南宮基), 그놈도 당예나 나 이상으로 죽을 맛이겠군. 헤헤 헤! 명강량, 고맙구나. 고마워! 우리 사대세가의 옥기린(玉麒麟)들은 별 고생을 하지 않고 컸지. 네놈 덕분에 세상의 험난함도 느껴 보고 …… 으헤헤!" 팽해만이 어깨를 건들거리며 웃었다. "구대문파는 어떻게 한다더냐?" 그가 다시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팽해만의 감정은 들쭉날쭉 제 멋대로였다. 어지간히 감정의 기폭을 잡을 수 없는 모양……. "무당파에서 제법 많은 제자들을 하산(下山)시켰다고 합니다. 마옹 에게 세 명의 제자가 당한 지라 어떻게든 마옹을 잡아 체면을 만회할 생각이겠지요. 일부는 산동으로 갔고 일부는 이곳으로 온다고 했습 니다." "으헤헤! 이곳으로도 온다고? 제기랄! 벌써부터 입맛이 떨어지는군 !" 팽해만이 눈살을 찌푸렸다. "화산파(華山派)에서도 제자들을 보냈습니다." "화산파에서도?" "화산의 제자들은 산서로 바로 들어가고 있을 것입니다. 비응보에 서 당 당주와 합류할 계획이랍니다. 그리고 마옹을 잡아 명성을 날리 겠다는 변방의 무사들도 산서로 서너 명씩 모여드는 중입니다. 아마 마옹이 산서나 하북에 모습을 드러낼 줄 알고 주작당주께서 미리 손 을 쓴 모양입니다." "흐흥! 무당, 화산파까지……. 그놈들이 웬일로 고분고분 언가(彦 家) 놈의 말을 들었을까?" "마옹이 무당 제자를 세 명이나 처치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이 컸 을 것입니다." "헤헤헤! 그렇겠군. 놀랐겠지. 그 도도한 무당 제자까지 죽였으니 ……." 팽해만이 묵편으로 손바닥을 탁탁 쳤다. 그는 내심 마옹이 무당 제 자를 처치한 일만은 고소하게 생각하던 터였다. 천하가 유향경천문의 발아래 벌벌 떨고 있는 판국인데도 구대문파 는 오히려 유향경천문을 눈 아래로 대했다. 그들은 유향경천문의 청을 받아들여 마지못한 듯 배교 타파에 나서 고는 있었다. 하지만 협조를 하러 온 자들도 유향경천문의 지시는 안 중에도 없이 제멋대로였다. 따라서 팽해만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이라 면 마옹 못지 않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구대문파도 주작당의 지시에 따라 길을 나누어 마 옹을 추적하고 있었다. 역시 구레나룻의 말대로 그들이 애송이라 경 시하던 마옹에게 무당의 제자가 사상 당한 일이 큰 충격이었던 모양 이다. "구대문파와 같이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팽해만이 묵편을 만지작거리며 발로 흙을 찼다. "어때? 이번에는 그물이 튼튼해 보이지 않아?" 그가 음산한 눈빛으로 구레나룻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청룡당, 현무당, 백호당, 무당, 화산……. 이번에는 반드시 마옹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구레나룻도 안광을 빛냈다. "잡아야지! 그것도 내 손으로……. 구대문파나 당예 같은 멍청이가 명강량을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그들은 고작해야 명강량을 이곳으 로 몰아 줄 몰이꾼에 불과하다. 명강량은 분명히 다시 이곳으로 온다 . 교타방(鮫打幇)에 사람을 보내라! 모든 배를 황하에 풀라고 해!" 팽해문이 이를 으드득 갈며 소리쳤다. "명강량! 다시 황하를 넘어 보시지. 두 번의 실수는 하지 않을 것 이다! 으헤헤! 헤헤!" 그가 어깨를 거들먹거리며 광소를 터뜨렸다. * * * 명강량은 빽빽한 나무숲 사이에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아 운기 행공(運氣行功)을 하고 있었다. 장강에서 황하를 건너기까지는 호흡법(呼吸法)만으로 기(氣)를 조 절했었다. 적의 공격을 안심하고 피할 수 있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 황하를 건너자 명강량은 비로소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는 지 금 수장흡기법(手掌吸氣法)으로 쇠잔(衰殘)한 기력을 회복하는 중이 었다. 강호인들은 배교의 수장흡기법을 흡정술(吸精術)이라 부른다. 흡정 술! 사람의 몸에서 기를 취하는 채음(採陰), 채양(採陽)의 사술(邪術 )! 그러나 강호인들이 흡정술로 부르는 수장흡기법은 실제 사람으로부 터가 아니라 초목(草木)으로부터 기를 취한다. 흡정술은 인단(人丹) 의 술이고 수장흡기법은 내단(內丹)의 술이니 익히는 방법부터가 차 이가 있다. 하지만 강호인들은 수장흡기법을 흡정술이라 부르며 마공 (魔攻)으로 두려워하고 경멸했다. 배교에 대한 오랜 불신이 부른 결과였다. 명강량은 그 오해의 책임이 전적으로 강호인에게 있다고는 생각하 지 않았다. 교는 강호에 흡정술을 교의 절학으로 선보인 적도 있었다 . 나백과 탈명! 오래 전 배교의 명옹들인 그들은 수장흡기법이 아니라 흡정술을 사 용했었다. 그들이 펼치던 흡정술에 의해 고사(枯死)당한 강호인들이 한둘이던가. 강호인들은 배교의 무공하면 먼저 흡정술을 떠올릴 것이다. 이해가 갔다. 나백과 탈명의 일은 배교가 영원히 지고 가야 할 죄 의 업(業)이었다. 지금 겪고 있는 교의 환란도 그 업의 대가인지 모른다. 하지만 명 강량은 그 업의 대가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가가 너무 가혹했기에 인고(忍苦)의 마음보다 증오의 마음이 더 치솟았다. 그래서 그는 가끔 나백과 탈명의 힘을 동경하기도 했다. 명옹이라 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지만……. 겨울이라 초목에서 흘러나오는 기가 약했다. 그리고 장강에서 황하 로 오기까지 너무 무리를 해 그의 기력은 극히 쇠잔한 상태였다. 수 장흡기법을 한동안 펼쳤는데도 기력은 충만하지 않았다. 산림(山林) 에 묻혀 부지런히 이삼 개월은 행공을 해야 예전의 내력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 그만한 시간을 베풀자는 아무도 없었 다. 교도들도, 적들도……. 명강량은 가부좌를 풀고 자신을 살폈다. 성한 곳이 없었다. 그는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상처투성이의 몸이었다. 그러나 다행 히 겨울이라 화농(化膿)이 생긴 곳은 많지 않았다. 명강량은 상처에 묻은 피와 화농을 닦아 낸 후 마른 쑥을 꺼냈다. 그가 쑥에 불씨를 지폈다. 그는 쑥으로 자신의 상처 부위를 지졌다. 명강량은 자신의 전신이 도흔이라 신경이 모두 죽어 있는 줄 알았 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쑥 뜸질에 고통을 호소했다. 그는 그 고통은 달가웠다. 명강량은 상처를 쑥으로 모두 지진 후 다시 옷을 걸쳤다. 황기명사가 청기명사에게 연락을 취했을 것이고 청기명사는 그가 만날 자에게 연락을 취해 놓았을 것이다. 그 전에 성녀를 만나 안부를 확인하려 했으나 시간이 촉박했다. 황 하에서 한 판 싸움을 벌이느라 시간이 지체된 것이다. 명강량은 성녀에 대한 조급한 마음을 눌렀다. 황하를 건넌 후라 조 금 안심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머물던 흔적을 깨끗이 지운 후 발걸음을 옮겼다. 명강량이 가는 곳은 태행산(太行山)이었다. 그가 숲을 빠져 나와 작은 구릉을 달릴 때였다.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휘-익! 휘-익! 휙! 휘파람처럼 길고 가늘게 들려 오는 소리! 명강량은 하늘을 우러렀다. 한천(寒天)에 새 한 마리가 날고 있었다. 까맣고 작은 새! 명강량의 가슴은 뛰었다. 휘-익! 그가 새의 울음에 화답(和答)하듯 휘파람을 불렀다. 허공을 선회하던 새가 쏜살 같이 하강(下降)했다. 명강량은 팔을 내밀었다.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그의 팔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중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새였다. 머리와 꼬 리에는 두 가닥의 오색(五色) 깃이 길게 뻗어 있었다. "명조(明鳥)……." 명강량의 무심하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에게도 보인 적 이 없는 미소였다. "성녀께서 보내서 왔느냐?" 그가 새에게 말을 걸었다. 작은 새는 성녀가 키우는 새였다. 명조라는 이름도 성녀가 붙여 준 것이다. 반가움의 표시인지 새는 명강량의 팔과 어깨를 제멋대로 뛰 어다녔다. 명강량은 손바닥을 벌렸다. 새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손바닥으로 뛰어들었다. 새는 둥지를 틀 듯 그의 손바닥에 앉았다. 명강량은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는 새를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 꽃비가 휘날렸다. 한동안 교에는 성녀가 없었다. 성녀가 교로 돌아온 것은 십여 년 만이었다고 한다. 성녀를 처음 만난 곳은 황산(黃山)의 총단에서였다. 사부를 만나고 교에 몸을 담은지 일 년이 넘어갈 때였다. 그때 그는 총단의 불목하니로 있었다. 나무를 하고 불을 지피는 일 이 그의 일이었다. 황산이 홍엽(紅葉)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산에서 끌어 모은 나뭇단을 풀고 장작을 한아름 든 채 대화로(大火爐)로 들어섰다. 대화로 앞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명강량이 본 적이 없는 작은 계집이었다. 계집은 긴 장대로 대화로의 불씨를 뒤적이고 있었다. 불씨는 대화 로 바깥까지 튀어나와 폭죽처럼 이리저리 휘날렸다. 계집은 그 불씨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을음을 치우는 일도 그의 일이다. 불장난을 얼마나 쳤는지 대화로 주변은 그을음 투성이었다. 그가 장작을 와르르 쏟았다. 계집이 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성녀의 얼굴을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가슴이 시리도록 맑은 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대화로에서 장난을 치지 못하도록 계집에게 한 마디의 말은 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계집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관산(關山)에는 꽃잎이 지고 있어요. 바람을 따라 꽃잎은 이 리저리 휘날리죠. 하늘 가득…… 모두 자기들이 원하는 데로 가고 있 는지 모르겠어요." 계집은 꽃잎이 날리는 것을 손짓으로 흉내내며 몽롱한 눈빛을 지었 다. 명강량은 계집의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 줄 알 수 없었다. '참 이 상한 계집도 다 있구나'라는 것이 그의 생각의 전부였다. 그 계집이 성녀였다는 것을 안 것은 그로부터 오 년(五年)이 지나 서였다. 황산대전(黃山大典)에서 차기(次期) 명옹으로 지명을 받은 후, 그 는 사부를 따라 성녀를 배알하러 갔다. 사실 명강량은 차기 명옹이 된 것에 대해 별 다른 감정이 없었다. 원래 모든 일을 무감(無感)하 게 받아들이는 그의 성격 탓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차기 명옹이 된 것에 대해 한 가지만은 즐거웠다. 성녀! 명왕의 전언을 알리는 성결(聖潔)한 여인……. 가까이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그의 복(福)이었다. 사부를 따라 성녀를 배알한 곳은 명왕전(明王殿)이다. 언제 나타난 줄도 몰랐다. "강량! 반가워요. 나는 오래 전부터 당신이 호교신장이 될 줄 알았 어요. 이상하게 당신이 자주 꿈에 보였거든요." 그 말에 명강량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성녀! 원광(圓光)도 없었고 꽃비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 녀의 성결함에 취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대화로 앞의 그 계집 이 성녀임을 기억하지 못했음은 물론이었다. 그 기억이 이어진 것은 다시 삼 년의 세월이 흘러서였다. 교에 대한 적들의 공세가 거세지자 사부는 그를 가까이 불렀다. 언 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사부는 만약의 변고에 대비 호교신장 의 위(位)를 넘겨주기 위해 그를 지척에 두었다. 사부가 그를 머물게 한 자리에는 성녀도 있었다. 성녀는 웃기를 좋아하고 가끔 깊이를 알 수 없는 침묵에 빠져 우울 해 한다는 것도 알았다. 태호에서 사부가 죽었다. 그는 호교신장이 되었다. 그로부터 육 개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성녀는 내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꽃비의 흔적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꽃비를 맞고 있는 자는 명강량 혼자 뿐인 듯했다. 휘-잉! 휘-잉! 황하를 넘어서자 바람은 또한 달랐다. 산서의 거센 북풍이 몰아치 자 명강량은 비로소 침묵에서 깨어났다. "성녀께서는 잘 계시느냐?" 명강량의 물음에 명조는 눈만 멀뚱거렸다. "성녀에게 전하라. 일을 끝낸 후, 곧 돌아가겠다." 명강량이 손바닥을 들었다. 휘-익! 휘-익! 명조가 서너 번 날개를 퍼덕이며 낮은 소리로 울었다. 푸드드드득……! 명조가 하늘로 치솟았다. 명조는 허공을 서너 바퀴 선회한 후, 북 쪽을 향해 훌쩍 사라져 갔다. 명강량은 팔짱을 낀 채 명조가 아득한 점으로 사라지기까지 지켜보 고 서 있었다. 명조를 보내는 그의 눈빛은 애잔함뿐이었다. * * * 타닥! 탁탁탁! 두 줄기 인영(人影)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의 거친 산줄기를 분주히 질주하고 있었다. 선두를 달리는 자는 월평에서 하릴없이 뒹굴던 전 우삼이었다. 그의 팔에는 보기에도 위맹한 대월(大鉞)이 들려 있었다 .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는 꾸부정한 허리에 왜소한 체구의 갈의(葛 衣) 노인! 산서, 하남, 하북을 종단하는 태행산맥의 준령(峻嶺)들은 험하고 거칠다. 칠흑 같은 어둠…… 별빛만이 쌓여진 눈에 잔광(殘光)을 뿌 렸다. 휘-잉! 휘이잉! 매서운 산바람은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날려 시야(視野)까지 어렵 게 했다. 그러나 전우삼과 검고 긴 장대를 든 왜소한 체구의 갈의 노 인은 험한 산악(山岳)과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도 비호(飛虎)처럼 빨랐다. 특히 전우삼을 뒤따르는 갈의 노인의 발걸음은 전우삼이 발을 디딘 곳과 똑 같아 잔설(殘雪)에 남은 발자국은 마치 한 사람이 길을 간 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하북 방향에서 달려오는 길이었고 목적지는 산서에 치솟은 태행산맥의 주봉(主峰) 태행산 아래였다. 갈의 노인이 출발한 곳은 하북이 아니라 산서의 고도(古都), 태원 이다. 분하(汾河)의 물결을 타고 정양(定讓)으로 갔다가 정양에서 월 평으로 월평에서 다시 태행산맥을 타고 산서로 넘어오는 길이니 갈의 노인은 길을 둘러도 엄청 둘러 오는 길이었다. 중도에서 행색(行色)을 바꾼 것만 해도 다섯 차례……. 모두 주위의 이목을 흩트리기 위해서였다. 전우삼은 노인과 월평에서 합류했다. 산길을 분주히 달리던 그들은 태행산의 웅장한 자태가 한 눈에 들 어오는 산모퉁이에 이르러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그만큼 주의를 기 울였음에도 갈의 노인은 그래도 혹시 추적자(追跡子)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설(白雪) 에 비친 잔광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갈의 노인의 전신을 흐릿하게 비췄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의 얼굴에는 세월의 풍상(風霜)이 할퀴고 간 상 처로 굵은 주름살 투성이었다. 나이는 이순(耳順)을 오래 전에 넘긴 듯했다. 촌락(村落)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촌로(村老)의 얼 굴…… 하지만 눈은 달랐다. 갈의 노인의 눈은 별빛보다 더 하얀빛이었다. 그의 차가운 눈에는 눈동자가 없었다. 맹인(盲人)!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자였다. "명두, 늦었소. 빨리 가야……." 전우삼이 길을 재촉했다. 갈의 노인이 백안(白眼)을 번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우삼이 명두라 부르는 갈의 노인, 그는 두 말 할 것도 없는 배교 산서 향당을 이끄는 자였다. 산서 명두, 주화청(朱和淸)! 주화청의 전력(前歷)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유난히 행동이 각별히 조심스러워 교도들에게조차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자! 백도인들이 주화청을 부르는 칭호는 잠마(潛魔)였다. 그들도 주화 청의 정체는 오리무중(五里霧中)이라 그 같은 별호(別號)를 붙여 준 것이다. 흑면호 전우삼은 성질이 불같이 급한 자다. 또한 한 대 맞으면 두 대를 때려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전우삼은 배교 내에 서도 사단만 일으키고 다니는 골치덩이였다. 주화청의 평소 조심스러운 행보(行步)를 보건대 당연히 중인들에게 두루 얼굴이 알려진 전우삼을 멀리함이 옳았다. 그런데 그는 오늘 전우삼을 대동한 채 산길을 달리고 있었다. 전우삼을 데리고 다님으 로써 정체가 노출될 위험은 높았다. 하지만 주화청에게는 전우삼을 꼭 데려가야만 할 사정이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 길 안내로 쓰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는 세상! 자신도 언제 어떻게 쓰러질지 모를 일이다. 자신의 대(代)를 이을 명두를 생각해 두어야 했다. 전우삼은 그가 생각해 둔 후계자다. 산서 명두인 주화청은 이 밤에 누군가를 만나게 되어 있었다. 그가 만나기로 되어 있는 자는 아직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백척 간두(百尺竿頭)에 선 교에 희망을 주는 상징(象徵)이었다. 주화청은 그 앞에 전우삼을 후계자로 밝힐 생각이었다. 주위가 어수선하지 않 았다면 예를 갖춰 후계자임을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내일을 장담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특히 이 밤에 주화청이 만나야 할 자는 정말로 목숨이 백 개 있어도 내일을 장담하지 못할 자였다. 산서는 황량하고 거친 산림에 둘러싸인 곳이라 중원의 소요(騷擾) 에 비교적 조용한 곳이다. 또한 교의 뿌리도 그렇게 깊지 않아 온 천 지(天地)가 교에 대한 공격으로 악머구리처럼 들끓었지만 이곳만은 상대적으로 잠잠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칼부림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서나 사마척결(邪魔剔抉)이라면 앞 뒤 없이 핏대를 세우는 자 들이 있기 마련이다. 산서에서는 비응보가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비응보가 악마성전 배교를 치는데 선봉(先鋒)을 자임한 데는 나름 의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배교 타파(打破)를 기치로 산서의 맹주(盟 主)가 될 꿈을 꾸고 있었다. 비응보와의 충돌이 이어졌다. 그러나 주화청은 비응보와의 일전을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비응보가 비록 근자에 산서에서 약진( 躍進)하고 있는 문파이기는 하나 천 년 배교를 어떻게 할 정도의 실 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따라서 주화청의 염려는 오히려 다른 지역의 배교도들이었다. 그런 데 십 여일 전, 명전(明傳)으로부터 그를 바짝 긴장시키는 전갈(傳喝 )이 들어왔다. 대현(代縣)의 향주(香主)가 눈으로 확인한 내용이었다. 안문(雁門)을 통해 매화(梅花) 문양의 도복(道服)을 걸친 다섯 명 의 도사(道士)가 들어왔다는……. 매화 문양의 도복을 입은 도사라면 두 말 할 것 없는 화산파(華山 派)의 제자들이다. 새벽 이슬에 몸을 씻고 구름 속을 거닐며 한담(閑談)을 나눈다는 자들, 구대문파! 화산파는 그런 구대문파 중에서도 쟁쟁(錚錚)을 자 랑하는 곳이다. '그들이 왔다면…….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다섯 명이나…….' 주화청은 긴장했다. 배교 내에서 걸출한 무공을 자랑하는 자나 명두의 경우는 보통 두 세 명의 제자를 파견한다. 그런데 다섯 명이나 왔다. 처음 주화청은 구대문파가 배교를 위, 아래 없이 초토화시키는 쪽 으로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 근 일 년 이상, 강호를 횡행해도 배교 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 그들이 마 음을 바꾼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주화청은 곧 고개를 저었다. 구대문파의 행보가 그런 이유로 가벼울 리 없었다. 주화청이 화산파의 출현에 긴장,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였다. 며 칠 전, 그는 명사로부터 또 한 장의 서신을 받았다. 명사는 명옹의 영을 전하고 명전은 명두의 영을 전하는 자다. 따라서 그 서신은 물 론 명옹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산서를 방문할 예정이니 맞을 채비를 하라는……. 그제야 주화청은 자신의 이마를 쳤다. 명옹! 한 달여쯤 강남의 향당을 순회하던 그가 하남을 훌쩍 넘어 드디어 산서에 다다른 것이다. 그는 강남을 순회하던 도중 무당파 제자들과 조우(遭遇) 세 명을 사상(死傷)케 했다. 그 일로 침잠(沈潛)해 있던 교도들의 사기는 치 솟았으나 구대문파는 발칵 뒤집어졌다. 배교 총단의 와해, 전임 명옹의 패사(敗死) 이후, 잠시 교에 대한 공세를 주춤거리던 구대문파였다. 신임 명옹이 젊은 애송이라는 것도 구대문파가 교에 대한 공세에 흥미를 잃은 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그 애송이가 무당파의 제자 세 명을 처치했다. 구대문파는 이내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신임 명옹에 대한 추 살령(追殺令)이 재차 구대문파의 산문(山門)을 치달았다. 그런 까닭 에 구대문파는 다급히 각 제자들을 파견했고 그 한 무리는 산서로 왔 다. 안문을 통해 들어온 화산파의 제자들……. 주화청은 화산파의 제자들이 명옹을 잡기 위해 나타난 자들임을 그 제야 눈치챘다. 산서의 전 교도들에게 비상령(非常令)을 내리고 스스 로의 행동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 그리고 태행산……. 주화청은 명사의 영을 받고 명옹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전우삼은 추적자가 없음을 확인하자 잠시 긴 장을 풀었다. 그는 산길을 달리느라 나뭇가지와 눈에 어수선해진 옷 을 털었다. 그가 옷깃을 가다듬고 허리를 폈다. 태행산이 지척으로 보이자 그 의 가슴은 흥분으로 또 다시 심하게 두근거렸다. "명두! 저도 명옹을 만날 수 있겠지요?" 전우삼이 물었다. 주화청은 긴 장대를 지팡이처럼 짚고 아무 말도 않았다. "명두! 성녀는 못 본다고 하더라도 명옹은 꼭 보고 싶습니다." 전우삼이 애원하듯 말했다. 주화청은 미간을 좁혔다. "만난 것으로 생각하라. 명옹의 얼굴을 보아서 교에 무슨 득 될 일 이 있다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명옹의 얼굴을 보았다고 함부로 자랑이나 하고 다닐 것으로 보입니까?" 전우삼이 입을 삐죽였다. "사람의 살과 뼈는 고문(拷問)을 견뎌 내기에 적당하지가 않다. 저 놈들이 명옹의 용모파기(容貌　記)를 얻어내기 위해 혈안인 것은 너 도 잘 알 것이다.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이 명옹을 위하는 길이야." 전우삼을 명옹 앞에 내세우고 싶은 마음이야 주화청이 더할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욕심! 주화청에게 보다 중요한 문제는 후계 자를 선보이는 일 보다 명옹의 안전이었다. 전우삼을 데려가는 것은 명옹에게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였지 명옹 의 얼굴을 보게 하려 함은 아니었다. "흥! 그깟 놈들에게 누가 잡힌 답니까? 차라리 죽어 버리지! 그리 고 설혹 잡힌다고 하더라도 그깟 놈들의 고문에 내가 입을 열 것 같 소?" 전우삼은 명옹의 얼굴을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화청의 굵은 주름살이 깊이를 더했다. "……그렇겠지." 주화청은 뒷짐을 지며 하늘을 우러렀다. 생각하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세월이었다. 성녀와 명옹의 얼굴을 한 번이 라도 보고 죽고 싶은 마음은 비단 전우삼의 마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마음이 약해졌다. 아무리 냉정한 그였지만 상황이 그런지라 전우삼의 청을 분질러 거절하기는 힘들었다. "같이 만날 수는 없는 일이고…… 삼십 여장밖에 떨어져 침입자를 살피며 명옹의 얼굴을 재주껏 보아라." 전우삼을 위한 주화청의 최대 배려였다. "헤헤헤! 명두! 고맙습니다." 전우삼이 아이처럼 좋아하며 그 큰 머리를 조아렸다. "가자!" 주화청이 긴 장대로 길을 더듬으며 휘적 걸어나갔다. 그의 장대가 마치 영묘(靈妙)한 짐승의 더듬이처럼 움직이며 산길 을 밝혔다. 제4장 삭풍(朔風) 악진웅(岳進雄)은 몸이 젖혀질 정도로 태사의에 몸을 기댔다. 그는 턱을 괴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의 앞에 앉은 청년을 응시했다. 얇은 입술, 갸름한 콧날, 하얀 피부, 나이는 스물서넛……. 몸도 날아갈 듯 가벼워 영락없이 계집이라 착각했을 자였다. 청년의 전신에서 뿜어 나오는 기도(氣度)도 마치 계집처럼 앙칼스 러웠다. 교태로 보일 정도의 앙칼짐이면 얼마나 좋을까. 청년의 앙칼 짐은 건드리면 당장 심장에 비수라도 꽂을 것 같은 표독스러움이었다 . 악진웅은 청년의 그 표독스러운 기운에 앉아 있는 자리도 불편했다 . 산서 제일방(第一幇)을 자처하는 비응보의 보주, 악진웅을 좌불안 석(坐不安席)으로 만들고 있는 청년! 악진웅은 비응보에 들어선 청년이 그의 앞에 영패(令牌)를 내미는 순간, 비로소 청년의 정체를 알아챘다. 산서가 아무리 외진 곳이라 하나 어찌 유향경천문의 사람을 모를까 . 청년은 유향경천문의 사대당주 중 한 명이었다. 유향경천문 백호당주, 천독미랑(千毒美狼) 당예(唐藝)! 이름과 별호가 증명하듯 당예는 사천당문 출신이다. 구대문파와 어 깨를 나란히 하는 사천당문 출신에 작금 천하의 패주로 떠오르는 유 향경천문의 당주, 뿐만 아니라 말 한 마디 잘 못하면 비수부터 날릴 것 같은 차디찬 기도까지……. 산서의 거두(巨頭), 악진웅이 일개 애송이 앞에 엉덩이를 들썩이는 것을 전적으로 그가 심약(心弱)하기 때문이라 탓할 바는 못되었다. 악진웅은 태사의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채 유향경천문에 대해 생각 했다. 유향경천문이 어떻게 세워지게 되었는지, 자존심 강한 사대세가가 그것도 한 자리에 모여 유향경천문의 수하가 된 이유가 무엇인지, 유 향경천문이 배교 타파에 앞장 선 이유는…… 배교 타파는 오랫동안 구대문파의 몫이었다. 구대문파에 덧붙이면 신생 문파 유향경천문에 구대문파가 순순히 협조를 하고 나서는 이유도 또한 궁금했다. 중소( 中小) 방파야 사대세가의 위세가 워낙 커고 유향경천문의 위세가 하 늘을 찌를 정도라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지만……. '이것들은 강호인들 누구나 궁금해하는 문제다. 그런데도 강호인들 은 누구도 그 궁금증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 모든 궁금증을 쥐고 있 는 자는 물론 유향경천문의 문주 본인이겠지. 하지만 나를 포함 강호 인들은 유향경천문의 문주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누구인가?' 악진웅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이 있다면 유향경천문 문주의 정체일 것이다. '보건대 유향경천문의 문주는 분명 정파인일 것이다. 그것도 이름 이 높은…… 그런데 왜 정체를 숨긴다는 말인가? 배교 타파가 나쁜 일도 아닌데…….' 그 궁금증 또한 정사(正邪)를 떠나 모든 강호인들이 궁금하게 생각 하는 것 중 하나였다.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긴 산서 벽촌(僻村)의 무부(武夫)가 어찌 중원의 은밀한 소용돌이까지 알랴!' 악진웅은 자신의 궁금증을 더 이상 이어가지 않았다. 묻는다고 당 예가 대답해 줄 것도 아니고 또한 그의 역할은 배교도를 치는 것 이 상의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지금 자신이 누리 고 있는 자리를 더욱 단단히 굳히는 것 뿐! 탁! 천독미랑, 당예는 읽고 있던 얇은 책자를 조용히 덮었다. 그가 찻잔에 손을 댔다.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었다. '저 손은 순식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손이다.' 악진웅은 당예가 당가의 사람임이 재삼 떠올렸다. 소수(素手)가 섬 섬옥수(纖纖玉手) 같다는 생각을 이내 버렸다. 긴장을 풀지 말아야 했다. 원래 여자 같이 행세하는 자가 더 독하 고 무서운 법이다. 악진웅은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었다. 중소(中小) 방파의 명호야 ' 아차!' 하는 사이에 대문파(大門派)의 위세 앞에 날아가 버리는 곳이 강호다. 당예는 찻잔을 들었다.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악진웅은 시비(侍婢)를 불러 차를 다시 따르게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시비를 부르는 것을 그만 두었다. 따뜻할 때 차를 마시지 않은 책임은 전적으로 당예라는 놈의 책임이니…… 아마 식은 차를 좋아할 지도 모를 일이다. '차를 마시는 모습까지 계집 같군.' 악진웅은 남색(男色)에 흥미가 없는 자라 할지라도 당예를 보면 누 구나 약간은 야릇한 상상을 하리라 생각했다. 당예는 찻잔을 비운 후, 책자 옆에 놓인 자신의 철필(鐵筆)을 들었 다. 철필은 그가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물건이다. 언제 어디서나 글을 쓸 수 있음은 물론 특별한 경우에는 암기로도 사용 가능했다. 아직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툭! 툭! 툭! 당예는 그 철필로 궤안(　案)을 가볍게 쳤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악진웅과 아직 제대로 눈빛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있었다. '찢어 죽일! 유향경천문 놈들은 언제나 이런 식인가?' 당예의 침묵에 악진웅의 조바심은 점점 깊어졌다. 결국 악진웅은 자신이 먼저 입을 열지 않겠다던 스스로의 결심을 깨고 말았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산서는 배교 놈들의 활동이 뜸한 곳이오. 그래 서 자랑할 만한 성과도 없소." 악진웅이 책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당예가 보고 있던 그 책자는 비 응보에서 제작한 것으로 산서 배교에 대한 모든 것과 산서 배교에 대 한 비응보의 성과를 조목조목 적어 두고 있었다. 악진웅의 말에 당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는 말도 못 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가 소매에서 한 장의 양피지(羊皮紙)를 꺼냈 다. 여기저기 작은 구멍이 숭숭 뚫린 양피지였다. 양피지의 상단에는 각 성(省)이 적혀 있었고 성 아래는 촘촘히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 었다. 악진웅은 양피지에 적힌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금방 눈치챘다. 양피 지에 적힌 자들은 명두, 명전을 위시한 각 성의 배교 수뇌급 인물들 의 이름이었다. 악진웅은 급히 산서라 이름 적힌 곳을 찾았다. '음…….' 악진웅은 미간을 좁혔다. 양피지에는 산서의 패주라는 자신도 전혀 알지 못하는 배교 수뇌급 인물들의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악진웅의 눈길이 양피지 최상 단에 머물렀다. - 마두 주화청! 유향경천문은 자신이 그렇게 찾던 잠마의 이름까지 밝혀 놓고 있었 다. 악진웅은 가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이는 이순을 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우리도 그 이 상은 그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당예가 철필을 들며 말했다. 지치고 가는 목소리였다. 입술은 붉고 목소리 또한 애처러워 악진웅은 순간적으로 당예가 남 장여인(男裝女人)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탁! 악진웅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관심 없이 당예는 철필을 양피지 에 꽂았다. 철필은 양피지에 적힌 이름 하나를 정확히 꿰뚫었다. 철 필에 이름은 꽂힌 자는 악진웅이 처치한 산서 배교도 중 한 명이었다 . "커험!" 악진웅은 헛기침으로 어색함을 달랬다. 양피지에 꽂힌 철필은 일 여년 간 그가 배교도를 상대로 산서에서 거둔 성과를 한 눈에 나타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예는 양피지를 말았다. 그는 양피지를 소매에 넣은 후,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당예의 얼굴은 목소리만큼 지쳐 보였다. 격렬한 정사(情事)의 꿈을 꾼 후, 막 잠에서 깨어난 여인의 얼굴 같다고나 할까. 악진웅은 속으로 웃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상상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우스운 것! 그는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으려 노력했다. "태행산에 간 수하들로부터 무슨 연락이 있었습니까?" 당예가 물었다. "아니! 그 사실을 어떻게?" 악진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흑면호라는 자보다 흑면호와 동행한다던 그 늙은이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당예가 손바닥에 철필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산서의 사정에 대 해 악진웅보다 오히려 더 많이 아는 듯했다. 악진웅은 재삼 기가 죽 었다. "어험! 흠! 당 당주, 나도 그 늙은이에 대한 예감이 별로 좋지 않 았소. 흑면호를 대동한 채 으쓱한 산길을 달리는 늙은이라……." "나는 그 늙은이가 잠마가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늙은이 의 형상과 우리가 주워 들은 잠마의 형상은 조금 비슷한 점이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당예의 목소리는 한숨을 쉬듯 가늘었으나 또박또박했다. 말투도 존 어(尊語)였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잠마라고 생각하 기에는 그 늙은이의 행동이 왠지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지 않소? 얼굴 이 알려질 만큼 알려진 흑면호를 달고 다니다니……. 잠마는 매우 신 중한 자라고 들었소." "맞습니다. 매우 신중한 자입니다. 평소의 잠마라면 절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지금 배교는 그가 주위를 돌아볼 틈도 없이 몰리고 있고, 그리고…… 명강량이 산서에 나타났다면 문제는 더 달라졌겠지요. 잠마는 개인과 산서 배교의 안전보다 명강량의 안 전이 무엇보다 중요했을 테니." 당예가 가만히 악진웅을 응시했다. "명강량? 명강량이 누구요?" 악진웅이 당예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강량의 누군지 모르기는 악진웅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모르고 계셨군요. 하긴 우리도 이름 석자를 얻기 위해 그토 록 많은 시간을 허비하기는 처음이니……. 명강량! 악마성전, 배교의 수괴……." 당예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사이한 미소였다. 그러나 악진 웅은 그 미소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마…… 마옹이 태행산에 나타났다는 말입니까?" 악진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은 모릅니다. 태행산에 가 봐야 결과를 알겠지요. 만약 그 늙 은이가 잠마가 맞고 잠마가 움직인 것이 명강량 때문이라면…… 악 보주의 공은 적지 않게 기록될 것입니다." 당예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태행산에 가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그가 옷을 단정히 추스르며 물었다. "외당당주, 문호일(文豪逸)! 칼을 뽑기까지 십 여번은 숙고하는 놈 이지. 상대가 흑면호라면 더욱…… 별 일이 없으면 나를 기다리고 있 을 것이오." 악진웅이 중얼댔다. "그런 자에게 외당을 맡기다니…… 사연이 있나 보군요. 그러나 어 쨌든 다행입니다. 그런 자라서……." 당예가 방문을 나섰다. 악진웅은 잠시 그 자리에 서 움직이지 않았다. '명강량…… 명강량…….' 그의 가슴은 격랑(激浪)으로 심하게 두근거렸다. 육 개월 여전, 전대 마옹이 패사했을 때 강호인들은 배교는 이제 끝장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배교는 아직 그들의 불을 끄지 않고 있었 다. 새로이 마옹으로 등극한 자가 놀랄만한 용전(勇戰)을 보였기 때 문이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 마옹! 명강량! 바로 그자였다. 그자가 정말 태행산에 나타난다면……. '놈은 내가 잡는다!' 악진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마옹을 잡을 수 있다면 그의 명성 과 비응보의 명성은 태행산을 넘어 사해로 뻗어 갈 것이다.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 악진웅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염태명(廉太明)! 출발을 준비하라!" 그가 방문을 뛰쳐나가며 소리쳤다. 내당당주 염태명이 출발을 준비하던 비응보의 수하들을 도열시켰다 . 악진웅은 당예의 곁으로 다가갔다. 손가락 끝으로 철필을 돌리고 있던 당예가 악진웅에게 시선을 던졌 다. "악 보주, 잊지 마시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명강량은 정말 다루 기 힘든 자입니다. 혹시 태행산에 놈이 있더라도 잡을 생각은 마십시 오. 보주와 나의 임무는 놈의 종적을 밟으며 추살대를 기다리는 것뿐 입니다." 당예가 무표정하게 말했다. 악진웅은 미간을 좁혔다. 우리도 마옹을 잡을 만한 능력은 충분히 있다고 항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입을 닫았다. 유향경천문 앞에 서 힘 자랑은 해 보았자였다. "흠! 우리야……. 당 당주의 뜻을 존경하겠지요. 하지만 화산파의 존귀한 분들이…… 어떻게 나올지?" 그가 뜸을 들이며 말했다. 당예가 고개를 휙 돌리며 악진웅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표독스런 눈빛이었다. 악진웅은 '아차!'했다. 얼굴이 계집처럼 생겼고 말을 부드럽게 하 더라도 당예는 유향경천문의 당주다. 가슴을 열기 전까지는 가벼운 농담도 조심해서 던져야 할 자였다. 그는 당예의 눈치를 살폈다. 말 한 마디에도 노심초사하는 자신을 한심스럽게 여기며……. "벌써…… 화산파의 문도들이 왔습니까?" 당예가 물었다. 악진웅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행산에도?" "그…… 그렇소!" "……." 당예는 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구대문파에 대한 그의 감정도 물론 좋지 않았다. 구대문파! 유향경천문의 권위를 전면으로 무시하는 자들…… 배교와의 싸움을 칼놀음 정도로만 생각해 산통을 깨고 다니는 자들도 그들이었다. "이상하군. 언 당주가 분명 부탁을 했을 텐데. 같이 움직이라고. 화산, 무당…… 이번에도 제멋대로 놀 참인가?" 당예가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렸다. 화산파가 왔다면 그들은 분명 비응보에서 자신과 합류해야 했다. 그런데 따로 놀고 있다는 것은… …. 당예는 이번에도 그들로 인해 일을 그르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작당에 부탁을 해 구대문파를 부른 일이 후회가 되었다. 가슴 속에 숨겨둔 적개심이 다시 끓어올랐다. "가시지요." 그가 가늘고 긴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출발하라!" 당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악진웅이 고함을 쳤다. * * * 우제준(禹製俊)은 운기행공을 멈추고 눈을 반개(半開)했다. 철(鐵) 을 꿰뚫듯 형형하게 빛나던 눈빛도 잠시, 가부좌를 풀자 그의 눈빛은 원래의 담담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은 태원의 한적한 객잔이다. 그는 덜컹거리는 객방(客房)의 문을 열었다. 휘잉! 휘이잉! 차디찬 바람이 사정없이 방안으로 몰아쳤다. 새벽이 오려 하건만 삭풍의 위세는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우제준은 객방 한구석에 놓여 있던 죽비(竹　) 비슷한 나무조각을 들었다. 그가 나무조각을 손바닥으로 쳤다. 딱! 딱! 딱! 나무조각에서 나는 소리가 맑고 장중하게 객잔을 울렸다. 그 소리는 점소이를 부르는 소리였다. 하지만 먼저 모습을 보인 자 는 점소이가 아니라 약관을 바라보는 소년이었다. 나이는 십 칠팔세 정도, 소년은 우제준과 같은 매화 문양의 도복을 걸치고 있었다. 우제준과 소년은 화산의 문하(門下)였다. "삼사형(三師兄), 일찍 일어나셨군요." 소년이 포권으로 우제준에게 예를 올렸다. "문천, 일찍 일어났구나. 추운데 왜 밖에 서 있는 게냐?" "삼사형이 운기조식(運氣調息)을 끝내기를 기다렸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게로구나. 들어오너라." 우제준은 장문천(張文天)이라는 그의 사제를 불렀다. 장문천이 객방으로 들어섰다. "어제 삼 경(三更)이 가까워 올 때, 누가 너를 찾아온 모양이더구 나. 발걸음이 무겁고 보폭(步幅)이 경망스러워 네가 어떻게 못할 자 는 아니라 생각했다." "알고 계셨군요. 그때 저를 찾아온 자는 비응보의 외당(外堂) 향주 (香主)라는 자였습니다. 그 자가 전하기를……." 장문천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점소이가 김이 펄펄 나는 세숫물을 들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야기하라." 우제준이 소매를 걷고 얼굴을 씻으며 말했다. "비응보의 수하들이 흑면호 전우삼이라는 자의 행방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월평을 지난 곳인데 태행산맥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더군요." "흑면호? 그 자가 누구냐?" "이곳에서는 제법 흉명이 높은 배교 교도라고 합니다. 비응보의 수 족(手足)들도 수 명이나 그놈의 대월에 참살(慘殺)을 당했다고 합니 다." "그런가?" 우제준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흑면호를 잡기 위해 비응보에서는 태행산맥 곳곳에 사람을 푼 모 양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 전혀 종적을 찾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 런데 얼마 전, 의외로 태행산으로 가는 길에서 화부(火夫)로 변장해 있던 비응보의 수하 하나가 놈의 종적을 발견한 모양입니다." "태행산?" "그렇습니다. 태행산입니다. 종적을 감추었던 흑면호라는 놈은 그 사이, 노인 한 명까지 데리고 나타났다 합니다. 그 노인의 정체도 심 상치 않아 비응보에서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탁! 탁! 탁! 우제준은 나무조각으로 손바닥을 치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커게 신경 쓸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흑면호 같은 놈들이야 비응 보에서 알아서 처치할 게고……. 또 태행산은 칠사형(七師兄)이 지키 고 있으니까요." 장문천이 말했다. 산서에 들어오면서 우제준은 자신의 세 사제들을 용문산(龍門山)과 살호구(殺虎口), 태행산으로 각기 보냈다. 섬서(陝西)를 가려면 용 문산을, 산동이나 하북을 가려면 태행산맥,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지 나 북방(北方)으로 가려면 살호구를 지나는 것이 가장 은밀한 길이다 . 만약 마옹이 산서에 들어와 있다면 마옹은 그 길 중에 한 곳을 택 해 다른 곳으로 가리라 우제준은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제 들을 각기 그곳으로 보낸 터였다. 물론 마옹을 잡는 일은 유향경천문과 공동(共同)으로 하기로 했었 다. 사부도 그에게 유향경천문의 일에 협조를 베풀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유향경천문은 강호의 풍진(風塵) 속에 놓인 문파다. 청정(淸 淨) 문규(門規)를 자랑하는 화산의 제자가 그들과 같이 다닌 다는 것 은 왠지 격이 맞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마옹이 만만치 않음 자 임을 알고 있었으나 연수로 적의 포획에 나선다는 것은 화산파의 체 면 문제……. 아마 그 때문에 사부도 유향경천문과의 동행을 특별히 강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행산을 지키고 있는 자는 척명일(拓明逸)이라는 그의 사제다. 우 제준이 도관(道冠)을 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응보주(飛鷹堡主)가 밤중에 사람을 보내 올 정도로 심상치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산서의 배교를 책임진 자는 유달리 조심성이 많은 자라 했다. 오 죽하면 강호인들이 그를 잠마라 부르겠느냐? 특히 우리가 나타난 후, 이곳의 배교도들은 쥐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움직였다 는 것은……." 우제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그의 검(劍)을 잡았다. "흑면호라는 놈은 앞 뒤 가림이 없는 놈이라 들었습니다. 제멋대로 움직였을 수도 있겠지요." 장문천이 따라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서 더욱 이상한 일이지. 그렇게 문제가 많은 자였다면 산서 배교의 마두, 잠마라는 자는 그에게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엄명을 내 렸을 것이다. 그런데 흑면호는 움직였어." 우제준이 객방문을 열었다. "태행산으로 가실 생각입니까?" 장문천이 그를 따라 나서며 물었다. "왠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구나. 흑면호와 대동한다는 그 괴노( 怪老)에 대해서도 감(感)이 좋지 않고. ……일이 없으면 또 어떠랴. 명일도 보고 태행산도 구경하는 게지." 우제준이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우러렀다. 계명성(啓明星)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검을 가져오겠습니다." 장문천이 자신의 방으로 후닥닥 뛰어들어가 허리에 검을 걸치고 나 왔다. 두 사형제(師兄弟)는 아직도 어둠이 완연한 객잔을 나서 태원 의 교외(郊外)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산서 배교의 마두, 잠마라는 자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될까요? " 길을 걸으며 장문천이 물었다. "내가 명일에게는 특별히 말했지. 마옹이나 잠마를 만나더라도 절 대 싸우지 말라고. 명일의 문제는 그가 지나치게 자신의 검에 자부심 을 가지고 있다는 게야." 우제준은 잠마는 물론 마옹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대 화산파 의 세 번째 제자다. 하지만 그는 사제들에게는 절대 자신이 마옹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표시하지 않았다. 사제들이 경거망동(輕擧妄動) 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칠사형은 그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문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낱 하오문인 배교도를 상대하는 데 검을 숨기라는 명까지 내린 사형에게 불만이었다. "강남에서 마옹의 손에 무당파의 제자, 명청(明淸)이 죽고 명화(明 華), 명인(明仁)은 큰 부상을 당했다. 비록 그들이 무당파에서 발군( 拔群)은 아니지만 철중쟁쟁(鐵中錚錚)을 자랑하는 무당의 제자들임에 는 틀림없지. 마옹은 강남의 분란(紛亂)으로 이제야 자신의 진가(眞 價)를 드러냈고 마두들은 이미…… 내가 이곳으로 오면서 가만히 헤 아려 보니 마두들에 의해 죽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벌써 이십 여명 에 이르고 있어. 놀라운 일이지. 배교의 세(勢)가 어느 때보다 약해 져 있다는 작금에……." "……."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서도 강호인들은 모두 네놈같이 배교의 실력을 얕보고 무시한다. 하오문! 오랫동안 눈과 귀가 그 말에 익숙 해져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장문천, 잊지 마라. 배교의 역사가 천 년이라는 것을…… 배교는 약해도 그 천 년 역사의 골간(骨幹)을 지 켜 온 수뇌들은 약하지 않다." 후두두두두둑! 산비둘기 몇 마리가 사람의 발걸음에 놀라 어둠 속을 비산(飛散)했 다. 우제준과 장문천은 벌써 태원의 교외를 걷고 있었다. 그들은 유 유자적(悠悠自適) 걷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 빠르기는 장한이 달리는 것보다 더 빨랐다. "어제 문호(門戶)를 연 문파가 오늘 한 줌의 재로 변해 있는 것이 강호의 현실이다. 지금 산서의 패주로 떠오르고 있는 비응보의 역사 도 고작해야 십 여년! 그런데도 배교는 천 년을 버텨 왔다. 천 년.… …." 우제준은 긴 호흡을 삼켰다. 새벽을 앞둔 밤공기는 폐부를 찌를 정 도로 찼다. "습지(濕地)를 천 년 동안이나 기어다닌 놈들입니다. 그런데도 아 직 명맥(命脈)을 유지하고 있지요. 대단한 놈들은 맞는 것 같군요." 장문천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의 말투는 다분히 비아냥거림 조였다. "핫하하! 그렇다. 그들은 그렇게 천 년을 쫓겨다녀도 아직 살아 있 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천 년 동안 도망 다니는 비법(秘法)만 익혔 다고 하자. 그 비법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내가 배교의 환술을 쉽 게 잡술로 치부하지 않는 이유지." 우제준은 그의 사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장문천은 입을 굳 게 다물고 있었다. 배교를 지나치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우제준의 태 도가 시종(始終)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나는 네가 내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말았으면 한다. 무당의 제자들이 어디 스스로 죽고자 해서 죽었겠느냐? 배교의 무리 들을 만나더라도 쉽게 검을 뽑지 마라. 강호에서 한 번의 실수는 바 로 죽음이다. 그리고 어차피 대사형(大師兄)이 너를 나를 따라 내려 보낸 것도 강호를 두루 살펴보게 하기 위함! 배교도들을 처치하는 문 제는 나와 네 사형들이 맡을 것이다. 알겠느냐?" 우제준이 장문천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근엄하게 소리쳤다. 직접 겪 어 보지 않고 그 일의 어려움을 아는 자는 뛰어난 자다. 하지만 그런 자는 쉽게 나지 않는 법! 대다수는 쓴맛을 봐야 자신의 경솔함을 깨 닫는다. 그러나 강호는 쓴맛을 죽음으로 다반사(茶飯事) 요구하는 곳 이다. 우제준은 자신의 어린 사제에게 자칫 잘못될 수 있는 그 쓴맛 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강호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곳임을 설 파하고 또 설파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장문천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다수의 강호인들은 강호의 연륜 을 경험으로 쌓는 듯했다. 아무리 떠들어도 경험이 얕으면 받아들이 는 폭도 그 이상 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장문천도 마찬가지인 듯… … 그는 자신의 사제에게 더 이상의 설교는 그만 두기로 했다. "곧 새벽이 오려는 모양이구나." 어둠은 한치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깊어져 있었다. 우제준은 그 어둠을 응시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왠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서두르자!" 우제준이 신형(身形)을 뽑았다. 그의 신형이 한줄기 그림자로 어둠 속에 파묻혀 갔다. 장문천은 장검(長劍)을 철컥이며 그 뒤를 따랐다. * * * 주화청의 백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야수(野獸)의 눈처럼 민활(敏 活)하게 움직였다. 마의(麻衣)도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의 귀는 관제묘(關帝廟)의 낡은 문이 삐꺽거리는 소리는 물론 사방 십 여장 내의 나뭇잎 구르는 소리까지 찾아냈다. 그러나 사람의 인기척은 없 었다. 기파(氣波)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 오시지 않았는가?" 주화청은 천천히 공력(功力)을 풀었다. 그때였다. 츠츠츠츠츠……! 뱀이 풀밭을 기는 듯한 경미한 소리가 주화청의 귀를 울렸다. 오 장여 밖이었다. 고목(枯木) 사이에 놓여 있던 한 채의 커다란 바위가 운무(雲霧)로 일어서고 있었다. 운무는 빠른 속도로 사람의 형상(形象)을 그려 갔다. 주화청의 신형이 비호(飛虎)처럼 움직였다. 그의 우수(右手)에는 섬전(閃電)처럼 푸른 협도(狹刀)가 번뜩이고 있었다. 장대에 숨겨져 있던 협도였다. 주화청이 사람의 형상으로 일어서는 운무를 향해 일도(一刀)를 뻗 어 갈 때였다. 휙! 운무 속에서 묵선(墨線)이 일 자(一字)를 그리며 주화청을 쏘아 갔다. 주화청이 절묘한 금나술(擒拏術)로 자신을 향해 쏘아 오는 물체를 거머쥐고 허공에서 빙글 신형을 틀었다. 그는 손안에 든 물체를 재빠 르게 더듬었다. 묵선으로 쏘아 오던 물체는 삼각형의 작은 깃발이었다. 주화청이 그 깃발을 모를 리 없었다. 전교영기! 전교영기를 날린 자는 그가 기다리던 자였다. 주화청은 전교영기를 받든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산서의 명두, 주화청이 명옹을 뵈 옵니다." 그가 오체투지로 부복했다. 바위에서 피어오르던 운무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빛 바랜 청의(靑衣)에 신장도를 든 청년이 서 있었다. 명강량! 배교의 젊은 지존……. 주화청이 만나기로 되어 있던 자는 바로 그였다. "주 명두, 오랜만입니다. 기다려도 오지 않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은형술로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명강량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주화청에게 다가갔다. 주화청은 감회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삼 년 전 황산대전에서 보았던 가요? 세월은 고작 삼 년인데 그때가 마치 억겁(億劫) 전의 일처럼 느껴집니다." 주화청의 얼굴이 복잡한 상념(想念)으로 물들었다. "일어나십시오." 명강량은 전교영기를 회수한 후, 주화청을 부축해 일으켰다. 주화 청이 명강량을 마주 대하고 섰다. '소문대로…….' 주화청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호교신장이라는 직책이 명강량을 변하게 했는지 아니면 몇 개월의 환란(患亂)이 명강량을 변하게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 든 명강량은 삼 년 전, 황산에서 봤을 때와 너무도 달라 보였다. 사위를 압도하는 묵묵한 기파……. 주화청은 그 기파의 중압감(重壓感)에 어깨를 추슬러야 했다. 삼 년만에 그의 앞에 선 명강량은 이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교의 지 존(至尊)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주화청의 즐거움은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이야기들은 들으나 마나 암울한 이야기들로 가득할 것이다. 주화청은 감회에 젖어 잠시 말을 잊고 있었다. 명강량이 노인의 상념을 깼다. "주 명두, 죄송합니다. 오래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아! 그렇겠지요." 주화청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들어갑시다." 그가 관제묘로 명강량을 안내했다. 주화청과 명강량은 어깨를 나란 히 한 채 묵묵한 발걸음을 옮겼다. 전우삼의 가슴은 심하게 두근거렸다. 운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 그는 두 말 할 것 없는 명옹이었다. 전우삼은 나무 사이에 깊게 몸을 숨긴 채 명옹의 얼굴을 조금이라 도 더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어둠이 지천이고 거리가 삼 십 여장이나 떨어져 전우삼의 그 좋은 눈도 명옹의 얼굴을 보기가 쉽 지 않았다. 다행히 때맞추어 여명(黎明)이 빛줄기를 뿌려 그는 명옹의 얼굴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순간, 전우삼의 얼굴에는 적잖은 실망의 표정 이 어렸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 나이는 소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의 것은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팔 척 거한에 태산(泰山)을 압도하는 위엄, 두 눈은 화광(火光)으 로 빛나 철석(鐵石)을 녹일 정도라 했다. 과히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절로 머리를 숙이고 경배할 만한 자태(姿態)……. 교도들 사이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젊은 명옹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전우삼이 직접 눈으로 확인한 명옹의 모습은 너무도 평범했 다. 중키에 여기저기 핏자국으로 물든 빛 바랜 청의, 어수룩한 동작 …… 그저 나무 쌈지나 지고 다닐 화부의 모습에 딱 어울렸다. '젠장!' 전우삼은 왠지 맥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광륜(光輪)을 뿌리며 천하 를 질주하는 명왕의 모습이 아니라도 좋았다. 최소한 그는 명옹이 복 수에 이글거리며 세상을 혈해에 잠기게 할 암왕의 얼굴로는 나타날 줄 알았었다. '지금은 어둠의 한 가운데…… 암왕은 오지 않는가? 나는 암왕을 원한다. 암왕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백염왕! 나백염왕 같은 자라도 나타났으면……. 그러면 놈들의 시신을 조각 내고 육포(肉脯)를 실컷 씹을텐데.' 전우삼은 나무에 몸을 기댄 채 진금구에게 들은 나백염왕을 떠올리 고 있었다. 그가 나백염왕으로 명옹에 대한 실망감을 달래고 있을 때 였다. '헉!' 전우삼은 한줄기 섬광(閃光)이 전신을 관통(貫通)하고 지나 는 충격에 몸을 움츠렸다. 화광이었다. 명두와 함께 관제묘로 들어서려던 명옹의 두 눈에서 뿜어 나오는 빛! 그 빛은 삼십 여 장을 격(隔)한 전우삼의 눈동자에 뚜렷이 박혀 전우삼의 몸을 꼼짝 못하게 얽어맸다. '으으으…….' 전우삼은 이빨을 딱딱 부딪혔다. 그의 혼은 암계(暗界)의 지옥도( 地獄圖)를 거닐었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 지옥도가 순식간에 안개처럼 사라졌다. 전우삼은 혼이 나간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명두가 명옹의 팔을 잡고 관제묘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관제묘 의 문이 닫혔다. 전우삼은 긴 한숨을 쉬었다. "모…… 몽환술(夢幻術)이라는 것인가? 젠장! 죽다 살아나는 줄 알 았어. 하…… 하긴 명옹의 명성이 그냥 날 리는 없지." 그가 이마에 식은땀은 닦았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전우삼은 그제야 오체투지로 명옹을 배알(拜謁)했다. 낡은 관제묘의 나무벽 사이로 여명은 실오라기 같은 빛을 연신 뿌 렸다. 명강량의 눈은 그 빛줄기 사이에 선 노인을 쫓았다. '정말로 억겁의 세월이 흐른지 모르겠구나.' 세월의 연륜이 보태 준 주름살은 이제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초 점 없는 백안도 무심함으로 더 깊어져 있었다. 산서 명두, 주화청! 명두라는 높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항상 낮은 목소리로 교도들을 대 하는 인물, 하지만 교의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를 하지 않는 고집통이 그였다. 그 때문인지 명강량은 유달리 주화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 고 있었다. 그는 주화청의 주름진 얼굴에서 오랜만에 평안(平安)을 느꼈다. 명강량이 침묵을 지키자 주화청이 먼저 입을 뗐다. "보셨습니까?" 주화청은 명강량이 전우삼을 발견했음을 눈치챘다. 지척에서도 자 신에게 기파를 들키지 않았던 명옹이다. 전우삼 정도는 쉽게 눈에 띄 었을 것이다. "누구입니까?" "내가 데려온 아이외다. 하도 명옹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기에… …." "주 명두께서 친히 데리고 다니시는 것을 보니 훗일 교를 위해 큰 일을 할 자겠군요." "맞습니다. 이곳의 차기 명두로 생각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얼굴만 이라도 명옹께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 잘못 된 줄 알면서도 데리고 왔습니다." "아닙니다." "잘 키워 명옹의 한 팔로 쓸 수 있게 해야 할 텐데……. 성질이 워 낙 급한 놈이라……." "좋아지겠지요. 나도 이전에는 쓸만한 재목이 아니었습니다." 명강량이 씨익 웃었다. "주 명두, 앉으시지요." 그가 주화청에게 자리를 권했다. 명강량과 주화청은 서로를 마주보고 앉았다. "명옹의 위신력(威神力)이 나날이 높아져 가는 것 같소. 솔직히 노 부는 오 장 내에서도 명옹의 기파를 전혀 느끼지 못했소." "부끄러울 뿐입니다. 저는 교도들의 방호벽(防護壁)이 전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사부는 호교신장의 자리를 잘못 물려준 것 같습니다." "아니오. 아니외다. 광명계에 계신 전대 명옹께서도 당신의 선택이 틀림없었음을 좋아라 하고 계실 것이오. 이 어려운 시기에 명옹이 아니었던들 교가 어찌 이만큼 견뎠겠소." 주화청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즐 거워하는 중이었다. 삼 년 전, 황산대전의 주요 의제(議題)는 차기 명옹을 선임(選任) 하는 것이었다. 그때 전대 명옹은 명강량을 차기 명옹으로 지명했다. 대다수의 명두들은 명강량이 차기 명옹으로 지명 받은 데에 대해 반 대를 표했다. 교가 드물게 뛰어난 인재(人才)로 넘실거릴 때였다. 그 제자들 중 에는 교의(敎義)에 해박한 자도 있었고 타고난 무골(武骨)도 있었다. 형세(形勢)에 빠른 자도 있었으며 몇 백년 간 교에 충성을 바친 후 예(後裔)도 있었다. 그런 자들과 비교해 명강량은 특별함이 전혀 없 어 보였다. 다른 명두들의 반대는 당연했다. 후계자를 두고 전대 명옹과 명두들 사이에 갑론을박(甲論乙駁)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 몇 몇의 명두들이 전대 명옹의 편을 들었고 명 강량은 결국 차기 명옹으로 정해지게 되었다. 주화청은 명강량을 차기 명옹으로 밀었던 명두 중의 한 명이다. 원 래 주화청은 '전혀 아니다'라는 일 외에는 교에 자신의 고집을 내세 우는 경우가 없었다. 하지만 황산대전에서는 달랐다. 그는 다른 명두 들이 서슬에 질릴 정도로 고집을 부렸다. 주화청이 고집이 세다는 것은 그가 고집을 자주 부려서가 아니라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누구도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화청 은 그 고집으로 전대 명옹을 도와 명강량을 차기 명옹의 자리에 앉혔 다. 회의가 파(破)한 후, 명두들이 물었다. '그 아이를 그렇게 지지한 이유가 무엇이요?' 주화청은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우직해서'라고 이야기하기 에는 왠지 명옹의 자격으로 답이 궁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명 옹의 첫 번째 자격은 우직함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주화청은 앞을 보지 못하는 지라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사람 을 본다. 그는 명강량에게서 바위보다 더 단단한 강단을 보았었다. 그리고 지금 교의 젊은 지존은 그의 기대대로 어려움에 빠진 교를 무쇠같은 용력(勇力)으로 헤쳐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주화청은 명강량을 손자(孫子)처럼 업고 다니고 싶을 정도 로 좋았다. 사람의 마음은 표시를 해야 통하는 것이 아니다. 명강량도 주화청의 훈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편한 자세로 앉으며 신장도를 풀었다. "주 명두, 산서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만남의 반가움도 잠시 그들은 이내 가슴을 짓누르는 암담한 현실을 이야기해야만 했다. "우리야…… 비응보라는 놈들이 조금 성가시게 굴기는 하여도 그렇 게 염려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곳이 걱정이지요. 강남의 각 성은 아수라장이라고 하던데……." 주화청은 미간을 좁혔다. "소문대로 좋지 않습니다. 이대로 마냥 당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이고 시급한 조치들을 취해야 하는데……. 주 명두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습니다." 명강량이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주화청은 명강량의 담담한 어투 뒤에 숨어 있는 고뇌(苦惱)를 생각 했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었으나 명옹이라는 자리는 젊은 그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자리일 것이다. 가슴은 쓰렸지만 주화청은 위로의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어차피 명옹으로 주어진 난관은 명옹이 넘어야 하니까. "여기로 오기까지 각 성의 명두들로부터 여러 의견을 들었을 줄 압 니다.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던가요?" 주화청은 평소대로 자신의 의견을 먼저 내세우지 않았다.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강남입니다. 교도들의 시신이 저자 거리에 서 연일 피투성이로 뒹굴고 있지요. 그곳의 명두들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복수! 그들은 혈채(血債)를 갚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토끼처럼 쫓겨다니는 생활은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악이 받칠 대로 받쳐 있겠지요. 눈에 보이는 것은 복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화청은 긴 한숨을 쉬었다. "특히 강동(江東), 강서(江西)의 교도들은 호협(豪俠)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여양의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의 생각도 교도 들과 같습니까?" "……." 명강량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북상(北上)은 너무도 빨라 여 명두 가 죽었다는 소문도 그를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여 명두는 죽었습니다. 강을 건너는데 적기명사가 그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명강량이 신장도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 주화청은 숨을 멈추었다. "양의가 죽었다고? 양의가……." 그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늘 듣는 소식이 사람 죽는 소 식이라 주화청은 웬만한 일에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여양의 의 죽음은 달랐다. 여양의는 교에서 그와 가장 가까운 지기(知己)였 다. "그를 죽인 자는 누구입니까?" 주화청이 눈을 질끈 감으며 물었다. "유향경천문!" "유향경천문……." 주화청이 신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노안에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비통함으로 피를 토할 심정이었다. 눈앞에 명옹이 없 었다면 눈물이라도 뿌렸을 것이다. "여 명두도 죽고…… 주 명두, 이제 강남에 남은 명두는 세 명뿐입 니다. 그 세 명은 모두 피의 복수를 말했던 분들이지요. 강을 건너기 전, 나는 여 명두를 만나 말했습니다. 그 분들을 설득해 달라고. 하 지만 이제 여 명두가 죽었으니 그들을 달랠 길은 없을 것 같습니다." 담담하던 명강량의 얼굴에 비로소 그늘이 졌다. "누구하고 싸우겠다고 하던가요? 세상이 모두 적입니다. 세상을 상 대로 미친소처럼 달려들겠다고 하던가요?" 주화청이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누가 있겠습니까? 유향경천문! 그들만은 반드시 죽여 없애겠 다고 했습니다." "뭣?" 주화청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아이들의 생각도 아니고…… 유향경천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강남의 명두들은 아직 모르고 있던가요? 그렇게 당했 으면서…… 허허허!"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명옹이 그 같은 명을 내리면 따라야 할 터! 명옹의 생각도 그와 같습니까?" 주화청이 백안을 번뜩이며 물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찾았다. 그가 신장도를 무릎에 놓으며 입을 열 었다. "주 명두, 불행히도 사부께서는 나에게 명옹이라는 자리를 맡기고 떠났습니다. 명옹이라는 자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여산 기슭의 유향경천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태화궁(太和宮) 이나 소실봉(少室峰)을 찾았겠지요." 그가 무심하게 말했다. 태화궁은 무당파의 본전(本殿)이고 소실봉은 소림(少林)이 있는 곳 이다. 주화청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는 짧은 순간, 명강량의 전신에서 폭 죽처럼 쏟아지는 살기를 느꼈다. 말투는 담담했으나 명강량이 유향경 천문과 구대문파에 대해 쏟는 살의(殺意)는 주화청의 가슴까지 격탕( 擊　)시킬 정도였다. 친부(親父)처럼 따르던 사부의 죽음,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동료 들도 짐승처럼 죽어갔다. 어찌 분노가 없으랴! 하지만 주화청은 명강량의 그 분노가 불안했다. "명옹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르겠소." 주화청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강량의 보이지 않는 분노는 반대로 주화청의 분노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었다. 희노애락(喜怒哀 樂)에 무감한 듯 보였지만 그래도 명옹은 흥분하기 쉬운 젊은 나이다 . 명옹이 흥분으로 자칫 신장도를 치켜들면 교의 존망(存亡)이 달린 한바탕 혈란(血亂)은 피할 도리가 없었다. 명강량은 주화청의 안타까운 그 마음을 아는 듯했다. "강남의 명두들이라고 어찌 그들을 상대로 한 싸움의 무모함을 모 르겠습니까? 앉아서 죽느니 호쾌하게 한 판 싸움이라도 벌이고 죽자 는 것이겠지요." 그가 자신의 분노를 가슴 저 깊은 곳에 숨기며 말했다. "명두라는 자들이 어찌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귀담아 들을 이 야기도 못됩니다. 벌써 죽을 자리나 찾다니!" 주화청이 질책하듯 소리쳤다. "감정으로 내뱉은 말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유향경천문과의 한 판 싸움으로 본교의 의기(義氣)를 천하에 보여준 후, 운남(雲南)이나 청 해(靑海)로 가자고 했습니다." "운남이나 청해? 그 변황에는 무슨 일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곳에서 우리들의 쉴 자리를 찾자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주화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만히 숨어 있어도 적들은 귀신(鬼神)같이 교도들을 색출(索出) 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재주로 운남이나 청해까지 간단 말입 니까? 그리고 운남이나 청해는 말 그대로 허허벌판입니다. 적들로부 터 우리를 숨길 그 무엇이 있다고 하던가요? 중원인들이라면 이를 가 는 이민족(異民族)들의 공세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일이 분명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외는…… 주 명두, 저는 그 외는 이 환란을 수습할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명강량이 신장도에 두 손을 모았다. "……." 주화청은 미간을 좁히며 침묵에 빠졌다. 그라고 무슨 별다른 방법 이 있을까.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명왕께서 도와주실 것이오." 결국 그가 의지한 곳은 시간과 신(神)이었다. "명왕께서 도움을 주실 생각이 있었다면 벌써 도와주셨을 것입니다 . 주 명두, 지금 이 시각에도 몇 몇의 교도들은 적들의 칼에 피를 뿌 리고 있을 것이오." 불경스러운 짓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명강량은 명왕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반사적으로 화가 났다. 주화청은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 다. "명옹, 이 늙은 것이 명옹의 결단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 채 주제넘은 간섭만 했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명옹의 결단은 교의 결 단……." 대안(代案)이 없다면 주화청의 선택은 젊은 명옹의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게 마음이나마 편하게 해 주는 것이었다. "그 결단을 내리기에는 어깨가 너무 무겁습니다. 주 명두, 호교신 장의 임무는 한가지만이 아닙니다." 교의 호교신장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다. 교를 지키고 성녀를 수호하는 일! 그 중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성녀를 지키는 일이다. 사부는 바로 성녀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었었다. 그리고 사부가 죽음으로써 그에게 내린 명도 끝까지 성녀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호교신장에게 있어 성녀를 지키는 일은 어떤 일보다 앞서는 일이었 다. 성녀를 지켜야 할 책임이 없었다면 싸워야겠다던 강남 명두들의 청을 수월하게 받아들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성녀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싸우겠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었다. 그는 성녀를 위해서도 쉽게 죽을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렇지요. 성녀도 지켜야지요. 늙은 것이 불충해서 먼저 성녀의 안부를 묻는 것도 잊었습니다. 성녀께서는 잘 계신지요?" 주화청이 황망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잘 계십니다. 요즘은 둔갑술(遁甲術)에 재미를 붙여 시간 가는 줄 모르십니다." "일전에는 화령술(火靈術)에 정신없이 빠져 계시더니…… 어쨌든 다행입니다. 십 여년 만에 본교로 돌아온 성녀외다. 성심껏 모셔야지 요." 주화청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명옹, 내가 죽기 전에 다시 성녀를 볼 수 있을 것 같소?" "당연히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명강량이 굳게 말했다. "그렇게 된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소." 주화청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관제묘를 울렸다. 명강량과 주화청은 잠시 그들이 할 이야기를 잊고 침묵 속으로 빠 져들어 갔다. 휘잉! 휭! 위잉! 잠시 잦아들던 삭풍은 다시 맹위를 떨쳤다. 관제묘를 실오라기처럼 파고들던 빛줄기도 사라지고 없었다. 눈이 오려는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갑자기 길이 멀게 느껴지고 마음도 조급해졌다. 그의 마 음도 주화청의 마음처럼 성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제5장 난설(亂雪) 비응보 외당당주, 문호일은 삼십 여명의 외당 수하들과 함께 움푹 한 산허리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와 삼십 여장을 떨어진 곳에는 한 마리의 검은 호랑이가 나무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검은 호 랑이는 비응보의 수하들을 수 명이나 포식(飽食)한 식인호(食人虎)였 다. 흑면호 전우삼! 보주로부터 가볍게 움직이지 말라는 명은 받았지만 문호일은 손이 근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배교대척살령이 내린 후, 그가 이끄는 외당은 배교도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변변한 전과(戰果) 한 번 올리 지 못했었다. 싸움이 벌어지면 언제나 피해를 입는 쪽도 그였다. 때 문에 그는 보주로부터 누차 면박을 받았었다. 누이가 보주의 애첩(愛 妾)이 아니었다면 벌써 외당당주 자리는 다른 자에게 돌아갔을 것이 다. 지금은 어쨌든 누이 덕분에 당주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그 전에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어 야 했다. 흑면호는 산서에서 잠마 다음으로 흉명을 떨치는 자다. 그런 점에 서 흑면호는 자신의 체면을 세워 줄 수 있는 적임자였다. 하지만 문 호일은 흑면호에 대한 공격을 쉽게 결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놈의 대월에 토막난 수하들만 해도 몇 명인가?' 문호일은 걱정이 앞섰다. 역시 흑면호는 쉽게 칼을 뽑을 상대가 아 니었다. 그는 흑면호와 약간의 면식도 있었다. 비록 냉랭한 사이였지 만 배교척살령이 있기 전까지는 죽자고 달려드는 관계는 아니었었다. 그래서 그는 흑면호를 더욱 잘 알았다. 흑면호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목숨의 반은 미리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문호일은 망설이며 향주들을 둘러보았다. 향주들은 수십 번이나 표정을 바꾸는 문호일의 얼굴에서 이미 그의 의중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흑면호를 처치하자 고 나서는 자는 없었다. 향주들 중에는 흑면호의 대월 솜씨를 직접 경험한 자도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 칼밥을 먹은 게 아니라 눈칫밥만 먹은 놈들이구 나. 내가 이런 놈들을 수하라고.' 문호일은 향주들이 눈만 떼굴떼굴 굴리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울화가 치솟았다. 그가 턱을 매만지며 한바탕 발작을 하려 할 때였다 . 사자코 장한이 나섰다. "보주께서는 신중히 행동하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 이곳으로 올 예정이니 그때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사자코 장한은 외당 일향주(一香主)였다. 문호일의 눈이 찢어졌다. '보주께서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한 것은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 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그런데도 이놈은…….' 그는 일향주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다. 일향주의 말이 틀린 것 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향주는 경륜도 무공 실력도 그 보다 나았다. 당연히 보주와 수하들의 신임도 일향주가 높았다. 누이 덕만 아니었으면 당주의 자리는 이미 일향주가 차지하 고 있었을 것이다. 문호일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기에 그는 일향주에 대한 자격지심(自激之心)을 털어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향주의 말이 맞습니다. 보주께서 곧 오실 텐데 뭘……." "흑면호 뿐만 아닙니다. 관제묘의 늙은이도 심상치 않습니다. 보주 께서는 관제묘의 늙은이를 잠마로까지 의심하셨습니다." "당주, 섣불리 나서다 또 일을 그르친다면 정말 우리 외당은 보주 의 노여움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던 향주들도 일향주의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문호일의 눈은 더욱 찢어졌다. 수하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일향주를 지지하고 나서자 그의 심경은 더욱 뒤틀렸다. '네놈들이 나를 얕봐도 너무 얕보는 구나. 그럼 어디…….' 문호일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자신의 칼을 스르릉 뽑았다. 향주들의 안색이 변했다. "흑면호에게 가장 피해를 입은 곳은 바로 우리 외당이다. 원수를 눈앞에 두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이미 칼을 잡을 자격이 없는 자다. 흑면호는 우리가 처치한다." 문호일의 결심은 결국 흑면호를 처치하는 쪽으로 결정 났다. 그 공 은 전적으로 일향주의 몫이었다. "관제묘의 늙은이가 잠마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향주가 급히 물었다. "관제묘의 늙은이가 잠마라면 더욱 문제지. 만약 잠마와 흑면호가 동시에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 때문이라도 흑면호는 미리 제압(制壓)해야 한다." 문호일의 결심은 확고부동했다. 향주들은 더 이상 말을 붙여 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이 무식한 상관은 결정은 어렵게 하지만 일단 결정을 내리면 자신의 말을 철석 같이 지켰다. "관제묘의 늙은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단번에 흑면호를 제압해야 한다. 전면은 일향주가 맡아라. 좌측면은 이향주, 우측면은 삼향주가 맡는다. 가자!" 문호일이 칼을 치켜들었다. 비응보 외당의 수하들이 자세를 낮추며 마지못한 발걸음을 옮겼다. * * * 빛 바랜 청의는 그가 걸어온 길을 말해 주듯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칼은 신장도……. 관제묘 밖을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청의 청년은 바로 배교의 젊은 지존 명강량이었다. 새벽은 여명으로 잠깐 빛을 뿌리더니 다시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 바탕 폭설(暴雪)이 쏟아질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주화청이 서둘러 무슨 묘법(妙法)을 내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주화청은 아무 말도 없었다. 호남의 여 명두를 만났을 때처럼 그냥 떠나는 도리밖에 없는 듯했 다. 그가 주화청에게 작별을 고하려 할 때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주화청이 입을 열었다. "대전(大典)을 열었으면 합니다." "대전을?" "어려움이 있겠지만 모든 명두들을 한 자리로 불러 봅시다. 대전을 연지도 너무 오래 되었소." 원래 배교의 대전은 격년(隔年)으로 열린다. 작년에 대전이 열려야 했으나 갑작스런 적들의 공세로 열리지 못했었다. "대전에서 명두들의 중지를 모읍시다. 그곳에서 우리 교의 진로를 결정 짓기로 하지요. 이마를 맞대고 결정 지은 일이라면 가타부타하 는 명두들도 없을 것입니다." 명강량은 턱을 매만졌다. 대전을 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대전을 열기를 주저한 이유는 명옹으로서 그 가 명두에게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대안없이 명두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니…….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정말 그 방법 외는 다른 방법이 없는 듯했다. 자신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할 도리밖에……. "어디가 좋을 것 같습니까?" 대전이 열리는 곳은 언제나 황산 총단이다. 그러나 지금 황산의 총 단은 불타고 없었다. "무산(巫山) 신녀봉(神女峯)! 다섯 달 후, 망월(望月)에 모두 모이 기로 하지요." 주화청이 말했다. "명사들에게 그 명을 전하라 하겠습니다." 명강량이 신장도의 도신을 손가락 끝으로 툭치며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주화청이 물었다. "하남의 양 명두를 만났으면 합니다." "양 명두라고 무슨 특별한 생각이 있겠습니까? 무산에서 모두 같이 모인 자리에서 보시지요." "황기명사에게 산서를 찾은 후, 하남을 들르겠다는 명을 양 명두에 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약속을 어기면 양 명두가 섭섭해 할 것입니다 ." "그렇지요. 섭섭해 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적들이 혈안이 되어 명옹을 찾고 있습니다. 이 늙은 것은 그것이 걱정입니다." "그렇다고 숨어 다닐 수 만은 없는 일입니다. 명옹이 밝음을 피해 어둠 속으로만 파고들면 교도들부터 비웃을 것입니다." 명강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주화청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어렸다. 그가 젊은 명옹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명옹의 이런 점 때문이었다. "아! 주 명두, 가능하면 산동과 하북의 명두를 저 대신 한 번 만나 주십시오. 강남은 순회를 했는데 강북은 순회를 하지 않는다고 섭섭 해할지 모르겠습니다. 직접 찾아가는 것이 예의나…… 강남에서 무당 파의 제자들과 소란을 일으킨 후, 적들의 추적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목(耳目)도 이곳으로 쏠려 있어 양 명두를 만난 후, 서둘러 서천( 西天)으로 가고자 합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동북(東北)의 명두들은 제가 명옹을 대신해 만나겠습니다. 그들도 명옹의 사정을 잘 아니 섭섭해하지는 않을 것 입니다." "그럼 주 명두, 뒷일을 부탁합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허리에 맸다. 밖이 환해지고 있었다. 눈발이 흩 날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 길이 멀었다. 눈이 허리까지 쌓이기 전 에 길을 서둘러야 했다. "무산에서 다시 뵐 수 있도록 바라겠습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주화청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늙은 것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명옹께서나 몸조심하십시오. 그 리고 성녀께도 이 늙은 것이 안부를 여쭙는다고 전해 주십시오. 부디 몸 건강하시기를……." 그가 읍을 했다. 명강량을 보내는 주화청의 마음은 어린 손자를 먼 길에 떠나 보내는 마음과 같았다. 명강량은 옷을 추슬렀다. 그때였다. 명강량의 두 눈에 섬광이 번쩍했다. '쩡!'하는 쇳소리가 산림을 울리고 있었다. 명강량이 관제묘를 뛰 쳐나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주화청이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비응보의 더러운 개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전우삼의 악에 받친 고함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뿔싸! 그렇게 조심했건만 결국 꼬리를 달고 말았구나." 주화청은 탄식을 터뜨리며 명강량의 인기척을 찾았다. 그러나 명강 량의 인기척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들리는 것은 칼 부딪히는 소리 와 전우삼의 욕지거리 뿐! '벌써 가셨는가? 명옹에 대한 사죄는 나중에 하고 우선 저놈들부터 막아야겠다.' 휙! 주화청이 신형을 날렸다. 그의 협도가 눈발을 가르며 비응보 외당의 수하들을 쏘아 갔다. * * * 화산파 장문인(掌門人), 숭양진인(崇陽眞人)의 일곱 번째 제자, 척 명일은 나무 사이를 미끄러지듯이 달려가고 있었다. 쨍! 쨍! 쨍! "으악!" "악!"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더욱 요란했다. 하지만 척명일은 비응 보 수하들이 내지르는 비명을 무시했다. 그가 목표로 삼는 곳은 관제 묘! 그는 전망 좋은 곳에 앉아 태행산에 일어나는 일들을 샅샅이 보 고 있었다. 앞뒤를 짐작컨대 관제묘에 최소한 잠마 정도의 거물이 버 티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삼사형, 우제준은 배교 수뇌들과 조우하더라도 절대 싸우지 말라고 명했었다. 사부, 사형이 한 번 입밖에 낸 말은 지엄(至嚴)하다. 그 렇지 않고서 어찌 화산파가 대문파가 되었으랴? 그러나 척명일은 지 금 사형의 명을 어긴 채 관제묘로 달려가고 있었다. 불가(佛家)에서 개차법(開遮法)이 있듯이 화산파에도 개차법이 있 다. 절대의 명(命)인 사형제의 명을 비켜 갈 수 있는 법이…… 사형 제의 명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목전(目前)에 위태로운 사람 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구하는 일이 우선이다. 비응보의 수하들이 배 교도에 의해 절대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화산파의 제자라면 당 연히 그들을 위기에서 구출할 의무를 져야 했다. 사형의 명을 어겨서 라도……. 하지만 정작 척명일은 비응보의 수하들을 돕기 위해 달려가고 있지 않았다. 그에게 비응보 수하들의 위기는 좋은 핑계일 뿐이었다. 사 실 그는 싸우고 싶었다. 마옹, 마두를 위시한 배교의 수뇌들에게 죽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한 둘이 아니다. 척명일은 그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불타는 호 승지심(好勝之心)에 시달리고 있었다. 때맞추어 어리석은 비응보의 수하들이 배교도에게 시비를 걸어 주었기에 척명일은 그 뜻을 이룰 수가 있었다. '나는 안다. 결국 내가 검의 투기(鬪氣)를 이겨내지 못했음을……. 자신의 검을 제어하지 못하는 자! 나는 심마(心魔)에 걸린 것이다. 하지만 싸우고 싶다. 어쩌면 적이 상상외로 강해 죽음을 맞을지라도 …….' 척명일의 발걸음은 검의 부름에 따른 것이었다. 검에서 느껴지는 투기가 그를 관제묘로 이끌고 있었다. 생각은 긴 것 같았지만 그가 관제묘를 삼사 십 여장 남겨 두었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촌각에 불과했다. 척명일은 관제묘를 앞두고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심결(心 訣)을 외며 호흡을 골랐다. 그 순간, 척명일은 휘날리는 눈발 사이로 어른거리는 그림자 하나 를 보았다. 그 그림자는 눈발을 헤치며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아무런 기파도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산중(山中)이니 태 행산이라고 화부 한 둘 쯤은 없으랴. 그러나 척명일은 이내 미간을 좁혔다. 달그락! 달그락!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자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물체는 나무꾼이 차고 있어야 할 도끼가 아니었다. 작자의 허리에서 달랑거리는 물체 는 언월도였다. 척명일은 그제야 상대가 예사롭지 않은 자임을 느꼈 다. "누구냐?" 그가 검을 잡아가며 물었다. 척명일을 향해 다가가던 자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그도 유연한 자세로 허리에 묶인 칼을 잡아갔다. 신장도! 배교의 지존, 명옹의 신물……. 척명일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는 바로 명강량이었다. 그는 전우 삼이 싸우고 있는 자들은 별 대수롭지 않은 자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관제묘를 향해 쏜살 같이 달려오고 있는 자는 최소한 구대문파의 제 자 정도는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오랜 수련을 겪은 자만이 토해낼 수 있는 기파……. 역시 눈앞에 나타난 자는 구대문파의 제자가 맞았다. 화산파의 제 자…… 구대문파 제자와의 싸움은 이 번이 두 번째다. 무당파 제자들 과 싸울 때는 처음이라 많은 긴장도 했지만 명강량은 이제 제법 여유 도 찾고 있었다. 그 여유는 척명일에게도 느껴졌다. 척명일은 일개 하오문인 배교의 무리가 감히 대화산파의 제자를 상대로 여유를 부리고 있다는 생각 에 배알이 뒤틀렸다. 척명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검이 명강량의 심장을 향해 날아간 때는 바로 그때였다. 팟! 한줄기 미풍(微風)처럼 가볍게 날아가는 검세(劍勢)! 하지만 칼 끝에 이는 바람은 눈발을 천공으로 휘날리게 할 정도로 매서웠다. 화산파의 무공은 발검술(拔劍術) 하나로도 그들의 자리를 증명하고 남았다. 명강량은 척명일의 검세에 정면으로 대항하지 않았다. 그는 미끄러 지듯이 주르르 물러나며 척명일의 검망(劍網)에서 벗어나려 했다. 척 명일은 선기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일개 하오문인 배교도를 상대 하는 데 채신없이 먼저 검을 뽑은 그다. 최소한 그는 그의 어린 사제 들에 비해서는 승부의 냉혹함을 알고 있었다. 명강량을 휘몰아쳐 가 는 그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매화일지(梅花一支)! 매개이도(梅開二度)! 매화비산(梅花飛散)…… 척명일의 검 끝에서 화산의 절예,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 法)이 연이어 쏟아졌다. 명강량은 종내 척명일의 검세에서 벗어나지 못할 듯이 보였다. 하 지만 척명일은 아직 명강량의 옷깃 하나 자르지 못하고 있었다. 명강 량의 보법(步法)은 특이했다. 그의 보법은 봄날, 꽃밭 사이를 어지럽 게 나는 나비들 보다 더 어지러웠다. 명옹의 절기 중 하나인 군접환영보(群蝶幻影步)였다. 만약 척명일에게 사태를 직감하는 빠른 능력이 있었다면 결코 승부 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옹의 무공을 일개 하오문의 잡술로 경멸하는 척 하고 있었지만 실 상 척명일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무당 제자들의 패사, 삼사형 우 제준의 염려스런 당부…… 싸울 결심은 쉽게 했으나 초조함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 초조함 때문에 그는 승부를 서둘렀고 판세 를 넓게 보는 눈을 가질 수 없었다. 눈발이 제법 지면을 가린다고 생각 될 때였다. 군접환영보로 척명 일의 매화검법을 피해 가던 명강량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명강량의 신형이 하나, 둘, 불어났다. 분신술(分身術)! 역시 강호인들에게 잘 알려진 배교의 환술 중 하 나…… 하지만 명강량이 펼치는 분신술은 강호인들이 일반적으로 알 고 있는 것과 달랐다. 점점 불어나는 명강량의 허상(虛像)은 바로 군 접환영보가 부른 것이다. 군접환영보는 그 어지러운 발걸음에서 일종 의 환상진(幻想陣)을 불러내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술법으로 상대의 눈을 현혹시키는 분신술과는 전적으로 격이 달랐다. 명강량의 신형은 이미 넷으로 불어나 있었다. 챙! 그가 신장도로 척명일의 검을 쳐내며 대반격(大反擊)을 준비했다. 네 명의 마옹에 네 자루의 칼……. 파파파파팟! 난마로 휘몰아쳐 오는 명강량의 공세에 척명일은 식은 땀을 흘렸다. 그가 입을 악물며 한광을 빛냈다. '이따위 더러운 잡술로 감히…….' 척명일은 내공을 최대한 끌어올려 심안(心眼)으로 명강량의 실상( 實像)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어느 상에도 기파가 느껴지지 않았다. 사위는 점점 도산검림(刀山劍林)으로 변해 갔다. 한 명을 상대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네 명…… 섬광처 럼 산뜻하게 뻗어 가던 매화검법이 허공 속을 허둥대고 있었다. '천 년 배교! 명일, 그 천 년의 세월을 우습게 보지 마라. 천 년의 세월은 돌팔매질 하나에도 무게를 준다.' 사형, 우제준의 당부가 척명일의 머리 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전 의(戰意)는 점점 사라지고 척명일은 패배를 예감했다. 마옹의 분신은 이제 각기 제멋대로 움직이며 그를 에워쌌다. 척명일은 어지럽게 날 뛰는 분신을 보는 것만으로도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사부, 숭양진인께서 뭐라고 말했던가? 명문(名門) 의 제자는 죽음 앞에 가장 빛을 발한다. 맞는 말이다. 척명일은 자신의 검로(劍路)를 최대한 좁혔다. 뼈와 살, 목숨을 내 주는 한이 있더라도 최소한 이 마귀 같은 놈의 살 한 점은 베어먹을 생각이었다. 그는 동패구상을 그리며 검을 가슴에 모았다. 사부, 사형, 사문에 대한 명예스런 죽음……. 명강량이 척명일의 생각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그는 척명일을 무척 부러워했을 것이다. 명강량은 그런 생각들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 의 생각은 단 하나! 빨리 상대를 처치하는 것! 명강량의 무심한 눈빛이 빛을 뿌렸다. 순간, 척명일을 압박해 가던 그의 분신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타탓! 명강량이 척명일을 쇄도해 갔다. 그의 좌수가 붉은 그림자를 뿌리며 척명일을 노렸다. 척명일은 명강량이 느닷없이 장영을 뿌릴 줄은 몰랐었다. 검으로 막기에는 이미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같이 장법(掌法)으로 대결할 도리밖에…… 그리고 장(掌)의 대결은 내심 그가 원하던 바였다. 사 마(邪魔)의 난잡한 내공이 대화산파의 정순(貞純)한 내공을 어찌 당 하랴! 그도 무당파의 속가제자인 창의문주, 신충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척명일은 반전의 기회를 준 하늘에 감사하며 화산의 절학 태을전진 미리장(太乙全進彌離掌)으로 명강량의 장법에 대항했다. 홍무(紅霧)와 청무(靑霧)가 서로를 얽어 갔다. 명강량과 척명일은 삼 장(三掌)을 연이어 나누었다. 퍼퍼퍽! 둔중한 격타음(擊打音)과 함께 명강량과 척명일은 각기 반 장여를 물러났다. 명강량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러나 깊은 내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 았다. 그것은 척명일도 마찬가지였다. 척명일은 자신의 몸이 더 가벼워진 듯했다. 무지한 배교도는 승리를 눈앞에 두고 감히 장법의 대결을 택해 화를 자초한 것이다. 척명일은 장법 대결에서 얻은 우위를 바탕 으로 승부를 결정지으려 했다. 그가 호호탕탕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 러나 척명일의 호기(豪氣)는 몇 걸음을 가지 못했다. 투둑툭툭툭! 혈맥(血脈) 곳곳에서 작은 폭발들이 일어나며 그의 몸 에 화마(火魔)를 불러왔다. 척명일의 내부는 열탕(熱湯)으로 부글거렸다. 그 고통을 견디지 못 해 척명일은 입을 딱 벌렸다. "커악!" 척명일이 열려진 입으로 피화살을 내뿜었다. 그의 눈이 허연 동자 를 드러냈다. 툭! 그가 그의 애검(愛劍)을 붙잡고 동토(凍土)를 뒹굴 었다. 하얀 눈발이 빠른 속도로 그의 시신을 덮었다. 명강량은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삼양장(三陽掌)! 이제야 겨우 오 성(五成)의 경지…… 사부는 구 성(九成)의 공력으로도 그를 꺾지 못했고 했다. 내가 그를 만난다면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내놓아야겠군." 그가 우울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그는 사부를 격상시켜 죽음에 이르게까지 한 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강호인들이 아는 것처럼 사부는 구대문파의 협공에 의해 죽은 것이 아니다. 물론 죽음을 선사한 것은 그들이 맞았다. 그러나 그 전에 사부는 이미 죽음에서 헤어날 수 없는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사부를 그렇게 만든 자……. 씁쓸한 이야기이지만 사부는 그 자를 만나면 무조건 달아나라고 했 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단원홍(丹元洪)…….' 하지만 명강량은 그 이름을 아직 교도들에게 한 번도 말한 적이 없 었다. 구대문파 고수들의 협공에 의한 패사면 수치보다 자부심을 가 질 일이다. 하지만 일대일(一對一)의 비무(比武)에서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었다면……. 명강량은 가뜩이나 기가 죽어 있는 교도들에게 더 큰 충격을 주기 싫었다. 그러나 무산대전에서는 모두에게 이야기를 할 참이었다. 복 수를 논하는 마당이라 적의 힘을 정확히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컥!" "아악!" 눈발은 점점 짙어 가고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은 잦아들고 있었 다. 비응보의 수족들은 애초에 주화청이나 전우삼의 상대가 아니었다 . "화산파라…… 서둘러야겠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허리에 질끈 묶었다. 그가 주화청이 싸우고 있 는 곳을 향해 가볍게 읍을 했다. 휙! 그가 시야를 가릴 정도로 휘날 리는 눈발 속에 신형을 감추었다. "커악!" "으악!" 비응보 외당 무사들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이었다. 처음의 기습은 문호일에게 적잖은 만족을 주었다. 좌측면의 공격을 맡았던 이향주가 흑면호의 어깨를 꿰뚫는 성과를 올렸기 때문이다. 의외의 공격을 받은 흑면호는 말 그대로 상처 입은 야수처럼 날뛰었 다. 이향주의 머리통이 박살나고 대여섯 명의 수하들도 다진 고기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문호일은 승리를 장담 했다. 승부가 역전된 것은 관제묘에서 백안의 늙은이가 가세하고서부터였 다. 수하들은 늙은이의 상대가 되지도 않았다. 문호일은 서둘러 퇴각 을 명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발치까지 쌓인 눈은 온통 비응보 수하들의 피로 물들어 갔다. "문호일! 이 더러운 놈! 네 놈의 만용(蠻勇)으로 우리는 모두 죽게 생겼구나!" 일향주가 문호일을 향해 악을 썼다. 그는 흑면호를 상대하고 있었 다. 일향주는 흑면호의 대월을 피해 다니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으 나 오래가지는 못할 듯했다. "퍽!" 예상대로 반 각(半刻)도 지나지 않아 흑면호의 대월은 일향 주의 머리통을 조각 냈다. "문호일! 쥐새끼 같은 놈!" 흑면호 전우삼이 뇌수(腦髓)가 뚝뚝 흐르는 대월을 어깨에 걸치고 문호일을 향해 걸어갔다. 문호일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이것 보게! 우삼, 자네와 나는 배교대척살령이 내리기 전까지는 그런대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나?"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놈이 나와 친했다고? 나는 버러지를 친구로 두지 않아!" 전우삼이 대월을 번쩍 들었다. 문호일은 뒷걸음질을 쳤다. 여차하면 도망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 다. 전우삼이 한달음에 문호일을 육박하며 대월을 휘둘렀다. "어헛!" 문호일은 헛신음을 토하며 당나귀처럼 굴렀다. 그의 표정 은 싸우겠다는 생각보다 자신의 결단에 대한 자책과 절망뿐이었다. '이런 한심한 놈이 있나. 허우대만 멀쩡할 뿐 수하들 보다 못한 놈 이구나. 구역질 나는 놈! 퉤!' 전우삼은 문호일의 비굴한 태도에 침을 뱉었다. 그는 문호일에게는 일향주와 같은 호쾌한 죽음을 주기도 아까웠다. 그는 문호일의 사지 를 하나하나 토막내어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가 맹호(猛虎)가 늑대를 탐하듯 문호일을 쓸어 갔다. 문호일은 전우삼의 대월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전우삼의 완 력(腕力)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악!" 문호일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한쪽 팔은 전우삼의 대월에 이미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그 팔도 내놔!" 전우삼이 겁에 질려 사색(死色)이 된 문호일의 남은 팔을 취하려 할 때였다. 탁!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문호일의 미간(眉間) 사이를 정확하게 꿰 뚫었다. 문호일이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쓰러졌다. 전우삼은 불만에 가득한 눈빛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의 등뒤에 는 비응보 수하들을 처치하고 난 주화청이 서 있었다. 나뭇가지는 그 가 날린 것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 따위 장난을 치고 있느냐?" 주화청이 화를 터뜨렸다. 그제야 전우삼은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명두, 죄송합니다." 그가 머리를 긁적였다. "비응보의 수족들을 명옹께서 달고 오지는 않았을 게고…… 어찌된 일이냐?" "그게 저도 잘……." "꼼짝 말고 월평에 숨어 있으라고 했다. 설마 그 명을 어긴 것은 아니겠지?" "물론 제가 어찌 명두의 명을 어기겠습니까?" 전우삼이 눈을 치켜 떴다. "그럼 이놈들이 어떻게 우리의 종적을 알아챘단 말인가? 이놈들이 나의 정체를 알았을 리는 없을 텐데." 주화청은 어디서 꼬리가 밟혔는가를 찾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그 순간, 전우삼이 안색을 찌푸렸다.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 다. "명두, 월평에서 딱 한 번 바깥출입을 한 적은 있습니다. 와사곡( 臥蛇谷) 숯 굽는 영감의 딸이 제 정혼녀라는 것은 명두도 잘 알지 않 습니까. 그녀를 만나러 딱 한 번……." 전우삼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놈을 보았나? 내가 그렇게 조심해라 했건만!" 주화청이 고함을 질렀다. 전우삼은 떠받는 소 같은 성질을 가진 자다. 은근히 미안함을 느끼 고 있는 데 주화청이 화를 내자 오히려 반발심이 치솟았다. "와사곡에 간 것은 딱 한 번뿐이오. 그 때문에 놈들에게 종적이 발 각되었다고 어찌 말하겠소?" 그가 입을 삐죽였다. "그만두자." 주화청은 손을 저었다. 그도 전우삼의 성질을 알고 있었고 이왕 이 렇게 된 것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져 보아야 덕될 일도 없을 듯했 다. 그가 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시오?" 전우삼이 어깨의 상처를 매만지며 물었다. "상대가 비응보 놈들뿐인 줄 알았느냐?" 주화청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젠장! 오리 고기를 먹었나? 무슨 고함은……." 전우삼이 투덜대며 그 뒤를 따랐다. "화산파 놈이잖아!" 전우삼이 눈발이 묻힌 시신을 뒤적이며 말했다. 시신은 아직도 온 기(溫氣)를 담고 있었다. "화산파?" 주화청은 눈살을 찌푸렸다. "잘 죽었다! 틀림없이 명옹의 솜씨일 게야. 그런데 명옹은 어디 갔 지?" 전우삼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까지 계시겠느냐? 화산파까지 온 것을 확인했는데!" 주화청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차분한 성격의 그도 자신들로 인해 명옹이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하자 역정이 계속 나는 모양이었다 . "헤헤헤! 명두,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화산파 놈들 쯤이야 명옹의 실력이면……." "이놈이!" 화를 참지 못한 주화청이 결국 장대로 전우삼의 머리를 쳤다. "아이구!" 전우삼이 머리를 감싸쥐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가 눈을 부라리며 주화청에게 달려들려 할 때였다. 주화청의 백안이 재빠르게 돌아갔다. "우삼!" 그가 태행산의 초입(初入)을 가리켰다. 전우삼이 후닥닥 전망 좋은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희끗거리는 눈발 사이로 오륙 십명의 무사들 이 달려오고 있었다. "별 놈들은 아니오. 비응보 놈들이군." 전우삼이 나무 위에서 말했다. "비응보 외에는 아무도 없느냐?" "이상한 놈도 한 놈 있는데…… 꼭 계집같이 생겼군. 비응보주가 남색을 즐기는 줄 예전에는 몰랐어." "뭣? 어서 내려와라!" 주화청이 미간을 좁히며 냉랭하게 소리쳤다. "또 누가 오고 있소? 와 봐야 화산파 놈들이겠지. 신나게 한판 싸 워 보자구. 달아나고 숨는데는 이제 질렸어." 전우삼이 나무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떠 벌리고 있기는 하나 그의 표정도 긴장으로 굳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 상대는 구대문파 중에도 철중쟁쟁을 자랑하는 화산파다. "아무래도 늙은이보다야 내가 낫겠지. 내가 여기서 놈들을 막겠소. 그 동안 명두는 알아서 도망가시오." 전우삼이 휘적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실수로 불러들인 화산파다 . 책임은 당연히 그가 질 생각이었다. "어리석은 놈! 네 놈의 상대가 아니다!" 주화청이 전우삼의 손목을 재빠르게 낚아챘다. "시간이 없다! 가면서 이야기하도록 하자!" 주화청이 전우삼의 손목을 끌며 신형을 날렸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늙은이의 손에 의지해 다니는 경우는 고금(古 今) 어디에도 없소!" 전우삼이 바동거렸다. 그러나 주화청은 전우삼의 손을 놓지 않았다 . 태행산을 벗어나서야 주화청은 비로소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가 움 켜쥔 전우삼의 손목을 놓았다. "젠장! 손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전우삼이 손목을 만지며 도끼눈을 했다. "우삼, 긴말은 하지 않겠다. 너는 당장 와사곡으로 가라." "와사곡이라면 가지 말라고 해도 하루에 열두 번씩 가고 싶은 곳이 지." "당분간 신(申) 노인(老人)의 집에 머무르며 나를 기다려라." 신 노인은 숯 굽는 영감으로 전우삼의 빙부(聘父)가 될 자다. 그도 배교도였다. "헤헤헤! 명두께서 명하신 일이니…… 마땅히 지켜야지." 전우삼이 손바닥을 비비며 좋아라 했다. "지금 당장 가라! 네놈이 아무리 태행산을 샅샅이 잘 안다지만 이 번에는 적의 추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비응보 놈들과 다른 자들이 야. 조심해서 내려가라." 주화청이 전우삼의 길을 재촉했다. "알았어!" 전우삼이 신바람을 내며 달려갔다. 아이처럼 촐싹대며 산길을 내려 가던 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명두는?"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명옹이 길을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적들 의 이목을 흐린 후, 따라가겠다." "으헤헤! 그런 재미있는 일을 혼자 할 생각이었어?" 전우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산길을 다시 올라왔다. 주화청은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그렸다. "아이고! 알았어! 알았다구! 내가 있어 봐야 귀찮기만 하다 이 말 이지. 좀 도와주려고 했더니…… 그럼 혼자서 잘 해 보시오!" 전우삼이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우삼, 명옹은 보았겠지?" "물론이오! 생각보다는…… 생각보다는…… 멋지더군." 원래 전우삼이 내뱉으려 한 말은 실망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막 상 입밖에 나온 말은 그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 훌륭한 분이다. 이 위기만 잘 넘긴다면 그 분은 우리 교 를 반석(盤石)에 앉혀 놓을 것이다. 너는 그 분을 잘 모셔야 한다." "헤헹! 잘해 봐야 결국 배교는 배교일 뿐! 나는 명두가 죽고 나면 이 지긋지긋한 교를 떠날 생각이야. 설마 귀신(鬼神)이 되어 나타나 나를 교에 붙잡아 두겠다고 하지는 않겠지!" 전우삼이 너털너털 산길을 내려가며 소리쳤다. 그의 신형이 눈발과 나무 사이에 가려 이내 사라졌다. '우삼, 나는 네가 그러기를 바라겠다. 하지만 나는 네가 교를 떠나 지 못할 것임을 안다. 내가 귀신이 되어서 네 발목을 잡겠지. 내 사 부가 내 발목을 잡은 것처럼…… 벗어날 수 없는 배교도의 운명……. ' 주화청은 전우삼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전 우삼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자 태행산을 바라보고 섰다. '계집 같이 생긴 자…….' 주화청은 전우삼이 한 말을 기억해 냈다. 그 자가 누구인지는 확인 할 필요도 없었다. 천독미랑, 당예! 주화청은 품속을 뒤졌다. 그가 품속에서 한 장의 정교한 인피면구( 人皮面具)를 꺼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그는 항상 몇 장의 인피면 구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가 인피면구를 뒤집어썼다. 주화청의 얼굴이 순식간에 밋밋한 청년의 얼굴로 변했다. "천독미랑! 계집처럼 생겼지만 사갈(蛇蝎)보다 더 독한 마음을 가 진 놈! 놈은 물론 화산파까지 왔으니 이미 태행산 백 여리는 천라지 망(天羅之網)으로 덮여 있을 것이다. 명옹이 위험하다. 꾸물거릴 시 간이 없다." 주화청이 백안을 번쩍였다. 그가 갈의를 팽팽하게 부풀리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우두둑! 우두둑! 주화청의 전신에 뼈마디가 부서지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주화청의 키는 일 촌(一寸)씩 늘어났다. 주화 청은 자신의 진면목(眞面目)을 축골공(縮骨功)으로 숨기고 있었던 모 양이었다. 왜소했던 주화청의 체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주화청은 자신의 키가 범인의 키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축골공을 풀었다. "닮았는지 모르겠군. 적들도 명옹의 얼굴은 잘 모른다고 하니 이 정도면 되겠지." 주화청은 인피면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청년의 모습으로 분한 주 화청이 눈발 속을 가볍게 걸어갔다. * * * 휘날리는 눈발은 망자(亡者)의 육신을 감추고도 남았다. 비응보의 수하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시신들을 찾았다. "보주, 외당당주의 시신도 발견했습니다." 비응보 내당당주, 염태명이 악진웅에게 보고했다. "음……." 악진웅은 턱수염을 쓸며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살아 남은 자는 한 명도 없는 듯했다. "수하들을 모아라!" 그가 소리쳤다. "아직 시신을 모두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염태명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눈구멍 속이라 부패하는 시신은 없을 게다. 두서너 명의 수하들을 남겨 짐승들로부터 시신을 보호하게 하라. 나머지는 배교 놈들을 추 적한다." 악진웅은 감산도(　山刀)를 불끈 쥐고 당예를 향해 걸어갔다. 당예는 관제묘 부근의 언덕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돌아오는 도중에도 혹시 눈에 띄는 것이 없나 살피느라 바빴다 . "대다수의 수하들은 도끼에 당했소. 그놈은 흑면호일 게고…… 협 도를 사용한 자는? 그 놈이 잠마가 맞는 것 같소?" 악진웅이 당예의 곁에 다가서며 물었다. 당예는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가 철필을 손바닥에 두드리 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참지 못한 악진웅이 한마디 내뱉었다. "수하들은 모두 일도에 심장이 잘려 나갔소. 그토록 정교한 칼솜씨 를 가진 자는 산서 배교 놈들 중에서는 잠마를 제외하고 없소." "잠마가 맞을 것입니다." 당예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럼 왜 추적을 하지 않소? 놈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오." "……." 당예의 눈초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가 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심 의 울화를 참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악진웅은 당예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마 옹, 잠마! 그들의 출현에 흥분한 그인지라 당예의 기분을 살필 겨를 도 없었다. "마옹의 종적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소? 마옹이 나타난 것은 확실하오?" 악진웅이 연거푸 물었다. 당예가 악진웅을 바라보며 사이한 눈빛을 빛냈다. 악진웅은 그제야 당예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챘다. 팍! 당예는 돌연 철필을 나무에 처박았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나무의 속살만 후벼팠다. 악진웅의 표정이 해쓱해 졌다. 그는 당예의 눈치를 살피며 한 걸음 물러났다. 당예가 나무에 박힌 철필을 빼며 가만히 손을 들었다. "악 보주의 수하들과 철모르는 애송이가 날뛰는 바람에 마옹은 한 발 먼저 이곳을 떠났습니다. 좋은 기회였는데……." 그가 붉은 입술을 가늘게 떨며 중얼거렸다. "무슨 말이오? 우리 수하들이 서둘렀다니…… 나는 수하들에게 몇 번의 주의를 주었소. 함부로 날뛰지 말라고." 악진웅이 급히 항변(抗辯)했다. "그렇습니까? 악 보주의 수하들은 매복(埋伏)에 묘한 재주가 있는 모양이군요. 저렇게 시야가 확 트인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니……. " 당예가 눈짓으로 비응보 수하들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는 곳을 가리 켰다. "놈들이 먼저 수하들의 종적을 발견했겠지. 뒤엉켜 싸우다 보니 저 곳까지 갔을 것이오." 악진웅은 수하들의 잘못을 끝내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당예는 대꾸하지 않고 옅은 미소만 지었다. 한기가 살 속까지 느껴 질 정도의 비릿한 미소였다. 악진웅은 급히 시선을 돌렸다. 억지로 항변은 했으나 그도 당예의 말이 틀리지 않음은 알고 있었다. 만약 기습을 당했다면 수하들의 시 신이 뒹굴고 있어야 할 곳은 이십 여장 떨어진 움푹한 구릉이다. 구 릉에서 이곳까지 올 수 있는 가능성은 그의 말대로 용전분투(勇戰奮 鬪)로 뒤엉켜 적을 몰아붙였을 경우다. 하지만 수하들이 그럴 가능성 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 달아나기에도 바빴 을 것이다. '문호일, 머저리 같은 놈! 쓸데없는 만용을 부려 죽어서도 나를 곤 궁하게 만드는 구나!' 악진웅은 이미 시신으로 나뒹구는 외당당주, 문호일에게 분노를 터 뜨렸다. 그가 어색함을 숨기며 당예에게 말을 걸었다. "어쨌든 마옹도 잠마도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오. 추적을 서두릅 시다. 태행산의 눈발은 한 번 뿌리기 시작하면 허리를 잠기게 하오." 악진웅은 혼자라도 추적할 기세였다. 마옹을 잡겠다는 마음에 그는 조급함으로 발을 굴리고 있었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쓸 데없는 자들만 끼여들지 않는다면!" 당예가 관제묘 부근의 언덕을 바라보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악진웅 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당예의 앙칼진 목소리는 우제준의 귀에 생생했다. 우제준은 쓴맛을 다셨다. 사제, 척명일의 패사! 사문의 치부(恥部)를 보여주기 싫어 그는 당 예를 모른 척 했었다. 하지만 당예는 그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아챈 모양이었다. 당예의 고함은 척명일이 쓸데없이 나서 마옹을 놓쳤으니 다음에는 나서지 마라는 비난의 뜻이 분명했다. 화가 치솟았으나 이왕 모른 척 한 것 나설 입장이 아니었다. '소면각저 팽해문, 천독미랑 당예…… 저런 자들이 유향경천문의 일개 당주로 만족하고 지내다니…… 어쨌든 유향경천문의 문주는 대 단한 자일 것이다.' 우제준의 뒤에는 장문천이 척명일의 시신을 붙잡고 훌쩍이고 있었 다. 당예에게 인기척이 들킨 것은 사제, 장문천의 훌쩍임 때문이었 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예의 실력은 대단했다. 그 먼 거리에서 인 기척을 느꼈으니……. "흑! 흑! 흑! 칠사형……." 장문천은 척명일의 시신을 붙잡고 계속 눈물을 뿌렸다. "그만 울어라! 삶과 죽음의 구별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리고 놈 은 죽어 마땅하다! 내가 그렇게 조심하라 일렀건만!" 우제준이 화를 냈다. 그라고 사제, 척명일의 죽음에 통한(痛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척명일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감정보 다는 척명일이 가져다 준 사문의 치욕에 대한 분노가 우제준에게는 더 컸다. '마옹…… 이제 고작 약관의 나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벌써 삼양장 을 저만큼이나 익히다니…… 강호의 풍파(風波)가 또 한 명의 마성( 魔星)을 키워 내려는가?'' 우제준은 배교가 정말로 마교에 어울리는 흉명을 떨칠 때를 기억했 다. 강호인들의 기억 속에 까마득한 벌써 칠백 년 전의 일이었다. 우 제준은 그 이야기를 노도장(老道長)으로부터 들었다. 배교에 의해 피 의 광란으로 물들었던 백 일! 그는 노도장의 말을 믿지 못했다. 배교에 그런 힘이 있었다니…… 그러나 그 일은 사실이었다. 강호의 암흑기(暗黑期)로 기록될 정도로 가장 잔혹했던 한 때! 그 암흑기를 만든 자들이 배교라는 것은 강호 사(江湖史)에도 명백히 기록되어 있었다. 하오문인 배교를 치는데 구대문파가 움직이는 이유를 구대문파는 강호 협의 때문이라고 말한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고 우제준은 생각했다. 우제준은 구대문파가 배교 척결에 앞장서는 또 다른 이유를 배교에 대한 은밀 한 두려움으로 뽑았다. 칠백 년 전, 나백염왕이 일으켰던 배교 혈사(血史)를 듣는 순간, 그의 가슴에 은근한 두려움이 남았듯이 다른 자들의 가슴에도 그런 두려움이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채 씻기도 전에 일어났 던 또 한 번의 혈사…… 탈명마효! 실제 구대문파는 이번이 아니라도 배교를 여러 번 친 적이 있었다. 기치(旗幟)는 물론 사교, 요교인 배교를 뿌리 뽑아 정도(正道)를 세 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목적은 배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였다고 짐작은 해 볼 만했다. 나백염왕이나 탈명마효 같은 자들 이 언제 또 다시 나타날지 모르므로……. "마옹, 이 생간을 뽑아 씹어 죽일 놈! 칠사형……." 장문천은 눈물을 그칠 줄 몰랐다. "그만 울어라! 만약 이 자리에 이사형(二師兄)이 있었다면 명일, 저놈은 노천(露天)에서 늑대나 까마귀밥이 되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 다." 우제준이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장문천은 우제준이 두 번이나 같은 말을 하자 비로소 눈물을 그쳤다. "사문에 명일의 죽음을 알려라. 그리고 명일의 시신은 적당한 곳에 안치하라. 용문산과 살호구에 있는 네 사형들에게는 연락을 취해 태 행산으로 오도록 하라." "사형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장문천이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마옹을 추적할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본문의 표기를 남겨 두겠 다. 네 사형들에게 그 표기를 보고 나를 찾으라고 해라." "알겠습니다." 장문천이 명을 받았다. "강호의 험난함은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바와 같다. 네 사형들에게 연락을 취한 후, 너는 태원의 객잔에 머물러라. 내가 데리러 가겠다. " "……." 장문천은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서 가라!" 우제준이 손을 저었다. 장문천은 척명일의 시신을 들쳐업고 우제준에게 읍을 했다. 그가 바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갔다. 우제준은 장문천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비로소 마옹에 대한 추적을 준비했다. 그가 마옹이 도주했으리라 짐작되는 방향으로 발걸 음을 옮길 때였다. 휘리릭! 휘리릭! 바람을 울리는 야릇한 소리에 우제준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우제준은 그 소리가 명적(鳴鏑)에서 나는 소리임을 단번에 맞추었 다. 명적은 활촉에 구멍이 달린 기구를 부착하여 만든 화살로 쏘면 특이한 소리가 나 신호를 알리는데 사용한다. 우제준은 명적이 마옹이나 잠마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라는 것을 쉽 게 짐작했다. 마옹을 잡기 위해 당예가 준비한 사람은 비응보의 수하 들 뿐만은 아닐 테니……. 당예와 비응보의 수하들이 산 전체를 들썩이며 명적이 울린 방향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마옹이나 잠마 답지 않군. 종적을 저렇게 쉽게 들키다니……. 그 러나 어쨌든 가 봐야겠지." 우제준도 명적이 울린 방향을 향해 신형을 뽑았다. * * * "젠장! 이렇게 쫓겨만 다닐 곳을 뭐 하려고 끌어들여서……." 전우삼은 툴툴대며 눈길을 헤쳤다. 그는 태행산이라면 손바닥 보듯 훤하게 알고 있었으므로 은밀한 길 을 택해 발걸음을 서두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명두가 걱정이군. 앞도 보지 못하는데……." 태행산을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하자 전우삼은 주화청에 대한 걱정이 들었다. "아이고! 내가 알게 뭐야! 달아나는 일이라면 나보다 명두가 훨씬 낫지! 헤헤헤! 와사곡에 빨리 가서 화정의 허벅지에 언 손이나 녹여 야지." 전우삼은 다시 발길을 서둘렀다. 그러나 그는 몇 걸음도 채 못 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젠장!" 그가 눈덩이를 발로 찼다. "화산파 놈들까지 왔다는데……." 주화청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만나면 욕이나 하고 잔소리만 퍼부었지만 그래도 주화청은 그를 가 장 아껴 준 사람이다. "하지만 내가 가 봐야……." 전우삼은 전혀 앞뒤를 모르는 자는 아니었다. 비응보라면 한 팔의 도움은 되겠지만 화산파라면 짐만 될 뿐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에잇! 모르겠다. 잘난 영감이니 알아서 하겠지." 전우삼은 침을 퉤 뱉은 후, 자신이 가던 길을 서둘렀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발걸음은 헛걸음을 걷고 있었다. 그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태행산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찾아 가 보지 그래!" 전우삼은 스스로에게 꽥 고함을 질렀다. "맞는 말이야. 명두가 잘 달아나고 있는가 잠시 보고만 오면 되잖 아. 이렇게 간단한 것을…… 하하하!" 그가 파안대소(破顔大笑)를 터뜨리며 대월을 들었다. 전우삼은 결국 주화청에 대한 염려를 참지 못하고 태행산으로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가 주화청과 헤어진 장소를 향해 조심스럽게 올라 갈 때였다. "기다리는 놈은 나타나지 않고 엉뚱한 놈이 걸려들었군. 꿩 대신 닭이라!" 냉랭한 목소리가 전우삼의 귀를 때렸다. 그와 동시에 눈덩이 속에 서 불쑥불쑥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가죽옷에 장창(長槍)을 든 다섯 명의 사내였다. 허리에는 투 삭(投索)을 걸쳤고 특이하게 발에는 설마(雪馬:눈썰매)를 달고 있었 다. "신호를 보낼까요?" 우측의 사내가 중앙의 매부리코에게 물었다. "흑면호 정도에 신호는 무슨! 내버려둬라!" 중앙의 매부리코가 말했다. 전우삼은 다섯 명의 사내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이! 자네들은 누구인가? 보아하니 산서의 파락호들은 아닌 듯한 데. 꿩과 닭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어디 빙궁(氷宮)에서 오신 분들인가?" 그가 대월을 흔들며 소리쳤다. "곤륜노처럼 생긴 놈이 입심도 좋군!" 우측 사내가 장창을 들며 안광을 빛냈다. "곤륜노? 이런 개잡종들이!" 전우삼이 콧김을 쏟았다. 곤륜노라는 말은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 는 말이었다. "허리를 댕강 잘라 주마!" 그가 대월을 휘두르며 설마를 탄 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다섯 명의 사내 중, 중앙에 있는 매부리코가 장창을 들었다. 매부리코는 설마를 탄 자들의 두목인 모양이었다. "마옹과 잠마가 아직 이곳에 있을지 모른다. 놈을 서둘러 처치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팍! 그가 장창을 눈에 깊숙이 꽂으며 외쳤다. 매부리코의 명이 떨 어지자 나머지 사내도 일제히 눈밭에 창을 꽂았다. "죽여라!" 매부리코가 장창을 힘차게 밀치며 소리쳤다. 싸악! 싹! 장창을 지렛대로 밀며 설마를 탄 자들이 일자로 전우삼 을 공격해 왔다. 설마의 힘을 빌린 자들의 속도는 너무도 빨라 전우삼이 '앗!'하는 순간, 그들은 흰그림자로 전우삼을 덮쳐 오고 있었다. 휘휙! 휙! 장창이 설화(雪花)를 날리며 매섭게 전우삼의 사지를 노렸다. 전우삼은 적들의 날카로운 공세를 감히 정면으로 맞설 자신이 없었 다. "허헛!" 그가 죽을힘을 다해 대월을 휘두르며 눈밭을 굴렀다. 그러나 적들은 전우삼이 호락호락 달아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찌직! 찍!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우삼은 오른쪽 어깨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장창이 스쳐 가며 그의 어깨를 삽시간에 붉게 물들이고 있 었다. "이런 쳐죽일!" 전우삼은 이를 갈았다. 그가 대월을 지팡이로 눈밭에서 벌떡 일어 났다. 그 순간, 적들은 다시 전우삼을 덮쳐 오고 있었다. 다섯 명의 적들이 설마를 타는 솜씨는 신기에 가까웠다. 그들은 마 치 줄을 타고 공중 비행을 하듯 눈밭을 너울대며 다녔다. 전우삼은 눈을 부라리고 적들을 상대했으나 적들의 빠르기를 따라 잡기란 역부족이었다. 적들이 두 번째 전우삼을 스쳐 가자 전우삼의 전신은 핏자국으로 성한 곳이 없었다. "젠장! 그래 내가 졌다! 졌어! 하지만 이대로 죽지는 않겠다. 헤헤 헤! 어떤 놈을 죽여줄까?" 설마로 반원형을 그리며 선회(旋回)하고 있는 적들을 향해 전우삼 이 소리쳤다. 전우삼은 정말 동귀어진을 각오했는지 어깨를 쫙 펴고 가슴을 드러냈다. 적들은 방향을 틀며 다시 전우삼을 향해 한 일자로 모여들었다. 전 우삼은 대월을 든 팔뚝에 모든 힘을 모았다. 까짓 장창 몇 대에 뚫린 다 해도 당장 죽지는 않을 듯 싶었다. 죽기 전에 대월로 적들의 머리 통 한두 개 조각 내면 그만이었다. 전우삼이 기세등등하게 나오자 매부리코는 상황이 별반 재미없을 것임을 깨달았다. 흑면호는 장난치듯 대적할 상대는 분명 아니었다. 매부리코가 장창을 치켜들며 허공에 크게 원을 그렸다. 매부리코의 지시가 떨어지자 설마를 탄 자들이 산개(散開)했다. 그들은 전우삼을 주위로 원을 그리며 돌았다. "쳐라!" 매부리코가 재차 명을 내리자 적들은 일제히 투삭을 날렸다. "뭐야!" 전우삼이 의외의 공격에 허둥대는 사이 투삭은 거미줄처럼 그의 몸 에 얽혔다. 적들은 전우삼을 옭아맨 채 설마로 서너 바퀴 원을 더 그 렸다. 전우삼은 줄에 감겨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꼼짝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가 자랑하는 완력으로 줄을 끊어 보려 했지만 줄은 이미 거미줄처럼 감겨 꼼짝 않았다. "개 발바닥이나 핥을 놈들아! 이런 계집 같은 수작을 부리다니! 나 를 풀어 주고 정정당당하게 다시 한 번 붙어 보자!" 그가 할 수 있는 저항은 고래고래 욕을 퍼붓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수하들 중의 하나가 매부리코에게 물었다. "목에 황금이 걸린 자는 마두와 마옹 뿐이다. 죽여라!" 매부리코가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적들이 창을 들며 전우삼을 겨누었다. '아이고! 이제 죽었구나. 나야 원래 아무렇게나 구르던 놈이라 이 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마찬가지지만 화정은 처녀로 늙어 죽을 테니 불쌍해서 어떡하나.' 전우삼은 정혼녀인 화정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까지 핑돌았다. 적들이 그런 전우삼의 사정을 봐 줄 리 없었다. 그들은 전우삼을 고슴도치로 만들기 위해 창을 든 팔을 당겼다. 전우삼은 눈을 질끈 감았다. 피핑! 핑!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전우삼은 그 소리를 창이 날아오는 소리로 생각했다. 따라서 당연 히 비명을 질러야 할 자도 그였다. 그런데……. "앗!" "누구냐!" 분분히 고함을 지르는 자들은 매부리코를 비롯한 설마를 탄 자들이 었다. 전우삼은 눈을 번쩍 떴다. 빛 바랜 청의, 출렁이는 신장도! "명옹……." 전우삼의 입이 찢어졌다. 눈밭을 날렵하게 뛰어내려 오는 자는 이미 사라진 줄 알았던 명강 량이었다. 피핑! 핑! 명강량은 탄지공(彈指功)으로 흑두(黑豆)만한 철환(鐵丸)을 날리며 적들을 향해 육박했다. 매부리코 일당은 명강량의 날렵한 출수에 놀라 감히 대적할 생각을 못한 채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명강량이 그림자처럼 그들을 뒤쫓았다. 그는 실상 전우삼과 매부리 코 일당이 싸우는 것을 반 쯤은 본 터였다. 그가 보기에 매부리코를 비롯한 적들의 무공이 전우삼 보다 월등 하다 할 수 없었다. 전우삼 이 일방적으로 당한 것은 바로 그들이 타고 있는 설마 때문이었다. 눈밭이라 전우삼의 행동은 굼뜰 수밖에 없었고 반대로 적들은 최대의 속도를 자랑할 수 있었다. 명강량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매부리코 일당이 설 마에 가속(加速)을 붙이기 전에 그들을 처치하려 했다. 설마에 속도 가 붙는다고 해도 매부리코 일당을 어떻게 못할 그는 아니었지만 한 가하게 시간을 축내며 싸울 처지가 아니었다. 매부리코는 명강량의 가벼운 움직임에서 갑자기 나타난 상대가 최 소한 잠마 정도의 거물임을 눈치챘다. "신호를 올려라!" 그가 장창을 세우며 다급히 소리쳤다. 수하 한 명이 허리춤에서 죽통(竹筒)을 꺼냈다. 신호를 알리는 폭 죽(爆竹)인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폭죽을 준비하는 적에게 철환을 연이어 발출한 후, 전우 삼의 곁을 경쾌하게 스쳐 지나며 신장도를 번뜩였다. 촥! 신장도는 전우삼을 얽어매고 있던 줄을 단번에 동강냈다. 명강량이 달려들자 매부리코 일당들은 당황해서 웅성댔다. 폭죽을 쏘려던 자는 철환을 비키느라 눈밭에 엉덩이를 처박고 있었다. "설마를 벗어 던져라!" 매부리코가 흉광을 빛내며 고함을 질렀다. 전우삼과 싸울 때는 설 마가 유용한 무기였지만 명강량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높은 곳을 차지한 자는 명강량이었다. 또한 지금 설마를 움직인다 고 하더라도 속도가 붙을 상황도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은 설마가 거 추장스러울 뿐이었다. 매부리코의 수하들이 설마를 벗느라 분분히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미 명강량의 적들의 곁을 지척으로 달라붙고 있었다. 설 마를 벗던 자들이 화들짝 놀라 일제히 장창을 내뻗었다. 명강량은 손등으로 장창을 쳐내며 장영을 뿌렸다. 펑! 펑! 펑!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매부리코 수하들은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눈 밭에 붉은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창졸간에 수하들이 모두 쓰러지자 매부리코의 안색은 해쓱하다 못 해 파랗게 변했다. "으얏!" 그는 두려움을 잊으려는 듯 장창을 내질렀다. "어딜!" 명강량을 가로막으며 매부리코에 맞선 자는 전우삼이었다. 전우삼 은 분기탱천 대월을 휘두르며 매부리코를 핍박했다. 전의(戰意)도 꺾였고 자랑하던 설마도 없었다. 매부리코는 전우삼 의 대월에 주춤주춤 밀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한순간, 투둑! 하는 소 리와 함께 대월이 장창을 동강내며 매부리코의 미간으로 떨어졌다. "형제!" 명강량이 놀라 다급히 전우삼을 불렀다. 그는 매부리코에 몇 마디 물어 볼 말이 있었다. 하지만 "명옹, 불렀습니까?"하고 전우삼이 돌아볼 때는 그의 대월 은 이미 매부리코의 미간에 깊숙이 꽂힌 후였다. '성질이 불같아 화가 나면 앞뒤 가리지 않는 자라더니…….' 명강량은 주화청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짐작되는 바는 있었으나 명강량은 메부리코로부터 직접 그를 이곳으로 보낸 자의 정 체를 듣고 싶었었다. "으헤헤! 잔꾀로 본 나으리를 곤궁하게 만들더니 꼴 좋다! 원래 네 놈은 내 반초지적(半招之敵)도 되지 않았어!" 전우삼이 명강량의 속도 모른 체 어깨를 으쓱이며 다가왔다. "주 명두는 어디 갔습니까?" 명강량이 물었다. "화산파 놈들까지 오고 해서…… 명옹께서 안전하게 도주할 시간을 벌어 준다며 놈들의 이목을 끌고 있소."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되는데…… 주 명두께서 위험을 자처하셨군 요." 명강량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명옹께서는 왜 아직까지 여기 계십니까? 훨씬 전에 떠난 줄 알았는데." 전우삼이 대월에 묻은 피를 눈밭에 쓱쓱 닦으며 곁눈으로 명강량을 살폈다. 그의 앞에 선 자는 교의 지존인 명옹이다. 천하 없는 전우 삼이었지만 정면으로 볼 용기는 없었다. 사실 그는 이렇게 가까이에 서 명옹을 보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해지는 기분을 견딜 수 없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까딱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 "좋지 않군." 그가 신장도를 허리에 차며 말했다. "적들이 한둘이 아닌 것 같소. 조심해서 가십시오. 되도록 빨리 이 곳을 떠나고…… 형제, 다음에 뵙겠습니다." 명강량이 전우삼에게 공수(拱手)했다. 그는 전우삼이 예를 차릴 틈 도 주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잠깐 사이에 눈보라 속에 사라졌다. "쳇! 되게 바쁜 척 하는군! 목숨 한 번 구해 준 것 가지고 그만 잘 난 척 하란 말야!" 명강량이 인사 나눌 틈도 없이 훌쩍 사라지자 전우삼은 섭섭한 마 음에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입을 주먹으로 쳤다. "이놈의 입! 헤헤헤…… 우삼, 명옹은 정말 멋진 분이야. 암! 화정 에게 명옹을 코앞에서 봤다고 자랑해야지. 아이고! 그나저나 온몸이 쑤셔 죽겠다. 죽일 놈들! " 퍽! 전우삼이 매부리코의 시신을 발로 차며 자리를 떴다. 배교의 도주술(逃走術)과 잠행술(潛行術)은 강호인들도 모두 인정 해 주는 바였다. 오랫동안 쫓겨다니는데 익숙한지라 도주술과 잠행술 은 발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적이 서두르면 느리게, 적이 느리게 움직이면 빨리! 적의 급하고 느린 형세를 판단하여 응수하는 동수상응(動脩相應)의 술책은 명강량이 곧잘 사용하는 수법이다. 화산파의 제자, 척명일을 처치한 후, 명강량은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전망 좋은 곳을 차지 귀식대법(龜息大法)으로 호흡을 숨긴 채 적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하루 정도 숨어 있 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전우삼이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일전을 벌이는 바람에 그는 결국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 다. 적에게 흔적을 남겼으면 적보다 빨리 움직여야 한다. 명강량은 신 법을 최대한 발휘 태행산을 벗어나고 있었다. 매부리코 일당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황산대전에서 차기 명옹으로 지명을 받은 후, 그는 사부를 따라 천 하 각지를 떠돌았다. 매부리코와 그의 일당은 그때 흑룡강(黑龍江)을 지나며 잠시 보았었다. 오대랑(五大狼)이라 불리는 그들은 흑룡강에서 알아주는 호랑이 사 냥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태행산에 나타났으니…… 그것도 자신을 잡기 위해……. 태행산은 흑룡강 보다 호랑이가 많은 곳이 아니다. 누군가의 사주 가 없지 않고서야 그들이 그 먼길을 올 리 없었다. 그들을 끌어들인 자들은 뻔한 자들일 것이다. '유향경천문…… 별별 자들 까지 다 끌어들였구나.' 명강량은 위기를 새삼 느꼈다. 그는 서둘러 산서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물이 더 좁혀 지 기 전에……. 이런 경우 그가 취하는 방법은 한가지다. 적들보다 빨리 움직일 것! 제6장 분하(汾河) 우제준은 너른 바위에 앉아 의관을 정제하고 신발을 다시 고쳐 신 었다. 태행산맥의 줄기가 산서를 지나 이미 하북에 이른 곳이었다. 그와 십여 장 떨어진 곳에는 한 떼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 다. 당예와 악진웅이 이끄는 비응보의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피투성이로 뒹구는 세 구의 시신을 뒤적거렸다. 벌써 세 번째! 이번 세 구의 시신을 포함 죽은 자를 발견하기는 열 명이 넘었다. 시신은 이번에도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는 어떤 흔적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제준도 죽은 자들의 문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짐작컨 대 유향경천문에서 마옹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끌어 모은 자들일 것 이다. 우제준의 관심은 누가 그들을 죽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옹인가? 잠마인가? 깨끗한 칼솜씨로 보건대 마옹일 가능성도 있었고 잠마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역시 마옹은 아닌 듯했다. 처음의 의심이 맞았다. 상대는 자신의 종적을 남기지 못해 안달인 듯했다. 마옹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잠마!' 배교! 사교, 요교로 불리는 그들이었지만 이상하게 인간적(人間的) 관계(關係)는 끈끈했다. 물론 녹림도들의 의리(義理) 같은 것이겠지 만…… 마옹에 대한 교도들의 충성심도 어느 다른 문파에 비해 높았 다. 잠마라는 자가 마옹의 도주로를 열기 위해 교란책을 쓰고 있다고 충분히 상상 가능했다. 우제준은 무릎을 쳤다. 미련을 떨치지 못하고 여기까지 온 것이 잘 못이었다. 그는 지금 자신이 쫓고 있는 자가 잠마라고 확신했다. 잠마도 물론 쫓을 가치는 있다. 정사(正邪)를 떠나 검(劍)을 겨루 기에도 손색이 없는 자다. 늙은 생강이 맵다고 했으니 어쩌면 잠마의 무공이 마옹보다 나을 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잠마를 쫓을 생각을 깨끗이 포기했다. 잠마를 잡는다 면 개인적 명성은 높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이 사문에 무슨 덕이 되랴! 사문의 명성을 높이려면 역시 마옹의 목을 날려야 했다. 마옹 의 목을 다른 파에 넘겨 줄 수는 없었다. 특히 사제, 척명일까지 패 사한 마당에……. '무당파도 그같이 생각하고 있겠지.' 탁! 탁! 탁! 우제준은 신발을 편하게 하느라 발을 몇 번 굴렀다. 그가 바위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갔을까?' 그는 마옹이 갔으리라 생각되는 곳을 추측했다. 추측되는 곳은 잠 마가 이쪽으로 왔으니 반대쪽으로 갔으리라는 생각 뿐! '움직이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게 되어 있다.' 우제준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가 당예를 잠깐 쳐다 본 후, 천천히 오던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예는 철필로 죽은 시신에 새겨진 칼자국을 더듬고 있었다. 볼수 록 깨끗한 수법이었다. 정면으로 대적한다면 싸워 이길 것 같지도 않 았다. 당예는 철필에 묻은 피를 시신의 옷에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가 우제준이 앉았던 바위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드디어 눈치를 챘군."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무슨 눈치를 챘단 말입니까?" 악진웅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 력했다. 준령을 넘느라 생긴 피로가 아니라 자신이 추격하는 적의 무 위에 질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파의 보주쯤 되는 자라면 전혀 무위를 보는 안목이 없지는 않을 테니…… 시신에 그어진 칼자국은 누구를 불문하고 단 일도였다. 심 장 한 가운데를 정확히 자르는……. "누가 눈치를 챘단 말입니까?" 악진웅이 재차 물었다. "그런 자가 있습니다. 마옹과 잠마를 이제야 구별하는……." 당예가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당 당주께서는 우리가 쫓는 자가 마옹인지 잠마인지 알고 있 었단 말입니까?" 악진웅이 침을 삼키며 눈빛을 빛냈다. "잠마! 명강량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아무래도 그놈 이 아닌 모양입니다." 당예가 손가락으로 철필을 놀리며 말했다. 악진웅의 표정이 굳어졌다. 죽자고 추적한 자가 마옹이 아니라니… … "명강량은 우리가 아니라도 잡을 사람이 있겠지요." 당예가 붉은 입술을 살짝 열며 사이하게 웃었다. 밖으로 전혀 표시 는 않고 있지만 그의 기분도 좋지 않았다. 자신이 쫓는 자가 마옹이 아니고 잠마임을 그도 이제야 확인한 터였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당예는 잠마를 계속 추적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가 한 마리도 못 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잠마를 잡고 마옹을 추 적하나 그냥 추적하나 뒤를 쫓는 시간도 그렇게 차이가 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잠마를 쫓기로 결심을 굳혔지만 기분은 말이 아니었 다. 우제준과 마찬가지로 그도 마옹의 목을 더 원했다. "이제 끝을 볼 때가 되었습니다. 아니지 벌써 일을 끝냈는지도 모 르겠군요." "누가 무슨 일을 끝냈다는 말이오?" 악진웅은 묻기만 했다. "그런 자가 있습니다." 당예가 귀찮은 듯 말했다. 산동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갔었다. 현무당과 무당파의 제자들이 그들이다. 마옹이 태행산에 나타났다는 연락이 갔으니 포위망을 좁 히며 지금쯤 태행산을 향해 오고 있을 것이다. 퇴로를 장악하고 있는 자가 현무당이라는 사실이 당예의 마음을 안 심되게 했다. 현무당의 남궁(南宮) 당주(堂主)는 사대당주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난 자고 실수가 없는 자였다. '마옹이 아니라 잠마라면 남궁 당주도 실망이 크겠군. 어쨌든 대단 한 자다. 내가 본 자들 중 문주, 다음으로…… 명강량…….' 당예는 가는 한숨을 쉬며 미간을 살짝 모았다. 솔직히 그는 명강량에게 약간 이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악에 받쳐 육시(戮屍)를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지만 간혹 어떤 때는 어수선할 정도로 마음이 끌리기도 했다. 싸우면서 정이 든다고 너무 명강량, 명강량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니면 천하를 상대로 종횡(縱橫)하는 명강량의 강(强)함을 인정했든 지…… 그는 유난히 강한 자를 좋아했다. 당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명강량에게 마음이 끌리는 중이었다. 그는 손가락을 만지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별 우스운 생각을 다하고 있군.' 그가 철필로 그의 손바닥을 찔렀다.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손바 닥에 핏방울이 붉게 돋아났다. "가시죠." 그가 핏방울이 솟는 손바닥을 꽉 쥐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전유권(全有權)은 화북(華北)에서 목기(木器)에 관한한 제법 알아 주는 상인(商人)이다. 그는 화북 일대에 자신이 경영하는 마전(磨典: 목기를 만들어 파는 곳)을 다섯 개나 가지고 있었다. 전유권은 워낙 꼼꼼한 자인지라 그 마전들을 총관(總官)에게 일임 하지 않고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직접 자신이 마전의 일 을 간섭하곤 했다. 통상 겨울이면 전유권은 제남(濟南)에 머물렀다. 그러나 올 겨울에 는 무슨 마음인지 태원에 들이닥쳐 점원들을 닦달하고 있었다. 파장(罷場)을 알리는 해가 지고 있었다. 마전의 문이 닫히자 전유권은 그날도 공방(工房) 일꾼들을 모아놓 고 한바탕 일장 연설을 늘였다. 그의 앞에는 대추나무로 깎은 제기( 祭器)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모두 그가 직접 깎은 물건들이었다 . 맨드라한 생김새, 흠 잡을 데 없는 물건들임에는 분명했다. 전유권은 자신이 깎은 그 제기들을 자랑하며 공방 일꾼들에게 자신 과 같은 심력(心力)으로 목기를 대하도록 질책하는 중이었다. 한바탕 연설이 끝나자 전유권은 총관에게 뒷일을 맡기고 자신은 후 원(後園)을 향했다. 시비가 떠 주는 물에 손발을 씻었을 때는 이미 어둑한 밤이었다. 그가 옷을 갈아입고 방문을 나서자 시비는 등촉(燈 燭)을 건네주었다. 전유권은 등촉을 들고 후원 구석진 곳에 있는 사당으로 향했다. 사 당에는 관성대제(關聖大帝)의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었다. 그는 관 성대제의 보살핌 때문에 그의 마전이 이만큼 번성했음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밤, 관성대제의 신상에 분향(焚香)함을 잊지 않 았다. 삐꺽! 전유권이 사당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가 등촉으로 사당의 불을 밝혔다. 언월도를 든 관성대제의 좌위(座位)가 불빛 속에 위맹한 모습을 드 러냈다. 그가 관성대제에게 분향을 하기 위해 향을 들 때였다. 그의 눈에 분향대 앞에 놓인 작은 삼각형의 깃발이 들어왔다. 전유권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그는 다급히 사당 밖으로 나왔다. 원래 이 시간이면 아무도 후원 출입을 못했다. 관성대제에게 성심(誠心)으로 공을 들여야 한다는 명 목으로 출입을 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외인(外人)이 있을까 하여 그는 짐짓 산책을 하듯 후원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후원에 아 무도 없음을 확인한 전유권은 바쁜 걸음으로 다시 사당으로 돌아왔다 . 쿵! 그가 사당문을 굳게 닫았다. 삼각형의 깃발은 사라지고 없었고 모든 것이 원래 그대로였다. 하 지만 전유권은 부복했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청기명사 전유권이 명옹을 뵙습니 다." 전유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전의 거상, 전유권의 본래 신분 은 바로 배교의 명사였다. 명사의 신분은 명옹만이 알뿐이다. 명사들은 모두 다섯 명이다. 그들은 전유권처럼 상인이나 표국주( 　局主), 약재상(藥材商) 등으로 가장(假裝) 중원을 오등분하여 각기 한 지역을 맡고 있었다. 명옹이 그 지역 중 한 곳을 방문할 경우 명옹은 명사를 찾아 자신 이 움직일 곳을 대략 가르쳐 준다. 그러면 그 지역의 명사는 명옹을 따라다니며 명을 기다린다. 전유권이 산서 태원의 마전에 머물고 있는 것도 명옹이 움직이는 곳을 따랐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수상한 자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전유권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알고 있소. 여기까지 오는 데도 무척 힘이 들었소." 관성대제의 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물론 명강량의 목소리였다 . "서둘러 산서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찾아왔소. 양 명두에게 전하시오. 배를 타고 홍동(洪洞)까 지 오라고…… 가장 빠른 속도로…… 그곳에서 양 명두를 볼 것이오. " 양 명두는 하남의 명두, 저파룡(　婆龍) 양백(陽伯)이다. 기행(奇 行)으로 교에 적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인물! "뱃길을 택하실 생각입니까? 위험합니다." 전유권이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요. 나 혼자라면 어떻게 해 보겠는데 성녀까 지 있소. 홍동까지 가는데도 제법 시일이 걸릴 것이오. 바보가 아닌 이상 그때쯤이면 저들도 나의 종적을 찾겠지. 이후는 우물거릴 시간 도 없소." "성녀까지 왔습니까?" 전유권이 놀라 화들짝 뛰었다. "……." 명강량은 입을 닫았다. "할 수 없군요. 하지만 문제는 그 뿐이 아니라……." 전유권은 안색을 찌푸렸다. "양 명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내키지 않는 투로 말했다. "지금은 무척 어려운 때입니다. 어려운 때가 되면 별별 소문이 다 나돌게 되어 있지요." "소문 정도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양 명두의 배교(背敎)가 확인되었소?" "교를 배신했다는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럼 됐소!" 명강량은 말을 끊으려 했다. 황기명사에게도 양 명두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소문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양 명두는 원래 교의보다 현실 에 가깝게 노는 자라 주위의 눈총을 이전에도 제법 받았었다. 물론 그 때는 교를 배신했다는 소문까지 나온 것은 아니다. 지금은 교를 배신했다는 소문까지 나올 정도로 심각했지만 명강량은 모른 척 할 생각이었다. 주화청이 하남 행을 만류했을 때 그가 양 명두를 만나겠다고 고집 한 이유 중 하나는 소문의 진위(眞僞)를 확인하고 소문이 거짓이면 양 명두를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양 명두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소문도 좋지 않은데 자신까지 만날 약속을 깨 버리면 양 명두가 무 척 섭섭해 할 것이 틀림없었다. 사람을 믿으면 끝까지 믿어야 한다! 그것이 명강량의 지론이기도 했다.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닙니까? 명옹, 명옹께서는 양 명두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전유권은 걱정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를 자세히 모르오. 하지만 나는 그를 믿소. 유(劉) 명두( 明頭)가 양 명두를 믿었듯이…… 명두 자리는 아무에게나 물려주는 것이 아니잖소. 나는 유 명두의 안목(眼目)까지 의심하기 싫습니다." 유 명두는 하남의 전임 명두다. 그는 이년 전, 양백에게 명두 자리 를 넘겨주고 광명계로 떠났었다. 명강량이 전임 명두까지 물고 늘어지자 전유권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양 명두에게 홍동까지 오라는 명을 전하겠습니 다." 전유권이 머리를 숙였다. "수고를 부탁합니다. 전(全) 노야(老爺)!" 명강량이 작별을 고했다. 순간, 팍!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일제히 꺼지고 사당에는 정적만이 맴돌았다. "부디 무사하시어 성녀와 교를 지켜 주기를……." 전유권이 흑암(黑暗) 속에서 중얼거렸다. 명강량은 편복(　　)처럼 고도 태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산서에 온 이후, 그의 발걸음은 유달리 바빴다. 적들의 공세도 공세지만 성 녀의 존재가 내내 신경이 써였다. '이곳으로 오는 것이 아닌데.' 명강량은 성녀가 있는 산서로 바로 온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위험 이 있더라도 적들을 다른 곳으로 완전 따돌린 후, 산서로 왔어야 했 다. 이전에도 추적은 받았지만 이렇게 집중적인 추적을 받은 적은 없 었다. 성녀를 생각하는 조급한 마음이 부른 결과였다. '한심한 일이군.' 그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러나 자책을 한다고 이미 벌인 일이 수 습되는 것은 아니다. 급한 일은 서둘러 산서를 벗어나는 일이었다. 명강량은 발걸음을 더욱 빨리 하며 태원 근교의 하구(河口)를 치달 았다. 태원에서 서너 마장 떨어진 하구에는 고기를 잡으며 생활하는 노부부(老夫婦)가 있다. 그 노부부도 교도였다. 명강량은 사부를 따라 강호를 떠돌 때 그 노부부의 얼굴을 익혀 두 었었다. 성녀는 그 그 노부부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 * * 용문산과 살호구에 있던 사형들에게 삼사형, 우제준의 명을 전하고 난 장문천은 하릴없이 태원의 객잔을 뒹굴고 있었다. 사형들을 따라 마옹을 추적했으면 하는 마음은 간절했지만 삼사형의 명이 워낙 엄 해 그는 꼼짝할 수 없었다. 사형들의 소식을 기다리며 창 밖을 내다보는 것으로 하루를 소일하 던 장문천이 그 여인을 본 것은 어스름이 질 무렵이었다. 여인은 피 타전(皮打典:가죽신을 만들어 파는 곳)을 걸어나오고 있었다. 숨을 쉴 수 없다는 표현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장문천은 숨이 딱 멈추는 기분이었다. 파장을 앞둔 상인 들과 행인들의 웅성거림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회색(灰色)으로 정지해 있었고 그의 눈에 움직이는 자는 그 여인뿐이었다. 세치 혀로 그 여인에 대해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필설(筆舌)로 형용할 수 없다라는 표현 또한 맞는 말이었다. 그의 눈은 분명 여인 을 쫓고 있었지만 보고 있는데도 그는 여인의 얼굴을 그릴 수 없었다 . 여인은 무척 빠른 걸음으로 저자를 돌아다녔다. 철유전(鐵鍮典:철 기와 유기를 만드는 대장간)과 염방(染房), 표방(漂房),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상점들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노리개도 한두 개 사는 듯 했다. 아마 여인이 천수관음(千手觀音)의 팔을 달고 있었다면 저자의 물건은 벌써 동이 났을 것이다. 여인은 더 이상 들 수 없을 정도까 지 물건을 사고 난 후에야 저자를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었다. 해가 까웃 넘어갔을 때였다. 주위가 어두워지자 여인은 돌연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여인이 쫓기듯 어둠 속을 사라져 갔다. 장문천은 그때까지 넋을 잃고 있었다. 여인의 모습은 그의 시야에 여전히 남아 환영(幻影)으로 나풀거렸다. 마치 꿈을 꾸는 느낌이었다 . 물밀 듯이 밀려드는 애잔한 감정에 장문천은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 고 있었다. 화산(華山)의 산문에 들어 여인을 최대 금기로 여기고 검로(劍路) 에만 매달린지 십 여년……. 어느 새, 그는 열 여덟이었다. 한참 여인을 동경하고 여인을 꿈꿀 혈기왕성한 나이……. 여자에 대한 동경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는 강호를 지나치며 만난 여인들에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하지만 방금 저자 거리에서 본 여 인은 달랐다. 여인은 장문천이 동경하던 여인이었고 그가 꿈꾸던 여 인이었다. 장문천의 얼굴이 고통으로 이지러졌다. "커헉!" 그가 억지 숨을 쉬며 간신히 저자에서 시선을 뗐다. 저자에는 몇몇 점포(店鋪)만이 불을 밝히고 있을 뿐 여인은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허전했다. 힘이 쭉 빠졌고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장문천은 창문을 닫고 장삼(長衫)을 걸쳤다.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여인이 다시 보고 싶었다. 저자 거리를 급히 빠져 나온 여인은 나루터에 발을 디디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오색깃이 머리와 꼬리에 길게 늘어진 새였다. 새는 많은 사람들을 싫어하는 모양이었 다. 새가 여인의 어깨에 내려앉은 때는 여인이 한적한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변의 꽁꽁 언 얼음을 지나 여인은 나룻배 한 척으로 다가갔다. 나룻배에는 중늙은이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노를 잡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소?" 중늙은이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랜만에 시전(市廛)에 나왔다니 살 게 너무 많았어요." 나루터로 급히 달려오너라 호흡이 찼는지 여인은 숨을 할딱이며 말 했다. "이곳 산서는 산세가 험하고 거칠어 험한 놈들도 많다우. 소저 같 이 고운 여자를 그냥 두지는 않을 것이오. 내가 빨리 오라고 했건만 어떻게 하려고 밤길을 자처했소? 이 늙은이는 소저를 도와 줄 힘이 없다는 것만 아시오." 중늙은이가 퉁명스럽게 말하며 여인의 손에 들린 짐을 나룻배에 실 었다.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나룻배에 올랐다. "이거 드셔요." 나룻배에 오른 여인은 짐을 뒤적이더니 중늙은이에게 작은 호로병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요?" 중늙은이가 노로 물결을 차며 물었다. "술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죽산홍(竹山紅)이에요." "아니! 이…… 이렇게 귀한 것을…… 얼굴만 예쁜 줄 알았더니 소 저는 마음도 곱구려." 중늙은이의 표정이 이내 달라졌다. 죽산홍도 보통 죽산홍이 아니었 다. 그가 평생 한 번 마셔볼까한 상품(上品)의 술! "좋은 술을 옆에 두고 구경만 하는 자는 참 술꾼이 아니지." 중늙은이가 침을 삼키며 밀봉(密封)된 죽산홍을 열었다. 죽산홍의 청한 향이 밤공기 전체를 맑게 했다. "먼저 한 모금 드셔 보겠소?" 중늙은이가 여인에게 술을 권했다. 여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콸!콸!콸! 중늙은이가 신나게 술을 들이켰다. "커! 좋은 술에 가인(佳人)! 지금 내 나이가 딱 십 년만 젊었으면 부러울 게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주책으로 듣지 마시오. 자! 그럼 갑 시다. 어여차!" 그가 입을 닦으며 힘차게 노를 저었다. 검은머리보다 흰머리가 배는 많아 보였지만 노인의 노 젓는 솜씨는 젊은이들 저리가라였다. 배는 분하의 찬 물결을 두둥실 헤쳐 나갔다 . 중늙은이는 서너 번의 노질에 술 한 모금을 곁들었다. 죽산홍은 비 싼 만큼 흥취도 빨리 불러오는 모양이었다. 어느 틈에 중늙은이는 소시절의 노래 한 가닥을 뽑고 있었다. - 인생이란 백 년도 못 다 살고 떠나가야 하는 것. 언제나 천 년의 근심을 품은 채로 살아가고 있다. 못내 안타까운 건 낮이 너무 짧고 밤이 너무 길다는 것. 어찌 횃불을 밝혀 놀지 않을 수 있으랴? 인생이란 모름지기 그때그때 즐겨야만 하는 것……. 중늙은이는 제법 풍류(風流)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는 자신의 흥에 취에 노래를 멈출 줄 몰랐다. 여인은 맑은 미소로 중늙은이의 노래 에 귀를 기울였다. 겨울밤의 은한(銀漢)은 유난히 빛났고 여인의 눈 빛은 별빛보다 더 반짝였다. 어깨에 앉은 작은 새 한 마리는 여인의 아름다움을 더욱 신비스럽 게 꾸미고 있었다. 장문천은 미추(美醜)를 가리는 눈은 개나 소나 비슷하다고 생각했 다. "흥!" 그가 코웃음을 쳤다. 제법 그럴듯하게 차려 입은 서너 명의 작자들이 여인을 뒤따르고 있었다. 태원에서 제법 목소리께나 높이는 귀공자(貴公子)들임에 분 명했다. 그들도 여인의 뒤를 졸졸 따르고 있었다. 장문천은 내심 그들의 출현이 기뻤다. 여인에게 협의남아(俠義男兒)의 기개를 보여 줄 둘도 없는 기회가 생길 것 같았으므로……. 목선(木船)을 탄 네 명의 귀공자들은 여인을 향해 열심히 노를 저 어 가고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목선이 점차 여인이 탄 나룻배를 향해 다가가자 그의 마음은 이상하게 급해졌다. "사공, 서두르시오." 장문천이 사공을 독촉했다. 그가 조바심에 발을 구르며 물길을 서 너 장 더 헤쳤을 때였다. "저건 뭐야?" 장문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분하에 돌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색등(五色燈)을 주렁주렁 단 작 고 화려한 유선이었다. 유선도 이물을 비틀며 여인이 탄 나룻배를 향 해 접근하고 있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괜찮은 계집이야. 저런 절색이 어찌 우리 눈에 띄지 않았지?" 선수(船首)에 선 자가 입을 해 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곳의 여자는 아닌 것 같아." 배 가운데 선 청년이 여인을 유심히 살피며 중얼댔다. "밤중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유곽(遊廓)의 여자는 아닐까? 듣자 하니 화춘루(花春樓)에 새로운 계집이 들어왔다는데 혹시……." "아니야! 우리가 유곽의 여자들을 한두 번 대해 봤나. 유곽의 여자 라면 척 보면 알 수 있지." 선미(船尾)에 선 청년들도 한마디씩 주절댔다. 목선에 탄 네 명의 청년은 태원에서 알아주는 파락호들로 집안의 힘을 믿고 온갖 행패를 일삼는 작자들이었다. "그런데 말일세. 저 여자를 이제 어떻게 할 셈인가?" 선미의 우측에 선 청년이 삭풍에 언 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쩌긴 어째! 본래 하던 대로 해야지!" 선수의 청년이 쏘듯이 말했다. "평소 하던 대로 하자면 골고루 나눠 갖자는 말인데…… 그렇게 할 여자로는 너무 아깝지 않은가?" 배 가운데 선 청년이 은근한 눈빛으로 나머지 청년들을 바라보았다 . "맞어! 동감이야!" 선미에 선 두 명의 청년이 동시에 소리쳤다. 여자를 문짝처럼 취급해 자기 것, 남의 것, 가리지 않는 작자들이 었지만 나룻배에 탄 여인에 대해서는 소유욕(所有慾)이 치솟는 모양 이었다. 사실 나룻배에 탄 여인은 나눠 가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여 자였다. "저만한 계집은 평생 한 번 보기도 힘들 걸세. 저 계집을 혼자 끼 고 싶은 마음은 자네들 보다 내가 더할 걸! 하지만 어떻게 하나 우리 는 네 명이고 여자는 한 명인데……." 선수에 선 청년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 둔 바가 있지." 배 가운데 선 청년이 주위의 이목을 구하며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 . 그러자 선미 우측에 선 청년이 그의 말을 재빨리 가로챘다. "자네 머리에서 나오는 방법이야 딴 방법이 있겠나? 금냥을 많이 내는 자가 저 계집을 차지하자는 것이겠지. 나머지 자들은 지불한 금 냥을 챙겨 가고." "맞았어!" 배 가운데 선 청년이 손뼉을 쳤다. "흥!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집을 팔아서라도 저 계집을 손에 넣으 려 할 것일세." 선미 좌측에 선 청년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다른 청년들은 입을 닫았다. 집안의 재력(財力)을 따진다면 그를 능 가할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선에 탄 작자들이 서먹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켰다. 선수에 선 청년이 그 침묵을 깼다. "까짓 계집 하나 때문에 이렇게 긴 입씨름을 해 보기는 처음이군. 그나저나 여기서 아옹거려 봐야 뭐 하겠나? 이렇게 추운 날 배 위에 서 돗자리 펴자는 것도 아닐 테고. 일단 계집이나 엮어 놓고 다시 이 야기함세." 그의 말에 나머지 작자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노를 저어라!" 선수에 선 청년이 사공들을 향해 소리쳤다. 촥! 촥! 두 명의 사공이 여인이 탄 나룻배를 향해 힘차게 물질을 했다. 청년들을 태운 목선이 나룻배에 삼 장여 접근해 갈 때였다. '핑!'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뱃전이 둔탁하게 울렸다. "뭐야?" 작자들이 놀라 소리쳤다. 뱃전에는 까만 화살이 꼬리를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작자들이 화살 이 날아온 것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과 예닐곱 장 떨어진 곳 에는 화려한 오색등을 단 유선 한 척이 떠 있었다. 작자들은 나룻배 의 여인에만 관심을 가지느라 그 유선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오색등으로 환한 유선의 선수에는 금의에 화려한 장식을 주렁주렁 단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 서 있었다.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가 한 눈에도 성깔께나 있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청년의 손에는 각궁(角弓) 이 들려 있었다. 목선을 향해 화살을 날린 자는 바로 그였다. "저놈이! 우리가 누구라고!" "죽으려고 작정을 한 놈이군!" 목선에 탄 작자들이 유선에 탄 청년을 향해 이구동성으로 개소리를 늘였다. 그때였다. "가만!" 유선을 유심히 보고 있던 선미 좌측의 청년이 손을 들었다. "교타방(蛟打幇)!" 그가 손가락으로 유선의 돛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뭐? 교타방!" 나머지 작자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교타방이라면 황하에서 가장 큰 수상(水上) 표국(　局)이다. 아무 리 태원에서 분탕질로 악명을 떨치는 그들이었지만 교타방의 명성에 는 기가 죽지 않을 수 없었다. "젠장! 저놈도 저 계집에 눈독을 들이고 있을 줄이야." 선수에 선 청년이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댔다. "나는 가야겠어. 아무리 계집이 좋다지만 목숨을 잃을 수는 없지 않는가?" 배 중앙의 청년이 목을 움츠리며 말했다. "가세! 서둘러 가세! 다시 화살이 날아오기 전에…… 놈의 행색을 보건대 교타방에서 적지 않은 지위에 있는 자일 거야. 이놈들아! 빨 리 가자!" 선미 우측의 청년이 발을 동동 구르며 사공들에게 소리쳤다. 작자들의 목선이 포말을 일으키며 급히 이물을 틀었다. "아이고! 이런 벽촌에서 저런 절색을 어찌 다 보는가 했더니……." "저놈은 좋겠군. 아깝다! 아까워!" 작자들은 허둥지둥 달아나면서도 나룻배의 여인에 대한 아쉬움을 한마디씩 나타냈다. '행색을 보아하니 교타방의 소방주(少幇主) 쯤 되겠군.' 유선의 출현이 달갑지 않기는 장문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심 교타방의 출현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심하는 중이었다. 교타방의 소방주 쯤 되는 자라면 고함 한 번에 물러갈 자는 절대 아 니다. 또한 교타방의 세는 화산파도 감히 무시할 바가 못되었다. '그럴듯한 말로 놈을 내쫓아야 하는데…….' 장문천은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나 마음만 바쁠 뿐 종내 무릎을 칠 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이 생각 저 생각을 굴릴 때였다. "앗!" 사공이 갑자기 고함을 질렀다. 유선이 이물을 틀어 장문천이 탄 배를 향해 쾌속으로 다가오고 있 었다. 유선과 장문천이 탄 배는 그대로 충돌할 듯했다. "멈춰라!" 의외의 사태에 당황한 장문천이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유선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아이고!" 사공이 비명을 지르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장문천 이 탄 배와 유선이 거세게 부딪혔다. 콰직! 장문천이 탄 배가 유선에 산산이 조각났다. 다행히 장문천은 경신술에 제법 조예가 있어 배가 부딪히는 순간, 유선으로 재빨리 뛰어오를 수 있었다. "무슨 짓이냐?" 유선에 뛰어오른 장문천이 화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범의 아가리도 마다하지 않는 애송이군." 냉랭한 목소리가 장문천을 맞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선수에 서 있던 눈썹이 치켜 올라간 청년이었다. "너는 누구냐? 보아하니 교타방의 식솔인 듯한데…… 교타방이 이 렇게 예의를 모르는 자들인 줄은 예전에 몰랐다!" 장문천이 한광을 쏟았다. "흐흥! 우리 교타방은 강호의 파락호에 대해서도 예의를 베풀 만큼 아량이 넓지는 않다. 애송아, 우리 소방주께서 더 화를 내기 전에 이만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다." 눈썹이 올라간 청년 옆에는 쥐꼬리 수염의 중년인이 서 있었다. 그 가 수염을 꼬며 장문천에게 훈계하듯 말했다. 그의 옆구리에는 '순(巡)'이라는 철패가 걸려 있었다. 그는 남일기 (南逸己)라는 자로 교타방의 순찰(巡察)이었다. 눈썹이 치켜 올라간 청년은 장문천의 짐작대로 교타방의 소방주가 맞았다. 그는 교타방주의 다섯 째 아들로 마충현(馬忠賢)이었다. 마충현은 남일기의 안내를 받으며 분하의 분타를 순회 중이었다. 유향경천문의 청룡당주로부터 마옹이 산서에 출현했으니 뱃길을 튼튼 히 지켜 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도 나루터에 선 여인을 발견한 후, 한순간에 마음을 뺏겨 분하의 소란에 끼여든 것이다. "파락호? 흥! 교타방의 위세가 이제 우리를 파락호라 부를 정도군! 교타방의 소방주께서는 너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게 아니신지?" 장문천이 '우리'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며 빈정댔다. 매화 문양이 점점이 박혀 있는 도복(道服)! 눈이 있는 자라면 그가 화산파의 제자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구대문파의 제자인 척 하는 자들은 강호에 한둘이 아니지. 나는 구대문파의 제자 중 여인을 집적거리는 파락호들의 수괴가 있다는 말 을 들어 본 적이 없다." 교타방의 소방주, 마충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뭐? 내가 저놈들의 수괴라고?" 장문천이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고 있는 태원의 파락호들을 가리키 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저놈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게냐?" 교타방의 순찰, 남일기가 날카롭게 물었다. 장문천은 순간적으로 할 말이 없었다. 대화산파의 제자가 체면 없 이 여인에 혹(惑)해 그 뒤를 졸졸 따랐다고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 다. "소방주께서는 시비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다. 더 이상 책임을 묻 지 않을 테니 빨리 이곳에서 사라져라!" 남일기가 성큼 걸어 나오며 장문천을 윽박질렀다. 장문천은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다. 앞뒤 없이 고함을 지르는 교타방도들에 의해 졸지에 그는 파락호의 수괴가 되어 있었다. "셋을 셀 때까지 기회를 주마! 그 전까지 이곳을 떠나라! 만약 떠 나지 않는다면!" 남일기가 허리에 차고 있던 박도의 도신(刀身)을 반쯤 보이며 음산 한 미소를 흘렸다. 이쯤 되자 장문천의 분노는 폭발했다. "화산파의 제자는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간다! 내가 분하의 물결 을 타든 말든 네놈들이 무슨 상관이냐? 그리고 내가 화산파의 제자가 맞는지 정 의심스럽거든 검으로 확인하라!" 쓱! 그가 분노로 몸을 떨며 검을 뽑았다. 남일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으름장 몇 번이면 장문천이 물러 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장문천이 검까지 뽑고 나서자 급히 마충현 의 눈치를 살폈다. 마충현이 눈썹을 꿈틀댔다. "죽여라!" 그가 각궁을 부러뜨리며 음산한 눈빛을 빛냈다. 마충현의 명에 남일기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소방주, 죽여라는 명은…… 생각보다 사태가 커질 수도……." 그가 말을 우물거리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시끄럽다! 죽여라! 놈은 파락호일 뿐이야!" 마충현이 부러진 각궁으로 뱃전을 세차게 치며 악을 썼다. 남일기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수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스슥! 슥! 남일기가 이끄는 서너 명의 수하들이 장문천을 에워쌌다. "쳐라!" 남일기가 수하들과 함께 장문천을 공격했다. 장문천이 교타방의 공세에 맞서 육합검법(六合劍法)을 멋지게 펼쳤 다. 육합검법은 이십사수매화검법에 비해 현기(玄機)는 떨어지나 초 식(招式)이 간명하고 날카로워 다수의 적을 상대하기에는 제격이다. 쨍! 쨍! 쨍! 분하에 때아닌 칼바람이 불었다. 장문천은 처음에는 머릿수의 우위에 밀리는 듯했다. 그러나 호랑이 새끼는 역시 호랑이! 그는 십여 초만에 남일기 등과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검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자 장문천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육합검법은 화산파의 절예로 강호에 제법 알려진 검법이다. 다른 자 도 아닌 교타방의 소방주 쯤 되는 자가 육합검법을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저들은 자신을 파락호로 몰았다. 한낱 파락호를 상대하는데 순찰쯤 되는 자가 직접 칼을 빼고 달려들다니……. '알고 있다. 내가 화산파의 제자라는 것을…… 그런데 왜?' 장문천은 교타방의 식솔들이 그를 다짜고짜 파락호로 몬 이유를 몰 랐다. 그는 연환공격(連環攻擊)으로 남일기를 몰아친 후, 잠시 생각 을 정리했다. 오래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그는 이내 마충현의 의중을 짐작했 다. '저놈이!' 장문천의 눈초리가 파르르 떨렸다. 교타방의 소방주라는 작자는 태원의 파락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 고 있었을 것이다. 수상에서 여인을 강제로 납치하려는……. 하지만 자신이 불쑥 나타나자 계획이 헝클어졌다. 화산파의 제자가 보는 앞에서 여인을 강제로 데려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데려갈 것 을 고집 한다면 자신을 죽이거나 멀리 내쫓는 방법 뿐! 파락호로 몰아붙인 것은 그 때문인 듯했다. 겁을 먹게 해서 달아나 게 하든가 죽여도 변명을 남겨 두기 위함! 자신의 시신이 분하에서 발견되고 살인자가 교타방의 소방주임이 밝혀져도 놈들이 자신을 파락호와 한 패인 줄 알고 죽였다면 사문에 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죽은 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지금의 상 황은 파락호라 몰아붙여도 달리 변명할 상황도 못되었다. 자신이 분하에 있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으므로……. '아! 아! 강호의 음흉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더니……' 장문천은 탄식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그는 더욱 노기탱천(怒氣　 天)했다. 교타방에서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확인해서 만이 아니었다. '추악하고 더러운 놈! 저 여인을 위해서도 나는 네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장문천의 생각은 여인에 가 있었다. 만약 자신이 교타방의 소방주 놈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여인은 작자의 품에 떨어질 것이다. 생각만 해도 치 떨리는 일이다. 그는 목숨을 걸고 여인을 지킬 생각이었다. 파팟! 팟! 파팟! 장문천의 검세가 더욱 날카로워져 갔다. '으악!'하는 비명과 함께 잠깐 사이에 남일기의 수하 한 명이 나뒹굴었다. 마충현은 장문천이 수를 더할수록 힘을 발휘하자 미간을 좁혔다.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며 시비를 걸 것 같아 아예 없애 버리기로 마음 을 먹었다. 보는 자 마다 여인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또 어떤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마음이 급했다. 그 때문에 그는 애송이를 없애 버리기로 결심을 굳힌 것이다. 분하의 깊은 물에 돌을 달아 던져 버리면 저 애송이를 누가 죽인 줄 알랴! 하지만 애송이의 무공은 의외로 고강했다. 순찰, 남일기의 이마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승부는 반전되어 몰아붙이고 있는 자는 화산의 애송이였다. 교타방주인 아버지의 말대로 구대문파의 무공은 정말 그 끝을 알 수 없었다. '한낱 애송이도 저만한 무위를 자랑하다니…….' 그러나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충현이 아미자(峨嵋刺)를 꺼냈다. 팟! 그가 금침정해(金針定海)의 수법으로 장문천을 향해 아미자를 번뜩였다. 챙! 챙! 챙! 챙! 챙! 장문천, 마충현 등이 좁은 유선을 뛰어다니며 난마(亂麻)로 얽혔다 . 그들은 지금 머리털이 난 이후, 가장 치열한 싸움을 치르고 있었다 . 생각하면 화산파와 교타방의 충돌은 강호에 폭풍을 몰고올만큼 큰 사건이다. 만약 분하의 소란이 화산파나 교타방에 흘러 들어간다면 화산의 장문인과 교타방주는 문파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무슨 조치 를 취할 것이다. 자칫하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끝에 화산파와 교타방의 대 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교타방이 화산파에 비해 명성과 실력이 떨 어진다고는 하나 교타방주는 유달리 자존심이 센 자이니…… 물론 그 같은 경우는 최악(最惡)의 경우다. 각 문파가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는 최소한의 경우를 따져도 장문천 은 금족령(禁足令)이다. 죽을 때까지 화산을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 하는……. 화산파에서 장문천에게 그같은 벌을 내린다면 교타방주도 당연히 마충현에게 그에 상응(相應)하는 벌을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장문천과 마충현은 지금 위험천만의 승부를 벌 이는 중이었다. 그들도 싸움이 가져올 결과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 었다. 하지만 지금 장문천과 마충현의 생각은 뒷일을 염려할 만큼 한 가하지 못했다. 그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인의 환영뿐이 었다. 그들은 젊었고 나룻배의 여인은 또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품안 에 넣고 싶은 여자였다. 챙! 챙! 챙! 장문천과 마충현의 피를 부르는 싸움은 쉽게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나룻배에 탄 여인은 그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주위에 눈길 한 번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미 술이 취한 나룻배 사공의 노래 가 너무 컸기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연 신 입가에 미소만 물고 있었다. 장문천과 마충현이 한바탕 싸우는 사이, 여인을 태운 배는 어둠 저 편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들리는 것은 죽산홍에 취해 흥얼거리는 사 공의 노래 소리 뿐……. * * * "얌! 얌! 꿀꺽!" 팽해만은 메기입에 죽엽청(竹葉淸)과 육포(肉脯)를 연신 쑤셔 박고 있었다. "으헤헤! 이 놈이 사람을 얼려 죽이려고 작정을 한 모양이군!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그가 죽엽청을 꿀꺽 들이키며 투덜댔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추위를 들기 위해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들이 킬 때였다. 사박! 사박! 눈 덮인 갈대밭 사이로 삼십대 중반의 도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 는 무당파의 명정도장(明淨道長)이었다. 명정은 몇 명의 사제들과 함 께 개봉 외곽의 객잔에 머물고 있었다. "아이고! 도장! 이제야 오셨군요." 팽해만이 호들갑을 떨며 그를 맞았다. "하필이면 왜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소이까?" 명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는 팽해만을 만나는 것이 영 마 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같은 마음은 명정 뿐만이 아니었다. 팽해만을 만나면 짜증스런 감정부터 불쑥 생기는 것은 그를 몇 번 만 난 구대문파 대다수 제자들도 비슷했다. 사실 초면(初面)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팽해만에 호감(好感)을 가 진다. 아이 같은 얼굴, 싹싹한 태도…… 특히 당예나 다른 당주들을 먼저 본 자들은 팽해만에 더욱 호감을 가졌다. 나머지 당주들은 하나 같이 말을 붙이기 힘들 정도의 인상들이므로……. 그에 반해 팽해만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에 대해 간이라도 빼줄 듯 허리를 굽실거렸다. 그러나 몇 번 만나고 나면 팽해만이 다른 자들보다 훨씬 피곤한 자 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자신의 자세를 최대한 낮추어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부리는 놀라운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명정과 구대문파 제자들의 불만은 팽해만이 구대문파를 수족처럼 부리려 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가 워낙 저자세로 나오는 바람 에 어쩔 수 없이 끌려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별반 중요하지 않은 일까지……. 오늘만 해도 그랬다. 찾아오거나 객잔에서 만날 수 있는 일을 굳이 허허벌판에서 만나자니…… 도사 체면에 만나는 장소로 아옹다옹 싸 울 수 없는 일이고 만약 체면 팽개치고 시비를 걸 요량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팽해만은 다음날 이같이 말 할 것이다. "어제는 정말 추운 날이었소. 밤새도록 기다렸습니다. 바쁜 일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으헤헤!" 메기입에 능걸거리는 웃음을 달고……. 실상 팽해만은 밤을 새워 기다릴 자였고 몇 번 그런 적도 있었다. 그러니 구구한 말을 하기 싫어서라도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 다. 팽해만은 매사를 그렇게 속을 한 번 뒤집어 놓고 시작했다. 따라서 명정이 팽해만을 보자마자 짜증부터 내는 것을 전혀 그의 수양 탓만으로 돌릴 바는 못되었다. 팽해만이 명정의 그 같은 마음을 어찌 모르랴! 하지만 구대문파 놈 들만 만나면 어떻게든 골려 주고 싶은 마음부터 생기니……. "헤헤! 도장,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어디 불편한 데라도……." 그가 육포를 질겅거리며 짐짓 염려의 표정을 지었다. 명정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여기까지 부른 이유나 듣고자 하오!" 그가 냉랭하게 말했다. "아! 그렇게 하지요." 팽해만은 남은 육포를 입에 쑤셔 넣고 손을 탁탁 털었다. "음…… 짭!짭! 전갈이 왔습니다. 태행산에서 명강량의 종적을 찾 았다고 하더군요." "태행산? 어느새 태행산까지…… 달아나는 재주 하나는 인정해 줄 만하군." 명정이 한광을 번뜩였다. 마옹을 잡기 위해 무당산을 내려온 자는 그 뿐만이 아니다. 마옹에 의해 세 명의 제자가 사상을 당한 후, 무 당파는 실추된 문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각지를 제자를 보냈다. 사형 명광(明光)은 몇몇의 사제들과 함께 산동으로 갔다. 연락이 닿 았으면 태행산으로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정말 끈질긴 자이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쉽게 달아나지 못할 것입니다. 도장을 위시해 소림, 화산에서도 추살대를 보내 주셨으니……." "그래서 부탁할 일이 무엇이오?" 명정은 여전히 쌀쌀한 어투였다. "도장, 분하로 가 주시겠습니까? 헤헤헤! 명강량이라는 놈이 갑자 기 뒷문으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무슨 말이오? 마옹은 태행산에 있다더니……." "태행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태행산에 있지 않습니다. 당예와 화산 파의 귀하신 분들께서 놈을 놓친 모양입니다. 으헤헤! 그들이 지금 쫓고 있는 자들은 명강량이 아니라 잠마라 하더군요. 명강량, 그놈은 이미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고…… 이런 좋지 않은 소식을 저 눈 동 그랗고 예쁜 비둘기가 물고 오다니…… 쩝!" 팽해만이 혀를 차며 조롱속에 들어 있는 전서구(傳書鳩)를 가리켰 다. "음……." 명정은 신음을 흘렸다. "그래서 도장께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곳은 제가 맡을 테니 도장께서는 분하로 가 주시라고…… 소림의 나한(羅漢)들이 우측을 맡아주고 내가 가운데를 맡고 도장이 분하를 맡아 주시면 놈은 달아 날 곳은 없을 것입니다." "육로(陸路)를 택해 섬서(陝西)로 넘어간다면?" "그것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화산파에서 대거 제자들을 풀 어 섬서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헤헤헤!" 팽해만은 연신 히히덕거렸다. 그는 사실 기분이 좋았다. 예측대로 마옹이 당예와 화산파의 추적을 따돌리고 다시 황하에 모습을 드러내 려 하고 있으니…… 특히 그가 지키려 하는 곳은 마옹이 나타날 확률 이 가장 높은 곳이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곳으로 가지 않겠소? 설마 마옹이 뱃길을 택하겠습니까? 요지(要地)마다 사람이 깔려 있음을 알텐데. 강상(江上)에는 피할 곳도 없습니다." "으헤헤! 모르는 말씀! 명강량은 무식한 놈이라 앞뒤 없는 엉뚱한 술책을 좋아합니다. 뱃길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포위망을 서둘러 벗어 나기 위해 정면돌파를 시도할지 모르지요. 헤헤헤! 부끄러운 말이지 만…… 명강량을 자주 놓치다 보니 경험도 생기더군요." 팽해만이 머리를 긁적였다. "알았소! 그럼 이제 이야기가 끝났소?" 명정이 냉랭하게 물었다. "예! 물론 끝났습니다. 이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헤헤헤! 여기 까지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장!" 팽해만이 손바닥을 비비며 경망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명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등을 돌렸다. "다음에 보겠소!" 그가 뒤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팽해만은 명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쳤다. "헤헤헤! 당신이야 물론 나를 보고 싶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정말 보기 싫어! 보기 싫다고! 어이! 지독하게 춥군. 봄이 와도 이 추위는 쉽게 가시지 않겠어!" 그가 몸을 움츠린 채 소매 사이로 손을 넣으며 주절댔다. 제7장 암중가(暗中歌) "성녀가 없어졌습니다." 명강량을 맞는 노부부의 표정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명강량도 심장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보이지 않았소?" 그가 급히 물었다. "오전에 그물을 거두러 나갔습니다. 찬이 변변치 않아 성녀에게 어 죽(魚粥)이나 끓어 들이려고 했는데…… 갔다 오니 보이지 않았습니 다." 노인(老人)이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말했다. "영감과 내가 종일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 명옹, 아이고! 이 늙은 것들을 죽여주십시오. 성녀도 제대로 못 모시고……." 노파(老婆)는 아예 눈물을 떨구었다. 명강량은 눈앞이 캄캄했다. 천길 낭떠러지를 구르는 기분이었다. 귀는 윙윙거리고 머리 속은 하앴다. "수상한…… 수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소?" 그가 쥐어짜는 목소리로 물었다. "가구(家具)와 식기(食器)는 모두 그대로입니다. 이상한 자를 보았 다는 사람들도 없고……." 노인이 가슴을 쳤다. 명강량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무 일도 없을 게요." 그가 노부부에게 위로의 말을 던졌다. "반드시 찾아오리다." 노부부를 다독거린 후, 명강량은 신형을 날렸다. '만약…… 만약…… 성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명강량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는 호마(胡馬)처럼 이리저리 치달았 다. 나뭇가지에 걸려 옷은 이리저리 뜯겨 나갔고 얼굴도 상처 투성이 었다. '모두 죽여 버릴 것이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도 그의 머리를 아득하게 했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증오였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복수였다. 몇 시간을 돌아다닌지 몰랐다. 적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었다. 태원 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듯도 했다. 웬만한 자라면 포기했어도 벌써 포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머 리 속에는 성녀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명강량은 노부부의 집에 다시 들렀다가 성녀가 아직도 오지 않았음 을 확인한 후, 이번에는 물가를 달렸다. 윙! 윙! 휘잉! 밤이 깊어 갈수록 삭풍은 매서웠고 얼음이 두텁게 얼며 일어서는 소리는 늑대의 울음보다 더 사나웠다. 그러나 명강량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얼음판을 질주해 갈 때였다. "강량!" 바람결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명강량의 피는 일순간에 흐름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어둠 저편을 향했다. "강량!" 그를 부르며 달려오는 자는 여인이었다. 어깨에 명조를 앉히고 두 손에 한아름의 물건을 든……. 여인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명강량을 향해 다가왔다. 명조도 날갯짓을 하며 그를 반겼다. 명강량은 맥이 쫙 풀렸다. 손이 덜덜 떨려 신장도는 땅에 떨어질 듯했다. 눈물도 핑 돌았다. 아무 곳에나 주저앉고 싶었다. "화났어요?" "……." "죄송해요. 이야기를 하고 가는 것인데……. 하지만 밖에 나가겠다 고 하면 가지 말라고 했을 것 아니에요." 여인은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이었다. 명강량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화도 났고 마음도 진정되지 않았다. "꼭 사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여인이 명강량을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이 명강량의 화를 일시에 날렸다. 그러나 명강량은 안색을 풀지 않았다. "여기를 보세요." 여인이 손에 들고 온 짐을 가리켰다. 그녀가 오른쪽에 놓인 짐을 풀었다. 보퉁이에는 옷가지와 가죽신 등이 있었다. "강량의 것들이에요."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옷을 펼쳤다. 화려한 금의(錦衣)였다. "명조가 강량이 온다는 것을 알려주었어요. 진작부터 강량의 옷을 사리라 마음먹고 있었거든요. 강량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겨울옷이 아니에요. 너무 찢어졌고……." 여인의 말에 명강량은 문득 자신의 청의를 살폈다. 정말 그가 입고 있는 청의는 계절이 지나도 한참 지난 옷이었다. 핏자국과 땟물로 번지르르 했고 찢어진 곳도 한두 곳이 아니었다. 계절을 잊을 정도로 바빴으니 옷은 신경도 쓸 수 없었던 것은 당연 한 일이었다. "조하방(朝霞房:비단을 짜는 방)에서 바로 샀는데 몸에 맞는가 모 르겠어요." 여인이 옷을 명강량의 가슴에 맞추어 보았다. 명강량은 콧등이 찡했다. 그러나 그는 여인이 사준 옷에 좋아라 할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여인의 손에서 뺏듯이 옷을 받아 보퉁이에 챙겼다. 그가 여인 이 들고 온 짐을 어깨에 걸쳤다. 명조가 날갯짓을 하며 보통이 위에 앉았다. "이런 옷은 주위의 이목만 집중시킬 뿐입니다. 그리고 호교신장은 검소(儉素)함을 미덕(美德)으로 여겨야 한다고 사부로부터 들었습니 다." 명강량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사람들 눈에 오히려 더 잘 띌 걸요." 여인은 낙담(落膽)한 표정이었다. 모처럼 큰마음을 먹고 벌인 일인 데……. "어쨌든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노인들께서 무척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녀의 관심은 광명계이어야 하지 이곳 하 계(下界)가 아닙니다. 성녀께서 옷 나부랭이를 사러 다닌다는 것을 알면 교도들이 저에게 먼저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명강량이 표정 없는 어투로 말했다. 여인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성녀가 아니에요. 내 이름은 악약(鄂藥)! 밤마다 어머니가 불러 할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온 것뿐이에요!" 그녀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소리쳤다. 여인이 말하는 어머니는 전대 성녀였고 할아버지는 그의 사부다. 여인이 눈물을 뚝 떨어뜨렸다. 명강량은 여인의 눈물을 모른 척했다. "갑시다. 노인들께서 지금도 가슴 졸이며 기다릴 것이오."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운악약(雲鄂藥)…….' 명강량은 오랜만에 성녀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성녀는 언제나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성녀라 불렀 고 앞으로도 성녀라 불러야 했다. '영원히 넘을 수 없는 벽…….' 명강량의 가슴은 애잔한 통증을 호소했다. 생각은 생각의 금기에 닿아 있었다. 때문에 성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도 말아야 했다. 그가 성녀에 대해 생각할 일은 성녀를 지키는 일 뿐이었다. 촥! 명강량은 깊은 물 속에 몸을 담궜다. 그는 얼음을 깨고 찬 강 물에 몸을 씻고 있는 중이었다. 저벅! 저벅! 노인이 다가왔다. 노인의 손에는 옷가지들이 들려 있 었다. 성녀가 사 온 것들이다. 노부부도 누더기가 된 청의보다 성녀가 사 온 옷들이 사람의 눈에 들 띌 것이라며 그 옷들을 입기를 권했다. 그래서 그는 마지못한 듯 그 옷들을 입기로 했다. 물 속에서 빠져 나온 그가 몸을 닦고 노인이 내미는 옷을 걸쳤다. 금의도 가죽신도 그의 몸에 딱 맞았다. 그가 옷을 모두 걸치자 노인이 흡족한 표정으로 한마디했다. "아주 잘 어울립니다." 명강량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기분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노야(老爺), 출발 준비는 끝났습니까?" 그가 옷의 주름을 펴며 물었다. "예, 끝났습니다." "성녀께서는?" "낮의 일로 피곤한지 깊게 주무시고 계십니다. 깨울까요?" "아니, 그대로 두시오." 명강량은 노부부의 초옥(草屋)을 향해 걸어갔다. 마당에는 두 마리의 나귀가 있었다. 널빤지로 엮인 나귀의 등에는 이불이 깔린 커다란 광주리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귀의 발굽은 두 터운 천으로 동여매져 있었다. 동상(凍傷)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밤길 에 발굽 소리가 크게 들릴 것을 우려해서였다. 명강량은 성녀가 자고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명조가 날갯짓을 하며 그를 맞았다. 명강량은 성녀를 안았다. 성녀의 잠은 깊고도 깊다. 지금 그가 안고 가는데도 성녀는 잠을 깨지 않았다. 명강량은 성녀를 광주리에 실은 후, 춥지 않도록 이불 로 감쌌다. 명조가 그 이불 사이로 뽀르르 날아들었다. "지금 가실 겁니까?" 노인이 물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명옹!" 노부부가 무릎을 꿇었다. "성녀시여! 청정광명세계명존(淸淨光明世界明尊)을 불러 주시어 이 흑암으로부터 어서 우리를 구하소서!" 그들이 성녀를 향해 오체투지로 몸을 던지며 간절히 기구(祈求)했 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성녀가 빙긋 웃었다. 노부부의 염원을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 * * 장문천은 자신의 행색을 살피며 실소를 흘렸다. 전신은 피투성이였 다. 교타방과의 일전에서 입은 상처였다. 장장 한 시진을 넘게 싸웠 었다. 적들의 칼에 전신이 성한 곳이 없었지만 결국 승리를 거둔 자 는 그였다. 교타방의 두 수하를 참했고 순찰이라는 작자의 한쪽 팔을 잘랐다. 소방주라는 자도 그의 죽엽수(竹葉手)에 엄중한 부상을 면하지 못했 다. 교타방과의 싸움, 최초의 살인(殺人), 승리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희열, 사문의 무예에 대한 자부심……. 장문천은 흥분을 가라앉히려 해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하루 저녁에 일어난 일들이 그에게는 모두 꿈만 같았다. '어디로 갔을까?' 장문천은 흥분된 가슴을 삭히지 못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는 이 모든 일의 빌미를 제공한 저자 거리의 여인을 찾고 있었다. 여 인이 분하의 소란을 알고 있을지 모를지는 별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장문천은 그 여인 때문에 교타방과 싸웠고 그 여인을 위해 목 숨을 걸었기 때문에 자신은 여인을 찾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 했다. 만나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소저를 지키려다 이렇게 부 상을 입었노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게고……. 하지만 여인은 그를 보면 분명 '수고했다'라는 말로 위로를 해 줄 듯했다. 자신의 상처를 가슴 아파해 하며 따뜻한 손으로 치료도 해 줄 것 같았다. 장문천의 가슴은 또 다시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그는 여인을 찾기 위해 장검을 철컥이며 분주히 돌아다녔다. 교타방과 시비가 붙은 데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인을 두고 다투었다는 소문이 사부나 사형의 귀에 들어가면 중형( 重刑)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장문천은 그 일을 심각하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교타방의 소방주라는 놈도 떳떳하게 자랑할 만한 일로 그와 싸운 것이 아니므로 분하의 소란을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 고 놈은 패했다. 무슨 염치로 자신과 싸운 것을 밝힌단 말인가. '그렇지. 놈은 객방 한 구석에서 끙끙 앓고 있으면 될 일이고 나는 여인을 만나면 될 일이다. 나는 이겼고 놈은 패했다.' 장문천은 묘한 상상까지 하고 있었다. 승자는 자신이니 여인을 품 에 넣는 자는 당연히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여인에 대한 끝없는 상상으로 희희낙낙(嬉嬉樂樂)하며 여인을 찾을 때였다. 장문천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타박! 타박! 한밤을 은근히 울리는 소리는 발굽 소리였다. 발굽 소리가 낮고 뭉 툭한 것으로 보아 야행(夜行)을 하느라 발굽에 헝겊 같은 것을 씌운 모양이었다. 가까이 있지 않았으면 발굽 소리를 듣지도 못했을 것이 다. '밤을 행각하는 자 치고 제대로 된 자는 없지.' 장문천은 발굽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상대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물론 명강량이다. 발걸음 소리로 보아 경신 공부를 제법 한 자였다. 그러나 감당하지 못할 자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상대가 그냥 지나쳐 가기를 바랬다. 하지만 발걸음은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명강량은 또 다른 자가 있나 싶어 주위에 귀를 기울였다. 다행히 상대는 한 명뿐인 듯했다. 그 상대는 어둠 속에서 이내 모습을 드러냈다. 장문천……. "멈춰라!" 그가 명강량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금의를 입은 청년, 두 마리 나귀, 나귀등에 실린 커다란 광주리… …. "앗!" 장문천은 놀라 고함을 질렀다. 광주리에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은 바로 그가 그토록 찾던 여자였다. "산서는 음적 투성이구나!" 그는 앞뒤 가리지 않고 칼부터 뽑았다. 명조가 놀라 푸드득 날아올랐다. 밤중에 나귀를 몰고가는 행색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고 이제껏 만난 자들 또한 여인을 탐하는 자들뿐이었다. 장문천은 눈앞의 자도 동류 (同類)로 생각했다. "미혼약(迷魂藥)을 먹였구나! 어디로 데려갈 생각이었느냐?" 그가 검을 치켜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장문천을 무심하게 바라보던 명강량의 눈빛이 잠시 이채(異彩)로 번뜩였다. "화산파의 제자군." 그가 중얼거렸다. 아직 풋내가 풀풀 나는 애송이였다. 그러나 상대는 화산 문하(門下 )……. 종적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죽여야 했다. 명강량은 나귀 고삐를 놓고 우수를 들었다. 그의 장심(掌心)이 붉 게 물들어 갔다. 그는 삼양장으로 화산파의 애송이를 단번에 격살할 생각이었다. 장문천의 안색이 변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기파가 사위를 짓누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금의인(錦衣人)이 넘볼 수 없는 고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금방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였 다. 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의 몸은 경직됐다. 약관에 이처럼 뛰어난 무위를 가진 자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今時初聞)이었다. "누…… 누구냐?" 그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명강량은 대답 대신 우수를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그만하세요!" 악약이 급히 명강량의 출수를 막았다. 장문천의 날카로운 고함에 그녀는 잠이 깬 모양이었다. "죽여야 하오!" 명강량이 냉랭하게 말했다. "왜 죽여야 해요?" "저자는 화산파의 제자요." "화산파의 제자는 모두 죽여야 하나요?" "내가 저자를 죽이지 않으면 저자가 나를 죽일 것이오." 파팟! 말이 끝나자마자 명강량은 붉은 장영을 뿌렸다. 장문천은 화광으로 날아오는 손 그림자를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몰랐다.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 억지로 검을 세워 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명강량은 순식간에 장문천의 검을 뺏고 심장을 찍어 갔다. "멈추세요!" 악약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화산파에 의해 쓰러진 교도들도 복수를 부탁하고 있소." 명강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손은 장문천의 가슴에 밀착되어 있었다. 타투경(打透硬)을 쏟으면 장문천은 찍 소리 못하고 죽어야 만 했다. "명이에요. 성녀로서의 명…… 나는 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 을 보고 싶지 않아요." 악약의 눈에 뿌연 수막이 어렸다. 장문천은 그녀의 눈물에 자신의 처지도 잊고 같이 슬퍼지는 기분이 었다. 그러나 순간……. '성녀! 교도!' 그의 머리 속에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는 급히 명강량을 살폈다. 이십 대 중반의 나이, 언월도와 유사하게 생긴 칼, 여인을 데리고 다니는 자……. 얼굴은 모르지만 장문천도 대충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삼사형은 칠사형의 죽음이 삼양장에 의해서라고 했다. 삼양장…… 붉은 장인(掌印)으로 내부를 불태워 버리는 무서운 마공! 마옹의 절 학!' 방금 금의인의 손에서 번쩍이던 화광도 생각이 났다. '그럼 이자가…….' 장문천의 안색이 창백해 졌다. 천하인들이 찾고 있는 자……. 마옹! '이자가 마옹! 바로 그 마옹이었구나.' 등골을 타고 공포가 그의 전신을 지배했다. 몸이 덜덜 떨리고 이마 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투박하게만 보이던 명강량의 얼굴도 한 순간 에 악귀의 형상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장문천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옹이 사람의 생간을 즐겨 씹는다는 이야기도 들은 듯했다. 칠사 형의 복수 운운하던 것은 까마득한 기억의 저편이었다. 그는 이 흉악 한 마왕(魔王)이 그저 자신을 편하게 죽이기만을 바랬다. "이 자를 살려 두면 필경 자신들의 동료들을 끌고 올 것입니다. 호 교신장의 임무는 성녀를 지키는 것! 나는 성녀를 위해서도 이 자를 죽여야 합니다." 명강량은 장문천의 표정에서 그가 자신의 정체를 알아냈음을 확인 했다. 성녀가 자신의 신분을 발설하지 않았어도 생각이 있는 자라면 금방 자신들의 정체를 밝혀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죽여야 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나로 인해…… 차라리 저는…… 저는……." 악약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떨구었다. "어쨌든 살려주세요. 명이에요." 그녀가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문천의 심장을 압박하며 명강량은 손을 달싹거렸다. 근자에 성녀 는 너무 자주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분명히 죽여야 할 자였지만 그 때문에 성녀가 가슴에 또 하나의 상처를 담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의 걱정이었다. 악약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들었다. "소협!" 그녀가 장문천을 불렀다. 장문천이 해쓱한 표정으로 악약을 바라보았다. 시리도록 맑은 눈이 가득 자신을 담고 있었다. '마옹과 같이 있는 여자라면 분명히 마녀! 이 여인이 정말 마녀인 가?' 그는 강호의 소문이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무엇인가 잘못이 있다 고 생각했다. 배교 놈들이 여인을 이용하고 있다거나……. 악약이 붉은 입술을 열었다. "소협, 소협은 우리를 보지 못했어요. 우리도 소협을 보지 못하고 …… 맹세해 줄 수 있겠지요?" "……." 이 무슨 소리인가! 적을 보고도 모른 척 하라니……. 죽으면 죽었지 적을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대화산파의 제자가…… 하지만 장문천은 여인의 청이 너무도 간절하게 들렸다. "맹세해 주세요." 악약이 다신 간청했다. 장문천은 미간을 좁혔다. "좋소." 한동안 망설이던 장문천이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스 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허락을 한 것은 마옹의 손에 죽게 됨 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고……. 여인의 청은 너무도 간절하고 애절했다. 자신을 위하는 마음이 없 다면 저 마왕에게 빌 듯이 사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인의 마음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여인의 청을 수락해야 했다. "나는 이 자의 말을 믿지 못합니다." 명강량이 무심하게 말했다. "믿어 주세요. 거짓말을 할 분으로 보이지 않아요." "이 자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 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개인의 결심 은 커다란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무런 힘도 행사할 수 없는 경우 가 허다합니다." "물결이 거세서 그랬다면 물결을 탓해야지 이 분을 탓할 수 없잖아 요. 강량, 그만 가세요.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 물결이지 사람은 아 니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물결에 휩쓸려 나를 죽이려 든다 할지라 도……." 악약이 잔잔하게 말했다. 명강량은 입술을 깨물었고 장문천도 입술을 깨물었다. "나귀야 가자." 악약이 눈을 감았다. 명강량은 장심(掌心)에 내력을 실었다. 가슴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지자 장문천은 눈초리를 떨었다. 천하의 혈란(血亂)을 주도하는 자, 마옹! 놈이 어떤 놈인데 여인의 몇 마디에 순순히 물러가겠는가. 살인을 밥 먹 듯 하는 놈일 것이다. 여인으로 인해 잠시 잊혀졌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아무리 의연하려 해도 의연해 지지가 않았다. 장문천은 죽음을 다시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명강량은 장문천의 가슴에서 손을 뗐다. 그가 가는 한숨을 쉬며 나귀를 끌었다. 타박! 타박! 나귀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장문천은 석상(石像)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교타방과의 일전에서 얻은 모든 감정들이 뒤바뀌어 있었 다. 적 앞에 벌벌 떨었던 수치감과 패배감만이 그의 뼈를 삭풍처럼 쑤셨다. 적들의 공세도 걱정이었고 방금 놓아준 화산의 제자도 걱정되었다. 구대문파의 최고(最高) 진리(眞理)는 사마(邪魔) 척결이다. 그 최고 진리를 실행하기 위해 거짓말 정도는 사소한 일로 치부할 수 있는 자들이 구대문파다. 역시 뒤탈이 없도록 처치해 버렸어야 했다. 하남의 명두, 양백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도 걱정이었다. 양백이 정말 교를 배신했다면……. 그는 범의 아가리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 었다. 성녀까지 데리고……. 이런저런 걱정들이 태산의 무게로 명강량을 짓눌렀다. 그가 성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성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정말 편안한 잠이었다. '지금 뒷일을 걱정해서 무엇하리!' 명강량은 하늘을 우러렀다. 한바탕 폭설이 퍼붓고 난 하늘을 별들 로 총총했다. * * * 챙! 챙! 챙! 챙! 챙! 여섯 자루의 칼이 한꺼번에 얽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주화청은 협도를 비틀어 빼며 훌쩍 이 장을 물러났다. 사박! 사박! 가볍게 눈을 밟으며 그를 육박하는 자들의 발걸음은 전혀 흐트러짐 이 없었다. 그러나 주화청은 지쳐 있었고 전신은 상처 투성이었다. 적들이 펼치는 오행검진(五行劍陣)은 완벽에 가까웠다. 이십 여합 을 넘게 싸웠으나 좀체 허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 만난 상대 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들……. '산중(山中) 고혼(孤魂)이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겠구나.' 주화청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적은 오행검진을 펼치는 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잘 갈은 한 자루의 칼 같이 싸늘한 기파를 흘리고 있는 자! 오행검진을 펼치는 자들의 뒤에는 백의인(白衣人)이 서 있었다. 바 싹 마른 몸에 얼음 조각을 연상시키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 삼 십 여명의 무사들 사이에 우뚝 서 있는 그는 아직 검도 뽑지 않고 있었 다. 주화청은 그가 발검(拔劍)을 하면 승부를 뒤집기란 전혀 어려우리 라 판단했다. 이마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연신 흘러내렸다. 피는 그 의 백안을 혈안(血眼)으로 만들었다. 통곡으로 피눈물을 쏟은 자의 눈이었다. 사실 주화청의 마음은 그와 같았다. 눈물을 쏟을 여유라도 있었으 면 피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이미 살만큼 살았으므로 목숨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쫓기는 성녀, 적들의 포위 공세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명옹…… 모 두 자신의 살과 피보다 더 아끼는 자였다. 주화청은 끝까지 살아 그들을 지키지 못하고 죽는 것이 못내 안타 까웠다. 그러나 명왕께서 자신의 운명을 여기까지 점지(點指)했으니 ……. 그가 호흡을 길게 삼키며 협도를 들었다. 다섯 명의 적이 오행의 위치를 점하며 재빨리 그를 둘러쌌다. 주화청은 거리와 위치를 가늠했다. 살려 둔다면 정말 명옹에게 짐 이 될 자였다. 그는 자신의 협도에 모든 기를 모았다. 오행검진을 펼치는 자들이 잰걸음으로 점차 포위망을 좁혔다. "으핫!" 주화청이 사자후(獅子吼)를 터뜨렸다. 그가 협도와 하나가 되어 ' 목(木)'의 자리에 선 자를 노렸다. '목'의 자리에 선 자는 몸을 비틀고 나머지 자들은 주화청의 좌우 를 노렸다. 주화청은 그 칼들을 무시했다. 그 칼들을 상대하다 보면 검진은 다시 철옹성(鐵甕城)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는 몇 군데 의 상처를 각오하고 '목'의 자리에 있는 자를 공격했다. 여기저기 피 분수가 솟구치고 사지가 칼침으로 뜨끈거렸다. 그러나 그의 칼은 집 요하게 '목'의 자리에 선 자를 노리고 있었다. '목'의 방위를 지키던 자는 주화청의 공세를 요행히 잘 막아내는 듯했다. 하지만 자신의 살점을 내주며 야차(夜叉)같이 달려드는 주화 청의 공세에 결국은 무방비로 무너졌다. 주화청의 협도가 작자의 인후(咽喉)를 그어 갔다. 오행검진을 지휘하던 백의인이 수하의 위기에 놀라 몸을 날렸다. 주화청이 자신의 살점까지 내주며 오행검진을 파훼(破毁)하리라는 생 각도 못했었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멋들어지게 빛을 발하고 '목'의 자리를 지키던 자를 구하기 위해 나머지 네 명의 오행검수(五行劍手) 들도 쾌검(快劍)을 쏟았다. 그러나 주화청의 협도는 상대의 목줄기를 이미 가르고 있었다. 그 순간, 주화청은 다시 한 번 전신에 뜨끔한 통증을 느꼈다. 상대를 자 르는 사이 네 자루의 검이 그의 몸을 스쳐 지나간 것이다. 주화청은 그 상처도 개의치 않았다. 원래 그가 반드시 죽이기로 결심한 자가 허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자신의 살을 내주며 오행검진을 파훼한 것은 그 상대를 처치하기 위 해 길을 연 것뿐이었다. 다행히 다가갈 필요도 없이 상대가 접근해 오니……. 주화청은 적을 벤 여세를 몰아 반사적으로 허공에 몸을 퉁겼다. 그 가 허공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일도(一刀)를 휘둘렀다. 그러나 순간, 주화청은 너무도 황망함에 어이가 없었다. 협도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손목이 뚝 꺾이며 그의 손목에 피가 확 솟구쳤다. 오행검수들에 의해 이미 그의 손목 근맥(筋脈)은 깊숙 이 잘려진 상태였다. 마음이 앞서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이 없었다. 또한 '목'의 방위를 지키던 자를 베고 허공의 상대를 향해 일도를 휘두른 시각은 손목의 상처가 벌어질 틈도 없는 촌각(寸刻)이었다. 하지만 칼을 휘두르려 는 순간, 핏줄로 간신히 이어져 있던 손목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뚝 꺾여 버리고 만 것이다. 허공에서 빛무리가 번쩍였다. 오행검진을 지휘하던 백의인의 검에 서 쏟아지는 빛이었다. 주화청은 눈을 감았다. '우삼, 나를 대신해 성녀와 명옹을…….' 팟! 백의인의 검이 주화청을 스쳐 가며 그의 생각을 끊었다. 주화청의 몸이 허공에서 피화살을 쏟으며 털썩 떨어졌다. 언제나 교를 생각하고 언제나 교를 위해 소리 없이 일하던 산서 명 두, 주화청의 최후였다. 탁! 주화청을 가른 백의인은 검집에 칼을 넣으며 주화청의 옆에 섰 다. 그가 주화청의 얼굴을 덮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겼다. 밋밋한 청년의 얼굴 대신 세월의 풍상이 한 눈에 느껴지는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잠마 주화청! 유마 여양의를 능가하는 실력자였군. 여양의는 오행 검진을 꺾지 못했지. 그러나 아쉽군. 마옹이 아니라서…….' 백의인은 주화청을 바라보며 품속에서 하나의 철패(鐵牌)를 꺼내 들었다. '경천(驚天)'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철패였다. 그가 주화청의 시신 옆에 철패를 던졌다. 깡마른 백의인은 유향경천문의 현무당주 남궁기였다. 섬전비표(閃電飛豹) 남궁기(南宮基)! 유향경천문의 사대당주 중 가장 무공 실력이 뛰어난 자. "가자! 당예를 기다릴 시간도 없다. 태원으로 바로 간다!" 남궁기가 동료의 시신을 묻고 난 오행검수들에게 소리쳤다. 남궁기 와 오행검수들, 그의 수하들이 풍마(風馬) 속에 사라졌다. 남은 것은 핏속에 잠긴 주화청의 시신 뿐! 주화청의 가슴에서는 쉬지 않고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의 끈끈한 피는 쌓인 눈을 녹이며 흘러 종내 '경천'이라는 철패가 놓인 곳까지 이르렀다. 주화청의 피가 철패를 붉게 물들였다. 그제야 주화 청의 가슴에서 쏟아져 나오던 피는 흐름을 멈추었다. 바람이 불어 만산(萬山)에 피냄새로 주화청의 죽음을 알렸다. 배교 도들에게 가장 화려한 장(葬)은 조장(鳥葬)이다. 그러나 중원에서는 조장이 여의치 않기에 풍장(風葬)을 주로했다. 늑대들은 배교도들이 풍장을 좋아함을 아는 모양이었다. 우 - 우 - 우 - 바람이 싣고 온 피냄새에 화답하며 늑대들이 하나, 둘, 주화청 주 변으로 모여들었다. * * * 명강량은 어둠을 택해 홍동으로 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노부부의 집을 나선지 벌써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걱정하던 화산 파의 추격도 없었고 추살대도 보이지 않았다. 화산파의 애송이는 약속을 지켰고 추살대는 주화청의 교란책에 넘 어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가 자랑하던 도주술과 잠행술은 육개월의 사투를 넘기며 대부분 간파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적들의 공세는 나날이 집요했다. 주위가 너무 조용하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움직이지 않는 적이 더 위험 하다. 요로(要路)에 그물을 치고 호구(虎口)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언제나 마음 편하게 길을 밟아 볼 수 있을는지…….' 명강량은 눈 앞에 펼쳐진 길이 구절양장(九折羊腸) 이상으로 험하 고 멀게 보였다. 컹! 컹!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산 어귀 어딘가에 촌락(村落)이 있는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그곳에서 하루를 쉬기로 마음먹었다. 교 도가 있는 마을은 아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밤의 노정으로 성녀는 무 척 지쳐 있었다. 오한(惡寒)이라도 만난다면 홍동까지의 여정이 더 길어질 것이다. 사람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최고지만 주위의 이목을 감수하고서라도 성녀의 몸을 편한 방에서 쉬게 할 생각이었다. 명강량이 나귀의 고삐를 채며 발걸음을 빨리 할 때였다. "강량!" 악약이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명강량은 한동안 기척이 없기에 그녀가 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었 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방금 꿈을 꾸었어요." 악약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병에 걸린 사람처 럼 초췌했고 이마는 진땀이 맺혀 있었다. 무척 무서운 꿈을 꾼 모양 이었다. "강량……." 악약이 다시 그를 불렀다. 그녀는 명강량을 바라보며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돌연 이슬이 맺혔다. 명강량은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근자에 자신이 너무 유약(柔弱)해져 간다고 생각했다. 동행을 요구하는 성녀의 청도 거절하지 못했다. 일장(一掌)에 때려 죽여야 할 화산의 애송이도 살려 주었었다. 예전 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두 자신이 유약해졌기 때 문이다. 명강량은 알고 있었다. 사부가 자신을 호교신장으로 택한 이유를… … 사부는 자신의 강철(鋼鐵) 같은 마음을 높이 샀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호교신장이 할 일을 묵묵히 하리라 사부는 기대했을 것이 다. 그런데 그는 사부의 기대에 실망만 주고 있었다. 명강량은 그 이유를 성녀의 눈물에서 찾았다. 성녀의 눈물이 자신 의 마음을 부식(腐蝕)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성녀의 눈물을 보지 않기로 했다. 화산파의 애송이를 살려 보내고 난 후, 스 스로를 질타하며 굳게 먹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물기 젖은 성녀의 목소리까지 몰라라 할 재주는 명강량에게 없었다. "강량, 이제야 생각났어요. 방금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 누 군가가 죽었어요." 명강량은 성녀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성녀에게는 이상한 예지력(叡智力)이 있다. 성녀들의 피를 통해 대 대로 내려오는 능력! 사실 이상하다고 할 것도 없었다. 명왕의 전언을 알리는 여자라면 이미 반신(半神)의 자리에 오른 터…… 그만한 능력이 없다면 오히려 교도들이 성녀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죽음을 예시하는 성녀의 꿈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사부가 죽 을 때도 성녀는 죽음을 꿈꾸었고 여 명두를 비롯한 여타 명두들이 죽 었을 때도 죽음을 꿈꾸었다. "그의 피와 살은 늑대들이 가져갔어요. 남은 뼈들은 바람이 씻어 줄까요?" "……." 명강량은 침묵을 지켰다. 그는 앞만 보고 걸었다.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는 그가 아니더라도 할 사람이 많았다. 호교신장이 할 이야기 는 살아 있는 교도들에 대한 이야기라야 했다.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명강량의 가슴은 지리한 통증에 시달 렸다. 죽었다면 누가 죽었단 말인가? 머리 속에서는 한 사람의 영상이 지워지지 않았다. 주화청……. 사부 다음으로 많은 정을 느꼈던 사람! '정말 주 명두가 죽었다면…….' 불덩이가 치솟았다. 명강량은 자신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오랫동안 참아 왔던 분노였다. 그 분노는 노도(怒 濤)처럼 그의 가슴을 휘젓고 다녔다. 분노가 분노를 부르고 그 분노가 또 다른 분노를 불러 그의 분노는 눈덩이처럼 커져만 갔다. 명강량은 머리가 터질 듯한 고통에 시달리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 에 이를 갈았다. 그 분노는 악약에게도 전달되었다. 악약은 명강량의 분노에 몸을 떨었다. 그녀의 눈에 언뜻 섬전 같은 영상이 스쳐 간 것은 그때였다. 전신이 검은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자였다. 두 눈만은 불덩이처럼 붉었다. 그는 피냄새를 물씬 풍기며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악약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명왕에 맞서 세상의 한쪽인 어둠을 지배하는 자! '암왕…….' 그녀가 본 것은 암왕의 환영(幻影)이었다. 암왕은 전포(戰袍)를 펄럭이며 명강량을 덮어 갔다. 악약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강량!" 그녀가 쫓기듯 명강량을 불렀다. 그러나 명강량은 돌아 보지 않았다. 분노의 뿌리가 그렇게 깊을 줄 은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글거리는 분노에 모든 생 각을 뺏기고 있었다. "강량……." 악약이 다시 명강량을 불렀다. 명강량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명강량이 약간의 움직임을 보였다. "강량!" 악약이 세 번째 불렀을 때 명강량은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악약은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붉은 눈! 명강량의 눈은 방금 환영으로 보았던 암왕의 눈 그대로였 다. 두려움 대신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그 짧은 순간, 또 하나의 환영을 본 것이다. 자신과 명강량 사이에 이어진 운명의 한 가닥이었다. 악약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그녀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땅바닥 에 뚝뚝 떨어졌다. 명강량의 혈안은 그 눈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의 눈은 악약이 흘린 눈물의 양만큼 점차 붉은 빛을 잃어 갔다. 명강량과 악약은 토굴(土窟) 속에서 새벽을 맞고 있었다. 악약은 민가에서 몸을 쉬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그래서 명강량 은 산중의 움푹한 터를 골라 토굴로 쉴 자리를 만든 것이다. 명강량 은 토굴 입구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고 악약은 이불 속에 파묻혀 있었 다. "양 명두라는 분은 어떤 분이에요?" 악약이 하남의 명두, 양백에 대해 물었다. 그녀는 쉽게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아직 그를 본 적은 없소." "나는 본 적은 있어요. 할아버지가 이 년 전, 하남의 새로운 명두 라며 양 명두를 소개시켜 준 적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때 나는 다른 일로 바빠 양 명두와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답니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겠군요." "각진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나에게 외숙(外叔 )이 있다면 그 분 같은 얼굴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좋은 인상이었 어요. 풍마 속을 잘 돌아다닐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답니다." "소문도 그렇습니다. 그는 아주 유연(柔軟)한 사람이지요. 그래서 가끔 교도들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너무 유연해 허리가 적들 에게까지 굽었지 않았는가 하고……." "양 명두는 하는 일은 무엇이에요? 그때 언뜻 들은 것 같기도 한데 ……." "그는 낙양의 대부호(大富豪)입니다. 전장(錢場), 객잔, 상선(商船 )…… 손 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재(理財)에 아주 밝은 자지요. " "그럼 아주 잘됐네요. 우리는 그 동안 배불리 먹지도 못했잖아요." 악약이 오랜만에 밝게 웃었다. "양 명두는 무척 재미있는 사람일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했습니까?" "별호가 저파룡이라면서요?" "맞습니다." "저파룡에 대해 모르나요?" "모릅니다." 명강량은 불씨를 지폈다. "주둥이는 짧은 악어 같이 생겼고 크기는 한 길쯤 될 거예요. 네 개의 다리를 갖고 있으며 등과 꼬리에는 단단한 인갑(鱗甲)이 덮여 있답니다. 성질이 게으르고 잠만 자기를 좋아해 눈은 늘 감고 있지요 . 그러나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필사적으로 달려듭니다." "군웅들이 양 명두의 별호를 잘못 지은 것 같군요. 그는 느릿느릿 하지만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악착같다는 말은…… 빈손으로 시작해서 낙양의 대부호가 된 분입니다. 모든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 리지 않고서는 그만한 위업(偉業)을 이룩하기 힘들었겠지요." 명강량이 실소를 흘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악약도 웃었다. "어쨌든 저파룡은 잠을 자거나 빈둥빈둥 뒹구는 것을 낙으로 삼았 어요. 음악에 대해 알 리가 없죠. 하지만 상제(上帝)는 그에게 음악 을 지어 오도록 명했답니다. 저파룡은 고민에 빠졌어요. 상제의 어명 을 거절할 수도 없고…… 그래서 결국 생각한 것이 몸을 눕히고 꼬리 로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흰 뱃가죽을 두들기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소리가 꽤 아름다웠던 모양입니다. 결국 상제는 저파룡을 천상(天上 )의 악사(樂士)로 임명했어요. 저파룡은 바로 그런 용이랍니다." 악약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저파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생긴 것 같군요. 양 명두의 북 치 는 솜씨는 신기(神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래요?" 악약이 눈을 빛냈다. 명강량은 성녀의 마음을 눈치챘다. "제가 양 명두에게 부탁을 하겠습니다. 성녀를 위해 북 치는 실력 을 보여 달라고…… 그리고 진미(珍味)도 준비하라 하지요. 성녀께서 는 선상(船上)에서 양 명두의 북소리를 들으며 진미를 맛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 아!" 악약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눈빛이 몽롱하게 젖어 갔다. 그녀 는 벌써 선상 연회(宴會)의 꿈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불씨를 지폈다. 원래 그는 연회를 즐기는 성격도 다정다 감(多情多感)한 성격도 아니다. 선상 연회를 이야기한 것은 성녀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저파룡의 마지막 이야기를 끝내지 않은 성녀의 마음……. 저파룡에 대한 이야기라면 명강량도 알고 있었다. 저파룡의 마지막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저파룡의 뱃가죽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세 상으로 퍼졌다. 그래서 결국 저파룡의 후손들은 뱃가죽으로 북을 만 들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 점점 멸절되어 갔다. 웃으면서 할 수도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성녀는 저파룡의 최후를 비켜 갔다. 교의 참화와 교도들의 죽음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 일 것이다. 명강량은 나무를 불 위에 한 아름 올렸다. 화르르! 불이 기세 좋게 타 들어가며 토굴을 훈훈하게 데웠다. 그는 토굴 벽에 몸을 기댔다. 피로가 밀려왔다. 그는 팔짱을 끼고 잠깐의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몸은 납덩 이처럼 무거웠으나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명강량은 성녀의 꿈을 생각했다. 죽은 자가 정말 주 명두라면……. '이번에는 그냥 넘어 갈 수 없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꽉 움켜쥐었다.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는 강남 명두들의 말도 떠올랐 다. 강남 명두들의 말대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라고 명 강량은 생각했다. 결단을 내리고 신장도를 치켜든다고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그뿐이다.' 쫓겨다니는 생활이 누구보다 싫은 사람은 바로 그였다. 하지만, 하지만 그 이후의 일은……. 또 다시 반복되는 생각! 그는 성녀에게 얼굴을 돌렸다. 성녀는 명조와 함께 어느 틈에 잠들어 있었다. 자신에게 일이 생긴다면 누가 성녀의 잠을 지켜 줄 것인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 그러나 괜스레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천…… 천 리 멀리까지 누…… 누런…… 구름…… 뒤덮여……." 성녀에게 배운 시가(詩歌)였다. - 천 리 멀리까지 누런 구름 뒤덮여 태양을 가리고, 북풍이 기러기를 불어 보내며, 눈은 펑펑 쏟아진다. 여행길에 나를 이해하여 주는 사람 없다고 슬퍼 말지니, 천하가 모두 너를 몰라도 나만은 너를 알아주리라. 명강량의 목소리는 투박했고 가락도 제 멋대로였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겨울 바람을 타고 낮고 깊게 울려 퍼졌다. 제8장 황운(黃雲) 장문천은 태원 외곽에 자리잡은 주루에서 홀로 술을 들이킨 후, 객 잔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꾸역꾸역 술잔을 기울인 덕에 제법 많은 술을 마셨었다. 주루를 나설 때는 몰랐었다. 그러나 주루를 나서 밤길을 몇 걸음 걷자 장문천은 술기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기분이 묘했고 모든 근심이 아득한 먼발치로 사라지는 듯했다. '흐흥! 이것이 취흥(醉興)이라는 것이군.' 장문천은 어깨를 으쓱했다. 취하기 위해 술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 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취흥에 몸을 맡기 고 싶었다. 인적도 없고 태원에는 자신을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해 구른다 한들 누가 참견할 수 있으랴. 하지만 장문천은 발 걸음을 가지런히 하려고 노력했다. 사부의 눈은 만 리(萬里) 밖까지 미쳐 있고 사형들의 눈은 천 리( 千里) 밖까지 미쳐 있다. 사문에서 벤 엄격한 생활이 술에 취한 그의 의식을 암중에 굳게 붙잡았다. 술을 마시지 말라는 사문의 규정은 없다. 그러나 젊은 제자들에 대 해서는 술은 금기에 가까웠다. 수행에 모든 뜻을 두어야 할 나이였기 때문에 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사숙부나 사형이 술을 권 하는 경우,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자리를 제외하고는 술을 마시지 못 했다. 하지만 그는 오늘 태원의 구석진 주루에서 홀로 한 잔의 술을 들이켰다. 마음속의 번민(煩悶)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번뇌(煩惱)는 아직도 마녀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을 만나고 다시 마옹을 만난 후, 생긴 병이었다. 여인에 대해서는 견딜 수 없는 그리움에 시달렸고 마옹에 대해서는 굴욕적인 패배감에 시달렸다. 또한 여인과 마옹을 같이 떠올리면 질 투심에 심장이 재가 되어 버릴 듯했다. 어떤 때는 그리움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다가 어떤 때는 패배감과 질투심이 그를 지배했다. 심마를 풀 도리가 없었다. 술이 아니면……. 술은 소문대로 제값을 했다. 장문천은 거나하게 오르는 술기운을 즐기며 술은 역시 하늘이 내린 물건이라 생각했다. 마음이 여유로웠다. 장문천은 그 기분을 객방의 구석진 곳에서 풀기 싫어 하릴없이 남 관(南關)을 거닐었다. 남관은 홍무(洪武) 팔 년에 태조(太祖)가 그의 아들 주강(朱綱)을 진왕(晋王)으로 봉하며 쌓은 성이다. 날씨가 춥고 어둠이 깔려서인지 남관 주위에는 사람은 물론 수졸( 守卒)들도 잘 보이지 않았다. 장문천이 이십 여리에 이르는 남관의 벽돌벽을 걸어가며 취흥을 즐 길 때였다. 그는 다투는 듯한 남녀의 소리에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 그가 안력(眼力)을 돋구었다. 남관의 허물어진 벽돌벽 사이에는 일남일녀가 얼굴을 맞대고 있었 다. 남자의 얼굴은 등을 지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고 여자의 모습은 보였다. 행색으로 보아 여염집 여자인 듯했다. 나이는 스물다섯…… 여염집 여자로는 드물게 꽤 반반한 얼굴을 자랑하는 여자였다. 여인은 사내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장문천은 음침한 곳에서 벌어지는 남녀의 행각에 부쩍 호기심이 동 했다. 점잖은 화산의 제자가 곁눈질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었으나 술기운이 그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장문천은 결국 나무로 몸을 가린 채 벽돌 사이의 두 남녀에게 이목 을 모았다. - 안돼요! - 안되긴 뭐가 안돼! - 친구분이 어떻게 이럴 수 있어요. - 친구? 웃기고 있군. 그놈이 없었다면 지금 연(燕) 누이와 나는 이 추운 곳이 아니라 한 이불 밑에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즐기고 있었을 게다! - 아아! 제발……. - 생색 그만 내라고!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다 그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잖아! 한동안 독수공방(獨守空房)을 지키느라 외로웠을 것이다 . - 아앗! 여인이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사내가 우악스럽게 여인을 밀치며 여인의 옷깃 사이에 불쑥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사내의 손이 여인의 옷 속을 거칠게 휘젓고 여인은 그 손을 빼내느 라 아웅거리는 사이 여인의 옷고름이 툭 떨어졌다. 사내의 손에 움켜잡힌 여인의 하얀 젖가슴이 드러났다. "꿀꺽!" 장문천은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런 나쁜 놈이 있나.' 머리 속으로는 여인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몸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가만있어!" 사내는 여인을 벽돌 틈 구석까지 밀어붙여 꼼짝 못하게 했다. 그가 여인의 두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밀치고 들어갔다. 여인은 두 다리를 꽉 모은 채 사내의 무릎이 가랑이 사이로 들어오 는 것을 저지했다. 그러나 힘이 부쳐 여인은 결국 사내의 다리가 가 랑이 사이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고 말았다. 사내는 두 손으로 여인의 엉덩이를 연신 더듬으며 무릎으로 국부를 압박했다. 여인은 사내의 어깨와 등을 두드리며 저항했으나 사내는 여인의 주 먹질이 애교 정도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아!" 여인이 저항을 포기하고 탄식을 터뜨렸다. 사내가 기회를 놓칠 새라 여인의 치마 끝을 잡았다. 사내가 치마를 걷어올리자 장문천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여인의 희뿌연 허벅지와 그 사이 아슬하게 걸려 있는 고의(袴衣:속 옷)……. 사내의 손이 고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내가 여인의 가랑이 사이 의 속살과 엉덩이를 거칠게 넘나들었다. "허억!" 어느 순간, 여인은 단 신음을 터뜨렸다. 여인의 가랑이 사이에 파 고든 한 손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사내의 손가락이 여인의 속살을 파 고들고 있었다. "아아! 아!" 여인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의 목에 매달렸다. 여인의 애액은 손가락은 물론 손등을 적실 정도로 질퍽했다. 사내는 여인이 촉촉하게 젖었음을 확인하자 히죽 웃었다. 그가 여 인의 고의를 찢듯이 벗겨 냈다. 그는 엉덩이를 주춤 빼며 바지를 잡 았다. 여인의 가랑이 사이에서 본격적인 분탕질을 벌일 모양이었다. '저런! 저런! 산서는 음적이 첩첩이 쌓여 있구나.' 장문천은 화들짝 놀라며 나무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것이다. "멈춰라!" 그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갔다. 불쑥한 흉기로 여인의 속살을 비비대며 막 진입을 시도하려던 사내 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장문천은 작자의 옆구리에 사정없이 복호권(伏虎拳)을 날렸다. 사 내가 볼 상 사나운 모습으로 쓰러졌다. 그는 옆구리를 정확히 가격 당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켁켁거렸다. "꺼져라! 목을 비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하라!" 장문천이 사내를 향해 소리쳤다. 사내는 자신이 장문천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가 장문천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며 엉금엉금 뒷걸음질을 쳤다. "허험! 흠!" 장문천은 헛기침을 하며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이 잘 익은 감처럼 붉어졌다. 여인은 가랑이를 벌리고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그 가랑이 사이를 가려야 할 고의는 이미 바람에 날아가고 없었다. 때문에 장문천의 눈 은 여인의 검은 거웃까지 보고 만 것이다. 상의도 멋대로 흐트러져 그녀의 젖가슴은 반은 드러난 상태였다. "괜찮습니까?" 장문천이 시선 둘 데 없어 황망해 하며 물었다. 여인은 넋 나간 사람처럼 아무 말도 없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어찌 좋은 일만 있겠소?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시오." 장문천은 술기운에 객쩍은 소리까지 몇 마디 했다. 그러나 여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만 지었다. '이것 참!' 장문천은 괜히 실없어 지는 기분이라 등을 돌렸다. 그가 제 갈 길 을 가려 할 때였다. "소협……." 여인이 그를 부르며 부스스 일어났다. 젖가슴은 여전히 드러난 채 였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인이 머리를 숙였다. "아니, 뭐 감사할 것까지……." 장문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저 자는 남편의 친구예요. 남편이 수자리 간 틈을 타 음심(淫心) 을 품고……." "아하! 원래 그랬군요." 장문천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했다. "소협, 고마움의 표시를 하고 싶어요. 저의 누옥(陋屋)으로 모시고 자 하니 거절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오." "부탁드립니다." 여인이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장문천은 여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여인의 얼굴은 더욱 반반하고 고왔다. "사실…… 그 자가 다시 올 것 같아 걱정도 되고…… 꼭 초대에 응 해 주십시오." 장문천이 행여 자신의 초대에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여인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까지 염체 없이 밝혔다. '아하! 원래 그런 뜻이었군. 그렇다면 초대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 장문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란 마시면 누군가를 상대로 이야기를 풀게 만드는 희한한 물건 이다. 장문천은 내심 그렇지 않아도 술기운을 녹녹히 풀 상대를 필요 로 하던 터였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그가 여인의 청을 수락했다. 나무로 지은 작고 아담한 집이었다. 내부도 아주 정갈했다. 장문천은 황촛불이 이글거리는 작은 방에 앉아 술을 들이키고 있었 다. 그의 얼굴도 붉었고 여인의 얼굴도 붉었다. 벌써 몇 잔의 술을 들이킨 후였다. "솔직히 저는 소협이 원망스러웠어요." 여인이 요염(妖艶)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장문천은 여인의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난 후, 그는 여인의 말을 이해했다. 여인은 장문천의 곁에 기대 술을 따르고 있었다. 분명히 마주앉아 술을 권했는데 언제 자리를 바꾼지도 몰랐다. 은은한 체향(體香), 전신에 느껴지는 뭉클한 촉감……. 장문천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마음뿐 몸은 도통 여인 곁을 떠날 줄 몰랐다. "남편을 수자리로 보낸 후, 무척 외로웠어요. 하늘이 저의 외로움 을 알고 소협을 보냈을 거예요." 여인은 이제 노골적으로 장문천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녀가 다시 한 잔의 술을 장문천의 잔에 채웠다. '남편은 이족(異族)의 침입을 막아내느라 그 변경의 추위 속에서 떨고 있는데 아내라는 여자는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부르지는 못할 망정 다른 남자의 품이나 그리고 있다니…… 선현(先賢)들의 말씀이 맞구나. 참으로 요망한 것이 여자라더니…….' 장문천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생각만 그럴 뿐 몸은 여인의 추 파에 자글자글 녹아 나고 있었다. "드세요." 여인이 장문천의 품에 몸을 맡기며 술을 권했다. 장문천은 술을 꿀꺽 들이켰다. 생각과 몸이 따로 노는 이 희안한 사태를 극복할 유일한 방도는 술뿐이었다. 여인은 연신 매미처럼 달라붙었고 장문천은 그 낯 간지러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연신 술만 찾았다. 장문천이 다시 서너 잔의 술을 더 들이켰을 때였다. 갑자기 천장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모든 것이 흔들렸다. '어! 내가 이렇게나 취했나?' 그는 머리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나 어지러움증은 더했다. '어! 어! 어…….' 장문천은 자신의 몸이 허공을 난다고 생각했다. 전신의 기운이 빠 지고 그의 고개가 서서히 꺾였다. 챙그랑! 그가 술판을 덮치며 쓰러졌다. "흥! 이제야 쓰러졌군! 십여 잔 가까이 마시게 했는데도 쓰러지지 않아 미혼약이 잘못된 줄 알았다!" 여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장문천은 침을 해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미혼약에 중독된 것이다.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옷을 추슬렀다. 그녀가 문 밖을 나섰다. "천(千) 랑(郞)!" 여인이 뒤뜰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불렀다. "다 끝났소?" 어둠 속에서 사내 한 명이 모습을 보였다. 소 잡는데 사용하는 넓 적한 칼을 든 사내는 남관에서 여인을 겁탈하려던 그 사내였다. "미혼약에 취해 쓰러져 있어요. 애송이라 쉽게 속아 넘어 가더군요 ." "수고했소. 자 빨리 준비를 합시다." 사내가 여인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쓰러져 있는 장문천을 방구석으로 내던지고 술상을 치웠다. 그가 간소한 물건들을 상을 다시 차리며 향로(香爐)를 놓았다. 사내 는 제상(祭床)을 차리는 모양이었다. "들어오시오." 제물(祭物)이 모두 갖춰지고 신위(神位)가 놓여지자 사내는 여인을 불렀다.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오며 머리를 풀었다. 사내와 여인은 향로에 향불을 피우며 몸을 엎드렸다. "어이! 어이! 엉엉! 흐흑흑……." "흐으으으흑! 흐으윽……." 그들은 무릎을 꿇자 마자 곡(哭)을 터뜨렸다. 주위의 귀를 염려 낮 은 목소리로 곡을 했으나 그들의 곡은 간장이 끊어질 듯 애절했다. "흐흐흑! 으흑!" 사내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쏟았고 여인은 통한에 가슴을 치며 혼절이라도 할 것 같았다. "흑흑흑! 명두, 저 화산파 애송이의 심장을 뽑아 바칠 테니 먼길을 가는데 억울함을 풀고 가십시오. 유향경천문! 구대문파! 비응보! 이 생간을 씹어 죽일 놈들! 엉엉엉!" "청정광명세계명존이시여! 명두의 영혼을 광명대계(光明大界)로 인 도하소서! 흑흑!" 사내와 여인이 방바닥을 눈물로 흥건히 적시며 통곡했다. 그때였다.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사내와 여인이 놀라 급히 고개를 들었다. 방문 앞에는 삼십대 중반의 도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사내가 재빨리 칼을 잡아갔다. 순간, 두 줄기 검광(劍光)이 번쩍였다. 츠츠츠츠츠…… 촤악! 사내와 여인의 심장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며 방안을 이내 붉게 물들 였다. 그들이 한 소리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방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이유로 사제를 노리는가 했더니 배교의 잔당이었군." 철컹! 검집에 검을 넣고 있는 삼십대 중반의 도사는 우제준이었다. 그가 머리를 낮추며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눈에 핏줄기가 이리저리 튄 신위가 보였다. - 蓋世光明明頭(개세광명명두) 朱和淸(주화청) 神位(신위). '쯥…….' 우제준이 쓴맛을 다시며 주화청의 위패(位牌)를 남녀의 시신 위에 던졌다. 그가 장문천에게 다가갔다. 장문천은 세상 모르고 뒹굴고 있었다. "때 마침 내가 남관을 지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우제준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가 품속에서 정명환(精明丸)을 꺼내 장문천에게 먹였다. 장문천은 우제준을 뒤따르며 그들이 묵고 있는 객잔을 향해 발걸음 을 옮기는 중이었다. 그는 부끄러운 마음에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직 삼사형, 우제준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호된 질책이나 중 벌(重罰)을 내렸으면 마음이라도 편하련만…….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술을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 여인 을 탐하려 하기까지 하다니…… 심마는 한순간에 찾아와 몇 년 적공( 積功)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만든다는 말이 맞는구나.' 장문천은 후회로 가슴을 쳤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후회 일 뿐이다. 화산의 제자로서 가장 소중히 간직해야 할 명예를 잃어버 린 그에게 돌아올 것은 사형제들의 조소밖에 없었다. '말은 하지 않고 있지만 삼사형도 나를 벌레 보듯 경멸하고 있을 것이다.' 장문천은 참괴(慙愧)한 마음을 참을 길 없었다. 혀라도 깨물고 싶 은 심정이었다. 그때였다. "문천……." 우제준이 장문천을 불렀다. 장문천은 해쓱한 표정으로 발길을 멈추었다. "강호의 흉흉함은 네가 겪은 바와 같다. 좋은 경험을 했다고 생각 하라. 그 경험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잊어라. 누구나 한 번의 실수는 있다. 다음에는 그 같은 실수를 하지 말도록 하라." 우제준이 낮게 말했다. 장문천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앞서 가는 우제준의 뒷모습이 태 산 같이 보였다. '삼사형…….' 장문천은 감동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사제, 사형제 간 화산파의 엄격함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러나 그 엄격함이 엄격함으로만 끝났다면 화산파는 천 년 명성을 누 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제, 사형제 간의 신의(信義)! 그 꿋꿋한 신의가 있었기 때문에 화산파의 엄격함은 겉치레로 남지 않고 사문을 지탱하는 힘으로 남을 수 있었다. 우제준은 장문천의 실수를 눈감아 줌으로써 장문천으로부터 사문과 사형제에 대한 충성심을 더욱 받아 낼 수 있었다. 물론 두 번의 실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 사형들에게 연락은 보냈느냐?" "예, 보냈습니다. 지금쯤 태행산에 다다랐을 것입니다." "길이 어긋났구나. 소문을 들었으면 이곳으로 오겠지." "소문이라니요?" "잠마가 죽었다." "예?" 장문천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네놈은 놀기를 작정하고 나를 따라 나섰구나.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게냐? 비응보 아이들이 잠마를 자신들이 죽인 양 떠들며 자랑 하고 다니는데." "……." 장문천은 지은 죄가 있어 찍소리도 못했다. "무…… 물론 잠마를 처치한 것은 삼사형이었겠지요. 비…… 비응 보 놈들이 잠마를 처치했을 리는 없고……." 그가 우제준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내가 아니다. 비응보 아이들이 잠마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 잠마는 뼈만 남아 있었다고 하더구나." "뼈만 남은 자를 잠마인지 어떻게 압니까? 사실 살아 있을 때도 잠 마가 누군지는 몰랐지 않았습니까." "비응보주와 동행한 자 중에는 유향경천문의 당예라는 자도 있었지 . 그 자가 잠마임을 확인했다면 뼈만 남은 그 시신은 잠마가 틀림없 을 것이다." "그렇군요. 그건 그렇고 잠마를 늑대밥으로 만들게 한 자가 누구입 니까? 보통 실력자는 아니겠군요." "아마 유향경천문 현무당의 솜씨일 것이다. 퇴로를 막고 있는 자들 이 그들이라 했으니……." "유향경천문…… 또 그들이군요. 사형, 도대체 그곳의 문주는 누구 입니까? 저는 아직 강호 견문이 좁아서……." 장문천이 송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명숙들께서는 알고 있는 것 같은 데…… 말을 해 주지 않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더 이상 궁금해 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장문천은 머리를 숙였다. "나는 이곳의 개방 분타에 들렀다 가겠다. 마옹의 종적에 대해 혹 시 아는 것이 있는지 물어 볼 것이다. 오는 길에 마옹이 달아날 만한 길을 여기저기 찾았다. 하지만 시간만 허비하고 말았다. 어디로 갔 는지……." 마옹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자 장문천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마옹을 직접 만났었다. "어쨌든 앞으로 조심하라. 너를 노렸던 자들은 배교의 잔당이다. 잠마의 죽음으로 그들의 독은 오를 대로 올라 있어. 네가 입고 있는 도복은 놈들의 좋은 표적이 될 것이다." "예? 그들이 배교의 잔당!" 장문천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는 자신을 노렸던 자들을 단 순한 도적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터였다. '이런 죽일 놈들!' 장문천의 눈이 찢어졌다. '배교는 역시 마귀가 득실대는 사교가 분명하구나. 추잡한 놈들! 여인의 몸까지 미끼로 사용해 사람의 목숨을 노리다니…….' 그가 이를 갈았다. '그런 사악한 자들의 괴수가 마옹! 당연히 마옹이라는 놈은 그 놈 들보다 몇 배 더 사악하겠지. 그렇게 사악한 놈이라면 벌써 그 여인 을…… 아아!' 장문천의 가슴에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아니야!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었던가. 마옹이라 하더라도 그 여 인만은 함부로 대하지 못할 것이다. 보았잖아! 마옹도 그 여자에게는 고분고분 했었지.' 그는 흉흉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어떻게 그런 놈과 같이…….' 그의 마음은 안타까움뿐이었다. '맞아! 틀림없이 마옹의 사악한 술수에 걸려 어쩔 수 없이 따라다 니고 있을 게다. 아니면 마옹의 힘이 무서워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 지 못하던가.' 그가 마옹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일의 경중(輕重)과 대소(大小)를 구분할 줄 아는 자만이 현명한 자라 했다. 장문천,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천하를 혈 란에 빠뜨리고 있는 놈과 약속이라니…… 마옹을 처치하고 여인을 구 해야 한다. 그 여자가 마녀일 리는 없어!' 장문천은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 "삼사형!" 그가 우제준을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저…… 저는 마옹을…… 마옹을 보았습니다." "뭣?" 우제준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이냐?" "삼사형, 저는 마옹을 보았습니다!" 장문천이 위축되는 어깨를 펴며 말했다. "마옹을 보았다니……." 우제준은 팔짱을 꼈다. "우연히 놈이…… 수족들을 만나는 것을 엿듣게 되어…… 마옹이 맞았습니다." 장문천이 두서없이 말했다. "언제였느냐?" 우제준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부…… 분하를 따라 서너 마장 내려간 곳입니다. 칠 일 여쯤 지났 습니다." "틀림없느냐?" "틀림없습니다!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장문천이 항의하듯 소리쳤다. "역시 놈은 남로(南路)를 택했구나. 북로(北路)는 전혀 종적을 찾 을 길이 없더니……." 우제준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문천,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왜 이제야 이야기하느냐?" 그가 문득 생각난다는 듯 물었다. "겨…… 경황이 없었습니다. 삼사형도 알다시피 저는……." 장문천은 말을 우물거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우제준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는 다시 마옹을 추적하러 가겠다. 너는 네 사형들을 기다려라. 길이 어긋났음을 알았을 테니 조만간 객잔으로 돌아 올 것이다. 그때 너는 네 사형들에게 내가 간 곳을 알려라. 그리고 사문에 전갈을 보 내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삼사형." 장문천이 고개를 숙였다. 우제준은 그의 인사도 받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가 분하의 물줄기를 향해 다급히 신형을 날렸다. * * * '울고 짜는 일은 질색이야. 이렇게 한바탕 쓸어버리면 될 일을…… .' 전우삼은 발바닥에 묻은 눈을 대월로 툭툭 털었다. '어이! 하지만 기분은 영 아닌 걸!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았으면 왜 그냥 가라고 했어? 젠장! 다 늙어 허리도 제대로 못 펴는 주제에 …….' 그는 시큰둥한 마음에 콧날을 만졌다. 주화청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고! 이거 큰일인데! 잘못하면 계집처럼 질질 눈물을 짜겠다! 훠이! 훠이! 명두, 빨리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구.……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에 대한 기억도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 전우삼은 나무에 털썩 몸을 기댔다. '명두, 자꾸자꾸 나타나지 말라니깐! 복수는 해 주겠다고 했잖아!' 쿵! 그가 뒤통수로 나무를 박았다. 나무에서 눈이 우수수 떨어져 그를 덮쳤다. 전우삼은 눈을 흠뻑 덮어쓴 채 다리를 꼬았다. "우삼,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지 않아?" 진금구가 전우삼을 향해 걸어왔다. 전우삼의 곁에는 진금구를 포함 이십 여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화 노인을 포함한 그들은 전우삼이 급히 끌어 모은 교군들이었다. 전우삼은 와사곡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주화청이 걱정되어 와사곡 에는 얼굴만 잠시 보인 후 태원으로 다시 숨어들었던 것이다. 그 와 중에 주화청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우삼은 당장 화 노인과 진금구를 통해 모을 수 있는 교군들은 모 두 모이게 했다. 주화청에 대한 복수로 먼저 비응보를 잿더미로 만들 기 위해서였다. 화 노인과 진금구는 전우삼의 말에 박수를 보내며 교군들을 끌어 모았다. 그렇게 해서 모인 자들이 지금 여기 있는 이십 여명의 사람 들이었다. "주웅(朱雄)과 월녀(月女)는?" 전우삼이 교군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주웅과 월녀는 남관 근처에 사는 젊은 부부(夫婦) 교도들이다. "글세…… 아직 보이지 않는군. 화 노인이 연락은 했다고 하던데… …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다. 목숨이 아까워 이곳에 오지 않을 자들 을 아니잖아? 주 명두에게 입은 은혜가 얼만데." "그렇지. 무슨 일이 있겠지. 어이! 슬슬 갑시다!" 전우삼이 소리쳤다. 이십 여명의 교군들이 창칼을 고쳐 잡으며 일어섰다. 그들이 비응 보를 향해 어둠 속을 은밀히 행군(行軍)했다. "꽥!" "으악!" 전우삼의 대월은 무자비했다. 그의 대월은 비응보의 문을 지키던 두 명의 수하를 사정없이 동강내고 있었다. 전우삼은 뇌수와 핏물이 뚝뚝 흐르는 대월을 들며 히죽 웃었다. 피 를 본 순간, 그의 눈동자는 이미 광기로 젖어 있었다. "모두 죽어 봐라!" 그가 고함을 지르며 대월로 비응보의 현판(懸板)을 내리찍었다. 진 금구와 화 노인도 문짝을 산산이 박살냈다. "죽여라!" 전우삼을 앞세운 배교의 교군들이 비응보를 물밀 듯이 쇄도했다. 비응보의 연무장(鍊武場)에는 서너 명의 무사들만이 화톳불 앞에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어! 어!" "뭐야?" 그들은 교군들의 기세에 질려 싸울 생각도 못했다.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들을 향해 전우삼과 진금구가 달려들었다. 전 우삼의 대월이 두 명의 적을 쪼개고 진금구는 장창(長槍)으로 적의 목을 꿰뚫었다. "으하하! 모두 죽이고 불태워라!" 화 노인이 불씨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의 눈빛도 이미 대장간에 서 쇠나 두들기던 순박하던 노인의 눈빛이 아니었다. 화 노인이 화섭자에 불을 붙인 채 외당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냐?" 때를 같이하여 한 떼의 무사들이 외당으로 뛰쳐나왔다. 허리띠 묶 을 사이도 없이 달려나오는 자들은 염태명이 이끄는 비응보의 수하들 이었다. "으헤헤! 염가(廉家) 놈 잘 만났다!" 전우삼이 냅다 염태명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외당당주 문호일은 물 론 내당당주 염태명과도 안면이 있었다. "흑면호! 배교 놈들이 감히 이곳에!" 염태명이 흠칫 놀라며 칼을 뽑았다. 파파팟! 팟! 전우삼과 염태명이 칼바람을 일으키는 것을 시작으로 비응보의 수 하들과 배교의 교군들이 얽혔다. 화르르르……. 화 노인이 외당에 붙인 불은 바람을 타고 이내 기세 좋게 타올랐다 . 그 불빛 아래 배교도와 비응보의 수하들이 유혈극(流血劇)을 벌였 다. 염태명의 실력은 외당당주 문호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는 보주 악진웅이 가장 신뢰하는 수하답게 경쾌한 칼솜씨를 자랑하며 전 우삼과 어울렸다. 또한 내당의 수하들도 외당의 수하들과 달랐다. 그 들은 제법 진용(陳容)을 갖춘 채 배교도들을 상대했다. 하지만 배교 도들의 공세가 워낙 악착같았다. 전우삼을 비롯한 배교의 교군들은 주화청의 복수에 눈이 멀어 제 몸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동강난 팔, 다리를 덜렁거리며 싸우는 자들이 배교도들이었다. 그에 반해 비응보의 수하들은 은자 몇 냥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자들이다. 승세(勝勢)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하면 모르겠지만 배 교도들과 호각지세(互角之勢)까지 이루자 사기는 점점 떨어져 갔다. "싸워라! 보주께서 곧 나오실 것이다!" 염태명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수하들은 보주를 기다릴 여유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수하들 이 서로의 눈치를 보며 비칠비칠 물러나자 진용은 맥없이 무너져 갔 다. 일이 틀어지려면 틀어지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악진웅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며칠 동안 그는 정신없이 바빴었다. 잠마를 추적하고 돌아오자마자 유향경천문의 배후 지원을 독려해야 했고 내, 외당도 정리해야 했다 . 비로소 그가 여유를 찾게 된 것은 어제부터다. 술이 생각나고 여자 가 생각났음은 물론이다. 특히 여자 생각이 간절했다. 악진웅도 보통의 무부들처럼 여인을 가까이 했다. 그렇다고 색골( 色骨)로 불릴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어제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여자가 그리웠다. 평상시와 달랐으므로 악진웅은 당연히 이유를 물었 다. 악진웅은 쉽게 이유를 찾았고 곧 실소를 터뜨렸다. 당예였다. 그 계집 같은 유향경천문의 당주가 며칠 동안 그의 앞을 간들거리는 사이 춘정을 제법 뿌린 모양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그 느낌이 덜했는데 떠나고 나자 그 느낌은 더욱 강했다. 옆구리가 허전 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악진웅은 문득 자신의 그 같은 생각이 웃어넘기고 말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혹시 남색을 즐기는 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하 고 의심했다. 그래서 악진웅은 더욱 계집을 찾았다. 이제 방중(房中)의 재미를 익혀 가는 새로 들인 어린 계집은 악진 웅의 방문에 반색을 했다. 늘어지게 술을 마시고 어린 계집과 숨이 깔딱거릴 정도로 질펀한 정사를 나누었었다. 노독(路毒)에 술기운, 어린 계집과의 격렬한 정사로 쌓인 피로, 그 리고 그가 있는 곳은 어린 계집을 위한 환희밀전(歡喜密殿)으로 설계 된 내당의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쨍! 쨍! 쨍! 악진웅이 칼 부딪히는 소리에 눈을 뜬 것은 자신의 수하들이 배교 도들과 난장으로 얽힌지 물경 일 각여가 지나서였다. 처음 그는 칼 부딪히는 소리를 풍경(風磬) 소리쯤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배 위에 알몸으로 엎드려 자는 계집의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그가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다시 반 각이 지나서였다. "이런!" 악진웅이 벌떡 일어났다. 그의 배 위에서 자던 어린 계집이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굴러 떨어졌다. 계집이 의아해 하는 사이 악진웅은 자신의 애병(愛兵) 감산도를 잡았다. 칼 소리가 분명했다. 악진웅은 후다닥 외당을 달려나갔다. 치솟는 불! 나뒹구는 시신……. 악진웅은 외당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입을 딱 벌렸다. 염태명의 뒤틀린 얼굴도 보였다. 염태명은 왜 이제야 나타났느냐는 원망의 눈빛을 그에게 보내고 있었다. 허리에는 장창이 깊숙이 꽂혀 있었고 머리에 번뜩이는 그림자는 대월이었다. "죽일 놈들! 멈춰라!" 악진웅이 노호(怒號)를 터뜨리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어디 전우삼이 악진웅의 말을 들을 자인가! 그는 대월을 멈 추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기세 좋게 염태명의 머리를 조각내며 골수를 튀겼다. "헤헤헤! 때맞추어 잘 나타났다." 전우삼이 소매로 코를 씩 훔치며 악진웅을 마주보고 섰다. 진금구도 장창을 꼬나들었고 화 노인도 철구(鐵求)를 꺼냈다. 비응보의 수하들은 모두 달아나거나 죽었고 살아남은 배교도들도 칠팔 여명에 불과했다. 산서 늙은 매의 눈썹이 이마 끝까지 치솟았다. "죽어라!" 그가 대갈일성(大喝一聲)하며 전우삼을 육박했다. 전우삼이 정면에서 악진웅을 맞서고 진금구는 장창으로 좌측을 노 렸다. 화 노인의 철구도 바람을 갈랐다. 배교도들은 악진웅을 사면에서 포위 공격했다. 악진웅은 포위 공격에 맞서 좌충우돌했다. 그는 과연 한 지역의 패 주 다웠다. 젊은 시절 맨주먹으로 하루 동안 호랑이를 일곱 마리나 죽였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커억!" 그의 감산도에 배교도 한 명이 피를 뿌렸다. 전우삼의 눈에 불이 튀었다. "헤헤! 네놈만은 반드시 죽이겠다! 으핫!" 전우삼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살을 주고 뼈를 깎는 수법으로 악진 웅을 몰아쳤다. 전우삼이 거세게 나오자 악진웅은 주춤했다. 그가 감산도가 날아가 는 방향을 좁히며 수세(守勢)를 취했다. 악진웅의 수비식은 철벽을 자랑했다. 전우삼 등으로는 쉽게 악진웅 의 가슴에서 쏟는 피를 보지 못할 듯했다. 차디찬 목소리가 싸우는 자들의 귀를 때린 것은 그때였다. "재미없군요!" 싸우는 자들의 냉랭한 목소리에 놀라 일제히 칼을 거두며 뒤로 물 러섰다. 그 순간, 은백선(銀白線)이 번뜩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 노인이 몸을 건들거렸다. 화 노인의 미 간 사이에는 콩알만한 점이 뚫려 있었고 그 사이로 핏방울이 맺혔다. 쿵! 화 노인이 피로 범벅이 된 땅바닥을 굴렀다. 전우삼과 진금구 등은 갑자기 출현한 자의 가공할 무위에 놀라 화 노인의 죽음을 애도하지도 못했다. 악진웅이 반색을 하며 먼저 소리쳤다. "당 당주,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까?" 나타난 자는 당예였다. "명강량은 참으로 무정(無情)한 자이군요. 잠마의 복수를 위해 비 응보에 혹시 나타날 줄 알았더니……. 끝내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이런 자들만 보냈군요." 당예가 사이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춤을 추듯 가볍게 소매를 뿌렸다.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는 침들이 배교도들을 덮쳤다. 황봉침(黃蜂針)이었다. "피하라!" 전우삼이 다급히 소리치며 땅을 굴렀다. "으악!" "악!" 배교도들이 허둥지둥 피했으나 무공이 약한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 하지 못했다. 당예의 소매짓 한 번에 살아 남은 자는 전우삼과 진금 구 뿐이었다. "제법이군." 당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찔렀다. 그가 소매에서 학(鶴) 의 깃털을 두 개 꺼냈다. 학우침(鶴羽針)! 그는 학우침을 각기 한 손 에 잡고 수인(手印)을 맺듯 손가락을 모았다. 전우삼과 진금구는 감히 달려들 생각도 못한 채 당예의 손가락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당예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때였다. "어리석은 놈!" 회색 인영 하나가 전우삼을 덮쳐 갔다. 때를 같이하여 당예가 학우침을 뿌렸다. 당예의 손을 떠난 학우침 은 섬전보다도 더 빨랐다. "억!" 진금구는 비명을 터뜨렸고 전우삼의 앞을 가로막은 회색 인 영도 둔중한 신음을 내뱉었다. 학우침 중 하나는 진금구의 심장에 꽂혀 깃털을 붉게 적시고 있었 고 나머지 하나는 회색 인영의 손바닥을 관통한 채 꼬리를 떨고 있었 다. "신 노인……." 전우삼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손바닥에서 학우침을 빼내는 노인을 불렀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회색 인영은 바로 그의 빙부가 될 와사 곡의 숯 굽는 늙은이였다. "이렇게 어리석은 짓을 벌이다니……. 주 명두가 한 말을 잊었느냐 ? 와사곡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던!" 신 노인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신 노인이 그것을 어떻게……."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다! 빨리 이곳을 떠나라!" "하지만……." "빨리!" 신 노인이 꽥 소리쳤다. 그의 눈빛은 말을 듣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전우삼을 때려죽일 듯했다. "화정을 찾아가라! 네게 전해 줄 물건이 있을 것이다. 어서 가라!" 전우삼은 주춤주춤 물러나고 당예는 자신의 학우침을 받아 낸 늙은 이를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한 놈도 살아가지 못한다!" 악진웅이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질렀다. 그가 신 노인과 전우삼을 향 해 감산도를 치켜세웠다. "명두의 명을 어기고 이 많은 교도들까지 죽음으로 이끈 네 놈의 죄는 백 번 때려 죽어도 시원치 않다! 화정을 네 놈에게 맡길 생각까 지 한 내가 어리석었다. 어서 사라지지 않고 뭐 하느냐? 에잇!" 신 노인이 전우삼을 거세게 밀치며 그 반탄력으로 악진웅을 쏘아 갔다. 그가 악진웅의 감산도에 맞서 장죽(長竹)을 휘둘렀다. 악진웅도 악을 쓰며 감산도를 휘둘렀다. 신 노인의 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악진웅의 감산도에 맞서 신 노 인은 오히려 장죽의 그림자를 늘이고 있었다. 그때까지 전우삼은 달아나지 않았다. "네 놈 때문에 내가 죽는 꼴을 보려고 하느냐?" 신 노인이 발을 굴렀다. 전우삼은 그제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당예가 허공에서 물건을 취하듯 손목을 꼬았다. 그의 손가락 사이 에 철전(鐵錢) 하나가 드러났다. 핑! 철전이 달아나는 전우삼의 등을 향했다. 신 노인의 신경은 오로지 전우삼에게 있었다. 그는 당예의 출수에 이번에도 몸을 날려 철전을 가로막았다. 단지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어깨였다. 신 노인은 쇄골이 부서지는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당예는 고개를 갸웃했다. 학우침도 막아내고 철전도 막아내고…… 아무래도 상대는 악진웅 보다 강한 듯했다. 당예는 원래 전우삼 같은 애송이는 싸울 마음도 없었던 터라 신 노인에게 관심을 돌렸다. 산 서에서 잠마 다음의 거물이 분명한 듯했다. '어쩌면 운 좋게도 마옹의 종적을 들으려나…….' 당예는 철필을 손가락 사이에 돌리며 눈빛을 빛냈다. 휙익! 그가 철필을 날렸다. 철필이 빙글빙글 돌며 악진웅을 육박하 던 신 노인의 목을 노렸다. 신 노인이 철판교로 휘청 몸을 눕혔다. 철필은 신 노인을 스쳐 가 며 다시 꼬리를 틀었다. 신 노인이 장죽으로 악진웅의 감산도를 막아 내며 철필을 다시 피하려 할 때였다. 당예가 허공으로 신형을 뽑았다. 파팟! 그가 신 노인을 향해 양 소매를 뿌렸다. 당예의 소매에는 만 종(萬種)의 암기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그의 소매에서 뻗어 나가는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실이었다. 신 노인은 천라지망으로 내려오는 실에 놀라 장죽을 다급히 휘둘렀 다. 그러나 촘촘한 실의 그물을 피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척추에도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철필이 그이 허리를 스치 고 지나간 것이다. 신 노인은 허리를 꺾고 쓰러졌다. 당예와 악진웅이 그를 향해 천천 히 걸어왔다. 신 노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우삼, 뒷일을 부탁한다!' 그는 마지막 힘을 모아 전신의 모든 모공(毛孔)을 닫았다. 그가 재 빨리 피를 역류(逆流)시켰다. 피가 엄청난 힘으로 역류하며 심장으로 모여들었다. 그의 눈은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듯했다. '흡!' 신 노인 이 한 모금의 호흡으로 역류하는 피의 힘을 가속하자 그가 크게 한 번 몸을 꿈틀거렸다. 신 노인의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흐르며 그의 눈빛이 점차 빛을 잃어 갔다. 역류하던 피가 심장을 압박 파열시킨 것이다. 신 노인이 역혈(逆血)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까지는 혀를 깨무는 시 간보다 더 빨랐다. 또한 혀를 깨물면 어떻게 살릴 방도라도 있지만 심장이 터진 경우야……. 신 노인이 펼친 것은 말 그대로 역혈대법(逆血大法)이었다. 피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배교의 비공(秘功) 중 하나! 역혈대법은 시전자의 무공 수위에 따라 여러 가지 효능을 가진다. 그 중, 간혹 교의 중요한 자리에 앉은 자들이 교의 비밀을 사수(死守 )하기 위해 신 노인처럼 목숨을 끊는데 역혈대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배교는 상대하기 힘든 자들이 너무 많군요." 당예가 고소를 흘렸다. 악진웅은 불타고 있는 외당과 수하들의 시신에 눈을 돌렸다. "흑면호! 그 개자식부터 찾고 난 후 이야기합시다!" 그가 흉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악진웅이 전우삼을 찾아 신형을 날렸다. "명강량…… 만나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당예는 연무장에 홀로 서 한숨을 토해 냈다. 악진웅의 추적을 간신히 떨구고 와사곡에 도착한 전우삼을 맞이한 자는 그의 정혼녀 화정이었다. 놀랍게도 화정은 자신의 아버지인 신 노인이 산서 배교의 명전이라 말했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건네주었 다. 주 명두가 당신이 죽을 경우를 대비 전우삼에게 주라며 신 노인 에게 맡겨놓은 물건이었다. 전우삼은 상자를 열었다. 상자 속에는 '명(明)'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녹슨 철패와 양피지 한 장, 서신 한 통이 들어 있었다. 철패는 명두를 나타내는 신물이고 양피지는 산서 배교도들의 명단 이었다. 그리고 서신에는 '전우삼을 배교 산서 향당의 명두로 명함. 청정광명세계명존의 비호가 항상 따르기를.'이라는 간단한 글이 전혀 있었다. 일순, 전우삼의 머리는 둔중한 물체로 두들겨 맞은 듯 멍했다. 그 가 녹슨 철패를 꽉 쥐었다. 미칠 지경이었다. 철패에는 주화청의 교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 교의 미래 에 대한 염려와 자신에 대한 염려가 그의 가슴을 터뜨릴 정도로 담겨 있었다. "이까짓 게 뭐라고?" 전우삼이 발악을 하듯 고함을 지르며 철패를 집어 던졌다. 주화청에게 업혀 다니던 일이며 주화청의 수염을 잡고 장난을 치던 온갖 일이 물밀 듯이 되살아 났다. 그는 그 기억에 입술을 깨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서였다. 눈물은 경멸할만한 놈들이나 흘리는 것이다. 전우삼은 눈을 부릅떴고 입술은 깨물고 또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엉! 엉! 엉!" 전우삼은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산이 떠나갈 정도의 울음이었다. 그는 화정을 껴안았다. 정말 미치고 미칠 지경이었다. "엉! 엉! 엉!" 한 번 눈물을 보이기 시작한 전우삼은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심 장이 쪼개질 듯했고 뼈는 쑤셨다. 주화청, 진금구, 화 노인, 신 노인……. 슬픔의 깊이는 곧장 분노의 깊이로 이어졌다. 녹슨 철패에 담긴 애정은 다른 한 편 죽어 간 교도들에 대한 뼈아 픈 통증과 피의 복수를 일깨우고 있었다. "화정! 화정, 이것으로 무엇을 하란 말이야? 이것으로! 이것으로는 놈들에게 아무런 복수도 하지 못한다!" 전우삼은 양피지가 든 상자까지 내동댕이쳤다. "화정! 나는 찾을 것이다! 암왕의 무공을…… 나를 기다리지 마! 미안해! 미안해! 화정!" 그가 울부짖으며 화정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볐다. "나는 참을 수 없어! 모두 죽여 버리겠다!" 전우삼이 비틀거리며 화정에게 등을 돌렸다. "엉! 엉! 엉!" 그가 연신 눈물을 흘리며 산을 내려갔다. 화정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전우삼과의 오랜 이별을 예감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우삼을 잡지 않았다. 배교의 여자들에 게 이별이란 언제나 준비해 두어야 할 어떤 것이었으므로……. 이별을 대신해 화정은 눈물을 떨어뜨리며 전우삼이 집어던진 철패 와 양피지를 주웠다. * * * 양백의 본향(本鄕)은 정주(鄭州)다. 근동(近洞)에서 양가장(陽家莊 ) 하면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많았을 정도이니 제법 살만한 처지 였다.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마음에 드는 여자와 혼인까지 했다. 그때까지 모든 것이 괜찮았다. 그가 과거(科擧)로 입신(立身) 하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것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어느 날, 한 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한촌(閑 村)의 학사(學士)였던 그의 선친(先親)은 자신의 재주를 과신(過信) 했든지 아니면 심심함을 풀 길이 없었든지 이상한 책에 관심을 기울 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책이 바로 배교의 보권이었다. 공자(孔子)께서는 산 사람의 일도 모르는데 어찌 죽은 사람의 일을 알랴며 주의하셨는데 그의 선친은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혹(迷惑) 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종교(宗敎)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 그의 선친은 교에 물든 다른 사람들처럼 보권을 한 권의 책으로, 세상 많 은 가치(價値) 중의 한 갈래 정도로 대하지 못했다. 당연히 교도가 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것은 그의 선친은 배교도 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다. 선친은 가족들에게까지 배교도가 되었다는 것을 비밀로 했다. 언 젠가 모두를 배교도가 되게 하리라 생각하였겠지만……. 어쨌든 양백은 한동안 몰랐었다. 그의 선친이 배교도가 된 것을… … 하지만 가족 사이의 비밀이 무슨 오래 갈 수 있으랴? 그의 어머니 가 먼저 그 비밀을 알았다. 그리고 비밀은 안방과 부엌을 따라 회자 된다고 다음으로 그의 여자가 그 사실을 알았다. 여자…… 참으로 풀 길 없는 세상의 반! 그의 여자는 그와 혼인하 기 전에 죽도록 사랑했던 남자가 있었다. 양가장을 마주보고 있던 비 성보(飛星堡)의 남자였다. 비성보는 예전에는 무가로 제법 이름을 날렸던 곳이다. 하지만 당 시는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폐보(廢堡)가 될 위기에 놓여 있던 곳이 다. 아마 그래서 그 여자의 부모는 비성보의 남자보다 그에게 그 여 자를 보냈을 것이다. 양백이 맞아들였던 여자는 양백과 혼인을 하고 나서도 무척 비성보 의 그 남자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다시 그 남자와 맺어지기를 원했 고 양백의 선친이 배교도라는 사실을 안 순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찾기 위해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양백으로 보면 그 여자가 때려죽일 여인이지만 비성보의 그 남자로 보면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지킨 아름다운 여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양백의 부모는 죽고 양백도 배교도로 몰려 한동안 도망을 다녀야 했다. 세상이 잠잠해졌다고 생각했을 때 집을 찾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그의 여인은 비성보의 아낙이 되어 있었고 선물로 양가장의 전답까지 모두 비성보로 가져간 모양이었다. 양백이 현실에 대한 자신의 약삭빠름을 알아챈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그는 복수를 외치면 비성보의 문 앞에서 울고불고 하지 않았다. 그 는 바로 배교의 향당을 찾아갔다. 그리고 배교도가 되었다. 양가장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여자 이상 증오하던 배교를……. 양백이 배교도가 된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거리를 떠도는 동 안 그는 아무것도 없었다. 굶주려 죽어 당장 길거리를 뒹굴어야 할 판이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배교도가 된 자에게는 교도들로부터 추 렴한 다섯 말의 곡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교도가 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그 때문이었다. 배교도들은 교로 인해 화를 당한 양백의 전력을 알기에 다섯 말의 곡식 이상의 혜택을 베풀어주었다. 양백이 금적보(金積堡)라는 이 거 대 상단(商團)을 이룩할 수 있게 한 첫 재원(財源)이 바로 그것이었 다. 양백은 몇 말의 곡식으로 부를 계속 쌓아 나갔다. 한 번 붙기 시작 한 부는 해를 거듭할수록 쌓여 갔다. 그는 어느 틈에 대상단의 주인 이 되었고 비성보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는 그렇게 호인(好人)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원한을 잊는 자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짓밟아 주었다. 비성보의 식솔은 물론 그 집의 개까지도, 그가 받은 십 여배 이상의 고통을……. 그리고 양백은 이제 원하는 것을 더 바랄 것 없는 부자가 되었다. 그동안 그의 가장 큰 고객(顧客)이었고 동업자(同業者)였던 배교의 힘도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득(利得)이 남지 않는 것을 가까이 하지 않음은 상인(商人)의 철 칙이다. 교를 멀리 하려 했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유 명 두! 하남의 전임 명두였던 그가 죽음 직전에 자신에게 명두 자리를 넘겨 버린 것이다. 양백은 황당했다. 사람 보는 안목이 그렇게 없지 않는 노인이라 생 각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신심(信心)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신에게 명두 자리를 넘겨주다니……. 양백이 더욱 황당하게 생각한 것은 하 남의 교도들과 다른 지역의 명두들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이 명두가 됨을 너무도 당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명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두가 되지 않으면 교도들이 의심의 눈 으로 바라볼 것이고 의심의 눈길이 쌓이다 보면 악감정도 쌓여 자칫 천하에 그가 배교도임이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당시는 세상이 조용할 때였다. 명두가 된다고 특별한 무슨 일이 생길리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내심 명두 자리가 싫지도 않 았다. 그곳이 배교라 하더라도 주위로부터 인정을 받아 한 지역의 총 수(總帥)가 된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임에는 분명했다. 그렇게 명두가 되고 이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양백은 지금 가장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배교대척결에 나선 저놈 들의 엄청난 힘! 금적보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 는 힘이었다. 배교와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그래서 잔꾀를 꾸며 보았다. 솔직히 교도들 사이에 흉흉하게 나돌고 있는 그에 대한 소문은 바로 자신이 뿌린 것이다. 그는 그 소문으로 교도들이 그와 절연(絶緣)을 선언하 고 냉담해지길 바랬다. 뜻대로 된다면 자연스럽게 교와 그의 관계는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자신의 뜻대로 될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하남 명두, 양백은 한 통의 서신을 들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비 문으로 적힌 그 서신은 황기명사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명옹께서 홍 동으로 마중을 나오기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양백은 정말 생각 못했었다. 명옹이 자신을 찾을 줄은……. 소문 중에는 자신이 적들의 세작(細作)이라는, 물증(物證)까지 그 럴듯하게 갖춘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도 찾아온다니……. "명옹께서는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군." 양백이 서신을 태워 없애며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구나. 나를 그렇게 믿는다니……." 그는 그렇게 의리가 없는 자는 아니었기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흘러 가는 데로 자신을 맡기기로 했다. "종현수(種賢秀)!" 양백은 금적보의 총관을 불렀다. 그는 양백이 가장 믿고 아끼는 자 로 또한 배교 하남 향당의 명전까지 맡고 있었다. 양백은 종현수에게 명옹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할 참이었다. 종현수는 자신이 보주 양백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이유를 보주 의 마음을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방금 그는 보주로 부터 몇 가지 지시를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지시를 내리는 보주의 표정에서 그는 역시 보주의 마음을 읽었다. 종현수는 깊게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언젠가는 정리해야 했고 그 정리를 위해 누군가가 나서야 했다. 종 현수는 그 일에 나설 사람이 자신 뿐이라 믿었다. 그는 배교의 명전 이전에 금적보의 총관이었다. 그리고 명왕과 성 녀 보다는 양백을 더욱 받들었다. 명왕과 성녀가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 만 보주 양백이 자신의 목숨을 지켜 준 증거는 분명했다. 은혜를 입 은 것은 물론 말할 필요가 없다. 종현수는 보주가 내린 지시 외에 한 가지 일을 더 준비했다. 무리 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작은 무리수라도 끝은 무리수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그는 굳게 믿었다. 제9장 천잠로(天潛路) 달도 없는 캄캄한 밤이었다. 창을 든 십 여명의 사내들이 주위를 삼엄히 지켰고 그 가운데 남녀노소(男女老少) 오십 여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화로(火爐)가 놓인 제단이 있었고 화로에는 불이 기 세 좋게 이글거렸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배교의 밀회(密會)! 명강량은 바쁜 와중에 산서 고현(古縣)의 밀회에 참가하려 하고 있 었다. 악약이 조르듯이 가자고 했기 때문이다. 눈이 둥그런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명강량의 앞을 가로막았다. 차 림새로 보아 그는 고현의 향주인 모양이었다. "진공가향(眞空家鄕)! 무생부모(無生父母)!" 그가 의심의 눈길로 명강량을 바라보며 진언(眞言)을 외쳤다. "명왕출세(明王出世)! 하토천국(下土天國)!" 명강량도 진언으로 회답했다. 고현의 향주와 명강량은 수인사를 하며 각기 교의 진언을 주고받았 다. 진언을 주고받는 것은 교도가 맞는가를 묻는 행위이기도 했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이곳의 사람은 아닌 듯한데……." 향주가 물었다. "강남에서 왔습니다." "강남? 그렇다면 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강남의 명두들도 산서 이 작은 현의 밀회가 열리는 장소를 알지 못할 텐데……." 향주는 의심을 풀지 않았다. 교가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기 때문 에 심문(審問) 검색(檢索)이 더 심한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명옹이라도 일개 현의 밀 회 장소까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밀회에 가자고 한 사람은 악약이다. 그리고 밀회 장소로 명강량을 이끌고 온 사람도 악약! 악약은 화로에 타고 있는 불을 보느라 정신 이 없었다. 명강량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신분을 밝혀야 했다. 그가 품속에 손을 넣었다. 향주는 그가 무슨 암기라도 꺼내는 줄 알고 긴장된 표정으로 창을 잡았다. 명강량은 향주만 볼 수 있도록 전교영기를 내밀었다. 향주가 눈을 휘둥그래 떴다. 그가 급히 명강량의 아래, 위를 살폈 다. 그제야 그의 눈에 신장도도 들어왔다. 벽촌의 향주인 그로서는 한 눈에 명강량이 찬 칼을 신장도로 알아볼 재주가 없었던 모양이다. 향주가 부복을 하기 위해 급히 허리를 숙였다. 명강량이 그를 잡았다. "주위가 시끄러워짐을 원치 않소. 모른 척 해 주시오." 명강량의 말에 향주가 넋 나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명강량은 악약과 함께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며…… 명…… 자…… 잠깐만!" 향주가 황망히 명강량에게 다가왔다. "며…… 명옹, 그럼 옆에 계신 분은……." 향주가 침을 꿀꺽 삼키며 악약을 곁눈질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 향주는 숨을 멈추었다. 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이 벽촌의 작은 현에 명옹은 물론 성녀까지 와 주다니…… 향주는 정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교군을 지휘하고 교의 잔무를 처리하는 자는 향주다. 따라서 대체 로 향주의 나이는 젊다. 그러나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사람은 나이 많은 사람 중에 선임된다. 배교에서는 제의를 주관하는 자를 노관(老 官)이라 하는데 고현의 노관은 눈썹이 길게 늘어진 노인이었다. 사람 이 신심을 가지고 살다 보면 평생 동안 험한 일을 하고 살아도 기품( 氣品)이 생기는가 보다. 고현의 노관이 그랬다. 그는 어떤 풍상에도 표정을 바꾸지 않을 듯했다. 노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명강량의 마음에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홍동을 서둘러 가야 한다는 조급함도 들 수 있었다. 노관은 장대를 짚고 서 교도들에게 서부(書符:병과 귀신을 쫓는 부 적)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명강량과 악약은 각기 서부를 한 장씩 받았다. 서부를 받은 교도들은 서부를 가슴에 대고 화로 주위에 모였다. 교 도들이 축사(逐邪)의 주문을 외며 화로가 설치된 제단을 돌았다. 화 로 주변을 도는 행위는 노관이 장대로 제단을 서너 번 치기까지 반 시진 가량이나 계속 되었다. "앉으시오." 노관이 제단에 올라 장대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교도들이 줄을 맞춰 앉았다. 노관이 보권을 설할 때가 온 것이다. 명강량은 귀를 씻고 자세를 정중히 했다. 명색이 교의 호교신장이 라는 자가 보권을 돌보지 못한 지 몇 개월은 된 듯했다. 쿵! 노관이 장대로 크게 제단을 친 후, 입을 열었다. "그곳의 땅은 비옥하고 큰 성이 하나 있소. 매일 낮에는 맑지만 밤 이며 용왕(龍王)이 비를 내려 주십니다." 노관은 밑도 끝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사람이 잠든 사이에 나찰(羅刹) 귀신이 와서 말끔하게 소제를 해 주고 마을 사이에서는 개나 닭이 한가로이 우는 소리가 들리며 과일 은 향기롭고 사철의 기후는 온화하며……." 노관의 카랑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명강량은 노관이 설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아챘다. 안락국(安樂國)! 교도들의 이상향(理想鄕)! "……곡식은 저절로 자라며 껍질이 없고……." 명강량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악약은 서부를 받았을 때부터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있었다. 노관의 연설은 한 식경 이상 이어졌다. "……교가 어려울 때입니다. 하지만 어둠이 깊어진다는 것은 곧 새 벽이 온다는 증거! 명왕이시여!" 노관이 제단에 부복하고 교도들도 따라서 부복하며 명왕을 찾음으 로써 연설은 끝났다. 교도들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고 젊은 교군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밀회의 마지막은 언제나 가무를 즐기고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며 끝 난다. 교도들이 담소를 나누며 긴 원을 그리고 섰다. 교도들이 흥겹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남녀 구별 없이 얽혀 가며 추는 이 춤은 중원에 처음 발을 들인 벽 안의 배교도들로부터 유래된 춤이다. 중원의 춤과 달리 격했고 밤중에 남녀 구별 없이 얽혀 추는 춤이기 에 중원인들이 충분히 이상하게 볼만했다. 강호인들이 배교도들을 음 란한 자들로 보는 이유 중 하나였다. 화로의 불은 더욱 활활 타오르고 장단은 빨라졌다. 악약은 명강량을 상대로 춤을 추고 있었다. 악약의 춤은 너무도 격 렬해 명강량이 머쓱함을 느낄 정도였다. 악약의 발걸음은 교도들 사이를 이리저리 나는 명조처럼 가벼웠고 몸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와도 같았다. 그녀의 얼굴은 붉었고 콧등에는 가는 땀방울도 맺혔다. "강량! 강량, 내가 왜 밀회에 가자고 했는지 아셔요?"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명강량은 악약의 빠른 발걸음을 맞추느라 대답할 틈도 없었다. "나는 무척 이 춤을 추고 싶었어요. 그것도 강량과 함께…… 그래 서 밀회에 가자고 했죠." 악약이 하얀 이를 살짝 보이며 웃었다. 명강량은 놀라 급히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모두 흥겹게 춤 을 추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들을 아는 자도 향주뿐이었다. 향주는 호목(虎目)을 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성녀와 명옹이 계신 이 영광스런 자리에 혹시 나타날지 모를 적들을 지키느 라 온 정신을 쏟고 있는 모양이었다. "강량, 노관이 한 말 기억나요?" 악약이 잠깐 발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명강량은 악약의 말에 태연자약(泰然自若) 하느라 그 물음에도 답 하지 못했다. "안락국! 강량, 나는 문득 안락국이 생각났어요." "……." "강량과 함께 안락국에 가겠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요?" 악약이 명강량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명강량은 안색을 찌푸렸다. 안락국은 광명대계에 있는 나라다. 하 계에도 안락국이 세워질 수 있지만 그것은 명왕이 세상에 모습을 보 이는 이후라야 가능하다. 성녀는 춤을 추면서도 죽음을 꿈꾸고 있었는가? 명강량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 남은 자들이 불쌍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모두 안락국에 갈 수는 없거든요." 악약이 아미를 찌푸렸다. 명강량은 악약의 말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려 고 애쓰지도 않았다. 가끔 성녀는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므로……. "강량, 하지만 나는 언젠가 그곳에 가 볼 생각이에요. 강량과 함께 ……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요?" 악약의 눈빛이 몽롱하게 젖어 갔다. 그녀가 소매 깃을 길게 늘이며 팔을 벌렸다. 악약은 다시 춤을 추었다. 저번처럼 격렬한 춤이 아니었다.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부드럽고 가벼운 발놀림……. 명강량은 한 걸음 물러났다.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눈빛은 계속되고 있었다. 성녀는 선녀(仙女 ) 같은 춤사위만 남긴 채 다른 세계로 가 있음이 분명했다. * * * 거지는 먹고 자는 것 외에 다른 고민이 없을 것이라 이야기하는 사 람은 삶의 무게를 너무 가볍게 대하는 사람일 것이다. 왕후(王侯)도 거지도 각기 자신의 신분에 어울리는 고민 한둘은 언제나 따라 다니 는 법이다. 등장평(鄧長平)은 개방에서 유일하게 구결(九結)을 한 자다. 개방 의 용두방주는 당연히 그의 신분이고 천일취개(千日醉　)는 그의 별 호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거지가 있으랴 마는 등장평은 유난히 술을 좋 아했다. 천일취개는 그가 천일 동안 쉬지 않고 술을 마셨기 때문에 붙여진 별호다. 사실 그는 천일 이상의 날들을 그의 별호 앞에 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술이 너무 과해 꼬박 이틀을 자는 바람에 하루 동안 술을 입에 대지 못해 결국 그의 별호는 천일취개로 낙점(落點) 되고 말았다. 거지 중에서도 두목, 더해서 술! 웬만한 고민쯤은 고민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근자에 등장평은 제법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귀찮은 일이 생긴 것이다. 배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외풍(外風)은 생각보다 거세 개방까지 건들거리는 판국이었다. 유향경천문은 물론 이제 구대문파까지 개방에 배교 타파를 위해 나 서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직접 타구봉(打拘棒)을 들고나서지는 못할 망정 눈과 귀는 빌려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유향경천문은 몰라도 오랫동안 구파일방(九派一幇)으로 불려 온 연륜이 있는지라 구대문파 의 청은 참으로 거절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배교 타파에 나선다는 말인가? 방도들의 밥그 릇을 깼다는 배교도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을 뿐더러 오히 려 배교도들은 개방의 거지들에게 후했으면 후했다. 배교도들은 십시 일반(十匙一飯)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자들이니……. 더해서 강호에 대한 간섭을 최소한 한다는 것이 개방의 원칙이다. 유향경천문은 물론 구대문파의 청도 거절해야 함이 옳았다. 하지만 강호란 어디 시시비비(是是非非)로 이야기되는 곳인가? 배교를 처치하는 과정에서 이유야 어쨌든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다 수 상했다. 그 제자들의 피값을 받는 일에 개방이 모른 척 한다면 무 척 섭섭해 할 것이 틀림없었다. '피를 흘리게 된 사연은 당신들이 자초한 것이 아니오'하며 따지고 나설 수도 없는 게고……. '귀찮은 일이다. 귀찮은 일!' 이럴 때 등장평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 그의 별호가 소문과 다르지 않음을 유감없이 증명하는 일……. 구석진 곳에서 세상 모르는 척 술만 찾았다. 강호인들이 요즘 천일 취개는 만일취개(萬日醉　)가 되어 술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평 해 주면 좋은 일이고 그렇게 평해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술에 취해 그럭저럭 시간을 흘려 보내도 좋은 일이었다. 또 하나 좋은 일은 그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물어 술에 취할 버젓 한 명분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진정한 술꾼은 어떤 상황에서도 꿋꿋이 술을 찾는 법이다. 그러나 등장평은 오늘만은 뱃속의 술벌레를 달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다 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모처럼 그럴듯한 안주를 곁에 두고 술을 마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 안주가 얼마나 좋았는가 하면 방의 일을 게을리 한다고 눈만 뜨 면 자신을 들볶던 법개(法　)도 식탐(食貪) 어린 눈으로 부글거리는 솥만 바라보고 있었다. 법개의 눈치만 아니었다면 그 귀한 안주를 구해 온 일결제자(一結 弟子)에게 당장 이결(二結)을 하라고 했을 것이다. '암! 그렇게 했다면 모든 제자들이 개를 구하러 다니기 위해 동분 서주 할 것이 아닌가? 법개, 저놈만 아니었다면 나는 앉아서 매일 호 식(好食) 했을 텐데.' 등장평은 법개에게 눈총을 보냈다. 장작불에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음식은 바로 황구(黃狗)였다. 구수한 냄새는 천지를 진동했다. 등장평은 더 이상 참았다가는 술벌레가 뱃가죽을 뚫고 나와 죽을 것 같았다. "꿀꺽! 여…… 열어 보라고. 너무 삶으며 기름기가 허물어져 맛이 없다구. 개고기의 맛은 누가 뭐라도 쫀득쫀득한 껍데기에 있지." 그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점잖게 앉아 있던 법개가 기다렸다는 듯이 솥뚜껑을 열었다. 하얀 김과 함께 솥에 혀를 빼문 거대한 개가 부글부글 삶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이상 참았다면 등장평은 이미 등장평이 아니었을 것이다. "어디 보자! 어디 보자!" 그가 법개를 밀치며 솥 옆에 섰다. 그의 손에는 어느 틈에 찰랑이는 호로병과 단도(短刀)가 들려 있었 다. "헤헤헤! 어느 놈인지 털도 참 잘 벗겼다. 어디! 어디! 코부터 맛 을 볼까?" 등장평은 단도로 개의 여기저기를 몇 번 찔러 본 후 솜씨 좋게 개 코를 싹둑 잘랐다. 그가 입을 아 벌리고 한 입에 개코를 꿀꺽 삼키려 할 때였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짧은 나뭇가지 하나가 개코를 노리고 날아왔 다. "누구냐?" 등장평이 대경실색(大驚失色)하며 급히 몸을 피했다. 손에 든 물건 이 개코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고얀 놈! 위, 아래 없이 덥썩덥썩 음식에 손을 대는 버릇은 어디 서 배웠느냐? 네 놈이 그 모양이니 소개란 놈도 그 모양이지." 한 소리 고함과 함께 땟물이 졸졸한 상거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 다. 거지들이 더럽다고 저리 가라 할 노인은 바로 등장평의 사백, 원 상이었다. "사백!" 등장평은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는 무릎을 꿇는 찰라를 이용 재빨 리 개코를 입안에 쑤셔 박았다. 사백이 나타난 이상 그 맛있는 개의 코, 귀, 혓바닥은 자신의 입에 들어가지 못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손에 쥐고 있는 개코라고 챙겨야 했다. 그것도 빨리! 씹으면서 먹었다가는 뱉어 내라고 할 것 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일도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없을 것이다. 눈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고기, 그리고 술……. 하지만 등장평은 입을 댈 수가 없었다. 사백은 자신만 혼자 야금야 금 먹을 뿐 먹으라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아마 개코를 삼킨 데에 대 한 보복을 하는 모양이었다. "사백! 개봉까지 어쩐 일로……. 추위를 피해 강남으로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등장평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몇 가지 물어 볼 일이 있어 왔다." 원상이 개고기를 한 입 가득 쑤셔 박으며 말했다. '노인이 이빨도 좋지. 컥컥!' 등장평은 입안에 고인 침으로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었다. "사백, 궁금한 일이라니요? 궁금증은 빨리 풀어야지요. 저도 빨리 대답할 테니 빨리 물어주십시오." "입이나 닦아라. 보기 흉하구나." 원상이 냉랭하게 말했다. 등장평의 입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 등장평이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소매로 입을 훔쳤다. "유향경천문에 대해 알고 싶다." "유향경천문은 일 년여쯤 사대세가가 힘을 합쳐 여산에서 문호를 연 문파지요." 등장평이 재빠르게 말했다. "문주는?" "문주? 문주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직까지 살아 있는 옛 벗들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후학(後學)들 에게 대뜸 물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아! 그러셨군요. 사실 유향경천문의 문주 정체를 아는 자는 강호 에 몇 되지 않습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이나 명숙들 몇 분 정도…… ." "너는 알고 있느냐?" "알고 있습니다. 동창(東廠)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청성 파(靑城派)의 개코 도장으로부터 들었습니다." 청성파의 개코 도장이란 청성파의 장문인 청허도장(淸虛道長)이다. 청허도장은 천일취개 등장평의 지기였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동창?" 원상이 눈을 치켜 떴다. "맞습니다. 동창! 유향경천문이 여산에 뿌리를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에게 동창으로부터 한 통의 서 신이 전해졌지요." "……." 원상은 말을 잃었다. 너무도 엉뚱하게 불거져 나온 이름, 동창! 작금 대(大) 명(明)의 실권(實權)을 잡고 있는 곳……. "동창에서 구대문파에 보낸 서신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다고 하더냐 ?" 원상이 이마에 잔주름을 늘이며 물었다. "유향경천문의 문주는 금의위(錦衣衛)의 천호(千戶)다. 유향경천문 의 일에 협조를 당부한다. 단 유향경천문의 배후에 동창과 금의위가 있다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 뭐 이런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동 창의 위세야 보시는 바 그대로 아닙니까. 황제의 영토에 사는 이상 구대문파도 동창의 뜻을 정면으로 거역할 수는 없었겠지요. 구대문파 가 유향경천문에 협조를 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들을수록 가관인 말들이었다. "그 고집 센 세가들이 한 자리로 모여들 때 나는 그 배후에 엄청난 힘을 가진 자가 있었으리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 배후가 동창일 줄은……." 원상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동창이 문파까지 세우며 강호에 개입한 이유는?" "배교 타파! 다른 이유는 나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배교를 없애는 일로 동창이 나섰다는 말인가? 배교 타파는 오래 전부터 강호인들 스스로 해결해 왔고 지금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다. 배교의 힘이 예전 같지 못함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다른 이 유가 있을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만 저는 물론 다른 장문인들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 창이 배교 타파를 기치로 유향경천문을 세우고 그것을 바탕으로 강호 까지 손아래 두려 함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만…… 아직 그런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구나. 참으로 이상한 일이구나." 원상은 자신의 무릎을 가만히 치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오래 전 부터 그 의심을 파헤쳐 온 등장평도 모르는 일! 당장 의심이 풀릴 리 없었다. "유향경천문의 문주가 금의위의 천호라 했느냐?" 원상이 물었다. "맞습니다. 능운공작(凌雲孔雀) 단원홍(丹元洪)! 이름난 무가의 자 손이며 약관에 금의위의 천호 자리를 꿰어차 세상을 놀라게 한 자이 지요." "그가 아무리 동창과 금의위를 등에 업고 있다 하나 고집 센 사대 세가의 식솔들을 수하로 부리려면 여간 애를 먹고 있지 않겠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유향경천문의 당주를 맡고 있는 사대세가의 기 린들은 능운공작의 말이라면 꼼짝 못한다고 합니다." "사대세가가 언제부터 그렇게 권력에 아부하는 자들이 되었을꼬." 원상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부가 아니라 진심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더군요. 능운공작 단원홍이라는 자에게는 그만한 실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무리 이름난 무가의 자손이라 하나 고작 창법(槍法), 도법(刀法 ) 몇 절밖에 더 익혔겠느냐?" "태호에서 구대문파의 협공에 걸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전대 마 옹, 이정인이 실제로는 능운공작 단원홍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알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뭐라고?" 원상이 소리쳤다. 그는 정말 놀란 모양이었다. 배교도들은 약해도 배교의 수뇌들은 약하지 않다. 이정인이 누군인 가? 정사(正邪)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바로 그였다 . 그리고 원상은 직접 이정인의 무위를 본 적도 있었으므로 그 놀라 움은 동창 운운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강호인들의 최대 관심은 역시 무(武)였다. "이정인은 능운공작과의 승부 끝에 동패구상을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상처로 전전하다 한 달 뒤, 구대문파의 협공에 걸려 목숨을 읽었지요. 그러니 결국 이정인을 죽인 자는 능운공작 단원홍이라는 자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그 소문은 빠지고 이정인이 구대문파의 협공에 의해서 죽었다는 소문만 났느냐?"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등장평이 히죽 웃었다. "강호에 소문이 그렇게 난 이유는 능운공작, 구대문파, 배교 모두 소문의 전모가 강호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능운공작 은 주목을 받기 싫어했지요. 이정인을 죽인 자로 주목받게 되면 이목 의 집중을 받을 테고 그렇게 되면 그의 배후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요 . 동창도 금의위도 자신들이 강호의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 고 싶어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구대문파는?"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이정인이 아무리 처치해야 할 자라 하지만 구대문파의 이름난 명숙들이 협공으로 그것도 부상당한 자를 죽이다 니…… 물론 부상당한 것을 모르고 협공을 가했겠지만 어쨌든 자랑할 일은 분명 아니지요." 등장평이 고소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배교의 입장이야 뻔합니다. 교도들의 사기를 꺾기 싫었을 것입니 다. 구대문파의 협공에 죽었다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이나 능운공 작이라는 강호에 이름도 모르는 애송이에게 하늘처럼 떠받드는 호교 신장이 동패구상 당한 것을 알면 얼마나 실망이 커겠습니까. 구대문 파와 마찬가지로 수뇌들이 모르는 척 쉬쉬 했겠지요."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어느 문파에서 그만한 자를 키워냈는고? 소림인가?" "구대문파에서 키운 제자는 아닙니다. 어느 문파인지, 사용하는 무 공이 무엇인지도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하더군요." "구대문파의 제자도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어디서…… 모든 것이 신비 투성인 아이구나. 그래 지금 능운공작이라는 그 아이는 무엇을 하고 있다고 하더냐?" "삼양장은 보기 보다 독한 모양이더군요. 아직도 요양을 하고 있다 고 합니다. 하지만 곧 강호에 재 출두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배교도 …… 쯥!" 등장평은 쓴맛을 다셨다. "배교는 유향경천문의 배후가 동창이라는 것을 아느냐?" "저도 배교의 사정은 잘 모릅니다만…… 알 수가 없겠지요. 소문이 새어나갈 곳이라고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과 명숙들 뿐인데 그들의 입이 가벼울 리는 없겠지요." "이정인으로서는 다행한 일이군." "무엇이 다행이라는 말입니까?" "그가 걱정한 적은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 뿐이었으니…… 만약 배 교 타파에 동창까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원혼(　魂)이 되 더라도 이승에 남으려 했을 것이다." "원혼이 되어 남았을 것입니다. 이정인의 원혼이 씌이지 않았다면 어찌 그 젊은 마옹이 아직까지 버텨 낼 수 있었겠습니까?" "괜찮은 아이지. 눈에 정사(正邪)의 딱지를 떼고 본다면…… 하지 만 놈은 정말 이 강호의 풍진을 견뎌 내지 못하겠구나. 예전에는 놈 이 살아날 가망성을 천에 하나 주었는데 지금은 만에 하나 주기도 힘 들겠어. 쯔쯧!" 원상이 혀를 찼다. "사백, 남의 이야기 할 때가 아닙니다. 근자에 구대문파로부터 배 교 타파에 나서 달라는 청이 쇄도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는 이 상한 눈총을 받기 딱 좋겠습니다." 등장평이 개고기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는 그제야 개고기 한 점을 날름 입에 넣을 수 있었다. 싸늘히 식은 개고기 한 점 먹는 일이야 굳이 사백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터! "결정이야 방주가 하실 일!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볼 수 있으면 지켜 보시게. 배교를 둘러싼 강호의 소요에 흑룡방이 불거지더니 이번에는 동창이 불거졌네. 다음에는 어디서 누가 튀어나올지 어찌 알겠나? 풀어지지 않는 궁금증도 한둘이 아니다. 신중하고 신중하게. 강호의 풍파가 예사롭지 않아. 이 늙은 거지의 예감일세." 원상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중얼거렸다. * * * 배교도들에게 있어 강호의 풍파는 예감이 아니고 현실이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을 오가는 차디찬 현실! 어젯밤 밀회에서 성녀가 속삭임으로 남겨 준 단꿈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가온 현실이었다. 명강량은 나무 사이를 빠져 나와 장방형의 평지에 섰다. 그곳에는 담담한 기파로 그를 부른 자가 있었다. 그는 그 기파에 끌려 성녀를 숨겨 둔 채 이곳으로 왔다. 성녀에게는 잠시 볼일이 있 다고 말했다. 걱정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를 부른 자는 넓은 바위에 앉아 먼 산에 쌓인 눈을 구경하고 있 었다. 명강량이 나타나자 그 자는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명강량은 한 눈에 그가 이제까지 싸운 자들 중 최고의 고수임을 눈 치챘다. 강남에서 싸운 세 명의 무당 제자들처럼 그를 하오문의 수괴로 경 시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장강에서 싸운 창의문의 문주처럼 긴장된 표정도 짓지 않았다. 태행산의 화산파 제자가 보인 조급함은 더욱 없 었다. 그저 장검을 뽑아들 뿐이었다. 검신에 하얗게 빛나는 매화 문양! 그는 바로 화산파 장문인 숭양진인의 세 번째 제자, 우제준이었다. 우제준은 비무할 상대가 정해진 이상 그 상대가 누구이든 상대를 위 해서도 최대한의 실력을 발휘하는 자다. 검에 마음의 허술함이 담길 리 없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강하고 그 강함에 꺾였을 때 죽음이 찾아온다는 것을 안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통상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명강량은 애잔한 아픔을 느꼈다. '운악약…….' 언젠가 이런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그 시간이 너무 빨리 온 느 낌이었다.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왔더라면 하는 후회도 있었고 이후 의 일도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생각은 신장도를 들기 전까지의 생각! 신장도를 드는 순간 그는 신장도의 투기(鬪氣)에 모든 것을 맡겼다 . 우제준이 검을 드는 순간 검에 모든 심력(心力)을 쏟았듯이 명강량 도 칼을 드는 순간 모든 것을 잊을만한 경지는 이루고 있었다. 우제준과 같은 고수는 환술이 먹혀들어 갈 자가 아니다. 환술도 기 (氣)의 싸움! 우제준의 기파는 명강량의 기파를 능가했다. 손과 발, 내력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치켜들며 투로(套路)를 머리 속에 그렸다. 냉랭한 기파가 폭풍처럼 피어올랐다. "핫!" 누가 먼저 고함을 지른지 모른다. 명강량도 우제준도 누가 먼저 칼을 뽑니 하는 일로 느물거리는 자 들이 아니었다. 파파팟! 파팟! 날카로운 칼바람에 시들은 초목이 뿌리째 뽑혀 이리저리 날고 칼그 림자는 천공(天空)을 가렸다. 명강량과 우제준은 한 치의 양보 없이 도검을 번뜩였다. 언젠가 숭양진인이 사제들을 불러 놓고 제자들을 평한 적이 있다. 그는 우제준에 대해서는 절제(節制)를 아는 자라 평했다. 검을 가볍 게 대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숭상하지도 않으니 오 년 내에 화산 제자 들 중 가장 뛰어나다는 둘째, 오세악(吳世樂)의 성취를 따라잡을 것 이라 했다. 명강량은 도법은 기괴했고 분신에 눈이 팔리지 않는다고는 하나 군 접환영보 또한 검이 쫓기 어려울 정도로 현란했다. 하지만 우제준은 뇌전처럼 떨어지는 신장도의 공세를 가볍게 파훼했다. 검은 언제나 원하는 자리로 뻗어 갔고 강약(强弱)의 조절도 물 흐르듯 했다. 명강량의 거친 공격, 우제준의 유현한 대응! 승부는 쉽게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고수들의 승부는 오래갈 듯 해도 한 순간에 판가름이 난다. 명강량과 우제준은 몇 합을 나누는 사이 서로를 뒤엉켜 가고 있었 다. 권(拳), 장(掌), 각(脚)도 아낌없이 날렸다. 뿌연 흙먼지가 두 사람의 신형을 가릴 때였다. 딱! 딱! 딱! 마른 나뭇가지가 꺾이는 듯한 소리가 세 번 울렸다. 그와 동시에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얽혀 가던 명강량과 우제준의 신 형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분리되었다. 우제준은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하지만 얼굴은 붉고 머리칼은 곤두 서 있었다. 검을 든 자세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였다. 명강량도 철탑(鐵塔)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상태는 우제준보 다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표정은 창백했고 입가에는 한 줄기 피 까지 흘렀다. 우제준의 태을전진미리장에 맞서 순간적으로 삼양장을 날렸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우제준은 검을 가볍게 놀렸다. 선기를 잡은 그는 명강량이 호흡을 고를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매영보(梅影步)를 밟으며 미끄러지듯이 명강량을 육박했다. 명강량의 상태는 밖으로 보기 보다 더 나빴다. 태을전진미리장에 막힌 삼양장의 열기가 역류하며 그의 내부를 더욱 진탕시키고 있었다 . 명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성녀, 사부의 얼굴……. 싸워야 했다. 싸워서 이겨 죽음을 비켜 가야 하는 것이 그의 의무 였다. 명강량은 바람처럼 다가오는 우제준에 맞서 신장도를 날렸다. 명강량과 우제준이 다시 어울렸다. 명강량의 두 번째 공세는 첫 번째 공세보다 더 격렬했다. 때문에 우제준은 한결 싸우기가 쉬었다. 상대가 억지 힘으로 나서기 때문에 종종 과수(過手)가 보였다. 우제준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장검으로 원호(圓弧)를 그리며 태을전진미리장을 뿌렸다. 타탁! 탁! 탁! 우제준은 명강량과 삼 장(三掌)을 나눈 후 훌쩍 신 형을 뽑았다. 그는 이 장여를 물러난 채 팔짱을 꼈다. 명강량은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있었다. 입에서 흘린 피는 가슴 까지 적실 정도로 낭자했다. 억지로 몸을 세워 보려 했으나 단장(斷腸)의 고통이 그를 꼼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눈빛도 점점 흐려졌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점점 흐려 갔으나 성녀의 얼굴만은 더욱 또렷했다. '이게 아닌데.'해도 죽 음이라는 단어가 언뜻언뜻 스쳐 갔다. 우제준은 고통에 찬 상대의 표정에서 이제 그를 죽일 때가 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라!' 명강량은 그때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역혈대법으로 모 든 피를 왼손 약지(藥指)에 모았다. 약지는 몰려드는 피로 깨질 듯 아팠다. 머리도 환각에 시달리며 텅 비어 갔다. 우제준이 이 장여 가량 거리를 좁혀 왔을 때였다. "하핫!" 명강량이 맹호처럼 일어서며 피로 꿈틀대는 약지를 뻗었다. 신장도 가 섬전처럼 뒤따르며 약지의 한 마디를 토막냈다. 그가 최후로 준비 한 회심의 절초……. 혈전(血箭)! 말 그대로 피화살이었다. 혈전에 섞여 암기로 날아가 는 물체는 동강낸 명강량의 약지였다. 거리가 너무 짧았고 배교에 괴이한 무공이 많다지만 이런 분사공( 噴射功)이 있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우제준의 당황해 하는 표정이 보였다. 명강량은 만족했다. 그의 몸 이 스르르 쓰러져 갔다. 우제준도 따라서 쓰러지리라 생각했다. 하지 만……. "좋은 경험이었다. 다른 자들은 방금 그 수법을 치졸하다고 욕할지 모르지만 나는 욕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를 죽여야 하는 일은 언제 나 쉽지 않지." 담백한 우제준의 목소리였다. 그의 가슴은 명강량이 뿌린 피와 그 가 흘린 피로 엉망이었다. 그는 가슴에서 명강량의 토막난 손가락을 뽑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요혈은 지킨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몸은 부유했고 혼백은 서둘러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한천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바람이여! 나의 혼을 붙들어 매어 다오. 나는 성녀를 지켜야 한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눈까풀은 점점 무거워지고 기 력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혼돈 속에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우제준이 가슴에 검을 찔러 넣기 위해 오는 모양이었다. 아니었다. "강량!" 한천을 울리며 다급하게 들려 오는 목소리……. "강량! 강량! 일어나세요!" 악약이었다. 명강량은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모든 통증을 덮어 버릴 정도로 가슴이 쓰렸다. '울고 있구나. 성녀는…….' 일어나서 악약을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통 몸을 말 을 듣지 않았다. 갑자기 어둠이 찾아왔다. 명강량은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하 지만 그는 아직 주검으로 남아 있지는 않았다. '악약, 운악약…….' 명강량은 혼돈 속에 성녀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그의 생각은 삶 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술에 만취한 사람처럼 띄엄띄엄 이어지고 있었 다. "강량! 강량! 일어나세요! 일어나요!" 악약의 목소리는 너무도 애절했다. 명강량은 문득 길을 떠나는 자신의 혼백을 발견했다. 사부의 노여 운 얼굴도 보였다. 사부는, 사부는, 자신이 죽음으로써 맡긴 책임을 꼭 지켜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지. 그렇지. 나는 죽을 수 없어!' 누워 있던 명강량의 몸이 크게 한 번 꿈틀댔다. 욱! 한모금의 선혈 도 토해낸 듯했다. 곧이어 그의 손가락도 가늘게 움직였다. "강량!" 악약이 명강량을 부르며 울음을 터뜨린 그 순간이었다. "으핫!" 명강량이 노호를 외치며 강시처럼 벌떡 일어났다. 무심하게 번들거리는 눈, 알 수 없는 입가의 미소……. 명강량은 두 발로 지면을 굳게 밟고 하늘을 받들 듯 신장도를 치켜 들었다. 우제준은 신형을 주춤거렸다. 그가 보기에 명강량은 실혼인(失魂人 )이 분명했다. "죽인다!" 그 실혼인이 파천황(破天荒)의 기세로 달려들었다. 다 죽어 가던 자가 벌떡 일어서 달려드는 것을 보고 우제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배교에 환혼대법(還魂大法)이 있는 줄 생각했 을 것이다. 어쨌든 우제준은 자신의 머리로는 그 같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환혼대법으로 회생했든 실혼인이든 다시 한 번 일어난 명강량의 공세 는 그가 투로에 모든 신경을 모아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 다. 쩡! 도검이 얽히며 두터운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났다. 명강량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우제준은 뼈마디가 저리는 통증에 몇 번이나 검을 놓칠 뻔했다. 그 힘에 밀려 투로는 점점 산만해 져 갔다. 반대 로 명강량의 무위는 더욱 강해졌다. 폭풍같은 기파에 우제준은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 같았다. 어디서 왔는가? 저 무서운 힘! 정말 알 수 없는 힘이었다. 한 번 더 싸워 본다면 그 힘의 정체를 알 수 있을지……. 하지만 화산파에는 환혼대법이 없다. 신장도의 금빛이 우제준의 산만해진 투로를 뚫고 뇌전처럼 파고 들 고 있었다. 쾅! 우제준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어느 순간, 우제준은 심장이 작열하는 고통을 느꼈고 상대가 원래 의 자리로 스르르 쓰러지는 것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우제준은 장검을 떨구며 쓰러지는 자신도 확인했다. - 강량, 일어나세요. 강량! - 강량, 일어나세요. 나와 함께 안락국에 가기로 했잖아요. - 광명신장을 만났어요. 나는 안락국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어요. 하늘로 숨어드는 길, 천잠로(天潛路)! - 우리는 천잠로를 따라 안락국으로 가는 거예요. - 강량, 일어나요. 일어나세요. 명강량의 몸은 따로따로 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악약이 무슨 말 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악약의 등에 팔을 올렸다. 체온이 느 껴졌다. 자신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악약은 살아 있음을 확인했기에 기분이 좋았다. 악약을 껴안았다. 신성(神聖)을 침범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앉은 명조가 그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호구(糊口)를 위해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그중 흑막(黑幕)은 살인을 청부(請負)받아 입에 풀칠을 했다. 흑막의 막주(幕主)는 방금 한 건의 청부를 받고 여러 생각에 고심 하고 있었다. 청부를 받았으니 가부(可否)만 내리면 될 일이지만 이 번 건은 그렇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의견 을 구하기로 했다. 그는 한 통의 서신을 써 전서구에 매달았다. 흑막의 전서구 중 가장 빠르고 멀리 나는 비둘기였다. 비둘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 제2권에서 계속 암왕 2 ☞ 차 례 ☜ ▶ 제10장 안락국(安樂國) ▶ 제11장 화령주(火靈珠) ▶ 제12장 관산(關山) ▶ 제13장 우중(雨中) ▶ 제14장 파랑(波浪) ▶ 제15장 혈무(血霧) ▶ 제16장 마화(魔火) ▶ 제17장 금역(禁域) ☞ 일러두기 ☜ * eBook에서는 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 글자가 있으므로 빈 공간이 생 길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10장 안락국(安樂國) 주르르르……. 교타방 서북로(西北路) 표두(　頭), 엄전(嚴田)은 흔들리는 뱃전에 기대 굵은 오줌발을 분하의 물줄기에 쏟았다. "어지간히 술을 마셨던 모양입니다." 표사(　士) 한 명이 씩 웃으며 다가왔다. 그는 엄전의 조(組)에 속 한 표사로 한충일(韓充溢)이라는 자였다. "술? ……오랜만에 성중(城中)에 들렀지. 술이나 마시고 있었을 것 같은가?" 엄전이 바지를 추스르며 돌아섰다. "계집의 살을 만져 본 지 몇 개월은 됐지. 어제 모처럼 계집의 사 타구니에 들어앉으니 빼기도 싫더군. 측간 갈 틈도 없었다." 그가 히죽거리며 뱃전에 엉덩이를 걸쳤다. "후후후…… 그러셨군요.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성중은커녕 집에 가본 지도 꽤 되는 것 같군요. 표두를 따라 옥문관(玉門關)까지 표행 (　行)을 갔다가 바로 이곳으로 왔으니……." 한충일은 은근슬쩍 쉴 틈 없이 분주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드러 냈다. "우리 교타방이 다른 표국들 보다 배로 즐거운 점이 있다면 결빙기 (結氷期)에 마조패(馬弔牌)나 만지며 퍼지게 노는 것이었지." "맞습니다. 그런 즐거움이 없었다면 굳이 물길 위의 표사 생활을 좋다 할 사람은 없었겠죠." "이해하게. 이게 다 배교놈들 때문이 아니겠나." 엄전이 교타방 표두의 신분을 나타내는 동패(銅牌)를 손가락으로 돌리며 한충일을 위로했다. "배교놈들 때문에 우리가 왜 이 난리를 부려야 합니까? 그들이 우 리에게 떡을 내놓으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엄동설한에 밤낮 없이 분하의 물줄기를 지키느라 지친 한충일이 뱃 전을 발길로 차며 불평을 터뜨렸다. "아무리 갓 표사 생활을 시작했다지만 강호에 대해 너무 모르는군. 표국이란 말일세. 필요하다면 흑산(黑山:산적들을 일컫는 강호 은어 )의 무리들은 물론 흑사회의 무리들까지 비위를 맞추어 두어야 하는 곳이지. 하물며 강호의 패주로 떠오르고 있는 유향경천문이 시킨 일 이야……." 엄전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쩝, 몰라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한충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만 더 참게. 부방주(副幇主)의 말로는 우리가 찾는 배교의 수 괴놈이 나타날 때가 오늘, 내일이라고 하니…… 그 동안에도 나타나 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도주했겠지." 엄전이 동패를 허리에 차며 말했다. "아무리 놈이 배교의 수괴라고는 하나…… 결국 배교도는 배교도 아닙니까? 배교도 한 놈 때문에 이 난리를 피워야 한다는 것은……." 한충일은 눈을 치켜 떴다. "모르는 소리하고 있군. 자네의 그 귀는 계집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달고 다니나. 내노라 하는 구대문파의 제자들도 놈의 칼 아래 고혼이 되었어." "예?" 한충일이 놀란 표정으로 엄전을 바라보았다. "행여 놈을 만나더라도 깝죽대며 나서지 말게." 엄전은 손칼로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그런 놈이었군요. 출신(出身)은 어디라고 하던가요?" "배교놈들 중에 강호에 자신의 내력(來歷)을 떳떳이 밝히고 다니는 놈들이 있던가. 알려진 게 있다면, 강량!" "강량?" "놈의 이름이지. 누가 지어 주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딱 들어맞는 이름이야." "대악인(大惡人)일수록 이름은 멋지더군요. 강량…… 하하하! 배교 놈들에게는 딱 맞는 말이겠군요. 그 놈들에게는 그 이상 강하고 어진 자가 없을 테니……." "강량이라는 말이 어디 그 뜻만 있는 줄 아나. 예전 삼황오제(三皇 五帝) 때 섭이(　耳)라는 나라가 있었지. 그 곳의 북해(北海)에 세 명의 신이 살고 있었다. 우강(禹强)과 구봉(九鳳) 그리고 마지막 하 나가 바로 강량이란 신이지. 사람의 몸에 호랑이의 머리, 팔뚝은 유 난히 길고 입에는 항상 뱀을 물고 다녔다고 하더군. 아마 사람께나 잡아먹었다지. 낄낄!" "아하! 원래 그런 뜻이었군요." 한충일은 무릎을 쳤다. "어쨌든 표두께서 말씀해 주지 않았다면 나는 멋모르고 놈에게 달 려들 뻔했습니다." 그가 존경의 염으로 엄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귀는 항상 강호의 소문을 향해 열어 두어야 한단 말일세. 우리 같이 뼈와 살이 무른 자들은 눈치라도 빨라야 제 명대로 살 수 있지. 큼!" 엄전이 가래침을 퉤 내뱉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충일은 포권을 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표두, 방금 우리가 수색했던 그 배 말입니다." 그가 문득 말문을 돌렸다. "부방주와 함께 올랐던 그 배 말인가?" "맞습니다. 그 배 주인이 누구입니까? 부방주도 쩔쩔 매는 것을 보 면 상당한 위세를 떨치는 자 같던데." "쯔쯔…… 아무리 변새(邊塞)를 떠돌던 자였다고 하지만 하남의 전 귀(錢鬼)에 대해서도 모르고 있었다니……." 엄전이 혀를 찼다. "아하! 그럼 그 자가 그 유명한 하남의 거부, 저파룡 양백입니까?" "맞았어. 양백은 우리 교타방의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고객(顧 客)이다. 당연히 부방주가 그를 대하는데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 "상선(商船)도 아니고 유선…… 장삿길에 나섰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겨울에 유람을 나온 것은 더욱 아닐 테고…… 도대체 분 하까지 왜 배를 띄웠답니까?" "여기저기 둘러 볼 곳도 있고 만나 볼 사람도 있다더군." "까닭 없이 불쑥 나타난 것을 보니 하남으로 모자라 산서까지 상권 (商權)을 확장시킬 모양이군요." "어찌 내가 양백의 마음을 알랴. 하지만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 는 것 같더군. 양백이 왔다는 소문에 산서의 상인들은 잠도 이루지 못하고 있을 것이야." "젠장! 나는 언제 그만한 거부가 되어 보나." 표사, 한충일은 보잘 것 없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을 지었다. "쯔쯔…… 칼밥을 먹으며 거부를 꿈꾸다니…… 언감생심(焉敢生心) ! 이대로 살다 끝이 좋기만을 바라게. 칼밥을 먹는 자 치고 끝이 좋 은 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낄낄낄!" 엄전이 뱃전에서 펄쩍 뛰어내리며 말했다. "싹수가 그렇게 뻔한 것을 알면서 표두께서는 왜 이 바닥을 떠나려 하지 않으십니까?" 한충일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배운 재주가 칼질이고 당장 호구를 의지할 곳도 칼뿐이다. 이 바 닥을 떠나 봐야 결국 갈 곳은 흑산뿐! 흑산 보다야 이곳이 백 배 낫 지. 어이!" 엄전은 한 소리 고함과 함께 기지개를 펴며 팔을 벌렸다. "좋은 바람이다." 그가 훈풍(薰風)에 몸을 맡겼다. 계절의 전이(轉移)는 너무도 놀라웠다. 며칠 전만 하더라도 한바탕 폭설과 함께 삭풍이 천지를 꽁꽁 얼려 놓고 지나간 터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가온 이 훈훈한 기운은……. "정말 지긋지긋하게 추웠던 겨울이었습니다. 이제 봄이 오려는 모 양이군요." "아니! 아직 봄을 이야기하기에는 이르지. 한두 번의 삭풍을 더 견 뎌야 화초도 싹을 틔울 것일세. 커흠!" 엄전이 기침을 하며 뒷짐을 졌다. "흰소리를 했더니 목이 컬컬하군. 선실에 가서 분주(汾酒)로 목이 나 축이세." 그가 성큼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한충일은 남풍을 맞으며 북행 중인 양백의 유선을 부러움 섞인 눈 길로 잠시 바라본 후, 엄전을 뒤따랐다. * * * 바람을 섬전처럼 넘나드는 표범, 남궁가(南宮家)의 신성(新星), 유 향경천문 현무당주, 남궁기의 무심한 눈빛에 한 줄기 이채가 번뜩였 다. 장방형의 분지, 그 곳에 웅크리고 누워 바람에 몸을 표표히 씻기우 고 있는 한 구의 시신! 주검으로 놓여 있는 그는 남궁기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자였다. 구대문파 중에서도 명문 대파 화산파, 그 화산의 제자 중에서도 손가 락으로 꼽히는 자, 우제준! 바로 그였다. 뒤틀어진 근골, 피부는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었고 그 사이로 핏 줄이 터져 피가 엉켜 있었다. 우제준이라는 풍운고수(風雲高手)의 죽음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제준을 절명(絶命)에 이르게 한 것은 가슴에 길게 그어진 상처와 심장의 파열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제준은 근맥과 혈맥에 뒤틀어 져 이미 반은 죽은 목숨이었다. 등골에 전율이 느껴질 정도의 패악(悖惡)스런 힘! 남궁기는 우제준의 시신 주변을 한 바퀴 돈 후, 뻣뻣하게 선 자세 에서 가만히 머리를 숙였다. "믿지 못하겠군. 우리가 쫓던 자가 그런 자였다니……." 그가 발끝으로 흙을 툭툭 차며 중얼거렸다. 만약 우제준의 몸에 경미하게 남은 삼양장의 흔적이나 어지러운 발 자국 속에서 군접환영보의 족적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는 우제준을 죽인 자를 다른 산의 이물(異物)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위의 흔적들은 우제준을 죽인 자가 누구인가를 명명백백( 明明白白) 밝혀 주고 있었다. 배교의 수괴, 명강량! 마음속의 부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앞뒤를 볼 때 마옹의 짓이 틀림없는 듯 했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서 있던 남궁기는 우제준의 곁에서 물 러나 널찍한 바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우제준은 약한 자가 아니다. 이제껏 마옹의 손에 죽은 자들과 격이 다른 자였다. 남궁기는 검신을 달깍거리며 무슨 생각에 골몰했다. 마옹과 자신의 실력을 가늠이라도 하는지……. 바람은 소소히 불고 모처럼의 양광(陽光)은 몸을 권태롭게 할 정도 였다. 먼발치에 서 있던 현무당의 수하들도 그 양광에 취해 절로 긴 장감을 풀어 가는 중이었다. 순간, 졸음이라도 조는 듯 앉아 있던 남궁기가 갑자기 벌떡 일어섰 다. 신형은 바람을 가르고 그의 검은 이미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 파파팟! 팔방풍우(八方風雨)로 휘몰아치는 검! 원래 남궁가의 검은 길이가 여타의 검보다 짧고 검폭도 좁은 편이 다. 검의 현묘(玄妙)함에 도의 실용성(實用性)까지 아우르다 보니 생 긴 변화……. 투로도 찌르는 수법 못지 않게 베고 흘리는 수법도 많아 검법인지 도법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특히 남궁기의 검법은 그 변화가 더 심했다. 무정형(無定形)으로 꿈틀대는 검초! 파팟! 팟! 수를 더하자 남궁기의 검은 뿌연 흙먼지 속에 검광만 번뜩였다. 남 궁가의 원로들도 놀랄만한 검초가 남궁기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사실 남궁기의 검법은 이미 남궁가의 검법이 아니었다. 그는 남궁가를 떠난 후, 한 명의 위대한 스승을 만났었다. 능운공작 단원홍! '문주…….' 그의 자존심에 유일하게 무릎을 꿇게 만든 자! 그 위대한 스승은 단 몇 마디 말로 남궁기의 검에 대한 새로운 눈 을 뜨게 만들었다. 웬만한 자라면 우제준의 죽음에 대경실색(大驚失色)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기는 우제준의 죽음에 담담했다. 무정검(無情劍)으로까지 불려지는 그의 냉랭한 성품 탓도 있었지만 바로 문주를 만난 후 얻게 된 확고한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는 문주 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비표(飛豹)에 어울리는 날개를 달게 된 것이다 . 쐐액! 천변만화(千變萬化)로 휘몰아치던 남궁기의 검이 섬전처럼 천지를 양단했다. 흙먼지는 아직 분분히 휘날리고, 남궁기는 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 가 팔짱을 낀 채 희미하게 남은 마옹의 발자국과 우제준의 발자국, 그곳에 짝을 맞추듯 새롭게 더해진 자신의 발자국에 눈길을 돌릴 때 였다. "좋았어!" 짝짝짝! 박수 소리와 함께 왜소한 인영 하나가 남궁기를 향해 걸어 왔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던 남궁기는 이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문사 차림의 옷에 술 달린 띠로 멋을 부리며 나타난 자는 백호당주, 당예였다. "명강량의 짓이 맞아?" 당예가 큰 키에 거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남궁기에게 물었다. 남궁기는 콧날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강량이라는 자는 싸울수록 강해지는 모양이군." 당예가 붉은 입술에 한숨을 달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강하리라 생각하지 못했어." 남궁기가 어눌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서 겁이 났나? 싸워 보니 어떻던가?" 당예가 어지러운 발자국들을 둘러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남궁기는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현무당주께서는 명강량이라는 자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군." 당예가 권태롭게 중얼댔다. 남궁기가 그런 당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나보다 앞서간 줄 알았지. 어디 갔었던가?" "비응보에 잠시 있었지. 행여 비응보에 나타날 줄 알았더니 이곳에 서 우제준의 목을 따고 있었군." "그래서 늦은 게로군." 남궁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떻게 할 참인가?" 당예가 물었다. "현무당이 나서야지." "앞장은 앞에 서겠다고 말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앞에 서 있는 자 의 몫이지." 당예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선두에서 명 강량을 추적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남궁기는 당예의 고집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명강량이 목 벤 자의 가치가 높을수록 명강량의 목에 걸린 가치도 높아지는 법! 명강량이 녹녹치 않은 상대라는 생각과 비례해서 그만큼 호승지심 도 더욱 치솟고 있을 것이다. "그럼…… 아!" 등을 돌리던 당예가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는 듯 철필로 손바닥을 탁 치며 다시 남궁기에게 시선을 던졌다. "잊을 뻔했군. 주작당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문주께서 출관(出關) 하셨어." "삼양장의 화독(火毒)을 벌써 뿌리 뽑았다는 말인가? 빠르군. 아무 리 문주라 해도 족히 일 년은 요양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아직 내상을 완전히 다스리지는 못했어. 자금성(紫禁城)의 털 없 는 노물이 불러 서둘러 출관하셨지." 당예가 옅은 미소를 입가에 달고 말했다. "일이 자꾸 늦어지니 동창의 그 늙은 환관까지 나선 모양이군." 남궁기는 쓴맛을 다셨다. "잘 모르겠지만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어. 지금 남경(南京)의 안 택(安宅)에 내려와 있다고 하더군. 문주께서는 그곳으로 향하는 중이 다." "문주께 죄송할 따름이다." 남궁기의 안색이 흐려졌다. "어쨌든 문주는 출관하셨어. 이왕 강호에 발을 들였으니 다시 폐관 (閉關)에 들어가지는 않을 테고…… 죄송한 일이야 이미 저질러 놓은 것! 더 이상 문주께 창피를 당하기 전에 서둘러 맡은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다." 당예는 철필을 놀리며 어깨를 폈다. "나는 이만 가겠어. 좋은 소식 있기를……." 그가 발걸음을 돌렸다. 남궁기는 총총히 걸어가는 당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발끝으 로 흙을 툭툭 찼다. "당예!" 그가 당예를 불렀다. 당예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허리를 짚고 서 무슨 일이냐는 듯 남궁기를 바라보았다. "……조심하게. 우리가 쫓는 자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남궁기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당예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가 냉랭한 시선으로 남궁 기를 쏘아본 후, 휙 발걸음을 옮겼다. 남궁기는 얼굴을 매만졌다. "정말 대하기 힘든 친구군." 그가 탄식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 * - 명강량은 채홍색(彩虹色) 운무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첩첩이 쌓인 산, 좁은 험로(險路)! 명강량은 그 길을 따라 셀 수 없을 정도의 산을 넘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을 뿐이었다. 길은 끝이 없지만 누구나 정해진 목적지에서 길을 멈춘다. 명강량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저갱(無底坑)으로 놓여 있는 깊은 석굴(石窟)! 이수(異獸)의 울음이 긴 메아리로 들려 오는 음습한 곳이었다. 명 강량은 먼 산을 바라보듯 석굴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그는 듣고 있었다. 이수의 울음과 숱한 환청들 속에서 뚜렷하게 들리는 카랑한 목소리 를……. "오라!" 명강량은 그 목소리를 따랐다. 석굴은 끝없이 깊은 것 같으면서도 깊지 않았고 사위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깜깜했으나 어둡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 그 굴의 끝에서 자신을 부르는 자……. 명강량은 한 사람을 만나고 있었다. 팔 척에 가까운 키, 딱 벌어진 어깨, 무릎까지 길게 은발(銀髮)을 늘인 벽안의 노인이었다. "오라! 어서 오라!" 벽안의 노인이 소리쳤다. "오래 전부터 너를 기다렸다. 크카카!" 그가 광소를 터뜨리며 눈빛을 섬광처럼 빛냈다. "으하하하! 하하하……." 노인의 웃음은 석굴을 단번에 무너뜨릴 듯 사방을 윙윙거렸고 명강 량은 처음 길을 걸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무감하게 그 속에 서 있었다. 꿈이 현실로 돌아오는 그 길목에서 명강량은 석굴에서 만난 그 노 인이 누군가를 잠시 생각했다. 벽안의 노인…….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도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도들 중에는 색목인(色目人)들도 적지 않게 있다고 한다. 그들은 대체로 영남(嶺南)의 해안이나 감숙의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은 성령의 불이 정통(正統)으로 이어진 자들은 그들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같은 교를 신봉하기는 하나 오히려 사이가 좋지 않아 교류가 전무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명강량은 벽안의 이족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 구도 만난 적이 없는 듯했다. 굳이 벽안인의 흔적을 찾으라면 성녀……. 성녀의 자리는 핏줄로 이어지니 오랜 세월 속에서도 성녀에게는 처 음 성령의 불을 중원에 들인 벽안 성모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으로 벽안의 노인을 꿈에 그렸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 예전에 길거리 패로 떠돌 때 무일(無一)이란 노인이 들려준 말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때 자신의 이름은 무오(無五)였다. 명강량이라는 이름은 사부가 교에 발을 들일 때 지어 준 이름이다. 무오는 말했었다. '그런 꿈을 꾸다니…… 그 꿈은 네놈의 전생인가 보다. 생전에 보 지 못한 사람을 보고 겪어 보지 못한 일을 꿈에 겪은 것은 전생(前生 )의 기억이 되살아나서이지. 아마 네놈은 전생에 제법 부자였던가 보 다. 부자질을 더럽게 해서 지금은 길거리 패로 떠도는지 모를 일이지 . 겔겔!' 누군가의 꿈을 풀이하며 말했던 것 같다. 명강량은 그 기억을 떠올리며 실소를 흘렸다. 이미 지난밤의 꿈을 더듬는 것은 뒷전이었다. 꿈은 꿈! 명강량은 꿈 하나로 하루를 노닥거리던 옛날이 생각나 쓴웃음을 지 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한가로움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를 때 쯤 그는 간밤의 꿈을 모두 잊었다. 가슴 전체가 불타는 통증이 더 빨리 그 꿈의 기억을 잊게 했다. 명 강량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우제준의 태을전진미리장에 가로막혀 역류한 삼양장의 열기가 가끔 들불처럼 일어나 전신을 들끓게 했다. 운기행공으로 화기를 억눌러야 했지만 명강량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화마가 휩쓸고 지나기만을 기다릴 뿐……. 분명 각기 떨어져 잔 것 같은 데 성녀는 어느 틈에 그의 팔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몇 개월을 같이 지냈지만 이렇게 가까이 성녀를 대하기는 처음이다 . 그러나 이상하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팔을 뺀다고 성녀가 잠에 서 깰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대로 있었다. 한동안의 지리한 통증이 끝난 후 명강량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성 녀를 바라보았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성녀의 얼굴은 초췌할 대로 초췌했다. 우제준과의 승부로 의식을 잃었었다. 다시 의식을 찾았을 때는 오 일여가 훌쩍 지난 후……. 나귀에 실려 가는 자는 바로 그였고 나귀를 끄는 자는 성녀였다. 밤에는 나귀를 끄느라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고 낮에는 활생법(活生 法)으로 자신을 치료하느라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그 못 다한 잠의 뿌리를 뽑으려는지 성녀는 홍동의 외진 객방에 여 장을 풀자마자 바로 수마에 몸을 맡겼다. 이른 저녁부터 새벽이 오기까지 이어지고 있는 성녀의 잠! 명강량은 자세를 편하게 한 후, 운기행공을 대신하여 관정법(灌頂 法)으로 자신의 상처를 살폈다. 정수리에 쏟은 한 가닥 빛살로 그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을 더듬었다. 생사를 오간 것치고는 내상이 그다지 심한 편은 아니었다. 성녀의 손끝에는 만물(萬物)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유향경천문의 문주라는 자에게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부상을 당 했던 사부가 성녀와 자신을 위해 적들을 태호로 유인할 수 있었던 힘 도 성녀가 가진 놀라운 치유력 때문이었다. 그 역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건만 성녀의 활생법 덕으로 내상이 벌써 반 이상 치료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런 놀라운 성녀의 능력도 잘려진 뼈와 살은 되살릴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좌수를 가만히 들며 손바닥을 폈다. 뭉툭하게 잘려 나간 약지! 그는 쓴웃음을 흘리며 주먹을 꽉 쥐었다. 우제준 같은 자들이 강호에 한둘이 아닌 것은 자명하다. 다음에 그 를 찾는 자는 우제준 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을 엄정히 볼 필요가 있었다. '끝까지 성녀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나의 고집일 뿐이다.' 명강량은 자신의 능력을 시인(是認)했다. 그의 눈빛이 무저갱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명강량은 사부가 죽은 후, 몇 개월을 돌이켰다. 지긋지긋한 어둠의 날들! 하지만 전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 듯 했다. 성녀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기 전에는 성녀와 떨어진다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명강량은 성녀의 곁에서 졸고 있던 명조를 가만히 손바닥 위에 올 렸다. - 강량, 천산의 비처(秘處)에는 우리 일족(一族)의 숨겨진 낙원(樂 園)이 있어요. 산이 사면으로 에워싸 주위의 발길과 바람을 끊고 햇 살만을 받아들이는 곳! 땅위의 안락국, 바로 그곳이에요. 초대 명옹께서 천산을 지나며 우연히 발견한 곳이지요. 초대 명옹께서는 이 땅에 안락국이 들어서는 것을 영겁(永劫) 이후 의 일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자신의 손으로나마 안락국을 만들고 그것을 보고 싶어했어요. 중원에 도착한 후에도 몇 년 동안 천산을 오가며 신수(神樹)와 기 화(奇花)를 심고, 전각을 세우고……. 안락국은 그렇게 만들어진 거예요. 나에게 안락국으로 가는 길, 천잠로를 이야기해 준 분은 광명신장 이었어요. 그 분은 천잠로가 전해지는 것은 천 년만의 일이라 했어요 . 광명신장은 갑자기 왜 나에게 천 년의 비밀, 천잠로를 말해 주었을 까요? 아마 명왕의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겠죠. 오갈 데 없는 우리의 처지 를 가엾게 여기셔서 광명신장으로 하여금 천잠로를 알려준 것일 거예 요. 강량, 이제 우리는 초대 명옹이 오갔던 천잠로를 따라 안락국으로 가는 거예요. 성녀의 마지막 말은 힘이 없어 보였다. 명강량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고현의 밀회에서 성녀가 무엇이라 했던가. 모든 자들이 안락국에 갈 수는 없다. 모두 안락국에 갈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안락국에 갈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 사이 안락국이 갑자기 커진 것도 아닐 테고 교도들의 수가 손가 락으로 셀 정도로 급감한 것도 아니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안락국은 천 년의 비밀 속에 묻혀 있던 신비지처(神秘之處) ! 말은 않고 있지만 광명신장은 틀림없이 성녀를 제외한 그 누구도 갈 수 없는 장소로 안락국을 말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녀는 안락국에 가자고 한다. '갈 수 없음을 알지만 그 길을 떠올리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이기 때문…….' 명강량은 성녀의 마음을 그렇게 이해했다. '나는…… 안락국에 가지 못한다.' 안락국에 더 더욱 갈 수 없는 자는 바로 명강량 자신이다. 그는 교와 교도들을 끝까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는 호교신장이었다 . 그래서 하계에 있어도 결국 갈 수 없는 땅, 안락국! 하지만……. 명강량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곳에 자신은 가지 못하더라도 성녀는 가야 한다. 안락국! 그렇게 은밀한 곳이라면 세상의 분진이 가라앉을 때까지 성녀가 충분히 몸을 숨길 수 있을 터……. 그것이 며칠 내내 고민해 오던 생각의 종국(終局)이었다. 간단한 결론이다. 그 결론에 며칠을 고민했다는 것은 심란한 그 무 엇이 있었다는 증거! 명강량은 부정하지 않았다. 헤어지는 일도 가슴 아픈 일이고 아무리 안락국이라 하지만 그 먼 길에 성녀를 남겨 두고 와야 하는 일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지금 성녀를 지킬 유일한 방도는 그 길뿐! 명강량은 팔에서 성녀를 가만히 빼어 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옷을 걸치고 신장도를 허리에 찼다.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야 할 금의는 깨끗했다. 산서의 계곡을 흐르는 물은 얼음장처럼 차다. 성녀가 옷에 묻은 피 를 지우기 위해 작은 손을 호호거리며 옷을 빨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객방의 문을 나서면서였다. 푸드드득! 방안에 갇혀 있다시피 하던 명조가 좋아라며 그를 따라 나섰다. 명강량은 우보(牛步)로 천천히 객방 뒤에 자리잡은 산을 올랐다. 가끔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털기도 하고 여명에 반짝이는 분하의 물 줄기에 눈을 돌리기도 했다. 산중턱에 이르러 명강량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가슴을 쭉 폈다. 어떤 일이던 결론은 내리기까지 힘들어 하지만 한 번 결론을 내리 면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이 그의 장점! 산을 오르는 동안 모든 것을 정리한 후였다. 이제 몸만 움직여 주면 되었다. 안락국! 당장이라도 그곳을 향해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서너 달 후에 무산에서 대전이 열린다. 모처럼의 대전에 호 교신장인 그가 빠질 수는 없었다. 성녀를 안락국까지 모실 다른 사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쉽게 눈에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성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불안 했다. 그리고 성녀는 안락국에 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억지로라도 안락 국으로 성녀를 인도할 사람은 자신뿐인 것 같았다. '앞으로 사오 개월…….' 성녀를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다. 그의 눈빛이 다시 침잠 되었다. 순간, 명강량은 스스로에게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강량, 잊지 마라! 너는 천 년 배교의 호교신장! 성녀는 안락국에 보낸다. 그리고 너는 호교신장으로 교도들과 함께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을 것이다.' 그가 약해지는 스스로를 질책했다. 여명 속에 빛살은 점점 짙어 갔다. 명강량은 객방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산기슭을 내려올 때였다. 분하의 뿌연 물안개를 헤치며 화려한 한 척의 배가 포구(浦口)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높게 매달린 돛에 이글거리는 일광(日光)을 그린 배였다. 그 배를 보며 명강량은 자신이 홍동에 온 이유를 찾았다. 성녀를 안락국에 보내는 일로 고심하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었 다. 화려한 일광은 하남 금적보의 문양이다. 그를 찾아 하남 명두, 양백이 오고 있었다. * * * 입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는 소문들은 천리마(千里馬) 보다 더 발 빠르게 천하를 치닫는 모양이다. 우제준의 죽음! 화산파가 그 소식을 접하게 된 것도 문호도 알 수 없는 자가 소문 이라며 산문(山門)에 툭 던지고 간 말 때문이었다. 화산파 장문인, 숭양진인은 제자들로 하여금 사실 여부를 확인하라 고 명했다. 제자들이 반신반의하며 산문을 나설 때였다. 마옹을 처치하기 위해 분하에 파견된 제자 한 명이 급보를 들고 달 려왔다. 화산에 우제준이 죽었다는 믿지 못할 소문이 전해진 지 반 시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산문에 이른 그 제자는 대지급(大至急)을 외치며 소리쳤다. 급보는 비보(悲報)였다. 소문이 맞았다. 우제준이 죽은 것이다. 하오문의 수괴, 마옹이라는 작자에 의해……. "허어, 그런 일이……." 언제나 평상심을 잃지 않는 숭양진인도 아끼는 제자의 죽음에 잠시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곧 담담하게 그의 사제를 불러 말했다. "운대봉(雲臺峯)에 있는 그 아이를 불러오게." 화산의 서쪽 선인봉(仙人峯)과 동쪽 낙안봉(落雁峯)은 홀로 우뚝하 다. 그에 비해 화산파가 있는 연화봉(蓮花峯)만은 유독 세 작은 봉우 리들이 떠받들 듯이 시립해 있다. 그 작은 봉우리 중 하나가 운대봉이다. 각진 얼굴이 강인한 인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낡은 도포의 사 내가 운대봉을 소소히 내려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발걸음을 행운유수(行雲流水)로 옮기던 사내는 이내 연화봉까지 그림자를 드렸다. "사형!" "이사형(二師兄)!" 산문을 지키던 화산의 제자들이 사내가 나타나자 일제히 반색을 하 며 고함을 질렀다. 운대봉에서 연화봉으로 발을 들인 낡은 도포의 사내는 바로 숭양진 인의 들째 제자, 오세악이었다. 작금 화산의 제자들 가운데 후기지수로 가장 검에 뛰어나다는 자! 다른 구대문파의 명숙들 조차 후기지수 중 첫째, 둘째로 인정해 주는 자였다. 그는 홀로 운대봉에 파묻혀 있다 근 이 년만에 연화봉에 발을 들이 고 있었다. 셋째 제자, 우제준의 나이는 삼십 대 중반이다. 하지만 오세악의 나이는 많이 보아도 서른……. 사실 오세악의 나이는 넷째, 탁중평(卓中平) 보다 어렸다. 하지만 입문(入門)은 누구보다 빨랐다. 이제 장년(壯年)을 바라보는 대사형 보다 빠른 정도…… 핏덩이로 강보(襁褓)에 쌓인 채 화산에 몸을 담 았으니 대사형은 못 되어도 둘째는 당연한 자리였다. "이사형! 삼사형이……." "마옹의 짓이라 합니다!" 산문을 지키던 제자들이 한 소리씩 내뱉으며 오세악 주위로 모여들 었다. 오세악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부는 운대봉에 있던 그를 불렀던 것이다. 오세악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무슨 자랑거리라도 생긴 줄 아느냐?" 그가 쉰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오세악의 낮은 목소리에 산문을 지키던 제자들의 목이 자라목처럼 움츠려 들었다. 오세악은 원래 어릴 때부터 화산의 산문 안에서 엄격한 규율만 익 히고 컸기 때문에 성격이 얼음장처럼 차가워 사형제 간의 잔정을 몰 랐고 사제들의 조그마한 잘못도 용납하지 않았다. 산문을 지키던 제자들은 오세악의 한 소리에 그제야 이사형의 차가 운 성품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부님은?" 오세악이 물었다. "상궁(上宮)에 쭉 계시다가 방금 옥녀지(玉女池)로 내려가셨습니다 ." "알았다." 오세악은 산문을 들어섰다. 옥녀지로 가는 길은 다시 산문을 내려가 산기슭을 돌아야 한다. 오 세악이 바로 본전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분향(焚香)을 위해서임을 안 제자 한 명이 눈치 빠르게 소리쳤다. "삼사형과 칠사형의 위패(位牌)는 노군전(老君殿)에 모셔져 있습니 다." 오세악은 멈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곱째가 죽은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명일도?" "그…… 그렇습니다. 칠사형 역시 마옹이……." 산문을 지키던 제자 한 명이 우물거리며 말했다. 오세악은 절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켰다. 그가 갑자기 발걸음을 휙 돌렸다. 그는 산문을 들어설 때와 마찬가 지로 짜여진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오세악은 옥녀지로 바로 가는 길이었다. 우제준의 죽음을 들었을 때 오세악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 다. 우제준을 죽인 자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바로 우제준에 대한 분 노였다. '한낱 배교 애송이의 손에 죽어 문파의 이름을 더럽히다니…….' 비록 그가 사형이기는 하나 나이 때문에 우제준에게 조금 저어하는 바는 있었다. 그럼에도 우제준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런 치욕을 안 고 왔다면 그 저어함도 마다 않고 우제준에게 경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자! 산문에 들어서기까지 최소한 향 몇 대는 피워 망자에 대한 예는 지 켜 주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일곱째, 척명일까지 배교도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자 그런 마음은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사제들이 보는 앞에서 우제준과 척명일을 욕하지 않은 것만 해도 죽은 자에 대한 예우로는 충분했다. 산길을 돌며 오세악은 탄식을 터뜨렸다. "마옹! 네놈이 내 칼에 목이 날아간다고 해도 이미 떨어진 화산의 명예…… 주워 담기 힘들겠구나." 요람(搖籃)으로 자란 사문, 그 때문에 사문의 명예를 결백할 정도 로 아끼는 그였다. 사부, 숭양진인은 포행(匍行)으로 옥녀지를 거닐고 있었다. 오세악은 그 뒤에 비스듬히 서 숭양진인을 따랐다. 오랜만에 만나는 스승과 제자였지만 그들의 만남은 담담했다. "양류(楊柳)에 물이 오르는구나." 숭양진인이 운을 뗐다. "강남에는 벌써 매화잎이 날리고 있을 겁니다." 오세악도 계절 타령을 했다. "운대봉의 재미는 어떻더냐?" "……." "말이 없는 것을 보니 제법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럼 어디 ……." 숭양진인이 느닷없이 장권을 내밀었다. 느릿하게 다가오는 숭양진인의 손그림자에 오세악은 천 근의 압박 감을 느꼈다. 태청강기(太淸　氣)가 실린 죽엽수였다. 같이 내력으로 부딪힌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 오세악은 재빨리 호흡을 삼킨 후 장권을 비산(飛散)했다. 타타타타탁! 오세악의 권장이 숭양진인의 일 권(一拳)에 부딪혀 갔다. 이형권과 이십사수나혈비기(二十四手拿穴秘技)를 섞어 후려치는 오 세악의 손놀림은 헝체가 없을 정도로 빨랐다. 그는 숭양진인의 손끝에 실린 태청강기의 힘을 섬전 같은 손놀림으 로 수십 번 짧게 끊어침으로써 약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숭양진인의 손은 여전히 우악스럽게 그의 심장을 노리며 전 진해 오고 있었다. 오세악은 검미를 꿈틀댔다. "핫!" 그가 한 소리 고함과 함께 주먹을 연이어 내질렀다. 딱! 딱! 딱! 딱!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오세악의 안색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하지만 그가 내지르는 주먹의 힘은 배로 늘어나고 있었 다. 목구멍까지 치오르는 피비린내를 삼키며 오세악이 일곱 번째 주먹 을 휘둘러 갈 때였다. "그만!" 숭양진인이 금나수로 오세악의 공세를 차단하며 두 걸음 물러섰다. "구소신공(九　神功)을 익혔구나." "부끄럽습니다." 오세악은 고개를 숙였다. 구소신공은 아홉 번 연이어 펼치는 무공으로 한 초식이 더해질 때 마다 그 힘이 배가 되는 특징이 있다. 내력 차가 월등한 자를 상대하기에는 그만한 무공이 없었으나 모두 익히기는 꺼려했다. 최후의 몇 초식에서는 잠력까지 끌어내야 하므 로 자칫하면 진원진기까지 크게 손상되기 때문이다. 명문의 제자가 진원진기의 손상이라는 위험까지 감수하며 승부에 연연하는 모습도 별반 좋아 보이지 않기에 구소신공은 화산파 내에서 점점 이름을 잃어 가고 있는 무공이기도 했다. "세악, 만약 실을 짜는 여직공(女織工)이 실로 변해 버린다면 그 여직공은 실을 짤 수 없고, 목수(木手)가 나무로 변해 버리면 그 목 수는 목기를 만들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검을 든 자가 검이 되어 버리 면 검사(劍士)는 검을 다스릴 수 없다. 무슨 뜻인 줄 알겠느냐?" 이 년의 세월 동안 오세악의 호승지심은 구소신공까지 넘볼 정도로 더 늘어난 듯했다. "예전에 여러 사숙들로부터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싸움 질은 잘해도 대기(大器)는 이루기 힘들 것이라고……." 오세악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누가 뭐라도 자신의 길을 고집하겠다는 태도였다. 숭양진인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군전에는 가 보았느냐?" "가 보지 않았습니다." 오세악이 냉랭하게 말했다. "삶의 저 너머는 시간의 흐름도 없는 곳! 빨리 찾아 왔다고 좋아하 지도 늦게 왔다고 싫어하지도 않을 것이다. 분향은 일을 끝낸 후 천 천히 하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오세악이 머리를 숙였다. "예전에 사파에 오흉이라 부르던 걸출한 다섯 명의 고수들이 있었 지. 철심흑사 곽부, 마옹 이정인, 무외도 심여덕, 흡룡곤 모태명, 왜 수 상유…… 모태명과 상유는 특별히 말 할 것 없는 자이기는 하나 곽부와 이정인은 정말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다. 지금의 마옹은 당연 히 그 이정인의 제자이지." "……." 오세악은 사부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신중하기로 따지면 셋째, 우제준만 한 자는 없을 것이다. 무공도 얕지 않다. 그런 그를 죽일 정도니 마옹의 실력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세악은 일찍부터 검의 현묘한 도 운운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길이 얼마나 멀고 험하며 대성(大成)을 이룰 확률 또한 얼마나 적 은가를 사숙들과 사숙조들을 통해 어릴 때부터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검끝은 비검박투(比劍搏鬪)를 택했다. 사숙부들이 가르쳐 준 검로를 따라가는 대사형이나 우제준 등이 훗 날에 자신을 몇 배 능가할 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세악은 우제준과 자신의 무공이 비교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자 신의 자만심 때문만이 아니라 사숙부들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상대를 얕잡아 보지 않는 마음은 검을 든 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 어야 할 마음이다. 당연히 마옹을 가볍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사 부의 말에 안색을 찌푸린 것은 사부의 마음에 노파심까지 들도록 만 든 우제준과 척명일이 생각할수록 괘씸해서였다. "다녀오너라." 숭양진인이 그런 오세악을 담담히 바라보며 말했다. 오세악은 포권으로 읍을 한 후,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빠른 걸음으로 화산을 내려갔다. 오세악의 그림자가 화산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 숭양진인을 향해 초 로(初老)의 도장이 다가왔다. 그는 숭양진인의 사제 청양도장(淸陽道長)이었다. "장문 사형, 마옹이라는 아이를 처치하는 데 세악까지 내려보낼 필 요가 있었습니까?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고 다른 문파들이 비 웃지나 않을까 염려됩니다." 청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준이 죽었다는 소식은 다른 산에도 전해졌을 것이다. 소식을 들 은 자들은 그제야 하나, 둘 숨겨 두고 아꼈던 제자들을 강호에 내 보 내겠지." "……." 청양은 숭양진인의 서답(西答)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근자에는 비무대회(比武大會)가 없었다." "비무대회가 언제나 각 문파 간 불씨를 남기며 끝나기 때문에 없애 버리는 게 낫다고 합의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랬지. 그래서 그 덕분에 몇 십년 간 각 문파간의 우열을 논할 기회가 없었던 게야. 그런데 이제 본 문의 제자들은 물론 무당 제자 들의 목까지 줄줄이 꿴 마옹이란 아이가 나타났어. 그 아이를 처치하 는 문파에게는 어떤 영광이 돌아가겠나?" 청양은 숭양진인의 말에 그제야 사형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렇군요. 만약 다른 문파의 제자가 마옹을 처치하면 우리는 은연 중에 그 문파에 제자들의 원수를 갚아 준 은혜를 지는 격이 되는군요 . 또한 우리 제자들이 처치하지 못한 자들을 다른 문파에서 처치했으 니 본 문의 위신도 크게 떨어질 테고……. 별 것 아닌 일인 줄 알았 는데……." "별 것 아닌 일은 맞네." "예?" "마옹이란 아이를 우리가 처치하지 못하면 조금 체면 상하는 일은 생기겠지. 하지만 그 정도 체면을 감내 하지 못할 정도로 화산의 도 량이 좁은 것은 아니네." "그럼 다른 뜻이.……." "세악이 마옹을 처치한다고 해서 이미 떨어진 본 문의 체면이 서겠 나? 내가 세악을 보낸 뜻은 마옹을 처치하기 위해서만이 아닐세. 사 제, 세악은 유난히 호승지심이 강한 아이지. 마옹의 목만 들고 돌아 오지는 않을 것일세." 숭양진인이 뒷짐을 지며 옥녀지의 잔잔한 수면 위로 눈길을 돌렸다 . 청양은 사형의 생각을 읽기 위해 분주했다. "아!" 잠깐 동안 반백의 수염을 쓸며 생각에 잠겨 있던 청양이 탄사를 터 뜨렸다. 그는 사형, 숭양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사형, 숭양의 마음은 언제나 옥녀지의 물결 같이 잔잔하다. 세간의 일을 전혀 개의치 않을 것 같은 초연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금 청양은 사형의 다른 모습을 보고 있었다. 본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세간의 시비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달 려드는 사형의 냉엄(冷嚴)한 태도! 청양은 사형, 숭양의 어깨에 매인 일 문(一門)의 수좌(首座)라는 짐을 다시 느꼈다. 오세악은 막아 둔 물과 같다. 박투를 위해 익힌 검! 비무행(比武行)을 벌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을 것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그 생각에서 청양의 머리 속에 언뜻 떠오른 자는 유향경천문의 문 주, 능운공작이라는 자였다. '만약 세악이 능운공작, 단원홍이라는 자에게 비무를 요구하고 그 에게 이긴다면…….' 그렇게 될 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렇게 된다면 마옹의 목 백 개를 베는 것보다 가치 있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청양의 안색이 급변했다. "세악, 그 아이는 지나치게 검에만 매달리는 단점은 있으나 그 때 문에 검끝은 가볍지 않습니다. 사형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굳게 말했다. 검 하나만은 청양도 오세악을 인정하고 있었다. "방금 그놈과 몇 수를 나누어 보았지. 태청강기에 죽엽수를 싣고 더해서 눈치채지 못하게 비형권(秘形拳)까지 날렸지. 그런데도 잘 막 아내더군. 생각 이상의 성취를 얻었어. 칭찬으로 혀끝이 간질여질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았네. 놈이 가는 길을 다시 지켜볼 생각이야. 허허 허!" 숭양진인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허허로워 청양은 '설마 사형이 그런 이유로 세악 을……'하며 방금까지 했던 자신의 생각을 의심해야 했다. * * * '젠장! 달거리한 계집의 속곳이라도 차고 다니던가 해야지. 무슨 놈의 악신(惡神)이 이렇게 밥 달라는 개 같이 쫓아다니나.' 재수 옴 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땡그랑! 마충현은 아미자를 내동댕이치며 침상에 털썩 몸을 던졌다. 시절은 호시절(好時節)이 지척인데 종일을 물위에서 냄새 나는 표 사들과 어울려야 하는 신세……. 죽을 지경이었다. 바람이라도 쐬러 갈라 치며 표사들이 우르르 그 의 곁에 달라붙어 길을 막았다. 마옹이라는 놈의 이름이 분하에서 지워지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내 린 이 금제(禁制)가 풀어질 것 같지 않았다. '육시를 해서 두고두고 씹어 먹을 놈!' 마충현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 모든 일이 화산파의 애송이를 만난 후 생긴 일이었다. 두 명의 수하를 잃고 총관, 남일기는 한쪽 팔을 잃었다. 그리고 그 역시 적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남일기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 화산파의 제자와 싸우다가 그런 변을 당했다는 것은 아버지에게 숨겼다. 하지만 이미 자신을 뿔난 송아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아버지는 필경 좋지 않은 사단으로 그 같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표두들에게 명해 그를 분하에 꽁꽁 묶어 둔 것이었다. '장문천이라는 놈이었지.' 마충현은 사람을 풀어 자신과 싸운 화산파의 제자 이름까지 알아둔 후였다. '화산에 아직 발을 들였다는 소식은 없고…… 그렇겠지. 계집을 데 리고 산문에 들어 설 수는 없을 테니…… 으윽!' 다시 울화가 치솟았다. 분하에서 만난 그 여인의 얼굴은 갈수록 선명했다. 그 고운 얼굴을 마주 대하며 히히닥거리고 있을 장문천이란 놈을 생각하면……. 콰쾅! 마충현의 발길질에 침상 모서리가 박살이 났다. "진란(眞蘭)!" 그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잠시 후, 방문이 빼끔 열리며 까무잡잡한 얼굴에 왜소한 체구의 계 집이 얼굴을 내밀었다. 근동 농가의 아이로 남일기가 마충현의 객고나 풀라고 붙여진 계집 이었다. "이리 와!" 그가 계집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며 소리쳤다. 진란이라는 계집이 주춤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마충현은 진란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끌어당겨 침상에 얼굴을 처박 았다. "아얏!" 계집이 비명을 질렀다. "엉덩이를 들란 말이야." 짝! 그가 치마를 끌어올리며 진란의 토실한 엉덩이를 후려쳤다. 진 란은 벌벌 떨며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계집이나 상대하고 있어야 하다니 너도 불쌍하구나." 마충현이 자신이 아랫도리를 끌어내며 탄식을 토해 냈다. "에잇!" 그가 진란의 속살을 유린해 갔다. 마충현의 공격은 거칠어 침상은 물론 진란의 작은 몸조차 부서질 지경이었다. "으윽! 윽!" 진란은 거센 파랑(波浪)을 견디지 못해 결국 신음을 내질렀다. 그 때였다. "낄낄낄! 그놈 참 재미있게 노는구나." 칼칼한 목소리가 마충현의 귀를 때렸다. 한참 절정으로 치닫던 마충현의 열기(熱氣)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 리였다. 마충현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팟! 그가 진란을 밀치며 아미자를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피맛이 그리워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그는 시 비를 건 자의 머리통을 단번에 박살낼 생각이었다. 때맞추어 방해자가 방문을 훤히 열어 젖혔다. "죽어라!" 마충현의 아미자가 기세 좋게 허공을 갈랐다. 그러나 마충현은 이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손속을 급히 철회 하느라 생긴 일이었다. 주름살만큼이나 도흔으로 가득한 얼굴, 손등에도 보기 흉측한 상처 가 길게 새겨져 있었다. 예순은 족히 넘어 보이는 흑의 노인은 마충 현의 눈에 너무도 익은 자였다. "할아버지!" 땡깡! 마충현이 아미자를 내던지며 팔을 벌렸다. 제11장 화령주(火靈珠) 배는 기세 좋게 황하의 본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하남의 거부, 양백! 그를 제지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엇을 살핀다고 배 위에 오른 자들도 형식적으로 이곳저곳 살피고 내려갈 뿐이었다. 명강량은 성녀와 함께 그 배에 머물고 있었다. 성녀가 머무는 선실은 호사가 극에 달한 곳이다. 명강량은 그 곁의 작고 아담한 선실에 머물고 있었다. 양백은 소문대로 유들유들한 자였다. 성녀까지 나타나자 약간 당황 한 듯 했으나 이내 자신의 일로 돌아갔다. 양백에 의해 성녀는 양백의 질녀(姪女)로 자신은 보표(保　:호위무 사)로 소개되어졌다. 집안 일로 금적보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이 배에 탄 자들이 자신과 성녀에 대해 아는 전부였다. 양백은 하수인에게까지 집안의 사정을 콜콜히 알릴 신분이 아니므 로 그 정도의 말만으로도 자신과 성녀의 내력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았다. 성녀와 그가 있는 선실에는 시동(侍童)을 제외하고 사람의 출입이 불허(不許)되었다. 양백의 배에서 명강량은 모처럼의 한가함을 맛보고 있었다. 성녀도 그 한가함을 아이처럼 좋아했다. 자신의 선실보다 명강량의 선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쉴새 없이 이야기를 늘여 놓아 명강량은 성녀가 한 말의 반에 반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 사이 훌쩍 삼사 일이 지나갔다. 양백을 보게 되는 것은 성녀에게 드리는 아침 문안 인사 때가 고작 이다. 명강량이 양백과 본격적으로 얼굴을 마주 대하게 된 것은 오일 여 가 지난밤이었다. 양백은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명강량을 마주 대하고 앉았다 . "진작 자리를 만들었어야 하는 건데." 그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첫 대면이라 맨송맨송할 것 같아 제가 음식을 조금 시켜 두었소." 짝짝! 양백이 밖을 향해 손뼉을 쳤다.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던지 시동 하나가 소반(小盤)을 들고 나타났 다. "너는 그만 나가거라." 양백이 시동을 내보냈다. 소반에 담긴 것은 간단한 건과류와 옥배(玉杯), 술이었다. 술은 배교도들에게 금기다. "하늘에서 주신 물건, 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먹어야지요. 술이라 부르기 힘들면 누구처럼 곡차(穀茶)라 부르면 됩니다. 제갈가(諸葛 家)의 가양주(家釀酒)로 이 맛을 보기 위해 제갈가의 대소사를 빠지 지 않고 참가하는 사람도 있다 합니다." 쪼르르……. 양백이 작은 도자기에 담긴 술을 옥배에 채웠다. 명강량은 양백이 권하는 술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사실 술은 금기 이기는 하나 전혀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교도들은 드물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잔의 술은 하는 터였다. 하지만 교법은 명확히 술을 금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교법을 지켜 야 하는 호교신장! 시험 당하는 기분도 들었고 양백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도 떠올랐 다. 명강량의 생각에 아랑곳없이 양백은 보란 듯이 술잔을 들이켰다. 그는 연이어 석 잔을 들이킨 후 술병을 놓았다. "허허! 정말 먹을만 하군요." 양백이 입술을 닦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명강량은 묵묵히 눈앞의 술잔만 쳐다보고 있었다. 양백은 몇 잔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나한 자세를 취했다. "오늘 특별히 명옹을 찾은 것은…… 그동안 명사들도 만나기 힘들 었을 줄 압니다. 그들을 대신해 교와 강호의 소문들도 들려 드리고… … 드릴 말씀도 있고……." 명강량은 그제야 입을 뗐다. "명사들을 만난지 오래 되기는 합니다." "그러셨겠지요. 오는 길에 보니 천지간에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 그 놈들의 수족뿐이더군요. 이제 우제준이라는 작자까지 죽였으니… …." 우제준이 죽었다는 소문은 벌써 강호에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명옹께서 그만한 무위를 지니셨다니 기쁜 일이기는 하나…… 결국 은 좋지 않은 일이지요. 범 같은 자들이 더욱 득실거리며 나타날 테 니. 그들이 물어뜯고자 하는 자들이 어디 명옹뿐이겠습니까." 양백은 쓴맛을 다셨다. 양백의 말은 돌이키면 명강량이 우제준에게 목을 내어놓았어야 옳 았다는 말도 될 수 있었다. 전혀 생각이 없는 자는 아니니 명강량도 그 뜻을 충분히 짐작했다. 하지만 양백의 말에 시비를 걸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다. 명강량은 원래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무게를 두지 않는 자였다. "강남의 일은 아십니까?" 양백이 옥배에 잔을 채우며 물었다. 명강량은 필경 좋지 않은 일일 것임을 직감했다. 여 명두까지 죽고 없어진 마당이니……. 나쁜 예감은 원래 잘 들어맞는 법이다. "절강(浙江)의 오(吳) 명두(明頭), 강서(江西)의 장(張) 명두(明頭 )가 마침내 칼을 뽑고 말았습니다. 지난 망월에 손을 합쳐 형산파(衡 山派)로 몰려가 한바탕 난리를 부린 모양입니다." 생각 보다 나쁜 소식이었다. "형산파라 하면 원래 원래 무당파의 세력권에 있던 문파입니다. 그 러나 요즘은 유향경천문에 달라붙어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하고 있지요 . 강남의 교도들이 유향경천문 다음으로 찢어 죽이고 싶어하던 자들 이 바로 그들이니……." 양백이 탄식 섞인 목소리를 내뱉으며 잔을 비웠다. "형산파와의 싸움은 멋지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가 문제겠지요. 강남은 피바다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예전에 도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예측된 일이었고 앉아서 당할 수 없다는 강남 교도들의 입장도 모 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명강량은 서운한 감은 있었다. 아무리 급해도 무산대전까지는 참아 줄 줄 알았었다. 그런데도 칼 을 뽑아 든 것은 자신에 대한 기대는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 ! 사부가 호교신장으로 있었다면 이 보다 더 어려운 일이 벌어져도 그 같이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명강량은 호교신장으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다시 생각했다. "오 명두, 장 명두가 어찌 명옹의 영을 어기고 싶어 어겼겠습니까. 명두들이 가만히 있으니 각 향당의 교군들이 들고일어나 일전을 벌 일 기세였다고 하는데…… 싸움이 당장 벌어질 판인데 명두가 뒷짐을 지고 있을 수는 없는 형국이었을 것입니다. 호북(湖北)의 노(盧) 명 두(明頭)도 그런 오 명두와 장 명두의 고충을 전해 왔더군요." 정파인들에게 비마(飛魔)로 더 잘 알려진 노 명두는 오 명두, 장 명두와 함께 강남에 남은 세 명의 명두 중 한 명이었다. 명강량은 노 명두가 왜 같이 칼을 뽑아 들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노 명두도 결전을 소리 높이 외친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양백이 노 명두의 입장을 대신 밝혔다. "오 명두, 장 명두는 나중에 죽음으로 명옹 앞에 죄를 빌겠다고 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런 기회가 있을지…… 노 명두가 가세 하지 않은 이유는…… 노 명두까지 끼여들어 일이 잘못되면 강남에는 더 이상 남아 있는 자가 없지 않겠습니까. 오 명두, 장 명두, 노 명 두는 성녀와 명옹께서 강남에 왔을 때 자신들이 모두 죽어 성녀와 명 옹의 쉴 자리도 마련해 주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한 모양 입니다. 그래서 오 명두, 장 명두는 노 명두만은 싸움에 참가하지 말 도록 했다더군요." 양백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영 입맛이 쓴 듯했다. 명강량의 마음도 말할 것은 없었다. "……이제 끝간데까지 간 듯 합니다. 한바탕 혈란은 피할 도리는 없고…… 저 천산을 넘어 온 성령의 불도……." 양백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입에 담을 수 있는 말에도 한계가 있다. 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후에 양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명옹, 혹시 모태명이라는 자를 압니까? 흡룡곤! 흑룡방의 방주로 있는 자지요." "이름은 들었습니다." "장사치가 되다 보니 그와도 이런저런 연줄은 가지고 있습니다. 들 리는 이야기로 그자가 명옹을 한 번 보았으면 한다고 합니다." "내가 모태명을 만날 이유는 없소!" 명강량도 흑룡방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 고 배교와 흑룡방은 아무 관련도 없는 사이……. "좋지 않은 자이지요. 같은 사파인들에게 조차 신의 없는 자로 통 하니…… 하지만 이왕 청해 온 것 한 번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 을 듯 합니다." "……." "근자에 모태명의 행보가 바쁜 모양이더군요. 유향경천문 때문인 줄 압니다. 문주라는 자의 배후가 의외로 두터워 연줄 있는 관부인을 통한 압력도 행사되지 않고 은자로 칠을 하려 해도 전혀 되지 않으 니…… 눈에 가시가 박힌 느낌일 것입니다." "모태명이라는 자가 원하는 것이 유향경천문에 대한 연수(聯手)랍 니까?" "십중팔구 그런 뜻으로 만나고자 하는 줄 아나…… 워낙 신의 없고 음흉한 놈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지요. 만나 보 시겠습니까?" 양백의 물음에 명강량은 가타부타 아무 대답도 없었다. "급한 쪽은 사실 흑룡방 보다 우리지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해야 할 자도 우리고…… 혹시 압니까. 놈이 특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양백은 명강량이 모태명을 한 번 만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정말 지 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은 양백의 마음……. 그러나 명강량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무리 급하다지만 사파인 흑룡방과 거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내 키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양백은 명강량의 의중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단정했다. '이 철없는 애송이에게 우리 교의 향후(向後)가 걸려 있다니……. 지금이 정사(正邪)를 가릴 때인가.' 모태명을 만나 보아야 별 이득이 있으리라고는 양백도 생각하지 않 았다. 그러나 모태명을 만나는 일을 미적이는 명강량에게는 짜증과 한숨이 났다. 양백은 별로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나 제갈가의 가양주를 다시 한 잔 꿀꺽 들이켰다. "명옹, 사실 내가 오늘 명옹을 뵈러 온 것은 내 사정을 이야기 드 리고자 함이었소." 탁! 그가 기세 좋게 술잔을 탁자에 놓았다. "금적보의 일이 무척 바쁩니다. 무산대전에 참가할 수 있을지 모르 겠군요." 그가 명강량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양백은 그 한 마디면 자신이 교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충분히 전해지리라 생각했다. 그는 명옹에게 아직까지 교에 헌신(獻 身)하는 자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치 않았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교를 떠날 자라는 인상을 심어 주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자 신에 대한 원망이 줄어들 테니……. 젊은 명옹을 상대로 나이와 체면에 어울리지 않게 떠받는 소같이 대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명강량은 고개를 숙였다. '그럼 그렇지!' 양백은 명강량이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교와 거리를 한 발 더 멀리 했다는 생각에 숨 통도 조금 열리는 듯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 의 마음 한편에는 전교영기를 휘두르며 자신의 불경을 질책할 호교신 장의 모습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묘한 두 가지 마음으로 술병을 기울일 때였다. "양 명두!" 명강량은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양백을 불렀다. 양백은 술을 주르르 따랐다. "북을 잘 친다고 들었소. 북춤을 한 번 보여주시오." 느닷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양백은 술을 따르던 손을 뚝 멈추었다. '나보고 재인(才人)처럼 북춤을 추라고…….' 북이야 지금도 한 번씩 즐겨 치기는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아니 었다. 나이가 있었고 금적보의 보주라는 자리도 있었다. 그런데 그 경박한 북춤을 추라니……. "성녀께서 원하시오." 명강량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성녀의 부탁…….' 양백의 눈초리는 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성녀께서 원하신다니…… 그렇게 하지요." 양백이 마지못한 듯 말하며 느릿하게 술잔을 들었다. "어려운 부탁을 한 가지 더 하고자 합니다. 몇 개월 동안 성녀는 제대로 된 음식을 드시지 못했습니다. 이곳에 와서야 양 명두 덕에 쓴 음식은 드시지 않고 계시지만…… 그러나 아직 드셔 보지 못한 음 식이 많은 모양입니다." "성녀를 위하는 일인데 그 정도야…… 단지 지금은 적들의 경계도 삼엄하고 하니 적당한 때에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요. 그 외에 다른 부탁은……." "무산대전에 참가하시오." "……." 사람 좋아 보이던 양백의 안색이 일순간에 변했다. 명강량과 양백의 눈길이 허공에서 얽혔다. 깊이를 알 수 없이 무심하게 빛나는 젊은 명옹의 눈! "음……." 양백이 신음을 토하며 자신의 눈빛을 내리깔았다. 그것도 잠깐, 생 각에 잠겨 있던 양백은 이내 사람 좋은 얼굴로 돌아왔다. "허허! 가지 않겠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뿐 아니라 그 누구 도 무산에 갈 수 없는 일을 만나면 갈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 까." 유유롭게 웃으며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양백의 모습은 맨주먹으 로 대상단을 이룬 자의 처세(處世)를 한 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무산에서 볼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부탁이 한 가지 더 있소. 명사에게 영을 내릴 것입니다만…… 양 명두의 전언이 더 빠를 수도 있을 것 같아 드리는 말입니다. 노 명두, 오 명두, 장 명두에 게 전해 주시오. 당장 싸움을 멈추라고. 만약 이 영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교법으로 책임을 물을 것이오." 여전히 표정 없는 말투였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 말을 잃은 자는 이제 양백이었다. 이제껏 주위에서 들은 명옹의 모습과 직접 대면하고 있는 명옹의 모습이 너무도 달라 혼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양백은 모르고 있었다. 홍동에서 일어난 젊은 명옹의 일을……. 홍동에서 명강량은 큰 짐 하나를 내릴 수 있었다. 성녀! 성녀의 갈 길이 정해진 후, 그는 비로소 자유로워 질 수 있 었다. 명강량에게 달라진 것은 그것뿐이었다. 말투도 그대로고 눈빛도 그대로고 행동도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그대로 인데 양백은 명강량에 대해 엄청난 변화를 느끼 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른 말씀은……." "없습니다." "그럼 저는……." 양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없느냐? 이것들을 치워라!" 그가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시동 하나가 뽀르르 달려와 소반을 들고 나갔다. 양백은 읍을 한 후, 선실을 걸어나왔다. "완력만 센 줄 알았다니…… 호교신장, 그 자리는 그냥 주어진 게 아니었군." 뱃전으로 나서며 양백이 중얼거렸다. * * * "음! 냠! 냠! 꿀꺽!" 팽해만은 닭다리 하나를 들고 뼈까지 오도독거리고 있었다. "흐흠……." 그가 먹고 있던 닭다리를 휙 내던지며 다음에는 어떤 놈을 뜯을까 하고 눈을 두리번거렸다. 탁자에는 이미 닭뼈가 산을 이룰 정도로 쌓여 있었다. 그래도 팽해 만은 배가 차지 않는 듯했다. 소반에는 아직 서너 마리의 삶은 닭이 더 놓여 있었다. 팽해만은 그 중 하나를 잡아 가랑이를 반으로 쭉 채며 통째로 입으 로 가져갔다. 벌써 네 마리째 먹는 닭이었다. 청룡당 수석향주인 구레나룻 장목생을 비롯 팽가의 식솔들은 이미 팽해만의 식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팽해만의 먹성을 처음 보는 하 토문의 수하들은 달랐다. 그들은 팽해만을 마치 신기한 그 무엇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저 작은 체구에 네 마리나 되는 닭이 들어가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원래 팽해만이 대식가(大食家)이기는 하나 저 정도로 식탐을 밝히 는 편은 아니다. 수석향주, 장목생은 지금 소가주의 심기가 최대로 불편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책을 잡힐까 연신 수하들에게 눈짓을 보내는 증이었 다. 마음에 쌓인 울화를 푸는 방법은 사람마다 여러 가지다. 현무당주, 남궁기는 기분 좋지 않은 일이 있으면 진땀이 날 정도로 칼을 휘두른다. 주작당주, 언상영(彦常榮)은 멀쩡한 기관을 부수거 나 새롭게 만들곤 했다. 백호당주, 당예는 사람들이 북적대는 곳만 찾아다니며 그 틈에 끼여 정처 없이 휩쓸려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팽해만이 울화를 푸는 방법은 폭식(暴食)이다. 문주가 출관했다는 소식은 그도 들었다. 하지만 문주에게 자랑할 만한 뭐 하나 해 놓지 못한 것이 자신의 처지였다. 우제준이 죽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황하에 발이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신세…… 가만히 기다리며 앉아 있는 것 은 정말 그가 싫어하는 일 중의 하나였다. 기다리는 마옹은 목이 빠 지게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고…… 벌써 나타나도 나타났어야 했다. 혹시 포위망을 빠져나가 버렸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그의 울화를 배 로 늘이고 있었다. "으…… 윽!" 계륵(鷄肋)을 신나게 뜯던 팽해만은 이제 배가 찰만큼 찼는지 트림 을 하며 가슴을 폈다. 그가 배를 몇 번 퉁퉁 두들기더니 다시 닭다리를 잡고 술잔을 채웠 다. 이제 여유를 가지고 술안주로 남은 닭들을 요절낼 참이었다. 팽해만이 토끼가 풀을 뜯듯 야금야금 닭고기를 씹으며 몇 잔의 술 을 들이키고 있을 때였다. 쨍! 쨍! 쨍! 날카로운 쇳소리가 귀를 울렸다. "가 봐." 팽해만이 닭다리를 내던지며 장목생에게 눈짓을 했다. 원래 칼을 든 놈들이란 거칠고 포악하다. 몇 마디 시비 끝에 칼부 터 찾는 자가 그들이었다. 사고가 잦을 수밖에……. '특히 교타방이나 하토문 같이 말도 안돼는 놈들의 집단이야…….' 마옹이라고는 생각도 않았다. 청천백일에 나 잡아가라고 나타날 리 는 아예 없었다. 팽해만은 몇 잔의 술을 더 들이켰다. 그런데도 칼 부딪히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비명이 들리지 않는 것도 특이했다. "뭐야?" 그제야 팽해만은 이상한 마음에 고개를 뺐다. 장목생이 달려오고 있었다. "소가주, 큰일 났습니다!" 장목생이 소리쳤다. 얼마나 큰일이 났으면 당주란 말 대신 입에 익은 소가주란 말을 썼 을까. "광노(狂奴)…… 아니 광마(狂魔)가 나타났습니다!" 장목생이 해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팽해만은 팽해만이었다. 그는 어느 새 묵편과 유엽도를 들고 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머물고 있는 객잔 아래는 넓게 펼쳐진 갈대밭이다. 마른 갈대 가 웅성대는 속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움직이고 있었다. 마옹을 잡기 위해 숨겨 둔 백호당과 하토문의 수하들이었다. 칼 부딪히는 소리는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수하들이 싸움을 거부한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 수하들이 상대하는 자는 단 한 명! 얼굴 여기저기가 도흔으로 가득한 흑의를 입은 늙은이였다. "헤헤헤! 듣도 보도 못한 늙은이구나. 젊은 아이들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다니…… 노망(老妄)이 들었는가 보군. 가자!" 팽해만이 성큼 강둑을 내려섰다. "쯥!" 팽해만은 이 사이에 낀 닭고기를 뜯어내며 쓴맛을 다셨다. 눈을 말뚱말뚱 뜬 채 갈대밭 사이에 이리저리 쓰러져 있는 수하들 ……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지 못한 것은 단번에 혈도를 제압 당했기 때문인 듯했다. 팽해만은 눈치라면 남 못지 않게 빠른 자다. 하토문의 수하들은 물론 백호당의 아이들까지 상처 하나 없이 혈도 를 제압할 정도면 고인(高人) 중에서도 보통 고인이 아님은 분명했다 . "노옹(老翁)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을 방문하셨습니까? 지나는 길인 데 저희 아이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면 너그럽게 봐 주십시오. 저는 유 향경천문의 백호당주를 맡고 있는 말학(末學) 팽해만이라 합니다." 평소에도 인사성 하나는 밝은 팽해만이었다. "팽해만? 유엽도에 팽가 성을 쓰는 것을 보니 하북 정윤(正尹)의 피붙이인가 보군." 칼자국 투성의 노인이 말했다. "맞습니다. 저희 할아버님이 바로 정(正) 자, 윤(尹) 자를 썼던 분 이시지요." 팽해만이 어깨를 으쓱했다. 팽정윤은 전, 전대 팽가의 가주로 이미 이 세상에는 없었다. "기이한 일이군. 팽가 놈이 남의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니…… 보 아하니 네놈도 둘도 없는 망종이라 팽가에서 내쳤구나." "제가 비록 우리 족속(族屬)의 뿔난 송아지이기는 하나 집안에서 내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유향경천문은 저희 아버님이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 팽해만의 말투는 정중하고 정중했다. 칼자국 투성의 노인도 그 점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 참, 비루먹은 개처럼 싹싹하구나. 원래 내가 이곳에 온 이유 는 네놈의 팔 하나를 가져가지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전에 정윤, 그 놈이 나한테 한 번 져 준 공도 있고 네놈이 하도 싹싹하게 굴기도 하 니……." 팟! 흑의 노인이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칼을 치켜들었다. 도신이 무려 세 치가 넘어 보이는 광도(廣刀)였다. "헤헤헤! 좋은 말도 많은데 왜 칼부터……." 팽해만은 해살거리며 도망치려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동작과 달리 팽해문의 묵편은 이미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흑의 노인은 손을 내밀었다. 촥! 묵편이 노인의 손목을 영사처럼 휘감았다. "아이고! 아프겠군요!" 팽해만이 재빨리 소리쳤다. 그는 자신의 묵편이 흑의 노인의 뼈는 박살내지 못했더라도 심근( 心筋) 정도는 잘랐으리라 생각했다. 그가 그 여세를 몰아 묵편을 당 기며 유엽도를 번뜩이려 할 때였다. "낄낄낄! 이런 물건은 네놈 같은 개망니들의 종아리나 때리는 데 어울리지." 흑의 노인이 묵편을 거머쥐고 휙 잡아 당겼다. 팽해만이 '어! 어!' 하는 사이에 묵편은 그의 손을 떠나 저 먼 갈 대밭으로 사라졌다. 그가 메기입을 씰룩거렸다. "으헤헤! 이것도 뺏어 회초리로 한 번 사용해 보시지요." 유엽도가 바람을 갈랐다. 흑의 노인도 소 잡는 데 쓰면 꼭 알맞을 것 같은 광도를 날렸다. 챙! 챙! 챙! 팽해만과 흑의 노인은 갈대를 짓밟으며 잠깐 사이에 수초를 겨누었 다. 흑의 노인의 광도는 험악하고 악랄했다. 하지만 팽해만의 유엽도도 예기와 빠르기가 그에 못에 않아 그런대로 동수를 이뤄 가는 듯했다 . "이놈 봐라!" 흑의 노인도 팽해만의 칼솜씨에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사실 남궁기라는 걸출한 동료와 경박한 성격 탓에 실력만큼 인정받 지 못하고 있을 뿐 팽해만의 무위도 따지고 들면 당대 후기지수 중 몇 손가락 안에 충분히 들만했다. 또한 그도 남궁기와 같이 문주로부터 적지 않은 사사를 받은 터라 예전과는 실력을 비교할 수 없었다. "정윤 보다 낫겠군!" 흑의 노인이 한 소리 외치며 갑자기 도법을 변화했다. 파파파팟! 광도가 눈부시게 빨라졌다. 칼이 나아가는 방향도 사분 오열이라 팽해만은 잠깐 사이에 허둥댔다. 이마에 식은땀이 솟고 보폭도 어지러웠다. 칼에서 쏟아지는 경기조 차도 견디기 힘들었다. 흑의 노인은 팽해만과 무공에 대한 안목을 몇 단계 달리하는 고수 였던 것이다. '아이고!' 팽해만은 쩔쩔매며 속으로 연신 비명을 터뜨렸다. 흑의 노인이 칼 에 일 푼의 악독함만 더 더하면 다른 사람의 심장이 아닌, 자신의 심 장에서 쏟아지는 피를 보아야 할 입장이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칼에 신바람이 붙으면 칼 스스로가 종 종 주인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움직인다는 것을 팽해만은 알고 있었다 . 그가 흑의 노인의 칼에 모든 것을 내맡긴 채 갑자기 우뚝 섰다. "이놈 봐라." 흑의 노인이 팽해만을 음침하게 바라보며 광도를 세웠다. "훗일 정윤 보다 몇 배의 성취를 얻을 것 같아 내친김에 죽여 버리 려고 했더니……." 팽해만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흑의 노인의 말이었다. "헤헤헤…… 저 같은 망종은 죽여 보았자 노인의 칼만 더럽힐 뿐입 니다." 눈빛은 두려움으로 가득해도 입만은 잘도 조잘댔다. "내 칼은 원래 더럽혀질 만큼 더럽혀진 칼이라 청탁(淸濁)을 가리 지 않는다!"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럼……." 팽해만이 자신의 목을 만지며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이나 하나 내놓아라!" "손가락? 그것 하나면 되겠습니까?" "왜, 두 세 개를 더 내놓고 싶으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팽해만은 소매에서 소도를 꺼내 지체없이 자신의 손가락에 갖다 댔 다. '불쌍한 손가락아! 주인을 잘못 만났다고 원망하지 마라. 방금 까 지는 닭도 실컷 먹여 주지 않았느냐.' 소도에 팽해만의 손가락 하나가 뚝 떨어졌다. "이리 다오!" 흑의 노인이 손을 내밀었다. 팽해만은 울상을 지으며 그 손가락을 흑의 노인에게 바쳤다. "통통한 것이 닭발보다는 맛있겠군." 흑의 노인이 손가락을 장중에 넣었다. 팟! 그가 신형을 날렸다. 흑의 노인의 그림자가 갈대밭 사이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늙은이는 갔느냐?" 노인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팽해만이 손가락을 움켜쥔 채 강둑에 선 수하들에게 물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수하들이 소리쳤다. "으헤헤…… 망할 놈의 늙은이! 청산(靑山)이 녹수(綠水)로 변하지 않는 한…… 청산과 녹수가 변하지 않는 한 다시 만날 일이 있을 것 이다!" 팽해만이 어깨를 들먹이며 이를 갈았다. "도대체 누구일까요? 하필이면 팽 당주에게 바란 것이 손가락이라 니……."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자는 하토문의 당주였다. 그는 흑의 노인에 놀라 잠시 잊었던 것이 있었다. 뿔난 돼지는 화가 나면 앞뒤도 모른다는 사실! 짝! 팽해만이 사정없이 하토문 내당당주의 뺨을 후려쳤다. "으헤헤…… 죽고 싶어! 그럼 그 늙은이가 내 목을 달랬어야 옳았 다는 말이야." 팽해만의 두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아무리 하토문의 내당당주라는 자가 용렬한 자라 하나 그도 칼을 찬 무사다. 그 수모까지 당하자 먼저 손이 가는 곳은 역시 칼이었다. 팽해만도 주저없이 유엽도를 들었다. "참으십시오!"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팽해만과 내당당주 사이를 뛰어든 자 는 수석향주, 장목생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내당당주를 쳐다보던 팽해만이 먼저 휙 등을 돌렸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한 꼴이었다. 유향경천문에 매인 몸이 되 고부터 생긴 변화였다. 내당당주는 한동안 분을 풀지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끝내 그의 칼 은 칼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콰직! 그가 갈대를 세차게 밟으며 성난 발걸음을 옮겼다. 팽해만은 내당당주와의 다툼은 벌써 잊고 있었다. '누구일까?' 궁금한 것은 흑의 노인의 정체였다. 절정의 고수에 광도를 든 자, 얼굴의 상흔과 하는 짓을 보면 정파 출신이 아님은 분명했다. 팽해만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강호 견문(見聞)을 동원 흑의 노 인의 정체를 찾았다. 머리를 쥐어짜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맞아! 그 늙은이…….' 그의 머리 속에 언뜻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사파의 전대 고수! 얼굴은 본 적이 없다. 자신이 강호에 발을 들일 때 이미 강호에서 사라져 버린 자이므로……. 하지만 팽해만은 분명 그 자가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흑의 노인이 그 작자가 분명하다고 생각되자 그는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 늙은이를 만나 손가락 하나밖에 잃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범 아가리에 들어가 머리카락 하나 뽑히고 살아난 것과 마 찬가지의 행운이었기 때문이다. "헤헤헤, 사지를 잘라 죽을 때까지 똥통에서 돼지처럼 살게 해도 모자랄 늙은이! 어지간히 싸울 상대가 없었던 모양이군. 나에게까지 찾아와서 시비를 거는 것을 보면…… 음, 가만!" 그렇게 생각하자 팽해만은 다른 의문이 들었다. 정말 흑의 노인이 그 작자가 맞다면 자신을 찾아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예는 몰라도 권위만은 유달리 내세우는 자들이 사파인들 이다. 흑의 노인이 그 작자가 맞다면 배분이 낮아도 한참 낮은 자신을 찾 아와 비무를 요구할 까닭이 없었다. 이겨도 본전을 못 뽑을 것이고 싸웠다는 사실만으로 명성이 올라갈 자는 팽해만 자신이면 자신이었 다. "정말 내 손가락이 그렇게 맛있어 보였나?" 팽해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손가락을 폈다. 뭉툭하게 잘려 나간 손가락에서는 아직도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 팽해만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뒤늦게 손가락이 욱신거리며 깨질 듯 아팠다. "으악! 아얏! 장목생, 이 돼지 새끼 같은 놈! 뭐 하는 게야? 붕대! 붕대! 아이고! 어머니!" 그가 죽겠다며 길길이 날뛰었다. "아함!" 마충현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밤새도록 신법을 펼치느라 잠 한숨도 자지 못했었다. 사실 신법은 그가 펼친 것은 아니었다. 업혀서 오긴 했지만 피곤하기는 마찬가지 였다. "이왕 액땜을 하려면 초조(初潮)를 치른 계집의 속곳이 좋지. 돌아 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것부터 손에 넣고 말겠다." 그가 나른하게 가라앉는 몸을 나무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마충현이 졸린 눈을 비비며 막 잠이 들려 할 때였다. 툭! 가랑이 사이로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마충현은 실눈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아직 채 피가 엉켜 붙지도 않은 손가락이었다. 그가 짜증스런 표정으로 얼굴을 들었다. 그의 앞에는 흑의 노인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었다. "약속대로 가져왔다. 팔을 떼 오지 않은 것은 그놈의 할아비와 내 가 조금은 안면이 있기 때문이다. 자! 이래도 이 할아비의 실력을 의 심하겠느냐?"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노인은 바로 조금 전 팽해만을 상대로 일전을 벌였던 노인이었다. "으……." 마충현은 죽겠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처박았다. 눈앞의 흑의 노인은 바로 그의 외조부(外祖父)였다. 잊혀질 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다가 근자에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얼마 전 분하에 홀연 그를 찾아 나타난 것이다. 다 른 친척들과 달리 유난히 그를 애지중지 하던 외조부라 반갑게 맞았 었다. 하지만 그 애지중지 귀여움을 받던 일이 화근이 될 줄이야! 근자에 재수 옴 붙은 일 중에 가장 옴 붙은 일은 바로 외조부를 만난 일이 었다. 그를 찾은 외조부는 다짜고짜 자신의 무공을 배울 것을 요구했다. 무공을 배우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쉬운 일이었다면 화산파의 장 문천을 상대로 이만 갈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그가 지니고 있 는 보잘 것 없는 무공도 얼마나 애를 써 얻었던 것인가. 그래서 그는 외조부의 청을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외조부는 좀 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밤낮 없이 괴롭혔다. 남만 괴롭혀 온 마충현이 남에게 시달리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 인가를 깨달은 것은 그때였다. 외조부에게 팽해만의 팔을 잘라 오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팔 을 잘라 오면 무공을 익히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팽해만을 택한 것은 그가 마옹을 잡는데 동원된 교타방도들을 마치 수족처럼 다루려고 하는 데다 자신을 새발의 때만도 못하게 여겨 눈 길 한 번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팽해만은 팽가 출신에 작금 천하제일문인 유향경천문의 당주다. 외조부의 무공이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팽해만 만큼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 하지만 눈앞에 놓인 것은 팽해만의 손가락! '차라리 이 손가락이 팽해만이 갖다 놓은 할아버지의 손가락이었으 면…….' 솔직한 마충현의 심정이었다. 팽해만을 이길 정도면 외조부의 무공이 그의 생각을 훨씬 넘는다는 말이 된다. 무공이 높으면 그만큼 그 무공을 익혀야 할 고충도 커지 는 법!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자! 이제 약속을 지켜라. 너도 이 할아비가 평생을 애써 얻은 무 공이 관(棺)과 함께 파묻히는 것을 원하지 않겠지." 흑의 노인이 말했다. "왜 하필이면 나예요? 나보다 몇 배 뛰어나다는 형님들도 있는데… … 내가 내놓은 놈이라는 것은 할아버지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마충현이 입을 삐죽이며 소리쳤다. "그래서 너를 택했다. 내가 무공을 가르치는 법은 직접 사람을 상 대하면서야. 사람 죽이는 것을 우습게 알아야 해. 그런 놈은 세상에 많지 않지. 네가 제격이다. 첫째놈은 네 아비를 닮아 마음이 너무 심 약해. 둘째, 셋째놈은 교타방 일에 빠져 은자 맛을 알아 버렸고…… 넷째놈은 우습게도 과거 준비를 한다면서? 너밖에 없다. 이 할아비의 전인(傳人)이 되거라. 이 할아비의 무공을 남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 깝지 않느냐." "줘 버려요! 손자에게 사람 죽이는 일을 못 가르쳐 안달이 난 할아 비가 있다니……." 마충현이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낄낄! 여기 있지 않느냐. 가자! 네 어미에게는 내가 데려갔다고 차후에 연락을 하겠다." 흑의 노인은 당장 마충현을 끌고 갈 태세였다. 외조부는 말이 나오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이다. 끌려가면 모든 것이 끝이라 마충현은 잔머리를 굴려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려 했다. "아버지가 맡긴 일은 끝내야 할 것 아니에요. 할아버지를 따라가면 언제 집으로 돌아올 지 모르는데…… 가는 마당까지 불효(不孝)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낄낄! 네놈이 부모 생각을 다 하다니 별일이구나." "마옹이 분하를 지나는데 몇 개월이 걸린다고 합니까! 고작해야 며 칠인데……." 마충현이 버럭 화를 냈다. "흐흥! 좋다. 내가 또 한 번 속아 주지. 그러나 네놈이 약속을 어 기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가자! 낄낄낄!" 흑의 노인이 마충현을 옆구리에 끼었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 * * 계혈탕포(鷄血湯包), 삼황계(三黃鷄), 담가채(譚家菜), 소맥(小麥) , 살기마(薩其馬), 소와두(小窩頭) 오향두(五香豆), 팔진탕(八珍湯), 십팔가마화(十八街麻花), 과파채(鍋巴菜), 우양육(牛羊肉), 진진피 자(秦鎭皮子), 호로두(葫蘆頭), 백란과(白蘭瓜), 열동과(熱冬果), 판 압(板鴨), 호피삼선(虎皮三鮮)……. "아!" 악약은 눈앞에 펼쳐진 백 가지 음식에 탄성을 터뜨렸다. "준비를 한다고는 했으나…… 배 위라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양백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작은 배들이 유선을 쉴새 없이 오가고 한 무리의 숙수(熟手)들을 태운 배도 오더니 양백은 정말 상 다리가 휘어질 정도의 음식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황하가 지척으로 다가오고 적들의 경계도 눈에 띄게 줄어든 곳에서였다.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돌려보내지 않은 숙수도 있고 재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 오도록 하겠습니다." 성녀가 기분 좋아하자 양백의 마음도 흡족했다. "아니에요. 여기 있는 것만 해도 한 달은 족히 먹을 수 있을 것 같 아요. 이런 대접은 평생에 한 번 받아 보기 힘들 거예요." 악약은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표정이었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이런 음식을 드시게 해 드리겠습니다." 진심이 담긴 양백의 말이었다. 교에 대해서는 시큰둥한 마음을 가 지고 있는 그였으나 성녀에 대한 마음만은 달랐다. 딸 같이 애처로웠 고 손녀 같이 귀여웠다. 황산에서 처음 성녀를 만났을 때부터 가진 마음이었다. "이 번 한 번이면 족해요. 두 번이나 이런 음식을 달라 하면 명왕 께서 화를 내실걸요. 음…… 그런데 양 아저씨, 여기에 한 가지가 빠 진 것 같아요." 사람이 있건 없건 악약의 명두들에 대한 호칭은 할아버지, 아저씨 다. "뭡니까?" 양백은 성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천 길 불길 속을 달려가서라도 가 져오겠다는 자세였다. "일전에 할아버지를 따라 황산으로 올 때였어요. 여러 날 동안 객 잔을 전전했죠. 그런데 항상 객잔에서 본 것이 병에 담긴 음료를 맛 있게 마시는 사람들이었어요. 할아버지에게 사달라고 하려다가 그만 두었어요.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아마 할아버지가 먼저 사주 었을 테니까요." 악약의 말에 양백은 명강량을 흠칫 바라보았다. 불장난을 하다 들 킨 아이처럼 마음이 괜스레 송구했다. "하지만 정말 먹고 싶어 견딜 수 없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 몰래 구해서 마셨죠. 죽엽청(竹葉淸)이라고 했던가. 맛을 별로 였는데 먹 고 나니 정말 기분은 좋았어요." "허허허!" 술 이야기에 가슴 졸이던 양백은 성녀의 돌연한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명강량 앞에서는 자신있게 술을 내어놓던 양백이다. 하지 만 성녀에 대해서는 그런 불손을 보일 수 없어 고기는 주위의 이목 탓에 준비해도 술은 준비하지 않은 터였다. "그것이 먹고 싶다 이 말이군요." 양백의 시선이 다시 명강량을 향했다. 명강량은 말이 없었다. "성녀께서 원하신다니……." 양백이 식탁에 놓인 종(鍾)을 들었다. 사공들은 선실로 모두 들어가고 없고 시동들도 멀찍이 서 있었다. 뱃전에 있는 자들은 명강량과 악약, 양백뿐이었다. 아직 추운 날씨인데도 뱃전에서 만찬을 즐기고자 한 사람은 악약이 다. 그녀는 강물의 도도한 흐름을 바라보며 즐기는 식사를 원했다. 청을 받아들이며 양백은 대신 악약의 전신을 모피(毛皮)로 감싸주었 었다. 땡그랑! 맑은 종소리가 시동을 불렀다. 두 명의 시동이 종종 걸음 으로 다가왔다. "내 선실에 가면 울금향(鬱金香), 태백소(太白燒), 백건아(白乾兒) 가 있을 것이다. 가져오너라." 어디 술이 그 술만 있을까. 하지만 양백은 주(酒) 자가 싹 빠진 술 만 청했다. "오늘은 배에 등(燈)을 켜지 마라. 선두와 선미에 배의 위치를 알 리는 등만 켜도록 하라. 그리고 여기는 유등(油燈)을 가지고 오너라. "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행여 주위의 이목을 끌까 염려한 양백의 조치였다. "자! 이제 천천히 음식을 드셔 보실까요. 아직도 나오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양백이 팔을 벌리며 음식을 권했다. "강량." 악약이 웃으며 젓가락을 내밀었다. 달은 높게 떠올라 있었고 유등 속에 비친 양백의 얼굴은 붉디붉었 다. 성녀와 마시는 술이라 특별한 맛이 났을까. 양백은 과음(過飮)을 한 편이었다. 악약의 얼굴도 술기운에 복사꽃처럼 붉었다. 명조는 주인 이상 신이나는 양 돛대 사이를 이리저리 날았다. 멀쩡 한 사람은 명강량뿐인 듯했다. 그러나 실상 그도 제법 많은 술을 들 이킨 터였다. 악약과 양백이 번갈아 가며 억지 술을 권했기 때문이다 . 좋은 분위기를 해치기 싫어 그렇게 받아먹다 보니 잔 수로 따지면 오히려 그가 가장 많이 마신 듯했다. 술이라면 이전에는 많이 마셨었 다. 그때는 배가 고파 주객(酒客)들이 마시다 남긴 술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마셨지만……. "허허허! 내 생애에 이렇게 즐거운 날은 없었을 것이오. 일월성신 께 감사드릴 따름이오. 허허허!" 양백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술기운이 최고조에 달한 모양이었다 . "성녀, 이 미천한 저파룡의 북솜씨를 구경하고 싶다고 했습니까?" 그가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섰다. 양백이 지닌 내력이면 백 잔의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몸을 비틀거릴 정도로 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정말 취하기 로 작정하고 마음을 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양 아저씨!" 악약은 손뼉을 치며 좋아라 했다. "보여 드리지요. 아무렴! 보여 드리고 말고요. 여봐라! 북을 가져 오라!" 양백이 선상(船上)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시동 하나가 허겁지겁 양백의 북을 들고 달려왔다. 보통의 북보다 조금 작은북이었다. 양백은 옥배 대신 대접에 술을 한가득 붓고 통쾌하게 마셨다. 그가 북을 어깨에 걸쳐 매고 나갔다. 그는 한동안 애지중지 키운 자식을 어루만지듯 북을 쓰다듬었다. '어이!' 하는 한소리와 함께 양백이 북채로 북통을 '딱!' 치며 무 고(舞鼓)의 시작을 알렸다. 둥! 둥! 둥! 북소리가 낮고 길게 울려 퍼졌다. 깊은 산의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 리며 계곡으로 밀려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둥! 둥! 둥! 악약은 턱을 괬다. 북소리가 신기했던지 아니면 놀라서인지 저 홀로 이리저리 뛰어나 니던 명조도 다소곳이 악약의 어깨 위에 앉았다. 북소리와 함께 양백의 긴 소리가 어우러졌다. 수변양류녹연사(水邊楊柳綠煙絲) 입마번군절일지(立馬煩君折一枝) 유유춘풍최상석(唯有春風最相惜) 은근갱향수중취(慇懃更向手中吹). - 물가의 수양버들 초록색 실을 늘인 듯 한데, 말 세워 그대 손 빌어 꺾은 가지 하나 받았다. 봄바람이 그 가지와 이별을 아쉬워하는 듯 은근하게 그대 손 향해 불어오고 있다. 한껏 뽑아 대는 양백의 목소리는 중년의 나이를 무색케 했다. 북도 특수한 재질로 만든 듯 낮고 긴 울림으로 양백의 가락에 흥을 더하 고 있었다. "강량." 악약이 불렀다. "저 노래를 알고 계셔요?" 명강량은 고개를 저었다. 배운 글자도 몇 안 되는데 시가까지 알 도리는 없었다. 그가 아는 노래는 길거리를 떠돌며 배웠던 육가(肉歌 )와 근자에 악약에게 배운 몇 소절이 전부……. "절양류(折楊柳)라는 노래예요. 예전에는 송별(送別)할 때 버들가 지를 꺾어 상대방의 평안을 비는 풍습이 있었던가 봐요. 그래서 나온 이별의 노래지요. 멋도 모르고 나도 많이 불렀어요." 악약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옛일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들으니 별로 기분이 좋지 않군요. 양 아저씨는 왜 저 런 노래부터 택했을까요? 강량……." 악약이 하얀 미소로 명강량을 다시 불렀다. "내가 노래를 불러 보겠어요." 말이 끝나자마자 악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야(上耶)!" 양백의 북소리를 뚫고 울려 퍼지는 악약의 잡티 하나 없이 맑은 목 소리……. 푸드드득! 명조가 기세 좋게 하늘로 치솟았다. 양백은 흠칫 북채를 다시 잡았다. 둥! 이번에는 악약의 노래와 양백의 북소리가 고저(高低)로 어울렸 다. - 하늘에 맹세합니다. 내가 당신과 서로 알게 되고부터 오래 살며 언제까지나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산에 언덕이 없어지고, 강물이 그 때문에 말라, 겨울에는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여름에는 눈이 내리며 하늘과 땅이 합쳐져도 그대와 헤어지지 않으리다. 악약이 부르는 노래는 상야(上耶), 아욕여군산지(我欲與君相知)로 시작되는 악부의 한 소절이다. 하지만 시작은 같아도 끝은 달랐다. 끝은 천지합내감여군절(天地合乃敢與君絶)로 '하늘과 땅이 합쳐지 는 그날이 오면 할 수 없이 헤어지리다'이나 악약은 그 부분을 살짝 바꾸어 부른 것이다. 명강량은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뜻은 몰라도 언제나 좋은 것이 성녀의 노래다. 성녀까지 합세해서 한 소절을 보태 주자 양백의 흥은 더욱 고조(高 調) 되고 있었다. 둥! 둥! 둥! 둥! 북소리가 빨라지고 몸놀림도 바빠졌다. 악약은 호흡을 고르며 자리에 앉았다. "강량." 그녀가 상기된 얼굴로 명강량을 불렀다. "이전부터 강량에게 주고 싶은 것이 있었어요." 그녀는 작은 손으로 소매를 뒤졌다. 악약이 소매에서 꺼낸 것은 악약이 손에 쥐기에 딱 알맞은 구슬이 었다. 안으로부터 붉은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묵빛 구슬이었다. 명강량의 안색이 변했다. "이것은 누구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누가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 다." 그가 냉엄하게 말했다. 악약이 명강량에게 주겠다는 것은 어이없게도 배교의 신물(神物), 배교의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화령주(火靈珠)였다. "할아버지가 말하기를 이것은 어머니가 나에게 선물한 것이라 했어 요. 선물로 받은 것, 선물로 줄 수 있잖아요." 악약이 항의하듯 소리쳤다. "그것을 선물할 수 있는 자는 성녀가 성녀에게 뿐입니다." "그래요? 음……." 악약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은 어때요. 우리는 서로 가진 것이 없잖아요. 내가 강량에게 이것을 선물하고 나중에 이것을 강량이 나에게 다시 선물하는 거예요." 그녀가 화령주를 손바닥에 펼쳐 보이며 말했다. 명강량은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악약과 화령주를 가만히 바 라보던 그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동안입니다." 그가 화령주를 받았다. 화령주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악약의 표정은 너무도 진지했다. 거 부하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강량, 화령주에는 숨겨진 비밀이 있어요. 화령주는 바로 안락국의 문을 여는 열쇠이거든요." 악약이 속삭이듯 말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저는 정말 기분이 좋아요. 강량……." 악약이 바람을 안 듯 팔을 벌렸다. 그녀가 잔을 들고 같이 일 배를 권했다. 명강량의 눈길이 양백을 향했다. 양백은 이제 저 홀로 흥에 취해 주위를 잊고 있었다. 명강량은 악약을 따라 술잔을 들었다. 백건아의 맑은 향이 목구멍을 따라 흘렀다. 달은 중천으로 떠오르고 악약의 눈빛은 더욱 총총해져 가고 있었다 . 물소리, 북소리만 요란했다. 꺼지지 않는 영원한 배교의 불, 화령주! 화령주에는 사해팔황을 단숨에 불태워 버릴 수 있는 열기가 숨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은 사실이 아닐지라도 화령주에 엄청난 화기가 숨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화령주에 열이나 내력을 가하면 그 가해진 힘의 수 배 이상 열기가 폭사된다. 금강불괴를 자랑하는 자의 손도 가볍게 녹아 버리고 금강석(金剛石 )도 불 속의 얼음처럼 녹았다. 명강량은 그 화령주를 들고 서 있었다. 한바탕 북을 치고 난 양백은 그래도 흥을 이기지 못해 한동안 더 술잔을 기울였다. 결국 만취한 그는 시동들에게 부축되어 자신의 선 실로 돌아갔다. 성녀도 만찬의 흥분이 잘 가셔지지 않던 모양이었다. 만찬이 끝난 후에도 자신의 선실로 돌아가지 않고 명강량의 선실에 머물렀다. 그 러다가 탁자에서 잠이 들었다. 명강량은 방금 성녀를 당신의 침실에 재워 두고 자신의 선실로 돌 아온 터였다. 새벽이 오려는지 어둠은 더욱 깊어 갔다. 명강량은 침상에 올라 좌정을 했다. 눈을 붙이기 전에 운기행공으로 주독(酒毒)을 풀고 역류한 삼양장 의 화독을 억누를 생각이었다. 화령주를 손바닥 사이에 올렸다. 화령주를 올린 이유는 이열치열( 以熱治熱)로 삼양장의 화독을 몰아낼까 해서였다. 명강량은 운기를 시작했다. 화령주에서 은은한 온기가 피어올랐다. 그 온기는 봄날의 햇살보다 더 따뜻하게 명강량을 감쌌다. 명강량은 포근한 마음이 되어 이내 몰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일다경이 지나자 화령주에서 묵빛을 압도하며 홍채(紅彩)가 찬란하 게 피어올랐다. 명강량은 무의식 중에 삼양장의 화독이 쏜살같이 한 곳을 향해 몰 려 나가는 것을 느꼈다. 삼양장의 화독을 삼키고 있는 것은 화령주였 다. 화령주는 한 편으로는 화독을 빨아들이고 또 한 편으로는 강한 빛살로 명강량의 몸 전체를 투영(透映)했다. 빛살은 혈맥 여기저기를 지나며 맺혀 있던 응혈들을 비산시켰다. 생각도 못했던 화령주의 효능이었다. 명강량의 얼굴에 굵은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노폐물이 모두 씻겨 나오는 것 같았다. 명강량은 몰아지경 속에 운기행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화령주에서 뿜어나오는 홍채가 점점 짙어지며 선실을 붉게 물들였 다. 선실의 열기도 사막의 한낮을 넘을 정도였다. 다시 일다경이 지나자 선실에 있는 모든 것들이 습기를 잃고 목내 이(木乃伊)처럼 뻣뻣하게 말랐다. 명강량이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반 각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억!" 손바닥이 타는 통증에 명강량은 화령주를 놓았다. 화령주는 불덩이였다. 지지지직! 화령주가 선실의 바닥을 그을리며 굴렀다. 명강량은 큰 숨을 들이쉬고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았다. 신기할 정도로 몸이 가벼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화령주를 집어들었다. 점차 열기가 식어 가고 있 다고는 하나 아직 보통 사람이 집으면 손을 데일 정도였다. 목이 칼 칼했다. 창문을 열었다. 새벽이 희뿌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명강량은 창틀에 기대 바람에 몸을 말렸다. 탁! 그가 창문을 닫았다. '다시 긴 하루가 시작되리라.' 벌써 그를 찾아오는 자도 있었다. * * * 새벽과 함께 그를 찾아온 자는 황기명사였다. 명사들은 명옹을 기다릴 뿐 찾지 않는다는 원칙은 이미 깨어진 듯 했다. 사사로이 내왕이 금지되어 있는 명두들까지도 서로 만나는 처 지니……. 그만큼 교가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증거였다. 황기명사가 먼저 꺼낸 말은 역시 강남의 소식이었다. 그 소식이 급 했기 때문에 양백의 배까지 뛰어든 것이리라. 양백에게 이미 들은 내용이나 황기명사의 입을 통해 명강량은 묵묵 히 그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 양 명두에게 전한 말과 같은 말 을 황기명사에게 전했다. 황기명사는 양백보다 더 놀라는 듯했다. "알겠습니다." 말을 잊고 있던 그가 비로소 명을 받았다. "그리고…… 청기명사의 전언입니다. 이미 소문으로 들었을 줄 압 니다. 산서, 주 명두께서 유향경천문 놈들에 의해 광명계로 입적하셨 습니다." 황기명사가 침울하게 말했다. 성녀의 예지력으로 주 명두의 죽음은 이미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 만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했었다. 홍동으로 오기까지 며칠간 그는 강 호의 소문에 귀를 열 처지가 못 되었다. 양백도 주 명두의 죽음은 말 하지 않았다. 몰라서 안 알려준 것이 아니라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잘 가시오. 주 명두…… 좋은 세월에 다시 만납시다.' 명강량이 주화청에게 보내는 조의(弔意)의 전부였다. "산서의 새로운 명두는 나만큼 젊은 사람이 되었겠군요."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주 명두가 후계자라며 대면을 시켜 준 사람이 있소." 명강량은 전우삼을 떠올렸다. 흑우(黑牛)를 연상시키던 커다란 몸 집…… 막연하게 긴 길을 같이 가게 되리라 느꼈던 자였다. "역시 주 명두군요. 다른 곳에서는 아직도 새 명두를 뽑지 못해 우 왕거리고 있는데……." "적들의 기습이 급작스러웠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환란을 초창기에 당한 명두들은 후계자를 내정할 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군요. 아!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 아직도 명두를 내정 하지 못하고 있는 성(省)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명두 가 없는 성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명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해야 하나 로 황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명두를 정하는 일은 각 성 소관입니다." "그것이 어디…… 이미 중심이 무너진 곳은 중지를 모으기 위해 만 나려 해도 만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차라리 명옹께서 임시로 각 성 의 명두를 정해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무산대전에 모인 명두들 에게 물으면 각 성에 명두 감이 될만한 유력한 인물들은 천거(薦擧) 해 줄 테니……." "무산대전에서 명두들에게 의견을 물어 보겠습니다. 그 방법 외에 다른 수가 없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강남의 일도 그렇고 방금 제기한 명두들의 선임 문제도 그렇고 명 옹의 대답에 황기명사는 가슴이 시원시원 뚫리는 기분이었다. 결과야 어찌 되던 일단 마음은 든든했다. "그리고 다음은 백기명사(白旗明使)의 전언입니다만…… 어디까지 가 사실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다며 토를 달아 보내 왔더군요." "무슨 일입니까?" "서북 변경에 우리와 같은 명왕을 모시는 이족(異族)이 있다는 것 은 아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그곳 이족의 교도들이 성녀를 자기 땅으로 모셔 가기 위해 중원으 로 사람을 보냈다고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무심하던 명강량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곳을 오가는 상인들 중에 우리 교도들도 제법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기를 이족의 교도들은 지금 성녀가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다고 거리를 치장하는 등 난리 법석(法席)을 부리고 있다 합니다." "우스운 일이군. 그들이 갑자기 성녀는 왜?" 같은 명왕을 모시기는 하나 그들과의 사이는 떨어져 있는 거리만큼 이나 멀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그들은 우리 교의 모든 것은 부정해도 명왕과 성녀만은 인정하고 있지요." "성녀를 인정한단 말이오?" 명강량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그들의 뿌리도 원래 처음 천산을 넘어 중원에 들어오던 초대 교도 들에 있습니다. 초대 교도들 중 일파가 중원까지 진출하지 않고 그곳 에 남아 뿌리를 내린 것이지요. 그러니 당연 성녀를 모시는 것도 같 습니다. 이후에 거리와 풍속, 지역을 달리하다 보니 벽이 생겨 버렸 지만……." "그렇소. 그렇게 벽을 두고 살아 왔소. 그런데 왜 이제 성녀를 데 려가겠단 말이오?" "성녀를 모시고 싶은 마음이야 그들도 있었습니다. 벽이 완전 쌓이 고 난 초창기에는 성녀를 서로 모셔 가기 위한 치열한 싸움도 몇 번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한 지역에 자리 잡은 그들이 중원 전역에 자리 잡은 우리를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해를 넘길 수록 세력은 더욱 차이가 나니 성녀를 잊은 듯 포기해 버린 것이지요 ." "그래서? 지금…… 지금 우리가 누란지세(累卵之勢)에 놓여 있으니 그 틈을 타 성녀를 데려가겠다는 것이오? 나는 성녀께서 그들의 땅 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아직 들은 적이 없소. 그들은 어떤 방 법으로 성녀를 데려가겠다고 하오?" "모르겠습니다. 백기명사도 확인하지 못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 다. 워낙 이상한 짓거리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한바탕 소란일 수도 있 겠지요. 백기명사가 좀더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 탁탁! 명강량은 손끝으로 탁자를 쳤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닐 수 있 었다. 자신이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한 듯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 꿈을 꾸었나.' 명강량은 며칠 전에 꾸었던 벽안 노인의 꿈을 떠올렸다. 앞뒤가 전 혀 연결되지 않는 꿈이었으나 기분이 묘했다.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곧 사공들이 깨어날 시간이었다. "가장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황기명사의 표정이 굳어졌다. "유향경천문의 문주라는 자가 다시 강호에 발을 들였습니다." 유향경천문 문주, 능운공작 단원홍! 만나면 무조건 피하라고 사부가 일러준 자. "무산대전에 차질이 없도록 다른 명사들에게도 독려 바랍니다. 그 리고 적기명사에게 가능한 한 빨리 전갈을 보내 강남 명두들에게 나 의 명을 전하라 하십시오. 의창(宜昌)은 누가 맡고 있습니까?" "의창까지 제 소관입니다." "무산으로 바로 갈 것입니다. 그 중간에 별 일이 없으면 의창에서 봅시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정해진 장소에 비문을 남겨 두겠소." "알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황기명사가 읍을 했다. 선실 밖에 잠시 귀를 기울이던 그가 여명 속으로 몸을 던졌다. 명강량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을 청하기는 늦은 것 같았다. 그는 신장도를 풀고 면포를 꺼냈다. 그가 천천히 신장도를 닦았다. '단원홍…….' 아무래도 최후의 만남은 그 자가 될 것 같았다. 제12장 관산(關山) 나한당주 혜명(慧明)의 시봉승(侍奉僧), 정각(正覺)은 얼굴을 손으 로 가린 채 하늘을 우러렀다. '강북에는 아직도 눈이 날린다는데…….' 이제 겨울을 막 벗어난 이른봄이었다. 그런데도 날씨는 초하(初夏) 를 방불케 했다. 목덜미와 이마에 끈적한 땀이 베어 날 정도였다. '지난겨울이 끔찍할 정도로 추워 서둘러 여름을 불렀는가.' 정각은 승포를 여몄다. 그의 앞에는 불장(佛杖)을 짚고 선 초로의 승이 있었다. 사숙(師叔)인 나한당주, 혜명이었다. '사숙께서는 무슨 일로 이곳에…… 종일을 서 있을 참인가.' 정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림을 훌쩍 떠나 남행을 택한 사숙은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 우뚝 서 벌써 두 시진 이상을 꼼짝 않고 있었다. '누구를 만나기로 하셨나?' 사숙의 눈길은 먼길에 놓여 있었다. '어이, 정말 따분하구나.' 정각은 지루함을 견딜 수 없었다. 나한권(羅漢拳)이라도 펼치며 지 루함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사숙 앞에서 경망스럽게 자신의 나한권을 보여줄 수는 없는 게고……. '……불조항마(佛祖降魔), 불법무변(佛法無變)…….' 정각은 손발을 놀리는 대신 머리 속으로 투로를 그렸다. 그가 그런 식으로 지루함을 달래 갈 때였다. "정각!" 혜명이 정각의 생각을 끊었다. "가지고 있거라." 혜명은 불장을 내밀었다. 정각이 영문도 모른 체 불장을 받았다. "네가 숭무(崇武)의 기상이 높음을 안다. 그래서 너를 이곳까지 데 려왔다. 잘 보거라. 두 번 보기는 힘들 것이다." 사숙, 혜명이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내던졌다. 정각은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살폈다. '무엇을 보란 말인가?' 길 위에는 나는 새 한 마리도 없었다.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사숙을 바라볼 때였다. 따각! 따각! 봄날의 나른함을 깨며 들려 오는 말발굽 소리……. 정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굽이진 고개를 돌아 뚜렷한 그림자가 긴 꼬리를 끌며 모습을 드러 내고 있었다. 망포옥대(　袍玉帶)에 연분홍 전포, 만화(蠻靴:말을 탈 때 신는 목 이 긴 신발)를 신은 청년이었다. '아!' 정각은 절로 한숨을 쉬었다. 반듯한 이마, 짙은 눈썹, 우뚝한 콧날……. 수행하는 승에 사내인 그가 봐도 가슴이 격앙될 정도로 청년의 용 모는 수려했다. 가뜩이나 춘정(春情)에 들뜬 여인네들은 한 번 본 것 만으로도 며칠 밤을 지새울 것이 분명했다. 정각은 원래 무(武)에 관심이 많은지라 말을 보는 눈도 웬만했다.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하얀 말은 하루에 천리는 충분히 달릴 듯했다 . 하지만 천리마는 자신의 준족(俊足)을 자랑하지 않았다. 노새의 걸 음보다 더 한가(閑暇)했다. 망포옥대에 천리마, 수려한 용모……. 명문 대가의 자손임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당연히 청년의 눈빛은 세상을 좌시할 정도로 오만해야 했었고 패기 로 넘쳐야 했다. 그러나 청년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空虛)했 다. 계속되는 낙방의 쓴 고배를 견디지 못해 무작정 봄길을 나섰는지 ……. '그렇겠군.' 정각은 그렇게 단정했다. '흥! 알고 보니 팔자 좋은 한량이었구나.' 그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말을 타고 오는 청년이 자신을 낙척서생(落拓書生)이라고 밝힌 것 도 한량이라고 밝힌 것도 아니다. 까닭 없는 청년에 대한 냉대! 정각은 청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질투심임을 까맣게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청년은 그저 천천히 말을 몰아 올 뿐이었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사숙 혜명은 나직한 불호를 외며 어깨를 폈다. 호흡을 고르는 것을 보면 심결(心訣)을 외는 모양이었다. 그제야 정각은 사숙의 말을 다시 기억했다.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길 위에 보이는 자는 여전히 청년뿐! '그럼…….' 정각은 사숙과 청년을 언뜻 바라보았다. 사숙 혜명이 청년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미타불! 단(丹) 시주(施主)가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청년이 대답했다. 절도가 있는 정중한 어투였다. 정각은 청년의 그 한 마디 말에서 청년이 집안의 위세나 빌려 날뛰 는 개망나니는 아닐 것이라 짐작했다. "단 시주를 뵙기 위해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사숙, 혜명은 합장(合掌)으로 머리를 숙였다. 청년은 잠시 시선을 먼길에 던졌다. 그가 묵묵히 말에서 내렸다. "일타운(一朶雲), 너는 잠시 그늘에서 쉬고 있거라." 청년이 말고삐를 안장에 감으며 말의 엉덩이를 쳤다. 백마(白馬)는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듯 느긋하게 나무 그늘을 찾았 다. "노납(老衲)은 소림 나한당에 얹혀 사는 혜명이라 하오. 무태상인 을 스승으로 모셨지요." 무태상인, 정파의 고인(高人)들을 논할 때 첫 손가락에 오르는 이 름! 청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혜명이 나타난 이유를 짐작하겠다 는 표정이었다. "무태상인께서는 잘 계십니까?" 그가 물었다. "이미 열반(涅槃)에 드셨습니다. 아미타불!" "아쉬운 일이군요. 사부님께서는 항상 그때 일을 회상하곤 하셨지 요. 다시 논검(論劍)을 원하셨는데 열반에 드셨다니……." 청년은 하늘을 우러렀다. 기품 있고 여유로운 동작이었다. 정각은 자신도 모르게 청년을 따라 하늘을 우러르는 자신을 발견했 다. "단 시주는 역시 그분의 제자군요. 백운룡(白雲龍)!" "백운룡? 나는 몰랐습니다. 사부님의 별호가 백운룡이신지." "당연히 모를 수 밖예요. 백운룡이라는 별호는 노납의 스승을 비롯 그분과 일 합을 겨루었던 전대의 몇 분 고인들께서 붙여 준 별호니 …… 당시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만 밝힌 줄 압니다. 운씨(雲氏)라고 했지요?" "맞습니다. 운 자, 학(學) 자, 추(追) 자를 쓰십니다." 망포옥대의 청년이 말했다. '운학추? 백운룡.…….' 정각은 기억을 더듬었다. 사숙의 말을 생각할 때 청년의 사부, 백 운룡은 사숙조 무태상인을 비롯 당대를 떨치던 몇 몇 고수들과 비무 를 한 듯했다. 비무를 청할 정도였다는 것은 당대에 최소한 이름 석 자는 새겼다는 뜻! 그러나 정각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운학추라는 이름을 떠올릴 수 없었다. "운 시주께서는 아직 정정하시겠지요?" "관직(官職)에 매인 몸…… 생각보다 시간을 내기가 여의하지 않더 군요. 사실 변명일 따름입니다. 제가 불충하기 때문이지요. 못 뵌지 한 삼 년은 됩니다. 하지만 별 일은 없으실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장원(莊園)의 집사(執事)로부터 연락이 오기로 되어 있으니까 요." 청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고 보니 관부인이었군. 그런 티가 전혀 나지 않더니…….' 정각은 청년의 아래, 위를 다시 살폈다. 관부인이라면 은연중에 말 투와 행동에서 관가의 냄새를 풍기는 법이다. 그러나 다시 보아도 청 년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정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단 시주의 몸은 어떻소? 미간에 붉은 기운이 서려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삼양장의 화독이 제 거되지 않은 듯 한데……." "대수롭지 않습니다. 관문에 들어서기 싫어 꾀병을 피우고 있지요. " "아미타불! 다행입니다. 그 악독한 삼양장에 당하고도 몸을 보중( 保重)하시다니…… 반드시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혜명은 청년의 말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청년은 한 두 달 후면 완전 삼양장의 화독에서 벗어날 듯했다. "과찬의 말씀……." 청년은 미소로 겸양을 표했다. "사실 내가 단 시주를 백운룡, 운 시주의 전인으로 점찍은 것은 노 납의 사제로부터 단 시주의 무위를 듣고 나서외다. 천하에 누가 있어 이토록 젊은 나이에 이정인을 격퇴시킬 제자를 키워내겠소이까. 오 흉 중에서도 곽부와 함께 으뜸으로 꼽히던 이정인을……." "……." 정각은 입이 딱 벌어졌다. 눈앞의 청년이 마옹, 이정인을 처치한 자라니…… 그도 이정인은 구대문파의 합공에 의해 태호에 수장 당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숙이 실 없는 소리를 할 리가 없다. "운이 좋았을 따름입니다. 이정인은 나와 싸우기 전에 구파의 고수 들에게 여러 날 쫓겨다니느라 진기가 많이 손상되어 있었지요." 청년은 담담하게 웃었다. '맞구나. 그가…… 그가…… 이정인을 처치했어.' 정각은 전신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태산이 그의 앞 에 뚝 떨어진 듯 숨도 갑갑했다. "배교의 무공 중에서는 요사한 것이 많아 내력을 사용하고 사용해 도 샘물처럼 치솟는 것이 있다 합니다. 이정인이 내력이 고갈된 상태 에서 단 시주와 싸웠을 리는 없지요." 혜명의 말에 청년은 시인도 부정도 않았다. "단 시주, 내가 왜 이곳에서 단 시주를 기다린 지 아시오?" 말을 돌려 혜명은 원래의 용무를 끄집어냈다. 망포옥대의 청년은 입을 닫고 침묵을 지켰다. "사부, 무태는 열반에 들기 전 나에게 강호의 숨겨진 이야기 하나 를 들려주었소. 바로 단 시주의 사부, 백운룡에 대한 이야기이외다. 어느 날, 홀연히 찾아와 사부에게 비무를 청했다고 하더이다. 사부는 그 청을 받아 들여 대실봉에서 비무를 벌였었소. 결과는 믿지 못하 게도 사부의 일패도지(一敗塗地)!" 쿵! 정각은 나락으로 구르는 기분이었다. 사숙조(師叔祖), 무태상 인은 소림 칠십이종(七十二種)의 절예 중 무려 삼십이종(三十二種)이 나 되는 절예를 익혔었다. 대반야신공(大般若神功)도 칠 성(七成) 이 상의 경지에 올라 이미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라는 자리도 우습게 알며 사람 밖의 사람 자리에 앉았던 분! '그런 분을 꺾은 자가 있다니…….' 정각은 믿어지지 않았다. "백운룡, 운 시주에게 패배를 당한 후 사부께서는 폐관에 드셨소. 운 시주에게 패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우리는 사부, 무태가 마지막 용맹정진(勇猛精進)으로 대각(大覺)을 이루기 위해 폐관에 든 줄만 알았지." 혜명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청년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부가 폐관에 든 것은 운 시주의 무공을 파해 할 방법을 찾기 위 해서였소." 침묵으로 일관하던 망포옥대의 청년은 그 말이 떨어지자 눈빛이 미 미하게 변하는 듯했다. 공허한 눈빛의 깊숙한 곳에 사문의 무예에 대 한 자긍심은 숨겨 둔 모양이었다. '아무렴! 사숙조께서 그냥 열반에 드시기야 했을라고…….' 정각은 마른 목에 억지 침을 삼켰다. "하지만 결국은…… 사부께서는 파해법을 찾지 못했다고 털어놓았 소. 그 이야기를 털어놓고 사부는…… 오탁악세(五濁惡世)를 떠나셨 소. 아미타불!" 혜명은 강호 비사의 한 토막을 끝낸 후, 탄식 섞인 불호를 터뜨렸 다. "무태상인께서 조금 일찍 사부를 만났더라면 파해법을 찾을 수 있 었을 것입니다. 사부님은 무태상인에게 너무 늦게 비무를 청해 상인 께서 파해법을 찾을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했음을 미안해 하셨습니다 ." 청년은 여전히 겸손했다. 하지만 그 겸손한 말도 정각의 귀를 거슬렸다. 울화가 부글부글 끓 어오르고 살심이 치솟았다. 그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소림의 제자 였다. "단 시주, 말씀을 잘 하셨습니다. 사실 내가 단 시주를 찾은 이유 는 그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나는 사부의 유지(遺志)를 잇기 위해 운 시주를 찾았소. 운 시주가 노납에게 한 수 가르침으로 갈 길을 열어 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소." 혜명이 청년 앞에 나타난 이유의 전부였다. 나한당은 외부의 적들로부터 소림을 지키는 무승(武僧)들이 모인 곳이다. 소림의 골짜기는 넓고 깊으니 숨은 고승들이야 어디 한두 명 이랴만 표면적으로 소림의 무맥(武脈)을 이은 자는 바로 나한당의 당 주! 혜명은 사부의 유지 이전에 소림의 무통(武統)을 이은 자로서 전대 의 상처를 씻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나의 사부는…… 강호의 번거로움을 무척 싫어하십니다. 이전에 무태상인을 비롯 몇 분과 비무를 벌일 때에도 결과는 물론 만난 사실 조차 감추기로 약조했을 줄 압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가 결국 이렇게 흘러나오고 말았군요. 강호의 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사 부는 지금도 싫어하십니다." 또박또박한 청년의 말은 사부, 백운룡 운학추의 행방을 더 이상 묻 지 말라는 완곡한 부탁이었다. "무태, 사부께서도 그 일을 입밖에는 내지 마라 하셨소. 하지만 지 금 나는 사부 한 사람의 제자이기 이전에 소림의 제자외다. 소림의 제자로 나설 수밖에 없는 나의 고충을 단 시주는 이해해 주리라 믿소 . 그리고 강호가 그렇게 번거롭고 싫은 곳이었다면 운 시주는 아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말았어야 했소." 혜명은 순순히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제가 입을 열지 않겠다면 대사께서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정중하던 청년의 말투가 빈정대는 투로 바뀌어 들리는 것은 청년에 대한 정각의 분노 때문이었을까? "단 시주, 무례를 용서하시오." 긴말이 필요 없었다. 혜명은 가슴팍까지 쌍장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바닥이 옥빛으로 변 해 갔다. 소림의 무쌍절예 중 하나인 보리옥룡인(菩提玉龍印)이었다. 망포옥대의 청년은 결말이 이렇게 날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도 두 말 없이 내력을 끌어올렸다. 바람도 없는 날에 그의 전포가 펄럭이고 망포는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정각의 눈빛이 흔들렸다. 패배감이 그를 아득한 절망감에 빠뜨렸다 . 내력 하나만 보더라도 그는 청년의 상대가 아니었다. 청년의 기파는 수미산의 장중함으로 버티고 선 사숙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각은 쓰러지려는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의 여파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그의 처지였다. 사숙도 결론이 이렇게 날 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러니 두 번 보 기 힘든 장면을 볼 것이라 말했겠지. 어쩌면 사숙은 미리 청년과 비 무를 해 보기로 마음을 먹고 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청년은 먼저 손을 뽑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혜명과 청년은 서로를 마주 대한 채 한동안 팽팽한 기파만 주고받았다. 일 각 넘게 기파의 회오리 속에 서 있던 혜명은 노안을 찌푸렸다. 청년은 기다릴 줄도 아는 자였다. 어쩔 수 없이 혜명이 선수를 뽑아 야 했다. "시주, 조심하게!" 팟! 승포가 도검처럼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장영이 번쩍 빛났다. 청년은 혜명, 사숙의 공세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장영이 무색하게 허공을 비켜난다고 생각한 순간, 사숙의 장영이 갑자기 우박비처럼 쏟아졌다. 구련조화인(九蓮造化印)! 미풍 속에 칼날 같은 장영이 천변만화(千變萬化)로 쏟아지자 청년 은 보폭을 바꾸었다. 청년은 어깨를 건들 움직이며 사숙, 혜명의 현 란한 구련조화인 속에 몸을 던졌다. 타타타탁! 타타탁! 마른 대나무가 불길에 타는 듯한 소리가 천지를 휩쓸었다. 한 번 몸을 움직인 청년은 먹이를 향해 뛰어드는 호랑이와 같았다. 절(切), 삭(削), 나(拿)……. 사숙, 혜명은 청년의 반격에 주춤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사숙은 구련조화인에 이어 팔십일복마장법(八十一伏魔掌法)을 어지 럽게 펼쳤다. 정각이 본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이후로 그는 종내 시선을 잃고 말았다.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르기도 빨랐지만 천지를 난타 하는 사숙, 혜명과 청년의 개세 무위에 삼혼칠백(三魂七魄)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그는 그저 눈 뜬 장님처럼 멍하니 지켜볼 따름이었다. 혜명과 청년이 박투를 벌인 것은 긴 듯 해도 찰라지간이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 수 십, 수 백 합을 주고받고 있었다. 혜명은 그 짧은 시간에 십 여종의 절예를 선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청년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 상태였다. 초조함이 혜명의 호승지심을 연신 부채질했다. 평생 아집(我執)을 버리기 위해 수행 에 몰두한 그였으나 막상 승부에 임하자 이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의 손끝에 점차 반야신공이 묻어 났다. 수련의 차이를 감안 내력의 대결은 피하려던 그였다. 청년은 반야신공에 맞서서도 잘 버텨 나갔다. 혜명은 반야신공을 점차 끌어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 초식에 무상의 내력이 실리자 처음의 박투는 그저 시정 잡배들의 주먹 다툼으로 보였을 정도였다. 쾅! 쾅! 쾅! 멸로포(滅虜砲), 호준포(虎　砲), 불랑기포(佛郞機砲)가 한꺼번에 터지는 듯한 소리가 정각의 고막을 흔들었다. 보이는 것은 귀화(鬼火 )처럼 날아다니는 푸르고 노란빛뿐……. 딱! 폭사되는 청무(靑霧), 황무(黃霧) 속에 정각이 마지막으로 들은 소 리였다. 사위가 갑자기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한바탕 천지분열의 대접전이 있고 난 후라 봄날의 정적은 더 깊었다. 그 정적 속에 사숙, 혜명과 청년은 서 있었다. 둘 다 처음의 자세 그대로 서 있었으므로 정각은 승부의 우열을 찾을 수 없었다. 청년의 호흡이 조금 거친 듯 했으나 승부를 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망포옥대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대사(大師), 좋은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 사숙, 혜명은 아무 말도 않았다. 청년은 포권으로 사숙에게 머리를 숙였다. "일타운, 가자. 길이 늦었다." 그가 한가롭게 풀을 찾던 말을 불렀다. 말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청년이 말안장에 훌쩍 몸을 실었다. 따각! 따각! 그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봄길을 걸어갔다. 그때까지 사숙, 혜명은 침묵으로 서 있었다. "사, 사숙! 어떻게 된 것입니까?" 청년이 시야에서 완전 사라진 후 정각이 화들짝 혜명에게 달려갔다 . "밀교(密敎)의 황금신공(黃金神功)까지 익혔을 줄이야. 무태, 사부 로부터 백운룡이 그런 무공까지 지니고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한 듯 한데……." 혜명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사숙, 어떻게 된 것입니까?" 정각이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억지를 썼는데도 이기지 못했으니…… 졌다." 혜명은 청년과의 최종 대결을 내력 대결로 몰고 간 자신을 책망하 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음에도 결국 이기지 못했다. 물론 항마 전(降魔戰)의 자세로 끝까지 싸웠다면 반 초식 차이의 승리는 그에게 돌아왔겠지만……. "사숙, 졌다니요. 이 무슨……." 정각은 숫제 울 듯한 표정이었다. "이 무슨 망신인고. 그 제자에게 이기지도 못하면서 백운룡을 찾아 논검을 하려 했으니……. 허허허!" 혜명은 허탈하게 웃었다. "사숙, 도대체 그의 내력은 무엇입니까? 관부인이 그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니…… 사부인 백운룡이라는 자의 내력은? 나는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정각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앞으로 우리 소림은 적어도 삼십 년 동안은 태산북두(泰山北斗)의 기치를 내려놓고 있어야 할 것이다. 유향경천문에 의해…… 그만 가 자." 혜명이 허허로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왜 유향경천문에게……." 와락 고함을 지르던 정각이 말을 뚝 멈추었다. "사숙, 그럼 그가 근자에 강호를 비상하는……." "그렇다. 백운룡의 제자, 금의위의 천호, 유향경천문의 문주…… 모두 같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 방금 네가 본 그 시주니라." "능운공작!" 정각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능운공작 단원홍! '그렇게 젊은 사람이었다니…….' 정각은 오늘 자신이 몇 번 놀라는지 셀 수가 없었다. 봄날의 하루 가 영원히 가지 않을 듯했다. 따각! 따각! 일타운의 발걸음은 여전히 가벼웠다. 하지만 단원홍의 몸은 중병( 重病)에 걸린 사람처럼 무거웠다. 적당한 시기에 손을 뺏어야 했으나 물러서기 싫었다. 사부의 명예 가 걸린 일전이었다. 덕분에 그는 적지 않은 내상을 입었다. 삼양장 의 화기도 다시 꿈틀대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그가 괴로운 것은 몸보다 마음이었다. 기억 저편에 묻 어 두려 했던 사부! 사부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사부를 생각하면 함께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원홍은 창백한 안색으로 묵묵히 일타운을 몰았다. 반 마장을 더 갔을 것이다. 그는 일타운을 세웠다. 가슴 저편에서 맹렬한 통증이 밀려들고 있 었다. 혜명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 때문은 아니었다. 움직이기 싫었다. 역시 한 번 꼬리를 물고 일어난 기억은 쉽게 숙 여들 생각을 않았다. 단원홍은 하늘을 우러렀다. 머리 속에 꽃잎이 우수수 날리고 있었다. 관산(關山)! '지금도 그곳에는 꽃잎이 날리는가.' 말안장에 몸을 기댄 단원홍의 눈빛은 공허함으로 더욱 깊어져 갔다 . * * * 삐걱! 삐걱! 쾌선은 이름 그대로 경쾌하게 물살을 갈랐다. 교타방 표두, 엄전은 팔꿈치를 뱃전에 기대며 몸을 비스듬히 눕혔 다. 그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선수(船首)에 선 청년을 바라보았 다. '살다 보니 별일도 다 보는군.' 퇫! 그가 가래침을 내뱉었다. '하루아침에 마음을 바꾸지는 않았을 테고…… 또 무슨 사단을 준 비하려고 저러는가.' 엄전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미간을 모았다. 선수에 선 청년은 교타방의 소방주였다. 호랑이는 개새끼를 낳지 않는다는 속설(俗說)을 여지없이 깨어 버 린 개망나니 자식, 마충현! 제 어미 구멍으로 다시 들어갔으면 하는 바램은 엄전만의 희망이 아니었다. 그런데……. 마충현은 변해 있었다. 변해도 너무 변해 엄전뿐만 아니라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표두들은 물론 표사들에게까지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배를 타는 것을 마치 죽으러 가는 일인 줄 알더니 자신이 앞장서서 배 위에 올 라 마옹이 있나 검색(檢索)하고 다녔다. 술을 멀리 했고 생활도 규칙 적인 것 같았다. 단 며칠 사이의 변화였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데…… 죽지 않으면 황모(黃毛)가 백모(白毛) 되는 꼴을 보겠지.' 엄전은 팔꿈치를 퉁기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탄 쾌선이 화려한 유선의 선저(船底)에 달라붙고 있었다. 이 미 한 번 오른 적이 있는 하남의 거부, 양백의 배였다. "소방주, 이 배는 양백의 배입니다. 양백이 누구인지는 아시지요. 이미 수하들이 한 번 수색을 한 적도 있고 하니 다른 배들이나 둘러 봅시다." 염소 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말했다. 그는 교타방의 부방주, 천국성(千國成)이라는 자였다. "부방주께서는 무슨 말을 하는 게요? 태원으로 오르는 배는 수색을 게을리 하더라도 내려오는 배는 철저히 조사하라는 아버님의 명을 잊었소?" 마충현은 천국성을 나무랐다. "양백이라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하는 소리지요." 부방주, 천국성이 미간을 좁혔다. 변한 것은 좋은데 이제 문제는 마충현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날뛰는 것이었다. '교타방에서 방주 다음 자리는 부방주인 나외다.'하며 마충현과 싸 우게 되는 것이 아닌가를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전에는 전혀 생각 도 할 수 없었던 일…….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소! 그리고 가장 어두운 곳 은 등잔 밑이라는 말도 있지 않소." 마충현은 제법 의젓한 표정까지 지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요구수(撓鉤手:갈고리)를 들었다. "사다리를 내리라고 명해라!" 휙! 그가 직접 요구수를 양백의 배에 걸며 소리쳤다. 잠시 후, 양백의 배에서 출렁이는 사다리가 내려왔다. "올라갑시다." 마충현이 앞장서서 양백의 배에 올랐다. 천국성이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양백의 배에 오른 마충현과 천국성 일행은 뱃전에 도열했다. "무슨 일이요?" 강바람에 붉게 거슬린 피부, 딱 벌어진 어깨, 부리부리한 눈, 우르 르 서 있는 교타방의 무사들을 향해 걸어오는 자는 모동곽(毛動廓)이 라는 자였다. 금적보에는 보주 아래에 총관이 있고 그 아래 각기 맡은 부분이 다 른 별관(別官)이 있다. 모동곽은 금적보의 선단에 대한 모든 지휘권을 가진 자였다. "모 별관, 미안하게 됐소이다. 마옹을 잡으라는 명이 여러 곳에서 워낙 지엄해서…… 보주께서는 계시겠지요?" 부방주, 천국성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계시지만 지금 다른 일로 바쁘오. 찾을 자가 있으면 찾아보도록 하시오." 모동곽이 딱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두 번씩이나 자신의 배를 오르내리는 교타방 무사들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마충현은 잠시 독사 눈으로 모동곽을 쏘아본 후 휙 움직였다. "누구요?" 모동곽이 냉랭한 눈빛으로 물었다. 대충 뱃전만 한 번 둘러보고 내려갈 줄 알았었다. 그런데 교타방의 애송이가 걸어가는 곳은 선실이었다. 잠자리까지 들쑤시러 가겠다는 데 모동곽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본 방의 소방주외다. 아직 천지(天地)를 모르니 이해하시기 바라 오." 모동곽의 기분을 눈치챈 천국성이 말했다. 그가 재빨리 마충현을 따라갔다. 선실은 넓고 쾌적했다. 마옹을 잡는 일에 열(熱)과 성(誠)을 다 보이던 마충현이다. 당연 히 선실 하나하나를 살펴봄이 옳았다. 그러나 마충현은 무슨 생각인 지 선실을 대충 곁눈으로만 살피고 지나갔다. 선실은 두 개의 층으로 구분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선실의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자 계단이 하나 나타났다. 계단 위는 선실을 가르는 오단목(烏檀木) 문이 세워져 있었다. 마충현의 눈빛이 빛났다. 그는 주저 없이 계단을 올라가 문에 손을 댔다. "소방주! 그곳은……." 천국성이 놀라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러나 그보다 마충현의 손이 빨랐다. 마충현은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있었다. 주단(紬緞)으로 깔린 통로, 금칠로 치장한 문, 여기저기 걸린 장신 구도 금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마충현은 주저 없이 그곳에 발을 들였다. 그때였다. "아!" 마충현은 가는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강철같은 손이 우악스럽게 그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이곳은 보주가 머무는 선실이오. 아무도 들어갈 수 없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마충현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고 있는 자는 모 동곽이었다. 마충현의 인상도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그가 모동곽의 손을 세차게 떨치며 두 걸음 물러났다. "모 별관이라 했소? 귀하는 지금 천하가 마옹을 잡기 위해 얼마나 동분서주하고 있는가를 모르는 모양이군." 마충현이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우리 금적보가 강호의 일을 알아야 할 이유는 없소." 모동곽은 문을 닫으려 했다. "우리는 있지!" 마충현은 돌연 아미자를 뽑았다. 수색을 허락하지 않으면 힘으로라 도 밀어붙이겠다는 자세였다. "소방주!" 천국성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천방지축이 따로 없었다. 금적보와 사이가 틀어져 돌아올 불이익은 교타방밖에 없다는 것을 알 터인데……. 모동곽은 싸늘한 미소를 흘렸다. "교타방 분들을 배웅해 드려라!" 그가 교타방 무사들과 함께 서 있던 금적보 자경대(自警隊) 무사들 을 향해 소리쳤다. 가슴에 '금(金)' 자를 새긴 서너 명의 무사가 마충현의 앞을 가로 막았다. "애송이!" 들릴 듯 말 듯한 모동곽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충현의 귀에는 자신을 조롱하는 모동곽의 목소리가 너무 도 똑똑히 들렸다. 쌓아 온 수행의 깊이가 바닥이라 마충현은 그 소 리를 참지 못했다. "개자식!" 그가 살심을 터뜨리며 아미자를 날렸다. "악!" "윽!" 금적보 자경대 무사들의 어깨와 팔에 피분수가 치솟았다. '아뿔싸!' 부방주, 천국성은 눈앞이 깜깜했다. 이미 말리기에는 늦은 듯했다. 모동곽이 비호처럼 단극(短戟)을 뽑아 들고 있었다. 양백은 뒷짐을 진 채 창파(滄波)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의 종적을 잡을 수가 없었다. 배교에 무슨 미련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간의 정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교를 따르고 교의 일에 몸을 받쳤을 뿐! 적당한 기회에 구 실을 만들어 결별을 선언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그의 마음 한 편에는 어이없게 도 이전에도 없었던 교에 대한 믿음이 봄풀처럼 돋아나고 있었다. 조석으로 성녀를 배알하며 생긴 마음이었다. 그 같은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양백으로서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었 다. 교의 현실과 자신의 현실은 절대 융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련 없이 한 곳은 정리해야 한다.' 스스로에 대한 양백의 끝없는 주문이었다. 물론 정리할 곳은 배교 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과는 반대로 마음이 움직이니……. 부대낌을 풀 도리가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성녀는 물론 교에 대한 일도 싹 잊어버리는 것 인데…… 한 삼 년, 상단을 이끌고 천축에나 다녀올까. 그 사이 모든 것은 변해 있겠지.' 양백은 선창을 어슬렁거리며 여러 생각을 떠올렸다. 그의 귀에 금적보 자경대의 비명과 칼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응?' 양백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언뜻 머리 속에 든 생각은 성녀와 명옹 을 노리는 구대문파의 내습이었다. 그는 지체없이 탁자에 놓인 철척( 鐵尺)을 잡았다. 물건의 길이를 재는 데 보다 병기로 더 어울리게 만 든 자(尺)였다. "무슨 일이냐?" 그가 선실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선실문이 또 하나 왈칵 열렸다. 해쓱한 얼굴로 뛰쳐나온 여인은 바로 악약이었다. 악약에게 칼 부딪히는 소리는 강박(强迫)이었다. 명강량과 우제준의 일전을 보고 난 후에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그래서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뛰쳐나온 것이 다. "모 별관!" 양백이 악약을 향해 선실로 들어가라는 눈짓을 보내며 고함을 질렀 다. 모동곽은 양백의 고함에 급히 단극을 회수했다. 마충현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상인 나부랭이 정도야 하고 가볍게 달려들었다가 단극에 심장이 뚫 릴 뻔했기 때문이다. 정말 가슴을 쓸고 있는 사람은 천국성이었다. 소방주가 당하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입장이 라 막 도신이 칼집을 떠나 모동곽을 향해 날아가려 하던 참이었기 때 문이다. 그렇게 되면 금적보와는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넘게 되는 꼴이었다. "보주…… 죄송합니다." 먼저 깊게 머리를 숙이며 절하는 자도 천국성이었다. 뒤이어 모동곽이 머리를 숙이며 한 편으로 물러섰다. 마충현도 찢어진 눈에 살기를 담고 양백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자신의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숨이 턱까 지 차 올라 가슴도 답답했다. 양백과 함께 문 안쪽에 서 있는 여자! 혼이 반쯤 나간 마충현의 시선은 연신 그 여인을 쫓고 있었다. 분 명했다.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분하의 물결을 가르던 그 여인……. "질녀는 들어가라." 양백이 약약에게 말했다. 삐꺽! 선실문을 열리며 명강량이 나섰다. 도검 소리에도 그가 외부 에 반응을 하지 않은 것은 칼을 겨루던 자의 무위가 염두에 둘 정도 로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백이 알아서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뒤늦게 모습을 보인 것은 악약을 선실로 이끌기 위함……. 명강량은 악약을 숨기듯 감싸며 그녀의 선실로 데려 갔다. 마충현은 그런 악약을 따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성큼 문 안으로 발 을 들였다. 모동곽의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가 마충현의 사정을 어찌 알랴 ! 그의 눈에는 보주 앞에서도 선실을 들어가겠다고 부득부득 우기는 뿔난 애송이가 있을 뿐……. '오늘 네놈의 팔, 다리 하나를 꺾어 놓지 않으면 내가 사람이 아니 다! 이 일이 문제되어 내가 금적보를 떠나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의 버릇은 고쳐 놓고야 말겠다!' 모동곽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금나수로 마충현의 팔 하나를 비틀어 놓으려 할 때였다. "모 별관은 비키게!" 양백이 성큼 다가와 모동곽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네는 누구인가?" 그가 마충현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사람 좋은 얼굴로 물었다. "보주, 죄송합니다. 그분은, 그분은 본 방의 소방주외다. 아직 강 호 견문이 좁아 결례를……." 천국성이 쩔쩔매며 대신 대답했다. "아! 교타방주의 영윤(令胤)이었군. 허허허! 교타방주의 영윤들은 모두 범 같다더니 과연……." 양백이 마충현을 바라보며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모동곽은 양백의 말에 속이 뒤틀어졌고 천국성은 떨어졌던 심장이 다시 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소?" 그제야 마충현은 여인이 사라져 간 선실에서 눈을 뗐다. "……."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가?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옹으로 인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마옹을 찾고자 결례를 무릅 쓰고 보주의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소방주의 충심이 지나쳐 소란 을 피우고 말았습니다." 다시 천국성이 대신 대답했다. '아!' 부방주, 천국성의 말을 듣는 순간, 마충현은 자신이 양백의 배에 오른 이유를 찾았다. '마옹? 흥! 내가 그 미친놈을 왜 찾아! 자칫 그 놈을 만나면 목이 백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판인데.' 원래 마충현이 양백의 배에 오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이유도 딴전이었다. '가만, 가만! 질녀라 했지. 그럼 양백이라는 이 자는 그 여인의 숙 부!' 마충현의 눈빛이 묘하게 돌아갔다. 예의를 갖춰 자신의 좋은 점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양백의 손을 벗어나 포권지례를 올리려 할 때였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양백의 손은 요구수 였다. 양백이 마충현의 어깨에 힘을 더했다. 마충현은 천 근의 힘이 그의 어깨를 눌러옴을 느꼈다. 그가 어깨를 움칠거릴수록 그 힘은 점점 더 세어져 갔다. "정말 근자에 보기 드문 청년이오. 자신이 맡은 일에 그렇게 열심 이다니……." "아무렴, 아무렴요! 보주께서 소방주를 그렇게 봐 주시니 감읍(感 泣)할 따름입니다!" 천국성이 소리쳤다. '아, 아! 사람은 자기 품만큼 재물을 벌어들인다더니…….' 마충현이 처한 속사정도 모른 체 그는 양백의 위인 됨에 갈채를 보 내고 있었다. 마충현은 죽을 지경이었다. 오줌보가 찔끔거리고 다리는 무거운 짐을 진 노새의 다리처럼 후들 거렸다. 만약 눈앞의 자가 여인의 숙부만 아니었다면 금적보의 보주 고 뭐고 이판사판으로 아미자를 날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에잇! 모르겠다.'하고 개구리처럼 주저앉아 버렸던 가. 체면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버티고 서 있긴 서 있었으나 정말 잠시 후면 그는 선실 바닥을 뒹굴어야 할 것 같았다. 다행히 그때 양백은 장심의 힘을 거두었다. 마충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최대한 어깨를 펴며 눈동자에 힘을 주었다. 범 같이 보일지는 몰라도……. "허허허! 정말 훌륭한 젊은이야." 양백이 소탈하게 웃으며 마충현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악!' 마충현은 튀어나오는 비명을 이를 깨물며 참았다. 그러나 눈 물이 핑 도는 것까지는 참지 못했다. 양백의 다독거리는 손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후학을 아끼는 정성스 러운 손길로 보였겠지만 그에게는 철퇴였다. 살이 떨렸고 뼈마디까지 쑤셨다. "명호를 물어 보지도 못했군. 소형제(少兄弟), 자네의 충심은 이해 하네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줄 수 없겠나? 내게 번거로운 일이 있어 서 말일세." 양백은 이제 은근하게 말을 놓았다. 마충현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또 무슨 수를 쓸까 주춤주춤 물러나기에도 바쁜 처지였다. "더 이상 둘러볼 곳도 없습니다!" 부방주, 천국성도 소리쳤다. "근자에 나의 조그만 재미는 강호의 젊은 영웅들과 한담을 즐기는 것이라네. 소형제, 언제 금적보로 찾아와 줄 수 있는가?" 그 말만은 정말 마충현도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가 크게 머리를 숙였다. "부방주, 아직 바람도 찬데 정말 수고가 많소. 모 별관, 여기 교타 방의 동도들이 배에서 내려 따뜻한 술 한 잔 드실 수 있는 배려를 잊 지 마시오." 양백이 모동곽에게 명했다. "뭐, 그렇게까지야." 부방주의 입이 찢어졌다. 은자 몇 냥에 입이 찢어지다니……. 표두, 표사들이 보기에도 부방 주의 행동은 너무 가벼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부방주라는 자리 가 어떻게 주어지는지 몰라서 하는 생각일 뿐이었다. 부방주가 될 첫째 자격은 손속의 매서움도 아니고 이재에 대한 탁 월한 능력도 아니다. 만나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마음을 거스르지 않는 수완……. 부방주의 눈과 귀, 입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딱 제격인 자였다. 은 자 몇 냥은 표사, 표두들에게는 큰돈일지 모르나 그에게는 하루 벌이 도 되지 않는 돈이다. 그런데도 입을 귀밑까지 째며 좋아라 한 것은 주는 자의 마음을 흡 족하게 하기 위함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주는 자는 방금 까 지 큰 결례를 보인 교타방의 몇 번째 고객인 금적보의 보주였다. "방주께도 기회가 닿으면 한 번 만나자고 전해 주시오. 의기(義氣) 를 나눈지 너무 오래 된 것 같소. 그럼……." 양백은 등을 돌렸다. 천국성은 양백을 향해 포권한 후 교타방 수하들을 바라보고 섰다. "모두 쾌선으로 돌아간다!" 그가 소리쳤다. 교타방 무사들이 우르르 선실을 빠져나갔다. 마충현은 후미에 서서 연신 여인이 사라진 선실 쪽을 바라보며 한 숨을 쉬었다. 발걸음도 잘 떨어지지 않았다. 모동곽이 뒤에서 도끼눈을 한 채 툭 툭 어깨를 밀치지 않았다면 선실에서 뱃전에 이르기까지 꼬박 한 시 진은 걸렸을 것이다. 부방주를 비롯한 표두, 표사들은 양백이 던져 준 은자를 들고 주점 으로 우르르 몰려간 후였다. 마충현은 그들과 떨어져 자신의 소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방주,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시오? 그들은 우리를 고작 그들의 호위 무사 정도로 여길 뿐이오. ……은자의 힘이란 원 래 그런 것이오. 귀신도 부릴 권능(權能)을 가졌다고 하지 않소.' 마충현은 쾌선에서 던진 부방주의 말을 되씹었다. '맞는 말이다.' 그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땀냄새, 피냄새 베인 표국주의 아들을 질녀의 낭군(郞君)으로 택할 리 없었다. 표국주의 아들이 아닌 세가의 아들들도 사위가 되기 위 해 줄을 서고 있을 것이다. 양백은 독신(獨身)이다. 능력만 있으면 조카사위라도 금적보를 이 을 기회도 생긴다는 뜻! 그리고 무엇보다 그만한 미인은 세상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침을 흘리지 않을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화산파의 애송이, 장문천이라는 놈과 자신도 여인을 두고 대뜸 목 숨을 건 싸움부터 벌였었다. 사실 마충현의 더 큰 근심은 빈한(貧寒)한 집안의 내력보다 이미 세간에 알려질 대로 알려진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었다. 사위 될 자의 인품(人品) 정도야 당연히 주위에 물을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마충현은 아버지에게 청해 매파(媒婆)를 보낼 자신이 싹 사라졌다. 청혼(請婚)은 물 건너 간 듯했다. '그 수밖에 없는데…….' 마충현은 아미자를 매만졌다. 자신의 법대로 해결하는 것! 그러나 그 길은 더욱 아득해 보였다. '맞소이다. 양 보주의 무위는 한 지역의 패주에 못지 않습니다. 직 접 칼을 든 지 오래되어 세월 속에 그의 검명(劍名)이 묻힌 것이지요 . 하지만 이 바닥에 제법 구른 자라면 대산관(大散關)의 대혈전 하면 바로 양 보주를 떠올립니다. 맨주먹으로 일어난 자라 당시 양 보주 는 표국에게 물건들을 맡길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로 거상(居 商)이었고 표사였지요. 흑산의 무리들이 홀로 다니는 그를 어찌 가만 히 두었겠습니까. 당시 양 보주는 제법 큰 규모의 상단을 이끌고 대 산관을 지나고 있었는데 흑산의 무리들이 기회다 하고 덮쳤지요. 백 여명이 넘는 무리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흑산의 무리들은 단기( 單騎)로 몰아치는 양 보주의 칼 아래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바 닥에서는 이미 전설(傳說)이 된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칼을 뽑으면 양 보주를 당해 낼 자는 드물 것입니다. 이제 자경대, 표국이 그의 칼을 대신해 주니 칼을 뽑지 않고는 있지만…… 방금 보신 별관 모동 곽만 하더라도 한 때는 황하가 좁다고 날뛰었던 자입니다. 그러나 지 금은 양 보주를 위해 칼을 쓰고 있지요.' 직접 겪어 보지 않았다면 부방주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부방주는 원래 허풍이 심한 자이니……. 그러나 마충현은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다. 그는 모동곽은 물론 양백의 손가락 하나에도 꼼짝 못하고 바동거리 던 자신을 기억했다. "젠장!" 마충현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그림의 떡' 정도라면 두 말 않고 포 기라도 했을 것이다. '매양 일이 어떻게 이런 식으로 꼬일 수 있을까?' 그는 첩첩으로 뒤틀리는 자신의 처지에 분통을 터뜨렸다. 원래 마충현이 양백의 배에 오른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 다. 불쑥 찾아와 무공을 배우라는 외조부! 먼 훗날에 남의 살을 자르고 뼈를 깎는 통쾌함은 있을 지라도 당장 무공을 배우기 위해 겪어야 하는 뼈와 살을 깎는 고통은 싫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생각한 것이 어디론가 훌쩍 달아나는 것! 실현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당장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이 있었다. 바로 한바탕 천하를 주유하며 즐길만한 은자였다. 씀씀이가 몸에 벤 그로서는 은자 없이는 한 발걸음도 다른 땅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 같았다. 은자를 구해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줄 리 없었고 신용이 바닥난 그에게 선뜻 은자를 빌려 줄 자도 없었다. 결국 마충현은 주인의 허 락 없이 빌릴 수 있고 나중에 갚아 주지 않아도 될 은자를 얻기로 결 심했다. 마충현이 머무는 곳은 푸성귀도 귀한 곳이다. 선택은 분하를 오가는 배들 가운데 하나로 정해졌다. 그중 유독 눈 에 띈 배가 바로 하남의 거부, 양백의 배였다. 먼저 내부 구조(構造)를 익히고 훔쳐 갈 물건들이 있는 곳을 확인 해야 했다. 양백의 배에 오르고 선실을 살펴보기 위해 기를 쓰고 싸 운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엉뚱한 일이 터진 것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아니었다. 표현할 길도 없이 내내 가슴속에 아쉬움으로만 자리잡고 있던 여인이 그곳에 있었다. 이후는……. 은자를 훔치는 일도, 무공을 배우라며 닦달할 외조부와의 싸움도, 아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결국 여인과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비감(悲感)함에 짜증과 우 울만이 만신창이로 그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을 뿐! 쾅! 마충현은 문짝을 떨어져라 걷어찼다. 시비(侍婢) 진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걸어나왔다. 마충현은 안색을 찌푸렸다. "네 다리는 왜 그 모양이야?" 그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침까지 멀쩡하던 진란은 한 쪽 다리를 절고 있었다. 진란은 더욱 질린 얼굴이 되어 아무 말도 못했다. "낄낄! 그것 말이냐?" 괴소(怪笑)를 흘리며 나타난 자는 마충현의 외조부로 팽해만의 손 가락 하나를 뺏어 갔던 흑의 노인이었다. "근자에 내가 새로운 무공을 창안(創案)했지. 파천무(破天舞)라는 것이야. 단번에 서른 여섯 대혈(大穴)을 베 나가는 수법이지. 손이 근질거리던 차에 마침 저 아이가 좋은 자세를 취해 주어 한 번 시전 해 보았다. 낄낄낄! 살짝 상흔만 내려 했는데 한 곳은 힘이 너무 실 려 근맥까지 잘라 버린 모양이다." 흑의 노인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말했다. 개망나니 짓이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마충현이었지만 외조부의 한 소리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처박혀 있지 않고!" 짝! 마충현은 외조부로 인해 더 치솟는 울화를 애꿎은 진란의 뺨을 후려치며 풀었다. 진란은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만약 그녀의 아비, 어미가 딸이 이런 꼴을 당할 줄 알았다면 굶어 죽었어도 딸을 팔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또 모를 일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호구라 했으니……. 우당탕! 마충현은 거칠게 방문을 열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에 들어온 후에도 마충현은 울화를 풀지 못해 숨을 씨근덕거렸다. "노망든 늙은이를 상대하는 것 보다 더 힘드는구나. 만약 나에게 힘이 있었다면 외조부라 해도……." 마충현은 중얼거림을 뚝 멈추었다.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마충현의 입가에 음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할아버지!" 그가 밖으로 달려나갔다. 흑의 노인은 수도(手刀)를 놀리며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할아버지……." 마충현이 그 답지 않게 은근한 표정을 지으며 흑의 노인에게 다가 섰다. "무슨 일이냐? 무공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은 게냐?" 마충현이 해살거리며 나오자 흑의 노인은 무슨 수작이 있는 가 싶 어 미리 못을 박았다. 그러나 마충현은 생각과 달리 너무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무공을 배우겠다고?" 흑의 노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한 가지 부탁?" 흑의 노인의 안색이 흐려졌다. 역시 속내가 있음이 분명했다. "어려운 부탁이 아니에요. 저도 좋고 할아버지도 좋은 일이죠." 마충현이 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 있다니……. 나는 세상에 두 사람이 동 시에 좋은 일은 남녀의 일 외는 보지 못했다."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만 보지 말아요. 내가 할아버지께 부탁 드리 고 싶은 것은…… 나와 어떤 여자의 발목을 붉은 끈으로 매 주면 되 는 것이에요." "뭐야? 네놈은 내가 월하노인(月下老人)이 되기를 바라는 게냐?" 흑의 노인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하노인은 남녀를 부부로 맺게 하기 위해 전세(前世)에 양자의 발 목을 붉은 끈으로 잡아매는 노인이다. 결국 마충현의 부탁은 혼사(婚事)였다.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할아버지의 힘이 필요해요. 만 약 그 여인과 맺어질 수만 있다면……." "무공을 배우겠다는 말이냐?" "예!" 마충현이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흐흥!" 흑의 노인은 마충현을 유심히 바라보며 수염을 쓸었다. 표정으로 보건대 이번에는 장난으로 내던진 말은 아닌 듯했다. "전후(前後) 사정이나 들어 보자구나." 흑의 노인이 성큼 방으로 들어갔다. 마충현은 쾌재를 부르며 노인을 따랐다. 제13장 우중(雨中) 후두둑! 후두두둑! 가늘게 내리던 빗방울이 제법 굵다랗게 쏟아지고 있었다. 창틀 사이로 빗물이 줄줄 흘렀다. 객방에는 두 명의 초로인(初老人)이 술상을 대하고 있었다. 외양(外樣)은 달랐으나 풍겨 나오는 분위기는 형제처럼 닮은 노인 들이었다. 그들은 잔을 나누는 것도 잊은 채 주르르 떨어지는 빗줄기만 바라 보고 있었다. 빗줄기를 쫓는 그들의 눈빛은 복잡했다. 먼저 입을 연 노인은 깡마른 얼굴에 움푹한 눈의 노인이었다. "아우, 이렇게 쏟아지는 비를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삼십 년! 아마 그 정도의 세월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구릿빛 얼굴에 매부리코 노인이 대답했다. "삼십 년……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되었나? 마괴파(馬傀坡)를 지나 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성성하던 젊음을 그곳에서 다 바칠 줄 난들 어찌 알았겠습니까. 한 이삼 년이면 돌아올 줄 알았지요." 매부리코 노인의 얼굴에도 회한이 서렸다. "그래도 우리는 다행 아닌가. 반백이 되어서라도 돌아왔으니……." 깡마른 체구의 노인은 창 밖을 보며 술잔을 비웠다. "맞습니다. 마괴파를 같이 넘은 오십 여명 중 이제 살아남은 자는 련주(聯主)와 총노(總老), 사호법(四護法), 우리 십장로(十長老)뿐이 니……." "십장로…… 살다 보니 이런 자리에도 올랐어. 한낱 철기당(鐵騎堂 )의 맹원(猛員)에 불과하던 내가…… 자네는 파벽당(破碧堂)에 속해 있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파벽당의 생존자(生存者)는 내가 유일하지요. 그 때 문에 마괴파를 넘는 순간 조장(組長)도 아닌 향주의 자리가 주어져 있더군요. 당주는 영원히 부재(不在)니 실재로는 바로 당주가 된 것 이지요. 흐흐흐! 으핫하하!" 매부리코 노인이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한바탕 웃음으로 대신했다 . "명봉령(鳴鳳嶺)에서 정파에 쫓겨 패퇴할 때 파벽당은 후미를 맡았 었지. 때문에 파벽당은 피해가 제일 컸어." "선두를 맡은 형님의 철기대도 피해는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어 쨌든 대단한 혈투였지요." "대단한 혈투였지만 또한 기억하기 싫은 혈투지!" 깡마른 체구의 노인이 파랗게 눈빛을 빛냈다. "명봉령의 치욕은 다시 없을 것입니다!" 매부리코 노인도 같은 눈빛으로 소리쳤다. "아무렴! 그 삭막한 곳에서 보낸 삼십 여년 간의 인고(忍苦)의 세 월! 반드시 놈들에게 앙갚음으로 돌려주어야지!" 분하의 물결이 보이는 작은 객잔, 초로인들은 이심전심(以心傳心) 으로 술잔을 들었다. "사매(師妹)는 이틀 후면 다시 련(聯)으로 돌아가겠군." 길고 가느다란 눈썹, 분칠을 한 듯 얼굴이 창백한 이십 대 후반의 사내가 말했다. 후두둑! 후두두둑! 비는 쉴새 없이 내렸다. 겨울을 끝내고 봄을 부르는 비치고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창가에는 긴 머리의 여인이 서 있었다. 어깨와 무릎이 드러날 정도 의 짧은 가죽옷에 목과 손, 발목 등에 흰 붕대를 둘러 맨 여인이었다 . 그녀의 키는 보통 사내의 키 보다 머리 하나 정도가 더 컸다. "어쨌든 놀랬어. 원(元) 장로(長老), 배(裵) 장로(長老)로도 모자 라 사매까지 보내다니…… 사부는 이 번 일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고 계시는가." 비오는 날은 모두 술을 찾는가 보다. 사내도 술잔을 비웠다. "고작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를 상대하기 위해 장로들은 물론 사매 까지 보내다니…… 사부가 나의 능력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의심 스러울 정도야." 사내는 손가락으로 술잔을 돌리며 불만을 터뜨렸다. "이정인이라는 이름 때문이겠지. 놈은 이정인의 의발전인(衣鉢傳人 )이니…… 사부가 사파인들 중에 유일하게 인정해 주는 자는 이정인 뿐이었다." 사내는 연신 술을 찾고 있었다. 눈가가 붉고 눈에도 물기가 서린 것으로 보아 이미 적지 않게 마셨음이 분명했다. 침묵을 지키던 여인이 입을 뗐다. "나를 이곳에 가라 한 자는 사부가 아니에요. 나는 아버님의 명으 로 이곳에 왔어요." 또박또박 끊어지는 말투였다. "구륜전왕(九輪戰王)께서? 음…… 그렇지. 성녀라는 여자를 더 원 한 자는 사부가 아니라 전왕이었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나요?" 여인이 물었다. "있다! 왜 없겠나!" 사내는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내는 성큼 여인의 등 뒤에 섰다. "사매…… 왜 이렇게 쌀쌀해졌는가? 이 년만의 만남이야. 내가 사 매를 얼마나 생각했을지 알고 있잖아." 사내가 쥐어짜는 소리를 내며 여인을 껴안았다. "사매……." 그가 거친 호흡을 삼키며 여인의 가슴을 헤쳤다. 여인의 가죽옷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사내는 여인의 탄력 있는 젖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인은 아미를 가볍게 찌푸렸다. 그녀가 창가에서 등을 돌렸다. 사내의 손이 절로 여인의 젖가슴에서 떨어져 나갔다. 여인은 사내를 보고 섰다. 하얀 피부, 푸른 눈…… 창가에 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던 여인은 중원의 여인이 아니었다. 크다란 눈에 오뚝한 콧날, 붉은 입술…… 흠 잡을 데 없는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를 가진 이족의 미녀였다. "사형, 많이 취했어요. 중원은 술을 많이 마시게 하는 곳인가 보군 요." 여인이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사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마음이 변했나? 대사형에게 마음을 주기로 결정한 거야?" 그가 고함을 질렀다. "사매, 잘 들어라. 본 련의 후계자는 바로 나다. 대사형이 아니란 말이다! 사부께서 몽골의 오랑캐에게 본 련을 넘겨주시겠느냐? 둘째 사형도 마찬가지다. 흥! 그는 양떼나 몰면 딱 어울릴 강족(羌族)의 잡인(雜人)이지. 핫하하!" 사내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여인은 아직도 빗물이 뚝뚝 흐르는 전의(氈衣)를 들었다. "사형은 중원의 술에 취해 우리의 법도 잊었군요. 능력 외에는 아 무것도 자신의 이름 앞에 붙이지 않는다는……." 그녀가 전의를 걸치며 말했다. "나는 능력도 있다! 나에 대한 사부의 편애가 말 뿐이었을 줄 아느 냐?" 사내는 느닷없이 우수(右手)를 내밀었다. 그의 손이 검게 물들며 묵기(墨氣)를 피웠다. "묵령장법(墨靈掌法)이군요." 여인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팟! 그녀도 우수를 내밀었다. 사내는 눈썹을 꿈틀했다. 여인의 손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장인(掌 印)은 역시 사부의 삼대절학(三大絶學) 중 하나인 묵령장법이었다. "가끔 나는 사형들이 사부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요. 자신을 탐닉하는 자들은 남을 좋아할 틈도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누구를 좋아할 만큼 한가하지 않으니까요." "……." 사내는 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매도 사부와 마찬가지인가?"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인은 말없이 전의에 묻은 빗방울을 털었다. 그녀가 어깨를 펴며 입을 열었다. "사형이 경시하는 오랑캐인 대사형의 뒤에는 초원을 질주하던 푸른 늑대들이 있어요. 둘째 사형에게는 강족의 철기들이 있고…… 한 번 쯤 생각해 보기 바래요. 사형의 뒤에는 과연 무엇이 있는지. 흑막… …." 그녀의 입가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가는 미소가 맺혔다. 창백하던 사내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인을 집어삼킬 듯 쏘아보던 그는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수치심을 견딜 수 없었다. 흑막! 그가 이끄는 힘! 여인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흑막의 힘은 두 사형이 이끄는 힘은 물론 여인의 세력과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의를 다듬고 난 여인은 죽립(竹笠)을 썼다. 전신을 덮는 전의에 죽립으로 얼굴까지 가리자 여인의 외양은 완전 사내였다. 여인은 사내를 홀로 둔 채 객방을 걸어나갔다. 그녀가 묵고 있는 곳은 객잔의 별채다. '어떤 자일까?' 빗속을 걸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중원 배교의 전왕! 중원에서는 전왕이라는 말 대신 호교신장이라는 말을 쓴다고 들었 다. 이미 오래 전에 서로 다른 교처럼 벽이 쌓여 버렸지만 그래도 배 교는 배교다. 여인 역시 배교도였다. 중원 배교의 일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여인의 관심을 끈 것은 호교신장이라는 자의 행보였다. 젊은 나이에 홀로 천하를 상대하며 교와 성녀를 지키는 자! 이상할 정도로 뭉클한 감동을 느꼈었다. 중원 배교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자에 대한 배교 일족으로서의 연민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함이 느껴졌다. 아마 비무로 무공을 따지면 사형들이 더 나을 것이다. 무위의 우열에서 느껴지는 강함은 아니었다.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녀는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강한 기파를 느꼈었다. 사부와 사형들은 전혀 그 같은 기파를 느끼지 못하 는 눈치였다. 같은 배교도이기 때문에 자신만이 특별한 느낌을 받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어떤 자인가는 조만간 밝혀지겠지. 이틀 후, 기회가 닿으면 먼저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인은 죽립을 들었다. 빗방울이 이내 그녀의 얼굴을 적셨다. 그녀는 다시 죽립을 눌러 쓰고 별채로 향했다. 알 수 없는 향이 계속 그녀 주변을 맴돌았다. 그녀는 그 향을 중원 이라는 천 리 타국(他國)의 특별한 냄새 정도로 생각했다. * * * 빗줄기는 거칠었지만 분하의 물결은 잔잔했다. 봄을 부르는 양으로 는 조금 많은 양이라고는 하나 분하의 물길에 영향을 줄 정도로는 부 족했다. 유선은 빗줄기가 뿜어내는 수막을 뚫고 유유히 항진했다. 명강량과 악약도 선창(船窓)에 부딪히는 이른 봄비를 감상하고 있 었다. 악약은 빗소리가 들리자마자 후다닥 명강량의 선실로 왔었다. 비가 무척 반가웠던 모양이었다. 봄을 부르는 비는 명강량에게는 조금 우울했다. 계절이 변하면 서로 걸어가야 할 길도 변하리라. 하지만 명강량은 곧 자신의 우울을 잊었다. 성녀의 잡담은 언제나 일상사에서 그의 시선을 떼게 한다. 묵가(墨家)를 들려주었고 한 편의 자작시(自作詩)도 보여 주었다. 이야기가 시들해지자 시권(猜拳:가위, 바위, 보와 비슷한 놀이)을 하 자고 했다. 성녀는 시권 같은 단순한 놀이에도 쉽게 빠져든다. 누가 볼까 머쓱해 하며 명강량이 악약과 함께 시권을 하고 있을 때 였다. 똑! 똑! 선실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두 명의 시동이었다. 시동들의 손에는 화로와 다과(茶果)가 들려 있었다. "보주께서 비 때문에 선실이 눅눅할 것이라며 불을 피워 들이라 했 습니다." 시동이 화로를 놓았다. 양백의 마음 씀씀이는 그와 같았다. 세세한 부분까지 배려를 잊지 않았다. 악약은 불을 보자 또 눈빛이 달라졌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화신(火神)이 든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했다. 그녀는 불을 어루만지듯 쓸었다. 불꽃이 마른 짚단을 던진 듯 확 피어올랐다. "강량……." 악약이 눈동자에 불씨를 담고 불렀다. "갑자기 주강(珠江)의 꽃배라는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그녀가 불꽃을 이리저리 날리며 말했다.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예요." '아버지?' 명강량은 흘깃 악약을 바라보았다. 성녀의 입에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성녀들은 아버지가 없다. 그들은 천상제(天上祭)를 통해 수태(受胎)를 한다. 하늘의 불을 받 아 수태를 해 성녀의 피를 다음대로 전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 지가 있을 리 없었다. 물론 지금의 성녀도 그렇게 태어났을 것이다.2 악약은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예전에 곤륜(崑崙)의 깊은 곳에서 각고(刻苦)의 수련을 한 장자( 長者)가 있었다고 해요. 오랜 세월 동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는 도를 깨치게 되었어요. 도를 깨친 그는 하산을 했답니다 . 자신의 깨우침을 세상에 널리 알릴 생각이었지요." 투다닥! 빗방울이 연신 선창을 때렸다. "긴 강에 배를 띄웠어요. 그 강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법(傳法) 을 하고 그 강이 끝나는 곳에서 다른 세계로 들리라 마음을 먹은 것 이지요." 화르륵! 악약의 손길에 불씨가 폭죽처럼 흩날렸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사람들을 만나며 굽이친 강물을 내려갔어요. 장자에 대한 소문은 곧장 세상에 퍼져 나갔어요. 그를 보기 위해 사 람들은 연일 구름 같이 모여들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명강량은 선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문을 열고 싶었다. 후끈한 열기에 땀이 벨 정도였다. 화로의 열기에 더위를 느낄 정도의 그가 아니다. 화기를 받은 화령주가 열을 뿜어내고 있음이 분명했다. "장자는 강가의 마을에서 어떤 여인을 보았답니다. 장자는 한 눈에 그 여자에게 반해 버렸어요. 여인을 배에 태웠지요. 꿈 같은 나날이 었다고 합니다. 그 세월 속에 배는 끝없이 흘러갔지요." 악약은 소매를 몇 번 휘저었다.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것을 끝으로 화로는 하얀 재만 남기고 식어 갔다. 명강량의 이마에서 땀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배를 얼마 동안 탔는지 모릅니다. 장자는 그날도 여인과 꿈 같은 하루를 보낸 후 뱃전에 섰죠. 순간, 장자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답니 다. 강가의 정경(情景)이 너무도 눈에 익었기 때문이죠.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요? 배는 처음 장자가 배를 띄웠던 그 장소로 되돌아 와 있었던 거예요. 장자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였어요. 한 사내가 강에서 나타났어요. 강량, 그가 장자에게 무엇이라고 한 줄 알아요?" 악약이 물었다. 명강량은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는 이렇게 말했어요. 대인께서는 주강의 꽃배를 타셨군요." 악약은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끝냈다. '주강의 꽃배…….' 알 듯한 이야기 같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명강량이 관심은 '아버 지'라는 말이었다. 성녀를 십 여 년 간 키워 준 그 분이 무척이나 궁 금했다. 악약은 명조를 불렀다. "누구나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죠. 길이 다른 만큼 꽃배를 바라보 는 눈도 각기 다를 거예요. 나는……." 그녀는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언젠가 이야기 해 드리도록 하겠어요." 그녀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그녀는 잣을 한 줌 탁자에 뿌렸다. 명조가 신을 내며 탁자에 놓인 잣을 쪼았다. "아버지의 무릎에 기대 이 이야기를 들었죠. 아! 그러고 보니 아버 지를 잊고 있었군요. 나는 참으로 무정(無情)한 여자예요." 악약은 묻지 않아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지 않고 할아버지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을 거예요. 철 따라 꽃이 피고 지는 곳이었어요. 겨울에는 온 세상 가득 눈꽃이 날리고……." 그녀의 눈빛이 회상으로 몽롱하게 젖어 갔다. 십 몇 년 간 교에는 성녀가 없었다.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인들의 교에 대한 공격은 이번만이 아니다. 이번처럼 집요하지는 않았지만 기회가 닿으면 정파인들은 배교 타파 의 기치를 드높였었다. 가까이 전대에도 적들은 공세를 펼쳤었다. 전대 성녀가 천상제로 현 성녀를 뱃속에 안고 있던 그 해의 일이었다. 그때도 사부와 교도들은 성녀를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었다. 그 런데 그 와중에 성녀를 잃어버렸었다. 적들의 공세가 끝난 후 교도들은 성녀를 찾아 나섰다. 전대 성녀는 이내 발견되었다. 돌무덤 안에 차디찬 시체로 누워 있 었다. 교도들은 통곡을 하며 이번에는 아기 성녀를 찾았다. 성녀에게 서 해산(解産)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아기 성 녀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상심의 세월 속에 사부는 한 통의 서신을 받았다. 의외로 그 서신은 교도들과 일체 접촉을 하지 않는 광명신장의 서 신이었다. 광명신장은 서신에 성녀가 있는 곳을 밝혀 두고 있었다. 사부는 부랴부랴 성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십 여년만에 광명신장이 말해 준 그곳에서 사부는 새 성녀 를 볼 수 있었다. 철 따라 꽃이 피고 지던 그곳은 사부가 성녀를 찾아갔던, 성녀가 교로 돌아오기 전까지 지내던 그 곳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할아버지를 따라 보내지 않으려 했어요. 나를 데려 가려던 할아버지를 죽이려고까지 한 걸요. 몇 차례 싸움도 벌어졌어 요. 그 싸움 때문에 여름이면 정자(亭子)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 던 느티나무도 동강 나고 말았어요. 참 아끼던 나무였는데……." 명강량은 퍼뜩 시선을 들었다. 성녀는 교의 모든 것……. 십 여년만에 찾은 성녀! 사부는 절대 성녀를 포기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명강량 자신이라 하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녀를 교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반대로 성녀를 십 여년간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키운 그 분은 성 녀를 선뜻 사부에게 내어 줄 리 없었다. 당연히 싸움은 있었을 게고……. 싸움을 벌였다기에 명강량은 처음에는 말다툼 정도로 생각했다. 주 먹을 들어 사부와 싸울 자가 천하에 몇 명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그 렇게 싸웠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동강 날 정도로……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싸웠는데도 사부는 몇 차례나 성녀를 교로 데려오는데 실패했 다. '누구인가?' 성녀를 키워 준 그 분은 최소한 사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고수임에 분명한 듯했다. "처음에는 나도 할아버지를 따라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매일 밤 어머니가 나타나 계속 할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하시잖 아요. 그리고 나도 왠지 할아버지를 따라가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 서 결국 말씀드렸죠. 할아버지를 따라가겠다고……." "그 분이 무척 섭섭해 하였겠군요." "무척 섭섭해 하셨죠.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으려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에요. 나를 얼마나 아끼셨는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그 분이 보내 주시던가요?" "아버지는 아셨던 것 같아요. 나를 잡지 못하리라는 것을…… 다시 는 보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떠나는 날에도 얼굴을 보이지 않으셨죠.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악약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 뒤로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버지를 알아요. 당신께서는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번복 하지 않으시는 분이시죠. 아버지께서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말을 내 던졌을 때는 이미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 놓 여진 거예요." 악약의 눈가에 결국 눈물이 맺혔다. "강량, 그렇게 나는 나를 가장 아껴 주던 분과 헤어짐으로써 우리 교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어쩌면 마지막도……." 악약은 입을 다물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명강량은 그 무거운 침묵이 싫었다. 분위기를 서둘러 바꾸어 보고 싶었으나 원래 그의 말재간이라는 게 너무도 뻔했다. "한 번 찾아가 보시지 그랬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무척 보고 싶 어 하셨을 것입니다." "아니에요." 악약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 너무 고통이에요. 아버지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나를 다시 보 지 않겠다고 하신 것일 거예요." 명강량은 악약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비수로 찔리듯이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사실 한 번 가 본 적은 있어요. 할아버지 몰래…… 떠난다는 말도 못하고 왔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내가 할아버지를 따라 오기 일 여 년 전에 경도(京都)로 떠났던 분이에요. 어느 날, 문득 나는 그분이 돌아온다는 것을 안 거예요." "누구……." "사형(師兄)! 참 좋은 분이었지요. 밤중에 몰래 만나고 왔답니다. 아!" 악약은 갑자기 손뼉을 쳤다. "사형을 생각하니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어요?" 그녀는 소매를 뒤졌다. 소매에서 그녀가 꺼낸 것은 비단 주머니였다. 그녀가 탁자에 주머니에 든 것을 쏟았다. 금화(金花), 금비녀, 금환(金環), 작은 금괴(金塊) 등이 우르르 쏟 아졌다. "양 아저씨가 가지고 놀라고 준 것이에요. 강량은 가진 것이 있나 요?" "무엇을……." 명강량은 영문을 몰라 했다. "가진 것이 없다면 내가 빌려 드리겠어요." 악약은 금붙이를 나누어 반을 명강량에게 내밀었다. "쌍육(雙六)을 아세요?" 악약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쌍육은 주사위 놀이다. 길거리 패로 떠돈 명강량이 쌍육을 모를 리 없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네요. 사형을 생각하니 갑자기 쌍육이 생각났어요. 사형에게 배웠거든요. 강량, 양 아저씨께 주사위를 얻어 쌍육을 하는 거예요. 시권 보다 훨씬 재미있을 거예요." 악약은 흥분된 표정으로 좋아라 했다. 분위기를 바꿀 필요도 없었다. 명강량은 조용히 시동을 불렀다. 주사위를 가져오라고 했다. * * * '유향경천문의 문주가 금의위의 천호였다니…….' 모태명은 서신을 탁자에 던지며 태사의에 길게 몸을 기댔다. '이름난 무가의 자손, 동창의 환관까지 그의 뒤를 봐주고 있다. 유 향경천문의 뒤에도 동창이 있고…….' 모태명은 그간 유향경천문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귀를 총동원(總動 員) 했었다. 그리고 결과는 지금 한 장의 서신으로 서탁에 놓여져 있 었다. 투자된 시간과 은자에 비하면 형편없을 정도의 정보(情報)였다 . 무엇보다 서신에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었다. '능운공작 단원홍, 도대체 그는 무엇을 위해 유향경천문을 세우고 강호에 뛰어들었다는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모태명은 철칙이 있다. 안개 속에 쌓인 곳은 절대 발을 들이지 않는……. 그는 그만큼 정보를 중시했다. 정보는 타인의 예측된 행동을 알려준다. 타인의 예측된 행동이 있 어야면 자신도 예측된 행동을 할 수 있는 법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 )에 서 줄타기를 하듯 살아온 그가 아직 주위의 흥망 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모태명은 강호인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갈대 보다 더 간사(奸邪)한 자!'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부는 바람에 따라 허리를 굽히는 능력은 아 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음을……. 타인의 성쇠(盛衰)를 예측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과감히 신의를 버릴 수 있었고 어떤 때는 굴종과 타협도 택했다.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했던 힘이 바로 정보였다. 때문에 모태명은 관부와 강호에 많은 자신의 눈과 귀를 박아 두었 었다. 그런데 그 눈과 귀가 총동원되었어도 결국 가장 얻고자 하는 유향 경천문에 대한 비밀을 얻지 못했다. 유향경천문의 비밀은 몇 몇 소수(小數)만이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더 이상 유향경천문에 대해 알기를 포기해야 함이 옳을 것 같았다. 예측할 수 없는 자들에 대한 모태명의 태도는 일단 호의(好意)의 추파다. 나중에 칼을 맞대고 싸울 망정……. 하지만 모태명이 알아낸 한 금의위의 천호이자 유향경천문의 문주, 단원홍이라는 애송이는 씨도 먹힐 인간이 아니었다. 작자의 윗선에 손을 써야 한다는 뜻인데 그 위에 있는 자는 동창의 환관, 바로 대명(大明)의 실세(實勢)다. 한낱 무부에 불과한 모태명 으로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알 수도 없고 힘도 미치지 않는 곳, 유향경천문! 모태명은 중압감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태사의를 까딱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앉아서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발 빠른 선택으로 강호의 험곡(險谷) 을 빠져 나왔다고 자부하는 자신의 적성에도 맞지 않았다. 그리고 강 호는 가만히 앉아 있는 자를 항상 좋은 재물로 삼았다. '상유, 그 늙은이를 그때 너무 쉽게 보내 버렸어. 위험을 좀더 과 장하고 싸움을 충동질 했어야 했는데.' 모태명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이전에 상유를 불러 유향경천문의 위험성(危險性)을 설하고 당장이 라도 칼을 뽑아들 듯이 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정말 그때는 유향경천문이 오리무중(五里霧中)이었다. 그래서 먼저 손을 써 유향경천문의 반응을 보려 했다. 물론 먼저 유향경천문에 시비를 걸 자는 그가 아니었다. 왜수, 상유! 자기 고집밖에 내세우지 않는 그 늙은이를 구슬리고 겁주면 어떤 형태로든 유향경천문을 걸고넘어지리라 믿었다. 모태명은 그 과정에서 유향경천문이 사파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가지 고 있는 지 확인할 생각이었다. 과연 유향경천문의 칼끝이 배교만을 향하고 있는지……. 그러나 그의 계획과 다르게 상유는 움직여 주지 않았다. 모태명은 상유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를 먼저 그의 둔감(鈍感) 함에서 찾았다. 상유는 원래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똥만 조심하는 자였다.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을 당장 뺏으려는 자가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모태명은 잊은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역시 상유를 만날 당시 유향경천문에 대한 위험 성을 보다 강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데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는 유향경천문의 배후에 동창이나 금 의위가 연관되어 있는 줄은 몰랐으니…….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다시 한 번, 상유를 부추겨 보아야겠군.' 동창과 금의위가 있다는 것이 확인된 이상 상유를 유향경천문과의 시비에 끌어내는 것은 시간 문제라 모태명은 생각했다. 자신의 아집이 강한 자일수록 반대로 떠도는 소문에 귀를 더 잘 기 울인다. 모태명은 자신의 눈과 귀과 충분히 상유를 끌어낼 만한 소문들을 만들어 내리라 믿었다. '상유는 그렇게 몸으로 유향경천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줄 테고 …… 배교!' 모태명의 생각이 배교로 옮겨갔다. 배교는 지금 유향경천문과 싸우고 있다. 따라서 그가 배교에 접근해 갈 방법은 유향경천문에 대한 적의밖에 없었다. 만약 유향경천문이 배교뿐만 아니라 사파대척결에 나선다면 당연히 그는 배교와 나란히 서 유향경천문과 싸울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 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성급히 유향경천문에 이빨을 드러내어 화를 자초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태명은 지금 성급히 배교에 접근하려 한다. 그 들의 수뇌, 호교신장을 만나자는 청도 보냈다. 같이 싸우는 일이 아니라도 차후 배교는 모태명에게 그럴듯한 쓰임 이 있을 듯했다. 향후 몇 년간 강호를 움직이는 축은 유향경천문이 될 것이라는 것 은 누구도 부정 못하는 현실이다. 만약 싸움을 비켜 갈 수 있다면 흑룡방은 유향경천문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 자명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의 동료를 팔아먹는 일은 모 태명에게는 별반 특별한 일도 못되었다. '배교는 흑룡방과 유향경천문의 관계를 녹녹히 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배교와의 끈을 지금보다 더 두텁게 해야 한다.' 두텁게 해 두어야 유향경천문에 생색을 낼 양도 많아질 것이다. 그 러나 만나야 일이 풀릴게 아닌가. 배교의 호교신장으로부터 만나자는 답신은 아직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할 일은 기다리는 일밖에 없군.' 모태명은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중의 갑갑함은 가시지 않았다. 유향경천문 주위를 겉돌고만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보다 직접적인 조치를 찾아야 했다. 그러나 모태명의 고민은 그 조치를 찾지 못하는데 있었다. 여전히 유향경천문은 안개 속에 있었다. '위험 수라도 던져 보아야 하나.' 모태명은 흑룡방을 직접 움직일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 개를 저었다. 혼동 속에 빠지면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지 않 았다. 흑룡방을 초토화(焦土化) 시키기 위해 핑계 거리를 찾고 있는 자는 강호에 부지기수였다. 모태명이 이런저런 생각에 몰두하며 대전을 쳇바퀴 돌 듯 맴돌 때 였다. "방주!" 대전으로 염소 수염의 중년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손에 서신 한 장을 달랑 들고 들어오는 그는 비서각(秘書閣)의 각주(閣主), 성 렴(成廉)이라는 자였다. "방주, 이것을 보십시오." 비서각주, 성렴이 서신을 내밀었다. 모태명은 서신을 펼쳤다. 서신의 내용의 간단했다. - 지급(至急). 흑막(黑幕) 소속, 원세웅(元世雄). 전력(前歷), 단혈철각련(丹血鐵脚聯) 철기당 소속 맹원. 흑막 소속, 배천화(裵千化). 전력, 단혈철각련 파벽당 소속 맹원. 흑어(黑魚) 십칠호(十七號). 모태명의 안색은 일시에 변했다. "단혈철각련! 흑막에 어떻게 단혈철각련의 잔당이……." 그가 서신을 꽉 움켜쥐었다. 단혈철각련! 단혈철각련은 삼십 여년 전, 구대문파에 맞서 정사대 전(正邪大戰)을 이끌었던 사파 최대의 방파였다. 련주(聯主)는 바로 정사대전의 패배 이후, 정파에 의해 참담하게 새외(塞外)로 쫓겨나야 했던 흑도의 조종, 철심흑사 곽부! "원세웅, 배천화, 이 자들은 살수인가?" 모태명이 다급히 물었다.7 "방주도 아시다시피 단혈철각련과 흑막 사이에는 삼십 년의 시차( 時差)가 있습니다. 아무리 체면 없는 무부라 해도 살수로 행세하기에 는 열없는 나이지요. 살수당(殺手堂)을 만들어 나타났다면 모를까." "그래서 흑막 내에서의 직책을 물었다!" 모태명이 고함을 질렀다. "죄송합니다. 직책은 적어 놓지 않고 있군요." 성렴은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흑어 십칠호는 어떤 자인가?" "처음부터 방주를 따라다녔던 자입니다. 정사대전에도 참가한 줄 압니다. 나이 때문에 지금은 본 방을 떠나 황하를 오가는 장사치로 변해 있지요." "그래?" 모태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게 종적을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던 흑막! 정사대전에 참가했다면 단혈철각련의 인물과도 제법 안면이 있을 것이다. 아마 그 때문에 우연히 꼬리가 잡혔을 것이다. "음……." 모태명은 턱을 매만졌다. 그의 눈동자가 바쁘게 돌아갔다. 흑막은 근자에 강호 도상에 명호를 드러내고 있는 살수당이다. 강 호에 언제나 몇몇 살수당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강호의 풍파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경미한지라 언제나 모태명의 관심 밖이었다. 하지만 흑막은 달랐다. 우선 규모부터가 다른 살수당과 달랐다. 보통 살수당의 경우 큰 규 모라 해도 살수의 인원이 이십 여명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흑막의 경우 조사한 바에 의하면 백 여명에 이르는 듯했다. 한 방파를 세워 도 될만한 인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점은 청부의 가림도 없었다. 살수당은 대체로 상인 이면 상인, 정객이면 정객 등과 같이 특별한 부분에 붙어 활동한다. 그러나 흑막은 청부를 가리지 않았다. 소방파(小幇派) 간의 싸움에도 참가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 때문에 모태명은 흑막에 대한 조사를 명했었다. 그런데 불쑥 흑막의 이름 앞에 단혈철각련이 튀어나오다니……. "단혈철각련의 잔당이 흑막에 있지 마라는 법은 없습니다. 칼밥을 먹던 자들은 칼밥을 찾아 떠도니 흑막에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모태명이 지나치게 흑막에 대해 고심한다고 생각되었던지 성렴이 한 마디 내던졌다. 딴에는 위한다고 던지 말이었으나 지금 모태명의 심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말이었다. 모태명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네놈은 그 사이 여벌의 목을 하나 만들어 두었나 보구나. 각주라 는 자가 고작 할 말이 그것밖에 없단 말인가!" 그가 노호를 터뜨렸다. 성렴은 찔끔 목을 움츠렸다. "원세웅, 배천화! 흑어 십칠호가 이 놈들의 종적을 찾은 곳은 어디 냐?" 모태명이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물었다. "협현(陜縣)에서 꼬리를 잡았다고 합니다. 잠깐 하는 사이에 종적 은 놓쳤으나 어디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미 추적자들은 보 냈습니다." 성렴이 기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협현은 분하의 물이 황하에 맞부딪히는 곳에 있다. "그곳에 사람을 더 보내라. 동원 가능한 모든 자들을…… 반드시 놈들의 종적을 찾아야 한다. 서둘러라!" 모태명이 음산한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존명!" 성렴이 읍으로 명을 받았다. 그가 총총히 대전을 걸어나갔다. 모태명은 중병을 앓던 사람처럼 지친 표정으로 털썩 태사의에 몸을 던졌다. '곽부…….' 흑도 제일의 고수, 사파의 조종! 모태명에게는 먼저 공포로 다가오는 자……. 삼십 여년 전, 단혈철각련이 이끄는 흑도연합(黑道聯合)에 모태명 도 한 무리의 수하들을 이끌고 참가했었다. 하지만 종국에 그는 몸을 뺐다. 눈으로 보기에는 정사의 힘이 비등한 것 같았으나 실제로는 사파연합의 힘이 절대적인 열세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파는 싸울 수록 모래알처럼 결집력(結集力)이 흩어졌고 정파는 반대였다. 의기 로 뭉친 자와 눈앞의 이익으로 뭉친 자들과의 싸움이니 그 결과는 처 음부터 예정되어 있었다. 모태명은 눈치 빠르게 대세를 읽고 중도에서 단혈철각련과 결별을 선언하려 했다. 하지만 결별을 선언한다고 해서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인들이 그를 용서하겠는가? 이미 그의 칼에 목숨을 잃은 정파인 들이 한둘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는 그만한 대가를 정파인들에게 치뤄 주어야 했다. 그 래서 비밀리에 정파의 수뇌들을 만나 그만한 대가를 치러 주었다. 강 호의 비밀로 남은 일!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살아남기는 했지만 그 당시의 일은 모태명에게 여전히 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왜냐하면 곽부가 죽었다는 소문은 강호 어디에서도 아직 들리지 않 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수, 상유는 용의 꼬리가 되기 싫어 곽부가 싫다고 했다. 모태명 자신도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모태명은 곽부의 꼬 리에 달라붙는다 하더라도 그렇게 불만은 없었다. 곽부가 영원히 그때의 비밀을 모르고 넘어간다면…….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다. 비밀이 지켜진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겠으나 만약 비밀이 밝혀 진다면 그가 더 두려워해야 할 자는 단원홍이라는 자가 아니라 곽부 였다. 단원홍이라는 자에게는 최소한 편안한 죽음은 얻어낼 자신은 있었으나 곽부는 전혀 아니었다. 모태명이 단혈철각련이라는 이름에 과민할 정도로 놀라는 이유였다 . * * * 콸! 콸! 콸!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살은 빗물로 제법 불어나고 있었다. "참 잘도 오시는군." 원상은 모닥불을 뒤지며 빗물에 씻기는 산하를 바라보았다. 모닥불 위에는 넝마 같은 옷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불 위의 깨 어진 솥에는 구수한 냄새가 풀풀거렸다. 솥에 삶기고 있는 것은 돼지 머리였다. 고사가 끝나자마자 냅다 들 고 온 것이다. 원상은 코를 킁킁대며 돼지 목살을 한 점 뜯어 입에 넣었다. "잘 익었군." 그는 기름 종이를 깔고 그 위에 소금을 한 점 뿌렸다. "비오는 날, 좋은 안주에 술도 있고……." 그가 옆구리에 찬 호로병을 풀었다. "뭐 하는 게야? 그것은 내가 얻어 온 것이라구! 당연히 목살은 내 차지라구!" 다리 아래 개천에는 어린 거지가 고추를 달랑거리며 몸을 씻고 있 었다. 그가 원상을 향해 소리쳤다. "이 놈아, 먹지 말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오는 날 아니면 언제 몸을 씻어 보겠어! 벗겨도 벗겨도 때가 계속 나온단 말이야! 거기 돌멩이로 등에 때나 좀 밀어 줘. 깨 끗하게 씻고 난 후 돼지 머리를 먹으면 맛도 더 좋을 거잖아." "나는 씻지 않아도 맛만 좋다. 그리고 이 놈아, 너는 정말 굶어 죽 기로 작정을 한 모양이구나. 너무 거지가 깨끗하면 밥 빌어먹기 힘드 니라. 깨끗한 거지는 또한 우리 개방의 수치이기도 하지." 원상은 돼지 머리를 솥에서 꺼냈다. "아이구! 두서너 시진 푹 고았더니 살이 절로 떨어지는군." 그는 손가락 굵기로 목살을 썬 후 맛있게 한 점을 우물거렸다. "젠장!" 어린 거지는 눈을 흘겼다. 그가 개천을 걸어나와 알몸으로 불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맞는 말이야. 씻어 봐야 봐 줄 사람도 없고…… 다른 문파들은 여 자 동도들도 많던데." 어린 거지가 투덜대며 손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삼켰다. "그것이야말로 나 또한 불만이었다. 왜 여자 거지들은 없는지…… 세상은 남자 보다 여자가 쓰일 때가 더 많은 모양이지. 얌! 얌!" "이건 말이야 내가 총타의 노삼(路三)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여 자는 남자 보다 입이 하나 더 많다고 해. 입이 둘이라 일도 배로 할 수 있다더군.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남의 밥을 빌어먹지 않아도 잘 산 다더라구." "호오……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런데 나는 아직 입이 둘인 여 자를 보지 못한 듯 한데." "나도 보지 못했어.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있겠지. 노삼이 나에게 실없는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아하! 노삼, 그 놈은 정말 모르는 것이 없구나." 원상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호로병을 들이켰다. "그래서 내가 늙은 거지는 나이를 헛 먹었다는 게야. 도대체 아는 것이라고는 주먹질밖에 없으니…… 칼 좀 줘 봐." 어린 거지가 원상을 칼을 뺏어 돼지 귀를 싹둑 잘랐다. 그가 오도독거리며 귀를 씹었다. "늙은 거지,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어. 주먹질 말이야. 늙은 거지 를 따라 죽자고 주먹질을 배우고 있으니 나중에는…… 나중에는 마옹 정도는 가볍게 이길 수 있겠지?" "마옹? 하필이면 왜 상대가 마옹이냐?" "이곳 분타에 잠깐 들렀었지. 온통 마옹에 대한 이야기뿐이더라고. 화산파의 우제준이라는 자도 죽였다나…… 모두 무서워하더군. 이결 제자, 한 명은 마옹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살성(殺星)이 될 것이라 고 했어. 훗일, 덜컥 그를 만났다고 생각해 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를 이겨야 하잖아." "이 놈아, 문자를 배우려면 제대로 배워라. 전인미답이 아니라 전 대미문(前代未聞)이다. 하긴 만나는 놈들이 모두 노삼 같은 놈들이니 …… 소개야, 마옹을 이기는 것은 지금 네가 하는 바에 달려 있다. 열심히 무공을 익히면 이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는 것이지." "또 얼렁뚱땅 넘어 가려 하는군. 그럼 다시 묻겠어. 노개와 마옹의 사부라는 자가 싸우면 누가 이겨?" "모르겠다. 싸워 보지 않았으니…… 손을 합쳐 본 적은 있지." "손을 합쳐 본 적이 있다니?" "이정인은 모르겠고…… 실력이 따르지 못한 사람은 분명 있었지. 철심흑사 곽부라는 자다. 삼십 여년 전, 나는 그와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않았어. 놈의 섭심 마도(攝心魔刀)에 당장 목숨을 잃을 판이었지. 그때 다행히 이정인이 길을 지나고 있었다. 이정인이 연수로 도와준 덕에 나는 간신히 목 숨을 구할 수 있었다." "엥? 그럼 이정인에게 신세를 졌다는 말이……." "그래, 구명지은(求命之恩)이지. 배교가 어떤 일을 해도 내 입장에 서는 할 말이 없는 이유다." 원상은 호로병에 든 술을 꿀꺽 삼켰다. "전대 마옹 보다 센 자가 있었구나. 곽부라 했지?" "그렇다." "기억해 두어야겠군. 놈의 제자들을 만나도 무조건 출행랑이다. 또 없어? 솔직히 털어놓으라고. 체면 차린다고 숨겨 두었다가 나중에 애꿎은 내 목이 달아나도록 만들지 말고!" "소림의 무태, 무당의 자허, 화산의 비운(飛雲)…… 모두 일세를 풍미한 고수들이지. 하지만 그들의 이름은 기억할 필요가 없다. 싸울 일이 없을 테니……." "그럼 곽부라는 자와 이정인의 제자만 기억하면 되겠군." "한 사람 더……." "잉? 또 있어?" 어린 거지는 눈을 치켜 떴다. "장권을 단련하겠다면 누구 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이름이지. 백운 룡! 목숨을 걸고 싸울 상대도 아니고 네 나이로 보건대 싸울 일도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너는 그 이름을 기억하라. 장담하건대 그 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세상에서 더 이상 이겨야 할 자를 찾지 못할 것이다." 원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백운룡? 곽부라는 자보다 강했던 모양이군." "물론…… 부끄럽게도 나는 그의 백초지적(百招之敵)도 되지 못했 다. 언젠가 그의 후인(後人)이 강호에 발을 들이겠지. 너는 그때를 대비해서라도 수련을 게을리 하지 마라." 어린 거지는 못 들은 체 했다. 지금 행하는 수련만 하더라도 매일 팔, 다리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다. 그는 열심히 돼지 머리만 팠다. "소개야. 네 이름이 뭐라 했느냐?" "장사(張四)! 이오(李五)! 소칠(小七)! 두칠(頭七)…… 너무 많아 기억도 못하겠다." 어린 거지가 돼지 머리에 붙은 살을 훑어 내며 말했다. "등중용(鄧中庸)! 소개, 앞으로 네 이름이다." "등중용?" "천문(天文)을 보고 고심 끝에 지은 이름이다. 성은 네 사부, 등장 평 그 놈 것을 빌었고…… 중용, 기억하라. 앞으로 개방은 네 어깨에 모든 것을 걸게 될 것이다." 원상이 어린 거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근자에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천문을 읽고 난 후에는 그 불안감이 더 심해졌다. 자미성(紫微星)이 조금씩 조금씩 빛을 잃어 가고 있었다. 천제(天帝)의 궁(宮)이 흔들린다는 것은 대 변란(大變亂)의 예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원상은 그 변란으로부터 개방을 지켜 낼 자 는 눈앞의 어린 거지 뿐이라 믿고 있었다. * * * 금적보 총관, 종현수는 후원(後園) 지하에 있는 밀실(密室)에 서 있었다. 조화(造花)로 꾸며진 제단, 그 위에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꽃! 그 와 보주, 양백만이 아는 교의 숨겨진 제단이었다. '종 총관, 이 불이 꺼지는 날 나는 배교와의 인연을 다 할 것이다. ' 종현수의 보주, 양백의 말을 떠올렸다. 보주는 기실 교와의 인연을 끊을 핑계 거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이 불이 꺼지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화가 꺼질 리 없었다. 화로로 흐르는 기름은 언제나 넉넉했다. 지하 깊숙한 곳이라 비바 람이 불길을 끌 리 없었다. 보주가 자신의 손으로 화로를 끄기 전까지는 성화는 이곳에서 영원 히 불꽃을 피울 처지였다. 보주의 마음은 그와 같았다.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교를 벗어나고 자 하나 자신의 손으로는 교와 결별을 주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종현수는 이제 자신이 보주를 위해 교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 했다. 그는 화로로 흐르는 기름관을 잡았다. '대천대계(大天大界)의 명왕이시여! 나의 배덕(背德)을 용서하소서 . 나의 배덕의 반의 책임은 세상을 환란 속에 놓이게 한 당신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우둑! 종현수는 화로로 흐르는 기름관을 거칠게 끊었다. 화로로 흐르던 기름이 제단으로 뚝뚝 떨어졌다. 종현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제단으로 뚝뚝 떨어지는 송유(松油)가 마치 자신의 피처럼 느껴졌다. 그는 품속에서 두 권의 책을 꺼냈다. 하남 배교의 비밀이 담겨 있 는 책이었다. 그는 그 책들을 화로에 던졌다. 기름관이 끊겨 불길이 잦아들던 화로가 다시 확 피어올랐다. '이제 무엇이 남았는가?' 종현수는 밀실을 서성였다. 새벽이 밝아 올 때였다. 그 새벽과 함께 그가 청부를 한 자들은 성녀와 명옹을 찾아 갈 것 이다. 정리해야 할 일은 이제 더 이상 없는 듯 했다. 마지막 남은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는 품속에서 날이 잘 세워진 비수를 꺼냈다. 명두와 교도들 사이를 잇는 끈을 잘라 버리는 것! 끈을 잇고 있는 자는 명전이다. 그 명전은 종현수 바로 자신이었다 . 명전이 없다면 교는 잠깐 동안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잠깐의 혼 란 동안 명두는 교와의 관계를 잘 정리하리라 믿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일은 명전인 자신이 사라져 주어야 한다. 그가 사라져야 할 또 하나의 이유도 있었다. 아마 보주는 알 것이다. 성녀와 명옹을 처치하도록 청부를 의뢰한 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 싫든 좋든 아직 교에 배신의 칼을 내밀지 않고 있던 보주다. 교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 그런 보주가 자신을 볼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들 것인가. 보주의 성격으로 보건대 이왕 벌어진 일 모른 척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볼 때 마다 보주는 암묵적으로 배신 에 동참했구나 하는 씁쓸한 마음을 떠올 릴 것이 분명했다. 종현수는 자신으로 인해 보주가 그런 씁쓸한 마음을 품고 다니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역시 일을 벌인 자가 책임을 지고 사라져 주는 것 이 가장 좋을 듯했다. '보주가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죽었을 목숨…….' 종현수는 양백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두(叩頭)를 올렸다. 그가 화섭자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는 불붙은 화섭자를 제단으로 질퍽하게 흐르는 기름 위에 던졌다. 기름에 불길이 붙는 것을 보며 종현수는 비수를 자신의 손목에 갖 다 댔다. 피가 튀었다. 그는 손목에서 콸콸 치솟는 자신의 피를 보며 느긋하게 벽에 몸을 기댔다. 불이 제단에 옮겨 붙으며 불길은 점점 치솟았다. 온 몸이 나른해져 갔고 눈까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명왕이시여……." 종현수가 마지막으로 찾은 자는 제단을 불태움과 함께 자신과 양백 의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려 했던 바로 그 신이었다. 제14장 파랑(波浪) 명강량은 호흡을 길게 내쉬며 좌정을 풀었다. 화령주에서 뿜어 나오던 채홍색 빛이 급속히 사라졌다. 화령주의 효능은 정말 놀라웠다. 우제준과의 상처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몇 개월의 노독(路毒)도 땀과 함께 사라진 터였다. 기력도 충만했다. 아무래도 화령주는 교의 일양번천신공(一陽　天 神功)을 돋아 주는데 특별한 효능이 있는 듯했다. 삼양장을 가만히 펼쳐 보았다. 그렇게 짧은 기간임에도 삼양장의 위력은 일 성(一成) 이상 배가된 터였다. 명강량은 금의를 걸치며 화령주를 소매에 감추었다. 아직 새벽이 오기 전인데도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똑! 똑! 그의 문을 두드리는 자는 시동이었다. "대, 대협, 보, 보주께서 찾으십니다. 선수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시동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명강량은 시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동은 그의 눈길을 피해 급히 문을 닫고 나갔다. 왠지 시동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잠이 깨지 않았는지 , 아니면 일을 잘못해 꾸지람을 들었는지……. 명강량은 아무 생각 없이 신장도를 들었다. 오랜만에 만져 보는 신 장도였다. 그는 신장도를 허리에 차고 선실을 나섰다. 찬 강바람이 그를 맞았다. 새벽이 곧 밝아 오려 하고 있었다. 이틀 후면 양 명두의 배에서 내려야 한다. 아마 그 때문에 이후의 일을 묻고자 이른 새벽부터 그를 찾은 것이 리라. 명강량은 측현을 돌아 선수에 섰다. 양백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시동을 찾았다. 시동도 보이지 않았다. 순간, 피 - 잉! 포향(砲響)이 긴 꼬리를 끌며 날았다. 명강량의 안색이 변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이 그를 긴장에 빠뜨렸다. 그는 다급히 선실로 돌아가려 했다. 그때였다. 희미한 어둠 속에 두 명의 초로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도신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급히 물살을 헤집는 소리! 두 척의 피벌(皮筏:유목민들이 주로 사용하는 가죽배)이었다. 피벌 에 탄 자들 중 모두 복면을 하고 있었다. 그들 속에 성녀는 잠을 자고 있었다. 수혈(睡穴)이 찍힌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그제야 전후를 알아챘다. 생각 보다 몸이 더 빨리 움직였다. 그는 용두(龍頭)를 차고 올라 물결 속으로 뛰어들려 했다. 피벌은 작고 가벼워 빠르기가 여는 배 보다 빠르다. 등평도수(登平渡水)를 펼치지 않는 이상 피벌을 따라잡을 수 없음 이 뻔했다. 하지만 명강량의 생각은 그곳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성녀를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새벽 어둠 속에 나타난 초로인들은 그것 마저 허락하지 않 으려 했다. 번뜩이는 도신과 함께 두 가닥 경기가 명강량의 길을 막으며 좌우 로 날아왔다. 흑의 노인의 안색은 불만으로 가득했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가 일을 처리하는 것은 그의 직성에 전혀 맞지 않았다. 교타방의 방주인 사위의 주요 고객이라 불씨를 만들기 싫어 어쩔 수 없이 새벽 야음(夜陰)을 택하기는 했지만……. 새벽이 오기 전의 어둠은 누구에게나 습격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 긴장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눈까풀이 절로 내려올 시간이기 때문이 다. 얻고 싶은 것이 있으면 싸워서 뺏었다. '낄낄! 야습(夜襲)이라…….' 이런 낯간지러운 일을 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알려는지……. 흑의 노인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손자를 바라보았다. 노를 잡고 유선으로 접근해 가는 마충현의 얼굴은 긴장과 흥분으로 역력했다. 그 여자를 생각하느라 할아비의 마음은 염두에도 없음이 분명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마는 색마(色魔)라 했으니…….' 그 여인을 얻어 주면 무공을 배우겠다던 약속도 약속이지만 여난( 女難)에 봉착하면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하물며 그 배우기 싫은 무공이야……. 그 때문에 손자의 청을 받아들였었다. 하지만 막상 여인의 살 냄새에 취하면 자신의 무공을 배울 일은 지 금보다 더 싫어질 것이다. 그래서 흑의 노인은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다. "네놈은 지금 그 여자와 어떻게 싫증이 나도록 분탕질을 즐겨 볼까 로 고심하고 있겠지." "히히히……." 마충현은 히죽 웃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 좋아하지 마라. 네놈이 그 여자와 밤을 새울 수 있는 날은 딱 삼 일뿐이다."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옛?" 마충현은 놀라 노 젓던 손을 멈추었다. "여자의 단물은 삼 일만 빨아먹어도 족하다. 그래도 그 단물에 미 련이 남는다면…… 너는 몇 년 후를 기약하라." "할아버지! 그, 그 무슨 말을……." 머충현은 울상을 지었다. 최소한 몇 개월간의 신접(新接)은 보장해 줄 줄 알았었다. "만약 삼 일 밤을 지새우고 난 후에도 딴소리를 한다면…… 낄낄! 네놈은 시체와 더불어 밤을 즐겨야 할 것이다." 흑의 노인이 음산한 눈빛으로 마충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죽이겠다는……." 마충현은 다리에 힘이 쭉 풀렸다.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만들지 마라!"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소리치며 어둠 속을 항진하는 유선에 시선을 던졌다. '당연히 할아버지는 삼 일이면 족하겠지. 다 늙은 영감이 삼 일이 나 견뎌 낼까. 아! 아! 삼 일이라…… 삼 일…….' 마충현은 통탄에 가슴을 쳤다. 할아버지의 성격으로 보건대 말을 듣지 않으면 분명 그 여자를 죽일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는 흑의 노인의 입에서 불시에 터져 나온 말에 머리를 쥐어짰다. 그때였다. 흑의 노인과 마충현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쨍! 쨍! 쨍! 새벽의 적막을 깨는 날카로운 쇳소리……. 흑의 노인은 안력(眼力)을 돋구었다. 선상에 희끗한 그림자가 전광(電光)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장쾌(壯 快)하게 쏟아지는 도검의 향연(饗宴)도 눈에 들어왔다. 찰라간에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갈 정도로 볼만한 군무(群舞)였다. 싸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흑의 노인이다. '애송이들의 싸움이 아니다!' "비켜라!" 흑의 노인이 마충현을 밀쳤다. 그가 노를 잡고 유선을 향해 힘차게 배를 저었다. 찌-익! 배천화는 놀라 황급히 몸을 뽑았다. 신장도의 예리한 칼날이 소매를 양단하고 있었다. "비켜라!" 유부(幽府)를 울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 "나를 막는 자는…… 모두…… 죽는다." 명강량의 눈빛은 점점 붉은 빛을 더해 갔다. 배천화는 해쓱한 표정으로 자신의 잘린 소매를 살폈다. 칼을 일 촌(一寸)만 더 들이밀었으면 잘려 나간 것은 소매가 아니 라 팔목이었을 것이다. "아우! 조심하게!" 원세웅도 처음의 초연한 모습은 아니었다. 약관에 곽부의 휘하에 들었을 때 그들은 맹원에 불과했다. 비록 맹 원으로 출발했으나 새외에서 곽부의 비전을 전수 받아 십장로라는 자 리를 차지한지가 오래 전……. 삼십 여년만의 중원행이 고작 애송이의 길을 가로막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련주를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었다. 하지만 이정인에 대해서는 유별날 정도로 경계하는 련주의 마음을 아는지라 불만을 감추고 명을 따랐다. 상대는 이정인의 제자! 이정인의 이름도 있었고 중원에서 들은 소문도 있는지라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줄은 알았었다. 하지만 막상 칼을 겨루어 보니 상상 이 상으로 고강했다. 특히 붉은 광채 속에서 피어오르는 지독한 살기(殺氣)! 도산검림을 마다 않았던 그들도 섬뜩할 정도였다. 붉은 광채는 명강량이 내력을 돋구면서 생긴 화령주의 빛이었다. '련주는 추적만 끊어라 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방어만 하다가는 자칫 낭패를 당하기 딱 좋겠군.' 원세웅은 흘깃 배천화를 바라보았다. 칼을 모로 세우고 숨을 들이쉬고 있는 배천화도 마침 그를 바라보 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無言)의 합의가 뒤따랐다. 꿈도 이뤄 보지 못한 채 분하의 물결에 삼십 여년의 세월을 묻을 수는 없었다. 그 정도로 상대의 공세는 지독했다. 천상 팔, 다리 하나는 잘라 놓 아야 떼어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켜라!" 명강량의 낮은 목소리가 다시 새벽을 울렸다. 야수의 포효(咆哮)였 다. 소매를 따라 붉은 빛덩이가 움직이며 신장도가 빛났다. 원세웅과 배천화는 칼을 고쳐 잡았다. "하 - 핫!" "캇!" 그들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질풍노도(疾風怒濤) 같은 발걸음에 신속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살 초였다. 명강량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쐐액! 신장도가 도광(刀光) 속을 질주했다. 화령주의 빛을 받은 신장도는 마치 한 마리의 화룡(火龍)과 같았다 . 콰쾅! 쾅! 뱃머리가 박살나고 분하의 물은 천 장으로 치솟아 폭포 수(瀑布水)로 떨어졌다. 팟! 누구의 피인지 모를 핏방울이 솟구쳤다. 그리고 배는 점점이 붉은 혈흔으로 물들었다. 새벽은 점점 여명으로 다가오고 죽음의 향기는 광풍(狂風) 속에 더 욱 짙어져 갔다. 쩡! 쩡!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양백의 가슴은 놀란 토끼의 가슴 처럼 뛰었다. 명옹을 응원하기 위해 몇 번이나 철척을 꺼내 들었지만 서로 뒤엉 켜 출수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무리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양백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지금 눈앞에서 벌어 지고 있는 일의 연유를 찾으려 했다. "모 별관!" 그는 먼저 모동곽을 찾았다. 순간, 양백은 자신의 이마를 쳤다. 정신이 그렇게 없었다. 모동곽은 소선(小船)으로 피벌을 추적하고 있었다. 그가 피벌을 추 적하라는 명을 내린 터였다. 양백은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누구일까?' 그는 납치객(拉致客)들이 어떻게 선원으로 위장해 배를 탈 수 있었 는가를 생각했다. 성녀를 납치해 간 자들은 내부에 있었다. 피벌이 아무리 작고 가벼운 배라 하나 유선에 접근하는 소리를 명 옹이 듣지 못할 리 없었다. 유선 내부에서 피벌을 내려졌기 때문에 명옹은 적들이 접근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이다. 그 짧은 찰나에 모동곽은 사라진 선원들의 수가 오륙 명 정도임을 이미 확인까지 했었다. '성녀와 명옹이 이 배에 타고 있음을 알았고 납치객들을 선원으로 가장해서 배에 태울 수 있었던 자…… 종현수' 양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종 총관, 그가 결국…….' 종현수가 양백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듯이 양백도 종현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는 있었다. '아닐 것이다! 그가 어찌…….' 양백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다. 하늘이 뒤집혀 질 정도가 아닌 하늘, 바 로 명왕을 뒤엎는…… 양백은 평소의 종현수를 생각했다. 그렇게 간담이 큰 자는 분명 아 니었다. 자신의 주변에 앉아 소심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일을 처리하 던 그였다. '아니야! 종 총관은 아닐 것이다! 분명 다른 사단이 있을 것이다!' 양백이 자꾸 떠오르는 종현수라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애쓰고 있을 때였다. "흐흥…… 이곳에서 옛 벗들의 절기를 보게 될 줄이야." 카랑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양백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선미에서 일노일소(一老一少)가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에 상처투성이의 흑의 노인과 얼마 전에 본 적이 있는 교타방 의 소방주, 마충현이라는 애송이였다. "아이구!" "으악!" 흑의 노인을 가로막던 금적보 자경대의 무사들이 흑의 노인의 한 주먹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흑의 노인은 성큼성큼 양백의 곁으로 다가왔다. "삼양장에 양광등천도법(陽光騰天刀法)! 좋아! 좋아! 어린놈이 정 말 대단하군. 곽부의 개들이 펼치는 쇄천도법(碎天刀法)도 어지간한 데 말이야." 그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소리쳤다. 흑의 노인의 무공도 양백이 도저히 따라가지 못할 듯했다. 양백의 명옹과 적들의 일전을 바라보는 것만 해도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 그런데 흑의 노인은 단번에 그들이 펼치는 초식까지 알아맞히고 있 었다. 흑의 노인의 정체가 궁금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양백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철심흑사, 곽부! '곽부의 개? 저들이…….' 곽부의 흉명은 양백도 오래 전부터 들어온 터였다. 삼십 여년 전에 이미 중원에서 사라진 자다.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성녀와 명옹을 찾아와 시비를 걸 이유가 없었다. 배교는 삼십 여년 전의 정사대전에서 방관자의 입장으로 남아 있었 으므로…… '도와 달라는 곽부의 청을 거절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그것 때문에…….' 종현수에 대한 의심에 더해 양백의 머리는 더욱 복잡하게 돌아갔다 . "노야(老爺)!" 양백은 황급히 흑의 노인을 불렀다. 정말 작자들이 곽부가 보낸 자들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러나 흑의 노인은 양백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군. 내력도 초식도 보법도 곽부의 개들이 나은 듯 한 데…… 왜 저렇게 쩔쩔 매고 있지. 흐흥! 가만 있자. 삼양장은 맞고 …… 저 건 이정인의 양광등천도법이 맞나? 맞기는 분명 맞는 것 같 은데. 투로도 제멋대로군. 아하! 그렇군. 칼끝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반응하고 있군. 야수 같은 놈이야." 그는 광풍으로 흔들리는 뱃머리를 바라보며 무엇이라 중얼거렸다. "……정말 탐나는구나. 저 기도…… 두려움이라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겠군." 흑의 노인은 문득 시선을 마충현에게 돌렸다. 마충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흑의 노인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곽부의 개들을 만났으니…… 그냥 지나칠 수야 없지. 우 리는 암중에 서로의 새끼들을 용납하지 않기로 한 사이 아닌가." 팟! 흑의 노인이 어깨를 건들했다. 그가 칼바람을 헤치며 장권을 뻗어 갔다. 그는 신랑조(神狼爪)로 배천화의 어깨를 찍어 갔다. 배천화는 날카로운 파공음에 놀라 몸을 비틀며 쇄천도법을 연이어 펼쳤다. 흑의 노인은 발걸음을 어지럽게 놀리며 배천화의 공세를 비켜 갔다 . 그가 신랑조로 배천화의 호수구와 맥문을 동시에 노렸다. 배천화는 칼을 빼앗길까 두려워 칼이 나아가는 방향을 좁혔다. 그 한 수로 배천화는 흑의 노인에 대한 선공을 모두 놓치고 말았다 . "낄낄! 곽부의 개…… 황사(黃砂)나 마시며 지내지 중원에는 왜 왔 느냐?" 흑의 노인의 조공(爪功)이 더욱 맹위를 떨쳤다. 원래 합공을 해도 힘들어했던 상대였다. 흑의 괴노의 출현으로 홀로 명강량을 상대해야 하는 원세웅의 처지 도 좋지 않았다. 파팟! 삼양장과 신장도가 번뜩일 때마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열 기가 몰아쳤다. 신장도에 서린 채홍색 빛과 광기 어린 상대의 기도도 그의 정신을 산만하게 했다. 그러나 역시 걱정은 흑의 괴노였다. '예사로운 늙은이가 아니다. 길게 싸워 봐야 좋을 것은 하나도 없 겠구나. 빨리 이놈을 처치하고 아우와 손을 합쳐야겠다.' 원세웅은 살을 주는 한이 있더라도 서둘러 명강량을 쓰러뜨리기로 마음먹었다. 연수를 해야만 흑의 괴노를 이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핫!" 그가 괴성과 함께 쇄천도법을 펼쳤다. 웅! 웅! 웅!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선원들은 귀를 감쌌다. 고 막이 터져 나갈 듯했다. 하지만 흑의 노인의 말대로 명강량은 두려움을 몰랐다. 그도 신장 도를 번뜩이며 원세웅을 취해 갔다. 쨍! 쨍! 쨍! 불꽃이 폭죽처럼 흩어지며 명강량과 원세웅은 촌보의 양보도 없이 서로를 바짝 다가섰다. 원세웅이 장을 내뻗고 명강량도 삼양장으로 맞부딪혀 갔다. 퍽! 원세웅은 서너 걸음 주춤 물러났고 명강량은 분하에 떨어지듯 튕겨났다. 원세웅은 전신이 덜덜 떨렸고 눈은 깨질 듯이 아팠다. 하지만 상대 는 더 심할 것이다. 연신 피화살을 뿜고 있었다. 서 있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간신히 뱃전에 기대 시야를 가리는 핏물을 닦고 있을 뿐!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원세웅은 마지막 힘을 모아 도약했다. 허공에서 쇄천도법이 이름 그대로의 위용을 드러내며 명강량을 향해 폭사됐다. 명강량은 원세웅의 칼에 무방비(無防備)로 보였다. 몸을 가누기도 힘들어하는 듯했다. 하지만……. 명강량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가 신장도를 일 자로 세운 채 솟구쳤다. 시위를 떠난 화살이었 다. 명강량과 원세웅은 허공에서 얽혔다. 원세웅의 칼은 명강량의 목을 향해 있었고 명강량의 신장도는 원세 웅의 심장을 노리고 있었다. 퍽! 뼈가 동강나는 둔탁한 소리가 중인들의 귀를 때렸다. 연이어 누구의 것인지 모를 혈우(血雨)가 후두둑 쏟아졌다. "크악!" 곧 이어 배천화의 비명도 들렸다. 흑의 노인의 신랑조에 배천화는 뇌수를 뿌리며 분하로 떨어지고 있 었다. "헉! 헉!" 명강량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이 유황불 속에 타 들어가는 듯했다. 그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피! 피! 피냄새! 모든 것을 죽이고 싶다는 살기가 지옥의 유황불 보다 더 뜨겁게 그 를 부글부글 불태우고 있었다. 살심이 폭발하지 않고 있는 것은 성녀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一念) 때문이었다. 그 마음이 그의 이지(理智)를 간신히 붙들어 놓고 있었 다. 콱! 명강량은 신장도를 짓눌렀다. 신장도의 칼끝에는 원세웅이 꽂혀 있었다. 칼을 짓누르자 원세웅은 심장에서 더욱 붉은 피를 내뿜었다. 명강량은 한동안 그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과 목으로 흐르 는 피, 가공할 살기, 명강량은 혈귀(血鬼)를 방불케 했다. 누구 하나 그의 곁으로 다가가려는 자가 없었다. 새벽은 적막 속에 밝아 왔다. 명강량은 여명 속에 돋아나는 물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창파를 바라보며 어깨를 폈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담담한 어투였다. 하지만 중인들은 머리칼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꼈 다. 무심함의 뿌리가 지독하게 깊어 심장에 서릿발이 곤두설 정도였 다. 중인들은 중압감 속에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커흠!" 침묵을 깬 자는 흑의 노인이었다. "이정인의 제자냐?" 그가 물었다. 명강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양백을 향해 걸어갔다. 양백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이정인의 제자냐고 물었다!" 흑의 노인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명강량은 양백의 앞에 섰다. 투명하도록 무심하게 빛나는 눈! 양백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주춤 물러났다. 손은 물론 다리까지 떨리고 있었다. "나, 나는 아니오. 나…… 나는……." 그가 쥐어짜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묻지도 않았었다. 명강량은 양백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양백은 극도의 공포감에 질려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 명 강량의 기도도 기도였지만 종현수의 일이 마음에 걸렸음이 분명했다. "나를 믿지 못하시오? 나를……." 양백은 갑자기 철척을 치켜들었다. "믿어 주시오!" 그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가 철척을 내리쳤다. 팟! 양백의 팔이 동강나며 피를 뿌렸다. 팔을 잘라야 했을 정도로 명옹이 위압적이고 자신의 처지가 절박했 는가. 양백은 대답 할 수 없었다. 단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이상한 것은 중인들의 생각도 양백과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양백이 자신의 팔을 싹둑 자르는 것에 조금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 예측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 집단으로 몽환술에 걸린 것과 같았다. 마충현도 멍하니 명강량의 눈빛만 쫓고 있었다. 유일하게 제 정신으로 서 있는 자는 흑의 노인뿐! "건방진 놈이군! 노부 앞에서 그토록 오만 방자를 떨다니…… 그러 고도 목숨이 붙어 있기를 바라느냐!" 흑의 노인은 쌍심지를 돋구었다. 그가 미끄러지듯 명강량을 육박하며 쌍장을 날렸다. 명강량은 선 자세 그대로 쌍장을 내밀었다. 펑! 흑의 노인은 어깨를 건들했고 명강량은 부동(不動)이었다. 그 러나 명강량의 입에서는 잠시 멈추었던 피가 다시 콸콸 쏟아지고 있 었다. 눈빛도 몽롱하게 흐려졌다. "양백, 배를 뭍으로……." 명강량이 들리지도 않을 정도의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뚜벅뚜벅 선실을 향해 걸어갔다. 뱃전에 서 있던 중인들이 길을 쫙 비켰다. "이정인의 제자가 맞군! 이정인에게 빚진 것이 있어 이 번 한 번만 은 봐 주겠다! 하지만 다음 번에 내 놈에 뜨인다면……." 쾅! 흑의 노인의 손에 뱃전이 산산이 박살났다. '흐흥! 냉살장의 위력이 분명 줄어든 것은 아닌데. 칠 성(七成) 공 력이면 단번에 격살(擊殺) 시킬 줄 알았더니…… 어떻게 이런 놈이… ….' 흑의 노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강호의 금언(金言)이 있다면 장강의 뒷 물결이 앞 물결을 민다는 말이다. 동량(棟樑)이 될 재목은 미리 밑둥을 잘 라 버리는 것이 그의 철칙! 따라서 그는 명강량도 죽이려 했다. 곽부 의 개와 싸우며 입은 휴유증도 있는지라 칠 성의 냉살장이면 치명적 상처를 입히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저렇게 멀쩡하다니…… 자존심도 상했고 자존심이 상한 것 만큼 살심도 치솟았다. 흑의 노인은 장심에 다시 내력을 돋구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내력 을 풀었다. 역시 다른 자존심 보다 애송이를 상대로 두 번이나 암수를 쓴다는 것에 더 자존심 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정말 이정인에게 신세를 진 바도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곽부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손 을 대지 않더라도 곽부가 저놈을 알아서 처치해 주겠지. 저놈을 건드 려 배교놈들을 전부 적으로 만드는 일도 귀찮은 일이고…….' 흑의 노인은 그 같은 생각을 덧붙여 명강량에 대한 살의를 깨끗이 지웠다. '그러나 다음 번에는…… 다음 번에 만난다면 체면이고 이전의 신 세고를 따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흉광을 번뜩였다. 그가 명강량에 대해 이 생각 저 생각을 하 고 있을 때였다. 양백은 비로소 자신의 팔이 허전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쓴웃 음을 흘리며 지혈(止血)을 했다. 수하 하나가 뽀르르 붕대도 가져다 주었다. 양백은 천으로 상처를 감싸며 흑의 노인에게 다가 갔다. "도와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그가 머리를 숙였다. 흑의 노인은 양백을 힐끔 쳐다본 후 냉막한 표정을 지었다. "물어 볼 말이 있습니다. 방금 곽부의 개들이라고 하셨습니까?" "쇄천도법은 곽부의 개들이 아니면 쓸 수 없지!" "그럼 오늘의 소란이 일어난 배후에 곽부가……." "배후가 누구인지 판단할 일은 네놈이 할 일이다! 궁금하면 배후를 알아볼 만한 곳은 가르쳐 줄 수 있지!"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그런 곳이 있습니까?" 양백은 황급히 물었다. "흑막! 일전에 똥 마려운 강아지 마냥 비비적거리며 바쁘게 달려가 는 놈을 붙들은 적이 있다. 심심하던 차에 그놈을 상대로 내 도법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지. 그런데 우연히 그놈에게서 곽부에게 가는 비 문을 발견한 게야. 그래서 흑막이라는 곳에 대해 좀 조사를 해 보았 지. 흑막은 곽부가 중원 재진출을 위해 교두보로 만든 곳이다. 그곳 에 가서 물어 보려무나. 곽부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의 사단은 곽부 를 찾아 연유를 물어 보면 될 테고." "흑막이라는 곳의 위치가 어디입니까?" "하남의 기산(箕山)에 가면 독천(犢泉)이 있지." "알고 있습니다." "그 주위를 얼쩡거려 보아라. 복면을 뒤집어쓰고 날뛰는 이상한 놈 들이 보일 테니…… 배에 오르기 전 피벌을 타고 달아나는 몇몇 놈들 을 언뜻 보았는데 행색이 흑막 놈들과 비슷하더군." 흑의 노인은 이상할 정도로 양백의 물음에 순순히 답변했다. "감사합니다. 노야의 은혜 정말 잊지 않겠습니다. 존성대명이라도 들려주시지요." 양백이 깊게 포권하며 말했다. "네놈 같은 애송이에게 내 이름을 들려주어 자랑할 일이 무엇 있겠 느냐? 그러나 알고 싶다니 들려주지. 나는 천하제일인이 아니다. 천 하제일인이 아니라도 누구와도 싸웠지. 그래서 예전의 강호인들은 나 를 이렇게 불렀다.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 없는 자! 낄낄낄!" '하늘 아래 두려운 것이 없는 자…….' 순간, 양백은 눈을 번쩍 떴다. "무외도!" 그가 소리쳤다. 무외도 심여덕! 사파 오흉 중의 일인, 피를 부르는 비검행(比劍行) 으로 강호에 악명을 드높인 자! 그와 비무를 벌이다 죽은 자는 천 여 명에 이르렀다. 상처 투성이의 얼굴, 만할도(萬割刀)라는 넓적한 칼만 보았다면 이 름을 밝히지 않았어도 양백은 흑의 노인이 무외도임을 알아챘을 것이 다. "혹시 곽부를 만나거든 이야기해 주어라. 흑막의 소재를 가르쳐 준 자는 바로 나라고…… 그리고 곽부의 개 한 마리도 해치웠지. 다른 개들도 보이는 족족 맛있게 먹겠다고 전하라. 낄낄낄!" 흑의 노인, 무외도는 음산하게 웃었다. 곽부의 수족을 죽인 것도 그렇고 흑막의 정체를 가르쳐 준 것도 그 렇고 무외도는 곽부와 씻을 수 없는 원한을 맺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무외도는 곽부에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난 상처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곽부의 작품이었다. 비무에서 패하자 곽부는 그의 얼굴을 난자하고 근맥까지 끊어 내팽개쳤다. 때문에 무외도는 영원히 칼을 잡지 못할 처지였다. 그런 그를 구해 준 자가 바로 이정인이다. 배교의 의술(醫術)은 특이하다. 서국의 영향 탓인지 중원에는 화타 이후 간신히 맥을 이어가고 있는 해부학(解剖學)이 무척 발달되어 있었다. 이정인은 그 의술로 동강난 무외도의 근맥을 이어준 것이다. 물론 이정인은 폐인으로 나뒹굴고 있던 그 자가 무외도임을 몰랐었 다. 알았다면 이정인은 치료를 해 줄 것인가로 한동안 고심했을 것이 다. 어쨌든 무외도는 그 같은 사정으로 곽부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양 백에게 이름을 가르쳐 준 이유도 생색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이 한 짓임을 밝혀 곽부의 약을 올리기 위함에 다름 아니었다. 만약 무외도가 정파인들을 곽부만큼 싫어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벌 써 정파인들에게 흑막의 비밀을 떠벌렸을 것이다. "강호의 어린것들은 상유, 그 애송이 놈에 대해서는 잔인함을 따를 자가 없다고 이야기하지. 모태명, 그 놈에 대해서는 음흉함을 최고 로 치고…… 이정인에 대해서는 백가(百家)와 싸워도 사학(邪學)을 옹호할 수 있는 자라 했던가? 물론 나는 칼에 인정이 없기로 유명하 지. 곽부는…… 가서 이정인의 의발을 이어받은 그 놈에게 전하라. 곽부는 우리 네 명이 가진 그 모든 것은 갖춘 놈이라고. 조심해서 상 대해야 할 게야. 낄낄낄!" 무외도는 등을 돌렸다. "가자!" 그가 마충현에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그 여자는…… 여기 온 일은 마무리 지어야지요." 마충현이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피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을 보지 못했느냐?" 무외도가 화를 냈다. "쫓아가면 되지 않습니까. 쫓아가야지요." "이런 놈을……." 무외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네놈은 자존심도 없는 모양이구나." 그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슴까지 치솟는 울화를 간신히 삼 키는 듯한 목소리였다. "무슨……." "방금 보지 않았느냐? 이정인의 제자를…… 네 나이와 비슷할 것이 다." "아마 그럴 것 같군요. 그런데 그 게 왜?" "죽자고 무공을 익혀도 너는 그 놈을 따라잡을까 말까 할 정도다. 그런데도 여자 타령……." 무외도의 두 눈에 한광이 번뜩했다. 마충현은 두려움에 고개를 떨구었다. 외조부의 그런 눈빛은 처음 보는 터였다. "곱게 이야기를 해서는 안될 것 같구나.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는 내 방식대로 할 것이다. 가자!" 무외도가 마충현의 손을 휙 끌었다. 마충현은 도살장을 끌려가는 소처럼 무외도를 따랐다. 철썩! 무외도와 마충현을 태운 배가 창파를 갈랐다. 양백은 이마를 만지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유향경천문, 구대문파에 이어 곽부까지…….' 마음이 천 근 같이 무거웠다. 총관 종현수에 대한 의구심, 성녀에 대한 걱정, 명옹의 분노……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아무 곳이나 주저앉 고 싶었다. 금적보를 반석에 앉힌 후 정말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곤 욕은 맛보지 않으리라 믿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가? 배교…… 배교…….' 교에 대한 분노, 아직까지 교와 절연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 노가 양백을 더욱 지치게 만들고 있었다. "가까운 곳에 배를 대라." 그가 뱃전에 몸을 기대며 간신히 말했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며 당장 머리 위로 떨어질 것 같았다. 앉아 있는 의자도 빙글빙글 돌았다. 선실 여기저기는 명강량이 흘린 피로 울긋불긋 했다. 탁자 위는 어제 성녀와 늦게까지 쌍육을 하며 놀던 그대로였다. 두 알의 주사위와 금붙이들…… '명왕이여! 그대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명강량은 주사위를 움켜쥐었다. 푸스스! 주사위가 재가 되어 날렸다. 명강량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악약의 선실로 향했다. 성녀는 역시 없었다. 성녀가 있어야 할 침상에는 달랑 한 장의 서 신만이 남아 있었다. 명강량은 핏물로 젖은 눈을 닦으며 서신을 들었다. 양백은 무외도에게 애써 흉수의 종적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흉수들은 대담하게도 자신들의 종적을 말해 주고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간단했다. - 여자를 찾고 싶으면 하란산(賀蘭山)으로 오라! 하란산은 하란산맥의 주봉으로 영하(寧夏) 서쪽에 자리 잡은 산이 다. 만리장성(萬里長城)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으며 음산(陰山)과 대 사막(大沙漠)의 경계에 있는 새외의 오지! 명강량은 안색을 일그러뜨리며 서신을 꽉 쥐었다. 하얀 연기와 함께 서신이 잿가루로 날렸다. 잠들었던 악기(惡氣)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어지러움은 점점 더 심해져 갔다. 흐르는 피도 멈출 생각을 않았다. 명강량은 결국 어지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침상에 풀썩 쓰러졌다. 하얀 침상보가 명강량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었다. 명강량은 그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더러운 것들! 명왕이여! 이제 나는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을 것 이다.' 그는 천장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환영들이 어른거렸다. 수라전의 마군들도 보였고 이상한 기물들도 보였다. 명강량은 환상을 떨치기 위해 눈을 감으려 했다. 그러나 눈은 천장 에 딱 달라붙은 듯 감겨지지 않았다. 우우우우! 환청들도 들렸다. 도검으로 무장한 마병(魔兵)들이 진군(進軍)해 왔다. 그들은 미친 듯이 날뛰며 지옥도를 펼쳤다. 피의 향연 속에 명강량의 눈동자는 점점 붉어졌고 살기도 짙어 갔 다. '태워라! 불태워라! 세상의 모든 것!' 명강량도 지옥도 속으로 뛰어들었다. 순간, 지옥도는 환영임을 증명하듯 일시에 사라졌다. 대신 무저갱 으로 놓여 있는 동굴! '오라!' 누군가가 부르고 있었다. 명강량은 동굴에 발을 들였다. 마군(魔軍)들이 동굴 벽면에서 양각(陽刻)으로 돋아나며 그의 주변 을 에워쌌다. 그는 마군들의 호위(護衛)를 받으며 무저갱을 걸었다. '오라!' 환청은 끊임없이 그의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 끝에 서 만난 자! 전신이 검은 철갑(鐵甲)으로 무장한 자였다. 키는 일 장여도 넘었 다. 허리에 길게 늘어진 칼, 호심경(護心鏡:가슴을 가리는 갑주), 악 마상(惡魔像)이 새겨진 요대(腰帶), 모든 것이 흑요석(黑曜石)보다 검게 번뜩였다. 검지 않은 유일한 곳은 두 눈! 두 눈만은 불덩이처럼 붉었다. 그가 팔을 벌렸다. 피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명강량의 그 자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그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등을 돌렸다. 명강량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강량…….' 그를 부른 자는 악약이었다. 새벽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은 악약의 선실을 휩쓸고 명강량을 휘돌았다. 바람이 실어 오는 향기 속에는 악약의 체향이 가득했다. 마음이 편안했다. 모든 환영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명강량은 그 속에 몸을 맡겼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의식이 끊어진 것이다. * * * "도대체……." 조구완(曺求完)은 가는 눈썹을 모았다. 셋째 사형을 바라보며 아란하도 아미를 찌푸렸다. 이 와중에 어디서 저런 태사의를 구했는지 모를 일이다. 호피(虎皮 )를 깐 태사의는 적막한 사당과 너무 어울리지 않게 화려하고 위맹했 다. 때문에 아란하는 셋째 사형, 조구완이 반대로 너무도 초라해 보 였다. 가는 눈썹, 가는 얼굴, 가는 몸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때는 어떻게 그를 좋아했는지……. '중원을 동경했기 때문에 중원인까지 동경했었던가.' 짜증이 났다. 아란하는 머리칼을 쓸며 자신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하니 이제 셋째 사형, 조구완은 그 녀에게 있어 아무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누구와 비교를 해서 좋다 나쁘다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조구완을 그 누군가와 계 속 비교하려 들고 있었다. 분하의 창파에 몸을 맡긴 채 금도(金刀)를 휘두르던 자! 비교를 강요하는 자는 바로 그 자였다. "우 장로, 배 장로는 십장로 중에서도 비록 말석이라 하나 각 문의 당주급 이상의 실력은 가진 자들이었다. 그런데 분하에 뼈를 묻어야 했다니……." 조구완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사매는 십장로와 그놈이 싸우는 장면을 보았겠지?" 그가 아란하에게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먼 곳에서……." 아란하는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놈이 강했어?" 아란하는 자신의 요령(腰鈴)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분하의 혈 투를 영상(映像)으로 끌어내는 중이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아미를 찌푸렸다. 먼발치라 하나 그 정도면 그녀의 안력으로 얼굴 정도는 충분히 식 별할 거리였다. 실제로 당시에는 얼굴을 선명히 보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형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마옹! 다른 것은 기억에 없고 한 가지만은 분명했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강했어요." "음……." 조구완은 가는 턱을 매만졌다. 사부가 중원에 흑막을 설치한 이유는 두 가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서였다. 하나는 각 파의 세력, 주요 인물들의 동향 등 중원의 제반 사정을 상세히 알기 위해서다. 다른 하나는 청부를 통해 중원 진출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일! 그 두 가지 일 중 보다 중요한 일은 전자다. 따라서 조구완은 배교와 마옹에 대해서도 사부에게 몇 차례 보고를 한 적이 있었다. 마옹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고를 했는가……. 서너 개월 정도는 더 강호인들의 이목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자, 그 러나 강호의 물줄기에는 전혀 영향을 끼칠 수 없음! 무공은…… 당주 들 보다 강하나 십장로 보다는 약함! '그렇게 보고를 했었는데…….' 선상(船上) 일전은 자신의 보고가 거짓말이었음을 증명한 셈이었다 .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조구완은 사부의 못마땅한 눈초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란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녀는 조구완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선상 일전을 제대로 본 자는 그녀뿐이다. 성녀 를 납치한 흑막의 수하들은 등을 진 채 노를 젓기에 바빴고 보기에도 너무 먼 거리였다. 선상의 사정을 좀더 자세히 말해 사형의 걱정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그렇게 하기 귀찮았다. 조구완은 태사의에 깊게 몸을 파묻은 채 좌우 팔을 교대로 턱을 괬 다. 아란하는 사형이 조금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의 정리(情 理)라는 것이 그런 것인지…… 그녀는 결국 입을 열었다. "한 명이 더 있었어요." "뭐야?" "장로들을 처치한 자는 마옹 혼자만이 아니었어요." "그럼 그렇지!" 조구완은 무릎을 쳤다. 사형의 좋아하는 모습에 아란하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기 분이 좋지 않았다. 왜 자꾸 짜증이 솟구치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누구인가? 양백? 양백으로는 장로들을 당해 내기 힘들었을 텐데… …." 아란하는 조구완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무외도!" 그녀는 툭 한 마디를 내던졌다. "무외도? 심여덕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인가?" 조구완은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 그 늙은이가 맞을 거예요. 하지만 그 늙은이의 도움이 없었 더라도 마옹은 장로들을 처치했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옹이 두 명의 장로를 상대로 이길 수 있었을지……. "무외도, 그 개 같은 늙은이는 아직도 끼일 때와 끼이지 않을 때를 분간하지 못하는구나!" 조구완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아란하는 등을 돌렸다. 사당의 낡고 쾨쾨한 냄새가 싫었다. 서둘러 일지국(日枝國)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사매, 어디 가는가?" 조구완이 옥패를 찰랑거리며 황급히 다가왔다. "중원에서 나의 일은 끝났어요." "그렇다고 바로 가 버린단 말인가?" "사형의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사형은 해야 할 일이 많은 분 이잖아요. 사부는 사형이 좀더 많은 일을 했으면 해요. 그렇게 전하 라고까지 하더군요." "사부가…… 이 이상 어떻게 더 많은 일을 하란 말인가? 지금도 너 무 많이 일을 벌여 종적이 드러날 판인데." 조구완이 눈자위에 힘을 주며 말했다. "때가 왔잖아요. 사부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숨기거나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에요. 그래서 흑막은…… 좀더 과감해 질 필요가 있지요. " "좀더 과감해 지라니…… 좀더 과감해 지라는 이야기는 우리 흑막 의 꼬리를 정파 놈들에게 아주 내보여 목을 쳐 주십사 하고 기다리라 는 말이 아니냐! 사부는 멀리 있고 우리 흑막의 힘은 정파 놈들을 상 대하기에 아직 요원하다는 것을 잊었느냐!" 조구완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사형……." 아란하는 고개만 돌렸다. "흑막이 맡은 그 이상의 역할이 있었던가요? 단혈철각련은 살수당 까지 직접 하수인으로 거느릴 정도로 약하지 않아요. 그런 일은 대리 인(代理人)에게 맡겨도 충분해요. 대리인조차 찾기 힘든 상황이었던 지라 흑막을 만들었지만…… 그리고 사형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사형은 살수당의 막주로 만족하실 모양이죠." 조구완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저 눈자위만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아란하의 말이 백 번 맞더라 도 흑막은 그의 열과 성이 배인 곳이다.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는 심경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형, 하란산에서 다시 뵙겠어요." 하란하는 사내 같은 발걸음을 성큼 옮겼다. "서라!" 조구완은 거칠게 아란하의 팔을 잡았다. 조구완과 아란하의 눈빛이 각양의 색으로 얽혔다. 조구완의 눈빛은 무척이나 많은 말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란하 의 눈빛은 여전히 무심했다. "피곤하군요." 아란하는 조구완의 팔을 털었다. 조구완은 맥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모든 이야기는 오래 전에 끝 나 있었다. 그것을 조구완은 지금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란하는 사당을 나섰다. 비 온 뒤의 하늘은 맑은 빛을 쏟아 붇고 있었다. 일산(日傘)을 쓰기에도 죽립을 쓰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아란하는 중원에 들어 온 후 줄곧 숨겨 오던 자신의 얼굴을 외부에 맡겼다. 그녀는 강변을 향해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어갔다. 다행히 외진 곳이라 사람들의 발길은 없었다. 강변에는 나룻배 한 척이 놓여 있었다. 노를 잡고 있는 여인은 역시 이국의 여인이었다. 아란하는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나룻배에서 기다리던 여인이 노를 저었다. 나룻배가 나아가는 곳은 조화로 장식된 화사한 꽃배였다. 나룻배를 젓는 여인의 힘은 억세 아란하는 잠깐 사이에 화선에 몸 을 실을 수 있었다. 화선에 탄 사공들은 중원인과 이족들이 각각 반이었다. 그들은 일렬로 서 아란하를 맞았다. "출발을……." 아란하는 소매를 저었다. 사공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돛을 올렸다. 꽃배가 천천히 물살을 갈 랐다. 아란하는 선실로 향했다. 패검(佩劍)을 찬 한 명의 여인이 그녀의 곁에 섰다. 선이 굵은 얼 굴에 동산처럼 튀어나온 젖무덤, 옥주(玉柱) 같이 쭉 뻗은 다리를 가 진 팔 척의 여장부였다. 웬만한 사내들 보다 더 큰 아란하도 그녀의 곁에 서자 작아 보였다. 따라서 여인이 찬 패검은 패검이 아니라 장 검(長劍)도 무색했다. 그녀 역시 파란눈을 가지고 있었다. "하라사, 성녀는?" "주실(主室)에 모셨습니다." 팔 척 여인이 말했다. 아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하라사라는 팔 척 여인을 앞세운 채 성녀가 있는 곳으로 향 했다. 수혈이 찍힌 성녀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작고 오밀조밀한 얼굴…… 괜히 집적거려 보고 싶을 정도로 이뻤다 . 자는 모습도 평화스러웠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자신도 잠이 올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성녀에게 찾고자 했던 것은 그런 분위 기가 아니었다. 아란하가 찾고 있었던 것은 신성(神性)이다. 아버지인 구륜전왕과 일지국의 백성들이 목마르게 기다리던 명왕의 전령, 성녀! 수백 년의 기다림 속에 이제 이교도(異敎徒)인 사부의 힘까지 빌려 되찾아 온 성녀였다. 당연히 성녀의 존재는 장엄하고 신령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다시 보아도 아란하는 성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원래 아란하의 믿음은 아버지나 일지국의 백성들만큼 돈독한 편이 아니라 성녀라고 해서 유별나리라 생각은 않았다. 특히 성녀 혈통의 승계 비밀인 천상제 같은 것은 아예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녀에 대한 경외는 어느 정도 있었다. 오랫동안 배교의 분위기에 젖어 커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성녀의 평범이 조금 은 실망스러웠다. "궁주(宮主), 성녀의 수혈을 풀어 들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사를 드시게 해야 하는데……." 하라사가 말했다. 궁주는 단혈철각련 내에서의 아란하의 직책이다. 단혈철각련은 다섯 개의 문(門)이 모여 이루어진 맹(盟)이다. 사부 인 련주와 총노, 사호법, 십장로가 있는 단혈철각부(丹血鐵脚府), 대 사형이 거느린 파벽전(破碧殿), 둘째 사형의 철기대(鐵騎隊), 셋째 사형의 흑막, 그리고 아란하는 여인들로 이루어진 월영궁(月影宮)을 이끌고 있었다. 파벽전의 뒤는 푸른 늑대를 자처하는 몽고의 용사들이 버티고 있고 철기대 뒤에는 강족의 전사들이 있다. 아란하의 월영궁을 받쳐 주는 힘은 아버지인 구륜전왕이 이끄는 일지국이다. 새외 부족의 자제들을 제자로 받아들여 중원 설원을 꿈꾼 사부의 오랜 노력의 결과였다. 물론 새외 각 부족들도 중원을 도모함에 있어 사부와 이해가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아들, 딸을 사부에게 맡겼었다. 아란하의 일지국의 꿈은 성녀를 되찾고 중원 배교를 자신의 교단( 敎團)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많이 상하셨을 게다. 성찬(聖餐)을 준비해서 조금이라도 기분을 풀어 드리도록 하라." 아란하가 말했다. 그녀는 선창으로 눈을 돌렸고 하라사는 식사를 준비하러 갔다. 그 때였다. "아란하……." 몽롱하게 들려 오는 목소리! 아란하는 퍼뜩 고개를 돌렸고 하라사는 발길을 멈췄다. 아란하를 부른 자는 성녀였다. "아란하, 나를 원래의 자리에 데려다 주세요. ……내가 강량의 곁 에 없으면 강량은 무척 화를 낸답니다." 아란하와 하라사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부의 점혈 수법은 고명해 아란하 본인이 풀지 않으면 그 누구도 풀 수 없다. 아란하는 성녀의 수혈을 풀지 않았다. 성녀는 수혈을 찍 힌 채 이야기하고 있었다. 꿈결 같이 몽롱한 성녀의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강량이 화를 내면 우리는 모두 무사하지 못해요. 아란하, 그 의 곁에는 암왕이 있어요. 암왕……." 성녀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숨소리도 가늘고 규칙적이었다. 성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라사의 얼굴 표정이 해쓱해졌다. 그녀는 제법 교의 열렬한 신도다. 성녀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그 녀를 더욱 기괴한 공포에 빠지게 했을 것이다. '강량, 암왕…….' 하라사만큼은 아니지만 아란하도 기분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 강량은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다. '암왕은…….' 물론 암왕도 알고 있었다. 명왕과 함께 천하를 양분 세상의 어둠을 지배하는 자! '나의 이름은 또 어떻게 알았는가?' 이상한 기분은 점점 은근한 두려움으로 바뀌어 갔다. 왠지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제15장 혈무(血霧) "…… 곽부의 단혈철각련과 그의 하수인인 흑막의 짓입니다. 도대 체 그들이 무슨 이유로 성녀를 납치해 갔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습니 다." 양백이 보고했다. 야명주(夜明珠)가 은은한 빛을 내고 약 냄새가 온 방에 가득한 작 은 석실이었다. 명강량은 문건(文巾)에 깨끗한 백의를 걸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 에 병색이 완연한 모습이었다. 그 짧은 동안 양백이 갖은 노력을 동 원 영약(靈藥)으로 알려진 것들을 복용시켰기 때문에 그나마 거동이 가능한 정도였다. "찾아가서 물어 볼 생각입니다. 무슨 이유로 그 같은 짓을 벌였는 지……." 명강량은 신장도를 찾았다. 그가 신장도를 허리에 걸쳤다. "아직 움직일 만큼 상세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좀더 몸을 요양하 시기 바랍니다." 양백은 명강량을 잡았다.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잠깐 사이에 뒤돌아보면 우리의 적은 또 한 명 늘어나 있을 것이오." 명강량은 쓴웃음을 흘렸다. "밖에 구대문파와 유향경천문의 수족들이 쫙 깔렸습니다. 아무래도 분하의 싸움에서 이상한 낌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이곳은 불모산(不 毛山)이라는 곳입니다. 예전에 관부의 묵인 아래 내가 철을 캐던 곳 이지요. 우리가 있는 곳은 그 폐광구(廢鑛口) 안입니다. 여기에 있는 한 적들은 전혀 우리의 종적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위가 조용해 지고 몸이 회복되면 나가도록 하시지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성녀께서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명강량은 화령주의 효능에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을 맡기기로 했다. 양백은 주름살을 깊게 그린 채 명강량을 바라보았다. 갈수록 드세 지는 이 젊은 명옹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분하에서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면 당연히 놈들의 이목은 양 명두 에게 집중되고 있을 것 아니오?" 명강량은 문득 생각난다는 듯 물었다. "그 정도의 말을 둘러 낼 재간은 있습니다." "양 명두는 그렇겠지만 배에 탄 다른 자들은 적들의 추궁에 쉽게 둘러 낼 말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야 알고 있는 것이 있어야지요. 전후를 모르기 때문에 본 그대로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 일에 입을 맞추는 것도 다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양 명두께서 알아서 잘 하시리라 믿습니다. 어쨌든…… 말을 맞추 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배로 돌아 가셔야겠군요." "예, 그래서 명옹께 인사도 드리고……." "내가 먼저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주위를 살핀 후 양 명두는 천천 히 나오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양백은 머리를 숙였다. "성녀와 명옹께 죄송할 뿐입니다. 내 배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 그가 머리를 들며 미간을 좁혔다. 명강량은 아무 소리 않고 양백을 스쳐 지났다. 양백을 지나 문고리를 잡던 그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양백을 바라보며 옷깃을 훑었다. 양백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맺혔다. "이것 말입니까?" 양백은 어깨를 흔들었다. 빈 소매가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렸다. 명강량은 양백의 한 쪽 팔이 허전한 것을 그제야 발견한 모양이었 다. "누가 그랬습니까?" 명강량이 물었다. 양백은 쓴웃음만 흘렸다. 그렇게 쉽게 팔을 자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의 일을 이 해할 수 없었다. 무엇에 홀렸음이 분명했다. 명옹도 그 때의 일을 모 르는 것을 보면 같이 홀린 듯했다. "아마 붕조(鵬鳥)가 날아와 물고 간 모양이지요. 자고 일어나니 없 더군요. 사실 날아간 이 팔 한 쪽 때문에 나는 유향경천문이나 구대 문파 놈들에게 분하에서 일어난 일을 보다 싶게 변명할 수 있게 되었 습니다." 양백이 원래의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명강량은 웃지 않았다. "누가 그랬습니까?" 같은 표정에 같은 말투였다. 하지만 악착스러움이 느껴졌다. '또 변했구나.' 양백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고집도 세고 강단도 느껴졌지만 저런 악착스러움은 처음에는 느껴 지지 않았었다. 그는 변해 버린 명옹의 모습에 씁쓸해 하며 자신의 팔을 자른 원흉 을 찾으려 했다. 보건대 원흉을 말하지 않으면 백 번이라도 더 같은 말을 물을 것 같았다. 하지만 팔을 자른 자가 스스로라고 말하기는 싫었다. 팔을 자른 이 유에 대해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하는데 남을 어떻게 납득시킨단 말 인가. "말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말하라고 한다면 …… 세상의 모든 일은 명왕의 뜻! 붕조가 아니라 명왕께서 나의 팔 을 필요로 했겠지요." 양백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명왕…….' 명강량은 고개를 숙인 채 신장도의 칼날을 만졌다. "양 명두, 명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무슨……." 너무 의외의 물음이라 양백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서렸다. 명왕의 존재를 물어 마치 교에 대한 자신의 부덕을 힐난하는 것 같아 가슴 이 뜨끔하기도 했다. "명왕은 어디에 있습니까?" "……." 양백은 수염을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도저히 젊은 명옹의 의중을 눈치챌 수 없었다. 다행히 명옹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집 요함을 보이지 않았다. "명왕께서 우리 주변에 있다고 느껴지는 그런 좋은 날 다시 보기로 합시다." 명강량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양백도 포권으로 인사했다. "어디로 가실 예정입니까?" 그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나는 이곳에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강을 건널 생각입니다 ." 명강량의 대답이었다. 그가 문을 열고 언제나 그의 발걸음 앞에 친 근하게 놓여져 있는 어둠 속으로 몸을 맡겼다. "강을 건너리라 생각했습니다. 강 양안도 적들로 가득합니다. 그래 서 내가 도강을 돕고자 조금 준비를 해 둔 것이 있습니다. 내일 새벽 에 신탄(新灘)에서 강을 건너십시오. 안개가 제법 볼 만하게 피어오 르는 곳입니다. 그곳에 사부로부터 배운 몇 가지의 잔재주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기회를 틈타 강을 건너시기 바랍니다." 양백이 명강량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 * * 푸르르! 푸! 일타운은 연신 고개를 흔들며 투레질을 했다. 발걸음도 신경질적이 었다. 처음에는 한가로운 발걸음이 좋았으나 지금은 용솟음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해 뿔난 망아지처럼 투덜댔다. 그러나 단원홍은 일타운의 고삐를 채지 않았다. 그는 묵상을 하듯 말을 타고 있었다. 여인들의 추파도 봄날의 화려함도 어느 것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 했다. 가끔 둔병(屯兵)들이 그의 발길을 잡았으나 허리에 찬 금인(金 印)을 보고는 후다닥 길을 비켜 주었다. 단원홍은 일타운과 함께 영원히 길을 걸어갈 듯했다. 하지만 그의 길도 영원하지만은 않았다. 투두두두두! 다섯 필의 말이 뽀얀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일타운, 어디 앉을 곳이나 찾아보자." 단원홍은 관도를 벗어났다. 다섯 필의 말이 속도를 늦추며 그 뒤를 따랐다. 단원홍이 일타운에서 내린 곳은 옥류(玉流)가 흐르는 곳이었다. 그 는 일타운을 물가로 끌고 가 물을 먹인 후 등을 돌렸다. 말에서 내린 다섯 명의 사내가 그를 향해 일제히 포권했다. "오랜만이구나." 단원홍이 네 명의 사내 앞에 선 청년에게 말을 건넸다. 곱상한 얼굴, 소매가 길게 늘어진 청포(靑袍)에 유건(儒巾)을 쓴 청년은 바로 유향경천문 주작당주, 언상영이었다. "협시(挾侍)를 해 드리지 못 해 죄송합니다. 남경에 가신다는 것을 알고 시종들을 보냈는데 문주를 찾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바로 남경에서 문주를 기다리라 했습니다." 언상영이 손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가 사람을 보내 번거롭게 할 것 같아 일부러 한적한 길을 택했 다. 그런데……." 단원홍의 언상영의 뒤에 서 있는 네 명의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행검수들 중 한 명이 없구나." 언상영의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은 배교의 명두들인 여양의, 주화청 등을 해치우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 바 있는 오행검수들이었다. 원래 언상영의 가문인 진주 언가는 기문진법과 토목, 심지어 강시 술 같은 잡학으로 이름을 날린 곳이다. 언상영도 가전을 익혀 그 같 은 것들에 능했다. 그 중 특히 언상영이 자신 있어 하는 부분은 기문 과 검진이다. 따라서 유향경천문 내에 있는 오행검수들은 당연히 언 상영의 노고(勞苦) 속에 키워진 자들이었다. 소속도 주작당이다. 그 들이 다른 당주들을 따라 다니는 이유는 언상영이 유향경천문의 내부 일에만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서 마두, 주화청의 칼에 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 때문에…… 새로 한 명을 뽑아 오행검진을 채울까 하다가 차라리 저들에게 사상 검진(四象劍陣)을 익히게 했습니다. 처음부터 손발을 맞추지 않은 자 가 들어오면 새로이 검진을 가르치는 것 보다 힘든 부분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언상영이 말했다. "오행검진을 파해하다니…… 주화청이라는 자의 무공이 의외로 높 았던 모양이군." "현무당주의 말로는 여양의 보다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주화청을 처치한 자도 현무당주입니다." "남궁기의 실력은 보지 않아도 많이 늘었겠지." 단원홍은 뒷짐을 졌다. "팽해만과 당예도 잘 있는가?" "그들을 보지 않은지는 저도 꽤 오래 됩니다. 마옹을 쫓아다니느라 근 팔 개월여 이상을 본 문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신임 마옹이 아직 잡히지 않았다는 소식은 나도 들었지. 남궁기 등이면 충분히 처치하리라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언상영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할 것까지야…… 일부러 잡지 않으려 한 것도 아닐 테고 마옹 이라는 자가 그만한 재주도 가졌겠지." "이번에는 잡을 것 같습니다. 이곳으로 오는 도중에 받은 보고입니 다. 양백이라는 자의 배에서 마옹의 족적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곳에는 남궁 당주, 당 당주, 팽 당주는 물론 무당, 화산의 제자들 까지 우르르 몰려 있습니다. 포위망도 여느 때보다 좁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너무 장담하지 말게. 한 번 그물을 헤집은 자는 다음 번에도 용케 그물을 헤집지. 싸움에는 전대 마옹이 강하더라도 달아나는 재주는 신임 마옹이 더 강한 것 같더군. 전대 마옹도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 지 않고 달아나는데 주력했더라면 육 개월만에 처치하기 힘들었을 거 야." "놈의 달아나는 재주가 전대 마옹 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문주 께서 직접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신임 마옹은 문주께서 나섰더 라면 삼 개월여도 도망 다니지를 못했을 것입니다!" 언상영이 냉랭하게 말했다. "성녀라는 여자는?" "배교의 요사(妖邪)한 계집 말입니까? 그 계집은 마옹과 붙어 다니 고 있겠지요." "하늘과 교감(交感)하는 여자라 했던가. 한 번 보고 싶군." 단원홍이 혼자말로 중얼대며 하늘을 우러렀다. "상영,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는 부탁을 한 가지 하기 위해서다." "말씀하십시오." "오는 길에 줄곧 사부를 생각했어.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 뵙지 못한지 벌써 몇 년이다. 홀로 외롭게 계시는데…… 아무래도 내가 곁 에서 모셔야 할 것 같다. 이제야 이런 생각을 하다니……." 단원홍은 시선을 하늘에 둔 채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운 대야(大爺)를 모셔 오라는 말씀입니까? 운 대야를 유향경천문 에 모셔 온다면 그만한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언상영은 반색을 했다. "아마 오시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내가 자네를 보내는 이유는 내 마 음을 전해 주고 눈치껏 사부의 운을 떠보기 위해서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재주는 자네를 따를 사람이 어디 있는가." "과찬이십니다." "내가 마옹을 잡으러 나서면 삼 개월만에 잡을 수 있다고 했는가. 남경까지 갔다가 마옹을 잡으러 나서는데 한두 달은 걸릴 것이고…… 다섯 달 후에 찾아뵌다고 전해 주게." "삼 개월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언상영은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해 준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 ……산과 들에 가득한 배교도들의 피! 마옹, 마녀, 마두들을 서둘러 처치했다면 이렇게 많 은 피를 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실 저는 문주의 말을 동감하기 힘듭니다. 배교도들은 지위 고하 를 막론하고 모두 죽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요. 문주께서 배교 의 수뇌들만 추살하라 했으니 그렇게 하고는 있습니다만……." "그럼 됐네." 단원홍은 언상영의 말을 잘랐다. 논쟁을 할 수 있는 사람과는 논쟁을 하지 않는다. 논쟁을 할 만한 사람은 이미 자신의 논리를 굳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을 할 수 있는 자들과의 논쟁은 언제나 평행선을 확인하며 공허하게 끝난 다는 것을 단원홍은 알고 있었다. "배교도들의 피를 미친 듯이 탐하는 자들은 사실 우리 유향경천문 이 아닙니다. 우리는 문주의 명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지요. 하지만 강호의 인심이 어디 그렇습니까. 강호는 약자들에게 동정 보다 피의 축제를 주기 더 좋아합니다. 배교도들에 대한 사냥은 군소방파들이 더 열을 올리고 있지요. 마치 그래야만 자신의 입지가 지켜지는 것처 럼 말입니다. 이제 지금은 그 누구도 배교도들 앞에 떨어진 칼을 거 두라고 소리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문주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 언상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처음에는 이유가 있어 칼에 피를 묻혔는지 모른다. 그러나 다음에 는 이유를 찾기 보다 칼에 묻은 피의 흔적을 먼저 찾는다. 다음, 다 음에는 더더욱 혈적(血蹟)을 찾고…… 결국 나중에 이유는 공허한 메 아리로만 남고 피의 흔적만 선명하게 남아 싸우기 위해서 싸우는 자 들의 목소리만 울리는 곳, 강호(江湖)! 단원홍은 강호에 반쯤 발을 담그고 있었으나 언상영이 하고자 하는 말뜻은 충분히 알아챘다. "나는 가끔 문주께서 강호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육삼문을 떠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단원홍은 입가에 엷은 미소가 지은 채 언상영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관부를 떠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홍포에 오사모, 자줏빛 인끈이 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던 모양이군." "일타운에 장검, 소매에 묻은 핏자국도 어울려 보이지 않습니다. 배교도에 대한 염려까지……." 언상영의 말에 단원홍은 자신의 소매를 들었다. 지운다고 지웠는데 소매에는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한당주 혜명과의 비무에서 얻은 핏자국이리라……. "관부도 어울리지 않고 강호도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천상 유령( 幽靈)처럼 살 팔자인가 보군." 단원홍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저희들은 문주께서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으시면 무척 섭 섭할 것입니다." "구대문파 때문인가?" "맞습니다. 오랜 우리 사대세가의 꿈을 응원해 주신다고 하지 않았 습니까?" "약속했지. 공공께서 약속을 하라고 했으니…… 공공의 청이 없었 더라도 나는 그 약속은 지켜 줄 마음이 있었네. 구대문파는 국법(國 法)을 우습게 아는 한낱 무부들일 뿐이다. 앞으로 그들은 자네들이 이끄는 유향경천문에 의해 통제를 받을 것이다." "그 말씀이면 모든 것이 족합니다." 언상영은 읍을 했다. "술은 남경에 다녀온 후에 한 잔 하세." "물론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언상영과 사상검수들은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단원홍은 일타운에 올랐다. 그는 한가했으나 그의 주변은 언제나 바쁜 듯했다. 단원홍은 가끔 무엇인가에 매달려 바쁠 수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 * * "이이, 정말 기분이 개떡같군." 손을 파리처럼 싹싹 비비고 있는 자는 교타방의 표사였다. "개떡이 어떻다고 자네 기분에 개떡을 갖다 대는가?" 심심함을 시비조로 달래려는 자도 교타방의 표사였다. "개떡이 어떻는데? 우리 강하(江下)의 사람들은 개떡은커녕 만두( 灣頭)도 먹어 보기 힘드니…… 사시사철 먹는 것이라고는 쌀밥뿐이다 ." 손을 연신 파리처럼 비비던 자가 은근 중에 자신의 고향인 강남의 풍성한 산물을 자랑했다. "어떻기는 맛만 좋지. 하지만 생긴 것은 정말 개떡처럼 생겼지. 자 네 상판처럼 말일세." "아하! 그런가? 그렇다면 정말 나는 개떡이 맞군. 자네 마누라가 말하기를 생긴 것과 달리 그 짓 하나만은 감창(　暢) 나게 잘 한다고 나를 칭찬했거든." "상종 못할 개자식이로다. 구멍이라면 개구멍, 닭구멍도 가리지 않 겠구나." 좌측에 서서 시비를 걸던 표사가 혀를 끌끌 찼다. "개구멍, 닭구멍 중 네 마누라 구멍은 어떤 구멍이냐?" "감창 나게 놀아 본 놈이 알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나는 집에 들어가면 누워 자기도 바쁘다. 어이, 그건 그렇고 정말 개떡같은 날 씨군." 그가 칼집으로 발등으로 툭툭 두들기며 투덜댔다. 오리무중(五里霧 中)이 따로 없었다. 지척에 있는 사람도 눈을 크게 뜨고 보지 않으면 사람을 식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는 자욱했다. "개떡이 어떻다고 자네 기분에 갖다 붙이나. 나 같으면 꼭 뿔난 돼 지를 본 기분이라고 말했을 거야." 우측에 서서 손을 비비던 표사가 시비조로 말을 붙였다. "뿔난 돼지를 본 기분이라니?" "뿔난 돼지도 모르는가?" "뿔난 돼지야 산에 가면 많이 있지." "쩝! 하긴 자넨 그 자리에 없었으니…… 내가 말하는 자는 유향경 천문의 청룡당주라는 팽가 놈이다." "아하! 맞어. 그 작자의 별호가 소면각저였지." "어제, 놈이 부방주를 찾아왔더군." "필경 개수작을 부리고 갔겠군." 좌측에 선 표사가 보지 않아도 훤하다는 투로 말했다. "우리를 제 놈의 수족처럼 아는 모양이더군. 구대문파 제자들에게 는 간이라도 빼 줄 듯이 쩔쩔 매더니……." "그놈을 그래 가만 두었나?" 좌측의 표사가 쌍심지를 치켜올렸다. "부방주, 표두도 어쩌지 못하는 놈일세. 우리 같은 표사들이야…… 치밀어 오르는 울화를 꿀꺽 삼키고 말았지. 자네는 늦게 합류한 덕 을 톡톡히 본 줄 아세. 자네 성격이야 원래 화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 아닌가. 필경 달려들었을 것이고 달려들었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 들었겠지. 그놈의 손버릇에 하토문의 무사 몇 명도 죽었다고 들었다. " "호오! 정작 조심해야 할 자는 마옹이 아니라 소면각저라는 놈이었 군.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원래는 그렇게까지 흉폭하지는 않았다더군. 근자에 기분 나쁜 일 들이 줄줄이 있었던 모양이야. 마옹은 잡히지 않고 괴노에게는 손가 락을 잘려 수하들 앞에 체면을 구기고……." "그것 참! 고소하다." 좌측의 표사가 손뼉을 쳤다. "어쨌든 조심하세. 마옹이든 소면각저든…… 소면각저, 그놈이 밤 낮 없이 날뛰는 것을 보면 마옹이 가까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팽해만을 욕하던 표사는 칼을 사타구니에 끼운 채 다시 손을 비볐 다. "이곳의 날씨는 원래 이런가?" 그가 자꾸만 불어나는 안개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맘때면 안개가 심하긴 심하지. 분하의 차가운 물이 황하의 물과 만나서 수막을 만드는 게야. 더해서 지금은 봄이라 기온 차가 심하 니 안개가 심할 수밖에…… 해도 뜨지 않았잖아." "해는 떴는데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으스스한 게 기분이 좋지 않아." "마찬가지야." 교타방의 두 표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움찔 몸을 떨었다. 봄이라고는 하나 안개 탓에 아직 날씨는 추웠다. 두 명의 표사들이 무슨 이야기로 시간을 보낼까 생각하며 발을 동 동거릴 때였다. "앗!" 우측의 표사가 고함을 질렀다.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인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 귀화(鬼火)다." 좌측에 서 있던 표사가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무리 담이 큰 자라 하더라도 머리칼이 곤두설 장면이었다. "이, 인광(燐光)일 뿐일세. 귀…… 귀화는 무슨……." 말은 그렇게 했으나 우측 표사의 얼굴도 하앴다. 인불은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차례로 피어올 라 종내는 수 백, 수 천을 헤아렸다. 인불이 풍매화(風媒花)처럼 안개 속을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우웅! 우! 우! 우! 우! 하는 평생 들어보지 못했던 이 상한 소리도 들려 왔다. 우측 표사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자신의 팔뚝을 비비며 주 위를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이…… 이 소리는……." 그가 좌측 표사의 팔을 툭툭 쳤다. 좌측 표사는 꼼짝을 않았다. 그의 눈은 인불에 고정되어 있었다. 표정이 수시로 바뀌었다. 마치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듯한 극도로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무엇을 보았기에……." 우측 표사의 시선도 황급히 인불을 쫓았다. 그러나 그는 인불에 시 선을 두지 말았어야 했다. 인불은 풍매화처럼 움직여도 멋대로가 아니었다. 인불은 여러 가지 도형(圖形)을 만들어 내듯 움직이고 있었다. 인불을 쫓던 우측 표사의 눈빛이 순식간에 몽롱해졌다. 그리고 그 는 수 백, 수 천의 홍등이 자신의 머리 속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 소름이 돋고 발과 몸이 굳었다. 우측 표사의 눈빛도 극도의 공포로 질려 갔다. 무엇을 보았는지 두 표사는 바지에 오줌을 줄줄 싸며 움직일 줄을 몰랐다. "으악!" "악!" 요란한 비명이 들려 온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두 표사는 그 비명도 들리지 않는지 꼼짝을 않았다. "사형, 큰일났습니다!" 도포 자락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달려오는 자는 사제, 명오(明吾)였 다. 명광은 두 명의 사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명은 그도 들었 으니 큰일날 일쯤은 마옹의 출현으로 충분히 짐작했다. 두 명의 사제들도 남루한 도포에 장검을 걸쳤다. 무당산에서 산동, 산동에서 태행산, 태행산에 신탄, 이제야 기다리 던 마옹을 조우하는 순간이라 모두는 생각했다. 명광은 명오의 말을 들을 것도 없이 사제들과 함께 임시로 묵고 있 던 목채를 나섰다. "사형, 저기를!" 명광이 나오자마자 명오는 허공으로 손가락을 들었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가관이라고도 할 장면이었다. 인불은 은한(銀漢)처럼 반짝이고 그 가운데 하나씩 있는 홍등은 계 명성처럼 기괴한 빛을 뿌렸다. 우웅! 우! 우! 우! 우 - - - 목채에서는 바람 소리 정도로 생각했던 소리였다. 하지만 조금 씩 뚜렷하게 들려 오는 소리는 바람 소리는 분명 아니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소리임으로 용의 울음소리 정도로 생각할까. 명광은 인불과 괴성에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가 어깨를 펴며 수일(守一)로 정신을 집중하려 할 때였다. 그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이 있어 급히 사제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명의 사제는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명오의 눈빛도 몽롱 하게 젖어 갔다. 명광은 단전에 기를 모았다. "하-핫!" 그가 짧게 창룡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명오를 비롯한 세 명의 사제들은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 렸다. 그들이 명광을 바라보았다. "인불을 보지 마라! 다른 사제들은?" 명광이 다급히 물었다. "사형이 있어라 한 곳에서 마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명정 사형은 마옹의 도강을 대비 강 건너편에 있고……." 명오는 아직도 정신을 완전히 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자다 깬 사람처럼 말했다. "가자!" 명광은 뛰었다. 그는 달리면서 검을 연신 규칙적으로 찰그닥거렸다. 이상한 소리로 부터 사제들의 귀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명광 사형, 그럼 저 인불은……." 명오는 그제야 알아챈 모양이었다. "기진(奇陣)!" 두 명의 사제도 소리쳤다. 명광은 발걸음을 빨리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광 사형, 저는 이토록 기괴한 진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입니 다. 역시 배교놈들의 짓거리입니까?" 명오가 물었다. "화혼진(火魂陣)이라는 것이다. 화혼무(火魂舞)라는 배교놈들의 귀 신 장난에서 유래한 것이지." "화혼무는 또 뭡니까?" "배교놈들은 명계로 들어가지 못한 혼은 불씨로 떠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인과 유황을 죽통에 넣어 터뜨려 인불을 만든다. 놈들은 그 인불을 명계로 들어가지 못한 혼이라 믿고 하늘로 올라가기를 축원하 는 제를 지내지. 그 제가 바로 화혼무다. 화혼진은 바로 화혼무에 음 양(陰陽)이나 삼재(三才), 사상, 구궁(九宮)의 변화를 주어 만든 진 법으로 삼류배들의 눈을 현혹시키기에는 딱 좋지. 하지만……." 명광은 말끝을 흐렸다. 기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중 하 나가 그날의 일기(日氣)다. 화혼진은 안개와 기가 막히도록 잘 어울 렸다. '이놈의 안개가 유령 놀이 같이 유치한 하오문 진법의 위력을 백 배로 늘였구나.' 그는 안개에 대비하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탓했다. "그럼 저 이상한 소리들은……." "바람 부는 곳에 홈을 판 나무 등거리를 놓아 괴성이 들리도록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경 쓰지 마라!" 명광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명오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크악!" "악!" 비명은 계속해서 들렸다. 그러나 비명이 들리는 위치를 잘 분간할 수 없었다. 이상한 소리가 비명이 들리는 방향까지 혼란케 했다. 비 명은 지척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 소리는 명광의 귀까지는 현혹시킬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 는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달려갈 수 없었다. 상대는 바람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 어느 곳에 칼을 들이밀지 정말 오리무중이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사제들의 목숨이 위험했다. 제법 정력(定力)이 있다는 명오까지 인불에 넋을 빼앗길 정도였으니 …… 사제들의 안전을 지켜본 뒤 상대를 추적할 생각이었다. 명광은 장검을 철컹이며 발걸음을 점점 더 빨리 했다. '헤…… 헤헤, 젠장! 웃음도 나오지 않는군.' 팽해만은 코를 박고 뒤집어져 있는 시신을 걷어찼다. 두 구의 시신의 교타방의 무사들이었다. 팽해만은 주위를 휘 살폈다. 지척에서 비명이 들려 한달음에 달려 왔는데 마옹은 또 보이지 않 았다. '이번에는 나뭇가지였군.' 교타방 무사들의 심장에는 손바닥 크기의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암기에 당했다면 이 근처에 마옹이 있을 리 없었다. '정말 마옹인가?' 팽해만은 메기입을 씰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마옹을 잡을 그물은 조롱(鳥籠) 같이 촘촘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안개로 인해 그물은 숭숭한 허점 투성이었다. 평소 마옹의 행보를 보건대 벌써 강을 건넜거나 화산파가 기다리는 서쪽으로 도주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마옹은 조롱 속을 떠날 생각을 않았다. 반대로 유향경천문 이나 무당파, 교타방, 하토문의 수하들을 조롱 속에 가둔 듯 마음껏 주살하고 다녔다. 마옹이 이렇게 정면으로 싸움을 걸어온 적은 없었다. 때문에 팽해 만은 암습자가 마옹이 맞는지도 의심해야 했다. 안개로 인해 암습자 의 얼굴은커녕 머리칼도 보지 못한 상태이니……. "크악!" "컥!" 비명은 쉬지 않고 터졌다. 팽해만은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이제는 달려가 볼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헤헤헤, 웬만큼 재미를 봤으면 그냥 가시지 이건 너무 심하지 않 는가.' 인불과 번뜩이는 홍등, 짙은 피냄새로 안개는 혈무(血霧)로 보였다 . 팽해만은 묵편을 휘휘 저으며 주위를 서성거렸다. 인불이 화혼진이라고 떠들고 다녀 이제는 환각에 빠져드는 수하들 은 없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수하들은 인불을 보지 않으려고 졸고 있는 닭처럼 머리를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마옹이 목을 베기 딱 좋은 자세였다. 그래서 마옹은 수하들을 닥치 는 대로 닭목 자르듯 베고 다녔다. 일방적인 도살이었다. 마옹이 분 명하다면 이제껏 당한 분풀이를 실컷 하는 셈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놈을 잡는가 했더니……. 헤헤헤, 이 꼴이 무엇인 가? 배교놈들이 믿는 신은 정말 있는 모양이군. 하필이면 이때 안개 라…… 천국성, 그 개자식! 황하를 그렇게 많이 오갔으면 여기에 안 개가 심하다는 것쯤은 알았을 것 아냐! 누가 제 놈에게 꼬리 치는 일 이나 더 신경을 써라 했나.' 팽해만은 교타방 부방주의 굽실대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어이없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눈앞의 마옹을 쫓는데 급해 지세와 일 기를 따지지 못한 자신의 실책을 통탄했다. 하지만 누가 일기까지 꼼 꼼히 따지며 추적을 한단 말인가? 주작당주, 언상영 정도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팽해만은 거칠게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매번 실책이나 통탄하는 자신에게 울컥 울화가 치솟았다. 눈에는 핏발이 섰다. "어이없군! 어이없어!" 그가 천지가 떠나갈 정도로 와락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래 봤자 돌아오는 것은 냉랭한 메아리뿐이었다. '안개가 걷히지 전까지는 수를 찾지 못하겠다. 한 발 물러나 포위 망을 다시 구축해야 하나…….' 팽해만은 머리를 쥐어짰다. '헤헤헤, 이럴 때 누가 언상영, 그놈의 목을 싹둑 베어 내 머리와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 별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안개가 걷히기 전 어디로 가긴 가겠지. 어디로 갈 것인가? 서쪽은 훤히 밝았을 테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갈 리는 없겠지. ……강을 건널 것이다. 물살이 빠른 곳을 찾아! 그곳에서 기다리자. 헤헤헤, 실컷 놀다가 지치면 그곳으로 오겠지.' 팽해만은 마옹을 쫓아다니기를 포기하고 한 곳에서 기다리기로 했 다. 그는 뿌연 수막에 어린 강가를 향해 발걸음을 죽인 채 걸어갔다. "으악!" "억!" 비명은 줄을 이었다. '마옹이란 놈은 죽어도 할 말은 없겠군. 한 목숨이 저렇게 많은 목 숨들을 뺏어 가니…… 헤헤헤! 고맙다. 나의 귀여운 수하들아! 죽어 서 마옹이 원귀로 나타나지 않게 해 주어…….' 팽해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짐짓 경박한 척 하고 있었지만 팽해만 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옹의 칼이 수하들만 두려울 까닭은 없었 다. 우제준도 죽인 놈이다. 팽해만은 한 식경 가량을 걸었다. 쿠르르르르! 물살이 굽이치는 소리가 거세게 들리고 안개는 더욱 자욱했다. 물가가 지척인 모양이었다. 그는 청각(聽覺)에 온 신경을 모았다. 배 젓는 소리야 숨길 수는 없을 테니……. 팽해만은 귀를 세우고 물가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응?' 팽해만의 눈빛이 이채로 번쩍였다. 아주 순간적으로 가는 기파를 느낀 것이다. 가까이 있었다. 팽해만은 숨을 죽이고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기파를 숨길 정 도면 예사로운 상대가 아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손을 꼽을 정도 …… 당연히 마옹도 그 중의 한 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유엽도의 도신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과 귀는 토끼의 눈과 귀 보다 더 영활 하게 움직였다. '저쯤인데…….' 팽해만은 상대의 위치를 가늠했다. 문제는 작자가 마옹이 맞느냐였다. '마옹이 아니면 쥐새끼처럼 숨을 죽이고 있을 리 없지!' 팽해만은 남은 힘을 벼락 같이 끌어올렸다. "핫!" 그가 삼 장 밖의 허공을 향해 유엽도를 번뜩였다. 팽가의 절예, 오호단호도법 중에서 '쾌(快)'로 으뜸인 오호단혼뢰( 五虎斷魂雷) 초식이었다. 과연 오호단혼도법은 이름 그대로였다. 다섯 마리의 뇌호(雷虎)가 태산이라도 삼킬 듯한 기세로 날았다. 무외도와 싸울 때와는 전혀 다른 면모였다. 사실 팽해만은 무외도와 싸울 때에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었다. 전 력을 다해도 이기지 못할 상대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했 으면 무외도와 최소한 몇 십 합은 멋들어지게 어울렸을 것이다. 수하 들 앞에 최소한의 체면은 지켰을 테고…… 하지만 그렇게 했다면 무 외도의 초식도 흉흉함이 더 했을 것이다. 당연히 살아날 확률은 적었 을 것이다. 그 때문에 팽해만은 무외도를 상대할 때는 본신의 실력을 전부 발휘하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상대가 마옹이라면 달랐다. 웅! 웅! 하는 칼 바람과 함께 유엽도는 천라지망을 그렸다. 한 합 에 모든 것을 끝장낼 듯 달려드는 팽해만의 기세를 그 누구도 꺾지 못할 듯했다. 그의 유엽도가 원하는 목적지를 향해 천군만마(千軍萬馬)로 치달을 때였다. 번쩍! 어둠 속에서 푸른 섬광이 작렬했다. 섬광은 팽해만의 유엽도 에 거칠게 부딪혔다. 쨍! 쨍! 쨍! 쨍! 현란한 불꽃 속에 팽해만은 어깨를 흠칫했다. 손목이 저려 왔고 근 맥은 뒤틀렸다. 검을 부리는 재주도 놀라웠고 내력도 엄청났다. 그렇 다고 물러날 수도 물러날 상대도 아니었다. 팽해만은 재빨리 유엽도를 고쳐 잡고 오호단혼산(五虎斷魂散)으로 다시 공세를 취하려 했다. 그때였다. "그만!" 안개 속에서 다급한 고함이 들렸다. 팽해만의 뒤룩뒤룩한 눈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뭐야?" 그가 볼멘 소리를 냈다. 갑자기 긴장이 풀어져 어깨가 축 늘어졌다 . "아무리 안개 속이지만 그 정도 거리에서 일 합을 주고받고도 나를 모르겠던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안개 속에 불쑥 나타난 자는 남궁기였다. "젠장할 놈! 쥐새끼처럼 행세 하니까 그렇지." 팽해만이 메기입을 씰룩댔다. 사실 그는 남궁기의 말에 조금 겸연 쩍은 마음도 적지 않았다. 남궁기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무턱대고 칼을 휘두른 것은 마옹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이었으리라. "마옹에게 나 여기 있다고 밝히고 있었어야 옳았다는 말인가?" 남궁기가 다가섰다. "그래서…… 보아 하니 현무당주께서도 여기서 숨까지 숨긴 채 마 옹을 기다릴 생각이었나 보군." 팽해만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자네는 다른 방법이 있던가?" 남궁기가 검을 스르릉 검집에 넣으며 물었다. "없었어. 내 평생 이런 싸움을 벌일 줄 알았겠나. 헤헤헤, 안개와 원한이 진 적은 없거든. 아니야! 아니야! 입이 커서 다른 사람보다 안개를 많이 마시긴 마신 편이지." 팽해만은 너스레를 떨었다. 남궁기는 팔짱을 낀 채 나무에 몸을 기댔다. "……치욕의 하루로 기억되겠다. 문주의 얼굴을 어떻게 보고 강호 인들이 조소는……." 그가 찹찹한 눈빛으로 말했다. 팽해만은 슬쩍 남궁기를 바라보았다. '저놈이, 저런 표정을 지을 때도 다 있군.' 남궁기는 안면 근육이 유난히도 부드럽지 못한 자였다. 무표정이 아니면 고졸(古拙)한 미소가 전부였다. 검밖에 몰랐기 때문에 다른 표정이 있을 리 없었다. "안개는 곧 걷히겠지?" 남궁기가 나무에서 어깨를 떼며 물었다. "물론!" "서쪽은 누가 지키고 있나?" "화산파!" "강 건너는?" "명정이라는 무당 말코 나부랭이에게 지켜라 했다. 명광이라는 놈 도 같이 있으라고 했는데 자신도 여기 있겠다고 부득부득 고집을 피 우지 않겠나." "마옹의 목을 치기에는 이 이상 좋은 장소는 없지. 명정이라는 자 를 강 건너에 남겨 둔 것만 해도 무당파에게 고마워 해야 해." "아무렴! 걸음이 늦어 어쩔 수 없이 서쪽을 지키게 된 화산파의 발 들에게는 더더욱 고맙고……." "마옹이 강을 건너 갈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물론! 자네가 이곳에 있고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지." "명광은 몰라도 명정은 마옹의 도강을 막기에 역부족일 것이다." "하토문의 수족들도 있다. 음…… 그러나 그들로는 조금 힘들겠지. 하지만 귀하신 당 당주께서 있다." "당예가 강 건너에 있단 말인가?" "몰라!" 팽해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당예가 강 건너에 있는 줄 아나? 주작당주로 부터 받은 지시가 있었던가?" "없었어!" 팽해만은 눈을 뒤룩거렸다. 언상영이 보고를 받은 것은 단원홍을 만나러 가는 도중이었다. 때 문에 보고는 받을 수 있었어도 지시를 내릴 수는 없었다. 비둘기는 날개만 펴면 내키는 대로 소식을 전해 주는 영리한 동물은 아니므로 ……. "나는 자네가 강 건너편에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왜? 강 양안을 지키라는 책임을 떠맡긴 자들이 누군데. 나는 당연히 이곳에 있을 권리가 있다구!" 팽해만이 소리쳤다. 남궁기는 원래 남의 책임을 탓하는 좁은 성품은 아니다. 그것을 알 고 있어도 팽해만은 괜히 남궁기가 자신의 책임을 묻는 것 같아 화를 냈다. "헤헤헤! 걱정하지 말라구. 당예는 틀림 없이 강 저편에 있을 테니 …… 놈의 성격을 모르는가. 계집처럼 꼼꼼한 성격이잖아. 마옹의 도 강을 가장 먼저 염려했을 거야." 팽해만이 자신 있게 말했다. "자네가 여자의 성격에 대해 아는 것은 꼼꼼함뿐이군. 이것도 알아 두게.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하지. 몰랐는가? 마옹 에 대한 당예의 분노를…… 당예는 누구보다 마옹과 가까이 있기를 원했어. 마옹의 목을 얻기 위해…… 팽 당주, 뒤나 돌아보시게." 남궁기가 눈짓을 했다. '아!' 팽해만은 탄성을 터뜨렸다. 남궁기는 그답지 않게 필요 이상의 말들을 늘여 놓으면서도 눈과 귀는 천 리 밖까지 열어 둔 모양이었다. 안개 속에서 왜소한 인영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들이밀었다. 문사 차림의 옷에 술 달린 띠로 멋을 부리며 나타난 자는 바로 백 호당주, 당예였다. "헤헤헤, 정말 오늘은 유향경천문 사상 최악의 날이구나." 팽해만이 탄식을 터뜨렸다. "어디 가나?" 그가 당예를 향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배를 가지러……." 당예가 차분하게 말했다. "배? 마옹이 강을 건너고 있는가?" 팽해만이 놀라 물었다. 그 순간, 휙! 하며 남궁기가 당예를 앞서 갔다. "노는 현무당주께서 잡으실 모양이군." 당예가 한가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발걸음만은 남궁기만큼 빨랐다. '무슨 짓거리들을…… 아!' 팽해만은 자신의 이마를 쳤다. 비명이 더 이상 들리지 않음을 그제야 확인한 것이다. 휙! 팽해만도 신형을 날렸다. 남궁기도 당예도 팽해만도 말을 잊었다. 안개는 곧 걷힐 듯했다. 화광(火光)과 다른 붉은 빛이 동녘을 물들였다. 침묵으로 앉아 있던 팽해만은 고개를 저었다. 방금까지 본 일이 꿈만 같았다. 벌겋게 치솟던 불길, 구호를 외치며 분주히 움직이던 사람들, 창검 부딪히는 소리, 비명……. 붉은 화염 아래서 이루어진 한 바탕 혈투였다. 함성과 비명, 창검 부딪히는 소리가 언제 그쳤는지는 모른다. 그러 나 어쨌든 지금은 조용했다. '마옹은 죽었는가?' 팽해만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불빛 아래 나뒹구는 시신들…… 그 시신들은 마옹은 아직 죽지 않 았다고 악을 쓰며 외치고 있었다. 팽해만은 나룻배를 콱 움켜쥐었다. 마옹이 쫓겨만 다녔던 자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당예는 바람에 묻어 날아온 거스름을 하나씩 떼고 있었다. "중원의 강들은 너무 넓어." 그가 어깨 깃을 펴며 가는 소리로 말했다. "헤헤헤, 장강이 아니라 황하인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라구!" 팽해만도 중얼댔다. 그들은 아직 강 위에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가에 닿을 듯했다. 노를 잡고 있는 자는 남궁기였다. "늦었다고 생각지 않나?" 그 역시 적막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팽해만과 당예는 다시 굳게 입을 닫았다. 당예는 생각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추적하던 마옹을 왜 그렇게 속 수무책으로 놓쳐 버렸냐고……. 안개는 탓할 만은 것은 되었다. 그러나 포위망이 쉽게 무너진 것은 전적으로 안개 탓만은 아니었다. 반격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처음으로 받아 보는 마옹의 역습에 그도 남궁기도 팽해만도 무당파 도 뚜렷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못했었다. 항상 마옹을 상대하던 수법 은 포위망을 압축해 독 안에 든 쥐로 만드는 것뿐이었으므로……. 마옹의 반격! '두려울 정도였지?' 당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술을 잘끈 깨물고 있을 때였다. "앗!" 팽해만이 벌떡 일어났다. 언제인지 강둑에 두 개의 인영이 나타난 것이다. 화광과 뒤늦은 일출(日出)을 받고 선 두 개의 그림자는 불덩이처럼 붉었다. 당예와 팽해만은 동시에 남궁기를 바라보았다. 남궁기의 눈과 귀는 그들보다 밝은 편이었다. 남궁기도 그들을 본 듯 노를 멈추고 있었다. "도포 자리와 백의인이군." 남궁기의 눈은 역시 밝았다. 그가 다시 노를 저었다. "헤헤헤, 도포 자리라면 볼 것 없이 명정, 그 말코도장이다." "백의인은?" "명정 같은 놈과 누가 저렇게 친근하게 마주보고 있을 수 있단 말 인가? 미친놈이 아니면 명정, 저 말코 도장과 가까이 붙어 있을 놈은 없어!" 팽해만이 소리쳤다. 강둑에 선 두 인영은 마치 팽해만의 고함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했 다. 빛살과 화광에 비친 도검이 현란한 빛을 폭사했다. 먼발치에서도 눈이 부실 정도의 어지러운 군무였다. 두 개의 인영은 처음부터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독날한 손속을 펼쳤다. "명정이라는 자의 검법이 제법이군." 남궁기가 말했다. 비록 인영의 형체는 흐릿했으나 빛을 받은 도검 은 선명했다. 남궁기는 칼에 맺힌 빛의 흐름을 따라 두 인영의 일전 을 어렴풋이 읽어 낼 수 있었다. 명정으로 추측되는 자의 검은 날렵하고 신속하기 이를 때 없어 검 에서 솟아나는 빛이 눈부신 광채를 번뜩이며 허공에서 춤을 출 정도 였다. 강호의 두 축 중 하나인 대무당파의 제자다운 위용이었다. 반 대로 마옹으로 추측되는 자의 칼은 조금 둔중해 보였다. 그러나 칼이 뻗어 가는 길은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우리가 갈 때까지 버텨 줄 것 같은가?" 팽해만은 다급히 물었다. "저런 승부는 오래 가지 않지!" 당예의 눈에도 이제 도검의 흐름은 보이고 있었다. 쉬쉭! 하는 소리까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 명정은 양의검법(兩意劍法)에서 대라검법(大羅劍法) 으로 투로를 바꾸고 있었다. 검세(劍勢)를 여러 가지 수법으로 바꾸 며 마옹을 취해 가고 있었지만 중심을 찔러 가지는 못했다. 잇달아 십 여번을 공격했으나 마옹의 자세는 요지부동이었다. 명정은 다시 검세를 바꾸었다. 순간, 마옹이 움직였다. 검세가 바뀌는 그 때를 의도적으로 기다린 듯했다. "아!" 당예가 탄성을 터뜨렸다. 마옹의 칼이 금빛으로 번뜩이며 명정을 온통 휘감아 갔다. 팟! 금광(金光) 속에서 핏줄기가 쫙 뿌려졌다. 둥그런 물체 하나가 허공을 치솟았다. 그 물체는 강둑에 뚝 떨어져 강변을 향해 때굴때굴 굴렀다. 볼 것 없는 명정의 목이었다. "헤헤헤, 일을 끝냈으니 그는 가겠군." 팽해만이 허탈한 투로 말했다. 남궁기는 노를 으스러져라 잡았고 당예는 소매를 매만졌다. 마옹은 화광과 햇살을 가득 안고 황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어깨를 펴며 허리에 칼을 찼다. 자신이 걸어온 시체 더미의 그 길을 관조하는 듯했다. "금검경혼(金劍驚魂)…… 멋지군." 당예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남궁 선생(先生), 너무 빨리 노를 젓지 마! 전혀 정(情)이 가지 않는단 말이야! 으헤헤! 정도 가지 않는 놈을 왜 그렇게 서둘러 만나 려는 게야. 남색을 즐길 양이면 옆에 당예도 있잖아!" 팽해만이 소리쳤다. 남색 운운은 당예가 가장 싫어하는 농지거리다. 하지만 당예도 남 궁기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마옹은 강둑에서 등을 돌렸다. 그가 천천히 빛발 속으로 사라져 갔 다. 남궁기는 노를 놓았다. "쫓아가지 않을 생각이야?" 팽해만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 마옹은 변했어." 남궁기는 다른 말을 했다. "동감이다. 이제 우리가 그를 찾지 않더라도 그가 우리를 찾아서 오겠지." 당예가 눈빛을 빛냈다. "호오! 배교의 호교신장께서 드디어 달아나는 일에 재미를 잃었다 는 말인가? 달아나느니 싸우겠다 이 말이지? 하긴……." 팽해만은 강 양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헤헤헤, 그래서 서둘러 추적을 해야 한다구. 나는 느닷없이 찾아 오는 방문객(訪問客)은 정말 싫어! 틀림없이 대접은 목으로 해 달라 고 할 것이잖아!" 그가 유엽도를 뱃전에 탁 꽂으며 소리쳤다. * * * "지하에서 연기가 치솟았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이었지요." 머리를 숙이며 이야기하는 자는 집사, 정회(鄭懷)였다. 황하의 유혈극(流血劇)을 등 뒤로 하고 금적보에 들어 선 양백은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창고지기 장(張) 노인(老人)을 찾았습니다. 그는 보주도 아시다시 피 금적보를 지을 때 목수(木手)로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금적 보의 내부는 훤하지요." 정회의 말에 양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백은 지금 금적보 후원의 별실 앞에 서 있었다. 배 위에서 부고( 訃告)를 받고 서둘러 달려온 길이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의 영정이 향불 앞에 놓여져 있었다. 총관, 종현수! 자신의 한 쪽 팔 이상으로 아끼던 자였다. "하지만 장 노인도 연기가 나는 사정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인들 을 시켜 땅을 파 보도록 했지요. 놀랍게도 그곳에는 지하 밀실이 있 었습니다." "지하 밀실.……." 양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바로 자신과 종현수만이 아는 배교의 성전이었다. "화마가 휩쓸고 가 남은 것은 잿더미뿐이었습니다. 그 잿더미 곁에 꺼먼 덩어리 하나가 놓여 있더군요. 처음에는 사람인지 분간도 못했 습니다." 정회는 한숨을 쉬었다. "종 총관의 방에서 유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불에 그슬 린 시체가 종 총관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유서?" 양백은 미간을 좁혔다. "지하 밀실의 변고를 보고하러 갔던 하인 한 놈이 발견한 것입니다 . 보시지요." 집사, 정회가 서신 한 장을 내밀었다. 눈에 익은 필체, 종현수의 서신이 맞았다. - 하늘 같은 보주의 은혜에 이렇게 밖에 보답하지 못하는 저는 금 수 (禽獸)와 같습니다. 일전에 이립(李立)이라는 무리와 어울린 적이 있습니다. 인물됨이 괜찮아 서너 달 사귀다 보니 나중에 호형호제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이립이라는 자는 도박(賭博)에 능한 자로 제 신분이 금적 보의 총관임을 알고 의도적으로 접근……. 처음에는 재미로 한 것이 금 백 냥이나 잃게 되고 또 그 본전이 생 각나서 계속하다 보니 제 능력으로 갚을 길이 없을 만큼 잃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립이라는 자의 뒤에는 날을 세운 소 같은 자들이 수두룩하여 빚 을 갚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금적보의 창고를 뒤질 것 같아 결국 제 한 목숨으로 모든 것을……. 와락! 양백은 종현수의 유서를 움켜 쥐었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성실하던 종 총관이 도박에 빠지다니 ……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가 봅니다." 집사, 정회는 설래설래 고개를 흔들었다. 양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종현수는 백 번 죽다 깨어나도 도박 같 은 것에 미칠 자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양백은 성큼 별실로 들어섰다. 가슴과 목이 막혀 조사(弔詞)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그는 한 대의 향만 올렸다. '이 사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나…….' 모든 것이 분명했다. 배교에 관련된 것은 자신만이 은밀히 소지하고 있는 하남 명두의 증표인 철패를 제외하고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종현수가 죽음과 함께 그것을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그 때문에 흑막까지 불렀나? 배교와의 연분을 끊기 위해 성녀와 명옹까지 해할 생각을 하다니…… 현수, 이제 보니 자네는 나 보다 백 배는 간이 커구만…….' 양백은 허탈했다. 그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내당에 앉아 갑갑한 심중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종국으로 치달았다. 양백은 황하의 유혈극을 생각했다. '명옹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였을까?' 안개와 화혼진을 이용하면 명옹 정도의 실력이면 난투를 벌이지 않 더라도 포위망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젊은 명옹은 포위 망을 벗어나기 보다 살극(殺劇)을 원했다.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백은 알고 있었다. 이제 젊은 명옹이 종국으로 치닫는 교의 마지 막 수순을 택했다는 것을……. 피의 복수, 적들과의 일전! 그 이후의 일은 누구나 생각하는 그대로였다. '올해 안에 중원에서 배교의 이름은 사라질 것이다.' 양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양백은 방 안을 거닐며 묻고 또 물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결심했다. '이 사람, 자네가 죽음으로써 당부한 일 아닌가.' 양백은 종현수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교에 대한 면죄부(免罪符)는 종현수의 죽음이면 충분했다. 종현수도 그 때문에 죽음까지 택했을 것이다. "정 집사!" 양백이 정회를 불렀다. 정회가 다급히 달려왔다. "정 집사, 지금부터 금적보에 대한 모든 것을 자네에게 맡기겠다." "옛?" 돌연한 말에 정회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한 삼 년 상단을 이끌고 천산을 지나 천축에 다녀올 것일세. 그때 까지 금적보를 이끌어 주게." "갑자기 왜 그런 결심을……." "이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네. 금적보가 놀기에는 중원은 좁다. 모 별관, 유(劉) 별관(別官)을 불러 주게. 그들과 천축으로 떠날 구체적 인 계획을 짜야겠어. 당장!" 양백이 소리쳤다. 제16장 마화(魔火) 치익! 명강량은 화섭자에 불을 붙였다. 그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명왕이여, 오라!' 휙! 그가 화섭자를 던졌다. 화르르르르…… 엄청난 불길이었다. 바위를 불태우고 쇠도 녹일 듯 했다. 천화분(天火焚)! 이 세상으로 명왕의 강림(降臨)을 기원하며 피우는 하늘의 불, 비 바람도 끌 수 없는 불이었다. 황하에서 십 여일을 쉬지 않고 달려온 그는 천화분을 피우고 있었 다. 명왕을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 곳을 화염지옥(火焰地獄)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였다. 명강량이 있는 곳은 하남 기산의 독천 근처였다. 독천에서 일다경 가량 수풀을 헤치면 빽빽한 산림에 둘러싸인 계곡 이 나온다. 그 계곡의 가운데 수풀로 위장된 자연 석동(石洞)이 있었 다. 바로 흑막의 본거지였다. 명강량은 천화분으로 그 석동 부근을 불태우고 있었다. 불길은 맹렬했다. 수풀들은 이내 격렬한 화염에 휩싸여 잿더미가 되고 석동이 불길 속에 명강량의 눈앞에 드러났다. 천화분은 두텁게 닫힌 석동의 석문(石門)을 침범했다. 찌지직! 찌직! 석문도 천화분의 불길을 감당하지 못했다. 석문이 천화분에 달구어 지며 금이 갔다. 때맞추어 바람이 불자 천화분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다. 석문은 금은 점점 더 굵어지고 어느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열기를 견디지 못한 석문이 산산이 조각났다. 불길은 노도처럼 석동으로 빨려 들어갔다. "으악!" "악!" 비명과 분주한 발걸음 소리……. 석동 안은 아수라장이 된 듯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풀었다. 천화분은 그의 눈동자 속에도 그의 가슴속에도 피어오르고 있었다. '싸움을 원한다면…….' 명강량은 신장도를 고쳐 잡았다. 천지를 불태울 듯 피어오르던 천화분은 한순간에 푸시시 꺼졌다. 천화분이 스쳐 간 곳은 까만 잿더미뿐이었다. "으……." "으으!" 천화분이 꺼지자 목을 움켜쥔 서너 명의 흑의인들이 엉금엉금 기다 시피 석동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칼은 제멋대로였고 얼굴은 감 처럼 붉었다. "커억!" "끄억!" "쿨럭!" 그들은 신선한 공기를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고자 폐부를 쥐어짰다 . 천화분은 석동 내부까지 열탕(熱湯)으로 만들어 화기(火氣)에 주체 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상했음이 분명했다. 명강량은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용케 천화분의 열기 속에서 살아난 그들은 내부의 화기를 진정시 키느라 명강량의 출현은 알지도 못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가볍게 뻗었다. "칵!" "으악!" 흑의인들이 목 대신 가슴을 움켜쥐고 뒹굴었다. 네 명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피의 양은 대단했다. 피는 잿더미 사 이로 흐르며 이내 작은 내를 이루었다. 명강량은 성큼 석동 안으로 발을 들였다. 팟! 한 자루의 칼이 그의 목을 노리고 날아왔다. 굴 밖으로 기어 나오려다 비명을 듣고 암습자가 있음을 알아챈 모 양이었다. 명강량은 작자의 칼을 가볍게 피하며 손목을 잡았다. 그가 작자를 바짝 끌어당기며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뚜둑! 목과 함께 작자의 눈도 허옇게 돌아갔다. 명강량은 작자를 내던지며 석동 안으로 나아갔다. 석동은 아직 후덥지근했고 벽은 열기로 손을 댈 정도였다. 열기와 연무를 참지 못하고 석벽을 손톱으로 긁다가 죽은 자도 적 지 않았다. 석동은 넓었고 중간 중간에 인공으로 뚫은 길들도 있었다. 명강량은 석동을 관통하는 중앙의 길만 걸었다. 쉭! 천퇴각(千腿脚)이었다. 명강량은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상대의 발을 잡았다. 그는 천퇴각 을 날린 자를 바로 벽면에 후려쳤다. 퍽! 육편이 우수수 날리며 이미 형체를 잃은 작자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명강량은 작자의 발목을 놓으며 정면을 응시했다. 그의 앞에는 삭 도(削刀)를 든 자가 서 있었다. 아마 천퇴각을 날린 자와 합공으로 명강량에게 달려들고자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철삭을 든 자는 꼼 짝도 못한 채 몸만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동료의 육편 이 얼굴을 주르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명강량의 신장도가 그의 공포를 없애 주었다. 철삭을 든 자의 목이 날았다. 뚜벅! 뚜벅! 명강량의 발걸음 소리만 석동을 울렸다. 그의 앞에는 십 여명의 흑의인이 서 있었다. 흑의인들은 방금 자신 들의 동료가 어떻게 죽었는지 본 터였다. 달려들 생각을 않았다. 명강량은 그들과의 거리를 점점 좁혔다. 비로소 흑의인들 중 한 명이 칼을 세웠다. "쳐라!" 그가 고함을 질렀다. 십 여명의 흑의인들이 고함에 놀라 우르르 달려들었다. 쨍! 쨍! 쨍! "으악!" "크악!" "악!" 석동은 삽시간에 십 여구의 시신으로 더 채워졌다. 석동으로 들어갈수록 흑의인들은 점점 불어났다. 쨍! 쨍! "으악!" 몇 차례의 싸움은 더 있은 듯했다. 명강량의 왼손에 들린 이름 모를 자의 팔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리고 그 몇 차례의 싸움이 있은 후 흑막의 수하인 흑의인들은 더 이상 달려들지 않았다. 그들은 깨달은 것이다. 달려들지 않으면 최소한 죽음은 면할 수 있다는 것을……. 누가 이야기 한 것도 아닌데 흑의인들은 일제히 길을 비켰다. 명강량은 그 사이로 유유히 걸어갔다. "음……." 흑막의 막주, 조구완은 마른침을 삼켰다. 봉두난발(蓬頭亂髮)에 백의를 피로 염색한 자! 핏발선 눈, 하지만 그 눈동자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군.' 조구완은 태사의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쨌든 다행이다.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 놈들이라면 달랑 한 놈 만 보내지 않았을 테니…… 누구인가?' "누구냐?" 조구완은 물었다. 명강량은 신장도에 묻은 피를 털었다. "너희들은 성녀를 데려 갈 아무런 자격이 없다." 그의 목소리가 건조하게 석동을 울렸다. '성녀? 그럼…….' "핫하하!" 조구완은 무릎을 치며 웃었다. "누군가 했더니…… 그대가 바로 마옹이군." 그가 음산하게 눈빛을 빛냈다. "성녀라는 여자를 우리가 데려간 것은 분명히 맞지. 하지만 그랬다 고 해서 이건 너무 심하지 않는가."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명강량은 다른 말 없이 신장도를 세웠다. "잠깐! 서두르지 말게. 자네들의 성녀를 우리가 꼭 나쁜 뜻으로만 데려간 것이…… 앗!" 조구완은 비명을 질렀다. 그가 다급히 몸을 굴렸다. 우지끈! 신장도가 태사의를 양분했다. 조구완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네 사부는 우리 사부를 이기지 못했다! 그런데 네놈이 나를 어찌 이긴단 말이냐!" 그가 고함을 지르며 직배도(直背刀)를 뻗었다. 쨍! 쨍! 곽부의 무술은 과연 사파의 조종답게 특이한 점이 있었다. 조구완 의 직배도는 단번에 신장도의 공세를 차단해 갔다. "내가 네놈이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을 줄 아는가! 굳이 벌주(罰酒) 를 마시겠다면!" 직배도가 웅! 웅! 바람을 갈랐다. 조구완은 이번 기회에 단혈철각 련의 위용을 배교놈들에게 단단히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래야 이후 사부의 일에 배교놈들이 고분고분할 테지…… 방패막 이는 방패막이에 어울리는 행동이 있다.' 명강량의 칼을 몇 번 받아 본 후 조구완은 자신이 생겼다. 당장 이 기지는 못하겠지만 백 합 내에 승부를 결정 지을 자신은 있었다. 벌 써 상대의 몸에 몇 군데의 혈구(血口)를 만든 터였다. 조구완의 공세가 기이하고 악랄해 명강량은 수세를 면치 못했다. 몸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고 황하에서 쌓인 피로도 해독되지 않았다. 그가 조구완을 맞서 그나마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은 실전(實 戰) 경험 때문이었다. 임기응변(臨機應變)에 있어 조구완은 도저히 명강량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 이유로 명강량은 당장 피를 뿜고 쓰러지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것은 시간의 차이일 뿐인 것 같았다. 성녀를 잃은 분노로 천화분 하나만 믿고 너무 무모한 싸움을 걸었 던가? 명강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듯했다. 챙! 명강량은 신장도로 거세게 조구완의 직배도를 밀쳤다. 신장도에는 천 근의 힘이 실려 있어 그 순간만은 조구완도 멈칫해 야 했다. 연수로 이어가면 어느 정도 선기는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명강량은 급히 신장도를 회수한 후 춤을 추듯 가볍게 신장도를 뿌렸 다. 신장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보다 소매가 펄럭이는 소리가 더 요란했다. '앗!' 순간, 원래 창백한 조구완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명강량의 소 매에서 뿌연 가루가 쏟아지며 그의 전신을 훅 덮었기 때문이다. '독(毒)?' 머리 속에 언뜻 떠오른 생각이었다. '배교에 용독(用毒)의 비법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다.' 때문에 조구완은 전혀 독에 대비하지 않았었다. '독이라면 어떤가. 놈을 잡아 해독약(解毒藥)을 받아 내면 된다. 어쨌든 빨리 놈을 처치해야…….' 일순간 당황해 하던 그는 이내 평정을 찾았다. 다행스럽게 산공독(散功毒)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이후가 걱 정되어 그는 단번에 명강량을 제압하고자 했다. 조구완은 내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직배도를 날렸다. 명강량도 극성의 내력으로 대항했다. '챙그랑'하는 소리가 들려 오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몸을 뺄 상황이 아니었다. 몸을 빼면 상대의 검망(劍網)에 갇혀 영 원히 선기를 잃을 판국이었다. 하지만 명강량은 훌쩍 몸을 뺐다. 조구완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의 직배도가 바람을 가르며 명 강량을 뒤쫓았다. 승부는 끝난 듯했다. 그러나……. 조구완은 허리가 불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급히 자신의 몸 을 살폈다. 지지직! 불타는 듯이 아니라 불이 타고 있었다. 시퍼런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타올랐다. 조구완은 그 불을 끄기 위해 직배도까지 내던졌다. 하지만 불길은 너무도 빨랐다. 시퍼른 불은 삽시간에 그의 전신을 뒤덮었다. "아악!" 조구완은 바닥을 굴렀다. 그러나 불꽃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아…… 아……." 조구완의 비명이 애처롭게 울렸다. 그리고 그 비명은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고 말았다. 효웅(梟雄) 곽부의 애제자(愛弟子) 치고는 너무도 어이없는 최후였다. 조구완은 더 이상 꿈틀대지 않았다. 타닥탁! 푸른 불꽃이 이제 시커먼 고기 덩이로 남은 조구완의 몸을 뼈까지 태웠다. 흑막의 수하들이 장포를 벗어 불을 끄려고 시도했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명강량은 자신의 소매를 털었다. 조구완의 몸에 뿌려지고 조금 남았던 가루가 떨어졌다. 그 가루는 소혼분(消魂粉)이라는 것이다. 조구완은 배교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가 있었다. 신기에 가 깝게 불을 다루는 배교도들의 기술을……. 강호인들에게 배교도들의 불을 다루는 기술을 마술(魔術)이었다. 화마술(火魔術)! 화혼진, 천화분, 겁화분(劫火焚), 소혼분, ……특히 강호인들이 마 화분(魔火焚)이라 부르는 겁화분은 순식간에 수 장을 초토화 시킬 정 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강호인들이 두려워 하던 탈명마효 이후 세상에 이름을 감추었지만……. 화혼진, 천화분과 마찬가지로 소혼분도 배교의 제의와 관련이 있다 . 배교도들에게 시체는 악마에게 오염된 것이다. 따라서 신성한 흙과 물에 섞이는 것을 막기 위해 조장이나 풍장을 치른다. 하지만 급박 한 상황에서는 조장이나 풍장도 어렵다. 그 때 사용하는 것이 소혼분 이다. 인위적(人爲的)인 방법이라 꺼려하기는 하지만 신성한 땅을 오 염시키는 시체를 말끔히 없애는 데는 소혼분이 오히려 나았다. 명강량은 소혼분을 뿌린 후 극성의 내력으로 일부러 조구완의 칼에 부딪혀 갔다. 칼이 부딪히며 생길 불꽃을 원해서였다. 뜻대로 조구완은 칼을 부딪혀 주었다. 소혼분의 발화성(發火性)은 부싯돌의 불꽃에도 반응할 정도다. 하물며 거세게 부딪힌 칼에서 일 어난 불꽃이야……. 푸시시! 푸른 불꽃은 조구완을 한 줌의 재로 만든 후에야 꺼졌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허리에 찼다. 그가 석동을 걸어 나갔다. 그의 발길을 막는 흑막의 수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 * * 아란하는 뱃전에 기대 머리칼을 강바람에 씻기고 있었다. 세 번째, 대화룡(大火龍)의 발견! 일지국으로부터 날아온 소식이었다. 대화룡은 무쇠로 만든 두 장 길이의 비룡상(飛龍像)이다. 장정 여 덟 명이 부목을 받쳐야 들 수 있을 정도의 무게……. 음산의 긴 산줄기 여기저기에 천 년의 세월 동안 묻혀 있다가 이제 야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대화룡을 만든 사람은 천산을 넘어 중원으로 발을 들이던 초대 전 왕이다. 중원의 배교도들이 초대 명옹으로 부르는 전왕은 아홉 마리 의 대화룡을 만들어 음산 여기저기에 숨겨 두었었다. 그 중 세 번째가 발견된 것이다. 대화룡에는 멸겁화(滅劫火)를 부를 수 있는 엄청난 불덩이가 숨겨 져 있다. 단번에 수십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화력(火力)이었다. 사실 일지국은 말이 나라지 초원(草原)의 작은 부족보다 사람 수가 적었다. 무공도 전왕을 호위하는 사방위(四方衛), 십위병(十衛兵) 정도만 그런대로 남 앞에 부끄럽지 않게 주먹을 내밀 정도다. 일지국 의 무공이 특별한 바가 있었다면 아버지인 전왕은 자신을 중원에서 쫓겨난 이족에게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일지국의 힘은 그 같이 미약했다. 그럼에도 사부는 중원을 도모하는 동반자로 선뜻 일지국을 택했다. 바로 대화룡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한 마리의 대화룡이면 수십 장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멸겁화를 부 를 수 있다. 아마 사부는 그 화룡으로 정파인들을 지글지글 불태우는 통쾌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제 세 번째…… 앞으로 여섯 마리가 더 남았다. 사부는 그 동안 중원 진출을 참아 줄 것인가.' 참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정파인들을 잘만 유인하면 세 마리의 대화룡으로도 마괴파에서 당 한 수모를 몇 배 이상 갚아 줄 수 있었다. 그것이 사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일지국 사람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아홉 마리의 대화룡을 모두 찾았을 때 천하에 그것 을 선보이기를 원했다. 단순히 천 년의 유물을 다 찾아야 천하에 선보이겠다는 의도는 아 니었다. 대화룡에는 초대 전왕이 남긴 예언(豫言)이 있다. - 아홉 마리의 용이 창천에 붉은 눈을 드러내면 천하는 배교의 것 이 되리……. 아버지외 일지국 사람들은 그 예언을 굳게 믿었다. 배교 천하! 일찍부터 사부를 따라 교와 약간의 거리가 생긴 그녀에게도 가슴이 뛰는 말이었다. 하물며 작금의 전왕인 아버지와 일지국 사람들의 마 음이야……. 생각하니 아버지와 사부의 충돌은 필연일 것 같았다. 음산의 줄기 는 깊고 넓다. 대화룡을 찾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고는 하나 대화룡을 모두 찾기 위해서는 아직도 십 여년의 세월은 더 필요할 듯 했다. 사부는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은 정파인들을 불태울 정도의 화룡이면 되었지 배교 천하는 아니므로……. 어떻게 될 것인가. 결과는 자명했다. 그녀는 사부, 철심흑사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일지국을 초토화시켜서라도 대화룡을 뺏으려 들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는, 예언이란 원래 허망한 것이므로 초대 전왕의 예언은 예언 일 뿐임을 일지국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이다. 그녀는 몇 번 그 같 은 의도로 말을 꺼내 보았다. 그러나 역시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반 응뿐이었다. 만약 전왕의 딸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배교자(背敎者 )로 낙인찍혀 죽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배교 천하라는 말의 위력은 명왕 출세라는 말만큼이나 컸다. 자신을 가장 잘 따르는 하라사까지도 대화룡의 얽힌 초대 전왕의 예언을 굳게 믿고 있었으니……. 설득은 이미 힘든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사부의 공격에 대비 도피처를 미리 마련해 두는 것이 다. 그녀는 전왕의 딸이고 일지국의 사람이므로 싸움이 벌어지면 당 연히 일지국의 사람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부를 상대로 싸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다른 것을 떠나 상대가 되지 않 음을 알기 때문이다. 때문에 도피처를 만드는 일만은 꾸준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제일 좋은 방법은 아버지와 사부가 한 발씩 서로의 입 장을 후퇴시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아버지와 사부는 서로의 입장이 그렇게 조율되리라 믿고 있었다. 중원 진출이라는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 각자의 앞에 놓여져 있으므로……. 그리고 간혹 각자의 의지 보다 긴박한 상황이 서로의 문제를 더 잘 풀어낼 때도 있다. 중원 진출의 회오리 속에 말려들면 각자의 생각 만을 고집할 수 없는 의외의 일들이 분명 닥칠 것이다. 어쩌면 사부 의 중원 진출이 호호탕탕하여 대화룡을 필요치 않을 경우도 생길 것 이다. 아니면 천 년의 예언 보다 당장의 위험에 쫓겨 아버지가 대화 룡을 내놓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던가……. 무엇보다 아버지와 사부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싸워서 서로에게 득이 될 것이 없음을 잘 아는 분들이었다. 아버지는 중원 진출에 반드시 사부를 필요로 했다. 사부는 물론 대 화룡을 원한다. 하지만 대화룡을 강제로 취하고자 할 경우 자칫 잃게 될 자신의 주력 하나를 걱정해야 했다. 바로 그녀와 그녀의 월영궁이었다. 흑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 이다. 선택의 무게는 물론 대화룡 쪽이겠지만 월영궁도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은 못 되었다. 그녀의 월영궁이 등을 돌린다는 것은 단순히 단혈철각련의 축 하나를 잃는다는 의미뿐만이 아니라 월영궁만한 힘 을 가진 적 하나를 새롭게 만드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일지국과 틀 어지면 다른 새외의 동반자들과의 관계에도 악영향이 미칠 것은 뻔했 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일들이 좋게 좋게 풀어지리라 믿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아란하는 강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손으로 곱게 쓸었다. 푸른 산, 푸른 들……. 그녀는 문득 같이 말 달리는 그대를 생각했다.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담소를 나누며 걸을 그대! 그 그대는 누가 될지 아직 몰랐다. 하지만 아란하는 그대와 함께 이미 푸른 산, 푸른 들을 질주하고 있었다. 여인의 마음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방금까지 피비린내 나는 강호를 이야기하더니 건듯 부는 봄바람에 아란하의 마음은 꽃길을 거닐고 있었다. 하늘은 화창하고 바람은 산뜻했다. 아란하는 젊고 젊으며 일지국의 사람들은 남녀 상사(相思)에 자유 로우니 쉽게 춘정에 젖어들만도 했다. 그녀가 표표히 강바람을 쐬며 몽념(夢念)에 잠겨 있을 때였다. 쿵! 쿵! 갑판(甲板)을 울리며 하라사가 다가 왔다. "궁주, 성녀께서 찾으십니다!" 하라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성녀께서?" 아란하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수혈을 풀어 준 후에도 말 한마디 않던 성녀였다. "알았다." 아란하가 선실을 향했다. 악약은 생각에 잠겨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깨에 앉은 명조도 창 밖을 바라보며 꼼짝을 않았다. 아란하는 그녀의 앞에 시립했다. 악약이 아란하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우울에 잠긴 눈빛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아란하는 죄스러운 느낌에 고개를 숙였다. "아란하,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나는 돌아가야겠어요." "……." "일지국의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니……. 일지국을 가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녀를 모시는 것은 일지국 사람들의 오랜 꿈이었습니다." 아란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했다. "예, 가 볼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랍니다. 강량이 생각 보다 더 화가 났어요." "중원의 호교신장께서는……. 물론 화가 나셨겠지요. 하지만 우리 는 그에게 성녀를 어디로 모시는지 말해 주었습니다. 하란산에서 곧 호교신장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란산으로는 올 거예요. 피바람을 몰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어요. 그래서 나는 서둘러 강량의 곁으로 돌아가야 한답니 다." 아란하는 머리를 숙였다. 난처했다. 그녀는 어쨌든 성녀를 하란산 까지 모셔 갈 책임이 있었다. "아란하, 일지국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전해 주세요. 나는 지금 빨리 가야 해요. 아란하……." 아란하를 부르는 악약의 목소리가 갑자기 은밀해졌다. 아란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고개를 들었다. 악약의 눈빛과 아란하의 눈빛이 부딪혔다. 잡티 하나 없이 맑은 성녀의 눈! 아란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아란하…… 우리 성녀들에게도 몇 가지 재주는 있어요. 대천밀계( 大天密計)와 천상제의 비밀은 바로 이곳에 있죠." 악약이 투명한 눈동자를 더욱 빛냈다. 아란하의 눈빛이 순식간에 몽롱하게 변해 갔다. 갑자기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몸은 허공을 날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 속으로 꿈결 같은 목소리는 계속 들려 왔다. "아란하, 언젠가 아란하를 보고 난 후 문득 꿈을 꾸었어요." 악약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녀가 문득 물었다. 아란하는 아미를 찌푸렸다.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잘 되었어요. 아란하, 지금 누가 그대를 향해 가고 있어요. 보이 나요?" 악약의 말에 아란하는 마치 무엇을 보려는 듯 눈동자를 모았다. 아 란하의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한 사람이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의 그는 바로 분하에서 아련히 보았던 그 얼굴이 었다. 분하에서 보다 환상 속에서 얼굴은 더욱 생생했다. 그녀는 호 흡까지 거칠어졌다. "아란하, 당신은 그를 도와야 해요." 악약의 목소리가 애조(哀調)를 띄었다. "약속할 수 있나요?" 그녀의 물음에 아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란하, 약속을 해 주어서 고마워요. 그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탄 답니다." 악약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연분홍 겉옷을 걸쳤다. 그녀가 선실을 걸어나갔다. 아란하는 얼굴을 붉힌 채 여전히 몽롱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악약의 발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은 없었다. 하라사를 비롯 배에 탄 모든 자들은 그녀와 눈빛이 마주치자 아란하처럼 각자의 환상에 빠져 움직일 줄 몰랐다. 악약은 이마에 송글송글 땀을 맺혀 가며 나룻배를 강물에 내렸다. 그녀는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곡예를 하듯 타고 내려가 나룻배에 몸을 실었다. 그녀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화선에 이어진 나룻배의 줄을 끊었다. 나룻배와 화선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물살을 갈랐다. "명조야, 너는 모르지. 강량이 어디로 오는지…… 나는 알고 있단 다." 악약은 오랜만에 환하게 웃었다. 그녀가 흘러가는 강물에 몸을 맡 겼다. * * * "무당파의 제자 다섯 명, 그 중에는 무당칠우(武當七友) 중 한 명 인 명정도장도 포함되어 있다. 하토문이 스물 셋, 교타방은 무려 사 십 한 명이나 당했다고 하더군. 유향경천문의 희생자도 십 여명에 이 르는 모양이야. 부상자까지 합치며 마옹에게 당한 자는 근 백 여명에 이르지." 꺼무죽죽한 얼굴이 술께나 마시는 듯한 사내가 말했다. "그놈은 이제 완전 살성(殺星)이 된 모양이군." 볼살이 뒤룩뒤룩 한 자가 입에 묻은 술을 닦으며 흉광을 흘렸다. 복장이며 탁자에 세워 둔 짧은 칼이 근동의 소방파에 속한 무사들임 을 증명하는 자들이었다. "죽을 때 죽지 않는 놈은 교룡(蛟龍)이 된다고 했어. 두고 보게나. 이제 그놈의 칼 아래 얼마나 많은 자들이 희생될지." 꺼무죽죽한 얼굴의 사내도 술잔을 비웠다. "자네의 염려는 너무 지나치군. 죽을 때가 되었으니 마지막 발버둥 을 하는 게지. 소문도 못 들었나?" "무슨 소문?" "드디어 유향경천문의 문주께서 출관하셨어. 뿐인가. 화산파에서도 고명한 제자 한 명을 하산시켰지. 벌써 북검(北劍)으로 명성이 자자 한 오세악이라는 자다. 신탄에서 그토록 낭패를 당했으니 무당파도 명광도장에게만 모든 것을 맡겨 두지는 않을 게야. 북검에 어울리는 누군가를 내려보내겠지." "아하!" 꺼무죽죽한 얼굴의 사내는 무릎을 쳤다. "내가 목을 걸고 자네에게 약속하지. 배교의 이름은 육 개월 내에 강호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볼살이 뒤룩뒤룩한 자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아무렴! 이번에는 놈들을 완전히 뿌리 뽑아야지!" 꺼무죽죽한 얼굴의 사내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산아래 자리잡은 외진 주루였다. 음식도 술맛도 별 다른 바가 없었 지만 주루는 이상할 정도로 북적댔다. 산판이나 광산이 있는 듯했다. 두 명의 무사들은 그곳을 지키는 자 경대 쯤 되는 모양이었다. 초췌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칼, 명강량은 그들 틈에 있었다. '우리 교도들은 백 명이 아니라 천 여명 이상 목숨을 잃었지. 지금 도 몇 명은 시체로 나뒹굴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배교도들의 목숨은 목숨이 아니었다. 명강량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는 벌써 한 동이의 술을 깨끗이 비운 후였다. '육 개월이라 했나? ……길다.' 명강량은 술잔을 움켜잡았다. 팍! 술잔이 조각나며 탁자 위에 우수수 떨어졌다. 그는 회계대(會計臺)에 은자를 던진 후 주루를 나섰다. 술기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분하에서 성녀가 권하던 술을 제외하고 교에 발을 들인 후 처음으 로 먹는 술이었다. 성녀를 잃은 마음의 상심도 컸고 무엇보다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 다. 강호의 소문을 이야기하던 두 명의 무사는 주루 입구에 앉아 있었 다. 명강량은 그들 곁을 지나며 맹렬한 살의를 느꼈다. 마음의 긴장 을 풀었다면 신장도는 그들의 목을 날렸을 것이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는 살기! '백 여명…….' 명강량의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백 여명도 넘었다. 강호인들은 자신이 흑막을 어떻게 처리했는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가끔 그 정 도의 살업(殺業)은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또 다시 생각하 면 살성이라는 비난은 당연히 들어야 할 비난이라고도 생각되었다. 머리 속은 뿌옇고 몸은 부유했다. 자신 안에 서로 다른 이질적인 자신이 자리잡고 있는 듯했다. 성녀를 서둘러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의 혼돈 속에 묻혀 버릴 것 같았다. 술기운은 더욱 거세게 올랐다. 술을 먹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 분이 좋아진다는데 명강량은 아니었다. 기분이 점점 더 나빠졌다. 주루로 뒤돌아 가 두 놈의 목을 베야 울 화가 풀릴 것도 같았다. 성녀에게 배운 노래가 문득 생각났다. - 천 리 멀리까지 누런 구름 뒤덮여 태양을 가리고, 북풍이 기러기를 불어 보내며, 눈은 펑펑 쏟아진다. 여행길에 나를 이해하여 주는 사람 없다고 슬퍼 말지니……. 명강량이 취기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술은 오감(五感)을 그토록 무감하게 만드는가. 어깨에 닿은 감촉은 분명 다른 사람의 손이었다. 그는 그 손 주인 의 인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 했었다. "배교의 호교신장인가?" 손의 주인이 물었다. 조용한 목소리였다. 명강량에게 강호의 인물은 선자불래(善者不來)였다. 팟! 그는 어깨를 털며 비호처럼 등을 돌렸다. 삼양장이 연이어 손 의 주인을 향해 뻗어 갔다. 휘-휙! 웅혼한 장력이 휘몰아 쳤다. 삼양장의 공세를 단번에 무산 시키는 장력이었다. 절세의 고수였다. 사부에 버금갈 정도의…… 자신은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명강량은 신장도를 잡아갔다. 우제준 보 다 열 배나 더 강한 자였으면 하는 것이 그의 마음이었다. 그가 핏발 선 눈으로 상대를 쏘아보며 신장도를 뻗으려 할 때였다. 손의 주인은 성큼 세 걸음을 물러나며 뒷짐을 졌다. 비호처럼 달려들던 명강량의 몸도 굳었다. 노인답지 않은 당당한 체구, 이제 자랑하던 붉은 수염은 띄엄띄엄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명강량의 흐릿한 눈빛이 잠이 빛을 뿌렸다. 그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눈앞의 노인을 잊고 있었는지……. "철(鐵) 숙부(叔父).……." 그가 멍한 눈동자로 말했다. 붉은 수염에 노인답지 않은 하얀 손, 바로 강호인들이 눈앞의 노인 을 부르는 말이었다. 적염날수 철중달(鐵仲達)! 정사 양도 간의 인물로 오래 전부터 독행(獨行)으로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다. 사부의 유일한 지기(知己)이기도 했다. 명강량은 사부를 따라 몇 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괴팍한 성격 탓 에 항상 냉막하게 자신을 대했지만 정이 없는 노인이 아니라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사부만큼 어려운 사람이다. 평소라면 술까지 마신 자신의 추태를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고립무원(孤立無 援)으로 흔들릴 때라 그런 마음까지 잊고 있었다. 철중달은 계류가 있는 한적한 바위에 앉아 있었다. 명강량은 그 앞 에 무릎을 꿇은 자세였다. 그들은 한동안 말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 그간의 사연들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막막하기만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암조(暗鳥)가 하늘을 날고 야효(夜梟)는 울었다. 침묵 끝에 철중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있는 곳은 강호의 소문과는 거리가 너무 먼 곳이다. 정인이 죽었다는 소문도 몇 개월 전에야 들었지." 그가 찹찹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에 계신지도 몰랐고 부고를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다. 죄송합 니다." "그 친구야, 원래 제 명이 그렇게 끝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대다수의 명옹들이 그렇게 걸어갔던 길 아닌가. 나의 안타까움은 그 친구가 배교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것이다." "……." "내 마음이 그와 같으니…… 너도 알 것이다. 내가 배교를 위해 한 거(閑居)를 떨치고 강호에 나오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정인과 철중달은 막역한 사이이기는 하나 배교에 대한 입장은 확 연히 달랐다. 만약 철중달이 배교에 관심이 있었다면 그는 이정인을 따라 벌써 배교에 몸을 담았을 것이다. "여러 소리 않겠다. 나를 따라 가자." "어디를……." "백운장(白雲莊)이 누추한 곳이기는 하나 네 한 몸 숨기기에는 어 려움이 없을 것이다." 백운장은 철중달의 장원이다. 명강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배교에 대한 네 놈의 신의를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 세는 이미 기울었어. 연연해 보아야 돌아올 것은 쌓여 가는 시체일 뿐이다." "철 숙부,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교를 떠나지 않을 것임 을……." 명강량이 힘겹게 말했다. "네 사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라. 네 사부도 네가 죽을 날만 기 다리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다. 굳이 몸을 숨기는 것이 부끄럽다면 훗일을 기약한다고 생각하려무나." "사부는 자신의 제자에게는 몸을 숨기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 니다. 하지만 호교신장에게는 절대 교를 떠나 몸을 숨기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철 숙부의 말이 맞습니다. 호교신장들의 대다수는 그 렇게 길을 걸어갔습니다. 호교신장은 선두에서 끝까지 교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정인이 죽고 배교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곰곰이 생 각했다. 내가 정인과의 우의(友誼)에 보답할 길이 무엇인가를…… 생 각 끝에 너를 백운장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정인이 이 세상의 것 중에서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이 너였으므로…… 나는 아마 정인도 나 의 결정을 좋아하리라 믿었다. 다시 묻겠다. 너는 나를 따라 백운장 으로 가지 않겠느냐?" "……." 명강량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철중달은 한숨을 쉬었다. "너는 끝내 내가 정인과의 의리를 지키는데 일조(一助)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죄송합니다. 철 숙부……." "그 사부에 그 제자구나. 고집은 네 사부를 닮지 않았어도 되는데 ……." 철중달은 탄식을 터뜨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뒷짐을 졌다. 그는 붉은 수염을 쓸며 한동안 서성였다. "네가 나를 따라간다면 너는 나의 무공을 배울 수 있다. 이정인과 나의 문로(門路)를 하나로 만든다면 당대에 누가 있어 너를 이길 수 있으리……." "……." "나는 나의 무공이 배교를 위해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럼 에도 그 같은 결정을 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말씀은 고맙습니다." 여전히 표정 없는 묵묵한 말투였다. "그래……." 철중달은 명강량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저 바위 같은 우직함! 이정인은 그 때문에 제자로 받아 들였을 것 이다. '어쩔 수 없구나.' 꺾을 수 있는 고집이 아니었다. "싫다 하니 더 이상 붙잡지 않겠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가면 죽어 네 사부를 볼 면목이 없고…… 받아라." 철중달은 품 속에서 비구(臂構) 하나를 꺼냈다. 기화이초와 벌, 나 비를 정교하게 새긴 비구였다. 중간 중간에는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 었고 단추도 여러 개였다. "예전에 네 사부와 남만(南蠻)에 갔을 때였다. 오래된 동굴에서 우 연히 얻은 것이다." 철중달은 비구를 명강량에게 건넸다. 명강량은 비구를 받았다.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그 안에는 몇 가지의 교묘한 장치들이 있다. 위급할 때 사용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원래 나는 이런 장난감에는 관심이 없고 또 이 비 구를 먼저 발견한 사람은 네 사부니 이 비구는 당연히 너의 차지다." 명강량은 비구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원래 명강량은 몸에 무엇을 달고 다니는 것을 싫어하는 지라 거추장스러울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비구 마저 거절하면 철중달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 같아 비구를 왼쪽 손목에 찼다. 비구는 그의 손에 딱 맞았다. "황하에서 소동이 있었다고 들었다." 철중달의 말에 명강량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이 적개심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싸우지 않을 수 없었겠지. 하지만……." 철중달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다 입을 닫았다. '강호의 피값' 운 운은 눈앞의 젊은이에게는 공허한 말장난 이상은 되지 않을 테니…… . "이제 어디로 갈 생각이냐?" 명강량은 하란산 이야기를 꺼내려다 도로 집어넣었다. 사부의 지기 라 하나 배교와는 벽을 쌓은 분이다. 배교의 일에 연루시키기가 싫었 다. "서북으로 가 볼 생각입니다." "서북이라…… 조심해서 가도록 하라. 눈이 있는 자라면 네 행적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게야." 생각 없이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주위의 이목도 걱정하지 않았던 터였다. "조심하겠습니다." 명강량은 머리를 숙였다. "너는 먼저 가도록 하라." 철중달이 손을 저었다. 명강량은 읍을 한 후 등을 돌렸다. 오랜만의 만남치고는 너무도 가벼운 작별이었다. 가볍게 작별할 만 큼 두 사람의 관계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위해 해 줄 말이 너무 없었다. 그저 안타까 운 마음만으로 서로를 떠나 보내는 도리밖에……. 명강량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자신이 빨리 사라져 주는 것이 철중 달을 위한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강량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이내 빨려 들어갔다. 철중달은 붉은 수염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강호의 풍파가 저 아이의 성정(性情)을 너무도 바꾸었구나. 원래 저렇게 조급하고 거친 아이가 아니었는데……." 그는 암천을 우러렀다. 항상 소탈한 표정으로 자신을 맞아 주던 벗 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인, 저 아이를 그냥 보냈다고 섭섭해하지 말게. 내 탓이 아닐세 . 호교신장의 자리가 죽음으로써 지켜야 하는 자리라면 자네는 당연 히 죽음을 회피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자리를 주었어야 하지 않는가. 생각해 보니 자네도 자네가 모시는 신도 참 모질군. 왜 믿음을 꼭 죽 음과 바꾸라고 요구하는가."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영겁의 시간 속에서는 사람이 나고 죽는 일도 미미한 일 일뿐일 테지……." 철중달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배교의 일은 내 손밖에 있고…… 이왕 강호에 나온 것 원상, 그 비루먹을 늙은이나 한 번 봤으면 싶군." 강호에 나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강호에 나오니 숱한 세월이 흐른 듯했다. * * * 단원홍은 일각문(一脚門)을 지나 내당으로 들어섰다. 정자와 정원 이 고아(古雅)하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여기서 잠시 기다리십시오. 공공께 오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길을 인도하던 어린 환관이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 꾸며진 정원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 린 환관은 뽀르르 내당으로 달려갔다. 내실의 문은 어린 환관이 도달하기 전에 열렸다. 대청에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염 하나 없는 얼굴에 백설 같이 하얀 머리칼을 단정히 쪽진 늙은 이와 살이 너무 붙어 얼굴과 어깨가 붙어 버린 도관을 갖춘 초로인이 었다. 도관을 갖춘 초로인은 학익선(鶴翼扇)으로 번들번들한 얼굴을 연신 살랑대고 있었다. 하얀 머리칼을 쪽진 늙은이는 바로 단원홍을 부른 자로 동창을 손 에 쥐고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노환관이다. 광동(廣東) 출신으로 이름 은 우득용(禹得用),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자들이 가장 이를 갈고 있는 자이기도 했다. 도관을 갖춘 초로인은 서너 번 면식이 있는 자로 모산파(茅山派)의 도사였다. 원래 모산파는 강소 모산에 본산을 둔 파로 상청파(上淸派)로 불려 지기도 한다. 개조(開祖)는 삼모군(三茅君) 혹은 위화존(魏華存)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북조, 당을 거치며 교단을 정립했다. 특히 불교와 의 논쟁에 뛰어들어 도교의 교학을 형성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하지 만 교단으로서의 힘은 그다지 크지 않은 파였다. 엄격한 계율을 강조 했기 때문에 쉽게 문도가 될 수 없는 단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이전의 모산파에 해당되는 말이고 근자의 모산 파는 판이하게 달랐다. 작금의 모산파는 불로(不老), 불사(不死)의 영약(靈藥) 제련, 축사 의 부적 제조, 영환술(靈還術) 등 기복(祈福)에 치중했다. 기복은 정 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모든 종파가 가지고 있다. 문제는 모산파는 지나칠 정도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삿된 술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미 모산파는 도문(道門)으로부터 정종(正宗)을 벗어난 이단 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하지만 불노, 불사의 유혹은 사람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유혹이다. 때문에 모산파는 이전과는 반대로 교단을 사람들 속에 깊게 뿌리내 릴 수 있었다. 자금성에도 모산파의 영향이 깊숙한 것은 물론이다. 노환관, 우득용과 내실(內室)의 여인들 중 다수가 모산의 문턱을 넘 나들었다. 도관을 갖춘 초로인은 바로 모산을 찾는 자금성의 귀빈(貴賓)들을 인도하는 자였다. 현천도장(玄天道長), 풍도(馮都)! 모산파의 장문인이 바로 그였다. 단원홍은 풍도를 바라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안색을 찌푸렸다. 그만 그만한 것이 사람이라 특별히 싫어할 일도 좋아할 일도 없었지 만 풍도만은 유일하게 역겹게 느꼈다. 그의 세 치 혀 끝 아래 벌써 몇 사람이 목숨을 잃었던가. '행여 했더니…… 역시 그 일이었군.' 단원홍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풍도를 본 순간 그는 노환관, 우득용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늦었구나." 우득용이 짜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공공……." 단원홍은 머리를 숙였다. "몸은 좀 어떠냐?" "괜찮습니다." "들어오너라." 우득용은 내당으로 들어갔다. 풍도는 단원홍을 바라보며 살랑살랑 학익선을 흔들었다. 단원홍은 풍도의 시선을 피하며 만화를 벗었다. 그가 바람 소리를 내며 풍도를 지나쳤다. 가까이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날아가 풍도의 심장을 짓누를 것 같았다. 용연향(龍涎香)이 가득 베인 내실이었다. 노환관, 우득용은 태사의에 턱을 괴고 있었고 풍도는 좌측 편의 옻 칠을 한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원홍은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득용을 마주보며 서 있었다. "사대세가라는 것들은……. 정말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이야. 유향( 柳香), 그렇지 않느냐?" 우득용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원홍은 정자세로만 서 있었다. 유향은 단원홍의 호(號)다. 우득용은 단원홍에 대한 친밀감을 그런 식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사대세가를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이라 평할 수 있는 분은 공공뿐이 십니다. 따지고 들면 사대세가의 뿌리는 저 알량한 구대문파라는 작 자들 보다 훨씬 깊다고 할 수 있지요." 풍도가 대신 나섰다. "그런데 일을 왜 모양으로 하는 게냐? 배교 정도는 육 개월 내에 끝장을 낼 수 있을 것이라 들은 듯 한데……." "모두 제 책임입니다." 단원홍은 머리를 숙였다. "아니오, 아닙니다! 어찌 일이 지체되는 것이 단 천호의 잘못이겠 소. 내가 알기로 구대문파라는 작자들이 유향경천문의 일에 발 벗고 나서 주지를 않아 일이 늦어진다고 들었습니다." 모산파의 장문인, 풍도는 제법 단원홍을 감싸고 도는 듯했다. 혀끝 으로 누구를 변호해 주는 일은 밑천 들지 않는 일이라 언제나 즐거운 일이고 무엇보다 풍도는 평소에 구대문파에 대한 악감정이 많았다. 구대문파는 모산파를 배교 보다 못한 귀졸(鬼卒)들이 모인 곳으로 치 부하므로…… 사실 유향경천문을 세운 주역은 바로 풍도였다. 강호의 일은 강호인에게 맡기는 것이 원칙이라면 그는 먼저 구대문 파를 찾았어야 했다. 그러나 구대문파에 대해 그 같이 좋지 못한 감 정들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는 구대문파 대신 사대세가를 찾아 유향 경천문의 기치 아래 모이게 한 것이다. 거래는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성립된다. 사대세가의 꿈은 언제나 구대문파를 제치고 그들이 강호의 패주로 행세하는 것이었다. 풍도는 사대세가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기로 약속했다. 그의 뒤에 는 대명의 실세인 우득용이 버티고 있었으므로 들어주지 못할 약속도 아니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 우득용도 별반 구대문파를 좋아하지 않았다. 우득용은 언제나 모든 것이 권력(權力)의 그늘 아래 있기를 원하는 자다. 심산(深山)에서 도를 닦고 수련을 하는 자라 할지라도 국법을 가볍게 여기는 무리들은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풍도가 사대세가에 요구한 것은 자신과 우득용이 벌인 한 가지 일 이었다. 아무리 천하를 제멋대로 주무른다고는 하나 관부를 동원하기 에는 멋쩍은 일……. 그 일의 전모를 아는 자는 풍도 자신과 우득용, 그리고 단원홍에 불과하다. 사대세가도 일의 전모는 말해 주지 않았었다. 단지 배교 척결만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배교 척결이라 하면 사대세가에 있어서 특별한 일도 아니고 강호인 들의 비난을 받을 일도 아니므로 그들은 풍도의 청을 쉽게 수락했다. 유향경천문은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다. "누구의 책임이든…… 유향, 일이 너무 늦어지고 있어." 우득용은 눈살을 찌푸리며 찻잔을 들었다. 단원홍은 답답한 마음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공공, 단 천호의 그간 사정은 공공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 제 단 천호께서 강호에 발을 들였으니 원하는 물건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풍도가 학익선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그 때의 일을 이해할 수가 없어. 유향, 전대 마옹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느냐? 죽은 자는 말 할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잘 알지 않느 냐." 우득용이 찻잔을 입에 대며 날카롭게 눈빛을 빛냈다. "물론 놈을 잡아 주리를 틀어 그 물건의 행방을 물었으면 좋았겠지 요. 단 천호라고 어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의외 로 마옹이라는 작자의 무공이 고강했던 모양입니다. 강호에서 오대흉 인이라 하면 알아주는 작자들이지요. 그 작자도 오대흉인 중의 한 명 입니다. 사로잡는 일이 죽이는 일 보다 배로 어렵다는 것을 아신다면 단 천호를 책할 수 없을 것입니다." 풍도는 단원홍을 비호하는데 열을 올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세상 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자들이 강호 도의(道義)를 찾는 물들지 않은 젊은 사람들임을…… 그들은 이해의 득실을 따지려 들지 않으므로 어 떤 행동을 취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풍도는 감으로 단원홍도 그런 젊은 축들 중의 한 명이라 느꼈다. 자신과 우득용이 벌이는 일 이 영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차에 언사까지 거슬리면 뒷일 은 정말 알 수 없었다. 젊은 협사(俠士)의 칼은 언제나 지위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단원홍의 칼이 얼마나 매서운가는 이미 강호의 소문 으로 들은 터였다. 단원홍에 대한 풍도의 지나친 변호에 우득용은 한 마디 말 정도는 내던질만 했다. 그러나 그는 풍도의 변호를 거나한 자세로 듣고만 있 었다. 그가 찻잔을 놓기 위해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전대 마옹은 그렇게 죽였다 치자. 그런데 이번 마옹도 꼭 죽이려 는 이유가 무엇이냐? 성녀라는 계집, 각 성의 마두들까지 모두 죽여 라 명했다고 들었다." 우득용의 말에 단원홍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나는 네가 그 물건을 취하는데 전혀 관심이 없는 듯하다. 배교의 수뇌들을 모두 죽이겠다는 것은 그 물건을 살인멸구(殺人滅口)로 영 원히 함구시키겠다는 뜻이 아니냐?" 우득용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는 자금성의 이무기 답게 단원홍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었다. "단 천호, 사실이오?" 풍도가 놀라 물었다. 일에 불만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배교의 수뇌 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그 물건을 영원히 어둠 속에 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 못했었다. "배교도들이 불쌍하던가? 아마 그 이유 때문이었겠지. 수뇌들이 모 두 죽어 그 물건의 소재가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히면 내가 일반 배교 도들은 더 이상 손대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몇 명의 배교도들 을 죽여 다수의 배교도들은 살린다……." 우득용은 소매를 뒤져 장죽(長竹)을 꺼냈다. 그는 연초(煙草)를 다 졌다. 치익! 그가 장죽에 불을 붙였다. 그는 길게 연초 연기를 내뿜 으며 의자에 다시 몸을 묻었다. 단원홍은 아무 말도 못했고 풍도는 거친 호흡을 삼켰다. "유향, 다시 시작하라." 우득용은 담뱃대로 탁자를 툭툭 쳤다. "그 물건을 찾는 일을 맡길 자는 네가 아니라도 많다. 그럼에도 내 가 이 일을 네게 맡긴 이유를 너는 아직도 모르느냐. 이번 일은 귀인 (貴人)들은 물론 황후(皇后)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네가 이번 일 을 잘 처리한다면 황후와 귀인들은 반드시 네 이름을 기억해 줄 것이 다. 내가 너를 총애해서 네 뒤를 봐주려 해도 한계는 있다. 하지만 황후와 귀인들은 다르지……." 우득용은 연초를 짧게 빨았다. "……너의 영전(榮轉)을 위해서만도 아니다. 다른 아이에게 일을 맡겼다고 생각해 보자. 유향, 그 아이들이 어떻게 일을 할 것 같은가 . 그 아이들이 일을 하는 방법은 고문과 살인밖에 없다. 나도 이런 일까지 그런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아. 조금의 양심은 있으니… … 헐헐헐!" 그가 연초 연기를 내뿜으며 웃었다. "우향, 추한 늙은이가 추한 짓거리로 숱한 사람을 죽인다는 생각이 들겠지. 하지만 이번만은 그런 생각을 접어라. 나를 위해서……." 그는 재를 털며 가는 한숨을 쉬었다. "배교도들에게 무슨 목숨 타령을 하십니까! 그 작자들은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작자들입니다!" 풍도가 소리쳤다. 우득용은 손을 저어 풍도의 말을 막았다. "하겠느냐?" 그가 물었다. 단원홍은 고개를 들었다. "육 개월 내로 원하시는 물건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말했다. "되었어. 필요한 것은 없나?" "없습니다." "현천도장, 다른 준비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소?" 우득용은 연기를 풍도를 향해 내뿜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천년대망(千年大　)과 인면지주(人面蜘蛛)만 남았을 뿐입니 다. 천년대망은 흔적을 찾았다고 하니 곧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풍도가 말했다. "유향, 서둘러야겠구나." "알겠습니다." 단원홍은 포권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가 풍도에게도 가볍게 읍을 한 후 등을 돌렸다. "유향, 부지휘(副指揮) 자리는 조만간 너에게 돌아갈 것이다. 이번 일과는 상관없이……." 우득용이 단원홍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단원홍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는 듯했다. 그가 내실을 그냥 걸어나 갔다. "너무 뻣뻣하군요." 단원홍이 내실에서 사라진 후 풍도가 말했다. 우득용은 실눈으로 웃었다. 간신(奸臣)으로 모두가 이를 가는 자의 웃음치고는 너무도 순박한 웃음이었다. "양아들로 들일 생각을 할 정도로 아낀다고 들었습니다. 단 천호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습니까?" "뻣뻣해서 마음에 들었다오." 우득용은 다시 웃었다. "공공께서 마음에 드신다니 가타부타는 하지 않겠지만…… 아무래 도 꺼림칙합니다. 다른 자에게 일을 맡겨 보시지요. 설마 동창, 금의 위가 고문과 살인이나 일삼는 자들만 모인 곳이라 말씀은 하지 않으 시겠지요. 기라성 같은 영걸들만 모인 곳 아닙니까." 풍도는 단원홍이 불안한 모양이었다. 단순히 일을 잘 처리하지 못 할 것 같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물건을 구한 후 배교도들은 다른 자에게 맡겨 쓸어버리면 돼. 걱정 마시오." 우득용은 풍도의 불안을 알고 있었다. 풍도가 원하는 것은 배교도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었다. 그는 배교 교단의 악착같음을 누구 보다 잘 아는 자다. 그 악착같음이 없었다면 벌써 멸문의 길을 걸었을 배교였다. 이번 배교 척결이 모산파와 관 련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 악착같음으로 모산파에 복수의 칼을 들이밀 게 분명했다. 그래서 배교도들은 얻고자 하는 그 물건과도 상 관없이 모두 죽어야 했다. 복수가 아니라도 그 물건을 되찾기 위해서 라도 죽기 살기로 달려들 것이다. "공공을 위해 목숨을 바칠 충성스러운 자들은 주위에도 많습니다." 풍도는 단원홍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충성스러운 개들은 많지. 하지만 나는 짖지 않는 개들은 싫어하오 ." 우득용은 장죽을 놓고 다시 차를 찾았다. 풍도는 미간을 좁혔다. "세인들이 나를 어떻게 평하는지 나도 알고는 있소. 추악한 늙은이 지…… 그래서 가끔 청(淸)한 것을 찾고 싶기도 한다오. 유향…… 그 같은 젊은이들을 키우는 것은 이 땅을 위해서도 좋지. 현천도장, 나 를 돈과 권력만 아는 자로 보지 마시오. 헐헐헐!" 우득용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제가 어찌 감히…… 저는 단지 단 천호가 이번 일을 하기에……." "유향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마시오." 우득용은 손을 들어 풍도의 말을 잘랐다. "알겠습니다. 공공……." 풍도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우득용은 턱을 괴며 풍도를 넌저시 바라보았다. "영단(靈丹)의 효험(效驗)은 분명 하겠지요?" "틀림없습니다. 시조(始祖), 삼모군께서 할 일이 없어 그런 비급을 남겼겠습니까." 풍도는 펄떡 뛰었다. "그 비동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는 책이 삼모군의 책은 맞소?" "고서방(古書房)에서 이미 천 년의 세월을 확인하고 필체의 신령스 러움까지 확인한 책입니다." 풍도는 침을 튀겼다. 우득용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험(靈驗)이 확인되면 모산의 도장은 모두 금으로 치장되게 될 것이오." "삼모군의 업적을 치하하시려면 그 정도의 금은 당연히 내어놓아야 하시겠지요. 허허허!" 풍도는 학익선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사람의 욕심의 끝은 어디인가? 후후!' 단원홍은 실소를 흘렸다. 말도 되지 않는 일에 끼여들어 있는 자신도 우스웠다. 공공에게 진 빚이 없었다면 이 우스꽝스러운 일을 맡지 않았을 것 이다. 공공이 자신을 아들처럼 아끼고 정치적 후견인(後見人)이 되어 주어서만은 아니었다. 공공은 정란(正亂) 때 역모(逆謀)의 누명을 써 삼족(三族)이 멸할 위기에 빠진 자신의 집안을 구해 주었었다. 그 이유가 무문에 존경을 받고 있던 아버지를 구해 무가에 대한 입 지를 강화시키겠다는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었지만 어쨌든 단씨 일가 에 있어 공공은 집안을 멸문에서 구해 준 사람임은 분명했다. 그 빚 때문이었다. 그 빚이 아니라면 관복을 벗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일을 맡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 관직에 나아가는 일은 그가 원했던 일도 아니었다. 무가의 자 손답게 무반(武班)으로 나아가길 원했던 아버지의 염원 때문에 관직 에 발을 들였을 뿐……. 하지만 지금은 아버지도 이 세상 사람은 아니다. 굳이 관직에 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일을 끝으로 그 빚을 갚고 홀가분하게 관복을 벗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배교도들의 저항이 거세 그 는 쉽게 발을 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진흙탕 속을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단원홍은 고개를 숙인 채 일타운을 몰았다. 길 양변에는 버드나무가 가지런히 줄지어 있었다. 단원홍은 생각난다는 듯 문득 일타운을 멈추었다. 그가 버드나무 가지를 꺾었다. '사매…… 사매였군.' 단원홍은 버드나무 가지를 입에 물었다. 주작당주, 언상영은 자신이 관부도 강호도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자라 했다. 맞는 말이다. 단원홍도 자신이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는 자라 생각했다. 미련을 둘만한 세상의 재미가 없었다. 작고 하얀 손으로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주며 이별을 노래하던 그 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꿈이었던가?' 단원홍은 관산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꿈이었는데 이상하게 버드나 무 가지는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사부의 말이 아니었다면 꿈으로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꿈……. 단원홍은 버드나무 가지를 씹었다. 견딜 수 없이 입맛은 씁쓸했다. 제17장 금역(禁域) 휘-잉! 윙! 폭풍은 황사(黃砂)를 싣고 몰려와 천지를 뿌옇게 물들였다. 낙타똥과 이리똥을 찾아다니던 어린아이들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 고 영길사(英吉沙)라는 예리한 칼을 찬 장정들은 그들의 가축들을 황 사의 폭풍으로부터 대피시키기에 바빴다. 유목민(遊牧民)의 여인들도 이동식 천막이 날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분주함을 떨었다. 이맘때면 언제나 찾아오는 황사의 폭풍이었다. 폭풍은 초원을 지나 산맥을 치달았다. 하란산! 걸복산(乞伏山)을 주봉으로하여 달리는 산줄기……. 하란산에는 깎아지른 절애를 양편으로 거느린 천장애(天仗崖)라는 깊은 계곡이 있다. 폭풍은 하란산의 나무들까지 황사로 뒤덮으며 천장애의 심처까지 파고들었다. 휘-잉! 후다다닥! 다다닥! 천장애로 들어가는 계곡은 깊고 높아 폭풍이 몰아칠 때마다 귀신의 호곡성(號哭聲) 같은 소리와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뒤섞여 사람의 혼을 뺐다. 좁고 긴 계곡의 입구를 반 각 정도 지나면 천장애는 갑자기 넓어진 다. 그리고 퇴색한 빛깔로 우중충하게 들어앉은 십 여채의 목채들… …. 천장애의 음산함과 어우러져 목채들은 마치 유부를 방불케 했다. 목채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돌로 깎은 두 마리의 독수리가 석축 (石 築)위에 높게 앉아 있었다. 붉은 눈에 당장이라도 사람의 눈을 후벼 파기 위해 달려들 것 같은 흉흉한 모습이었다. 독수리 아래에는 파풍도(破風刀)를 든 십 여명의 무사들이 서 있었 다. 곡구(谷口)를 지키는 자들인 모양이었다. 중원인도 있었고 이족 들도 있었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햇빛을 많이 쬐지 못해서인지 얼굴 색은 모두 창백했고 한결 같이 표정이 없었다. 입구를 지나치면 좌우에 목채를 거느린 커다란 문이 나온다. 황사가 내려앉고 있는 그 문의 높다란 곳에는 붉은 글씨가 용사비 등(龍蛇飛騰)으로 휘갈겨져 있었다. 단혈철각련! 사파의 조종, 철심흑사 곽부를 언제나 따라다니던 그 이름이었다. 허리까지 치렁한 은발(銀髮), 사자의 갈기털 같은 수염, 눈빛은 철 을 꿰뚫을 듯 형형했다. 고희(古稀)를 오래 전에 넘겼을 것 같은 나 이이나 젊은이들 못지 않게 위맹한 기파를 내뿜는 자…… 태사의에 앉아 중인을 좌시하고 있는 그는 바로 사파의 조종, 단혈철각련의 련 주인 철심흑사 곽부였다. 그의 앞에는 다섯 명의 노인이 좌우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좌측 선두에 선 미염(美髥) 노인은 바로 삼십 여년 전의 정사대전 때 사파연합의 제갈무후(諸葛武侯)로 활약한 바 있는 지낭(智囊), 갈 인후(葛仁厚)다. 지금 단혈철각련 내의 신분은 일인지하(一人之下)의 자리인 총노였다. 갈인후와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네 명의 노 인은 역시 정사대전 때 각기 사파의 한 문파를 이끌던 자로 지금은 단혈철각련 내에서 사호법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 총노인 갈인후로부터 믿지 못할 소식을 받고 황급히 단혈각(丹血閣)에 모인 터였다. "분명 하오?" 우측 끝에 선 자가 물었다. 거치도(鋸齒刀)를 차고 있는 그는 모온 (毛溫)이라는 자로 삼십 여년 전 사천의 표파자(瓢把子:산적 두목을 일컫는 말)를 하던 자였다. 사천의 녹림도를 이끌고 정사대전에 참가 했다 패해 곽부를 따르게 된 인물……. "믿어지지 않으시겠지요. 비록 흑막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는 하나 그렇게 쉽게 당할 곳은 아닌데……." 갈인후가 자신의 애병인 염왕비(閻王匕)로 손바닥을 쳤다. 흑막은 배후가 드러날 만일에 대비 주력은 거의 투입하지 않았었다 . 지원을 해 줄 수 없는 상황이라 자칫 정파인들의 집중 공세 속에 하란산에서 아껴 키운 수하들의 일부를 몽땅 잃을 위험도 있었고 하 란산에서 키운 수하가 정파인에게 붙잡혔을 경우 하란산의 비밀을 나 불거릴 위험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인 청부 집단 정도의 일 이야 굳이 주력을 투입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곳이라 해도 그곳의 막주는 련주의 제자, 조구완이다. "배교의 애송이 놈이 너무 광오하군! 두 명의 장로를 죽인 것도 모 자라……." 눈이 쭉 찢어진 늙은이가 흉광을 흘렸다. 진호경(陳護敬)이라는 자 로 작자야말로 삼십 여년 전 살막(殺幕)이라는 살수당으로 천하를 공 포에 빠뜨렸던 자다. 따라서 흑막을 보는 눈에 남다른 애정이 있었을 것이다. "내가 실수를 했소. 배교의 애송이를 너무 가볍게 보았어. ……그 런데 알 수 없는 것은 흑막의 위치를 어떻게 그 애송이가 알게 되었 는지." 갈인후는 안색을 찌푸렸다. "갈인후!" 곽부가 불렀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전각이 울렸다. 갈인후는 곽부를 바라보며 머리를 숙였다. "그놈은 이곳으로 오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황하를 따라 오고 있다 하니 이곳으로 오는 길이 맞 을 것입니다." "성녀라는 계집은 배교의 모든 것이라 했다. 맞느냐?" "맞습니다. 배교를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은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흑막을…… 성녀라는 계집에게 돌아갈 위해(危害) 는…… 걱정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군." "이정인의 사람 보는 눈을 어떻게 보십니까? 교와 성녀라는 계집을 염려도 하지 않을 자에게 호교신장의 자리를 넘겨주었을 리 없지요. 배교의 그 애송이에 대한 배교 내의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가 아니었다면 매일을 죽음과 맞부딪혀야 하는 호교신장의 자리를 벌써 버렸을 것입니다." "그런가?" 곽부는 미간을 좁혔다. "특이한 놈입니다. 상처를 입으면 물러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오히려 더욱 달려들다니…… 한 발 물러난 상태에서의 타협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단 당한 만큼 되돌려 주고… …." "갈인후, 너는 그놈에 대해 많이도 아는구나." "강호의 풍파를 이끄는 자입니다. 관심 있게 보지 않을 수 없었지 요. 그런 자는 세상에 많지 않습니다. 저도 어떤 분을 몇 십년간 모 시다 보니 그런 자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갈인후는 소매에 손을 쑤셔 박으며 고개를 숙였다. 곽부는 음산하게 눈빛을 빛냈다. 자신에 대한 칭찬 같기도 하고 비 난 같기도 한 갈인후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소리를 하지 않 았다. "만만치 않는 놈이겠군." "그렇습니다." "무릎을 꿇지 않는 자는 필요 없다. 죽여라." 곽부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 일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기다렸다는 듯이 진호경이 성큼 한 걸음 나섰다. 갈인후는 소매에서 손을 빼며 자신의 수염을 쓸었다. '죽이라니…….' 그는 마음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련주의 말은 말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장로들이 죽고 제자가 죽고 흑막이 초토화되었으니 자존심 때문이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지 나간 일……. 배교의 애송이를 죽여서 이득이 될 일이 없다는 것은 련주 스스로 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법들은 모른다. 호법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라도 그는 련주를 설득하는 척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련주, 지금은 배교의 애송이를 죽일 때가 아닙니다. 가만히 두어 도 배교는 정파 놈들과 잘 싸우고 있었습니다." "나는 놈을 죽인 후 내가 원하는 놈에게 배교를 이끌게 할 것이다. " 곽부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렇게 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겠지요. 하지만 작금의 배교 사정은 명두들 조차 선임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새로운 명옹을 어떻게 뽑겠습니까?" "배교 놈들에게 왜 그렇게 연연해하시오! 그깟 놈들의 힘이야……. " 진호경이 소리쳤다. "우리가 성녀라는 그 계집을 납치한 이유가 오로지 구륜전왕을 위 해서는 아니었소. 그 계책은 성녀라는 계집을 인질로 삼아 중원 배교 를 마음대로 조종(操縱)하기 위함이었소. 배교가 전혀 힘이 없는 곳 이었다면 그 같은 계책은 왜 나온 것이오? 정파 놈들의 집중 공세 속 에서 일 여년 간이나 맥을 유지하는 문파는 많지 않지. 배교는 힘이 있소." 갈인후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진호경은 시선을 외면했고 세 명의 호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곽부가 입을 열었다. "갈인후, 배교가 머릿수가 많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나는…… 그들이…… 나를 위해 싸우려 하지 않음을 이야기했다."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끝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제 한 번씩 칼을 주고받았으니 다시 이야기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지 도 모르지요. 아직 성녀는 우리 손에 있습니다." 갈인후가 말했다. 그는 이미 성녀가 아란하의 손을 벗어났음을 모 르고 있었다. "내버려 두어도 정파 놈들과 싸울 텐데 굳이 성녀라는 계집을 인질 로 삼아가면서까지 배교를 손에 넣으려 한 이유는 그들의 힘을 우리 가 원하는 대로 사용하지 위해서였지요." "모태명과 싸우게 할 생각이었지." 곽부가 말했다. 흡룡곤, 모태명! 그 이름이 나오자 네 명의 호법들은 일제히 적개심을 드러내며 이 를 갈았다. 삼십 여년 전 마괴파에서 당한 처참한 패배는 헛된 소문을 퍼뜨린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괴파에서 정파의 수뇌들이 회합을 한다는… …. 그 때문에 곽부를 비롯한 사파연합의 정예들은 기회라 생각하고 마 괴파로 몰려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던 자는 정파의 수 뇌들이 아니라 정파의 천라지망이었다. 정파의 공세에 사파연합은 떼 죽음을 면치 못했다. 살아 남은 자는 오십 여명에 불과했다. 마괴파를 넘어 새외로 달아난 후 살아남은 자들은 헛된 소문의 진 원지를 찾았다. 그러나 자리를 잡기에도 바빠 그런 일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이십 여년의 세월이 흐르고 새외에서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단 혈철각련은 배신자를 찾았다. 곽부의 귀를 속일 자라면 아무리 소문을 그럴 듯하게 위장하고 퍼 뜨렸어도 못 찾을 이유가 없었다. 사파연합 내부에 깊숙이 간여하던 자임이 분명했다. 갈인후는 사파연합에 가담했으면서도 죽지 않고 강호를 활약하고 있는 자들을 찾았다. 두 명의 인물이 곧 떠올랐다. 왜수, 상유! 흡룡곤, 모태명! 의심은 모태명으로 쉽게 좁혀졌다. 그리고 곧이어 모태명이 헛된 소문을 퍼뜨린 자임이 확인되었다. 사실 사파연합에 참가했던 자가 흑룡방이라는 큰 방파를 이끌면서 도 정파인들의 제지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만 해도 의심 받을만 했다 . 하지만 쉽게 모태명을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마괴파에서 누 구보다 용전분투로 활로를 뚫는데 나섰기 때문이다. 마괴파를 넘은 후, 모태명이 보이지 않기에 곽부나 갈인후 등은 모태명이 죽은 줄 알았었다. 그후, 십 몇 년이 지나 모태명이 흑룡방을 일구었다는 소 식을 들었을 때도 용케 살아 사파의 일문을 일으켰다는 생각에 기뻐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확인 결과 배신자는 모태명이었다. 당장 끌고 와 인육을 만 들고 싶었다. 하지만 모태염으로 인해 자칫 단혈철각련의 종적이 드 러날까 참고 또 참고 있는 중이었다. 갈인후의 마음도 그와 같았고 사호법과 달리 아무 표정도 없이 앉 아 있었으나 련주의 마음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큰일을 위해 그 정 도의 감정은 참아야 했다. 단혈철각련이 사라진 후 사파의 가장 큰 기둥은 누가 뭐라도 모태 명의 흑룡방이다. 십 수년 간 그렇게 활동했으니 사파인들에 뿌리 내 린 영향력도 깊었다. 단혈철각련이 중원에 진출하면 모태명은 그 영향력을 누구를 위해 쓸 것인가. 갈인후는 잘 알고 있었다. 모태명이 얼마나 음흉한 자인가를…… 정파에 몸을 의탁하던가 잘해야 양다리를 걸치는 정도일 것이다. 그 것은 단혈철각련에게는 정말 괴로운 일이다. 단혈철각련이 지금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자신을 위해 뛰어 줄 다수 의 발들이었다. 그 발들은 물론 중원 도처에 있는 사파인들이 될 것 이다. 하지만 모태명이 자신의 영향력을 발휘 그들의 다수를 몽땅 방 관자로 만들어 버리거나 정파에 맡겨 버린다면…….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제나 대사를 논하는데 중요한 변수 는 머릿수다. 그래서 갈인후는 먼저 모태명을 흔들어 놓을 생각이었 다. 배교를 원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배교와 흑룡방이 이전투구를 벌이 게 된다면 모태명의 힘은 분산될 것이고 사파인들에 대한 입지도 약 화될 것이다. 사파인들은 당연히 배교를 사파라 생각하고 있었고 홀홀단신으로 정파와 싸우는 배교에 동정을 보내는 사파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정 파도 아닌 같은 사파에 칼을 대는 모태명에 불만을 가질 것이 뻔했다 . 단혈철각련은 그때 나타나 주면 되었다. 배교의 손을 들어주고 배 신자인 모태명의 목을 자르며……. 그럴 듯한 등장이 될 것임에 분명했다. 계획은 그랬는데……. 의외로 녹녹하게 생각했던 배교의 젊은 애송이는 억셌다. 쉽게 다 룰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갈인후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젊은 배교 애송이의 의사와 상관없이 배교와 흑룡방이 이전투구를 벌일 방도를 마련해 둔 터였다. "싸우게 할 수 있습니다." 갈인후가 염왕비를 흔들며 말했다. 좌중의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 "진 호법의 이름만 잠시 빌리면 됩니다." "무슨……." 진호경은 갑자기 자신이 거론되자 의아해 했다. "단혈철각련을 들먹이기에는 이르고…… 진 호법의 이름이 적당하 오. 흑막의 배후는 살막의 막주가 가장 정당하지 않겠습니까. 껄껄!" 갈인후가 미염을 쓸며 웃었다. 호법들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곽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인후의 생각을 모두 읽었으니 더 앉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갈인후, 이곳으로 찾아올 배교의 애송이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알아서 대접하겠습니다. 구륜전왕으로 하여금 대접하게 할 생각도 있습니다. 사실 성녀라는 계집을 더욱 원했던 자는 구륜전왕입니다. " 갈인후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맺혔다. 곽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장막 뒤로 사라졌다. 곽부가 사라지자 호법들이 갈인후 주위로 우르르 몰렸다. "방금 하신 말은 무슨 말이오?" 호법들은 갈인후의 의중을 좀 체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모태명은 지나치게 의심이 많소. 몇 가지 소문이면 그는 배교를 상대로 칼을 빼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몇 가지 소문?" "흑막의 뒤에는 진 호법이 있었소. 성녀를 납치한 자는 바로 진 호 법이었지. 진 호법은 성녀라는 계집을 인질로 삼아 배교도들을 협박 했소. 배신자 모태명의 목을 가져 오라. 소문은 그것이 전부외다." "……." 호법들은 입을 다물었다. "두고 보시오. 모태명은 지나치게 영악한 자신의 머리를 후회하게 될 것이오. 자업자득이지. 껄껄!" 갈인후는 수염을 쓸며 웃었다. 하지만 그는 모르는 것이 있었다. 첫째, 성녀는 이미 인질이 아니었다. 두 번째, 모태명은 그가 생각하 는 이상으로 영악한 자라는 점이다. 세 번째, 그는 젊은 배교 호교신 장의 심중에 일어난 변화를 까맣게 몰랐다. 그렇게 모르는 것이 많았으므로 갈인후의 계획은 당연히 틀어져야 옳았다. 그러나 왕왕 세상의 일은 너무 예측이 틀렸기 때문에 맞는 일도 있었다. * * * 악약은 머리칼을 쓸며 뱃전으로 나섰다. 십 여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작은 배였다. 그러나 돛대가 세 개나 되었다. 돛을 잡고 있는 자는 한 명의 중년인과 약관의 청년, 그리 고 십 여세 소년이었다. 그들은 돛대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두 마리의 원숭이만큼 빨랐다. 오랫동안 손발을 맞춘 듯 눈빛 하나로 그들은 돛의 방향을 조절했다. 발가락까지 동원해 가며 돛을 조절하 는 그들의 솜씨에 악약은 절로 찬탄을 터뜨렸다. 마치 한 편의 정연 한 무극(舞劇)을 보는 느낌이었다. "어머! 딱 맞네!" 갑판에서 명조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쳐다보고 있던 여인이 악약을 보고 손뼉을 치며 다가왔다. 통통한 체격에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악약보다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였다. "명절(名節) 때만 입는 옷이란 말이야." 볼 맨 소리와 함께 선실에서 또 다른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눈에 오똑한 콧날, 귀여운 인상의 십오륙 세 소녀였다. 그녀는 시큰 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죄송해요." 악약은 무안해 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바로 그 소녀의 옷이 었다. "옷장 속에 숨겨 두는 것 보다 이렇게라도 한 번 바람을 쐬어 주는 것이 그 옷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갑판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바느질하고 있던 중년 여인이 말했다. 그녀의 곁에는 작은 체구의 노인이 있었다. 노인도 무엇인가를 열심 히 다듬는 증이었다. 중년 여인과 노인이 손질하고 있는 물건들은 마 희단(馬戱團)이 사용하는 물건들이었다. 배의 주인들은 바로 배로 천하를 주유하며 사람들에게 재주를 보이 고 웃음을 파는 마희단의 단원들이었다. "추위는 좀 가셨소?" 노인이 허리를 펴며 물었다. "예, 이제는 괜찮아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악약의 입술은 아직도 파랬다. 흔들리는 나룻 배에서 물보라를 얼마나 뒤집어썼는지 모를 일이었다. 만약 노인 일 행을 태운 배가 조금만 늦게 나타났어도 그녀는 나룻배와 함께 황하 에 몸을 묻었어야 했다. "하백소(河伯沼)라는 곳이오. 가끔 한 번씩 미친 듯이 물이 뒤집어 지는 곳이라 황하의 물길에 이력이 난 자도 걸려들면 곤혹을 치룬다 오." 중앙의 돛을 조절하던 중년인이 말했다. 그는 풍향을 모두 맞추었는지 손을 털며 돛대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 선수와 선미의 돛을 잡던 청년과 소년도 중앙의 갑판으로 걸어왔다 . "하백소에 미친 소용돌이가 생기는 이유는 하백 놈이 장가를 가기 위해서라 하던데…… 조용하던 하백소가 갑자기 아가씨가 지나자 미 친 듯이 날뛴 것을 보면 그 말도 사실인 모양이오. 허허허!" 노인이 주름살을 그리며 웃었다. 노인의 말에 악약은 얼굴을 붉혔다. "차림새를 보니 귀한 집 아가씨 같던데…… 무슨 일로 혼자 나룻배 를 타게 되었는지 물어도 될까요?" 중년 여인도 일손을 놓았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여자가 혼자 길을 나서게 되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밖에 없지."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청년이었다. 허름한 옷과 헝클어진 머리 칼, 그러나 그럼에도 청년의 외모는 단순간에 여인들의 마음을 뺏어 갈 정도로 뛰어났다. "맞아! 남편에게 쫓겨난 경우와 제 짝을 찾아 야반도주를 한 경우 뿐이지!" 소년이 소리쳤다. "무정(無情) 오라버니, 무혼(無魂)! 처음 보는 분에게 무슨 말버릇 이 그래!" 분칠을 진하게 한 통통한 여인이 눈을 흘겼다. "물어 보면 알 수 있지." 소녀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빛냈다. "맞아요?" 분칠을 진하게 한 여인이 태도를 돌변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악약은 당황했다. "그런 것은 아니에요. 음…… 하지만 사람을 찾아 나선 것은 맞아 요." "누구일까요?" 소년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남자!" 소녀가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노인은 허리를 두들겼고 중년인과 중년 여인은 나란히 팔짱을 낀 채 웃고 있었다. "남자는 맞아요. 하지만……." 악약은 황급히 자신의 처지를 말하려 했다. 청년이 그녀의 말을 냉랭하게 잘랐다. "…… 하지만 보지 않으면 보고 싶겠지!" "곁에 있으면 분명 괜히 기분이 좋고 마음이 편할 거야." 소년도 한 소리 하며 뱃전에 폴짝 엉덩이를 걸쳤다. "맞아요?" 분칠을 진하게 한 여인과 소녀가 동시에 물었다. "음…… 그말은 맞는 것 같아요." 악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람은 연인밖에 없는데…… 그럼 형님의 말이 맞잖아!" "연인을 찾아 나섰군요. 용감도 해라……." "짝을 찾아 나선 벌, 나비는 폭풍도 두려워하지 않지. 하물며 하백 소의 물 정도야." "부러워. 나의 꿈이 바로 마음에 맞는 남자를 찾아 이 배를 떠나는 것인데……." 소년과 소녀, 청년과 여인이 왁자지껄 한 마디씩 내던졌다. 그들을 지켜보며 악약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전혀 놀림을 당하는 기분이 아니었다. "찾는 분은 어디에 있어요?" 중년 여인이 온화한 미소로 물었다. "강변을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 분을 만날 때까지 편하다면 이곳에 계셔요." "고맙습니다." 악약은 노인을 비롯 배에 탄 사람들에게 머리를 숙였다. "놀고먹는 자는 이 배가 반기지를 않아. 있는 동안 밥값은 해야지. " 청년이 차갑게 말했다. "맞는 말이야! 어머니 대신 아버지 잠자리를 시중 들라 하지. 어머 니의 춤솜씨가 예전과 달라. 낡은 허리로는 낮일, 밤일을 동시에 하 기는 어렵지." 소년이 상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배 위에 탄 자들은 개의치 않았 다. 악약도 소년의 육담(肉談)이 귀엽기만 했다. "가진 재주가 있소?" 노인도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이 배는 놀고먹는 자를 반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악약은 작은 손을 매만졌다. "노래를 조금 불러요."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노래라……." 노인은 시선을 창파로 돌렸다. 나머지 자들은 모두 흥미진진(興味 津津)한 얼굴로 악약을 주시했다. "장단은 내가 맞춰 주지!" 소년이 뱃전에서 뛰어 내렸다. 그가 북을 잡으러 갈 때였다. "상야!" 강심을 울리는 맑고 높은 소리……. - 하늘에 맹세합니다. 내가 당신과 서로 알게 되고부터 오래 살며 언제까지나 마음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산에 언덕이 없어지고, 강물이 그 때문에 말라, 겨울에는 천둥이 우르릉거리고 여름에는 눈이 내리며 하늘과 땅이 합쳐져도 그대와 헤어지지 않으리다. 악약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수줍어하던 표정과 달리 그녀는 놀랄 만한 열정으로 노래를 부른 것이다. 작은 돛배에 침묵이 흘렀다. 악약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달랐다. 그들은 잠시 말을 잊고 있 었다. 악약은 그 침묵에 다시 부끄러워졌다. "좋은 목소리요." 노인이 감회 서린 음성으로 말했다. "이 늙은 것은 무무(無無)라 하외다." 그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놈은 아들이오. 무생(無生)! 그 곁에 있는 여자는 자부(子婦)로 무사(無死)라 하오" "아가씨,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소개를 받은 중년인과 중년 여인이 머리를 숙였다. "반가워요. 저는 악약이라 합니다. 운악약……." 악약도 읍을 하며 자신을 소개했다. "저기 멋없이 서 있는 놈은 큰 손자로 무정, 저기 얼굴에 분칠을 덕지덕지한 계집은 둘째, 무색(無色), 저 아이가 셋째, 무향(無香), 말 많은 저 어린놈은 무혼이라 하오." 노인이 자신들의 손자들을 쭉 소개했다. 중원의 성씨 중에 무씨(無氏)가 있는 지는 악약은 잘 몰랐다. 부인 의 성도 무씨인 것을 보면 아마 마희단에서 사용하는 예명(藝名)인 듯했다. "반가워요. 저는 운악약이라 합니다." 악약은 그들에게도 같은 말로 자신을 인사했다. "잘 오셨소. 있는 동안 편하게 지내기를 바라오. 운(雲) 소저(小姐 )." 청년이 대표로 인사했다. 처음의 냉랭하던 표정과는 조금 다른 얼 굴이었다. "무색, 무향! 오늘은 새로운 분이 오셨으니 숨겨 둔 음식을 꺼내야 지." 중년 부인이 두 명의 딸에게 말했다. "알았어요!" 여인들이 반갑게 소리치며 선실로 달려갔다. * * * "이 친구……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도 한 잔 하지 않고 갈 참인가. " "어제 마신 술은 술이 아니던가." "주야(晝夜)로 삼 일은 퍼 마셔야 술을 마셨다고 할 수 있지. 적염 날수의 수염이 희끗희끗해지더니 이제 적염날수는 적염날수가 아니군 ." "바쁘게 왔으니 바쁘게 가야지. 나의 칼을 알아주는 이도 없는 이 곳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쯔쯔…… 지음(知音)은 이정인밖에 없나 보군. 궁신이라는 작자도 자네의 투로 정도에는 찬탄을 보내 줄 수 있을 텐데……." "찬탄을 보내 줄 수는 있지. 하지만 그 친구야 소리를 평하기 보 다 술을 평하기를 더 좋아하니……." "자네의 지음은 지도(知刀)고 나의 지음이야 원래 지주(知酒)가 아 닌가. 낄낄!" 원상은 경망스럽게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철중달과 원상은 정말 초저녁부터 시작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술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과 안주를 사다 나르느라 소개, 등중용은 본업(本業)인 비럭질도 포기하고 점소이가 되어야 했다. "솔직히 이야기 해 보게. 백운장에서 나귀처럼 뒹굴거리기만 하던 자네가 강호에 나온 이유를…… 역시 이정인 때문이지?" "맞네. 이정인이 아니면 세상의 그 무엇이 나의 관심을 끌겠나." 철중달은 안색을 흐리며 엎었던 술잔을 다시 들었다. "보자 보자 하니…… 정말 자네는 이정인만 친구로 아는 모양이군! " 원상이 투덜대며 손가락으로 술병을 퉁 쳤다. 술병에서 술이 솟구 쳤다. 그 술은 한 방울도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철중달의 잔을 채웠 다. "나에게 친구는 이정인과 자네밖에 없지. 자네는 원래 친구가 많은 사람이고 이정인은…… 안타까울 따름일세." 철중달은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비웠다. "이정인 때문에 나왔다고 하니…… 만날 사람은 만났겠군." "만났네." "이정인의 제자라는 젊은 명옹이겠군." "이정인은 많은 배교도들을 소개시켜 주지 않았다. 나도 배교도들 을 소개받기를 원하지 않았고……." "소문은 들었을 테지." "무슨 소문?" "그 아이가 명정과 우제준을 죽였어. 황하에서 백 여명을 죽였고… … 죽였다는 말 보다 도살했다는 말이 옳겠군." 원상은 노안을 찌푸렸다. "그렇다고 하더군." 철중달은 붉은 수염을 쓸었다. "우제준이라는 아이는 일전에 숭양을 만났을 적에 본 적이 있다. 물건이 될만한 아이였어. 이정인의 제자에게 패할 줄을 꿈에도 몰랐 다." "원상, 자네는 이정인을 너무 얕보는군. 숭양은 멋만 부리는 화산 의 개코 나부랭이에 불과해. 숭양의 제자는 이정인의 제자를 이길 수 없다. 당연히……." 철중달은 원상의 앞에 가득 쌓인 닭뼈 하나를 들었다. 그가 손가락 으로 닭뼈를 퉁겼다. "아!" 소개, 등중용은 탄성을 터뜨렸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닭 뼈는 바위를 뚫고 흔적을 감추었다. '누가 본다면 닭을 잡아먹는 바위라 하겠군. 맞아! 이 얼마나 진귀 한 바위인가. 이상한 돌을 모으기 좋아하는 왕(王) 대인(大人)에게 가져가면 제법 돈푼께나 받겠구나.' 소개, 등중용은 닭뼈로 구멍이 난 바위에 눈알을 갖다 대며 잔머리 를 굴렸다. 바위의 형상도 사람과 비슷했고 닭뼈가 박힌 곳도 하필이 면 입처럼 생긴 곳이었다. "자네의 말이 맞네. 숭양의 제자는 이정인의 제자를 이길 수 없지. 하지만 자네는 이것은 알아야 해. 배교의 제자는 화산파의 제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 화산파가 빛낸 제자는 부지기수나 화산파를 빛낸 제자는 많지 않다." "배교가 빛낸 제자는 많지 않지만 배교를 빛낸 제자는 강호인들의 머릿속에 수 백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더군!" 철중달이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구대문파의 그 찬란한 위명을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 찬란한 위명을 넘어 보고자 한 시절을 칼과 함께 소일하던 그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 벽을 넘지 못했다. 남 은 것은 정사 양도 간의 인물이라는 이상한 평과 함께 적염날수라는 별호뿐…… 때문에 반사적으로 구대문파의 하나인 화산파를 깎고 배 교를 치켜세웠는지 모를 일이다. 별반 좋아하지도 않는 배교를……. "나백염왕과 탈명마효를 이야기하려 함인가! 자네가 나백염왕과 탈 명마효를 들먹일 줄이야……." 원상은 미간을 좁혔다. 철중달은 냉랭한 얼굴로 입을 굳게 닫았다. 쓸데없는 말을 꺼냈구 나 하는 후회가 들었다. 개방도 구대문파와 동류다. 나백염왕, 탈명마효! 강호에 뿌려졌던 피를 생각한다면 농담으로도 무위를 내세울 자들 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왕 뱉은 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원상은 허리춤을 뒤적였다. 그가 술잔 대신 호로병으로 술을 콸콸 들이켰다. 호로병의 술은 분위기를 바꾸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적염날수라는 작자는 자신의 언사를 절대 돌이키는 자가 아니었으므 로…… 할 수 없이 개입으로 나불대는 그가 분위기를 풀어야 했다. "이정인…… 괜찮은 친구였지." 원상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그는 철중달이 과한 말을 한 이유를 이정인 탓으로 믿었다. 이유야 어쨌든 구대문파는 이정인라는 지기를 죽인 자들이므로……. "강호의 인심이 흉흉하니 사람의 인심까지 흉흉하군." 원상은 다시 호로병을 기울였다. 철중달도 술잔을 잡았다. "우제준이라는 아이는 내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정인의 제자는 보지 못했어. 그래서 한 말일세. 자네는 몇 번 본 적이 있겠군." "이정인이 서너 번 데리고 왔지." "자네는 기억하는가?" 원상은 다리를 꼬았다. "아! 명강량이라는 아이였지. 요즘은 나이가 들어 내 이름도 깜박 깜박하니…… 명강량이라는 아이는 무골도 준재도 아니라고 했다. 단 지 그 아이가 가진 특별한 기운에 끌려 후계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이정인에게 들었다면서……." "생각 나는군. 그렇게 들었지." "특별한 기운이라…… 자네도 그 아이에게 그런 기운을 느꼈는가?" 원상이 콧구멍을 후비며 물었다. "느끼지 못했네. 우직해서 자신의 그릇만큼의 일은 해 낼 것 같더 군." "그럼 그 특별한 기운이란 배교도들만 느낄 수 있는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지." "만날 사람은 만났다고 했으니…… 필경 명강량이란 아이를 만났겠 지." "만났다고 이야기했네!" "어떻던가?" 원상의 물음에 철중달은 눈살을 찌푸렸다. 원상답지 않는 집요한 관심이었다. "많이 변했어. 예전의 순박하고 우직한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더군 . 감정도 무뎌졌고…… 나에 대한 반가움도 잊어버릴 정도로…… 하 긴 그 악머구리 속에서 사람의 심성을 지키고 있는 자가 이상한 자겠 지." 철중달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것은……." 원상이 코딱지를 퐁 호로병 속에 떨어뜨렸다. 그가 호로병의 술을 맛있게 들이켰다. "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철중달이 창노한 목소리로 물었다. 호로병을 내리며 이번에는 원상은 아차 했다. 추궁하듯 물을 필요 가 없는 일인데……. "특별한 기운! 그 말이 무척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 가 이정인에게 들은 그 아이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 철중달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배교에는 두 가지 보물과 두 군데 금역이 있다." "두 가지 보물과 두 군데 금역?" 원상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이미 강호인들에게 알려질 대로 알려진 것이지." "화령주를 말함이군." 원상이 호로병을 휘휘 흔들며 말했다. "그렇다. 다른 하나는 새외에 있다고 하더군. 이정인이 무엇인지 이야기는 해 주지 않았다. 나는 보물이 아니라 금역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는가?" 원상이 슬며시 물었다. 낯간지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명강량이라는 까마득한 후학에 대해 졸렬할 정도로 초조해 하던 자신을 조금 참괴 해 하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천문의 불길한 기운을 읽은 후 자꾸 명강량이라는 아이에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자네가 그 아이를 그토록 궁금해 하니 내가 어찌 저 아이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을 수 있겠나. 이정인에게 들은 것 일세." 늙으면 어린애처럼 잘 삐친다더니 철중달의 심사는 이미 꼬여 있었 다. "끙!" 원상은 한숨을 쉬며 허리를 벅벅 긁었다. "두 가지 보물과 두 군데 금역은 모두 배교의 초대 명왕과 관련이 있지. 자네는 이정인이 명강량이라는 아이를 처음 어디서 만났는 줄 아는가?" "명강량이라는 아이는 길거리 패였다고 하지 않았나. 길을 떠도는 아이였으니 길에서 만났겠지. 이정인이 데려가지 않았으면 우리 개방 의 방도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개방에서 우수마발로 택해 데려갈 정도의 아이였다면 이정인은 제 자로도 삼지 않았다! 잘 듣게 이정인이 명강량이라는 아이를 처음 만 난 곳은 바로 배교의 금역 중 한 곳이야." 개방을 싸잡아 욕함으로써 철중달의 노화는 한 풀 꺾인 듯했다. "금역이라면 배교의 교도들에게만 금역이었는가? 어떻게 그곳에서 ……." "금역은 비동(秘洞)이었다. 억수 같은 비가 내렸다더군. 비동을 지 키는 교도로부터 수맥(水脈)이 터져 비동 자체가 무너져 내릴 판이라 는 보고를 듣고 이정인은 황급히 그곳에 도착했네. 비동은 그가 도착 한 그 순간 수맥의 폭발로 물줄기 속에 터져 버렸지. 비동은 우르르 무너지고……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물줄기 속에 한 사람이 딸려 나 온 게야." "명강량이라는 아이였겠군." "듣기로 산중에서 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발밑이 허전해 지더라는 거야. 떨어지며 기억을 잃었다더군. 정신을 차려 보니 이정인의 앞이었고…… 비동에 흙으로만 된 숨구멍 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비로 씻겨 가 지반이 약해진 곳에 발을 디뎠겠지." "헹! 정말 희한한 만남이군. 그래 그 비동에 무슨 비밀이 있기에 배교도들은 그곳을 금역으로까지 삼았나?" 원상이 발가락 사이의 때를 뜯으며 물었다. "모르네." "모른다고? 이정인이 이야기 해 주지 않던가?" "이정인도 모른다고 하더군. 그냥 천 년의 세월 동안 금역으로 알 려져 지켜 온 곳이라는 것 뿐이야. 이제 수맥이 터져 흔적도 없이 사 라졌으니…… 배교의 두 군데 금역 중 한 곳은 사라진 게지." "나머지 한 곳은?" "모르네." 철중달은 입을 굳게 닫았다. 생각하니 정말 실없는 이야기였다. 배 교도들이 한담으로나 나눌 그런 이야기들을 왜 자신이 꺼냈는지 몰랐 다. 명강량이라는 아이에 대한 원상의 조바심을 조소하기 위해 꺼낸 이야기인 듯은 한데 아무래도 술이 좀 과한 듯 싶었다. "원상, 세상의 대마두나 대살성을 만든 반의 책임은 바로 세상 자 체에 있음을 알았으면 하네. 우리가 누구를 대살성이라 계속 부른다 면 그는 싫어도 대살성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철중달은 그 이야기를 끝으로 자리를 털려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 어났다. "이정인과의 의리 때문에 나왔다면 명강량이라는 아이를 살려주기 위해 나왔을 것이 아닌가." 원상은 앉은 채로 말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지. 하지만 싫다고 하더군. 전인으로 삼겠다는 제의까지 거절하더군. 죽은 이정인이 자신의 그런 제자를 어떤 얼굴 로 지켜보고 있을지……." 철중달을 안색을 찌푸렸다. "명강량이라는 아이가 내 제의를 모두 거부하기는 했으나 일단 입 은 뗐으니 그것으로 이정인과의 의리는 지킨 셈이지. 이제 나는 백운 장을 나서지 않을 것일세. 자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달려오지 않았다고 욕하지 말게." "죽은 후에야 자네가 달려와서 내게 득될 일이 무엇 있다고…… 어 쨌든 자네가 부럽네. 자네는 그렇게라도 이정인에 대한 신의는 지켰 으니…… 내가 이정인에게 진 빚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알고 있네."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인데 나는 빚을 어떻게 갚누……." 원상은 궁상을 떨었다. "기회가 있겠지. 나는 가네." 철중달은 휘적 길을 나섰다. "가는 길에 그 앞의 어린 거지 얼굴이나 한 번 보아주게." "이미 보았네." "어떻던가?" 원상이 성급히 물었다. "자네는 밥 해 먹기도 싫어 남의 밥을 빌려 먹고 있는 자가 아닌가 . 그토록 게으른 자네가 후인을 키운답시고 손발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을 보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좋은 근골일세." 철중달이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무태도 죽고 자허도 죽고 비운도 죽고…… 이제 우리는 마지막 작 별을 고하니…… 이렇게 우리의 한 시대도 끝나는가 보군. 잘 가시게 . 친구……." 원상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철중달의 붉은 수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 * 명강량은 토굴에서 부스스한 몸을 일으켰다. 며칠을 계속 술을 마 신 탓인지 몸이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깊은 잠을 취할 수 없어 피로 는 더 한 듯했다. 등허리와 얼굴에는 질퍽한 땀 투성이었다. 꿈! 매일 밤 반복되는 석동의 꿈……. 그 꿈은 하루하루 더욱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다. 누구일까? 명강량은 안개 속 같은 뿌연 머릿속을 더듬었다. 역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명강량은 목이 칼칼하게 말라옴을 느끼며 호로병을 입에 댔다. 죽 엽청의 진한 향이 목젖을 울리고 위를 자극했다. 그는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다리를 꼬았다. 정강이의 굵은 상처가 무심결에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상처를 생각 없이 바라보던 명강량의 눈빛이 빛났다. 그가 미간을 좁혔다. 그 상처는 오래 전 석동에 떨어지며 생긴 상처였다. 중원에 성화를 최초로 가져온 명옹이 남겼다는 석동! 비가 폭포수 같이 쏟아지던 날…… 나무 등거리에 걸려 넘어지면 그는 석동으로 떨어졌었다. 정강이뼈가 살을 뚫고 나올 정도의 상처 였으니 정신을 잃을만도 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사부……. '아니, 아니…… 그것만은 아닌 듯한데…….' 명강량은 다시 한 모금의 술을 들이키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 전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을 듯했다. '혼절한 중에…….' 그는 머리를 쥐어짰다. 무엇인가 기억이 날 것 같으면서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이 이상했다. 전혀 내가 아닌 것 같은…… 그 때는 상처 때문이 라 생각했는데…… 처음 보는 사부의 얼굴도 낯설지 않았고 배교라는 이름도 친근했다. 가만…….' 석동 속에 누가 있은 듯했다. 느낌으로……. '느낌이라…….' 그 느낌 때문이었다. 지난 밤 막 그 꿈에서 깰 때와 석동에서 정신을 잃은 후 사부에 의 해 막 눈을 떴을 때의 느낌! 너무 비슷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오래 전 석동에 떨 어졌을 때의 기억을 더듬고 있었던 것이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달칵거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알 수 없다.' 기억의 실마리는 결국 풀리지 않았다. 명강량은 생각의 긴장을 풀었다. 그는 술을 서너 모금 더 마시고 신장도를 찼다. 한두 시진 눈을 붙 였으니 다시 길을 떠나야 했다. 토굴을 나서던 그는 문득 품속을 뒤 졌다. 무관심 속에 어딘가에서 흘려 버리지 않았을까 싶었던 전교영 기는 그의 품에 그대로 있었다. * * * "죄송합니다. 신탄에서 마옹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주작당주, 언상영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안개 그리고 각 당주들, 구대문파, 중소방파들 간의 공조……." "알고 있다. 보고는 서면으로 이미 하지 않았느냐." 단원홍은 손을 저었다. "멀리 달아나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곧 포위망을 다시 구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상영, 남궁기 등을 모두 불러들여라." "예?" "호랑이를 잡으려면 단 번에 잡아야 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놈에게 상처만 입히고 말았다. 상처 입은 호랑이는 갈수록 영악해지고 포악 해지지." "잡을 수 있습니다. 신탄에서는 제가 잠시 주작당을 비웠기 때문에 ……." "불러들여라!" 단원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놈이 산림으로 도주하게 내버려두실 작정이십니까?" "추적할 자는 따로 있다. 무영인(無影人)들…… 금의위 때부터 내 가 범인을 잡기 위해 사적(私的)으로 키우던 자들이다. 부상(扶桑)에 보내 인자(忍者) 수업까지 받게 했지. 이미 마옹을 추적하러 보냈다 ." "그런 자들이 있었군요. 하지만 마옹은 일반 범죄자들과 다릅니다. 부상의 인술(忍術)이 독특하다고는 하나……." "그들이면 충분하다." 단원홍은 일타운의 고삐를 하인에게 건넸다. "언상영, 너는 지금 한 가지 일을 급히 해 주어야겠다." 그가 내당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구대문파에 통문(通文)을 보내라. 마옹과 성녀라는 계집을 발견하 면 죽이지 말고 무조건 포획하라고…… 공공의 명이라는 것을 강조하 라. 마옹에 대한 혈채를 갚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있을 테니 명 을 듣지 않을까 우려된다." "죽이지 말아야 합니까? 구대문파가 아니라 각 당주들부터 그 명에 는 화를 내겠군요." 언상영은 고소를 흘렸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 사부님은 뵙고 왔느냐?" "만나 뵙고 왔습니다." "근황은 어떠시더냐?" "기력(氣力)이…… 많이 노쇠한 듯했습니다." "기력이 좋을 리 없겠지. 노년의 유일한 즐거움을 잃으셨는데.…… ." 단원홍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문주께서 모시고 싶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전했습니다. 그런데 아 무 말씀도 없어시더군요. 단지 한 번 찾아오라는 말만 하셨습니다." "나를 찾아오라고?" 단원홍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사부는 사람을 청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오면 만나고 가면 보냈다. "바쁘게 부르는 일은 아닌 듯했습니다." 언상영이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는 천화원(天花院)을 떠나기 보다 자신이 천화원에 머물기를 더 원할 것이다. 찾아오라는 뜻을 단원홍 은 그렇게 해석했다. '어차피 이번 일을 끝으로 관부를 떠나기로 했으니…… 천화원에서 사부나 모시며 유향경천문의 일을 도와주어야겠다.' 단원홍은 자신의 결심을 더욱 다졌다. * * * 휘! 휙! 휘! 무혼은 신바람을 내며 휘파람을 불렀다. 무혼은 혼이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악약이 보기에 무혼은 누구 보 다 잘 울고 누구 보다 잘 우는 아이였다. "으싸!" 무혼이 세 개의 주머니를 허공 중에 빙글빙글 돌리며 배 위로 올랐 다. 두 마리의 원숭이도 펄떡 뛰며 따라 올랐다. 오늘은 정말 모두에게 신나는 날이었다. 세 개의 주머니에 돈이 가 득 찰 정도의 수확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무무도 무생, 무사도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돈 때문만은 아니었 다. 구경꾼도 즐거웠지만 누구 보다 즐거웠던 사람은 재주를 부리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바로 자신들이었다. 모두 아직 흥이 가시지 않은 얼굴들이었다. "정말 즐거운 하루였어. 모두 아가씨, 덕분이오." 무무가 악약의 손을 부축해 배로 이끌며 한 마디 했다. 그는 나이 에 어울리지 않게 짧은 바지, 짧은 소매의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있 었다. 무혼의 옷차림도 그와 같았다. 악약을 비롯한 여인들은 화려한 궁장 차림이었고 무생과 무정은 영웅건(英雄巾)에 상체가 거의 드러 나는 철갑 차림이었다. "단장지가(斷腸之歌)만 잘 부르는 줄 알았더니. 그런 희소곡(嬉笑 曲)은 또 어디서 배웠어요?" 무사가 배시시 웃으며 물었다. 악약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모두 언니 이야기뿐이군요. 원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저란 말이 에요." 무향이 입을 삐죽였다. "아가씨의 노래는 맑은 가운데 고아하고 무향의 노래는 높은 가운 데 청량하니 누가 누구를 잘 불렀다고 할 수 있겠느냐. 오늘 두 사람 이 같이 노래를 부르니 서로에게 없는 것을 보태 그야말로 천상의 옥 음이었다. 무향아, 너는 너의 음색에 어울리는 이런 분을 또 만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생이 무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도 알고 있어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무향은 해 웃었다. "바쁠 일도 없으니 오늘은 돛을 펴지 말고 강물에 그냥 길을 맡겨 보자구나." 무무가 손에 든 물건을 갑판에 털썩 놓으며 말했다. 무정과 무혼은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악약은 무향을 향해 다가갔다. "무향, 언니가 보이지 않는구나." 무색은 춤판이 벌어지고 난 이후부터 보이지 않았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해요. 무색, 언니는…… 춤을 제외하고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다면…… 히히히! 바로 남자예요. 어 디서 남자를 꼬셔 놀고 있을 거예요. 올 때가 되었는데……." 무향은 시선을 돌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색이 배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옷이 헝 클어져 그 사이로 풍만한 젖무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녀가 후다닥 배 위로 뛰어 올랐다. "미친 놈" 무색은 배 위로 뛰어오르자 마자 욕부터 내뱉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무향이 물었다. "나 같은 명기(名器)는 세상에 처음이라며 제 첩으로 앉히려 들잖 아." "첩으로 앉지." "같은 남자의 얼굴을 한 시진 이상 본다는 것은 내게 참을 수 없는 곤욕이라는 것을 너도 잘 알잖아." "한 시진이면 딱 남자와 그 짓을 하며 놀 시간이네." "네가 무엇을 안다고! 오라비에게 빨리 배나 띄우라고 그래. 보아 하니 쉽게 물러날 작자가 아닌 듯했어." 무색이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히히히! 이미 늦었어. 벌써 오셨는데." 무향이 손가락을 들었다. "서랏!" 한 무리의 사내들이 개떼처럼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맙소사! 그 작자야! 무혼!" 무색은 다급히 무혼을 불렀다. "뭐야? 또 사고야!" 무혼이 투덜대며 다가왔다. "무혼, 부탁해! 오늘은 누나가 너를 위해 특별한 것을 만들어 주겠 다." 무색은 선실로 달려갔다. 그녀는 춤 다음으로 남자를 좋아했고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요리였다. "젠장!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째야! 만 번인가 만 한 번인가! 몇 번 을 더 이 짓을 하란 말이야!" 무혼이 투덜대며 뱃전으로 걸어왔다. "어이, 많이도 왔군." 그가 배 위에서 갑자기 몸을 쑥 기울였다. 마치 강물에 뛰어드는 것 같은 자세였다. 순간, '아!' 하며 악약은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무혼의 몸은 마치 가랑잎과 같았다. 그가 바람을 타고 움직이듯 허 공을 날아 한 무리의 사내 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헤헤헤! 그만 돌아가시지!" 무혼이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꼬마 놈은 비켜라!" 장정 한 명이 무혼의 어깨를 잡으며 고함을 질렀다. "헤헤!" 무혼의 눈빛이 장난기로 빛났다. 그가 장정의 손을 잡았다 . "아악!" 비명과 함께 무혼의 어깨에 손을 대던 장정은 강물 위로 날아가고 무혼은 장정들 사이를 바람처럼 움직였다. "으악!" "악!" 어떻게 손을 뻗는 지도 몰랐다. 장정들은 팔, 다리, 어깨를 움켜쥐 며 비명을 질렀다. "전부 약골들뿐이군. 우리 누나는 당신들 같은 약골들은 싫어한단 말이야!" 무혼은 단순간에 장정들을 쓰러뜨리고 거만하게 뒷짐을 졌다. 장정들은 무혼의 눈치를 살피며 엉금엉금 기었다. 그때였다. 삐꺽! 하며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정이 닻을 올리고 있었다. 무무를 비롯해서 배에 탄 자들은 포구의 난동에 눈길 한 번 주지 않 고 있었다. 무혼이 배에 뛰어오르며 악약을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악약의 눈빛이 이채로 반짝 빛을 뿌렸다. "자! 오늘은 밖에서 식사를 합시다!" 무색은 조리 도구를 한 가득 들고 뱃전으로 나왔다. "좋아!" 무향이 그녀를 거들었다. 타타타탁! 무색의 칼질은 신기에 가까웠다. 그녀는 여러 개의 화로 를 이용해 지지고 굽고 튀기며 뱃전을 구수한 냄새로 가득 채웠다. 무색의 부산한 손놀림과 구수한 냄새에 뱃전은 다시 흥으로 되살아 났다. 너무 신나게 난장을 벌였는지라 모두 흥이 아직 덜 풀린 상태 였다. 무정은 무색의 칼질에 맞춰 다리를 까딱였고 무혼은 어깨를 들 썩였다. 무무는 주위를 둘러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들을 위 한 난장을 한 판 더 벌여야 할 것 같았다. 그 판의 주인은 물론 새로 온 아가씨여야 했다. "아가씨, 다루는 악기는 있소?" 무무가 물었다. "음…… 비파(琵琶)를 좀 배웠었고 그리고……." "비파면 됐소. 무색이 식탁을 차리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은 것 같은데 한 곡조 들을 수 있겠소?" "알았어요." 악약은 사양하지 않았다. 악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혼은 비파를 가져왔다. 디링! 디딩! 딩! "무슨 곡을 칠까요?" 비파 줄을 고르며 악약이 물었다. "아무것이나…… 내키는 대로……." 무무가 웃으며 말했다. 악약은 비파를 쳤다. 그녀는 처음부터 숨이 가쁠 정도의 빠른 곡조 를 연주했다. 명조가 퍼덕 날고 원숭이들은 손뼉을 치며 뛰어 다녔다 . 무무는 미간을 좁혔다. 처음 듣는 곡이었다. 정말 내키는 대로 비 파를 타는지…… 하지만 무딘 자신의 흥취조차 삽시간에 일으킬 정도 로 경쾌한 곡조였다. 무무는 자신의 손가락이 자신도 모르게 곡조를 타고 움직이고 있음 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생은 강적(羌笛)을 꺼내 들고 있었다. 무사는 필율(　栗)을 입에 대고 있었다. 무향과 무혼은 이미 방향(方響)과 박판(拍板)으로 악 약의 비파에 화답했고 무정은 곡나팔을 개조해 만든 나팔을 만지작거 리고 있었다. 곡조를 타며 자신이 뛰어들어야 할 때를 찾고 있음이 분명했다. 요리를 하는 무색의 손놀림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 라졌다. 수천 가지의 요리도 단숨에 할 듯했다. "흐흥……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군." 무무는 수염을 쓸었다. 그리고 그도 갈고(　鼓)를 들었다. 둥! 무무가 갈고를 울렸다. 일곱 개의 다른 악기가 각자의 소리로 하나의 음을 만들어 갔다. 정해진 곡이 아니라 처음에는 삐꺽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반 각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갈고의 울림과 서로의 마음에 의지해 한 소 리를 내고 있었다. 가을 밤의 쓸쓸함을 이야기했다가 천군만마로 휘몰아치는 여름날의 폭풍을 이야기했다가……. 배에 탄 자들은 한 마음으로 옥음을 만들고 있었다. 반 시진이 흐르자 방향을 타는 무향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슬프고 기뻐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혼은 방향에 담겨 이미 다른 세계를 거 닐고 있었다. 그 세계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었다. 눈물을 흘리지 않 았을 뿐 무생, 무사, 무정, 무혼, 요리를 하는 무색도 마찬가지였다. 악약은 한량없이 마음이 편했다. 그녀는 그 세계에 접어들자 비로 소 오랜만에 자신의 자리를 찾은 듯했다. 악약은 조용히 비파를 놓았다. 무무도 갈고를 놓았다. 나머지 자들 은 여전히 악기에 매달려 있었다. "무무……." "말씀하십시오. 아가씨……." 무무는 어린 계집이 자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악약과 무무는 그렇게 오랜동안 서로 말을 터고 지낸 사이 같기도 했다. "무무, 당신들은 누구예요?" "저기서 흘러왔다가…… 저 곳으로 흘러가는 자들입니다." 무무가 웃었다. "어부가 말했소. 성인은 사물에 구애되지 않고 능히 세상과 더불어 추이(推移)한다. 세인이 모두 흐렸으면 어찌하여 그 진흙을 휘저어 그 물결과 같이 하지 않으며, 뭇사람이 모두 취했으면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먹는 것과 박주를 마시는 것을 마다하는가." 그는 굴평(屈平)의 어부사(漁父辭)를 단숨에 중얼거린 후 잠시 숨 을 멈추었다. "……깊이 생각하고 높이 행하여 스스로 추방당하려 하지 않음9이 우리의 삶입니다. 아가씨는 누구요?" 무무의 눈빛이 빛났다. "나는 이곳에도 있지 않고 저곳에도 있지 않는 사람입니다." 악약은 먼 하늘, 먼 산으로 시선을 던졌다. "쯔쯔…… 천인합일(天人合一)을 기다리는 분이군요. 어려운 일이 지요." "맞아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악약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 다. "무무, 부탁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어려운 부탁은 아니에요." 악약은 무무의 귓가에 대고 무엇인가를 말했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그렇게 하지요." 무무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에요. 나는 무무가 그 부탁을 들어 줄 수 있을지 조금 걱정 했거든요." "별로 좋아하는 일은 아니나 원하신다니…… 좋은 노래를 들려준 값이라 생각하십시오." 무무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 제3권에 계속 암왕 3 ☞ 차 례 ☜ ▶ 제18장 암가(暗家) ▶ 제19장 연희(演戱) ▶ 제20장 대전왕(大戰王) ▶ 제21장 동정호(洞定湖) ▶ 제22장 백운룡(白雲龍) ▶ 제23장 구전지단(九轉之丹) ▶ 제24장 천상제(天上祭) ☞ 일러두기 ☜ * eBook에서는 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 글자가 있으므로 빈 공간이 생 길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18장 암가(暗家) 땅! 땅! 따당! 바위에서 불꽃이 튀며 뾰족한 바위 한 귀퉁이가 귀두도(鬼頭刀)의 칼날에 떨어져 나갔다. 수척한 얼굴, 한 쪽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반 절 접힌 바지에 핏자국이 가득한 그는 바로 강서의 명두, 장호(張虎)였다. "정강(精剛)으로 만들어졌지. 아직도 칼날이 무뎌 지려면 멀었다." 그는 귀두도의 칼날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만 명 정도 목을 베면 칼날이 무뎌질까? 그 때까지 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그의 수척한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장호의 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큰 눈, 속여먹기 에 딱 좋을 것 같은 선량한 인상의 중년인은 절강의 명두, 오삼립(吳 三立)이었다. 그는 장창(長槍)을 건들거리며 연신 큰 눈을 깜박였다. 찢어진 마의, 그 사이로 엉켜 붙은 핏자국, 오삼립의 행색도 장호의 행색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놈이 우리를 보자고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인 것 같소?" 그가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크게 도와 줄 일이 있을 것이라 해서 나오긴 나왔는데…… 오 명 두까지 불렀을 줄은 몰랐어." "모태명은 전혀 믿을 놈이 되지 못 하오. 그런 놈인 줄 아는데 내 가 왜 이곳에 왔는지……." 오삼립의 안색이 흐려졌다. "왜 나왔기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이었겠지! 토끼처럼 몰 리다 어느 순간, 개죽음을 당할 판이니……." 장호의 외눈에 한광이 흘렀다. 그의 한 쪽 눈은 이름 모를 자에 의 해 이미 강호에 묻은 터였다. 형산파를 급습하는 것을 시발로 강남의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적들도 배교의 반격을 생각 못 했기 때문에 호호탕탕 적들을 밀어붙 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유향경천문, 무당파의 지원 아래, 형산파를 비롯한 강남의 군소방파들은 배교의 교군들을 하나하나 괴멸시켜 가고 있었다. "모태명은 이전부터 명옹을 만나려 한 것으로 알고 있소. 명옹께서 만나 주지 않으니 우리를 부른 것 아니겠소." 오삼립이 말했다. "유향경천문의 세가 날로 비대해 지고 있다. 장강의 이무기도 걱정 은 되었겠지. 유향경천문은 사대세가가 주축이고 사대세가는 구대문 파와 달라 강호의 이권(利權)을 모른 척 하지 않는 곳이니……." "그럼 장 명두께서는 모태명이 우리를 보자 한 이유를 유향경천문 과의 공동 대적을 위해서라 생각하시오?" "그 일 말고 다른 일이 있을까 생각 중이네. 하지만 그 일 말고 다 른 일은 없을 것 같더군." 장호가 칼배로 어깨를 안마하듯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만약 모태명이 정말 그 같은 제의를 한다면 장 명두께서는 그 제 의를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오삼립이 장창에 기대 머리를 숙이며 물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면 자네는 왜 이곳에 왔나!" 장호가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오삼립은 한숨을 쉬었다. "갑갑한 마음이라 만날 생각은 했지만…… 그 더러운 놈과 손을 잡 아야 한다니…… 내키지 않습니다." "흥! 배가 부르군!" 땅! 장호는 귀두도로 다시 바위를 쳤다. 바위에 굵은 도흔이 새겨 졌다. "이것 보게, 오 명두! 이제 나에게는 다른 꿈이 없네. 있다면 놈들 의 목을 하나라도 더 자르는 것뿐! 교도들의 목이 하나, 둘 싹둑싹둑 잘려 나가는 것을 보니 다른 생각은 없어지더군. 흐흐흐……." 장호가 메마른 웃음을 흘렸다. "명왕이시여……." 오삼립은 그 큰 눈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황사로 인해 하늘은 누런 색이었다. "쯔쯔! 아직도 명왕을 찾고 있다니…… 우리 강서의 교도들은 더 이상 명왕을 찾지 않지. 암왕……." 장호의 외눈이 흐릿하게 변해 갔다. 평상시라면 생각도 못할 말이 었다. 그러나 지금 처한 상황이 그와 같았다. 오삼립은 땅 속에 꽂힌 장창을 뺐다. "장 명두, 얼마 전 명사로부터 명옹의 전언이 왔소. 강서에는 전언 이 왔습니까?" "모르겠다. 비함(秘函)을 열어 본지도 오래되니…… 열어 볼 생각 도 없다. 명옹의 영을 어기고 교군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는 교의 죄 인이었지. 교의 죄인이 무슨 자격으로 명옹의 영을 받는단 말인가!" 장호가 냉랭하게 말했다. 비함은 명사가 명옹의 영을 던져 놓는 곳이다. "싸움을 당장 중지하라 하셨소. 그리고 무산대전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더군요." "싸움을 중지하라고? 어떻게…… 이미 쏘아진 화살! 멈추려 해도 멈출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후후……." 장호는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상황이니…… 하지만 무 산대전이 열릴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면 나는 무산에 가 볼 생각이 오. 장 명두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잘못을 비려면 살아 있을 때 비는 것이 좋겠지. 젊은 나이에 명옹 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맡긴 것도 미안한 일인데 폐까지 끼쳐 드리고 있으니…… 그래서 나는 가지 않을 작정이네. 이야기하지 않았나. 나 는 이미 교도가 아니라고.……." 장호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잘못을 비는 것도 비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우리들이 조급했던 것 같소." "이제 와서 또 무슨 말인가?" "신탄에서의 소문을 못 들었소?" "명옹께서 황하를 넘어간 일 말인가. 화혼진도 펼쳐졌다면서…… 통쾌한 일이야. 명옹의 칼에 쫓겨 우왕거리는 놈들의 꼬락서니를 곁 에서 지켜보았어야 하는 것인데…… 껄껄!" 장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 명두, 신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명옹께서는 이미 전교영기를 들기를 결심하신 것 아니오? 그렇지 않다면 적들의 목을 그토록 많이 원하실 리 없지." "흐흠……." 장호는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무산대전에서 교군들로 하여금 창과 칼을 높이 들게 명하실 게요." 오삼립의 눈빛이 빛났다. "우리 교에 갑자기 파천황(破天荒)의 힘이 생길 것도 아니고…… 명옹께서 전교영기를 높이 든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는 것 같은가? ……무산대전까지 살아 남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장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가슴이 답답한지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어쨌든 나는 무산대전에서 명옹께서 전교영기를 치켜드는 것을 보 고 싶소." 오삼립도 따라 일어섰다. "그렇게 될 수 있기를 바라겠네." 장호는 씁쓸하게 말하며 눈에 귀두도의 날을 맞추었다. 오삼립은 장창을 가볍게 휘두르며 뒷짐을 졌다. "너무 조용하군요." 오삼립이 말했다. "맞았어. 너무 조용해……." 적막한 산중이라도 새의 울음소리는 들릴 법한데 그마저 들리지 않 았다. 오삼립의 말에 장호도 문득 그 사실을 느꼈다. "설마……." 장호는 퍼뜩 오삼립을 바라보았다. 그는 적들의 포위망을 걱정했다 . 오삼립도 장호의 생각을 눈치 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경각심을 돋구며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저벅! 저벅!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오삼립은 팽팽한 긴장 속에 고개를 뺐다. "어이! 그곳에 계신 분들은 배교의 귀한 분들 아니시오?" 염소 수염의 중년인이 산길을 걸어오며 손을 들었다. "저 놈이 바로 용을 집어삼킨다는 괴물, 흡룡곤 모태명인가. 생각 보다 젊군." 장호는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염소 수염의 중년인은 장호 등과 십 여장 떨어진 곳에서 우뚝 발걸 음을 멈추었다. 그는 모태명이 아니었다. "나는 흑룡방의 비서각주로 있는 성렴이라는 자외다. 강서와 절강 에서 오신 분들이지요. 따라 오시오. 방주께서는 저곳에서 기다리고 계시오." 성렴이라는 자가 염소 수염을 매만지며 손짓을 했다. 장호와 오삼립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성렴이라는 자의 뒤를 따랐다. 성렴은 일 각 쯤 걸어 촘촘한 수풀 속 작은 공터가 있는 곳에서 발 길을 멈추었다. "보아하니 두 분 모두 홀홀 단신으로 오셨군." 성렴이 히죽거리며 등을 돌렸다. "애석한 일이야."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턱을 매만졌다. "무엇이 애석하다는 말이오?" 오삼립이 물었다. "너희 둘만 사로잡게 되었으니 하는 말이다!" 성렴은 돌연 표정을 바꾸며 음산하게 소리쳤다. "뭣?" 오삼립은 성렴의 너무도 어이없는 말에 놀라 황급히 장호를 바라보 았다. '결국 경솔한 판단이었나…….' 장호는 외눈을 질끈 감았다. "천하가 배교를 처치하기 위해 벌떼처럼 일어났는데 우리 흑룡방이 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우리 흑룡방도 강호의 녹을 먹는 처지니 그만한 일을 해야 하지 않겠나. 낄낄낄!" 성렴은 음산하게 웃었다. "그럼 모태명이 우리를 부른 이유는……." "낄낄낄! 무슨 좋은 일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나? 궁수(弓手 )!" 짝짝! 성렴은 손뼉을 쳤다. 갑자기 수풀이 우수수 움직이며 철태궁(鐵胎弓)을 든 오륙 십 명의 흑의 무사들이 일어났다. 그들은 시위를 일제히 장호와 오삼립을 향 해 돌렸다. "모태명은 어디 있느냐?" 오삼립이 큰 눈 가득 분노를 담고 소리쳤다. "방주는 조금 후면 볼 수 있을 것이다. 목과 몸뚱이가 따로 분리된 채 방주를 볼 지 몸뚱이에 목을 붙인 채 방주를 볼 지는 네놈들이 결정하라!" 성렴은 고함을 지르며 뒤의 수하에게 눈짓을 했다. 네 명의 수하가 포승을 들고 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 이…… 찢어 죽일!" 오삼립은 이를 갈며 장창을 들었다. 장호가 조용히 그의 팔을 잡았다. "오 명두는 참아라. 저놈들을 상대하는데 두 명이나 나설 필요는 없지." 그가 잔잔히 말하며 몇 발걸음 걸어나갔다. 그리고 그는 품 속을 뒤져 주먹만한 크기의 단환(丹丸)을 꺼냈다. "이것을 언제 쓰게 될 것인가 늘 궁금했지. 유향경천문의 문주라는 놈, 아니면 최소한 당주 급의 인물에게 사용되리라 믿었었다. 그런 데 모태명의 수족들에게라…… 조금 억울한 느낌도 드는군." 장호는 허허롭게 웃었다. 그도 오삼립도 빗발치듯 쏟아질 철태궁의 활촉을 피할 재간은 없었다. "오 명두, 무산에 가시게. 가서 명옹 앞에 나의 잘못도 같이 빌어 주게나. 자네는 끝까지 살아 성녀와 명옹도 잘 모시고……." 장호는 어깨를 폈다. 그가 성렴을 똑바로 마주보고 섰다. 그 사이 포승을 든 모태명의 수하들은 지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우리 배교는 네놈들이 상상도 못할 사괴(邪怪)한 물건들이 많지. 즉멸화(卽滅花)라고 들어보았는가? 화혼진 만큼 재미있는 것이다." 장호가 성렴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말했다. 성렴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오삼립의 안색은 급변했다. "장 명두!" 오삼립이 황급히 달려가며 장호의 손에 든 물건을 뺏으려 들 때였 다. 장호는 이미 불을 붙인 후 푸른 불꽃으로 이글거리는 단환을 꿀 꺽 삼키고 있었다. 그는 속에서 불덩이가 타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 러뜨렸다. "오 명두는 가라!" 그가 고함을 지르며 비호처럼 뛰었다. 허공에서 귀두도가 번뜩였다 . "크악!" "악!" 포승을 들고 오던 모태명의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장 호는 단순간에 네 명의 적을 처치한 후 재차 도약했다. 장호의 흉흉한 기색에 놀란 성렴은 급히 등을 돌렸다. "쏴라!" 그가 꼬리를 빼며 소리쳤다. 피핑! 핑! 철태궁이 파공음을 내며 장호의 몸을 향해 빗발치듯 쏟 아졌다. 장호는 허공 중에서 귀두도를 섬전처럼 휘두르며 화살에 맞 섰다. 오삼립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미 장호의 목숨을 돌이킬 수 없었다 . 장호의 말대로 개죽음을 피하는 길만이 유일하게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방도였다. 철태궁에 다시 화살이 매겨 지려면 약간의 시간이 필 요하다. 오삼립은 그 사이 달아나야 했다. 휙! 오삼립은 이를 악물고 신형을 날렸다. 퍽! 퍽! 퍽! 둔중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화살이 장호의 육신을 탐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장호는 화살에 꿰인 새처럼 허공 중에서 풀썩 떨어졌다. 귀두도로 심장이 꿰이는 것은 막아낼 수 있었으나 다른 곳은 엉망이었다. 마치 그의 몸은 짚단으로 만든 과녁처럼 너덜너덜했다. 장호는 그래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배교천하(拜敎天下)!" 그가 목청이 찢어져라 고함을 지르며 다시 성렴을 향해 달려들었다 . 오삼립을 향해 시위를 당기던 모태명의 수하들은 황급히 장호를 향 해 방향을 바꾸었다. 피핑! 핑! 화살이 날며 이번에는 장호도 고슴도치 신세가 되는 것 을 면치 못했다. 성렴과 일 장여 떨어진 곳이었다. "핫하하!" 장호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일갈(一喝)이었다. 그가 전신에 피를 흘리며 서서히 쓰러졌다. 그의 몸에 진동이 일어나 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그와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장호의 몸이 폭발했다. 육편과 함께 찬연하게 피어오르는 피! 그것은 정말 평생에 한 번 볼까 말까한 꽃이었다. 그 꽃은 모태명의 수하들에게는 죽음의 꽃이 었다. 육편의 꽃잎은 비산하며 모태명의 수하들을 쓸었다. 육편과 함 께 장호의 몸에 꽂혀 있던 화살들도 날았다. "크악!" "으악!" 모태명의 수하들이 비명을 질렀다. 가까이 있던 성렴은 즉사를 면 치 못했고 삼사 장 내에 있던 수하들도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장호의 육편은 멀리까지 날았다. 그 중 한 조각은 달려가는 오삼립 의 눈앞에도 떨어졌다. 찢겨진 손가락 한 토막이었다. 오삼립은 그 손가락은 꽉 쥐었다. 피가 역류했다. 그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오삼립은 등을 돌리며 장창을 세웠다. "으하하! 죽어라!" 그가 악귀와 같은 얼굴로 모태명의 수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피핑! 핑! 화살이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지독한 놈들이군." 모태명은 오삼립의 시신을 발로 툭 찼다. 오삼립의 몸은 더 이상 화살이 박힐 틈도 없었다. 그는 그런 몸으로 모태명의 수하들을 반이 나 죽인 터였다. "목을 베어라." 그가 곁에 있는 민대머리 중년인에게 말했다. 민대머리는 흑룡방의 외당당주를 맡고 있는 동태진(董太眞)이라는 자였다. 동태진은 채양도(蔡陽刀)로 오삼립을 목을 내리쳤다. 목뼈 부러지 는 소리와 함께 오삼립의 목은 몸뚱이에서 떨어졌다. "방주, 저는 알 수 없습니다." 동태진이 오삼립의 목을 주워 들며 말했다. 앉아서 구경이나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배교를 적으로 만드냐는 뜻이었다. "사로잡았어야 좋았는데. 그래야 놈들의 주리를 틀어 강서와 절강 의 배교 놈들을 줄줄이 처치하기 쉬웠을 것이다. 마옹이라는 놈의 행 적도 물어 볼 수 있었고……." 모태명은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 목을 유향경천문에 충성의 서약으로 바쳐라. 그리고 네놈은 이 곳에 남아 배교도들을 쓸어버리는데 일조한다." "유향경천문? 방주!" 동태진은 너무 놀라 멍한 눈빛으로 모태명을 바라보았다. 득될 것 없이 배교에 시비를 건 일도 놀라운데 유향경천문에 충성 을 서약하고 오라니……. "네 놈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모태명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알겠습니다." 동태진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주작당주, 언상영이라는 자가 네놈을 맞을 것이다. 흑룡방의 처사 에 대해 궁금해하면 조만간 내가 찾아갈 것이라 전해라. 가라!" 모태명은 손을 저었다. 동태진은 읍을 한 후 수하들을 향해 손을 들었다. 그가 한 무리의 수하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모태명은 비릿한 피 냄새와 육편이 너저분하게 깔린 자리를 천천히 거닐었다. '진호경! 살막의 막주…… 그리고 지금은 흑막을 이끌고 있다. 성 녀라는 계집을 인질로 삼아 배교의 놈들에게 나의 목을 가져오라 협 박했다고? 곽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후후후! 개가 웃을 일이 지. 나는 놈을 안다!' 그의 눈빛이 빛났다. 단혈철각련의 총노, 갈인후가 퍼뜨린 소문은 잘 그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놈은 절대 의리를 찾을 놈은 아니다.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움직 였겠지…… 곽부…….' 모태명은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그렇지. 곽부는 살아 있었어. 마괴파의 비밀도 알고 있었고……. 때문에 배교라는 남의 칼을 빌려 나의 목을 치려 했겠지. 하지만 내 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은가.' 그는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조금 더 지켜보겠다. 만약 내 추측이 맞다면…… 곽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살아남기 위해 유향경천문의 개를 자처 자네를 향해 짖을 것이다.' 모태명은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그나저나 안됐군.' 그가 육편과 핏자국으로 너저분한 장내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곽부의 고래 싸움으로 배교 놈들이 새우등 터지게 생겼으니 …… 그것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약한 자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이 없다!' 모태명은 장호의 것으로 짐작되는 검붉은 육편을 송충이를 밟듯 발 로 비볐다. * * * 쨍그랑! 술병이 주루의 벽에 부딪히며 산산이 조각났다. 쾅! 우지끈! 식탁도 반 절로 동강나며 음식물이 튀었다. "무슨 짓이냐?" 점소이들이 달려들었고 주방에서는 칼을 든 숙수도 눈을 부라리며 뛰어나왔다. "호로 자식이로고!" 까닭 없이 음식 찌꺼기와 술 세례를 받아야 했던 주루의 객들도 한 마디씩 욕을 퍼부었다. 만약 난동을 피웠던 자가 주먹만한 자였다면 먼저 주먹을 앞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자의 덩치는 너 무 컸다. 딱 벌어진 어깨, 문설주 같은 두 다리, 무엇보다 위압적인 것은 부 리부리한 눈에 곤륜노처럼 시커먼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대월까지 들었으니……. 꼭 양산박(梁山泊)의 대살성 흑선풍을 연상시키는 자였다. "헤헤헤! 개에게 주는 음식도 이것보다는 낫겠어." 우당탕! 떠받는 소 같이 눈을 치켜 뜨며 동강난 탁자를 발로 걷어 차는 자는 바로 전우삼이었다. "이런 미친 놈! 맛이 없어서 술은 여섯 병, 안주는 다섯 접시나 해 치웠느냐! 돈이 없다면 돈이 없다고 할 것이지!" 점소이 하나가 냅다 전우삼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헤헤헤……." 전우삼은 가볍게 점소이의 팔을 잡았다. 그가 점소이의 멱살을 잡 고 허공 중에 들었다. "아이고! 놓아! 놓아라!" 점소이는 다리를 바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헤헤헤! 맞아. 나는 지금 돈이 없다." 전우삼은 그를 개구리처럼 내동댕이쳤다. 우당탕탕! 점소이가 식탁 을 나뒹굴며 주루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처음 보는 놈 같은데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이번에는 숙수가 칼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귀찮아!" 전우삼은 주먹을 툭 뻗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숙수는 코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그가 고개를 푹 꺾으며 쓰러졌다. "네놈들도 볼일이 있어?" 전우삼은 와락 고함을 질렀다. 쾅! 그가 대월을 들었다. 그의 곁에 서 있던 점소이들의 낯빛이 창 백해졌다. 전우삼이 대월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자 그들은 대경실색( 大驚失色) 황충(蝗蟲)처럼 후다닥 뛰었다. 전우삼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시선을 한 바퀴 돌렸다. 주루에서 술을 마시던 자들이 전부 목을 자라처럼 움츠렸다. '아이고! 생긴 것처럼 무지막지한 놈이구나. 잘 못하면 큰 봉변을 당하겠군. 저 도끼 좀 봐!' 주루에 있던 객들이 엉금거리며 출구를 찾았다. 전우삼은 성큼 회계대를 향해 걸어갔다. "헤헤헤…… 얼마야?" 회계대에 앉은 자는 주인이었다. "어…… 얼마라니요? 대…… 대협 같은 분이 왕림해 주신 것만 해 도 고…… 고마운 일인데." 주인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에헤헤! 헤헤헤헤…… 왕림해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라고? 그 럼 술이나 좀더 주시오." 전우삼은 자신의 체구에 딱 어울리는 큼직한 호로병을 회계대에 올 렸다. "뭐…… 뭣들 하느냐! 대…… 대협께서 수…… 술을 원하신다!" 주인이 고함을 질렀다. - 강남은 연을 따기 좋은 곳이네. 연잎이 어찌나 무성한지, 물고기들이 그 사이를 노니네. 물고기 연잎의 동쪽에서 헤엄치네. 물고기 연잎의 서쪽에서 헤엄치네. 물고기 연잎의 남쪽에서 헤엄치네. 물고기 연잎의 북쪽에서 헤엄치네. '또 없나?' 전우삼은 호로병의 술을 콸콸 들이켰다. 근자에 술맛을 알게 된 전 우삼이었다. "물고기 연잎의 서남(西南)에서 헤엄치네. 물고기 연잎의 북서(北 西)에서 헤엄치네. 물고기 연잎의 동북(東北)에서 헤엄치네." 그는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불렀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노래에 싫증이 났다. "재미없군." 전우삼은 길에 우뚝 섰다. '헤헤헤…… 나는 파락호다. 화정이 나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 그는 길가에 풀썩 주저앉았다. '화정, 보고 싶다. 당랍산까지 가는 길이 너무 멀구나.' 전우삼은 신발을 벗었다. 산서를 떠나올 때만 해도 탈명의 유물을 찾아 한 달음에 당랍산에 도착할 듯했다. 하지만 시일이 지날수록 당 랍산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아무래도 진금구의 말 이 맞는 듯했다. 몇 백 년의 세월이 흘렀다. 탈명의 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지 아무리 생각해도 의문이었다. 탈명이 유물을 남겼으리라는 보장도 없 었다. '우삼, 너는 정말 앞뒤라고는 모르는 바보구나. 조금 더 생각을 했 어야지.' 전우삼은 자신의 머리를 주먹으로 쿵쿵 쳤다. 명두가 없는 산서의 일도 걱정이고 화영도 정말 보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었다. 눈물까지 뿌리며 산서를 떠나왔는데 빈손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체 면이 서지 않았다. 당랍산으로 갈수록 탈명의 유물은 오히려 멀어지는 것 같고 그렇다 고 내친 발걸음을 돌릴 수도 없고……. 전우삼의 마음이 천 근 같이 무거운 이유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주위에 행패도 부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마음은 더욱 짜증스러 워져 갔다. '오늘은 또 어디에서 눈을 붙이나.' 전우삼은 신발을 신었다. 그가 호로병의 술을 홀짝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별들이 총 총한 밤이었다. 서두를 일도 없으니 전우삼은 어슬렁거리며 밤길을 걸었다. 반 마 장쯤 걸어갔을 때였다. 한적한 길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전우삼은 눈살을 찌푸렸다. 새파란 애송이였다. 그 애송이도 자신과 같이 호로병으로 개나발을 불고 있었다. 전우삼은 문득 동질감을 느꼈다. 맞은 편을 걸어오는 저 애송이를 상대로 밤의 적적함을 잊을까라고 생각도 했다. 그러나 막상 애송이 가 눈앞에 다가오자 그의 생각은 달라졌다. 전우삼의 두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그는 일부러 취한 척 하며 지 척으로 다가서는 애송이에게 어깨를 세차게 부딪혀 갔다. 애송이는 피하지 않았다. 쿵! 바위가 부딪히듯 두 개의 어깨가 부딪혔다. 전우삼은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땅바닥을 나뒹굴 줄 알았던 애송 이는 어깨만 건들할 뿐이었다. 전우삼을 바라보는 애송이의 눈빛도 조금 놀란 눈빛이었다. 두 눈 에 총총하던 술기운이 어느 정도 사라지는 듯했다. "눈알을 발바닥에 달고 다니는 게야!" 전우삼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놈이야말로 눈알을 엉덩이에 달고 다니는 모양이군. 너 같은 잡 놈을 상대로 취흥을 풀려고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비켜라!" 애송이도 만만찮게 소리쳤다. "잡놈? 어디 잡놈의 맛 좀 봐라!" 전우삼은 두 말 않고 대월을 들었다. 그가 살기를 뿜으며 대월을 휘둘렀다. 술 취한 자 답지 않게 애송이의 몸도 빨랐다. 그는 순간적인 발검( 拔劍)으로 전우삼의 대월을 막았다. "잡놈치고는 어디서 몇 수 배운 놈이구나!" 애송이가 고함을 지르며 칼끝을 날카롭게 놀렸다. 챙! 챙! 챙! 때아닌 시간, 때아닌 장소에서 칼부림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전우 삼도 애송이도 칼을 뻗어 가는 자세가 심드렁했다. 그러나 몇 합을 주고받은 후 그들은 대월과 장검의 무게를 달리했다. 애송이는 전우 삼의 도끼 한 방에 두개골(頭蓋骨)이 조각날 자가 아니었다. 전우삼 은 밤중에 취객들의 주머니나 노리는 파락호가 아니었다. '이것 봐라!' 도끼와 장검을 놀리며 그들은 서로의 무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확인 했다. "네놈은 무슨 이유로 나에게 시비를 건 것이냐?" 애송이가 검풍(劍風)을 세 갈래로 날리며 물었다. "네놈의 골을 쪼개 뇌수를 파먹기 위해서지!" 전우삼이 도끼로 장검을 막아내며 소리쳤다. "나를 죽이겠다고? 사람을 잘 못 본 것이 아니냐!" 애송이는 전우삼이 생면부지였다. 강호에 출도한지도 얼마 되지 않 았기 때문에 특별히 원한을 맺은 일도 없었다. 있다면……. "화산파! 헤헤헤……. 네놈은 죽어 나를 원망하지 말고 네놈이 입 고 있던 도복을 원망해라." 전우삼의 도끼질이 더욱 우악스러워졌다. '사문과 혈채가 있는 놈이었군. 그렇다면 더 이상 손에 사정을 봐 줄 필요가 없지.' 애송이의 눈빛이 냉랭하게 빛났다. 그는 바로 화산파의 제자였다. 장문천! "알고 보니 흑산이나 하오문의 무리였군. 본 문을 상대로 복수 운 운하는 것을 보니……." 장문천이 풍운취기(風雲取起)로 전우삼을 몰아치며 냉랭하게 말했 다. "하오문? 화산파야 말로 거지나 도둑, 창녀의 자식들이 줄줄이 모 여 이룬 문파지. 헤헤헤…… 본좌의 문파는 네놈이 듣기에도 거룩한 배교이시다!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 천하의 모든 잡종들이 떼거지로 달려들어도 꿈쩍 않는 곳이지!" 전우삼도 식골단근(蝕骨斷筋)이라는 험악한 수법을 펼치며 소리쳤 다. '배교? 배교…….' "배교! 마교의 무리였군!" 장문천의 두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그는 크게 전우삼을 두 번 공 격한 후 검을 급히 회수했다. 그가 검에 살기를 담았다. 휘휙! 휙! 검광이 번뜩하는 가운데 장문천의 검이 난파풍(難破風)의 기세로 전우삼을 휘몰아쳐 갔다. 사정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는 독날한 출 수였다. 전우삼은 장문천의 흉맹한 공격에 허우적댔다. 보법도 어지러웠고 부법(斧法)도 어지러웠다. 잠깐 사이에 장검에 피를 뿌릴 것 같았으 나 전우삼도 주화청으로부터 몇 수 배운 바는 있었다. 그리고 그는 힘에 있어서는 아직 장문천과 비교 한 수 위였다. 쨍! 쨍! 쨍! 전우삼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자 이번에는 장문천 이 비틀거렸다. 장문천도 대월에 피를 뿌릴 것 같았으나 화산파의 현 묘한 보법인 청운신법(靑雲身法)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들이 다시 살기등등한 기세로 부딪혔다.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 전우삼은 장문천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고 장문천은 전우삼이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 그들은 장점으로 상대를 공격하고 상대의 단점으로 자신을 수비했 기 때문에 승부는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정확히 실력을 논하면 아무래도 장문천의 실력이 전우삼의 실력보 다 나았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장문천의 검은 왠지 조급한 감이 있 었다. 쨍! 쨍! 쨍! 전우삼과 장문천이 뒤돌아볼 틈도 없이 삽시간에 수십 초를 주고받 았을 때였다. "어린놈들의 손속이 너무 흉흉하군!" 어둠 속에서 창노한 음성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휙! 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장문천은 '어!'하며 주춤 물러났다. 방금까지 싸우던 배교의 시커먼 놈이 없었다. 장문천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어둠뿐! 귀신 에 홀린 기분이었다. '배교 놈들은 요사한 술법을 잘 구사한다던데…… 배교의 환술인가 .' 그는 검을 세운 채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이 각 가량을 그는 그런 자세로 움직였다. 그러나 인기척이라고는 찾을 길이 없었다. 눈앞의 지형은 은신술을 펼치기에도 적당한 지형이 아니었다. 드문드문한 길가의 몇 그루 나무가 전부였다. '강호에는 남의 일을 간섭하기 좋아하는 기인들도 많다고 했으니… ….' 스르릉! 장문천을 검을 꽂았다. 배교 놈의 실력은 하등 자신 보다 나은 것이 없었으므로 환술로 이 각 이상 자신의 눈을 속일 수도 없 다고 생각했다. 꿀꺽! 장문천은 호로병의 술을 들이켰다. 신경질이 다시 솟구쳤다. '더벅머리 배교의 잡놈 하나 처치 못하고…….' 그가 이를 악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자신의 검을 뚝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문에서 내린 검이라 장문천은 검을 부러뜨리고 싶 은 충동을 용케 참았다. 꿀꺽! 꿀꺽! 장문천은 호로병의 술을 입으로 냅다 부었다. 주루에 서 다시 한 잔을 더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휘휙! 휙! 주위의 지형들이 쏜살 같이 스쳐 갔다. 전우삼은 코끝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붉은 수염이 간들거 리며 그의 코끝을 간질이고 있었다. 코를 훔치고 싶었으나 마혈이 찍 혔는지 몸은 통나무와 같았다. "엣취!" 전우삼은 마침내 재채기를 했다. "영감, 영감! 나를 구워 먹을지 삶아 먹을지는 영감 마음이겠지만 제발 그 지저분한 수염은 좀 치워 주시오! 헤헤헤…… 콧물이 졸졸 흐르는 고기는 염감이 먹기에도 좋지 않을 걸!" 그가 괴노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붉은 수염의 노인은 아 무 소리 않았다. 그는 바람 소리를 내며 휙! 휙! 달릴 뿐이었다. 한 마장쯤 달려간 후에야 노인은 발길을 멈추었다. 그가 대월과 함 께 전우삼을 내던졌다. "아이구!" 전우삼은 땅바닥을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조심해, 조심하라구! 보기 보다 나는 살이 무르다고!" 그가 도끼눈으로 소리쳤다. "너를 가르친 자는 낙법(落法)도 가르치지 않고 신법을 가르쳤나 보구나." 붉은 수염의 노인이 말했다. "떨어지는 법이야 천근추도 배웠고 구르는 법이야 가르쳐 주는 자 가 없어도 나귀한테 이미 배웠지. 하지만 영감이 혈도를 찍었는데 내 가 무슨 재주로…… 어!" 전우삼은 어깨를 만지고 있는 자신의 팔을 확인했다. "혈도를 풀었다면 풀었다고 이야기를 했어야지! 헤헤헤…… 영감, 고맙소. 에잇!" 전우삼은 옷을 터는 척 하다가 냅다 노인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뻗 었다. 하지만 노인은 너무도 쉽게 전우삼의 완맥을 제압했다. 노인이 내경을 쏟자 전우삼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 며 입을 딱 벌렸다. "언젠가 이정인에게 들었지. 배교의 명두들 중에는 그럴듯한 무공 을 가진 자가 꽤 많은데 그중 하나가 비류참도(飛流斬刀)였을 것이다 . 몇 가지 간단한 투로까지 보여주더군. 간명하고 군더더기가 없어 감탄한 적이 있었다. 산서 명두, 주화청의 도법이라 했었지." 노인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노인의 말에 전우삼의 안색이 변했다. "네놈의 부법을 보아하니 비류참도의 냄새가 다분한데 산서의 배교 도인가?" 노인이 물었다. 화산의 애송이와 싸우는 자신을 단숨에 제압해 달릴 때부터 전우삼 은 눈앞의 노인이 풍진 기인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자신의 문로(門路 )까지 단숨에 맞출 줄은 전혀 생각도 못했었다. "영감은 누구요?" 그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되물었다. 노인은 전우삼을 가만히 바라보며 붉은 수염을 쓸었다. '붉은 수염, 붉은 수염…… 다 찌그러진 늙은이가 멋을 내기 위해 수염을 물들였을 리는 없고…… 앗!' 전우삼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이마를 쳤다. 주 명두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영감은 적염날수였군. 전대 명옹과 절친한 사이였다는!" 그가 박수를 쳤다. 우연한 곳에서 배교와 연분이 있는 기인을 만나 놀랍기도 했고 적은 아니라는 생각에 안심이 되기도 했다. "주화청의 식솔이 맞는 모양이군." 붉은 수염의 노인이 말했다. 그는 적염날수, 철중달이 맞았다. 원 상과 헤어진 후 백운장으로 돌아가다 우연히 장문천과 싸우고 있던 전우삼을 발견한 것이다. "맞소. 주 명두는 나를 키워 준 분이오. 그러니 당신은 함부로 주 명두의 이름을 말하지 마시오. 주 대인, 주 대협, 주 형님 같은 좋은 호칭도 많이 있지 않소. 당신의 친구였다는 전임 명두께서도 주 명 두의 함자는 함부로 입에 올리지 않았소." 전우삼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껄껄껄! 미안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산서의 배교놈이 이곳에는 웬 일이냐? 산서는 여기서 멀다." "주 명두도 죽었는데 그곳에 내가 있을 이유가 무엇이오? 산서는 정말 정이 가지 않는 곳이야." 전우삼은 볼멘 소리로 대월을 들었다. 주화청이 떠오르자 그의 기 분은 다시 찹찹했다. "주화청도 죽고 산서 배교도들을 향하는 칼끝은 하루가 다르게 매 서워 지니 새외로 도망을 치는 중이었군." "뭐라고? 누가 어디를 도망간단 말이야? 배교와 연분이 있는 영감 이라 좋게 봐주려 했더니……." 전우삼은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냈다. "그럼 네놈이 여기까지 온 이유는 무엇이냐?" "헤헤헤…… 네놈, 네놈 하지 마라구! 나는 영감의 네놈이 아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내 발이 원해서였지." "내 발이 달아나기를 원했던 모양이구나." 철중달은 전우삼의 비위를 긁기로 작정한 듯했다. "헤헤헤…… 입에 노망이 들었군!" 전우삼은 휙 등을 돌렸다. "원래 배교놈들은 사악한 놈들이라 의리보다는 항상 자신의 처지를 앞세우지." 철중달이 중얼거렸다. 전우삼은 고개를 돌렸다. "헤헤헤……." 그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죽어라!" 전우삼은 앞뒤 가리지 않고 대월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대월은 순식간에 철중달의 손으로 넘어가 있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이유는 영감 같이 입이 찢어진 모든 놈들을 때 려죽이기 위해서다!" 전우삼은 더욱 악을 쓰며 적수공권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의 팔, 다리도 곧 철중달에 제압 당했다. "껄껄껄! 개 한 마리도 때려죽일 힘도 없는 놈이 누구를 때려죽이 겠다고……." 철중달은 조소를 흘렸다. 전우삼은 눈에 불똥이 튀었다. "탈명마효의 무공을 손에 넣기만 하면……. 헤헤헤…… 영감, 그때 도 그런 소리를 하는가 보겠다!" 그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터지며 피가 주 르르 흘렀다. "탈명마효……." 철중달의 눈빛이 변했다. "탈명의 무공을 찾고 있었나 보군. 어리석은 놈! 탈명이 사라진 지 가 언젠데.……." "헤헤헤, 배교의 영혼들은 죽지 않아. 당랍산의 어디에서 그분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전우삼이 소리쳤다. 철중달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나는 배교에 대해 참견도 간섭도 하지 않았다. 이정인이 친구라는 이유도 조금 있었지. 하지만 참견을 할 때도 있다. 나백과 탈명을 찾는 배교놈들에 대해서…… 네놈은 탈명의 유물을 찾지 못할 것이다 . 그러나 탈명의 유물을 찾지 못 하더라도 다른 어떤 무공은 익힐 것 같다. 대살성이 되어 돌아오겠지. 한동안 강호는 네놈이 뿌리는 피 로 소란할 것이다." "헤헤헤, 잘도 아는군!" 전우삼은 한광을 쏟으며 철중달에 대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배교도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두 종류의 사람뿐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친구냐, 적이냐…… 전임 명옹의 친구였다는 철중달이 그 사 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철중달이 냉랭하게 말했다. "헤헤헤헤!" 전우삼은 배를 내밀며 실눈으로 웃었다. 철중달은 손을 들었다. 그가 전우삼의 정수리를 눌러 갔다. "헤헤헤, 헤헤헤헤!" 전우삼은 곧 뇌수를 뿌리며 쓰러질 판인데도 눈을 똑바로 뜬 채 여 전히 웃고 있었다. 철중달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날수(捺手)를 거두었다. 죽이려 했 으면 구구한 말을 늘여 놓기 전에 벌써 죽였을 것이다. 입이 심심해 서 애송이를 상대로 말장난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으니……. 철중달은 전우삼을 다시 찬찬히 살폈다. 역시 그의 눈은 틀리지 않 았다. 그가 화산파의 애송이와 싸우는데 끼여들고 구구한 말을 늘여 놓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눈 없는 자가 더 잘 본다더니 사람을 보는 눈은 주화청이 나았다. 전우삼은 보기 드문 무골(武骨)이었다. 욕심이 났다. 등중용이라는 원상이 키우는 아이를 본 후로는 전인에 대한 욕심이 더했다. 그래서 그는 전우삼을 보자마자 전인으로 퍼뜩 생각했었다. 철중달은 명강강에 대해서는 이정인과의 의리 때문에 전인으로 삼 으려 했다. 이정인이 특별한 기운 운운했지만 철중달은 명강량에게서 그 특별한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뼈 깎는 고초를 겪으면 일 류(一流)의 반열에 들 수 있을 정도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전우삼은 달랐다. 탈명마효의 무공을 찾지 못하더라도 대살성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 는 자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기인은 새외에도 황하의 모래알처 럼 많다. 눈이 있는 자라면 전우삼을 제자로 삼으려 할 것이다. 몇 가지의 비공은 익힌다고 보아야 했다. 이정인의 말이 맞았다. 어느 때보다 배교에 인재가 많이 들어왔다 더니……. 어쨌든 그 정도로 전우삼의 자질은 출중했다. 전인으로 삼겠다는 욕심도 그만큼 컸다. 그러나 철중달의 고민은 명강량과 마찬가지로 전우삼이 배교도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몇 가지 말로 전우삼의 마음 을 떠보았다. 명강량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전우삼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배교 와의 의리를 찾을 놈을 분명했다. 철중달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죽이던가 아니면 예측할 수 없는 뒷 일을 무시한 채 전인으로 받아들이던가……. 철중달은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눈을 떴다. 결정 은 내려졌다. "너는 나를 따라 가야 한다." 결국 철중달은 전우삼을 전인으로 삼기를 결정했다. 철중달이 생각하건대 배교는 길게 잡아도 일 년을 더 버티지 못할 듯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배교가 사라진 후면 전 우삼의 마음도 달라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사람의 마음이야…… 철중달은 그동안 배교에 대 한 전우삼의 마음도 바뀌리라 확신했다. "이정인은 나의 오랜 친구였다. 학문에도 뛰어났지. 그런데 어느 날, 배교의 보권을 보고 마음을 뺏겨 버린 게야. 처음 이정인이 나에 게 배교를 논할 때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지금 일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무척 후회가 되는구나. 그때 이정인의 손에서 보권을 뺏어야 했는데…… 너도 아직 늦지는 않았다. 나를 따라 백운 장으로 가자." 그가 전우삼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헤헹, 누구 마음대로……." 전우삼은 코방귀를 뀌었다. "나백과 탈명의 무공이 있기를 바라겠지. 하지만 그것은 있기를 바 라는 네 마음뿐! 나백과 탈명의 무공은 없다." 철중달은 냉랭하게 말하며 전우삼의 허리를 잡았다. 들쳐 매고 백 운장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헤헤헤, 영감, 나를 데려가고 싶으면 데려 가라구. 하지만 나는 왜 영감이 그 같은 고초를 자처하는지 모르겠다. 밤중에 먼저 영감의 그 붉은 수염부터 싹둑 잘라 주지! 다음에는 목이다!" 전우삼은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고 철중달은 전우삼을 껴안았다. 철중달이 신형을 날리려 할 때였다. "철중달, 누가 나백과 탈명의 무공이 없다고 하더냐? 마치 본 것처 럼 이야기하는군." 한가한 목소리였다. "그 아이를 내려놓아라. 건방진 놈! 감히 배교의 아이를 상대로 자 신의 무공을 자랑하다니…… 철중달, 네놈의 무공 따위는 배교의 개 들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얼음 같이 차가운 깊은 저음(低音)이었다. 철중달은 급히 주위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 속에 두 개의 그림자가 느릿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철중달은 등골이 오싹했다. 두 개의 인영과 철중달과의 거리는 오 륙 장여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철중달은 상대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었다. 천하에 누가 있어 그토록 지척에 오기까지 적염날수, 철중달의 이 목을 속일 수 있을 것인가? 두 명의 노인이었다. 대춧빛 붉은 얼굴에 관후한 인상, 홍안(紅顔)과 하얗게 늘어뜨린 수염이 어우러져 우측 노인은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도인을 연상시켰 다. 입고 있는 옷도 학처럼 우아한 백의였다. 그의 곁에 선 노인의 기도는 홍안 노인의 기도와 반대였다. 깡마른 체구에 평생 웃음이라고는 달고 다니지 않았을 것 같은 엄격한 표정 이었다. 그는 흑의를 입고 있었다. 우측의 백의 노인이 도인을 연상시킨다면 좌측의 흑의 노인은 평생 성(誠), 경(敬)으로 수일(守一)해 온 엄격한 유가(儒家)의 학덕(學 德)을 연상시켰다. 그 기도와 더불어 철중달이 또 달리 느낀 것은 위압적인 힘이었다. 그것은 도인이나 학자에게서 느낄 수 있는 지덕(知德)의 힘이 아닌 패도적인 힘이었다. 가슴을 짓누를 정도로 도도하게 밀려오는 기파… …. "그 아이를 내려놓아라." 흑의 노인이 싸늘하게 말했다. 철중달은 붉은 수염을 쓸었다. 철중달이라는 이름을 몰랐으면 모르 겠지만 눈앞의 노인들은 자신의 이름까지 불렀었다. 그러나 그 노인 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한참 아래의 후학을 다루는 듯했다. 전, 전대 고인쯤 되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는 적염날수다 . 백 년 내 강호의 최대 고수를 뽑는다면 그는 당연히 열 손가락 안 에 들어갈 것이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철중달은 전우삼을 풀어주었다. 흑의 노인의 명 때문이 아니라 어 린것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사나웠기 때문이다. "너는 우리가 누구인지 물을 자격이 없다!" 흑의 노인은 처음부터 철중달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말이 너무 거칠군." 철중달이 수염을 쓸며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손발이 바빠질 것 같았다. "너는 이리 오너라." 백의 노인은 전우삼을 불렀다. 전우삼은 철중달과 두 노인을 번갈 아 보며 멍하게만 서 있었다. "현제(賢弟), 철중달이라는 저 늙은이가 아무래도 저 아이의 혼을 빼 놓은 것 같군. 자네가 데려오게." 백의 노인이 말했다. "너는 이리 오지 않고 무엇을 하는 게냐!" 흑의 노인은 화를 내며 전우삼을 향해 걸어갔다. 순간, 팟! 하며 철중달이 쌍수(雙手)를 움직였다. 철중달의 쌍수가 허공을 비산하며 흑의 노인의 대혈을 찍어갔다. 철중달이 석년(昔年 )에 얻었던 명성은 과연 헛되이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얀 손그림 자가 번뜩 하는가 싶더니 옥수(玉手)는 어느덧 흑의 노인의 앞가슴을 짓쳐 가고 있었다. 흑의 노인은 당연히 철중달의 공격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신형 도 번뜩 움직였다. 흑의 노인이 환영처럼 움직이며 우측으로 몸을 비 켰다. 그와 동시에 그는 손바닥을 교묘하게 뒤집으며 철중달의 옆구 리를 노렸다. 역반수(逆反手)라는 대수롭지 않은 배교의 무공 중 하 나였다. 삼류 무공도 쓰는 자에 따라 위력이 달라질 수 있었으므로 철중달 은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는 역반수에 맞서 대파수(大破手)를 연이 어 삼 장 날렸다. 벼락같은 공격이었다. 흑의 노인은 자신의 장영을 거두어야 될 듯했다. 기세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철중달의 쌍수에 맞서 역반수를 우직하게 그대로 밀어붙였다. 타탁! 철중달과 흑의 노인의 장이 부딪혔다. 순간, 철중달의 안색 은 변했다. 자신의 내력이 얼음판 위를 미끄러지듯 엉뚱한 곳으로 흐 르고 있었다. '이화접목(移花接木)!' 철중달은 속으로 소리쳤다. 상대의 내력으로 상대를 공격하지는 않 았지만 흑의 노인의 내력을 흘리는 수법은 도가의 현공인 이화접목과 유사했다. 뿐만 아니었다. 철중달은 엉뚱하게 흐르는 자신의 내력이 한 곳으로 쏠려 가고 있음도 알았다. 그곳은 바로 허리에 비스듬히 걸치고 있는 흑의 노인의 좌수였다. 철중달의 놀람은 상상도 못할 정 도였다. '설마 흡정(吸精)의 술(術)…….' 그는 다급히 삼 장을 물러났다. "도대체 당신들은……." 철중달은 상대의 정체를 물으려 했다. 하지만 흑의 노인은 철중달 이 신형을 가눌 틈도 주지 않았다. 붉은 그림자가 번뜩했다. 그 붉은 장인은 철중달도 몇 번은 본 터였다. 이정인에 의해…… 삼양장! 하 지만 흑의 노인이 펼치는 삼양장은 이정인의 수법과 너무도 달랐다. 이정인의 삼양장은 세 번을 연이어 구사하며 위력을 높이는데 비해 흑의 노인의 삼양장은 단 한 번의 출수로 끝이 났다. 그 한 번의 출 수가 철중달을 향해 다가가며 두 번의 변화를 일으켰고 마지막 한 번 은 철중달의 지척에서 섬광으로 번뜩였다.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철중달은 황급히 연환분뢰수(連環奔雷手)를 펼쳤다. 적염날수, 철 중달을 오늘까지 있게 한 무공이었다. 철중달과 흑의 노인의 장이 두 번째로 부딪혔다. 콰쾅! 쾅! 지축을 흔들리는 폭음, 꽃잎과 풀잎이 우수수 휘날리는 가운데 전 우삼은 휘청 열 걸음을 물러났다. 장력의 여파만으로도 전우삼은 심 장이 파열될 듯했다. 속을 뒤집는 역겨운 냄새도 자욱했다. 철중달의 손에서도 흑의 노인의 손에서도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 었다. 철중달과 흑의 노인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전우삼은 두 번의 격돌에서 누가 우위를 차지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밖으로 보기에 는 아직 그들은 말짱했다. 철중달이 신뢰하격(迅雷下擊)의 수법으로 다시 움직였다. "제법이군!" 흑의 노인이 냉갈을 터뜨렸다. 그가 다시 장영에 붉은 기운을 일으 키며 철중달을 쓸어 갔다. 타타타탁! 타타탁! 철중달과 흑의 노인이 수차(水車)처럼 돌며 뒤엉켰다. 전우삼은 경천동지의 일전을 멍한 표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는 백의 노인이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는 지도 몰랐다. "아이야, 가자." 백의 노인이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전우삼은 퍼뜩 백의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가 어깨를 움칠하며 물었다. "전우삼이라고 했지. 흑면호…… 참으로 좋은 별호다. 아이야, 우 리는 오래 전부터 너를 지켜보아 왔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 도록 하자구나." 백의 노인은 전우삼의 손을 잡았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전우삼 은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뿌리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 백의 노인이 마치 손자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하듯 전우삼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노인의 발걸음은 느릿느릿 했다. 하지만 주위의 풍경은 바람처럼 휙휙 하고 지나갔다. 그럼에도 전우삼은 전혀 발걸음을 옮기는데 힘 이 들지 않았다. 자신의 몸도 백의 노인을 따라 한 걸음에 일 장여 씩을 움직이고 있었다. 갑자기 절정의 신법을 배우게 된 것은 아니었 다. 전우삼은 이유를 찾았고 뒤늦게 이유를 발견했다. 자신이 그렇게 걸을 수 있게 된 것은 백의 노인이 격공섭물(隔空攝物)로 자신의 몸 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격공섭물! 이야기로만 듣던 말이었다. 전우삼의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그의 눈길이 연신 백의 노인을 향 했다. 반 각쯤 발길을 옮겼을 때였다. 백의 노인이 옆에 사람에게 이야기 하듯 입을 열었다. "현제, 그만하고 오시게." 전음입밀(傳音入密)이나 천리음(千里音)쯤 되는 모양이었다. 흑의 노인의 귀에는 그 소리가 뚜렷했다. 흑의 노인은 삼양장으로 십팔박(十八拍)을 펼쳤다. 가뜩이나 기혈이 울렁거려 사정도 좋지 않았다. 철중달은 흑의 노 인의 맹타를 정면으로 맞설 자신이 없었다. 그가 슬쩍 뒷걸음질을 쳤 다. 흑의 노인은 철중달을 쫓지 않았다. 그가 우수를 가슴에 세우며 장 공(掌攻)을 중지했다. "철중달, 제법 이름 값을 하는구나. 오늘은 바쁜 사정이 있고 원래 네놈이 배교에 대해 저지른 악행의 값도 적으니 이만 물러가도록 하 겠다. 승부의 결말은 다음으로 미루겠다."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흑의 노인은 신형을 날 렸다. 철중달은 흑의 노인이 갑자기 사라질 줄은 몰랐다. "멈춰라!" 그가 흑의 노인을 뒤쫓았다. 그러나 흑의 노인의 신법은 그가 지닌 무공만큼 뛰어나 종내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철중달은 흑의 노인에 대한 추적을 포기했다. '누구일까?' 그가 나무 아래서 생각에 잠겼다. 말하는 것을 보아 하니 배교의 인물인 듯했다. 하지만 철중달은 쉽게 그들이 배교의 인물이란 생각 이 들지 않았다. 그만한 무공을 지닌 자들이 배교에 있을 리 없었다. 설혹 배교에 그런 인물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교의 위기에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 은 이유는…… 흑의 노인이 펼치는 무공도 배교의 무공과 비슷하기는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면 삼양장부터 시작해서 겉만 비슷할 뿐 배교 의 무공과는 달랐다. 이정인으로부터 배교에 그 같은 이인(異人)이 있다는 것은 전혀 들은 바도 없었다. 배교의 인물이 맞는가부터 의심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인가?' 철중달의 강호 제파(諸派)와 명숙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노인들의 정체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종내 오리무중이었다. '알 수 없군. ……앗!' 철중달은 안색을 찌푸렸다. 그가 황급히 처음의 장소로 돌아왔다. 전우삼은 보이지 않았다. 노인들의 정체와 싸우는데 정신이 팔려 그 는 전우삼의 존재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럼 저들도 그놈의 재질이 탐이나…….' 철중달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간혹 강호의 인사들 중에는 훌륭한 제자를 얻기 위해 남의 제자까 지 강탈해 가는 자가 있다. 철중달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당장은 그 이유 말고 두 노인의 출현과 전우삼의 실종을 설명할 다른 말이 없었다. '애석하군.' 놓친 고기가 더 커 보이는 법이다. 철중달은 전우삼을 뺏겼다는 생 각에 울컥 화가 솟구쳤고 아쉬움도 컸다. '어디서 온 자들인가?' 이제 궁금한 것은 그들의 문로(門路)였다. 투두두두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는 북풍처럼 치달았다. 전우삼은 그 마차에 앉아 있었다. 마차의 내부는 울긋불긋한 휘장 으로 화려했고 사람이 누울 수 있을 만큼 공간도 넓었다. 두 명의 노인은 단정히 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전우삼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백의 노인만 있었으면 벌써 수 십 마디는 내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흑의 노인의 냉랭한 안색을 보는 순간 그의 말문은 들어가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전우삼 은 결국 입을 열었다. "노인들은 도대체 누구요?" 그가 눈을 뒤룩거리며 물었다. "우리도 배교도다." 백의 노인이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배교도가 아니다!" 흑의 노인은 냉랭하게 말했다. '배교도란 말인가 아니라는 말인가? 백의 노인은 본 교의 인물이고 흑의 노인은 본 교의 인물이 아니라는 뜻일까? 백의 노인이 본 교의 인물이라는 것도 이상하다. 흑의 노인이 형으로 받들 정도면 대단한 인물이라는 뜻인데…… 나는 얼굴은커녕 백의 노인에 대한 소문도 들은 적이 없다.' 전우삼은 노인들의 말에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때 마차의 앞을 가린 장막이 열리며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자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어자(御者:말몰이꾼)였다. "전 공자, 우리는 배교도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오." 그가 웃음기 베인 목소리로 말하며 장막을 다시 닫았다. '저 자의 말은 더욱 나를 난감하게 하는구나.' 전우삼은 한숨을 쉬었다. "궁금한 것은 차차 알게 될 것이다. 너무 조급해 하지 마라." 백의 노인이 전우삼의 궁금증을 달랬다. "나는, 나는 말이오. 원래 용무가 있단 말이오. 같은 방향이면 노 인들에게 감사하겠지만…… 헤헤, 다른 방향이면…… 노인들은 수고 를 하고도 좋은 소리를 못 들을 것이오." 백의 노인이 좋게 말하자 전우삼은 용기를 내어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았다. "우리가 가는 방향은 네가 가는 방향과 같다!" 흑의 노인이 자르듯이 말했다. '당신이 무슨 점쟁이라도 된단 말인가? 내가 가는 곳을 알게…….' 전우삼은 목까지 튀어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노인들은 어디로 가시오?" 그가 다른 말로 물었다. "만인부(萬忍府)!" 두 노인이 동시에 말했다. "그곳은 어둠 속에 있는 곳이오. 하하하! 전 공자, 우리는 바로 어 둠 속에서 왔소이다. 이랴!" 어자가 한 소리 외치며 말에 박차를 더욱 가했다. 투두두두두! 쌍두마차(雙頭馬車)가 질풍처럼 어둠을 치달았다. 제19장 연희(演戱) 타당! 탕탕! 쨍! 내가기공만을 전문적으로 파괴한다는 암기, 투풍표(透風　)가 이리 저리 흩어지고 세 자루의 칼이 얽혔다. 그와 동시에 '핫!' 하는 소리 와 함께 세 가닥의 그림자가 허공에서 표표히 선회하며 지면을 착지 했다. "으헤헤! 문주, 잠깐 보지 않은 사이에 몸이 많이 약해진 것 같소. 설마 삼양장인가 뭔가 하는 웃기지도 않는 무공 때문에 아직도 겔겔 거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유엽도를 까딱거리며 해죽이는 자는 팽해만이었다. "팽해만, 투풍표가 떨어진 방향이나 보고 이야기해라." 남궁기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팽해만은 고개를 돌렸다. 당예가 걸어가고 있었다. "고마운 일이군." 그가 가는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였다. 그의 발 밑에는 누가 놓은 것처럼 투풍표가 놓여 있었다. 방금 그가 단원홍을 향해 날린 투풍표 였다. "당예에 대한 문주의 애정이 그 정도까지 될 줄은 몰랐소. 헤헤헤 …… 그래서 때가 되면 장가를 가야 한다고." 팽해만도 한숨을 쉬었다. "남궁기, 팽해만! 지금 너희들이 사용하고 있는 그 칼은 내력이 있 는 칼들인가?" 단원홍이 팽해만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우리 남궁가에는 칼은 만드는 장인(匠人)이 따로 있습니다. 사내 라면 태어남과 동시에 한 자루의 칼을 받게 되지요. 그리고 죽기까지 십 여 자루의 칼을 더 받게 됩니다. 불운한 사람은 한 자루의 칼도 다 못 써 보고 죽게 되고 행복한 사람은 수 십 자루의 칼을 바꾸어 사용하고 죽게 됩니다." 남궁기가 말했다. "그럼 이제 그 칼은 바꿀 때가 되었는가?" "아직 쓸만 합니다. 하지만 문주의 검력(劍力)이 너무 강해 몇 군 데 이빨이 나갔을 지는 모르겠군요." "알았다. 팽해만, 자네는?" 단원홍은 팽해만에게 눈길을 돌렸다. "헤헤헤, 나는 원래 귀한 물건을 귀하게 다루지 못하는 성미라서… … 팽가에도 전가의 보도(寶刀)는 몇 자루 있지만 나에게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더군요. 내 주제에 바라겠다는 생각도 없고…… 지금 쓰 고 있는 이것도 그런대로 쓸만 합니다. 하북의 명인, 철수노인(鐵手 老人)에게 부탁해서 정련(精鍊)한 칼인데 쇠는 몰라도 바위 정도는 가볍게 자릅니다." 팽해만이 자신의 유엽도를 경망스럽게 놀리며 말했다. "잘 되었구나." "잘 되었다니요?" 팽해만이 유엽도를 칼집에 쓱쓱 거리며 물었다. "마침 나에게 질 좋은 한철(寒鐵)이 한 덩이 있다. 장검, 한 자루 와 유엽도, 한 자루를 만들 양은 충분히 될 것이다." "정말입니까?" 팽해만은 입을 해 벌렸다. 무인들에게 있어 애마(愛馬), 애검(愛劍 )과 절세의 무공비록(武功秘錄)은 언제나 탐나는 물건이다. 남궁기도 눈빛을 반짝이며 흥미를 보였다. "하북, 철수노인의 명성은 나도 예전에 들었다. 그의 명성과 조화 옹(造化翁)의 명성을 비교하면 누가 나을 것 같은가?" "명장(明匠)들을 찾자면 먼저 당예의 집부터 찾아야겠지요. 하지만 사천 당가는 외인(外人)을 위해 일하지 않으니…… 세상에 알려진 명장들은 하북의 철수노인, 호북의 만상인(萬象人), 섬서의 집물노( 集物老),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조화옹 등이겠지요. 그중 단연 실력 이 뛰어난 자라면 조화옹이 아니겠습니까." 남궁기가 말했다. "맞아. 나도 그렇게 들었다. 조화옹의 솜씨는 그야 말로 조화옹이 라면서……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망치질을 멈추어 버렸으니……." 팽해만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나는 조화옹과 약간의 연분이 있다. 망치질을 그만 두었다고 하나 도검 한 자루 씩 만들어 달라는 나의 부탁은 거절하지 못할 것이다. 다루어야 할 재질이 한철이라면 부탁하지 않아도 일에 대한 욕심이 생길 것이다. 나의 검도 그가 만들어 준 것이지." 단원홍은 들고 있던 검에 내력을 실었다. 장검이 가늘게 떨리며 차 가운 기운을 사방에 뿌렸다. 남궁기와 팽해만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은 재질에 좋은 명인…… 그 속에서 나온 물건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부럽군." 당예가 중얼거렸다. "어이, 당예! 부러워하지 말라고! 남는 한철 조각이 있다면 우모침 (牛毛針)이라도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할 테니……." 팽해만이 꽥꽥 소리쳤다. "칼은 그렇게 선물하기로 했으니…… 자네들의 칼은 내가 가져가도 되겠나?" 단원홍이 물었다. "달라면 드리겠지만 쓰일 때가 있겠습니까?" "헤헤헤, 달라면 주면 되지 이유를 묻기는…… 대장간에라도 팔아 어디 급하게 꾼 돈을 갚아야 할 일이 있나 보지." 팽해만은 허둥지둥 칼집을 풀었다. 그가 유엽도를 단원홍에게 넘기 려 했다. 그러나 단원홍은 유엽도를 받지 않았다. "다시 한 번 비무를 벌여 보지 않겠나?" 단원홍이 옷깃을 펴며 말했다. "으헤헤, 어쩐지 칼 하나를 거저 얻게 되나 했더니…… 대가치고는 너무 비싸!" 팽해만이 소리쳤다. 그러나 말과 달리 팽해만은 단원홍과의 비무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졸라서라도 하루에 몇 번의 비무를 벌이고 싶 었다. 단원홍 같은 절정 고수를 상대로 실전 검예를 익힐 기회는 평 생 가도 많지 않을 것이다. 팽해만은 오호단혼도법의 기수식을 취했고 남궁기는 장검을 세웠다 . 남궁기의 장포는 이미 팽팽하게 부풀어올라 있었다. 당예는 일곱 자루의 투풍표를 매만졌다. 칠성좌(七星座)의 방향을 한꺼번에 노리 는 칠성추혼(七星追魂)이라는 당가의 독문 수법을 시전 하려는 모양 이었다. "모두들 조심하라! 칼을 한 자루 마련해 준다고 했으니 이번의 공 격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단원홍은 장검을 비스듬히 늘어뜨렸다. 그가 장검으로 원호를 그리 며 천천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남궁기와 팽해만은 눈썹을 꿈틀댔다. 엄청난 경기의 폭풍이 일고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파였다. '그럼 문주는 지금까지 자신의 진신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 짧은 순간 남궁기는 의구심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검에 모든 것을 몰입했다. 보이지 않는 기파들이 허공 중에 부딪히며 쿠궁! 쿵! 뇌전을 일으 키는 것 같았다. 남궁기와 팽해만, 당예는 단원홍이 토해 내는 기파에서 단원홍이 이제껏 선보이지 않았던 초식을 펼치리라 예감했다. 그 초식은 필경 공전절후(空前絶後)의 초식일 것이다. 쉽게 검끝을 놀릴 수 없었다. 팽팽한 기파의 대결 속에서 그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 정 적을 먼저 깨뜨린 자는 팽해만이었다. 팽해만의 칼끝이 가늘게 떨린다 싶더니 유엽도는 일파만파(一波萬 波)의 기세로 단원홍을 쓸어 갔다. 움직임은 팽해만이 빨랐지만 칼이 나아가는 곳은 남궁기가 더 빨랐다. 그의 검은 팽해만의 유엽도에 앞서 검광을 뿌리고 있었다. 파팟! 팟! 투풍표도 바람을 갈랐다. 당예의 출수는 남궁기와 팽해 만에 비해 조금 늦은 감은 있었다. 일부러 속도를 조절한 것이다. 투 풍표가 나아가는 방향은 단원홍의 진로를 꼼짝 못하도록 묶고 있었다 . 실전을 방불케 하는 비무가 아니라 바로 실전이었다. 남궁기, 팽해 만, 당예는 단원홍의 목숨을 노리는 살초를 퍼붓고 있었다. 단원홍의 무위에 대한 절대적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한 비무였다. 단원홍은 찰라지간에 장검에 모든 기를 쏟았다. 장검에서 푸른 섬 광이 불쑥 솟구쳤다. 그 섬광은 단원홍의 검끝을 따라 움직였다. 순 간, 쐐액! 하는 천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푸른 섬광이 현란하게 나부 꼈다. 쨍! 쨍! 쨍! 날카로운 쇳소리가 그 뒤를 이었다. "욱!" "으헛!" 남궁기와 팽해만은 손아귀가 찢어지는 듯한 격렬한 진통을 느끼며 몇 걸음을 물러났다. 여진(餘震)은 계속해서 남아 팽해만의 하늘은 빙빙 돌고 있었다. 당예는 빈손을 내 보였고 남궁기는 검을 축 늘어 뜨렸다. 팽해만의 유엽도도 남궁기의 장검도 뚝 잘려진 상태였다. 소림의 나한당주, 혜명은 말했다. 만약 항마전의 자세로 단원홍과 싸웠다면 반 초식의 차이로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항 마전의 자세로 싸우지 않은 것은 단원홍도 마찬가지였다. 혜명은 마 군이 아니었으므로……. 사실 단원홍의 실력은 이정인과 싸울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해 있 었다. 이정인과의 실전을 통해 이제까지 머리 속으로만 그리던 자신 의 검로를 완전히 체득했고 삼양장의 화독을 제거하느라 운기에만 전 념해 내력 역시 예전과는 달랐다. 남궁기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비검에서 상대에게 검이 부러지는 것 이상의 수치는 무사에게 없다. 검이 부르지는 것은 검의 재질 탓이 아니다. 재질도 물론 영향은 미치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 은 검력의 차이다. 검이 부러졌다는 것은 상대에 비해 최소한 두서너 단계는 무위의 차이가 있다는 뜻……. 그렇게 노력을 했건만 남궁기는 단원홍과의 격차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왕왕 세상은 노력으로도 따라잡을 수 있는 일이 있는지라 문 주를 상대로 경쟁하기를 포기해야 될 것 같았다. "아이고!" 팽해만은 뒤늦게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매만졌다. "무엇입니까?" 남궁기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단원홍은 씨익 웃으며 정원석에 앉았다. 비슷한 연배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은 기분 좋은 일이다. 그는 모처럼 우울을 벗고 있었다. 이번 일을 마지막으로 관복을 벗고 천화원에서 사부를 모시며 지내 리라 결심했기 때문에 마음이 가벼운 지도 몰랐다. 단원홍은 한쪽 발을 무릎에 올리며 어깨를 폈다. 남궁기 등이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나의 문로가 상당히 궁금할 줄 안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오?" 팽해만이 경망스럽게 물었다. "특별히 밝히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사부, 당신께서 당신의 이름이 오르락내리는 것을 극히 꺼려하시니……." "그럼, 운 대야의 이름만 쏙 빼고 이야기하시오." 팽해만이 말했다. 단원홍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나의 아버님은 무학(武學)의 훈도(訓導)로 계셨지." 단원홍이 이름난 무가의 자손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다. 무학 은 병부(兵部), 오성병마지휘사(五城兵馬指揮司), 오군도독부(五軍都 督府) 등과 함께 병권(兵權)의 주요한 기구다. 수반(首班)은 교수(敎 授)고 훈도는 그 아래 자리다. "아버님은 사부님과 함께 한동안 그곳에 일하셨다." "아! 운 대야께서도 관부인이셨군요." 남궁기가 놀라워했다. 그는 단원홍의 사부인 운학추는 세외(世外) 고인 정도로 생각했었다. "물론 아버님은 사부님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사부님은 권문 (權門)의 출신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실력 하나로 그 자리까지 오 른 분이야. 그 더러운 곳에서 자신의 실력 하나로 그 정도의 자리까 지 올랐다는 것만 보더라도 사부님의 실력을 구구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때문에 시기도 많이 받으셨지. 반대로 존경하는 자들도 많았다. 다행히 아버님도 그 중의 한 분이셨어." "호오! 모든 것이 다 썩었는데도 나라가 이만큼 지탱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군." 팽해만이 한 마디 거들었다. "원래 아버님은 사부님을 흠모하는 바가 있었으므로 곧 그분과 친 해지셨다. 스물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형제의 의를 맺을 정도 로…… 그렇게 한동안 무학에서 일하셨지. 그런데 어느 날, 무학에 재미있는 황제의 명이 떨어졌다." "호호호! 또 사람 잡는 일이었겠지." 팽해만은 잠시도 자신의 가려운 입을 참지 않았다. "누구의 권고(勸告)인지 모르나 참으로 일 같은 일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금군(禁軍)을 강병(强兵)으로 만들기 위해 천하 각지의 무술 을 한데 모아 무예총람(武藝總攬)이란 교본(敎本)을 만들라고 지시하 셨지." "생각은 좋군. 하지만 천하의 무술은 원류(原流)가 다 다르고 깊이 도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가르칠 수 있지? 그것도 교본 하나에 의지해 한 명도 아닌 수 만명을…… 악비(岳飛) 같은 명장(名將)이라 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역시 책상머리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군요 ." 당예가 빈정거리는 투로 말했다. "맞는 말이다. 무예총람이라는 것은 결국 천하의 무공을 소개하는 정도 이상의 것은 되기 힘들었지. 사부가 도중에 그 일을 그만 둔 이 유 중의 하나다. 그러나 당시는 어쨌든 사부님은 그 일을 자청해서 맡으셨다. 원래 사부님은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것보다 밖을 돌아다 니기를 좋아 하셨으니……." 단원홍은 한쪽 발을 내리며 무릎을 가지런히 했다. "사부님의 장점은 한 번 일을 시작하면 무섭도록 밀어붙인다는 것 이야. 황궁의 서가를 시작으로 천하 각지를 돌아다니며 무공비록들을 찾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와중에 무술에 푹 빠지신 게야." "헤헤헤, 당연히 십팔반 무예 정도는 우습게 보였겠지." "무예의 바다에 빠진 사부님은 종내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셨다. 발길은 새외까지 향하고 나중에는 관직까지 내던졌지." "그럼 무예총람인가 하는 것은?" 팽해만이 물었다. "그간의 사부님이 얻은 성과를 모아 아버님께서 일을 마무리 지으 셨지. 원래 자금성의 높은 분들은 내용 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더 좋아하니 별 말은 없으셨다고 한다. 그렇게 십 여년이 흘렀다. 어느 날, 사부께서 홀연히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내가 열 살 되던 해였지 ." "비전들을 익히고 돌아오셨군요!" 팽해만이 황급히 말했다. "물론! 몇 가지 기연까지 얻어 사부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고 수가 되어 돌아오셨지. 아버님과 밤새도록 술을 나누셨고 나도 처음 으로 소개를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사부님은 다시 강호로 떠나셨어 ." "운 대야는 욕심이 많군요. 십 여년의 주유도 모자라 다시 강호로 나서다니……." 남궁기가 말했다. 단원홍은 아무 말 않고 미소만 지었다. 사부의 두 번째 주유는 무 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부의 두 번째 주유는 바로 자신의 성취를 확인하기 위해 무태상인 등을 상대로 비검행을 벌인 기간이었 다. "이 년여가 지나 사부님은 다시 우리 집을 찾아오셨다. 사부님과 아버님은 회포를 푸셨고 나는 다음 날 사부를 따라 천화원에 들어가 게 되었지." 단원홍은 이야기를 끝냈다. "아하! 운 대야와 문주의 문로는 바로 천하의 무공에 있었군요!" 팽해만이 놀란 척 소리쳤다. 단원홍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다섯 가지의 무공만을 배웠을 뿐이다." "다섯 가지?" "밀교의 황금신공, 외곤륜(外崑崙)의 추서십육섬(追絮十六閃), 남 해(南海) 청조각(淸潮閣)의 해선와(海旋渦), 천룡사(天龍寺)의 반심 고장(般心高掌), 그리고 문로를 모르는 사자철권(獅子鐵拳), 그 다섯 가지다." "아!" 남궁기, 팽해만, 당예는 일제히 탄성을 터뜨렸다. 솔직히 그들이 들어 본 이름은 밀교와 천룡사가 고작이다. 청조각이나 외곤륜은 있 었는지도 몰랐다. 밀교와 천룡사도 신비에 쌓인 곳이라 그곳의 무공 을 측량할 재주 또한 사실 그들에게는 없었다. 단지 천룡사의 반심고 장 정도는 주워 들은 바가 있었다. 몰랐기 때문에 더 탄성을 터뜨린 그들이었다. "원한다면 가르쳐 줄 수도 있다." "정말입니까?" 팽해만은 비공에 대한 욕심을 감추지 않았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 지만 남궁기, 당예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운 대야께서 그토록 고생을 하시며 얻은 무공들인데 남들에게 주 기 아깝지 않습니까?" 남궁기가 물었다. "남궁기, 이제 나도 나의 문로는 나의 문로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방금 보인 것이 자네 눈에는 흡족하지 않았던가 보군." 단원홍이 남궁기를 바라보며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남궁기 등은 말을 잃었다. 단원홍은 그들을 지나쳐 별실로 걸어갔다. "아이고!" 팽해만이 한숨을 쉬며 동강난 유엽도를 내던졌다. 그때였다. "문주!" 단원홍을 부르며 내당으로 들어오는 자는 언상영이었다. "무슨 일로 왔다고 하더냐?" 단원홍이 등을 돌리며 물었다. "모태명은 과연 교활한 자더군요. 흑룡방의 외당당주라는 자가 절 강의 마두, 오삼립의 목을 가지고 왔습니다. 강서의 마두, 장호라는 자는 이미 다진 고기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무슨 이유로?" "흑룡방은 문주께 충성을 서약하겠다고 하더군요." "충성의 서약이라…… 후후!" 단원홍은 실소를 흘렸다. "어떠냐?" 그가 의미 있는 눈길로 언상영을 바라보았다. "모태명이라는 놈이 저렇게 다급히 나오는 데는 다른 이유가 있겠 습니까. 단혈철각련의 움직임을 읽었겠지요. 살기 위해 기댈 곳을 찾 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외군요. 구대문파를 향해 달려갈 줄 알았더 니 우리에게 오다니……." 언상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단혈철각련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사 실 유향경천문은 이미 단혈철각련의 움직임을 이미 샅샅이 읽고 있었 다. 삼십 여년 전, 곽부와 모태명 사이의 풀지 못할 혈채까지……. 단혈철각련 내부에 유향경천문의 간세(奸細)가 없다면 그런 것까지 알기는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단원홍의 작품이었다. 새외의 수상한 움직임을 알려준 자는 바로 그의 사부, 운학추다. 운학추에게는 천하를 주유할 때 사귄 새외의 벗들이 많다. 그 벗들이 운학추에게 새외의 이상한 기류를 알려왔고 운학추는 단원홍에게 그 사실을 언질했다. 단원홍은 무영인들을 풀어 단혈철각련의 움직임을 샅샅이 조사했다 . 그리고 간세도 심었다. 원래 그는 단혈철각련에 대해 그 정도의 관 심까지 기울일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단혈철각련의 발호를 들은 언 상영이 자신의 머리를 가세해 일을 키웠다. "피해 오는 새는 쏘지 않는다고 한다. 언상영, 너는 모태명의 청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으헤헤, 새도 새 나름이지…… 냄새 나는 잡새는 아무도 좋아하지 않아!" 팽해만이 말했다. "단혈철각련이 우리의 힘을 알지 못하도록 우리는 최대한의 힘을 기울였습니다. 우리의 노력이 성공했다면 단혈철각련은 우리를 응조 손(鷹爪孫:관가의 앞잡이) 정로로만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도 그렇게 믿게 해 주어야지요." "구대문파와 단혈철각련의 싸움을 지켜본 후 그들이 양패구상으로 비틀거릴 때 강호를 한 손에 넣겠다는 너희들의 생각은 변함없는 모 양이군." 단원홍은 가는 미소를 흘렸다. "문주의 비웃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지금 강호의 영웅들을 모아 곽 부를 치면 강호에 흘릴 피는 그만큼 줄어들겠지요. 하지만…… 문주! 문주는 우리 사대세가의 오랜 숙원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상영이 머리를 숙였다. "젠장! 비웃기는 누가 비웃는단 말이야! 나는 단혈철각련과 구대문 파가 뼈다귀를 노리는 개처럼 서로 치고 받고 싸울 날을 기다리느라 눈이 빠질 판인데…… 두 놈 모두 그렇게 싸우다 뒈져도 괜찮아!" 팽해만은 입에 침을 튀겼다. "팽해만, 너의 뜻대로 하라." 단원홍이 웃으며 팽해만의 어깨를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가자!" 언상영이 팽해만에게 손짓을 했다. "왜 나를 부르는 게야? 나는 흑룡방 놈들만 보면 어제 먹은 것도 올라오려 한단 말이야." "흑룡방의 외당당주라는 놈에게 엄포를 놓아야지. 다시 유향경천문 에 발을 들이지 못하도록…… 흑룡방의 비리를 샅샅이 파헤친 듯 이 야기할 것이다. 배교 다음은 흑룡방이라는 느낌이 들도록…… 그런 엄포는 팽해만, 자네 이상 잘 하는 사람이 없지." "놈을 골려 주는 일이었구나. 그런 일이라면 빨리 이야기를 했어야 지! 으헤헤……." 팽해만은 메기입을 씰룩거렸다. "문주, 배교의 일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언상영이 물었다. "이미 무영인들을 풀었다." "마옹과 마녀를 죽이지 말라는 지시에 대해 구대문파의 반발이 예 상 보다 큰 것 같습니다. 제자들의 복수는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하 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그러나 그들이 공공의 명까지 거역하며 그렇게 하기를 고집한다면 나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다. ……마옹이라는 자와 마녀라 는 여인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아닌 나를 만날 수 있도록 그들의 신 에게 빌어야 할 것이다." 단원홍은 황사가 스쳐 지나는 하늘을 우러렀다. * * * '단원홍.…….' 오세악은 백호(白虎)처럼 웅크리고 앉아 장검을 매만졌다. 운대봉 에 잠깐 있는 사이 그 이름이 천하를 휩쓴 모양이었다. '이정인을 꺾었다. 오대흉인 중의 하나인 이정인을…….' 넷째, 탁중평이 강호의 공공연한 비밀이라며 그 사실을 알려주었었 다. '한낱 금의위의 천호가…… 사문도 모르는 자라고 했지.' 오세악의 미간이 좁혀졌다. 능운공작의 명성에 가려진 북검이었다. 자존심도 상했고 팽팽한 호승지심도 들끓어 올랐다. 그는 그 호승지 심 때문에 벌써 며칠을 가슴 두근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호승지심을 느낄 만한 자였다. 소림의 나한당주, 혜명은 또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삼십년…… 우리 소림은 태산북두로서의 기치를 내릴 것이 다. 강호에는 유향경천문과 능운공작이 있다." 혜명은 그 같은 말을 던지고 배교 척결에 동원된 나한들을 산문으 로 불러들였었다. 혜명의 말은 앞으로 삼십 여년 정도는 강호에 단원홍을 꺾을 자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오세악은 혜명이 자신의 이름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소림 산문의 제자들만 생각하고 화산의 제자들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에 삼십 여년 의 세월을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문파는 염두에도 두지 않는 소림의 지독한 아집(我執)! 혜명의 말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오세악은…… 단원홍에 대한 소문은 적었으나 오대흉인에 대한 소문은 강호에 자 자하다. 배교의 마옹, 이정인은 곽부 다음으로 사파에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다. 오세악은 자신과 이정인의 무위를 비교해 보았다. 오세악은 언제나 진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자다. '그렇게 유명한 자인데 사부는 왜 그 자에 대한 언질도 없었을까?' 오세악은 장검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 이다. 사부, 숭양진인은 자신의 호승지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단원홍이라는 자의 이야기를 꺼내 호승지심에 불을 붙이기 싫었을 것 이다. 비검 운운하며 금의위를 상대로 시빗거리를 만드는 것을 원하 지 않았을 테니…… 금의위의 졸렬한 수작들은 이미 강호에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검은 미치도록 단원홍이라는 자를 찾고 있었다. 오세악은 장검을 불끈 쥐었다. '그만한 성취를 이룬 자다. 다른 자들과 같을 리 없다. 설마 비검 의 결과를 놓고 관부로 시비를 거는 치졸한 짓은 하지 않겠지! 마옹 이라는 놈을 처치하고 난 후…… 나는 그의 검로를 물어 볼 것이다.' 그가 안광을 빛냈다. 결국 그는 검에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 오세악이 있는 곳은 객잔이다. 화산의 제자들은 마옹의 뒤를 쫓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하고 있었다. 오색악은 검을 들고 객잔 밖으로 나갔다. 비검을 생각하자 몸이 가 려워 견딜 수 없었다. 몸을 풀 생각이었다. 그가 객잔을 막 나설 때였다. "이사형!" 서너 명의 제자들과 함께 객잔으로 들어서며 오세악을 부르는 자는 넷째, 탁중평이었다. 오세악은 원래의 냉담한 눈빛으로 탁중평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늘 어진 꼴이 오늘도 마옹이라는 놈의 꼬리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 "죄송합니다." 탁중평은 머리부터 숙였다. "내일은 길을 나누어 놈을 찾도록 하자." 오세악은 그 말을 던지고 객잔을 나섰다. 탁중평이 따라왔다. "사형, 일전에 한 번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무슨?" "마옹을 죽이지 말고 포획하라는……." "그래서?" 오세악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올라갔다. "내일 사형과 길을 나누게 된다고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 솔직히 저는 자신 없습니다. 삼사형도 이기지 못한 놈입니다. 매화검진(梅花劍陣)이 있기는 하지만…… 매화검진을 펼친다고 해도 사로잡는 일은…… 사로잡는 것은 죽이는 일 보다 배로 힘들지 않습 니까." 탁중평이 떠듬거리며 말했다. 오세악은 냉랭하게 탁중평을 쳐다보았다. 넷째의 가장 큰 문제는 너무 앞뒤를 잰다는 것이다. 자신이라면 두 말 않고 명부터 따랐을 것이다. '하긴…… 미련하게 죽는 것 보다 낫겠지.' 오세악은 장검으로 땅을 툭툭 쳤다.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어쩌다 가 대 화산의 제자들이 하오문의 무리에게 목숨까지 걱정하게 되었는 지……. "이사형은 보았습니까? 삼사형의 시신을……." "보지 못했다. 분향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오세악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삼사형의 직접적인 사인(死因)은 가슴에 길게 패인 상처였습니다. 분명 병기에 그인 자국 같은데 둔중한 물체로 긁힌 듯 너덜너덜 했 습니다. 심장도 베인 것이 아니라 압박으로 파열되었더군요."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이사형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력의 승부였다면 심장의 파열은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검초의 대결이었다면 가슴의 상처 또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슴의 상처와 심장의 파열이 동시에 생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삼사형의 사인이 가슴에 난 상처에 의 하면 심장이 베어져 있어야 하고 사인이 심장의 파열에 의하면 가슴 의 상처는 그토록 깊게 패이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음……." 오세악은 턱을 쓰다듬었다. 듣고 보니 이상도 했다. 타투경에 의해 심장이 파열되었다면 가슴의 상처는 너무 깊었다. 타투경이란 원래 밖은 상하지 않고 속을 상하게 함이 원칙이니…… 사인이 쾌초에 의 해서라면 탁중평의 말대로 상처가 너무 거칠었다. 우제준은 쉽게 죽 을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그를 죽일 만한 검초라면 상처가 자로 잰 듯 깨끗하게 그어져야 옳았다. "제준의 시신을 사부님은 보았느냐?" "사부님도 사숙들도 보지 않았습니다. 본 사람은 저와 몇 몇 사제 들뿐입니다." "그렇겠지. 죽인 자가 마옹이란 놈이 명확한데 검안(檢案)을 하실 생각을 했겠느냐. 죽은 제자의 시신을 살피는 일도 별 즐거운 일은 아니었을 테고……." "저는 사실 이 문제를 줄곧 생각해 왔습니다. 사형, 검을 한 번 들 어보십시오." "검을?" 오세악은 검을 들었다. 탁중평이 다가와 오세악의 검을 오세악의 가슴에 비스듬히 붙였다. 챙! 탁중평은 자신의 검을 뽑았다. 그가 오세악의 검에 자신의 검 을 십(十) 자로 갖다 댔다.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요?" 탁중평은 자신의 검을 오세악의 검에 밀어붙였다. "무슨 짓을 하는 게냐?" 오세악은 미간을 좁혔다. "죄송합니다." 탁중평은 머리를 숙이며 검을 거두었다. "사형, 방금 보신 것처럼 저는 삼사형의 가슴에 난 상처가 삼사형 자신의 칼등에 찍혀 난 상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마옹이란 놈 이 엄청난 힘으로 밀어붙였기 때문에…… 그 때문에 가슴에 거친 상 처도 생기고 심장도 잘린 것이 아니라 파열되었겠지요." 탁중평이 어떠냐는 듯 눈빛을 빛냈다. "이런! 어리석은…… 자신의 칼등에 가슴이 찢겨지고 심장이 파열 될 때까지 제준의 다리는 왜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냐?" 오세악은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고수들의 승부는 순간입니다. 순간의 힘으로 눌렀다면……." "그만 두어라!" 오세악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는 마옹이란 놈의 능력을 무척 추켜세우고 싶은 모양이구나. 합 을 겨루어 제준의 발을 묶고 단순간에 가슴의 상처까지 내며 심장을 파열시킬 힘! 마옹에게 역발산(力拔山)의 힘이라도 있다는 게냐! "그것은……." 탁중평은 우물거렸다. 마옹에게 그 정도 힘이 있었다면 사실 세상 은 벌써 발칵 뒤집혀졌을 것이다. "배교에는 사이한 무공들이 많다. 그 중에는 이상한 외문(外門)의 기공들도 있겠지. 마옹이라는 놈은 제준이 방심한 틈을 노려 그 술수 를 사용했을 것이다. 화혼진만 해도 그렇다. 그따위 아이들 장난 같 은 짓거리에 백 여명이 죽었다. 조심해야 한다. 너는 사제들에게 배 교의 술수를 잡술로만 생각하지 말고 항상 경계로서 대하라 이르라." "알겠습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탁중평은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 "어쨌든 마옹은 삼사형은 물론 무당의 명정까지 해했습니다. 죽이 는 것은 몰라도 사로잡는 것은……." 그가 난색을 표했다. 오세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잡기 힘들면 죽이면 될 것 아니냐!" 그가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하지만…… 늙은 환관이 명으로……." "필요 없다! 대 화산의 이름에 피 칠을 한 자를 누구 손에 넘겨준 단 말이냐! 잡더라도 나는 놈을 화산으로 끌고 갈 것이다! 탁중평, 다시 말하겠다! 잡기 힘들면 죽여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오세악은 흥분으로 손까지 떨며 말했다. 탁중평은 그 기세에 질려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화산의 명성을 혼자 다 먹칠할 놈이다.' 오세악은 한숨을 쉬었다. 객잔이 멀리 보이는 한적한 산중에 선 오세악은 사제, 탁중평으로 인해 뒤틀린 마음을 풀기 위해 먼저 손발을 가볍게 놀려 보기로 했다 . 그가 궁보(弓步)를 취하며 주먹을 천천히 뻗었다. 화산에 갓 입문 한 제자들이 배우게 되는 복호권(伏虎拳)이었다. 처음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화산파의 모든 정수(精髓)가 담겨 있어 평생 갈고 닦아야 하 는 것이기도 했다. 오세악은 위맹한 힘으로 주먹을 내밀었다. 그가 맹호출림(猛虎出林 )으로 시작, 흑호탐조(黑虎探爪), 맹호비월(猛虎飛月), 호위늠름(虎 威凜凜)으로 복호권을 펼쳐갈 때였다. 오세악은 뻗어 나가던 주먹을 우뚝 멈추었다. "서문을 나서며 걸음걸음마다 이것을 생각한다. 오늘 즐기지 못하 면 언제 즐기리? 어서 즐기세! 어서 즐기세!" 술에 취한 흥얼거리는 소리……. 오세악은 한 손으로 뒷짐을 진 채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 로 고개를 뺐다. 어둑한 산길에 비틀거리는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보 였다. '이건 또 뭔가?' 오세악의 두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아아! 화산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는 탄식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즐기세! 때를 맞이하였으니 어찌 우울하게 있으리? 이런 때가 오기를 어찌 더 기다리리? 좋은 술을 빚고 기름진 고기를 구워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부르면……." 서문행(西門行)이란 노래로 원래 둘이 어울려 불러야 하는 상화가( 相和歌)다. 그 상화가를 홀로 흥얼거리며 산길을 걸어오는 자는 장문 천이었다. "흐흥! 재미없군. 재미없어…… 꿀꺽!" 장문천은 걸음을 멈추고 호로병의 술을 콸콸 들이켰다. 밤중이면 몰래 빠져나가 매일 마시는 술이었다. 하지만 사형들은 마옹을 잡는 데 정신이 팔려 그가 연일 취기로 흔들거리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헤헤헤! 헤헤헤헤…… 너는 정말 대단한 놈이야. 대단한 놈! 으하 하하!" 장문천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는 분하에서의 한 장면을 결코 지우 지 못하고 있었다. 삼사형, 우제준이 패사하고 난 이후에는 그 장면 은 더욱 선명했다. "비굴한…… 헤헤헤헤!" 장문천은 연신 술을 들이켰다. 그가 문득 소매로 입술을 닦으며 정색을 했다. 발끝으로 땅을 차며 한숨도 지었다. "부럽군. 후후후후후!" 그가 어깨를 건들거리며 실소를 터뜨렸다. 장문천의 행동은 마치 미친 자를 보는 듯했다. 그가 다시 한 모금 의 술을 들이킬 때였다. "우스운가? 우습겠지!" 귀에 익은 냉랭한 목소리……. 장문천은 눈살을 찌푸렸다. 산길을 느릿하게 걸어 내려오는 자는 이사형, 오세악이었다. 술이 취한 와중에도 장문천의 안색은 변했다. 이사형은 까다롭기로 이름난 사람이다.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문천은 가는 미소를 흘리며 오세악을 맞았다. 될대로 되 라는 심정이었다.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좋군!" 오세악이 싸늘하게 말했다. 술주정까지 들은 모양이었다. 장문천은 고개를 숙인 채 발바닥으로 흙을 비볐다. "문천, 청규(淸規)를 듣고 싶다." 오세악의 말에 장문천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국법을 어긴 자는 도관에서 추방합니다. 교의에 대해 이렇게 저렇 게 논박한다든지 다른 도사를 불온하게 한다든지…… 질서나 통제를 위반한 자는 대나무 몽둥이로 때린 후에 추방합니다." 장문천은 왕중양(王重陽)의 전진교(全眞敎) 영향이 다분한 화산의 청규를 줄줄 욌다. "…… 술, 색(色), 재(財), 비린내 나는 것을 과하게 밝히는 자도 추방합니다. 교활한 자……." "그만!" 오세악은 호수구를 칼집에 경쾌하게 부딪히며 딱 하는 소리를 냈다 . "모르지는 않구나." "모를 리 있겠습니까." 장문천은 고개를 들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이놈 봐라!' 당혹감을 느낀 자는 오세악이었다. 죄를 짓지 않은 자도 그의 앞에 서면 괜한 잘못을 저지른 듯 안절부절못하는 판이었다. "내가 너에게 무슨 벌을 내릴 것 같으냐?" "이사형은 저에게 아무런 벌도 내리지 못할 것입니다." 장문천은 취한 자가 아니었다. 그가 똑바로 말했다. "내가 아무런 벌도 내리지 못할 것이라고……." 오세악의 눈빛이 매처럼 빛났다. "이사형, 화산의 청규는 화산의 제자에게만 적용됩니다. 저는 화산 을 떠날 것입니다. 설마 아직 화산에 적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시비 를 거시지는 않겠지요?" 장문천이 히죽거리며 물었다. "……." 오세악은 할 말을 잃었다. 그가 긴 숨을 들이켰다. 장문천! 사부, 사숙, 대사형은 물론 자신도 장문천에 대한 호감은 어느 정도 있었다.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고 스스로에 대한 탁마(琢磨 )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하산을 한 몇 개 월 사이 보지 말아야 할 것,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은 지 모를 일이 었다. 오세악은 장문천에 대해 조금 더 신중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이유를 듣고 싶다." "말하기 싫습니다." 장문천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놈이!" 오세악은 주먹을 들었다. "네놈은 내가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구나!" 그가 버럭 화를 내며 다시 자신의 본색을 드러냈다. 오세악이 노발대발하자 장문천은 무의식중에 흠칫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화산의 무예는 무예가 아닙니다. 이사형, 삼사형이 마옹에게 패사 했습니다. 한낱 하오문의 수괴에게…… 그리고 저는……." 장문천은 눈썹을 꿈틀댔다. 수치로 얼굴도 달아올랐다. 분하에서 마옹과 조우했던 일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저는…… 배교의 이름 없는 더벅머리를 상대로도 이기지 못했습니 다." 그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분하의 일은 차마 말 할 수 없었다. 장문천은 전우삼과의 승부를 대신 이야기했다. "죽장을 천 대 맞고 참회동(慙悔洞)에서 백 년을 썩어도 모자랄 놈 이구나! 제준의 패배에 네놈은 왜 사문을 걸고넘어지는 게냐! 모두 제준의 수행이 부족함 때문인 것을…… 그리고 수치를 느낀 놈이 술 이나 찾고 있었다는 말인가! 더욱 정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세악은 단 매에 장문천을 때려죽일 듯했다. 장문천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시 악기가 치솟고 있었다. 그 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담았다. "이사형, 나는 아직 삼사형만큼 자신에 엄격한 사람을 보지 못했습 니다. 사문의 어른들도 모두 인정하시는 바입니다. 그런 삼사형이 패 했습니다. 나 보고 화산에서 무엇을 배우라는 말입니까?" 장문천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는 정말 더 이상 상대 앞에 무릎을 꿇기 싫었다. 그것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더욱……. 딱! 딱! 딱! 오세악은 손가락으로 퉁겨 칼집에 소리를 냈다. "…… 화산의 검은 현묘(玄妙)하다. 그 깊고 넓은 바다 속에 뛰어 들기까지는 한동안의 시간이 걸리지. 수십 년의…… 제준이 아쉬운 것은 그가 그 바다 속에 뛰어들기 전에 마장(魔障)을 만났다는 것이 다." 오세악의 말투가 차분해졌다. "이사형, 그래서 저는 화산을 떠나고자 합니다. 저는 그렇게 오랫 동안 기다릴 수 없습니다. 기다리고 싶지도 않고…… 당장 거치적거 리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장문천은 오세악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오세악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마음이 기꺼웠다. 동질감(同 質感)을 느낀 것이다. 그도 그 같은 생각을 가졌었고 그래서 운대봉 에 처박혔었다. "강호를 호령하는 패자(覇者)의 검을 갖고 싶으냐?" "밑도 끝도 없이 매달려야 하는 검선(劍仙)의 자리는 싫습니다." "내가 너에게 그것을 주겠다. 받겠느냐?" "물론 주신다면 받겠습니다. 하지만 화산에 그런 것이 있겠습니까? " 장문천이 비아냥조로 물었다. "운대봉에 가라! 영호준(令狐俊)에게 물으면 내가 운대봉에서 수행 하던 동부를 가르쳐 줄 것이다. 그곳에는 사람 크기의 마검석(磨劍石 )이 있다. 들추어보아라. 한 권의 비급이 나올 것이다. 죽영파사검법 (竹影破邪劍法)!" "죽영파사검법?" 화산파에도 절예는 많다. 익히지는 못해도 이름 정도는 장문천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영파사검법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 "내가 핏덩이로 화산에 들어왔다는 것은 너도 잘 알 것이다. 화산 은 어릴 때부터 가보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비급은 서현동(西玄洞)에 서 장난을 치던 중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화산에는 도교의 사대동천(四大洞天)이 있다. 태극동(太極洞), 서 현동, 노군동(老君洞), 왕자동(王子洞)…… "어릴 때에는 사문의 무공이 최고라 생각했기 때문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놔두었지. 나이가 들고 검에 어느 정도 눈이 뜨 인 후에 나는 그 책을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턱없이 강하다고 생각 했다. 부드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더군. 하지만 화산의 향기는 충분 히 느낄 수 있었다. 사문의 고인(古人)이 남긴 유물이 분명하다. 아 마 지나치게 패도를 추구했기에 외도(外道)로 낙인찍혀 서현동에 묻 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사형이 강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화산의 문도라면 모두 알고 있 는 사실입니다. 죽영파사검법이 그렇게 패도적인데 왜 이사형은 익히 지 않았습니까?" "다른 곳에 눈을 돌릴 틈이 없었다. 나는 구소신공을 익히고 있는 중이다. 자하신공(紫霞神功)이 아무리 현묘해도 나는 그 밋밋함이 마 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구소신공을 택했다. 앞으로 한 오 년 정도 는 더 매달려야 할 것이다." "아!" 장문천은 탄성을 터뜨렸다. 이사형다운 파격이었다. 모든 제자들이 택하는 자하신공을 대신해 이미 사장(死藏)되다시피 하는 구소신공 을 택하다니…… 사실 이전부터 이사형의 그 용기는 부러웠었다. "이사형, 죽영파사검법이 강호 패자의 자리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장문천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만 말해 주겠다. 죽영파사검법은 지금 보아도 눈이 어지러울 것이다." "알겠습니다." 장문천은 그 말이면 족했다. "삼 년 뒤에 한 번, 오 년 뒤에 한 번 찾아가겠다. 그 동안 너의 종적은 내가 알아서 말해 두겠다. 이제 되었느냐?" "이사형, 감사합니다." 장문천은 포권으로 머리를 숙였다. 그는 열병에 걸린 것처럼 흥분 해 있었다. 내색은 않고 있었지만 죽영파사검법에 대한 열정으로 그 의 가슴은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가슴 가득한 답답함들도 한순간에 씻긴 듯했다. "가라!" 오세악은 손을 저었다. 장문천은 두 말 않고 등을 돌렸다. 오세악은 어둠 속으로 황급히 사라져 가는 어린 사제를 바라보며 천천히 주먹을 내밀었다. 복호권을 처음부터 다시 펼칠 작정이었다. * * * 청산(靑山)과 녹수(綠水)는 절로 푸르러만 갔다. 명강량은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머리 속에는 만 가지 생각이 맴돌 고 가슴속에는 만 가지 감정이 교차돼 명강량은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곡기를 언제 삼켰는지 몰랐고 한동안 마시던 술도 잊었다 . 그는 실혼인(失魂人)처럼 강변을 따라 걷고만 있었다. 봉두난발에 길게 자란 수염, 충혈된 눈에 꺼칠한 몰골, 칼을 차고 있지 않았다면 노숙자(露宿者)로 몰리기 딱 좋았다. 명강량은 화현(華縣)을 지나 위남(渭南)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이름 없는 곳치고는 제법 가호(家戶)가 많은 포구를 지날 때 였다. 명강량은 북적대는 사람들의 소음 속에 한 가닥 노래 소리를 들었 다. 가슴을 울리는 아련한 목소리였다. 그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둥글게 쭉 서 있었다. 명강량은 구경꾼들의 어깨에 이리 저리 밀리며 한 자리를 잡았다. 마희단이었다. 아이들 같이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노인, 그의 몸에는 두 마리의 원숭이가 재주를 부리며 매달려 있었다. 흉신(凶神)과 무신(武臣)으 로 분장한 두 명의 사내, 긴 창을 들고 있는 그들은 분장이 너무 두 꺼워 나이를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그들은 절묘한 창술로 서로를 공 격하며 격투를 벌이고 있었다. 소년은 땅재주로 구경꾼들에게 익살을 떨고 소녀는 꽃잎을 날리며 대바구니에 구경꾼들의 주머니를 담았다 .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마희단원들은 한꺼번에 자신들의 재주를 선보이느라 모든 것이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구경꾼들은 그것 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박수와 환호가 연신 터져 난장을 더했다. 악약은 그곳에 있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다 했더니 악약은 그 난장 판 속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는 혼동 속을 떠돌았다 . 난장판의 어수선함을 더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노래는 난장을 맴돌며 정연한 질서를 잡아 주는 듯했다. 그 때문에 난장은 더욱 난 장이었다. 개판으로 뒤엉켜도 흥취의 운율은 도도히 이어지고 있었다 . 그런 자리면 으레 등장하는 술주정꾼도 파락호들도 없었다. 그들도 흥에 취해 자신을 잊고 있음에 분명했다. 명강량은 머리를 긁적였다. 갑자기 피로가 억수같이 밀려왔다. 눈 앞이 침침하고 온 몸에 맥이 풀렸다. 잠이라고는 전혀 자 보지 못한 사람처럼 잠이 밀려왔다. 명강량은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마희단을 뒤로했다. 다른 모든 소란은 이제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악약의 노래 소리만 솔 바람을 타고 그의 귓가를 울렸다. 그는 마희단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신록(新綠)을 더해 가는 좋은 나무였다. 명강량은 그 나무에 앉아 등을 기댔다. 수마(睡魔)가 일순간에 그의 몸을 덮쳤다. 명강량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나무 위로 날아든 명조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를 바라보았다. 명강량은 눈까풀에 반딱반딱 하는 빛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이 부셨다. "일어났어요?" 그의 앞에는 악약이 서 있었다. 반딱반딱 하는 빛은 악약의 옷에 달린 패옥(佩玉)이 석양(夕陽)에 비치며 난 빛이었다. 명강량은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혼곤히 잠을 잤는 지라 일어나면서 다리가 비틀거렸다. "가요."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잡았다. 명강량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가 악약의 손에 끌려 포구로 향했다. "많이 찾았어요?" "……." "원래 나는 노래를 많이 부르지 않아요. 노래는 무향의 몫이거든요 . 하지만 오늘은…… 강량을 만날 줄 알았어요. 내 노래가 어떻던가 요?" "잠을 잔다고 듣지 못했습니다." 명강량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빨리 가요. 배가 곧 떠날 거예요." "배?" "재미있는 사람들이 타고 있어요. 그들에 대해서는 내가 나중에 이 야기해 주겠습니다."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잡고 뛰었다. 명강량은 주춤거리며 악약을 따라갔다. "오신 것을 환영하오. 배교의 전사(戰士)여……." 무무는 손을 앞으로 내밀며 명강량을 맞았다. 명강량은 악약을 바라보았다. "무무, 할아버지께서 타심통(他心通)까지 익혔을 줄은 정말 몰랐어 요. 강량이 배교도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죠?" 악약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타심통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만 이분에게서 불 냄새를 조 금 맡았을 뿐이지요. 허허허!" 무무가 원숭이를 어깨에서 내리며 웃었다. "자, 떠날 준비는 모두 끝났느냐?" 그가 배를 둘러보았다. 무생, 무정, 무혼은 출항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무혼이 닻을 올리며 손을 들었다. 무정이 조타를 맞추었다. 배가 강심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갑판에는 길다란 식탁이 놓여 있었다. "저쪽으로 갑시다." 무무는 명강량을 식탁으로 안내했다. 무생, 무정, 무혼도 배를 강 심으로 이끈 후 조타를 고정시키고 식탁으로 걸어왔다. "무향, 음식을 들여오너라!" 무생이 선실을 향해 소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반갑소. 우리는 원래 통성명을 좋아하지 않아 인사는 이것뿐이오. " 그가 명강량을 바라보며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무정은 눈짓만 한 번 보냈을 뿐 고개도 까딱 않았다. "형, 나는 예전에 우리 마희단에 있던 검둥이라는 곰이 왜 갑자기 생각날까! 히히히…… 누님의 연인은 과연 생긴 모양도 별다르군!" 무혼이 이마를 치며 까불었다. "무혼!" 악약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자, 나가요!" 선실문이 열리며 무사가 양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접시를 들고 나왔다. 무향은 머리에도 접시를 올리고 있었다. 무색이 든 접시에는 향로와 소금 등이 담겨 있었다. "아얏!" 무색은 선실문을 나서며 비명을 질렀다. 선실문에 발이 걸려 무색 의 몸은 휘청 기울었다. 마희단 출신답게 몸이 빨라 볼상 사납게 나 뒹구는 꼴은 면했으나 접시는 와장창 조각 나는 것을 면치 못했다. "허허허, 별일이구나. 무색이 저런 실수도 다 저지르고……." 무무가 손녀의 실수를 좋아라 했다. 마침 분위기가 서먹서먹하던 판이었다. "나는 알지. 큰누나가 왜 자빠졌는지……." 무혼이 장난스런 눈빛으로 의자를 까딱였다. "그 나무 아래는 한 남자가 졸고 있었지. 봉두난발에 꼭 곰 같은 사내였다네. 큰누나는 곰을 좋아해. 마음이 콩밭으로 갔다네." 그는 식탁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무색의 얼굴이 홍시(紅枾)처럼 붉어졌다. 그녀는 후다닥 선실로 다 시 뛰어들어갔다. "정말이었네! 정말이었네!" 이번에는 무향도 입을 맞춰 무혼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허허허……." "하하하!" 무무도 웃고 무생, 무사도 웃고 악약도 웃었다. 분위기가 조금 풀 어진 듯했다. "작은누나, 왜 여자들은 곰 같은 남자를 좋아할까?"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 언니가 없으니 어머니에게 물어 보렴." "아버지는 곰 같이 생기지 않았잖아." "네 아버지는 낮에는 곰이 아니지만 밤에는 곰 같이 된단다." 무사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하! 아버지는 변신술(變身術)도 익혔군. 나중에 그 수법을 배워 나도 여자 앞에서 써먹어야겠다." "네 얼굴은 변신을 부려도 늑대나 너구리가 고작이다." 무향이 접시를 탁 놓으며 말했다. 무사와 무색, 무향은 몇 번을 선실을 들락거렸다. 식탁이 꽉 찰 정도의 성찬이었다. 재료가 흔한 것들이라 양백이 차려 준 음식에 비하면 격이 많이 떨 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도 식탐이 자극되었다. 지지고 굽고, 볶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공자, 맛있게 드시오." 음식이 차려지고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 앉아 무무는 명강량에게 음 식을 권했다. 한바탕 신나게 논 후라 모두 출출한 상태였다. 악약을 비롯 무무 등은 환담을 나누며 맛있게 식사를 들었다. 말이 없는 자는 명강량과 무정뿐이었다. 술잔도 몇 순배 돌았다. 명강량은 자신에게 쏠리는 술을 마다 않고 모두 받아 마셨다. 십 여 잔은 족히 마셨을 것이다. 식사가 끝난 후 에도 그들은 술을 즐겼다. 무색은 안주까지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오늘은 유난히 무색의 음식 솜씨가 좋구나." 무생이 거나한 얼굴로 술을 들며 말했다. "음식 솜씨만 좋은 줄 알아. 가만히 있는 꼬락서니 좀 봐! 요조숙 녀가 따로 없다니깐!" 무혼이 술을 쪽 빨며 소리쳤다. "무혼!" 무색은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대뜸 술병을 잡더니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마셔 버렸다. 탁! 그녀가 술병을 놓으며 명강량에게 눈길을 돌렸다. "공자, 우리 배에는 철칙이 있어요. 처음 오는 분은 무조건 자신이 지닌 재주 하나를 선 보여야 한다는 거예요." 그녀가 쏘듯이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맞았어. 악약, 누이도 노래를 불렀잖아." "비파도 탔었지." "예쁘고 귀엽지도 않잖아. 악약, 누이는 예쁘고 귀여워 재주를 부 리지 않아도 봐 줄 것은 있었지." "한 사람만은 예쁘고 귀여운 모양이던데." 무혼과 무향은 한 마음으로 말을 맞췄다. "껄껄껄!" 무무가 술잔을 기울이며 웃었다. 무무를 비롯한 그들은 모두 흥미 로운 눈빛으로 명강량을 바라보았다.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명강량은 원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다. 남에게 나서기를 극히 꺼려했다. 그리고 가진 바 재주도 없었다. 악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같이 노래 를 불러 주려 했다. 그러나 명강량은 악약의 생각과 달리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가 자 리에서 일어났다. 명강량은 무심한 눈빛으로 신장도를 뽑았다. 그의 재주는 칼부림 말고 다른 재주가 있을 리 없었다. 파팟! 명강량은 신장도를 뿌렸다. 명옹으로만 이어지는 배교의 절 학, 양천등광도법이었다. 투로는 성하(盛夏)의 태양처럼 강렬하게, 몸놀림은 바위처럼, 발걸 음은 물 흐르듯 유유하게……. 명강량은 신장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잠깐 사이 이마에 땀 방울이 솟았다. 적을 상대로 싸워도 그만한 심혈을 기울이지는 않았 을 것이다. 파팟! 팟! 명강량의 검무(劍舞)는 수를 더할수록 화려함을 더해 갔 다. 경건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무무와 무생의 눈빛은 빛나고 악약은 '아!' 하는 탄성을 터뜨렸다. 무정이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소화창(小花槍)이 들려 있었다. 무정은 누가 붙잡을 틈도 없이 휙! 하며 신장도의 그늘 속으로 뛰 어들었다. 명강량은 신들린 듯했다. 그의 눈빛은 이상한 광채까지 뿌리고 있 었다. 그래서 그는 무정조차 안중에 없었다. 그저 손 가는 대로 신장 도를 휘두를 뿐…… 때문에 무정의 신형은 순식간에 신장도의 그늘에 가렸다. 명강량의 도세(刀勢)가 갈수록 바빠졌기 때문에 무정은 신 장도의 칼날 아래 피를 뿌릴 것 같았다. 그러나 무정은 소화창을 휘 두르며 용케 명강량의 칼날을 피해 갔다. 챙! 챙! 챙! 신장도와 소화창이 부딪히며 불꽃을 일으켰다. 무정은 명강량의 공세를 합으로 잠시 차단한 후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예를 펼쳐 나갔다. 파팟! 팟! 쉬쉭! 창칼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얽혔다. 악약은 초조함으로 주먹을 쥐었다. 그녀의 손바닥은 이내 땀으로 끈끈해졌다. 명강량과 무정은 서로에 대해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난 듯 그들은 서로를 향해 창칼을 날렸다. 용쟁호투(龍爭虎 鬪)였고 용호상박(龍虎相搏)이었다. 기어이 한 명은 피를 볼 것 같았 다. 하지만 무무, 무생, 무사는 느긋한 표정으로 지켜만 보고 있었다 . 무색, 무향, 무혼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해 하는 사람은 악약뿐이었 다. 명강량과 무정은 삽시간에 백 여합을 넘게 겨루었다. 악귀들의 다 툼 같은 칼부림에 점차 변화가 생긴 것은 그때부터였다. 명강량과 무정의 격투가 선율을 타기 시작했다. 명강량이 공격하면 무정은 기다렸다는 듯이 막고 무정이 공격하면 명강량의 신장도는 무정의 소화창을 반갑다는 듯이 그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자들이 보았으면 약속대련(約束對鍊)이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 이다. 하지만 명강량과 무정은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은 사이다. 창칼을 뻗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상대의 공세를 의식하고 창칼을 뻗지 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비무는 마치 방금 무생과 무정이 난장에서 벌인 연희의 박투처럼 손발이 척척 맞아 돌아가고 있었다. 명강량의 전신은 땀으로 질퍽했다. '상상할 수 없는 고수다.' 그는 그때가 되어서야 무정의 실력을 느끼고 있었다. 백 여합 동안 무정은 자신의 양천등광도법을 모조리 꿰어 버렸다. 투로뿐만 아니 라 자신의 몸짓까지 모두…… 때문에 무정은 신장도가 움직이는 그 순간에 자신의 초식 변화를 모두 읽었다. 그래서 방어가 가능했다. 무정의 공격은 우습게도 명강량이 펼치는 양천등광도법이었다. 명강 량이 양천등광도법의 한 초식을 펼치면 그 다음 초식은 무정이 펼쳤 다. 밖에서 보기에 손발이 맞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명강량은 감정은 세파에 시달려 죽을 때로 죽어 있었으므로 그나마 호들갑을 떨며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신장도를 거두어들임 으로써 한바탕의 칼춤을 끝마쳤다. 그가 신장도를 허리에 차며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무정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훌륭하오!" 무무와 무생, 무사는 명강량에게 박수를 보냈다. 악약은 손수건으 로 명강량의 땀을 닦아주었다. "우리 배에서 재주를 선 보였던 자들 중 가장 형편없는 재주였어!" 무혼은 고압자(高鴨子)를 우걱 씹었다. "그래도 열심히는 했잖아." 무향이 말했다. "재주가 없으면 당연히 열심이라도 해야지! 사실 그 정도의 재주면 여기 차려져 있는 음식 몇 조각 대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구! 식탁 도 성대하고…… 악약, 누님이 땀까지 닦아 줄 필요는 더욱 없잖아!" 무혼이 명강량의 귀는 안중에도 없이 소리쳤다. "깔깔깔! 네가 화를 내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구나. 오소리에게 실 컷 두들겨 맞은 너구리같은 놈아!" 무향은 머리를 찰랑이며 깔깔댔다. "너희들은 이제 그만 까불어라!" 무사가 엄하게 나무랐다. 무향과 무혼은 쳇! 하며 입을 닫았다. "자, 일단 모두 같이 술을 한 잔 하고……." 무무가 잔을 들었다. 그들은 잔으로 허공에서 건배하며 술잔을 비 웠다. 무무가 일어났다. "공자의 재주를 보았으니 이제 우리의 재주를 보여 드려야겠지요." 그는 갈고를 들었다. "지겨워!" 무혼은 입을 삐죽이며 박판을 들었다. 무생과 무사도 강적과 필율 을 잡았고 무정은 저만치 떨어져 나팔을 목에 걸쳤다. "악약, 언니! 비파를 가져올까요?" 방향을 들고 나오던 무향이 물었다. 악약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져와. 비파는 내가 탈게." 무색이 말했다. "웬일이야? 무색, 언니가 오늘 따라 별스럽네. 생전 악기는 근처에 도 가지 않으려더니……." 무향이 동그란 눈동자를 굴렸다. "악기를 잡고 있으면 남자들이 고고하게 볼 것이라 착각하는 어떤 얼빠진 여자들도 간혹 있더군. 내버려둬!" 무혼이 소리쳤다. 무색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향이 가져다주는 비파의 줄을 골랐다. 줄이 맞춰지자마자 그녀는 벼락 같이 손끝을 놀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잠깐 사이에 현 위를 수 백번 오가는 듯했다. 악약 못지 않은 빠르기로 첫 음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마지막 음이 퉁겨지고 있었다. 무색은 무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무가 북통을 탁! 치자 의외로 무향이 아니라 무색이 노래를 뽑았 다. "삼세(三世) 후에 그대를 볼 것이다. 그때 만나……." 무색의 목소리는 여자로서 보기 드문 거친 저음이었다. 하지만 낮 은 중에서도 투명하게 맑아 야릇한 정취를 일으켰다. 무색이 그 목소 리로 몇 소절을 읊자 처음에 시큰둥하게 악기를 잡던 무혼도 이내 가 락에 빨려 들어갔다. 뱃전에는 무무 일행의 노래와 물소리만 요란했다. 악약은 명강량의 곁에 몸을 바짝 붙였다. 풋풋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명강량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강량, 강량은 저들이 누군지 아세요?" "나는 오늘 그들을 만났습니다." 명강량은 잔을 들었다. "일전에 들려준 주강의 배라는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기억합니다." "그들은 바로 그 꽃배를 탄 자들입니다." 악약이 말했다. 명강량은 악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 줄 알아서 고개 를 끄덕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들은 주강의 대인과는 달라요. 저들은 저 먼 곳으로 가 려 하지 않습니다. 강가에서 만난 여인과 노니는 것을 더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꽃배가 이리저리 흘러 처음의 그곳으로 다시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명강량은 술잔을 기울였다. "그래서 저들은 교룡이 된 자들입니다. 즐거움을 찾아 승천(昇天) 을 거부한 교룡……." 악약은 두 눈을 빛냈다. "가끔 나는 저들이 부러울 때가 있어요. 저 먼 곳까지 가기는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아 버렸기 때문이에요. 강량……." 그녀가 은밀한 눈빛으로 명강량을 불렀다. 명강량은 눈길은 여전히 술잔에 가 있었다. "강량, 우리도 이 배를 타고 다니면 어떻겠어요? 저들도 우리를 싫 어하지는 않을 거예요." 악약의 말에 명강량은 고개를 들었다. "이곳이 재미있습니까?" 그가 술잔을 흔들며 물었다. 잔에 담긴 술이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재미있어요! 아주 재미있어요! 강량도 같이 있다 보면 이곳이 얼 마나 재미있는지 알 거예요." 악약은 좋아라 하며 손뼉이라도 칠 자세였다. "마음에 드는 곳이라니 다행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여기에 머무 르면 되겠지요." 명강량은 술을 들이켰다.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그가 술병을 들었다. 악약은 술잔을 들며 머뭇거렸다. 오랜만에 보아서인지 명강량이 이 상하게 낯설어 보였다. 행동도 그 같지 않았다. "이 배는 좋은 것으로 갈 것입니다." 명강량이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의 말이 없었 다. 밤은 깊어 갔다. 명강량은 뱃전에 서 머리를 긁적였다. 강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휩 쓸고 지나갔다. 정말 보내기 싫었다. 죽더라도 같이 있고 싶은 것이 그의 본 마음 이었다. 하지만 보내야 한다. 어떤 형태의 헤어짐이던 그 헤어짐은 얼마의 시간을 남겨 두지 않고 있었으므로……. 보내고 나면 어떻게 될까? 홍동에서는 솔직히 적들과 싸우다가 죽 을 것이라는 간단한 마음으로 그 물음을 정리했다. 문제는 언제나 살 아 있을 동안인데……. 부유하는 마음으로 있기 싫었다. 그것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 비참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벽을 쌓기로 했다. 성녀를 향하는 마음에 대한 두터운 벽이었다. 신기하게 그 벽은 잘도 자라 줬다. 때문에 그는 오늘 성녀를 만났 어도 담담할 수 있었다. 좋은 징조다. 자, 이제 정말 적들과 싸울 일 만 남은 것이다. 안락국 보다는 이 배가 나을 듯했다. 안락국은 쓸쓸한 곳이다. 하 지만 이 배에는 성녀를 즐겁게 해 줄 사람들과 일들이 지천으로 기다 리고 있었다. 적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무정이란 자… … 최소한 우제준이나 자신 보다 두 서너 배는 강한 자임이 분명했다 . 무무, 무생, 무사…… 그들은 무정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 을 것이다. '잘 되었어. 너무 잘 되었다.' 명강량은 물결에 흔들리는 배의 난간을 잡았다. '잘 가시오.' 그는 어깨를 폈다. '운악약…….'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는 몸을 꼿꼿이 세운 채 바 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황하는 넓다. 강변까지 헤엄쳐 갈 수 있을지 몰랐다. 악약은 벌떡 잠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당탕! 그녀는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은 채 선실문을 열었다. 그 녀는 다급히 옆방의 문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방, 역시 명강량 은 없었다. 악약은 후다닥 무무의 선실을 향해 뛰어갔다. "무무!" 그녀는 선실문을 두들겼다. 무무가 마의를 걸치고 나왔다. "강량, 강량이 없어졌어요!" 악약이 소리쳤다. "그를 따라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무무의 물음에 악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무생……." 무무가 무생을 불렀다. 무생과 무사는 어느 틈에 악약의 뒤에 서 있었다. "아가씨를 보내 드려라." 무무가 악약과 함께 뱃전으로 나서며 말했다. 악약은 황급히 뱃전에 올랐고 무무와 무생이 그 뒤를 따랐다. "이제 가면 언제 볼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참으로 먼 훗날이 되어서야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 그럴 것 같군요. 무무, 고마웠어요." 악약은 머리를 숙였다. "감사 드려야 할 사람은 오히려 우리입니다. 아가씨를 모실 수 있 는 영광을 주셨으니……." 무무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무무, 약속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악약이 문득 생각난다는 듯 물었다. "물론입니다." 무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지요." 무생은 손에 문짝 반반한 널빤지를 들고 있었다. 그가 그 널빤지를 강물에 던졌다. 무생이 악약을 껴안고 그 널빤지 위에 뛰어 올랐다. 돛도 없고 노 도 없었다. 그러나 악약과 무생을 태운 널빤지는 쏜살 같이 강물을 가로질렀다. 일위도강(一葦渡江)! 강호인들이 보면 나자빠질 신법이었다. - 무생의 손에 끌려 강물을 빠져 나오는 명강량을 보는 순간 악약 의 가슴은 쿵 떨어졌다. 무심한 눈빛! 그 눈빛은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그녀에게는 너무 도 이질적이었다. 그녀는 그 이질감에 놀라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강량, 강량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내가 있지요." 그녀는 더듬거리며 그 말만 했다. 명강량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렸다. 물이 줄줄 흐르는 명강량의 뒷모습이 악약의 눈앞에 있었다. 가슴 이 아파 왔다. 그녀는 한순간에 명강량에게서 느낀 이질감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뜻대로 되었으면 했다. 그러나 악약은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명강량은 모진 사람이 못되었다. 그래서 가슴이 더욱 아팠다. 제20장 대전왕(大戰王) 비함에는 비문 대신 이상한 소년이 서 있었다. 비함을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은 배교로서는 큰 사건이다. 상대 가 소년이고 아니고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명강량은 신장도에 손 을 댔다. 소년은 명강량의 아래, 위를 초조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이 황급 히 무릎을 꿇었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소년이 오체투지로 몸을 낮추었다. 명강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배교의 인물? 배교의 인물이라도 명사 외는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 자는 없었다. "명옹이 틀림없겠지요?" 소년이 일어나며 물었다. 명강량은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곳에 떨 어뜨려 놓아도 살아남을 영악스럽게 생긴 소년이었다. "명옹, 저는 황기명사의 매영인(媒影人)입니다." 소년이 말했다. '매영인?' 그제야 명강량은 아! 했다. 배교도들은 다른 방파와 달리 방주의 독선은 없다. 후임자를 선임 하는 것도 절대로 그들의 선택이다. 명옹은 명옹만 선임하고 명두는 명두를 명사는 명사를 선임한다. 물론 명옹의 경우는 명두들의 추인( 追認)이 있어야 하고 명두와 명사는 명옹의 추인이 있어야 하지만 명 강량의 경우를 제외하고 통상 그것은 요식적 행위에 불과했다. 매영인, 매영자(媒影子)라 불리기도 하는 이들은 바로 명사가 다음 대를 잇기 위해 준비해 둔 자들이다. 당연히 교의 일에 얼굴을 보이 지 않아야 옳았다. 특히 차기 명사가 되기 위해서는 더욱…… 그런데 소년은 지금 명강량의 앞에 서 있었다. 매영인까지 동원해야 할 급 박한 사정이 황기명사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접고 팔짱을 꼈다. "사부님은 의창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명옹을 만나기로 한 줄 압 니다. 저는 명옹의 길이 늦어질 수 있다며 이곳에 남게 했습니다. 명 옹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저로서는 다시없는 영광입니다." 소년이 흥분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름이 무엇이라 했지?" "방남(龐男)! 방남이라 합니다!" 소년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좋은 이름이로구나." 명강량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영악한 모습과 달리 부끄러움 이 많은 모양이었다. "황기(黃旗)가 관할하는 곳은 중원의 허리이니 가장 일이 많은 곳 이다. 뿐만 아니라 황기는 다른 기들의 수장 역할까지 해야 한다. 너 는 그 어려움을 알고 신중히 행동하라." "알겠습니다." 방남이라는 소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앞에 있어 명강량은 현 존하는 전설이었다. 유향경천문, 무당, 화산…… 숱한 문파의 깃발이 명옹의 신장도 아래 꺾였다. 사정이야 어쨌든 어린 마음에 그만한 우상은 없었다. 명옹을 열심히 보좌해 반드시 배교일세를 이루리라… …. 방남은 그런 생각을 하느라 잠시 자신이 이곳에 서 있는 이유를 잊 고 있었다. 명강량은 급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방남을 재촉하 지는 않았다. 방남은 명옹을 모시고 적도들을 호호탕탕 소탕하는 상상까지 마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임무를 자각했다. "명옹, 강서의 장 명두와 절강의 오 명두가 적도들의 칼에 의해 명 계로 입적하셨습니다." 방남이 비분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 다른 표정은 없었다. "그 더러운 모태명이라는 놈의 짓입니다. 놈은……. 놈은……." 방남은 흥분으로 말도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두 명두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강남의 교도들을 이 잡듯 하고 있습니다. 유향경천문이나 강남의 중소방파들은 강남의 내부 사정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흑룡방은…… 흑룡방 놈들은 이런저런 관계로 강남 교도들의 사정도 조금 알고 술수가 워낙 독해 고문도 서슴지 않 기에 강남은 초토화 될 지경이라 합니다." 방남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명강량은 머리칼을 쓸었다. 유향경천문, 구대문파, 단혈철각련……. 누군가가 빠진 듯했었다. 생각해 보니 바로 모태명의 흑룡방이었다 . '이제 남은 것은 왜수의 백인회인가.' 명강량은 모태명이 왜 배교 타파에 나섰는가는 묻지 않았다. 그가 궁금한 것은 이 일이 황기명사가 매영인까지 보낼 정도로 급박한 일 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강남 장 명두, 오 명두의 죽 음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으므로……. 적도가 모태명이라는 의외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매영인을 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야 매영인을 보내지 않아도 강 호의 소문으로 충분히 알 일……. 황기명사는 자신으로부터 무슨 답을 듣고 싶었을까?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자의 자신의 행보와 신탄에서의 일전 으로 인해 교도들은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 다. 결말은 좋지 않을 지라도 와중의 흡족함은 충분히 느낄 것이다. 대세는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결정 났었다. 당한 값의 십분의 일 정 도는 돌려주어야 한다. 모두가 원하는 일! 싸울 것이다. 모두가 원하지 않아도 혼자라도 싸울 것이다. 싸우지 않고는 스스로를 견딜 수 없었다. "방남……." 명강량은 분노로 입을 자근자근 깨물고 있는 방남을 불렀다. "황기명사에게 연락하라. 동원 가능한 강남의 모든 교군들은 악양 에 모인다." 명강량은 품속에서 삼각형의 깃발을 꺼냈다. 전교영기! 그가 방남의 눈앞에 전교영기를 세웠다. "배교일세! 명옹광휘!" 방남은 소년답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부복했다. 무산대전에서 명강량은 천하를 상대로 한 배교의 성전(聖戰)을 선 언할 계획이었다. 흑룡방과의 싸움은 강호에 배교의 성전을 알리는 서전(緖戰)의 대상으로 제격이었다. 산굽이를 돌아가는 길이었다. 새 소리만 요란한 그 길은 멀고 한적 했다. 명강량과 악약은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한가로와 그들 은 만춘(晩春)을 즐기는 선남선녀(善男善女) 같았다. 악약은 들꽃 십 여 송이를 들고 있었다. 산길을 걸으며 꺾은 꽃들 이었다. "강량……." 산길을 걷던 악약이 문득 명강량을 불렀다. "그 비구는 누가 준 것이에요?" 그녀는 명강량의 손목에 차인 비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강량도 자신의 손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도 잊고 있었던 물건 이었다. "철 숙부라는 분이 준 것입니다." 그가 무심히 말했다. "그 비구가 어떻게 만들어 진 줄 알아요?" "모릅니다." "남만의 하희족(遐嬉族)이 만든 물건이에요. 천음관(天音管)이라는 악기예요." 악약의 말에 명강량은 고개를 들었다. 세상에는 성녀가 모르는 물 건도 있는 듯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그러나 악약은 철중달 보다 그 물건을 더 잘 알고 있었다. "하희족은 아주 손재주가 뛰어난 부족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그들 은 없어요. 이미 멸족의 길을 걸어 버렸거든요. 중원에서 철(鐵)이 들어왔기 때문이죠. 남만의 오지에 사는 부족들은 오랫동안 쇠를 만 져 보지 못했어요. 중원으로부터 쇠가 들어오자 그들은 서둘러 병기 를 만들었어요. 그것이 그들이 가장 필요로 했던 물건이었거든요. 하 지만 하희족은 달랐어요. 그들은 쇠로 장신구와 악기를 만들었어요. 쇠로 만든 병기를 휘두르는 다른 부족의 침략을 막아낼 방도가 없었 지요. 하희족은 그렇게 멸망했답니다." 악약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천음관을 만든 자는 하희족의 마지막 생존자예요. 그는 천음관을 만들며 생명을 다했지요. 그래서 여기 천음관에는 하희족의 즐거움과 하희족의 원한이 모두 함께 담겨 있어요. 나는 이 사실을 고금의 악 기들을 총평한 책에서 읽었어요. 그때는 정말 천음관이라는 악기가 있으리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애틋한 눈길로 천음관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비구를 바라보 았다. "강량, 그것을 이리 줘 봐요."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명강량은 비구를 풀어 악약에게 건넸다. 악약은 비구를 합장으로 쥐었다. "대천대계의 모든 맑은 빛들이여……." 그녀는 머리를 가볍게 숙이고 눈을 반개(半開)한 채 진언을 외기 시작했다. 나직이 중얼거리는 악약의 진언은 아주 빨랐다.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너무 빨라서가 아니라 중원의 말이 아닌 듯했다. 악약은 콧등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진언에 열중했다. 끝도 없는 중얼거림이 끝나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반 시진이 훌쩍 지난 후였다. "하희족의 원한이 풀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악약이 천음관이라는 비구를 소중히 감싸며 손가락으로 여기저기를 눌렀다. 명강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철중달은 비구 속에 숱한 암기 들이 들어 있다고 했었다. 자칫하면 악약이 다칠 줄 몰랐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 전에 비구에서 암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색 그물 , 은빛 침, 채홍색 연무……. 피핑! 핑! 쉬쉭! 하는 소리와 함께 비구에서 암기가 하늘을 덮을 듯 쏟아졌다.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명강량은 안색을 찌푸린 채 지 켜만 보고 있었다. 그 작은 비구 속에 들은 암기는 수십 종은 되는 듯했다. 악약은 반 각도 되지 않는 동안 그 모든 암기를 비웠다. 암기에 흥미가 있는 강호인들이 보았다면 땅을 칠 노릇이었다. 신나게 단추를 누르던 악약은 장난스럽게 비구를 흔들었다. 비구에 서 공명(共鳴)을 알리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동굴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바람 같은 음이었다. "이상해요. 하나가 더 들은 것 같은데…… 이것은 도통 나올 생각 을 않네. 음관(音管)인가?" 악약이 비구를 귓가에 대고 흔들었다. 명강량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악약의 손에서 비구를 뺏었다. 비구에 또 다른 암기가 들어 있을 줄은 정말 모르는 일이었다. 악약은 명강량의 마음을 알았는지 그의 거친 행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녀는 비구를 다시 받아 명강량의 팔에 채웠다. "이제 이 비구는 비로소 천음관이 되었어요. 보실래요." 악약은 대뜸 명강량의 팔을 잡았다. 그녀가 천음관이라는 비구에 입술을 갖다 댔다. 그녀는 명강량이 팔을 뺄 틈도 없이 천음관에 호 흡을 불어넣었다. 웅웅! 긴 뿔고동을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나며 천음관은 악약의 호흡 과 손가락의 놀림을 따라 음색을 만들어 냈다. 무겁고 장중한 음색이 었다. 아무리 밝고 경쾌한 음률이라도 천음관을 통과하면 장중한 소 리로 바뀔 것 같았다. 괜한 비장감(悲壯感)에 명강량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원하지 않 는 감정이었다. 악약을 그의 팔에서 떼려 했다. 그 전에 먼저 악약이 천음관에서 입을 뗐다. "음…… 천음관은 울기만 하는 악기인가 봐요. 이런 소리밖에 나지 않네." 그녀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저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드리겠습니다." 명강량은 천음관이라는 비구를 풀었다. "아니에요. 그것은 강량이 선물 받은 것이잖아요.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선물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에요. 가지고 계셔요. 제가 부는 법을 가르쳐 드리겠어요. 그리고…… 강량은 저에게 따로 선물할 것이 있잖아요." "……." "기억하지 못하는가 보군요. 내가 양 아저씨의 배에서 화령주를 선 물했던 일을……." 악약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령주를 돌려 드리겠습니다." 명강량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악약은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나는 다른 선물을 받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강량에게 말하겠어요 ."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은 눈을 시리게 했다. 명강량의 가슴은 노도 속의 작은 배 처럼 흔들렸다. 그래서 화가 났다. 명강량은 입을 굳게 닫았다. 그는 묵묵히 발길을 재촉했다. 한 구비를 돌았을 때였다. "강량, 어디로 가는 거예요?" 악약은 문득 이 길이 자신들이 가야 할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 다. 명강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산으로 가는 길이 아니었어요?" 악약이 달려가 명강량의 앞을 가로막으며 물었다. "악양에 볼일이 있습니다." 명강량이 마지못한 듯 대답했다. "악양으로 가는 길이었군요. 잘 되었어요. 저번에 강량 혼자 강남 에 가서 섭섭했거든요. 나는 아직 악양루(岳陽樓)를 한 번도 보지 못 했어요. 동정호(洞定湖)도.……." 악약이 좋아라 했다. 하지만 명강량은 무정하게 악약의 기분에 찬 물을 끼얹었다. "성녀께서는 형주(荊州)까지 가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 다른 곳으 로 인도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강량……." 악약은 아미를 모았다. "강량, 악양에는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군요." "……." "나도 같이 가겠어요." "성녀께서 있을 자리가 못 됩니다!" "나는 그곳에 있어야겠어요. 나는 싸움을 용인하는 성녀가 되지는 않겠어요. 피의 갚음을 피로 하려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세상에 없 어요." 악약의 어조가 의외로 강경했다. 교의 일에 대해 특별한 고집을 부 린 적이 없었는데……. "세상 밖의 일은 성녀에게 돌리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의 일은…… 성녀께서는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호교신장의 몫 입니다." 악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명강량은 그녀를 지나쳐 갔다. 악약은 고개를 숙인 채 발길을 뗐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 다. 명강량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섭섭했다. 그녀가 힘없 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도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전우삼은 눈을 뒤룩 사방으로 돌렸다. 마차를 타고 며칠, 말을 타고 다시 며칠, 벽호(壁虎)처럼 산길을 오른 것도 며칠이었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이었다. 준령들은 첩첩이 쌓여 있고 수풀은 하늘을 가렸다. 장막에 가려진 마차를 타고 온 덕에 전우삼은 자신이 있는 곳의 위 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걸린 시간과 산세의 웅장함을 생각하 면 종남(終南)의 산줄기 어디인 듯했다. 전우삼은 지금 준령들 사이에 자리한 오 십여 호의 작은 마을을 지 나고 있었다. 입구에 세워진 크다란 석비가 그 마을의 이름을 알려주 었다. 만인촌(萬認村)! 백의 노인과 흑의 노인은 만인부에서 왔다고 했다. 필경 만인촌은 만인부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목적지가 멀지 않았으리라 전우삼은 생각했다. 만인촌의 연륜은 족히 수 백년은 되는 듯했다. 마을의 표비인 석비 의 글자가 흐릿할 정도로 풍상(風霜)에 씻겨 있었다. 전우삼은 백의 노인과 흑의 노인을 느긋하게 뒤따르며 마을을 살폈 다. 화전민(火田民)들이 사는 곳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정갈했다. 세상의 근심을 피해 숨어든 은자(隱者)들의 거소로 보기에는 너무 화 려했다. 해가 아직 중천을 가리키고 있건만 사람의 그림자는 찾을 길 없었다. "궁금한 것이 많을 줄 안다." 백의 노인이 잔잔하게 웃으며 전우삼을 바라보았다. "궁금증을 풀어 줄 사람은 따로 있다. 지금 자네를 기다리고 있을 것일세." 그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전우삼은 눈을 굴리며 마을을 지나쳤다. 만인촌을 지나 반 마장 정도 더 수풀을 헤치자 깎아지른 석벽이 나 타났다. 날짐승들도 기대기 힘들 정도의 깎아지른 석벽이었다. 그 석 벽에는 한 사람 정도만 간신히 올라갈 수 있을 나선형의 돌계단이 놓 여져 있었다. "저기에 있는 사람이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이겠군." 전우삼이 석벽을 쳐다보며 고개를 뺐다. "그렇다. 노관(老官)께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지." 백의 노인이 말했다. "노관?" 전우삼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노관은 배교에서 제의를 주관하는 자다. 역시 자신을 데려온 노인 들은 배교도가 맞는 모양이었다. 노인들이 노관까지 거론하자 전우삼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노인들이 배교도라는 확신이 들자 실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가 지금 만나고자 하는 배교의 동도는 나백과 염왕이었지 다른 동 도들은 아니었다. 전우삼은 발끝으로 흙을 툭툭 찼다. "생각해 보니 나는 무척 바쁜 사람이었소." 목적지에 도착한 순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임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들도 한가한 사람들은 아니다!" 흑의 노인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노인도 한가한 사람이 아니고 나도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 우리는 각자의 길로 가면 되겠구려." 전우삼은 대월로 신발에 묻은 흙을 털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각자의 길을 원했던 사람은 바로 나다! 대노관(大老官)과 여기 계 신 형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네놈을 찾아다니는 견마지로(犬馬之勞)를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인촌에도 사람은 많다! 천하를 우리의 깃발로 덮어 버릴……." 흑의 노인이 한광을 쏟았다. "노제(老弟)……." 백의 노인은 가만히 손을 들었다. 흑의 노인이 냉랭한 시선을 먼 산으로 돌렸다. "우삼, 자네를 찾아낸 사람은 바로 아우일세. 아우의 성격이 원래 그러하니 개의치 말고 듣게나. 바쁜 일이 있다고 했지? 이왕 우리를 위해 며칠을 내어 준 것 다시 몇 시진만 더 내어 주게나. 그 이후에 는 자네를 간섭하는 사람은 없을 것일세." 백의 노인이 말했다. 전우삼은 흑의 노인을 향해 입을 삐죽였다. 뭐라고 한 마디 하려다 그는 그냥 입을 닫았다. "노관이라는 분은 저 위에 계시오?" "만인부는 바로 저 곳에 있네." 백의 노인이 석벽의 끝을 가리켰다. "알았소." 전우삼은 퉁명스럽게 말하며 석벽에 아슬하게 만들어진 계단에 발 을 디뎠다. "그 쓸데없는 도끼는 여기 내려놓고 가라!" 흑의 노인은 단번에 전우삼의 대월을 뺏었다. 전우삼은 흑의 노인을 도끼눈으로 노려본 후 '쳇!'하며 계단을 올 랐다. 백의 노인과 흑의 노인은 그를 따라오지 않았다. 계단을 성큼 올라가던 전우삼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노인들은 누구요?"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배교의 혼은 영원히 멸하지 않네. 나는 불사혼(不死魂), 도예(都 叡)라고 하네. 아우는……." 백의 노인이 잔잔한 미소로 흑의 노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흑의 노인은 먼 산만 바라보며 미동도 않았다. 백의 노인은 가는 한숨을 쉬었다. "아우는…… 패하지 않는 배교의 혼, 불패혼(不敗魂) 예광(芮光)일 세. 우리는 만인부의 쌍혼(雙魂)들이라네." 그가 흑의 노인을 대신 소개했다. 소매 길이가 짧은 단삼(單衫)을 입을 자들이었다. 만인부! 석문을 지키고 있던 그들은 공수(拱手)로 전우삼을 맞았다 . 그리고 석문을 열었다. 크르르르르……. 석문이 괴음을 내며 열렸다. 전우삼은 안색을 찌푸렸다. 짙은 향 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는 석 문을 지키는 자들을 향해 포권한 후 석문으로 들어섰다. 크르르르……. 쿵! 괴음과 함께 석문이 다시 닫혔다. 어둠이 찾아왔다. 석문 안에는 작은 문 하나가 더 있었다. 전우삼은 그 문을 열었다. 요요로운 빛줄기가 한꺼번에 쏟아지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했 다. 그 빛에 적응하기 위해 전우삼은 몇 번이고 눈을 비벼야 했다. 시야가 빛에 적응되자 전우삼은 주위를 살폈다. '아!' 전우삼은 탄성을 터뜨렸다. 석실은 자신이 왜소하게 보일 정도로 넓었다. 그리고 온갖 종류의 보석과 조형(造形)들로 치장되어 있었다 . 눈을 부시게 한 빛은 야광주(夜光珠)의 빛이 보석에 반사되어 나는 빛이었다. 전우삼은 석실의 웅장함에 압도되어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무 엇보다 그를 위축되게 한 것은 석실의 정면에 세워진 거대한 석상이 었다. 대화로의 불빛을 받아 석상은 붉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전우삼은 자신도 모르게 그 석상을 향해 걸어갔다. 이 장여 크기의 석상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석상은 붉은 색이 아니 라 재질이 흑요석이라 온통 검었다. 허리에는 긴 칼, 태양처럼 둥근 호심경, 사자상이 새겨진 요대, 전신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우삼은 경외감(敬畏感)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그의 시선은 조심 스럽게 석상의 얼굴을 쫓았다. 호목(虎目)에 뚜렷한 콧날, 굴곡이 뚜렷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벽안 인임을 나타내 주는 자였다. 머리칼은 무릎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고 수염도 배를 가렸다. 전우삼은 석상의 전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몇 걸음을 물러났다. 대화로의 열기는 맹렬했다. 그는 화기를 견디지 못해 다시 몇 걸음 을 물러났다. '누구일까?' 전우삼은 석상을 쳐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글거리는 대화로……. 다른 말 할 필요 없이 석실은 배교의 성전(聖殿)이 맞았다. 배교의 성전에 조상(造像)으로 모셔질 자는 초대 명옹 정도는 되어야 했다. 명왕은 원래 형체를 그릴 수 없는 분이라 조상으로 모시지 않으니… …. 전우삼은 초대 명옹의 조상을 본 적이 없다. 옛날에는 총단에 조상 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파를 자처하는 놈들의 내습으로 파괴되어 버렸다. 그 후에도 몇 번 조상은 만들어졌으나 그때마다 적 들의 공격에 의해 초대 명옹의 조상은 파괴되었다. 때문에 전대의 교 도들은 더 이상 조상을 만들지 않았다. 초대 명옹의 조상이 적들에게 난자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만들이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그 후 초대 명옹의 모습은 한 장의 그림으로만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초대 명옹의 화상은 명두들의 모임인 대전 때나 교도들의 총모임인 대성회(大聖會) 때 공개된다. 전우삼이 있는 동안에는 대성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명두가 아니었으므로 대전에 참가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초대 명옹의 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석상을 초대 명옹의 조상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하 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철갑묵인(鐵甲墨人)의 석상은 주 명두에게 들었던 초대 명옹의 상 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눈앞의 석상은 한 마디로 전신(戰神)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주 명 두가 설명해 준 초대 명옹은 보권을 들고 온화한 표정으로 교화에 열 중하는 문사의 모습이었다. 초대 명옹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럼 초대 명옹이 아니 라면……. 배교에도 한 뿌리에서 나더라도 다른 가지는 있다. 전우삼은 석상으로 새겨진 인물을 만인촌을 만들었던 배교의 한 지 파 수장 정도로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전우삼은 쓴맛을 다셔야 했다. 중원의 배교도들이 그런 자들을 부르는 말은 '이단' 외에는 없었다. '흥! 처음부터 노는 꼴들이 수상쩍더니…….' 전우삼은 코방귀를 뀌며 석상에서 등을 돌렸다. '노관이라는 작자는 왜 나타나지 않는 게야.' 그는 석실을 서성거렸다. 석실을 서성거리던 그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저건 또 뭐야?' 전우삼은 벽을 향해 걸어갔다. 좌우 벽에는 정교한 부조(浮彫)들이 쭉 새겨져 있었다. 모두 싸우는 장면이었고 사천왕(四天王)이 마군들을 쫓듯 긴 장검 으로 종횡 하는 자는 바로 석상의 인물이었다. 부조는 너무도 생생해 전우삼은 비명과 피비린내가 어우러진 살육 의 한 가운데 있는 듯했다. 석상 인물의 움직임을 따라 그도 주먹을 불끈 쥘 정도였다. 전우삼은 등을 돌렸다. 부조에 흥미를 느낀 그는 우측 벽 끝에서부 터 하나씩 그림들을 보기로 했다. 부조는 열 여섯 개의 각기 다른 장면들로 새겨져 있었다. 쥐처럼 쫓겨다니는 자들도 대부분은 색목인이었고 작은 체구의 흑인들도 있 었다. 처음 몇 장면을 유심히 살피던 전우삼은 곧 흥미를 잃고 건성으로 부조들을 훑고 지나갔다. 좌측 끝의 마지막 부조에 이르자 그는 다시 부조에 흥미를 느꼈는지 시선을 쉽게 떼지 않았다. 마지막 부조는 춘화도(春畵圖)를 방불케 했다. 반나의 남녀들이 기묘한 체위로 얽혀 있었고 석상의 인물은 후향 체위로 여인을 공격하고 있는 민대머리 의 목을 자르고 있었다. "헤헤헤……." 전우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을 능욕하는 남자의 머리가 날아 가는 줄도 모르고 희락에 취해 있는 여인의 모습은 너무도 도발적이 었다. 전우삼은 불끈거리는 아랫도리를 억누르기 위해 발을 바닥에 쿵쾅거리는 수고까지 해야 했다. "정말 잘 만들었군." 그는 부조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환희밀전(歡喜密殿)과의 싸움을 묘사한 것일세." 차분한 노인의 목소리였다. 발걸음 소리도 듣지 못했었다. 전우삼은 놀라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갈의(葛衣) 노인이 서 있었다. 석실의 웅장함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왜소한 노인이었다. 등도 낙타처럼 불쑥해 구루(　　 :곱사등인)인 모양이었다. "뉘시오?" 전우삼이 눈을 내리깔며 물었다. "자네를 보고자 했던 사람일세. 만인촌의 노관을 맡고 있지." 구루 노인이 말했다. 모양은 볼품없어도 안색과 눈빛은 더 없이 잔잔했다. 그렇지만 전 우삼은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불사혼, 불멸혼, 두 노인을 자신에게 보낸 자는 만인촌의 노관이라 했다. 그런데 노관은 외양은 물론 기도 에서도 불사혼, 불멸혼이라던 두 노인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역시 만인촌에서도 노관은 제의를 지내는 자 이상은 아닌 것 같았다. "환희밀전을 포함 여기 있는 열 여섯 개의 부조들은 대전왕(大戰王 )께서 천축 십육천(十六天)을 굴복시키는 장면을 담은 것일세." 만인촌의 구루 노관은 손가락으로 쭉 부조들을 가리켰다. "대전왕?" 전우삼은 석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분이지. 배례는 올렸는가?" 구루 노인이 온화한 눈빛으로 물었다. "내가 왜 배례를 올려야 한단 말이오! 대전왕은 당신들의 대전왕이 지 나의 대전왕은 아니지 않소!" 전우삼이 석실을 발로 쿵 구르며 소리쳤다. "자네는 배교도가 아닌가?" "누가 나 보고 배교도가 아니라고 했소?" "그럼 왜 배례를 올리지 않겠다고 하는가?" "이야기했지 않소! 대전왕은 당신들의 대전왕이지 나의 대전왕은 아니라고! 우리 중원의 교도들은 대전왕이라는 이름도 모르오." 전우삼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허허허! 허허허허……." 만인촌의 구루 노관은 작은 체구를 끄덕이며 웃었다. "내가 잠시 잊었네. 중원의 교도들은 대전왕을 다른 이름으로 부른 다는 것을…… 초대 명옹……." "초대 명옹? 그럼 저 석상이……." 전우삼은 놀라 눈을 둥그렇게 떴다. "우리 만인촌의 사람들은 그 이름으로 대전왕을 부르기를 극히 싫 어하지. 특히 불패혼은…… 불패혼 앞에서는 절대 초대 명옹이란 이 름으로 대전왕을 부르지 말게." 노관이 입 속의 말로 중얼거렸다. "거짓말 마시오! 저 분이 초대 명옹이라니…… 헤헹! 누구를 속이 려구." 전우삼은 못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자네를 속이려 한단 말인가. ……자네는 아직 대전왕의 화상 (畵像)도 보지 못했군." 노관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초대 명옹께서 저런 모습이 아 니라는 것은……." "타할륜……." 노관은 전우삼의 말을 잘랐다. '타할륜…… 타할륜…….'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았다. "……대전왕의 본명(本名)이시네." 노관이 입을 여는 순간 전우삼은 '아!' 했다. 타할륜! 오래 전에 주 명두로부터 그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났다. 존함을 부르는 일은 좀 체 없었기에 그 이름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열사(熱砂)의 땅에서 태어나셨지. 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부 모를 따라 일군(一群)의 교도들과 함께 천축에 발을 들이셨네. 그러 나 천축도 교도들에게 결코 편한 곳은 아니었지. 적들의 공세 속에 호교신장들이 잇달아 죽자 대전왕께서는 젊은 나이에 호교신장의 위 를 받게 되었네. 젊은 날을 교를 수호하기 위해 꼬박 바치셨다. 그러 던 어느 날, 대전왕께서는 홀연히 종적을 감추셨지. 그리고 십 여년 가까이 모습이 보이지 않으셨어. 교도들은 호교신장이 이름 모를 곳 에서 적들의 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분명했다. 주 명두로부터 들은 초대 명옹에 대한 이야기와 같았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전우삼은 끝없이 물었다. "……대전왕께서는 당연히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지. 그분은 돌 아오자 마자 풍운을 일으키셨네. 천축 십육천을 모두 발아래 무릎 꿇 게 했다. 대전왕에게 패한 천축의 여러 문파들은 힘을 모아 영산(靈 山)에서 대전왕과 마지막 일전을 벌이려 했다. 영산회전(靈山會戰)! 천축의 마지막 발악일 뿐이었지. 대전왕 자신도 교도들도 천축 십육 천까지도 대전왕이 이기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배교천하……. " 만인촌 구루 노관의 잔잔하던 눈빛이 흔들렸다. 전우삼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배교천하! 얼마나 가슴 뛰는 말인가. "대전왕은 교군들은 산기슭에 남겨 둔 채 단신으로 회전장(會戰場) 에 올라가셨다. 교군들은 별 걱정을 않았지. 배교의 깃발이 영산에 나부낄 때를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대전 왕은 교군들 앞에 모습을 보이셨다. 교군들은 모두 놀랐다네. 대전왕 의 손에 들린 것은 천축 제파의 꺾여진 깃발들이 아니라 바로 성녀의 시신이었다. 대전왕의 패했는가?" "초대 명옹께서는 패하지 않았소!" 전우삼이 소리쳤다. "그렇다. 대전왕께서는 패하지 않으셨다! 성녀의 시신에 놀라 회전 장으로 다급히 올라간 교군들이 본 것은 꺾여진 천축 제파의 깃발들 이었다. 배교의 불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지. ……패하 지 않은 것이야. 대전왕이 대회전을 벌이던 그 시각, 성녀와 대전왕 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 "알 수 없다. 대전왕께서는 결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으니…… 영산에서 내려온 대전왕은 동천행(東天行)을 명했다. 그리고 갓 태 어났던 어린 성녀를 모시고 중원으로 온 게야. 타할륜, 대전왕, 초대 명옹…… 바로 그 분이 저 분일세." 노관은 손을 들어 석상을 가리켰다. 그러나 전우삼은 아직도 마음 한편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아 무리 봐도 석상의 모습은 그가 들어왔던 초대 명옹의 모습은 아니었 다. 분향을 하고 배례를 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자네의 마음이 그러하다면 굳이 예를 찾을 필요가 있겠나. 나중에 대전왕이 자네가 생각하는 초대 명 옹이 맞다면 배례를 올리도록 하시게." 구루 노관이 잔잔한 미소로 말했다. 노관이 그렇게 말하자 전우삼의 마음은 갑자기 달라졌다. 그가 성 큼 대화로 앞으로 나갔다. 대화로에 불씨를 던지고 향을 지핀 그는 석상을 향해 콩 튀기 듯 구배(九拜)를 했다. '만약 석상의 인물이 초대 명옹이 아니라 해도 나의 잘못은 없다. 속인 자가 잘못이지 속은 자가 무슨 잘못인가.' 전우삼은 가슴을 폈다. "노인, 나를 보고자 한 이유는 무엇이오?" 그가 노관을 향해 성큼 걸어가며 물었다. "성미가 급한 젊은이군. 나를 따라오게나. 여기는 긴 이야기를 나 누기에 적당치 않네." 만인촌의 구루 노관은 좌측 석벽으로 걸어갔다. 그가 좌측에서 여 섯 번째 부조를 손으로 밀자 부조가 빙글 열렸다. 노관은 그 자리에 서 전우삼에게 손짓을 했다. 미로(迷路) 같은 긴 동부가 이어져 있었다. 전우삼은 노관을 따라 부조로 된 문을 지나며 문득 생각했다. 만인 촌이라는 교의 아주 작은 지파도 초대 명옹의 일에 대해서는 부조로 새겨 놓을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배교의 본산을 자처하는 중 원의 배교는 초대 명옹에 대해 부조는커녕 자세한 행적조차 잘 밝히 지 않고 있었다. 천축 십육천을 발 아래 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런 일 인가! 하지만 중원의 배교는 초대 명옹의 일대기(一代記)에서 천축의 십육천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라는 간단한 말만 전하고 있었다. '흥! 그토록 통쾌한 일은 쉬쉬 감추고 매양 쫓겨다닌 일만 자랑스 럽게 떠드니 지금도 이 모양 이 꼴일 수밖에…….' 전우삼은 그것이 불만이었다. "궁금한 게 많을 줄 아오." 동부는 마치 개미굴과 같았다. 길은 나누어지고 나누어져 전우삼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줄 몰랐다. 안내자가 없다면 평생 동부를 벗어나지 못하리라……. 그 미로 같은 동부의 석실 한 곳에서 전우삼은 구루 노관과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빽빽한 책들로 둘러싸인 곳이었다. "나는 아직 노인의 이름도 모르오." 전우삼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허허허…… 미안하외다. 나는 방환(方煥)이라고 하오. 우리 만인 촌에는 일왕(一王), 일노(一老), 쌍혼,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 사(三十六護敎士)가 있소. 그중 일노가 바로 나외다. 앞으로 나를 방 노관이라 부르며 될 것이오." 구루 노관, 방환이 자신을 소개했다. "앞으로 노관을 찾을 일이 있을까 마는 찾을 일이 있다면 방 노관 이라 부르겠소. 방 노관, 나는 만인촌에서 방 노관이 가장 높은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일왕이 더 높은 신분인가 보군요." "일지국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소?" 방환은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전우삼은 고개를 저었다. "일지국도 배교의 한 지파외다. 대전왕을 따라 중원으로 오다가 음 산으로 분가(分家)를 택했지요." "새외에 명왕을 모시는 이족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 그곳이 일지국이라는 곳이었나 보군." 전우삼이 '흥!'하며 말했다. 만인촌과 마찬가지로 일지국에 대한 그의 생각도 본류(本流)를 벗어난 교의 이단에 불과했다. "일지국도 일왕, 일노, 사방위, 십위병이 있소이다. 쌍혼, 삼십육 호교사는 없지만…… 일지국에서 일왕은 전왕이오. 우리 만인촌에서 도 일왕은 대전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전왕이외다." "그럼 결국 전왕이란 호교신장, 명옹을 말하는 것이었군. 당신들은 초대 명옹을 그렇게 높이 받들면서 왜 초대 명옹의 뜻을 제 멋대로 어기시오. 초대 명옹께서 전왕이라 부르라고 했던 적이 있었던가." 전우삼이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전왕, 명옹…… 우리 일문의 오랜 고향, 열사의 땅에서는 그 이름 은 하나 뿐이었소. 호교신장…… 중원에서도 정식으로 명옹을 칭하는 말은 호교신장일 것이오. 우리도 마찬가지요. 명옹은 대전왕이 중원 에 발을 들이며 붙여진 명호일뿐…… 전왕이란 호칭은 어떻게 붙여진 줄 아십니까?" "내가 알 필요가 있겠소?" 전우삼이 쏘듯이 반문했다. "전왕은 천축에서 붙여진 호칭이오. 천축 십육천을 굴복시키며 호 호탕탕 배교일세의 꿈을 이루어 가던 때……." 방환의 눈빛이 심유하게 빛났다. "일지국은 물론 우리 만인촌도 그때의 신화를 잊지 못하오. 지금도 그때의 신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지. 그래서…… 그래서 우리 는 아직 전왕이란 호칭을 고집한다오." "……." 전우삼은 더 이상 투덜대지 않았다. 그 마음을 어찌 모르랴! 교도 들의 주검, 주 명두, 신 노인, 화 노인, 진금구…… 홀로 두고 온 여 인, 화정도 생각났다. '전왕…….' 전우삼은 이를 악다물었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 지금 필요한 이름이 있다면 호교신장도 명옹도 아닌 전왕이란 이름이었다. "만인촌의 유래는 궁금하지 않소?" 방환이 전우삼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바쁜 사람이니 서둘러 말해 주시오!" 전우삼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교의 처지를 생각한 잠깐 사이에 감 정이 격해진 모양이었다. "대전왕이 처음 동천을 말했을 때 교도들은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대전왕의 뜻을 따랐소. 천축 보다 중원이 넓기에 교세를 넓히려 동천 행을 택한 줄 알았던 것이오. 그래서 대부분의 교도들은 중원에서도 대전왕의 신위를 기대했소. 하지만……." 방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천산을 지나며 대전왕께서 말씀하셨소. 앞으로 절대 칼로 일어서 지는 않을 것이라고…… 좋은 이야기지. 좋은 이야기…… 그러나…… ." 방환의 눈빛은 점점 빛을 발했다. 마주 보기에 눈이 따가울 정도였 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도들은 알고 있었소. 칼로 일어서지 않고 버티 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가를…… 연일 사교로 몰려 학살을 당하 던 지난 일도 생각났을 것이오. 예전처럼 힘이 없었다면 또한 모든 것을 명왕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당시 교군들의 힘 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소. 대전왕께서 당신의 무공을 혼자만 독차지하지는 않았을 테니……." '꿀꺽!' 전우삼은 긴장으로 침을 삼켰다. 전혀 듣지 못했던 숨겨진 교의 비화 한 토막이 밝혀지고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힘!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과거…… 대전왕에 대한 모반은 천산을 지나며 싹 터 중원에 이르렀을 때는 돌이킬 수 없을 형국이 되었소. 먼저 한 부류가 일탈을 선언했지. 바로 일지국으로 흘러들어간 자들이오. 그들은 대전왕에게 말했소. 더 이상 쫓겨다니 기 싫다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자신들의 땅을 찾아 배교도만의 왕국을 세울 것이라고……." "초대 명옹께서 가만히 있었소?" 전우삼이 다급히 물었다. "허락하셨소. 순교를 피해 전교의 포기를 택한 자들이라 전교영기 로 엄한 문책을 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대전왕께서는 칼을 놓음으로 써 받게 될 교도들의 고초 또한 이해하신 게요. 대전왕에 대한 한 부 류의 모반은 그들이 음산으로 떠남으로써 그렇게 끝났소. 다른 한 부 류는……." 방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전우삼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가 긴 한숨과 함께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들은 음산의 오지로 만족할 수 없는 자들이었지. 천축뿐만 아니 라 중원도…… 배교천하……." '배교천하…….' 전우삼은 긴장된 표정으로 입 속에서 그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교권을 장악해야 했다. 교권을 장악한다는 것은 바로 대전왕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 먼저 떠났던 한 부류는 대 전왕의 무위에 눌려 음산으로 떠났지만 남은 부류는 감히 대전왕을 상대로 한 싸움을 벌인 것일세. ……자네는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교 도들 간의 피 튀기는 싸움을……." "무…… 물론 들어 본 적이 있소." 전우삼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진금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 리고 있었다. "대전왕을 상대로 칼을 들었던 자들은 누구인가?" 방환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암가…… 암류……." 전우삼은 목이 콱 막힌 듯했다. 그가 켁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맞네. 암왕…… 암왕의 추종자들…… 모두 같은 말이지." 방환의 눈빛이 심유하게 빛났다. "모반을 결행함으로써 암류로 몰린 자들의 힘도 엄청났지. 하지만 대적할 수 없었어. 대전왕을…… 천축 십육천을 발 아래 무릎 꿇힌 분이다. 천축 십육천 중에는 뇌음사(雷音寺)도 있었다네. 석가(釋迦) 의 영지(靈地), 삼장(三藏)이 경(經)을 구하러 갔던 곳, 보리 달마의 소림 무학의 원류가 된 그곳…… 그곳도 꺾으신 분이다. 모반을 획 책했던 자들은 당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대전왕의 무위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세. 처참한 패배를 당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대전왕의 금제(禁制)를 등에 업고 한 곳으로 숨어야 했지. 그 곳이 어디인 줄 아시는가?" 방환의 눈빛이 빛살보다 강렬하게 전우삼의 눈동자에 꽂혔다. "서…… 설마……." 전우삼의 손끝은 떨렸고 눈초리는 기이하게 돌아갔다. "만인촌! 바로 여기일세. 허허허! 허허허허……." 방환은 불쑥한 등을 펴며 석실이 짜랑하도록 웃었다. 쿵! 전우삼은 심장이 떨어졌다. 머리도 쇠절구로 맞은 듯 멍했다. 그의 손발이 더욱 심하게 떨렸다. 암왕! 그 오랜 전설의 파편이 현실로 눈앞에 보이고 있었다. 암왕 의 무공을 찾아 길을 나선 그였지만 막상 암가가 눈앞에 펼쳐져 있자 전우삼은 극심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반사적으로 적개심도 끓 어올랐다. 유향경천문이나 구대문파에 대한 적개심 보다 배는 강한 적개심이었다. 유향경천문이나 구대문파는 결국 이교의 적에 불과했 지만 암왕은 직접적인 명왕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흑의 노인, 불패혼은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눈앞의 노관이나 불사혼, 그를 실어 준 어자는 전혀 어둠의 냄새가 없었다. 그런데 이들이 암왕의 후예라니……. 전우삼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비록 세상의 분노를 견디 지 못해 탈명의 무공을 찾아 나선 그였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 권의 가르침과 주 명두의 가르침이 절절이 박혀 있었다. 그 가르침을 잊었다면 전우삼은 탈명의 무공을 찾아 적들에게 복수하리라는 생각 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겹도록 쥐처럼 쫓겨다녀야 하는 삶만 가르 쳐준 교! 명왕을 버리고 교를 버렸다면 그 교를 위해 복수를 꿈꿀 이 유도 없었다. 그가 필요로 한 것은 암왕의 힘이었지 암왕은 아니었다. 팟! 전우삼은 방환을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날렸다. 빨리 이 악마 의 소굴을 벗어나야 했다. 그러나 방환은 너무도 쉽게 자신의 얼굴만 한 전우삼의 주먹을 잡았다. "서두르지 말게." 방환이 눈살을 찌푸렸다. "필요 없다!" 전우삼은 고함을 지르며 이번에는 왼 주먹을 휘둘렀다. 순간, 전우삼의 몸이 경직됐다. "어, 어, 어……." 그의 몸이 거세게 떨렸다. 그와 동시에 전신의 기력이 터진 둑에 물 빠지듯 주르르 흘러 나가고 있었다. 자신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는 곳은 방환의 손이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지고 눈은 침침해졌다. 욕을 퍼부으려 해도 입술 조차 천 근으로 무거웠다. 전우삼의 안색은 잿빛으로 변해 갔다. 거미에게 체액(體液)을 빨리 는 황봉(黃蜂)처럼 고사(枯死)되기만을 기다려야 할 형편이었다. 방환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대화로를 보지 못했는가? 대전왕의 석상은? 우리가 암왕을 추종한 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인가? 대전왕이 암왕인가? 중원의 교도들이 초 대 명옹으로 받드는 그분이…… 우리도 배교도일세. 암왕은 따로 있 지. 어디 있는 가는 우리도 알 수 없지만…… 만인촌 교도들의 입장 도 조금 들어주게나." 방환의 말이 끝나는 순간 전우삼의 기력은 역류했다. 빨려 나갔던 기력이 서서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있었다. 전우삼의 얼굴도 화 기를 찾아갔다. "천천히…… 천천히…… 생각해 보세. 칠 일 뒤에 다시 오겠네." 방환은 전우삼의 손을 놓았다. '헉!' 전우삼은 헛바람을 들이쉬었다. 몸이 가려운 것을 제외하고 는 달라진 것은 없었다. "칠 일 동안 이곳에 있으려면 심심할 테니 이것이나 보고 계시게." 툭! 방환은 품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내 전우삼 앞에 던졌다. 그 가 석실을 나섰다. 쿵! 석실문이 굳게 닫혔다. 그제야 전우삼은 정신을 차리고 석실문으로 달려갔다. 그가 석실문 을 밀었다. 그러나 문은 꼼짝 않았다. "갇혔구나! 젠장!" 전우삼은 화를 내며 탁자를 걷어찼다. 그 바람에 방환이 두고 간 책자가 그의 발아래 뚝 떨어졌다. "이건 뭐야?" 전우삼은 책을 들었다. 금박을 입힌 책자였다. 그는 책을 열었다. 빽빽한 그림들만 가득했다. "젠장!" 전우삼은 책을 집어던지려 했다. 그때였다. "인단(人丹)의 장(章), 흡정(吸精)의 술(術)……. 방금 내가 자네 에게 펼쳐 보인 것일세. 딱히 마음에 들지 않는 이상 한 번 관심을 가져 보게나." 문밖에서 방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우삼은 주춤했다. '흡정의 술…….' 그의 머리 속으로 언뜻 스쳐 가는 기억이 있었다. 언젠가 우연히 사귄 낭인(浪人) 검사의 말이었다. '자네 교에는 남의 기력을 훔쳐 빠는 거머리 같은 절학이 있다면서 …… 흡정술(吸精術)!' 그때 전우삼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작자의 이빨을 몽땅 부러 뜨려 놓았었다. 그런데……. 전우삼은 책자를 다급히 다시 열었다. 보아서 알 것도 아니고 볼 필요도 없었다. 방환이 이미 몸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깨 가 축 늘어졌다. 그가 비틀거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방환으로부터 기력을 빨릴 때보다 더 힘이 없었다. 며칠간의 일들이 모두 꿈만 같 았다. 그러나 분명 꿈은 아니었다. 전우삼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헤헤헤! 헤헤헤헤……." 그가 미친 자처럼 히죽댔다. 웃는 이유는 자신도 몰랐다. * * * 단원홍은 탁자에 팔꿈치를 기댄 채 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머리 속은 희뿌옇고 몸은 무거웠다. 지난 밤, 육신은 물론 마음까 지 고단케 한 꿈을 꾼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 꿈을 더듬고 있었다. 무엇인가 잡힐 것도 같았다. 그러나 종내 그 꿈은 기억에 없었다. 무슨 절절한 심금(心琴)을 울리는 사연을 꿈꾸었는지…… 며칠 동 안 잊었던 오랜 친구, 허탈과 고독이 밀려들었다. 단원홍은 그런 감정을 즐기는 자는 아니었기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 어났다. 날씨는 흐려 벌써 입하(立夏)를 알리는 비가 올 모양이었다. 아니 나 다를까 빗방울이 후두둑 쏟아졌다. 단원홍은 비를 맞으며 정원에 섰다. 그는 포행(匍行)을 하며 천천 히 몸을 풀었다. 보는 사람이 숨이 막힐 정도의 느린 움직임이었다. 빗방울은 이내 그의 속옷까지 적셨다. 하지만 단원홍은 매일 하는 연공을 멈추지 않았다. 우울한 날일수록 하루의 시작을 더욱 철저히 준비하는 그였다. 단원홍은 반 시진 가량 몸을 푼 후 거실로 들어섰다. 시비가 건네주는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그는 비함을 열었다. 어 젯밤 축시(丑時) 초(初)에 누군가가 다녀갔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잠을 깨어 이후에 꿈자리가 어수선했는지 모를 일이다. 비함에는 역시 죽통에 든 서신 한 통이 있었다. 무영인이 놓고 간 서신이었다. 단원홍은 서신을 한 눈에 읽은 후 탁자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가 내당을 지키는 무사를 불렀다. "한 시진 후에 당주들을 모두 정자에 모이도록 하라." 단원홍은 내당 무사에게 명을 내린 후 옷을 벗으며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 속에서 반 시진 정도 묵상으로 있던 그는 욕실을 걸어나 와 시비들이 챙겨 놓은 청포(靑袍)를 걸쳤다. 탁자에는 무영인이 놓고 간 서신이 여전히 뒹굴고 있었다. 단원홍 은 그 서신을 차를 내어 오는 시비에게 건네 불사르게 했다. 창밖에 는 쉬지 않고 비가 내렸다. 단원홍은 그 비를 바라보며 차를 마셨다. 아무래도 비오는 날은 차 맛이 덜하다. 기분 탓인지…… 그는 씁쓰름한 뒷맛을 느끼며 찻잔을 놓았다. 정자에 두런두런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망스런 팽해만의 웃음도 섞여 있었다. 한 시진이 훌쩍 지난 모양이었다. 단원홍은 만화를 신고 시비가 건네주는 꽃무늬가 곱게 새겨진 우산 을 펼쳤다. 언상영은 단정히 앉아 비를 바라보고 있었고 남궁기는 생각에 골몰 해 있었다. 당예는 입가에 가는 미소를 담은 채 팽해만을 바라보았고 팽해만은 소매로 탁자 위에 놓인 자신의 유엽도를 닦느라 여념이 없 었다. 냉기가 가슴을 찌를 정도로 서슬 푸른 칼이었다. 단원홍이 나타나자 그들은 우르르 정자에서 일어났다. "무슨 난리가 일어났다고 새벽부터 부르셨소?" 자리를 갖춰 앉으며 팽해만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소매로 연 신 유엽도를 닦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단원홍이 웃으며 말했다. "흡족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쓸만은 하오." 팽해만은 유엽도를 세웠다. 한광이 뇌전처럼 번뜩이며 정자를 비추 었다. 한철과 조화옹이 만나 이룬 작품답게 유엽도는 자신을 한 번 선보이는 것으로도 진가를 충분히 자랑했다. "삼 일 동안 손에서 놓을 생각을 않는군. 이제 그만 싫증이 날 때 도 되었을 텐데……." 언상영은 유엽도를 한시라도 내려놓지 않는 팽해만을 바라보며 실 소를 흘렸다. "으헤헤, 네 마누라를 준다고 해 봐라. 내가 네 마누라를 껴안고 자는가…… 나는 이것을 껴안고 잘 것이다." 팽해만은 이제 소매 대신 겨드랑이 사이에 유엽도를 끼어 넣고 쓱 쓱 닦았다. "내 마누라가 비록 앙칼지기는 하지만 사내의 물건을 자를 정도로 앙칼지지는 않다. 하지만 그 유엽도는 조금만 토라져도 네놈의 물건 을 싹둑 잘라 버릴 것 같구나. 그런데도 네놈은 내 마누라 보다 그 칼을 껴안고 자는 것이 더 좋단 말인가?" 단원홍을 비롯 사대당주 중 처자(妻子)가 있는 자는 언상영이 유일 했다. "아무렴! 앙칼진 계집일수록 맛은 더욱 좋지. 하물며 물건을 자르 겠다고 달려드는 계집이야…… 훗일 네 마누라가 꽃다운 딸들을 줄줄 이 낳아 덤으로 줄 테니 같이 살자고 하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보기는 하겠다." "쯥……." 언상영은 쓴맛을 다셨다. 팽해만은 다시 유엽도를 세웠다. 그는 그제야 도광(刀光)에 만족한 듯 유엽도를 칼집에 넣었다. "내일 주방(廚房)의 정가(鄭哥) 놈이 소를 한 마리 잡는다고 하더 군. 그 소를 내가 잡아 주기로 했다. 으헤헤……." 팽해만은 메기입을 씰룩이며 칼집을 기분 좋게 쳤다. "하필이면 왜 소지? 그 칼에는 뿔난 돼지가 더 어울릴 텐데……." 당예가 눈살을 찌푸리며 한 마디 내던졌다. "당예야!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칼의 예기가 지나치면 주인까 지 해치지. 하지만 내 칼은 고귀(高貴)해서 돼지 같이 더러운 피는 싫어하니 이 또한 얼마나 다행인가!" 팽해만이 소리쳤다. "으헤헤…… 아무래도 네놈은 이것을 얻지 못해 괜한 심술이 나는 모양이구나. 한철이 조금 남긴 남았어. 그래서 조화옹에게 부탁했다. 네놈을 위해 우모침 하나 만들어 달라고……." "흥! 고마운 부탁을 하셨군." "만들어 준다고 하더군. 하지만 아무리 조화옹이라 해도 당가의 우 모침을 보지 않은 이상 어떻게 만들 수 있겠나. 어떻게 생겼는지 가 르쳐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말해 주었지. 네놈의 아랫도리를 까 물건을 보라고. 네놈의 물건과 우모침은 한 치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말했지. 으헤헤헤……." 팽해만이 샐쭉한 눈으로 당예를 바라보며 키득거렸다. 본전도 못 찾기는 당예도 마찬가지였다. 당예는 가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휙 돌렸다. 그 모습이 또한 가 관이라 단원홍은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당예의 모습은 꼭 토라진 계집 같았다. "껄껄껄!" 단원홍은 대소를 터뜨렸고 언상영도 웃었다. 세상은 괴로움의 바다라고 한다. 그 괴로움 속에서도 살아가는 이 유는 바로 이런 순간 순간의 즐거움 때문은 아닌지……. 단원홍은 아침의 우울했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새벽은 아니지만 아침부터 우리를 부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언상영이 물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옹이란 자를 찾았네." 그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옹!" 사대당주의 시선이 일제히 단원홍에게 쏠렸다.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궁기가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단원홍은 가만히 남궁기를 바라보았다. 그는 남궁기에게서 폭발적 으로 끓어오르고 있는 투기(鬪氣)를 느꼈다. '팽해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철과 조화옹이 만나 이루어 낸 한 자루의 검은 남궁기에게도 돌 아갔다. 그 검을 사용해 보고 싶은 욕심은 팽해만 보다 남궁기가 오 히려 더할 것이다. 검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한 자이니…… 팽해만 과 달리 검의 상대를 찾는 데 신중을 기하느라 내색을 하지 않고 있 을 뿐! 마옹이라면 남궁기가 검을 시험해 볼 아주 좋은 상대였다. 그러나 단원홍은 남궁기에게 마옹을 맡길 생각이 없었다. 남궁기로서는 애석 한 일이 되겠지만……. "남궁기, 자네는 우제준의 시신을 직접 보았다고 했지?" "보았습니다." "어떻던가?" "엄청난 힘이더군요." "언상영으로부터 사인을 보고 받고 나도 그런 생각을 했지."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이오?" 팽해만이 툭 끼여들며 물었다. 분명 마옹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하다니…… 그는 잠시 상대를 헷갈려 했다. "마옹! 놈은 우제준을 역발산의 힘으로 밀어붙여 우제준은 자신의 칼에 가슴이 찢기고 심장이 파열되어 버렸어. 얼마나 엄청난 힘이었 는가 하면 우제준이 서 있었으리라 생각되던 자리에 두 치 깊이의 발 자국도 패어 있었다." "뭐야?" "뭣?" 팽해만과 당예는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 당예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제준의 시신은 나만 본 것이 아니었다. 자네도 보지 않았는가?" 남궁기가 되물었다. 당예는 입을 닫았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보는 안목조차 달랐다. 인정하기 죽도록 싫었지만 역시 남궁기는 자신보다 강했다. 당예는 수치심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문주 앞에서 당한 일이라 그 수치감 은 더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당예가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 결백했 기 때문에 가진 감정일 뿐…… 만약 남궁기 보다 먼저 당예가 우제준 의 시신을 살폈다면 당예는 남궁기 보다 더 꼼꼼히 우제준의 사인을 가렸을 것이다. "으헤헤…… 당예는 그렇다 쳐도 왜 내게는 이야기하지 않았어? 자 칫했으면 놈에게 죽을 뻔했잖아!" 팽해만이 와락 소리쳤다. "틀림없어. 놈은 마공(魔功)을 익힌 게야. 마공…… 아이고! 배교 에 우리가 그렇게 우려하던 개세마두가 나타났구나!" 그는 탁자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남궁기, 이길 수 있을 것 같던가?" 단원홍이 물었다. "싸우기 전에 승부를 장담하는 자만큼 미련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 지만 진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습니다. 마옹의 패악스런 힘은 인정 하지만 그 힘은 아직 정련된 힘은 아니었습니다." "싸워 보고 싶겠군." 단원홍의 말에 남궁기는 똑바로 고개를 들었다. "제 마음은 문주께서 더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남궁기가 무심하게 말했다. 단원홍은 빗줄기가 쏟아지는 정원을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 였다. 그리고 그는 남궁기에게 시선을 돌렸다. "참아 주었으면 하네." "……." 남궁기는 고개를 숙이며 침묵을 지켰다. 후두둑 쏟아지던 빗줄기가 가는 비로 변해 갔다. "알겠습니다." 반 각이 흐른 후에야 남궁기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문주는 마옹을 포획하려 한다. 싸워서 이길 지는 몰라도 포획은 자신의 능력 밖이 라는 것을 남궁기는 알고 있었다. 문주도 그 사실 때문에 마옹을 자 신에게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하네." 단원홍은 남궁기를 위로했다. 좋은 상대를 지켜만 보고 있어야 하 는 남궁기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는 배교의 일은 이번 한 번으로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놈은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언상영이 물었다. "악양으로 가고 있다고 하더군. 아마 군산(君山)으로 가는 모양일 세." "군산에는 무슨 일로?" "주작당에 무슨 소식이 들어온 것이 없는가?" 단원홍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역시 그 일입니까? 신탄에서부터 놈의 거동이 수상하더니…… 결 국 싸움을 택한 모양이군요. 하긴…… 쫓겨다녀도 결과는 마찬가지니 ……." 언상연은 안색을 찌푸렸다. "둘이서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야!" 팽해만이 꽥 소리쳤다. "근자에 강남 배교도들의 움직임이 수상했어. 놈들은 지금 악양으 로 몰려들고 있네. 그런데 그곳에 마옹까지 가세하고 있는 것을 보니 ……." "아이고! 이제 모태명이라는 놈은 큰일났구나! 그러게 시키지도 않 은 일을 벌이더니…… 누가 배교도들의 목을 댕깡댕깡 잘라 오라고 했나!" 팽해만이 박수를 치며 고함을 질렀다. "남궁기, 자네는 쾌선에 현무당을 이끌고 배후를 맡게. 팽해만은 동쪽, 당예는 서쪽…… 언상영, 자네는 누선(樓船)에 올라 각 당을 지휘기(指揮旗)로 통솔해 주게. 나는 점장대(點將臺)에서 기다리겠다 . 마옹을 그곳으로 몰아주게." "어이, 단 천호께서는 어지간히 대도독(大都督)이 되고 싶었던 모 양이군." 팽해만이 놓치지 않고 한 마디 했다. 점장대가 삼국시대(三國時代) 때의 오나라 명장, 노숙(盧肅)이 수군(水軍)의 훈련을 지휘하던 곳 이라는 것을 알고 한 말이었다. "왜 일을 번거롭게 하시려 하십니까? 악양에 놈들이 모였을 때 덮 쳐 버리거나 군산에서 흑룡방과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을 때 덮쳐 버 리는 것이 더 편할 텐데." 언상영이 의문을 표했다. "흑룡방…… 대명천지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가 없네 . 내 신분이 하찮은 천호가 아니었다면 벌써 쓸어버렸겠지. 대명을 좀 먹고 있는 곳이다." 단원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주의 뜻을 알겠습니다." 언상영이 미소를 지었다. "……이왕 벌어지는 싸움, 그 싸움에서 배교도들이 흑룡방을 깨끗 이 청소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시군요." "그렇다. 나는 마옹이라는 자에게 나라의 은혜를 갚을 그 정도의 기회는 주고자 한다." "하지만 모태명은 만만치 않습니다. 만약이 마옹이 모태명의 칼에 죽어 버린다면 모든 일이 수포로 끝나 버리지 않겠습니까?" "모태명을 이기지는 못 해도 죽음의 칼을 피할 수 있을 실력은 되 리라 믿는데…… 만약 내 예측이 어긋나 마옹이라는 자가 모태명의 칼 아래 목숨을 잃게 된다면…… 언상영, 그 또한 이제까지 내가 바 라 왔던 일이 아닌가. 공공께서 모태명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것도 좋 은 일이지." "그렇군요." 언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준비를 해 주게. 지금쯤 형주 가까이 왔을 것이다." 단원홍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정자를 나섰다. 빗방울은 점점 가늘어져 안개비로 흩날리고 있었다. * * * 명강량은 서너 번 거세게 몸을 꿈틀거렸다. 치솟는 열화로 입을 딱 벌렸다. 거센 기운이 미친 듯의 그의 전신을 질주하고 있었다. 전신 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고통은 계속되고 머리도 열기로 텅 비워져 가는 듯했다. 행공이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의식을 끈을 놓고 행공을 풀면 주화입마가 찾아오리라는 것은 뻔했다. 그의 전신 이 숯불처럼 달아오르고 심줄도 팽팽하게 솟구쳤다. 그리고 한 순간, 미친 듯이 날뛰던 기운은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평 온이 찾아왔다. 명강량은 긴 숨을 내시며 좌정을 풀었다. 알 수 없었다. 미친 듯한 그 내력(內力)을……. 근자에 들어 행공을 하면 가끔 그 기운이 들불처럼 일어나 그를 당 혹하게 했다. 영약을 먹은 적도 기인의 도움을 받은 기억도 없었다. '아!' 다시 생각하니 양 명두로부터 몇 뿌리의 영약은 얻어먹은 듯 했다. 하지만 그 물건들로는 방금 들끓었던 자신의 힘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우제준과 승부를 벌였을 때의 일도 돌이켜졌다. 분명 그는 우제준 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죽은 자는 우 제준이었다. 그 때는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운 때문에 이겼다는 것 은 얼마나 설명력(說明力) 없는 말인가. 특히 우제준 같은 고수를 상 대로 한 비무에서…….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일은 알 수 없는 일이다. 명강량은 가만히 신장도를 뻗었다. 힘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일 이었지만 힘은 분명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 있었다. 다 시 우제준과 싸운다면 이제는 그렇게 몰리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모태명은?' 싸워 보아야 알 일이다. 강호의 소문은 우제준 보다 그의 무위를 높이 평하는 듯했다. 명강량은 신장도를 허리에 걸치고 허리띠를 단단히 맸다. 그는 손 바닥을 펼쳤다. 화령주는 아직도 붉은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몇 번의 어려운 고비에서 주화입마를 피해 갈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화령주의 힘 때문이었다. 내력이 급히 늘어나고 있는 이유도 화령주 때문인지 모를 일이었다 . 하지만 이제 화령주는 주인에게 가야 한다. 명강량은 손바닥에 화령주를 올린 채 화령주의 열기가 소진되기를 기다렸다. 가늘게 내리는 비로 새벽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화령주가 식어 가기를 천천히 기다렸다. 새벽과 함께 화령주는 온기를 다했다. 방에서 일어서던 명강량은 문득 자신의 팔목을 바라보았다. 천음관이라는 악기인지 비구인지 모 를 물건은 여전히 그의 팔목에 부착되어 있었다. 명강량은 그 물건을 어떻게 할 것인가로 잠시 고민했다. 그날 이후, 형주로 오기까지 성녀는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가끔 자신의 팔목에 기대 천음관만 불뿐이었다. 명강량은 천음관을 매만졌다. 찬 금속성 속에는 성녀의 체취가 묻 어 났다. 이것 하나는 자신의 물건으로 소유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 했다. 그러나 결국 명강량은 천음관도 풀었다. 방문을 열었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황기명사가 그를 맞았다. 명강량은 황기명사에게 화령주를 내밀었다. "성녀의 물건이오." "화령주……." 황기명사는 놀라워하며 화령주를 조심스럽게 받았다. "무산에서 기다려 주시오. 만약 내가 무산에 나타나지 못할 사정이 생긴다면…… 성녀께 말씀 드려 주시오. 안락국에서 기다리고 있으 라고…… 연락을 주면 찾아갈 것이라 하시오." 명강량은 천음관까지 건네며 말했다. "안락국?" "그렇게 말씀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성녀께서 알아서 길을 안내해 줄 것이오. 안락국에 도착해서 연락을 주어도 내가 오지 않아…… 혹시 나를 찾아 세상 밖으로 나가시려 하시거든…… 잡아 두시오. 세 상의 광풍이 모두 지나갈 때까지……." "무슨 말씀을?" 황기명사가 아는 것은 저 세상의 안락국뿐이다. 이 세상에도 초대 명옹이 세운 안락국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그는 명강량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당연히 알 수 없었다. 명강량은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부탁하오."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하십시오. 청정광명세계명존의 비호가 있기를……." 황기명사는 부복했다. 발걸음을 옮기던 명강량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여름을 준비하는 산하는 더욱 푸르렀다. 모든 것이 좋았다. 부지런한 새는 일찍 먹이를 쫓고……. 그 새들 중에는 명조도 있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녀가 다시 따라올지 모르는 일이다. 제21장 동정호(洞定湖) 아무래도 밝음보다 어둠이 교도들의 더 친근한 벗인 듯했다. 매끈한 얼굴, 가지런한 수염, 세상일은 담을 쌓은 채 공맹(孔孟)이 나 찾고 있을 듯한 자는 호북의 명두, 노기준(盧琦俊)이었다. 하루에 대강(大江)을 오가는 자가 있을까 마는 그 정도의 소문이 붙을 정도로 신출귀몰(神出鬼沒)을 자랑하는 자가 바로 그였다. 그래 서 정파인들에게 그에게 붙여진 별호는 비마(飛魔)…… 배교에 환란 이 닥치기 전부터 강남에 있었던 명두는 이제 그가 유일했다. 노기준은 흔들리는 배에 서서 깊어 가는 동정호의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삐꺽! 삐꺽! 그의 주위에도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각양각색 의 복장에 굳은 얼굴로 앉아 있는 자들은 그와 같이 모두 군산으로 향하는 교군들이었다. 갑자기 강남에 떨어진 전교영기……. 그 명을 받들어 오늘 강남의 교군들은 흑룡방을 상대로 혈전을 벌 일 계획이었다. 노기준은 배에 탄 교군들을 쭉 살폈다. 강남의 모든 교군들이 다 모였는데도 그 수는 고작해야 이백 여명…… 그 중 반 수는 자신이 이끌고 온 호북의 교군들이었다. 명이 갑작스럽게 떨어졌다고는 하나 너무도 적은 숫자였다. 최소한 그는 머릿수에서는 흑룡방을 압도할 줄 알았었다. 참괴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명옹에 대한 죄스러움이었다. 서너 명의 교 군들만 온 성도 있었다. 강남에서 가장 교세가 컸던 곳은 호남이다. 범 같은 자들도 많다. 하지만 믿었던 호남의 교군들은 아예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여 명두가 광명계로 떠난 후 교의 사정이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적들의 침탈도 침탈이었지만 명사, 명전, 향당으로 이어지는 연락 체계가 무너진 데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듯했다. 노기준은 불안했다. 혼자라면 그다지 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 다. 목이 날아간다고 해도……. 배들의 선두에는 젊은 명옹이 있었다. 그의 불안은 명옹을 지킬 수 있을까였다. 그래서 교군들에게 명옹의 호위를 최우선으로 당부했지 만 솔직히 자신은 없었다. 모태명을 상대할 자는 이곳에서는 명옹뿐 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태명의 적수는 아니었다. 어제 회합(會合) 때 흑룡방을 치는 일을 좀더 심사숙고하라고 말했 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그런 생각도 나지 않았었다. 명옹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 힘이 넘쳤다. 흑룡방 정도는 문제도 되 지 않을 것 같았다. 명옹이 강남을 순회한 지는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명 옹은 너무도 변해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듯했다. 교를 걱정 한 전대 명옹의 혼이 명계로 들지 않고 젊은 명옹의 혼에 도로 앉았 는지……. 노기준은 고개를 들었다. 군산으로 향하는 명옹의 모습은 여전히 늠름했다. 그 힘에 감화된 탓인지 비록 행색은 남루해도 교군들의 기세는 높았다. 그것만은 위 로가 되었다. '장호…….' 노기준은 강서의 명두, 장호의 호탕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였다면 명옹과 함께 싸운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것을 만족했을 것이다. '장호, 우리를 도와주게. 이대로는 끝날 수 없지 않는가.' 그는 동정호의 물 냄새를 깊게 마시며 가슴을 폈다. 어둠 속에 허연 목책(木柵)이 보였다. 흑룡방 수채가 눈앞으로 다 가오고 있었다. 간혹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교군들 은 노질을 더 빨리 했다. 노기준은 같은 배에 탄 교군들에게 손짓을 했다. 명옹을 앞장세울 수는 없었다. 그의 배가 맹렬한 속도로 선두로 나아갔다. 명두가 앞 으로 쭉 나가자 호북의 교군들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호북을 제외 한 다른 교군들은 적은 숫자에 염체를 차릴 길 없어 하고 있었다. 때 문에 호북에 선두까지 뺏길 수는 없었다. 특히 흑룡방에 명두를 잃은 강서와 절강의 교군들은 혼신의 힘을 다했다. 비록 작은 배들이었지만 수십 척의 배들이 전력을 다해 일제히 물 살을 가르자 동정호에는 갑자기 거센 파랑이 일어났다. 목책에는 이삼십 여명의 흑룡방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음담패설과 술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목책을 향해 노도처럼 몰려가는 배교도들의 배는 그들의 눈에 금방 띄었다. "저놈들은 뭐야?" 앞니가 없는 흑룡방도 한 명이 몰려오는 배들을 가리켰다. 고작해 야 나룻배였고 나룻배에 탄 자들의 행색도 지저분했다. 흑룡방을 상 대로 달려드는 적이라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파시장을 열려나…… 간이 큰놈들이군." 누런 얼굴의 흑룡방도가 히죽 웃었다. "아니야, 아니야! 저놈들 좀 봐! 전부 칼을 들고 있어!" 호로병을 들이키던 자가 안색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뭐라고?" 흑룡방도들이 우르르 목책으로 몰렸다. "누군지 모르지만 겁이 없는 놈들이군. 당주에게 연락하고 철선(鐵 線)을 올려라!"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자였다. 입은 옷도 다른 자들과 달랐다. 향주쯤 되는 모양이었다. 철선은 큰배를 저지하기 위해 수채 입구에 쳐 둔 거대한 쇠사슬이다. 크르르르르……. 흑룡방도 서너 명이 달라붙어 쇠사슬을 감았다. 쇠사슬이 물 속에 서 포말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냈다. "철태궁!" 작자는 궁수들까지 포진시켰다. 그리고 여유만만하게 수하가 들고 있던 호로병을 뺏어 입으로 가져갔다. 노도처럼 달려들던 배교도들의 배는 쇠사슬에 막혀 잠시 주춤거렸 다. 밑으로 지나가고자 쇠사슬을 들었으나 쇠사슬은 너무 무거워 꿈 쩍 않았다. 노기준도 합세해 용력을 써 보았으나 큰배들을 가로막기 위해 쳐 놓은 쇠사슬이라 그로서도 무리였다. 방법은 물 속으로 뛰어 내린 후 배의 밑바닥을 들어 쇠사슬 위로 넘기는 수밖에 없었다. 하 지만 그렇게 하자니 시간이 너무 지체될 듯했고 적들도 그것을 용납 하지 않았다. 피핑! 핑! 목책에서 흑룡방도들이 철태궁을 당겼다. 화살이 쏟아지 며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방도가 없는지라 노기준은 교군들 로 하여금 물 속으로 뛰어들어 쇠사슬 위로 배를 넘기도록 했다. 풍덩! 풍덩! 노기준의 명을 받은 교군들은 일제히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교군들이 화살에 몸을 피하며 쇠사슬 위로 배를 넘기려 할 때였다. 명강량을 태운 배가 다가왔다. 명강량은 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쇠사슬을 향해 배를 그대로 항 진하며 신장도를 번뜩였다. 쩡! 길게 늘여진 쇠사슬이 강물에 퉁기며 일제히 분수 같은 물보라 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쇠사슬은 반으로 동강나 수심으로 꼬르륵 가라앉았다. "와!" "와!" 교군들은 함성을 질렀다. 그들이 수심에서 빠져 나와 배에 오르는 동안 명강량을 태운 배는 목책을 향해 홀로 질주했다. 노기준의 배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명강량을 태운 배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졌 다. 원래 노기준은 명강량의 배에 강남에서 가장 날고 긴다는 교군들 만 태운 터였다. 명옹의 명이 있었는지 아니면 힘 자랑을 할 요량이 었는지 배는 속도를 더하고 있었다. 그 사이, 목책에는 훅룡방도들이 더욱 불어나 있었다. 화살도 빗줄 기처럼 쏟아졌다. 명강량은 선수(船首)에 서 신장도를 휘둘렀다. 타당! 탕! 철태궁에 서 쏟아진 화살이 신장도에 막혀 강물로 우수수 떨어졌다. 목책이 바 로 눈앞이었다. 흑룡방으로 들어가는 수문(水門)은 굳게 닫혀 있었다 . "칼을 주시오." 명강량은 신장도로 쏟아지는 화살을 막으며 손을 내밀었다. 배를 젖던 교군들은 영문도 모른 체 각자의 칼을 내밀었다. 팟! 명강량은 연이어 세 자루의 칼을 날렸다. 칼은 수문에 일정한 간격으로 나란히 박혔다. 명강량은 자세를 낮추었다. 목책이 가까워질수록 적들은 발악적으 로 화살을 퍼부었다. "조심하시오!" 명강량은 한 소리와 함께 몸을 날렸다. 그가 몸을 솟구치며 허공에 서 화살들을 쓸어 갔다. 그는 교룡처럼 몸을 번뜩이며 수문에 꽂아 둔 칼의 칼잡이에 정확히 착지했다. 놀란 흑룡방도들이 철태궁의 방 향을 바꿀 때였다. 명강량은 다시 솟구쳤다. 그는 꽂아 둔 칼을 밝으 며 단숨에 목책에 올랐다. "크악!" "으악!" "악!" 피분수가 솟구치며 세 구의 시신이 강물로 떨어졌다. "으, 으……." 졸지에 세 명의 동료를 잃은 흑룡방도들은 신음을 흘렸다. 명강량 은 병아리를 노리는 매처럼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으악!" "악!" 목책에 선 적들은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명강량의 기 세가 워낙 등등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노기준까지 가세하자 적들은 살기 위해 다리가 부러지는 것도 감수하고 그 높은 목책에서 뛰어내 렸다. 철컹! 철컹! 줄을 단 요구수(撓鉤手:갈고리)를 목책에 걸치며 대여 섯 명의 교군들도 목책을 타고 올랐다. "수문을 열어라!" 노기준이 적들을 몰아치며 목책을 오르는 교군들을 향해 소리쳤다. 교군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며 수문을 열었다. 콰르르르…… 수문이 포말을 일으키며 열렸다. "와!" "와!" 벌떼 같이 수문을 들어서며 교군들은 일제히 횃불을 밝히고 고함을 질렀다. 흑룡방도들은 우왕좌왕했다. 공격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근자에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한 적 없어 그들의 칼날은 무뎌질 만큼 무뎌져 있었다. 더해서 명강량과 노기준의 맹호 같은 위력을 본 후 라 전의를 차리기도 힘들었다. 흑룡방도들은 전열을 갖춘 내당의 무사들이 나타나기 전까지 혼비 백산 교군들의 칼날을 피해 다니기 바빴다. "크억!" "악!" 노기준은 두 명의 흑룡방도들을 벤 후 명강량을 찾았다. 명강량은 벌써 외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맞은 편에서 십 여명의 흑룡방도들이 분주히 뛰어오고 있었다. 옷 깃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허둥지둥 달려오는 민대머리는 노기준도 아는 자였다. 채양도를 든 민대머리 중년인은 바로 흑룡방의 외당당 주, 동태진이라는 자였다. 명강량의 신장도가 동태진을 향했다. 동태진은 놀라 황급히 두 자 루의 비도를 날렸다. 쨍! 신장도가 비도에 퉁기며 비도는 원래의 주인을 향해 되돌아왔 다. 동태진이 던진 속도 보다 더 빠른 속도였다. 동태진은 대경실색 고개를 숙였다. "으악!" "악!" 동태진을 비켜 간 비도가 그의 뒤에 있던 수하들의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팠다. "누…… 누구냐?" 간담이 서늘해진 동태진이 채양도를 치켜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 었다. 신장도는 말문을 여는 것을 싫어했다. 신장도의 그림자가 동태진을 덮쳤다. 동태진은 교연번신(巧燕飜身)의 수법으로 황급히 물러나며 채양도를 휘둘렀다. 쩡! 칼 부딪히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명강량의 좌수에서 붉은 그 림자가 번쩍했다. 삼양장이었다. "으윽!" 동태진이 신음을 흘렸다. 권으로 삼양장을 막기는 했으나 맥문으로 부터 일순간에 열기가 솟구쳐 신형을 가눌 수 없었다. "개자식.……." 동태진은 미친 개 같이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신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죽어라!" 그가 고함을 지르며 대풍기혜(大風起兮)로 채양도에 바람을 일으켰 다. 그러나 그 보다 더 빨리 명강량의 다리가 움직였다. 으드득……. 뼈가 부르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나며 동태진의 몸은 뻣뻣이 굳었 다. 뼈 조각이 살과 장기를 후벼파는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을 것 이다. 명강량은 한 번 더 삼양장을 뿌렸다. "으아!" 동태진이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날았다. 쾅! 그의 신형이 땅바닥을 나뒹굴며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렸다. 명강량은 놀라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동태진의 수하들을 향해 신장 도를 몇 번 더 휘둘렀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에 우중충 하게 앉아 있는 흑룡방의 전각들로 뛰어들었다. 총관이 배교도들의 습격을 보고하기 위해 다급히 달려왔을 때 모태 명은 이미 병기를 걸친 후였다. 전전반측(輾轉反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태명은 철태궁의 시위 소리에 이미 자리를 차고 일어났었다. "잘됐군." 총관의 보고에 모태명이 혁화(赫靴)를 신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잘 됐다니요? 외당은 파훼되고 동 당주는 이 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내당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형국입니다! 배교 놈들의 공세가 상상 이상입니다!" 총관은 입에 침을 튀겼다. "단혈철각련의 방문 보다 낫지 않느냐?" 철컥! 모태명의 좌측 손에 철갑(鐵甲) 의수(義手)를 달고 있었다. 의수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한 자 길이의 비도가 세 자루 접혀 있었다 . 모태명이 주먹을 쥐자 그 칼이 월광(月光)에 잔혹한 빛을 반사하며 일어섰다. 잔혼수(殘魂手)! 오른 손에 든 일월아(日月牙)와 함께 모 태명의 가장 믿음직한 분신이 되어 온 병기였다. "물론 그렇기는 하지만……." 총관은 우물거렸다. 단혈철각련 보다 배교의 침입이 몇 번 낫기는 나았다. "유향경천문은 응조손을 자처하며 곽부의 일에 발을 빼고 구대문파 는 원래 내 말이라면 먼저 뒤집어 놓고 생각하는 자들이니…… 곽부 의 출현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해 줄 자가 필요했다. 그런 차에 마옹 이 직접 왔으니……." 팟! 모태명은 잔혼수를 그었다. 작은 열매를 맺어 가던 도화(桃花) 가 싹둑 세 동강으로 잘렸다. "……뿐이냐! 유향경천문이 정말 응조손이 맞다면 나는 그들에게 조금 잘 보일 필요도 있겠지. 유향경천문의 능운공작이라는 그 어린 놈이 우리를 조사하겠다고 떠들기까지 했다니…… 눈에 불을 켜고 찾 고 있는 마옹을 넘겨주면 조금 예쁘게는 봐 줄 것이다." 모태명은 옅은 미소를 흘리며 허리띠를 질끈 감았다. "생각 보다 나쁘군." 외당을 걸어가며 모태명이 말했다. 흑룡방은 산을 끼고 있어 계단 식으로 지어져 내당에서 보면 외당과 목책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배교 도들은 벌써 외당까지 진격해 오고 있었다. 외당은 아수라장이었다. 내당당주가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나 배교도들의 공세는 갈수록 치열했 다. "쯥……." 모태명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입을 모았다. 휙! 모태명은 휘파람을 불렀다. 휘파람 소리는 호각 보다 더 날카 롭게 밤하늘을 갈랐다. 모태명이 서너 번 더 휘파람을 불자 흑룡방도들은 물론 배교도들까 지 잠시 칼을 멈추고 시선을 모태명에게 돌렸다. "배교의 애송이! 나는 여기에 있다!" 그가 짜랑하게 소리쳤다. 순간, 모태명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느끼며 신형을 틀었다. 쐐액! 어둠 속에서 금검이 그를 쇄도하고 있었다. 모태명은 철판교로 휘청 몸을 눕히며 환영각(幻影脚)을 날리고 잔혼수를 뻗었다. 동작의 신속 함과 출수의 날카로움은 모태명이 간계 하나로 사파 오대흉인에 든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격은 명강량이 했으나 뒷걸음질도 명강량이 쳤다. "흐흐흐……." 모태명은 음소를 흘리며 명강량을 바짝 육박했다. 잔혼수와 일월아 가 난마로 명강량을 뒤덮었다. 허초(虛招)와 실초(實招)를 섞어가며 잔혼수와 일월아가 날자 명강량은 수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면의 흙과 바위가 모태명의 발자국을 따라 산산이 부서져 흩날렸다. 양천등광도법과 간간이 뻗어 가는 삼양장에는 힘도 있었고 투로도 정연했다. 하지만 변화가 지나치게 단조로운 것이 문제였다. 양천등 광도법과 삼양장을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명강량은 그 깨 달음의 깊이가 낮았다. 모태명 같은 강호의 이무기를 상대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노기준은 형세의 불리함을 읽고 손에 땀을 쥐었다. 명강량을 도와 협공을 한다고 해도 별 도움은 되지 않을 성 싶었다. 명왕이 신력(神 力)으로 명강량을 도우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파팟! 팟! 광풍으로 명강량을 거세게 몰아치던 모태명은 갑자기 훌 쩍 일 장을 물러나 뒷짐을 졌다. "애송아, 순순히 포박을 받아라. 더 이상 날뛰지 않는다면 곱게 네 놈을 모셔 주겠다." 모태명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명강량의 눈빛은 변함없었다. 방금 모태명의 공격을 받아 생사를 오간 일을 남의 일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가 다시 신장도를 세 웠다. "당랑(螳螂) 같은 놈이군! 굳이 권주(勸酒)를 두고 벌주(罰酒)를 마시겠다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태명은 일월아를 휘두르며 바로 명강량에게 덮쳐 들었다. 신장도의 칼빛이 유성처럼 빙그르 돌았다. 차장! 두 번째의 대결은 첫 번째 대결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신장도와 잔혼수, 일월아가 부딪히며 일으키는 괴상한 쇳소 리에 중인들은 고막을 잡았다. 강풍이 회오리를 일으키고 뇌전이 번 뜩였다. 갈수록 명강량의 그림자는 위태롭게 흔들렸다. 헛점들이 곳곳에서 드러났다. 모태명은 일월아로 명강량의 심장을 찍어 가며 은밀히 잔 혼수의 칼날을 접었다. 명강량이 일월아를 피해 신형을 비트는 순간 잔혼수가 기해혈(氣海穴)에 육박했다. 사로잡아야 했다. 단숨에 명강 량을 제압하기 위한 일격 필중의 수법이었다. 명강량은 주저하지 않 았다. 그는 일월아의 톱니바퀴가 자신의 심장을 쪼개 오는 것도 개의 치 않고 신장도를 기해혈로 접근하는 잔혼수로 뻗었다. 죽으면 죽었 지 녹녹히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찍! 일월아가 명강량의 옷을 찢으며 피를 튀겼다. 동시에 모태명은 황급히 잔혼수를 회수했다. 마옹의 심장과 자신의 손가락 하나도 바 꾸기 싫은 모태명이었다. 또한 그는 지금 명강량을 사로잡아야 했다. '호랑이 새끼는 역시 호랑이군.' 모태명의 눈빛이 독사처럼 빛났다. 비록 덜 익었다고는 하나 양천 등광도법은 양천등광도법이었고 삼양장은 삼양장이었다. 초식의 대결 로는 눈앞의 애송이를 쉽게 포획하지 못할 듯했다. 조금 힘은 들더라 도 내력을 진탕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채챙! 챙! 모태명이 잔혼수의 칼날을 가위질하듯 부딪혔다. 그가 일월아와 잔혼수에 내력을 불어넣었다. 장포가 팽팽히 부풀어오르며 일월아와 잔혼수가 은광(銀光)을 뿌렸다. "카핫!" 무거운 질타성과 함께 잔혼수가 격렬한 파공음을 내며 명강량을 휩 쓸어 갔다. 카캉! 신장도와 잔혼수가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그와 동시에 명 강량의 신형이 비틀 흔들렸다. 바위 덩이 하나가 어깨에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단내도 울컥 치솟았다. 명강량은 되도록 잔혼수와 부딪히는 것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원 래 초식의 기교도 모태명이 뛰어났던 터였다. 역량과 기교가 약해 내 력의 승부로 끌고 간 모태명이 아니었다. 몸으로 막지 않는 한 신장도로 막아야 했다. 챙! 챙! 챙! 모태명이 중수법을 연이어 펼치자 명강량의 입가에는 결국 선혈이 맺혔다. 귀가 웅웅거리며 단전의 기는 산산이 비산했다. 그러나 명강량의 눈빛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무심하게 모태명에 맞 서는 모습이 정말 당랑이 수레를 향해 달려드는 모습이었다. '틀렸다.' 노기준은 이를 악물었다. 모태명이 공격을 멈추고 있는데도 명강량은 몸을 불쑥거리고 있었 다. 진탕된 내력을 수습하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음에 틀림없었다. 노기준은 칼을 들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끝나는 듯했다. 광명계 로 향하는 길에 명옹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자신이 먼저 가야 했다. 노기준은 모태명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어딜!" 그러나 흑룡방의 내당당주라는 작자가 그가 가는 길을 막았다. 노 기준은 먼저 작자와 싸워야 했다. 노기준과 내당당주가 어우러지자 잠깐 칼을 멈추고 있던 배교도와 흑룡방도들이 다시 서로를 향해 칼을 뻗었다. 명옹이 분사(憤死)하리라는 것을 알았어도 배교도들의 기세는 죽지 않았다. 너무 많은 패배를 당해 패배하는 싸움을 일상으로 겪고 있 었기 때문인지 몰랐고 군산의 패배를 이미 예감했기 때문인지도 몰랐 다. 어쨌든 흑룡방도들에 대한 배교도들의 공세는 처음 보다 더 격렬 했다. "으악!" "악!" 팔, 다리가 날고 비명이 군산을 흔들었다. "지독한 놈들……." 모태명은 안색을 일그러뜨렸다. 서둘러 마옹을 제압해야 했다. 그 는 숨을 헐떡이며 구부정하게 서 있는 명강량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뇌전 같은 출수로 명강량의 기해를 다시 노렸다. 반항할 힘도 없으 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엇!" 모태명은 놀라 다급히 손을 뺏다. 신장도가 벼락같은 기세로 그의 손목을 갈라 오고 있었다. '이런, 우라질…….'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손목을 매만졌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나 보구나!" 모태명은 노호를 터뜨리며 잔혼수에 전력을 실었다. 명강량은 당장 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모태명의 잔혼 수에 부딪혀 갔다. 쩡! 거친 쇳소리와 함께 모태명의 어깨가 휘청 흔들렸다. 얼굴에 핏줄이 솟는 것을 보면 이번에는 그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명강량의 사정은 더 나빴다. 그는 피를 뿌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모태명은 주춤했다. 방금 합을 겨루었을 때 느껴졌던 힘은 전과 현 저히 달랐다. 다 쓰러져 갈 것 같이 보이는데 마옹의 힘은 더 불어난 듯했다. '마지막 발악이겠지.' 모태명은 흉광을 흘리며 손목과 어깨에 찌릿하게 느껴지는 통증을 무시했다. "웨엑!" 명강량은 한 덩이의 피를 내뿜었다. 그의 내부는 엉망이었다. 그를 괴롭히는 것은 모태명의 중후한 내력뿐만이 아니었다. 운기 중에 느 꼈던 알 수 없는 힘…… 모태명이 내력으로 짓눌러 올 때 마다 그 힘 은 반사적으로 치솟으며 전신을 들끓게 했다. 모태명의 공세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내부에 서로 다른 내 력들이 제멋대로 치닫자 명강량은 자신을 수습할 수가 없었다. 처음 에는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했다. 그러나 모태명의 계속되는 공세에 명강량은 들끓는 기력을 억제할 수 없었다. 내부가 폭발해 스스로 자 멸할 지경이었다. 만약 모태명이 명강량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계속 내력으 로 명강량을 위협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는 잔혼수를 연이어 뿌렸다. 쩡! 쩡! 쩡! "웩!" 명강량은 주르르 밀려나며 앞가슴이 질퍽하도록 피를 뿜었다 . 더 이상 치솟는 힘을 억누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명강량은 심결(心 訣)을 풀어 버렸다. 전신이 후끈 달아오르며 눈에 빛발이 섰다. 몸은 둥둥 떠다니는 느 낌이었고 손과 발이 어디에 있는 지도 몰랐다. 자신의 몸은 다른 사 람의 것인 듯했다. 하지만 그의 손과 발은 모태명의 공세에 반사적으 로 반응했다. 챙! 일월아에 불꽃이 튀었다. 일월아의 톱니가 박살나며 모태명은 주르르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일월아를 들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렸 다. 일월아의 무게도 천 근 같이 느껴졌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 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옹의 힘은 수를 더할수록 불어 나고 있었다. '죽여야 한다!' 모태명은 마옹을 사로잡겠다는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됐는가 를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조금 늦은 감이 있었다. 파팟! 신장도가 질풍노도로 밀려왔다. 모태명은 다급히 일월아를 들었다. 쨍깡! 정강(精剛)으로 만들어진 일월아가 무처럼 토막 났다. 손도 갈라져 허연 뼈를 드러냈다. "마…… 마옹……." 모태명은 다급한 김에 명강량을 불렀다. 명강량의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쐐액! 신장도가 수십 가닥의 뇌전을 번뜩이며 모태명의 전신을 쓸 었다. 모태명은 죽을힘을 다해 잔혼수를 번뜩였다. 쨍그랑! 은빛 파편들이 월광 속으로 분분히 날았다. 잔혼수는 마치 유리가 박살나듯 깨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으…… 으……." 모태명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내렸다. 어떻게 해서 상황이 이 렇게 되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듯했다. "이…… 이것 보게. 나…… 나는……." 모태명은 뒷걸음질을 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잠시 흐름을 멈추었던 신장도가 다시 움직였다. 붉은 눈, 표정 없는 잔혹한 얼굴, 차가운 칼날……. 꿈이 맞았다. 악신에게 쫓기는 꿈이었다. 모태명은 다급히 등을 돌렸다. 순간, 허리뼈가 토막 나는 고통에 그는 입을 딱 벌렸다. "아……." 모태명은 애절한 비명을 흘렸다. 어깨와 등으로 불에 덴 듯한 통증 이 찾아 들고 몇 군데 더 도흔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목은 하늘을 날았다. 뚝! 떼구르르르……. 모태명의 목이 무엇인가 할 말이 있다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굴렀다. 명강량은 신장도에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섰다. 그의 몸은 연신 폭 죽 같이 터지는 힘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었다. '바로…… 이 힘이었어.' 우제준과 싸울 때는 들끓는 기력의 충격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 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식의 한 가닥은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명 강량은 내부를 뒤쑤시는 힘을 똑똑히 느끼고 있었다. 명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뼈가 우두둑 일어섰고 역혈대법을 시전 하지도 않았는데 피는 제멋대로 역류했다. 불덩이 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 고통 때문에 의식도 혼미했다. "으웩! 웩!" 피도 몇 모금 토했다. "아 - 아 - " 군산을 울리는 고함이 절로 터졌다. 가만히 있지 못하게 했다. 주 체할 수 없는 힘이 방주를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흑룡방도들 속으 로 그를 내몰았다. 피비린내가 몰려왔다. 피비린내 속에 명강량은 결국 자신의 의식도 놓았다. "크악!" "칵!" 군산의 밤의 피의 제전이었다. 올 때에도 침묵 속에 왔지만 갈 때에도 침묵 속에 갔다. 흑룡방의 와해! 대환란 이후 가장 통쾌한 일이었다. 군산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성 을 질러야 옳았다. 그러나 교군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노기준은 칼집으로 갑판을 툭툭 쳤다. 배의 이물에는 명옹이 앉아 있었다. 지친 표정이었지만 의연한 자 태였다. 그는 명옹에게서 시선을 떼고 흑룡방으로 눈길을 돌렸다. 활활 불 타고 있는 목책과 전각, 불빛 사이로 무수히 보이는 시신들……. 노기준은 자신의 팔을 쓰다듬었다. 피부가 꺼칠했다. 상처라도 낫 나 싶어 시선을 돌리니 소름이 촘촘히 돋아 있었다. 그는 퍼뜩 젊은 명옹에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교군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룡방에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도살이었다. 마치 아이 들이 장난으로 개미를 짓밟아 버리듯……. 광기로 번뜩이던 눈, 적들은 물론 교군들과 자신까지 두려움을 느 꼈었다. 명옹에 대해…… 나중에 자신과 교군들은 명옹이 펼치는 대 학살극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피의 복수는 원했었다. 하지만 그런 사나운 장면까지 원한 것은 아 니다. 패주하는 흑룡방 수족들의 목숨까지 야차 같이 노릴 필요가 있 었을까. 배교도들은 누가 뭐라도 세상의 밝음을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 노기준은 고개를 숙였다. 주 명두와 여 명두가 생각났다. 주 명두와 여 명두라면 오늘 같은 날 젊은 명옹을 위해 분명 무슨 말인가를 해 주었을 것이다. 주 명두 , 여 명두가 아닌 자신이라도 뭔가 해 줄 말은 있었다. 그러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젊은 명옹에게서 심한 이질감을 느꼈다. 솔직히…… 그때는 사람이 아닌 그 무엇 같았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그 인상은 너무도 강하게 남겨졌다. 그 인상이 너무도 강해 교군들의 승리의 흥취까지 뺏어 갔음이 틀림없었다. 휘-익! 펑! 포향 소리에 노기준은 고개를 들었다. 불꽃이 허공에 튀었다. 누군가가 배교도들의 승리를 대신 축하해 주는 모양이었다. 그 순간, 노기준은 다시 생각했다. '아무려면 어떤가? 우리는 참을 만큼 참았다! 주 명두, 여 명두도 더 이상 참으라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던 자들은 같은 대가를 받아야 돼!' 명옹의 학살극을 두려워하고 적들을 동정하던 자신이 우스웠다. 그 가 안광을 빛내며 주위를 살폈다. 교도들의 생각도 그와 같은 모양이 었다. "이겼다!" 비로소 승리의 환호성이 물결처럼 번져 나갔다. 눈빛도 승리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싸워야 할 적은 아직 많았다. ＊ ＊ ＊ 허공에서 작렬하는 불꽃은 푸른빛이었다. "음……." 언상영은 누대(樓臺)에 서 학익선으로 손바닥을 가볍게 쳤다. 의외였다. 푸른빛은 배교도들이 흑룡방을 무너뜨렸다는 신호다. 뿐 만 아니라 마옹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뜻……. '놈이 모태명을 죽였다는 말인가?' 믿어지지 않았다. '모태명은 분명 흑룡방에 있다고 했는데…….' 불타는 흑룡방은 그의 눈에도 보였다. 흑룡방이 와해되는 것을 모 태명이 지켜보고만 있었을 리 없었다. 언상영은 고개를 갸웃 저었다. 어둠 속이라 자세한 사정은 확인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포향은 배교도들의 승리와 마옹의 건재(健在)를 알렸다. "불을 밝혀라!" 그가 고함을 질렀다. 누대에 횃불이 환하게 오르며 누선도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언상영은 깃발을 들었다. "으헤헤, 헤헤…… 장목생!" 팽해만은 쾌선을 질주하며 수석향주를 불렀다. 구레나룻이 다가왔다. "명강량이 살아 있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팽해만이 대뜸 물었다. "의외군요." 장목생이 말했다. "모태명의 마음이 좋아졌나? 제 집을 불태운 놈을 살려 보내 주다 니…… 그렇지 않으면…… 헤헤헤! 설마 명강량이 모태명을 죽인 것 은 아니겠지?" 팽해만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모태명은 최소한…… 구대문파의 명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는 됩니다." "맞았어. 그럴 리가 없겠지. 그럼 저건?" 팽해만은 언상영이 누선에서 보내는 신호를 가리켰다. "음……." 장목생은 수염을 쓸었다. "으헤헤, 신기한 일이야! 신기한 일!" 팽해만은 박수를 쳤다. "나는 그놈을 잡으면…… 머리를 따고 배를 갈라 놈의 내부를 한 번 들여다보아야겠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인지. 어이, 어쨌든 이 지 긋지긋한 추적도 오늘에야 끝나겠군! 명강량, 나는 네놈 덕분에 산천 구경은 실컷 했다! 서둘러라!" 그가 허공 중에 묵편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배교도들을 태운 작은 배들이 월광 속에 희끗희끗 보였다. 팽해만과 청룡당의 수하들이 배교도들을 협공하기 위해 쾌속으로 나아갈 때였다. "뭐야?" 팽해만은 이물에 서 고함을 질렀다. 어둠 속에 긴 부교(浮橋)가 보였다. "동정호에 다리를 놓겠다는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팽해만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름드리 통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부교는 넓이가 마차 두 대는 족 히 지날 정도, 길이는 십 여장에 달했다. "부교가 아닙니다. 사천의 나무꾼들인 모양이군요." 장목생이 말했다. "사천의 나무꾼?" "사천의 산림에서 벤 나무들을 뗏목으로 묶어 금사강(金沙江), 민 강(岷江)을 따라오며 나무를 팔지요. 어떤 자들은 배를 타고 내려오 는 동안 아예 저 뗏목 위에서 가축을 키우고 먹을 것도 가꾸고 한답 니다. 보통 가족이나 서너 명이 한 조로 움직이는데 이번에는 엄청나 군요." "그래? 팔자 좋은 놈들이군. 어쨌든 빨리 비키라고 그래!" 팽해만이 소리쳤다. "저자들을 비키게 하느니 우리가 돌아가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장목생이 말했다. "이런 젠장……." 팽해만은 돌연한 장애물에 울화를 터뜨렸다. 돌아가는 것은 별 문 제가 아니었지만 돌아가다 보면 대열이 흩어진다. 작은 배들이고 어 둠 속이라 짜여진 선단을 형성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팽해만이 선단의 우회를 명하려 할 때였다. 뗏목에서 횃불이 환하게 오르며 허공으로 섬광이 날았다. 그와 동 시에 뗏목에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름한 차림에 긴 노를 들고 있는 자들은 영락없는 나무꾼들이었다. "어이, 어디로 가시오?" 횃불 아래에서 장한 한 명이 소리쳤다. 원숭이처럼 전신에 털이 숭 숭한 자였다. "네놈의 목을 따러 간다!" 악에 받친 팽해만이 와락 고함을 질렀다. "좋은 일을 하시는구려. 보답을 드릴까 하오." 장한은 느긋하게 말했다. "어이!" 그가 횃불을 좌우로 흔들었다. 뗏목 위에 사람들의 그림자가 분주 히 오가더니 돛대가 일어났다. 금사강, 민강의 험한 강물에서 놀던 자들 답게 뗏목을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뗏목은 돛에 바람 을 받아 항진을 시작했다. 뗏목이라도 순풍(順風)이 실리자 보통 속 도가 아니었다. "뭐 하는 게야?" 팽해만이 놀라 소리쳤다. 뗏목들은 일제히 꼬리를 틀고 청룡당을 태운 쾌선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쾌선이 빠르기는 하나 지금은 돛을 달지 않았다. 그리고 물살을 거 슬러 올라야 하는 터였다. 반면에 뗏목은 순풍에 물살까지 흐름을 도 와주고 있었다. 뗏목은 곧장 쾌선을 들이받을 듯했다. "어이, 어이, 사양하겠어! 가져가! 가져가라구! 장가갈 때 세 칸 집이나 지을 수 있도록 그때 달란 말이야! 화전(火箭)! 화전! 모두 죽여 버려!" 팽해만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청룡당 수하들이 급히 노(弩)를 들었다. "좋은 데 쓰시오!" 횃불 아래 털북숭이 장한이 히죽 웃었다. "끊어라!" 그가 고함을 질렀다. 몇 대의 뗏목만 남겨 두고 뗏목에 탄 자들이 일제히 통나무를 이은 끈을 끊었다. 줄이 풀린 통나무들이 동정호에 쫙 갈라졌다. 통나무 는 이미 가속이 붙어 있었으므로 그물처럼 흩어지며 팽해만의 선단을 덮쳤다. "아이고! 죽일 놈! 장가갈 때 달라니깐!" 팽해만은 동정호를 메울 듯 시커멓게 몰려드는 통나무를 보며 발을 굴렀다. 펑! 두 번째 포향이 울렸다. '함정에 걸렸구나.' 누선의 환한 불빛도 눈에 들어왔다. 누대에 펄럭이는 깃발은 유향 경천문의 깃발이 틀림없었다. '근자에 조용하다 했더니……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구나.' 노기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명두, 저쪽을 보십시오!" 교군 한 명이 소리쳤다. 수십 척의 배들이 배후와 좌측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우리를 동정호에 수장시킬 셈이구나. 우리는 수상전(水上戰)에 대 비한 아무런 무기도 없다.' 노기준은 초조했다. 그가 흘깃 명옹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명옹은 여전히 무표정하게 이물에 서 있었다. 감추려 해도 지친 기색은 역 력했다. 흑룡방에서 그토록 좌충우돌했으니……. 노기준은 고개를 빼고 뭍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다. 보이지는 않아도 그곳에는 커다란 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을 것임에 뻔했다. 그러나 물 위 보다는 뭍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 을 듯했다. "명옹을 주위로 대형을 밀집하라!" 그가 손짓을 하며 소리쳤다. 적들은 필경 쇠뇌나 화전으로 먼저 공 세를 펼치리라. 우선 급한대로 명옹을 보호하기 위해 인(人)의 장벽 이라도 쳐야 했다. 교군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급히 물살을 헤쳤다. 잔잔하던 동정호에 다시 파랑이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휘익! 하며 허공에 다시 한 번 섬광이 번뜩였다. '앗?' 노기준은 놀라 좌우를 살폈다. 허공을 수놓는 불꽃은 배교도 들만 사용하는 폭죽이었다. 멀리서 횃불이 휘휘 도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응원군을 보낸 모양 이었다. "저 곳이다!" 노기준은 횃불이 흔들리는 곳을 향해 손짓을 했다. "껄껄껄, 노기준! 네놈 꼴이 꼭 꼬리에 불붙은 쥐 같구나!" 돛을 단 세 척의 뗏목이었다. 뗏목에 선 털북숭이 장한이 노기준을 향해 호탕하게 소리쳤다. "추(秋) 명두(明頭)!" 노기준은 반색을 했다. 뗏목에 선 털북숭이 장한은 바로 사천의 명 두, 추대괄(秋大恝)이었다. 근육질로 단단히 뭉친 체격, 전신에 무성 한 털……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추대괄의 나이는 노기준과 비슷해 보 였다. 그러나 추대괄은 노기준 보다 십 년이나 연상이었다. 만락군( 萬樂君)이라 불릴 정도로 매사에 낙천적이라 나이가 들지 않는지 모 를 일이었다. "추 명두가 여기에 어떻게?" 노기준은 추대괄의 등장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노기준, 결국 큰일을 벌이고 말았군. 잘했다! 무사히 살아 돌아온 것을 보니 모태명의 목을 베었겠군." "물론!" 노기준은 주먹을 들어 보였다. "통쾌한 일인지고, 통쾌한 일이야. 싸움을 반대했던 주 명두, 여 명두는 이제 이 땅에 없고 어정거리던 자네까지 나섰다. 됐어! 이제 명옹께서는 어쩔 수 없이 전교영기를 들겠군. 크카카카!" 추대괄은 황소 같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셨습니까? 내가 아닙니다. 명옹께서 계십니다." "뭣?" 추대괄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눈에 어둠 속에 서 있는 명강량이 보였다. "아이고!" 그가 손뼉을 치며 명강량이 탄 배에 훌쩍 뛰어올랐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명옹이시여!" 추대괄은 급히 부복했다. "추 명두, 꼭 이 년만에 뵙는군요." 명강량은 가는 미소로 추대괄을 맞았다. "흑룡방을 불사르고 모태명의 목을 딴 분은 명옹입니다. 우리들이 야 흑룡방 놈들의 전각에 불장난이나 했을 뿐이지요." 노기준이 웃으며 말했다. "잘 하셨습니다! 잘 하셨습니다! 중원에서 들려 오는 소식에 애간 장이 다 탔더이다." 추대괄은 명강량의 손을 덥썩 잡고 흔들었다. "반가움은 나중에 나누고…… 추 명두, 빨리 이곳부터 벗어나야겠 소. 유향경천문 놈들이 냄새를 맡았습니다." 노기준이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청룡당은 통나무에 갇혀 아직도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나 현무당과 백호당은 쾌속으로 교군들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럼세. 사실 나도 이상한 낌새를 느꼈기 때문에 이곳으로 온 것 일세. 형산파, 하토문…… 별의별 놈들이 쫙 깔렸더군." "역시 저곳에도 매복이 있겠군요. 그러나 우리는 수상전을 벌일 처 지가 아니니……." "뚫고 나가면 되지 무슨 걱정을 하는가! 명옹도 계신데…… 명옹은 이리로 모시게. 가자!" 추대괄이 손을 들었다. 명강량은 추대괄에게 끌려 뗏목에 몸을 실었다. 노기준도 뗏목에 올라탔다. 뗏목이 움직이고 나룻배들도 그 뒤를 따랐다. "추 명두, 정말 이곳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추대괄의 뗏목 위에서 노기준이 물었다. "무산대전이 바로 코앞일세. 이왕 무산으로 가는 길 나무나 좀 팔 자고 생각했지. 중원과 강남의 교도들이 적들의 공세로 엉망이라 들 었다. 달리 도울 방법도 없고 해서 나무를 팔아 은냥이나 얹어 주리 라 마음먹었지. 그러던 차에 아무래도 이곳의 조짐이 수상쩍어 동정 호에서 하루를 묵었네." 추대괄은 원래 초부(樵夫)가 맞았다. 초부도 보통 초부가 아니라 사천에서 제법 알아주는 목재상(木材商)이었다. "그렇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아까운 나무를 다 버리게 되었으 니……." 노기준은 뭉클한 감동을 느끼며 말꼬리를 흐렸다. "자네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 통나무 몇 조각이 아까워 동도들을 몰라라 할 사람으로 보이던가! 나무는 아직 많네. 총단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사천의 각 향당에 명을 내려 질 좋은 나무들을 구하라 했지. 총단을 다시 지어야 할 것 아닌가. 성녀와 명옹께서 거주할 곳 없어 떠돌아다니게 해야 하다니…… 교도들이 온 산을 헤집고 다녔 다. 덕분에 지금은 황산 총단의 두 배 정도 되는 총단을 지을 수 있 을 정도의 나무를 모았네. 이번 나무는 그 나무들 중 질이 떨어지는 나무를 조금 가져온 것뿐일세. 껄껄껄!" 추대괄이 호탕하게 웃었다. 노기준은 목이 메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 천 년의 환란 속 에서도 배교가 버텨 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명옹, 이번 무산대전에서는 전교영기를 드시겠구려." 추대괄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명강량은 짧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서 있기도 힘든 처지였다. 교 군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억지로 버티고 있었지만 들끓던 기력이 가라앉으며 몸은 점점 무거웠다. "잘 생각하셨소. 우리 교의 힘은 그렇게 약하지 않소. 항상 우리가 저울질하는 이상이지." 추대괄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명두!" 교군 하나가 추대괄을 다급히 불렀다. 유향경천문의 배들이 월광 속에 완연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빠르군. 이러다가 꼬리를 잡히겠어." 추대괄은 송충이 같은 눈썹을 꿈틀댔다. "아우, 안되겠네. 자네는 명옹을 모시고 뭍으로 오르게나. 나는 놈 들의 배를 막을 테니……." "저 많은 배들을 무슨 수로……." "걱정 마시게. 저게 있지 않는가." 추대괄은 씨익 웃으며 뗏목 한 편에 있는 상자를 가리켰다. 상자에 는 작은 호박만한 묵환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어폭뢰(漁爆雷)라는 것일세. 민강, 금사강의 지류들은 비가 온 후 면 온갖 것들이 베어 낸 나무들이 떠내려가는 것을 막지. 급류 속에 뛰어들어 일일이 그것들을 치워 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때 저기 어폭뢰 한 방으로 물길을 튼다네. 내가 만든 것이지." 추대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도 배교도 답게 화기에는 밝았다. "어폭뢰가 있다고 하더라도…… 놈들과 싸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어쨌든 뭍으로 나아갑시다." 노기준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만류했다. "나를 비롯해 여기 있는 교군들은 민강, 금사강, 삼협의 험한 물길 속에서도 잉어처럼 노니는 자들이다. 안되면 물 속으로 달아나면 그 만이니 걱정 말게." 추대괄은 노기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명강량을 바라보고 섰다 . "명옹이시여!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무산에서 뵙겠습니다." 그가 머리를 숙였다. "아우, 뭐 하는가! 어서 명옹을 모시게!" 추대괄이 고함을 지르며 돛대를 잡았다. 노기준은 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명강량과 함께 나룻배에 올랐다. 뗏목이 방향을 틀었다. "표정들이 왜 그런가? 모두 싸우러 가는 자들이 아니군! 기운을 돋 워 줄까나." 추대괄은 히죽 웃었다. "양백 보다는 못 하지만 내 북소리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일세." 그가 북을 들었다. 둥! 둥! 두두두두둥! 추대괄이 싸움을 독려하는 북을 힘차게 두들겼다. "크카카카! 전성남(戰城男) 사곽북(死郭北)! 야사오가식(野死烏可 食)……." - 성벽 남쪽에서 싸우고, 성벽 북쪽에서 죽었다. 들에서 죽어도 까마귀의 좋은 먹이 된다. 추대괄은 노래를 부르며 멀어져 갔다. "전성남 사곽북……." 뭍으로 향하는 교군들도 이내 추대괄의 노래에 입을 맞추었다. 동 정호의 창파가 다시 술렁였다. 쾅! 쾅! 노기준은 폭음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화전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 었다. 어폭뢰가 터지며 추대괄과 유향경천문의 배들이 접전(接戰)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노기준은 주먹을 쥐며 전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변(湖邊)은 번뜩 이는 빛으로 가득했다. 창검이 월광에 비쳐 나는 빛이 분명했다. 노기준은 높게 손을 들었다. "가자!" 그가 고함을 질렀다. 배들이 전력으로 뭍으로 질주했다. 핑! 피핑! 호변에서 몇 대의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의 소나기를 생 각하고 있었는데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다행히 호변의 적들은 궁 노 같은 물건들은 준비를 못한 듯했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호변에 반 원형으로 도열해 있는 적들의 모습이 보였다. '잘 됐어. 형산파 놈들이군.' 노기준이 안광을 빛냈다. "쓸어버려라!" 그가 물 속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물은 허리춤까지 왔다. 그는 물살을 첨벙이며 형산파를 향해 달려갔다. 교군들이 그를 뒤따랐다. 반원형으로 도열해 있던 형산파는 숫자의 열세를 느꼈는지 아니면 기세에 질렸는지 대열을 밀집시켰다. 아마 배교도들이 자신들 앞에까 지 나타날 줄 몰랐을 것이다. 슥! 스슥! 형산파의 문도들이 칼을 뽑았다. 그때였다. "쳐라!" 하는 고함과 함께 형산파의 배후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인영이 형산파의 배후를 비호처럼 습격해 갔 다. 형산파 문도들이 의외의 적에 놀라 술렁거렸다. '저들은 또 누구인가?' 노기준은 새로운 응원군에 놀라 전면을 주시했다. '호남의 교군들이군.' 악양에 교군들이 모였을 때 호남의 교군들은 보이지 않았었다. 아 마 사정이 있어 이제야 합류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호남의 동도들이다! 쳐라!" 노기준이 쾌재를 부르며 소리쳤다. 쩡! 채챙! "으악!" 배교도들과 형산파의 문도들이 뒤섞이며 호변은 이내 핏물로 붉게 물들었다. * * * "후후……." 단원홍은 실소를 흘렸다. 그의 안광은 어둠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팽해만은 여전히 팽해만이었다. 이제야 간신히 통나무를 치우고 고 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배교도들을 추적하는 팽해만의 모습이 선했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팽해만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별 수 없이 희극적이었다. 아마 그는 자신의 목이 날아가는 상황 속에서도 웃음 을 잃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단원홍은 팽해만이 좋았다. 팽해만의 성격이 부러웠다. 나머지 자들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유향경천문, 언상영이 동원한 군소방파, 그들과 싸우는 배교도들……. 그들이 지금 그들이 싸우는 내막을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몇몇 자들의 호사스런 장난질에 자신들의 목숨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알 면……. 단원홍은 그 사실이 우스웠다. "으악!" "악!" 싸움을 갈수록 치열했다. 호변의 일전은 형산파의 붕괴로 끝나고 싸움은 악양 근교로 번져 갔다. 배교도들은 야산(野山)을 통해 달아나려는 모양이었다. 하토문 이 저지선을 만들고 있었고 대오가 흩어진 형산파도 산발적으로 배교 도들의 발길을 잡았다. 남궁기와 당예, 팽해만이 그 뒤를 따랐다. 언 상영의 누선도 호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언상영은 서두르지 않았다 . 배교도들이 역습으로 퇴로를 만들까 걱정하는 듯했다. '제법이군.' 단원홍은 뒷짐을 풀고 어깨를 폈다. 불타는 흑룡방, 허둥대는 추적 자들…… 적들에 둘러 쌓였어도 배교도들의 기세는 전혀 죽어 들지 않았다. 단원홍의 시선은 한 청년을 쫓았다. 번쩍이는 금검…… 배교도들이 작자의 주위를 철통 같이 호위하고 있었다. 힘겹게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작자는 마옹이 맞는 모양이었다. 단원홍은 점장대를 천천히 걸어 내려 왔다. 이 우스운 싸움의 끝을 볼 때였다. 원상은 점장대를 걸어 내려오는 단원홍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錐) 는 주머니 속에서도 감추어지지 않는 법이다. '혜명의 말이 맞겠구나. 앞으로 강호는 그의 일세가 되겠군. 백운 룡…… 제자조차 잘 거두었다.' 원상은 단원홍의 사부, 백운룡을 떠올렸다. 자신의 쌍장(雙掌)은 항상 무패(無敗)만 기록한 것은 아니다. 곽부, 그리고 백운룡…… 백 운룡은 그도 찾아왔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늙은 것이 망동(妄動)을 부려 괜한 곳까지 왔구나. 이 일을 어쩌누…….' 원상은 안색을 찌푸렸다. 봄이 오면 원상은 다시 개봉으로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강남에서 계속 미적이고 있었다. 황학루, 악양루도 오르고 군산에도 가 보기 위해서였다. 황학루는 이미 둘렀고 동정호는 이제야 도착했다. 이상한 마음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번 남행(南行)이 마지막이 될 지 모른다는……. 불현듯 자신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철중달의 얼굴을 보 는 순간 그런 생각이 났었다. 벗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 는 거울이다. 그는 철중달의 얼굴에서 속일 수 없는 세월의 노화(老 化)를 보았었다. 자신도 마찬가지리라……. 그래서 황학루, 악양루, 군산의 정취를 잊지 않고 담아 두려 했다. 한데……. 원상은 동정호의 소요를 쭉 지켜보고 있었다. 몰려가는 배교도들 속에 이정인의 제자로 생각되는 아이도 발견했고 백운룡의 제자도 발 견했다. 보아 하니 명강량이라는 아이는 살아남지 못할 듯 싶었다. 이미 지 칠대로 지쳐 있었고 지치지 않았다 하더라도 능운공작이라는 아이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 싶었다. 원상은 이정인에게 목숨을 구함 받았다. 이정인이 그 보답을 바란 다면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할 것인가. 십중팔구(十中八九) 위기에 처한 제자의 목숨을 구해 달라 할 것이다. 원상의 고민은 바로 그곳에 있었다. 배교의 일에는 정말 뛰어들기 싫었다. 보지 않았다면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빚을 갚을 일을 보았는데 이 정인의 은혜를 모른 척 하기는 힘들었다. '어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을꼬…… 그래, 내가 이곳에 온 것도 , 명강량이라는 저 아이를 만난 것도 다 하늘의 뜻…… 오늘만 배교 도들을 위해 한 팔을 거들어 주리라.' 그는 결심을 굳혔다. 찌익! 원상은 걸랑을 찢어 복면을 했다. 휙! 그가 신형을 날렸다. 그는 단원홍을 뒤쫓았다. 이후의 일은 알 수 없는 일이고 명강량이라는 아이를 향해 사신(死神)으로 다가가는 단원홍이라는 아이는 잡아 둘 생각이었다. * * * "크악!" "악!" 진로를 막던 서너 명의 형산파 문도들이 피를 뿌렸다. 명강량은 한 무리의 교군들에 둘러싸여 산의 어둠 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를 둘러싼 교군들은 뒤늦게 합류한 호남의 교군들이다. 모 두 신색이 출중한 자들이었다. 명강량은 그 중 한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의 곁 에서 달리고 있는 이제 갓 소년 티를 벗은 청년이었다. 짙은 눈썹, 반듯한 콧날, 꽉 다문 입술…… 재기가 넘쳐 보이는 청 년이었다. 호남의 교군들은 여 명두의 뒤를 이어 새로 명두가 된 자 라며 청년을 소개했다. 감악(甘岳)! 바로 새로 호남의 명두가 된 청년의 이름이었다. 호남의 교군들은 흑룡방과의 일전에 명두도 없이 참가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급히 향회가 열렸고 그 때까지 미적거리 고 있던 명두의 선임에 들어갔다. 마땅한 자가 있었다면 여 명두가 광명계로 입적한 후 바로 차기 명 두가 선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땅한 자가 없었기 때문에 호남의 교도들은 급박함을 알고도 명두의 선임을 미루고 있었던 터였다. 교도들의 입에서 여러 사람이 거론되었다. 그 중 가장 명두의 적임 자로 떠오른 자는 감악이었다. 원래 감악은 여 명두의 뒤를 이어 호 남의 명두가 될 자로 예측되어 온 청년이다. 문제는 여 명두가 불시 에 변을 당하는 바람에 너무 어린 나이에 명두 자리를 넘보게 되었다 는 것이었다. 세월의 연륜이 쌓여야 향당을 잘 이끌 수 있다는 뜻만 아니다. 배 교도들에게 명두란 어떤 자리인가. 명두라는 자리는 바로 죽음의 자 리다. 나이 어린 자에게 명두는 너무도 가혹한 자리였다. 특히 감악 은 호남의 교도들이 아끼고 아끼던 청년이다. 쉽게 명두를 맡아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호남의 교도들은 감악을 후계자로 앉히는 문제를 두고 밤을 새며 갑론을박을 벌인 듯했다. 흑룡방과의 일전에 뒤늦게 교군들이 합류시 킬 정도로…… 그 결과 결국 감악은 호남의 명두가 되었다. 감악이 명두가 되겠다 고 나선 모양이었다. 감악은 두 가지의 말로 호남의 교도들을 설득했 다. 젊은 명옹의 일, 명강량 자신을 거론하며 젊은 명옹도 있으니 젊은 명두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고 또 하나는 교가 어려울 때 뒷짐을 지 는 자는 이후에도 명두의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명강량은 후계자로 내정된 상태였고 감악은 후계자로도 내정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달랐다. 하지만 감악의 열변에 호남의 교도 들은 손을 들었고 그렇게 해서 감악은 호남의 명두가 되어 지금 자신 의 곁을 달리고 있었다. 추상(秋霜) 같은 표정으로 적들을 쓸어 가는 감악을 바라보면 명강 량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피로도 풀리는 듯했다. 산서 의 명두가 된 전우삼이라는 청년에게서 느꼈던 친근감을 그는 감악에 게서도 느끼고 있었다. 전우삼과 감악의 기질은 서로 완전 다른 듯했다. 명강량이 전우삼 에게 느낀 것은 불길의 사나움이었고 감악에게 느낀 것은 불길의 온 기였다. 사나움이든 온기든 살아 있는 한 그들은 교의 큰 기둥이 되어 줄 것임에 틀림없었다. 특히 감악은……. 명강량은 감악을 본 순간 또 다른 생각을 하나 하고 있었다. 마음 까지 편한 이유는 그 생각 때문이었다. "명옹!" 감악이 문득 명강량을 불렀다. "칼 부딪히는 소리가 잠잠해 졌습니다. 아무래도……." 그는 이를 악물었다. 수상에서 유향경천문의 추적을 막던 자는 추대괄이었다. 이제 유향 경천문의 추적을 막고 있는 자는 노기준이다. 노기준은 감악과 호남 의 교군들에게 명강량의 호위를 맡기고 자신의 나머지 배교도들과 함 께 추적자들을 막고 있었다. 그러나 격렬했던 칼 소리가 잠잠해졌다는 것은 저지선이 뚫렸다는 뜻……. 감악은 노기준과 교도들의 생사를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노 명두는 그렇게 쉽게 쓰러질 사람이 아니오. 그의 말대로 적들 을 막지는 못해도 피할 수는 있을 것이오. 아마 적들의 기세가 거세 산개전(散開戰)으로 적들을 상대하는가 보오." 명강량이 감악을 위로했다. 추대괄은 자신의 수중공부(水中工夫)를 자랑했고 노기준은 자신의 발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 실력은 적들을 상대로 등을 돌릴 때 발휘되는 것! 불퇴전(不退戰)으로 싸웠다면 결 과는 좋지 않을 것임에 뻔했다. 명강량의 발걸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명강량과 감악을 비롯한 호남의 교군들이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때 였다. 그들은 갑자기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둠 속을 울려오는 기이한 선율……. "이 거……." 감악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소리였다. 중 원의 악기가 아닌 모양이었다. 처음에 감악은 투박하고 거친 선율에 적들의 신호음 정도로 생각했 다. 그러나 어둠 속을 울려오는 선율은 애간장을 끊어 놓을 듯 너무 애절했다. 감악은 자신이 처한 지금의 처지도 잊고 괜스레 울적해 지는 기분 을 달랠 길 없었다. 그가 교군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교군들의 표정 은 그 보다 더했다. 어떤 자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 다. '마음(魔音)이다!' 감악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교군들의 마음을 수습하기 위 해 일갈을 터뜨리려 할 때였다. "아……." 교군들이 찬탄을 터뜨렸다. 산봉우리에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옥빛 옷자락과 긴 머리칼을 날리며 달빛에 소소히 모습을 드러낸 인 영……. 선율이 들려 오는 곳은 그곳이었다. 선녀(仙女)가 하강(下降)한 듯했다. 피로 얼룩진 이곳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었다. 감악은 명강량을 향해 퍼뜩 시선을 돌렸다. 명강량은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벼락을 맞은 듯 서 있었다. 그의 손 과 입술이 덜덜 떨렸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점점 악귀처럼 일그러져 갔다. "성녀……." 명강량은 신음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휙! 그가 비호처럼 산봉우리로 신형을 날렸다. 피로에 지쳤던 몸이 라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기세였다. "명옹!" 감악은 황급히 명강량을 불렀다. 그러나 잠깐 사이 명강량의 모습 은 산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성녀?" 감악은 같은 말을 되뇌었다. 순간, 그는 불에 덴 듯 놀라워했다. 그가 급히 산봉우리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도 명강량처럼 덜덜 떨 렸다. "서…… 성녀시여!" 감악은 쥐어짜는 목소리를 내뱉으며 오체투지로 몸을 숙였다. 단원홍도 산봉우리에서 들려 오는 선율을 들었고 산봉우리의 인영 을 보았다. 그의 밤눈은 야안공(夜眼功)을 익힐 필요도 없이 밝았다. 그래서 그는 누구 보다 산봉우리의 인영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 러나 처음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여인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 었다. 음률에 조예가 무척 깊은 여인인 모양이었다. 그 음률에 취해 단원홍은 동정호의 일을 끝낸 후 같이 술이나 한 잔 했으면 하는 마 음이었다. 마침 여인이 있는 곳은 마옹의 도주로와 같았다. 거리가 점점 가까 워졌다. 이상하게 눈에 익은 여인 같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산봉우리의 여인은 뇌전을 마음대로 부르는 모양이었다. 단원홍도 같았다. 단원홍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 뻣뻣이 굳었다. 전신을 덜덜 떨고 있음도 물론이었다. "사…… 사매.……." 그는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곁에 있는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듯했 다. 단원홍은 꿈이 아닌가 싶었다. 소매로 눈을 비볐다. 분명했다. 저 렇게 닮은 여인이 있을 리 없었다. 단원홍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산봉우리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마 옹을 잡는 일은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간간이 배교도들의 저항이 있었 으나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사매가 맞아. 사매가…….' 가까이 갈수록 여인의 모습은 더욱 분명했다. 꿈 속에서도 그리던 여인이 맞았다. '어떻게 된 것일까? 어떻게 된 것일까?' 단원홍의 머리는 뒤죽박죽이었다. 분명 사부는 사매가 죽었다고 했 다. 그런데…… 자세한 사정은 만나 보면 알 일이었다. 산봉우리의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단원홍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당연히 자신을 맞아 팔을 벌리는 줄 알았었다. 하지 만 아니었다. 단원홍은 안색을 찌푸렸다. 여인이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자는 마 옹이었다. 적개심이 끓어올랐다. 이제까지 마옹에 대해 느끼지 못했 던 적개심이었다. 그는 사실 마옹이나 배교도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 까지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알 수 없었다. 사매가 왜 마옹을 향해 팔을 벌리는지. 그것도 만나 보면 알 일이었다. 단원홍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지는 만큼 배교도 들의 저항도 거셌다. 팔, 다리가 잘려 나가도 악착 같이 달려들었다. 강철인(鋼鐵人)이 된 듯했다. 단원홍은 모르고 있었다. 배교도들은 크게 술렁이고 있었다. - 성녀가 왔다. 입에서 입으로 은밀히 그 이야기는 전해져 배교도들은 죽음을 모르 는 초인(超人)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성녀가 왔다. 배교도들은 감동으로 울었고 그 감동은 그들을 초인 으로 만들었다. 성녀 앞에서의 죽음은 정말 광명계로 입적이 보장되 는 죽음이었다. 만약 단원홍이 산봉우리의 여인에게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면 배교 도들의 악착같은 공세에 잠시 뒷걸음질을 쳤을 것이다. 상대가 두려 워서가 아니라 죽음도 개의치 않고 달려드는 용맹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러나 단원홍은 지금 그런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서둘러 만나야 했다. "으악!" "악!" 배교도들의 피가 단원홍을 혈인으로 만들었다. 배교도들의 죽음은 전혀 헛되지는 않아 단원홍은 조금 발길을 주춤거려야 했다. 그가 막 산자락에 이르렀을 때였다. 팟! 날카로운 경기가 단원홍을 덮쳤다. 이번에는 단원홍도 발걸음 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다급히 몸을 틀었다. 우르르……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름드리 나무가 톱으로 자른 듯이 반듯하게 쓰러졌다. 초절정의 고수였다. "잠깐 멈추시게." 복면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누구인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여전히 단원홍의 관심은 산봉우리 의 여인에게 있었다. 단원홍의 신형이 번쩍 움직였다. 신형이 팔방으로 그림자를 드리우 는가 싶더니 단원홍은 한 줄기 희뿌연 선이 되어 복면인을 비켜 갔다 . "으헛!" 복면인은 놀라 헛신음을 터뜨렸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 놓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복면인은 다급히 단원홍을 쫓으며 쌍장을 뻗었다. 쐐액! 세찬 경기가 단원홍의 등을 몰려왔다. 모르는 척 할 수가 없 었다. 단원홍은 신형을 질풍 같이 돌렸다. "비켜라!" 그가 광망(狂妄)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쌍수를 뻗었다. 손그림자 가 현기증이 날 정도로 어지럽게 복면인을 휩쓸어 갔다. 복면인도 쌍장으로 맞섰다. 콰쾅! 콰르르……. 쌍수가 꿈틀거리는 대로 기류가 어지럽게 소용돌이치며 폭풍우를 일으켰다. 반경 이 장 내는 성한 것이 없을 듯했다. 단원홍과 한 합을 주고받고 난 복면인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단원 홍의 무위는 소문 보다 배는 더 한 듯했다.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단원홍이 구룡백변(九龍百變)으로 멋지게 몸을 선회했다. 선풍(旋 風)이 일며 그 속에서 수백 개의 팔이 복면인을 요혈을 짓이겨 왔다. 평범한 수법으로 상대하다가는 낭패를 당하기 딱 좋았다. 정체가 드러나더라도 자신의 절예를 숨길 처지가 아니었다. 복면인도 뇌전 같은 쌍장을 날렸다. 타닥! 탁! 타타타타탁! 장력이 부딪히며 아름드리 나무가 뿌리째 흔들렸다. 단원홍과 복면인은 개세의 무공을 선 보인 후 각기 거리를 두었다. 복면인을 쏘아보는 단원홍의 눈빛이 붉었다. "노선배……. 왜? 왜…… 나를 막는 것이오?" 단원홍이 이글거리는 분노를 참으며 간신히 말했다. 복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쌍장을 들뿐이었다. "항룡장을 제대로 펼치는 자는 개방에 한 명밖에 없다고 사부는 말 했소. 궁신! 왜 나를 막는 것이오?" 단원홍이 악받친 고함을 질렀다. 복면인은 흠칫했다. "허허허! 백운룡이 나를 그토록 치켜 주다니…… 맞았네. 나는 개 방의 늙은 거지가 맞음세." 복면인은 복면을 벗었다. 꾀죄죄한 노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원상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듣겠소!" 단원홍은 다급히 등을 돌렸다. "잠깐 기다리시게. 무슨 그렇게 바쁜 일이 있다고……." 원상이 단원홍의 앞을 다시 막았다. 원래 그는 명강량으로부터 단 원홍을 떨치기를 작정하고 나선 터였다. 단원홍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가 산봉우리로 시선을 돌렸다. 마옹도 보이지 않았고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산봉우리를 둘러싸며 늘어나는 배교도들만 보였다. "비키지 않으시겠소?" 단원홍이 차갑게 물었다. "젊은 자가 왜 그렇게 매정한가! 자네 사부도 나를 이렇게 매정하 게 대하지는 않았네!" 원상은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단원홍은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그가 천천히 자신의 검에 손을 가져갔다. 장포가 팽팽히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그가 검을 들었다. "조심하시오!" 단원홍의 눈빛이 매정하게 빛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검 을 뿌렸다. 쐐액! 푸른 섬광이 풍뇌를 일으키며 원상을 쏘아 갔다. 원상은 그 검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죽을힘을 다해 뒤로 물러났다. 쾅! 콰쾅! 쾅! 주위의 나무들이 마치 포화(砲火)를 맞은 듯 터졌다 . 원상은 일 장여를 물러나 멍하니 서 있었다. "검강(劍　)…… 검강…… 이…… 이럴수가" 그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길이는 몇 치에 불과했지만 분 명 검강이 맞았다. 휙! 단원홍은 시위하듯 경쾌하게 검을 휘둘렀다. 그가 원상을 냉랭 히 바라본 후 산봉우리로 신형을 날렸다. "으악!" "악!" 단원홍은 배교도들과 뒤엉켰다. 배교도들의 저항은 완강했지만 단 원홍을 막을 수 있는 시각은 일 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 각 은 단원홍에게는 수십 년이었다. 단원홍은 장포에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산봉우리에 섰다. '없다.' 없었다. 보이지 않았다.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단원홍은 신형을 뽑았다. 그때였다. "멈추게!" 원상이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단원홍은 눈썹을 모았다. 그가 원상을 냉랭하게 쏘아보았다. 원상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장난기 어린 표정은 찾아 볼 수 없었 다. 단원홍은 그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원상은 절대 비키지 않을 것이다. 노개의 눈빛은 정식 비무를 청하 는 눈빛이었다. 검강을 본 순간, 나이도 지위도 체면도 생각나지 않 았을 것이다. 비검에 대한 욕심만이 노개를 지배하고 있을 것임이 분 명했다.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단원홍은 검날을 쥐었다. 손바닥에 상처가 패이며 혈조(血槽)를 타 고 피가 주르르 흘렀다. 저 멀리 일타운 보다 더 발 빠르게 달려가는 인영이 보였다. 여인 은 그 인영의 등에 업혀 있었다. 그리고 인영과 여인은 한 덩이가 되 어 이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금 늦은 듯했다. "으…… 으……." 단원홍은 괴성을 흘렸다. 그는 양손에 검을 잡았다. 그의 검 역시 한철로 만든 검이다. 그가 원상은 노려보며 힘을 썼다. 쩡! 한철로 만든 검이 두 동강났다. 단원홍은 동강난 그 검을 원상 앞에 던졌다. 미칠 지경이었다. * * * 얼마나 달렸는지 모른다. 명강량은 악약을 업은 채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팠고 눈은 침침했다. "우욱! 욱!" 명강량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토혈(吐血)을 했다. "강량……." 악약은 명강량의 어깨를 잡으며 발을 굴렀다. 명강량은 거칠게 악약의 손을 뿌리쳤다. 그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악약을 집어삼킬 듯 노려보았다. 악약은 창백한 안색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강량…… 강량, 내가 말했잖아요. 강량의 곁에는 언제나 내가 있 을 것이라고."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명강량은 맥이 쭉 빠졌다.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명강량은 급히 자신의 성채를 쌓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악 약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성채는 애초부터 쌓일 수 없는 성채였 다. 성벽이 쌓였다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그의 허망한 착각일 뿐이었다. 명강량은 쉽게 그 사실을 인정했다. "갑시다." 그가 말했다. 악약이 환하게 웃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참새처럼 입을 열 었다. "강량, 오늘 사형을 만났어요. 아는 척도 하지 못했어요. 마음이 너무 급했답니다. 강량이 또 어디론가 훌쩍 떠나 버릴 것 같았거든요 ." "아쉬웠겠군요." "아쉬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때 내 마음이 그랬던 것을…… 그리고 사형은……." 악약은 아미를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호교신장은 성녀를 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호교신장은 성녀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으니까요." 명강량이 말했다. "그런 말이 아니라는 것은 강량도 알잖아요. 어쨌든 강량은 두 번 이나 떠나려 했어요. 약속해 주세요. 다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모든 사람은 언젠가 헤어집니다." "순간일 뿐입니다. 대천대계의 긴 시간 속에서 보면…… 하지만 그 순간의 헤어짐도 가슴 아픈 고통일 것임에는 분명하겠죠?" 악약은 명강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명강량의 손을 꼭 쥐 었다. 제22장 백운룡(白雲龍) "궁금할 것일세. 우리가 왜 대전왕을 모시는지……." 한 번 안면이 있는 탓인지 방환의 말투는 조금 달랐다. "궁금하지 않소!" 전우삼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의 얼굴은 꺼칠했고 눈도 충혈 되어 있었다. 만인촌 사람들이 왜 대전왕을 모시게 되었는지 하는 궁 금증 보다 다른 생각할 것이 더 많았다. 우선 전우삼은 자신이 이곳 에 있어야 하는지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구루 노관, 방환이 던져 놓고 간 흡정술에 대한 유혹은 컸다. 비록 그것이 암가의 무공이라 하더라도……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그것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 았다. 그렇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거리는 사이 칠 일이 훌쩍 지 난 것이다. "우리는 대전왕에게 반기를 든 자들일세. 대전왕, 호교신장은 어떤 분인가? 현세의 교법을 지키는 분이지. 그분에게 반역한다는 것은 가장 크다란 배교(背敎)…… 죽인다고 하더라도 할 말은 없었다. 하 지만 대전왕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네. 만인촌까지 세워 주시며 죄를 용서해 주셨지." "초대 명옹께서는 원래 그렇게 자애로운 분이셨소! 당신들이 조금 의 잘못이라도 느꼈다면 초대 명옹을 모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 "대전왕에게 반기를 든 자들의 꿈은 컸다네. 대전왕에게 반기를 들 정도로…… 그런 자들이 대전왕이 용서를 해 주었다고 해서 감읍했 을 것 같은가? 대전왕이야 말로 그들의 꿈, 배교일세의 꿈을 무참히 짓밟은 장본인이 아닌가! 감사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일세. 하물며 조상까지 지으며 모실 일은 더욱 없었겠지." "하지만 지금 만인촌은 초대 명옹을 모시고 있지 않소!" "그래서 지금 이야기하고 있다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대전 왕의 행보였지. 대전왕께서는 만인촌을 세워 주며 역도(逆徒)들의 죄 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비전 절예까지 전수해 주셨다. " "엥?" 전우삼은 눈을 치켜 떴다. "아마 자네는 흡정술을 암가의 무공이라 해서 익히지 않았을 것일 세. 하지만 안심하시게. 그 무공 역시 중원의 배교도들이 초대 명옹 으로 받드는 대전왕의 무공이니……." "흡정술이 초대 명옹의 무공……." "배교의 적자(嫡子)를 자처하는 중원의 배교에도 물려주지 않은 무 공을 우리 만인촌에는 물려주신 것일세. 대전왕께서는 왜 그런 선택 을 하셨을까." "……." "중원의 배교도들이 암왕의 추종자로 칭하는 우리 만인촌의 생각은 사실 별 대수로울 것이 없다네. 중원의 배교도들은 보권을 통한 교 화로 명왕정토(明王淨土)를 꿈꾸지. 우리는 광명도(光明刀)를 통해 먼저 세상을 배교의 질서로 잡고 그 다음에 보권을 통한 교화로 명왕 정토를 꿈꾼다네." "광명도…… 헹! 이름은 좋군. 결국 칼과 피로 배교일세를 이루겠 다는 말 아니오!" "맞았네. 천축 십육천을 굴할 때 대전왕께서 가지고 계셨던 생각이 었지. 보게나. 열사의 땅과 천축에서 누 천년, 중원에서만도 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네. 보권만으로 하계에 명왕정토가 세워지던가. 상황 은 나빠지고만 있을 것일세. 우리 배교는 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필요 없단 말인가? 윤보(輪寶)를 굴리며 세상의 악을 소탕할…… 악 은 지천에 있다. 지금도 우리 교도들을 지글지글 불태우고 있는 저 적들!" 방환의 잔잔하던 눈빛에 한광이 번뜩였다. 전우삼의 얼굴도 험하게 일그러졌다. 적들에 대한 증오가 활화산처 럼 활활 타올랐다. 맞는 말이다. 그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다 만 암가에 대한 오랜 불신 때문에 박수를 치지 못하고 있을 뿐……. "그렇게 우리 만인촌은 힘을 추종하지. 그럼에도 대전왕은 그 힘을 제어할 생각은 않고 오히려 당신의 비전을 흘려 만인촌의 힘을 더욱 강하게 했다. 뿐인가! 대전왕에게 반기를 들고 음산으로 떠났던 또 하나의 지파, 일지국! 대전왕께서는 그들에게도 엄청난 힘을 주셨다. 사해를 화염지옥(火焰地獄)으로 만들 힘, 대화룡…… 음산의 비처에 남기셨지. 지금 하나, 둘, 대화룡이 붉은 눈을 뜨는 것으로 알고 있 다." '대화룡…….' 전우삼은 팽팽하게 솟아오르는 긴장감에 자신도 모르게 불끈 주먹 을 쥐었다. "대전왕께서는 얼마나 장난이 심한 분이신가. 광명도를 뺏은 일은 무슨 일이고 광명도에 더욱 힘을 불어넣어 돌려준 일은 또 무슨 일인 가." 방환은 탄식조로 중얼거렸다. "알 수 없네. 정말 알 수 없었다네. 대전왕의 뜻을…… 대천대계의 신만 알고 있을 것일세. 만인촌의 조사들은 그 같은 혼란 속에 결국 한 가지 결론을 내렸네. 대전왕께서는 삼계(三界)를 살피는 혜안(慧 眼)을 가지신 분이다. 범인으로서는 대전왕의 뜻을 알 수 없다. 때문 에 만인촌의 조사들은 대전왕의 뜻에 무조건 굴복하기로 하셨다네. 대전왕께서는 만인촌에서 그렇게 받들어졌지." 그가 가는 한숨을 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인촌의 낙성식(落成式)을 끝내고 떠나시던 날 대전왕께서는 말 씀하셨다. 금제였지. 천 년의 금제…… 천 년 동안 절대 만인촌의 힘 을 세상에 보이지 말라는 명이셨다. 한 경우를 제외하고…… 중원의 배교가 백척간두에 놓여 사멸의 위기에 빠졌을 때는 그들을 도와라 했다. 단 그것도 만인촌의 힘은 절대 드러내지 않고 중원 배교를 배 후에서 돕는 정도…… 우리 만인촌은 그렇게 천 년의 금제를 등에 업 고 살아왔네." 방환은 만인촌에 얽힌 긴 비사를 끝냈다. 전우삼은 다급히 의자를 끌어당기며 얼굴을 방환의 코끝에 들이밀 었다. "초대 명옹께서 중원의 배교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졌을 때 도우 라고 명했다고? 방 노관, 지금이 바로 그때가 아니오?" 그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우리도 듣는 귀는 있으니…… 지금이 그때가 맞는 듯 하네. 하지 만……." 방환은 백미(白眉)를 좁혔다.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오! 당신들은 대전왕…… 아니, 초대 명옹 의 명을 어길 셈인가!" 전우삼이 벌떡 일어섰다. 그는 불패혼, 예광의 무학을 보았었고 말 로만 떠돌던 흡정술의 비기가 실린 책자도 보았었다. 만인촌의 실력 이면 유향경천문, 구대문파와 당당히 겨룰 수 있을 것 같았다. "힘들 것 같네.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첫째, 이제 대전왕이 명 했던 인고(忍苦)의 천 년 금제가 끝이 났네. 만인촌의 돌로 된 표비 가 문드러질 정도로 세월이 흘러 버린 게야. 만인촌은 더 이상 금제 에 매일 필요가 없게 되었어. 둘째, 금제가 끝났어도 중원 배교를 도 와줄 용의는 있었다네. 그러나 늦었어. 만인촌은 중원 배교를 도울만 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쌍혼, 사방위, 십위병…… 또 뭐라고 했나? 삼십…… 삼십육…… 그 자들이 있지 않소?" 전우삼은 고함을 질렀다. "맞았네. 모든 준비는 되어 있지. 천 년 동안 금제가 풀릴 날만 기 다려 왔는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손가. 하나만 제외하고…… 전왕 ! 만인촌에는 전왕이 없네. 일노, 쌍혼,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 사를 움직일 분…… 전왕은 하루아침에 태어나지 않는다네. 지금의 형세로 보건대 만인촌에 전왕이 탄생했을 때는 이미 중원 배교가 사 라지고 없거나 이름만 근근히 이어가고 있을 것일세." 방환이 노안을 찌푸렸다. "방 노관! 저, 전왕이 꼭 있어야 하오? 지, 지금 있는 자들로도 중 원 배교들 돕는 일은 충분할 것이오!" 전우삼은 흥분으로 말까지 더듬거렸다. "자네는 우리 만인촌을 너무 우습게 보는군." "누가 만인촌을 우습게 본단 말이오!" "명왕이 없는 배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일세. 마찬가 지로 전왕 없는 만인촌도 없다. 하늘은 명왕, 땅은 전왕! 변함없는 우리들의 생각일세." 방환의 표정은 완고했다. "그토록 전왕이 중요하다면 왜 전왕의 자리를 당신들을 비워 두고 있었소? 헹, 핑계가 좋군! 배교의 적자를 자처하기 위해서라도 중원 배교가 사멸하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겠지." 전우삼은 도끼눈을 했다. "헐헐헐!" 방환은 곱사등을 흔들며 호탕하게 웃었다. "대전왕의 금제를 잊었는가? 만인촌을 떠나지 말라던…… 전왕은 광명도를 휘두르며 천하를 배교의 깃발 아래 복속 시킬 분이네. 그런 분이 금제로 만인촌을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게 된 게야. 전왕이 있을 필요가 있었겠나? 솔직히 전왕을 뽑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네. 비참하지 않는가. 전왕이 된 당신이나 날개 꺾인 새를 바라보듯 전왕 을 바라보아야 하는 만인촌의 교도들이나……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금제는 풀리고 세상의 문은 활짝 열렸다. 전왕이 마음껏 본연의 사 명을 다할 시기가 온 게야. 우리는 이제 전왕을 필요로 하네!" "당신들은 좋겠군." 전우삼은 맥이 빠졌다. 그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너무 실망하지 마시게. 중원 배교를 도울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니……." 방환이 말했다. 전우삼은 고개만 들었다. 방환의 말 한 마디에 애락(哀樂)을 거듭 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고 자존심도 상했다. "사실 우리 만인촌은 중원의 배교에 전혀 무관심하지는 않았네. 대 전왕께서 어려울 때 도와주라고까지 하셨으니…… 나백염왕과 탈명마 효를 기억하겠지. 그들은 바로 우리 만인촌의 도움을 받은 명옹들이 었네." 방환은 입가에 미소를 담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전우삼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놀랄 만큼 놀라 더 놀랄 일도 아니었는지 너무 놀라 혼백이 날아갔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는 침 만 꼴깍 삼켰다. "우리는 대전왕의 명에 충실했다네. 중원 배교가 어려움에 처하자 그들의 명옹을 찾아 우리의 비전을 전해 주었네. 그렇게 해서 그들은 나백이 되고 탈명이 되었지. 만약 대전왕이 중원 배교를 가장하고 힘을 행사하라는 명이 없었다면 우리는 나백과 탈명을 대신 내세우지 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직접 나섰다면 나백과 탈명이 죽는 일도 없었겠지. 구대문파라 했든가? 그들은 아직 배교의 진정한 힘을 모른 다! 헐헐헐! 마교라는 이름도 모자라 하오문이라 부르기까지 한다니 ……." 방환은 크게 웃었다. 전우삼은 수치를 느낄 여유도 없었다. "나, 나백과 타, 탈명도 만인촌의 사람이었단 말이요?" 그가 뒤늦게 재삼 물었다. "그들은 원래부터 중원 배교의 명옹이었던 분들이다. 이후 교가 환 란을 당하자 우리로부터 힘을 빌려 갔지. 그래서 반은 중원 배교의 교도고 반은 만인촌의 교도일세. 반은 명옹이었고 반은 전왕이었다. 전왕의 힘만 이었다면 그 분들은 결코 패하지 않았을 것일세!" 방환이 빠르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전왕의 탄생을 원하네. 만인촌에 전왕이 될만한 재목 이 있었다면 금제가 해제되는 날 전왕이 탄생했을 게야. 그러나 불행 히도 만인촌에는 전왕의 재목이 없었다. 그래서 중원으로 눈을 돌려 찾았지. 그 재목은 바로 여기에 있네. 바로 자네일세." 그가 전우삼을 직시했다. "내…… 내가…… 전왕……." 전우삼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가 허깨비를 쫓듯 머리를 크게 저었다. "흑면호, 전우삼! 이제 말해 주겠다. 그렇게 걱정하는 중원 배교를 도울 방법을…… 중원 배교를 도울 방법은 간단하다. 전왕이 되면 된다. 만인촌에 명을 내릴 수 있는 자는 전왕뿐일세. ……물론 전왕 으로 태어나기까지 약간의 시일은 필요하네. 그 기간 중원 배교는 이 름만 남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자네가 전왕으로 출관하여 중 원을 배교일세로 만든다면 중원 배교의 부활은 시간 문제가 아닌가." 방환이 은밀한 눈빛으로 말했다. 전우삼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잠깐 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헤헤헤……." 전우삼은 히죽 웃었다. "헤헤헤! 으헤헤헤!" 그는 의자를 말을 타듯 끄떡거리며 갑자기 미친 듯이 웃었다. 그의 눈빛이 장난기로 번들거렸다. 방환은 전우삼의 돌연한 행동에 눈살을 찌푸렸다. "방 노관, 맞아. 나는 머리가 돌이야!" 쾅! 전우삼은 탁자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탁자가 우지끈 동강났다. 그는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 "헤헤헤, 그렇지만 알 건 안다구. 전왕이 되어 중원을 배교일세로 만든다는 말은 광명도로 중원을 혈해(血海)에 빠뜨린다는 말이잖아. 우리 중원의 교도들은 그런 방법은 원하지 않아. 물론 나도 복수는 하고 싶어. 우리를 건드린 놈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고 싶단 말이야!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나는 초대 명옹이 걸었고 우리 동도들이 걸었던 그 길을 걸어갈 것이다." "헐헐헐! 허허허허……." 방환도 크게 웃었다. "잘 생각해 보게. 자네 말이 얼마나 어이없는 말인가를…… 복수는 원한다고? 그리고 복수를 끝내면 칼을 놓을 것이라…… 그 일이 가 능하다고 생각하는가? 중원의 배교가 버텨 온 것은 당하면 당하는 대 로 있었기 때문 아닌가? 꿈틀댔다면 더 큰 힘에 의해 짓밟혀 버렸을 게야. 그렇게 생각하면 중원 배교는 영원히 짓밟혀야 할 운명이지. 불쌍하게도……." "방 노관은 잊었나 보군. 나백과 탈명은 굉장했었다구. 비록 그 분 들은 패하기는 했으나 배교는 말짱했지."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뻔하지! 비록 이기기는 했으나 얼마나 겁이 났겠어. 헤헤헤…… 구대문파 놈들은 한동안 시비를 걸 엄두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헐헐헐! 허허허허…… 정말 재미있는 친구군." 방환은 만면 가득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무릎을 쳤다. "자네가 잊었나 보군. 적들이 두려워하던 나백과 탈명의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준 것일세. 그리고……." 그는 굵은 손마디를 만지작거리며 말에 뜸을 들였다. "……원래 자네는 나백과 탈명의 힘을 원했지. 원한 것은 피의 복 수고 배교천하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나?" "나에 대해 많이도 알고 계시군. 헤헤헤, 맞았어. 나는 원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당신들을 만나고 나서 생각이 달라진 게야. 나 는 누가 그 일을 하라고 하면 죽어도 하지 않는 개망종이거든……." 전우삼이 히죽댔다. "역시……." 방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지. 나백과 탈명에 대한 이야기일세. 자네가 잘 모르는 것일 게야. 중원의 배교도들은 나백과 탈명의 이 름조차 쉬쉬 했을 터니…… 나백과 탈명은 알고 있는 대로 구대문파 놈들에 의해 분사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나백과 탈명의 죽음은 예견되었네. 무엇 때문인 줄 아는가?"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으니 이야기하는 것 아니오." "나백과 탈명에 반기를 든 자들은 바로 같은 교도들이었다." "뭣?" 전우삼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처음에는 나백과 탈명의 호쾌한 복수극에 박수를 보냈지. 하지만 점점 나백과 탈명의 힘에 두려움을 느낀 게야. 그 놀라운 힘은 보권 을 통한 교화만 주장해 온 중원의 배교도들에게는 너무 이질적이었겠 지. 쌓여 가는 시신, 넘치는 피…… 비록 그것이 적들의 것이라 하더 라도…… 그래서 교도들은 나백과 탈명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그리고 나중에는 나백과 탈명을 암류로 칭하며 적에게 협조까지 했지 . 중원의 배교는 그 대가로 구대문파로부터 목숨을 부지 받은 것은 아닌가? ……나백과 탈명은 그렇게 고립되어 적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 "개소리!" 전우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개소린지 아닌지는 자네 스스로에게 물어 보게.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 그토록 원하던 나백과 탈명의 무공을 이곳에서 찾았는데 …… 뿌리 깊은 이질감을 느꼈겠지. 중원 배교의 한계일세. 때문에 불패혼을 비롯한 대다수 만인촌의 교도들은 자네를 전왕으로 앉히는 것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네. 그들은 중원 배교와의 관련은 어떤 것이든 거부하려 했다. 배신자가 더 무섭지. 동도라고 손을 내밀었는 데 나백과 탈명처럼 배신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나? 물론 중원의 배교 도들은 암류라서 배신을 했다고 당당히 말하겠지." "흐흥! 그따위 말을 누가 믿을 줄 알고…… 그리고 혹시 예전에 그 랬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나도 암왕을 기다렸어!" 전우삼이 숨을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곧 '아차!' 하는 마음 에 안색이 변했다. 흥분해서 자신의 본 마음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방환은 빙그래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번 더 믿기로 했네. 우리는 같은 신을 모시는 동도들이 아닌가. 저 열사의 땅에서부터 고락을 같이 한…… 전왕의 자리를 낯모르는 이교도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나와 불사혼은 만인 촌 교도들을 설득했다네. 결국 우리는 설득에 성공했네. 대신 전왕이 될 자를 찾는 일은 불패혼에게 맡겨졌다. 불패혼을 비롯한 반대자들 은 이왕 그렇게 결정난 것 최소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를 찾기 원 한 게야. 그 결과 자네가 선임되었지." 그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헤헤헤, 그런 어려움이 있었군요. 하지만 미안해서…… 나는 전왕 이 될 마음이 없소!" 전우삼은 다시 뻗댔다. "복수하겠다는 생각을 잊었는가? 나백의 힘도 여기에 있고 탈명의 힘도 여기에 있다. 중원 배교에는 그런 힘이 없다." "방 노관, 장담하지 마시오. 일지국인가 뭔가에는 대화룡을 주셨고 당신들에게는 비전 절예를 주셨소. 당연히 우리에게도 뭔가 하나쯤 은 주셨을 것이오. 헤헤헤, 초대 명옹이 가장 아꼈고 초대 명옹을 가 장 따랐던 자들은 바로 우리 중원의 교도들이었지." "헐헐헐! 그럴지도 모르겠네. 뭔가 안배가 있을 수도 있겠지. 그 안배를 찾는 일은 중원의 배교도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우리는 자네 를 전왕에 앉혀야겠네." "사양하겠소." "허어, 이런 답답한 친구를 보겠나. 실없는 소리는 더 이상 하지 말게. 안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안배가 있었다면 중원이 저 지경 이 되도록 놓아두었겠나. 복수를 원한다면 우리의 힘을 얻는 것뿐이 다. 대전왕께서 중원의 배교도를 위해 펼쳐 놓은 안배는 바로 우리들 일세!" "헤헤헤, 알고 있소." 우악스럽게 뻗대던 것과는 달리 전우삼은 의외로 쉽게 방환의 말을 수긍했다. "만인촌의 힘을 얻지 못하면 복수할 다른 방도를 찾기 어렵겠지. 그리고 만인촌의 입장도 조금은 이해하겠소. 그렇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 솔직한 나의 심정이오." 결국 전우삼은 자신의 본 마음을 드러냈다. "흐흠……." 방환의 노안에 흡족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반대로 전우삼은 눈 썹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오. 왠지 자꾸 전왕이라는 자리가 마음에 걸려. 음…… 주 명두의 얼굴도 떠오르고…… 그리고 방 노관, 성녀 의 안위에 대해서는 왜 일언반구도 없지?" 아무리 복수가 중하다지만 가지가 다른 만인촌이라는 곳에 발을 들 이는 게 주 명두에게 괜히 미안했고 처음부터 성녀의 안부를 묻지 않 는 데서 든 이질감이 전우삼이 뻗댄 이유의 전부였다. 그는 만인촌의 힘은 미친 듯이 원했다. "성녀는 우리도 모신다네. 하지만 중원의 배교도들처럼 높게 받들 지는 않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 이건가? 이래서 싫다니깐! 어이! 방 노관, 나는 가야겠소. 내 평생 소원이 성녀를 한 번 보는 것이었단 말이야. 여기 있는 동안 성녀께서 놈들에게 해를 당하면 천추의 한이 될 것 아니오." 전우삼은 석실을 나서려했다. 방환의 안색이 급변했다. "앉게! 자네는 갈 수 없다! 만인촌의 그 많은 비밀을 들고 어디로 가려는가!"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내 혀를 자르시오." "혀를 자를 필요도 없다. 우삼!" 방환이 전우삼을 불렀다. "뭐야?" 전우삼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한바탕 할 각오로 험악한 인상으로 방환을 쏘아 보았다. '어…….' 전우삼은 눈을 깜빡였다. 방환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 어…….' 전우삼은 그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상한 장면들이 눈 앞을 스쳐 갔다. 적들을 호탕하게 쓸어가는 장면도 보였고 도처에서 휘날리는 배교의 깃발도 보였다. 그 속을 달리는 자는 바로 전왕이 된 자신이었다. 마음 한 편에 전왕 에 대한 동경이 솟구쳤다. 그 순간, 방환의 목소리가 유부를 흐르는 물처럼 들려왔다. "섭혼술(攝魂術)은…… 들어보았는가? 우리는…… 섭혼술로도 자네 의…… 마음을 잡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도 자네도 원하 지 않는 일…… 우삼!" 방환의 부름이 천둥처럼 귀를 때렸다. 전우삼은 퍼뜩 정신을 차렸 다. "쉽게 이야기가 될 줄 알았더니 앞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 겠군. 아직 시간은 많으니…… 섭혼술이 아니라도 그 세월이 자네의 마음을 바꾸어 줄 지 모르지." 방환이 씁쓸하게 말했다. 아마 그렇게 될 것으로 그는 확신했다. 지금도 저렇게 복수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데 전왕이 되고 난 후 출관 을 하면…… 폐허가 된 중원의 배교를 보면 다른 생각은 나지도 않을 것이다. 광명도가 몇 자루 더 있었으면 하고 바랄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마음은 버리게. 앞으로 자네는 우리와 같이 있게 될 것이야. 대전왕의 무공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네의 재질과 성 격을 탐내 불패혼이 선택은 했지만…… 아무리 무골이라도 대전왕의 무공을 익히려면 뼈를 깎는 고통은 감수해야 할 게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석실을 걸어나갔다. 전우삼은 급히 방환을 따라나서려 했다. 그러나 무슨 수법을 썼는 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쿵! 석실문이 닫히자 전우삼의 몸은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열어! 문을 열라구!" 전우삼은 석문을 발로 찼다. 그러나 한 번 닫힌 문은 꼼짝 않았다. "젠장, 왜 말만 하고 가는 게야? 그렇게 전왕을 만들고 싶다면 섭 혼술인가 뭔가로 만들면 되지!" 그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솔직한 심정이었다. 만인촌의 힘은 그렇게라도 얻고 싶었다. "화정,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나는 정말 이상한 곳에 와 버렸다. 헤헤헤……." 화산의 애송이를 만나면서부터 꾼 꿈이 계속되고 있는 듯했다. 머 릿속은 방환이 내뱉은 수 만 가지의 말들로 윙윙거렸다. * * * 동관(潼關)은 황하에 위치하고 있는 큰 관소다. 섬서와 산서, 하남 성의 요충지로 성은 산허리에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어느 병가(兵家 )에서도 침을 흘리며 쟁취하고자 하는 땅으로 유명하다. 풍광이 좋은 곳에는 군의 주둔지가 있다. 그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산과 물 이 어우러져 이루어 낸 동관의 풍광은 병장기가 번뜩이는 살벌함 속 에서도 전혀 그 자태를 잃지 않았다. 투두두두두……. 한 필의 말이 동관을 쏜살 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말은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데도 전혀 속도가 줄지 않았다. 한 눈에 보기에도 명마가 분명했다. 관산을 지키던 병졸들이 창을 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황 급히 길을 열었다. 번쩍이는 휘장과 보인(寶印:통행허가증)은 그들이 저승사자보다 더 만나기 싫어하는 금의위 장교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달리는 말은 일타운이었고 금의위의 장교는 단원홍이었다. "젠장, 또 무슨 건수를 잡으려고……." 병졸들은 투덜대며 관문을 열었다. 투두두두두……. 일타운은 병영(兵營)으로 가지 않았다. 관문을 지난 일타운은 바로 산을 넘었다. 동관은 작아 보여도 요소에 비처가 많다. 산을 넘고 길 없는 수풀을 한동안 달린 후에야 단원홍은 일타운의 고삐를 챘다. 푸르르……. 일타운은 허연 거품을 입에 물며 투레질을 했다. 아무리 명마라 해 도 쉬지 않고 달려온 터라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맑은 계류가 흐르고 그 계류 양 옆으로는 버드나무가 줄을 이어 서 있었다. 도화(桃花), 행화(杏花), 온갖 꽃들이 별천지(別天地)를 이 루고 있는 곳이었다. 바람이 불자 꽃잎이 우수수 휘날렸다. 장원은 꽃잎이 날려 가는 그 곳에 있었다. 천화원……. 바로 단원홍의 사부, 백운룡 운학추가 머무는 곳이었다. 단원홍도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오랜만에 찾은 곳,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너무 적막했다. 단원 홍은 그 적막감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일타운에서 내린 그는 발 빠 르게 천화원을 향해 걸어갔다. 길게 늘어진 버드나무 잎이 그의 얼굴 을 간지럽혔다. 단원홍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질겅질겅 씹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급히 천화원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를 반갑게 맞아 줄 줄 알았던 여인은 없었다. 사부에게 물었다. 사부는 말했다. 사매는 자신이 경도로 떠난 일 년 전에 죽었다고…… 무덤도 없었다 . 시신은 불에 태워 황하에 뿌렸다고 했다. 단원홍은 철이 든 후 처 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꽃잎은 우수수 눈처럼 휘날리고…… 그날 밤 이었다. 사매가 찾아왔다. 자신은 다시 천화원으로 올 수 없는 먼 곳 에 있다고 했다. 그래도 사형이 보고 싶어 찾아왔다고…… 많은 이야 기를 나눈 듯했다. 하지만 기억나는 말은 없었다. 단지 마지막으로 사매가 자신을 위해 불러 주던 노래…… 그 노래는 귓가에 여전히 남 아 있었다. 절양류(折楊柳)! 그 노래를 들으며 잠이 들었었다. 그리 고 눈을 떠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손에 버드나무 가지가 들려 있지 않았다면 정말 꿈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꿈이라 생각했는데 손 에는 사매가 꺾어 준 그 버드나무 가지가 들려 있었다. 그래서 사부 를 찾았다. '사부님, 어제 사매를 만났습니다. 혹시 사부님은 보지 못했습니까 ?' '네 사매는 죽었다.' 사부는 냉랭하게 말했다. 사매는 죽었다. 죽었어…… 한동안 그런 줄 알았었다. 그런데……. "공자님!" 천화원으로 들어서는 단원홍을 일노일녀가 놀란 표정으로 맞았다. 노인은 천노(天奴)라는 노복(老僕)이었고 중년 여인은 도화(桃花)라 는 사매의 유모(乳母)였다. "사부님은?" "계십니다." 천노라는 노복이 말했다. 단원홍은 내당으로 서둘러 걸어갔다.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문득 고개를 돌렸다. "천노, 도화, 그대들은 사매의 죽음을 보았소?" "보지 못했습니다. 원주(院主)께서 죽었다고 하기에 그런 줄 알았 지요." 도화라는 여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사매를 젖먹이로 키웠으 니 친딸을 잃은 것 같은 아픔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른 말 않고 곧장 내당으로 들어 섰다. "원홍이냐?" 귀에 익은 카랑한 목소리……. 발걸음 소리로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원홍은 옷깃을 여몄다. 그가 대청에 올라 방문을 열었다. 방은 두터운 휘장(揮帳)으로 둘러싸여 암굴과 같았다. 방문을 통해 스며든 빛이 그곳에 단정히 앉아 있는 사람을 비추었다. 굵은 주름살, 검은 머리칼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깡마른 몸에 얼음 짱 같이 차갑게 앉아 있는 자는 바로 구름 속의 용, 당대 강호의 최 고 거인(巨人), 운학추였다. 단원홍은 조금 놀랐다. 몇 년 보지 않던 사이에 사부는 수 십년은 늙은 듯했다.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지만 쇠한 기력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는 사부가 이렇게 촌노 같이 늙어 갈 줄은 꿈에도 몰 랐었다. 가슴이 아팠다. 당신의 가장 큰 낙이었던 사매가 곁을 떠나 고 난 후 갑자기 멈춰 있던 세월의 연륜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단원홍은 조심스럽게 방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운학추를 향해 큰절 을 올렸다. 그가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았다. "주작당주라는 자가 찾아왔었다. 너를 보자고 했지. 조금 늦었구나 ." 운학추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맡은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을 끝마치고 사부를 모실 생각이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홀로 있는 것이 편하다." "사부……." 단원홍은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마음속의 말을 참을 수 없었다. "사부, 사매를 보았습니다."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 운학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뼈마디만 남은 손이 경련을 일으켰다. "사부, 사부……. 나는 사실을 알고 싶습니다. 내 눈으로, 내 눈으 로 사매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단원홍은 가슴을 쥐어짰다. 운학추는 눈을 감았다. "결국…… 만나고야 말았구나." 그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부, 사매는 원래 죽지 않았군요!" 단원홍이 그답지 않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악약은 죽은 것이 아니다. 너를 보고자 한 이유도 악약 때문이었 지." 운악약! 바로 백운룡, 운학추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고 단원홍의 사매…… 그 여인의 이름이었다. "왜 거짓말을 했습니까? 내가 사매, 사매를……." 단원홍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악약은 내 친딸은 아니다."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절대 사부님이 가정을 가질 사람 은 아니라 했습니다." "강호를 주유할 때였지. 구화산(九華山), 해단림(海丹林)을 지나고 있었다." 구화산은 안휘성(安徽省) 남동부에 있는 산으로 마흔 여덟 개의 봉 우리, 두 개의 연못, 열 네 개의 절벽, 다섯 개의 동굴, 열 여덟 곳 의 샘을 가진 영산(靈山)이다. "구화산의 정경에 푹 빠져 걷고 있었다. 그런데 해단림 아래에서 갑자기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 온 게야." "사매였겠군요." "그렇다. 세상의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참으로 아름다운 미부(美婦)였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미부는 이미 이 세상의 사람 이 아니었다. 난산(難産) 끝에 간신히 탯줄을 끊고 아이에게 젖을 먹 이려다 죽은 모양이야. 그 미부의 품속에서 악약은 울고 있었다." "그 미부가 사매의 친모(親母)군요. 험한 산중에서 사매를 낳았다 면 분명 내력이 있었겠군요." "네 아버지의 말이 맞다. 나는 가정을 가질 사람이 못돼. 아이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었지. 미부의 품에서 악 약을 떼 껴안자 악약은 금방 울음을 그치고 나를 바라보며 웃는 게야 . 이제 갓 태어난 핏덩이가……." 운학추는 그 때를 기억하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한 번의 웃음에 흠뻑 정이 들어 버렸다. 그러나 아이를 찾고 있을 아버지를 생각했지. 여러 군데 수소문을 했다. 하지만 결국 악 약의 아버지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수 년이 흘렀다. 나는 그 아 이의 아비를 찾아 주는 일을 포기했다. 찾을 수도 없었지만 그 사이 너무 정이 들어 버린 게야. 떠나 보낼 수가 없었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때였다. "원주!" 도화라는 여인이 운학추의 말을 끊었다. 그녀가 차를 가지고 들어 왔다. 운학추도 단원홍도 찻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도화가 나간 후 운학 추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과거를 준비하느라 경도에 머물 때였다. 하루는 악약이 울면 서 말했다. 어머니가 찾아왔으니 이제 내 곁을 떠나야 한다고." "무슨 소리입니까? 사매의 어머니는…… 구화산에서 죽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죽었지. 꿈으로 찾아온 게야." "꿈?" "어릴 때부터 악약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능력을 많이 보였었지. 사람의 방문과 죽음을 예측하고 불이 나는 곳도 미리 알아맞히고…… 이곳에서 악약을 보았다고 했지. 꿈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악약이 이상한 능력으로 꿈처럼 보이게 했을 것이다. 나는 물었지. 꿈속에서 찾아온 어머니라는 여인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악약은 어머니를 이야기했다. 똑 같았다. 구화산에서 내가 보았던 그 중년 미부와…… ." "……." "제 어미를 이야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악약은 또 말했다. 누군 가가 자신을 찾아오리라고. 악약은 그 자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는 찾아왔다. 이정인……." "이정인? 설마 배교의……." 단원홍은 놀라 눈을 부릅떴다. "그렇다. 이정인…… 배교의 호교신장! 그는 광명신장이라는 배교 의 이상한 자로부터 서신을 받고 자신들의 성녀를 찾으러 왔다고 했 다." "그럼, 지금 배교의 성녀라는 여인이……." 단원홍의 눈은 놀람으로 더욱 커졌다. 동정호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 마옹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리던 사매……. '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그의 혀는 바짝바짝 말라 갔다. "나는 이정인이라는 자를 죽이고 싶었다. 원홍아, 악약은 이 늙은 이에게 무엇이었겠느냐? 줄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이정인이라는 자를 죽이려 했지. 배교라는 이상한 곳도 모두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 단원홍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배교라는 이상 한 곳은 모두 불태워 버려야 했다. "나는 이정인이라는 자와 몇 번을 싸웠다. 마지막 싸움 때는 정말 나는 그를 죽여 버리려고 했어. 하지만 악약이 나타나 말리는 바람에 그를 죽이지 못했다." "놈은 내가 죽여 버렸습니다!" 단원홍이 차갑게 말했다. 담백했던 기도, 현란한 무위……. 이정인 은 그것만으로도 호감이 가던 자였다. 그러나 그 호감도 일순간에 날 아가고 없었다. "원홍아, 나는 정말 두려웠다. 악약이 떠나는 것이……." 운학추는 이마에 긴 주름살을 그렸다. 언제나 태산 같은 기도를 자랑하던 사부, 그러나 단원홍의 눈앞에 있는 사부의 모습은 너무 초라했다. 안타까움도 느꼈고 화도 났다. 사부를 초라하게 만든 자들에 대한 분노였다. "밤중에도 몰래 방을 들여다보곤 했지. 혹시 훌쩍 떠나지 않았는가 해서……. 몰래 떠나지는 않았다. 다만 먼 산만 바라보며 눈물만 흘 릴 뿐이었지. 괴로웠다. 아끼는 딸의 눈물을 매일 보아야 하는 아비 의 심정이 어떤지 너는 모를 것이다." "사부……." 단원홍은 목이 콱 막혔다. "정말로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좋아했던가를 느낀 게야. 그래서 불렀다. 나는 말했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이정인이라는 자 를 따라가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 했다. 악약은 또 울더구 나. 나의 마음을 알았을 게다. 나는 정말 악약을 보지 않을 생각이었 지. 배교……. 그곳에 가면 속인(俗人)이 출가(出家)를 하듯 이제까 지의 세상 인연이 모두 끊어진다는 것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며칠을 울더구나.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악약은 보이지 않았다. 떠난 것이 야. 이정인이라는 자를 따라……." "사부, 사부…… 그렇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까? 왜 잡지 않았습 니까?" 단원홍이 항의하듯 소리쳤다. "꿈에서 제 어미를 보았다는 순간, 나는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막아 보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지. 원홍아." 운학추는 단원홍을 가만히 불렀다. "세상의 실이란 희한하게 꼬이는구나. 네가 배교 타파의 깃발을 잡 고 있다고 들었다." "……." "너를 보고자 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악약은 배교도들이 성녀라 부르고 있지. 아마 성녀와 명옹은 너희들이 가장 노리는 자들일 것이 다." "사부, 나는 결국 자금성의 더러운 일들에 말려들고 말았습니다." 단원홍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악약을 잊기로 했지. 하지만 잊을 수 없구나. 너는 악약을 어떻게 할 생각이냐? 너를 보고자 한 이유는 그 대답을 듣기 위해서다." "데려 오겠습니다. 데려 와서……." "데려 오겠다고? 껄껄껄!" 운학추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부른 것은 아니다. 너는 악약을 지켜라. 저 먼 곳에 나 보다 악약을 먼저 앞세울 수는 없다. 나의 부탁은 그것 이 전부다." 그가 씁쓸한 미소를 흘리며 눈을 지긋이 감았다. "데려 오겠습니다." 단원홍은 같은 말만 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운학추를 향해 절을 올렸다. 방문을 나섰다. "공자님……." 도화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가왔다. 밖에서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모, 걱정 마시오." 단원홍은 도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일타운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더러운 것들…….' 그는 연신 입술을 깨물었다. 배교, 모산파……. '너희들은 모두 사라져 주어야겠다.' 그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맺혔다. 사부의 침소를 나서는 순간, 단원홍은 멸계(滅計)를 떠올리고 있었 다. 배교와 모산파를 한꺼번에 쓸어버릴……. 사매를 되찾기 위한 계획이었다. 단원홍은 일타운에 훌쩍 올랐다. 서둘러야 했다. 투두두두두……. 일타운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왔던 길을 달렸다. * * * 마옹의 칼에 모태명이 죽고 흑룡방은 잿더미가 되었다! 강호인들은 만나면 그 이야기를 화제로 삼았다. 우제준의 죽음은 마옹의 간계, 배교의 사이한 술수 등으로 치부되었었다. 하지만 모태 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강호인들의 생각은 달라졌다. 마옹은 강하다. 모태명이 누구인가? 간계라며 누구 못지 않게 뛰어난 자였고 무위 또한 이미 구파의 명숙들과 이름을 나란할 정도다. 그런 그가 다른 곳에서도 아닌 자신의 안뜰에서 죽은 것이다. 뿐인가? 동정호의 일전에는 유향경천문도 참가했었다. 형산파, 하 토문, 사대당주들이 모두 동원되었고 문주인 능운공작까지 직접 나섰 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옹은 그 포위망을 유유히 뚫고 사라졌다. 포위망에 가 담했던 형산파와 하토문에 괴멸적 타격까지 입히고……. 마옹은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흑운(黑雲) 속의 신룡인가? 벌써 일 년여 마옹은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의 추적을 따돌리며 강호를 행각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강호는 크게 술렁였다. 특히 그간 배교 타파에 나섰던 군소 방파들의 동요는 더욱 심했다. 신탄의 일전, 흑룡방의 괴멸……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배교는 칼을 빼든 것이다. 배교도들이 공세로 나섰다고 해서 그들의 운명이 바뀌어지리라 생 각하는 강호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흑 룡방 보다 강한 군소 방파는 없다. 그 흑룡방이 잿더미가 되었다. 배 교는 천하를 상대해서 이길 힘은 없어도 눈에 거슬리는 방파 하나쯤 은 언제든지 초토화시킬 수 있는 힘은 있는 것이다. 마옹이 칼을 들었다. 그 칼은 다음에 누구로 향할 것인가? 군소 방 파들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소 방파들 사이에 들불처럼 일어나던 배교 타파의 기운이 잠잠해 지는 듯했다. 앞서 나서 마옹의 눈밖에 나는 위험수를 자초할 용기 있는 군소 방파는 없었다. 특히 배교 타파에 가장 열성으로 나섰던 형산파와 하토문 등은 봉문을 한다는 소문까지 들려오는 판국이었다. 군소 방파는 그렇게 잠잠했고 구대문파, 유향경천문도 잠잠했다. 오랜만에 강호에 피비린내가 그치는 듯했다. 동정호의 일전 후 찾아 온 무거운 침묵이었다. * * * 여름을 준비하는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등에 땀이 벨 정도였다. 명강량은 바위에 앉아 빛살을 쬐고 있었다. 맑은 계류가 졸졸 흐르는 곳이었다. 풍덩! 돌멩이가 날아와 물살을 튀겼다. 물방울이 차갑게 그의 몸을 적셨다. "호호호! 강량……." 악약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돌멩이로 물벼락을 일으킨 자는 악약이었다. 악약은 계류에 발을 담그고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악약은 손짓을 했다. 명강량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앉아 있으니 꼭 늙은 자라 같단 말이에요." "늙은 자라?" 명강량은 어이없어 했다. "내가 살던 천화원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요. 아버님이 만든 연못이 죠. 그 연못에 어느 날, 자라 한 마리가 자리를 잡은 거예요. 물 속 에서 어슬렁거리다 한 낮이 되면 바위 위에 기어올라요. 그리고 해가 중천을 기울 때가 되어서야 물 속으로 들어간답니다." "하하!" 명강량은 웃었다. "고개를 축 내밀고 눈만 끔벅거렸어요. 그래서 내가 자라에게 말했 죠. 늙은 자라야, 너는 너무 게으르구나. 그러자 자라는 무척 화를 내며 말했어요. 내가 게을렀다면 황하를 열 두 번 오르락거리지도 않 았고 이 험한 산을 넘지도 않았다!" "……." "그래서 내가 다시 말했죠. 미안하다. 늙은 자라야. 그런데 너는 왜 황하를 열 두 번이나 오르락거리고 험한 산도 넘었니? 자라는 말 했어요. 나는 내가 쉴 가장 좋은 곳을 찾았다. 아하, 늙은 자라야, 그럼 너는 이곳도 곧 떠나겠구나. 이곳은 황하 보다 좁고 작으니…… . 아니다. 나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내가 쉴 가장 좋은 곳을 찾았다. 자라가 쉴 가장 좋은 곳은 햇빛 좋게 내리는 손바닥만 한 바위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늙은 자라는 그렇게 말하 며 눈을 감았어요." "신기한 일이군요. 말을 하는 자라가 있다니……." "호호호! 강량은 정말 바보군요. 자라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나는 자라가 그렇게 말했으리라 생각했을 뿐이에요." "하하하!" 명강량은 머쓱한 표정으로 다시 웃었다. "강량, 들어오세요. 아주 시원해요. 목욕을 하지 않겠어요? 등을 밀어 드리겠어요." "목욕은……." 명강량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고 보니 몸을 씻은지 정말 오래된 것 같애." 첨벙! 악약은 옷을 입은 채 바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강량, 강량이 내 등을 밀어 줄래요?" 악약이 겉옷을 벗으며 말했다. 명강량은 목까지 붉어졌다. 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계류를 따라 내려갔다. "어디를 가는 거예요? 호랑이가 나타나요." 악약이 소리쳤다. "멀리 가지 않습니다." 계류를 따라가며 명강량은 피식 웃었다. "재미없어!" 악약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강량!" 악약은 물 속에서 걸어나오는 듯했다. 명강량은 고개를 뺐다. 악약이 전신에 물을 뚝뚝 흘리며 다가왔다. "옷만 버렸어. 강량이 책임져야 해요." 그녀는 생트집을 부렸다. "어떻게 책임져야 합니까?" "옷이 젖어 걷지도 못하겠어요. 나는 언젠가 강량의 어깨에 한 번 앉아 보리라 마음먹었죠." "업혀 가는 것이 더 편할 것입니다." "아니에요. 나는 강량의 어깨에 한 번 업혀 보고 싶었어요." "편하다면……." 명강량은 악약을 훌쩍 들어 어깨에 앉혔다. "헤헤헤……." 악약이 기분 좋게 웃으며 명강량의 목을 잡았다. 명강량은 발걸음 을 옮겼다. 악약의 몸에서 흐르는 물이 그의 몸을 적셨다. 따뜻했다. "강량, 기억나세요?" "……." "선물을 주기로 했잖아요. 화령주를 돌려주었다고 선물을 주지 않 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무엇을 원하십니까? 배교의 호교신장은 주머니가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비천쌍마(飛天雙馬)를 갖고 싶어요. 강량이 직접 깎아 만들어 준 것…… 우리는 그것을 타고 저 하늘로 가는 거예요." 악약이 다리를 까딱거리며 기분 좋게 말했다. "조각(彫刻)을 하란 말입니까? 나는 손재주라고는 없습니다." "괜찮아요. 말인지 토끼인지 분간 갈 정도로만 만들면 되니……." "말인지 토끼인지도 분간 못할 겁니다." "그럼, 날개만 잘 만드세요. 말이든 토끼이든 잘 날기만 하면 되잖 아요." "만들어 보겠습니다." 명강량은 하늘을 우러렀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모든 것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길을 가며 명강량은 문득 생각했다. 명왕정토는 어디인가? 성녀가 있는 곳이 바로 명왕정토였다. 암왕 의 소굴(巢窟)은 어디인가? 암왕의 소굴은 성녀가 없는 모든 곳이었 다. '헛!' 명강량은 놀라 급히 눈을 떴다. 손등에 느껴졌던 차가운 기 운, 환상이었을까? 매미 날개 같이 하얗고 얇은 물체가 천음관 속으 로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명강량은 천음관을 찬 손에 다시 내력을 실었다. 천음관이 웅웅거 리는 소리는 냈다. 그와 동시에 천음관으로부터 매미 날개처럼 하얗 고 얇은 물체가 조금씩 튀어나왔다. 명강량은 그 물체를 유심히 살폈다. 길이는 한 자에 못 미쳤다. 모 양은 칼이었다. 그러나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 성녀는 말했다. 천음관 속에 아직 튀어나오지 않은 그 무엇이 하나 더 들어있다고…… 음관인지 모른다고 말했었다. 명강량은 그 물체를 가볍게 휘둘러보았다. 작은 움직임에도 쉽게 일그러질 듯했는데 그 물체는 전혀 바람을 타지 않았다. 웅웅거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야릇하게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소 리였다. 정말 음관이라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몰랐다. 탁자에 가볍게 대어 보았다. '헛!' 명강량은 놀라 두 번째 헛바람을 터뜨렸다. 매미 같은 그 물 체가 닿자 탁자는 두부 잘리듯 잘려 나갔다. '연검(軟劍)이었구나.' 명강량은 그렇게 단정했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음관 이면서 연검인지 모를 일이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음관 같았기 때문이다. 성녀가 들려 준 하희족의 고사도 생각났다. 하희족의 즐거움은 음관으로 하희족의 분노는 검으로……. 음관이면서 연검이 맞는 듯했다. 명강량은 내력을 풀었다. 매미 날개 같은 물체가 천음관으로 쑥 사 라졌다. 그는 그 날카로움이 마음에 들었다. 신장도는 호교의 칼이라는 상 징성이 우선해 병기로는 둔중함을 느끼던 터였다. '좋아, 앞으로 너를 천음검(天音劍)이라 부르겠다.' 명강량이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수준은 그 정도였다. 어쨌든 그는 천음검이 마음에 들었다. 날카로움은 물론 사람의 심혼을 빼앗는 듯 한 웅웅거리는 소리까지……. '그런데…….' 명강량은 연유를 찾았다. 군산으로 가기 전까지 천음관은 내내 그 의 손목에 있었다. 그때까지 천음관은 천음검을 보여주지 않았었다. '역시…….'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음검은 내력으로 뽑아 드는 검이 분명했다. 이전에는 내력이 부 족했기 때문에 천음검은 자신을 보이지 않은 듯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명강량은 자신의 내력이 나날이 불어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기혈 곳곳에 자리잡은 이질적인 내 력은 융화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모래알 속에 물이 스며들 듯 조금씩 원래의 내력과 합류해 갔다. 특히 큰 싸움을 한 번 치른 뒤면 내력이 여실히 달랐다. 천음검은 그 늘어난 내력 때문에 이제야 모습을 보였으리라……. 그렇다면 길이도 꼭 한 자는 아닌 듯했다. 내력이 늘어나면 길이도 그만큼 늘어날 것 같았다. 무사들에게 좋은 병기는 열 친구 보다 낫다. 위급함을 당했을 때 친구들은 위기를 못 구해 주는 경우가 있어도 병기가 못 구해 주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명강량도 칼을 든 자다. 기분이 좋았다.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낮에 물놀이를 한 탓인지 성녀는 깊이 잠들어 있었다. 결전의 날은 점점 다가오고 그만큼 헤어짐의 시간도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싸 움을 피할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러나 이왕 든 전교영기, 싸움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교도들은 자신이 무산대전에서 건곤일척 의 승부수를 띄울 것임을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명강량은 그 믿음 을 들어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다. 성녀는 원래의 계획대로 황기명사를 따라 안락국으로 갈 것이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마음의 번민은 덜했다. 이미 너무 많은 괴로움을 겪었기 때문에 마음이 무뎌졌는지 모를 일이다. 전혀 상황이 나쁘게만 흘러가리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새로운 칼도 생겼고 내력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그 동안 적들의 추적도 잘 피해 왔고 목숨까지 걸었을 정도로 어렵게 생각했던 흑룡방도 잿 더미로 만들었다. 또한 강호는 가마솥 같이 들끓다가도 눈 한 번 돌리는 사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더냐 하는 곳이다. 이유도 알지 못하고 환난을 당하고 있는 것처럼 이유도 모르는 다른 일에 강호인들이 관심을 돌릴지 모 르는 일이었다. 교는 실제 그런 경우를 몇 차례 겪은 적도 있었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려 노력했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성녀의 평온 한 얼굴이 그의 마음을 그렇게 가라앉혔다. 따지고 보면 성녀의 안위 만 보장된다면 다른 걱정할 일도 없었다. 명강량은 한동안 잠든 악약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갑자 기 씨익 웃었다. '비천쌍마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명강량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혁랑(革囊)을 풀었다. 혁랑 속에는 윤기로 반짝이는 두부만한 크기의 오단목(烏檀木)이 들어 있었다. 그 는 오단목을 정 중앙에 놓고 비도를 꺼냈다. 명강량은 비도에 정신을 집중했다. 사각! 사각! 오단목이 조금씩 떨어져 나갔다. * * * 촥 - 아란하는 복류(伏流)로 솟아오른 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어부었 다. 얼음처럼 찬물이다. 그러나 그 물도 그녀의 열기를 식히지는 못 했다. 아란하는 줄줄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욕실에서 걸어나왔다. 모든 것 이 나무로 이루어진 거실이었다. 덩그렇게 걸린 화살, 패검…… 분홍 빛 휘장을 제외하고는 여자의 거소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탁자 위에는 그녀가 벗어 놓은 옷이 아무렇게 늘려 있었다. 그녀는 그 탁자에 딸린 의자에 벌거벗은 채로 앉았다. 몸의 굴곡을 따라 흐 르는 물방울이 바닥을 적셨다. 아란하는 옷을 입을 생각도 않았다. 매일 밤 그녀는 시달리고 있었다. 한 남자가 온다. 분하에서 혈투를 벌였던 그자, 중원의 호교신장… … 명강량이라 했다. 매일 밤 그 남자는 꿈속에서 찾아와 자신을 사정없이 유린하고 갔 다. 잠을 깨며 주체할 수 없는 정념(情念)에 시달렸다. 때문에 그녀 는 자신이 색기(色氣)로 미쳐 버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 다. 성녀를 모시고 하란산으로 돌아올 때부터의 일이었다. 아란하는 가만히 자신의 머리칼을 쓸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 다. 왜 자신이 중원의 호교신장에게 그렇게 마음을 뺏기고 있는지. 솔직히 호감은 갔었다. 천하의 적들을 상대로 중원 배교의 성화를 지 키는 자! 하지만 그 외에의 감정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 는 그 남자에게 모든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아란하는 한숨을 쉬었다. '한 번 만나 보아야겠구나.'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얻은 마음의 병이 시간이 흐르면 절로 치유 될 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란하는 아버지와 사부에게 중원행을 말할 적당한 핑계 거리를 찾 으려 했다. 그때였다. "어이, 아란하!"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사내 한 명이 불쑥 그녀의 거실로 들어섰다. 작은 눈, 히죽거리는 미소를 단 누런 얼굴, 머리를 말총처럼 묶은 자는 둘째 사형, 창파(强巴)였다. 강족의 날쌘 전사로 이루어진 철기 대를 맡고 있는 자……. "이런!" 창파는 작은 눈을 번쩍 뜨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아란하, 고맙다! 이런 황홀한 장면을 보여 주다니……." 그가 소리쳤다. 아란하는 옷으로 몸을 가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를 꼬아 국부만 감추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창파에게는 더욱 유혹적으로 비쳤을 것 이다.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월영궁의 궁주께서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는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았겠소. 와하하! 보고 싶어서 왔다." 창파는 큰 소리로 웃었다. "이제 얼굴을 보셨으니 소원을 풀었겠군요. 그만 나가 주실까요. 이사형!" 아란하가 쌀쌀하게 말했다. "나를 너무 박정하게 대하지 마라. 나는 정말 네가 걱정이 되었다. 사부께서는 너무 심하셨지 않느냐? 그깟 계집을 놓쳤다고 뺨까지 때 리시다니……." "그깟 계집이라니…… 취소하세요. 나는 물론 아버지도 그런 언사 는 참지 못할 거예요." "와하하! 미안, 미안…… 성녀라 했지. 어쨌든 사부에게 조금 구박 을 받았기로서니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는 것은 너무 심하지 않느냐 ?" "이사형이라면 그렇게 하겠지요. 사부님으로부터 구박을 받았다고 바깥출입도 하지 않을……." "흐흥…… 그렇다면 역시 셋째 때문이냐? 조구완과 너는 제법 각별 했었지.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조구완이라는 놈은 그렇게 죽게 되어 있는 놈이었다. 사막의 모래 바람에도 뒤집어 질 정도로 약한 놈이었지. 고작 마옹이라는 애송이에게 죽다니…… 우리 단혈철각련 의 수치다!" 창파가 작은 눈을 게슴츠레 좁히며 말했다. "삼사형의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이곳에서 나가나 주 시겠어요. 훌떡 벗고 있자니 춥군요." "옷을 입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사부 의 명을 전하기 위해서다." "성녀를 다시 잡아오라고 하던가요?" "아니다. 이미 그 일은 끝났어. 듣지 못한 모양이군. 마옹이란 놈 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태명의 목을 베어 버렸어." "옛?" 아란하는 눈을 크게 떴다. "귀찮은 일을 깨끗이 처리해 준 게지. 조구완을 죽인 대가를 크게 갚은 것이다. 사부님은 그놈을 업어라도 주고 싶겠지." "……." "우습게 생각했던 놈인데 조구완은 물론 모태명까지 죽이다니…… 사부님은 그놈과 손을 잡을 방도를 다시 생각하고 계신 모양이야." '명강량…….' 아란하는 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불덩이가 다시 전신을 후끈 스 쳐 가고 있었다. "그렇게 모태명이라는 놈이 죽었으니…… 우리의 진로를 방해할 장 애물은 대충 없어진 셈이지. 아란하, 사부께서는 중원 진출을 의논하 고자 한다. 드디어 그 날이 온 게야." 창파는 좁은 눈을 번쩍였다. "단혈철각부로 오라. 모두 모일 것이다." 그가 등을 휙 돌렸다. 아란하의 거실을 나가던 그는 문득 발길을 멈추었다. "아란하, 너는 정말 가면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다음 번에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참지 못할 것 같다." 창파는 아란하의 위, 아래를 바라보며 음충한 미소를 흘렸다. "아란하, 아직 기회는 있다. 네가 내 마누라가 되겠다고 한다면 지 금껏 얻은 계집들을 모두 사막의 전갈 밥으로 던지겠다고 약속하마." 창파는 여섯 명의 아내를 두고 있었다. "좋은 제안이군요. 생각해 보겠어요." 아란하는 냉랭히 말하며 손을 저었다. "사형도 네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더구나. 단혈철각련의 계승자도 사형이 되고 너까지 사형에게 뺏긴다면 나는 초원의 늑대처럼 잠도 자지 않고 발광을 하며 돌아다닐 게야." 쾅! 창파가 문을 닫고 나가며 소리쳤다. 아란하는 꼬인 다리를 풀었다. 그녀는 의자에 길게 몸을 기댔다. 사부는 드디어 중원 진출을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녀도 무척 기다렸 던 날이었다. 그러나 중원 진출이라는 말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단지…… 아란하는 사타구니 사이에 손을 묻었다. 그녀는 손이 으스러질 정 도로 허벅지에 힘을 모았다. 몸은 점점 열기로 후덥지근했다. 제23장 구전지단(九轉之丹) 악약은 물었다. "이제 싸움은 시작되었다. 이 싸움을 멈출 수 없는가?" 광명신장은 대답했다. "멈출 수 없다. 누 천 년을 쌓여 온 한(恨)이다. 한을 등에 업고 새로운 배교가 시작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씻는 해원무(解寃舞)가 필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다. 긴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악약은 말했다.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인 먼 천 년 전의 어머니는 대천밀 계(大天密計)로 싸움을 멈추었다. 나도 대천밀계로 싸움을 멈추고자 한다." 광명신장도 말했다. "그대, 성녀의 어머니의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인 먼 천 년 전의 성녀는 자신의 피로써 초대 명옹에게 천 년의 시간을 유예(猶豫) 받 았다. 유예 받은 천 년의 세월도 인고의 세월이었다. 변한 것은 없다 . 보권을 지켜야 할 노관들도 칼을 들기를 원하는 때가 온 것이다." "왜 하필이면 그때가 나의 대(代)이어야 하는가?" "성녀여, 우리 교의 딸이여. 그 대답은 신만이 알뿐이다." "왜 하필이면 해원무를 출 사람이 강량이어야 하는가?" "지금 있는 자들 중 누군가 한 사람은 그 일을 해야 한다. 명옹은 그 한 사람 중에 선택된 자일뿐이다. 그는 이미 천 년을 내려온 초대 명옹의 힘, 광정(光精)을 수계(受繼) 받았다." "왜 강량이 그런 선택을 받아야 했는가?" "성녀여, 나는 그대의 물음을 알 수 없다. 명옹이 선택된 일이 그 렇게 중요한 일인가? 나는 누군가는 선택되었어야 했다고 말했다." "나는 강량을 좋아한다." "……." 중원 배교 천 년의 비밀을 간직한 자, 광명신장! 그는 악약의 의외 의 말에 호흡을 멈추었다. 그가 바위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성녀는 만물을 두루 사랑할 책임이 있다. 성녀의 사랑이 특별한 한 사람에게 향하는 것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야 할 것이 다." 악약은 말했다. "나는 강량을 좋아한다. 나는 그를 위해 천상제(天上祭)를 펼칠 것 이다." "……." 감정의 티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광명신장의 얼굴이 만 가지 상들로 흔들렸다. 광명신장은 수천 년의 시간 속에 침묵 하는 듯했다 . 그가 부스스 몸을 움직이며 말했다. "성녀여. 그대는 알 것이다. 천상제는 교도를 상대로 절대 펼칠 수 없다. 그대, 성녀는 왜 스스로 신성(神性)을 내팽개치려 하는가?" "광명신장이시여. 나는 알 수 없다. 신성이 무엇인지…… 나는 받 들려 높임을 당하기 보다 낮추어 받드는 쪽이 좋다. 잘 보이지도 않 는 먼 곳의 신의 마음을 닮는 것 보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닮 는 것이 좋다." 배교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 광명신장…… 그의 눈빛이 심유하게 빛났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성녀여, 그대는 다른 어떤 성녀들 보다 영력(靈力)이 뛰어났던 자 …… 나는 그대가 가는 길을 간섭할 능력이 없다. 그대는 그대의 선 택을 따르라." 악약은 말했다. "광명신장이시여. 다시 약속해 주십시오.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광명신장은 말했다. "성녀여, 우리 교의 귀여운 딸이여! 걱정 마라. 그것만은 약속한다 .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 악약은 몸을 깨끗이 씻고 산 정상에 올랐다. 그녀는 하늘을 향해 불을 피우며 삼일 밤낮을 기도했다. * * * "우리는 오랫동안 참아 왔소. 참고 기다리면 명왕의 정토가 이루어 지리라 생각했소. 하지만 누 천 년이 지나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 소이다. 우리들의 궤적(軌跡)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소. 결과는 우 리들의 궤적을 증명하오. 가만히 있으면 역시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 으리라는 것을 느꼈소. ……나는 명옹의 결단에 찬성하오. 만약 이 싸움에서 패해 우리 교가 사라진다면…… 그것도 명왕의 뜻일 터…… 불평 없이 받아들이겠소." 감숙(甘肅)의 명두, 황견(黃堅)은 명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자 다. 백 여세를 넘었다고 했고 그가 있는 동안 명옹만도 다섯 명이 바 뀌었다. 명강량은 바로 황견이 대하는 다섯 번째 명옹이었다. 황견은 이제 거동도 불편해 후계자의 부축을 받으며 무산대전에 참 가했었다. 그러나 이목은 아직 밝았고 이지도 말짱했다. 원래 나이 든 자들은 웬만한 일도 예전의 관습을 따라 그냥 넘어가 려 하는 법이다. 무산에 모여 든 명두들은 그 점을 걱정했다. 그들은 황견이 강하게 싸움을 반대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황견은 그 같은 말로 간단히 명강량이 전교영기를 든 데에 대해 찬성을 표했다. 이왕 들려진 전교영기…… 반대를 해 보아야 소용없을 줄 알고 차 라리 힘을 모아 주기로 마음을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원로 중의 원로, 황견까지 싸움을 찬성하고 나서자 무산대 전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명강량과 명두들은 유향경천문을 칠 구체적인 방법과 일자까지 잡 은 후 옥녀봉(玉女峯)에 올랐다. 승리를 기원하는 초제(醮祭)를 지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줄을 이어 옥녀봉으로 올라 갈 때였다. "명옹!" 급박한 목소리가 그들의 발걸음을 잡았다. "노기준!" 곽대괄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옥녀봉을 급히 달려오는 자는 호북의 명두, 노기준이었다. 명강량도 반가운 마음에 씨익 웃었다. 추대괄도 살았고 감악도 살았고 노기준까지 살았다. 노기준은 무산 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죽은 줄 안 터였다. 동정호의 일전에 참가했던 명두들 중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명 강량은 그것을 길조(吉兆)로 생각했다. "어떻게 된 게야? 속을 태우려고 일부러 늦게 나타났군." 추대괄이 소리쳤다. "추 명두께서 발에 지느러미를 달고 있다면 저는 발에 날개를 달고 있지 않습니까. 껄껄껄! 아! 감 명두도 무사했군." 노기준이 뒤편에 서 있던 감악을 바라보며 반갑게 손을 들었다. 감 악은 포권으로 머리를 숙였다. 감악의 안색은 무거웠다. 사실 노기준과 추대괄이 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명강량 덕분이었 다. 유향경천문은 물론 형산파, 하토문도 노기준과 추대괄을 상대로 시간을 끌기를 원하지 않았다. 명강량을 잡는 일이 가장 컸었다. 때 문에 그들은 노기준과 추대괄을 악착같이 쫓지 않았다. 그러나 지척 에서 명강량을 호위하던 감악은 달랐다. 적들의 정면 공세에 맞서야 했다. 뿐만 아니라 명강량이 사라졌을 때는 적들의 분풀이 대상도 되 어야 했다. 감악은 살아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감악이 살 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호북의 교군들이 그를 대신해 몸을 던졌기 때 문이다. 덕분에 감악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호북의 교군 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 감악의 표정이 어두운 이유였다. "노 명두,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명강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목숨은 지켰으나 한 쪽 눈이 없 었다. 얼굴에 흉측한 상처와 함께 노기준은 할자(割者)가 되어 그의 앞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정작 노기준은 자신의 한 쪽 눈이 없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 못 한 모양이었다. "성녀께서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편안히 계십니다." "다행입니다! 다행이오!" 노기준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아!" 그가 갑자기 손뼉을 쳤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지금 강호에 떠돌고 있는 소문을 들은 분은 계십니까?" 그가 중인을 둘러보며 급히 물었다. 명두들은 멀뚱한 눈으로 서로만 바라보았다. 노기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산에 모인 명두들은 감악을 제외하고 모두 외진 곳에 있는 명두들이다. 그리고 산길을 택해 무산에 도착 했을 테니 강호의 소문을 당연히 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양 명두는?" 노기준은 양백을 찾았다. 양백은 누구보다 강호 소문에 빠른 자였 다. "양 명두는 오지 않았소." 명강량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원래부터 수상쩍은 자였어! 작자야 오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추대괄이 물었다. "아쉽군요. 양 명두라면 나보다 강호의 소문을 더욱 소상히 알리라 생각했는데…… 강호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고 있습니다. 무산대전에 늦은 이유는 그 소문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노기준이 말했다. "무슨 소문입니까?" 황견이 물었다.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가 우리 교에 칼을 들이민 이유를 찾았습니 다!" "뭣?" 명두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천천히 이야기를 해 봅시다." 명강량이 말했다. 그는 무산대전이 열리던 임시 목채로 발길을 돌 렸다. 명두들도 급히 발길을 옮겼다. - 모영(茅盈)은 어린 시절부터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바가 있었더 라. 그가 장성하매 속세에서의 일상 생활을 싫어하게 되어 열 여덟살 에 가출을 하게 된다. 집을 나간 그는 항산(恒山)에 들어가 창출(蒼朮)을 먹으면서 수행 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던 중에 왕군(王君)에게서 도의 깊은 뜻을 전 수 받고 서왕모(西王母)에게서 한 권의 비전을 전해 받았다. ……공부를 마친 그는 마흔 아홉에 다시 고향에 돌아오게 된다. 그 런데 당시까지 건재하던 아버지는 그에 대해 가출한 채 집에 돌아오 지 않는 자식이라 하여 늘 섭섭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바…… 들고 있 던 지팡이를 힘껏 내리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토막토막 부 서지더니 그 부서진 조각들이 사방으로 날아가 집의 벽에 부딪치자 벽에 구멍을 내고 기둥에 맞자 그곳이 움푹 파이고 하는 것이었다. 기세등등하던 아버지는 그 모양을 보고서 놀라서 멈추었다. ……집에서 그럭저럭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다. 그의 두 동생이 출 세하여 각각 군의 장관이 되었기 때문에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성대한 환송회를 거행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영은 자기는 장 관이 되지는 못하나 내년 사월 삼일에 선인이 되어 하늘에 오르기 때 문에 오늘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성대한 환송회를 해 달라고 했다. 사 람들은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며……. 마침내 그날이 왔다. 푸른 비단이 쳐지고 하얀 융단이 깔렸다. 각 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연회가 열렸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술잔, 금으로 만든 접시, 본 적이 없는 음식, 향기로운 술…… 아름다운 음 악도 들리고 좋은 향내가 사방 수십 리까지 풍겨 사람들은 놀라게 했 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수백 명의 붉은 옷을 입은 천관 (天官)들이 어마어마하게 무장한 많은 수의 천병(天兵)들을 거느리고 하늘에서 내려왔다. 이를 본 모영은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 를 나누고 수레에 올랐다. 그리고 천관과 천병의 호위를 받으며 하늘 로 올라가고 말았다. ……멀리서 그 사실을 전해들은 두 동생은 장관직도 내던져 버리고 돌아와 어떻게든 형을 만나 하늘로 올랐으면 하고 바랬다. 얼마 지 나지 않아 그들 앞에 나타난 형은 불사(不死)의 법을 가르쳐 주고 구 전(九轉)의 환단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도 선인이 되어 모산(茅山)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들 세 사람을 삼모군(三茅君)이라 한다. "……모영을 비롯한 세 형제, 삼모군이 바로 모산파의 개조(開祖) 입니다." 노기준은 모산파에 얽힌 긴 이야기를 끝냈다. 명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했다. 교에 환난이 닥친 이유를 밝히겠다더니 노기준은 엉뚱하게 모산파의 연원을 장황하게 이야기 하고 있었다. 노기준은 중인들의 의아해 하는 시선을 눈치채고 서둘러 말을 이어 갔다. "이 년여 전쯤이었을 것입니다. 모산파에서 옛터에 웅장한 도관을 새롭게 지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우연히 그곳에서 녹각(鹿角)으로 만든 비급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모영이 두 동생에게 전해 준 불 사의 법과 선인이 될 수 있는 구전지단(九轉之丹)을 만드는 비결이 적힌 녹각이었다고 합니다." "단환 하나가 사람을 죽지도 않게 하고 선인으로 만든다고…… 모 산파, 과연 미친놈들의 소굴이군." 추대괄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의 생각이 어디 추 명두와 같겠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추 명두와 모두 생각이 같다면 모산의 문도는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모산 의 문턱을 넘나드는 자들도 없었을 것입니다." 노기준이 말했다. "맞는 말일세. 사람의 욕심은 끝없는 욕심을 부르지…… 미련하게 느껴질 정도로……." 노명두(老明頭), 황견이 노기준의 말을 거들었다. "그 녹각을 얻은 모산파의 장문인은 문도들에게 녹각을 얻은 사실 을 절대 함구하라 명한 후 다급히 자금성으로 갔습니다." "신이 났겠군. 불사의 비법으로 자금성의 금을 긁어낼 절호의 기회 가 생겼으니…… 당금 모산파의 장문인은 누구인가?" 추대괄이 물었다. "현천도장, 풍도라는 작자입니다. 그 작자는 원래 자금성에 제법 연분을 많이 두고 있었지요. 그는 자금성의 노환관, 우득용을 찾아 녹각을 얻은 사실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다고 합니다." "우득용, 나라를 망쳐 먹는 추괴한 늙은이…… 끼여들지 않는 곳이 없군. 협조라면?" "불사의 단을 만들 약재(藥材)들을 구하고…… 그리고 이 일이 우 리 교와 관련이 있습니다." 노기준은 안광을 빛냈다. 조금 지루한 기색을 보이던 명두들의 시선이 다시 노기준에게 집중 되었다. "불사의 단을 만드는 데는 수 백 종의 약재가 들어갑니다. 백복령( 白茯　), 천문동(天門冬), 숙지황(熟地黃), 구기근피(枸杞根皮) 같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설삼(雪蔘), 천 년 적하수오, 백하수오, 인면지 주, 천년대망 같은 구하기 어려운 것까지…… 이것들을 한꺼번에 연 단(鍊丹)해야 하는데 연단하는 과정에 약 기운이 섞이며 엄청난 독무 (毒霧)를 내뿜는다고 합니다. 그 독무를 완전 불태워야 비로소 단환 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의 불로는 그 독무를 태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풍도, 그 작자는 애초부터 불사의 단환인가 구전지단인가 하는 것 이 얻어질 수 없도록 수작을 부려 두었군. 설혹 불사의 비법이 있다 고 하더라도 설삼이나 천년대망을 어디에서 구하겠나. 구했다고 하더 라도 독무 때문에 되지 않는다고 하니…… 바람은 듬뿍 넣고 금냥만 챙기겠다는 수작이겠지." 추대괄이 비아냥거렸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강호의 소문이 맞는가를 확인하는 과정에 서 모산파에서 그런 약재들을 모두 구입해 갔음을 알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천년대망까지 잡았다고 하더군요." "아!" 노기준의 말에 명두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모산파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콩을 콩이라 해도 믿지 않는 그들이었지만 일이 그 정도까지 흘 러갔다고 하자 효능과는 별도로 불사의 비법이 적힌 녹각을 얻긴 얻 은 모양이구나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문제는 독무를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한꺼번에 독기를 깨끗이 태 울 화기(火器)……." "그렇게 무시무시한 독무가 흘러나온다면 불도 보통의 불로는 되지 않겠군. 독무를 태우다가 자칫 약재까지 태울 수 있지 않겠소. 모산 파는 태상노군(太上老君)의 화덕이라도 있어야 되겠구려." 황견이 말했다. "맞습니다. 아주 신령스런 불이 필요하지요. 독무도 태울 수 있고 약재들의 기를 보호할…… 강호에 그런 불이 있습니까?" 노기준이 문득 물었다. "강호에 그런 불이……." 명두들은 자신들의 강호 견문을 되살리며 그런 화기가 있는가를 찾 았다. 그러나 입을 여는 명두들은 없었다. 그런 신기한 물건이 세상 에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노기준은 단호하게 소리쳤다. "있습니다!" 명두들의 시선이 모였다. "잊었습니까? 우리 교의 꺼지지 않는 불, 화령주……." "……." 명두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맞는 말이다. 화령주에는 분명 그런 힘이 있었다. 교의 성스러운 불, 세상 밖의 물건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화령주를 떠올리지 못한 것뿐이었다. "풍도는 우득용이라는 자에게 말해 유향경천문을 만들게 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바로 우리들로부터 화령주를 뺏어 가기 위해 서입니다. 우리 교에 주어진 환난은…… 화령주를 얻기 위한 놈들의 수작일 뿐입니다!" 노기준이 외눈에 살광을 번뜩이며 소리쳤다. 명두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들의 표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어이 없어 하는 자도 있었고 적들에 대한 분노로 흉광을 번뜩이는 자도 있 었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 침묵을 깬 자는 가장 성격이 급한 자였고 명두들 중 가장 성격이 급한 자는 추대괄이었다. "죽일놈들!" 추대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용서할 수 없습니다! 먼저 우득용을 육시하고 모산파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립시다!" 그가 노로도 곧잘 사용하는 긴 낭아봉(狼牙棒)을 치켜들며 소리쳤 다. "다른 말이 있겠소!" 서너 명의 명두들도 추대괄을 따라 자리를 박찼다. "앉으시게. 찬찬히 이야기함세." 황견이 그들을 말렸다. 추대괄을 비롯한 그들이 숨을 씩씩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노 명두, 알고 싶습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화령주라 했습니다. 화령주만 가져가면 될 일이지 시끄럽게 왜 '배교 척결'의 기치까지 내걸었다고 합니까?" 오랜만에 들린 젊은 목소리였다. 낮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진 자는 감악이었다. "뻔한 일 아니겠소. 화령주가 어떤 것이오? 모산파 놈들이 화령주 를 가져갔다면 감 명두는 가만히 계시겠소? 생명을 걸고라도 되찾아 오려 하지 않았겠소. 풍도, 그놈은 그 사실을 안 게지. 어차피 벌어 질 싸움, 우리 교의 표적이 되느니 그들이 먼저 우리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겠지요. 강호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 노기준이 말했다. 명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산파는 원래 소문만 요란하지 문파의 힘은 정말 하오문 보다 약했다. 그런 자들이 배교에서 생명처럼 아 끼는 귀보(貴寶)를 가져갔다. 후환(後患)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유향경천문을 세워 아예 교를 없애 버릴 계책을 세웠을 것이다. 모든 것은 밝혀졌다. 불사의 비법이 적힌 녹각, 그 녹각으로 모산파의 영예를 노리는 풍 도, 수명(壽命)만 길다면 더 이상 세상에 바랄 것이 없는 자금성의 고관들, 배교를 없애고 화령주를 뺏어라는 명을 받은 그들의 충실한 주구인 유향경천문, 내막을 아는지 모르는지 덩달아 깨춤을 춘 구대 문파와 군소 방파……. 그들이 한 통속이 되어 벌이고 있는 일이 교가 처한 환난의 전부였 다. "화령주는 어디에 있습니까?" 황견이 물었다. 그도 화령주에 대한 걱정이 앞서는 듯했다. "성녀께서 가지고 계십니다." 명강량이 말했다. "다행이오. 화령주는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소. 그것은 명왕이 이 흑암을 밝히고자 우리에게 준 불이오." 황견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명옹,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산파 놈들을 내버려두실 생각이십 니까?" 추대괄이 다시 소리쳤다. "맞습니다! 우리의 칼은 먼저 모산파 놈들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명두들도 이구동성(異口同聲)이었다. 그들은 모산파와 풍도에 대해 이를 갈았다. 뿐만 아니라 비교적 현인(賢人)이라 생각하던 삼 모군에게까지 악의를 드러냈다. 장내는 모산파에 대한 이 갈린 성토 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 소요 속에 노기준이 명강량을 향해 은밀하게 말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탁! 탁! 탁! 노기준이 탁자를 세 번 세차게 두들겼다. "명옹께서 하실 말씀이 계시다고 하오!" 그가 주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소리쳤다. "좋습니다. 모산파를 먼저 쳐 풍도의 죄를 묻겠소. 날짜는 유향경 천문을 치기로 한 날 그대로 하겠소. 유향경천문은 모산파를 친 후 내가 연락하겠습니다. 혹 모산파를 불지르고 유향경천문으로 바로 몰 려갈 수 있으니 준비는 그렇게 해 두시오." 명강량의 말은 간단했다. 명두들은 당연하다는 듯 명강량을 결정을 받아들였다. 명강량과 명두들은 노기준의 등장으로 중지된 초제를 올리기 위해 부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누군가가 소리쳤다. 감악이었다. "명옹께서는 너무 간단히 이 일을 처리하려 하시지는 않습니까?" "다른 할 말이 있소?" 명강량이 물었다. "있습니다." 감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명강량은 명두들을 다시 자리에 앉게 했다. "명옹께서는 모산파를 불질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감악이 당돌하게 물었다. "감 명두는 무슨 그런 말을 하시는 게요.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 라니…… 유향경천문을 쳐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오?" 추대괄이 감악을 나무라듯 말했다. "유향경천문을 치는 것은 힘의 대결이었습니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통해 그간의 한도 풀고 앞으로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못하도록 막 자는 것이었지요. 모산파는……." "아하! 감 명두께서는 닭모가지 비틀 힘도 없는 상대에게 칼을 겨 누게 된 것이 불만이었던 모양이군! 하지만 감 명두, 모산파는 자신 들의 약함을 동정 받기에는 우리 교에 너무 많은 짓거리들을 자행했 소!" 추대괄이 감악의 말을 넘겨짚으며 말했다. 감악은 자신을 애송이로 치부하는 듯한 추대괄의 말에 씁쓸하게 웃 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모산파는 쳐 없애야 합 니다. 도관을 불태우는 정도가 아니라 거들먹거리던 자들이 한 명도 살아남을 수 없을 정도로 깨끗이!" 그가 한광을 쏟으며 소리쳤다. 감악의 냉랭한 눈빛에 그를 보는 명두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솔직히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를 상대로 한 싸움이 얼마나 승산 없는 싸움인가 하는 것은 여기 모인 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 다. 모산파를 불태우고 유향경천문을 불태우고 구대문파를 불태우고 소문대로 따르면 자금성까지 불태워야 할 판국입니다." "음……." 명두들은 신음을 흘렸다. 감악은 들추기 싫은 아픈 곳을 들추고 있 었다. "그럼 그 방법 말고 다른 방법이 있소?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벌써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오." 노기준이 말했다. 이 싸움이 이란투석(以卵投石)임을 모르는 명두 는 없었다. "있습니다. 그토록 험한 싸움을 하지 않아도 될! 환난이 시작된 원 인을 없애면 우리 교가 처한 어려움도 없어집니다! 화령주가 필요 없 게 되었는데 그들이 왜 우리 교를 처치하는 헛된 일에 심신을 소비한 단 말입니까!" 감악이 흥분하며 소리쳤다. 명두들은 퍼뜩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떤 자는 감악의 말뜻 을 알아채고 '아!'하며 탄성을 터뜨렸고 어떤 자는 아직 꿈속에서 헤 어나지 못해 주위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없었다. "먼저 구전지단을 만드는 비법이 적힌 삼모군의 녹각을 불태워야 합니다. 다음에 그 비법을 아는 모산의 말코 나부랭이 도사들을 모두 죽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놈들이 단환을 만들기 위해 준비한 약재 들을 모두 없애면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놈들은 더 이상 화령주를 찾고자 우리 교를 들쑤시지 않을 것이오." 감악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호오!" "아!" 명두들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듯 희색(喜色)을 띄었다. 어찌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던고. 그들은 자신들의 아둔한 머리를 탓했다. 싸움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매여 머리가 굳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방금 밝힌 세 가지의 일을 쉬워 보이는 듯해도 어렵습니다. 지금 우리는 녹각이 어디 있는지, 단환을 어디서 연단하는지도 모릅니다." 감악이 말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오. 모산의 놈들은 경망스러워 입 이 가볍소. 특히 금붙이 몇 개면 그들의 입을 더욱 가볍게 할 수 있 을 것이외다." 노기준이 큰소리 쳤다. 모산파와 무슨 연줄이 있는 듯했다. 명강량은 명두들을 쭉 살폈다. 명두들은 모두 기대에 찬 표정으로 감악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굳어 있던 분위기와는 달랐다. 활 로(活路)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몇 가지 더 생각할 문제는 있습니다. 이제껏 잠잠하던 모산파와 관련된 소문이 갑자기 왜 터져 나오게 되었는지…… 만약 모산에서 단환이 만들어지고 있다면 모산의 사정도 상세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 단환이 잘못 될까를 걱정한 우득용이라는 자가 모산을 유향경천문 보다 더 범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을지 모르니까요." 그 짧은 순간, 감악은 많은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걱정 까지 보탰다. "녹각의 비밀이 강호에 흘러나온 이유를 나는 이렇게 들었소. 모산 파의 장문인, 풍도는 녹각에서 얻어질 성과를 모두 제 몫으로 돌리려 한 모양이오. 부와 명성을 풍도 못지 않게 밝히는 다른 장로들이 가 만히 있었겠소? 풍도와 장로들 간에 심한 알력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종종 싸움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 내부는 물론 외부까지 녹각 의 비밀이 흘러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도 강호의 소문으 로 들었소." 노기준이 말했다. "모산의 놈들이라면 충분히 그럴만 하지! 아마 풍도라는 놈은 녹각 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쥐고 있을 수도 있을 게야. 그렇다면 일은 더 수월할 텐데……." 추대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명옹!" 황견이 명강량을 불렀다. "사정이 이러하오. 서둘러 결단을 내려 주여야겠소. 소문이 강호에 널리 퍼졌음을 알면 우득용이란 자와 모산파는 다른 조치를 취할 것 이오. 그 전에 감 명두가 말한 세 가지의 일을 이루어야 하오." "알겠습니다." 명강량은 황견에게 읍한 후 명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감 명두께서 모두 말씀해 주셨소. 먼저 녹각이 있는 곳과 구전지단을 연단하는 곳을 찾도록 합시다. 모산의 사정에도 촉각을 기울입시다. 나도 황기명사와 적기명사에게 명해 모든 것을 알아보도록 할 것이오. 모이는 장소와 일시(日時)는……." "칠월(七月) 칠석(七夕)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날 모산파에서는 서왕모(西王母)가 전한(前漢)의 무제(武帝)를 방문한 날을 기념하는 대회향제(大回香祭)가 열립니다. 모산파 놈들은 한 놈도 빠짐없이 참 가할 터이니 놈들을 쓸어버리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이지요." 노기준이 말했다. 전한의 무제는 불로불사의 도를 좋아했으며 모산 파의 초석(礎石)을 튼튼히 하는데 기여한 자 중의 한 명이다. 그래서 모산파는 특별히 그날을 기념했다. "좋습니다. 그날로 합시다. 모산파는 어차피 칠 것입니다. 강호의 소문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면…… 시일이 촉박하다고 하오. 서둘러 주십시오." 명강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두들도 서둘러 자리를 박찼다. 잠시 후, 무산에 한줄기 연기가 피어올랐다. 배교도들이 하늘에 제 (祭)를 올리고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명강량은 노 명두, 추 명두와 잠시 밀담(密談)을 나눈 후 황견 앞 에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허허허! 불렀습니다. 이 미천한 것이 늙었다는 핑계 하나로 명옹 을 오라 가라 합니다." 황견이 얼굴에 굵은 주름살을 그리며 웃었다. 모든 명두들은 무산을 서둘러 떠나가고 없었다. 명강량은 옥녀봉 기슭에서 황견의 초대를 따로 받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없소이다. 그저 명옹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모산 에는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가 봐야 짐만 될 것이고…… 그래서 모 산에는 이 놈이 갈 것입니다." 황견은 그의 곁에 있는 자를 가리켰다. 황견을 부축하고 온 자로 그 역시 이 놈, 저 놈 소리를 들을 나이가 오래 전에 지난 백발 노인 이었다. "나는 백 년을 살았소. 온갖 일을 다 겪었소이다. 그래도 아직까지 살아 있소. 잘 될 것이오. 명왕께서 지켜보고 계시오." 황견은 그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명강량의 손을 잡고 가만 히 바라만 볼뿐이었다. "명두, 명옹께서는 바쁜 분이십니다. 그만 길을 가시도록 해 드리 지요." 지켜보고 있던 황견의 후계자, 백발 노인이 말했다. "허허허! 그렇지, 그래." 황견은 명강량의 손을 놓았다. "명옹이시여. 부디 몸을 살피소서." 그가 노구(老軀)를 굽혔다. 명강량은 황송한 마음에 황급히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나 황견은 고집스럽게 머리를 땅에 찧었다. 일어날 때는 백발 노인의 부축을 받 았다. 황견은 많은 말을 눈빛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품속을 뒤 졌다. 그가 은사(銀絲)로 동여맨 족자를 꺼냈다. "가져가십시오. 총단이 불탔을 때 소실(燒失)되지 않았을까 걱정했 습니다. 그래서 행여 하는 마음에 가져왔습니다. 오늘 대전에 걸리지 않았던 것을 보니 역시 소실된 듯 합니다." 황견이 족자를 건넸다. "무엇입니까?" "풀어 보십시오." 명강량은 은사를 풀고 족자를 펼쳤다. 초상화(肖像畵)였다. 팔 척에 가까운 키, 딱 벌어진 어깨, 무릎까지 길게 은발을 늘인 벽안 노인의 초상화였다. 한 손에는 보권을 들고 한 손으로는 먼길을 가리키는……. '엇!' 초상화를 바라보던 명강량은 흠칫 놀라 초상화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림 속의 인물은 그가 꿈속에서 보았던 사람과 똑 같았기 때문이다. "누구입니까?" "명옹께서는 그 분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계셨습니까? 허어, 이 런 일이…… 호교전(護敎殿)에 걸려 있었을 텐데." "호교전은 명옹의 거소입니다. 내가 명옹이 되었을 때는 호교전이 불타고 없었습니다. 사부께서 나를 그곳으로 부른 적도 없고……." "그렇군요. 타할륜! 그 분이 바로 중원 배교의 초대 명옹이십니다. " "아!" 명강량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족자를 땅바닥에 펼친 후 구배(九拜)를 올렸다. "가져가십시오. 총단을 세울 때 모시기 바랍니다." 황견이 말했다. "황 명두, 감사합니다." 명강량은 읍했다. "이제 그만 가 보아야겠소." 황견은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백발 노인의 부축을 받 으며 무산을 내려갔다. "건강하십시오." 명강량은 황견의 등 뒤에 대고 머리를 숙였다. 황견을 보낸 후 명강량은 초대 명옹의 초상화에 다시 눈길을 돌렸 다. 그가 초상화를 뚫어지게 살폈다. 두 번 보아도 틀림없었다. 초대 명옹은 그가 꿈속에서 본 벽안 노인과 같았다. '나는 정말 초대 명옹의 초상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가?' 명강량은 먼저 자신의 기억을 의심했다. 보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렇게 생생한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호교전에 부름을 받고 갔었던가도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호교전에 갔던 기억은 없었다. 총단에 있을 때 줄곧 그가 있었던 장소는 대화 로였다. 사부가 임의로 후계자로 내정한 후에야 몇 번 대성전(大聖殿 )에 들렀을 뿐이었다. '어디선가 보긴 보았을 것이다. 내가 기억을 되살리지 못하고 있을 뿐…….' 명강량은 그렇게 단정했다. 그가 족자를 접었다. 아직 미심쩍은 부 분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꿈속의 인물이 초대 명옹으로 밝혀지자 마 음이 후련했다. 솔직히 꿈속의 벽안 노인에 대한 그의 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었다. 꿈을 꾸고 나면 어떤 중압감 같은 것을 느꼈던 터였 다. 그 중압감은 세상을 향해 뻗어 가는 칼날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른 새벽 신장도의 칼날을 만지며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몇 번이나 고심해야 했었다. 명강량은 족자를 접어 소매에 넣었다. 그는 발길을 서둘렀다. 만나 야 할 명두가 한 명 더 있었다. "부르셨습니까?" 명강량을 기다리고 있던 명두는 감악이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르게." 명강량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는 감악에게 말을 놓고 있었다. 명강량과 감악은 무산에 조금 일찍 도착했었다. 그 며칠 동안 같이 지내며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을 높였 으나 사적이 자리에서는 말을 텄다. "명옹이 명을 내리면 따라야겠지요. 그런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만나자마자 그런 말을 하십니까?" 감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선 이것부터 받게." 명강량은 신장도와 전교영기 그리고 방금 황견으로부터 받은 초대 명옹의 초상화가 그려진 족자를 내밀었다. "이것은……." 감악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는 그 동안 무척 바빴다. 뒷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지. 하지만 근자에는 조금 시간이 남아 교의 향후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도 있 었다. 생각하니 가장 중요한 일을 잊고 있었더군. 후계자를 지정하지 못한 각 성이 명두들이 없어 고심하는 것을 보고도 말일세." "그럼, 형님은 뜻은…… 안됩니다!" 감악이 신장도를 뿌리치며 와락 고함을 질렀다. "호북의 교도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들이 애써 뽑은 명두인데…… 하지만 우리 교 전체의 위함을 생각한다면 그들도 이해 하리라 믿네. 명옹에게는 그럴 권리도 있고…… 받게." 명강량은 명옹의 물건들을 다시 내밀었다. "안됩니다!" 감악은 검미를 꿈틀대며 소리쳤다. "형님, 왜 그런 약한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모산파 놈들 쯤은 문 제될 것이 없습니다. 유향경천문, 구대문파를 상대해서도 잘 버텨 왔 지 않습니까?" "생각하니 천행(天幸)이었다. 그런 천행이 언제까지 이어지겠나. 모산파는 분명 유향경천문과 구대문파 보다는 가벼운 상대다. 강호의 소문이 맞기를 정말 나는 바라고 있다. 하지만……." 명강량은 감악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만약 우리가 모산파를 쳐 이 되지도 않은 싸움을 끝장 낸다고 치 자. 그렇다고 해서 적들이 순순히 물러나겠나? 최소한 그들은 자신들 의 체면은 지키려 할 것일세. 그리고 분풀이도 해야 하고…… 당분간 교에 대한 공세는 계속되겠지. 특히 나를 죽이기 위해 광분할 것일 세. 나의 목을 얻어야 놈들도 조금의 위안은 얻을 것이고……." "……." "아우는 현명한 자일세.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네. 동정호에서 자네를 보자마자 먹은 마음이다. 받게." "안됩니다!" 감악은 결단코 신장도와 전교영기를 거부했다. 명강량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이 귀한 물건들이 적들에게 넘어가도 좋단 말인가?"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감악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명강량의 판단이 틀리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신장도와 전교영기를 받으면 명강량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 같아 받기 싫을 뿐이었다. "명옹으로서 명일세." "안됩니다!" 감악은 요지부동이었다. 명강량은 감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꺾일 고집이 아니었다. "할 수 없군. 그럼 이렇게 하세. 신장도와 전교영기를 잠시 보관해 주게. 내가 다시 달라고 할 때까지." 그가 한발 양보했다. 감악은 미간을 좁혔다. 그 부탁까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분명 잠시 맡아 두는 것뿐입니다." 그는 명강량에게 다짐을 받으려 했다. "알겠네." 명강량은 웃으며 신장도와 전교영기, 초대 명옹의 초상을 건넸다. "굉장히 무겁군요. 이렇게 무거운 물건들을 들고 다녀야 하는데 누 가 명옹이 되려 하겠습니까." 감악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물건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르고 날뛴 자도 있다네." 명강량도 웃음으로 답했다. "모산의 일전에는 빠지려 하지 않겠지?" "당연한 말씀입니다. 사해의 교군들이 다 모이는데 어찌 명두라는 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감악이 소리쳤다. "그렇겠지." 명강량은 감악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의 심정은 감악이 당 분간 싸움판에 끼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감악이 그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명강량은 그런 경우를 대비해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었 다. 노 명두, 추 명두와 밀담을 나누었다. 감악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을 비췄다. 그들도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국 승낙을 받아 냈다. 현 실적으로 후계자는 진작에 내정되었어야 함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모산의 일전에서도 감악을 안전한 곳으로 빼돌릴 방도에 대해서도 입 을 맞춘 터였다. 감악을 바라보는 명강량의 표정은 느긋했다. 어깨가 가벼웠다. 정 말로 신장도와 전교영기는 무거운 물건이었나 보다. "그럼, 모산에서 보는 일만 남았나?" "모산에서 뵙겠습니다." 감악은 머리를 숙였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황기명사는 무릎을 꿇었다. "성녀께서는 잘 계십니까?"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며칠 동안 또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황기명사가 송구한 표정으로 말했다. "형주에서 성녀의 종적을 놓친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정신을 바 짝 차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운무가 피어오르고 천지가 깜깜하더니 사방을 가릴 수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성녀는 계시지 않 았습니다. 두 번이나 이런 실수를 하다니……." 황기명사는 고개를 못 들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제가 깜빡한 것이 있습니다. 성녀께서는 한동안 둔갑법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둔갑법?" "화령술(火靈術)에 재미를 붙이시다가 둔갑법(遁甲法)에 빠지셨지 요. 재미로 익힌 것이라 별 성취가 대단치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 매번 성녀의 놀라운 능력을 보고도 성녀를 아이처럼 생각하는 자신 에 대해 명강량은 실소를 흘렸다. 둔갑은 하늘의 기, 땅의 기가 옮기고 변하는 것을 방위(方位) 속에 서 파악하는 학문으로 동(動)으로 보는 법과 정(靜)으로 보는 법이 있다. 주로 군사의 움직임, 포진이라 하는 것이 천지의 기와 어떻게 변하 는지 살피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다. 가령 아무리 대군을 투입해도 지리가 나쁘면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지리가 좋아도 때로는 격파 당 할 때가 있다. 원인을 파고들 때 보이지 않는 천지 기의 영향이라는 문제가 나온 다. 요컨대, 나날이 천지 자연의 기는 변동하고 그것이 각 방위의 다 름으로 해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거기서 법칙을 찾아낸 것이 바로 둔갑법이다. 일반적으로 둔갑은 방위에 의한 천지의 기의 좋고 나쁨을 보는 점( 占)으로 되어 있는데 진짜 둔갑의 명인(名人)은 돌이라든가 여하한 물건을 놓아두고도 자유자재로 천지의 기를 조절할 수 있다. 성녀의 둔갑법의 경지는 그 정도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백기명사에게는 연락을 취했습니까?" 명강량이 물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성녀를 안락국에 보낼 생각이 었다. 원래 황기명사에게 그 일을 맡길 생각이었으나 역시 황기명사 는 할 일이 많았다. 백기명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안락국으로 가는 길도 백기명사가 아무래도 나을 테니……. "한중(漢中)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백기명사에게 다시 연락을 취해 서너 명의 날쌘 여교도들도 준비 하라 하십시오. 성녀께서 둔갑법을 또 펼칠지 모르니……. 항상 같이 있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알겠습니다." "모산파에 얽힌 강호의 소문은 들은 바 있습니까?" "모산파에 대한 소문이라니요? 저는 성녀를 모시느라 다른 곳에 신 경을 쓸 틈이 없었습니다." "그랬지요." 명강량은 노기준에게 들은 강호의 소문을 황기명사에게 그대로 전 해 주었다. 황기명사도 모산파의 짓거리에 이를 으드득 갈았다. "서둘러 조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양 명두께서 무산에 오지 않 았습니다. 양 명두의 거취에 대해서도 알아주십시오. 저는 한중에 갔 다고 모산으로 갈 것입니다." 명강량은 한중까지 성녀를 호위할 생각이었다. 그 먼 안락국을 그 냥 보내기 아쉬워 아무리 바빠도 한중까지는 배웅을 해 주기로 결심 했다. "중도에 남경 막수호(莫愁湖)에서 보기로 합시다. 적기명사에게도 조사를 부탁하고 그도 막수호로 오라 하십시오." "존명!" 황기명사는 명을 받았다. "막수호에서 뵙겠습니다." 그가 바람처럼 신형을 날렸다. 명강량은 한동안 초옥(草屋) 주위를 서성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방 문을 두드렸다. "강량!" 악약이 고함을 지르며 반갑게 맞았다. 명강량은 머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며칠 동안 어디 갔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디를 갔었습니까?" "허락을 받으러 갔었어요." "무슨 허락을……." "강량과 혼인(婚姻)을 하기로 마음먹었죠!" 악약은 어리둥절해 있는 명강량의 품에 와락 달려들었다. * * * 단원홍의 안색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처럼 창백했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듯 눈도 항상 충혈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행동도 어수선했다. 예전의 빈틈없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 정자를 오르는 단원홍을 바라보며 언상영은 안광을 빛냈다. '설마 마옹을 놓쳤다는 충격 때문은 아니겠지.' 전혀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닐 것임을 알고도 갑갑한 마음에 언상영 은 별 추측을 다하고 있었다. 갑자기 내린 명 또한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언상영은 자리에 앉는 단원홍을 바라보며 오늘은 그 해답을 들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단원홍은 역시 무엇에 쫓기듯 다급했다. "언상영, 어떻게 되었느냐? 내가 강호에 퍼뜨려라 한 소문이 배교 도들의 귀에 들어갔겠느냐?" 그는 앉자마자 물었다. "누구보다 빨리 그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강호의 소문에 가장 촉각을 세우고 있는 자들이 그 놈들일 테니……." 언상영이 말했다. "문주가 시켜서 하긴 했지만 웬 그런 해괴한 소문을 퍼뜨려라 한 게요?" 팽해만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해괴한 소문이 아니다. 그 소문은 사실이다." "옛?" 팽해만은 놀라 입을 딱 벌렸고 언상영, 남궁기, 당예의 표정도 변 했다. "뭐야? 그럼 우리는 우득용이라는 그 늙은 환관 놈의 영생불명(永 生不滅)을 위해 모산파의 깨춤에 놀아났단 말이군! 으헤헤헤, 재미있 군! 재미있어!" 팽해만의 눈이 찢어졌다. "사실입니까?" 언상영의 표정도 심각했다. "사실이다." 단원홍이 끊어 말했다. "……." 사대당주들은 할 말을 잃었다. 어느 정도 수상한 냄새는 맡았었다. 그러나 '배교 타파'가 '마교 척결'이라는 최소한의 명분 내는 있으 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배교 타파'의 목적이 몇 몇의 불로장생을 위한 것임을 안 순간 언상영을 비롯한 사대당주들은 무사로서 견딜 수 없는 수치심을 맛보아야 했다. 농락을 당해도 철 저히 농락을 당한 기분이었다. "제기랄! 풍도, 그 개자식!" 팽해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헤헤헤, 유향경천문…… 이름이 좋군! 정말로 하늘이 놀랄 문파다 ! 시황(始皇)께서 나는 왜 저런 문파를 만들지 못했을까 하고 통곡을 하고 있겠군! 나를 잡지 마!" 그가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그를 붙잡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 원홍은 충혈된 눈으로 먼 곳을 응시했고 언상영은 생각에 잠긴 얼굴 로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남궁기는 무표정한 얼굴로 석상처럼 앉아 있었고 당예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연신 흘리고 있었다. "나를 잡지 마! 나를 잡지 말란 말이야!" 팽해만은 다시 소리쳤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팽해만은 엉거 주춤한 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좋아!" 팽해만은 마지못한 듯 털썩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갈 때 가더라도 몇 가지는 물어 봅시다. 왜 갑자기 그 사실을 밝 힌 게요? 알아서 쓱싹 처리하고 우리에게는 구대문파의 자리만 주었 다면 서로 좋은 일인데…… 으헤헤, 굳이 비밀을 밝힌 이유는 우리 간장을 뒤집어 놓기 위해서요?" "팽해만, 나는 추궁을 당하고 싶지는 않다." "잉?" 팽해만은 흠칫 놀라는 시늉을 했다. "이런 경우에 쓰는 적당한 말이 바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지. 으 헤헤! 문주, 정말 너무 하는 것 아니오." 사람을 끝까지 치근덕거리는 팽해만의 뒤틀린 심사가 발동되고 있 었다. "나를 이해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겠다. 내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 라는 것만 알아주었으면 한다." "배교의 뿌리를 뽑는 일에 미적거린 이유가 그 때문이라 말씀하고 싶은 것이군요." 언상영이 말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을 더 하고자 한다. 언상영, 남궁기, 팽해만, 당예, 나를 도와 다오." 단원홍은 지나간 일에 대해 더 이상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은 듯했 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만 했다. "도와 달라니…… 이런 경우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무 래도 소면각저께서 능운공작이 되고 능운공작께서 소면각저가 되어야 하겠군." 팽해만이 입에 침을 튀겼다. "문주, 무슨 부탁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남궁기가 비로소 물었다. "모산파를 없애 버릴 것이다. 배교도 역시……." "……." 사대당주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강호에 이상한 소문을 퍼뜨린 이유는 그 때문이었군요. 나는 생각 했습니다. 강호에 이런 소문이 퍼져 나가면 틀림없이 배교도들이 모 산으로 몰려들 것이라고…… 환난의 원인을 발견했는데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지요. 그래서 저는 문주께서 모산파라는 덫을 이용 배교를 소탕할 계획을 가지고 계시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모산파까 지 없애려 하실 줄은……." "그들도 죽어야 한다!" 단원홍이 강경한 어조로 언상영의 말을 잘랐다. "우리들처럼 개 같이 부림을 당한 일에 화가 나서입니까? 문주께서 는 원래부터 이 일의 전말(顚末)을 알고 있었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 서 모산파를 불태워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상영, 더 이상의 물음은 허용하지 않겠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내 계획을 따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뿐이다." 단원홍은 안광을 빛내며 시선을 고정시켰다. "아이구! 단 천호께서는 정말 너무 하시는군." 팽해만이 어깨를 젖히며 다리를 쭉 폈다. "알겠습니다. 문주, 저는 문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남궁기가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자식, 좀 봐! 살랑대는 꼬리에 폭풍이 일어날 정도잖아!" 팽해만이 남궁기를 바라보며 눈을 흘겼다. "나도 문주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모산파…… 조금 우스운 곳이군 요." 당예가 하얗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개자식들! 자존심도 없는 것들! 으헤헤, 문주! 저런 아첨만 일삼 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겠소. 유향경천문의 대들보 썩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군. 안되지, 안돼! 어쨌든 나는 능운공작, 나리를 끝 까지 쫓아다녀 오늘의 이 치욕을 갚아 줄 참이야! 으헤헤, 아무렴!" 팽해만이 다리를 까불거리며 소리쳤다. "모두 문주의 뜻을 따르기로 한 모양이군요. 저는 한두 가지 걱정 이 있습니다. 그 답은 문주로부터 들어야겠습니다." "무엇인가?" "강호에 영원한 비밀을 없습니다. 모산파를 우리가 없앴다는 소문 은 언젠가는 우득용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 사대세가는 자금성을 상대로 싸울 자신은 없습니다." "특별히 은밀하게 모산파를 칠 생각은 없다. 공공의 귀에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개의지 않는다. 모산파를 불태운 후 공공을 찾아가겠 다. 그리고 요구할 것이다. 강호의 일에 더 이상 관부를 개입시키지 말라고……." "우득용이 문주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리라 생각하십니까? 불로장 생의 꿈이 한순간에 날아간 판인데……." "나는 공공을 조금 안다.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 분이지. 득 되는 일이 있더라도 위험한 일이면 발을 들이지 않는다. 하물며 득 되는 일도 아닌데 발을 들일 이유는 더욱 없을 것이다. 구전지단은 이제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 나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것은 구전지 단을 얻지 못한 분풀이 뿐인데…… 공공은 나를 비롯한 강호인들이 얼마나 다루기 힘든 상대인가를 잘 안다. 쉽게 다룰 수 있는 자들임 을 알았다면 벌써 구대문파를 발아래 두었을 것이다. 나는 공공이 위 험수를 두지 않을 것을 확신하다." "동감입니다.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그 때문에 또 하나의 문제 가 생기는데…… 사실 사대세가가 유향경천문에 모인 이유는 구대문 파 대신 사대세가가 강호의 패주가 될 수 있도록 해주겠다던 우득용 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문주가 뜻대로 모산파를 불태운다면 우리 사대세가에 대한 우득용의 지원은 물 건너간 것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벌어져도 개의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사대세가가 강 호의 패주로 자리잡는 일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이었다. "언상영, 그 일은 걱정 마라! 다른 곳에서는 몰라도 강호에서의 힘 은 나의 힘이 공공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주께서 유향경천문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시겠다는 말로 믿어 도 되겠습니까?" 언상영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금의위를 떠나겠다. 강호로 돌아올 것이다." "알겠습니다." 언상영은 머리를 숙였다. "모두 끝난 거야?" 팽해만이 단원홍과 언상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끝났다. 이제 모산에서 모산파와 배교도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 가 하는 문제만 남았지." 언상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오, 그래! 그럼 지금 나는 칼을 갈아 두어야겠군. 모산파 놈들 은 수은(水銀) 같은 별 해괴한 것들을 다 처먹는다고 하니 틀림없이 살점이 질길 게야." 팽해만은 벌떡 일어섰다. 그가 정자를 내려갔다. 당예도 슬며시 일어났고 남궁기도 단원홍에게 읍한 후 정자를 내려 갔다. "내려가지 않겠습니까?"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모산의 지도(地圖)도 한 장 구해야겠고 배교도들의 동정도 알아보아야겠습니다." 언상영도 정자를 내려갔다. 단원홍은 정자의 기둥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장마가 시작되려는 듯했다. 단원홍은 먹구름으로 덮여 가는 하늘을 우러렀다. '사매…… 조금만 기다려라.' 그는 피곤에 지친 눈을 비볐다. * * * "강량,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악약이 물었다. 명강량은 이제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안락국으로 갑니다." 악약은 놀라지 않았다. "드디어 우리는 안락국으로 가는군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우리가 아닙니다. 저는 안락국에 가지 않습니다. 먼저 가 계십시 오.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혹시 가시 않겠다고 할까 싶어 명강량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악약은 떼를 쓰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안락국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만약 내가 늦게 오더라도……." 악약은 명강량의 말을 막았다. "찾아가겠습니다. 그곳이 지옥의 불구덩이, 도산검림(刀山劍林)이 라 하더라도……." 명강량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강량은 안락국으로 가는 길을 아시나요?" "모릅니다." "그럼 왜 묻지 않으세요?" "……." "가르쳐 드릴 테니 꼭 오세요."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명강량은 '앗! 했다. 손의 촉각을 통해 머리 속으로 긴 길이 그려 지고 있었다. 그 길은 너무도 선명했다. 말을 타고 가며 보는 듯한 장면들이 한동안 쭉 스쳐 갔다. 마지막으로 명강량이 본 것은 첩첩 산들에 둘러싸인 신전(神殿)이었다. 머리 속을 스쳐 가는 장면들은 그곳에서 끊겼다.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놓고 있었다. "기억하겠어요?" 그녀가 물었다.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오려고 해요." 악약이 힘없이 말했다. 비는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후두둑 쏟아졌다. 굵은 장대비였다. 명강량은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작은 관목림(灌木林)들만 총총한 곳이라 비를 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그는 악약을 껴안고 뛰었다. 잠시 후, 그들은 움푹한 바위 아래 비를 피할 곳을 찾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전신에 비를 흠뻑 맞은 후였다. 바위 아래는 너무도 좁 아 악약과 살갗을 맞대고 있어도 명강량은 한쪽 어깨를 고스란히 빗 물에 씻겨야 했다. 음산한 바람은 연신 불고 빗물은 바위를 타고 폭포수처럼 흘러내렸 다. 악약은 조금 추운 모양이었다. 그녀는 껴안기듯 명강량에게 몸을 기댔다. 그들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묵묵히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 고 있었다. 빗줄기는 좀체 가늘어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비는 땅을 패고 금 방 붉은 물이 흐르는 내를 만들었다. "강량, 비천쌍마는 다 만들어졌나요?" 악약이 문득 물었다. "아직 한 쪽 날개를 다듬지 못했습니다. 한중에 도착할 때면 다 만 들어질 것입니다." "다 만들어지지 않아도 괜찮아요. 지금 주세요. 불완전(不完全)한 것이 더 아름다워요. 서로를 받쳐 줄 수 있으니까." 악약은 손을 내밀었다. 명강량은 망설이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아직 덜 깎은 비천쌍마를 내 밀었다. "야!" 악약은 비천쌍마를 잡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고마워요. 강량! 나도 선물을 드릴 게 있어요." "화령주라면 사양하겠습니다. 화령주는 안락국에 꼭꼭 숨겨 두십시 오." "화령주가 아니에요." 악약은 몸을 틀었다. 그녀는 명강량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얼굴 이 다가왔다. 입술이 닿았다. 차가웠다. 그리고…… 명강량은 자신의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 게 악약의 허리를 껴안았다. 빗줄기 속에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 성녀는 떠났다. 저 먼 안락국으로……. 명강량은 물었다. 성녀를 다시 볼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대답했다. 다시 만날 것이다. 지옥의 불구덩이, 도산검림에 있다고 하더라도 찾아갈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반드시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이전처럼 막막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희망이 보였다. 명강량은 모든 것이 잘 되리라 믿었 다. * * * 대회향제를 앞둔 모산은 시끄러웠다.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사내들 과 온갖 장신구로 치장을 한 여인들이 거드름을 부리며 모산에 올랐 다. 그들을 맞이하는 모산의 도사들도 바빴다. 도관 곳곳에 화환(花環)이 걸쳐지고 돈다발이 쌓였다. 풍도는 제법 엄숙하게 초제를 지냈고 도사들은 긴 분향을 했다. 신 도들은 개인의 영달을 빌었다. 대회향제가 끝난 후, 모산은 난전이었다. 도사들은 영단과 부적을 팔기에 바빴고 신도들은 은자를 뿌리며 상춘객처럼 모산의 도관을 오 갔다. 어둠이 내렸다. 모산을 찾았던 신도들은 화려한 물결을 그리며 모산을 내려갔다. 두터운 모산의 산문이 굳게 닫혔다. 정적이 찾아왔다. 그 정적 속에 새로운 일군(一群)의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굳 은 표정에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는 자들이었다. 제24장 천상제(天上祭) "어김없군." "무엇이 어김없다는 말이오?" "칠석에는 비가 오지. 이번 만남은 특별했던가 보이…… 어지간히 도 퍼붓는군." 추대괄은 손으로 하늘을 받쳤다. 손바닥에 이내 빗물이 듬뿍 고였 다. "만남이 특별했던 것이 아니라 헤어짐이 특별히 괴로웠던 것은 아 니고요?" 감악이 물었다. "만남도 헤어짐도 모두 괴로움이다. 그건 그렇고 명옹께서는 왜 이 렇게 늦나?" 추대괄은 얼굴을 줄줄 타고 흐르는 빗물을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사위는 깜깜했고 비 내리는 소리만 요란했다. 그 정적 속에 철벅이 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모여 있던 명두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각자의 병기를 잡았다. "오십니다!" 어둠 속에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자는 노기준이었다. 그 뒤로 죽 립과 전의를 걸친 명강량이 나타났다.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명두들은 일제히 부복했다. "날씨가 좋습니다." 명강량이 죽립을 벗으며 말했다. "하하하!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명옹의 얼굴은 더 좋아 보입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추대괄이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낭아봉을 흔들었다. 명강량도 씩 웃었다. 감악이 입을 열었다. "모든 것이 강호의 소문과 다름없습니다. 풍도, 그놈이……." "알고 있소. 명사들로부터 보고를 받았소." 명강량은 막수호에서 황기명사와 적기명사로부터 상세한 내막까지 듣고 온 터였다. "녹각이 어디 있는지, 연단을 어디서 하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 습니다." 노기준이 말했다. "모산파에 있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소?" "모산파에 있는 것만은 확실할 것입니다. 구전지단을 만들 약재가 모두 모산파로 실려 간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그럼 됐소. 모산파 어디에 있을 것이오. 풍도를 잡아 물어 봅시다 ." 스릉! 명강량은 장도(長刀)를 빼 들었다. 신장도 대신 임시로 사용 하라고 황기명사가 구해 준 것이었다. "서북, 서남의 교군들은 나와 함께 모산파의 산문을 넘어 정면으로 쳐들어 갈 것이오. 강북의 교군들은 배후를 공격해 주시오. 강남의 교군들은 모산파를 에워싸고 한 놈도 도주하는 놈이 없도록 해주시오 . 내가 포향으로 신호를 알리겠소. 그때 일제히 공격을 시작하면 됩 니다." "존명!" 명두들이 소리쳤다. "왜 우리 강남의 교군들은 뒷짐을 지게 하십니까?" 감악이 불만스런 얼굴로 물었다. "강남은 그간 피해가 적지 않았소. 지금 동원된 교군들도 많지 않 음을 아오. 그리고…… 놈들의 도주를 막는 일은 누군가는 해야 하오 . 자, 서둘러 주시오." 명강량은 장도를 들었다. 명두들이 빗속을 바쁘게 움직였다. "배교도들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언상영이 말했다. "좋은 날씨군." 단원홍은 우산을 접었다. "더러운 모든 것들이 이 빗물과 함께 씻겨 내려갈 것이다. 언상영, 사대당을 움직여라. 놈들의 퇴로를 철저히 차단하라. 모산파든 배교 도든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가 성큼 어둠 속을 걸어갔다. "어디로 가십니까?" 언상영이 물었다. "모산파! 놈들의 도관에서 신호를 보내겠다. 공격은 그때 시작하라 ." "위험합니다! 혼자 가시다니…… 내가 모시겠습니다!" 언상영이 소리쳤다. 그러나 단원홍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 * * 풍도는 이마에 굵은 주름살을 그렸다. 생각할수록 장로들의 행동이 괘씸했다. '혼자서 공(功)을 삼킬 생각을 말라고…… 녹각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천복을 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내가 장문인일 때 녹각이 나왔단 말인가.' 풍도는 우득용의 힘을 빌어 장로들을 조금 전제(剪除)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이, 무슨 생각을 그토록 오래 하세요." 계집의 목소리였다. 풍도의 뒤에는 눈망울이 또랑또랑한 어린 계집 하나가 젖가슴을 드러낸 채 누워 있었다. 앳된 얼굴이었으나 몸매는 터질 듯이 풍부한 계집이었다. "흐흐흐……." 풍도는 계집의 도톰한 엉덩이를 만지며 음산한 미소를 흘렸다. 원 래 모산의 도사들은 속된 자들이 많고 또한 유해섬(劉海蟾), 장자양( 張紫陽)의 남파(南派) 쌍수법방중술(雙修法房中術)로 단수(丹修)를 한다는 그럴듯한 구실까지 있었으므로 도관에 곧잘 여인을 불러들였 다. "구전지단에 매달리느라 내 살맛을 잊은지 오래 되었구나. 오늘은 쏟아지는 빗줄기만큼 질퍽하게 놀아보자구나. 합환산(合歡散)을 써 볼까 미녀일소산(美女一笑散)을 써 볼까?" 풍도는 계집의 몸매를 훑으며 소매를 뒤졌다. "합환산은 너무 강렬해서 재미가 없고 미녀일소산은 너무 약해 재 미가 없어요. 나는 철야자정산(徹夜姿情散)이 좋던데." 계집이 데굴거리며 말했다. "미녀일소산이 약하다니…… 네년은 필경 나의 뼈를 말려 죽이겠구 나." 풍도는 계집의 엉덩이를 철썩 때린 후 소매에서 꺼낸 알약 하나를 계집에 주고 자신도 한 알을 먹었다. "진인(眞人), 그런데 근자에 제 몸이 좀 이상한 것 같아요. 경도( 經度)도 없고……." "뭐야?" 풍도는 놀라 미간을 좁혔다. "양생(養生)의 요체는 정(精)을 발출하지 않는데 있다고 들었는데 진인께서는 항상 제 몸에 정을 남기셨잖아요." "그래서 소녀채전(素女採戰)을 가르쳐 주지 않았느냐?" 풍도는 버럭 화를 냈다. "한참 그 일을 하고 있을 양이면 정신이 오락가락해 손이 발인지도 모르는데 무슨 소녀채전을 기억한단 말이에요." 어린 계집은 입을 삐죽였다. "그래, 내 탓이다. 내 탓이야. 내가 너무 재미에 빠져 너를 잘못 가르쳤다." 풍도는 한숨을 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 정말 아기가 생겼다면 산폐독(産廢毒 )으로 깨끗이 지워 버릴 테니……." 계집이 '흥!' 하며 말했다. 풍도는 철야자정산에 취해 벌써 촉촉이 젖어 가는 계집을 보며 머 리를 굴렸다. "산폐독을 쓰지 마라. 이왕 맛본 세간의 재미…… 자식을 키우는 재미 또한 느껴 보고 싶구나." "정말이에요?" 계집이 젖가슴을 출렁이며 벌떡 일어섰다. "물론!" 풍도는 남은 껍질을 벗으며 계집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그가 계 집의 촉촉한 곳을 더듬어 갔다. 계집은 풍도의 무릎 위에 앉아 엉덩 이를 흔들며 교태를 부렸다. 그들이 가진 바 재주를 뽐내며 서로를 탐닉해 갈 때였다. 피잉! 펑! 포향이 울렸다. 무릎에서 삽신(揷身)한 후 계집을 반듯이 눕히던 풍도는 이상한 기 분에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그가 계집을 희롱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라니요? 제자는 잘……." 밖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들려 오는 순간, '악!' '으악!'하는 비명 이 풍도의 귓가를 때렸다. 풍도는 놀라 급히 계집의 몸에서 떨어졌다. "무슨 일이냐?" 그가 다시 고함을 지르며 후다닥 도복을 걸쳤다. "으악!" "악!" "커억!" 비명이 사방에서 꼬리를 물고 터졌다. '배교! 배교놈들이 어떻게…….' 풍도는 빗속을 달리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발은 생각보다 빨리 움 직여 주지 않았다. '배교놈들이 본 문을 찾았다는 것은 구전지단의 비밀을 알았다는 뜻인데…… 어떻게 알았을까?' 그가 두려움에 찬 눈길로 고개를 돌렸다. 장대비 속에서도 화광(火 光)은 충천(衝天)했다. 성난 배교도들은 도관을 불태우고 모산의 제 자들을 소, 돼지처럼 도축(屠畜)하고 있었다. '비밀은 아는 자는 장로들과 공공, 단 천호뿐인데…… 그 놈들이… … 그 놈들의 입이 화를 불렀구나.' 풍도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는 장로들을 의심하고 있었다. '어쨌든 서둘러 비동(秘洞)을 봉쇄해야 한다.' 풍도는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그가 가는 곳은 녹각이 보관되어 있 고 구전지단을 연단하는 비동이었다. 반 각을 달리자 칼을 찬 오륙 명의 무사들이 그를 맞았다. 풍도는 반색을 했다. 무사들은 우득용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 내 준 동창의 고수들이었다. "무슨 일이요?" 무사 한 명이 불타는 모산의 도관을 바라보며 물었다. "배교놈들이 몰려왔소!" 풍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뭣이?" 동창의 무사들은 도관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풍도는 그들을 말렸 다. "배교놈들의 공세가 예사롭지 않소. 도관은 우리 제자들이 어떻게 든 지킬 테니 검우(劍友)들은 비동을 지키는데만 만전을 기해 주시오 . 놈들이 노리는 곳도 바로 이곳이오." 제자들이 어떻게 되던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녹각과 자신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알겠소." 동창의 무사들이 눈빛을 흉흉하게 빛내며 풍도를 따라 비동으로 되 돌아 왔다. 싸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그들도 같았다. 비동에는 십 여명의 무사들이 더 있었다. 풍도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비동으로 뛰어들었다. '가만 있자, 가만 있자…….' 풍도는 유등(油燈)에 불을 밝힌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동창에서 보낸 자들도 믿기 힘들었다. 그는 기관을 발동해 비동을 굳게 닫을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하니 기관을 발동할 장치가 어디 있는지도 잘 기억이 나 지 않았다. '아하!' 그가 손뼉을 쳤다. 동굴 한 편에 기관을 발동시키는 빗장을 발견했 기 때문이다. 그가 빗장에 손을 댔다. 그때였다. "현천도장……." 누군가가 풍도를 불렀다. 풍도는 대경실색 퍼뜩 고개를 돌렸다. "단 천호……." 그의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자는 단원홍이었다. "단 천호, 때맞추어 잘 오셨소!" 풍도는 쌍수를 들었다. 단원홍은 풍도의 반가움에 무심했다. "녹각은 어디 있소?" 그가 짧게 물었다. "녹각은 왜?" "녹각은 어디 있소?" 단원홍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저, 저기 있소." 풍도는 그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가리켰다. "앞장서시오." 단원홍이 말했다. 풍도는 엉거주춤한 몰골로 단원홍을 인도했다. 그가 비동의 끝에 자리한 석부를 열었다. 문을 열자 여러 가지 약재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구전지단을 만들기 위해 모아 둔 약재인 모양이었다. "녹각은 안전한 곳에 놓아두었소. 단 천호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 단원홍의 심상치 않는 기색에 질려 연단실(鍊丹室)까지 왔지만 녹 각을 보여주기는 꺼림칙했다. 단원홍은 한광을 뿌렸다. 풍도는 단원홍의 눈빛에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여, 여기 있소." 그가 석벽 한 곳에 손을 댔다. 석벽이 빙글 돌아가며 금함(金函)이 모습을 드러냈다. 풍도는 이번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재빨리 금함을 열었다. "아무래도 단 천호가 보관하는 것이 낫겠지요." 그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금함에 든 물건을 단원홍에게 건넸다. 녹각은 발처럼 엮어져 있었다. 그 녹각에는 빽빽이 전서(篆書)가 적혀 있었다. 단원홍은 녹각을 말아 소매에 넣었다. "풍도!" 그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맺혔다. "다…… 단 천호, 왜…… 왜 이러시오?" 풍도는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다. "구전지단을 만드는 수고를 하지 않더라도 영원히 죽지 않는 비법 이 있다." "그…… 그런 방법이…… 악!" 장검이 번뜩이는 순간 풍도의 목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단원홍은 떨어지는 풍도의 목을 들었다. 그는 유등을 약초 더미에 던졌다. 잘 건조된 약초 더미는 이내 불길에 휩싸였다. 붉고, 푸른 오색 연무가 석실을 채우는 것을 보며 단원홍은 비동을 걸어나왔다. "한 번 죽은 자는 다시 죽지 않는다." 그가 비동의 입구에 서 중얼거렸다. 그의 발아래는 동창의 무사들 이 시신으로 빗물에 씻기고 있었다. 단원홍은 한참 칼부림으로 요란한 모산의 도관을 향해 천천히 걸어 갔다. 그가 불타고 있는 모산의 도관 앞에서 최초로 만난 자는 정신 없이 모산의 제자들을 목베고 있는 배교도였다. 단원홍은 그 자의 앞에 섰다. "너희들이 찾는 두 가지 물건이 여기 있다." 그는 먼저 어리둥절해 하는 배교도 앞에 풍도의 목을 던졌다. 그리 고 소매에서 녹각을 꺼냈다. 그가 내력을 끌어올렸다. 녹각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단원홍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배 교도를 지나쳤다. 그가 불타는 도관들 사이를 천천히 거닐며 품속을 뒤졌다. 펑! 유성탄이 허공에 작렬했다. * * * "명옹, 큰일났습니다!"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오는 자는 외곽에서 도주하는 적들의 목을 베 고 있어야 할 노기준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장도의 핏물을 빗물에 씻으며 명강량이 물었다. 그도 상황이 이상 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들려 오는 비명으로 감지(感知)하고 있었 다. "유향경천문 놈들입니다! 놈들이 우리는 물론 모산파 놈들까지 닥 치는 대로 주살하고 있습니다!" "유향경천문! 모산파까지……." 추대괄은 영문을 몰라 했다. "천라지망이 펼쳐졌습니다! 상세한 연유는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 서둘러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노기준이 급하게 소리쳤다. "녹각도 찾지 못했고 연단실도 찾지 못했소. 처치해야 할 모산파 놈들도 아직 많습니다." 명강량도 사태의 심각성은 깨닫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나기가 싫 었다. "어물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공세의 주도권은 놈들이 잡고 있습니 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 차후를 다시 논의합시다!" 노기준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으악!" "악!" 비명은 점점 모산의 도관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포위망이 더 좁혀지기 전에 서둘러야 합니다." 노기준은 발을 굴렸다. "명옹, 노 명두의 말대로 합시다. 일단 이곳을 벗어난 후 정세를 보고 모산파 놈들을 처리할 방도를 찾읍시다." 추대괄도 위험을 느꼈다. 그는 명강량의 호위를 맡고 있었다. 명강 량의 안위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명강량은 미간을 좁혔다. 마음 같아서는 끝장을 내고 싶었지만 그 역시 걱정은 다른 교군들의 안위였다. "좋습니다. 일단 한 발 물러납시다." 그가 명을 내렸다. "물러난다! 모두 명옹을 호위하시오!" 추대괄이 소리쳤다. 각 성의 명두들과 교군들이 명강량을 에워싸며 몰려들었다. "갑시다!" 명강량은 그들의 선두에 서 달렸다. "크악!" "아악!" 비명은 끊임없이 터졌다. "감 명두는 어떻게 되었소?" 산을 내려가며 명강량이 물었다. "감 명두와 저는 너무 떨어져 있어서…… 나는 유향경천문의 움직 임을 발견하는 즉시 명옹에게 연락을 취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돌볼 틈이 없었습니다." "무사해야 할 텐데……." 명강량은 안색을 찌푸렸다. 위험을 피한 자리에 배치한다는 것이 가장 위험한 자리에 배치한 꼴이었다. 그가 감악을 걱정하며 모산파의 산문을 지날 때였다. 철컹! 철컹! 도검을 철컹이며 한 무리의 무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비쩍 마른 체구에 껑충 키가 큰 자였다. 무심한 눈 빛에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운 기도를 뿜어내고 있는 자…… 그는 현 무당주, 남궁기였다. 남궁기의 현무당은 명강량이 이끌고 있는 교군들 보다 숫자가 적었 다. 그러나 남궁기와 현무당은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명강량은 장도를 세웠다. 그도 벼락같이 움직였다. 선두에 선 자가 선두에 선 자를 향해 칼을 날렸다. 쨍! 쨍! 쨍! 검화(劍花)가 피어오르며 불꽃이 현란하게 피었다. 남궁기의 눈빛이 달라졌다. "명옹, 이놈들은 내가 막겠습니다! 명옹께서는 서둘러 하산하십시 오!" 추대괄이 소리쳤다. "마옹이었군." 남궁기의 무심하던 눈빛이 이채로 번뜩였다. 그는 명강량의 모습을 자세히 본 적은 없었다. 그가 마옹으로 기억하는 것은 금검이었다. 신장도……. 남궁기는 검을 세웠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의 검이 풍운백 변으로 명강량을 몰아쳤다. 파팟! 수백 가닥의 검영이 검망(劍網)을 그렸다. 추대괄이 어쩌고 할 자가 아니었다. 명강량은 양천등광도법을 번뜩였다. 챙! 챙! 챙! 검파(劍波)가 폭사되며 굵은 빗줄기가 안개비로 흩날 렸다. 명강량과 남궁기는 한 치의 양보 없이 도검을 주고받았다. 호적수( 好敵手)였다. 도검이 어우러지며 뻗어 나가는 기세가 워낙 험해 다른 자들은 간섭을 하려 해도 할 수 없었다. 천 합 내에 승부가 나지 않 을 듯했다. 그러나 명강량은 승부를 오래 끌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남궁기를 육박했다. 몇 군데 혈구가 생기며 피가 튀었다. 남궁기는 명강량이 단 합에 승부를 결정지으려 함을 알았다. 물러 날 이유가 없었다. 쐐액! 누구라 할 것 없이 명강량과 남궁기는 도검을 뻗었다. 전력 을 다한 절초였다. 도검이 뇌전으로 서로를 갈라 갔다. 쩡! 도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중인들의 고막을 흔들었다. 누구 하나 는 피를 뿌리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다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명강 량과 남궁기의 칼 사이에는 또 한 자루의 칼이 걸려 있었다. 두 사람 이 전력을 다해 펼친 절초를 가볍게 막아낸 다른 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문주……." 남궁기는 검을 거두었다. 명강량은 안색을 찌푸렸고 교군들은 무거운 신음을 흘렸다. 능운공작, 단원홍! 바로 그 자였다. 남궁기는 현무당의 수하들을 이끌고 몇 발걸음 물러났다. 추대괄을 비롯한 배교도들은 단원홍의 기세에 압도되어 목상(木像)처럼 굳어 있었다. 비가 세차게 흩날렸다. 단원홍은 명강량의 장도를 누른 채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그가 명 강량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꽉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사매는 어디 있느냐?" 명강량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가 장도를 뒤집으며 천두제탄( 天斗齊彈)으로 단원홍의 허리를 노렸다. 번쩍! 단원홍의 검이 따라서 움직였다. '챙!'하는 소리와 함께 은빛 파편들이 물방울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 명강량은 자신의 칼을 들여다보았다. 칼은 손잡이만 남아 있었다. 단원홍의 일검에 그의 장도는 산산조각이 나고 없었다. 남궁기는 턱을 매만졌다. 마옹은 분명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 상대를 문주는 마치 아이 다루듯 상대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능운공작의 능력! 기뻐해야 할지 괴로워해야 할지 남궁기는 몰랐다. '괴…… 괴물이다!' 노기준의 안색도 사색(死色)으로 질렸다. '다른 방법이 없다.' 그는 재빨리 허리춤을 뒤졌다. 명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자신의 내력을 모두 장력에 쏟았다. 장심에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팟! 그가 삼양장을 연환으로 펼쳤다. 붉은 기운이 화룡처럼 움직이 며 단원홍을 휘감아 갔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강한 힘이었다. 배교도들과 현무당의 수하들은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도 후덥지근한 열기를 느껴야 했다. 단원홍은 붉은 장영이 지척으로 다가올 때가 되어서야 움직였다. 좌수뿐이었다. 좌수에서 황금빛 광채가 찬연히 피어오르며 삼양장의 거센 기운에 부딪혔다. 콰쾅! 쾅! 뿌연 증기(蒸氣)와 함께 기파의 반탄력에 빗방울이 파편처럼 튀었 다. 명강량은 어깨를 부들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두 손은 충 격으로 뼈마디가 살갗을 뚫고 돌출해 있었다. 입가로 피가 주르르 흘 렀다. 정신이 혼미했다. 개세무적(蓋世無敵)이었다. 명강량은 단원홍이 자신을 죽이려 마음먹었다면 그 한 수로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처참한 심경이었다. 모든 것이 나락으로 구르는 듯했다. 단원홍은 신룡처럼 서 있었다. 그는 명강량에게 알아야 할 일이 있 었다. "악약은 어디 있느냐?" 그가 냉랭하게 물었다. 단원홍이 펼친 천룡사의 반심고장에 내상을 입고 눈빛이 흐릿해져 가던 명강량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악약은 어디 있느냐? 악약은 네놈들 같이 더러운 놈들과 어울려 다닐 여자가 아니다!" 단원홍이 광인(狂人)처럼 소리쳤다. '쌍육을 가르쳐 준 사형이 있다더니…… 후후후!' 명강량의 눈빛이 차갑게 번들거렸다. 그는 으스러진 손에 다시 내 력을 끌어올렸다. "누가 성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가?" 명강량은 사자처럼 포효했다. 그가 광풍을 일으키며 단원홍을 재차 육박했다. "안됩니다!" 노기준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와 함께 그는 허리춤의 묵환들을 새 카맣게 뿌렸다. 단원홍은 손바닥을 하늘로 받들며 주먹을 쥐었다. 우웅! 웅! 경기의 폭풍을 일으키며 그가 주먹을 뻗었다. 사자철권 이었다. 펑! 펑! 펑! 명강량은 사자철권의 위맹한 공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의 신형이 실 끊어진 연처럼 허공을 날았다. 그와 동시에 노기준 이 던진 묵환이 허공에서 작렬했다. 흑무(黑霧)가 가뜩이나 어두운 밤을 더욱 암흑 세상을 만들었다. "추 명두, 길을 여시오!" 노기준이 피화살을 뿜으며 날아오는 명강량을 받으며 소리쳤다. 추 대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현황탄(玄黃彈)을 가진 자는 있는 대로 던져라! 길을 열어라!" 그가 소리치며 발끝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전진했다. 펑! 펑! 다행히 노기준 외에도 현황탄을 가진 자가 몇 명 더 있었 던 모양이었다. 현황탄이 터지며 사위는 더욱 어두웠다. 길을 열려는 배교도들의 발걸음 소리만 요란했다. 단원홍은 일순 당황했다. 야안공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어둠이었다 . 배교도들의 잔수는 이 경우는 너무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듯했다. 단원홍도 남궁기도 선이 굵은 싸움에만 익숙한 자라 이런 잔수에는 잘 대치하지 못했다. "위치를 넓혀라! 다가오는 자는 무조건 쳐라!" 남궁기는 다급히 소리쳤다. 쨍! 쨍! 쨍! "크악!" "으악!" 흑무 속에서 비명이 터지고 도검이 난무했다. 노기준의 얼굴에도 누구의 피인지 모를 핏물이 확 튀었다. 그는 기 원했다. 군산에서처럼 명옹이 벌떡 일어나 다시 한 번 신위를 보여주 기를…… 암왕 보다 더 험악한 모습으로 부활(復活)해도 괜찮았다. 그러나 등에 업혀 있는 명옹은 호흡조차 미약했다. 믿을 것은 자신의 빠른 발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유향경천문의 술수였다. 모산파까지 끌어들이면서 왜?' 노기준은 물었다. 하지만 그의 물음은 야차처럼 달려드는 유향경천 문의 공세에 맞서느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으악!" "악!" 비명은 천지를 흔들었다. 상대를 알아보고 칼을 휘두르는지 알 수 도 없었다. * * * "헉! 헉! 헉!" 감악은 물살을 첨벙였다. 원래 산기슭을 휘감아 흐르는 작은 계류 에 불과했을 물은 허리춤까지 불어 있었다. 물살도 거세 감악은 뒤뚱 거리며 간신히 그 계류를 건넸다. 빗줄기가 약해지기는 했으나 비는 여전히 내렸다. 감악은 타는 목을 얼굴에 흐르는 빗물로 적셨다. 폐부는 찢어질 듯 아팠고 등에 업은 명옹의 몸무게는 태산이었다. 그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멀리 왔다고 생각했으나 모산은 지척이 었다. 사실 모산을 벗어난 것만 해도 천행이라 할 만했다. 현황탄, 천화분이 고비고비를 넘겨주었고 마지막에는 노 명두의 기 지가 있었기 때문에 이만큼이나 도주하는 것이 가능했다. 노기준은 명옹의 옷을 갈아 입히고 자신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는 명옹과 비슷한 체구의 교군에게 명옹의 옷을 입힌 후 그를 업고 다른 방향으로 퇴로를 열었다. 적을 속이기 위해 추 명두도 그쪽으로 따 라갔다. 그 때문에 적의 예봉(銳鋒)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속임수도 오래가지 못할 것은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한 떼의 무사들이 길을 되돌아오고 있었다. 감악의 인상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철갑인(鐵甲 人)처럼 움직이며 교군들의 목을 베던 자! 하북, 산동, 섬서의 명두 가 차례로 목숨을 잃었다. 적개심에 앞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이제는 그림자만으로도 작자를 식별할 수 있을 듯했다. 능운공작, 단원홍!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단원홍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감악 은 단원홍의 시선이 자신을 쫓고 있다는 착각에 시달렸다. 감악은 물살을 다시 헤쳤다. 한 걸음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야 했다 . 그러나 몸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고맙게도 의지와 무관하게 발이 움직여 준 것도 오래였다. 감악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물을 건넜다. 이제는 산을 넘어 야 했다. 별로 높지도 않는 산이었다. 그러나 감악에게는 그 산이 천 장절애 보다 더 높았다. 땅도 미끄러워 엉금엉금 기다시피 했다. 전신이 흙투성이였다. 정 말 단원홍은 자신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아! 이대로 끝나는가!' 감악은 절망감에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도 분해 대성통곡(大聲痛哭 )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 와중에도 감악은 벌레처럼 꿈틀대며 조금씩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만 앞설 뿐 몸은 뜻대로 움직여 주 지 않았다. 결국 그는 명옹을 가지런히 눕힌 후 자신도 털썩 주저앉 고 말았다. 미련하게 움직이느니 잠깐이라도 쉬며 힘을 축적하는 것이 나을 듯 했다. 그는 빗줄기에 몸을 맡긴 채 숨을 헐떡였다. 그때였다. "일어나세요." 맑은 목소리였다. 감악은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뒤축 높은 꽃신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연황색 치마를 입은 여인이었 다. 화려한 우산을 쓰고 있었고 어깨에는 본 적 없는 새 한 마리가 한가롭게 앉아 있었다. 여인의 갑작스런 출현에 놀라워하던 감악은 문득 눈앞의 여인이 어 디서 본 여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앗!' 그는 눈을 크게 떴다. 동정호에서 가슴을 저리던 음률을 연주하던 그 여인이었다. 명옹은 그 여인을 성녀라 했다. '성녀…….' 감악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시여!" 그가 오체투지로 부복했다. 감악의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백기명사를 따라 안락국으로 가고 있 어야 할 악약이었다. "처음 보는 분이군요. 누구예요?" 악약이 물었다. "저…… 저는 호남의 새로운 며…… 명두가 된 가…… 감악이라 합 니다." 감악은 성녀의 돌연한 출현에 감격해 말도 제대로 못했다. "아란하도 있고 감 명두도 있고…… 강량은 그렇게 외롭지는 않겠 군요." 악약은 뜻 모를 소리를 했다. "성녀시여! 여기는 위험합니다! 어서 피해야 합니다!" 감악은 아픈 것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괜찮아요. 감 명두, 나를 좀 도와주시겠어요?" "위험합니다. 서둘러 떠나야……." "강량을 좀 데려다 주세요." "명옹을? 명옹을 어디로……." "따라오세요." 악약은 사뿐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감악은 입술을 깨물며 힘을 냈 다. 그가 명강량을 다시 업었다. 악약은 산봉우리를 올랐다. 능선은 신형이 쉽게 노출된다. 감악은 애가 탔다. 그러나 다행히 성녀는 산 정상에 오르기 전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이에요." 악약은 손가락으로 한 군데를 가리켰다. 작은 동굴이었다. 호랑이나 곰이 머물던 곳 같기도 했다. 악약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감악이 그 뒤를 따랐다. "어!" 동굴을 둘러보던 감악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굴은 마치 여인의 규방처럼 정갈했다. 야광주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감 명두, 강량을 여기에 눕혀 줘요." 두툼한 풀 위에 백색의 모피가 깔려 있었다. 감악은 그 위에 명강 량을 눕혔다. "감 명두, 수고했어요. 이제 그만 가 보세요." 악약이 말했다. "성녀시여. 사방이 적들입니다. 이곳에 있으면……." "걱정하지 마세요." 악약은 웃으며 감악의 손을 잡았다. '이, 이것은…….' 감악의 머리 속으로 한 장의 지도가 펼쳐지고 있었다. "길을 기억하시겠지요? 생문(生門)은 그곳뿐이에요. 방금 감 명두 가 들어온 그 길도 닫아 버렸거든요. 감 명두!" 악약은 감악을 불렀다. 악약의 눈동자와 감악의 눈동자가 부딪혔다. 악약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순간, 감악의 눈빛이 꿈길에 선 듯 몽롱해졌다. "잊으세요. 나를 만난 기억을…… 감 명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 악약이 말했다. 감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히 가세요." 악약은 손을 저었다. 감악은 등을 돌렸다. 그가 동굴을 걸어나갔다. 그의 발걸음이 어둠 속에 묻혀 갔다. 악약은 감악을 보낸 후 동굴 한 편에 있던 청수(淸水)를 들고 왔다 . 그녀는 명강량의 옷을 벗겼다. 명강량은 나신(裸身)이 되었다. 상처투성이의 몸이었다. 그 상처는 명강량이 그녀와 교를 위해 몸을 던진 흔적이었다. 악약은 그 상처가 자신의 상처처럼 아팠다. "강량……." 그녀는 눈물을 떨구었다. 그리고 그녀는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된 명 강량의 몸을 청수로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머리도 감겼다. 명강량은 점점 사람의 모습을 찾아갔다. 명강량을 깨끗이 닦고 난 악약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장심을 모았다. 그녀의 손에서 은은한 청광이 피 어올랐다. 그녀는 그 손으로 명강량의 전신을 어루만졌다. 그녀의 손 길이 지나는 곳에 명강량의 끊어졌던 뼈와 혈맥이 이어지고 떨어졌던 근육에 새살이 돋았다. 악약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활생법으로 명강량을 치료했다. "개자식! 이놈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목을 자르기 전에 숨겨 둔 다리가 따로 있는가 볼 것을…… 에잇!" 팽해만은 들고 있던 목을 내동댕이쳤다. 눈을 감지 못한 수급 하나가 떼구르르 굴렀다. 한 눈이 없는 할자 의 목이었다. 호북 명두, 노기준! 감지 못한 그의 눈에 안개비가 흩날렸다. 남궁기도 그 곁에 목 하나를 던졌다. 최후까지 저항하던 추대괄의 목이었다. 그는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적들을 조롱하며 호탕하게 싸운 것이 틀림없었다. "포위를 끝냈습니다." 언상영이 말했다. "이만한 산에 포위는 무슨 포위! 후다닥 올라가서 잡아 버리면 될 것을……." 팽해만은 꽥꽥거렸다. "모산파는?" 단원홍이 물었다. 그는 조금 지친 표정이었다. "잔당이 조금 남은 것으로 압니다. 당예가 남은 놈들을 처리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명강량이란 놈밖에 남지 않았군. 어이, 빨리 일을 끝내 고 뜨끈뜨끈한 곳에서 몸을 좀 녹여야겠다. 종일 비를 맞았더니……. " 팽해만이 말릴 틈도 없이 산으로 뛰어올랐다. 단원홍과 남궁기는 팽해만을 잡지 않았다. 마옹이 회생 불능의 상 처를 입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단원홍이 팽해만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겉으로는 태연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의 마음은 급했다. 이상한 초조감에 시달리고 있었 다. 그가 팽해만을 따라 몇 걸음 걸었을 때였다. "앗!" 언상영이 신음을 터뜨렸다. 단원홍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지 산을 오르던 팽해만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 거리고 있었다. 그는 악을 쓰고 고함을 지르며 헛된 곳에 칼을 휘둘 렀다. "문주, 멈추십시오! 누군가가 기문(奇門)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언상영은 단원홍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누가 오라를 가진 자는 없느냐?"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수하 한 명이 요구수를 건넸다. "남궁기, 팽해만을 낚아채라!" 그가 요구수를 남궁기에게 건넸다. 휙! 남궁기가 요구수를 멋지게 날렸다. 요구수는 정확히 당예의 허 리춤에 걸렸다. "어, 어! 놔! 놓으라고!" 남궁기가 바둥대는 팽해만을 고기를 낚듯 단숨에 밖으로 끌어냈다. "이, 이……." 팽해만은 기문 밖으로 나온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칼을 휘 두르려 했다. "정신 차려라!" 남궁기가 한 소리 한 후에야 팽해만은 정신을 차렸다. "어이, 남궁기, 너도 들어가 봐! 재미있는 것들이 많더라구. 으헤 헤, 예쁜 여자도 있을 걸!" 팽해만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중얼댔다. "파해법(破解法)을 찾을 수 있겠느냐?" 단원홍이 언상영에게 물었다. 다행히 언상영의 진주 언가는 기관과 토목에 관한 한 천하가 알아주는 곳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언상영은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가 질퍽한 땅바닥에 돌멩이로 주위의 지형들을 그리며 무엇인가를 한동안 생각했다. "둔갑법에 상당한 조예를 가진 자입니다. 배교에 이런 자가 있을 줄은……." 언상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파해법을 찾을 수 없단 말인가?" "아닙니다. 팔괘(八卦)에 변화를 첨삭한 듯한데…… 비로 인해 기 문이 더 복잡해 졌을 뿐입니다. 비가 그친다면 반나절 내에 파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가 그치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한 이틀은 씨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상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하의 수재(秀才), 언상영의 골머리를 이틀이나 싸매게 할 기문 이 있단 말인가?" 팽해만이 놀라워했다. "반나절에서 이틀…… 너무 길다. 언상영, 남궁기, 팽해만, 너희들 에게 이곳을 맡기겠다." 단원홍은 검을 뽑았다. "어떻게 하시려고……." 언상영이 묻는 순간 단원홍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기문 속으로 뛰 어들었다.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마음은 점점 조급했다. 주위의 풍물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 으며 어떤 방향도 없고 형체도 없는 태극(太極)의 한가운데에 망망하 게 놓여졌다. 단원홍은 수일로 정신을 집중하며 기를 모았다.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방향은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이 서 있는 몸의 방향은 분명 산 정상 을 향하고 있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돌연 천장절애가 나타났고 돌덩이가 굴렀다. 이수가 포효하고 뇌광 이 번쩍이며 그의 길을 막았다. 거상(巨像)들도 움직였다. 허상이라 생각했지만 단원홍의 심신은 어쩔 수 없이 그 허상에 시 달려야 했다. 그도 팽해만처럼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가 팽해만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단원홍은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주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어떤 허상이든 그의 검이 용서를 않았다. 단원홍은 그렇게 천천히 숲을 헤쳤다. 그의 신형이 검풍의 폭풍우 에 흔들리는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 * * "강량……." 악약은 명강량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명강량은 고른 호흡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강량, 일어나세요." 악약은 명강량의 손을 잡고 힘을 주었다. 명강량이 몸이 움찔 흔들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일체의 감 정을 찾을 수 없는 투명하고 무심한 눈빛이었다. "강량, 일어나세요." 명강량은 부스스 일어나 악약을 마주보고 앉았다. "강량, 나는 이제 우리 성녀 일족의 피내림의 비밀, 천상제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명강량을 바라보는 악약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천상제의 비밀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강렬한 빛이 뻗어 나왔다. 명강량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악약의 눈빛을 따라 점점 짙어졌다. 악약은 눈을 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강량도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그는 악약의 허리를 껴안고 입술 을 맞추었다. 악약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명강량은 악약의 몸을 가린 천들을 하나씩 벗겼다. 부드러운 어깨 선이 드러나고 수밀도(水蜜桃)가 드러났다. 나긋한 세류요(細柳腰)가 드러나고 옥주(玉柱) 같은 허벅지가 드러났다. 악약은 눈을 감았다. 명강량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모피 위에 눕혔다. 악약의 눈까풀이 파르르 떨렸다. 비림(秘林)을 가리던 마지막 천 한 장이 명강량의 손에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명강량은 악약의 곁에 나란히 누웠다. 그가 팔베개를 하며 악약과 밀착했다. 그는 악약을 입맞추며 한 손은 선율을 탔다. 수밀도가 출렁이고 비림이 거친 폭풍에 시달렸다. 명강량은 능숙한 악공(樂工)처럼 악약의 몸을 연주했다. "하, 하……." 악약은 달뜬 신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명강량의 목에 매미처럼 매 달렸다. 그녀의 몸이 촉촉하게 젖어 갔다. 명강량은 서두르지 않았다. 악약이 옥주 속에 감추어 둔 비동을 스 스로 열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는 팔베개를 하고 있던 나 머지 한 손도 자유롭게 푼 후 악약의 전신을 남김없이 누볐다. '하, 아…….' 악약의 호흡은 높은 파고를 탔다. 그녀의 몸은 새로운 여정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요구로 꿈틀댔다. 명강량은 그 요구를 따랐다. 그는 악약의 나긋한 나신 위에 자신의 몸을 실었다. 악약은 아미를 모았다. 하복부에 닿는 이질적인 촉감에 그녀는 두 려움을 느꼈다. 명강량은 부드러운 손길과 입맞춤으로 악약의 두려움을 덜어 주었 다. 그가 악약의 나신 위에서 파랑을 일으켰다. 악약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까지 부드러웠던 명강량의 손길과 입 맞춤은 전부 거짓인 듯했다. 격렬한 통증에 그녀는 몸을 퍼덕였다. "아!" 결국 그녀는 그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터뜨렸다. 하지만 명 강량은 멈추지 않았다. 악약은 명강량이 일으키는 파랑에 견뎌 내기 위해 그의 목을 꽉 껴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밤은 흐르고 하늘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축제는 그칠 줄을 몰랐 다. 새벽이 왔다.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악약은 명강량의 품속에서 천천히 몸을 뺐다. 모피는 가지런했다. 지난밤의 격렬했던 기억은 붉은 꽃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명강량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삼 일 동안의 긴 잠이 될 것이다 . 잠에서 깨어나도 밤의 기억을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녀 는 어젯밤의 일을 명강량의 귀에 대고 살짝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명강량에게 입맞춤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대 신했다. 촤악! 촥! 악약은 한 동이의 물을 전신에 끼얹으며 지난밤의 흔적을 씻었다. 그녀는 몸을 깨끗이 닦은 후 옷을 걸쳤다. 악약은 소매에서 비천쌍마와 화령주를 꺼냈다. 그녀는 비천쌍마는 소매에 소중히 다시 감추고 화령주는 명강량의 머리 위에 놓았다. "강량, 너무 우울해 하지 마세요. 우리는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 예요." 명강량을 바라보는 악약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곧 환 한 미소를 지었다. "안녕히 계셔요. 강량……." 악약은 등을 돌렸다. 그녀는 동굴을 걸어나왔다.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끌며 산을 내려갔다. 단원홍은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었다. 그는 황량한 벌판에 서 있 었다. 끝도 없는 곳이었다. 단원홍은 비로소 자신이 방향을 잃었음을 알아챘다. 언상영 등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을까? 누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지 모를 일 이었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곤함이 그의 온 몸을 짓눌렀다. 몸의 피로보다 마음의 피로가 더 그를 괴롭혔다. 단원홍은 그 피로를 떨치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가 황량하기만 한 벌판을 허허롭게 걸어갈 때였다. "사형……." 지평선(地平線) 저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단원홍은 고개를 들었다. 황량한 벌판은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그를 부른 자도 멀 리 있지 않았다. 숲 한 가운데였다. 그를 부른 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사매……." 단원홍의 목이 잠겼다. 악약은 단원홍을 향해 걸어갔다. "사매, 네가, 네가 이곳에 웬일이냐?" 단원홍은 악약의 돌연한 출현에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 었다. "사형, 그 동안 잘 있었어요?" 악약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단원홍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문득 또 다른 환각일지 모른다 고 생각했다. 악약이 다가와 단원홍의 팔을 잡았다. 촉감이 느껴졌다. 단원홍은 악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분명 환각은 아닌 듯했다. "사형, 나는 사형에게 할 말이 있어요." "무슨 말을……." 악약은 단원홍의 손을 잡았다. 단원홍은 미간을 좁혔다. 악약의 손을 통해 자신의 머리 속으로 그 녀의 날들이 그림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단원홍은 그들의 축제를 보았다. 단원홍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이, 이런…… 이런 일을……." 그가 짐승 같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악약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쥐 었다. "사형, 미안해요." 악약이 담담하게 말했다. 단원홍은 충혈된 눈을 번쩍 들었다. 그가 악약을 집어삼킬 듯 노려 보았다. "사형, 사형은 나를 죽일 것인가요? 나는 아직 죽을 수 없어요. 할 일이 있어요." 단원홍은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을 따름이었다. 악약은 눈빛을 빛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충혈된 단원홍의 눈동자에 담겼다. 단원홍은 뇌전을 맞은 듯 몸을 흠칫 떨었다. 악의에 찬 그의 눈빛 이 조금씩 풀려 갔다. "사형, 이제 연희의 긴 한 장면이 끝났습니다. 기억하세요. 당신이 찾는 마옹은 죽었습니다. 당신의 칼에 의해…… 우리는 이대로 물러 가는 거예요." 악약이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악약이 시선을 거두자 단원홍의 눈빛은 다시 험악하게 되살아났다. "으아!" 그가 가슴속의 광기(狂氣)를 함성으로 터뜨렸다. 모산이 우르르 흔 들렸다. 악약은 단원홍의 손을 끌었다. 단원홍은 악약의 손에 끌려 병자(病 者)처럼 몸을 비틀거리며 산을 내려갔다. * * * 좋은 아침이었다. 명강량은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떴다. 팔을 움직여 보았다. 몸도 가뿐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식했다. 그가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인가?' 잘 꾸며진 작은 동굴이었다. 동굴을 살피던 명강량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요요로운 빛을 발하고 있는 물체, 화령주였다. '이것이 어떻게 여기에?' 명강량은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 밖으로 뛰어나가던 그는 문득 자신이 알몸임을 깨달았다. 그는 급히 옷을 걸쳤다. 햇살이 눈부셨다. '어떻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모산은 눈앞이었다. 그는 급히 모산으로 달려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체도 없었고 병장기도 없었다. 모든 것이 깨끗했다. 모산 파도 마찬가지였다. 폐허가 된 도관뿐……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명강량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화령주가 왜 그곳에 있어 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화령주는 분명 성녀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성녀가 왔다 갔었는가? 분명 안락국에 가기로 했는데…….'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동정호에서도 그랬다. 등 골이 오싹하고 머리칼이 섰다. 그는 쫓기듯 모산을 내려왔다. 성녀를 찾았다. - 성녀께서는 결국 놈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놈들은 성녀 를 화형(火刑)에 처했다고 합니다. 흑흑흑! 명옹……. - 화, 화형을 당하는 것을 본 자는 있다고 하오? -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끌려가는 것은……. 감악이었던가?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명강량은 하늘을 우러렀다. 염천(炎天)이었다. 모든 것이 바짝바짝 타 들어갔다. 초여름이 이렇게 더운데 한여름 은 얼마나 더울 것인가로 사람들은 걱정했다. 명강량은 방문(榜文) 앞에 서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혔던 사교, 배교는…… 선량한 풍속을 지키기 위해 배교의 요녀를 화형에 처하고 수괴, 마옹을 참함으로써…… 살펴 요 사한 생각에 물들지 않도록……." 그는 방문을 띄엄띄엄 읽었다. 머리가 간지러웠다. 그는 머리칼을 긁적이며 씨익 웃었다. 세상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 '성녀는 안락국에 있지.' 그가 터벅터벅 염천을 걸었다. 명강량은 화령주로 안락국의 문을 열었다. 성녀가 반가운 얼굴로 그를 맞아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반겨 주는 얼굴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셨구나.' 명강량은 천천히 안락국을 거닐었다. 성녀가 지내기에 참 좋은 곳이라 생각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명강량은 기다렸다. 그러나 성녀는 결국 오지 않았다. 명강량은 창천이 싫었다. 푸른 하늘은 누군가의 눈빛과 같았다. 기 억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그는 어둠을 찾았다. 깊고 깊은 어둠이었다. 그 어둠의 끝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났다. 목소리로만 남은 자였다. * * * - 어서 오라, 후인이여! 나는 천축 십육천을 무릎 꿇게 하고 중원으로 성스러운 불길을 옮 겼던 자, 타할륜! 천 년 동안 그대를 기다렸다. 우리의 한, 누 천 년을 쌓여 온 우리 교의 한!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가 죽고 형제가 죽고 동료들이 죽고……. 죽고 죽는 일이 어디 그대 세대만의 일이었던가. 나의 아버지도 죽 었고 나의 어머니도 죽었고 나의 누이도 죽었다. 죽음은 줄줄이 이어 졌고 나는 호교신장이 되었어도 그 죽음의 행렬을 막지 못했다. 후인이여, 누 천 년의 한을 풀어 줄 우리의 후인이여! 나는 뒤늦게 알았다. 우리를 지킬 자는 우리뿐임을…… 우리의 세 상을 이룰 자는 바로 우리임을……. 고행으로 설산(雪山)에 올랐노라. 후인이여,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눈물로 얻고자 했던 힘을 얻었노라. 세상 밖의 힘 '금단(禁斷)의 서 (書)…….' 나는 돌아왔다. 천축 십육천을 하나하나 나의 칼에 무릎 꿇게 했다 . 최후에 천축 십육천은 그들의 마지막 힘을 모아 영산의 대회전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찌 나를 이기리…… 나는 영산에서도 십 육천의 깃발을 모두 꺾었다. 배교의 세상을 선언했노라. 그러나 아니 었다. 배교일세의 꿈을 우리들의 어머니, 성녀가 막은 것이다. 영산에 홀연히 나타난 성녀는 말했다. "호교신장이시여, 그대는 무엇을 하려 하는가? 한 시대에 흘린 피 는 다음 시대에 그 배의 피값을 요구한다." "성녀시여, 우리는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을 것이다." "호교신장이시여, 그대는 그대의 힘이 영원하리라 생각하는가? 세 상은 불완전해 보여도 균형 속에 흘러가는 것! 한 시대의 힘 또한 그 다음 시대에 이르면 그 힘에 상응하는 힘이 생긴다. 호교신장이시여 , 그대는 그대가 떠난 후 우리 교에 가해질 세상의 힘을 어떻게 책임 지려 하는가?" "성녀시여, 나는 이제 더 이상 그대의 말을 듣지 않겠다. 비록 그 대의 말이 옳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까지 쌓여 온 우리 한이라도 풀 어야겠다." "우리들의 한! 너무도 마음이 아프구나. 그렇지만 호교신장이시여, 아직은 우리는 우리의 한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하늘이 감응(感 應)해야 한다. 하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천 년 세월의 유예를 부탁한다." "천 년? 너무 길다. 들어줄 수 없다!" "호교신장이시여, 그대는 나의 부탁을 들어주게 될 것이다. 나는 대천밀계를 펼치겠다." 대천밀계! 하늘을 속이고 땅을 속이는 성녀들의 신력……. 성녀는 대천밀계를 펼쳐 천축 십육천의 기억 속에서 나를 없앴다. 우리 교군들에게 무참히 짓밟혔던 기억들도 없앴다. 그리고 천축 십 육천이 흘린 피는 모두 성녀, 당신의 책임으로 천축 십육천의 뇌리에 심어 놓으셨다. 성녀께서는 천축 십육천의 기억에 스스로를 마녀로 자리잡게 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성녀는 천축 십육천의 눈앞에 피 흘리며 쓰러지는 당신 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리들이 짊어져야 할 피값을 그 죽음으로 대 신한 것이다. 천축 십육천은 그것으로 우리들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모두 잊었다 . 아, 아! 후인이여, 성녀는 대천밀계로 당신을 그렇게 보냈고 이제 나는 나의 일을 남겼다. 후인이여, 그대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성녀께서 피로써 부탁한 약속! 그 약속을 도저히 나는 저버릴 수 없었다. 천축을 떠나기로 했다. 성녀의 피가 베인 그곳에 더 이상 머물 수 없었다. 중원에서 천 년의 세월을 기다리기로 했다. 후인이여! 이제 그 긴 기다림의 세월 천 년이 지났는가? 그대는 이미 비동에서 나의 힘, 광정을 얻었을 것이다. 나의 또 다 른 힘 '금단의 서'는 이곳에 있다. 부단히 연공하여 그 힘을 그대의 힘으로 만들라. 세상에도 두 가지 안배를 마련해 두었다. 만인촌을 그대의 교군으로 써라. 대화룡을 그대의 신물로 삼아라. 위대한 우리 배교의 후예여, 이제는 일어날 때가 되었다. 가라! 가서 누 천 년 쌓여 온 교의 한을 씻어라! 누 천 년 쌓여 온 교의 염원을 풀어라! 세상을 불로 휩쓸 우리 교의 신장이여! 명강량은 예정된 자신의 운명을 깨달았다. 광정, 금단의 서, 만인촌, 대화룡……. 그것이 왜 자신에게 주어졌던가. 타할륜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명강량은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정말 사용할 곳이 있었다. 성녀는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성녀가 없다면 세상도 없다. 아직 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사라져야 한다. 사라질 것이다. 누군인가? 세상을 파멸로 이끌 자! 그는 꿈 속에서 몇 번 그를 본 적이 있었다. 전신에 두른 검은 철갑, 허리에 길게 늘어진 칼, 악마상이 새겨진 요대, 붉은 두 눈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검은 자였다. 그 자는 피냄새를 물씬 풍기며 자신의 꿈속을 드나들었었다. 암왕!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영혼을 암왕의 검은 전포로 감싸는 것 도……. - 명강량은 그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그 보다 백 배 더 깊은 어둠 을 심장에 각인했다. -제4권에 계속 암왕 4 ☞ 차 례 ☜ ▶ 제25장 초현(初現) ▶ 제26장 천화원(天花院) ▶ 제27장 구룡선(九龍船) ▶ 제28장 광풍(狂風) ▶ 제29장 마인거(魔人車) ▶ 제30장 만추(晩秋) ▶ 제31장 해후(邂逅) ☞ 일러두기 ☜ * eBook에서는 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 글자가 있으므로 빈 공간이 생 길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25장 초현(初現) "오호호호! 이거 재미있군! 재미있어!" 눈썹이 매처럼 매섭게 올라간 자였다. 그는 허리를 흔들며 키득키 득 웃었다. "재미있는 것은 네놈이다. 돈을 잃고도 좋다고 까부는 놈은 처음이 야." 텁석부리가 지패(紙牌)를 섞으며 말했다. "이 바닥에 구르는 놈치고는 정말 희한한 놈이야. 이제야 마조패를 배웠다니……." 하관이 재빠른 자도 한 마디 거들었다. "히히히, 도박이라면 밥 먹다가도 일어나는 나야. 쌍육은 지치도록 했지. 하지만 마조패는…… 십자, 만자, 색자, 문전, 외어야 할 끗 발이 너무도 많아. 별 수 없이 눌러 앉아 있어야 할 처지가 아니었다 면 나는 평생 가도 마조패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야. 아직 헷갈리는 것도 많다. 무송패가 높은가, 송강패가 높은가?" 눈썹이 매섭게 올라간 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캬하하! 네놈은 원래 석두(石頭)였었구나!" 쥐꼬리 수염은 손뼉을 쳤다. "내 머리가 석두라고? 이럴수가! 나도 모르는 나의 비밀을 네가 알 고 있다니…… 고맙다. 고마워. 가르쳐 주어서. 음, 으히히히! 기억 해 두마!" 매눈썹은 히죽 웃었다. "그만 떠들고 패나 받아!" 텁석부리가 지패를 돌렸다. "나는 잠깐 쉬겠어." 매눈썹은 자신 앞에 떨어진 패를 되돌렸다. "육전 같은 끗발로도 달려들더니 결국 은자를 다 잃은 모양이군. 어쨌든 은자를 보태 주어서 고맙네. 살림에 유용하게 쓰겠어. 다른 놈, 끼여들 놈 없어?" 텁석부리가 소리쳤다. 송충이 눈썹이 판에 끼여들었다. "어이, 내 자리를 잘 지키라고. 금방 돌아오겠다." 매눈썹은 송충이의 어깨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밤에 은자가 나올 때가 있는가? 우리의 귀하신 고객들은 밤길 을 싫어하신다네." 텁석부리가 말했다. "자네들은 헛살았어. 진정한 흑산의 인물이라면 고객을 기다리지 않고 찾아가지. 찾아가기 힘들면 가까운 곳에서 고객을 만드는 게야. " 매눈썹은 히죽 웃으며 방문을 나섰다. "아이고! 이 일도 보통 일은 아니군." 방문을 나선 매눈썹은 허리를 두들겼다. "이곳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하는군. 밖은 좀 조용해졌을까? 조용 해졌겠지. 산을 내려가볼까나." 그는 목과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목채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마조 패로 놀던 찬바람이 들어오는 엉성한 목채와 달리 아담하고 잘 짜여 진 목채였다. 매눈썹은 그 목채의 문을 활짝 열었다. "킁킁킁! 냄새가 좋군. 쾨쾨한 놈들 틈에 한동안 있었더니 별천지( 別天地)의 냄새로다." 캄캄한 목채 안은 여인의 방향(芳香)으로 진했다. "누구냐?" 짜증 섞인 사내의 목소리와 함께 등불이 켜졌다. 침상에는 일남일녀가 누워 있었다. 변발(　髮)을 한 중년인과 십칠팔 여세의 고운 여인이었다. "네놈은…… 네놈은 새로 들어온 마삼(馬三)이란 놈이 아니냐?" 변발 중년인이 인상을 쓰며 소리쳤다. 중년인은 옥문관에서 조금 떨어진 바로 이곳 소호산(小虎山)의 채 주였다. 천산을 오가는 표물을 털어먹고 사는 녹림의 수괴가 바로 그 였다. 이름은 주위(周衛)! 주위는 무척 화가 난 모양이었다. 그는 홧김에 손에 잡히는 대로 잡은 등잔을 매눈썹에게 던지려 했다. 매눈썹은 슬쩍 움직이는가 싶더니 등잔을 든 주위의 손을 잡았다. "채주(寨主)! 채주의 수하들은 너무 하더군요. 그들은 서로 짜고 마조패로 나의 돈을 다 우려먹었소." "미친놈!" 주위는 등잔을 던지려 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아!'하며 비명을 질러야 했다. 매눈썹의 완력은 엄청나 손목이 끊어질 정도였다. 그제야 주위는 매눈썹이 예사로운 자가 아님을 깨달았다. "으, 은자는 저기 있다. 피, 필요한 만큼 마음대로 쓰게." 그가 허둥대며 눈짓으로 보석과 은자가 든 함을 가리켰다. "고맙소." 매눈썹이 쌍수를 번뜩였다. 퍽! 주위의 뇌수가 터지며 침상보를 질퍽하게 적셨다. 여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그녀는 숨만 쾍쾍거렸다. "나는 계집의 비명은 합환의 즐거움으로 내지르는 비명만 좋아한단 말이야." 매눈썹은 우수로 여인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가 닭목을 흔 들 듯 여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여인은 흰눈동자를 드러내며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했다. "시끄럽게 굴지 마라." 매눈썹은 목을 쥔 손을 놓았다. 여인은 겁에 질려 아무 소리 못하 고 고개를 처박았다. "어디 보자." 매눈썹은 함을 뒤졌다. "이거야, 원! 소호산의 살림살이는 엉망이군. 네가 살림을 이만큼 거들 내었느냐?" 매눈썹의 물음에 여인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지." 매눈썹은 값이 나갈 만한 물건들만 주섬주섬 혁랑에 쑤셨다. "너는……." 매눈썹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그가 여인의 몸 을 가린 이불을 치웠다. "아얏!" 여인은 참았던 비명을 질렀다. 매눈썹이 그녀의 가랑이를 짝 벌리고 있었다. "쯔쯔쯔…… 어지간히도 해댔군. 너의 그곳이 불이 났겠구나. 빨리 닦고 옷을 입어라." 그가 여인의 다리를 놓았다.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허겁지겁 옷을 걸쳤다. "가자." 매눈썹은 여인을 끌고 목채를 나섰다. 그는 마조패를 하던 곳으로 향했다. 덜컹! 매눈썹은 마조패로 열중인 방문을 열었다. "어!" "뭐야?" 마조패를 하던 녹림도들은 매눈썹이 끌고 온 여인을 보고 어리둥절 했다. "소호산에서는 여자의 값이 얼마냐? 적당하게 가격을 쳐 다오. 나 는 이번 판에 이 여자를 걸겠다." 매눈썹이 말했다. "미친놈!" "채주가 알면 어쩌려구." 소호산의 비적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걱정은 나중에 하고 패나 돌려라. 그리고 그 자리는 원래 내 자리 였으니 너는 비켜다오." 퍽! 매눈썹이 맹하니 앉아 있던 송충이를 발로 찼다. "으악!" 송충이가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쾅! 그가 문짝에 부딪혀 피를 주르르 쏟으며 쓰러졌다. 소호산 비적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매눈썹의 미친 듯한 행동 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떼 지어 달려들지 않는 곳을 보면 매눈썹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는 느낀 듯했다. 원래 녹림도들이야 눈치가 생명인 자들이니……. "패를 돌리지 않고 뭐 하는 게야?" 매눈썹은 짜증을 냈다. 패를 잡고 있던 자는 쥐꼬리 수염이었다. 쥐꼬리는 손을 덜덜 떨며 황급히 지패를 섞었다. 그가 패를 돌렸다 . 매눈썹은 여인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는 여인으로 하여금 패 를 쥐게 한 후 그의 눈앞에 펴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는 느긋하게 여인의 사타구니 사이와 젖가슴을 희롱했다. "패가 어떠냐? 내가 보기에 저놈은 나에게 너무 심한 패를 돌린 것 같은데……." 매눈썹이 여인에게 물었다. 여인은 매눈썹의 거친 손길에 울상만 지었다. "패…… 패를 다시 도…… 돌리겠소." 매눈썹의 눈이 돌아가자 당황한 쥐꼬리는 마조패를 다시 돌리려 했 다. "나는 돌머리라서 그렇다 치지만 너는 돌머리도 아닌 놈이 패를 왜 이 모양으로 돌리는 게냐?" 매눈썹은 히죽 웃었다. 순간, 매눈썹의 이마가 구부정하게 고개를 숙인 채 패를 거두던 쥐 꼬리의 머리를 향해 날아갔다. 퍽! 쥐꼬리는 몸을 움칠했다. 그가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천천히 뒤로 쓰러졌다. "과연! 네놈의 말이 맞구나. 나는 돌머리야! 돌머리!" 매눈썹은 자신의 이마를 툭툭 쳤다. 일이 이쯤 돌아가자 비적들은 더 이상 그 자리에서 우물거릴 수 없 었다. 그들은 매눈썹의 눈치를 살피며 목채를 조심스럽게 빠져나가려 했다. 매눈썹은 마조패를 들었다. 파팟! 마조패가 날았다. "으악!" "악!" 종이로 된 패가 목채를 나서려던 비적의 등판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 소호산 비적들의 발이 얼은 듯 묶였다. "쯔쯧! 두 장을 버리고 말았구나. 마조패는 사십 장으로 치는 것이 잖아. 서른 여덟 장으로 마조패를 칠 수 있어?" 매눈썹이 텁석부리에게 물었다. 텁석부리는 칠 수 없다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건 어쩌지?" 매눈썹은 마조패를 손바닥 위에 올렸다. "필요 없는 것, 너희들이나 가져라!" 파파팟! 그는 마조패를 뿌렸다. 마조패가 살바람을 일으키며 목채 를 휘저었다. 종이로 된 마조패의 위용은 마조패에 그려진 양산박의 호걸들만큼 위맹했다. "으악!" "악!" "커억!" 소호산의 비적들은 마조패에 눈과 이마, 심장이 꽂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살아남은 비적들은 없었다. "일어나라." 매눈썹은 무릎에 앉은 여인의 엉덩이를 툭 쳤다. 혼이 반쯤 나간 여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피는 질퍽하게 목채 를 적시고 피비린내는 코를 찔렀다. "별로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군. 나는 심약해서 이런 장면은 잘 보 지 못해. 서둘러 밖에 나가야겠다. 저놈들 수중에 있는 은자들은 네 가 챙기라고. 알겠지! 그리고 만약 저놈들 몸에서 행여 남은 은 부스 러기가 나온다면…… 나는 너를 동료나 속이며 횡령을 일삼는 의리 없는 자로 알 거야." 매눈썹은 여인의 볼을 톡톡 두들기며 목채를 나섰다. 여인은 쫓기 듯 시신들의 몸을 뒤졌다. "너는 이곳의 계집이 아니구나. 이곳의 계집들은 새로운 남자에 대 해 단 두 가지의 태도만 취하지. 주먹을 들고 달려들던가 아니면 엉 덩이를 흔들며 달려들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통나무처럼 뻣뻣이 남자를 대하는 경우는 없지. 정말 가르쳐 줄 게 많은 계집이야." 매눈썹은 바지를 올리며 쓴맛을 다셨다. 여인의 몸은 매눈썹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깨물린 자국과 화인(火 印) 투성이었다. 그녀도 지친 얼굴로 옷을 찾았다. 매눈썹의 성급한 손길에 찢겨질 대로 찢긴 옷은 걸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중원의 이름 있는 집안의 요조숙녀랍니다. 어쩌다가 운 이 나빠 이 꼴이 되었지요. 그러니 제발 저를 싼 여자로 취급하지 말 아주세요라고 말하고 싶겠지. 헤헹, 웃기는 생각을 하고 있군. 예전 이야 어쨌든 지금 네 처지는 네가 입고 있는 그 옷과 같다. 그러니 빨리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라. 그렇지 않으면 이 험한 곳을 버티기 힘들 걸." 매눈썹은 들고 있던 칼로 여인의 이마를 툭 쳤다. 넓이가 세 치나 되어 보이는 칼이었다. 처지가 입고 있는 옷과 같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여인의 눈빛 은 자포자기로 더욱 짙어졌다. "네가 믿을지 모르겠다만…… 나도 예전에는 제법 잘 나가는 집안 의 귀한 아들이었어. 우리 아버지는 황하에서 가장 큰 표국을 했다니 깐! 어, 믿지 못하겠어?" 여인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매눈썹은 괜히 여인에게 시비를 걸 었다. "믿어! 믿으라고." 매눈썹은 광도로 여인의 머리를 목탁처럼 두들기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아버지는 쫄딱 망했다. 개망나니 같은 자식 하 나가 있었기 때문이야. 주색잡기(酒色雜技)에 사람 죽이기까지 좋아 하는 놈이었어. 형제 중에 누가 그런 개잡종이었냐고? 물론 척 보면 알았을 게다. 바로 나였지. 내가 아버지의 귀한 아들임이 알려지고 나서 우리 아버지는 쫄딱 망해 버리고 만 게야." 매눈썹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울화로 죽고 어머니는 몸져누웠다고 한다. 형님들은 알 거지가 되어 떠돌고…… 개망종의 형제들이라고 거지 소굴인 개방에 서도 받아 주지 않는 모양이야. 어디서 굶어 죽지는 않았는지…… 아 이고! 나는 정말 죽일 놈이야! 죽일 놈!" 그는 통한에 가슴을 치는 듯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조금 억울하다. 모든 잘못이 내 탓만은 아니거 든…… 죽일 놈의 할아비가 있었다. 나를 개망종으로 만든……." 그가 한광을 빛냈다. "무공을 가르쳐 주긴 왜 가르쳐 줘! 그저 그런 무공만 익혔다면 그 저 그런 잡놈들과 그저 그렇게 어울리며 아버지, 어머니 속만 태우고 말았을 텐데. 사람 죽이는 데 도통한 무공을 가르쳐 주어 간도 커졌 잖아. 그리고 그 무공도 이왕 가르쳐 주려고 했으면 끝까지 가르쳐 주던가. 중도에서 죽긴 왜 죽어! 히히히, 물론 그 영감의 시신을 보 았을 때는 꿈인가 싶을 정도로 좋았긴 좋았지만." 매눈썹은 히죽 웃었다. "어쨌든 어영부영 무공을 익혔기 때문에 나는 매양 쫓기는 신세가 된 거야. 황량한 이곳까지…… 참 더러운 팔자지. 그러니까 너는 동 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나를 이해해야 해." 그가 여인을 끌어안으며 다정한 척했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부부(夫婦)인 척 하면 나를 쫓는 놈들의 눈 을 속이기 싶겠지. 객고를 풀기 위해 이 담, 저 담 궁상스럽게 엿볼 필요도 없고. 뿐이냐. 서역에는 이상한 놈들도 많다고 하더라고. 금 은(金銀)을 우습게 여기는 곳도 있데. 하지만 어디 가도 여자를 우습 게 여기는 곳은 없지. 나를 위한 든든한 재산도 되어 주어야겠다." 매눈썹은 징그럽게 웃으며 여인의 입술을 핥았다. "합밀(哈密)로 갈까, 돈황(敦煌)으로 갈까?" 매눈썹은 안서(安西)에서 화전(和田)으로 갈 것인가 토로번(吐魯番 )으로 갈 것인가로 망설였다. "가까운 곳으로 가지." 그는 토로번으로 방향을 잡았다. "빨리 걷지 못해!" 그가 고함을 질렀다. 여인은 걷기도 힘든 듯했다. 심한 기온차(氣溫差), 다른 풍토(風土 )에 처음 하는 긴 여행, 밤에도 시달려야 했다. 때문에 여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병색은 얼굴에도 완연히 나타났다. "젠장, 제값을 받기는 이미 힘들겠군. 합밀에서 팔아 넘겨 버려야 겠다. 빨리 걸어! 나는 뭐든 짐이 되는 물건은 없애 버리는 성격이란 말이야!" 매눈썹이 흉광을 번뜩였다. 여인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발걸음을 뗐다. 그들은 황사풍(黃砂風)을 맞으며 합밀을 향했다. "지금쯤 중원에는 홍엽(紅葉)이 물들고 있겠지. 재작년 이맘때는 참 좋았었는데…… 악양에서 열 명의 계집을 붙들고 매일 밤을 지샜 지. 아, 아! 지금은 이 무슨 꼴인가?" 매눈썹을 한숨을 쉬었다. 그가 지난날의 즐거움을 회상하며 반 시 진 가량 걸어갔을 때였다. 매눈썹은 문득 전신이 미치도록 가려웠다. 모래알이 온몸을 자글자 글 굴러다니는 듯했다. 며칠을 사풍(砂風)에 시달렸으니 모래알이 굴 러다닐만 했다. 안서에는 녹주(綠州:오아시스)가 많다. 매눈썹은 적당한 곳에서 몸 을 씻고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녹주를 찾았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첨벙첨벙 하는 물소리 가 들렸다. 이미 귀가 물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몸을 씻고 싶다는 생 각이 든지 몰랐다. 매눈썹은 물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복류로 솟아난 물이 파랗게 고여 있는 작은 호수였다. 매눈썹은 눈빛을 빛냈다. 호수에는 작은계집 하나가 앉아 있었다. 첨벙거리던 물소리는 그 계집이 손과 발로 물장난을 치고 있었기 때 문에 난 소리였다. "호오!" 매눈썹은 탄성을 터뜨렸다. 계집의 몸뚱이는 작았으나 허리는 세류 요였고 엉덩이는 터질 듯이 팽팽했다. 어제 데리고 다니던 계집으로 신나게 객고를 풀었는데도 견딜 수 없는 색욕(色慾)을 느꼈다. "어디, 어디 얼굴도 그만한가 볼까." 매눈썹은 작은계집에게 다가갔다. 그가 계집 옆에 쪼그리고 앉으며 얼굴을 힐끗 보았다. 작은 얼굴에 또렷또렷한 이목구비, 한 입에 삼켜도 비린내 하나 나 지 않을 계집이었다. 얼굴은 아이 같았으나 젖가슴은 터질 듯이 풍만 했고 피부도 까무잡잡해 매눈썹은 한눈에 오금을 저려야 했다. '이런 곳에 이런 계집이 있다니…….' 매눈썹은 뜻밖의 횡재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계집은 누가 오든 말든 물장난만 열심히 치고 있었다. 매눈썹도 계집처럼 소매와 바지를 걷고 물을 첨벙였다. "귀여운 소저, 그대는 무슨 일로 혼자 이곳에 왔는가?" 그가 수작을 붙였다. "화가 나서 이리저리 다니다 보니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요." 작은계집이 종달새처럼 말했다. 억양이 조금 이상한 한어(漢語)였 다. 까무잡잡한 얼굴에서 혹시 이족의 여인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족의 여인이 맞는 듯했다. 하지만 이족이라도 이곳 강족의 여인은 아 니 것 같았다. "누가 이렇게 귀여운 소저를 화나게 했나?" 매눈썹은 은근슬쩍 계집에게 몸을 붙였다. "여자를 화나게 하는 물건은 남자밖에 없어요. 우리 남편!" 계집이 첨벙 물을 튀겼다. "잉? 벌써 남편이 있는 몸이라고?" 매눈썹은 자신의 얼굴까지 튀어오른 물을 훔치며 놀라워했다. "혼인을 한지 벌써 삼 년인 걸요." "아하! 그럼 소저가 아니라 부인(婦人)으로 불러야겠군." 매눈썹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따운 부인, 그대의 남편은 왜 그대를 화나게 했을까? 내 마누 라가 부인 같이 예뻤다면 매일 업어 주어도 모자랐을 텐데. 어이, 너 는 저리 꺼져!" 그가 소호산에서 끌고 왔던 여인에게 꽥 고함을 질렀다. 여인은 지친 표정으로 호반 주위의 나무 그늘에 몸을 풀었다. "나는 저 멀리서 시집을 왔어요. 신랑에 대해 들은 것은 이름뿐이 었다고요. 친영(親迎)을 올 때 처음 얼굴을 보았지 뭐예요. 계집 같 은 얼굴에 계집 같은 행동…… 나이도 서른이 훨씬 넘었어요." "아이고! 부인의 부모는 남편이란 작자의 재물이 탐나 부인을 놈에 게 넘겼겠구려." 매눈썹은 짐짓 애석해 하는 척했다. "맞았어요! 우리 아버지는 신랑의 명성을 탐내 나를 시집 보내고 만 거예요. 그렇게 신랑을 따라 중원으로 왔어요. 많이 울었지만 그 래도 처음에는 신랑이 잘 대해 주어 그런 대로 참을만 했어요. 신랑 은 손재주가 좋아요. 노리개도 많이 만들어 주었어요." "이후에 변했구려. 원래 남자들은 다 그렇소. 처음에는 누구나 다 잘해 주지. 나도 처음에는 저기 저 계집을 잘해…… 잘해 주려고 무 척 노력은 했소." "일 년이 지나자 살이 찌기 시작했어요. 돼지처럼…… 나중에는 배 가 하돈(河豚:복어)처럼 부풀어 잠자리도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었어 요. 내 얼굴이나 가슴 보다 등과 엉덩이를 바라보기를 더 좋아하는 거예요. 나는 누가 등 뒤에 서 있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데 말이에요. " "아하! 부인의 불만은 바로 그것이었구려!" 매눈썹은 손뼉을 쳤다. "하지만, 하지만…… 음, 그래도 전혀 재미는 없지 않았기에 참기 로 했죠. 그리고 아이도 낳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한두 해가 지나자 신랑은 그 짓도 하지 않는 거예요. 나는 무척 화가 났어요." "저런! 우라질 놈을 보았나! 이런 아리따운 부인을 눈물로 밤을 새 게 하다니!" 매눈썹은 고함을 질렀다. "무슨 일이 그렇게 바쁜지 모르겠어요. 나는 생각했죠. 네가 그렇 게 바쁘면 나도 바쁘다. 남만의 여인들은 중원의 여인들과 달라 가만 히 있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흐흠, 남만의 계집이었군. 가만 있자. 남만의 계집은 처음 식(食) 하는 것 같은데…….' 매눈썹은 손은 더 이상 점잖은 체를 못했다. 그의 손이 계집의 말 랑한 엉덩이를 더듬었다. 하지만 계집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자신의 말만 이어갔다. "나의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어요. 다행히 나도 조금 재주는 있 거든요. 친가(親家)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재주도 있고 시집와서 신랑 에게 배운 재주도 있고. ……음, 그런데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계집이 눈을 똑바로 뜨고 매눈썹을 바라보았다. "흐흐흐, 보고도 모르느냐?" 매눈썹은 계집의 말랑한 살을 움켜쥐며 본색을 드러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니에요? 나는 당신과 좀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계집은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주마. 우선 급한 불부터 끄고." 매눈썹은 작은계집을 쓰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작은계집은 무슨 수 를 썼는지 그의 손에서 쪼르르 빠져나갔다. "너무 서두르고 있다니깐! 당신이 서두른 덕분에 나는 백화정분(百 花精粉)까지 사용하고 말았잖아요." "뭐? 백화정분!" 매눈썹은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살폈다. 하얀 꽃가루 같은 것이 주 위를 휘휘 날고 있었다. 계집이 몸을 뺄 때 이상한 분향(粉香) 같은 것이 났는데 그것인 모양이었다. "계집아, 어디서 그런 이상한 물건의 이름을 주워들었느냐? 이리 오너라." 매눈썹은 흰 가루를 대수롭지 않은 듯 손을 저으며 작은계집에게 다가갔다. "나를 믿지 못하는군요. 누구에게 이름을 주워들었을까요? 누구긴 누구예요. 우리 아버지지. 우리 아버지는 남만 독문(毒門)의 문주(門 主)라고요. 당신이 첨벙이던 그 물에는 견혼수(牽魂水)를 조금 섞었 어요. 공력만 약간 상할 정도로……." "겨, 견혼수?" 매눈썹은 장난이 아님을 깨달았는지 급히 자신의 쌍수를 살폈다. 손은 벌써 푸른빛으로 변색되고 있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옷에는 화기소골산(化肌消骨散)이 묻혀져 있었 어요. 물장난만 쳤으면 좋았을 텐데 엉덩이는 왜 만져요? 그래서 내 가 말했잖아요. 서두르지 말라고. 이제 당신은 큰일났어요. 견혼수에 화기소골산, 나를 안으려 하는 바람에 백화정분까지 쏘였으니 아무 리 당신이 좋아도 나는 당신을 살려줄 수 없게 되었어요. 불쌍한 마 충현!" 작은계집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려 했다. 매눈썹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 계집의 이름에서 튀어나온 이름, 마충현! 원래 그의 출신은 제법 명문으로 알려진 교방타의 소방주였다고 한 다. 그러나 전, 전대의 악인, 무외도로부터 무공을 전수 받은 후 살 인귀(殺人鬼)에 색마(色魔)로 변신 강호에 흉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교타방은 강호인들의 지탄 속에 폐가가 되었고 마충현은 공적(公敵)으로 몰려 추살령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쫓기는 중에서 도 마충현의 악행은 계속되었다. 수백 명의 부녀자들이 겁간(劫姦)을 당해야 했고 수백 명의 죄 없는 자들이 놈의 만할도에 목숨을 잃어 야 했다. 마충현의 악행이 멈춰진 것은 일 여년 전, 개봉에서 정파 무림인들의 기습에 걸려 혼쭐이 난 후부터다. 그 이후로는 종적이 묘 연했다. 그런데 안서의 작은 녹주에서 작은계집은 마충현의 이름을 들먹이 고 있었다. "너, 너는 누구냐?" 매눈썹은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리며 물었다. 마충현! 숨겨 둔 그의 이름이 분명했다. "나는 천독미호(千毒美狐), 요연(療燕)이라고 해요. 아직 잘 기억 하지는 못할 거예요. 말했잖아요. 이제 나도 나의 일을 시작했다고. 나의 꿈은 남편 보다 더 큰 명성을 얻는 거예요. 두고 보세요. 조만 간 강호인들은 남편인 천독미랑보다 천독미호를 더 기억하게 될 거예 요. 마충현, 고마워요. 당신의 협조로 나는 한 발 쉽게 나의 미명을 강호에 알릴 수 있게 되었으니.……." 작은계집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요사스럽게 웃었다. '남편이 천독미랑? 그럼 저 계집은 사패 중 하나인 맹호전, 당예의 …….' 마충현은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문득 그는 당예가 늦장 가를 갔으면 변황까지 세를 확대시킬 목적으로 독문 문주의 딸을 아 내로 맞아들였다는 강호의 소문을 기억해 냈다. 백화정분, 견혼수, 화기소골산…… 그 또한 독문과 사천 당가의 독 이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눈앞의 작은계집이 사패의 하나인 맹호전의 안주인이라는 것을……. 마충현은 미색에 홀려 눈치 없이 깝죽댄 자신에게 울화가 치밀었다 . 그러나 화를 내기 전에 독부터 치료해야 했다. 벌써 전신이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이상한 감촉으로 스물거렸다. 독이 전신을 지배하기 전에 빨리 움직여야 했다. "해독약(解毒藥)을 내놓아라!" 마충현은 외조부 무외도로부터 물려받은 광도, 만할도를 빼 들었다 . "어머! 무서워요. 나는 독은 조금 다룰 줄 알아도 싸움은 잘 못해 요. 대신 싸워 줄 사람들을 부르겠어요." 천독미호 요연은 호들갑을 떨며 신형을 뺐다. 당문은 암기와 독 못 지 않게 신법도 일절로 통한다. 요연이 비영표(飛影漂)를 펼치자 마충현은 허둥댔다. 역시 이럴 때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은 왜 할아버지, 무외도의 무공을 죽자고 익히 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 마충현은 독기로 침침해지는 눈을 크게 떴다. 녹주의 좌우에서 몇몇의 자들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 포에 비호를 그린 일곱 명의 황의인(黃衣人)과 짧은 옷에 짧은 칼을 든 다섯 명의 무사들이었다. '아, 아!' 마충현은 절망했다. 이제껏 잘도 도망 다녔는데 이번에는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없을 듯했다. 황의인들은 맹호전의 금호령(金虎令)들이었다. 당예가 수족으로 부 리는 자들……. 짧은 옷에 짧은 칼을 든 자들은 마충현에게 더 나쁜 자들이었다. 천산오응(天山五鷹)! 천산파(天山派)의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간간이 중원에 알리고 있는 자들이 그들이었다. 마충현은 선택을 해야 했다. 요연이라는 계집에게 끌려가 맹호전에 서 온갖 수모를 당한 후 죽느냐, 이 자리에서 자결로 깨끗하게 죽느 냐. 누가 보아도 후자의 선택이 백 배는 나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목 숨에 대한 사람의 애착이 어디 그런가. 마충현도 후자가 백 배 나음을 알면서도 쉽게 자신의 목에 만할도 를 들이밀지 못하고 망설였다. 소호산에서 끌려온 여인은 나무 그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매눈 썹이 쩔쩔매는 꼴이 보였다. 작자가 자신에게 한 일을 생각하면 통쾌 해야 옳았다. 그러나 여인은 어떤 감정도 일지 않았다. 타인의 입장 을 헤아릴 여유는 그녀에게 없었다. 매눈썹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찢겨질 대로 찢겨진 자신의 마음을 기울 수 없을 듯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녀는 물었다. 그러나 아무런 답도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눈빛은 다시 공 허함으로 비워져 갔다. 반짝하는 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소호산의 여인은 무심결에 시선을 그곳으로 던졌다. 백양나무 가지와 물풀로 무성한 곳이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 를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한 사내가 있었다. 몇 십년을 입었을 듯한 금의를 입은 자였다. 하 지만 귀한 금의라 애지중지 입었는지 차림은 말쑥했다. 사내는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빛은 사내의 손에서 뻗어 나오고 있었다. 쇳조각으로 무엇을 다듬는 듯했다. 쨍! 쨍! 쨍!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개 같은 년!' '죽어라! 흉적!' 하는 악에 받친 소리도 들렸다. 소호산의 여인은 그런 장면에는 별반 놀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얼 굴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무 생각 없이 사내를 바라보고만 있 었다. 편안했다. 반짝반짝 하는 빛이 너무도 규칙적이라 단조로움 속 에 그녀는 잠이 올 듯했다. 몸도 나른했다. 몽롱하게 풀어져 가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사내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수 마 속에 몸을 맡겼다. "으아악!" 마충현은 미친 듯이 몸을 바동거렸다. 전신이 근질거려 미칠 지경 이었다. 선택을 잘했어야 했는데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에 연연하다 험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이 더러운 잡부(雜婦)! 빨리 나를 죽여라!" "당신 같이 멋진 사람을 왜 죽여요. 죽일 마음이 있었다면 견혼수 를 좀더 풀던가, 화기소골산으로 더 진한 화장을 했을 거예요. 나와 같이 맹호전으로 가요. 당신을 위해 좋은 침상을 준비해 놓았어요. 칠성판(七星板)! 깔깔깔깔!" 요연은 허리를 붙잡고 웃었다. "아, 아! 제발, 제발 나를 죽여주시오. 죽이기 싫다면 마혈이나 짚 어 주던가." 마충현은 이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독에 중독된 곳은 요연이 혈도를 찔러 더 이상 독기가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독이 침투 한 곳은 살이 가려워 견딜 수 없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도 긁을 수 있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연은 수족도 꼼짝 못하게 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기에 누가 나쁜 짓을 하래요. 당신이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길 사람은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인과응보(因果應報)라 생 각하셔요." 요연은 모른 척했다. 그녀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천산오응 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희들의 일에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머리를 숙였다. "아니오. 어찌 이 일이 맹호전만의 일이겠소. 감사해야 할 자는 오 히려 우리입니다. 중원은 사패의 등극으로 평화를 누리고 있을지 모 르지만 우리는 골치가 아픕니다. 이놈처럼 사패를 피해 새외로 빠져 나오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니……. 그런 차에 맹호전에서 이곳까지 사람을 보내 사파 척결의 의지를 보이시니……. 특히 부인께서 오실 줄은 저희들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천산오응의 첫째가 되려 감사의 말을 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아! 전주께서 장문인을 한 번 뵈 었으면 하던데……." "전주께서 장문인을? 무슨 일로……." 첫째는 부지간에 미간을 좁혔다. 그는 사패의 야심(野心)을 떠올리 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더욱 단단히 하기 위해 새외로, 새외로 세력을 진출시키고 있었다. 맹호전의 세력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천산파로서는 그 일만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안주인 도 안서까지 와 있었다. "다른 일은 아니고 역시 새외로 도주한 자들을 처리하는 문제입니 다. 추살대(追殺隊)를 같이 꾸렸으면 했어요. 맹호전이 놈들을 처치 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다고 하나 지리를 전혀 모르니……." "그 일이었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장문인께서도 마다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첫째는 가슴을 쓸었다. "그럼 조심해 가십시오." "안녕히 가셔요." 천산오응과 요연은 포권으로 인사한 후 등을 돌렸다. 그때였다. 천산오응은 흠칫 발걸음을 멈추었다. 낡고 낡은 금의를 입은 자였다. 눈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무 심했고 안색은 창백했다. 오른 팔목에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비 구를 차고 있었다. 언제 가까이 온 줄도 몰랐다. "누구냐?" 셋째가 물었다. 순간, 붉은 장영이 그들의 눈앞을 번뜩이며 둔중한 울림이 귀를 때 렸다. 피와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셋째!" "사형!" 천산오응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고함에 대답해야 할 셋째는 없었다. 있다면 후두둑 쏟아지고 있는 핏줄기와 육편뿐! 천산오응은 반쯤 혼이 나간 상태에서 각자의 칼을 잡았다. 그들이 칼을 뽑아들 때 붉은 장영은 뇌전처럼 그들의 코앞을 다가서고 있었 다. 퍽! 퍽! 퍼퍽! 퍽! 육타음이 연이어 둔중하게 울리며 혈우가 쏟아지고 육편은 우박처 럼 떨어졌다. 요연이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본 장면이었다. 방금까 지 이야기를 나누던 천산오응은 없었다. 질퍽한 피, 조각난 살점들… …. 철담(鐵膽)을 자랑하던 요연도 이런 끔직한 장면 앞에서는 자신이 여자임을 깨달은 듯했다. 그녀는 해쓱한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 다. 먼저 움직인 자들은 금호령이었다. 강호의 패주, 사패의 하나인 맹 호전의 충복(忠僕)들 답게 그들은 일제히 칼을 세우고 요연을 호위했 다. 낡은 금의를 걸친 사내가 발을 내딛었다. 신형이 흐릿해진다 싶더 니 그는 금호령을 지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금호령은 반사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칼은 철벽(鐵 壁)에 부딪힌 듯 사내의 근처를 뚫지 못했다. 쩌쩡! 쨍! 창그랑! 칼이 얼음처럼 조각나 떨어졌다. 그 때까지 표정 없던 금호령의 눈 빛이 공포로 물들었다. 붉은 장영이 번뜩였다. 퍼퍽! 퍽! 퍽! 퍽! 육타음이 들릴 때마다 요연은 오줌을 찔끔거렸다. 혈우가 그녀를 덮고 육편이 그녀의 옷을 더럽혔다. 금호령도 가볍게 처치하고 난 사내는 요연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 떨고 있던 요연은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고의(袴衣:속옷)는 오줌 에 젖어 질퍽했다. "악마(惡魔)!" 그녀는 울며 고함을 질렀다. 피핑! 핑! 그녀의 소매에서 백호정(白虎釘)이 날고 학익침, 유령전 (幽靈錢), 추혼전(追魂箭), 준자표(俊子　)가 날았다. 화기소골산, 백화정분, 단장색혈지독(斷腸索血之毒), 백보쇄혼독(百步碎魂毒), 염 백음분(炎魄陰粉)……. 까맣게 쏟아지는 암기, 독분과 독무 속에 상대가 죽었는지 살았는 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여러 독을 한꺼번에 쓸 경우 독이 상응을 해 시전자도 해독하지 못하는 독성이 생긴다는 것을 기억하지도 못했다 .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요연은 독문의 문주인 아버지가 지참금(持參金)과 함께 소중히 넣 어 준 혈갈마시독(血蝎魔屍毒)까지 뿌렸다. 신랑인 당예가 위급할 때 쓰라고 한 진천뢰(震天雷)도 던졌다. 쾅! 화염과 함께 사풍이 몰아쳤다. 짙은 연무가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렸다. 요연은 눈물을 닦았다.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아나지 못할 걸!" 그녀는 억지로 한 소리 고함을 질렀다. 간절한 바램이었다. 그러나 바램은 바램일 뿐이었다. 연무 속에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바로 그 자였다. 상처 하 나 없었다. 옷깃도 말짱했다. 요연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다시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렀다. 사내가 다가섰다. "엉! 엉! 엉! 엉엉엉엉!" 요연은 목을 놓았다. 달아날 생각도 못했다. 사내의 우수가 천천히 움직였다. 요연의 눈동자는 사내의 손끝을 따라가며 눈물을 쏟았다. "엉! 엉! 엉!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그녀는 용기를 내어 애원했다. 살아오면서 가장 큰 용기였다. 말을 붙이기도 힘든 자였다. 악마가 있다고 해도 눈앞의 자보다는 순할 듯했다. 요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사내의 눈빛은 무심함으로 더욱 깊어졌 다. "당예는…… 어디…… 있느냐?" 그가 물었다. 천장절애에 몇 백번 부딪혀 되돌아오는 메아리 같은 목소리였다. "집에, 집에 있어요." 요연은 엉겁결에 말했다. 사내는 가만히 있었다. 요연은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맹호전! 민산(岷山)에 가면……." 그녀는 자신의 말을 끝내지 못했다. 그녀의 눈빛은 묻고 있었다. 나 같이 어리고 귀여운 여자를 꼭 죽여야 했느냐. 사내의 손은 요연의 가슴에 깊숙히 박혀 있었다. 요연은 눈까풀을 파르르 떨었다. 사내가 손을 뺐다. 피분수가 치솟았다. 핏줄기는 사내의 근처에 닿 자 퉁겨 요연의 몸으로 되돌아갔다. "아, 아……." 요연은 애처로운 비명을 토해 냈다. 그녀가 핏물 속에 서서히 쓰러 졌다. 간지럽지 않았다. 방금까지 살을 도려내도 시원치 않을 정도로 간 지럽더니……. '이런 일이 있나.' 마충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유야 간단했다. 호랑이에게 생살을 씹히는 사슴은 무척 아플 듯해도 아픔을 못 느낀다. 공포가 모든 것 을 잊게 하기 때문이다. 마충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공포에 질려 간지러움도 깨끗이 잊고 있었다. '저자는 나를 죽일 것이다.' 살기가 심장을 찔렀다. 마충현은 요연이란 계집처럼 떨지 않으려고 무척 노력했다. 어찌 계집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요연보다 더 떨고 있었다. 그 토록 죽기를 바랬으니 그를 향해 점점 다가오는 사내에게 고마워해야 할 터인데……. "으, 으……." 신음은 절로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내는 손을 들었다. '끝장이다.' 마충현은 자신의 주검이 어떤 형태가 될 것인가를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충현은 눈을 번쩍 떴다. 눈에 익은 자였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얼굴 이었다. 왜냐하면 눈앞의 공포 마왕(魔王)은 자신이 이 꼴이 된 데 적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할 자였기 때문이다. 십 여년 전, 분하에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이정인의 제자는 저렇게 컸다. 그런데 네놈은 지금 무슨 꼴이냐!' 노기충천한 할아버지는 그 한 마디를 던지고 지옥 같은 훈련을 시 켰었다. 그래서 마충현은 장문천이라는 화산파의 애송이와 함께 눈앞 의 마왕에 대해서도 매일 밤 이를 갈았었다. 그러니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마왕은 손을 들었다. 붉은 장영이 어른거렸다. "마… 마옹!" 마충현은 황급히 소리쳤다. 마왕의 무심하던 눈빛이 짧은 순간 이채로 번뜩였다. 그러나 그는 이내 장영을 뿌리려 했다. "나, 나는 당신의 카, 칼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있소!" 마충현은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는 마충현 자신도 몰랐다. 삶에 대한 애착이 자신의 모든 기억들을 낱낱 이 떠오르게 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마왕은 장영을 거두었다. "그, 금검이 아니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자였소. 그도 쫓기고 있 었고 나도 쫓기고 있었소. 분명 그 자가 든 칼은 당신의 칼이 맞았소 !" 마충현은 한 발이라도 늦을 새라 두서없는 고함을 질렀다. "삼 년전, 이수(伊水)에서, 이수에서 보았소!" 그는 요연처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대신 땀구멍을 통해 그녀 보다 많은 물을 쏟고 있었다. 마왕은 무엇인가 생각하는 듯했다. 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차가운 그의 손이 마충현의 팔에 닿았다. "으악! 악! 살려주시오! 아, 아……." 마충현은 바동거렸다. 그도 결국 요연처럼 바지를 지리고 눈물, 콧 물을 쏟았다. "아, 아……." 그의 비명이 처량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불덩이가 그의 내부를 광란으로 돌아다녔다. "나, 나를, 빠, 빨리, 주, 죽여주시오!" 마충현은 눈물로 애원했다. 내부로부터 뼈와 살이 탔다. 분근착골 의 고통도 이 보다는 심하지 않을 듯 싶었다. "죽어라! 마왕!" 나중에는 너무 고통스러워 팔, 다리로 마왕을 가격했다. 그러나 보 이지 않는 두터운 벽은 자신의 팔, 다리가 마왕의 근처에 이르는 것 을 불허했다. 이야기로만 전해 오는 호신강기(護身　氣)를 익힌 모양 이었다. "으히히, 으히히히……." 고통이 너무 심해 마충현은 미친 자가 되어 갔다. 마왕이 조금 더 화기(火氣)를 쏟았다면 마충현은 정말 미치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마왕은 마충현에게서 떨어졌다. 마충현은 땀과 눈물, 콧물로 범벅인 된 얼굴로 마왕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살아 있고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불행한 일로 느껴졌다. "찾아라, 십 개월…… 북망산(北邙山)에서 기다리겠다." 마왕이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마충현의 혈도를 몇 곳 눌렀다. "으악! 악! 쾌액!" 마충현은 다시 떼굴떼굴 굴렀다. 이번에는 더 고통스러웠다. "달아나 생각은 하지 마라. 만약 달아난다면…… 십 개월 후, 그 꼴로 죽을 것이다." "아, 아…… 제발! 달아나지 않겠소." 마충현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대가가 이토록 험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라 굳게 마음을 먹은 순간 고통은 뚝 그쳤다. 마충현은 질린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없었다. 공포의 마왕, 공 포의 대왕(大王)은 사라지고 없었다. 마충현은 벌떡 일어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무조건 달렸다. 서너 시진을 달린 후에야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왕은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 '살았다. 나는 살았어.'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웬일로 어머니의 얼굴도 떠올랐 다. 그러나 마충현의 얼굴은 이내 해쓱해졌다. '십 개월 후, 북망산! 달아나면 그 꼴로 죽을 것이라고? 아이고! 찾아야 해! 금검을 든 그놈을…….' 마충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십 개월이면 금검을 찾기에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그는 황급히 온 길을 되돌아갔다. 후닥닥 달려가던 마충현은 무슨 생각인지 몇 걸음도 못 가 우뚝 발 걸음을 멈추었다. "십 개월, 너무 길다. 그 전에 나는 그 계집이 뿌린 독으로 죽고 말 것이야." 그가 처량한 표정으로 독에 중독된 자신의 쌍수를 들었다. "응?" 마충현은 놀라 자신의 눈을 비볐다. 독기에 쏘여 푸르스름하 게 변색되어 있던 자신의 손은 원래의 색으로 깨끗했다. 다른 곳도 황급히 살폈다. 독에 중독 된 흔적은 다른 곳에도 없었다. "아하!" 마충현은 이마를 쳤다. 내부로 밀려들던 그 뜨거운 기운! 마왕은 삼매진화(三昧眞火) 비슷한 것으로 자신의 독기를 몰아 내준 모양이 었다. 생각하니 자신은 요연에게 혈도가 제압 당해 꼼짝 조차 못하는 신 세였다. 마왕이 혈도도 풀어 주고 독기도 몰아내어 주었음이 틀림없 었다. 고맙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금검을 찾아야 해!' 마충현은 충견(忠犬)처럼 한 가지 명만 기억했고 그 명을 지키기 위해 발길을 서둘렀다. 금호령과 천산오응을 일순간에 한 줌의 핏물 로 만들어 버리던 마왕의 신위가 눈앞에 생생했다. * * * 운대봉의 가을은 생각 없이 찾아왔다. 언제나 계절은 생각 없이 찾 아오지만…… 성질 급한 몇몇 잎들은 벌써 붉게 스스로를 치장하고 있었다. 장문천은 오랜만에 동부에서 빠져 나와 초가을의 햇살을 쬐고 있었 다. 이사형, 오세악이 수행하던 그 동부에서 장문천은 몇 번째 가을을 맞고 있는지 몰랐다. 그 동안 딱 한 번 운대봉을 내려갔었다. 사부, 숭양진인의 상을 당했을 때였다. 장문천은 놀랐다. 사부의 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사형제들이 의외 로 적었기 때문이다. 한 분의 사숙, 대사형과 육사형(六師兄) 영호준, 그들이 전부였다. 동부에서 세상과 벽을 쌓고 수행에 몰두하는 동안 큰일이 있었고 그 는 그 일을 들었다. 단혈철각련의 발호! 벌써 오 년 전의 일이라 했고 그 싸움에서 이사형, 오세악을 비롯 한 나머지 사형제들이 모두 죽었다고 했다. 배교의 마옹이 죽고 마녀 가 화형을 당한 것은 그 이전의 일……. 장문천은 물었다. 왜 자신을 부르지 않았느냐고. 육사형, 영호준이 대답했다. 이사형, 오세악이 절대 외부의 소식을 운대봉에 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육사형, 영호준은 말이 나온 김에 이사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이사형은 곽부의 손에 죽었다고 한다. 무모한 싸움임을 뻔히 알면서 도 당랑처럼 곽부에게 달려들었다고 했다. 이사형의 행동을 화산파의 의기를 보여준 호쾌한 행동이라 평하는 제자도 있고 만용이라 평한 제자도 있다고 한다. 장문천은 육사형, 영호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사형, 오세악의 행동은 의기도 만용 도 아니었음을……. 이사형은 자신을 포기했다. 이미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곽부 를 상대로 목숨을 버린 것이다. 이사형의 명에 의해 동부에 발을 들인 후 운대봉을 찾는 자는 아무 도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동부에 몸을 담은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이사형이 초췌한 얼굴로 찾아 왔었다. 이사형은 말했다. '나는 패했다. 능운공작, 단원홍! 나는 그의 일초지적도 아니었다. 부끄럽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뛴 꼴이…… 문천, 나는 결코 그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는 벌써 검강을 사용하고 있다. ……이 제 그를 꺾을 자는 너뿐이다. 그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산을 내려오지 마라. 구소신공으로는 그에게 이기지 못한다. 여기 자 하신공이 있다. 사부에게 간청을 해서 얻어낸 것이다. 익혀라! 익혀 서 반드시 그를 꺾어라.' 이사형은 그 말을 남기고 산을 내려갔다. 사형의 뒷모습이 무척 쓸 쓸해 보였다. 검에 대해 누구 보다 애착이 강했고 누구 보다 자존심 이 강했던 사형이다. 아마 단원홍에게 패했을 때 이미 이사형은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사부의 상을 마친 후 장문천은 곧장 동부로 돌아왔다. 자하신공과 죽영파사검법에 매달렸다. 자하신공이야 평생을 수련해야 하는 것이고, 이사형은 한 오 년이 면 죽영파사검법을 모두 익힐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장문천 은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죽영파사검법의 오의(奧義)를 얻을 수 있었 다. 이사형이 자신의 재질을 너무 과대평가 해서 오 년을 이야기했는지 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스스로를 너무 낮추는 것 같고 ……. 이사형은 죽영파사검법을 익히지 않았다. 대충 겉만 훑고 말았던 것이다. 아마 그래서 오 년을 말했을 것이다. 죽영파사검법은 이사형이 생각한 몇 배 이상 패도적인 무공이었다. 무당, 공동(　　)과 함께 천하 삼대검문(三大劍門) 중의 하나로 꼽 히는 화산에서 수용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맹(强猛)한 검초……. 만약 죽영파사검법이 오 년 안에 익힐 수 있는 무공이었다면 자존 심 강한 화산의 조사들은 그 무공에 겁을 내어 사장시키려 들지도 않 았을 것이다. 구소신공도 남겨 둔 조사들이었다. 장문천은 이사형이 죽영파사검법의 진정한 위용을 알았다면 죽음을 택했을까라고 생각했다. 절대 죽음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죽영파사검법! 어쨌든 그 무공을 장문천은 익혔다. 지금……. 동부를 내려갈 때가 된 것이다. 장문천은 검신을 드러내며 내력을 끌어올렸다. 웅웅웅! 검이 울며 자색(紫色) 강기가 그의 전신에서 무럭무럭 피 어올랐다. 경기의 폭풍이 휘몰아치며 나뭇잎들이 우수수 날렸다. 검끝에서는 푸른 섬광이 자라고 있었다. 한 치, 한 치……. 푸른 섬광을 키워 내는 그 검의 상대는 예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능운공작, 단원홍! 그리고……. 강호는 정말 모르는 곳이다. 화산의 도장에서 그 검의 또 다른 상 대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제26장 천화원(天花院) 예령(叡鈴)은 가슴을 내밀며 숨을 들이쉬었다. 청정한 기운들이 그 녀의 전신을 상쾌하게 했다. 그녀는 소옥(小屋) 앞에 서 있었다. 아담하고 정갈하게 꾸며진 집이었다. 소옥의 담은 여러 종류의 나 무와 화단(花壇)으로 꾸며져 있었다. 예령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들을 살피며 소옥을 거닐었다. 가끔 울창한 삼림(森林) 너머의 먼 곳으로도 시선을 던졌다. 예령은 그곳에는 가보지 못했다. 갈 수 없었다. 언젠가 한 번 바깥 세상이 너무 그리워 밖을 나간 적이 있었다. 칼 을 든 무시무시한 사람들이 떼로 모여들며 그녀의 발길을 막았었다. 그녀는 그때 그들이 너무도 무서워 울었다. 할아버지와 파파(婆婆)도 절대 소옥 밖을 나가지 마라 했다. 그래 서 그 이후 그녀는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다. 소옥에서도 재미있는 일은 많았다. 서가(書架)에는 항상 새로운 책 들이 놓여졌고 매일 다르게 자라는 나무와 꽃들을 가꾸고 살피는 것 도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령은 오늘처럼 가끔 밖을 넘보았다. 가보지 못 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동경 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손짓하며 오라 하는 것 같았다. 가슴 저리게 부르는 목소 리였다. 때문에 그녀는 언젠가 그 목소리를 따라 밖을 나가게 되리라 예감했다. 삼림을 부는 바람은 벌써 소슬했다. 그녀는 갓 떨어진 나뭇잎들을 주우며 뒤뜰로 향했다. 활! 활! 활! 뒤뜰에는 예순을 넘은 노인이 마른 잎을 태우고 있었다. 예령의 눈빛이 빛났다. "할아버지!" 그녀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갔다. "아가씨, 거스름이 묻습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노인이 말했다. 그는 천노라는 노복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곁에 있었다던 가노(家奴)로써 예령은 신분 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라 불렀다. 천노는 뒤뜰에 보이는 작 은 별채에 홀로 기거하고 있었다. "잠깐만 놀다 가겠어요." 예령은 불 옆에 섰다. 그녀가 불을 쓰다듬듯 손을 저었다. 불길이 마른 짚더미를 던진 듯 확 치솟았다. 예령은 그 불에 취한 듯 두 눈을 반짝였다. 천노는 안색을 찌푸렸다. "아가씨, 그만 들어가십시오!" 그가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그러세요? 할아버지는 이상해요. 파파도 마찬가지고. 불 곁에 왜 서 있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예령도 화를 내며 토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파파는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그녀의 유모다. 천노와 같이 태어날 때부터 그녀를 지켜보았던 여자다. 예령은 소옥에서 천노, 파파와 함께 줄곧 살아왔었다. "아가씨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불장난을 좋아 할 나이가 아 니지요. 불장난을 좋아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천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비키십시오. 거스름이 날립니다." 그는 들고 있던 대 빗자루로 아예 불길을 잡아 버렸다. "쳇!" 예령은 입을 삐죽이며 등을 돌렸다. 그녀는 떨어진 나뭇잎을 몇 장 더 주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몸이 이상했다. 따뜻한 물에 나뭇잎을 띄우고 놀며 몸을 풀 생각이었다. "앙! 앙! 앙!" 저녁을 준비하던 도화는 예령의 울음소리에 놀라 급히 들고 있던 식칼을 놓았다. 울음은 욕실에서 들렸다. 그녀는 허둥지둥 욕실로 달려갔다. "아가씨!" 도화는 욕실의 문을 와락 열었다. 뿌연 수막 속에 예령이 알몸으로 서 있었다. "앙! 앙! 앙! 파파……." 그녀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화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무슨…… 흉한 벌레라도 나타났습니까?" 도화는 급히 욕실 주변을 살폈다. 욕실에는 나뭇잎과 창포(菖蒲)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파파……." 예령은 겁에 질린 얼굴로 눈길을 떨구었다. 도화의 시선이 황급히 예령의 시선을 따랐다. 도화의 굳었던 얼굴 이 밝아졌다. 그녀는 안도로 가슴을 쓸었다. "아가씨, 겁 내지 마세요. 아가씨는 이제 어른이 되었답니다. 다 큰 여인은 누구나 한 달에 한 번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요." 도화는 빙긋 웃으며 예령을 감싸안았다. 그녀는 예령을 깨끗이 닦인 후 새 옷을 입혔다. "오늘은 일찍 주무십시오." 그녀가 예령의 손을 끌고 욕실을 나섰다. "무슨 일이오?" 소옥 밖에는 천노가 서 있었다. 소옥 안에서 일어난 일이라 들어오 지 못하고 발을 굴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천노, 아무 일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아가씨는 이제 어른이 되 었답니다." 도화가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가 어른이?" 천노는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그는 처음에는 도화의 말이 무슨 말이지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세월이 그렇게 흘렀군." 천노는 하늘을 우러렀다. 그의 눈빛이 회한으로 흔들렸다. - 그 날밤 예령은 꿈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다. 푸른 공단옷에 꽃무늬가 수놓아진 연분홍 치마, 뒤축 높은 꽃신을 신은 여인이었다. 예령은 이전에도 꿈속에서 몇 번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어머니……. 어머니는 말했다. "나의 귀여운 아기, 이제 누군가가 너를 찾아올 것이란다. 모든 사 람이 그를 무서워해도 너는 그분을 무서워하면 안된단다. 너는 그분 을 위해 그것을 준비해 두렴." 그녀는 예령을 꼭 껴안으며 그 물건이 있는 곳을 가르쳐 주었다. "알았어요. 어머니." 예령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의 눈빛이 너무 애잔해 그녀는 다른 말은 물을 수도 없었다. * * * 방환은 천공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초가을의 밤은 깊고 아름다웠다 . 그러나 천공에서 시선을 거둔 방환의 표정은 별로 밝지 못했다. 방환은 오랫동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에 통증을 느 꼈다. 그는 곱사등을 툭툭 두드리며 생각에 골몰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방 노관!" 어둠 속에 나타난 자는 불사혼, 도예와 불패혼, 예광이었다. "주무시지 않고 무엇하고 계십니까?" 도예가 물었다. "이제 아흔이 넘었소. 밤잠도 없고 낮잠도 없소이다." 방환이 말했다. "우리도 이미 고희(古稀)를 넘겼습니다. 나이가 들면 잠이 많아진 다는데 방 노관만 다른 듯 합니다." 도예는 잔잔하게 웃었다. "나는 원래 늙기를 잘못 늙은 자라 잠이 없다지만 쌍혼께서는 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시오?" "잠이 올 리 있겠습니까. 전왕의 출관이 코앞인데……." 불패혼, 예광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한두 달, 그 정도 시일밖에 남지 않았지요. 나의 걱정은 전왕께서 과연 우리 만인촌의 원을 풀어 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원래 엉뚱 한 분이시라……." 도예는 쓴웃음을 흘렸다. "그의 선택은 더 이상 다른 것이 없소! 중원 배교는 이미 사라졌소 이다. 의리를 지키려 해도 지킬 수 없음 아니오. 성녀는 화형에 처해 지고 명옹은 참수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무공에 몰두한 것만 보아 도 알 수 있소!" 예광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것이…… 중원 배교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라네. 호교 사들이 근자에 중원 배교가 멸하지 않았다는 흔적을 발견한 모양이야 ." "저도 들었습니다. 있으나마나 한 처지로 있겠지요. 신경 쓸 필요 도 없습니다." 예광은 도예의 노파심을 탓했다. "전왕의 행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걱정을 마시오. 전왕께서 중원에 광명도를 들이댈 것은 분명하지 않소. 중원 배교의 복수를 위해서라 할지라도…… 걱정하는 것은 전왕께서 중원에 배교일세를 이룬 후 다시 보권의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일은 없 을 것이오. 복수에 혈안이 된 적들이 가만히 있겠소? 전왕께서는 보 권으로는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적들의 저항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왕께서는 모든 것 을 광명도에 의지할 것이오." 방환도 도예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다른 배교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일지국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오? 대화룡은 꼭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인데……." "아직은…… 호교사들이 행방을 찾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예광이 말했다. "서둘러 주시오. 그것은 전왕의 물건이외다." "알겠습니다." 도예와 예광은 읍을 했다. "방금 천문을 보았소." "아하! 전왕의 행로(行路)를 점쳐 보셨군요." 도예는 안광을 빛내며 호기심을 표했다. "천체의 운행(運行)이 이상합니다." "좋지 않은 일이라도……." 도예와 예광의 안색이 굳어졌다. "자미궁이 크게 침범 당하고 있소. 대변란(大變亂)의 예고이외다." "좋은 일 아닙니까?" 예광이 그 답지 않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허허허! 불패혼께서는 자미궁을 지금 중원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자로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그럼 우리는 무엇입니까? 자미궁을 흔들 고 있는 성좌(星座)는 천살성인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살성(殺 星)이라 할 참입니까?" "험!" 예광은 헛기침을 했다. "천문은 보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기는 합니다. 어떤 자는 편한 대로 자미궁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곤 하더군요. 그러나 천제의 궁이 어찌 몇몇 사람의 운명을 대변하겠소. 자미궁이 흔들린다는 것 은 삼라만상의 운행이 순리(順理)가 아니라 역리(逆理)로 흐른다는 징조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듣고만 있던 도예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도모하는 일이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방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쌍혼은 불쾌한 기색으로 입을 닫았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전왕의 별이 벌써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 "출관을 앞두었으니 당연한 일 아니오?" "태동(胎動)이 아니라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소. 그리고 지금은 천 살성과 일렬로 합쳐 자미궁을 압박하고 있소이다. 전왕께서는 아직 출관도 않으셨는데……." "그럼, 또 다른 전왕이 있다는 말이오?" 쌍혼은 입을 모았다. "모르겠소이다." 방환은 고개를 저었다. 침묵이 흘렀다. 큰일을 앞둔 터라 별 일에도 다 신경이 쓰이는 그 들이었다. 도예가 그 침묵을 깼다. "방 노관, 천문이란 원래 할 일 없는 자들이 심심풀이로 보는 잡학 일 따름이오. 우리에게는 명왕이 있소. 우리의 길은 명왕께서 가르쳐 줄뿐이오." "맞소! 형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예광은 목소리를 높였다. "허허허, 늙은 것이 괜한 짓을 했소이다. 이제 노관의 자리는 불사 혼께서 맡아야겠소. 옳은 말이오. 옳은 말이야. 우리가 의지할 곳이 명왕 말고 그 누가 있겠소." 방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자, 전왕의 출관도 코앞이니…… 만인촌이 중원으로 나아가는 일 에 빈틈이 없도록 준비를 철저히 합시다." 그가 말했다. "물론입니다!" 쌍혼은 포권으로 명을 받았다. * * * 우 - 워 - 워 - 늑대 울음이 사납게 곤륜의 산줄기를 뒤흔들었다. 새외로 줄달음치는 곤륜의 깊은 산중에는 소림, 무당, 화산, 아미 와 함께 천하 오대문파(五大門派)로 꼽히는 곤륜파가 있다. 이역에 떨어져 있으면서도 항상 중원에 영향을 끼치는 곳……. 낮은 점점 짧아지고 밤은 점점 길어지는 계절이었다. 곤륜의 도관 에는 벌써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각자의 일로 분주하던 제자들도 하나, 둘 숙소로 모습을 감추고 곤 륜의 도관들 사이로는 찬바람만 나뭇잎을 휘저었다. 산문에는 십 여명의 제자들이 불을 피워 놓고 곤륜의 밤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도란도란 모여 무슨 이야기인가를 열중하고 있었다. "…… 곽부는 엄청난 자였지. 원래 전, 전대의 고인들도 상대하기 힘들어하던 자였다. 파죽지세로 공동, 종남을 휩쓸고 화산으로 나아 갔어." 말을 하고 있는 자는 이십 대 후반의 도장이었다. 곤륜의 장문인, 광화자(光華子)의 제자 홍일도장(弘逸道長)이 그였다. 홍일을 비롯한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산문 한 편에는 청수한 얼굴의 중년인이 가만 히 산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홍일의 사형, 홍현도장(弘玄道長) 이었다. 홍현은 항상 말이 많은 사제, 홍일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고 싶었 으나 참았다. 천성이 그랬고 배분 낮은 제자들과 흉허물없이 어울린 다고 책할 노릇도 아니었다. 근엄한 얼굴의 사숙이 있으면 친구 같은 사숙도 있어야 할 터이니……. "우리 곤륜을 비롯한 구대문파는 뒤늦게 '아차!' 하고 농관(　關) 으로 모여들었어. 곽부의 단혈철각련을 막기 위해……." "대응이 왜 그렇게 늦었습니까?" 홍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자 한 명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물었 다. "음, 각 문파에서 서둘러 제자들을 동원하지 못할 사정들이 조금 있었지. 하나는…… 자신의 문파를 지키는 일이 급했을 테고 다른 하 나는 배교의 뿌리를 뽑는 일로 제자들이 강호에 많이 흩어져 있었거 든." "배교?"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낯선 이름이었다. "그런 곳이 있다. 하오문의 사교인데 뿌리가 고래 심줄처럼 질겼던 곳이다." 홍일이 말했다. "하오문의 일인데 왜 그렇게 많은 제자들을 하산시켰습니까?" 또 다른 제자 한 명이 물었다. "강호는…… 겁화가 일어도 서로 미동도 않는 경우가 있고…… 작 은 불씨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있다. 각 문파 사이에…… 서 로를 의식해야 하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홍일은 홍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자들은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농관에서 대접전이 벌어졌어. 삼 백년 내 강호 최대의 혈 투였지. 단혈철각련도 엄청난 타격을 받았지만 더 타격을 받은 쪽은 바로 우리 구대문파였다. 이전 세력을 그 한 판에서 반이나 꺾여 버 렸으니……." "농관의 혈전에 대해서는 저희들도 누차 들은 바 있습니다." 제자들이 말했다. 그들이 듣고자 하는 이야기는 원래 다른 것이었 다. "그래, 농관의 싸움은 그렇게 끝났고…… 단혈철각련은 승기의 여 세를 몰아 화산으로 나아갔다. 화산의 도림새(桃林塞)에서 두 번째 혈투가 벌어진 게야.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의 제 세력은 사활을 걸 었지만 상황은 역시 좋지 않았다. 그때 유향경천문이 나타났다. 능운 공작, 단 대협께서 나타나신 게지." "아!" 제자들은 찬탄을 터뜨렸다. "상상을 초월한 무위였다. 사대호법, 십장로…… 곽부의 수졸들은 짚단처럼 줄줄이 쓰러졌다." 홍일은 입에 침을 튀겼다. 제자들 중에는 도림새의 일전도 몇 번이나 들은 자가 있었다. 그러 나 익덕공(益德公)의 장판 싸움처럼 언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 라 모두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떨어진 곳에서 한 귀로 홍일의 이야기를 듣던 홍현은 달랐다. 그는 안색을 찌푸렸다. "홍일, 자리를 지켜라!"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홍일은 사형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제자리로 돌아갔다. 제자들도 산문에 일렬로 섰다. 한참 이야기가 재미있을 판인데 산통을 깬 홍현 의 심보를 그들은 몰랐다. "홍일, 네가 무엇을 안다고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느냐? 너는 그때 검도 받지 못했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더냐! 유향경천문이…… 조금 일 찍 싸움에 뛰어들었다면 우리는 농관에서 그런 대패를 당할 이유가 없었다. 세력의 오 할이나 꺾여 그 휴유증을 지금까지 지니고 있을 필요도 없었겠지. 사패에게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들은 절 대 우리의 늑장을 탓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홍현은 냉랭하게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기억하라! 강호를 지켜 온 곳은 언제나 구대문파였다. 사패의 세 상은 지금 순간일 뿐이었지. 물론 능운공작이 있는 한 사패의 세상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나도 안다. 그렇다고 너희들이 능운공 작이나 사패의 추종자처럼 꼭 왕왕거려야 하겠느냐! 대곤륜(大崑崙) 의 자존심은 어디에 두고 왔느냐!" 이왕 꺼낸 말 홍현은 제자들을 엄하게 질책했다. 홍일을 비롯한 제자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사패가…… 그들의 야심을 우리 산문까지 들 이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패의 세력은 하루가 다르게 커 가고 있지. 그러나 본 문을 비롯한 구대문파는……." 홍현은 미간을 좁혔다. 더 이상 말도 하기 싫었다. 화톳불만 활활 타올랐다. 산바람 소리와 귀뚜라미 울음소리…… 적막이었다. 중추절을 앞둔 달은 중천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홍현은 눈을 번쩍 떴다. 웅 - 웅 - 웅 - 긴 쇠관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그의 귀에 닿았다. 그리고 그 소리 는 곧 음률을 이루었다. 홍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간장을 후벼파는 애절한 음률이었다. 그 소리는 온갖 회한들을 다 불러일으키며 점점 산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홍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더 이상 그 소리에 빠져들다가는 제자들 앞에 터무니없이 약한 모습을 보일 것 같았다. '야심한 밤에 누가…….' 그는 야안공으로 주위를 살폈다. 가랑잎만이 바람에 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가까이 들리나 사람은 없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도 모호했다. 마치 사방에서 환청으로 웅웅 울리는 듯했다. '심상치 않다!' 홍현의 검인(劍人)으로서의 직감이 발동했다. 그는 급히 시선을 제 자들에게 돌렸다. 그의 안색이 변했다. 홍일은 눈물을 흘리기 일보직전이었고 나머지 제자들은 줄줄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그 중 내력이 약한 제자 한 명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듯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웩!' 그가 갑자기 피 를 토했다. "웩!" "으웩!" 연이어 제자들이 피를 토했다. 홍일은 머리를 껴안고 고통스러워하 고 있었고 홍현도 머리가 터져 나갈 듯 웅웅 울리는 것을 느꼈다. 간장을 후벼파던 음률은 정말 간장을 후벼파고 있었다. '마, 마음(魔音)이다!' "아 - 아 - 아 - " 그가 창룡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의 창룡음은 마음에 맞서기에는 너무 내력이 약했다. "홍일!" 홍현이 격음(激音)으로 홍일을 불렀다. 홍일은 충혈된 눈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종을 울려라! 적이다! 무서운 적!" 슥! 홍현은 검을 빼 들었다. 홍일은 비틀거리며 산문에 달린 종을 향해 걸어갔다. 털썩! 제자들이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산문을 굴렀다. "어디 있느냐? 오라!" 홍현은 악에 받친 고함을 질렀다. "으, 으, 으……." 홍일은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한 손으로 귀를 막고 종을 잡았다. 그가 종을 울리려 할 때였다. 머리를 울리던 굉음이 뚝 그쳤다. 홍일은 순간적인 안도감에 고개를 들었다. "아!" 그가 탄성을 터뜨렸다. 달은 중천을 넘어가고 은한은 총총했다. 그 사이로 유성(流星)처럼 그림자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점차 자신을 향해 다가 왔다. 홍현도 그 그림자를 보고 있었다. "능공허도(凌空虛渡)!" 그가 경악에 찬 함성을 질렀다. "홍일, 뭐 하느냐? 타종(打鐘)!" 파파파파팟! 옷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바람이 대나무 숲을 지나는 소리 보 다 더 요란했다. 인영은 삽시간에 홍현을 덮쳐 오고 있었다. 홍현은 허공에서 태산 이 눌러 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어물거리다가는 경기의 압박으 로도 폭사할 듯했다. 홍현은 곤륜이 자랑하는 신법으로 신형을 뽑았다. 그가 용미초풍( 龍尾招風)으로 비스듬히 치솟아 오르며 분광뇌풍검법(分光雷風劍法) 을 펼쳤다. 검 끝에 월광이 찬연하게 폭사되며 홍현의 검은 기세등등하게 허공 을 짓눌러 오는 인영을 향해 날아갔다. 검영에 맞서 붉은 그림자가 번뜩 하는 듯했다. 촤악! 은한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홍일은 보았다. 피와 살점, 조각난 검의 파편들이 은린(銀鱗)처럼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것을……. 파파팟! 옷깃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 오고 있었다. 홍일은 염왕을 보듯 허공을 날아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등을 돌 리고 싸울 생각도 못했다. 땡! 땡! 땡! 땡! 그는 종만 깨져라 울렸다. 붉은 장영은 그의 머리 위에도 떨어졌다. 단식(斷食) 수행 이레 째가 되는 날 밤, 홍인(弘仁)이 파랗게 질린 모습으로 달려왔다. "장문인! 크, 큰일 났습니다! 마성(魔星)이, 본 문에 마성이 출현 했습니다!" 홍인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홍인이 저토록 호들갑을 떨 정도면 가벼운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광화자는 검을 들었다. 단혈철각련과의 대혈전 이후 처음으로 드는 검이었다. "광운(光運), 광정(光正), 사숙께서 혼신을 다해 막고 있으나…… 좋지 않습니다!" 도관을 향해 내려가며 홍인이 말했다. 광화자의 눈빛이 흔들렸다. 광운, 광정까지 나섰는데 사태가 험하 다니…… 생각보다 사정이 더 나쁜 듯했다. 광화자는 땅을 박찼다. 팟! 그가 한줄기 그림자로 번쩍였다. 곤륜의 무상 절예, 운룡대팔 식(雲龍大八式)이 펼쳐지고 있었다. 도관을 향해 쏘아 가며 광화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칼 부딪 히는 소리도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곤륜은 깊은 밤 속에 고요하기만 했다. 광화자는 일 각만에 도관에 이르렀고 곤륜이 침묵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곤륜의 제자들은 모두 대성전(大聖殿)에 모여 있었다. "사형!" "사부님!" 사제, 광정과 대제자, 홍명(弘明)이 황급히 다가왔다. 광화자는 광정과 홍명을 비켜서게 했다. 산문까지 이르는 길이 광화자의 눈에 쭉 들어왔다. 질퍽한 핏물 투성이었다. 벌써 한 차례 싸움이 있은 듯했다. 그 길 위에 한 사내가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는 아무런 병기도 없었다. 광운이 보였다. 그는 일향문(一珦門)에서 야행인(夜行人)과 한 판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광정에게 용호풍운대진(龍虎風雲大陣)을 펼치게 한 후 자신은 직접 적을 상대하러 나선 듯했다. 막을 수 있다면 곤륜의 도관에 발을 들 이기 전에 막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운은 이미 자신이 적의 상 대가 아니라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꺾을 수 있는 자였다면 대성전까 지 물러난 후 용호풍운대진을 펼치라고 광정에게 지시도 않았을 테니 ……. "광오(光吾), 광성(光成)사숙, 홍현, 홍양(弘陽), 홍청(弘淸), 홍 일…… 이미 모두 놈에게 당했습니다. " 홍명은 비분을 터뜨렸다. 광화자는 아무 말 없이 일향문에만 눈길을 두었다. 핏물만 흥건한 곤륜으로 들어오는 길……. 광운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그러나 광운을 부르기에는 늦은 듯했다 . 파라락! 광운은 도포를 휘날리며 허공을 비상하고 있었다. 그가 허 공을 자유자재로 꿈틀대며 야행인을 향해 검을 뻗었다. 운룡무궁(雲 龍無窮)의 멋진 신법에 태청검법(太淸劍法)이었다. 광운다웠다. 검파는 현기(玄機)를 뿌리며 도도하게 야행인을 휩쓸어 갔다. 야행인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그의 신형이 얼음을 타듯 미끄 러졌다. 발 없는 유령의 움직임이었다. 그는 그 한 번의 동작으로 광 운의 검망을 무위로 만들었다. "으핫!" 광운은 상대가 자신의 공세를 너무 쉽게 비켜 가자 노호를 터뜨리 며 몸을 회전시켰다. 신룡선무(神龍旋舞)를 펼쳐 회전력(回轉力)으로 검의 위력을 배로 하고 있었다. 쐐액! 그는 검을 일자로 세운 채 선풍(旋風)을 일으키며 야행인을 공격했다. 야행인은 선 자세 그대로 우수를 내밀었다. 비구에서 백선(白線)이 번쩍 하는 것을 본 자는 광화자뿐이었다. 광화자는 사제, 광운에게 위험을 경고하려 했다. 그러나 경고하기 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비구에 숨겨진 것은 바람을 가를 정도로 날카로운 연검이었다. 사삭! 가벼운 움직임과 함께 허공에서 피가 솟았다. 운룡대팔식을 펼쳐야 할 광운의 두 다리가 육신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사삭! 삭! 팔이 날아가고 목이 날아가고 몸통이 조각났다. 백선으로 화한 연검은 마치 봄날의 간지러운 햇살처럼 움직이며 광 운을 조각조각 내고 있었다. 움직임이 너무 부드럽고 빨라 조각나고 있는 광운조차 자신의 처지 를 깨닫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찰나지간에 광운의 형체는 사라졌다. 육편만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 었다. 연검을 볼 능력이 없는 홍명 등은 광운이 절로 육편이 되어 흩날리 고 있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사술(詐術)! 장문인, 놈은 사술을 쓰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홍명이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사술이 맞다고 하더라도 광운을 조각낼 사술이면 이미 사술은 사술 이 아니다. 밤의 침입자는 광운을 조각낸 후, 일향문을 바라보고 섰다. 소매를 휙 뿌리는가 싶더니 손에서 불기둥이 확 일었다. 불기둥은 맹렬한 기세로 일향문을 휘감으며 불꽃을 휘날렸다. 광화자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이번만은 야행인이 무슨 수법을 썼 는가를 알 수 없었다. 세상에는 많은 수의 열양기공(熱陽氣功)이 있다. 화염장(火焰掌), 삼양신지(三陽神指), 열염홍심장(熱炎紅心掌), 천 염뇌화장(天焰雷火掌)……. 모두 무서운 극양기공(極陽奇功)들이다. 그러나 그 기공들 중 어느 것도 실제로 불을 뿜는 무공은 없었다. 타탁! 탁! 탁! 일향문은 기와를 태우며 이내 잿더미로 화해 갔다. 야행인의 눈길이 대성전에 닿았다. 광화자는 제자들의 안색을 살폈다. 제자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꼼 짝 않고 있었다. "진(盡) - 성(性) - 지(至) - 명(命)!" 광화자가 태상노군의 본지(本旨)를 창룡음으로 외쳤다. 홍현의 창 룡음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맑고 높은 음이었다. 곤륜산이 웅웅거 리는 소리로 화답했다. 제자들은 장문인의 창룡음에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일제히 검을 빼며 자신의 방위를 지켰다. 야행인이 완보로 대성전을 오르고 있었다. 걸음걸이는 느렸으나 한 걸음에 전각 하나가 휙휙 지나갔다. 야행인이 스쳐 간 전각에는 매 서운 불길이 뒤따랐다. "광정, 문로를 알겠느냐?" 광화자가 물었다. "장문 사형, 죄송합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광정은 머리를 숙였다. "너는 지금 태청전(太淸殿)에 올라 조사들께서 남겨 준 귀한 유물 들을 수습하라. 그리고 조사동으로 가라. 홍명, 너는 후미에 선 '정( 正)' 자 배(輩), 아이들을 이끌고 조사동에서 네 사숙을 기다려라. 내가 부르기 전까지 일체 밖을 내다보지 마라." 광화자가 말했다. 광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장문 사형, 그 말은……." "광정, 더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느냐?" 광화자가 냉엄한 눈빛으로 광정과 홍명을 바라보았다. 광정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홍명! 아이들을 데려 오라!" 휙!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형을 날렸다. 홍명도 이를 질끈 깨물었다. 그는 광화자를 향해 포권으로 깊게 머 리를 숙였다. "너희들은 나를 따른다!" 홍명이 후미의 제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한 무리의 어린 제자들이 홍명을 따라 우르르 움직였다. 광화자는 계단을 내려가 용호풍운대진의 중심에 섰다. 야행인도 대성전의 계단을 올랐다. 의외로 젊은 자였다. 신분도 밝히지 않았고 곤륜을 피로 물들이려는 이유도 밝히지 않았 다. 비구에서 은광(銀光)이 번쩍 빛났다. 비구에 숨겨진 연검의 길이는 얼마나 되는지 몰랐다. 매미 날개처 럼 가는 연검은 화살처럼 날아가 대성전에 일렬로 선 네 명의 제자를 단번에 꿰뚫었다. 제자들의 도포가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연검이 너무도 날카롭고 빨라 제자들은 고통은커녕 자신이 찔렸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광화자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흰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백 번 떨어져도 모자랄 악귀!" 그가 태청진력(太淸眞力)을 전력으로 끌어올렸다. 검 끝에 청광이 맺혔다. 그 순간, 야행인은 우수를 움직였다. "으아!" "악!" 연검에 관통된 제자들이 뒤늦게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사삭! 삭! 연검은 채대(綵帶)처럼 움직이며 곤륜의 제자들을 쓸었 다. 무슨 재질로 만들었는지 부드럽기도 한없이 부드러웠고 날카롭기 는 검을 짚단처럼 잘랐다. 용호풍운대진이 무용지물이었다. 연검은 부딪히는 모든 것을 잘랐 다. "으악!" "컥!" 팔, 다리, 토막난 검이 어지럽게 날았다. 잠깐 사이에 대성전은 피 바다를 이루었다. "멈춰라!" 광화자는 청광을 뿌렸다. 웅웅웅! 비구가 야릇한 굉음으로 울며 연검의 길이를 줄였다. 연검 이 은광을 뿌리며 광화자의 검영에 부딪혀 갔다. 채챙! 챙! 챙! 맑은 울림 속에 광화자는 두 치 깊이의 족적(足跡)을 남기며 비틀 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야행인의 신형이 팟! 사라지며 일순간 광화자의 코앞에서 형체를 그렸다. 내력도 짐작할 수 없었고 빠르기도 짐작할 수 없었다. 열기 가 훅 불어오며 붉은 장영이 일렁였다. 광화자는 짧은 호흡을 삼킬 틈도 없이 태청진기를 극성으로 담은 종학금룡수(從鶴擒龍手)를 펼쳤다. 펑! 쌍장이 교차하며 광화자는 다시 서너 걸음을 물러섰다. 얼굴은 대춧빛으로 달아올랐고 입가에는 선혈도 언뜻 비쳤다. 기혈은 역류 하고 혼백은 비산했다. 하지만 광화자는 대곤륜의 장문인이다. 의연 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수세에서 곧 공세로 전환했다. 야행인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가 손목을 가볍게 흔들자 손그림자가 십 여개로 불었다. 그는 그 손그림자를 노룡출담(怒龍出潭)으로 취 해 오는 광화자를 향해 뿌렸다. 십 여개의 붉은 손그림자가 중추절 황하에 띄운 유둥(流燈)처럼 느릿하게 광화자의 장영에 차례로 부딪 혀 갔다. 타닥! 탁! 탁! 탁! 장영이 부딪힐 때마다 광화자는 뇌전을 맞은 듯 몸을 흠칫 흠칫 떨 었다. 야행인은 펼쳤던 손바닥을 움켜쥐었고 광화자는 허공을 두 바퀴 선 회한 후 제자리에 섰다. 광화자의 허리가 점점 구부러졌다. 내부가 불타고 있었다. "대, 대단한.……." 확! 불길이 치솟았다. 광화자의 몸에서 치솟아 오른 불길이었다. 그 불길은 삽시간에 광화자를 한 줌의 재로 만들었다. 곤륜의 제자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야행인의 비구에서 연검이 뻗어 나왔다. 빠르지 않았고 가까이 있 었기 때문에 곤륜의 제자들은 이제 모두 그 검을 볼 수 있었다. 매미 날개 같은 그 연검은 곤륜의 제자들에게는 이수의 허연 이빨 보다 더 흉폭(兇暴)해 보였다. 연검이 물결처럼 움직였다. "으악!" "악!" 찢어지는 비명……. 대성전, 노군전, 천존전(天尊殿), 태청전…… 곤륜의 밤은 붉은 화 마와 함께 붉은 피로 물들어 갔다. * * * "음, 음, 음……." 딱 벌어진 어깨, 아름드리 나무 같은 팔뚝, 역발산(力拔山) 국태열 (國太悅)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손가락으로 탁자만 두들겼다. 다그락! 다그락……. 그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들길 때마다 탁자에 놓인 물건들은 현란 한 빛을 내며 들썩였다. 탁자에는 금, 은으로 만든 패물들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귀찮게 하지는 않겠소. 잠깐 동안만 뵙고 나올 것입니다." 국태열의 앞에는 백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풍상에 지친 꾀죄죄한 몰골, 만면에는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었다. 여느 곳에서 볼 수 있 는 촌로의 얼굴이었으나 노인에게는 근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천하의 국태열을 앞에 두고도 흔들림 없이 깊게 빛나는 눈빛, 알게 모르게 사람을 압박하는 말투……. 소싯적에 한가락했을 노인이 틀림없었다. 노인은 한 쪽 팔이 없었 다. 그 없는 팔이 노인에 대한 그 같은 인상을 타인으로 하여금 더욱 강하게 했다. 때문인지 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알려진 국태열의 태도도 노인에 대해서는 정중했다. 사실 외모가 아니라도 국태열은 노인을 함부로 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노야, 여기까지 온 사정을 꼭 원주를 찾아 밝혀야겠습니까? 나에 게 이야기하면 내가 전달해 주겠습니다. 원주께서는 외인을 만나기를 극히 꺼려하십니다." 그가 탁자에 쌓인 패물들을 힐끔 보며 말했다. "국(國) 대주(隊主)의 입장을 곤란하게 하지는 않겠소. 잠깐만 뵐 수 있도록 해 주시오." 외팔이 노인은 같은 말만 반복했다. "아이고, 이거……." 국태열은 의자를 까딱거리며 난색을 표했다. 외팔 노인은 소매를 뒤졌다. 그가 소매에서 주먹만한 금송아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눈에 금강석(金剛石)까지 박힌 금송아지였다. "험, 험, 험……." 국태열은 다시 헛기침을 했다.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군. 가만, 가만…… 내가 왜 이렇게 고민 을 하고 있지? 저 자는 강호인도 아니잖아. 원주를 잠시 뵙겠다고 하 는 것뿐이고…….' 그는 금송아지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에잇, 모르겠다. 설마 원주께서 일없는 늙은이 한 번 초대했다고 나를 나무라시기야 하랴! 그리고 그는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가 아닌가.' 국태열은 결국 재물에 굴복했다. 그가 '좋소!'라고 말하려 할 때였다. "대주(隊主)!" 사자코에 위맹한 인상의 청년이 덜컹 문을 열었다. 그는 천위대(天 衛隊)의 부대주(副隊主)인 한고(韓高)였다. 천위대는 호위대(扈衛隊)다. 작금 강호에 홀로 천상천하유아독존( 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칠 수 있는 능운공작의 장원, 천화원을 지키 는 친위대(親衛隊)가 그들이었다. "무슨 일이냐?" 국태열은 인상을 썼다. "소림, 나한당의 상좌(上座), 정각이라는 자가 원주를 뵙기를 청하 고 있습니다. 설치는 모양이 아무래도……." "비무를 청하러 왔다 이 말이지!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이번 에는 소림인가!" 국태열은 한광을 쏟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가 있거라!" 그가 소리쳤다. 한고는 읍을 한 후 밖을 나갔다. "노야, 미안하오. 원주께서 외인을 꺼려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일 때문이오. 제 실력도 모르는 것들이……." 국태열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한당의 상좌라면 만만한 상대가 아니오. 제법 몇 초식은 겨루어 야 할 듯하니 나 대신 한고를, 방금 저놈을 따라가시오. 원주에게 안 내해 줄 것이오." 그는 뒷짐을 지며 탁자에 놓인 재보들에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그 가 딴청을 부리는 척하며 탁자의 재보들을 함에 재빨리 쓸어 담았다. "나갑시다!" 그가 함을 한 구석에 놓은 후 호쾌하게 소리쳤다. 국태열과 외팔 노인은 문을 나섰다. "한고, 너는 이 분을 원주께 안내해 드려라. 나는 소림의 돌중을 상대하고 오겠다." 국태열이 말했다. 산을 내려가려던 그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누구요?" 국태열이 문 앞에 선 자를 바라보며 외팔 노인에게 물었다. 문 앞에는 날렵한 기형도(奇形刀)를 찬 자가 서 있었다. 작은 키에 곱슬한 머리, 피부가 갈색으로 짙은 이족의 사내였다. "내가 보표로 데리고 있는 자이외다. 천축의 원주민(原住民)이오. 예전에 상단을 끌고 천축에 간 적이 있지요. 병과 굶주림으로 죽어 가던 그와 그의 가족들을 구해 주었습니다." "흐흥, 천축의 원주민이라…… 노예(奴隸) 아니면 소처럼 부림을 당하는 하층민(下層民)이었겠군." 국태열이 천축의 사정에 대해 아는 척을 했다.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소. 그런데 두 번째 천축에 갔을 때 다 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변해 있더군요. 밀승(密僧)을 만나 기연을 얻었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은혜를 갚아야 한다면 나를 따라 중원까지 왔소. 몇 번이고 만류를 했는데도…… 타랍하(打拉下), 인 사드려라. 천화원의 국 대주이시다." 외팔 노인이 기형도를 찬 이족 사내에게 손짓을 했다. 이족 사내는 제자리에서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국태열은 안광을 빛내며 이족 사내의 아래, 위를 훑었다. "노야께서는 좋은 보표를 두고 있군요." 그가 히죽 웃으며 산을 내려갔다. 외팔 노인은 이족 사내의 곁으로 다가갔다. "어떠냐?" 그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능운공작이라는 분은 좋은 보표를 두고 있군요." 이족 사내가 능숙한 한어로 말했다. "때맞추어 잘 온 것 같다. 중원 무학의 뿌리는 소림에 있다고 하지 . 내가 듣기로 정각은 근자에 소림의 산문을 지키는 무승 중 가장 뛰 어난 자라 하더구나. 그리고 그와 싸우려 하는 국 대주는 작금 천하 제일인, 능운공작의 비전을 제법 이어받았다고 하는 자…… 괜찮은 구경거리가 될 게야." 외팔 노인은 이족 사내의 어깨를 툭툭 쳤다. "노야, 갑시다." 천위대의 부대주, 한고가 외팔 노인을 불렀다. 외팔 노인은 한고를 뒤따랐다. "양(陽) 노야(老爺)를 이렇게 가깝게 뵐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내당으로 향하며 한고가 말했다. "나를 아십니까? 나 같은 촌부(村夫)를 알아주시다니 오히려 영광 입니다." 외팔 노인은 빙긋 웃었다. "양 노야를 모르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을축년(乙丑年) 황하 대 홍수(大洪水) 때 재산을 풀어 수 만명의 목숨을 구해주신 분인데…… ." 한고는 존경의 염으로 외팔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쪽 팔이 없는 노인은 하남의 소상(小商)으로 출발 지금은 중원 제일의 거부가 된 금적보의 보주, 양백이라는 자였다. '……미간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 秋聲)! ……계전오엽이추성…….' 단원홍은 눈을 들었다. 창 밖으로는 정말 나뭇잎이 떨어지고 있었 다. 또 한 계절이 흘러가고 있었다. 단원홍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 천 종의 책만 빽빽한 그곳에 한 자루의 검이 덩그렇게 걸려 있었다. 먼지가 차곡히 쌓여있는 검이었다. 단원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 검을 뺐다. 검신은 금방 지난날의 위 용을 기억해 내며 청광을 뿌렸다. 지나간 한 시절이 담겨 있었다. 단원홍은 그 한 시절을 원래의 자 리에 걸었다. '계전오엽이추성이라…….' 서재(書齋)를 서성이던 단원홍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는 백발( 白髮)이 성성한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단원홍은 그 백발을 만졌다. 촉감이 전해져 왔다. 백발인(白髮人) 은 바로 그였다. 그는 거울 앞에 서 이미 하얗게 세어 버린 자신의 머리칼을 단정히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듯했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을 단원홍은 기억하 지 못했다. 언제나 그는 서재에 앉아 있었다. 수 천권의 책을 읽었지 만 그 기억도 없었다. 그날 이후, 단원홍의 기억은 모두 끊어져 버린 것이다. 그는 포행으로 천천히 서재를 거닐었다. 이제 일어날 때가 아닌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 본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부르는 목소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서탁(書卓)을 찾 았다. 덮어 둔 책을 펼쳤다. 그때였다. "원주, 하남 금적보의 양 노야께서 원주를 뵙고자 합니다." 한고가 뜰 앞에서 소리쳤다. 단원홍은 고개를 들었다. 한고와 함께 한쪽 팔이 없는 노인이 뜰 앞에 서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외인인 듯했다. 방금 한 계절을 보았음인지 이상 하게 술 생각이 났다. "정자로 모셔라." 단원홍은 그 외인을 맞았다. 연못 위에 세워진 정자였다. 단원홍과 양백이 정자를 오를 때는 가만히 있더니 시비들이 술상을 가지고 다가오자 바위에서 햇빛을 쬐던 늙은 자라는 물 속으로 풍덩 사라졌다. 쪼르르……. 단원홍은 송자주(松子酒)의 맑은 향을 양백의 잔에도 채우고 자신 의 잔에도 채웠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청명(淸名)은 바람을 타고 날아와 어쩔 수 없이 귓가에 그 이름을 알려주고 가더군요. 양 보주 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단원홍은 잔을 들었다. "과찬입니다." 양백도 잔을 들었다. 단원홍과 양백은 각기 일배(一杯)를 나누었다. 이번에는 양백이 단원홍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을 채우려 했다. 순간, 펑! 펑! 하는 둔중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단원홍은 정자로 이어지는 부교 입구에 시립해 있는 한고를 바라보 았다. "소림 나한당의 상좌, 정각이라는 자가 원주를 찾아왔습니다. 행세 하는 양이 원주를 상대로 비무 운운할 것 같아 국 대주께서 내려갔습 니다. 아마 정각은 국 대주를 상대로 비무를 벌이고 있는 모양입니다 ." 한고가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이며 양백이 권하는 잔을 받았다. "국태열은 내가 금의위에 있을 때 위사(衛士)로 있던 자입니다. 나 를 무척 따랐지요. 내가 금의위를 그만두자 같이 그만두고 따라와 천 화원의 문지기를 자처했습니다. 성격이 급해…… 양 노야에게도 결례 를 저지르지 않았는가 모르겠습니다." "허허허, 조금 만나기 힘들었습니다. 관부인이었음을 몰랐다면 저 도 원주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껄껄껄! 국태열이 좋아했겠군요. 그를 찾아오는 자들은 모두 싸우 려 하는 자들 뿐이었을 텐데 양 보주 같은 분이 찾아왔으니…… 천화 원은 궁한 곳입니다. 위사로 있을 때의 재미가 한 번쯤은 생각 났을 것입니다." 단원홍은 보지 않아도 양백과 국태열 사이에 오간 거래를 모두 아 는 듯했다. "어쨌든 원주께서는 칩거(蟄居)를 지켜주기에는 더 없이 좋은 사람 을 두었습니다. 국 대주로 인해 천화원은 전혀 귀찮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더군요." "천화원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고 물러난 강호 동도들도 그 같이 생 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껄껄껄!" 단원홍은 다시 잔을 들었다. 그가 연못에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양백도 가만히 술잔을 들었다. "장사치만큼 사람의 마음을 잘 읽는 자도 드물지요. 주제넘은 말일 지 모르나…… 원주께서는 그토록 외로움을 타시면서 왜 세상 밖으로 천화원의 문을 열어 두지 않습니까? 단원홍은 양백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주께서는…… 무슨 일로 한낱 강호의 무부에 불과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그가 말꼬리를 돌렸다. "한두 마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원주께서 유쾌하게 들을 이야기 는 못 되는 것 같군요." 양백이 씁쓸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양 보주께서 친히 오셔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인데… … 귀를 씻고 듣겠습니다." 양인대작(兩人對酌)했으나 양백의 잔이 비워지지 않자 단원홍은 홀 로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杯)했다. 산에 꽃도 피지 않았고 나 뭇잎만 줄곧 떨어졌다. "화북(華北)과 중원의 상인들이 나로 하여금 대표로 원주를 찾아봐 라 했습니다." "화북과 중원의 상인?" "승룡전의 팽 방주께서 근자에 저희 상인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 고 있습니다. 상로(商路)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매달 과도한 금액(金 額)의 상납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팽해만이 표국의 일까지 손을 댔다고 합니까?" "표국이 아닙니다. 표국에도 상납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래요? 알아 보고 사실과 맞으면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단원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들이 그 말을 원주께 고했다고는 말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 다." "이후를 두려워 해야 할 정도로 팽해만이 나빠졌습니까?" "……." 양백은 말 없이 잔을 들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군요. 팽해만은 거친 구석이 있기는 하나 명예를 알고, 재물을 밝히는 자는 아니었는데……." 단원홍은 쓴맛을 다셨다. "세월이 변하게 하지 않는 것이 있겠습니까.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 양백이 술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이 나이에 자신의 머리가 백발이 될 줄 알았겠는가. 스스로도 예측 못했던 그 일을 이룬 것은 세월의 부침이었다. "원주, 이제 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저도 많이 변했다고 했지 요.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 저는 배교에 적을 두고 있었습니다." 양백은 자작(自酌)으로 술잔을 들었다. "양 보주는 원래 배교도였군요. 놀랐습니다." 단원홍도 자작으로 술잔을 들었다. 말은 놀랐다고 했지만 놀란 기 색은 별반 없었다. "벌써 오래 전 일입니다. 원주께서 배교 척결의 깃발을 잡았을 때 나는 두려워 천축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으로 요지 경이더군요. 그때 천축은 교를 배신하고 도망 온 배덕자(背德者)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 주었습니다. 덕분에 나는 중원 제일 거부의 소리 를 듣게 되었지요." "맞습니다. 오래 전 일이군요. 그런 일인데 왜 양 보주께서는 그때 의 일을 꺼내십니까?" "젊었을 때는 쾌 풍채가 좋았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자꾸 쪼그라들 더군요. 세월 탓이라 생각했는데 의생(醫生)은 고황(膏　)이 들었기 때문이라 하더이다. 길어야 일 년을 살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육신의 병이야 이미 고칠 수 없는 일이고…… 죽기 전에 마음의 병이나 고 쳐볼까 해서 원주를 찾았습니다." "내 마음의 허(虛)함을 말씀하셨지요. 내 마음도 내가 고치지 못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보주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 쪼르르……. 술병이 바닥을 보이며 단원홍의 잔을 채웠다. "원주께서는 저의 병을 고쳐 줄 능력이 있습니다. 이미 한 번 배신 한 교,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이고…… 교에 대한 배신은 활빈(活貧 )으로 사죄할까 합니다." "배교라는 곳은 좋은 곳인가 보군요. 배교자(背敎者)에 대한 용서 를 활빈으로 하게 하니……." 단원홍은 한 병의 술을 더 개봉(開封)했다. "교가 싫어 교를 떠날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습니다. 나를 떠나게 한 것은 세상의 풍파(風波)지요." 양백의 눈빛이 은유하게 빛났다. "양 보주의 말씀이니 믿기로 하지요. 아! 나도 배교의 보권은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무척 궁금했지요. 도대체 무엇이 들어 있기에 …… 후후후!" 단원홍은 꿀꺽 술잔을 비웠다. "내가 들어 줄 수 있는 부탁이면 들어주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고황이 든 분에게 술을 권해도 될지 모르겠군요." 그는 새 술로 양백의 잔을 채웠다. 백건아였다. 양백은 백건아를 좋아했다. "일찍 죽는 것보다 좋은 술을 두고 죽는 것이 더 억울하지요." 그는 백건아를 연이어 석 잔 마셨다. 양백의 얼굴이 가을날의 잎처럼 붉어졌다. "마음에 걸리는 일은…… 우리 어리신 성녀와 명옹…… 불귀(不歸) 의 객(客)이 되신 그분들의 영혼 한 번 제대로 위로하지 못했다는 것 입니다. 돌아가신 그 자리에 위령비(慰靈碑)라도 세웠으면 합니다." 울컥하는 그 무엇이 있었는지 양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술 잔을 드는 양백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단원홍은 술잔을 따르던 손을 우뚝 멈추었다. 술병에서 조금씩 조 금씩 백건아가 흘렀다. 잔이 넘치려 했다. "위령비가 서 있는 것을 알면 강호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 다. 위령비를 부수겠지요. 내가 위한다고 한 일도 성녀와 명옹을 모 독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원주의 한 마디면 위령비를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노부의 부탁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양백은 단원홍을 향해 깊게 포권했다. 단원홍은 술병을 놓았다. 그가 넘쳐흐르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성녀라는 여자를 죽인 자와 마옹이라는 자를 죽인 자는 바로 나외 다. 둘에 대한 정성이 그토록 지극하니 양 보주는 나를 죽이고 싶겠 군요." "원주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배교에 손을 댔어야 할 상황이었겠지 요. 원주께서 공명(功名)을 위해서 우리 교도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로 만족합니다. 공명을 위함이었다면 천화원이 아니라 지금 자금 성에 앉아 있겠지요. 그리고 이미 십 여년이 지난 일입니다. 죽은 자 들도 추억으로 이야기할 세월이지요." "양 보주에게는 추억입니까? 나는 추억이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양 보주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맞습니다. 공명으로 배교 도들을 처치하지는 않았지요. 그것 보다 더 나쁜 이유 때문이었습니 다. 사감(私感)! 나는 배교를 멸하지 않을 수 없는 개인적인 감정이 있었습니다. 그 감정 때문에 나는 수십, 수백 명을 죽였습니다." 단원홍의 말투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러나 양백은 단원홍의 말에서 거센 감정의 기폭을 느꼈다. 양백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잡았다. 호방(豪放)한 자라 쉽게 일이 풀어질 줄 알았더니 오지 않음만 못한 꼴이 될 듯했다. 단원홍은 술잔을 빙빙 돌렸다. "성녀라는 여자는 어떤 여자였습니까?" 그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성녀가 기뻐할 때는 아주 기뻤습니다. 성녀가 슬퍼 할 때는 아주 슬펐지요. 세상의 희노애락을 그렇게 느끼게 해 준 분입니다. 귀여웠 지요. 내가 성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을 그것이 전부입니다." "왜 신성(神性)을 이야기하지 않소?" "저는 느끼지 못했습니다.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분이 생각 나고 그리워지더군요." "성녀라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교도들로부터는 신성을 인정받지 못 한 불쌍한 여자였군." "……." 양백은 입을 닫았다. 인간에 말에는 한계가 있다. 성녀를 대하지 못한 자는 성녀를 느낄 수 없다. "위령비는 어디에 세울 작정입니까?" 단원홍의 물음이 궤도에 올랐다. "바로 그곳입니다." 양백은 단원홍이 성녀를 화형에 처하고 명옹을 참수한 그곳을 말했 다. "모산에서 떨어진 조그마한 야산(野山)?" "근동의 촌로들은 재접봉(裁接峯)이라 하더군요." "찾기는 제대로 찾았군." 단원홍이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성녀라는 여자의 위령비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겠소. 비(碑)를 절 대 손대지 못하도록 조치도 취하겠소. 하지만 마옹이라는 자는 아니 되오. 내 이야기는 이것이 끝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배교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 나도 오늘 일은 잊겠소. 양 보주, 그만 가 보십시오." 그는 냉랭하게 말한 후, 연못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백은 더 이상 말을 붙이기 힘들다는 것을 알아챘다. "원주, 노부의 청을 들어주어서 고맙소이다. 이것은 나의 정성입니 다. 천축에서 구한 물건이지요." 그는 단도를 탁자에 놓았다. 금사, 은사,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칼 이었다. 장식으로 위엄을 상징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미친 듯이 탐을 낼 물건이었다. 단원홍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원주, 안녕히 계시오." "양 보주, 배웅하지 못함을 용서하시오." 단원홍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그는 시선을 연못에 고정시 킨 채 술만 들이켰다. 양백은 정자를 내려왔다. 그가 한고의 배웅을 받으며 천화원을 나설 때였다. "원주! 어디에 있소? 소림의 정각이 왔소이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납자(衲子) 한 명이 천화원을 들어서고 있었다. 승포는 흙투성이였고 무척 지친 표정이었다. 그 뒤로 천위대의 무사들이 뛰어오고 있었다. "부대주, 대주께서 당했습니다!" 그들이 한고를 향해 소리쳤다. 한고는 퍼뜩 단원홍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각도 정자에 선 단원 홍을 본 모양이었다. 정각은 단원홍을 향해 뭐라 한 소리 하려고 했다. 순간, 정자에서 황금 광채가 번쩍했다. 그와 동시에 쾅! 하는 굉음 이 울렸다. 연못가의 크다란 정원석이 가루로 풀풀 날리고 있었다. 늙은 자라가 햇빛을 쬐던 바로 그 바위였다. 정각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가 푹 고개를 숙였다. "부대주, 나는 그만 가야겠소." 양백은 쓴웃음을 흘렸다. 능운공작의 위용은 해가 갈수록 늘어나는 듯했다. 단원홍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마지막 술잔을 비우고 나서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자를 내려가던 그는 문득 달빛에 찬연하게 빛나는 물체를 보았다 . 보석으로 치장된 현란한 단도였다. 단원홍은 문득 양백이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남기고 갔다는 것을 기 억했다. 그는 그 단도를 뺐다. 역시 그는 무사였다. 장식 보다 도신 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었다. 도신도 제법 날카롭고 튼튼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단도에는 별 관 심이 없었다. 그가 단도를 탁자에 내던졌다. 정자를 내려오던 단원홍은 무슨 생각인지 다시 정자를 올라 단도를 들었다. 그는 어둠 속을 바쁘게 걸어갔다. 그가 걸어가는 곳은 내당이 아니었다. 그는 산허리를 쭉 돌아 황하 가 지척으로 보이는 산굽이에 섰다. "누구냐?" 서너 명의 무사들이 그의 길을 막았다. "원주!" 단원홍임을 안 그들은 급히 머리를 숙였다. 단원홍은 그들을 뒤로하고 몇 걸음을 더 걸었다. 유등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작은 소옥이었다. 단원홍은 바깥에 서 좌측 창문을 열었다. 달빛이 방안을 비췄다. 작은계집이 작은 침상에 곤하게 자고 있었다. 단원홍은 양백이 남긴 단도를 들었다. 단도가 창을 넘어 방으로 둥실 떠갔다. 그는 격공섭물(隔空攝物)로 단도를 작은계집의 허리 곁에 놓았다. 생각하니 단도는 노리개로 딱 어울릴 듯했다. 침상 위에 단도가 놓였다. 단원홍은 한동안 작은계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집이 부스스 움직였다. 단원홍은 급히 등을 돌렸다. "아저씨!" 계집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단원홍을 불렀다. "그만 자라!" 단원홍은 소리쳤다. 자신의 생각보다 높고 노한 목소리였다. 그는 성큼성큼 소옥을 걸어나갔다. "아저씨!" 계집은 창에 매달려 그를 불렀다. 단원홍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심장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는 울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 양백이라는 자는 왜 왔는가. 이제는 잊을만 했는데……. 그가 나무를 쳤다. 쾅! 아름드리 나무가 우르르 쓰러졌다. 나무들은 벌써 가을 소리를 내기는 한데 그 역시 아직 봄풀의 꿈에 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다. 잠의 뿌리는 생각 보다 깊었다. 신(神 )의 전당(殿堂)으로 나아가던 특별한 여자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제27장 구룡선(九龍船) "오랫동안 우리는 교의 부흥(復興)을 위해 일해 왔습니다. 전혀 성 과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세는 지금 보는 바와 같습니다. 적들의 공세 때문이었습니까? 물론 아직도 놈들 은 우리를 사교, 마교로 칭하며 어둠 속에 가두어 두려고는 하고 있 습니다. 그러나 유향경천문에 의한 모산 대참극(大慘劇) 이후, 교에 대한 적들의 직접적인 공세는 사라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예 전과 같이 어둠 속을 활보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지요. 옛 교도들은 언제나 그 같은 상황 속에서 교세를 확장해 갔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도 성과가 보일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 데 아닙니다. 우리는 발만 부르트도록 동분서주했지 진정으로 교세의 확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다른 형제들은 모르 겠습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사실 저는 어느 정도 그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성녀…… 우리를 저 하 늘로 이어 줄 성녀가 없었기 때문에, 교의 꺼지지 않는 불, 교의 신 성한 피가 영원히 단맥(斷脈)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교의 부흥을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메울 수 없는 공허함으로도 시달 려야 했습니다. ……삼황오해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버린 교도들이 다 시 모여들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니었겠습니까. 백 개의 성전( 聖殿)을 짓고 그 성전을 보화로 장식해도 이미 성녀가 없는 교는 교 가 아닙니다. 옛일을, 옛 사람의 은혜를 잊지 못하는 우리 같은 자들 만 모여드는 곳일 뿐……."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공허한 바람 속 에 나뭇잎이 날리고 있었다. 나머지 네댓 명의 자들, 여인도 한 명 있었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무겁게 침묵했다. 성녀가 없는 교는 존재할 수 있는가? 십 몇 년 간 교의 부흥을 위 해 밤잠을 가리지 않았던 그들이 가끔 가슴 걸리게 묻던 말이었다. 대답을 할 수 없었기에 그 문제를 회피해 왔었다. 그런데 오늘 그 문 제가 돌출하고 있었다. 나머지 그들은 그에게 마음속으로 물었다. 그대여, 그대는 갑자기 왜 그 문제를 끄집어내는가. 성녀가 없으면 교도 존재할 수 없다! 답이 그렇게 내려진다면 그대와 우리는 어떻 게 해야 하는가? 이제껏 피 흘린 우리들의 노력들은……. 창 밖을 무심히 바라보던 그는 우울해 하는 그들을 향해 시선을 돌 렸다. "한 통의 서신을 받았소. 광명신장으로부터 온 서신이었소. 성녀가 있다고 하오. 성녀를 찾으라 했소. 하남 동관……." 그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성녀에 대한 문제를 끄집어 낼 수 있었다. 우울함으로 침묵하던 그들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들은 그에게 다시 한 번 같은 이야기를 해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가을 바람이 나 뭇잎을 쓸어 가는 소리가 거세 잘못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어지지 않았소. 신성인(神聖印)이 찍힌 광명신장 의 서신조차…… 눈으로 확인해야 했소. 동관으로 갔습니다. 동관에 는 천화원이라는 능운공작의 장원이 있소. 그 곳에서 산허리를 돌아 한 마장쯤 떨어진 곳에 금옥(禁屋)이라는 절대 금역이 있음을 확인했 습니다. 금옥을 지키는 자들은 능운공작의 친위대인 천위대였소. 나 는 그곳을 지키는 천위대 무사 한 명을 은자로 매수한 후 물었소. 금 옥의 주인은 누구인가? 그 자는 대답했소. 어린 계집 한 명이 노복들 과 함께 그곳에 머물고 있다고…… 나이를 물었소. 금옥의 어린 아가 씨는 전대 성녀께서 우리들로부터 사라진 그 해와 비슷한 해에 태어 났었소." 그는 차분한 자다. 성녀와 명옹이 사라지고 원로들이 모두 사라진 교에 젊은 나이에 홀로 남아 흔들림 없이 교세를 이만큼이나 일군 자 다. 폭풍이 몰아치고 뇌전이 앞길을 막아도 바위처럼 묵묵히 교의 앞 길을 열었었다. 그런 그가 흥분으로 쇳소리를 내고 있었다. 무척 감 정이 격양되는 모양이었다. 나머지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곳의 유일한 여인이 한 방울의 눈물로 모든 이들의 감정을 대신 했다. "전, 전대 성녀께서도 전대 성녀를 그렇게 낳았고 전대 성녀께서도 지금의 성녀를 그렇게 낳은 모양이오. 전, 전대 명옹께서 광명신장 의 서신을 받고 전대 성녀를 찾아 온 것처럼 우리도 이제 성녀를 우 리 곁으로 모셔 와야 하오. 나는 그 일을 위해 여러분을 불렀소." 그가 말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눈빛이 빛났다. "먼저 청기명사께서는 무산 옥녀봉 아래 풍림(風林)으로 가 주시오 . 성녀를 찾은 후 그곳에 숨길까 하오. 예전에 대전(大典)을 그곳에 서 열은 적인 있소. 적들의 추적을 피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 소." 그가 여인을 보고 말했다. 여인은 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 명두께서는 동관 아래 빠른 배 몇 척을 준비해 두시오. 성녀를 구한 후 뱃길로 놈들의 추적을 따돌리겠소." 그곳에 모인 자들의 나이는 대체로 삼십 대였다. 유 명두라는 자는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그러나 그도 사십 여세에 불과했다. 유 명두라는 자도 포권으로 명을 받았다. "나머지 분들은 나와 함께 금옥으로 갑니다. 많은 교군들을 동원하 지는 마시오. 날쌘 자들만 몇 명 데리고 오십시오. 천화원이 지척입 니다. 능운공작이 눈을 뜨면 모든 것은 수포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관문에서 좌측으로 반 마장 떨어진 곳에 허물어진 수신당이 하나 있을 것이오. 중양절(重陽節), 어스름이 졌 을 때 모두 그곳에서 만나기로 합시다." 탁! 그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머지 자들로 의자를 박찼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서둘러 길을 가는 각자의 발걸음에 이슬이 맺혔다. 보는 자가 없자 누구나 할 것 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암흑 세상을 밝혀주는 배교의 성스러운 불, 신성한 피는 끊어진 것 이 아니었다. * * * 쩡! 섬광과 함께 손이 저렸다. 여인은 괭이를 던지고 다급히 손으로 흙을 팠다. 흙 속에서 검은 물체가 드러났다. "부궁주(副宮主)!" 여인은 소리쳤다. "무엇이냐?" 팔척 장신의 여인이 패검을 철렁이며 달려왔다. "비늘입니다!" 여인은 검은 물체를 가리켰다. 검은 물체는 분명 비늘이었다. 흙 속을 막 꿈틀대며 기어갈 듯한 이수의 비늘……. 팔척 장신의 여인은 허리를 굽히며 손으로 흙을 팠다. 검은 비늘이 빛살에 번뜩이며 점점 모습을 드러냈다. "궁주를 불러라!" 팔척 장신의 여인이 소리쳤다. 팔등신(八等身)으로 쭉 뻗은 몸매, 뚜렷한 이목구비, 새외의 거친 바람 속에 우뚝 서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이족의 미인은 아란하였다. 세월은 아란하의 풋풋하던 젊음을 앗아간 대신 다른 아름다움을 남 겨 주었다. 그녀는 만개한 국화처럼 완숙된 아름다움으로 자신을 치 장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 서 있는 팔척 여인은 물론 하라사였다. "궁주!" 하라사가 흥분으로 푸른 눈을 빛냈다. 이글이글 불타는 붉은 눈, 긴 수염과 함께 화룡은 마침내 가을 햇 살 아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심해라! 자칫 기관을 건드리면 이곳은 불바다가 된다!" 하라사가 소리쳤다. 문도들은 장대를 지렛대로 이용 화룡을 일으켰다. 크르르르! 살아 있는 용이 우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룡은 전모를 보였다. 아홉 번째 대화룡의 발견! 아란하는 팔짱을 꼈다. 아버지, 구륜전왕이 그렇게 찾았고 사부로부터 뺏기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대화룡은 결국 그녀의 손에 의해 모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란하는 아홉 번째 대화룡 곁에 섰다. 그녀는 대화룡에 묻은 흙을 툭툭 떨었다. "엉?" 그녀는 아미를 모았다. 흙 속에 숨어 있던 대화룡에 새겨진 글이 드러났다. 구룡하생(九龍下生) 배교일세(拜敎一世)! - 아홉 마리의 용이 땅에서 깨어나면 세상은 배교의 것이 되리라! 전설의 바로 그 말이었다. 아란하는 쓴웃음을 흘렸다. 대화룡에는 엄청난 화마가 숨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일지라 도 대화룡만으로는 배교의 한 세상을 꿈꾸기는 요원했다. 대화룡이 홀로 적들을 향해 불을 뿜을 것도 아니오, 스스로 자신을 지킬 것도 아니었다. 아란하는 대화룡을 어떻게 할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대화룡 은 죽음을 부르는 물건일 뿐이었다. 대화룡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에 세간에 알려지면 대화룡을 얻고자 하는 자나 대화룡을 없애고자 하는 자나 상관없이 먼저 대화룡을 가 진 자부터 죽이려 들 테니……. 그럼에도 아란하는 음산을 누비며 대화룡을 찾았었다. 아버지의 소 망이자 일지국 모두의 오랜 소망이었기 때문이다. 그 소망을 이루었으나 아란하는 별반 기쁜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홉 마리의 대화룡 무게만큼의 짐만 느꼈을 따름이었다. "비궁(秘宮)으로 대화룡을 옮겨라." 아란하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휘 - 잉! 휭! 황사의 폭풍이 불고 있었다. 아란하는 따뜻한 물로 노독을 푼 후 마유주(馬乳酒)를 마시며 부는 바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월영궁의 풍경은 언제나 이렇다. 누런 모래흙, 누런 바람……. 아란하는 자신도 그런 색깔로 고사(枯死)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비감(悲感)함을 느꼈다. 무엇 때문에 이 황량한 곳을 지키고 있는가? 중원으로 나아가겠다던 일지국의 꿈은 사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니, 일지국의 꿈을 빼앗아 간 사람은 바로 사부였다. 농관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사부는 정파의 반격이 만만치 않으리 라는 것을 예상했다. 아버지에게 대화룡을 요구했다. 당연히 아버지 는 사부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습격이 펼쳐졌다. 사방위, 십 위병이 죽고 아버지도 죽었다. 일지국의 모든 자들이 죽음의 칼날 아 래 놓여 있었다. 아란하는 사부를 배신할 수밖에 없었다. 하라사로 하여금 어린 월영궁의 제자들과 함께 대화룡을 미리 준비 해 둔 비처에 숨기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사부, 곽부에게 칼을 들이 밀었다. 처음부터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는 사부, 곽부의 힘을 너무 과소 평가했고 그녀의 힘을 너무 과대 평가했던 것이다. 싸움에 나섰던 월 영궁의 전 문도들이 옥쇄(玉碎)했다. 수치스럽게 그녀는 살아남았다. 마지막에 그녀에게 칼을 들이댄 자는 이사형, 창파였다. 이사형은 정 때문에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했다. 주위의 시선 때문에 칼을 휘 두르기는 했지만 요혈과 심장은 긋지 않았다. 훗일, 이사형을 만나면 그 일에 대해서는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사형 은 없다. 소문으로 듣기에 화산의 도림새라는 곳에서 능운공작의 칼 에 목숨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가슴에 끔직한 상처를 남긴 채 살아났다. 사부도 이루지 못한 중원 진출의 꿈, 자신은 더욱 이룰 수 없는 일 이고……. 일지국의 부흥만은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들이 없었다. 전왕이 될 자도 없었고 노관이 될 자도 없었고 사방위, 십위명…… 그 자리를 지킬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부의 악랄한 칼이 일지국의 남정네들을 모두 쓸어버린 것이다. 여인왕국(女人王國)을 꿈꾸었다. 그러나 어디 남자가 끝까지 여자 들의 말에 순종할 물건들인가. 처음에는 일지국 부흥의 꿈에 오냐오 냐해도 나중에는 자신의 야욕을 드러낼 것이 틀림없었다. 중원 진출의 꿈도 일지국 부흥의 꿈도 없었다. 그 속에서 그녀는 맹목적으로 대화룡만 찾았다. 이제 아홉 번째의 대화룡은 나타나고……. 아란하는 정말 자신이 할 일이 없을 듯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하라사를 따라 피난했던 어린 제자들은 이제 모두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 짝을 찾을 나이가 된 것이다. 월영궁을 해체한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짝을 찾아 떠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은……. 대화룡이 모셔진 비궁에는 수 천근의 폭약이 매장(埋藏)되어 있다. 적들에게 넘겨주느니 산더미 속에 묻어 버릴 생각으로 매설(埋設)해 둔 폭약이다. 아란하는 그 폭약을 다른 데 사용할 방도를 찾았다. 월영궁을 해체 하고 제자들을 떠나 보낸 후 그녀는 비궁의 폭약을 터뜨려 대화룡과 함께 영원히 묻힌다. 그때가 언젠가 하면 지금이 그때인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아니었 다. 아직은 버릴 수 없는 희망이 있었다. 기다림! 젊었을 때는 열정으로 기다렸고 지금은 지난날의 그 열정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으로 기다렸다. 올 것이다. 한동안 보이지 않더니 근자에는 자주 보였다. 지난 밤 꿈에도 찾아 왔었다. 분하의 창파 속에 금검을 들고 오연히 서 있던 사내! 죽었다는 소문은 들었으나 그녀는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 죽음이 정말 사실이라고 믿어지는 그 어느 날, 그녀는 비궁 속 에서 대화룡과 함께 잠들 생각이었다. "궁주!" 아란하는 잠에서 벌떡 깨어났다. "큰일났습니다!" 하라사가 목채를 쿵쾅거리며 들어왔다. '올 것이 온 것인가.' 아란하는 머리를 가지런히 쓸며 일어났다. 그녀는 사패의 하나인 맹호전을 생각했다. 맹호전이 근자에 새외로 점점 세를 넓혀 가고 있 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 와중에 월영궁이 드러난 듯했다. "밖을 보십시오!" 하라사가 손짓을 했다. 아란하는 옷을 입고 패검을 차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백 개의 횃불이 귀화처럼 흐르고 있었다. "활로는?" "없습니다. 사방이 적들입니다." 하라사는 죄스러움에 고개를 숙였다. 적들이 지척으로 올 때까지 적의 동정을 눈치채지 못한 책임은 그녀가 져야 했다. "모든 제자들을 비궁 앞으로 모이게 하라." 옷을 추스르며 아란하는 말했다. 하라사의 말대로 사방이 적들이었다. 사패는 아닌 모양이었다. 기 마대가 조직된 사패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병마(兵馬)를 동 원했는데 좋은 일로 왔을 리 없었다. 싸워야 할 적임에는 분명한 듯 했다. 포위를 뚫는 일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다. 설혹 뚫을 수 있다고 하더 라도 살아남을 자는 몇 명에 불과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란하는 당 당히 싸우기로 작정했다. 다행히 그녀의 뒤에는 수 천근의 폭약이 있 다. 당하는 이상의 피해를 적들에게 줄 자신은 있었다. 횃불이 쫙 갈라졌다. 탁! 탁! 탁! 둔중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세 필의 말이 다가왔다. 후미의 두 명 의 기마인(騎馬人)은 횃불을 들고 있었다. 횃불이 선두의 기마인을 비췄다. 그때까지는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선두의 기마인이 일장을 격하고 우뚝 섰을 때 아란하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작은 눈, 불쑥한 광대뼈, 강인한 턱…… 듬성듬성한 수염들은 제법 위엄 있게 길러져 있었다. "대사형!" 아란하는 꿈인가 했다. 밤중에 찾아온 기마인은 단혈철각련 내 몽 고의 푸른 늑대, 파벽전을 이끌던 첫째 사형, 치치터루(棋棋特魯)였 다. "많이 찾아다녔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치치터루는 씩 웃으며 말에서 내리려 했다. 수하 한 명이 뽀르르 달려와 말 아래 등을 숙였다. 치치터루는 수하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렸다. "아란하, 너는 여전히 예쁘구나." 그가 채찍으로 가죽신을 툭툭 치며 말했다. "대사형,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림새에서……." "죽은 줄 알았더냐? 도림새까지 갔었지. 그러나 그 싸움이 시작되 었을 때 나는 바로 초원(草原)으로 발길을 돌렸다. 먼 곳에서 그 싸 움을 지켜만 보고 있었지." "……." "나도 너도, 둘째도 셋째도 사부가 어떤 자라는 것은 다 알고 있었 지. 자신만을 생각하는 위인…… 이용만 당하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진작했다. 그러나 미련을 떨치지 못했어. 단혈철각련을 나에 게 넘겨줄지 모른다는…… 그리고 사부를 벗어나는 것이 겁도 났다." "그런데 왜?" "일지국과 월영궁을 없앤 자는 둘째와 진 호법이었지. 도림새로 가 는 도중 둘째와 합류했다. 둘째를 보자마자 사부는 노발대발했다. 둘 째를 죽이려고까지 하더군. 우리는 이유를 몰랐다. 배신자는 죽이는 것이 우리의 법이 아니냐. 둘째와 진 호법을 보낼 때 모두의 앞에서 분명 너를 죽이라는 명도 내렸었다. 명을 잘 수행하고 온 둘째에게 왜 저렇게 화를 낼까. 그래서 진 호법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사부가 저토록 화를 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진 호법이 웃으며 이야기하더 군. 일지국으로 가기 전에 련주가 은밀히 불러 다른 명을 내렸다고 하더구나. 너를 죽이지 말라는…… 모처에 곱게 모셔 놓아라 했다고 한다. 왜? 중원을 평정한 후 사부는 너를 통해 후세(後世)를 얻고 싶 었던 게야. 호법들과 갈인후에게는 예전부터 그런 의중을 밝힌 모양 이다. 혹시 그 늙은 것들도 너에게 눈독을 들일까 염려되어…… 핫하 하!" 치치터루는 짜랑하게 웃었다. 아란하는 안색을 찌푸렸다.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는 온 몸에 소름 이 끼쳤다. '이사형이 그간의 정리도 아랑곳 않고 험하게 칼을 쓰고 나를 죽음 까지 몰고 간 이유는 또 달리 있었구나.' 그녀는 이사형, 창파에게는 또 다시 고마웠다. 생각하니 창파는 성 격이 직선적이고 불같아 포악해 보일 뿐 음흉함과는 거리가 먼 쾌남 자(快男子)였다. "셋째와 너는 조금 사이가 좋았었지. 생각해 보니 셋째가 쓸데없는 흑막이라는 곳까지 보내진 이유도 너 때문인 듯 하더구나. 너와 셋 째를 떨어지게 하기 위해! 너도 알다시피 흑막은 십장로들 중 한 명 이 맡아도 충분한 곳이었지. 후후후, 사부는 그런 자다. 하지만 나는 사부의 그런 점은 이해할 수 있었어. 능력 있는 남자라면 그만한 권 리는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문제는 나였다. 네가 아닌 다른 여 자에게서라도 사부는 후세를 얻으려 할 것이다. 그 후세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 하겠지. 그럼 나는 무엇인가? 실컷 이용만 당하 다 내팽개쳐지는 신세가 되는 거야. 사부와의 정이 싹 떨어지더군. 등을 돌렸다. 멀리서 능운공작의 칼에 사부의 목이 날아가는 것을 보 았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달라 보이고 좋아 보이더구나." 치치터루는 채찍을 흔들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요? 이사형이 말해 주던가요 ?" "둘째가 나에게? 흐흥, 둘째는 사부 못지 않게 나도 싫어했지. 너 를 죽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할 리가 없지. 단지 나는 진 호법의 이 야기에서 네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창파는 너를 죽이는 일 도 너를 데려가는 일도 싫었을 것이다. 당연히 창파는 뒷짐을 지고 있어야 했고 너를 상대하는 일을 진 호법에게 맡겼어야 옳았다. 그런 데 스스로 나서 너를 죽였다고 하더군. 앞뒤가 맞지 않아. 창파가 너 를 빼 돌리기 위해 죽인 척 한 것이구나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돌아 와 시신들을 확인해 보니 당연히 너는 없더군." "나를 찾기 위해 시신을 뒤적이는 수고까지 하다니…… 무슨 이유 로 나를 그렇게 찾아다녔나요?" 아란하가 가슴을 펴며 물었다. "몰라서 묻나. 나는 네가 필요하다. 지난 세월에 대한 덤으로 대화 룡까지!" 치치터루는 안광을 빛냈다. 아란하는 패검의 손잡이를 만졌다. "아란하, 보아 다오!" 치치터루는 우수를 들었다. 장심이 검게 변하며 묵기가 귀기(鬼氣 )스럽게 물씬 피어올랐다. 묵기는 금방 치치터루의 전신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장심으로 쏜살같이 빨려 들어갔다. '아!' 아란하는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묵령장법! 대사형은 예전 사부의 위용과 비교할 만한 무공의 성취 를 이룬 듯했다. 아란하는 패검을 뽑는 것을 포기했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하라사!" 그녀가 부르자 하라사는 고개를 끄덕했다. 이미 그녀와 하라사 사 이에는 약속된 바가 있었다. 하라사는 횃불과 함께 심지를 들었다. 수 천근의 폭약에 이어진 심 지였다. 아란하는 다시 등을 돌렸다. "대사형,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내 대답은 저것이에요. 오랜만에 옛 정을 되살리며 불꽃놀이를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치치터루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아란하, 너는 항상 만일을 위한 대비가 되어 있구나. 할 수 없군. 선택을 네게 돌리겠다. 너와 대화룡을 내게 준다면 나머지 자들은 살려주겠다. 선택하라! 일 각의 시간을 주겠다." 휙! 그가 등을 돌렸다. 그는 훌쩍 말에 올랐다. "네가 폭사의 협박까지 하며 나를 거부할 줄은 몰랐다!" 그가 냉랭히 소리치며 말의 고삐를 챘다. 히히힝! 치치터루는 수하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철궁(鐵弓)!" 그가 곁에 선 수하에게 소리쳤다. 그는 수하로부터 받은 커다란 철궁에 강전(强箭)을 매겼다. 핑! 강전이 비궁을 훨씬 지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폭발의 범위 밖에서도 언제든지 월영문의 문도들을 죽일 수 있다는 경고였다. "궁주, 우리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라사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하지만 아란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벌어진 싸움이라면 간신히 문도들의 목숨은 각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문도들의 생명은 치치터루로 인해 그녀의 선택에 맡겨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구나.' 아란하는 마음을 굳혔다. 대화룡과 자신을 위해 문도들의 목숨을 내 놓아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치치터루에게 자신과 대화룡을 받칠 수도 없었다. "대사형!" 그녀는 치치터루를 불렀다. "문도들을 안전한 곳까지 보내 주세요. 그 다음 대사형의 청을 받 아들이도록 하겠어요!" "너는 끝까지 나를 믿지 못할 자로 만드는구나. 좋다! 약속하겠다. 문도들을 보내라!" 치치터루가 냉랭하게 말했다. 아란하는 문도들을 향해 등을 돌렸다. 그녀는 문도들로 하여금 빨 리 이곳을 벗어나라고 말하려 했다. 하라사가 먼저 단호한 어조로 소리쳤다. "안됩니다! 단혈철각련에 연루된 자는 누구를 불문하고 우리들의 원수입니다. 어찌 궁주를, 대화룡을 놈에게 내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 "안됩니다! 오히려 죽는 것이 낫습니다!" 문도들도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아란하는 하라사를 설득하기 위해 곁으로 다가가려 했다.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그 자리에서 싸우겠다는 답을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면 폭약에 불을 붙이겠습니다!" 그녀는 횃불을 심지 가까이 대며 위협했다. 문도들도 아란하가 심지를 빼앗지 못하도록 하라사 주위를 몸으로 벽을 쌓았다. 말은 싸움을 외쳤으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길 수 없어 하던 문 도들의 표정도 변해 있었다. 단혈철각련에 연루된 자라는 하라사의 말이 죽은 부모와 형제에 대한 복수심에 활활 불을 지핀 모양이었다. 원래 아란하는 문도들을 피신시킨 후 자신은 폭약을 터뜨려 대화룡 과 함께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하라사와 문도들이 결사항전(決死抗 戰)을 주장하자 그 방법도 쓸 수 없었다. 아란하는 한숨을 쉬며 치치터루를 마주보고 섰다. 그녀는 싸울 수 밖에 없음을 말하려 했다. 그때였다. "으악!" "악!" 갑자기 비명이 터지며 횃불이 미친 파도처럼 이리저 리 흩날렸다. 치치터루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밝은 그의 눈은 후미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번에 포착했다. 유령처럼 한 사내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바쁘게 움직이지도 않 았다. 산책을 하듯 유유히 움직이며 손목만 까딱였다. 손목이 움직일 때마다 은선이 번쩍이며 수하들의 팔, 다리, 동강난 칼이 날았다. 치치터루가 자랑하는 몽고의 푸른 늑대, 죽음을 모르는 용맹한 수 하들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치치터루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적개심으로 이를 드러내며 느닷없 이 찾아온 살귀(殺鬼)를 향해 신형을 뽑으려 했다. 확! 불길이 치솟았다. 불길이 치솟아 치치터루의 발길을 막았다. 수하들이 쓰러지며 놓친 횃불이 마른 잎에 옮겨 붙어 화마를 불러오 고 있었다. 바람까지 일어 주위는 순식간에 초열지옥(焦熱地獄)으로 변했다. "으악!" "악!" 꺼먼 연기와 불덩이 속에 수하들이 애처롭게 날뛰고 있었다. 불길은 한순간에 모든 것을 태웠다. 타탁! 탁! 타탁! 수하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고 붉게 이글거리는 화마의 구덩이 속 에서 생나무 타는 소리만 요란했다. 대자연의 위용 앞에 인간의 힘이 란 얼마나 초라한가! 미련한 적도 갑자기 불어닥친 화마에 몸을 자글 자글 태우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치치터루의 생각! "나는…… 모두 들었다. 누가 나의 물건을 탐내는가?" 천공을 웅웅거리며 들려 오는 목소리……. 치치터루는 머리칼이 쭈뼛 섰다. 훅! 강한 바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그와 동시에 초열지옥 사이로 평평한 길이 생겼다. 그 길을 살귀는 걸어오고 있었다. 화마 는 그의 곁에 근접도 못했다. 그가 좌수를 들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빛의 구슬이 들려 있었다. 구슬이 채홍색으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주위의 화기들이 구슬로 모 여들었다. 구슬이 화기를 삼키고 있었다. 묵주에서 쏟아지는 채홍색 빛이 더욱 짙어졌다. 중천을 밝히는 태양 같았다. 살귀는 구슬을 둥실 띄웠다. 그가 격공섭물로 기마대를 향해 구슬 을 날렸다. 훅! 훅! 뜨거운 열기가 폭풍처럼 몰아치며 구슬은 지나치는 모든 것을 고사시키고 불을 일으켰다. 치치터루도 그 맹렬한 화기는 견디지 못했다. 먼저 그의 애마가 혀 를 빼며 뒷걸음질을 쳤다. "피하라!"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순간, 구슬이 유성처럼 붉은 빛으로 흐르며 치치터루의 수하들 사 이를 휘돌았다. 치치터루의 수하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들은 목내이(木乃 伊)처럼 고사하며 인광(燐光)과 함께 금방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수하들을 간단히 처리하고 난 살귀는 격공섭물로 구슬을 거두고 있 었다. "이, 이……." 두려움 반, 적개심 반, 치치터루는 주먹을 쥐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칼을 가슴에 대고 장심을 그 앞에 세웠다. 묵기가 흑운 (黑雲)처럼 피어오르며 치치터루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살귀도 우수를 들었다. 붉은 장영이 천수관음의 손으로 불어났다. 치치터루와 살귀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신형을 날렸다. 콰쾅! 쾅! 쾅! 뇌음(雷音)에 아란하는 머리가 아찔했다. 바람은 불을 부채질한다. 바람으로 불을 잡을 수 있는 것은 파초선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치치터루와 돌연한 방문자는 경기의 여파 만으로도 그들의 등 뒤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잡고 있었다. 아란하는 대사형, 치치터루에게 갈채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가 어떻게 용맹정진(勇猛精進)했는가는 지금 이 한 판에서 여실히 보 여지고 있었다. 대사형, 치치터루에게 조금의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그는 석년(昔年)의 사부가 지녔던 무위를 초월할 듯했다. 하지만 대 사형, 치치터루에게는 더 이상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듯했다. 아란하는 불청객(不請客)이 순식간에 수백 명에 이르는 대사형의 수하들을 불귀의 객으로 만들었을 때 이미 사람으로서는 상대할 자가 아님을 눈치챘다. 예상대로 붉은 장영은 대사형의 묵기를 완전 압도하고 있었다. 아 란하는 모르고 있었지만 치치터루는 버틸 만큼 버틴 것이었다. 불청 객의 손에 대곤륜 장문인이 어떻게 당했는가를 알았다면 그녀는 패색 이 짙어 보이는 지금 이 순간에도 치치터루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이 다. 대곤륜의 장문인은 불청객을 상대로 몇 합도 견뎌 내지 못했었다 . 그러나 치치터루는 자신의 기예를 제법 선 보이고는 있었다. 갑자기 붉은 장영이 사라졌다. 묵령공(墨靈功)으로 펼치는 대사형 의 묵기는 여전했다. 대사형은 물론 불청객까지 덮고 있었다. 아란하는 알 수 없었다. 갑자기 왜 전세가 역전되었는지……. 그녀는 손에 땀을 쥐었다. 두려움은 그녀도 느꼈지만 호의는 처음 부터 이상하게 대살성(大殺星) 쪽이었다. 대사형이 위기에 처했을 때는 그간의 정리 때문에 물론 대사형이 죽지 않기는 바랐었다. 아란하가 이제 그 반대의 염려를 하고 있을 때였다. 흑운처럼 피어 오르던 묵기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그리고 묵기가 사라지며 대사형과 불청객의 모습이 어둠 속에 드러났다. 불청객의 완강한 등과 대사형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아!" 아란하는 창백한 안색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대사형의 머리를 불청객이 좌수가 매의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손가락이 두부(頭部)를 뚫은 듯 대사형의 이마를 타고 피가 줄줄 흘 렀다. 불청객의 우수는 대사형의 단전에 밀착되어 있었다. 대사형은 가끔 거친 숨을 내쉬며 몸을 거세게 떨었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나 방이 거미줄을 벗어나기 위해 날개를 파닥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 사형은 불청객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대사형, 치치터루의 눈빛이 흐릿해 졌다. 그 눈빛은 그녀에게 말하 고 있었다. 나를 도와 다오. 아란하는 정말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나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버지에게 들었고 사부에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상대의 기를 자신의 내력으로 빨아들이는 무서운 인단의 술, 방중 을 통한 채양, 채음의 사술(邪術)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술법이었다. 흡정술! 아버지도 말했고 사부도 말했다. 흡정술은 배교가 자랑하던 독문 절예 중 하나였다고……. 아란하를 바라보던 치치터루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뿌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입을 해 벌리며 눈을 스르르 감았다. 대살성이자 불청객은 대사형을 맛있게 포식(飽食)한 후 등을 돌렸 다. 손가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 거미줄을 뽑아 내는 그 손은 다음에는 누구를 노릴 것인가. 아란하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와중에 그녀는 살귀, 대살성, 마왕, 인면주(人面蛛)의 얼굴이 겹쳐 조각조각 보이던 불청객의 얼굴을 짜 맞출 수 있었다. 아란하의 굳건하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녀는 주저앉고 싶었 다. 만 가지의 생각들이 질풍노도(疾風怒濤)처럼 그녀의 머리 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그녀는 불렀다. "명옹……." 아란하를 바라보는 불청객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뿌렸다. "나를…… 명옹이라 부르지 마라. 그는, 그는…… 누구인가?" 불청객은 천둥 같은 소리로 우르릉거렸다. 대사형과 싸울 때에도 무심하던 그의 눈에 핏발이 서는 것을 아란 하는 보았다. 불길을 잡고 어지럽게 널린 병장기와 시신들을 정리했을 때는 이미 계명성이 빛을 내는 새벽이었다. 아란하도 지쳐 있었고 하라사와 문도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 그러 나 누구 하나 눈을 붙이는 자가 없었다. 구르는 나뭇잎에도 깔깔거리던 문도들은 입을 딱 붙였다. 무거운 침묵……. 아란하는 자신이 기다리던 사람을 문도들이 음울한 분위기에서 맞 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생각할 것이 많아 침묵하고 싶었 지만 천상 입을 열어야 했다. "그분은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었다. 우리와 같은 뿌리를 가진 분 이지.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아란하의 말에 문도들은 일제히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살아 있어 도 살아 있다고 말하지 못하던 그들이었다. 문도들은 왜 진작 그 같 은 말을 하지 않았느냐는 원망의 눈길을 아란하에게 보냈다. 그러나 문도들의 눈빛에는 아직도 두려움과 불안이 가셔지지 않고 있었다. 부모와 형제들이 쓰러지는 그 처참한 모습도 목도(目睹)한 그녀들이 었는데도……. 아란하는 이해했다. 그녀도 중원의 호교신장이 사람 아닌 그 무엇 으로 느껴졌었다. "그분은 정말 배교도가 맞습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하라사가 갑자기 물었다. 하라사에게는 이미 말 해 주었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시 묻고 있었다. 아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라사는 눈을 번쩍 떴다. "궁주, 그분이 혹시 전설을 실현시켜 줄 그분이 아닐까요? 아홉 번 째 용이 발견되자마자 그분은 나타났습니다!" 그녀가 큰 눈을 빛내며 소리쳤다. 하라사는 줄곧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던 듯했다. "대화룡의 전설!" "그분이……." 하라사의 말에 문도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눈빛에 두 려움과 불안 대신 어떤 흥분된 열기들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하라사 도 마찬가지였다. "모르겠다." 아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갑한 마음이었다. 바람이라도 쐬었으면 했다. 그녀는 천천히 밤길을 걸었다. 돌아온 자의 엄청난 무위, 대화룡, 배교일세……. 그 말들은 지금 아란하에게는 스쳐 가는 말들일 뿐이었다. 무척 기다렸었다. 내가 그렇게 기다렸으므로 상대도 그만한 기다림의 무게로 올 줄 알았었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생각하니 정말 자신은 착각 속에 살아 온 것이다. 기다려 달라고 청해 오지도 않았었고 기다리겠다고 말하지도 않았 었다. 정담(情談)을 나누기는커녕 얼굴 한 번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 그런데 무슨 미련으로 기다렸을까. 성녀를 태우고 황하를 오르던 십 여년 전, 그때부터의 일일 것이다 . 그때부터 그녀는 이유도 모른 채 기다림으로 가슴 졸였다. 무조건 기다리기만 하던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다고 이제야 느끼는 것도 참으 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란하는 머리칼을 쓸었다. 달빛 아래 긴 그림자가 보였다. 긴 그림자는 십 여년을 기다렸던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 바로 그였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란하의 가슴은 다시 뛰었다. 이지(理智)는 분명 이상한 일 투성이라고 의문을 달고 있었으나 마 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래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호교신장은 쳐다보지도 않고 물었다. "아란하! 일지국 전왕의 딸이었습니다." 아란하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호교신장은 우수를 들었다. '어!' 아란하의 몸은 허공으로 둥실 떴다. 그녀는 강력한 흡인력( 吸引力)에 끌려가고 있었다. 호교신장의 품안이었다. 그의 깊이를 모르는 무심한 눈빛이 아란하 의 눈동자에 닿았다. 아란하는 매에 채인 병아리처럼 꼼짝도 못했다. 파팟! 호교신장은 쌍수를 번뜩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옷을 거칠게 헤치며 옥당혈(玉堂穴)과 명문혈(命門穴)에 흡판(吸板)처럼 달라붙 었다. 옥당혈은 젖가슴 사이에 있고 명문혈은 치부(恥部) 위에 있었으므 로 아란하는 목까지 붉어졌다. '헉!' 아란하는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내력이 썰물처럼 주르르 흘러 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절망으로 흔들렸다. 호교신장은 그녀에게조차 흡정술을 펼치고 있었다. '아, 아…….' 내력을 뺏기는 데에 대한 고통 보다 배신의 고통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갈가리 찢었다. 그녀는 절망했고 체념했다. 처음의 느낌대로 이제 배교의 호교신장 은 사람이 아닌 마물(魔物)로 귀향(歸鄕)한 것이다.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이런 죽음을 맞기 위해 그토록 그를 기다렸던 가. 모든 것이 끝이었다. 끝이라 생각했다. 순간, 아란하는 명문혈을 파고드는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엄청난 내력이 다시 그녀의 기혈로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흘러 나갔던 내 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다행히 같은 종류의 내력이었다. 그녀는 그 내력이 호교신장이 흡 정술로 빨아들였던 대사형의 내력과 자신의 내력이 합쳐진 것임을 알 아챘다. 내력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폭풍처럼 임맥(任脈)의 회음혈(會陰穴) 에서 승장혈(承漿穴)까지를 꿰뚫고 독맥(督脈)의 장강혈(長强穴)로부 터 신정혈(神庭穴)까지도 꿰뚫었다. 양맥(兩脈)을 광풍으로 휘몰아치던 내력이 서로를 향해 맹렬히 부 딪혀 갔다. 쾅! 아란하는 고통으로 입을 딱 벌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 고 그녀는 의식을 잃는 순간 느꼈다. 임독이맥(任督二脈)이 너무도 쉽게 타통되어 버린 것을……. 아란하는 눈을 번쩍 떴다. 임독이맥이 타통된 것이 맞았다. 샘물 솟듯 내력이 넘쳐흐르고 있 었다. 그녀는 너무도 상쾌해 어깨를 우쭐거리고 싶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아란하는 급히 주위를 살폈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은 처음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소음마( 消陰魔)를 익혔는지 잠이 없는 모양이었다. "아란하!"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은 그녀를 불렀다. 천장절애를 웅웅 울리는 메아리 같이 음습한 목소리였지만 아란하 에게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하게 들렸다. 그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 준 것이다. "아홉 마리의 화룡을 실어라. 민산……." 호교신장은 말했다. "민산이라면 맹호전……." 호교신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아란하는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숙이며 아란하는 자신의 옷이 파헤쳐져 젖가슴이 다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옷을 추슬렀다. 촉감은 남아 있었다. 좋아질 것이라 믿었다. 이 장여 크기의 배였다. 육지를 질주하는 배! 아홉 마리의 대화룡을 싣고 이것저것 장식을 하다 보니 처음의 의 도와는 달리 교자(轎子)가 아니라 배가 되어 있었다. 아란하와 하라사가 특별히 모양에 신경을 썼고 모두 여인들의 손으 로 만들어진 물건이라 육지를 종횡할 배는 웬만한 꽃배와 비교가 되 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색깔도 오색(五色)으로 울긋불긋 했다. 후미에 두 마리의 대화룡을 장착했다. 좌우에 각기 세 마리…… 마 지막 한 마리의 대화룡이 선수에 장착되자 배는 완전한 모습을 갖추 었다. 구룡선(九龍船)! 중원이라는 대해(大海)를 질주할 배였다. 선두에는 황색, 청색, 백색, 흑색, 적색의 독전기(督戰旗)를 든 다 섯 명의 여인이 섰다. 그 뒤를 하라사가 이끄는 십 여명의 청의 여인 들이 받쳤다. 구룡선의 노처럼 된 부목(負木)을 좌우 각기 열 명의 녹의 여인들 이 들었다. 구룡선의 뒤에는 오십 여명의 홍의 여인들이 오열(五列)로 나란히 시립했다. 여인들은 모두 경장 차림이었고 패검을 차고 있었다. 살성으로 출현했던 배교의 호교신장은 선루(船樓)의 태사의에서 먼 산을 오시(傲視)했다. 꽃무늬가 수놓아진 백의를 입은 아란하가 패검을 차고 그 곁에 서 있었다. "민산! 가자!" 그녀가 소리쳤다. 독전기가 바람에 펄럭이며 길을 열고 구룡선은 그 뒤를 물결처럼 움직였다. * * * "이게 무슨 짓이요?" 비응보주 악진웅은 영문을 몰랐다. 중추절을 맞아 오랜만에 예전의 호기를 찾아 사냥을 다녀온 터였다 . 그 사이 비응보는 사패의 하나인 승룡방의 무사들에 의해 모두 장 악 당한 상태였다. 문도들의 시체도 몇 구 보였고 나머지 수하들은 칼을 푼 채 죄인처 럼 무릎을 꿇고 있었다. "으헤헤, 학(　) 선생(先生)! 보주께서 묻고 계시오. 정중한 설명 을 부탁하오." 길다란 수염을 꼬며 메기입을 씰룩거리는 자는 물론 사패의 하나인 승룡방의 방주, 팽해만이었다. 악진웅이 팽해만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팽해만이 승룡방을 세우고 개파대전(開派大典)을 열었을 때였다. 그 이후 처음 얼굴을 대하고 있었다. 수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메기 얼굴에 어울리는 수염이 길게 자란 것을 제외하고 팽해만은 여전히 동안(童顔)이었다. 팽해만의 곁에는 문건(文巾)을 쓴 말쑥한 차림의 중년인이 서 있었 다. 근엄한 표정에 청수한 외양을 하고 있었으나 어딘가 모르게 가벼 워 보이는 자였다. 그는 팽해만이 지낭(智囊)으로 부리는 학대통(　大通)이었다. 학대통은 팽해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보주께서는 우리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소. 우리는 이미 알 것 은 다 알고 왔소이다. 우리는 보주께서 흑산의 무리들과 손을 잡았다 는 결정적인 사실을 찾았소." 그가 근엄하게 말했다. "내가 흑산의 무리들과 손을? 어불성설(語不成說)이오!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있어……." 악진웅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나이와 비례하지. 악 보주께서는 이번에 새로 운 금침까지 깔았다고 하더군요." 학대통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수하들이 권해…… 내가 어린 계집을 들인 것과 흑산 의 무리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오!" 얼굴을 붉히던 악진웅은 생각하니 남의 잠자리까지 간섭하는 학대 통의 언사에 울화가 치밀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 아! 물론 상관은 없소." 짝! 짝! 학대통은 뒤들 돌아보며 손뼉을 쳤다. 승룡방의 수하들이 봉두난발의 사내 한 명을 결박(結縛) 지어 끌고 왔다. "물론 악 보주께서는 이 자를 모른다고 하시겠지요. 하지만 이 놈 은 악 보주를 안다고 했소. 이 놈은 수룡표국(水龍　局)의 표물을 노 린 놈 중의 한 놈이오. 표물을 털어라고 명한 자는 바로 악 보주라 하더이다." 학대통은 덤덤하게 말했다. 수룡표국은 교타방이 망한 후 황하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표국으로 승룡방의 분타나 같은 곳이다. "그런 터무니없는…… 네놈에게 언제 내가 그 같은 명을 내렸다는 말이냐? 나는 네놈을 본 적도 없다!" 악진웅은 봉두난발의 사내를 향해 악을 썼다. 봉두난발의 사내는 이를 악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그렇게 나오실 줄 알았소! 여봐라!" 학대통도 목청을 높였다. 그가 손짓을 하자 승룡방의 수하들이 비 응보의 창고를 활짝 열었다. "저 물건도 악 보주의 물건이요?" 학태통이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창고 내의 물건들을 가리켰다. 비단과 옥(玉)……. 악진웅은 눈을 크게 떴다. 보지 못했던 물건들이었다. "자기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말하시구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우 리는 더 이상 할 말은 없소이다." 학대통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감으며 뒷짐을 졌다. 악진웅의 얼굴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한 자루의 칼에 의지해 산림을 종횡했다. 머리가 희끗해졌을 때 비로소 산서의 패자로 군림했다. 그 와중에 더럽고 야비한 짓도 많이 저질렀지. 그래서 나는 언젠가는 검하(劍下)의 고혼이 되리라 생각 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죽음을 앞둔 이제까지 잘 버텨 왔다. 그렇 게 살다가 그렇게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 꼴이라니…… 차라 리 검하의 고혼이 됨만 못하겠구나." 악진웅은 고개를 숙인 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팽해만, 일전에 나에게 서신을 보내 비응보를 승룡방의 분타로 삼 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지. 나의 불찰이 있다면 그때 그 서신에 숨 은 말들을 너무 쉽게 넘겼다는 것이다. 몰랐다. 네가 이렇게 야심이 클 줄은…… 몰랐다. 네가 이런 더러운 방법까지 동원하며 비응보를 삼키려 들 줄은…… 아, 아! 나는 사패가 최소한 공작(孔雀)의 꼬리 는 될 줄 알았는데 참새의 꼬리만도 못했다니…… 팽해만! 비응보를 삼키려면 먼저 나를 죽여라!" 악진웅은 사자처럼 포효하며 감산도를 빼 들었다. 팽해만은 머리를 쓱쓱 긁었다. "저 늙은이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그가 깨지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죄를 죽음으로 씻겠다고 하는군요." 학대통은 짐짓 큰 한숨을 쉬었다. 팟! 악진웅은 비호처럼 팽해만을 향해 달려들었다. 쩡! 감산도와 유엽도가 얽혔다. 악진웅의 칼을 가로막은 자는 팽해만이 아니라 외당당주, 장목생이 었다. "비켜라!" 악진웅은 고함을 지르며 팽해만을 노리고자 했으나 장목생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팽해만은 악진웅과 장목생의 싸움을 뒤로 한 채 등을 돌렸다. 학대통이 그를 따라붙었다. "어이, 영 기분이 아니군." 팽해만은 묵편으로 마른땅을 툭 쳤다. "이왕 벌어진 판, 약한 마음은 버리셔야 합니다. 분하를 수중에 넣 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응보가 필요합니다." 학대통이 말했다. "방금 저 늙은이가 나를 참새 꼬리만도 못한 자라 했잖아! 으헤헤, 돼지 꼬리 보다 못하다면 몰라도 참새 꼬리라니……." 팽해만은 영 입맛이 쓴 듯했다. "구대문파의 세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사패와 구대 문파 간의 경쟁은 끝이 난다고 보아야지요. 사패 간에 강호의 주도권 을 놓은 싸움이 벌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입니다. 단심원주(丹心院 主)께서는 자신의 그릇을 아는 분입니다. 더 이상의 욕심을 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숭무각주(崇武閣主)께서는 천화원의 공작처럼 검로를 찾아 걸어가실 분입니다. 세상의 아귀(餓鬼) 다툼에는 별 관심을 가 지지 않겠지요. 남은 분은 방주와 맹호전주……." "으윽!" 비명이 학대통의 말을 끊었다. "팽해만,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 장목생의 칼에 악진웅이 피분수를 쏟으며 쓰러지고 있었다. "저 늙은이는 끝까지 자신을 모르는군요. 그에게는 방주를 쫓을 시 간도 없을 텐데…… 그는 스스로에게도 죽어서도 잊지 않고 기다릴 자가 많다는 것을 잊은 모양입니다." 학대통은 실소를 흘렸다. 웬만하면 메기입을 씰룩거리며 학대통의 말에 대꾸라도 해 주련만 팽해만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악진웅 주위에 일어난 불행한 일 은 당연히 모두 학대통이 꾸민 일이었다.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니 모략(謀略)은 아직 팽해만의 적성이 맞지 않는 듯했다. 처음 하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학대통은 팽해만이 곧 이런 일에도 익숙해지리라 믿었다. 남을 속이는 일만큼 재미있는 일이 또 어디 있을까. "맹호전주께서는 독문의 딸과 혼인을 한 후 독문을 기반으로 남만 에서도 급속히 세력을 넓혀 가고 있습니다. 서쪽으로는 천산파까지 넘본다는 소문입니다. 달리는 두 마리의 말 중 멈추는 말이 집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해야 합니다. 지지 않기 위해서는……." 학대통은 흔들리는 팽해만의 마음을 붙잡기 위해 이미 몇 번이고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알았어. 알았다구." 팽해만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황하 대상련(大商聯)의 일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번 일로 원주 께서 강호에 관심을 가진다면 정말 내 입장은 곤란하게 된다구." "원주를 찾아갔던 자가 금적보의 보주라 했지요. 양백! 겁 많은 장 사치들이 어떻게 해서 원주를 찾아갈 생각까지 했을까 해서 알아보니 이번 일은 양백, 그자가 모두 꾸민 일이더군요. 대상련의 상인들에 게 헛바람을 넣어 충동질을 하고 스스로 대표를 자처 원주를 찾아가 고자질을 하고……." 학대통은 미간을 좁혔다. "학 선생,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고 있다!" 팽해만이 짜증을 냈다. 얼마 전, 천화원으로부터 한 통의 서신이 왔었다. 팽해만이 젊은 날을 충심으로 따랐던 천화원의 원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당장 대 상련에 대한 상납을 금하라는……. 단원홍에 대한 팽해만의 마음만은 아직도 붉었다. 모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단원홍에게만은 잘 보이고 싶은 그였다. 그런데 그 런 서신을 받았으니……. "그렇지 않은 이야기도 자주 들으면 그렇게 믿어집니다. 특히 좋지 않은 이야기는…… 그리고 한 번 입을 나불거린 자는 다시 입을 나 불거리게 되어 있지요. 원주께서 주위의 좋지 않은 소문에 고개를 끄 덕이기 전에 입을 막아야 합니다." "죽이겠단 말이요?" "양백은 대상련의 중심에 선 자입니다. 황하 대상련을 길들이기 위 해서도 어쩔 수 없는 조치입니다. 빠를수록 좋지요." "으헤헤, 이제 장사치까지 죽여야 한단 말이지." "강호는 패도(覇道) 다음에 정도(正道)를 놓습니다. 정도에 마차를 올리는 기간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어물거리면 방주께서는 더 하기 싫은 일도 계획하게 될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학 선생, 표시 나지 않게 잘 해야 해." 팽해만은 이마에 주름살을 그렸다. "쉬운 일이지요." 학대통은 미소를 지었다. 팽해만은 나루터를 향해 묵묵히 걸었다. "학 선생, 나의 마차가 정도에 오르면 무엇이 달라지지?" 그가 문득 물었다. "다른 자들을 패도, 사도(邪道)라 명할 수 있지요." "으헤헤, 그것 참, 좋은 일이군." 팽해만은 비로소 그 답게 웃었다. "방주, 저는 비응보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 습니다." "알았소. 가 보시오. 아! 학 선생……." 팽해만이 등을 돌리는 학대통을 불렀다. "내가 정도라는 그 이상한 길에 오르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할 것 같 소?" "내가 어찌 방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원하던 좋은 일을 하시겠지 요." 학대통이 눈웃음을 지었다. "가 보시오." 팽해만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으헤헤, 학대통! 내가 그 길에 오르면 제일 먼저 네놈의 목부터 벨 것이다.' 그는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히죽 웃었다. '죽일 놈! 괜히 허파에 바람을 넣어 귀찮은 일만 만들어 놓고…… 원주를 따라 강호를 누빌 때가 좋았었지. 엉? 지난 추억을 그리워 하 면 나이가 든 징조라는데…… 그렇지. 짧은 세월은 아니었다.' 팽해만은 한숨을 쉬었다. 동안(童顔)이었지만 눈가에 주름살이 늘 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제28장 광풍(狂風) 사삭! 삭! 이십 여명의 인원이 능선을 오르고 있었다. 구름이 달을 가려 주는 좋은 날이었다. 사위는 조용했고 바람 따라 가랑잎은 우수수 떨어졌다. 어둠 속에 소옥 한 채가 보였다. 그 속옥을 앞에 두고 다섯 명의 무사가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 위대의 무사들이었다. 능선을 오르던 자들은 나무 사이에 급히 몸을 숨겼다. "생각 보다 경비가 허술한 것 같지 않소?" 선두의 자가 뒤에 선 각진 얼굴의 중년인에게 물었다. "누가 감히 천화원의 안뜰을 침입해 오리라 생각하겠소. 그리고 금 옥의 비밀이 외부에 알려졌으리라 생각하는 자들도 아무도 없을 것이 오."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말했다. 선두에 선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高) 명두(明頭)는 여기서 교군들과 함께 기다리시오. 장(張) 명두(明頭)와 내가 성녀를 모셔 오겠소." 그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각진 얼굴의 중년인은 주먹을 쥐어 보이며 명을 받았다. 선두에 선 자가 손짓을 했다. 우락부락한 대한을 비롯 다섯 명의 교군이 선두로 나섰다. 교군들 중에 날고 뛴다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튼튼한 포승이 들려 있었다. 선두에 선 자가 다시 한 번 손짓을 하자 그들은 일제히 산개(散開) 했다. 잠시 후, "억!" "헛!" 하는 신음과 함께 소옥을 지키던 천위대의 무사들이 쓰러졌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면 성녀께서 놀라실 것이오. 장 명두 만 나와 함께 갑시다." 교군들을 이끌던 자가 언월도(偃月刀)를 든 우락부락한 대한에게 말했다. 대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녀가 놀랄까 언월도도 등 뒤에 숨겼다. 그들이 소옥으로 나아갔다. 소옥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다가서자 등불이 켜지며 창문이 열렸다. 두 명의 명두들은 함정인가 싶어 급히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창문에 그림자만 어른거렸다. 둘의 시선은 퍼뜩 그림자에 고정되었다. 십삼사 세의 계집이었다. 허리에는 보화가 찬란한 단도를 차고 있 었고 오른 손에는 작은 함 하나를 들고 있었다. 예령, 금옥의 주인……. 예령은 두 명의 명두들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쯤 오실 줄 알았죠. 내려가겠어요." 그녀는 창틀 위에 훌쩍 올라섰다. "그럼……." 두 명의 명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성녀시여! 호남 명두, 감악이 이제야 성녀를 모시러 왔습니다." "사천 명두, 장탄(張坦)이 성녀를 뵙습니다." 그들은 격양된 목소리로 급히 부복했다. 선두에 선 자는 감악이었다. 성녀와 명옹이 사라지고 난 후 교의 실질적 책임자로 교의 부흥을 위해 밤낮을 잊었던 자! 장탄은 사천 명두였던 추대괄로부터 명두의 인을 물려받았던 자다. 그는 감악을 도우며 서북 지역의 교세 확장을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 는 중이었다. 예령은 창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감악은 주체하지 못하는 감동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 아!' 틀림없었다. 벌써 십 여년 전의 일이다. 그때 그는 동정호에서 성 녀의 얼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었다. 그 뒤에 한 번 더 본 것 같기는 한데 그 때는 꿈인 듯 했고…… 어쨌든 그때 동정호에서 본 성녀의 얼굴은 지금도 감악의 기억에는 생생했다. 눈앞의 어린 성녀 는 그때의 성녀와 똑 같은 얼굴이었다. 성녀가 아님을 의심하려 해도 의심할 수가 없었다. 감악도 장탄도 더 이상의 말은 못했다. 그 어려웠던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갔다. 이 날이었다. 이 날을 위해 끝까지 버텨 온 것이다. 가슴은 벅찬 감동으로 터질 것 같았다. 그들은 내색을 숨기기 위해 누구라 할 것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예령은 감악과 장탄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듯 천연덕스럽기만 했다 . "그분을 만나러 가는 길이죠?" 그녀가 뒷짐을 지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분이라니…….' 감악과 장탄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순간, 나뭇가지 하나가 그들 앞으로 툭 떨어졌다. 강서 명두, 고명 상(高明像)이 보낸 서두르라는 신호였다. "업히십시오." 장탄이 넓은 등을 내밀었다. 예령은 십 여년 간 지내 온 소옥을 애잔한 눈길로 빠짐없이 둘러보 았다. "잘 있어라." 그녀가 손을 흔들며 장탄의 등에 찰싹 업혔다. 감악과 장탄은 곧 강서 명두, 고명상과 합류했다. "서두릅시다!" 감악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선두에서 길을 열었고 장탄은 예령을 업은 채 중간을 지켰다. 후미는 고명상이 맡았다. 성녀를 처음 본 고명상은 다른 말도 못했다. '성녀시여, 성녀시여…….'라고 되풀이했을 뿐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 확인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감악은 필경 고 명상이 눈물을 흘리며 성녀의 뒤를 따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둠 속에 황하의 물굽이가 보였다. 현하(現下) 교의 명두들 중 최연장자(最年長者) 섬서 명두, 유공경 (兪恭敬)이 빠른 배로 성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범의 아가리를 이렇게 쉽게 빠져 나올 줄 감악은 몰랐었다. 명왕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이라 믿었다. 그러나……. "멈추어라!" 어둠 속에서 한 떼의 무사들이 길을 막았다. 사자코에 위맹한 인상의 청년이 삼사십 명의 천위대 무사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한(韓) 아저씨!" 장탄의 등에 업혀 있던 예령이 앞뒤 모르고 반갑게 손을 들었다. 예령은 사자코 청년을 알고 있었다. 백발 아저씨와 함께 가끔 소옥을 들렀기 때문이다. 우스개 소리를 잘 하는 아저씨였다. 그래서 무턱 대고 반가웠다. 그러나 그녀는 곧 그 아저씨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를 알았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놈들은 사악한 무리들입니다!" 사자코 청년이 소리쳤다. 그는 천위대의 부대주, 한고였다. "아니에요. 이분들은 사악한 분들이 아니에요." 예령은 한고의 고함에 놀라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고 명두!" 장탄이 고명상을 불렀다. 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고명상은 장탄의 생각을 읽었다. "성녀, 저에게 오십시오." 그가 장탄에게서 예령을 받아 안았다. "성녀? 역시 네놈들은 배교의 잔당들이었군!" 한고가 눈에 불을 켰다. 금옥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배교 도들일 것이라는 원주의 말이 맞았다. 성녀 운운하며 찾아 올 것이라 했다. 더 이상 자초지종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슥! 그가 검을 빼 들었다. 그 순간 장탄의 낭아봉이 날았다. 파팟! 한고의 검도 빛을 발했다. 검영이 나뭇잎을 날리며 장탄의 낭아봉 사이로 교묘히 파고들었다. "헉!" 장탄은 놀라 황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는 능운공작으로부 터 직접 몇 수의 지도를 받은 한고의 상대로는 실력이 모자랐다. 휙! 감악이 장탄의 앞을 막았다. "장 명두, 고 명두! 여기는 내가 책임지겠소! 빨리 성녀를 강으로 모시시오!" 그가 고함을 지르며 한고를 상대했다. "어디를 달아난단 말이냐! 한 놈도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한고가 비호처럼 감악을 덮치며 소리쳤다. 천위대의 무사들이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며 교군들의 길을 막았다. 챙! 챙! 챙! 여기저기서 칼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악!" 비명이 터지며 피도 확 치솟았다. 예령은 보아야 했다. 교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를……. "싸우지 마세요!" 그녀는 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 대답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번뜩이는 칼, 치솟는 피, 터지는 비명……. 예령은 그들이 싸우지 말았으면 했다. 그들이 서로의 피를 탐하지 말았으면 했다. 왜 그들은 각자의 생각,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걷지 않고 각자의 길을 막고 침범하는 데 더 바쁠까. 가슴이 아팠다. 싸움을 멈추고 싶었으나 그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순간, 예령은 문득 꿈속의 은자(隱者), 어머니 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 나의 귀여운 아기, 원하는 것이 있다면 간절히 염원하라. 초목의 마음에 그대 마음의 뿌리가 닿고 동물과 사람의 마음에 그대 마음의 뿌리가 닿도록 간절히…… 예령, 우리 성녀 일족의 힘의 비밀이다. 예령은 손을 모았다. 그녀는 염원했다. 간절히…… 서로 싸우지 말 도록, 서로가 서로의 피를 탐하지 말도록……. 예령의 눈빛이 몽롱하게 흐려져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녀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뿌렸다. "감 아저씨, 한 아저씨!" 그녀가 감악과 한고를 불렀다. 속삭임 같은 부름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갈대밭을 흔드는 미풍(微風 )처럼 물결치며 모든 이의 귓가에 닿았다. 철천지원수로 싸우던 감악과 한고는 동시에 예령을 바라보았다. 그 들의 눈동자에 예령의 맑고 밝은 눈동자가 담겼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가는 거예요. 바람에 몸을 맡긴 꽃잎처 럼……." 예령이 말했다. 미간을 좁히던 한고는 무엇인가에 찔린 듯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의 눈빛이 점점 투명하게 침잠 되었다. 철컹! 한고는 검을 검집으로 거두었다. 한고가 검을 거두자 모든 자들도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도검을 거 두었다. 한고는 한 편에 물러섰다. 천위대의 수하들이 그의 뒤로 물러서며 시립했다. "한 아저씨, 안녕히 계셔요. 감 아저씨 가요." 예령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머리칼을 쓸었다. 가슴을 찌르는 애잔한 감정에 잠시 다른 세계로 가 있던 감악은 예 령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되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성녀! 성녀의 일이었으므로……. "갑시다!" 감악은 긴 잠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덜 깬 목소리로 말했다. 교군들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들도 막 잠에서 깬 자 같이 주위 를 두리번거렸다. 감악이 움직였다. 그제야 그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깨닫고 감악을 황급히 뒤따랐다. 어둠에 잠긴 황하의 물결이 보였다. "빨리!" 강가에서 발을 구르고 있던 유공경이 반색을 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는 교군들에게 배를 묶은 줄을 끊어라 한 후 자신은 성녀를 맞으러 뛰어갔다. 유공경은 교도들 사이에 석년의 호남 명두, 여양의로 불리는 자다. 외양도 비슷했고 생각도 행동도 비슷했다. 그래서 교도들은 그를 가 끔 착각했다. 그가 섬서의 명두가 아닌 호남의 명두인 줄……. 유공경은 심안(心眼)으로 고명상에 업혀 오는 소녀가 분명한 성녀 임을 알아챘다. "성녀시여!" 그는 진흙밭도 마다 않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때였다. 파파파팟! 나뭇잎이 암기처럼 날아와 진흙밭에 가지런히 꽂혔다. 감악과 교군들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방해자는 또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과 오십 줄에 이른 여인이었다. "아가씨, 어디를 가시려 하십니까?" 노인이 카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 파파!" 예령은 고명상의 등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들은 천노와 도화였다. "감 아저씨, 인사하세요. 우리 할아버지와 파파예요." 그녀는 천노와 도화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감악이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는 금옥에 성녀 외에 두 명의 가복 이 더 머무르고 있음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복이라 생각했기에 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뭇잎을 날린 솜씨나 기도(氣度)를 보건대 방금 싸운 자 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을 듯했다. 사실 도화의 실력은 한고에 버금 갔고 천노의 실력은 천위대의 대 주, 국태열이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운학추, 단원홍! 두 명의 천하제 일인을 몇 십년 간 가주로 모셔 왔던 그들이다. 운학추도 단원홍도 천노와 도화를 노복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히 몇 수의 무공은 가르쳐 주었다. 소옥에서 감악 일행을 막고자 했다면 천노와 도화는 그들을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예령이 아끼는 소옥에 피를 묻히기 싫 어 여기까지 따라왔을 뿐! "배교의 아이들은 아가씨의 그 팔을 놓아라! 큰아가씨를 데려가고 도 모자라 이제 어린 아가씨까지 데려가려 하느냐!" 천노가 창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우수를 번쩍 들었다. 천노의 손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갔다. "황금신공……." 감악은 안색을 찌푸렸다. 단원홍이 곽부와 싸울 때 발휘했던 신력( 神力)으로 이제 모든 강호인들이 알고 있는 무공이었다. 감악은 금옥의 가복들이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황 금신공까지 익혔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달아나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녀를 모셔 가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성녀가 없었을 때는 몰랐 지만 성녀가 있음을 안 지금 모셔 가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두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 감악은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심정으로 칼을 들었고 황금신공을 장 심에 끌어올린 천노는 사자철권으로 모든 배교도들을 일격에 박살내 려 했다. 살기가 냉랭하게 서로의 심장을 압박했다. 예령은 또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감을 깨달았다. 앞으로 자주 겪 게 될 일이라 명왕께서 미리 그녀에게 보여줄 것을 보여주고 있는지 도 몰랐다. "할아버지, 멈춰요!" 예령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철권을 휘두르려던 천노는 흠칫 했다. 어린 아가씨가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파파! 알잖아요.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누구도 막지 못 하리라는 것을…… 어머니도 그렇게 떠났듯이 나도 떠나야 해요. 마 음은 아프지만……." 예령이 작은 손을 움켜쥐며 말했다. 천노와 도화의 눈빛이 흔들렸다. 막을 수 있는가? 어린 아가씨의 말이 맞는 듯했다. 지금은 어떻게 막을 수 있을지 몰라도 다음은 장담할 수 없었다. 큰아가씨도 떠나려 했다. 전대 원주께서는 그들처럼 보내지 않으려 했고…… 그러나 결 국 전대 원주께서는 큰아가씨를 보내고 말았다. 전대 원주도 막지 못한 천화원 아가씨들의 길을 그들이 어떻게 막 을 수 있을 것인가. 막을 수 없다. 그렇지만 보낼 수 없는 것이 그들 의 입장이었다. "어머니가 불러서 가는 길이에요. 할아버지, 파파, 길을 비켜 주세 요." 예령은 간청했다. 천노와 도화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그들은 예령을 너무 아꼈다. 그래서 예령의 마음의 뿌리가 뻗치기 전에 그들의 마음에 예령의 마음의 자랐다. 마음이 먼저 움직인 자는 역시 여자인 도화였다. 도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천노, 큰아가씨는 내가 젖먹이로 키웠습니다. 그런데 말도 않고 훌쩍 떠났지요.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배교라는 곳은 더욱…… 그리 고 지나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요. 큰아가씨가 그렇게 매정한 분이 었나, 배교가 그렇게 나쁜 곳이었나…… 배교라는 곳은 아직도 모르 겠습니다. 그러나 큰아가씨가 매정한 분이고 사교에 현혹되어 잘못된 곳에 발을 들일 분이라는 것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천노, 나 는 큰아가씨가 어떤 길을 갔는지는 모릅니다. 어린 아가씨가 어떤 길 을 가려 하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길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들 보다 아가씨 들을 더 믿습니다. 그리고 언제까지 어린 아가씨를 소옥에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 아니겠어요. 소옥이 아가씨에게는 금옥(禁獄)일 수도 있습니다. 천노, 나는 아가씨를 보낼 생각입니다. 보내기만 할뿐만 아니라 따라 가겠어요. 이제는 늙어 예전처럼 큰아가씨를 기다리듯 어린 아가씨를 기다리지도 못하겠군요. 아가씨, 나는 이제 아가씨에 게 의지하려 합니다. 괜찮겠지요?" 그녀가 물었다. "물론이에요. 파파……." 예령은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천노……." 도화는 천노를 바라보았다. 천노의 백미가 꿈틀거렸다. 그가 돌연 광풍을 일으키며 사자철권을 휘둘렀다. 쾅! 홍엽으로 물들던 아름드리 나무가 우수수 쓰러졌다. "도화, 아가씨를 잘 모시게!" 천노는 구부정한 등을 보였다. 그가 소옥을 향해 성큼성큼 발길을 옮겼다. "할아버지, 같이 가요!" 예령이 소리쳤다. 그러나 천노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도화가 예령의 손을 잡았다. "아가씨, 천노는 무척 아가씨와 함께 가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가씨와 함께 떠나지 못합니다. 천노는 원주를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큰아가씨, 아가씨도 떠나고 나도 떠나고…… 천노, 당신까지 떠나면 원주를 위로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생각한 것이지요." "원주라는 분은 누구예요?" "잊었습니까? 가끔 책과 옷, 노리개를 보내 주시던 하얀 머리의 그 분……." "아!" 예령은 탄성을 터뜨렸다. "할아버지! 곧 모시러 오겠어요. 그 동안 안녕히 계셔요. 그리고 백발 아저씨에게도 전해 주셔요. 인사 드리지 못하고 떠나 죄송하다 고!" 그녀가 손을 모으고 소리쳤다. 천노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묵묵히 산길만 올랐다. 감악은 허도를 지나서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천위대의 추적이 더 이상 감지되지 않았다. 도주를 치밀하게 준비한 덕에 천위대의 질긴 추적을 어느 정도 떨친 듯 싶었다. 배와 말, 마차를 번갈아 사용했다. 지금은 마차를 사용하는 중이었다. 감악이 어자로 말을 몰았고 성녀는 도화라는 여자와 함께 마차 안 에 타고 있었다. 유 명두, 장 명두, 고 명두를 비롯한 교군들은 보이 지 않는 곳에서 성녀에 대한 호위와 미리 길을 준비하느라 열심이었 다. 감악은 마차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화라는 여자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다. 성녀는 함을 정성스럽 게 닦고 있었다.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는 함이었다. "귀중한 물건이 들어 있는 모양이지요?" 감악이 물었다. 혹시 그는 함에 든 물건이 교의 꺼지지 않는 불, 화령주가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함에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물건이 들어 있어요. 얼마 전에 찾 았죠. 나무 밑에서 찾았는데도 전혀 벌레가 먹지 않았어요." 예령이 함을 닦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감악은 실망했다. 화령주라면 벌레가 먹으려 해도 먹 을 수 없었다. '성녀가 오셨으니 화령주도 찾아야 하는데…….' 감악은 화령주에 대한 걱정을 잠시 했다. "그 단도는 어떻게 해서 생긴 것입니까? 아주 귀한 물건으로 보입 니다." 그가 예령의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단도에 시선을 던졌다. 함에 든 물건과 함께 성녀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다. "백발 아저씨가 준 것이에요. 정말 좋은 분이에요. 항상 화난 눈빛 을 하고 있지만……." 예령은 단도를 탁! 탁! 두들기며 미소를 지었다. "백발 아저씨라…… 그분은 누구입니까? 소옥을 자유롭게 드나들 정도면 보통 분이 아니겠군요." 감악은 그 이름을 금옥 아래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누던 이야기를 돌이켜 볼 때 심상치 않은 내력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되었 다. 백발 아저씨라 칭하는 것을 보니 성녀는 그자를 잘 모르는 듯했 다. 그래도 물은 이유는 도화라는 여자에게서 그 답을 기대했기 때문 이다. 아니나 다를까 도화라는 여자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능운공작! 강호인들은 그분을 그렇게 부르지." 배교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한지 도화가 냉랭하게 말했다. 감악의 표정이 굳어졌다. '묘한 일이군.'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궁금증이 늘고 있었다. 화형을 당했다던 전대 성녀가 어떻게 성녀의 핏줄을 이을 수 있었 는지, 지금의 성녀는 무슨 이유로 하필 천화원을 요람으로 삼게 되었 는지, 더해서 단원홍은 배교도라면 이를 갈던 자다. 그런 자가 어떻 게 해서 성녀의 자상한 아저씨가 되었는지……. 성녀의 핏줄임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금옥을 설치한 것을 보면 단 원홍은 예전부터 소옥의 어린 아가씨가 대를 이을 성녀임을 알고 있 었던 것이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궁금증과 함께 걱정도 늘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단원홍은 교도들의 가장 큰 적이다. 그리고 지금 도 가장 위협적인 존재…… 그런 자를 성녀는 좋아하고 있다. 곤란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 않았다. '묘한 일이군, 정말 묘한 일이야.' 감악은 교와 단원홍 사이의 질긴 인연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악연(惡緣)이었다. 앞으로도 악연일 가능성이 더 높았 다. 그래서 그는 단원홍과의 모든 인연이 끊어졌으면 했다. "이랴! 이랴!" 그가 마차의 속도를 높였다. * * * 당예는 숨이 가쁠 정도의 포만감을 느낀 후에야 식탁에서 물러났다 . 그래도 조금 아쉬움이 남았는지 건채(乾菜)를 들고 와삭거렸다. 그 는 건채를 씹으며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들겼다. "흐흠, 음……." 며칠 사이에 뱃살이 더 늘어난 듯했다. "정말 하돈이 따로 없군." 당예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그는 자신의 방을 향했다. "누가 이것을 가져 놓았어!" 방으로 들어서던 당예는 날카로운 고함을 질렀다. 차와 함께 방에도 과일과 건포(乾脯), 화과자가 소반 위에 수북히 쌓여 있었다. 시비는 놀라 소반을 치우려 했다. "놔두어라!" 당예는 시비의 손을 휙 뿌리쳤다. 그는 건포를 쭉 찢어 씹으며 비스듬히 누웠다. 정면으로 걸린 거울 에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뒤룩뒤룩한 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사 내 한 명이 누워 있었다. "젠장!" 당예는 씹고 있던 건포를 거울을 향해 던지며 등을 돌렸다. 젊은 날, 가장 혐오하던 자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으로 거울 안에 들 어 있었다. 어떻게 지내던 사이 저런 모습이 되고 만 것이다. 당예는 창가에 내리는 어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늘도 무척 바빴던 하루인 듯했다. 몽고를 오가는 대상으로부터 보호를 요구받고 그 대가를 챙겼으며 작은 표국 간의 싸움에 뛰어들어 표국 하나를 없애 버렸다. 그리고 내친 김에 흑산의 목채 하나도 불태우고……. 생각해 보니 굳이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누구에게 보이기라도 하듯 바쁘게 움직였다. 팽해만도 방파의 세를 확장시키기 위해 바쁘다고 한다. 자신이 천 하제일문을 세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알아도 팽해만은 여전 히 바쁠 것인가. 당예는 맹호전을 천하제일문으로 키우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자신은…… 바쁨으로 해서 자신을 둘러싼 끈적한 피의 향을 지우고 싶을 따름이었다.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난 것이다. 당문에서 태어나지 말아야 했고 강호인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 묵향(墨香)을 마시며 꽃과 자신을 가 꾸는 일에 모든 시간을 보내야 옳았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살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당예는 그 작자를 비웃을 것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강호인 은 천하에 단 한 명밖에 없다. 천하제일인! 그 자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자신이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처분하 지 못하는 곳이 강호라는 것을 당예는 알고 있었다. 당문은 그것을 일찍부터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당문의 가주 자리를 놓고 벌였던 치열한 혈투…… 암계(暗計)와 귀 계(鬼計)가 난무했다. 패한 자는 그 어떤 것도 보장받지 못하고 쓸쓸 히 사라져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당문의 비전이 밖 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중심에서 밀려난 자에게는 살수도 뻗쳤다. 그곳에서 자란 당문의 아이들은 사갈(蛇蝎)같이 독하고 강하다. 당 예는 그 아이들 중에서도 제법 뛰어난 축에 속했다. 그러나 그는 처 음부터 다른 아이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승자의 환희 보다 패자의 고통에 더 눈길을 두었던 것이다. 당문의 가주, 나아가 천하제일인이 되지 못하면 언젠가는 쓴잔을 마셔야 한다! 당예가 기억하는 강호의 전부였다. 그래서 제법 바동거려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하지만 그는 천하제일인은 아니었다. 천하제일인이 될 가능성도 없 을 듯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운명이 마음대로 뒤바 뀔 불안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당예가 보기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자들은 하오문의 오합지졸들 인 듯했다. 그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려드니… … 예전 배교의 교도들이 그랬던 것 같았다. 소심하다. 맞는 말이다. 그는 그 정도로 용감하지 않았고 스스로에 대해 당당하지도 않았다. 지나치게 패배를 걱정하는 용렬한 자임이 분명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내가 그렇다는데…….' 모든 것이 강한 자의 칼끝 아래 이슬처럼 사라져 갈 허망한 것들이 라면 애착을 두지 않기로 했다. 집착한 것을 잃는 것만큼 가슴 아픈 일은 없으므로……. 자리, 세력, 재보, 여자……. 당예는 봄날의 꿈 같은 것으로 그것들을 대했다. 그리고 그 허망함 의 뿌리, 자신의 소심함을 숨기기 위해 무척 바쁜 척 해 왔던 것이다 .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바쁜 일상으로 모든 것을 잊고 지내다가 오늘처럼 문득 허망함을 느낄 때에는 여자가 생각난다. '요연…….' 당예는 자신의 손가락에 낀 반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요연이 직 접 옥을 갈아 만든 반지로 하나는 자신이 끼고 하나는 그에게 주었었 다. 요연이 끼고 있는 반지는 요연과 함께 흙 속에 매장되었다. '귀엽고 괜찮은 여자였지.' 가슴 한 편이 저렸다. 시신을 보았었다. 겁먹은 얼굴, 늑골(肋骨)이 부서지고 심장이 뚫 렸으니 무척 아팠을 것이다. 당예의 눈빛이 한광으로 번뜩였다. 요연, 천산오응, 금호령……. 그들을 한꺼번에 죽일 자라면 대단한 실력자가 분명할 것이다. 요 연이 뿌렸던 맹독(猛毒)에도 무사했던 자다. 요연의 실력이야 별 볼 일 없었지만 독공을 무시할 자는 드물다. 한동안 강호에는 신성(新星)이 출현하지 않았었다. 새로운 개방의 방주가 된 등중용이 고작…… 그러나 등중용은 풍운을 일으킬 자는 아니다. 안서에서 요연과 천산오응, 금호령을 처치한 자는 제법 풍운 을 일으킬 듯했다. '수하들이 종적을 찾고 있으니 곧 소식이 오겠지.' 당예는 천장을 보고 누웠다. 몸이 나른하고 잠이 밀려왔다. 요연의 아버지인 독문의 문주에게는 이미 소식을 전했다. 딸의 죽 음을 애도하며 그녀의 아버지는 그에게 새로운 딸을 보내겠다고 전해 왔다. 이제 열 다섯이라 했던가. 당예는 승낙했다. 독문의 문주가 그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그도 독 문의 문주를 필요로 했다. 독문의 문주는 언제나 바쁜 일을 많이 만 들어 내는 사람이니…… 또 누가 알겠는가. 이렇게 나가다 보면 천하 제일의 자리가 주어져 있을지. 독충과 독물이 우글거리는 남만도 좋았다. 이번에 신부를 데리러 독문에 내려갈 때는 한 몇 개월 그곳에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빙부( 聘父)도 내친김에 분명 처리해야 할 몇 개월의 일거리도 맡길 테고… …. 당예는 손바닥을 펼쳤다. 요연이 준 반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요연은 불쌍한가? 죽은 자만 불쌍하지는 않다. 살아 있는 자도 불쌍하지 않다. 불쌍 한 자는 불쌍하다고 느끼는 자가 불쌍한 자다. 당예는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다. 벌써 버려야 할 물건인데 잊고 있 었던 것이다. 그가 반지를 창 밖으로 휙 던졌다. 잠이 노곤하게 밀려왔다. 어둠은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낸다. '기이한 것도 다 있군.' 당예는 맹호전의 입구에 선 울긋불긋한 배 한 척을 보고 있었다. 이국의 여인들이 끌고 온 그 배에는 당장 하늘로 치솟을 것 같은 아 홉 마리의 용이 붉은 눈을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예는 그것이 너무 화려해서 상여(喪輿) 같기도 했다. '한 번 타 보았으면 좋겠군.' 그가 시선을 돌렸다. 금호령, 은호령(銀虎令), 철호령(鐵虎令)……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무서운 것이 많다지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다. 기인 한 일이 많다지만 역시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일은 사람이 만드는 일 이다. "으악!" "악!" 금호령, 은호령, 철호령의 팔, 다리, 목이 피분수를 쏟으며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어디서 떨어진 마물(魔物)인지 몰랐다. 그 배를 타고 육지를 항행(航行)해 온 마물은 삼호령(三虎令)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하고 있었다. 은선이 번쩍일 때마다 수하들의 목이 날아갔고 붉은 기운이 몰아칠 때면 수하들은 바위에 부딪힌 계란(鷄 卵)처럼 한줌의 피로 퍽퍽 터졌다. '요연을 죽인 자는 바로 저 자군.' 느낌이었다. 그러나 묻지 않아도 될 듯했다. "전주, 빨리 조치를……." 총관은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은호령주의 목이 날아가고 있었다. "나 보고 어떻게 하라는 말이오. 저런 마물은 천화원의 원주께서도 상대하기 힘들겠는데……." 당예는 고개를 설래설래 저었다. "그럼, 퇴각의 명이라도……." "미친 놈!" 팟! 당예의 손에서 은사가 번쩍였다. 총관의 목이 날았다. 당예는 예감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뒤바뀌 게 되는 그날…… 다행한 일이었다. 항상 이런 날이 올 줄을 생각하 고 있었던 탓인지 별다른 정회는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고 아쉬움도 없었다. 피할 생각은 더욱 없었다. 그는 자신이 일군 기업(企業)을 여유만만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싸움의 한 가운데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여덟 자루의 붉은 비수가 번뜩이고 있었다. 투풍혈아표(透風血牙　)! 내가(內家) 강기를 전문적으로 부순다는 투풍표를 조금 더 개량한 것이다. 당예는 십 몇 년 동안 그 한가지만을 준비했다. 단 한 사람 을 상대로 삼고……. 천화원의 원주, 능운공작 단원홍! 그를 꺾을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은 달라지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른 자를 상대로 투풍혈아표를 사용하려 했다. 팟! 여덟 자루의 투풍혈아표가 한꺼번에 날았다. 혈아표는 느리지 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천천히 호교신장을 팔방으로 노리며 날아갔 다. 아란하는 맹호전의 전주, 당예라는 자에 대해 조금 실망했다. 비록 혈아표의 방향이 팔방을 완전 점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녀라 해도 못 피할 정도는 아니었다. 휙! 호교신장은 소매 바람을 일으켰다. 강풍이 휘몰아쳤다. 당예라는 자에 대한 평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때였다. 투풍혈아표는 강풍에도 전혀 진로를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달리하며 호교신장을 붉은 이빨로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마치 이 기어검술(以氣御劍術)을 펼친 듯 혈아표는 자유로 움직였다. 네 자루의 투풍혈아표는 사대요혈을 노리며 그대로 나아갔고 나머 지 네 자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형체가 사라졌다. 호교신장은 다섯 손가락을 내밀었다. 그가 코앞으로 다가온 투풍혈 아표를 움켜잡듯 손을 내밀며 세찬 경력을 뿌렸다. 기류가 격렬히 소용돌이치며 귀신의 호곡성 같은 기괴한 소리가 들 렸다. 네 자루의 투풍혈아표가 허공 중에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사 라졌던 네 자루의 혈아표가 섬전으로 달려들었다. 파팟! 팟! 호교신장은 바람 가르는 소리를 내며 장영을 뿌렸다. 쨍! 쨍! 쨍! 비구에 부딪힌 혈아표가 불꽃을 튀며 흩어졌다. 그러 나 한 자루의 혈아표는 미쳐 피하지 못한 듯 호교신장의 팔뚝에는 피 가 솟고 있었다. 사패의 한 사람인 당예는 역시 대단한 자였다. 그 누구도 호교신장 을 수세에 빠뜨리지 못했고 그 누구도 피를 보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예의 저항도 그 이상은 되지 못할 듯했다. 아란하가 그렇 게 생각한 순간, 당예는 소매를 뿌렸다. 투풍혈아표는 소매에도 숨겨져 있었다. 소매를 벗어난 여덟 자루의 혈아표는 이번에는 거의 빛줄기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 갔다. 아란하의 민활(敏活)한 눈도 여덟 갈래의 붉은 선밖에 보지 못 했다. 호교신장은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그가 반수(反手)로 손을 흔들며 장력을 겨루듯 손을 뻗었다. 채홍색 빛이 부챗살로 확 퍼지며 그 중앙에 묵기를 빛내는 원구(員 球) 하나가 혈아표를 향해 유영(遊泳)하듯 나아갔다. 당예도 아란하도 원구에서 쏟아지는 빛살이 너무 밝아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원구는 화령주였다. 빛이 점점 강해지며 당예는 후끈한 열기에 호흡을 가누기도 힘들었 다. 화령주와 투풍혈아표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당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치직! 칙! 치지지직! 팽해만이 그렇게 자랑하던 한철에 정강과 오철(烏鐵)을 섞어 수백 번 넘게 제련한 투풍혈아표가 얼음처럼 녹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 간, 투풍혈아표를 둘러싼 강기의 벽도 사라져 버렸다. 화령주가 빛을 더욱 내며 광채 속에 당예의 모습까지 사라지게 했다. 빛살에 허우적대던 당예는 단전에 둔중한 물체가 부딪혀 옴을 느꼈 다. 엄청난 열기가 기경팔맥을 삽시간에 돌아 백회혈(百會穴)에서 뜨 끔하며 멈추었다. 당예는 그 짧은 찰나 생각했다. 요연의 반지를 버리지 말 것을……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었다. 훅! 당예의 전신에 불길이 치솟았다. 그의 신형은 이내 한줌의 재 로 변해 가을 바람 속에 흩어졌다. 호교신장은 열기를 누르며 화령주를 회수했다. 그가 등을 돌렸다. "으, 으…… 전신(戰神)이다! 달아나자!" 당예의 수하들도 등을 돌렸다. 그들은 아등바등 맹호전을 벗어나려 했다. 호교신장은 구룡선으로 되돌아왔다. "비켜라!"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아란하는 영문도 모르고 서둘러 문도들을 구룡선 뒤로 물러나게 했 다. 호교신장은 바람처럼 구룡선을 돌았다. 아홉 마리의 대화룡이 꼬리 를 틀며 각각의 방향으로 맹호전을 붉은 눈으로 응시했다. 훅! 후훅! 훅! 이상한 소리가 들려 왔다. 유황 냄새도 코를 찔렀다. 순간, 아란하 는 뜨거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문도들과 함께 몇 십 걸음을 더 물 러났다. 대화룡의 검은 비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아홉 마리 의 용은 일제히 불길을 토해 냈다. 화르르륵! 우지직! 콰쾅! 불길은 너무도 거세 담장은 물론 전각까지 날려 버리며 화마를 이 글거렸다. 순식간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던 맹호전의 전각들은 불바다 속에 잿 더미로 변해 가고 있었다. 살려고 바동대던 자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 다. 대화룡이 모든 것을 날려 버린 것이다. "후후후후, 으하하하하!" 호교신장은 불타는 맹호전을 지켜보며 광소를 터뜨렸다. 아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수백 명을 불구덩 이 속에 던져 버리는 저 마성(魔性)! 배교일세의 꿈이 사실이라고 하 더라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순간만은 달콤한 꿈도 없었다. 다시 두려움이 밀려왔다. 아란하는 문도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라사와 문도들의 안색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한 번도 아닌 벌써 두 번째……. 그녀들도 대화룡의 전설이 이런 무지막지함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 을 것이다. "흐흐흐흐, 으하하하하!" 호교신장의 광소는 민산을 뒤흔들고 아란하는 그 웃음소리가 자꾸 귀에 거슬렸다. * * * "으하하하! 캬하하!" 만인촌이 짜랑짜랑 울렸다. 도열해 있던 삼십육호교사들은 귀를 막았고 십위병의 안색은 창백 해졌다. 방환과 도예, 예광은 안색을 찌푸렸다. 표정과 말투, 원래 검은빛이라 얼굴이 변한 흔적도 별로 없었다. 달라진 것은 야수처럼 번들거리는 눈……. 만인부가 우수수 내려앉을 정도로 광소를 터뜨리고 있는 자는 이제 전왕으로 막 출관한 전우삼, 바로 그였다. "흐흐흐! 방 노관, 제대로 찾아보기는 했소?" 전우삼이 음소를 흘리며 물었다. "물론이오. 호교사들이 모두 동원되었소이다. 와사곡의 숯 굽는 터 는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고 하더이다. 그곳은 이제 초부들이 잠시 쉬는 초막(草幕)으로만 사용되고 있다 하오." "산서의 교도들에게는?" "물어 보려고 해도 물어 볼 수가 없었소이다. 산서에 배교의 세력 이 남았다는 흔적을 우리 힘으로는 밝혀 낼 수 없었소." "모두 죽었다는 말인가?" 전우삼은 앉아 있던 의자를 불끈 쥐었다. 돌로 된 의자가 부스스 떨어져 나가며 가루로 날렸다. "글쎄……. 숨도 쉬지 않고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지는 모르지요. 하지만 이후의 정황으로 보건대 교의 조직이 완전 와해되었으리라 보 는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산서의 패주를 자처하던 비응보라는 곳에서 광란으로 산서의 교도들을 추살(追殺)한 모양입니다." "비응보! 그 죽일 늙은이!" 전우삼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의자를 걷어찼다. 쾅! 의자가 돌가루를 날리며 흩어졌다. "헤헤헤! 으헤헤헤!" 전우삼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돌아가며 붉게 충혈되었다. "그래, 성녀도 죽고 명옹도 죽고 화정까지 죽었겠군. ……방 노관 은 좋겠어. 소원대로 광명도로 모든 것을 쓸어 주지!" 그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전우삼은 신형을 날렸다. 콰쾅! 쾅! 쾅! 그가 엄청난 경기의 폭풍을 일으키며 만인촌을 휩쓸었다. 전왕은 어이없게도 자신의 위용을 먼저 만인촌을 상대로 보이고 있었다. 한 마리의 검은 호랑이가 만인촌을 한순간에 폭풍이 휩쓸고 간 폐허로 만들었다. "으헤헤헤!" 전우삼은 충혈된 눈을 빛내며 어깨를 건들거렸다. 만인촌을 박살낸 것으로 화가 풀리지 않는 듯했다. 그는 그가 수련 을 하던 만인부를 향해 걸어갔다. 만인부는 만인촌의 성지(聖地)다. 도예와 예광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전우삼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전우삼은 보란 듯이 만인부의 현판을 박살냈다. 도예와 예광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동시에 방환을 바라보았다. 방환은 도예와 예광의 시선을 피했다. "원래 저런 분이 아니오. 십 몇 년 간 쌓인 분노외다. 모른 척 해 두시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 보다 다루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참지 못하겠소! 전왕이라 하더라도 우리의 오랜 성전을 부술 권리는 없소!" 불패혼, 예광이 소리쳤다. 도예가 그를 막으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불패혼은 이미 전우삼의 지척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멈추시오!" 불패혼은 전우삼의 앞을 막았다. "이거 뭐야, 비켜!" 전우삼은 보이는 것이 없었다. 그가 번천양장(　天陽掌)을 번뜩였 다. 삼양장과 원류(原流)는 같았으나 삼양장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예광은 그의 별호대로 만인촌에서 무적을 자랑하는 자다. 만인촌에 서 무적을 자랑한다는 것은 강호에서도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자가 손 가락 꼽을 정도라는 뜻…….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만큼 예광은 또한 싸움을 피하는 자가 아니었다. 쾅! 쾅! 쾅! 전우삼과 예광은 용호상박으로 얽혔다. 그러나 승부는 곧 가려졌다 . "헉!" 예광은 퉁기듯 만인부를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죽일 놈의 늙은이!" 전우삼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혈안을 번뜩이며 아예 예광을 죽이려는 듯 쌍장을 교차했다. "전왕!" "멈추시오!" 방환과 도예는 놀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파팟! 전우삼은 방환과 도예에 대해서도 수도(手刀)를 그었다. 수 도가 천공을 획분(劃分)하며 방환과 도예의 가슴을 짓눌러 갔다. 방 환과 도예는 감히 상대하기를 포기하고 급히 몸을 틀었다. 아슬하게 전우삼의 쌍수가 비켜 갔다. 그러나 그들은 전우삼이 뿜어낸 경기의 여파에도 신음을 흘려야 했다. "전왕을 키운 것이 아니라 미친 자를 키웠구나!" 잠깐 사이에 숨을 돌린 예광이 얼굴을 붉히며 대노했다. "불패혼!" "현제!" 방환과 도예가 다급히 말렸으나 이미 불패혼의 칼은 전우삼의 요혈 을 노리며 뻗어 가고 있었다. "헤헹!" 전우삼의 신형이 흐릿하게 움직였다. 예광의 칼은 갑자기 사라진 전우삼을 찾느라 허둥댔다. 맹렬한 살기가 지척에서 느껴졌다. 예광은 상대를 보지도 않고 칼 을 날렸다. 그러나 마음뿐 칼은 날아가지 않았다. 어느 틈에 전우삼은 금나(擒拿)로 예광의 팔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 전우삼은 히죽 웃으며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으드득! 으득! 손목뼈가 파열하며 예광은 칼을 쥔 손에 힘을 잃었다. 땡그랑! 그는 결국 전우삼의 악력(握力)을 견디지 못하고 칼을 떨 어뜨렸다. "천방지축도 모르는 놈!" 예광은 뼈마디가 으스러지는 고통도 참으며 조공(爪功)으로 전우삼 의 거골(巨骨)을 찍으려 했다. 전우삼은 예광의 팔목을 비틀었다. 예광의 몸이 팔목을 따라 돌며 등을 보였다. 때문에 예광의 좌수는 허공만 찢었다. 전우삼은 예광의 등에 바짝 붙었다. "헤헤헤, 처음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어!" 그는 번천양장으로 단번에 예광의 머리를 박살내려 했다. "참으시오!" "전왕!" 방환과 도예는 전우삼의 팔에 매달렸다. "전왕, 전왕…… 이 늙은이를 좀 보시오." 방환은 통사정을 했다. "뭐야, 귀찮은 늙은이들!" 전우삼은 방환의 노안에 시선을 돌렸다. 순간, 방환은 안광에 힘을 주었다. 섭혼술! 통할지 장담할 수 없었 지만 방환은 그 수법에 희망을 걸었다. 미친 자를 전왕으로 받드느니 차라리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르는 실혼인(失魂人)을 전왕으로 받드 는 것이 나을 테니……. 하지만 섭혼술은 역시 예전에 써야 했을 수법이었다. '헉!' 방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동자가 깨질 듯 아팠다. 조금만 더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면 심혼을 제압 당한 자는 바로 그가 되었 을 것이다. 제령술(制靈術), 부처의 마음까지 움직인다는 심마술(心魔術)! 섭 혼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전왕의 무공은 별스런 곳까지 다 미쳐 있는 듯했다. "하핫!" 전우삼은 예광의 등을 밀치며 팔을 쭉 폈다. 예광은 피를 쏟으며 밀려났고 방환과 도예는 반탄력(反彈力)에 허 공으로 퉁겨 났다. "헤헤헤, 또 막아 보시지!" 전우삼은 성큼 만인부로 들어갔다. 콰쾅! 쾅! 콰르르……. 만인부가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방환과 도예, 예광은 지켜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열해 있던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도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천 년의 기다림은 너무도 허망했다. 차라리 전왕이 출관하 지 않았으면…… 같은 마음이었다. 우르르르…… 만인부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카핫!"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흙더미가 치솟으며 검은 물체가 모습을 드러 냈다. 방환과 쌍혼의 눈동자가 커졌다. 석상이었다. 이 장여 크기의 거대한 석상……. 전우삼이 흙더미 속에서 들고 나온 것은 자신 보다 몇 배나 큰 대 전왕의 석상이었다. "헤헤헤, 여기는 너무 좁아. 중원 한가운데 초대 명옹을 모실 것이 다." 그는 소매로 석상을 쓱쓱 닦으며 히죽 웃었다. 방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 한마디로 이제까지의 걱정은 어 느 정도 사라졌다. "호교사들은 들어라! 전왕께서 대전왕의 조상을 옮길 마차를 원하 신다! 서둘러라!" 그가 소리쳤다. 삼십육호교사들은 긴 악몽에서 깬 듯 화들짝 움직였다. "방 노관, 도끼도 가져와!" "도끼라니요?" "내가 쓰던 대월을 잊었어?" "아! 알겠습니다." 방환은 도예에게 눈짓을 했다. 그 도끼가 아직 있을 가능성은 없었 다. 굳이 도예에게 눈짓을 보낸 이유는 알아서 그 도끼와 비슷한 것 을 가져오라는 뜻이었다. 도예는 방환의 눈짓을 금방 눈치챘다. '도끼 하나에도 이렇게 눈치를 봐야 하다니…….' 그는 씁쓸한 마음에 고소를 흘렸다. 앞으로 전왕이 만인촌 사람들 을 어떻게 대할지 눈에 선했다. 아니나 다를까 전왕은 방 노관을 향 해 소리쳤다. "방 노관, 나를 간섭할 생각 마! 나를 간섭할 사람은 천하에 단 한 명뿐이다! 헤헤헤, 주 명두……." 만인촌에서의 난동으로 전우삼의 광기는 조금 가라앉고 있었다. 그 러나 주 명두를 떠올리자 그는 다시 울컥 분노를 느꼈다. "여기가 어디야?" "대파산(大巴山)입니다." "대파산이라고? 종남산인 줄 알았는데…… 헤헤헤, 알았어! 가까운 곳부터 쓸어 주지!" 전우삼의 혈안이 이글이글 빛났다. 안서에 이어 대파산에서 시작되는 바람이었다. * * * "음, 흐흐흐……." 밖을 힐끔거리던 마충현은 음소를 흘렸다. "왜, 웃나?" "죽이는 끗발을 든 모양이지." 일층은 반점이고 이층은 객실이 주루였다. 마충현은 밖이 터인 이층의 객실에서 근동의 파락호들과 함께 마조 패를 만지고 있었다. "저 엉덩이 좀 봐! 으, 으…… 살이 다 떨리는군." 마충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어디, 어디……." 계집이라면 오금부터 지리는 자들이다. 그들은 마조패를 놓고 고개 를 뺐다. 그러나 계집은 코흘리개 아이조차 없었다. "뭐야? 끗발이 안 좋으니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군." "어이! 이 자식, 우리 눈을 딴 곳으로 돌리게 한 후 수작을 벌였을 지 모르니 패를 다시 돌리라구." 고개를 뺐든 작자들은 한 마디씩 했다. "눈이라고는 없는 놈들이군. 저기 보이지 않아. 소면을 먹고 있는 계집……." 마충현은 반점 한 구석을 가리켰다. 작자들은 다시 고개를 뺐다. "엉덩이는 정말 멋지군. 어이, 그러나 우리는 남자에게는 별 관심 이 없어!" "생긴 것처럼 이상한 놈이군. 빨리 엉덩이를 가려! 자칫하면 저놈 이 엉덩이에 불을 내겠다." "나는 타고 온 암노새의 엉덩이부터 살펴보아야겠어!" 그들은 마충현을 향해 모두 너저분한 한 소리를 내뱉었다. 마충현이 가리킨 자는 남자였다. "쩝, 그 눈에 마조패는 잘 보이는 모양이군. 남장(男裝)을 했다고 계집임이 숨져지나……." 마충현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그는 들고 있던 마조패를 슬쩍 놓았 다. 이런 곳에서 눈 먼 파락호들과 어울리고 있는 자신이 처량했고 계 집을 보고도 손을 뻗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으며 몇 개월 후면 피를 토하고 쓰러질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이 넓은 중원 천지에 놈이 어디 있는 줄 알아서 그날까지 놈을 찾 을 수 있단 말인가.' 마충현은 벽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하필이면 만나기로 한 곳도 망산이었다. 묏자리 걱정은 하지 않아 도 될 듯 싶었다. 마충현은 소매를 뒤져 작은 봉지를 꺼냈다. 그 봉지에는 독약이 들 어 있었다. 안서에서 당한 고통을 두 번 당하기 싫었다. 그래서 이판 사판으로 몰렸을 때 독약을 털어 넣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가 마왕과 의 망산 만남에 대해 준비한 모든 것이었다. 일이 그 지경이니 술을 마셔도 마신 것 같지 않았고 마조패를 들어 도 마조패를 들었는지 쌍육을 들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걱정으 로 살도 쭉 빠졌다.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회자수(　子手)의 칼에 목이 날아가기를 기다리는 사형수(死刑囚) 의 심정이 이와 같을 것이다. 마충현은 벽에 쿵쿵 머리를 처박으며 심장을 바글바글 태웠다. 그 러던 한 순간, 그는 인상을 험하게 쓰며 머리칼이 빠질 정도로 머리 를 긁적였다. '이봐! 마충현, 뭐 하고 있어?" 그가 문득 자신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한 거 아냐! 그럼, 이대로 끙끙 앓다가 꼭 죽 어야겠어!' 그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돌아갔다. '마충현, 너 답게 굴라고. 일각이 여삼추(如三秋)인데 봉놋방에서 냄새나는 놈들과 어울려 한숨이나 쉬고 있다니…… 그리고 그놈을 찾 는 일은 놀아 가면서 찾아도 되잖아! 어이구!' 마충현은 자신의 소심함에 주먹으로 머리를 쳤다. 왜, 스스로 주눅 들어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는지 몰랐다. 그놈의 눈빛, 마옹의 그 눈빛 때문에 한동안 다른 생각은 꿈도 꾸 지 못했던 듯했다. 한동안 겁에 질려 잊고 있었을 뿐, 제 버릇을 개 에게 주지도 않았었고……. "좋았어!" 마충현은 스스로의 기운을 돋구기 위해 손뼉을 쳤다. 물론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전했지만 이제 추운 겨울의 개구리처럼 움츠려 있지만 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왕 그렇게 마음먹은 것 소면을 먹 고 있는 일층의 저 계집부터 냠냠거려 볼 생각이었다. 온갖 계집을 다 건드려 보았으나 아직 남장여인(男裝女人)은 건드 려 보지 못했던 터였다. 별난 계집이니 별스런 아취(雅趣)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어디 가?" "저 자식, 웃기는 놈이군. 남의 동네에 와 은자를 다 긁어 놓고 그 냥 가려고 해!" 마조패를 돌리던 자들은 마충현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눈을 부라렸 다. "여기 놈들은 셈을 거꾸로 하는 모양이군. 누가, 누구의 은자를 긁 었다고? 어이, 선생들! 오늘 나는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그래서 나를 건드리지 마. 옛 본성이 나오면 곤란한 것은 자네를 뿐 이라고." 마충현은 히죽 웃으며 만할도를 어깨에 걸쳤다. "이 놈이 보자 보자 하니……." 마조패를 돌리던 자가 벌떡 일어섰다. 혁랑에 은자가 제법 있어 보 였다. 호구에 들어온 은자를 놓칠 그들이 아니었다. 작자는 마충현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마충현의 매눈썹이 더욱 치켜 올라갔다. "곱게 가려 했더니!" 그가 술냄새를 풍기며 달려드는 작자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작자가 피를 뿜으며 쿵 쓰러졌다. "개자식!" 나머지 작자들이 우르르 마충현에게 달려들었다. "좋아, 좋아! 개처럼 죽을 목숨, 나도 개처럼 남들을 한 번 죽여 보자!" 으득득! 마충현은 달려드는 작자들의 목을 닭목 비틀 듯 차례로 비 틀었다. 마충현과 함께 마조패를 돌리며 히히덕거리던 자들은 한 명만을 제 외하고 모두 불귀의 신세가 되었다. 마충현은 홀로 살아남은 작자를 향해 걸어갔다. 공포에 질린 작자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마충현이 그의 아가리를 꽉 잡아 꼼짝 못하게 했다. "이게 정말 제대로 효능을 발휘할지 모르겠단 말이야. 만약 그놈이 돌팔이라서 몸에 좋은 약으로 지었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지겠지. 네 가 한 번 먹어 봐." 마충현은 작자의 딱 벌린 아가리에 봉지에 든 독약을 조금 털어 넣 었다. 작자는 그 약이 필경 몸에 좋은 약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 에 삼키지 않으려고 바동거렸다. 그러나 입에 들어온 약은 신묘하게 침에 스르르 녹으며 목구멍을 부드럽게 타고 내려갔다. 역시 몸에 좋 지 않은 약은 먹기도 편한 모양이었다. 약을 삼킨 작자는 몇 번 헛구역질을 했다. 그리고 길바닥에 내동댕 이친 개구리처럼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마충현은 작자의 입에서 손을 뗐다. "웩! 웩! 웩!" 작자가 혈전을 쏟으며 스르르 쓰러졌다. 그의 몸이 거센 경련을 일 으키더니 그대로 굳었다. "확실하군." 마충현은 히죽 웃으며 독약이 든 봉지를 소매에 넣었다. 이곳저곳 굴러다니는 은자까지 챙긴 그는 객실을 나섰다. "잉? 어디 갔지?" 소면을 먹던 남장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 가기야 했겠어." 마충현은 느릿한 걸음으로 계집을 찾았다. 성시를 빠져나가는 길을 몇 되지 않았다. "호오, 호……." 마충현은 길가의 바위에 앉아 탄성을 터뜨렸다. 엉덩이만 탱글탱글한 것이 아니라 얼굴도 꽤 미인이라 할 수 있었 다. 분칠까지 한다면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만 했다. 한 가지 아쉬 운 것은 뒷모습과 달리 나이가 너무 많다는 것…… 이십 대 중반이나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나이 든 계집은 나이 든 대로 재미가 있지." 마충현은 씨익 웃으며 바위에서 일어났다. 남장여인도 마충현의 존재를 깨달은 듯했다. 숨소리가 낮아졌고 보 폭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움직였다. '그렇지. 혼자 길을 가는 계집이 내력(來歷)이 없을 리는 없지. 어 느 무문의 계집인가? 아미(峨嵋)의 속가제자?' 마충현은 만할도로 손바닥을 툭툭 쳤다. 무문의 여자라 해도 별 걱 정은 않았다. 자신의 이름은 개 같다고 해도 무공을 가르쳐 준 무외 도라는 이름은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구대문파, 사패의 추적 속에서 도 살아온 그다. 비록 지금 초라한 몰골로 떠돌고 있다고는 하나 계 집 하나 어쩌지 못할 실력은 아니었다. '무공을 익힌 계집이라면 더욱 좋지. 살맛이 쫀득쫀득할 테니…… 무른 계집과 무른 잉어는 질색이다.' 마충현은 길을 턱 막아섰다. "새서방을 찾아 야반도주를 하는 계집인가, 아니면 도둑서방을 금 침에 끌어들였다가 들켜 쫓겨나는 계집인가. 이런 이유든 저런 이유 든 사내는 급할 테니 나를 통해 급한 불을 끄고 가라. 은자 없이 호 쾌하게 빌려주겠다." 그가 육담을 늘어놓으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남장여인은 아미를 찌푸렸다. "네놈 같은 음적(淫賊)을 상대할 만큼 한가하지는 않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냉랭하게 말했다. 날카로운 음성은 역시 여인의 목소리가 맞았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계집이군. 하지만 나는 네년과 멋진 한 판을 벌여야겠다. 오랫동안 계집들에게 적선(積善)을 베풀지 못했더니 몸이 부풀어 터질……. 헉!" 마충현은 다급히 몸을 틀었다. 남장여인이 들고 있는 장대에는 날카로운 협도(狹刀)가 숨어 있었 다. 그 협도에 마충현은 '아차!' 하는 사이에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채화음적(採花淫賊), 마충현! 새외에서 까마귀밥이 된 줄 알았더 니 이곳에 있었구나!" 여인은 이미 마충현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호 의 여인들은 다른 자는 몰라도 마충현 만은 기억했다. 그로 인해 제 대로 피워 보지도 못하고 꽃잎을 떨군 여인이 몇 명이던가. 기습으로 단번에 죽이려 했다. 여인은 자신이 마층현의 상대로 조금 힘듦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충현은 아슬하게 몸을 비키고 있었다. 만할도가 빛을 뿌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 저런 자를 만나다니…….'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 여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흐흥, 나를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순순히 옷부터 벗을 일이지. 너를 백 번 겁탈하고 죽인 후 시간(屍姦)을 삼십 번 더 하겠다! 고 마워하라! 본 공자는 너 같이 늙은 계집은 손도 대 본 적이 없다. 그 런데 시신까지 즐겨 주겠다고 하니……." 마충현은 만할도를 들며 한광을 번뜩였다. 계집의 일도(一刀)에 너 무 놀라 이마에 식은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구대문파의 계집이나 사패와 관련 있는 계집이 틀림없겠구나. 서 두르는 것이 좋겠군.' 그는 인정 사정없이 여인을 상대하려 했다. 상처 하나 없이 삼키려 다 되려 자신이 봉변을 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그가 만할도를 거세게 휘두르려는 순간, 여인의 협도가 먼저 날아 왔다. 여인은 실력의 불리를 깨닫고 선기를 먼저 잡으려 했다. 파파팟! 협도가 경쾌하게 뻗어 나갔다. 절제된 검초였다. 군더더기 는 찾아 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역시 만할도에 쏟아지는 마충현의 무공을 감당하기에는 역 부족이었다. 아무리 거꾸로 무공을 익혔다고 하나 마충현의 만할도에 는 전, 전대 사파 고수, 무외도의 유학(遺學)이 깃들어 있었다. 쨍! 쨍! 쨍! 만할도는 쾌풍(快風)으로 협도가 나아가는 방향을 차단하며 여인을 위협했다. 처음 몇 초는 그럴듯하게 어울렸으나 이후 여인은 만할도 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 "히히히, 지금이라도 옷을 벗는다면 시체는 온전히 보전해 주겠다! " 마충현은 득의에 찬 고함을 질렀다. 여인은 마충현의 개소리에 대꾸할 여유도 없었다. 기습적인 검초로 순간, 순간을 넘기고 있었으나 그런 행운도 오래 가지는 못할 듯했 다. 손목이 저렸고 팔에 힘이 빠졌다. 그녀는 주춤주춤 물러나기만 했다. 응원군이 나타나지 않으면 이 순간을 모면하기 힘들 것 같았다 . 그러나 천우신조(天佑神助)는 늘 있는 일이 아니다. 동귀어진, 양 패구상을 각오하고 마지막 힘을 쏟을 도리밖에 없었다. 정 안되면… …. 피를 역류시켜 단번에 심장을 파열시켜 버리면 그만이었다. 역혈대 법, 교의 비밀을 사수하기 위해 명전 이상의 자들에게만 전해지는 배 교의 비공! 여인은 배교도가 맞았다. 감악으로부터 무산에 성녀가 쉴 자리를 만들라는 명을 받고 서둘러 길을 가던 배교의 청기명사가 바로 그녀 였다. 마충현에 대해 실력이 미치지 못함을 알면서도 구차하게 바동 거린 것은 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사명감 때문……. 하지만 결국 힘이 밀리자 그녀는 최후의 절초에 모든 희망을 걸려 했다. 그녀는 협도에 전력을 실었다. 그녀가 쾌도난마(快刀亂麻)로 마충현을 쓸어 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쾌풍으로 휘감아 오던 만할도의 도세(刀勢)가 눈에 띄게 느 려졌다. 여인은 처음 마충현이 수작을 부리거나 그녀를 희롱하기 위해 일부 러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정작 흐느적거리는 자 신의 도세에 당황해 하고 있는 자는 마충현 본인이었다. 마충현은 얼 굴에 땀을 줄줄 흘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몸도 새우처 럼 점점 구부러져 갔다. "헉, 헉, 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전신에 흠뻑 땀을 흘렸다. 얼굴과 팔뚝에 심줄 이 툭툭 불거지고 있었다. 여인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이인(異人)의 도움이 있었나 해서였다 . 하지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인은 마충현의 돌연한 변화에 영문을 몰랐다. 그러나 정말 영문 을 몰라 하고 있는 자는 마충현 본인이었다. 근맥이 자꾸 오그라들며 팔, 다리가 찢어질 듯 아팠다. 땡그랑! 결국 그는 꼽추처럼 몸을 웅크리며 만할도까지 떨어뜨리고 말았다. 격렬한 고통이 밀려왔다.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던 듯한 고 통이었다. '아, 아…….' 그제야 마충현은 자신의 변화를 조금 짐작했다. 자신에게 가해진 금제(禁制)를 잊고 있었던 것이다. 마왕의 점혈수법! 지금 전신을 엄습하고 있는 고통은 안서에서 마 왕이 혈도를 점했을 때 느낀 고통과 같았다. 혈도를 제압 당했다는 것도 잊고 무리하게 내력을 끌어올렸으니 몸 이 성할 리 없었다. 입술이 돌아가고 팔이 비틀렸다. 고통은 머리칼이 삐쭉거릴 정도로 심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망산이 아닌 이 자리에서 그 고통에 시달리다 죽는 것은 아닌가. 이 고통이 일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순간 때문에 눈앞 계집의 마수( 魔手)를 벗어나지 못할 듯 싶었다. 계집은 협도를 세운 채 점점 다가 오고 있었다. 구대문파나 사패의 앞에 끌려가면 자신은 어떻게 될 것 인가. 지금의 고통 못지 않은 고통이 주어질 것이다. '선택, 선택!' 마충현은 다시 죽음을 갈등했다. 손이 닿는 곳에는 편한 죽음을 보 장해 주는 물건까지 있다. "아, 아!" 그는 고통을 이기지 못해 처량한 비명까지 질렀다. 그 고통을 참을 수 없어 마충현은 마침내 억지 힘을 썼다. 떨리는 손으로 떨리는 입 술에 독약을 털어 넣었다. 반은 밖으로 흘리고 반은 삼켰다. 계집은 자신의 행동을 수상쩍게 생각했는지 아무런 제지도 않았다. 독약이 침에 섞여 목구멍으로 조르르 흘렀다. '이제 끝이다.' 마충현은 하늘을 보고 털썩 누웠다. 개망나니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그는 자신을 탓하기 보다 남을 먼저 탓했다. 자신을 이 지경으로 몰 고 간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입으로 절로 독설(毒舌)이 흘러 나왔다. 다행히 입은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더러운 계집년! 네년은 얼마나 살 듯 싶으냐. 흐흐흐, 마옹이 돌 아왔다. 마왕으로…… 죽은 줄 알았겠지. 나는 네 눈으로 똑똑히 보 았다. 분하에서 본 마옹이 분명했어. 천산오응, 금호령을 단순간에 핏물로 만들어 버리고 요연이라는 당예의 계집까지 죽였다. 흐흐흐, 흐흐흐흐!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 구대문파, 사패…… 나는 보았다. 마왕의 그 무서운 힘까지! 흐흐흐, 흐흐흐흐……." 마충현은 저주의 주문을 외듯 말했다. 여인의 안색이 변했다. "명옹, 명옹을 보았다고? 명옹이 살아 있다고?" 그녀가 급히 물었다. "흐흐흐,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으냐. 네년이 구대문파나 사패의 문 앞에서 나를 잡았다고 자랑하는 꼴이 보기 싫어 방금 독약 을 마셨다. 흐흐흐, 죽음을 앞둔 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누가 너를 구대문파나 사패의 문 앞으로 끌고 간단 말이냐? 나는 배교도다! 다시 말하라! 정말 명옹을 보았느냐?" "엉? 배교도라고……." 마충현은 눈을 치켜 떴다. 자신을 바라보는 계집의 눈빛은 너무도 진지했다. 장난을 치는 것 같지 않았다. 굳이 배교도를 자처하며 장 난을 칠 이유도 없었다. "으, 으……." 마충현은 신음을 흘렸다. 자신의 성급한 판단에 울화가 치밀어 죽을 지경이었다. 죽을 지경 이 아니라 죽어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입이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팔, 다리도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마왕의 수법은 마충현을 잠시의 고통에만 빠뜨렸을 뿐이었다 . 망산의 약속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라도 죽일 처지까지 만들어 놓지 않았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안서에서 호된 꼴을 당한 후 지레 겁을 먹어 성급한 판단을 한 것 이 졸지에 몇 개월의 생명을 내던져 버리고 만 꼴이 된 것이다. 생명 에 대한 애착이 되살아났다. 다급했다. "마옹, 마왕은 살아 있소. 아, 안서에서 분명 그, 그를 만났소. 나 , 나를 살려주시오. 해, 해독약을……." 마충현은 급한 대로 여인에게 애원했다. "아악!" 그가 배를 움켜쥐고 갑자기 떼굴 굴렀다. 배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하고 있었다. 독기가 퍼지는 모양이었다. '그, 그놈은 가, 간단히 죽었는데 나는 왜?' 마충현은 배를 껴안고 뒹굴며 물었다. 불행히도 그 독약은 범인에 게는 바로 효력을 발휘하나 마충현처럼 독물에 내성(耐性)을 어느 정 도 갖춘 자는 바로 죽음을 선사하지 않았다. 그는 안서에서 요연에 의해 이미 별 독을 다 경험한 터였다. "으악! 악!" 마충현은 비명을 지르며 굴렀고 여인은 여인대로 발을 굴렀다. 아 직 마충현에게 물어 볼 말이 많았다. 물어 보기 위해서라도 해독약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해독약을 어떻게, 무슨 수로 구한단 말인가. 어떤 독에 중독되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시간도 늦은 듯했다. 마충현의 전신은 퍼렇게 변색되고 있었다. "해, 해독약! 나, 나는 마, 마왕과 마, 만나기로 했소. 그, 그가 부, 부탁을…… 해, 해독약을 구, 구해 주면, 만, 만나기로 한 장소 를……." 마충현은 앞 뒤 가리지 않고 해독약만 찾았다.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흥정을 하려 했다.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으악! 으, 으……." 마충현은 비명을 지르며 피가 나도록 전신을 벅벅 긁었다. 요연이 뿌린 독 중 타지 않고 남아 있던 독이 상응하며 마충현의 육신을 더 욱 괴롭히고 있는 듯했다. 만약 그녀가 강호의 풍파를 조금 더 겪었다면 마충현을 단칼에 목 베어 죽였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마충현을 가장 위하는 길일 테니… … 하지만 여인은 그런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으, 으……." 피투성이로 구르던 마충현의 신음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전신의 뒤 척임도 늦어졌다. 그가 하늘을 보고 반듯이 누웠다. "우웩! 웩! 웩!" 마충현은 하늘을 향해 혈전을 뿌렸다.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이 맑아졌다. 여인은 마충현의 최후를 예감했다. 마충현은 하늘을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아, 아!" 그가 애처러운 탄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암흑(暗黑)! 그의 목이 툭 꺾였다. 희대의 탕아(蕩兒), 마충현의 최후였다. 죽음의 고통이 염왕전(閻 王殿)의 판관(判官)이 그의 죄를 감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을지… …. 마충현의 시신을 바라보며 여인은 아미를 찌푸렸다. 정말 그는 독 을 먹고 죽었다. 이제까지의 말이 내키는 대로 떠든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마충현은 죽음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일단 무산에 성녀의 거처를 마련한 후, 저 자의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해 보아야겠다.' 휙! 여인은 신형을 날렸다. 여인의 신형은 이내 소롯길을 사라졌다 . 만추(晩秋)의 서정(抒情)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충현의 시신만 이 그 길을 지켰다. 제29장 마인거(魔人車) "출당(黜黨)을 명해야 합니다!" "그 정도 일로 출당이라니…… 너무 하지 않소!" "상(商) 장로(長老)께서는 어찌 그 정도 일을 그 정도 일이라 하시 오! 분타주라는 자가 가죽신을 신고 다니다니…… 도대체 있을 법한 일이오!" "비록 그가 가죽신을 신은 것은 문제가 되기는 하나…… 그는 제자 들이 비럭질한 돈을 훔쳐 가죽신을 산 것이 아니오. 우연히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아 판 돈으로 가죽신을 샀다고 하지 않소. 그런데 어찌 출당을 명해야 한다고 하오." "대 개방의 분타주라는 자가 본업을 버리고 장사치가 되다니…… 그 죄만 묻더라도 출당의 사유는 정당하오!" "맞는 말이오! 만약 개방의 방도가 장사를 했다는 사실을 알면 어 느 장사치가 우리 개방에 적선을 하겠소." "그것은 모르는 말씀이오. 그럼 이(李) 장로(長老)께서는 천하에 부업(副業)이라는 말이 없어야 옳았다는 말 아니오. 나는 가끔 장사 치들도 비럭질을 하는 것을 보았소!" "아니, 어느 장사치가 비럭질을 했다는 말이오? 상 장로께서는 그 자의 이름이 누구인가를 똑똑히 밝혀야 하오!" "똑똑히 밝히리다! 허도에서 마전을 하는 이유달(李有達)이라는 자 요." "방주, 이유달이라는 자를 처단해야겠소. 감히 장사치가 비럭질을 하다니…… 방도들에게 명을 내려 때도 없이 그놈의 문전을 들락거려 개방의 무서움을 보여주도록 합시다!" "생짜를 부릴 곳이 따로 있지…… 오죽 갑갑했으면 비럭질을 나섰 겠소! 처단이라니…… 언어도단(言語道斷)이외다!" "왜 하필이면 비럭질을 한다는 말이오! 다른 일도 많은데!" 장로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등중용은 한숨을 쉬었다. 장로들은 이제 이유달이라는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로 한동안 옥신각신 거릴 듯했다. 원래 사건의 발단은 강서의 분타주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는 사실 이 총타에 보고되고서였다. 사대장로 중 한 명인 이 장로가 순찰(巡 察)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하고 장로회의(長老會議)를 요구했다. 강 서의 분타주를 처단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장로와 마(馬) 장로(長老)는 강서 분타주의 출당을, 상 장로와 정(鄭) 장로(長老)는 반대를……. 네 명의 장로들은 두 명씩 패를 지어 결론을 낼 기색을 보이지 않 았다. 결론이 날 듯 하다가도 때아닌 옆길로 새어 버리는 그들이었다 . 이제 이유달이라는 자의 처단 문제가 튀어나왔으나 그 일로 한동안 티격태격할 것이 분명했다. 등증용은 서둘러 회의를 파하고 싶었으나 장로들은 그가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고파서라도 등중용은 장로회 의를 파하려 했다. 그는 몇 번 이런 일을 당했기에 회의를 파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짝! 짝! 짝! 등중용은 손뼉을 쳤다. 장로들은 말을 멈추고 시선을 모았다. "모처럼 장로들께서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마침 총타에 약간의 개 고기와 술이 준비되어 있으니……." "개고기! 술!" 장로들은 눈을 번쩍 떴다. 마 장로와 정 장로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입에 침을 주르르 흘리 고 있었다. "밖에 있느냐? 장로들께서 출출해 하신다!" 등중용이 밖을 내다보고 소리쳤다. "헤헤헤, 개고기를 말씀 하시는군요. 들어갑니다. 조금만 더 늦게 불렀다면 벌써 우리가 요절내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결제자 한 명이 해살 거리며 삶은 개다리 두 쪽을 어깨에 걸치고 들어왔다. 또 한 명의 제자는 한 동이의 술을 들고 있었다. 관제묘 는 금방 구수한 개고기 냄새와 술 냄새로 가득 찼다. "허허허! 방주, 뭐 이런 것을……." 마 장로가 소매를 침을 닦으며 개다리에 손을 대려 했다. 등중용은 마 장로의 손을 정중히 뿌리치며 술과 개고기를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먹는 것은 먹는 것이고 일은 일! 회의를 파한 후 같이 먹도록 합 시다." 그가 점잖게 말했다. "맞는 말이요. 맞는 말이야. 아무렴, 일에는 순서가 있지." 장로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렇소. 가죽신을 신은 것이 문제가 되기는 하나 비럭질한 돈을 훔쳐 가죽신을 산 것도 아니고, 짐승을 잡아 판 돈으 로 샀다고 하니 이번 한 번만 덮어둡시다. 원래 강서 분타주는 나쁜 자는 아니었소." 목에 핏대를 올리며 출당을 주장하던 이 장로의 말이었다. "아무렴! 대 개방의 분타주가 본업을 잊고 장사질을 하다니…… 당 연히, 당연히 출당이오!" 출당을 목 높여 반대하던 상 장로의 말이었다. 그들은 크게 고함을 지른 후, 서로의 말에 놀라 했다. "말씀이 서로 다르시군요." 등중용은 술동이를 손으로 툭툭 쳤다. 술이 찰랑거리며 진한 주향( 酒香)을 뿜었다. "이 장로는 줏대 없이 무슨 말씀을 하신 게요! 출당을 시켜야 하오 . 그렇지 않으면 무결제자로 방에 발을 붙이게 한다던가!" 원래 출당을 주장하던 마 장로의 말이었다. "그만한 일로 무슨 출당! 비록 그 일이 잘못이라 하더라도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의 상사(常事)라 하지 않았소. 출당은 있을 수 없 소!" 원래 출당을 반대하던 정 장로의 말이었다. 그들은 크게 고함을 지른 후, 서로의 말에 다시 놀라워했다. "말씀이 또 서로 다르시군요." 퉁! 퉁! 등중용의 손에 술방울이 튀었다. 장로들이 침을 꼴깍거리는 소리는 개봉 부중(府中)까지 들릴 듯했 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미적거렸다. 또 서로 다른 말을 내뱉 을까 걱정하는 투가 역력했다. 이 장로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우리는 이제 늙었소. 사물은 보는 눈이 예전처럼 공평무사(公平無 私)하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오. 삶의 연륜만큼 편견도 자라나 버린 것이오. 나는 이 일의 옳고 그름은 세상의 편견에 적게 물든 방주께 서 가려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가 탄식 조로 말했다. "아무렴! 옳은 말씀이요, 옳은 말! 아, 아! 더럽구나! 나라는 이름 으로 자란 아집(我執)이여!" 상 장로가 박자(拍子)를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진작 그 같이 말해야 했소. 방주께서 들고 계신 용두봉은 이런 일을 처리하라고 있는 것 아니겠소." 마 장로도 한 마디 보탰다. 정 장로 역시 한 마디 보태려 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장로들의 눈 치를 받고 입을 합 닫았다. 장로들은 이 순간만큼은 말이 많은 자를 찢어 죽일 듯 미워했다. "그럼, 강서 분타주의 일은 내가 평결(評決)을 내려도 되겠습니까? " 등중용이 물었다. "물론이오!" 장로들은 입을 맞춰 소리쳤다. "조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둥중용은 운을 뗐다. "오! 조사께서……." "조사의 말씀이라면 천붕지복(天崩地復)이 된다고 하더라도 따라야 지." "아무렴, 조사의 말씀을 거역한다는 것은……." 따라서 한 마디 거들려던 정 장로는 다시 다른 장로들의 눈짓에 입 을 다물었다. "이 세상에 내 물건이란 있는가? 강서 분타주는 과연 그 멧돼지를 자신의 물건이라 할 수 있습니까? 하늘이 내려 주고 땅이 키워 주었 습니다. 그런데 강서 분타주는 어찌 염치없이 그 멧돼지를 모두 제 물건이라 한단 말입니까." "맞소이다! 생각하니 강서 분타주는 너무 염치가 없군. 그럼, 출당 을……." 이 장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조사께서는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땅의 공이 아무리 크다 하나 애써 그 물건을 얻은 사람의 공만 하랴!" "맞소! 그 말이 정말 맞소이다! 나는 돼지가 홀로 고기로 변해 사 람 입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소! 그럼, 용서를……." 상 장로가 물었다. "하늘, 땅이 내려 준 물건!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 나 애써 개인이 얻은 것, 또한 스스로 쓸데가 있으면 써야지요. 나는 강서 분타주가 과연 나누고 쓰는 일을 공평하게 했는가 묻고자 합니 다." "호오, 맞는 말이오. 맞는 말이야!" 장로들은 입을 모았다. "장로들께서는 강서 분타주께서 가죽신을 사 신은 이유를 아십니까 ?" 등중용이 물었다. "모르오." 이 장로는 고개를 저었다. "발싸개로는 겨울을 넘길 자신이 없었겠지요." 상 장로가 말했다. "강서에 있는 놈이 그런 걱정을…… 발싸개도 없이 겨울을 지내는 감숙의 방도들도 있는데!" 마 장로는 버럭 화를 냈다. "그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알아 본 바에 의하면 강서 분타주 는 멋을 부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멋을 부려 환심을 사야 할 여자 가 있었습니다." "잉?" 장로들은 모두 황당해 했다. "아니, 그런…… 정말 거지발싸개 같은 놈이군. 너덜너덜한 누더기 에 가죽신만 뎅그러니 신은 모습을 보면 계집이 환심은커녕 배를 째 고 웃었을 것이다." "나 같으면 가죽신 대신 동냥 그릇에 은칠을 했겠다. 아무렴, 그게 더 능력이 있어 보이지. 설마 은칠한 동냥 그릇에 찬밥을 던지겠어. " "문제야, 문제…… 어디서나 여자가 문제라니까. 그 멀쩡하던 놈이 갑자기 왜 가죽신을 사 신었는가 했더니, 결국 여자가 있었군. 여자 가……." 장로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강서 분타주는 사십이 넘도록 아직 여자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했 다고 합니다. 그런 차에 마음에 혹하는 여자가 나타났으니 가죽신이 고 뭐고 정신을 못 차릴 만 하지요." 등중용이 말했다. "나는 그 놈의 마음을 이해하겠다. 밤은 길어지고 얼마나 신세가 처량했으랴. 나도 예전에는 남자, 여자 빨래가 나란히 널린 것만 봐 도 밤잠을 못 잤었다." "아무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댓돌 위에 남녀의 신발이 나란히 놓 인 것만 봐도 화가 났었지!" 정 장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그가 득의양양한 표정으 로 주위를 살폈다. 마침내 한 마디 끼여들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기는 아직 일렀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 없다지만 여자만은…… 아, 아! 우리 개방의 방도들이 평생을 업고 가야 할 업보다. 방주, 나는 제자들이 불쌍해 서 못 참겠소!" 이 장로는 갑자기 술동이를 들었다. 그가 심화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술을 꿀꺽꿀꺽 들이켰다.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상 장로가 이 장로의 술동이를 받아 재빨리 술을 들이켰다. 정 장로가 술동이에 손을 뻗을 때 등중용은 술동이를 자신의 앞으 로 가져와 팔을 올렸다. "늙은 자들이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다니! 속을 다 버리고 말 것일 세! 자, 여기 있네!" 마 장로는 개다리를 쭉 뜯어 이 장로와 정 장로에게 눈곱만큼 주고 나머지는 도로 놓을까 어쩔까 하다가 자신이 꿀꺽 삼켰다. 술도 안주도 먹지 못한 정 장로는 황하의 물이 불어날 정도로 침만 줄줄 흘렸다. "강서 분타주의 처지가 그와 같았소. 장로들께서도 어느 정도 그를 동정하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가죽신을 신은 것은 분명 본 방의 규 율을 어긴 것! 벌은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벌을 내리지 않으면 가죽신 다음에 금의를 입겠다고 할 지 모르니까요." "방주의 말씀이 옳소!" 장로들이 한 입으로 소리쳤다. "분타주의 자리는 그대로 두겠습니다. 직위를 없애면 시간은 더 남 아 돌 테고 시간이 남으면 옳다구나 하고 멧돼지나 잡으러 다닐 테니 까요. " "아무렴, 작자는 그렇게 하고도 남을 놈이지. 강서의 멧돼지들을 위해서도 놈은 분타주를 계속 맡아야 하오." 상 장로가 말했다. "대신 올 겨울을 발싸개도 없이 맨발로 지낼 것을 명하겠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생각이……." 등중용이 물었다. "오, 오! 사백, 궁신께서 방주의 이름을 중용으로 지은 이유를 알 겠소. 그야말로 편편부당(偏偏不當)함이 없는 판결이외다. 중용이오. 중용……." "염왕전의 판관이라 하더라도 방주와 같이 명쾌한 판결은 내리지 못할 것이오." "개방의 홍복이외다. 술만 밝히던 사형, 천일취개는 일찍 죽음으로 써 개방을 이롭게 했소이다." 정 장로를 제외한 장로들이 나오는 대로 각각 한 마디씩 탄사를 터 뜨렸다. "그럼, 강서 분타주의 일에 대해서는 발싸개 없이 겨울을 지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등중용은 용두봉을 들었다. 그가 용두봉을 세 번 내리쳤다. 용두봉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로들은 빠른 손놀림을 과시했다. 손 이 제일 빠른 이 장로는 술동이를 안았고 상 장로, 마 장로는 각기 개다리 한 쪽을 들었다. 정 장로는 그때까지 방주에 대한 칭찬의 말을 찾고 있었다. "개방의 홍복으로 염왕전의 판관이라 하더라도 편편부당으로 좋아 할 것이오!" 사태가 급하게 돌아가자 다급히 고함을 지르며 자기 몫을 찾았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가죽신 하나가 개방 전체를 뒤흔드는 중요한 일이 될 만큼 평화로 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장로들은 그 뻔한 일에도 아이처럼 목소리를 높여 일거리를 만들려 하고……. 개방의 한가로움이 이와 같았다. 관제묘를 나선 등중용은 하늘을 우러렀다. 맑은 가을 햇살이 눈을 부시게 했다. "방주, 방주께서도 한 점 하셔야지요." 총타, 총순찰이 잘 삶은 개고기를 들고 왔다. 등중용은 선 자리에서 개호주 답게 낼름 총순찰이 들고 온 개고기 를 해치웠다. "고기 맛이 좋군요." 그가 총순찰이 주는 호로병의 술을 들이키며 말했다. "대사백에게 받치고자 한 개입니다. 잘 먹인 황구(黃狗)를 골랐지 요." "사백조께서 좋아하셨을 것입니다." 등중용은 웃었다. 사백조, 원상이 그의 꿈에 나타난 일은 그때 한 번만이 아니었다. 그 후에도 몇 번 침울한 얼굴로 나타났었다. 그래서 등중용은 정말 개 맛이 그리워 나타났나 해서 방도들로 하여금 개 한 마리를 잡아 사백조의 영전에 받친 터였다. 지금 장로들과 그가 먹고 있는 개는 바로 그 개였다. "집법당 당주께서 안 보이십니다." 등중용이 개고기를 짭짭거리는 방도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집법당주께서는 먹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아무리 대사백이 생전에 개를 좋아했다고는 하나 죽은 자의 영전(靈前)에 살아 있는 개를 죽 여 바치는 법이 어디 있느냐 하며 무척 화를 내셨습니다." "흐흠, 그럼 개를 잡은 일이 잘못된 일이란 말입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집법당주가 괜히 집법당주이겠습니까? 자신에게 한 마디 상의도 않고 개를 잡았다고 화가 난 것이겠지요." "물어 보고 개를 잡을 걸 그랬습니다." 등중용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개방이 방도들에게 요구하는 법도(法度)는 수백 가지가 넘는다. 구 걸할 때, 밥 먹을 때, 조사들을 모실 때……. 그 모든 것까지 등중용은 기억하지 못했다. 영전에 개를 받치지 않 는다는 법도도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올해는 포식으로 겨울을 맞게 되었으니 추위는 덜 탈 듯 합니다." 총순찰은 입에 묻은 개기름을 닦으며 흐뭇해했다. 그때였다. "방주!"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왔다. 뭐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바로 집법당 주였다. "무슨 일입니까?" 등중용이 조금 켕기는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빨리 저쪽으로…… 구결전(九結傳)이 도착했습니다!" "구결전!" 등중용과 총순찰이 동시에 놀라 소리쳤다. 개방은 허리에 묶인 매듭에 내용을 적고 다시 매듭을 묶어 소식을 전한다. 통상적으로 삼결전(三結傳)은 각 분타의 분타주들이 향주들 에게 보내는 전결(傳結), 오결전(五結傳)은 분타에서 총타 각 당의 당주들에게 전해지는 전결, 칠결전(七結傳)은 방주와 장로들에게 보 내는 전결이다. 결이 올라갈수록 전결을 전하는데 동원되는 방도의 수가 늘어나고 속도도 빨라진다. 칠결전 정도 되면 마필(馬匹)은 물론 반 이상의 방 도가 결을 전하는데 동원된다. 하물며 구결전이야……. 전결을 빨리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 아야 하고 전결이 지나가는 모든 분타는 오로지 전결을 빨리 보내는 일에만 매달려야 한다. 전결 하나에 개방 전체가 떠들썩하게 되는 꼴 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구결전을 잘 띄우지 않았다. 구결전이 떴다는 것은 천하대란(天下大亂)의 예고! 등중용과 총순찰이 펄쩍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디서 구결전을 띄웠습니까?" 구결전을 받으러 가며 등중용이 물었다. "청해(靑海) 분타인 듯한데……." 구결전에 먼저 놀라 집법당주도 자세히 보지는 못한 듯했다. "청해라면……." 등중용은 안색을 찌푸렸다. 구결전은 십 여년 전에도 한 번 떴었다. 곽부의 단혈철각련! 등중용은 단혈철각련 잔당들의 재 발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구결전을 읽고 난 등중용의 안색이 창백했다. 소식을 듣고 모인 장로들과 총순찰, 집법당주는 긴장으로 침을 삼 켰다. 구결전은 방주를 제외하고 그 누구도 읽을 수 없다. 방주가 공 개하기 전에는……. "보십시오." 등중용이 긴장으로 가슴을 태우는 장로들에게 구결전을 건넸다. 장 로들이 구결전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 청해 분타주가 방주께 전합니다. 곤륜 장문인 광화자의 대제자, 홍명이 각 문파에 급히 사실을 알려 달라며 본 분타에 전한 소식입니다. 칠월 모일(某日), 곤륜에 대마성(大魔星)이 출현했다고 합니다. 문 로는 모른다고 합니다. 금의에 우수에는 연검이 나가는 비구를 차고……. 장문인 광화자, 광운, 광오, 광성…… 대곤륜의 명숙들이 모두 그 자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습니다. 곤륜의 전각은 모두 불타고 살아남 은 자는 광정을 비롯한 몇 몇 제자들에 불과……. 홍명은 곤륜의 봉문(封門)을 선언했습니다. 대마성의 무공은 비견하건대 세 명의 곽부도 당해 내지 못할 것이 라 했습니다. 수족들도 없었다고 합니다. 방주께서는 속히 각파의 장문인들에게 이 같은 사실을 전해 대회맹 (大會盟)을 개최하시고……. "이, 이런 일이……." 장로들의 안색은 흙빛으로 변했다. "방주!" 그들은 모두 등중용에게 시선을 돌렸다. "총순찰, 이 사실을 각 산문에 급히 전해 주시오! 대회맹도 개최할 것이오! 각 분타에는 구결전으로 비상령을 내려 주십시오. 특별한 명이 없는 한 놈을 발견하더라도 싸움을 걸지 마라 하시오! 단 일인( 一人)으로 곤륜을 쑥대밭으로 만든 자입니다!" 등중용이 명을 내렸다. "알겠습니다." 총순찰은 급히 명을 받았다. "도대체 단신(單身)으로 곤륜을 쑥대밭으로 만든 자가 있다니……. " "세 명의 곽부라…… 한동안 조용하다 했더니……." 장로들의 표정이 점점 무거워졌다. 가죽신으로 논란을 벌이던 때가 아득히 먼 옛날 같았다. 정 장로는 벌써 이렇게 취했나 하고 자신의 뺨을 꼬집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밤, 사천 분타에서 도착한 전결에 비하면 청해의 전결 은 약과였다. - 사천 분타주가 방주께 전합니다. 근자에 민산에 큰불이 있었고 그곳이 맹호전과 가까웠던 바 행여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해서 제자 몇을 보냈습니다. ……맹호전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습니다. 연유를 알기 위해 생존자 를 찾았으나 생존자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전 제자들을 풀어 근동 의 초부들에게 물어 본 결과……. 겁을 잔뜩 먹은 초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설득에 설득 을 거듭 입을 열게 했습니다. 초부가 말하기를……. 아홉 마리의 용이 실린 배 모양의 커다란 교자였다고 합니다. 모두 여자들이 들고 있었고 남자는 단 한 명이었는데…… 너무 멀어서 모 습은 제대로 보지 못했고 작자의 날뛰는 모습만 보았는데…… 단순간 에 시산혈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배 같은 교자에 장착된 아홉 마리의 용이 불을 뿜었 는데 너무 지독한 화염이라 멀리 떨어져 있던 그도 숨이 막혀 얼굴을 돌렸다고 합니다. 눈을 떠서 다시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 잿더미 외에는……. 사패의 하나인 맹호전이 그렇게 사라졌다는 것을 보고 드립니다. 방주께서는 속히 총타의 인원을 보내 주시어 맹호전을 불태운 자들의 정체를 밝혀 제자들의 동요를 막아 주시기 바랍니다. 등중용은 생각했다. 악재(惡材)는 언제나 연속해서 일어난다고…… 그는 더 이상의 일이 없기만을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사천으로부 터 또 하나의 구결전이 바람처럼 총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사천 분타주가 방주께 대지급으로 전합니다. 점창파(點蒼派)의 유일한 생존자, 등조(鄧朝), 연상평(延上平), 저 속(楮謖)의 전입니다. 시월 초순, 열 여섯 마리의 말이 번갈아 끄는 팔륜거(八輪車)가 대파산 어디에서 돌연 출현 점창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오십 여명의 무사들이 호위하는 그 팔륜거에는 특이하게 이 장여 크기의 석상이 실려 있었다고 합니다. 허리에는 긴 칼, 태양처럼 둥근 호심경, 사자상이 새겨진 요대, 갑 주로 무장하고 있는 석상으로 흑요석으로 만든 듯 전신은 검은 색이 었다고 합니다. 석상 곁에는 석상과 비슷한 복장을 한 자가 타고 있었다고 했습니 다. 검은 얼굴, 팔척 장신에 대월을 든 자로 점창파의 연상평은 처음 그를 본 순간 전설의 치우(蚩尤)를 연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자는 팔륜거가 점창의 문 앞에 이르자마자 대월을 휘둘러 산문 을 부수고 바로 점창의 문전으로 쇄도했습니다. 점창의 전 문도는 용맹분투 기습자에 맞섰으나 그를 감당하지를 못 했습니다. 그 자뿐만 아니라 그 자의 수하들로 보이는 자 또한 하나 같이 개세의 마공을 익혔다고 합니다. 문로는 정확히 확인할 길 없고……. 저속이 말하기를 놀라운 일은 점창파가 오십 여 남짓한 적들에게 무너진 것은 한 시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점창파가 적들에게 입힌 피해는 고작 경상자 몇 명뿐이었습니다. 등조, 연상평, 저속이 살아난 것은 점창의 멸문을 막기 위한 명숙 들의 눈물겨운 노력 덕분이었습니다. 살아남아 본 분타에 도착 전후 사정을 밝히고 난 등조 대협은 말했 습니다. 사숙부들의 유지(遺志)가 복수 보다 점창의 맥을 먼저 잇는 일이나 당분간 봉문을 하고 은둔(隱遁)으로 점창의 이름을 강호에 잠시 지 우겠다고 했습니다. 등조 대협은 솔직히 자신들은 복수할 능력도 없 다고 한탄했습니다. 점창의 문도들이 사실을 밝히고 피눈물을 흘리며 본 분타를 떠난 후 저희들은 팔륜거의 행방을 급히 추적했습니다. 그 사이, 몇 개의 군소방파가 흔적도 없이 팔륜거에 의해 사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용두방주여, 팔륜거를 모는 자들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천 의 무문들을 정사(正邪) 가리지 않고 초토화(焦土化) 시키고 있습니 다. 마인(魔人)들입니다. 팔륜거에 세워진 거대한 석상은 바로 마인상( 魔人像)! 그래서 사천의 동도들은 이제 팔륜거를 모두 마인거(魔人車 )라 부르고 있습니다. 용두방주여, 총타와 강호 동도들의 급한 도움을 바랍니다. 사천의 동도들은 이제 마차가 구르는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사천 분타주의 직인이 찍힌 구결전이 총타로 향하고 있을 때 이미 사천 분타는 마인거에 불타고 없었다. 아미파도 불탔다. 우르르르……. 사천을 눈 깜짝할 사이에 광마(狂馬)로 질주하고 난 마인거가 섬서 를 향하고 있었다. * * * "감 명두, 전교영기와 신장도는 어디에 두셨소?" 유경공이 물었다. 산은 첩첩으로 쌓여 있었고 나뭇잎은 붉디붉었다. 감악, 유경공을 비롯 예령을 호위하는 자들은 이미 무산에 발을 들 이고 있었다. "안전한 곳에 두었습니다." 감악이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두에서 길을 여는 자는 사천의 장 명두와 강서의 고 명두였다. 성녀는 파파라는 여자의 곁에 붙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교자를 준비했는데도 두 발로 산행을 고집한 성녀였다. 가파른 산 길을 오르는 것이 성녀에게는 조금 힘든 듯했다. 이마에 송글한 땀이 맺혀 있었다. 그러나 성녀는 무산의 가을 정취에 빠져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흥분된 목소리로 파파라는 여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금옥이라는 좁은 곳의 정경만 바라보다 무산의 광활한 산림에 발을 들였으니 그 정감이 남다를 것이 분명했다. 특히 성녀의 감성(感性)이 얼마나 예민한 가는 이곳까지의 여행을 통해 감악은 이미 알고 있었다. 맑은 하늘, 화려한 홍엽, 계류를 흐르는 물처럼 청량하게 울려 퍼 지는 성녀의 음성……. 감악은 마음의 충만함을 만끽했다. 성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도 즐거웠다. 무산의 변화무쌍한 안개만큼이나 새로운 충족감들이 샘 물처럼 솟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 불안하기도 했다. 십 여년 전의 그때처럼 성녀를 혹시 잃지 않을까. 만약 이번에도 성녀를 지키지 못한다면 감악은 자신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 두셨소?" 섬서 명두, 유공경은 별스럽게 전교영기와 신장도에 대해 물고 늘 어졌다.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에 두었습니다. 그곳만큼 안 전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잘 되었군요. 진작부터 말씀드리려 했습니다만……." 유공경은 시선을 돌리며 잠시 말에 뜸을 들였다. "성녀께서도 오셨소. 이제야 말로 호교신장이 필요할 때이외다. 호 교신장의 위를 계승하시오." 그가 말했다. "무슨 말씀을…… 자격이 있었다면 벌써 명옹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호남의 명두 노릇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자입니다." 감악은 마치 무슨 듣지 못할 소리를 들은 것처럼 급히 손을 저었다 . "감 명두, 호교신장의 자리는 어떤 자리요? 물론 성녀를 가장 가까 이 모실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자리이기는 하외다. 하지만…… 그 자 리를 제대로 끝까지 지킨 명옹들이 드물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 자리 가 어떤 자리인지 알 수는 있을 것이오. 영광 보다 형극(荊棘)을 더 요구하는 자리이외다. 감 명두에게 형극의 길을 가라고 떠밀고 싶지 는 않소. 그러나 솔직히 나는 감 명두 보다 성녀와 교를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소. 성녀와 교를 위해서 호교신장의 위를 계승하시오." "……." 감악은 아무 말도 못했다. "감 명두는 광명신장의 서신을 받은 분이오. 광명신장께서 왜 감 명두를 선택해 서신을 보냈겠소? 나는 광명신장께서 감 명두를 이미 명옹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서신을 보냈다고 믿고 있소. 다른 교도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외다." "저는 아직……." "명옹이 돌아올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 게요. 명옹이 적들에게 목 숨을 잃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그런데 왜 자꾸…… 호형 호제하며 무척 친했음은 압니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 이제 미련 을 버리십시오." "유 명두, 내가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왜 내가 명옹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산 일전 때 명옹을 내가 모셨습니다. 분명 내가 모셨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명옹은 없고…… 중간의 기억이 없어졌습니다. 없어진 기억 가운데 언뜻…… 성녀를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성녀로부터 명옹에 대한 당부의 말도 들었고…… 명옹이 죽 었다면 성녀께서 명옹의 이후를 당부할 까닭이 없지요. 생각할수록 꿈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일이 지날수록 선명해지는 꿈도 있습니까?" 감악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한숨을 쉬는 그의 얼굴에 잔주름이 가 득했다. 세월의 무상함을 그 역시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감 명두는 그때 강호의 풍파를 많이 겪지 못했던 젊은 나이였소. 몸도 극히 피로한 데다가 너무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잠시 가 수(假睡)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 틀림없소. 환상도 보였을 테고… … 그렇게 생각하고 잊으시오. 명옹이 살아 계시다면 아직 모습을 보 이지 않을 까닭이 없지 않소."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감악이 마지못한 듯 말했다. "생각을 해 보겠다는 말로 될 일이 아닙니다. 어차피 모두 모인 터 , 성녀께서도 돌아오셨으니 교를 재조직해야 합니다." "모두의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감악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이제 새로운 성녀께서 돌아오셨으니 옛일에 대한 애착은 모두 잊어야 할 때가 된 듯도 했다. "무슨 말을……." 섬서 명두, 유공경은 어이없어 했다. 방금 전까지 감 명두에게 무슨 말을 했던가. 호교신장의 위를 계승 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명옹이 살아 있다니……. "트, 틀림없습니까?" 사천 명두, 장탄이 물었다. 명옹, 명강량! 짧은 기간 호교신장의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교도들 이 가장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다. 가장 최근의 호교신장이었기 때문 만은 아니다. 그가 호교신장으로 활약할 때는 교가 가장 어려운 때였 다. 모산에서 패해 비록 참수를 당하기는 했으나 이 년여 동안의 활 약은 교에 아직도 하나의 전설로 살아 있었다. 그가 사패의 전신(前 身)인 유향경천문, 구대문파를 비롯한 천하를 상대로 분투를 벌여 주 었기 때문에 교는 패했어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실재 강호인들 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배교를 평할 때 예전처럼 쉽게 하 오문이라는 호칭을 붙이지는 않는다. 명옹의 위신력을 대다수가 보았 고 들었기 때문이다. 명옹은 그렇게 교의 자존심을 지켰고 그 자존심 은 아직 살아 남은 교도들을 지탱하는 큰 힘이 되고 있었다. 장탄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명옹이 살았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 그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 "아직 장담은 할 수 없습니다. 마충현이 비록 죽음 직전에 남기 말 이라고는 하나 마충현의 그간의 행보를 보건대 그의 말을 모두 받아 들이기에는 힘듭니다." 삼십 대 초반의 여인이 말했다. 그녀는 원래 산서의 명전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비게 된 산서 의 명전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녀 역시 산서의 교세를 확장시키기 위 해 동분서주했다. 그 와중에 감악을 만났다. 그리고 그녀는 감악에 의해 청기명사를 맡아 주도록 청 받고 청기명사가 되었다. 여자인 그 녀로서는 교도들을 회합하고 교세를 확장시키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당장 급한 청기명사의 자리를 수락한 것이다. 청기명사, 신화정! 교도들에게 철의 여인, 무정화(無情花)로 더 잘 알려진 여자가 바로 그녀였다. "죽음을 앞두고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고 합니까? 악에 받쳐 겁이라도 줄 요량으로 그런 이야길 했다면…… 솔직히 단혈철각 련의 재발호(再跋扈) 같은 이야기를 내던지는 게 나았을 것입니다." 강서 명두, 고명상도 마충현이 실없는 소리를 했다고는 믿지 않은 눈치였다. "죽었다는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그것도 천산오응, 금호령을 단숨에 핏물로 만들어 버릴 절세 고수로 변해……." 유경상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람도 많습니다. 마충현이라는 자가 착각을 했 을 수도 있소. 그러나 전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으니 내가 사실 여부 를 확인해 보겠소." 감악이 말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명옹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는 일을 한시도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명옹이 살아 있다면…… 모산파 의 풍도 같은 엉뚱한 자가 엉뚱한 수작을 부리지 않는 한 교세는 십 년 안에 예전의 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감악은 장담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상하기는 하오. 개방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바빠 보이지 않았소?" 고명상이 안광을 빛내며 물었다. "흐흠, 정말 그랬던 것 같소." 장탄은 수염을 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옹인지 확인은 할 수 없으나 어쨌든 강호에 풍파를 일으킨 누군 가는 있는 모양이오. 한동안 잠잠하다고 했더니……." 유공경은 안색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성녀를 부탁합니다." 감악은 더 이상 미적거릴 수 없었다. 그가 목채를 나섰다. "명옹을 찾아 가신다고요? 감 아저씨가 바로 명옹이잖아요." 색깔 고운 나뭇잎을 줍고 있던 예령이 말했다. "저는 명옹이 아닙니다. 호남의 명두일 뿐이지요. 원래 우리 교를 지키던 호교신장은 따로 있습니다. 오래 전에 실종이 되셨습니다. 그 런데 지금 그 분을 보았다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감악은 명옹이 죽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어머니는 나를 지켜 줄 호교신장은 감 아저씨라 했는데 . 광명신장도 아저씨가 호교신장인 줄 알고 있을 걸요." "내가 호교신장…… 전대 성녀께서 나를 호교신장이라……." 감악은 어리둥절해 했다. "맞아요. 아저씨가 호교신장…… 그런데 또 무슨 명옹을 찾아간단 말이에요?" 예령이 오히려 이상해 했다. "사실은…… 명옹을 보았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자의 말이 전혀 거짓말 같지 않기에……." "아하! 어머니의 호교신장을 말씀하시는 것이군요."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어머니의 호교신장이라니…… 감악은 예령 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해 하지 말아요. 원래 그분은 우리 교의 호교신장이 아니었어 요. 원래부터 어머니의 호교신장이었고 지금도 그렇죠. 그분이 오고 있다고 합니까?" "저는 무슨 말인 줄 도저히……." 감악의 머리 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와 같았다. 그도 모든 호교신장 들이 처음 성녀를 만났을 때 겪는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감악 은 모르겠지만 이정인도 그랬고 명강량도 그랬다. "어쨌든 그럼, 명옹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입니까?" 감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분은 살아 있어요. 아마 곧 보게 될 것입니다. 나도 무척 보고 싶어요." "정말 명옹께서 살아 계시다는 말입니까?" 감악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찾아가실 필요 없어요.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까." 예령은 나뭇잎을 줍기 위해 다시 허리를 숙였다. 감악은 숨이 탁 막혔다. "성녀, 어떻게 명옹이 여기를……."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분은 하늘로 숨어드는 길, 천잠로를 따라 안락국으로 갔죠. 이 제 반대로 하늘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길을 밟을 테니 틀림없이 이곳 으로 올 거예요." 예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감악은 계속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 있었다. "감 아저씨, 나는 조금 걱정이 됩니다. 어머니께서 나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거든요. 얼마나 무서운 분이면 두려워 말라 고까지 하셨을까요. 아! 감 아저씨는 그분을 잘 알겠네요. 정말 그렇 게 무서운 분이셨어요?" 예령이 고개를 들며 문득 물었다. "그분을 무서워 한 교도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괴롭혔던 적 들은 조금 그분을 무서워 하기는 했지요." 감악은 딴 생각을 하며 말했다. "그럼, 그 동안 많이 변했나?" 예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살아 계시다면 물론 많이 변했겠지요." 감악은 여전히 혼란 속에 대답했다. * * * - 금술동이에 맑은 술은 한 잔에 천냥이요. 옥쟁반의 좋은 안주는 한 접시에 만냥이라 잔을 놓고 수저를 던지며 마시지 못하고 칼을 빼어 들고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음만 망연하구나. 황하를 건너려니 얼음이 가로막고 태행산을 오르려니 눈발이 가득하네. 한가로이 푸른 냇물에 낚시를 드리우니 해님 곁으로 달려갔네. 인생길 어려워라, 인생길 어려워라. 갈림길도 많으니 지금 어디 계신가. 큰바람 물결쳐도 님을 만날 수 있다면 구름에 돛을 달고 곧장 창해를 건너가리. 대화로의 불이 창궁(蒼穹)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계집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노래는 바로 그 계집이 부르고 있었 다. 명강량은 그 앞으로 다가갔다. 작은계집이 발딱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웃고 있었다. 노래를 부르던 십삼세의 작은계집은 악약이었다. "강량……." 그녀는 팔을 벌렸다. 명강량은 굳은 듯 악약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이에요. 강량! 제 노래가 어떻던가요? 나는 강량의 마음이 그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 "음,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주강의 꽃배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늙은 자라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악약은 다가와 명강량의 팔에 어깨를 기댔다. 작은계집은 간데 없 고 놀랄 만큼 아름다운 이십 여세의 여인이 명강량의 앞에 서 있었다 . 명강량은 악약의 체온을 느끼며 머쓱해 했다. "이야기가 재미없나요? 쌍육이나 할까요?" 악약은 몸을 돌려 명강량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강량, 강량은 역시 재미없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상큼하게 아미를 찌푸렸다. 명강량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어디 갔었습니까?" "재미있는 곳을 찾아다녔죠. 강량을 불러오기 위해." 악약은 명강량의 목에 매달렸다. "강량, 미안해요." "혼자 재미있는 곳을 돌아다녔기 때문입니까?" "음, 그 일도 있고 그리고…… 앞으로 미안해 할 일도 있는 것 같 아요. 저를 미워하지는 않으시겠지요?" "미워하리라 생각합니까?" "하하하!" 악약은 웃었다. 그리고 그녀는 명강량의 입에 자신의 입을 가볍게 맞추었다. 명강량은 눈을 번쩍 떴다. 가슴이 통증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 통증 때문에 눈을 뜬 듯했다 . 명강량은 자신의 주위를 살폈다. 아홉 마리의 용으로 장식된 화려한 배! 배라고 생각했는데 배는 아 니었다. 육지를 항행하는 배는 없으니……. 그는 흔들리는 거대한 교자에 앉아 있었다. 역시 화려한 옷을 입은 여인들의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것들은 무엇인가?' 낯설었다. 명강량은 태사의에 길게 몸을 기댔다. 꿈이 아닌가? 여인의 체향은 여전했다. 바람이 옷자락을 날려 그의 어깨를 간질였다. 비로소 명강량은 그의 뒤에 서 있는 이족의 미녀를 발견했다. 그녀만은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아란하……." 명강량은 여인을 불렀다. 아란하는 놀라 급히 명강량의 곁에 섰다. 잠긴 목소리이기는 하나 그 목소리에는 부드러움이 베여 있었다. 그 부드러움이 아란하를 놀 라게 했다. "아란하, 나는 잠을 잤었더냐?" "예! 아주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아란하는 조금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한 시진 가량 주무셨을 것입니다. 저는 대전왕께서 눈을 붙이시는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대전왕? 대전왕이 누구냐?" 명강량이 물었다. "명옹이라고도 호교신장이라고도 부르지 말라 하셨기에……." 아란하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당황해 했다. 명강량은 아란하의 걱정과 달리 시비치 않았다. "이곳은 어디냐?" "섬서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섬서? 벌써 여기까지……." 모산의 대파국(大破局) 이후 모든 기억들이 토막토막 이어지고 있 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아란하에게 그 세월을 물어 보려 하다 가 그만 두었다. 대신 그는 아란하에게 거울을 요구했다. 아란하가 거울을 건넸다. 창백한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으니…… 수염도 무 성했다. 그는 아란하에게 거울을 넘겼다. "대화룡이겠지?" 그가 자신의 옷에 묻은 핏자국을 살피며 물었다. "대화룡입니다. 벌써 한 번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었군."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가고 있느냐?" "종남산으로 가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종남산?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냐?" "……." 아란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랐다. "머리가 너무 길게 자랐다. 아란하, 결발(結髮)을 해 다오." 명강량은 아란하에게 머리를 맡기고 눈을 감았다. 아란하는 머뭇거리다가 명강량의 긴 머리칼에 손을 댔다. 내력이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 청정지신(淸淨之身)을 항상 유지하는 것이 가 능한지 몸을 씻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도 머리칼은 깨끗하고 부드러웠다. 명강량은 아란하에게 머리를 맡기고 아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더 이상의 말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몰랐다. 혹시 피의 행로를 멈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숨을 막히게 하던 살기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다. 아란하는 그렇게 하기를 바랬다. 모든 것이 이대로 멈춰져 영원이 흘렀으면 하는 것이 그녀의 마음이었다. * * * 콰쾅! 사람의 몸이 어떻게 저런 소리를 일으킬 수 있는지 몰랐다. 두 개 의 산이 부딪혀 나는 소리 같았다. 만산의 홍엽들이 잠깐 침묵을 지 키다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리고 세찬 경기의 여파에 휘말려 허공으 로 뿔뿔이 흩어졌다. 몇 장의 낙엽은 천공으로 치솟았다가 바로 떨어졌다. "좋군." 언상영은 머리 위로 떨어지는 낙엽에 손을 내밀었다. "어이, 언제 왔던가?" 중년 대한이 언상영을 향해 손을 번쩍 들며 다가왔다. 만면에 가득 한 웃음, 허술한 옷차림에 어눌한 표정…… 노류장화(路柳墻花)에 섞 여 가산(家産)이나 탕진하고 있을 대가의 공자 같은 자는 바로 숭무 각주, 남궁기였다. 사패를 쭉 지켜보아 왔던 강호인들은 사패 중 가장 부침이 심한 자 를 당예로 뽑았다. 계집 같이 소심한 자로 보였는데 야심만만하게 세 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언상영은 가장 부침이 심한 자를 남궁기로 뽑았다. 당예의 독기는 새삼스러운 바는 아니다. 하지만 바람을 가르는 표 범, 남궁기가 이렇게 어눌한 자로 변해 있을 지 누가 알았으랴! "언상영, 오래 전에 원주가 한 말을 기억하는가? 이제 당신은 당신 의 문로를 만들고 싶다던…… 나는 이제야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 다네. 무척 노력했는데도……." 언젠가 남궁기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그리고 그 이후 그는 변했다. 긴장으로 항상 흐트러짐 없는 태도, 잘 벼린 칼 같이 날카로 운 기도…… 섬전비표에 딱 어울리는 그런 모습을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천화원의 원주, 단원홍! 넘지 못할 벽이라는 것을 알고 결국 손을 들고 만 것임에 분명했다. 때문에 언상영은 이제 남궁기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팽 해만이나 당예처럼 강호에 눈길을 두리라 생각했다. 남궁기가 강호에 관심을 둔다면 숭무각의 위용이 곧 천하를 뒤엎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는데 남궁기는 강호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여전히 검 에 매달렸다. 역시 검로를 걷는 자들에게는 검을 잡고 노는 일 이상 의 즐거움은 없는 듯했다. "좋아졌군." "부끄럽다. 지켜보았는가?" "멀리서…… 겁이 나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원주를 이기려고 바동거릴 때는 몰랐다. 소일거리로 검을 잡고 나 니 그 동안 보이지 않던 것도 몇 가지 보이더군." 남궁기는 어깨를 으쓱했다. "비검을 하던 저 친구는 누구인가?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데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군." "인사를 나누겠나?" "별로 나를 반기는 눈치가 아닌 듯 한데……." "하하하, 맞았어! 숭무각을 찾아오는 친구들은 그들의 친구만을 제 외하고 사람들을 잘 만나려 하지 않지." "그들의 친구라면…… 자네도 그들 속에 포함되겠군."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군. 나는 제법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네. 연 공으로 하루를 소일하는 자들은 나뿐만이 아니더라고…… 가끔 자신 의 검로를 누구에게 묻고 싶기도 하고 확인 받고 싶기도 하지. 소문 을 듣고 이리저리 찾아가고 찾아오다 보니 그 와중에 열 한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사귀었다. 모두 논검(論劍)으로 사귄 친구들일세." "열 한 명이나 되는 친구들을…… 나는 갑자기 자네가 두려워지는 군." 언상영은 돌멩이를 툭 찼다. 농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강호 제세 력의 배후를 지탱해 주는 힘 중 가장 큰 힘은 뭐니뭐니 해도 가문과 친구다. 특히 남궁기가 친구로 삼을 자라면 각 개인의 힘은 보지 않 아도 훤했다. "우리는 우리를 십이지우(十二支友)라 부르지. 나를 제외하고 모두 강호에 이름을 알리기 싫어하는 친구들이야." "십이지우? 멋진 이름이군. 자네는 십이지(十二支) 중 무엇인가?" "나이순으로 십이지를 정하지 않았네. 무공 서열로 정한 것도 아니 고…… 그저 그렇게 정했을 뿐이다. 십이지 중 자검(子劍)이 바로 나 일세. 저기 저 친구는 해수(亥手)일세." "어쨌든 첫째는 자네이군." 언상영은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해수라는 저 친구의 문로를 알겠던가?" "전혀!" 언상영은 고개를 저었다. "아하! 자네는 저 친구가 쌍수를 날리는 모습을 보지 못했군. 정말 가관이지. 특히 지금처럼 만산에 홍엽이 가득할 때는…… 연환분뢰 수! 저 친구의 절학일세." "연환분뢰수? 그는 적염날수, 철중달의 제자?" 언상영이 놀라 물었다. "맞았어! 철 노야의 모든 비전을 이어받았네." "적염날수의 제자까지…… 굉장하겠군. 십이지우는……." 언상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자네는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여기까지 왔는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라니…… 마치 못 올 곳을 온 사람처럼 이야기 하는군. 이 정도의 말은 해 주어야지. 먼 곳의 친구가 찾아왔으니 이 또한 반갑지 아니한가!" "싱거운 소리는 그만하고……." 남궁기는 언상영의 어깨를 툭 쳤다. "술은 있나?" "술? 이거 정말……." 남궁기는 별스럽다는 표정으로 언상영을 쳐다보았다. 언상영은 원 래 술을 가까이 하는 친구가 아니었다. "술이 없는가?" "있기야 있지." "여기까지 왔으니 한 잔 얻어먹고 가야겠네." 언상영이 먼저 지우당(知友堂)으로 걸어갔다. 쪼르르……. 남궁기는 언상영의 잔을 채우고 자신의 잔도 채웠다.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 "무엇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이 술이 무슨 술인지 아는가?" "보면 모르나 죽엽청이지." "이 친구…… 이 세상에 살고 있으면 그 값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에 조금의 관심은 두게. 지금 우리가 마시고 있는 이 술은 친구의 혼령 을 위로하는 술일세." "……." 남궁기는 미간을 좁혔다. "당예가 죽었다네. 맹호전은 한줌의 재로 변해 버렸어." 꿀꺽! 언상영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남궁기는 손안에서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애석한 일이군." 그도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같은 자의 짓인가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나…… 곤륜은 그 이전에 불탔고…… 그들은 봉문은 선언했네." 언상영이 소매를 걷으며 남궁기의 잔과 자신의 잔을 채웠다. "놀라운 일이군. 당예는 물론 곤륜파까지…… 곽부의 잔당들이 벌 인 짓인가?" "곽부의 잔당들…… 후후후, 강호의 소문으로 그자의 무공은 세 명 의 곽부가 와도 당해 내지 못할 정도라 하더군." "어느 산에서 그런 마물이……." 남궁기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문로도 모른다네. 구미가 동하는가 보군." 언상영이 머리를 숙여 잔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어디에 있다고 하던가?" "모르지. 사천을 지나고 있는지, 섬서에 이르렀는지…… 지금쯤 또 다른 문파 하나가 작자의 손에 사라지고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천화원에는 사실을 알렸나?" "아니, 알리지 않았어." "나 보다 먼저 원주를 찾아갔어야 옳았던 것 아닌가? 세 명의 곽부 도 당해 내지 못할 자라 했으니……." "원주께서는 강호를 우리 사패에게 맡기셨네. 급하다고 뽀르르 달 려가 이미 은거를 택한 분에게 나와 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일 아 닌가." "이유가 그뿐인가?" "……." 언상영은 대답 없이 술잔을 비웠다. "원주께서 강호에 발을 들이는 것을 자네는 물론 팽해만도 바라지 않고 있겠지. 일단 강호에 발을 들인 이상 어떤 형태로든 강호를 재 편하고 천화원으로 돌아가실 테니…… 팽해만과 당예의 과수(過手)는 이미 강호에 알려질 만큼 알려져 있으며 나는 강호의 일을 전혀 모 른 척 하고…… 자네 홀로 원주께서 바란 사패의 영역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중에는 자네 홀로 모든 사패의 일을 다 짊어질 수 있을 지 모르나 지금은 아니지." "알고 있었나?" "껄껄껄! 천하의 언상영이 지금의 세력에만 만족하리라고 누가 생 각하겠는가. 자네는 당예와 팽해만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을 즐기 며 차곡차곡 세를 쌓아 가고 있었을 것일세." "모두 맞았다. 평생 가도 원주나 자네만큼의 힘을 가지지 못함은 안다. 하지만 나는 강호의 패자(覇者)가 되고 싶다. 강호의 패자가 하는 일이 별 일인가. 강호의 분쟁(紛爭)을 잘 조정하는 자가 진정한 패자이지. 힘은 없더라도 나에게는 모든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웃음과 탁월한 식견(識見)이 있네." 언상영은 쓴웃음을 흘리며 잔을 채웠다. "좋아. 나도 자네의 그 웃음과 탁월한 식견은 좋아하니…… 또한 누구도 자네가 힘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일세. 모처럼 강호는 인 의대협(仁義大俠)을 패자로 모시겠군." "어떻게 들으니 비웃는 소리로 들리는군." "나의 일이 아니라 자네의 일일세. 비웃을 일이 무엇 있겠나. 관심 도 없다. 그런 일에 관심이 있었다면 팽해만과 당예가 필요 이상으로 날뛸 때 벌써 한 마디 했을 게야. 일단 잔이나 한 잔 나눔세." 남궁기는 잔을 들었다. 남궁기와 언상영은 잔을 높여 술을 비웠다. "어쨌든 잘했네. 원주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하지만 자네가 알 리지 않는다고 해서 원주가 모르겠나. 천화원의 천위대들도 귀가 없 지는 않을 텐데." "천위대주, 국태열이라는 자를 조금 잘 아는 편이지." "잘 됐군. 잘 됐어. 모처럼 피가 끓는 것 같다." 남궁기는 잔을 놓으며 씨익 웃었다. "내가 사상검수들과 오행검수, 삼십육동인(三十六銅人)들을 붙여 주겠네." "이 친구…… 또 다른 물건을 만든 모양이지. 전 재산을 나에게 주 겠다고 하는 것을 보니……." "자네에게만 알려주지. 구십구사령기(九十九死靈騎)라는 것을 만들 어 보았다. 예전에 곽부의 단혈철각련에 철기대라는 것이 있었지. 무 척 부럽더군. 그래서 나도 한 번 만들어 보았다. 기마대를……." "그것뿐인가?" "모두 말을 해 버리면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로 술을 마실 텐가. 솔 직히 나는 그것을 쓸 일이 없기만을 바랄 따름이다. 나에 대한 강호 인들의 평도 생각해야 되니……." "대단한 것이겠군. 천기수사(天機秀士)께서 쉬쉬할 정도의 물건이 라……." "언제쯤 사상검수들과 오행검수, 삼십육동인들을 보내 줄까?" "필요 없다. 상대가 그렇게 강하다고 하니 친구들의 도움이나 조금 얻겠네." "십이지우들?" "그래, 그 중에 몇은 정말 놀랄 만한 친구들이다. 곽부를 능가하는 자가 나타났다고 하면 호쾌하게 나를 따라 줄 것일세." "알았어. 자네만 믿네." 언상영의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작금 강호의 제이인자(第二 人者)가 남궁기임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터였다. "구대문파도 난리겠군. 무슨 소식을 듣지 못했나?" 남궁기가 물었다. "아직…… 단혈철각련과의 일전에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뒤늦게 싸 움에 합류했지. 그 일이 계속 앙금으로 남는 모양이더군." "생각하니 그때 우리는 조금 심했어." 남궁기는 쓴맛을 다셨다. "강호가 사패의 세상이 된 것도 불만일 테고…… 아무런 연락이 없 었다. 독자적으로 움직일 모양이야.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겠지. 이 번 대마두(大魔頭)의 출현을 계기로 자신들의 힘을 보여 주어 강호의 주도권을 되돌려 받겠다는……." "쯔쯔, 강호는 정말 복마전(伏魔殿)일세. 곤륜이나 맹호전이 무너 진 것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잘 하면 내가 사패와 구대문 파를 동심(同心)으로 묶어 줄 수도 있겠군." "무슨 말인가?" "내가 놈에게 진다고 생각해 보게. 각기 멋대로 움직이려 하겠나? 껄껄껄!" 남궁기는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이 친구, 무슨 그런 소리를……." 언상영은 검미를 꿈틀거렸다. "팽해만은?" "여전하겠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데리고 있 는 학대통이라는 자는 잔재주는 뛰어나도 먼 곳까지는 보지 못하는 자야. 강호의 대란을 보고도 목전의 이익이 없는 한 쉽게 움직이려 하지 않을 걸." "작자가 그렇게 말한다고 팽해만은 그 말을 그대로 듣나?" "팽해만은 예전에도 탐욕은 강했었지. 하지만 그의 탐욕은 아는대 로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 달라졌네. 무엇이 그 를 저렇게 만들었는가? 세 치 혀끝일세. 세 치 혀끝의 무서움이 팽해 만을 저렇게 만들었지. 이번에도 별 수 없이 학대통의 세 치 혀끝에 놀아날 것이다." "음……." 남궁기는 수염을 쓸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금 내가 팽해만에게 걱정이 되는 것은…… 그가 황하 대상련을 상대로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황하 대상련?" "엄청난 재력을 가진 자들이지. 팽해만의 뜻대로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세상의 반은 이미 그의 것일세. 하지만……." 언상영은 말에 뜸을 들였다. "상인들을 우습게 보고 달려들었다가는 큰 피를 볼 것이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 거짓말이 아닐세."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팽해만은 조금 심하군. 상인들까지 물고 늘어지다니…… 상인들을 들쑤시겠다는 생각도 학대통이라는 자의 생각인가?" "당연하겠지." "왜 그런 놈을 가만히 두었는가?" "나의 일이 아니라 팽해만의 일일세." "흐흠, 그렇겠군. 학대통이라는 자는 팽해만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 아도 자네의 일에는 무척 도움이 될 테니……." 남궁기는 술잔을 기울였다. "나를 지나치게 용렬한 자로 생각하지 말게. 팽해만이 좋은 길을 가겠다면 나는 당연히 박수를 쳐주지. 나쁜 길을 간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가 선택한 길! 그리고 원래 팽해만은 누구의 간 섭도 싫어하네." "그럼, 됐어!" "무엇이?" "대마두인가 하는 자를 만나러 가는 길에 팽해만도 한 번 만나 보 겠다. 옛 정을 생각해 그를 위해 한 가지 일은 해 줄 생각이야." "무슨 일을 하려는지 알겠군." 언상영은 씁쓸히 웃으며 잔을 들었다. "불만은 없겠지?" "남궁기, 언상영은 원래 그런 자일세!" 언상영이 남궁기를 직시하며 잔을 기울였다. "미안, 미안!" 남궁기가 웃으며 언상영이 들고 있던 술병을 뺏어 권주했다. "불혹(不惑)이 바로 코앞일세." 언상영은 잔을 들며 허망한 눈빛으로 먼 산을 바라보았다. "가장 변한 사람을 자네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가장 변하지 않은 사람은 바로 자네야. 솔직히 언상영이라는 자는 그런 자로 변했네." "변하지 않는 것을 칭송해야 할 세월이 있고 변화를 칭송해야 할 세월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칭송하는 것을 보니 지금이 무척 어 수선한 세월은 분명한가 보군." 남궁기는 사람 좋은 미소로 건배를 청했다. "조금 서둘러 주게. 나는 불안하네. 대마두의 출현은 그의 출현만 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쨍! 하고 그가 강호의 균형 잡힌 질서에 부딪혀 온 순간, 그 소리는 심산유곡의 메아리처럼 걷잡을 수 없이 울려 어둠 속을 활보하던 온갖 것들까지 불러올 것일세. 십 여년 동 안 너무 조용했어." 언상영은 안색을 찌푸리며 술을 들었다. "알았다. 잔을 비우고 곧장 출발을 준비하지." 남궁기는 술잔을 탁자에 꽂듯이 놓았다. 휘 - 잉! 가을 바람이 소소히 지우당을 돌아 마른잎을 날렸다. * * * "왜수!" 잠깐 낮잠을 자고 있었다. 상유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눈을 게슴 츠레하게 떴다. 조용했다. '벌써 환청에 시달릴 나이인가.' 상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듣기 좋아하는 별호가 아니다. 자신의 별호를 부를 자는 전무했다. "상유!" 이번에는 별호가 아닌 이름이었다. 상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즐겨 입는 흑의를 걸쳤고 두 손에는 박 피(薄皮)로 된 수투(手套:장갑)를 꼈다. 수투의 손끝에는 새의 발톱 처럼 날카로운 철편(鐵片)이 달려 있었다. 외문(外門)의 무공인 백골 박조를 익힌 그로서는 나이가 들면서 무뎌지는 손끝의 매운맛을 철편 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나이를 드러내는 것 같아 별로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밖에서 부르는 놈처럼 틈만 나면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새파란 애송이들이 부지기수인데……. 우드득! 우드득! 상유는 손가락과 손목뼈를 풀었다. 한동안 조용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상대였다. 갈가리 찢어 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또 한동안 조용할 테니……. 상유는 방문을 나섰다. 후닥닥! 서너 명의 수하들이 급히 그의 앞에 섰다. "누구냐?" "도견(鍍犬) 사마신(司馬信)입니다. 대강 남북의 십삼 채주들까지 같이 왔습니다!" "뭐야?" 상유의 작은 눈에 매서운 한광이 번쩍였다. 흑산의 무리들은 그들 사이에 놓여진 험한 길만큼 사이가 멀어 지리멸멸이었다. 그런데 떼 거지로 몰려들다니……. '도견, 이놈이 무슨 수작을 벌였구나. 진작 놈을 처치해야 했었는 데.' 상유는 '아차!' 했다. 도견, 사마신은 황산의 채주다. 모태명의 흑룡방이 무너졌을 때 남 은 무리들을 끌어 모아 황산에 자리를 잡았다. 별로 신경 쓸 일도 없 어 그냥 두었는데 어느 순간, 소채(小寨)만도 십 여개를 거느린 표파 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세를 꺾어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있었는데 그가 먼저 찾아온 것이다. 다른 산의 무리들까지 이끌고… …. "앞장서라!" 상유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왜수, 오랜만이오." 얼굴에 금가루를 섞은 짙은 분칠을 한 자였다. 유곽의 퇴기(退妓) 처럼 보이는 그가 바로 도견, 사마신이었다. "무슨 일이냐?" 상유는 사마신을 음산하게 노려보았다. "따로 무슨 일이 있겠소. 이 많은 녹림의 호걸들이 당신 같은 늙은 이를 예쁘다고 찾지는 않았을 테고……." 사마신은 히죽 웃었다. 상유는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주위를 살폈다. 사마신의 뒤에는 흑산의 무리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쭉 서 있었다. 그리고 좌우 에는 백인회의 수하들이 시립했다. 수하들이 자리한 위치를 보며 상유는 눈살을 찌푸렸다. 왼쪽에는 염노로 활약할 때부터 그를 따랐던 수하들이 서 있었다. 오른쪽은 북 명왕을 처치하고 흑사회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끌어들인 수하들…… . 상유는 오른편에 선 수하들을 천천히 훑었다. 오른편에 선 수하들 은 찔끔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상유는 시선을 돌렸다. 사마신은 오늘을 위해 제법 공을 들인 듯했 다. 백인회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으니…… 흑도의 논리는 철저한 힘의 논리다. 싸움이 벌어지면 오른편에 선 수하들은 방관을 하거나 아니면 사마신의 편에 붙을 것이 확실했다. "도견, 꽤 많은 준비를 했구나." 상유는 박피로 된 수투를 손에 꽉 끼이게 끌어 올렸다. "나는 별로 준비를 한 것이 없소. 당신이 준비를 하게 도와주었지. 정파 놈들에게 달라붙어 아양이나 하고 푼돈을 받아먹는 일에 만족 하는 당신을 누가 따르려 했겠소." 사마신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담았다. "그런 점도 조금 있었지. 나의 잘못을 알았으니 너는 사패와 구대 문파를 상대로 싸우겠구나." 상유가 조롱 조로 말했다. "물론! 놈들의 도관과 절을 뺏고 우리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어둠 속으로만 기어다니는 데 이제 질렸다!" 사마신은 자신 있게 소리쳤다. "간이 크구나. 사패와 구대문파를 상대로 싸울 생각을 하다니…… 너는 너를 너무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아하,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사패와 구대문파를 상대로 감히 싸울 수 없지. 그러나 구룡선과 마인거가 있다면 다르지." "구룡선, 마인거?" "잘 모르는 모양이군. 천하가 발칵 뒤집어졌다. 사패와 구대문파는 구룡선과 마인거에 모두 매달려 있지. 이번 기회에 놈들을 뒤엎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어둠 속을 기어다닐 수밖에 없다. 우리를 위해 서라도 왜수, 당신은 비켜 주시오. 천하가 어떻게 돌아가도 당신은 당신의 것만 안전하다면 절대 움직이려 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럼 진흙탕 속에 놓여 있는 다른 흑도의 동지들은?" "……." 상유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사패와 구대문파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사마신의 말을 거짓이 아닌 듯했다. 흑산의 놈들이 정파에 대한 공 격을 말할 정도로 세상은 어지러운 듯한데 그는 전혀 그 사실을 모르 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의 눈과 귀가되어 주던 수하들이 오른편에 서 있으니……. 상유는 자신이 정말 늙었다고 생각했다. 사마신의 처치에 굼뜨게 행동했고 눈과 귀를 수하들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했으니……. "왜수, 순순히 그 자리에서 물러나시오!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리다 ! 지난날을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를 …… 단혈철각련이 흑도천하(黑道天下)를 부르짖으며 호호탕탕 중원 으로 진출할 때도 당신은 침묵으로 일관했소!" 사마신의 뒤에 서 있던 염소 수염의 사내가 소리쳤다. 구의산(九疑 山)의 채주였다. 상유는 눈을 번쩍 떴다. 사태는 이와 같았다. "누가 누구를 물러나라 하느냐!" 상유는 백골박조로 비호처럼 사마신을 덮쳤다. 일단 사마신을 죽이 고 기를 꺾은 후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국면이었다. 그러나 사 마신은 이미 상유의 출수를 예측하고 있었다. "흥!" 그가 주르르 뒤로 물러났다. "죽여라!" 그가 소리쳤다. 십삼 채주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머릿수는 흑 도의 오랜 무기였다. 그들은 도, 창, 부, 봉을 치켜들며 한꺼번에 상 유를 향해 달려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흑산의 수하들도 염노 출신의 상유의 수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쨍! 쨍! 쨍! 백인회에 피바람이 몰아쳤다. "크악!" "악!" 상유의 백골박조는 처음에는 제법 위용을 발휘하는 듯했다. 그러나 흑산에서 온 자들의 머릿수가 워낙 많았다. "억!" 수투와 함께 오른팔이 날아갔다. 그리고 다리…… 마지막으 로 상유의 목이 날았다. 염노로 출발, 북명왕을 죽이고 흑사회의 총수로 떠올랐다. 백인회 를 세워 흑도의 인물로는 드물게 수 십년 간 흑사회를 지배하던 상유 의 최후였다. 상유가 죽자 그때까지 저항하던 자들도 와르르 무너졌다. 사마신은 피묻은 칼을 치켜들었다. "가자!" 그는 패를 두 패로 나눠 형산파와 하토문에 대한 진격을 명했다. 흑산의 무리들이 노도처럼 형산파와 하토문으로 밀려갔다. - 언상영의 예측은 틀림없었다. 구룡선, 마인거의 출현으로 깨어진 힘의 균형 사이로 숱한 어둠의 것들이 솟구치고 있었다. 사마신이 이끄는 화북(華北), 화남(華南)의 흑산 무리들만 준동(蠢動)한 것은 아니었다. 관중(關中)에서도 한 떼의 마적(馬賊)들이 들고 일어섰고 흑룡방의 와해 이후 잠잠하던 장강의 각 수채도 급속히 세를 모아 가 고 있었다. 피가 치솟고 살점이 튀는 강호의 혼란은 순식간에 찾아오고 있었다 . 대암흑기(大暗黑期)의 시작이었다. 제30장 만추(晩秋) "사형, 가을이 지고 있어요." 눈망울이 또렷또렷한 십칠팔 세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추풍에 우수 수 떨어지는 잎들을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청년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청년은 종남파 장문인, 북당(北堂) 한탁정(韓琢正)의 여섯 번째 제 자, 서인학(徐仁學)이었고 가을을 이야기하던 여자는 그의 사매, 주 연화(朱蓮花)였다. "야색추광공일란(夜色秋光共一　), 포수풍로입비간(飽收風露入脾肝 )……." 주연화는 낮은 소리로 시를 읊었다. 서인학은 안색을 찌푸렸다. '여인의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구룡선과 마인거가 언제 들이닥칠 지 모르는 상황인데 추사(秋思)에 빠지다니…….' 그는 장검을 매만지며 한숨을 쉬었다. 서인학의 뒤에는 자연 동굴이 있었다. 그 동굴에는 어린 제자들이 한참 잠을 자는 중이었다. 구룡선과 마인거가 언제 닥칠지 모르므로 사부는 어린 제자들을 이곳에 피신시킨 후 그에게 맡겼었다. 종남파는 요지(要地)에 자리잡고 있어 사천, 감숙, 섬서 어디를 통 해 들어온다고 하더라도 새외의 사마외도(邪魔外道)들이 반드시 짓밟 고 지나가려 하는 곳이다. 구룡선과 마인거도 예외는 아닐 듯했다. 점점 종남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급전이 산문으로 치닫고 있었다. 때문에 사부는 개봉의 개방 총타에서 열리는 대회맹에도 사숙을 보내고 당신은 참석하지 않은 터 였다. "사형, 사형은 취옹(醉翁)의 시를 좋아하잖아요. 한 구절 들을 수 있을까요?" 주연화는 다소곳이 서인학을 바라보며 이제 구양수(歐陽修)를 들먹 였다. 가뜩이나 마음이 심란한 판이었다. 그런데 사매가 계속 엉뚱한 소 리를 하자 서인학은 벌컥 화를 냈다. "사문의 존망(存亡)이 오가는 판인데 사매는 시 나부랭이가 생각나 는가! 그만 들어가서 자라!"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주연화의 얼굴이 빨개졌다. "죄, 죄송해요. 사형……." 그녀는 허둥지둥 한 편으로 물러났다. 나무에 머리를 기대며 그녀는 눈물을 찔끔거렸다. 육사형은 너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했다. 그녀는 서인학을 좋아하고 있었다. '검문(劍門)의 평화는 언제 오리. 아, 아! 검문에 평화가 와도 내 마음은 평안(平安)하지 못하리라.' 주연화는 서인학을 힐끔거리며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서인학도 눈치채지 못하게 주연화를 힐끔거렸다. 나이는 거저 먹은 것은 아니니 그도 주연화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조 금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매……." 서인학은 주연화를 불렀다. 주연화는 화들짝 놀란 토끼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호랑이가 나온다. 이쪽으로 와." 서인학이 얼굴을 슬쩍 붉히며 객쩍은 소리를 했다. 주연화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산간추야(山間秋夜)라는 시였지." "예." "음, 취옹의 시는 그렇고…… 잠도 오지 않는데…… 장괘장권구식( 長掛掌拳九式)을 같이 한 번 펼쳐 보는 것은 어떻겠어?" 대체로 구대문파의 제자들은 남녀의 상사에 밝은 편이 아니었다. 서인학의 입에서도 분위기를 모르는 엉뚱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무 리 마음이 어수선해도 주연화의 기분을 생각해 구양수의 시를 한 구 절 들려 줄 수 있으련만……. 하지만 주연화는 서인학의 그 말만으로도 만족했다. "좋아요. 사형." 그녀는 나비처럼 몸을 날려 궁보(弓步)를 취했다. 서인학도 같은 자세로 그녀의 곁에 섰다. 그들이 손을 맞춰 막 장괘장권구식을 펼치려 할 때였다. "으악!" "악!" 비명이 밤하늘을 찢었다. 서인학과 주연화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왔다! 사매는 빨리 동굴 안으로 숨어라!" 서인학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는 다급히 전망 좋은 나무 위로 올랐 다. 인광처럼 푸른 불이 산문을 향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붉은 불빛 아래 거대한 마차 한 대가 서 있었다. 불빛에 비쳐 붉고 검은빛으로 이글거리는 석상…… 서인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인거! 마인거가 틀림없었다. 서인학은 휙!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마인거다! 사매, 빨리 동굴 안으로 숨지 않고 무엇하고 있느냐!" 그는 등을 돌리고 멍하니 서 있는 주연화의 어깨를 잡았다. "사형, 저기……." 주연화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들었다. "뭐야?" 서인학은 주연화의 앞으로 나섰다. '헉!' 그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듯했다. 마인거의 석상과 차림새가 비슷한 자였다. 기분 나쁜 대월, 검은 얼굴, 히죽거리는 웃음만 다 를 뿐……. "누, 누구냐?" 슥! 서인학은 지체없이 장검을 빼 들었다. "헤헤헤, 너희들이 잘도 도망가서 말이야. 도망가는 놈부터 때려죽 이려고 일부러 길도 없는 곳으로 올랐지." 흑면 괴한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그토록 검을 얼굴을 가진 자는 세 상에 많지 않다. 전우삼이었다. 전우삼은 동굴 입구를 대월로 쾅! 내리쳤다. 잠을 자던 종남의 제자들은 그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마인거의 마인이구나!" 서인학의 검이 현기를 뿌리며 날았다. 종남의 절학, 천하삼십육검(天河三十六劍)이 은한처럼 현란한 빛무 리를 뿌리며 전우삼의 전신을 덮었다. "흐흐흐……." 전우삼은 몸을 슬쩍 비켰다.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천하 성산(天河星散)으로 휩쓸어 가던 서인학의 검은 허공만 갈랐다. 서인 학은 허둥대며 상대의 종적을 찾으려 했다. 순간, 그는 정수리에 격렬한 통증을 느꼈다. 뒤였다. 팟! 뇌수와 피가 튀고 내장이 주르르 흘렀다. 전우삼의 대월이 서 인학을 아래, 위로 정확히 양분하고 있었다. 검을 잡아가던 주연화의 몸이 굳었다. 검문의 평화는 영원히 없었 다. 우르르르……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처참하게 동강난 서인학의 시 신만 그녀의 눈동자에 잡혔다. "사형!" "무슨 일입니까?" 그제야 종남의 어린 제자들이 밖을 향해 뛰어나오고 있었다. "어린 것들이구나. 다행히 피비린내가 적겠군." 전우삼이 밖을 뛰쳐나오는 종남의 제자들을 향해 대월을 휘둘렀다. 종남의 어린 제자들이 마치 도축장(屠畜場)에서 도부(屠夫)의 망치 에 의해 차례로 쓰러지는 돼지들처럼 줄을 지어 쓰러졌다. 비명 한 번 제대로 지르지 못한 시신이 피를 낭자하게 뿜으며 동굴 입구를 나 뒹굴었다. "흐흐흐……." 피를 본 전우삼의 눈은 광기로 더욱 붉어졌다. 그가 주연화를 향해 미끄러지듯이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주연화는 반항하지 않았다. 전 우삼은 닭목을 잡듯 주연화의 목을 잡고 끌어 당겼다. 주연화가 코밑 으로 끌려왔다. 전우삼은 대월을 들었다. "헤헤헤, 나를 원망하지 마라. 산서의 비응보 놈들은 우리 배교의 여자들에게 어떻게 했는 줄 아느냐? 겁간을 한 후 죽이거나 유곽에 팔아넘겼지. 흐흐흐, 우리는 아직 그런 짓은 하지 않아. 아직은…… 나중에는, 나중에는 어떻게 할지 모르지. 지금은 곱게 죽여 주마." 그의 대월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말처럼 주연화를 단번에 죽이 지 못했다. 눈빛이 충혈된 그의 눈동자를 뚫고 심장을 찌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주연화의 눈빛! 공포도 체념도 없었다. 애잔하고 맑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눈빛은 그 누구의 눈빛과 너무도 유 사했다. '맞았어.' 자신을 떠나 보내던 화정의 눈빛이었다. 언뜻 보니 얼굴도 비슷한 것 같았다. 전우삼은 부지불식간에 손을 떼며 주연화의 눈빛을 피했다. 주연화의 눈빛은 계속 전우삼을 쫓고 있었다. "왜, 죽이지 않으시는 거죠?" "헤헤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에…… 냄새 나는 계집까지…… 재 수 없다! 네 년은 다음 기회에 죽여주겠다!" 전우삼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릉 거렸다. "당신은 아직 완전히 마성에 물들지는 않았군요." 주연화의 눈빛은 전우삼의 심장을 찌르고 내면까지 닿은 모양이었 다. 서인학을 뜬눈으로 보낸 끝없는 애절함이 그녀의 몸에 새로운 힘 을 주었음이 틀림없었다. "기억해 주기 바래요. 당신이 죽인 사람들도 당신만큼의 가슴 속 이야기들은 하나, 둘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 이야기를 펼쳐 보지 도 못하고 죽는다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주연화는 힘없이 등을 돌렸다. "사형……." 그녀는 서인학의 곁에 서 장검을 빼 들었다. 슥! 장검이 빛을 발했 다. 그녀의 목에 피가 주르르 흘렀다. 피는 그녀의 여린 젖가슴 사이 로 흘러 이내 발등으로 뚝뚝 떨어졌다. 주연화의 가냘픈 몸이 서인학의 동강난 시신 위로 스르르 쓰러졌다 . 전우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목을 만졌다. 장검이 자 신의 목을 스쳐 간 것처럼 뜨끔했다. "헤헤헤, 헤헤헤헤……." 쾅! 그가 히죽거리며 대월로 나무를 찍었다. "별 미친 계집을 다 보겠군! 누가 너를 죽였느냐? 나는 아니다! 바 로 네 년의 사부, 구대문파, 사패, 정파를 자처하는 모든 놈들이 너 를 죽였다! 헤헤헤, 배교는 누가 건드리기 전에 먼저 이빨을 보인 적 이 없지. 그래서…… 크캬캬캬! 모두 죽여주지! 모두 유부에서 만나 게 해 줄 테니 그곳에서 펼치지 못한 이야기들을 실컷 나누라고!" 휙! 전우삼은 신형을 날렸다. 서둘러 피냄새 속에 묻히고 싶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주연화의 맑고 애잔한 눈빛도 마음에 걸렸고 그 녀의 마지막 말도 웅웅거리며 귓가를 맴돌았다. 종남의 전각들을 향해 달려가며 전우삼은 생각했다. 다음에는 무조 건 눈 맑은 계집부터 죽이리라……. 종남파 장문인, 북당 한탁정은 산문을 지나 느릿하게 밀려오는 한 떼의 무사들을 보고 있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오륙 십명 정도… … 하지만 그들은 이미 산문 앞의 일전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유감없 이 보여 준 터였다. "장문인!" 문도들은 장검을 들썩이며 산문 앞에서 죽은 사형제들의 복수를 빨 리 해 줄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탁정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물 흐르듯 잔잔한 기도,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한 당대의 재사(才士) 답게 피비린내 속에서도 묵향은 절로 베어 났다. 대체로 다식(多識)한 자들은 몸으로 행동하기 보다 혀끝으로 놀기 좋아한다 . 그러나 한탁정은 달랐다. 무실역행(務實力行)을 아는 문무겸전(文 武兼全)의 초인(超人)이 바로 그였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마인거의 등장에도 별 놀라는 기색이 없었 다. 성품 탓도 있지만 이미 구룡선이나 마인거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 두었기 때문이다. 멸문을 막기 위해 여러 제자들을 안전한 곳에 분산시켜 숨겼다. 몇 명의 사제들에게는 본산(本山)의 진보(珍寶)를 맡겼다. 본산에서 뻗 어 나간 각 지파(支派)나 속가제자들에게는 세상의 소요가 진정되면 본산의 중흥(中興)을 위해 힘써 달라는 통문까지 보냈다. 주춧돌까지 불타더라도 멸문을 당할 일은 없었다. 비록 다른 구대 문파에 비해 세가 약하다고는 하나 종남파의 뿌리도 얕은 편은 아니 었다. 한 가지 걱정은 지금 같이 있는 제자들의 목숨은 장담하기 힘들다 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 한탁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한 적이 나타날 때마다 매번 꼬리를 빼면 종남의 정기(精氣)는 지켜지기 힘들 것이다. 죽음으로써 그 정기는 지켜야 했다. 화려한 전각, 뛰 어난 제자가 많아도 정기를 뺏긴 문파는 삼대(三代)를 이어가기 힘들 다. 종남에 남은 자들은 죽음으로써 살아 남은 자들에게 종남의 정기 를 알릴 의무가 있었다. 곤륜 장문인, 광화자가 죽음을 알면서도 무모한 싸움에 제자들을 끌어들인 까닭도 같은 이유였다. 그리고 그곳에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훌륭하다고 칭송 받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죽음을 알면서도 본문의 정기를 지키기 목숨을 흔쾌히 내어놓는다는 점! 오랜 문풍(門風)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고 그들이 다시 죽음도 불사하며 문풍을 지켜 가고……. 사마외도는 물론이고 한때 반짝했던 문파들이 결국은 구대문파의 위세에 무릎을 꿇게 되는 이유였다. "셋째……." 한탁정은 사제, 심성남(沈成南)을 불렀다. 심성남이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다가왔다. "마인거에 대한 소문이 조금 과장된 것 같지 않느냐?" "글쎄요. 진면목을 아직 보이지 않고 있을 수도……." "그런가? 내가 보기에 앞선 두 늙은이와 그 뒤의 구루노인을 제외 하고는 특별한 자가 없는 듯한데……." 한탁정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마인거의 마인들을 바라보며 말했 다. 앞선 두 늙은이는 물론 쌍혼이었고 구루노인은 노관, 방환이었다 . "장문 사형께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심성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겠어. 하지만…… 마인거에 아미파가 불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군. 우리는 단혈철각련에 의해 세가 많이 꺾인 상태이나 아 미는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미산(峨嵋山)에는 아직 구 름 속에서 한담(閑談)을 즐기는 노니(老尼)들도 적지 않은데…… 저 들이 비록 우리 보다 뛰어나다고는 하나 철중쟁쟁(鐵中錚錚)에 불과 하다. 마인거는 절대 화산은 넘지 못할 것이다!" 한탁정은 단언했다. 그때였다. 쿵! 종남을 뒤흔드는 소리가 태극전(太極殿)에서 들려 왔다. 태극전은 종남파의 본전(本殿)이다. 태극전을 협시(挾侍)하듯 서 있는 네 개의 전각이 사상각(四象閣)……. 우르르르! 지붕이 빙글 돌더니 태극전이 무너지고 있었다. 콰쾅! 자욱한 먼지와 함께 기와장이 날며 사상각도 흔들렸다. 부동심을 자랑하는 한탁정도 일순간에 태극전이 무너지는 데는 놀 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제!" 그는 심성남을 불렀다. 심성남은 한탁정이 부르는 것과 동시에 태극전을 향해 몸을 날렸다 . 쿵! 우르르르……. 일진각(日進閣)도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졌다. 먼지가 먹장구름처 럼 더욱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멈춰라! 악적!" 사제, 심성남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침입자가 있음이 분명했다. 칼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바로 그 뒤를 이어 들리는 비명! "크카카카카! 으하하하하!" 광소가 짧은 비명을 덮었다. "장문인!" 제자들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월영각(月迎閣)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대월을 든 팔척 장신의 사 내였다. 입고 있는 옷은 마인거의 석상과 비슷했다. 그는 왼손에 피 가 뚝뚝 흐르는 수급 하나를 들고 있었다. 사제, 심성남의 목이었다. '저 자다! 저 자가 점창과 아미를 무너뜨렸구나!' 한탁정의 검이 섬광으로 검집을 빠져 나왔다. '저 것은…….' 아란하의 눈빛이 빛났다. 구룡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이 장여 크기의 석상이 우뚝 서 있는 거대한 팔륜거였다. "누구냐?" 네 명의 사내가 팔륜거에서 뛰어내리며 팔륜거의 뒤를 지켰다. 사 방위들이었다. 구룡선을 이끄는 자들도 마인거를 이끄는 자들도 자신들의 길만 갔 지 주위의 소문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때문에 그들은 배교 라는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줄 몰랐다. 명강량이라면 알 수 있었을까. 등을 보이고 있었지만 눈썰미가 빠 르다면 그 석상이 초대 명옹의 석상임을 알 법도 했다. 방환만 있었어도 확실히 서로의 뿌리가 같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방환이라면 배처럼 생긴 거대한 교자에 실린 아홉 마리의 용 이 무엇인지 단번에 알았을 테니……. 아란하는 명강량에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나 명강량은 종남으로 이 어진 길만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를 묶어 달라고 한 그 이후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사삭! 삭! 그 사이, 사방위들은 장도를 치켜들고 바람처럼 구룡선을 육박해 왔다. 마인거의 법은 걸리는 것은 우선 쓸어버리는 것! 하라사는 독전기를 든 문도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그녀 가 앞으로 나섰다. 구룡선을 육박하는 네 명의 적들은 하라사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자 들이라는 것을 아란하는 알았다. "하라사, 비켜라!" 아란하는 허공으로 신형을 솟구쳤다. 파파파파팟! 그녀는 닭을 노리는 매처럼 하강하며 사방위들을 향해 산수(散手)를 뿌렸다. 묵기가 소낙비를 부르는 검은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사방위를 휘감 았다. 산수가 비켜 가는 곳에 움푹움푹한 구덩이가 생길 정도의 위맹 한 출수였다. 사방위들은 장도를 휘두를 틈도 없었다. 그들은 정수리를 눌러 오 는 묵기에 맞서 급히 장영을 뿌렸다. 따닥! 딱! 딱! 장심과 장심이 부딪히며 대나무가 불에 타는 소리가 났다. 아란하는 장력의 대결에서 생긴 반탄력을 이용 멋지게 회전하며 하 라사의 곁에 선녀처럼 하강했다. 그녀는 사방위와의 장력 대결에서 전혀 손해를 보지 않은 듯했다. 얼굴에 살짝 홍조만 어렸다. 그것도 적들의 공격으로 피가 역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흥분 때문이 었다. 아란하의 무공은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명강량 이 치치터루의 내공과 함께 임독이맥을 타통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사방위들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들은 비틀비틀 물러나 며 결국 입가에 피를 주르르 흘렸다. 휙! 아란하는 재차 도약했다. 그녀가 다시 묵령장법을 뿌리자 사방 위는 제대로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풀썩풀썩 쓰러졌다. 사방위의 무공은 만인촌에서 일노, 쌍혼 다음이다. 구대문파의 명숙들에 버금 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란하의 상대가 되지 못 했다. 지금 아란하의 실력은 지난날의 철심흑사, 곽부에 버금가거나 능가할 정도였다. 파팟! 아란하는 소매를 펄럭이며 명강량 곁으로 되돌아 왔다. 사방 위를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녀는 죽이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대전왕만 해도 충분했다. "하라사!" 아란하는 손을 저었다. "치워라!" 하라사가 문도들에게 길을 막고 있는 팔륜거를 옮기도록 했다. 문 도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순간, 명강량이 손을 들었다. "아!" 아란하를 비롯한 월영궁의 문도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거대한 석상까지 실은 팔륜거가 명강량의 손짓을 따라 허공으로 둥 실 뜨고 있었다. 그리고 명강량이 휙 손을 내젓자 팔륜거는 길 한 편 에 우지끈! 나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팔륜거는 부서졌으나 석상은 단단한 흑요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부 서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흙먼지를 뒤집어쓰며 볼상 사납게 구르는 것은 면치 못했다. 하라사는 문도들의 진용을 가다듬었다. "가자!" 그녀가 손을 들며 소리쳤다. 구룡선이 종남파의 산문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우욱!" 종남파 장문인, 한탁정의 입에서 혈전이 치솟았다. "헤헤헤, 가라!" 전우삼은 혈안을 번뜩이며 번천양장을 날렸다. 장영이 상가(喪家) 의 홍등(紅燈)처럼 흐르며 연속해서 한탁정을 덮쳤다. 한탁정은 현청건강기(玄淸乾　氣)로 오뢰정인(五雷正印)을 일으키 려 했으나 손가락만 까딱할 뿐이었다. 이미 그의 몸은 아득한 나락으 로 구르고 있었다. 펑! 퍼펑! 격렬한 육타음과 함께 한탁정의 몸이 날았다. "장문인!" 제자들이 신형을 날려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한탁정을 붙들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한탁정은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죽일 놈!" 종남의 제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전우삼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우삼의 상대가 전혀 되지 못했다. "으악!" "커억!" 전우삼은 달려드는 종남 제자들을 장작 패듯 처치했다. "잉? 방 노관, 쌍혼! 뭐 하는 게야? 당신들은 특별한 사람들이야! 계속 뒷짐을 지고 있으면 영원히 뒷짐을 지게 해 주겠어! 한 놈도 남 기지 말고 죽이란 말이야!" 이미 끝난 승부였다. 방환과 쌍혼은 한 주먹도 되지 않는 종남의 제자들을 상대하기가 멋쩍어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전우삼은 피 묻은 대월을 들며 꽥 고함을 질렀다. 방환과 쌍혼은 한숨을 쉬었다. 괴로운 일이었다. 전왕으로 받드는 자는 그들을 싸움을 위한 도구 외에는 아무것으로도 인정해 주려 하 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그들의 처지 였다. 방환과 쌍혼은 죽음을 불사하고 달려드는 종남 제자들을 향해 신형 을 움직였다. 두 서너 명의 종남 제자를 처치하고 난 방환이 또 다른 상대를 찾 을 때였다. 방환은 미간을 좁혔다. 종남의 산문을 향해 마치 상여와 같은 거대 한 교자가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울긋불긋한 깃발, 화려한 의상의 이족의 여인들…… 절로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교자였다. 상여 같은 교자는 종남의 전각들을 한 눈에 바라보는 곳에서 우뚝 멈췄다. 여인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교자 위의 태사의에는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무엇인가를 이 야기했다. 사내는 손을 저었다. 사내로부터 명을 받은 여인은 교자 주위에 둘러선 여인들을 모두 뒤로 물러나게 했다.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던 교자 위의 여인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교 자 위에 장착된 거무틱틱한 용을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용의 입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용의 몸체가 점점 붉어져 갔다. '저것은…….' 방환은 안광을 빛냈다. 순간, 그의 머리 속으로 섬광처럼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방환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대화룡! 피하라!" 그가 종남이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대화룡?" 불사혼 도예, 불패혼 예광도 퍼뜩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교자, 비 늘을 붉게 물들여 가는 아홉 마리의 용, 그 용의 입에서는 불꽃과 함 께 검은 연기가 짙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하라!" 그들도 고함을 질렀다. 방환과 쌍혼은 체면도 잊고 놀란 토끼처럼 뛰었다. 십위병과 삼십 육호교사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죽을힘을 다해 방환과 쌍혼을 뒤따 랐다. "무슨 수작들이야?" 전우삼만 대월에 묻은 피를 털며 여유를 부렸다. "전왕, 대화룡! 피하십시오!" 방환이 악을 썼다. "뭐? 대화룡! 그것이 무엇이었더라……." 전우삼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확! 아홉 가닥의 불기둥이 종남의 전각들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뻗 어 왔다. "억!" 전우삼은 대경실색 신형을 날렸다. 그는 출관 이후 최초로 죽을힘을 다해야 했다. 화르르! 불기둥은 종남파를 순식간에 화염지옥으로 만들었다. 천공을 가리는 꺼먼 연기와 함께 불길은 삼천대계(三天大界)를 다 태울 듯 활활 타올랐다. "도대체 이 것은……."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다던 전우삼도 대화룡의 위력 앞에서는 혀를 차야 했다. 불길이 스쳐 지나 간 곳은 폐허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불길은 잦아들고 연기만 치솟았다. "찢어 죽일!"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불길만 지켜보고 있던 전우삼은 살광 을 번뜩였다. 조금만 늦었으면 자신도 그 폐허의 잿더미로 가라앉아 있었을 것이다. 전포도 불길에 닿아 군데군데 꺼멓게 탄 터였다. "모두 어디 있는 게야?" 전우삼은 방환 등을 찾았다. "헤헤헤……." 그는 혈안을 번뜩이며 히죽 웃었다. 꺼먼 연기 속에 소매가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 왔다. 종남파의 제자들과 싸울 리는 없고 방환 등은 이미 화염으로 종남 을 불태운 자들과 한 판 승부를 벌이고 있는 듯했다. "내가 네놈들을 타닥타닥 태워 주마!" 한소리 고함과 함께 전우삼도 구룡선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방환과 쌍혼은 대화룡이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대화룡을 찾은 자 가 누군지, 지금 대화룡의 주인이 누군지를 묻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란하가 이유를 묻지 않고 먼저 장영을 뿌렸다. 아란하는 사방위를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천공을 비상하며 선두 에 선 방환과 쌍혼을 향해 쌍장을 번뜩였다. 파파팟! 소매에서 이는 바람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바람은 방 환과 쌍혼의 머리칼을 뽑아 버릴 정도로 거셌다. 방환은 쌍혼을 향해 눈짓을 했다. 한 번 싸워 보라는 눈짓이었다. 대화룡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전에 대화룡을 지닌 자들의 실력을 알 아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불패혼, 예광이 나섰다. 휙! 그가 허공을 눈부시게 갈라 오는 아란하를 맞아 신형을 솟구쳤 다. 허공을 격하고 아란하와 예광이 부딪혔다. 타타타타탁! 장권을 주고받는 아란하와 예광의 손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묵운(墨雲), 홍운(紅雲)만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찰나지간에 아란하와 예광은 수십 합을 주고받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예광의 신형이 급속히 추락했다. 발을 지면에 착지하며 예광은 노안을 험하게 찌푸렸다. 상당한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기혈 도 제멋대로 움직였다. 파팟! 팟! 아란하는 마치 바람을 희롱하는 연작(燕雀)과 같았다. 그녀는 허공에서 크게 두 바퀴 신형을 회전한 후 몸을 비틀며 하강했 다. 그 모습이 너무도 우아하고 아름다워 방환과 도예는 예광의 처지도 잊고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십위병과 호교사들도 눈을 뺏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란하는 선녀 같은 자태와는 달리 쌍장에 태산의 무게를 싣고 예광의 정수리를 눌러 갔다. "현제!" 그제야 도예는 예광의 위기를 깨달았다. 그가 예광에게 쏟아지는 힘을 분산시키기 위해 아란하의 요혈(腰穴)을 취해 갔다. 임독이맥이 타통된 아란하는 내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여전히 예광을 눌러 갔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측면을 공격 해 오는 도예에 맞섰다. 쾅! 쾅! 격렬한 파공음이 종남산을 울렸다. 쌍혼의 일장을 골고루 받은 아란하는 반탄력을 이용 허공을 선회하 며 삼 장 밖에 섰고 쌍혼은 비틀거리며 다섯 걸음을 물러났다. 쌍혼 은 물러나며 각기 세 치 깊이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이, 이, 이럴수가!' 방환은 백미를 모았다. 쌍혼의 패배였다. 쌍혼의 몸은 무거워 보였 다. 그러나 여인은 안색만 창백해졌을 뿐이었다. 벌써 공세로 나서고 있었다. 방환의 놀람은 쌍혼을 상대하는 여인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홉 마 리의 대화룡을 마필(馬匹) 삼아 태사의에 앉아 있는 사내! 아무런 기 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쌍혼을 상대하는 여인을 수하로 부릴 정도면 그 실력은 보지 않아도 훤했다. '아, 아! 강호는 넓고 기인(奇人)은 황하의 모래알 보다 많다더니 …….' 그러나 방환은 감탄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여인의 공격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쌍혼은 도예가 위기에 처하면 예광이 양패구상의 수법으로 구해 주고 예광이 위기에 처하면 도예가 같은 수법으로 구해 주는 방법으로 간신히 동수를 이뤄 가고 있었다 . 하지만 그 수법들도 오래 가지는 못할 듯 했다. 쌍혼의 손발은 이 미 투로를 잃고 허우적댔다. 염치 불구하고 방환까지 협공에 나서야 했다. 휙! 방환이 쌍혼을 응원하기 위해 신형을 날렸다. 방환이 움직이자 십위병과 삼십육호교사들도 움직였다. 하라사도 문도들에게 전열(戰列)을 갖추기를 명했다. 구룡선과 마인거가 부딪히는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순간! "비켜!" 선풍을 일으키며 달려드는 자는 전우삼이었다. 방환과 쌍혼은 경기의 폭풍의 질려 다급히 물러났다. 아란하도 풍백(風伯)처럼 달려드는 검은 얼굴의 사내를 보고 있었 다. 그녀는 쌍혼을 몰아치는 장영을 급히 선회했다. 전우삼의 붉은 장영이 이미 상가의 등처럼 붉은 빛을 뿌리며 그녀의 코앞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쌍수가 벼락처럼 얽혔다. 쾅!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아란하의 옥주 같은 다리가 휘청 흔들렸다. 그녀는 네댓 걸음을 물러난 후에야 자세를 갖추었다. 눈앞 이 아찔했다. 철벽에 부딪히고 난 기분이었다. 호흡을 고르기도 전에 붉은 장영이 다시 그녀를 휩쓸어 왔다. 아란 하는 권, 장, 각을 모두 동원 연이어 날아오는 붉은 장영을 막아내려 했다. 곽부의 묵령장법은 빠르기와 날카로움에 있어 전우삼의 번천 양장에 못지 않다. 아란하는 번천양장을 봉쇄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내력의 차이가 현저했다. 방금 까지 승리의 기쁨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권장이 얽힐 때마다 아란하는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기혈이 역류하 는 고통에 머릿속이 텅 비는 느낌이었다. 목에서 익히지 않은 콩을 씹은 것 같은 비릿한 냄새가 치솟았다. 전우삼은 마치 술 취한 제왕(帝王)이 궁녀(宮女)를 희롱하듯 아란 하를 몰아붙였다. "헉!" 결국 아란하는 짧은 비명을 터뜨리며 한 모금의 선혈을 쏟았 다. 손발은 점점 어지러워지고 몸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 와중에 갑자기 서러운 생각이 들었다. '왜 도와주지 않는가?' 전우삼의 번천양장은 점점 위력을 더하고 있었다. 나중에 보이는 것은 자신을 조상(弔喪)하는 것 같은 홍등뿐이었다. 아란하는 몇 번 명강량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명강량은 꼼짝 않았다. 그때까 지도 아란하는 명강량이 도와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강량은 끝내 도와주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시선까지 돌려 버렸다. 아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전왕은 나의 죽음을 개의치 않는구나.' 죽음의 공포 보다 그 같은 생각이 아란하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혼연일체(渾然一體)로 싸워도 전우삼에게 이길까 말까 한데 정신까 지 어수선하니 전우삼을 감당할 리 없었다. 쾅! 어디를 가격 당했는지 모른다. 아란하의 신형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아득하게 정신이 흐려졌다. 볼상 사납게 쓰러지는 것밖에 남지 않은 듯했다. 순간, 그녀는 자신 의 몸이 한 곳으로 질풍 같이 빨려 감을 느꼈다. 익숙한 체향…… 자 신을 껴안고 있는 사람은 대전왕이었다. 안도와 원망을 교차하며 아 란하는 정신을 잃었다. 명강량은 한 손으로 아란하를 껴안고 한 손은 내밀었다. 무형의 강기가 벽을 이루며 전우삼이 뿌린 장영에 부딪혔다. 파팟! 홍등처럼 흐르던 번천양장이 바람에 등불이 꺼지듯 일순간에 차례로 사라졌다. "엉?" 전우삼은 눈을 크게 떴다. 번천양장을 한순간에 날리는 자가 있다니…… 그는 퍼뜩 고개를 들며 눈앞의 자에 혈안을 고정시켰다. "어, 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자라 생각했다. 순간, 무형의 압력이 그의 전신을 덮쳤다. "으, 으, 으……." 전우삼은 밀려나지 않기 위해 기를 썼다. 그러나 그는 열 치 깊이 의 발자국을 남기며 주춤주춤 물러나야 했다. "이거, 이거……." 전우삼은 자신이 밀려났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것은 약과였다. 훅! 더운 바람이 불었다. 붉은 장영이 날아왔다. 번천양장처럼 화 려하지 않았다. 손그림자는 단 하나 뿐이었다. '삼양장!' 명옹의 절학! 분명했다. 떠받는 소 같은 성질의 전우삼에게 이미 주화청도 손을 들은 바 있 다. 내력의 대결에서 한 번 진 바 있으므로 전우삼은 다른 생각은 접 고 번천양장부터 번뜩였다. 명강량의 홍장(紅掌)과 전우삼의 홍장이 부딪혔다. 전우삼의 수십 개의 홍장은 차례로 명강량의 장을 가격했다. 그러나 명강량이 뻗은 장은 일광(日光)처럼 이글거리며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어느 순간, 팍! 하며 흐릿한 그림자를 그리더니 폭죽처럼 수백 개의 장영 을 띄웠다. 방환과 쌍혼 등은 너무도 강한 빛살에 눈을 깜박여야 했다. 수백 개의 장영이 일광으로 타오르며 전우삼의 전신을 난마로 쓸어 가고 있었다. '헛!' 전우삼은 이마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극성의 내력을 끌어 올려 명강량의 홍장에 맞섰다. 그러나 번천양장으로는 그 많은 홍장 을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가슴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전우삼은 급히 고개를 떨구었다. 명강량의 장심이 그의 심장에 찰 싹 달라붙어 있었다. "헤헤헤헤……." 전우삼은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웃음을 흘렸다. 명강량은 전우삼의 심장에서 손을 뗐다. "명옹, 못 보는 사이 잔재주가 많이 늘었소." 전우삼이 히죽댔다. '명옹?' 방환과 쌍혼은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받아 보시오!" 전우삼이 돌연 쌍장을 섬전처럼 내밀었다. 쉽게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전우삼이었다. 명강량은 여전히 한 손에 아란하를 껴안고 있었다. 그는 전우삼에 맞서 우수를 가볍게 뿌렸다. 쾅! 장심이 부딪히며 흙먼지가 폭풍처럼 일고 돌가루가 날았다. 나 뭇잎들은 우수수 날렸고 방환과 쌍혼 등은 경기의 여파에 밀려 주춤 주춤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명강량과 전우삼의 모습이 드러났다. "헤헤헤헤……." 전우삼은 여전히 히죽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옷은 너덜너덜 했고 입가에는 피까지 주르르 흘렀다. 명강량은 요지부동이었다. "졌어, 졌어!" 전우삼은 소매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아이고! 명옹, 죽었다더니 어떻게 살았소?" 그가 고함을 지르며 털썩 부복했다. "방 노관, 쌍혼! 명옹은 죽었다고 했잖아! 어떻게 된 게야?" 그는 부복한 채 방환 등을 향해 눈을 흘겼다. 정말 영문을 몰라라 하는 자들은 방환 등이었다. 전우삼이 갑자기 미쳐 눈앞의 자에게 명옹이라 할 리 없고…… 죽었다는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어떻게 살아났는지, 어떻게 전왕을 능가하는 무공을 지닐 수 있게 되었는지, 대화룡은…….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명옹, 어떻게 된 게요? 어떻게? 삼양장은 원래 그렇게 무서운 무 공이었소?" 전우삼은 발딱 일어나 명강량에게 매달렸다. 그는 싸우던 때와 달 리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혈육(血肉)을 만난 듯 명강량에게 곱살스럽 게 굴었다. "우삼, 만인촌에 있었던가?" "만인촌은 또 어떻게 아시우. 별일이네. 그리고 왜 갑자기 반말이 오. 이름을 기억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전우삼이 도끼눈을 뜨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전우삼의 행동으로 보건대 명강량을 만났다는 사실이 여간 반갑지 않 은 듯했다. 다리를 종종거리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저 작자들에게 잡혀 만인부라는 곳에서 죽도록 고생은 했지. 명옹 이 살아 있는 줄 알았다면 당장 그곳을 뛰쳐나왔을 텐데." 전우삼은 멍하니 서 있는 방환 등을 매눈으로 노려보았다. "명옹은 어떻게 된 일이오?" 그가 다시 물었다. 명강량은 다른 말없이 등을 돌렸다. "저, 저…… 그, 그 여자는 누구요? 설마 부인은 아니겠지. 그렇다 면…… 음, 음…… 진작 이야기를 해 주어야 했지 않소! 설마 그 일 로 삐진 것은……." 명강량이 껴안고 있는 아란하에게 시선이 가자 전우삼은 크게 허둥 댔다. 명강량은 구룡선을 향해 묵묵히 발길을 옮겼다. "이봐, 이봐! 저…… 부인이 맞아?" 전우삼이 하라사에게 물었다. 궁주와 대전왕을 상대로 죽자고 싸우던 팔척 장신 흑면귀(黑面鬼) 가 갑자기 왜 대전왕과 절친한 척을 하는지는 하라사도 몰랐다. 각별 한 사이였다는 것만 짐작할 뿐…… 그래서 그녀는 전우삼의 물음에 대답은 해 주었다. "부인은 아닙니다." "그래, 그래…… 헤헤헤헤! 명옹……." 전우삼은 좋아라 하며 명강량을 따라갔다. "뭐라고 이야기 좀 해 보시오. 젠장! 잘난 척 하는 것은 예나 지금 이나 똑 같군!" 그는 연신 주절댔다. "전왕, 어떻게 된 일입니까?" 방환이 물었다. "듣고도 몰라! 이야기를 하지 않는데 나라고 알 수가 있어! 제길! 전왕의 무공 중에는 왜 타심통이 없는 게야!" 전우삼은 명강량이 들어라 소리쳤다. "전왕,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정신이 없기는 불사혼, 도예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뭘 어떻게? 명옹을 만났으니 이제부터 명옹을 졸졸 따라 가야지!" 전우삼은 고함을 지르며 정말 명강량을 졸졸 따랐다. 방환과 쌍혼은 전우삼의 마음을 몰랐다. 어느 날, 상전벽해(桑田碧 海)가 되어 버린 마음에 담던 곳이 있다고 치자. 주화청, 화정, 진금 구, 신 노인, 화 노인…… 사람도 벽해(碧海) 속에 모두 파묻혀 버린 줄 알았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 상전(桑田) 속의 사람을 만났다. 반 가움이 어떻겠는가! 만난 사람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목숨을 한 번 구해 주었고 마음의 기둥, 주화청이 죽음으로 따르라 했던 사람 …… 명옹! 존경의 염까지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방환 등이 전우삼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전우삼이 만인촌을 부수려 할 때 예광이 가졌던 마음의 열 배의 마음으로 전우삼을 이해 해야 했다. 분노가 아니라 기쁨의 마음으로……. "방 노관……." 도예는 이번에는 방환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물었다. 돌아가는 사정은 방환도 몰랐다. "지켜봅시다." 그 말 외에 달리 할 말도 없었다. 방환과 쌍혼은 팔륜거를 향해 돌아갔다. 구룡선 위에는 전우삼이 명강량이 듣거나 말거나 연신 헤헤거리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만인촌에 들어가기부터 출관까지의 이야기를 하 는지……. "엉?" 구룡선을 조심스럽게 지나 팔륜거에 이른 방환은 눈살을 찌 푸렸다. "쩝!" 도예는 쓴맛을 다셨다. 팔륜거는 부서져 있고 사방위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끙끙거리고 있었다. "서둘러 수리하라!" 예광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순간, 방환은 손을 들어 호교사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저 분이 중원의 호교신장이 맞다면 대전왕을 모를 리 없을 테고… … 대전왕의 석상을 내던진 것은 너무한 일 아니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못 볼 수도 있었겠지요." 도예가 말했다. "그랬을까요? 아마 그 말이 맞겠지요." 방환은 눈을 지긋이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예의 말이 맞기를 바랬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지 않는 이상 대전왕의 석상은 너무도 분명한 형상을 보이고 있었다. 모르고 내던졌다고 하더라도 이후에 는 볼 수 있었다. 보았다면 당연히 바로 세워 놓았어야 했다. 방환은 교의를 지켜야 하는 노관이다. 그는 노관이기 때문에 자신 이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대전왕의 석상을 쓰러뜨린 데 대해 지나 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스스로를 질책했다. 대전왕으로 부르든 초대 명옹으로 부르든 타할륜은 어느 배교의 지파 에게도 명왕 다음으로 받들어져야 하고 받들어지는 분이었으므로…… . 아란하는 숱한 악몽과 허상, 혼돈 속에 시달리다 눈을 떴다. "궁주!" 아란하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던 하라사는 반색을 했다. 아란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목채였다. "여기가 어디냐?" "종남파에서 조금 떨어진 곳입니다. 궁주께서는 칠 일만에 눈을 떴 습니다." "칠 일?" 아란하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아픈 기억이 되살아났다. "대전왕께서는?" 그녀는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아직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오실 것입니다." "오신다고?" "궁주의 내상을 치료하고 계신 분은 대전왕이십니다." "그가 무슨 마음으로?" 아란하의 눈빛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병 주고 약 주고, 더욱 놀 림을 받은 기분이었다. 하라사는 아무 말도 못했다. "팔륜거를 몰던 자들은?" "그들은 모두 대전왕의 추종자(追從者)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전왕이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궁주와 싸 웠던 자는…… 이름이 전우삼이라고 하더군요. 그 역시 중원의 배교 도였다고 합니다. 만인촌이라는 우리 교의 한 지파에서 그런 힘을 얻 었던 모양입니다." "대전왕의 힘은 더욱 강해졌군. 이제 우리를 필요로 할 일은 전혀 없겠구나." 내상으로 입은 상처의 고통도 컸지만 마음의 고통은 배로 더했다. 그녀는 손을 저었다. 조용히 혼자 있고 싶었다. 하라사는 머리를 숙이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명강량은 그 순간에 들어왔다. 아란하는 눈을 감으며 명강량을 외면했고 하라사는 한 편으로 물러 나 머리를 조아렸다. 명강량은 아란하의 곁에 섰다. 그는 아란하를 감싸고 있던 이불을 벗겨 던졌다. 아란하는 나삼(羅衫) 차림이었다. 명강량의 손은 거칠 것 없이 아란하의 몸을 더듬었다. 아란하는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나 고통 보다 여자로서의 자존심이 더 컸던 듯했다. 은밀한 곳까지 무자비하 게 짓밟아 오는 명강량의 손길에 그녀는 저항했다. 하지만 그녀는 도 마 위의 고기처럼 꼼짝할 수 없는 신세였다. 명강량의 장심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뼈까지 녹는 듯한 통증에 아란하는 이를 딱딱 마주쳤다. 전신은 물에 빠졌다가 나온 사람처럼 땀으로 흠뻑 했다. 명강량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곽부의 묵령공은 쓸 만한 무공이다. 익히기도 쉽고 위력도 적지 않은 줄 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묵령공을 폐기했다. 앞으로 너는 개천양일진력(開天陽逸眞力), 등천양광도법, 삼양장, 칠양지( 七陽指)를 익히게 될 것이다. 요체는 물론 개천양일진력이다. 잘 들 어라." 아란하를 난타하던 명강량의 손길이 조금 느슨해졌다. "일조내명(日照內命), 연신환허(煉神還虛)……." 명강량은 뚜렷한 목소리로 구결을 욌다. 아란하는 그것이 개천양일진력의 구결임을 알아챘다. 정신을 집중 시킬 필요도 없었다. 명강량의 목소리에는 생각을 전하는 심심상인( 心心相印)의 묘법이 있는 듯했다. 아란하는 편안하게 듣기만 하면 되 었다. 명강량은 기식법(氣息法)에 대해서도 상세히 가르쳐 주었다. 그의 목소리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나는 오래 전에 비동에서 타할륜의 광정을 얻었다. 광정은 타할륜 의 양신(陽神)이다. 그는 누구나 원하는 기화(氣化)를 하지 않고 양 신으로 광정을 만들었다. 천 년 후의 나에게 물려주기 위해…… 오랜 원념(怨念) 때문이었다. 배교도들의 오랜 원념……." 운기를 오래하면 기의 덩어리가 생긴다. 이것을 선태(仙胎)라 한다 . 이 선태가 출신(出神)의 행으로 점점 자라 또 하나의 자신을 내놓 은데 양신은 바로 그것이다. 오기조원(五氣朝元), 삼화취정(三花聚頂 ), 적사귀신(赤蛇歸神), 천화란추(天花亂墜)를 맛보아야 이룰 수 있 는 경지이다. 아란하는 명강량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의식중에 개천양일진력을 일 으키고 있었다. 폭풍 같이 화마가 훅 덮치며 그녀는 순간적으로 정신 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명강량은 이미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듯 혈맥을 어루만져 화마를 조절해 주었다. "이제 광정은 나의 몸에 있다. 아란하, 타할륜처럼 나도 광정을 누 구에게 물려줄 것 같은가? 나는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물려줄 수도 없다. 광정을 남길 수 있는 동천복지(洞天福地)는 많지 않다. 타할륜 이 광정을 남겼던 동천복지는 내가 광정을 얻던 그날, 수맥이 터지면 서 사라져 버렸다." 동천복지란 기가 분출하는 좋은 땅이다. 광정이라는 어마어마한 기 의 덩어리가 지켜지기 위해서는 동천복지도 예사로운 동천복지가 아 니면 안되었다. 그런 곳이 또 있다고는 명강량은 생각하지 않았다. 있다고 하더라도 찾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타할륜은 광정의 순청(純淸)을 지키기 위해 수십 년 간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아란하 , 기억하라. 나의 손에 피가 마르는 날은 나의 몸에 피가 마르는 날 이라는 것을……." 명강량의 목소리가 메마르게 목채를 울렸다. 아란하는 명강량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얽혔다. 그녀로서는 명강량 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최초였다. 명강량은 명강량의 생각이 있 었고 아란하는 아란하의 생각이 있었던 듯했다. "왜 나를 죽게 내버려 두었나요?" 아란하가 물었다. 그녀는 운기를 하며 다른 생각은 물론 말도 할 수 있었다. 개천양일진력도 양의심공(兩意心功)과 같은 효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명강량이 도와주고 있기 때문인지……. "나는 너를 죽이려 했다." 명강량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왜 죽이려 하셨나요?" "묻지 마라!" "살려 주는 이유에 대해서는 물어 봐도 될까요?" "묻지 마라!" 아란하는 눈을 감았다. 명강량의 말대로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 다. 기혈을 돌고 있는 화마는 점점 잠잠해 졌다. 한식경이 지났을 때였다. 아란하는 전신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화 마는 짜릿한 온기로 바뀌어 그녀의 몸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아란하는 눈을 떴다. 긴 세월을 기다렸던 그 사람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아란하의 얼굴은 붉어졌고 눈빛도 흔들렸다. 묘한 감촉은 묘한 감 흥을 일으키고 있었다. 명강량의 안색이 굳었다. "아란하! 나는 네가 어떤 심마(心魔)를 불러들여도 상관하지 않겠 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심마를 불러들인다면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아란하의 눈빛이 얼어붙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명강량은 아란하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는 목채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아란하, 나는 지금 어디로 가는가?" 목채를 나서며 그가 문득 물었다. "어디로 가겠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아란하, 나는 어디로 가는가?" 같은 물음이었다. 아란하는 입을 닫았다. 스스로가 물었고 스스로가 답할 수밖에 없 는 물음이었다. "파국 이후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만약 파국 이후에도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살아 남을 유일한 사람은 네가 될 것이다!" 명강량의 목소리가 목채를 웅웅 울렸다. 대전왕이 무슨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아란하의 기분은 이전 보다 나쁜 편은 아니었다. 창밖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만추였다. 휘 - 잉! 휭! 바람은 마른잎을 채홍색 꽃잎으로 휘날렸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서둘러, 빨리!" 팔륜거에 선 전우삼은 꽥꽥 고함을 질렀다. "대화룡이 앞질러 가면 우리는 죽일 놈도 없게 된단 말이야! 서둘 러, 서둘러!" 그는 팔륜거가 부서져라 발을 굴렀다. 초대 명옹의 석상이 들썩들 썩 흔들렸다. 아직도 창백한 안색의 사방위가 후다닥 전부로 나섰다. 방환은 전 우삼의 곁에 서 있었고 쌍혼은 마부석에 앉아 말고삐를 쥐었다. 십위 병은 다섯 명씩 팔륜거의 좌우에 서고 삼십육호교사는 팔륜거를 교대 로 몰고 갈 말과 함께 후미에 도열했다. 팔륜거 뒤는 구룡선이었다. 구룡선의 진용은 원래와 마찬가지였다. 하라사는 아란하를 바라보았다. 아란하는 긴소매를 늘어뜨리며 손을 수평으로 들었다. "무산!" 그녀가 소리쳤다. 대전왕이 가자고 한 곳이었다. "잉? 화산으로 가는 줄 알았더니, 무산? 방 노관, 무산! 무산!" 전우삼은 호들갑을 떨었다. "무산!" 방환이 황모(黃　)를 들며 소리쳤다. "히히힝!" "히힝" 여덟 필의 말이 땅을 박찼다. 크르르르르…… 뿌연 흙먼지와 함께 팔륜거가 움직였다. 만추의 잎 처럼 울긋불긋 화려한 구룡선도 독전기를 앞세운 채 그 뒤를 따랐다. - 강호인들이 구룡선, 마인거라 부르는 강호의 폭풍, 구룡선과 팔 륜거! 하나만 하더라도 강호인들의 간을 덜컥거리게 하던 그들이 같 은 대열로 무산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 * "어서 오십시오." 등중용은 깍듯이 머리를 숙였다. "모두 다 오셨소?" 깡마른 체구, 지친 표정으로 배 위를 오르는 노도장은 공동파의 장 문인, 현청도장(玄淸道長)이었다. "몇 곳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시기 힘든 상황일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현청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방주께서 고생이 많으셨소. 모두 왔다고 하니…… 자, 같 이 들어갑시다." 그가 등중용의 소매를 끌었다. 등중용은 현청도장과 함께 배 위에 올랐다. 뱃전에는 승, 도, 속,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안광을 빛내며 서 있었 다. 각 문파의 장문인들을 호위해 온 문도들이었다. 등중용과 현청은 선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오랜만이오. 현청도우." 소림의 방장 혜각(慧覺), 무당파의 장문인 양진자(陽眞子), 청성파 의 장문인 일진도장(一眞道長), 화산의 장문인 이건(李建), 종남의 명숙 사덕성(史德聲)……. 선실에 앉아 있던 자들이 등중용과 현청도장을 맞았다. 곤륜, 아미, 점창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대회맹 에도 사람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딱한 처지가 된 듯했다. 모두 침통한 표정들이었다. 그중, 개봉으로 오는 도중 종남의 멸문 소식을 들은 사덕성의 표정은 안쓰러워 바라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 다. 이런 무거운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 나가는 자들은 언제나 개방의 방주다. 등중용은 서두(序頭)를 열기 위해서라도 무엇인가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분위기에 압도되어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자는 최연장자인 무당의 양진자였다. "모두 오신 듯 하오만……." 양진자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여유가 없을 줄 아오. 그간의 안부는 나중에 묻기로 하고…… 바 로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먼저 등(鄧) 방주(幇主)께서 종남파의 일 이후 다른 일이 있는가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자 서둘러 오신다고 강호의 새로운 소문을 못 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오." 그가 등중용을 바라보며 말했다. "워낙 큰 사건이기 때문에 모르시는 분은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구룡선, 화룡거가 한 대열을 이루었습니다. 원래 그들의 뿌리가 같았 는지, 아니면 중원 진출을 앞두고 밀약(密約)을 맺었는지는 좀더 알 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지금 무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힘을 합하다니…… 각개(各個)로 싸우기에도 힘든 상대였 는데…… 그들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소?" 청성파의 일진도장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그것이…… 짐작도 할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룡선은…… 구룡선을 이끄는 자들은 이족의 여인들입니다. 남자는 단 한 명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마왕이라 부르는 자이지요." 등중용이 말했다. "이족의 여인들을 문도로 거느린 자라…… 혹시 환희밀전은 아닐까 요?" 양진자가 소림의 혜각에게 물었다. "아미타불! 환희밀전은 아니오. 한 명의 남자에게만 매달리는 밀전 의 여자들이 있다는 소리를 나는 아직 들은 적이 없소. 그들은 원래 난교(亂交)를 좋아하오. 그리고 환희밀전은 떠들썩하게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금방 표시가 납니다." "소림의 장경각(藏經閣)에는 만류(萬流)가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소. 짐작 가는 곳도 없습니까?" "보기 전에는…… 곤륜의 동도들이 한 분이라도 와 주었으면 좋았 을 텐데." 소림의 혜각이 아쉬움을 표했다. "내가 곤륜에 급히 들렀다가 왔습니다. 마군(魔君)에 대해 이것저 것 물어 보았소. 시원한 대답이라고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소이다. 광 오, 광성, 광운…… 곤륜의 쟁쟁한 명숙들이 단 몇 합도 그 마군의 손속을 견뎌 내지 못했다고 하오. 무엇을 볼 틈이 있었겠소." 공동의 현청도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 역시 점창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강호에 전해지지 않은 이야기 를 하나 들었는데…… 마인거에는 세 명의 노물(老物)이 따르고 있답 니다. 그 노물들이 사용하는 장법이 어딘가 배교의 삼양장과 비슷했 다고 말하더군요." 청성파의 일진도장이 말했다. "배교?" "삼양장!" 좌중들은 일진도장의 말에 어이없어 했다. 구룡선, 마인거라는 절 대 마물들의 이름 앞에 사멸하고 있는 하오문의 이름을 거론한 것이 황당했기 때문이다. 사실 점창도 그 때문에 쉽게 삼양장에 대한 이야 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머릿속에 담긴 세월이 조 금 더 길었다면 그들은 살아 남은 점창의 문도가 한 말을 쉽게 넘기 지 만은 않았으리라. 나백염왕! 탈명마효! 구대문파의 영수들은 중요한 순간에 강호의 한 세월을 피로 장식했 던 배교도의 이름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십 여년 전, 토끼처럼 몰리 다가 해체된 그 배교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배교의 삼양장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배교의 삼양장을 닮았다고 하더군요. 혜각대사, 강호에 삼양장과 비슷한 무공은 무엇이 있소?" 일진도장은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음양수(陰陽手), 자사장(紫邪掌), 유홍장(流紅掌)…… 몇몇 있기 는 하나 점창을 어떻게 할 장법은 없는 것으로 아오." 혜각이 대답했다. "두 마두가 중원인이 아니라면 어디 새외에서 툭 불거진 문파로나 알 텐데. 정말 오리무중이외다." 일양도장은 탄식을 터뜨렸다. "물어도 나오지 않는 대답…… 앞으로 할 일이나 이야기합시다. 구 룡선과 마인거가 합쳤소이다. 각자의 산문만 지키자고 이야기하지는 않으시겠지요." 양진자는 결말을 서둘렀다. 좌중들은 침묵했다. 당연한 말에 가타부타할 필요가 없었다. "십일월 중순에 의창에서 봅시다. 공동파와 청성파는 길이 멀 줄 아오. 의창에 같이 모였으면 하나 시일이 촉박하니 다른 일을 맡겼으 면 합니다. 근자에 구룡선과 마인거의 출현으로 사마외도들이 때를 만난 듯 일어서고 있다고 하오. 서천으로부터 놈들을 하나씩 소탕하 며 동진(東進)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미타불, 좋은 이야기입니다." 혜각이 양진자의 말에 쌍수를 들었다. 다른 문파들도 별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수고를 부탁하오." 일진도장이 소림, 무당, 화산의 장문인들을 바라보며 포권했다. "자, 그럼! 개봉의 대회맹은 이것으로 마쳤으면 하오만……." 양진자가 다른 의견이 있나 해서 좌중을 둘러보았다. "싸우는 일 말고 다른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나는 길이 멀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공동파의 현청도장이었다. "저 역시……." 일진도장도 일어섰다. "모두 조심해서 가십시오." 양진자가 서로에 대한 인사를 대신했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선실을 나섰다. 개봉 대회맹의 끝이었다. 강호를 받드는 기둥들의 모임으로써는 너무도 싱거운 감이 있었다. 사실 이번뿐만 아니라 가까이 배교 타파를 위해 대회맹을 열었을 때 도 이 같이 끝나기는 마찬가지였다. 구대문파의 연륜만큼 대회맹이 열렸던 역사도 길었다. 맹회(盟會) 를 누가 주관하느니, 적들을 맞서 싸우는데 각 문파에서 몇 명의 문 도들을 보내느니 하는 일들은 이미 관례(慣例)로 굳어진 터였다. 그 리고 굳이 관례가 아니더라도 적들을 치는 데 자신의 문파만 생각하 는 인색한 문파도 없었다. 구대문파가 구대문파인 것은 평상시에는 아옹거려도 외부의 적들에 맞서서는 무서운 단결력을 과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거…….' 장문인들을 배웅하며 등중용은 맹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이야기 하나가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 중요한 일을 장문인들이 잊 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왜 그 이야기를 거론하 지 않느냐고 묻기가 힘들었다. 별 수 없이 등중용은 가장 연배가 가까운 화산파의 장문인, 이건의 소매를 잡았다. "구룡선, 마인거의 무서움은 들은 바와 같습니다. 왜, 능운공작, 사패와 손을 잡을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까?" "방주의 걱정은 그곳에 있었습니까?" 이건은 사람 좋게 웃었다. "우리 구파일방(九派一幇)은 십 여년 동안 강호의 주인 자리를 사 패에게 내어 주고 있었습니다. 모든 장문인들이 이제는 원래의 자리 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이고 …… 강호의 주인이 공(功)과 과(過)로서 결정 난다면 공도 우리의 것으로 과도 우리의 것으로 할 필요가 있지요. 사패도 아마 그런 우 리의 생각을 읽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패로부터 특별한 연락이 없 었지요?" "없었소." 등중용이 안색을 찌푸리며 말했다. 구룡선, 마인거라는 전대미문의 대살성들이 출현한 이 마당에 세력 다툼을 염두에 두고 있는 구대문 파나 사패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사부의 말대로 정말 강호는 복마전이었다. "사패와 손을 잡지 않아도 구룡선과 마인거를 처치할 방도가 있는 모양이지요?" "다른 문파는 모르겠습니다. 저희 화산파는 조금 준비가 되어 있습 니다. 하하하!" 이건은 소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등중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 곤륜 등이 무너졌다고는 하나 아 직 소림, 무당, 화산은 건재하다. 그 세 문파는 나머지 구대문파의 힘을 모두 합한 것 보다 몇 배는 강하다. 그리고 사패를 이기기 위해 십 몇 년간 두문불출 실력을 키우는데 주력해 온 그들이다. 패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패하리 라고 생각하고 싸우는 싸움이 있는가. "쩝……." 등중용은 총총히 걸어가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을 보며 쓴맛을 다 셨다. 사패는 그렇다고 치지만 최소한 능운공작에게는 작금의 사정을 논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등중용의 생각이었다. 사패의 후견인이든 어쨌든 지금 강호의 가장 큰 힘은 바로 그였으므로…… 그러나 이건의 말을 들어보건대 구대문파는 능운공작까지 도외시(度 外視)할 것임에 분명했다. 제31장 해후(邂逅) 단원홍은 여명이 밝아 오기 전에 운기를 끝냈다. 간단한 몇 가지 동작으로 몸을 풀고 천화원으로 돌아왔다. 벌써 따뜻한 물이 그리울 때였다. 그는 따뜻한 물에 전신을 푹 담 그고 새벽을 맞았다. 새 옷을 갈아입고 시비가 가져다 준 잣죽을 비운 후 서재에 들어섰 다. 해는 늦게 뜨고 일찍 져,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책을 수월하게 읽을 만한 빛을 보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눈은 밤낮을 가리지 않기에 쉽게 글자를 가려냈다. 책을 펼쳤다. 그리고 읽던 책의 장(章)을 바꾸었을 때 해는 떴다. 맑은 가을 햇살에 바람은 소소히 불고…… 책을 넘기는 소리가 가랑 잎 날리는 소리와 좋게 어울렸다. 단원홍은 매일 그렇게 오후를 맞았다. 그러나 그날, 그는 책을 일 찍 덮었다. 참기 위해 무척 노력했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거울 앞에 서 백발을 가지런히 했다. 서재를 나온 그는 천화원의 뜰에 서 잠시 하늘을 우러렀다. 기러기 의 행렬은 이미 보이지 않고 낙엽만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그는 휘날리는 낙엽을 헤치며 천화원을 나섰다. 천위대의 부대주, 한고가 소리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산을 가로질러 그가 이른 곳은 금옥이었다. 천위대들이 허겁지겁 그를 영접했다. 단원홍은 그들을 지나 금옥에 들어섰다. 낙엽 타는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불을 피우고 있는 자는 천노였다. 단원홍은 그의 곁에 묵묵히 섰다. "아가씨의 소식은 없던가요?" 천노가 불길을 일으키며 표정 없는 얼굴로 물었다. "예령을 보내 준 사람은 천노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왜 묻습니까 ?" "아가씨를 보낸 사람은 내가 아니오. 아가씨는 아가씨의 발로 떠났 소." "제 발로 떠난 아이입니다. 소식을 더욱 보내올 리 없지요." "그렇겠군요. 말은 다시 온다고 했으나…… 언제나 아가씨들이 떠 난 길은 다시 올 수 없을 정도로 먼길이었지요." 천노의 눈빛이 공허함으로 물들었다. "천노, 기분이 이상합니다. 나는 근자에 무척 자주 화가 납니다. 예령은 나에게 어떤 아이였소?" "쯔쯔쯔, 원주께서는 부정하고 계셨군요. 어린 아가씨는 원주께서 키웠지요. 화가 나실 것입니다. 노원주(老院主)께서도 큰아가씨가 떠 났을 때 무척 화를 냈습니다." "예령이 내가 키운 아이라…… 후후후, 나는 그 아이가 타는 낙엽 처럼 어느 날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으면 하고 수백 번을 더 염원했던 사람입니다." "자신을 속이려 들지 마십시오. 더 큰 상처만 받을 뿐입니다. 떠날 수밖에 없는 분들입니다. 이제 두 분의 아가씨들을 잊으십시오." "천노까지 그렇게 이야기할 줄은 몰랐군." 단원홍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백발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돌아가시기 전에 사부께서 말씀하셨소. 당신의 운명은 사매를 키 워 주는 바로 그것에 있었다고…… 품안을 벗어나려 할 때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면 사매의 재롱을 몇 번 더 볼 수 있었을 것이라 했지." "그런 분이 왜 죽음에 이르러서도 큰아가씨를 보지 않으려 했답니 까?" "천화원의 원주들은 어떤 운명도 거부하고자 하는 운명을 타고 태 어났소.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느끼는 그 순간에도……." 단원홍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아가씨를 찾아 올 생각이시군요." "물론!" "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소? 나는 사부와 조금 다르오. 인고(忍苦)의 세월로 만족하지 않지. 죽여 버릴 것이오. 예령을……." 부지깽이로 불길을 헤집던 천노의 몸이 굳었다. 그가 단원홍에게 선을 던졌다. 단원홍은 턱을 매만지고 있었다. 천노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가늠할 수 없는 생각으로 애매하게 빛나는 눈빛, 옅은 미소…… 천 노는 단원홍의 표정에서 단원홍이 농담으로 그 같은 말을 하지 않았 음을 깨달았다. 휘-잉! 휭! 가을 바람이 불붙은 낙엽을 이리저리 흩날렸다. '경망스럽군.' 단원홍은 실소를 흘렸다. 금옥에 무슨 별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령이 돌아왔다면 천노가 한달음에 보고를 해 주었을 것이다. 그것 조차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경망스럽군, 경망스러워…….' 스스로가 가소롭고 가소로웠다. 죽인다는 말은 왜 했을까? 그는 자 신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사부와 마찬가지로 한 번 내뱉은 말은 잘 취소하지 않는 성격을……. '원홍, 너는 정말 웃기는 놈이구나! 그 어미 때문에 그렇게 마음을 태우더니 그 딸 때문에 또 구렁에 발을 들리려 하고 있다니…….' 자신의 경망스러움은 모두 예령 때문이었다. 천노의 말이 맞았다. 예령은 자신이 키웠다. 정을 끊기는 어려웠다. 그 정이 없었다면 이 렇게 허둥대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언제나 그는 예령을 냉랭하게 대했었다. 예령은 그의 젊은 날, 그 가 입었던 가장 큰 상처의 흔적이었다.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죽여야 할 온갖 이유는 다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결국 죽이지 못했다. 몇 년은 사매의 혼령이 그가 예령을 죽이는 것을 막았고 나머지 몇 년은 이미 그의 눈에 맺혀 버린 예령의 밝은 눈빛이 죽음을 막았다. 좋게 대하지 않았건만 예령은 항상 반갑게 그를 맞았었다. 천하에 누가 자신을 위해 그런 웃음을 웃어 주었단 말인가. 아무도 없다. 단원홍의 두 눈에 한광이 번뜩였다. 그래서 절대 뺏기지 않을 생각 이었다. "한고!" 천화원을 향해 걸어가며 단원홍은 한고를 불렀다. 한고가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국태열로부터 다른 소식은 없느냐?" "아직…… 그러나 지금쯤 아가씨의 종적을 찾았을 것입니다." "국태열이 예령을 데려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가씨를 데려간 놈들 중 별 대단한 놈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단지 아가씨의 이상한 눈빛에 현혹되어…… 국 대주는 충분히 아가씨 를 데려올 수 있을 것입니다." "별 대단한 놈이 없었다고…… 명강량! 그자도 별 대단하지 않았었 지! 하지만 그는 천화원에 있는 모든 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명강량이라는 자는 누구입니까?" 단원홍은 대답하지 않았다. 짙은 살기만 내뿜었다. "언상영은 왜 말이 없느냐?" 묵묵히 발길을 옮기던 단원홍이 갑자기 차갑게 가라앉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팽해만은 왜 말이 없고 남궁기까지 왜 말이 없느냐?" 그는 격노를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고는 목을 자라처럼 움츠리며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했다. "너희들은 나를 바보로 아는구나." "저희들이 어찌 감히 원주를……." 한고는 이마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좋다,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 세상 밖으로 향하는 천화원의 모든 통로에 높은 담장을 쌓은 자는 바로 나이니…… 세상 밖의 누가 나를 어떻게 부른들 무슨 상관이 있으리!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예령 이 사라졌다." 단원홍은 먼 곳을 응시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성녀의 부활이지. 배교도들에게는…….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구룡선, 마인거가 나타났다." 한고는 속으로 '헉!' 했다. 국태열이 절대 입밖에 내지 말라고 해 서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사실이었다. "저희들은…… 저…… 사패께서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은거를 택한 분인데 괜히 심란한 말씀을 드려…… 청정이 방해될까를 걱정하 셨습니다." 그가 허둥댔다. 단원홍은 구룡선과 마인거에 대해 보고를 하지 않은 사실을 더 이 상 문책하지 않았다. "구룡선, 마인거…… 기분이 좋지 않다. 왜 그곳에서 배교의 냄새 가 나는지……." "그렇다면…… 구룡선, 마인거가 배교도? 설마 배교에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아니기를 바란다. 아니라면…… 강호의 뜻에 따르겠다. 언상영, 팽해만, 남궁기, 구대문파……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나에게 구룡선과 마인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앞으로 나도 구 룡선과 마인거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다. 구룡선과 마 인거가 예령과 나를 비켜간다면……." 단원홍은 천화원으로 발 빠르게 걸어갔다. 한고는 멍하니 서 칼자루만 매만졌다. '원주는 알고 있다. 모든 것을…….' 맹호전 전주, 당예의 이름은 거론도 않고 있었다. 당예가 죽은 것 까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고는 알 수 없었다. 강호에 대해 원주의 귀와 눈이 되어 줄 사람 은 국 대주와 자신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 밖의 일을 저토 록 상세히 아는지…… 천화원을 나서는 것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원주의 눈과 귀가 되어 주는 또 다른 자가 있었나?' 한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 궁금증 보다 걱정이 앞섰다. 구룡선, 마인거! 무지막지한 기세로 중원을 난타(亂打)하고 있었다. 가면 갈수록 그들은 더욱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룡선, 마 인거의 힘이 처음부터 저 정도임을 알았다면 과연 언상영은 원주께 구룡선과 마인거의 출현을 알리지 말라고 했을까? 어쩌면 지금 언상 영은 원주께 구룡선, 마인거의 출현을 알리는 급보를 보내 오고 있을 지 모를 일이었다. 벌써 강호에 비관적인 전망들이 하나, 둘 쏟아지 고 있으니…… 만약 구룡선과 마인거를 사패와 구대문파도 막지 못한다면 결국 그 들은 저지할 사람은 원주밖에 없다. 그런데 원주는 방금 구룡선과 마 인거에 대한 간섭을 포기할 것임을 선언했다. 원주는 한 번 내뱉은 말을 쉽게 되돌리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을 생각해서라도 원주께 구룡선과 마인거의 출현을 말해 주었 어야 했는데…….' 한고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알려야 된다고 말했다. 맹호전의 멸망! 그것만 해도 큰 사건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맹호전주, 당예는 원주와 젊은 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다. 그 이유 때문이라도 알렸어야 했다. 하지 만 국태열이 막았다. 사패 모두가 알리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 다. 지금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다. 국태열은 절대 사패를 상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원 주와 가까이 있으므로 자신이 사패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이었다. 사패가 알리지 말라고 해서 알리지 않을 자가 아니 었다. 그리고 국태열은 자신이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원주에게 보 여주기 위해 강호의 작은 일도 미주알고주알 하는 자다. 구룡선, 마 인거의 등장 같은 큰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에 사패가 구룡선, 마인거의 등장을 쉬쉬해 달라고 했는지 모른다. 어쨌든 사패가 국태열의 입을 막기 위해 손을 썼음은 분명한 듯했다. "머저리 같은 놈!" 사태가 이 지경으로 흐르고 보니 한고는 국태열에 대한 울화가 치 솟았다. 국태열 같은 자를 상관으로 모시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기 도 했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 세상이 겁란(劫亂)에 휩싸여도 천화원의 안전은 어쨌든 믿었다. 하 지만 강호에는 그의 혈육과 지인(知人)들이 부지기수다. 사패가 알아 서 하겠다고 했으니 그들의 말대로 모든 것이 잘되기만을 바랄 따름 이었다. 국태열은 천화원의 문을 지키기에는 딱 적합하다. 오랫동안 자신을 열심히 따르기는 했으나 그 이상의 일은 맡길 수 없는 자였다. 예령 을 찾아오라고 보내기는 보냈다. 그러나 단원홍은 그에게 모든 일을 맡기지는 않았다. 다른 일도 아닌 예령을 찾는 일이었다. 단원홍에게는 국태열 못지 않게 오랫동안 그를 따르는 몇 명의 수 족이 있다. 어둠을 활보하는 자들, 무영인! 천화원에 발을 들인 이후로는 그들에게 한 번도 일을 맡긴 적이 없 었다. 각자의 일에 충실하고 있는 그들을 십 여년 만에 불렀다. 천화 원의 집사(執事)도 무영인 중 한 명이다. 집사를 통해 그들은 단원홍 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예령의 소재와 배교도들의 종적을 찾으라고 명했다. 그리고 강호의 사정들도 알아 오게 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배교도들의 출현! 그들의 뒤에는 이상하게 끈적거리는 그 무엇인가 가 있다. 파란을 부르는……. 예령이 금옥을 떠난 일과 배교도들의 출현이 그들만의 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단원홍의 짐작이었다. 그의 예감은 맞았다. 먼저 무영인들은 강호의 소식을 알려 왔다. 곤륜파, 점창파, 맹호전의 괴멸! 당예의 죽음…… 구룡선, 마인거 의 출현을 말해 주었다. 구룡선, 마인거! 단혈철각련이 연이어 난동을 부리지 않았으면 단원홍은 배교도들의 씨를 말려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었다. 곽부의 단혈철각련과 마찬 가지로 비록 그런 의도는 없다고 할지라도 배교도들의 명맥을 유지하 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나타난 자들인지 모른다. 아니면 배교도들 과 직접 관련이 있는 자들이거나……. 구룡선, 마인거에 꼭 배교를 끌어들여 이야기해야 하느냐? 남들은 지나치게 배교를 의식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 말이 맞을 것이다. 언제나 그는 배교와의 끈질긴 악연을 생각해 왔으므로…… 잊을만 했 을 때 양백이라는 자가 나타났다. 오랜만에 대하는 외부인이 배교도 일 줄 누가 알았으랴! 어차피 구룡선, 마인거는 사패와 구대문파가 맡겠다고 했으니 조사 정도 해 본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을 듯했다. 무영인들에게 구룡선 과 마인거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도록 명했다. 그들의 발 빠름은 여전했다. 서탁에는 또 한 장의 서신이 놓여 있었다. - ……밝혀진 바로 극양기공(極陽奇功)을 사용하고…… 구룡선을 끄는 여인들은 모두 이족의 미인들이며…… 마인거의 석상은 벽안인 의 조상(彫像)으로…… 대월을 사용……. 단원홍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배교에 대해서는 보권을 읽었을 만큼 그도 아는 바가 많았다. 삼양장, 저 먼 열사의 땅에서 왔다는 배교의 뿌리……. 짐작이 점점 들어맞는 기분이었다. 그는 벽에 걸린 검을 빼 들었다. 오랜 침묵을 깰 꽤 재미있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그렇 게 되기를 바랬다. 배교에 대해 풀지 못한 한들도 제법 있었으므로… …. 여전히 단원홍의 세계는 배교도 만큼 배교에 얽힌 세계였다. * * * "하!" "핫!" "하!" 투두두두두! 백 여기쯤 되는 말이었다. 기마인들은 괴성을 지르며 질풍노도처럼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구룡선, 마인거의 등장! 강호의 질서는 질그릇처럼 깨졌다. 그리고 그 틈을 타 산과 강, 들 판을 암약 하던 흑도의 무리들이 우후죽순처럼 들끓고 있었다. 관중 에는 특히 마적들의 발호가 심했다. 여가구(呂家口)! 여씨(呂氏)들만 모여 사는 백 여호의 촌락! 그곳 에도 마적의 무리들은 마수를 뻗치고 있었다. 특히 지금 여가구를 덮 치는 마적들은 관중의 마적들 중 가장 악명이 높은 쾌쾌단(快快團)의 마적들이었다. 어린아이, 여자 가릴 것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학살극(虐殺劇)에 재미를 잃을 때쯤 데리고 놀다가 팔아 치울 만한 여자들과 재물을 싹 거둔 후, 방화로 마을을 초토화시키고 떠난다는 자들……. 쾌쾌단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릴 때마다 여가구 촌장(村長)의 간은 쿵쿵 떨어졌다. "대, 대협! 차라리 도망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촌장(村長)이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앞에는 산뜻한 매화 문양이 새겨진 도복을 걸친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화산 파 장문인 이건의 사제, 장문천이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말 보다 빨리 달릴 자신이 있는 사람은 달아나 라고 하십시오." 장문천이 말했다. 그는 어린 제자들과 함께 화산의 주위에서 강호 행을 하고 있었다. 길을 가는 도중 우연히 쾌쾌단의 마수가 여가구로 뻗치는 것을 보고 한 팔의 힘을 돕기 위해 여가구에 온 터였다. "저항을 하면 더욱 참혹하게 죽인다고 합니다. 차라리 손을 드는 것은……." "여씨들의 기백은 하늘을 찌른다고 하던데 제가 소문을 잘못 들은 모양이군요. 백기를 들겠다면 드시오. 우리는 싸우겠소. 나야 별 싸 울 마음이 없는데 아이들이 싸우겠다고 하는군요." 장문천은 눈짓으로 마을 입구를 가리켰다. 마을 입구에는 여가구의 장정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말의 진입을 막 기 위한 목책(木柵)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칠 명의 검 사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서 있었다. 장문천이 데리고 다니는 제자들이었다. "저들이 과연 우리를 지켜 줄 수 있을까요?" 촌장은 염려를 풀지 않았다. 모양은 그럴 듯 했으나 검을 든 자들 은 아직 약관에도 이르지 못한 애송이들뿐이었다. "걱정이 되면 같이 싸우시오." "우리가 어떻게……." 촌장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장문천은 실소를 흘렸다. 뻔히 당할 줄 알면서도 싸우지 않겠다니 …… 칼을 든 자들과의 차이인 듯했다. 칼을 든 자들이라면 이왕 당 할 것 싸우다가 죽겠다고 말할 것이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당하면 당하는 대로 그렇게 순응하며 사는 것 이 그들의 운명인 듯했다. 하긴 한 대 맞았다고 그 갚음을 위해 누구 나 일어선다면 이 세계의 지반은 얼마나 허약하랴. 장문천을 팔짱을 꼈다. 투두두두두! 흙먼지는 자욱하고 마적들은 점점 여가구로 다가왔다. 여가구에 이 른 그들은 마을에 가로놓여진 높다란 목책을 보고 코웃음을 치며 말 에서 내렸다. 목책을 치우기 위해 걸어오던 십 여명의 마적들은 마을 입구에 선 화산의 제자들을 발견했다. 쾌쾌단은 전혀 무지한 자들은 아니다. 매화 문양의 도복…… 화산 파의 제자들임을 알아챘다. 그들은 또한 화산파를 겁낼 줄도 알았다. 목채을 치우려던 십 여명의 마적들은 크게 놀라며 후다닥 본진(本 陣)으로 돌아갔다. 웬만한 마적들이라면 상대의 머릿수와 나이에 관계없이 화산파라는 이름만으로도 다른 곳으로 말머리를 돌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쾌 쾌단의 단주는 지나친 만용을 부리고 있었다. 구룡선, 마인거에 판판 이 깨지는 구대문파를 우습게 본 탓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날 그에 게는 죽음의 악신이 씌었던 듯했다. 백 여명의 마적들은 일제히 말에서 내렸다. 쾌쾌단의 단주는 외치 고 싶었다. '나는 화산파 놈들까지 쓸어버렸어!' 그는 다른 마적들에게 그렇게 소리 치기를 바라며 수하들과 함께 목책을 슬금슬금 다가왔다. 화산파 제자들의 중앙에 선 호랑이 눈의 소년은 조충국(趙充國)이 다. 그는 마적들이 다가오자 검을 빼 들며 소리쳤다. "개화(開花)!" 조충국을 비롯한 일곱 명의 화산 제자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들은 날렵하게 움직이며 별 모양 같기도 하고 꽃잎 모양 같기도 한 진(陣)을 만들었다. 매화검진(梅花劍陣)! 소림의 나한진, 무당의 양의검진(兩意劍陣)과 함께 천하 삼대 절진 으로 꼽히는 바로 그 검진이었다. 때문에 아직 검진의 오의도 모르고 외형만 간신히 익힌 홍안의 소년들이 펼치고 있다고는 하나 진세가 갖추어지자 견고함과 위맹함이 단번에 마적들의 기를 질리게 했다. 쾌쾌단의 수하들은 단주의 눈치를 살폈다. "천방지축을 모르는 애송이들! 강호의 매운 맛을 느끼게 해 주마! 쓸어 버려!" 단주가 박도를 들며 소리쳤다. 쾌쾌단의 수하들은 창칼을 번뜩이며 목책을 넘었다. 매화의 꽃술 부분에 있는 자가 매화검진의 변화를 주도하는 자다. 조충국이 그 자리에 있었다. "풍화(風花)!" 그가 소리쳤다. 매화검진이 원형을 그리며 천천히 움직였다. 마적들은 그 검진을 깨지 위해 달려들었다. 쨍! 쨍! 쨍! 창칼이 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검진이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으악!" "악!" 비명이 터지기 시작했다. 마적들의 비명이었다. 화산의 제자들은 더욱 기세를 올렸고 마적들은 주춤거렸다. 그들이 언제 이토록 현묘 한 진법을 상대로 싸운 적이 있으랴! "난화(亂花)!" 조충국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검진의 변화 속도를 더욱 빨리 했다. 꽃잎이 바람에 우수수 어지럽게 흩날리며 날아가듯 화산의 제자들이 갑자기 미친 말처럼 움직였다. 보기에는 산만해 보여도 그들이 나가 고 들어옴에는 정연한 규칙이 있었다. 순식간에 십 여명의 마적들이 다시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타구니에 털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놈들이!" 쾌쾌단의 단주는 노화를 터뜨렸다. "비켜라!" 그가 염왕도(閻王刀)를 앞세우고 달려나왔다. 단주쯤 되는 자이니 뭐가 달라도 달랐다. 차륜전(車輪戰)의 묘함도 조금 아는 듯했다. 그 는 소두목들을 몇 개의 길로 나눠 지정한 자들을 쉬지 않고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한 무리의 수하들을 이끌고 가장 약해 보이 는 화산 제자를 찾아 공격했다. 이번에는 화산 제자들이 쾌쾌단의 정연한 공격에 밀렸다. 특히 쾌 쾌단의 단주가 공격하는 화산 제자는 진을 이탈할 정도로 휘청거렸다 . "폐화(閉花)!" 조충국은 매화검진을 두 팔 넓이로 좁히며 쾌쾌단 단주의 공격을 받아 비틀거리고 있는 화산 제자를 도왔다. 쾌쾌단의 차륜전은 계속 되었다. 그러나 화산 제자들은 용케 버텨 내고 있었다. "어떻소? 우리 아이들이 보기 보다 잘 싸우고 있는 것 같지 않소?" 장문천은 미소를 머금으며 촌장을 바라보았다. 생각밖에 제자들은 잘 싸워 주고 있었다. 이긴다고는 장담을 하지 못해도 절대 진이 부 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장담했다. "만약 당신들이 이번 기회에 저들의 배후를 공격하면 마적들은 오 갈 때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오." 장문천이 촌장에게 슬쩍 말했다. "우리가 어찌……." 촌장은 여전히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장문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때였다. "외지의 분들께서 이토록 우리를 위해 수고를 해 주시는데 우리는 뒷짐이나 지고 있다니…… 참으로 염치없는 짓이라 생각하지 않소!" 어디에나 피 끓는 사람들은 한두 명씩 꼭 있는 법이다. 우락부락하 게 생긴 중년 사내 한 명이 팔뚝을 들어 보이며 고함을 질렀다. "맞는 말이오!" 나서는 자들은 역시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손에 잡히 는 물건을 들더니 우르르 마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문천은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마적들을 상대로 나섰으니 여 가구의 사람들은 다른 마적들을 상대로도 칼을 뽑을 것이 분명했다. 다음에는 그들의 피로 그들의 마을을 지키게 할 망정 오늘만은 그들 의 피를 면해 주고 싶었다. 장문천은 완보로 마적들을 향해 걸어갔다. 슥! 스슥! 천천히 걷는 걸음걸이였으나 그는 어느 틈에 마적들에게 달려드는 여가구의 청년들을 지나 쾌쾌단의 단주 곁에 달라붙고 있 었다. 쾌쾌단의 단주는 갑자기 나타난 인영에 크게 놀라며 염왕도를 휘둘 렀다. 장문천은 피할 생각도 않고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이 쾌쾌단 단주 의 어깨를 툭 쳤다. 염왕도를 치켜들던 쾌쾌단 단주의 안색이 흙빛으 로 변했다. "웩!" 그가 피를 쏟으며 나뒹굴었다. 툭 건드리는 것만으로 내부를 완전 박살내 버리는 무서운 내가중수 법(內家重手法)! 장문천은 산책을 하듯 한가로이 마적들 사이를 거닐며 마적들을 툭 툭 건드렸다. 마적들이 곽란(　亂)에 걸린 자처럼 발작을 하며 나뒹 굴었다. "으, 으, 으……." 쾌쾌단의 마적들이 공포에 질려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은 급히 등을 돌렸다. "산화(散花)!" 조충국이 고함을 질렀다. 화산의 제자들이 매화검진을 해체하며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달 아나는 마적들의 뒤를 쫓았다. "커악!" "칵!" 마적들의 비명이 여가구를 흔들었다. "기분이 어떠냐?" 화산으로 돌아가며 장문천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나를 죽여 열을 살릴 수 있 다면 바로 그것이 협행(俠行)이 아닙니까!" "저는 제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솔직히 검진 을 쳐라 했을 때 사숙에게 불만을 가졌습니다. 마적들을 상대로 매화 검진이라니요. 그러나 매화검진을 펼치지 않았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검에는 정이 없습니다. 죽이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장문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든 말이 맞다. 앞으로도 각자가 자신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 다." "사숙, 형천(炯天)의 말과 저의 말은 다른데 어찌 모두 옳다고 하 십니까? 형천은 사람을 죽여 기분이 좋지 않다고 했고 저는 협행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다고 했습니다." 제자 한 명이 당돌한 표정으로 물었다. "형천의 마음이 형천의 검을 결정 지을 것이고 너의 마음이 너의 검을 결정 지을 것이다. 모두 같은 검로를 걸어 가라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너희들에게 각자의 마음을 각자의 검에 충실히 담아라 고만 말할 뿐이다." 장문천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제자도 있는 듯 했고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도 있는 듯했다. 누구나 자신이 담는 크기 만큼 본다. 그리고 머릿속의 이해란 이해하지 못한 것 보다 오히려 더 나쁜 경우도 있으므로 장문천은 부연(敷衍)을 불허했다. "내가 묻겠다. 오늘의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누구인 듯 하더냐?" "조충국!"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검진을 지휘하던 제자를 가리켰다. 조충국은 얼굴을 붉혔다. "충국은 훌륭했다. 시의 적절하게 검진을 잘 운용했다. 잔머리를 잘 쓰는 자가 임기응변에 뛰어난 자가 아니다. 임기응변은 상황을 주 도적으로 돌파할 수 있는 용감한 자가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없지. 그 래서 충국은 훌륭하다. 그러나 나는 충국에게 최고의 점수는 주지 않 는다." "그럼, 누가……." 제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숙, 저는 강석신(姜石身)이 가장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적들의 집중 공세를 받고서도 끝내 검진을 지켰습니다." 제자 한 명이 말했다. 강석신이라는 제자는 쾌쾌단의 단주로부터 집중적이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제자였다. "석신도 훌륭했다. 석신이 용맹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검진은 깨어 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석신도 아니다." "석신도 아니라면……." 제자들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종관(鍾寬), 이리 오너라. 나는 오늘 최고의 공은 종관에게 돌리 고자 한다." 장문천은 성종관(成鐘寬)이라는 제자를 불렀다. "종관에게 최고의 공을?" "검진의 요체는 나의 목숨을 다른 동료들에게 맡기는 것이다. 자신 을 먼저 생각하면 절대 검진은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누가 나 를 가장 많이 잊었느냐? 나는 종관의 검로에서 그것을 보았다." 장문천이 성종관이라는 제자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아!" 제자들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오늘 부탁하고자 한다. 천 년 화산의 위업은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 나의 작은 그릇을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마음에 화산이 라는 큰 그릇을 담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제자들은 산림에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장문천은 화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제자들이 우르르 그의 뒤를 따 랐다. 제자들의 기분은 최고였다. 사숙, 장문천! 사숙조, 사부조차 검이 천외(天外)의 경지에 이르렀 음을 인정한 분이다. 그런 분을 모시고 검로를 말할 수 있으니……. "사숙, 고백할 일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늘 적들에 맞서 무척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화산의 제자로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길을 가며 제자 한 명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사숙, 장문천은 검 에 실린 마음까지 읽는 분이다. 자신의 마음도 충분히 읽었으리라 생 각되자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두려움은 자신을 돌이키는 큰 스승이다 . 죽음의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는 자는 소, 돼지와 무엇이 다르겠느 냐? 항상 검을 두려움과 조심으로 대해 너를 더 높은 자리로 앉히도 록 하라." 장문천은 제자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독려했다. "그럼, 사숙께서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겠군요?" 조충국이 물었다. "물론! 공포와 두려움으로 오금을 저린 적이 있었다. 목숨을 건지 고 나서 견딜 수 없는 수치를 느꼈지. 그 수치가 지금의 나를 키웠다 ." "믿어지지 않습니다. 사숙을 공포에 떨게 한 그 무엇이 있었다니요 ." "배교의 수괴, 명강량! 나는 그 자의 얼굴이 아직도 잊어지지 않는 다. 나는 공포에 질려 칼을 뺄 생각도 못했었지. 지금도 나는 스스로 의 나태함을 발견할 때면 그 때의 일을 떠올린다. 그렇게 생각하면 명강량이라는 자는 나에게는 무척 고마운 자라 할 수 있지. 검에 대 한 큰 발심(發心)을 주었으니……." 장문천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 서둘러 가자. 영호 사형께서 무척 기다리시겠다. 대회맹에 간 장문 사형께서 돌아오셨는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 화산까지 경신술 로 달리겠다. 근기(根氣)를 키우는 데는 육신을 곤고(困苦)하게 만드 는 것 이상 좋은 방법이 없다. 힘들다고 발길을 멈추는 놈은 용서하 지 않겠다! 알겠느냐?" "예!" 제자들이 고함을 질렀다. "가자!" 장문천은 신형을 뽑았다. 제자들이 열을 지어 검을 철컥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회맹에 갔던 장문 사형, 이건은 이미 화산에 돌아와 있었다. 장 문천은 사형, 영호준과 함께 이건을 마주 대했다. "네가 운대봉에 오른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뜻을 접게 하고 제자들에게만 매이게 해서 미안하구나." 이건이 말했다. "아닙니다. 화산으로부터 받은 몸 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두 돌려 주어야지요. 그리고 즐겁습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을 보는 것만큼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습니까." "호오, 사제가 흡족해 하다니…… 아이들의 기골이 그렇게 뛰어난 가?" 육사형, 영호준이 물었다. "제각(祭閣)을 지킬 아이도 있고 문풍을 빛낼 아이도 있습니다. 물 론 검으로 화산을 빛낼 아이도 있지요." "종사(宗師)의 기질을 말할 수 있는 아이는?" 이건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있습니다! 장문 사형도 이미 보셔서 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조충국!" 영호준이 대신 말했다. "그렇습니다. 모두 철중쟁쟁이고 특히 조충국은 백미라 할 수 있지 요." "그릇은 닦고 만들어야 그릇이지." 이건은 섭선을 흔들었다. "장문 사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 아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생각이라…… 하지만 시절이 어디……." 이건은 찹찹한 표정을 지었다. 영호준과 장문천도 침묵을 지켰다. "네가 오기 전에 영호준과 이미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회맹에서 구 대문파의 힘을 모아 구룡선, 마인거를 치기로 했다. 나는 영호준을 보내려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장문 사형 홀로 이 넓은 화산의 도량을 어떻게 이끌겠습니까? 원 래 사부께서 영호 사형을 산문 밖으로 잘 보내지 않은 뜻은 영호 사 형이야 말로 보이지 않는 화산의 문틀까지 단단히 할 분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영호 사형이 가서는 안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이런 곳에 쓰려고 배운 무공이 아니었습니까?" "사제, 이번만은 양보하게. 나의 검도 가볍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주게나." 영호준이 말했다. "도대체 내가 이곳에 남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파, 속가 의 무문이 어디에 있는 가도 모릅니다. 제각은 어떻게 살피며 청규가 어떤지도 모릅니다. 내가 화산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돌아가신 이사형도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저를 운대봉에 보냈습니다." 장문천은 강경하게 자신이 떠날 것을 고집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네. 사제는 고집을 꺾어라!" 영호준도 목소리를 높였다. "장문 사형, 영호 사형, 다시 묻겠습니다. 도대체 내가 이곳에 남 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알고 있을 테지…… 사제를 남기려 하는 이유를…… 곽부와의 일 전 이후 우리 화산의 힘은 많이 약해졌다. 나는 정말 청출어람으로 화산이 빛나기를 바라네. 사제 아니면 누가 그 일을 하겠나." 이건이 어깨를 흔들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사형, 역시 그 때문이었군요. 감히 말하건대 사형들의 생 각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저를 키운 것은 누구입니까? 나를 키운 것 은 대 화산이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스승이라 하더라도 천 년 화산 이 가르치는 것만큼 가르치지 못합니다." "좋은 스승은 천 년 화산의 위업을 보다 쉽게 물려줄 수 있네." 영호준의 말이었다. "몇 가지만 말하겠습니다. 장문 사형, 영호 사형, 저는 구룡선, 마 인거에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설마 사형들께서는 저의 패배 를 미리 점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 만약을 생각하자는 것이지." 영호준은 장문천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천하에 화산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하늘을 받치 는 화산의 기둥이 전혀 좀 먹지 않았음을…… 사형들, 좋은 스승은 좋은 나무를 만드는 자양분(滋養分)이라는 것을 나도 인정합니다. 그 러나 결국 자양분일 따름입니다. 스스로 자라는 나무가 결국 깊은 뿌 리를 내립니다. 자양분조차 스스로 찾아가는 나무……." "음……." 이건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네가 그렇게 말 할 줄 알았다. 따지고 보면 너를 보내지 않겠다는 것은 구대문파 간의 의리도 져 버리는 처사…… 구룡선, 마인거를 상대하는데 온 힘을 기울여야지. 막내 사제, 너의 말이 맞다. 날쌘 제자들을 가려 뽑아 의창에서 강호의 동도들과 합류하라." 그가 말했다. "장문 사형!" 영호준이 화를 내며 벌떡 일어났다. "앉게." 이건의 손짓에 영호준은 할 수 없이 분을 삭히며 좌정했다. "이제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마라. 장문인으로서의 명이다. 그 외 다른 말이 있느냐?" 영호준은 검미를 꿈틀댔다. 장문인인 대사형은 당연히 강호의 의리 를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우선하는 것은 화산의 이익 이었다. 화산을 생각한다면 막내 사제 보다 자신이 의창에 가야 했다 . 하지만 대사형이 장문인의 명까지 들고 나오자 불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막내 사제의 말대로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구룡선, 마인 거를 막내 사제가 앞장 서 쳐부수는…… 오히려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막내 사제의 무공은 화산에서는 이미 논(論)밖이니…… 그럼 에도 자신이 나서겠다고 부득부득 우긴 것은 노파심에 다름 아니었다 . "장문 사형, 이번 강호행에 조충국도 데려갔으면 합니다." "충국을?" "염려가 되실 줄 압니다. 그러나 큰일을 겪지 못하면 큰 인물이 되 기 힘듭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장문천의 청에 이건은 길게 생각도 않았다. "사제의 뜻대로 하라." 새끼라도 호랑이라면 호랑이가 가는 길을 걸어야 한다. 설혹 중도 에 험한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의창에 갈 제자들을 뽑은 후 조사전에 모이도록 하겠습니다. 분향 을 할 때 장문 사형을 부르겠습니다." 장문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단원홍이라는 자도 의창에 온다고 합니까?" 그가 문득 물었다. "아마 오지 않을 것일세." "그래요?" 장문천은 조금 실망한 표정이었다. "구룡선, 마인거를 처치하고 나면 능운공작을 한 번 찾아가 보게." 이건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제, 장문천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장문 사형, 감사합니다." 장문천은 깊게 포권했다. 사실 그의 마음은 구룡선, 마인거 보다 단원홍에 대한 호승지심으로 더욱 이글거리고 있었다. * * * 그 깊은 산에는 여자가 산다네. 몸에는 풀잎의 의상을 걸치고 허리에는 덩굴의 띠. 다정한 눈빛과 사랑스런 미소 온화한 성품에다 아름다운 자태 붉은 표범을 타고 아름다운 여우가 뒤를 따르네. 개나리를 수레 삼고 계수나무 깃발 달아 향기로운 난초로 수레를 싸고 두형초(杜衡草)의 향기를 내뿜으며 아름다운 꽃을 꺾어 님에게 보내고져……. 예령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줍고 있었다. 하 루 종일 개미에게 말을 붙이기도 하고 자라나는 화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그 좁은 금옥의 생활도 지루해 하지 않던 그녀였다. 하물며 무 산은……. 예령의 오감(五感)은 모든 것을 항상 새롭고 흥미롭게 받아들이도 록 만들어져 있는 듯했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도토리를 찾던 예령은 허리를 폈다. "다람쥐들아, 화를 내지 마. 너희들의 것을 가져가려 하는 것이 아 니란다. 나중에 돌려줄게." 그녀의 주위에는 서너 마리의 다람쥐들이 폴짝거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 다람쥐를 바라보던 예령의 눈빛이 이채로 반짝였다. 언제 날 아왔는지 나뭇가지에 작은 새가 앉아 있었다. 배는 하얗고 등은 까만, 그녀가 처음 보는 새였다. 머리와 꼬리에 는 두 가닥의 오색(五色) 깃이 길게 뻗어 있었다. "야!" 예령은 탄성을 터뜨렸다. 나뭇가지를 총총거리는 모양이 너 무 예쁘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리 오너라." 그녀는 손을 내밀었다. 별 기대도 않았는데 작은 새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녀의 손에 둥지를 틀 듯 앉았다. "이야!" 예령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너의 이름은 무엇이니?" 그녀가 물었다. 그러나 새가 말을 할 리 없었다. 새는 네가 내 이 름을 지어 보아라는 듯 말뚱말뚱 예령을 쳐다보기만 했다. "음……." 예령은 생각에 잠겼다. "좋아! 무척 재미있게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낙조(樂鳥)라 해 야겠다. 낙조!" 그녀가 새를 불렀다. 오색조는 예령의 부름에 답이라도 하듯 뽀르 르 팔을 타고 예령의 어깨에 앉았다. "나를 따라가겠니? 파파와 신 아주머니에게 자랑해야겠다." 예령은 신바람을 내며 도화와 신화정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낙 조는 예령의 움직임에도 동요(動搖) 없이 점잖게 앉아 있었다. 예령이 수풀을 헤쳐 나갈 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여러 가지 고운 빛깔로 반짝였다. 낙조는 하늘로 치솟고 예령은 고개를 들었다. "아!" 그녀는 다시 탄성을 터뜨렸다. 전신이 채색(彩色)으로 빛나 는 새였다. 채색조(彩色鳥)는 예령의 머리 위를 천천히 선회했다. 하 늘로 치솟은 낙조는 채색조 주위에서 재롱을 떨며 날개를 퍼덕였다. 예령은 채색조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그 때문에 매 한 마리가 채색조와 낙조를 노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가끔 금수(禽獸)의 화려 함은 자신에게 도움을 주기 보다 포식하는 맹수(猛獸)에게 더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 채색조의 화려함은 먼 곳에서도 잘 띄어 매를 부 른 듯했다. "도망 가!" 뒤늦게 매를 발견한 예령이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쳤다. 그러나 채 색조는 도망치지 않았다. 채색조는 매를 마주보며 날개를 폈고 낙조 는 예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예령은 낙조를 소매에 숨기며 발을 동동 굴렀다. 채색조는 매의 상 대가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저 날카로운 부리, 부리부리한 눈…… 휙 ! 마침내 매는 선회를 멈추고 채색조를 향해 쏜살같이 낙하(落下)했 다. 그때였다. 휘-익! 휘-익! 마치 사람이 날카롭게 휘파람을 부는 소리와 같은 소리를 내며 또 한 마리의 새가 나타났다. 채색조 보다 반절은 커 보이는 새였다. 까 만 깃털에 날개와 몸통을 따라 흰 선이 뚜렷한 새였다. 흑백조(黑白鳥)가 나타나자 매와 싸우려던 채색조는 쉽게 예령의 어깨로 후퇴했다. 푸드득! 흑백조와 매가 발톱을 세우며 얽혔다. 승부는 단순간이었 다. 흑백조는 자신 보다 덩치가 몇 배 큰 매를 맞아 발톱으로 배를 가르고 부리로는 한 번에 날개를 꺾어 버렸다. 매가 팽이처럼 회전하 며 땅으로 곤두박질했다. 휘-익! 휙! 흑백조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허공을 선회했다. 낙조는 예령의 소 매에서 빠져 나왔다. 그들이 같은 소리로 화답하며 하늘로 치솟았다. 흑백조는 하늘을 지켰고 채색조와 낙조는 예령의 주위를 날며 화려 한 비행을 자랑했다. 예령은 새들의 군무(群舞)에 취해 넋을 놓았다. "앗! 너무 놀았구나." 겨울을 준비하는 무산의 해는 너무도 짧았다. 벌써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예령은 새들과 작별을 고하고 서둘러 목채로 발길을 돌렸다. 이야 기도 하지 않고 몰래 빠져 나온 터였다. 지금쯤 파파와 신 아주머니 가 자신을 찾느라 정신없을 것이 분명했다. "깊은 산에는 아이들만 잡아가는 귀신이 있다고 파파가 말했는데… …." 도토리를 찾아 걷다 보니 생각보다 멀리 온 듯했다. 늑대의 울음도 들리고…… 은근한 두려움이 들었다. 해가 꼴깍 넘 어가기 전에 목채로 돌아가야 했다. 예령이 수풀 사이를 정신없이 헤쳐 갈 때였다. "어!" 예령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놀라 주춤 뒷걸음질 을 쳤다. 수풀 속에서 거한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느닷없이 예령의 팔을 잡았다. 예령은 너무 놀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토끼처럼 눈을 뜨며 사내의 손에서 팔을 빼려 했다. 그러나 거한은 예령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아가씨, 많이 찾았습니다." 거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한은 혼자만이 아니었다. 곧 이어 수풀 속에서 칼을 든 삼사십 명의 장한들이 더 모습을 드러냈다. 예령은 겁먹은 얼굴로 그들을 살폈다. 다행히 아이들을 잡아가는 산귀(山鬼)는 아닌 듯했다. 예령의 팔을 잡은 거한이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아가씨,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천화원에서 온 천위대주입니다. 원주의 명을 받고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거한이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는 바로 국태열이었다. "천화원?" "설마 원주를 모르시지는 않겠지요?" "아! 백발 아저씨…… 물론 알고 있지요. 단 아저씨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예령은 도화로부터 백발 아저씨의 이름이 단원홍이며 천화원의 원 주라는 사실을 들었다. 그녀는 단원홍에 대해서는 금옥의 파파와 할 아버지 다음으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조금 안심은 되었다. "아가씨를 모셔라!" 국태열이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천위대의 수하들이 예령을 잡았 다. "더러운 배교놈들! 감히 천화원이 어디라고 그곳까지 와서 난동을 부려!" 국태열은 눈을 부라렸다. "놈들의 목채를 철저히 포위하라! 한 놈도 도망가게 해서는 안된다 !" 그가 소리쳤다. 천위대의 무사들이 사슴을 발견한 늑대처럼 뛰었다. "감 아저씨……." 예령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감악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 다. 왜 그녀의 주위에는 만나면 싸우겠다는 사람밖에 없는지…… 앞 으로 싸움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예령은 꼭꼭 숨어 있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감악은 차마 예령을 바라보지 못했다. 실수였다. 잠깐 긴장을 푼 것이 화근이었다. '나 같은 놈이 무슨 호교신장…… 성녀를 지키는 일에 한 눈을 파 는 호교신장도 있었던가? 이렇게 어이없이 성녀를 적에게 뺏기다니.' 그는 간이 타는 초조함 속에 자신을 질책했다. 죄스러워 하기는 신화정이 더했다. 그녀는 도화와 함께 예령을 가 까이서 모셔할 책임이 있었다. "죽일놈들!" 국태열은 째지는 목소리를 내질렀다. "목과 함께 천화원을 갈 테냐? 몸뚱이는 여기 남겨두고 목만 천화 원으로 갈 테냐? 선택하라!" 그가 두 눈을 희번득거렸다. 슥! 장탄과 고명상은 누구 먼저라 할 것 없이 칼을 뽑았다. "성녀를 내려놓아라!" 그들이 한소리 고함과 함께 국태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놈들 봐라!" 국태열은 자신의 칼을 손바닥으로 철컥 쳤다. 너 따위 것들은 칼도 필요없다는 듯 그는 자신의 칼을 수하에게 던졌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장탄과 고명상을 맞았다. 파팟! 장탄과 고명상은 국태열의 좌우를 협공했다. "흥!" 국태열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슬쩍 몸을 비틀며 주먹을 내 질렀다. 바위 같은 국태열의 주먹이 바람을 갈랐다. 천화원의 무공 중 하나 인 사자철권이었다. 원래 장탄과 고명상의 무공은 그들의 전대 명두인 추대괄이나 장호 보다 못했고 국태열의 무공은 사패 다음이라 해도 무방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감악이나 유공경, 신화정이 도와 줄 틈도 없었다. "으악!" "악!" 장탄과 고명상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묶어라!" 국태열이 거드름을 피우며 명했다. 천위대의 수하들이 몸을 뒤척이 고 있는 장탄과 고명상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포승을 엮었다. 감악은 이를 악물었다. 누구도 국태열의 상대가 되지 않을 듯했다. 상대가 가능한 자는 도화라는 여자가 고작…… 그러나 일이 틀어지 도록 되어 있었는지 지금 도화라는 여자는 성녀를 찾아 목채를 나가 고 없었다. 제때에 온다고 해도 원래 천화원의 가솔이었던 그녀가 배 교를 위해 싸워 줄지는 의문이었다. 부끄러운 일이나 성녀의 신력에 한 번 더 기대를 걸고자 했다. 하 지만 이번에는 그것도 어려울 것 같았다. 국태열은 한고라는 자로부 터 이미 성녀의 신력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성녀를 수하 들에게 맡겨 놓고 절대 성녀를 바라보려 하지 않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싸우는 만큼 싸워볼 도리밖에……. 명강량은 칼을 잡았다. 그때였다. "어이, 어이! 명옹의 신력은 위대하기도 하도다! 어찌 이 깊은 무 산 골짜기에 죽일 놈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걸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쿵 ! 하며 산림이 울리며 아름드리 나무가 우르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 다. "명옹의 신력은 위대하고 위대하다! 칼을 든 놈들은 모두 우리의 적! 죽이고 또 죽이리라!" 노래로 들려오는 걸직한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국태열은 안색을 찌푸렸다. "세상에 미친 놈들이 한둘은 아니군. 내가 어찌 이 깊은 무산 골짜 기에서 미친 놈을 만날 줄 알았어랴! 오두일(吳頭一), 너는 아이들을 몇 명 데리고 가서 저놈의 입을 찢어 정신을 차리도록 해 주어라!" 그가 관자놀이가 불쑥한 수하를 향해 소리쳤다. 오두일이라는 자가 서너 명의 천위대 수하를 이끌고 목소리가 들리 는 곳으로 달려갔다. 곧 이어, "으악!" "악!" "커억!" 비명이 무산을 흔들었다. 국태열의 안색이 변했다. 서로 다른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가며 죽 는 자를 그는 본적이 없었다. 비명은 천위대의 수하들이 내지른 것이 분명했다. "명옹의 신력은 위대하고 위대하다! 배 고플 때 때맞추어 말랑말랑 한 뇌수를 내려주시니…… 아니야, 아니다! 어흠, 험! 사실 뇌수는 별로 맛이 없지. 뭐니 뭐니 해도 팔딱팔딱 뛰는 간이 최고야. 어디 통통한 간은 없나. 헤헤헤!" 나무 사이로 불쑥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국태열도 크다지만 불 쑥 나타난 거한 보다는 작았다. 충혈된 눈, 어깨에는 대월을 걸치고 한 손에는 네댓 개의 수급을 쥐고 있었다. 머릿채를 붙잡힌 채 흔들 거리고 있는 수급은 선명한 핏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오두일 을 비롯한 천위대 수하들의 목이었다. 능운공작의 친위대인 만큼 천위대원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른다.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돌연 나타난 거한에 대해서는 간이 쿵 떨어지고 있었다. 유도(幽都)의 수문장이라는 토 백(土伯)이 나타난 느낌이었다. "누구냐?" 국태열은 흉광을 번쩍였다. "나를 묻지 마라. 나를 묻지 마라. 나는 나의 이름을 오래 전에 잊 었다." 대월을 흔들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자는 두 말 할 필요 없이 전우삼 이었다. "쳐라!" 국태열이 수하들에게 전우삼을 공격하도록 명했다. 천위대 수하들 이 삼면으로 달려들며 전우삼을 공격했다. 전우삼은 수급들을 허공에 던지며 무지막지하게 대월을 휘둘렀다. 퍽!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피비린내가 훅 치솟았다.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물러나라!" 국태열이 전우삼을 취해 가며 소리쳤다. 비록 성품(性品)은 개차반 이라 하나 무재(武才) 하나는 단원홍도 인정해 주는 국태열이었다. 국태열의 검이 돌풍을 일으키며 전우삼을 쓸어갔다. 천화원의 비전 절기 중 하나인 남해 청조각의 해선와가 오랜만에 강호에 선을 보이 고 있었다. "흐흥!" 전우삼은 제법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혈안을 반딱였다. 팟! 그가 대월과 함께 국태열의 검영 속에 신형을 던졌다. 쏴 - 아! 나뭇잎이 선풍에 몸을 맡기며 천공으로 치솟았다. 무산의 나무들은 갑자기 불어오는 폭풍에 몸을 부대꼈고 서 있던 자들은 경 기의 여파를 피해 다급히 물러났다. 쨍! 쨍! 쨍! 그림자는 백변(百變)으로 움직여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속에 칼 부딪히는 소리만 격렬했다. 천위대의 수하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승부가 쉽게 날 것 같지 않 았다. 감악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슬며시 주위를 살폈다. 모두 갑 자기 출연한 거한에 정신을 쏟고 있었다. 앞 뒤 사정에 빠르기로는 자신 보다 몇 배 나은 청기명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넋 나간 사람처럼 서 있었다. 감악은 청기명사를 부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둘 다 움직이면 적 들의 시선이 집중될 게 뻔했다. 그는 슬쩍 몸을 움직였다. 혼란을 틈 타 성녀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도 옮기지 못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난마처럼 얽혀 있던 인영이 갈라졌다. 천위대 수하들의 안색이 일제히 흙빛으로 변했다. 입가에 피를 흘 리며 물러나고 있는 자는 그들의 대주, 국태열이었다. "으, 으……." 국태열은 신음을 흘렸다. 그는 도저히 자신의 패배를 믿지 못하겠 다는 표정이었다. 검을 세우고 다시 일전을 벌이려 했으나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권장을 주고 받을 때 손목 어디의 근골이 상한 듯했다 . "헤헤헤, 신나게 손발을 움직였더니 배가 미치도록 꿀꿀거리는군. 배가 등에 붙어버렸어. 어디, 어디……." 전우삼은 정말 국태열의 간을 빼 먹을 듯 손을 내밀었다. 국태열은 입가에 피를 줄줄 흘리며 뒷걸음질만 쳤다. 생전에 이런 괴물을 만 나리라 생각이나 했으랴. 전우삼은 손을 가볍게 뒤집었다.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전우 삼의 손이 국태열의 심장을 찍었다. 국태열은 죽을 힘을 다해 나귀가 구르는 수법으로 몸을 피했다. 간발의 차이로 전우삼의 손은 국태열 의 옷만 찢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음은 정말 목숨을 장담할 수 없었 다. "잘도 구르는군." 전우삼은 발을 들어 땅바닥을 뒹구는 국태열을 마치 사천왕(四天王 )이 마군(魔群)을 짓누르듯 짓밟으려 했다. 국태열은 전우삼의 발을 피해 열심히 무산을 떼굴떼굴 굴렀다. '아, 아…….' 국태열의 눈빛이 점점 절망으로 흔들렸다. 짓밟혀 송충이처럼 진물 을 내며 터져버리는 것 외는 다른 선택이 없을 듯했다. 전우삼은 발을 치켜들고 더 이상 뒹굴며 달아날 곳을 찾지 못한 국 태열은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도 그들 도와줄 생각을 못했다. "헤헤헤, 생각을 바꾸었다. 잘근잘근 납짝하게 밟아 육포로 만들어 야지." 전우삼은 발을 번쩍 들었다. 그 순간! "멈추세요!" 날카로운 고함이 전우삼의 행동을 막았다. "뭐야?" 전우삼은 눈을 치켜 떴다. 만약 어린 계집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전우삼의 발길질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때아닌 어린 계집 의 목소리가 전우삼은 발길질을 멈추게 했다. 예령이었다. "죽이지 마세요. 그분은 단 아저씨가 보낸 분이란 말이에요!" 그녀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이런, 젠장! 솜털도 제대로 나지 않은 계집이 누구보고 이래라 저 래라 하느냐? 본좌는 누가 말리면 더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지. 일단 이놈을 육포로 만들어 놓고…… 한 점 나누어 줄 테니 더 이상 칭얼 대지 마라. 육포 맛을 보고 나면 누구 또 밟을 사람이 없나 하고 찾 게 될걸!" "멈춰!" 예령은 악을 썼다. "멈추세요. 명이에요!" 예령과 함께 또 한 명의 여자 목소리가 무산을 울렸다. 청기명사, 신화정이었다. "넌 또 웬 계집이냐? 명? 헤헤헤, 누구의 명? 이놈이 네년의 서방 쯤…… 어, 어, 어!" 신화정을 바라보던 전우삼이 한 쪽 발을 든 채 주춤댔다. 그의 눈 이 무산을 담을 듯 커지고 있었다. "헤헤헤! 서, 서, 설마, 화, 화, 화정은 아니겠지. 헤헤헤, 헤헤… …." 전우삼은 안면 근육을 심하게 씰룩거렸다. 그 어떤 세월의 풍상도 그녀의 얼굴을 잊게 하지 못하리! 와사곡에서 눈물로 작별을 고했던 그녀! 신화정은 눈을 부릅떴다. 오랜 세월의 회한을 참기 위해서였다. 어 찌 잊으리! 와사곡에서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보내기 싫었지만 보내 야 했던 그대! 눈물을 참기 위해 눈을 부릅떴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그 러나 눈물은 절로 넘치고 있었다. 그녀의 부릅뜬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성녀를 잊지는 않았겠지요? 명이에요. 성녀의 명…… 물러나세요! " 그녀가 감정을 숨기며 냉랭하게 말했다. "서, 성녀? 누가? 저 계집…… 아니, 아니, 저 어린 아가씨…… 화 , 화정…… 화정……." 전우삼은 예령과 신화정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했다. 마 치 복잡한 저자 거리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 버린 아이와 같았다. "아, 아!" 전우삼은 깊은 탄식을 토해냈다. 성녀에게 오체투지로 인사를 드려 야 했고 화정도 뼈가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주어야 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사지에 힘이 점점 빠졌다. 땡그랑! 손에서 대월이 떨어졌다. "헤헤헤, 에헤헤헤……." 전우삼은 실성한 자처럼 히죽대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명옹, 명옹! 나와 보시오! 빨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게 ……." 그가 암천을 우러르며 중얼댔다. - "강량, 오랜만이에요. 주강의 꽃배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늙은 자라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악약은 다가와 명강량의 팔에 어깨를 기댔다. 순간, 아름다운 이십 여세의 여인은 간데 없고 작은계집이 명강량 의 앞에 서 있었다. 대화로의 불은 창궁(蒼穹)으로 치솟고 꽃잎은 휘날렸다. 그 나무 아래 명강량은 서 있었다. 그리고 작은계집은 저 곳에 서 있었다. '성녀라…….' 가슴의 통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동안 시간의 역류 속에 허우적 된 듯했다. 너무도 닮은 모습이었다. 대화로 앞에서 거스름을 날리며 불장난을 치던 그 작은계집! 하지만 여기는 무산이었고 떨어지는 것은 꽃잎이 아니라 낙엽이었 다. 꿈에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멀고 험하다. 명강량은 상처로 지지 직거리며 마음의 문을 닫았다. 거칠게 서둘러 닫느라 조금은 틈새가 생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무 심함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화정, 화정…… 도대체 이게……." 전우삼은 여전히 허둥대고 있었다. "아란하……." 명강량은 아란하를 불렀다. 구룡선과 팔륜거는 길이 좁아 무산의 산길을 오를 수 없었다. 전우 삼과 아란하만이 그를 따르고 있었다. 아란하는 명강량의 곁에 섰다. "옷깃을 잡아 다오." 이번에는 머리가 아니라 옷깃이었다. 아란하는 명강량의 뒤에 서 너덜너덜한 금의의 주름을 폈다. 명강량은 목채가 있는 장방형의 분지로 나섰다. "명옹!" 전우삼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잊었던 급한 일을 기억한 사 람처럼 뛰었다. 부른 사람은 명강량이었는데 달려가는 곳은 딴 곳이 었다. 명강량이 나타나자 그는 비로소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를 깨달은 듯했다.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화정의 곁이었다. "아이고!" 전우삼은 화정을 끌어안으며 고함을 질렀고 다른 이들은 모두 시선 을 명강량에게 모았다. "며, 명옹……." 감악의 눈동자가 붉어졌다. 틀림없었다. 전교영기와 신장도로 천하 를 종횡 하던 저 모습…… "명왕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호남 명두, 감악이 명옹을 뵙습니 다!" 오랜만에 외치는 함성이었다. 감악은 격동에 찬 목소리로 부복했다 . 죽었다던 명옹이 무산으로 오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린 성녀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 말이 사실인지 믿기 힘들어하던 명두들이다. 하지 만 감악이 눈물을 떨구며 부복하는 것을 보면 명옹임이 확실한 모양 이었다. "섬서 명두, 유공경이 명옹을 뵙습니다!" 유공경이 부복했다. "사천 명두, 장탄이 명옹을 뵙습니다!" "강서 명두, 고명상이 명옹을 뵙습니다!" 결박을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장탄과 고명상은 목소리만 으로 크게 인사했다. 신화정은 전우삼의 넓은 품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명옹 의 출현을 듣자 그녀도 부복을 하기 위해 전우삼의 품에서 빠져 나오 려 했다. 그러나 전우삼은 그녀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만있어! 가만 있어라구! 나중에 인사하면 되잖아! 나중에…… 아이고! 화정……." 전우삼은 화정의 얼굴에 자신의 볼을 비비며 황소 같은 눈물을 떨 구었다. 오랜 해후(邂逅)로 모두 제 정신이 아니었다. 아란하까지 눈물을 글썽였을 정도니……. 하지만 정작 그 만남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명강량은 냉랭했다. 그는 감악 등은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국태열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어수선할 때 살 길을 찾아야 했다. '배교에 이런 놈들이 있었다니…… 살아날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 법이 있다면…….' 국태열은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그가 전력을 다해 개구리처럼 뛰 었다. 명강량을 두려움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고 있는 예령을 향 해서였다. 국태열은 예령을 붙잡고 있던 수하들을 밀치며 예령의 목에 서슬 푸른 비수를 갖다 댔다. 그는 알고 있었다. 배교도들이 그들이 성녀 로 모시는 여자를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가를……. 금옥의 아가씨를 인질로 잡았다는 소식이 원주의 귀에 들어가면 난 리가 나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후가 아니라 지금이었다. 일단 살고 봐 야 했다. "하하하! 더러운 배교…… 헛!" 국태열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흰 선이 번쩍하며 섬광 보다 더 빠르 게 그의 심장을 찔러 오고 있었다. 그는 다급히 몸을 비키려 했다. 그러나 흰 선은 너무도 빨랐다. "아!" 그가 비명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국태열의 뒤에 서 있던 두 명의 천위대 수하들도 비명을 터뜨렸다. 흰 선은 백사(白蛇)처럼 움직여 한꺼번에 세 명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아, 아!" 예령은 놀라 조막손을 모았다. 슥!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선이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명강량의 팔에 찬 비구를 향해서였다. 흰 선은 천음검이었다. 퓨퓨퓨퓨퓨…… 국태열을 비롯한 두 명의 천위대원의 심장에서 피 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명강량은 다시 한 번 천음검을 번뜩였다. "으악!" "악!" "아악!" 천음검이 하얀 이를 번뜩이며 무자비하게 천위대 수하들을 도륙했 다. "멈추세요! 단 아저씨가 보낸 사람들이란 말이에요!" 예령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는 천위대원 한 명을 몸으로 막았다. 그 러나 작자의 몸도 영사처럼 움직이는 천음검에 찔려 나무에 쿵 처박 혔다. "멈춰요!" 예령은 악을 썼다. 명강량은 천음검을 거두었다.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 다리를 동동 거리는 예령을 바라보았다. 예령도 애원하는 눈빛으로 명강량을 바라보았다. 명강량과 예령의 눈빛이 얽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한동안 침묵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짧은 시간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에게는 영겁처럼 긴 시간이었다. 일순간, 명강량을 바라보던 예령의 표정이 갑자기 해쓱해졌다. 그 녀의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아!" 예령은 짧은 신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황급히 명강량의 시선 에서 자신의 시선을 뗐다. 이마와 콧등에 식은땀이 촉촉했다. 아란하가 예령의 곁으로 다가갔다. "성녀라고 했지요? 전대 성녀를 꼭 닮았군요. 두려워 마세요. 이제 우리들이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예령을 어머니처럼 껴안았다. 예령은 아란하의 품에서 힐끔 명강량을 다시 보았다. 명강량은 뒷 짐을 지고 암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란하는 몰랐다. 예령이 두려워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어머니의 호교신장임을……. "화정, 화정…… 나는 늙었는데 너는 예전과 똑 같구나." "명옹이시여! 왜 이제야 나타났습니까?" 만난 자들은 만남의 기쁨 속에 서로를 불렀다. 그 틈을 타 살아 남은 천위대 수하들은 대살성이 다시 마수를 뻗치 기 전에 죽을힘을 다해 달아났다. 명강량은 원래 자잘한 곳까지 칼을 뽑는 자가 아니다. 아란하는 달 아나는 자에게 칼을 휘두르는 여자는 아니었고 전우삼은 화정과의 해 후로 다른 정신이 없었다. 달아나는 천위대원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성녀, 날씨가 찹니다." 아란하는 예령을 꼭 껴안고 산을 내려갔다. 아란하의 손을 잡고 가 며 예령은 연신 명강량에게 시선을 던졌다. 명강량의 시선은 암천에 고정되어 있었다. 바람 부는 어둠 속에 달은 차가웠다. 우 - 우 - 우 - 피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발광을 하는 무산의 밤이었다. - 그날 밤, 예령은 어머니를 불렀다. 꿈속의 은자, 어머니는 그녀 의 부름에 대답했다. "어머니, 나는 그분을 만났어요. 어머니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두려워하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잖아요. 두려워하지 않 으려 했어요. 하지만 두려웠답니다. 마음의 뿌리가 닿지 않았어요. 전혀 마음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을까 요? 나는 그분이 두려워질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령은 물었다. "나의 귀여운 아기……." 어머니는 예령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 말 외에는 다른 아무말도 하 지 않았다. * * * - 사천 분타의 괴멸로 인해 호북 분타주가 방주께 전합니다. 삼협(三峽)을 넘어 온 급전(急傳)입니다. 모일에 무산에서 천화원의 천위대는 배교의 잔당들과 충돌을 했습 니다. 배교도들을 소탕하려는 순간, 배교를 응원하는 두 명의 마물이 나타나 다시 싸움을 벌여야 했다고 합니다. 결과는 천위대주 국태열 의 패사, 천위대원들은 대부분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살아 남은 자가 경황없이 전하기를……. 구룡선과 마인거는 배교와 연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배교를 응원하던 두 명의 마물은 배교도들과 무척 가까워 보였고 또한 배교도들은 그 두 마물 중 한 명에게 배교 수괴의 칭호인 명옹 이라는 호칭까지 붙였다고 합니다. 또한 두 마물이 성녀라는 어린 계 집을 대하는 태도가 예사롭지 않고…… 더 놀라운 것은 그 두 마물과 배교도들이 어울려 돌아간 곳은 바로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구룡선, 마인거였다고 합니다. 구룡선과 마인거가 배교와 연관이 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살아 남은 천위대원의 보고가 공포에 질려 워낙 횡설수설하고 먼발치에서 숨을 죽이며 본 일이라 자초지종을 상세히 알려 드리지 못함을 양해 바랍니다. 하나 앞뒤가 전혀 어긋남이 없어 신빙성이 없 다고는……. 추측하건대 구룡선, 마인거가 사마외도들을 규합하는 과정에 배교 도 끌어들이지 않았나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배교도 들이 두 마물 중 한 명에 대해 명옹이라 호칭한 것에 대해 심히 마음 에 걸립니다. 공포에 질려 잘못 들었기 때문이 아니냐며 몇 번을 되 물었으나 살아 남은 천위대원은 그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쥐 잡을 힘도 없는 하오문의 어린 마녀에 대해 두 마물이 상 전처럼 조심스럽게 대했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천위대주, 국태열까지 아이처럼 다룬 마물들입니다. 힘의 논리로 지위를 결정 짓는 사마외도의 행동으로서는 도저히 상식 밖입니다. 배교와 구룡선 , 마인거의 깊은 연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지금 당장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은 없고 삼협의 동도들과 함께 조사를 시작할 생각입니다. 조사가 이루어지는 대로 다시 보고 드리 겠습니다. 호북 분타에서 개봉 총타로 올라가는 개방의 칠결전이었다. 호북 분타주는 구룡선, 마인거와 배교의 연관을 조사한다고 했으나 그는 조사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구룡선, 마인거는 자신들이 배교도임을 한 번도 숨기려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목소리 높여 알리지 않았을 뿐……. 이제 그들의 성녀까지 동승(同乘)했으므로 숨기고자 해도 숨길 수 없는 처지였다. 성녀에 대한 의례(儀禮)는 그들, 배교도들만이 하는 것이었으므로……. -제5권에 계속 암왕 5 ☞ 차 례 ☜ ▶ 제32장 마교(魔敎) ▶ 제33장 전야(前夜) ▶ 제34장 혈류(血流) ▶ 제35장 초설(初雪) ▶ 제36장 낭림(狼林)> ▶ 제37장 파문(破門) ▶ 제38장 기로(岐路) ▶ 제39장 비천(飛天 ☞ 일러두기 ☜ * eBook에서는 한자 지원이 되지 않는 글자가 있으므로 빈 공간이 생 길 수 있음을 밝힙니다. 제32장 마교(魔敎) 양백은 가슴에서 손을 떼고 어깨를 폈다. 타랍하는 손수건을 꺼내 양백에게 건넸다. "왜 고집을 부리십니까? 마혈(麻穴)을 점하면 될 것을……." 그는 안색을 찌푸렸다. "하늘이 주신 고통일세. 피해서 쓰겠나." 양백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고황으로 인해 불쑥불쑥 찾아오는 고통……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양백은 고통을 줄 일 수 있는 마비산이나 점혈수법을 절대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보주는 참으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세월이 지나면 지난날의 과오( 過誤)도 추억으로 미화(美化)시키는 것이 사람인데……." 타랍하는 알고 있었다. 양백이 고통을 그대로 받고 있는 이유를… …. 양백은 배교가 어려울 때 천축으로 훌쩍 떠나버린 일을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자책하고 있었다. "젊었을 때는 몰랐었다. 아니야. 몰랐던 것이 아니라 모른 척 지내 려고 무척 노력을 했었지. 상단을 이끌고 정신없이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바쁜 일도 없고…… 몸은 현세에 있으나 마음 은 저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더 많고……." 만추를 날려보내는 싸늘한 바람이 양백의 머리칼을 쓸었다. "배신을 그토록 가슴 아프게 느낀다는 것은 배신으로 잃게 된 뼈저 린 그 무엇이 있다는 뜻인데…… 보주께서는 배교와 명왕에 대해서는 별다른 집착을 보이시지 않은 줄 압니다.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뼈 저린 그 무엇이……." "나의 가장 즐거웠던 한 때…… 타랍하, 나는 잊지 못한다. 분하에 서 성녀를 모셨을 때의 즐거움을…… 그 맑고 고운 눈빛, 술을 한 잔 드시고는 목 높여 노래도 불렀었지. 타랍하, 분하를 흐르던 그 배에 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순백(純白)의 깃발이 있었던 게 야." "보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성녀라는 분이 더욱 보고 싶군요. 도 저히 볼 수 없음을 알지만……." "모르는 일이다. 타랍하, 양백이라는 자는 필부(匹夫)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필부를 본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내가 죽음을 두려 워하지 않는 것은 혹시 저 세상에서는 성녀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 는 마음에서지. 껄껄껄!" 양백의 웃음이 마른 바람 속에 공허하게 흔들렸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 저 세상에서 성녀라는 분을 만나면 제 이야기도 좀 해 주십시오. 보주의 마음에 이렇게 깊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분이 있다니…… 꼭 뵙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마." 양백은 뱃전에서 등을 돌렸다. "물소리가 거세군요." 타랍하는 양백의 등 뒤에 섰다. "재접봉에 간 아이들은 위령비를 세우는 일을 끝내는지 모르겠다." "지금쯤 끝냈을 것입니다." "이틀 후에 출발을 준비하라." "알겠습니다." 타랍하는 머리를 숙였다. 머리를 숙이며 그는 기형도의 칼잡이를 잡았다. 도신이 달빛에 반짝 빛을 뿌렸다. 순간, 쏴아! 하며 황하의 물결이 치솟았다. 물방울이 달빛에 비쳐 보석 같은 빛을 뿌리며 양백과 타랍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도광이 차갑게 빛났다. 다섯 명의 암습자였다. 그들은 황하를 솟구치며 등을 돌린 채 있는 양백과 타랍하를 공격해 왔다. 양백은 고개를 돌렸다. 그 보다 더 빨리 타랍하의 기형도가 빛을 뿌렸다. 타랍하는 이미 암습자들이 다가옴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양백의 등 뒤를 지키고 섰던 것이다. 쨍! 쨍! 쨍! 기형도와 다섯 자루의 칼이 허공에서 거칠게 얽혔다. 체구는 작아도 타랍하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암습자들은 비틀거 리며 신형을 착지했다. 양백은 암습자들의 출현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찾아올 줄 알았다. 팽해만이 보낸 자겠지?" 그가 무심한 눈빛으로 물었다. 암습자들은 당연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눈짓을 보냈 다. 팟! 그들이 다시 뱃전을 박찼다. "승룡방주는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었군!" 타랍하가 냉랭하게 소리치며 그들을 맞서 갔다. 쨍! 쨍! 쨍! 타랍하의 기형도는 호랑이의 발톱 보다 더 빨랐고 날카로웠다. 암 습자들은 타랍하의 말대로 타랍하를 일개 거부의 보표 이상으로는 생 각하지 않았다. 천하제일상단을 거느린 자의 보표이니 다른 보표들과 는 조금 다르기는 하겠지만……. 하지만 그 이상이었다. 암습자들은 몇 합을 버티지 못하고 손에서 칼을 잃어야 했다. 타랍 하가 기형도의 요철(凹凸)을 이용 암습자들의 칼을 전부 동강내 버린 것이다. 암습자들이 선수(船首)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은 싸움 같은 싸 움 한 번 못하고 패배를 시인해야 했다. 할 수 있는 일은 상대의 실 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무턱대고 명을 내린 자에게 욕을 퍼붓는 것밖에 없었다. 타랍하는 기형도를 허리에 걸쳤다. "달아날 자신이 있으면 달아나라." 그가 한쪽 발을 뱃전에 걸치며 말했다. 타랍하의 그 같은 행동은 암습자들을 더욱 위축되게 했다. 암습자 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달아날 생각을 못했다. "너희들은 살수가 아니다. 살수라면 실력의 여하를 불문하고 실패 했을 경우 자결을 하든가 무조건 달아나는 것이 상식이다. 그들은 습 관이 되도록 그렇게 훈련을 받지. 따라서 너희들은 승룡방의 무사들 이다. 맞느냐?" "……." 암습자들은 또 다시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내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보주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경우……." 타랍하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뱃전의 나무판을 뜯었다. "너희들의 머리통은 전부 이런 꼴이 될 것이다. 대답할 기회는 우 측 놈부터 주겠다." 그가 뜯은 나무판을 솜처럼 쥐어짰다. 암습자들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양백이 나섰다. 그는 묻거나 하지도 않았다. "팽해만에게 가서 전하라. 싸움을 원한다면 싸워 주겠다고…… 단 지 오늘처럼 경망스럽게는 행동하지 말라고 해라. 황하 대상련의 힘 은 그렇게 약하지 않으니……."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후의 일은 이후의 일이고, 양백이 의외로 순순히 자신들을 놓아 줄 것 같아 보이자 암습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타랍하 가 다시 그들을 물고 늘어졌다. 추측이 백이면 백 다 맞는 법은 없으 니……. "너희들을 보낸 자는 학대통이겠지. 같이 대답하라. 입을 닫고 있 는 놈은 죽는다. 말하라!" 타랍하는 기형도를 툭 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마, 맞습니다!" 암습자들은 입을 모았다. 타랍하는 암습자들을 향해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암습자들은 꽁지에 불붙은 쥐처럼 허겁지겁 황하의 물 속으로 뛰어 들며 사라졌다. "정말 싸울 생각이십니까?" 타랍하가 물었다. "호상련(護商聯)은 이런 일을 대비하기 위해 준비된 자들이 아니었 더냐." 양백이 씁쓸이 말했다. 호상련은 황하 대상련을 지키는 자경대(自 警隊)다. "호상련은 승룡방의 상대로 힘듭니다." "알고 있다. 싸워서 이길 수 없지. 호상련은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 만 하면 제 역할을 다 하는 게야. 중원의 시선이 황하로 쏠린다면 팽 해만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소요를 책임질 자는 팽해만이 될 테니… … 믿는다. 능운공작부터 팽해만을 제지하고 나설 것이다." "음…… 그렇게 되겠군요. 관부도 나설 테고…… 보주, 저는 어떻 게 해야 합니까?" "왜? 호상련과 어울려 팽해만과 싸우고 싶나?" "오래 전부터 사패의 무공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만 두어라. 이틀 후의 여행이나 준비하라. 사패와 싸울 기회는 앞으로 많다." "알겠습니다." 타랍하는 아쉬움을 숨기며 머리를 숙였다. "벌써 따뜻한 차가 그리운 계절이구나. 들어가자." 양백은 선실로 향했다. 그때였다. 양백과 타랍하는 동시에 시선을 돌렸다. 황하에 갑자기 장엄한 음률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박판, 갈고, 비파, 강적……. 여러 가지 악기들이 뒤섞여 들려 오는 그 소리는 사람의 심혼을 한 순간에 빼앗기 족했다. 그 때문에 양백과 타랍하는 동시에 고개를 돌린 것이다. 음률은 온갖 애상(哀想)들을 다 떠올리게 하며 점점 양백이 탄 배 를 향해 다가왔다. 양백은 음률에 마음을 완전 뺏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다가오는 배를 살폈다. 십 여명 정도를 태울 수 있는 작은 꽃배였다. 그러나 돛대는 세 개 나 되었다. 선수에는 한 명의 노인과 중년의 일남일녀, 약관의 청년과 묘령의 여인, 춘정에 눈 뜰 소녀와 치기 어린 얼굴의 소년이 서 있었다. 황 하를 장엄한 음률로 수놓고 있는 자들은 그들이었다. 그들은 선수에 나란히 서 각자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노를 잡는 자들도 없었고 돛을 조절하는 자도 없었다. 꽃배는 절로 흘러 어느 틈에 양백의 배에 이물을 대고 있었다. 배가 부딪히는 순간, 음률은 뚝 사라졌다. "저파룡은 어디 있느냐? 우리는 대해(大海) 용왕(龍王)의 명을 받 고 저파룡을 잡으러 왔다!" 중년인이 강적을 입에서 떼며 소리쳤다. '저파룡…….' 양백은 미간을 좁혔다. 오래 전에 잊었던 이름이었다. 교도들이 아 마 자신을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저파룡은 간을 내놓아라!" 강적을 든 중년인이 손을 내밀었다. 양백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양백은 놀라 천근추로 저항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앗!" 타랍하가 놀라 소리쳤다. 그는 음률에 빠져 두고 온 고향 생 각을 하느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웬 놈들이냐?" 타랍하는 고함을 지르며 양백을 데려가는 자에게 달려들었다. 곡나팔을 든 청년이 움직였다. 탕! 타랍하의 기형도와 청년의 곡나팔이 부딪히며 맑은 소리가 났 다. 그와 동시에 타랍하는 창백한 안색으로 털썩 뱃전에 주저앉았다. "히히히! 누가 네놈 보고 나서라고 했느냐? 우리 사해의 교룡들은 용의 족속들의 간은 먹어도 네놈 같은 인간의 간은 맛이 없어 먹지 않는단 말이야!" 박판을 든 소년이 장난스럽게 박판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이런 자들이…….' 타랍하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 다. 세상에 이런 무공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기형도와 곡나팔이 부딪힌 순간, 타랍하의 내력은 연기처럼 소멸되고 없었다. 그 사이 양백의 몸은 강적을 든 중년인의 손에 의해 꽃배로 옮겨가 있었다. "누구시오?" 양백은 물었다. "방금 우리 아이가 이야기하지 않던가요? 우리는 세상의 희락(喜樂 )을 찾아 세상의 모든 바다, 세상의 모든 하천을 천년 동안 주유한 교룡들이에요." 필율을 든 중년여인이 요염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해의 교룡이든 천년을 주유했든…… 나를 찾아온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오. 무슨 이유로 나를 찾으셨소?" "사람들은 저파룡의 뱃가죽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는 것밖에 모 르지. 간은 더 맛있는데!" 박판을 든 소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소년은 손을 쑥 내밀 었다. 양백은 가슴에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소년의 손이 그의 가슴에 푹 박혀 있었다. "간이 어디 있나?" 소년은 양백의 가슴에 손을 박고 양백의 장기(臟器)를 더듬었다. "여기 있군!" 소년이 좋아라 하며 무엇인가를 쑥 끄집어냈다. 양백은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어, 이게 뭐야?" 소년은 자신의 손에 얹힌 물체를 보며 안색을 찌푸렸다. 소년이 양 백의 가슴에서 꺼낸 것은 간이 아니라 고름이 줄줄 흐르는 부패한 덩 어리였다. "병이 든 놈이었군. 아무리 저파룡의 간이 맛있다지만 썩은 간을 먹을 수는 없지." 풍덩! 소년은 고름 덩어리를 황하의 물 속에 던졌다. 양백은 자신의 가슴을 살폈다. 죽었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아 있 으니 이상도 했다. '아!' 그는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분명 소년의 손이 자신의 가 슴을 뚫었는데 상처 하나 없었다. 그리고 곧 이어 양백은 고황으로 항상 결리던 가슴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는 것도 깨달았다. 설명 하지 않아도 소년이 자신을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챘다. "고맙소. 하지만 괜한 일을 하셨구려. 나는 오래 살만한 일을 남겨 두지 않고 있소." 양백은 고소를 흘렸다. "양 보주, 당신의 고황을 뿌리 뽑은 것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오. 당신은 오래 살아 해야 할 일이 있소. 그 일을 위해 당신의 고황을 없앴소." 갈고를 든 왜소한 노인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야 할 일이라니요?" "암왕의 출현은 들었소?" "암왕의 출현이라니요? 저는 무지한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근자에 는 몸조차 좋지 않아 도통…… 암왕?" 무심결에 이야기하던 양백은 눈을 번쩍 떴다. 기억이 났다. 암왕! 명왕에 맞서 세상의 반, 어둠을 지배하고 있는 자……. "암왕이라 불러도 괜찮고 대마두, 대살성, 구룡선주…… 뭐라고 불 러도 괜찮소. 어쨌든 그가 나타났소." "아! 강호에 대환란을 일으킨 자가 나타났다는 말씀이구려." 양백은 가슴을 쓸었다. 신(神)이 벌이는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사람 이 벌이는 일은 어떤 일이던 수습이 되는 법이다. "맞았소. 세상에 대한 장난을 조금 심하게 치고 있는 자이외다." 갈고를 든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한 일이군요. 우리 시대에 그런 자가 나타나다니…… 그런데 그자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를 찾았소? 보시다시피 나는 닭목 비틀 힘도 없소."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암왕은 한 때 양 보주가 상전으로 모셨던 사람이니……." "내가 상전으로?" 양백은 기억을 더듬었다. 그가 상전으로 모셨던 사람은 부지기수다 . 첫 출발이 상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상인이었으니……. "차차 알게 될 것이오. 나는 부탁 받은 말을 전하려 왔소. 그분께 서 부탁하시기를 암왕이 세상에 저지른 재해(災害)를 양 보주께서 갚 을 수 있을 만큼 갚아라 하셨소. 죽은 생명이 돈으로 갚음이 되겠소 이까만…… 최대한 성의는 보여라 했습니다." "금적보에 돈이야 많기는 많지요. 그런데 또 그분은 누구를 말함입 니까?" "성녀……." 갈고를 든 노인이 무심하게 말했다. '성녀…….' 양백은 놀란 표정으로 갈고를 든 노인을 직시했다. "내가 양 보주를 찾은 이유는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부탁하 오." "서, 성녀라니요? 성녀는 죽지 않았습니까? 죽기 전에 그 말을 남 겼나요?" 양백이 허둥대며 물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성녀께서 말씀하신 일! 그대로 따르면 될 것을…… 그리고 네가 죽음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느냐? 죽어 보지 도 않은 놈이 죽음, 죽음, 떠들기는…… 몇 살도 되지 않은 놈이…… ." 박판을 든 소년이 마치 어른처럼 양백을 나무랐다. 양백은 소년을 상대로 아옹거릴 정신이 없었다. "성녀를 어디서 만났습니까? 성녀께서 언제 그런 부탁을 하던가요? " "세상의 지락(至樂)을 찾아 헤매던 중 황하에서 만나 황하에서 부 탁을 받았다. 이것 말고 한 가지 부탁을 더 받았지. 그 일까지 해결 하고 나면 성의가 가상해서라도 성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연못에 머 물게 해 주실 것이다. 이제 지겨워. 이 세상을 떠도는 것도…… 정말 이 세상은 좁아. 천년 동안 놀고 나니 더 이상 다른 재미가 없잖아. " 방향을 든 계집이 조잘댔다. 양백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몰랐다.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묻기로 했다. "당신들은 누구요?"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게 하느냐! 우리는 세상의 희락(喜樂)을 찾아 세상의 모든 바다, 세상의 모든 하천을 천년 동안 주유한 교룡 들이라 하지 않았느냐!" 소년은 버럭 화를 냈다. 양백은 혼란스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해 더 이상 다른 말이 나오 지 않았다. "양 보주, 우리는 성녀의 부탁을 분명 전했소. 이후의 일은 당신의 몫이니 알아서 하시오." 갈고를 든 노인은 시선을 돌렸다. "노인!" 양백은 무슨 말인가 붙여 보기 위해 노인의 시선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둥실 뜨고 있었다. 양백은 타랍하의 곁으로 돌아왔고 꽃배는 이물을 틀었다. "노인! 노인!" 양백은 목 놓아 꽃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꽃배는 유유히 항진했 다. 술을 마주 대하여 노래하세 인생은 그 얼마이런가 비유컨대 아침 이슬. 뒤돌아보니 들리는 건 가엾은 울음소리 눈물을 뿌리며 홀로만 가네 오로지 근심 풀 곳은 술뿐이로세. 이 몸 죽을 곳 알지도 못하거늘 어이 두 몸이 온전할 수 있으리 바람에 돛을 맡기고 떠나가네. 꽃배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음률만 남기고 황하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 * * "부르셨소?" "부르셨습니까?" 전우삼과 감악은 머리를 숙이며 명강량의 앞에 섰다. 삼협의 험준한 지세를 빠져 나온 지점에서 아란하는 배를 띄웠다. 배에 구룡선과 팔륜거를 싣고 항행하던 그들이 하룻밤 유숙(留宿)을 위해 닻을 내린 곳은 갈주패(葛州　)라는 장강 가운데의 작은 섬이었 다. 명강량은 전우삼과 감악을 한 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전우 삼과 감악은 조금 긴장된 표정이었다. 선창을 바라보던 명강량은 의자를 돌렸다. "감악, 양백은 살아 있느냐?" 그가 대뜸 물었다. "살아 있습니다." "그를 만난 적은?" "없습니다. 교는 교를 떠난 자에 대해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습니 다. 솔직히 죄를 묻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으나 그럴 형편도 못 되고…… 다른 일도 바빠서 그렇게 잊은 듯 지냈습니다." "감악, 양백에게 사람을 보내라. 황산 총단을 다시 세우고자 한다. 전대의 총단 보다 배 이상 큰 총단을 만들라고 전하라." "언제 그 말씀을 하시려나 하고 기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옹… …." 성녀를 찾는 일과 함께 총단을 재건하는 일은 배교도들의 가장 큰 숙원이었다. 감악은 필요 이상으로 감격해 하며 머리를 숙였다. 당연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명옹, 양백은 오래 전에 교와 결별을 선언한 자입니다. 과 연 우리의 부탁을 받아 줄까요? 그리고 지금 총단을 세운다는 것도… … 적들은 황산에 우리 교의 총단이 들어서는 것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하니 염려할 일도 있었다. "나의 부탁이라고 하라. 그래도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 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총단에 대한 적들의 공세는 걱정하지 마라. 모두 없애 주겠다. 그리고 남은 적이 있다면…… 우 삼!" 명강량은 딴 눈을 팔고 있는 전우삼을 불렀다. 전우삼은 급히 자세를 바로 했다. "이후에 총단을 지키는 일은 너의 몫이다." "당연한 말씀 아닙니까. 그런데 이후라니요?" "네가 익힌 무공은 무엇이냐?" 명강량은 말을 돌렸다. "이것저것 익혀 기억도 못하겠소. 전왕의 무공이라는 것은 대충 다 익혔소." "개천양일진력은 없겠지." "음, 음…… 양일진력 아니오? 그 것은 없는 것 같소." "역혈대법으로 감악의 몸을 씻고 개천양일진력을 전수해 주겠다. 너는 감악에게 번천양장과 등천양광도법을 전수해 주어라." "알았소. 헤헤헤, 이제 나도 두 명이나 제자를 두게 생겼군. 그나 저나 역혈대법에는 별 효능이 다 있는 모양이군. 잠력을 끌어올리는 것까지는 나도 알지만 개정대법(開頂大法) 같은 힘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어." 전우삼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화정이라는 여자에게 네 무공을 가르쳐 줌을 알고 있다. 그만 두 어라. 타할륜의 무공은 아무에게나 가르쳐 줄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 주화입마를 부를 것이다." "그, 그렇소?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 전우삼은 해쓱한 안색으로 고함을 질렀다. "감악……." "말씀하십시오." "아란하에게 이상한 물건을 맡겼더구나." "이상한 물건이라니요." "가져가라." 명강량은 손을 저었다. 선실 한 편에서 한 자루의 칼과 깃발이 떠올라 감악의 손에 떨어졌 다. 신장도와 전교영기였다. "너의 물건이다. 내가 가질 이유는 없다." "신장도와 전교영기가 왜 나의 물건입니까? 교에 두 명의 명옹이 있었던 역사는 없었던 줄 압니다." "누가 명옹이란 말이냐?" 명강량의 눈빛이 무저갱으로 빛났다. "명옹이 아니면 그럼 뭐지? 헤헤헤, 명옹께서는 대전왕이라는 호칭 이 그렇게 좋소? 나는 전왕이라는 칭호 보다 명두라는 칭호가 더 좋 던데. 앞으로 나는 산서 명두요, 산서 명두! 예전에 주 명두가 맡긴 일이었소. 하지만 이제 와서 명두 운운하려니 채신머리가 없어서 말 이야. 헤헤헤, 그래서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화정이 꼭 하라고 말했 단 말이오!" 전우삼이 너스레를 떨었다. 감악은 명강량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많이 변한 줄은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묻겠습니다. 굳이 호교 신장의 자리를 내팽개치려는 이유를…… 한가지 더! 성녀와 초대 명 옹에 대한 의례는 왜 지키지 않습니까? 보권을 찾는 것도 명왕을 부 르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감악의 눈빛도 명강량의 눈빛만큼 빛났다. 무공의 고하(高下)가 아 무리 심해도 기골(氣骨)의 차이는 있었다. 궁금하기는 전우삼도 마찬 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명강량의 눈빛에 질려 묻고 싶은 말을 비켜 갔는데 비해 감악은 정면으로 묻고 있었다. "나의 실수는 세상을 불길로 휩쓸어 버리겠다는 생각이 앞서 아란 하를 찾았다는 것이다. 아란하를 만나 대화룡은 얻었다. 그러나 대화 룡의 위력만큼 나는 나의 힘을 반감시키는 짐도 얻었다. 그래서 너희 들은 만날 생각도 않았다. 하지만 명왕은 기이한 우연으로 너희들을 만나게 해 주더군. 감악, 전우삼!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자꾸만 늘 어나는 나의 어깨의 짐을……." "우리가 짐이라는 말이요? 그건 너무 심한 말이지 않소!" 전우삼은 발끈했다. "십 몇 년 동안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무엇을 얻기 위해 그 먼 곳에서 이곳까지 왔습니까?" 감악의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무산에서 만난 이후 명옹 은 의례는커녕 성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있었다. 그 사실이 감 악에게는 못으로 남아 있었던 터였다. 불경이 될 것 같아 참고 참았 지만 오늘 명옹이 자신을 찾지 않았다면 자신이 먼저 찾았을 것이다. 이유를 물어 보고 따지기 위해……. 방금 명옹이 황산 총단의 재건을 말하자 감악은 자신의 걱정이 기 우(杞憂)임을 깨달았다. 명옹이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는데 감격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 같은 기쁨도 잠시, 명옹은 그가 염려했던 이야 기를 꺼내고 있었다. 이왕 터져 나온 말이다. 감악은 명옹의 생각의 뿌리를 밝힐 생각이 었다. "나는 그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단 한가지만을 생각했다. 그 어둠 을 나와 이곳에 이르기까지도 한가지 생각뿐이다. 너희들을 만나 몇 가지 해야 할 일은 늘었지만……." "몇 가지 해야 할 일…… 총단을 세우겠다는 것도 그 일 중의 하나 이겠지요. 묻겠습니다. 설마 총단을 세우겠다는 이유가…… 옛 정 때 문은 아닌지요? 옛 정 때문에…… 해야 할 짐으로 느끼고 있지는 않 습니까?" 감악은 자신의 느낌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를 명옹이 자꾸 하자 악 에 받쳐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그는 터져 나오는 분노를 참느라 이를 악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말이 맞다. 나는 오래 전에 명왕을 버렸다." 명강량은 쉽게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메마르게 선실을 울렸다 . "……." 감악은 눈을 질끈 감았고 전우삼은 명강량과 감악을 번갈아 바라보 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며, 명옹……." 전우삼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댔다. 감악은 눈을 번쩍 떴다. "명왕을 버린 호교신장은 있을 수 없겠지요. 신장도, 전교영기! 가 져가겠습니다. 옛 정 때문에 총단을 세워 주시겠다면 사양하겠습니다 . 총단은 언젠가 우리 배교도들이 우리의 힘으로 세울 것입니다! 이 교도의 도움은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역혈대법을 시전 받지 않겠습니다. 아! 이곳을 곧 떠나는 것이 짐을 들어 드리는 가장 좋 은 방법이겠군요. 성녀께서 무사히 몸을 피할 장소만 찾는다면 곧 떠 나겠습니다. 우리 코앞에 구파일방이 천라지망을 펼치고 있다고 합니 다. 그곳만 넘기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어둠 속에서 갈고 닦은 생 각 좋은 귀결이 있기를 바랍니다." 감악은 찬바람을 일으키며 등을 돌렸다. "감악!" 명강량은 감악을 불렀다. 선실문을 열던 감악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 그는 명옹이 자신의 등을 다시 돌릴 수 있는 최소한의 말을 해 주 기를 바랬었다. 그러나……. "화령주를 주겠다. 나는 화령주를 전대 성녀의 것으로만 알았다. 하지만 생각하니 화령주는 성녀의 손에서 성녀에게로 이어지는 것… … 가져가라. 새로운 성녀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 명강량은 격공섭물로 화령주를 띄웠다. 감악은 화령주를 낚아챘다. 그가 거칠게 선실문을 열었다. "아이고! 감 명두, 왜 이러시오! 오랜만에 갑자기 빛을 쬐어 명옹 은 제 정신이 아니라구!" 전우삼은 감악의 손을 잡았다. "이미 끝난 이야기입니다! 미친 자라면 우리가 명옹으로 모실 이유 는 더욱 없소!" 감악은 전우삼의 손을 뿌리쳤다. "아이고, 아이고! 명옹, 오늘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겠소. 나는 아 무 말도 못 들었소! 아무 말도…… 감 명두, 감 명두!" 전우삼이 감악을 붙잡기 위해 후다닥 뛰어나갔다. 명강량은 선창으로 의자를 돌렸다. 감악의 화난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배교도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이렇다. 어수선했다. 서둘러 갈 길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감악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령! 악약의 피를 이은 새로운 성녀……. 볼 때마다 새로운 감정이 솟구쳤다. 그래서 그는 걱정해야 했다. 자신의 길에서 주저앉아 버리는 것은 아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 괴로운 불면(不眠)의 날을 끝내고 싶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운악약이라는 여자의 몸에서 흐른 수억 배 이 상의 피로 강호를 적셔야 한다. 그 일만이 악약을 잃은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위로였기 때문이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습니까?" 예령의 머리를 곱게 땋으며 아란하는 물었다. "감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특별한 말씀이 있었나 보군요." "의창을 지난 후 그분과 헤어지자고 했어요." "감 명두께서 대전왕과 헤어지자고 말했습니까?" 아란하는 깜짝 놀라 머리를 땋던 손을 멈추었다. "오늘 그분과 기분 좋지 않는 말을 나눈 모양이에요. 감 아저씨는 화를 잘 내지 않는 분인데 무척 격분한 표정이었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하던가요?" "말씀을 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그분과는 같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조만간 호교신장의 자리를 이을 테니 인정 을 해 달라고 했답니다." "호교신장의 자리까지……." 아란하는 아미를 찌푸렸다. "말씀은 하지 않았지만 저는 감 아저씨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아요." 예령은 고개를 돌려 아란하를 바라보았다. "감 명두는 선량한 사람입니다. 건드리지 않으면 절대 먼저 칼을 뽑을 사람이 아니더군요. 대전왕의 몸에 베인 피냄새가 싫었을 것입 니다. 저도 가끔 대전왕이 다른 산의 마물로 느껴질 때가 있답니다." 아란하는 한숨을 쉬었다. "아란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군요. 그 이유도 맞을 거예요. 그 분의 마음이 그러니……." "대전왕의 마음을 아십니까?" "전혀…… 두터운 장막 속에 가리어져 있었답니다. 그래서 무섭고 두려웠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정을 붙 이지 못합니다. 정해진 자신의 길만 보고 다른 곳에는 시선조차 두지 않으려고 하죠." "그렇군요." 아란하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차가움은 그녀도 경험할 만 큼 경험한 터였다. "나는 기억해요. 그분을 만났을 때 감 아저씨가 얼마나 좋아했는가 를…… 웬만한 상처가 아니라면 결별을 선언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아란하, 그분과 결별을 선언할 만큼 감 아저씨가 상처받을 일이 무엇 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감 명두라는 분에 대해 아직 잘 모릅니다." "감 아저씨가 가장 아끼는 것이죠. 바로 우리들의 교…… 그분은 아마 그랬을 거예요. 우리들의 교에도 미련을 붙이지 못한다고……." "……." 아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교에 대한 대전왕의 믿음이 의심받고 있다는 것은 주위의 수군거림으로 그녀도 알고 있었다. 왜 그런 이야 기를 들어야 하는가. 안타까웠다. 감 명두가 결별을 선언할 정도면 나중에 누가 그의 주위에 남아 있으랴! 의심받을 행동을 하고 있는 대전왕에 대해 분노 보다 고립을 자처하는 데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란하, 나는 화령주를 돌려 받았어요." 예령은 소매에서 꺼지지 않는 교의 불, 화령주를 꺼냈다. 화령주의 묵빛이 선실을 채웠다. "어머니가 그분에게 준 것이죠. 이제야 나에게 돌아왔어요. 화령주 를 돌려 받았으니 나도 그분의 물건을 돌려주어야 하는데……." 예령은 항상 소중히 간직하고 다니는 함에 눈길을 던졌다. "저 함에 든 물건은 대전왕에게 갈 물건인가 보죠?" "맞아요. 어머니가 주라고 했어요. 벌써 주어야 했는데 줄 기회가 생기지 않아요. 어머니가 애써 선물한 물건인데 받고 기뻐하지 않으 면 정말 나는 그분에게 화가 날 것 같거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언제나 저런 마음으로 계시지는 않을 거예요. " 아란하는 명강량을 변호했다. "성녀, 감 명두께서 떠나자고 했으니 떠나겠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예령의 눈치를 살폈다. "떠나지 않을 거예요. 모든 사람이 그분을 두려워해도 나만은 두려 워하지 말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셨거든요." 예령은 그날 밤의 꿈을 이야기했다. 아란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이 되었다. 대전왕의 마음 을 붙잡기 위해서도 성녀는 떠나지 말아야 했다. 성녀가 대전왕의 마 음을 변화시키고 있다는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고 있지 않지만 마 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성녀뿐이라는 사실을 아란하는 확 신하고 있었다. "머리를 마저 땋도록 해요." 아란하는 예령의 긴 머리칼을 매만졌다. "아란하, 아란하는 그분을 좋아하고 있군요." 자신의 머리를 맡기며 예령이 말했다. 아란하는 아무 말 않고 얼굴만 살짝 붉혔다. "나는 지금의 그분을 진정으로 좋아할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감 아저씨도 따지고 보면 옛 추억과 교세 확장이라는 꿈 때문에 그분을 따르고 있을 뿐이죠." "현재의 그분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란하는 좋아하잖아요. 언제부터 좋아하게 되었어요?" 예령이 호기심으로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아란하는 성녀 앞에 속일 말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맞아요. 나는 그분을 좋아합니다. 오래 전부터…… 하지만 그분의 마음은 전혀 딴 곳에 있답니다. 나는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죠." 아란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걸요. 나는 아란하에게서 그분의 체향을 느꼈 어요." "체향을 느꼈다니요?" "그분의 상념이죠. 아란하를 생각하는……." "정말 그럴까요?" 아란하의 마음이 후끈 달아올랐다. "분명해요. 내가 감 아저씨에게 떠나지 않겠다고 말한 이유 중 하 나죠. 마음이 전혀 없는 분은 아니에요. 아란하, 나는 매일 어머니께 염원한답니다. 그분의 마음을 돌려 달라고…… 아란하도 그렇게 되 기를 기도하기 바래요." "물론입니다. 전대 성녀께서 그분과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아란하는 예령을 껴안았다.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행로(行路)를 묻기는 방환도 마찬가지였다. '전왕은 포악해 보여도 본 바탕은 순하고 단순한 사람이다. 중원 배교에 대한 한풀이가 끝나면 충분히 우리의 뜻대로 움직여 줄 사람 이었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은…….' 방환은 지난 기억들을 반추(反芻)했다. '아니다. 그는 아니다.' 그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중원의 호교신장에게 느낀 것은 단 하나뿐이다. 피의 복수! 다른 일은 생각도 않고 있다. 지파 간의 알력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이미 대전왕과 성녀를 모시지 않는 것은 보았고…… 명왕까지 믿고 있지 않을지도 모르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환은 보권을 지켜야 하는 노관이다. 지파도 달랐고 감악과 같은 옛 정도 없었다. 전우삼처럼 장중(掌中)에 넣기를 꿈꾸지도 못했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에 대한 특별한 애착이 있을리 없었다. 그래서 명강량에 대해 보다 냉정하게 볼 수 있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방환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그 무엇 보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은 만인촌의 영향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방환은 한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 이 가진 엄청난 힘을 본 순간 꿈틀거리고 있던 계획이었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해서는 안된다. 자…….' 그는 손가락을 꼽으며 자신의 계획을 면밀히 재검토했다. 중원 배 교의 호교신장은 절대 실수를 용납할 사람이 아니다. 실수는 자신의 죽음은 물론 만인촌의 몰락을 가져올 것이다. '그렇지, 그것이 문제야.' 방환은 백미를 모았다. 중원 배교 호교신장의 마음, 도화라는 여자의 마음……. 그의 계획에 가장 큰 변수였다. 도화라는 여인의 마음을 잡을 자신은 어느 정도 있었다. 도화라는 여인은 교도들과 함께 길을 가고 있으나 아직 교에 대해 어떤 관심도 표하지 않고 있었다. 특히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에 대해서는 적개심 까지 표출하는 것을 보았었다. 몇 가지 말로 설득하면 별 무리 없이 자신의 계획에 동참하리라 믿었다. '문제는 중원 배교 호교신장의 마음인데…….' 이것만은 정말 알 수 없었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성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평소의 행동으로 보건대 성녀를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분 명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정말 곤란하다. '자, 자…….' 방환은 앞뒤를 주도면밀하게 재검토했다. '그렇지! 결국 그는 나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배교도임을 포기하는 것!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다. 배교자나 이교도가 되는 것이지. 원래 우리는 그가 중원에서 어떤 일을 벌이던 관심이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의 영향력이 우 리 교에서 종식되는 것…… 됐어!' 그는 결국 자신의 계획을 밀고 나갈 것을 결정지었다. 그러나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방환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계획을 검토했다. 무리 가 보이지 않았다. '구대문파 놈들이 우글거리며 모여든다고 한다. 그 때까지는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날뛰도록 내버려두자. 어차피 싸워야 할 적! 그가 처치해 주겠다고 하니…….' 계획을 실행에 옮길 날은 그 이후로 잡았다. 그러나 준비는 지금부 터 해야 한다. '먼저 쌍혼들에게 이야기를 해야겠다. 제거의 필요성에 급급해 무 리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계획을 몇 번이고 검토하고 확인해도 또 다시 검토를 촉구하는 방 환이었다. 방환은 쌍혼을 찾았다. 쌍혼이라면 두 말 없이 자신의 계획에 쌍수 를 들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중원의 배교도들이나 일지국의 배교도들도 나와 같은 생각 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지.' 방환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굳게 믿었다. * * * "이봐, 이봐! 그 가지는 손 대지 말란 말이야! 눈이 있어, 없어? 멀쩡한 가지를……." 팽해만은 눈을 흘겼다. "그럼, 팽(彭) 랑(郞)이 다 하셔요. 그 칼은 꼭 사람의 목을 자를 때 쓰라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전지(剪枝) 가위를 든 계집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추악한 사람의 목이나 자르는 칼로 이 아름다운 나무의 가지를 잘 라라구. 연옥(軟玉), 네년의 무식함은 그 끝을 알 수가 없구나." 짚을 나무에 두르며 팽해만은 이마를 좁혔다. "어이, 이제 다 끝나 가나." 그는 손을 털며 자신의 장원을 둘러보았다. 소담스럽게 짜여진 그 의 화원(花園)은 월동(越冬) 준비를 끝내고 있었다. "자, 겨울 넘길 준비도 끝냈고…… 이제 남은 일은 네년과 긴 겨울 밤을 오손거리는 것뿐이다." 팽해만은 전지 가위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고 있는 계집의 엉 덩이를 툭 쳤다. "흥, 긴 겨울밤 좋아하시네. 저번처럼 본가에 있는 큰언니가 오면 어떻게 해요. 아이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계집은 팽가에 있는 팽해만의 본부인(本婦人)을 떠올리며 입을 삐 죽였다. 팽해만은 본부인 외에 세 명의 첩이 더 있었다. 모두 하북 본가에 있고 작년에 얻은 눈앞의 계집만이 승룡방에 머물고 있었다. 연옥이 라는 계집으로 승룡방의 수족과 다를 바 없는 수룡표국 국주의 딸이 다. "이번에는 오지 못하도록 했다." "오지 말라 했다고 오지 않는다고 하던가요." "주위가 심상치 않다고 했지. 만약 오면 아이들을 호랑이 굴에 데 려오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말했다. 감히 내 귀여운 아이들을 호랑 이 굴에 가져다 받칠 생각은 하지 않겠지." "어쨌든 큰언니는 아이 키우는 재미라도 있으니 어떻게 긴 밤을 넘 기겠지만 둘째, 셋째 언니의 일이 걱정되네요." 계집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급하면 다른 서방을 불러 불을 끄겠지." "어머! 어떻게 그런 말을……." 계집은 놀란 척 입을 가렸다. "무가의 남자들은 냄새 나는 유생들과는 달라. 우리야 언제 저 먼 길을 갈지 모르는 자들이 아닌가. 살아 있는 동안은 여자에게 최대한 잘해 주려고 하지. 긴 밤을 눈물로 지새게 한다는 것은 남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 "우리 아버지도 칼밥을 먹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아버지 는 어머니를 꼼짝 못하게 하죠?" "빙부가 그런 사람이었나? 음…… 생각하니 훌륭한 분이군. 언제 갈지 모르는 삶! 제 입만 생각하고 사는 것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 지. 따라서 특별히 너만은 꼼짝 못하게 해 주겠다." 팽해만은 계집의 머리를 이마로 쿵 박았다. "아얏!" 계집은 눈물을 찔끔거렸다. "좋다! 좋아!" 팽해만은 뒷짐을 지고 다시 자신의 화원을 둘러보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한때 유향경천문에서 당예라는 놈과 한솥밥 을 먹은 적이 있었지. 놈의 취미가 화원을 가꾸는 일이었다. 그 때는 계집 같다고 많이 놀렸는데…… 이제 나의 취미가 이와 같다. 당예 라는 놈은 칼을 휘두르는데 정신이 없었고……." 당예를 생각하자 팽해만은 씁쓰름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유향 경천문에 있을 당시 당예는 자신이나 언상영, 남궁기에 비해 약한 편 이었다. 그 약함을 숨기기 위해 당예는 악착 같이 바동거렸었다. 악 착같은 자들은 원래 오래 사는 법이라 누구 보다 당예가 오래 살 줄 알았다. 그러나 이제 강호에서 그의 얼굴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간 맹호전과의 사이가 어떻건 학대통이 뭐라고 떠들건, 당예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 주어야 한다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쉽게 몸이 움 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당예에게 할애(割愛)하는 마음 보 다 다른 곳에 할애하는 마음이 많은 듯했다. 말이 나아가지 않겠다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연옥아!" 팽해만은 계집의 목에 팔을 걸쳤다. "너는 사람을 속단하지 마라. 보고 또 보아도 모르는 것이 사람인 데 몇 번 본 것으로 어찌 그 사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믿고 있다가는 큰 코 다칠 것이야." 그는 손끝으로 계집의 코를 퉁겼다. "아얏! 누가 팽 랑을 좋은 사람으로 생각한단 말이에요? 그런 생각 은 처음부터 한 적이 없으니 안심하세요!" 계집은 코끝을 만지며 쇳소리를 냈다. 팽해만이 계집과 머리를 맞대고 시시껄렁한 수작들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쨍! 쨍! 쨍! "으악!" "악!"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담장을 넘어왔다. "이거, 정말!" 팽해만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보자 보자 하니 끝없이 기어오르려고 하는군. 죽일 놈의 장사치들 !"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근자에 팽해만이 가장 골치 아파하는 일이 있다면 황하 대상련의 반발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자경대인 호상련을 동원 심심찮게 도발을 해 오고 있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진화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 각 황하 대상련에 속한 장원 하나를 감쪽같이 불태워 버렸다. 그쯤 하면 겁 많은 장사치들이 입을 조개처럼 다물리라 생각했는데 도발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이제 승룡방의 문 앞까지 싸움을 걸어오다니……. '주위의 이목을 생각해서 참을 만큼 참으려 했다!' 팽해만은 본때를 보여 주리라 마음먹으며 내당의 문을 거칠게 열었 다. "방주!"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오는 자는 학대통이었다. 학대통은 거친 호흡 을 삼키며 무엇인가를 말하려 했다. 팽해만은 이야기도 듣지 않고 거칠게 그를 지나쳤다.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외당을 들어서던 팽해만은 발길을 우뚝 멈추었다. 그는 그곳에서 세 명의 무사들을 보았다. 세 명의 무사들은 우르르 달려드는 그의 수하들을 종이처럼 날리며 연무장을 지나 외당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 팽해만은 칼잡이에서 손을 뗐다. 황하 대상련의 자경대인 호상련은 아니었다. 장목생이 있었으면 이런 소란도 없었을 것이다. 불행히도 수하들은 그 유명한 숭무각주의 얼굴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두 명의 무사들을 대동한 채 연무장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남궁 기였다. "물러나라!" 팽해만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으헤헤헤, 남궁기! 나의 친한 벗이여!" 팽해만은 남궁기를 내당으로 불러들이며 팔을 벌렸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더 반갑게 인사를 하지 못하겠나? 반갑다는 지, 반갑지 않다는지 전혀 구별이 가지 않는군." "계집을 제외하고 내가 사람을 이토록 반갑게 맞아 본 적은 없지. 내 마누라의 눈 좀 봐. 자네를 너무 반갑게 맞으니 마치 옛날에 같이 남색을 나눈 자가 아닌가 하고 의심하잖아." "찢어진 입이라 여전히 말은 잘하는군." 남궁기가 씩 웃었다. "시비를 걸려고 작정을 하고 왔군. 내 수하들을 두들겨 패니 재미 있던가?" 팽해만은 히히닥거리며 연신 입을 놀리고 있었으나 남궁기의 말대 로 꺼려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재미 때문에 토룡(土龍)을 밟는 사람은 없다. 귀찮더 군. 자네 만나는 일을 황상(皇上)을 뵙는 일 보다 더 어렵게 요구했 다." "헤헤헤, 미안…… 여기저기 귀찮은 일로 찾아오는 자들이 많아서 말이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부터 한 잔 해야지?" 팽해만이 슬쩍 물었다. "만나는 놈마다 술이군. 좋아!" "또 누구를 만났는가? 숭무각에 틀어박혀 있다더니……." "언상영! 찾아왔더군." "그래서? 음……." 팽해만은 머리를 긁적였다. 자신이 한 일이야 자신이 더 잘 아는 일이고 아무래도 한소리들을 일을 면치 못할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 자 기분은 더 나빠졌다. 내가 왜 저놈에게 욕을 들어먹어야 하는가! 남궁기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마음뿐이고 팽해만은 여전히 메기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 친구들과 같이 왔는데…… 저 분들이 묶을 만한 곳은 없는가? " 남궁기는 자신을 따라온 두 명의 중년인들을 가리켰다. "자네의 친구라면 나의 친구가 아닌가. 같이 자리를 하지." "아니! 저들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하네. 따로 자리를 내어 줌 세. 나도 자네와 단 둘이 해야 할 이야기가 있고……." "젠장! 술상을 두 곳이나 차리려면 돈이 많이 든단 말이야! ……알 았어! 학 선생, 저분들을 별채로 모셔 드리고 불편함이 없도록 대접 해 드려!" 팽해만이 삐죽이 서 있는 학대통에게 고함을 질렀다. 학대통은 조심스럽게 남궁기를 따라온 두 사람을 인도했다. "누구야?" 내당 후원의 정자로 향하며 팽해만이 물었다. "이야기해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인창(寅槍), 사곤(巳棍)이라 부르 는 것만 알게." "별스러운 별호를 가진 친구를 다 사귀었군." 팽해만은 신발을 벗고 정자에 올랐다. 내당의 시비들은 팽해만의 성격을 닮았는지 발 빠르게 술상을 준비 했다. 잠깐 사이에 팽해만과 남궁기는 술잔을 나눌 수 있었다. "무엇 하러 왔어?" 팽해만이 술잔을 쭉 들이키며 물었다. "자네 노는 꼴을 보기 위해 왔지. 정말 대단한 분이시더군." 남궁기는 씩 웃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되면 따라 하면 될 것 아냐!" 팽해만은 일단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좋은 기분이 아니니 엉뚱한 소리를 함부로 하지 마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어디 남궁기가 누구의 기분을 생각하는 자인가. "언상영으로부터 들은 것 보다 더 대단하더군. 이제 상인들을 상대 로 시비를 걸고 있다면서?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하북의 맹호가 황하를 건너면 고양이가 된 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야. 먹을 것이 그렇게 없던가? 상인들까지 집적 거리게……." 남궁기는 여유 만만한 미소로 잔을 들었다. "포동포동한 돼지를 그냥 지나가는 호랑이는 없어." 팽해만은 히죽댔다. "가금(家禽)을 노리는 호랑이는 제 명대로 살지 못하지." 남궁기는 술잔을 비웠다. 팽해만의 두 눈이 찢어졌다. "으헤헤헤, 으헤헤!" 그가 갑자기 미친 듯이 웃었다. "남궁기, 생각해 보니 나는 돼지였어! 소면각저!" 그는 찢어진 눈을 빛냈다. "맞아, 돼지! 뿔을 잃은……." 예전의 그와 다르게 남궁기는 집요하게 팽해만을 몰아쳤다. "내가 졌다! 남궁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왔지? 당예의 죽음, 구 룡선과 마인거, 황하 대상련과의 시비에 대한 이야기라면 사양하겠다 . 자네만 불혹을 앞두고 있지는 않아. 나도 생각은 있다!" 팽해만은 항복을 선언함과 동시에 남궁기와의 선도 그었다. 어릴 때야 논쟁(論爭)이 재미있지만 나이가 들면 논쟁만큼 사람을 피곤하 게 하는 일도 없다. 생각의 평행선(平行線)을 확인하면 빨리 입을 닫 는 것이 상책(上策)이라는 것을 남궁기도 알고 있을 것이다. "돼지 머리에 많은 이야기도 주워 담고 있군. 생각을 묻기 위해 온 것은 아니다. 그 머리에서 나올 생각이야 뻔하지!" 단순간의 만남이었지만 그도 팽해만의 아집을 느끼고 있었다. 언상 영에게 들은 것 보다 훨씬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상책을 제쳐 두고 팽해만을 물고 늘어지는 이유는 슬슬 울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의 일을 생각했겠지. 유향경천문이 강호의 주도 세력으로 떠 오르던…… 그때 우리는 일부러 늦게 단혈철각련을 상대로 칼을 뽑았 다. 구대문파의 힘이 소진되기를 기다린 게지. 이번에도 자네는 그때 의 재미를 보려는 것이 아닌가?" "헤헤헤, 잘 알고 있군. 굳이 앞장 서겠다는 데 내가 말릴 이유가 무엇이야? 나한테 협조를 구하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고." 팽해만은 남궁기의 시선을 외면하며 잔을 들었다. "협조가 와야 승룡방을 움직인다…… 팽해만, 왜 강호 제 세력이 결국 구대문파의 위용을 능가하지 못하는 가를 알고 있나? 어쨌든 그 들은 강호에 위기가 닥치면 먼저 나서네. 힘의 소진을 감수하고서라 도…… 강호인들의 존경을 받지. 그 존경의 힘! 십시일반으로 도와주 겠다는 강호인들의 그 힘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처지 가 되어도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정도(正道)라고 생각하지 않 는가? 팽해만, 강호가 구절양장(九折羊腸)임은 너도 잘 알 것이다. 자네에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 같은가? 자네에게 어려움이 닥 치면 강호인들은 자네를 돕기 보다 자네의 살을 뜯는데 먼저 협조하 고 나설 것일세." "말이 너무 심하군." 팽해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했지. 구대문파, 너희들이 강호의 주도 세력 임을 자처했으니 당연히 먼저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니냐? 지금은 모두 우리 사패가 강호의 주도 세력이라고 한다. 그러나 움직이는 자가 없다. 누구는 협조를 기다리고 누구는 한림(閑林)을 어슬렁거리다가 이제야 칼을 뽑았고. 구대문파는 벌써 의창에서 구룡선, 마인거와 일 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던데……." "구대문파의 처세가 무척 부러운가? 그럼 그렇게 행동하게. 숭무각 에서 배우는 것과 승룡방에서 배우는 것은 무척 다른 모양이군. 나는 이렇게 배웠다. 웃을 수 있는 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최후에 살아 남 는 자다! 제왕(帝王), 권신(權臣), 거부(巨富)들의 처세를 한 번 돌 이켜 보게나." 팽해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껄껄껄! 생각하는 것이 다르니 보는 것도 다른 모양이군. 알았어! " 남궁기는 자신의 무릎을 쳤다. "더 이상 할 이야기는 없을 것 같고…… 한두 가지만 이야기해 주 겠네. 언상영이 말했어. 황하 대상련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야." "으헤헤헤,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 다른 것은……." "나는 자네가 이렇게 우습게 변한 이유를 원주를 우습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원주를 우습게 생각한 적은 없다!" 탁! 팽해만은 술잔을 탁자에 거칠게 놓았다. "다행이군. 우습게 생각하지 않는다니…… 원주는 무서운 분일세. 기억나는가? 배교를 처단할 때의 일을…… 어느 날, 한순간 모든 것 을 날려 버렸다. 우득용과의 의리, 죄 없는 배교도들을 처치한다는 죄책감, 모산파의 숱한 목숨, 우리들 앞에 지키고 싶었던 당신의 체 면…… 그 모든 것을 폭풍으로 날려 버렸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알고 있겠지. 원주의 기분! 당신의 기분이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을 초 토화시켰다. 조심하게. 원주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경고도 잘 주지 않는 분이다." "……." 술잔을 채우던 팽해만은 못으로 심장을 찔린 듯 움찔했다. 그가 멍 한 눈빛으로 남궁기를 바라보았다. "강호의 소문을 들으니 구룡선, 마인거는 언상영이 말해 준 것 보 다 몇 배는 강해 보이더군. 솔직히 두렵다. 두렵기 때문에 네가 부럽 기도 하고…… 구룡선, 마인거의 위용이 그와 같은데 앉아서 잔머리 나 굴리고 있는 자네가…… 나라면 앞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다른 생 각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게야." 남궁기는 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팽해만은 잡지 않았다. "잘 가게." 그는 앉은 자세에서 손만 들었다. 남궁기는 말없이 내당을 나섰다. 내당의 문을 열던 그는 무슨 생각 이 났는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팽해만, 잊은 것이 있다. 언상영과 약속한 것이 있어. 자네를 위해 한가지 해 주어야겠다고 한 일이 있거든. 그 일을 해도 괜찮겠 는가?" "나를 위하는 일인데 내가 막을 이유가 무엇인가? 이상한 짓만 하 지 않는다면……." "알았어!" 남궁기는 뚜벅뚜벅 인창, 사곤이 있는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팽해만은 서너 잔의 술을 더 들이켰다. 그때였다. "으악!" 하는 비명이 별채를 울렸다. "남궁기!" 팽해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명을 지르게 한 자와 비명을 지른 자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생각하니 잘 있으라는 말도 못했더군. 잘 있게." 담장 너머로 남궁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리고 수급 하나도 따 라서 담장을 넘어왔다. 학대통의 목이었다. "개자식!" 와장창! 팽해만은 술상을 걷어차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방주! 방주!" 봉두난발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자는 정 장로였다. "무슨 일입니까?" 등중용은 안색부터 찌푸렸다. 정 장로가 들고 오는 칠결전을 본 것 이다. 결전(結傳)은 이제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한 터였다. "이것 보시오! 이것……." 칠결전은 장로들도 볼 수 있다. 정 장로가 허겁지겁 칠결전을 가리 켰다. 등중용은 벌레 보듯 씁쓰름한 표정으로 칠결전을 살폈다. 칠결전을 읽던 그가 눈을 번쩍 떴다. "정 장로, 맞는 말입니까? 구룡선, 마인거가 배교의 잔당들이라는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나, 나도 도저히…… 구, 구룡선과 마인거가 배교와 관련이 있다 니…… 방주, 맞습니까?" 정 장로가 오히려 물었다. '배교…… 배교…….' 등중용은 이 장로가 없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의창에는 그가 직접 가려 했다. 그러나 이 장로, 상 장로는 당신들이 가야 한다며 부득부 득 고집을 부렸다. 정 장로와 마 장로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나 서는 바람에 결국 의창에는 그들이 갔다. 그런데 하필이면 배교의 사 정에 비교적 정통한 자가 이 장로였다. 이 장로를 부를 수도 없고… …. "방주!" 부르는 자도 많았다. 허겁지겁 달려오는 자는 집법당주였다. "방주! 구룡선, 마인거에 탄 자들은 배교도라 합니다! 강호에 소문 이 쫙 퍼졌습니다!" 집법당주가 숨 넘어 가는 소리를 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던가 보군요. 강호의 소문이 칠결전만큼 빠르니 ……." 등중용은 쓴웃음을 지었다. "칠결전이 도착했습니까? 그럼 소문이 틀림없겠군요. 어떻게 배교 도들에게서 그런 힘이……." 집법당주의 의문도 마찬가지였다. 배교라면 등중용도 조금 알고는 있었다. 이정인, 명강량 같은 특출 한 마옹도 있었다. 그러나 그 자들 말고는…… 하오문 이상의 평을 내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하오문도 십 여년 전의 대공세 때 사라 져 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무엇합니다만…… 구룡선, 마인거가 배 교라니 조금 안심은 됩니다. 전대 방주의 지시로 우리 개방은 배교에 칼을 들이밀지 않았지요. 배교와 연분을 가졌던 방도들도 적지 않고 ……." 집법당주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도 싸우지 말자는 말입니까?" "아니, 내 말은 그것은 아니고…… 다른 산의 괴물들 보다 배교도 이어서 조금 안심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구룡선, 마인거가 강호에 적 신 피가 얼마입니까. 당연히 싸우기는 싸워야지요." 집법당주는 황급히 변명했다. "미친 놈!"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정 장로가 일갈을 터뜨렸다. "방주……." 정 장로는 등중용을 불렀다. 어눌한 표정이 아니었다. "늙으면 역시 죽어야 하오. 이제야 그들의 이름이 생각나는 것을 보니…… 나백염왕! 탈명마효!" 정 장로는 안광을 빛냈다. "나백, 탈명?" 등중용과 집법당주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배교도들이오. 세상을 시산혈해(屍山血海)로 만든…… 잊고 있었 어. 잊고…… 배교에는 세상을 뒤집을 힘이 있다는 것을…… 나백과 탈명의 후인이 나타난 게야." 정 장로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순간, 등중용의 안색도 변했다. - 배교는 기억하기 싫을 정도의 개세마두를 출현시켰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나…… 그들은 칼로 배교천하를 꿈꾸며 세상을 시산혈해로 만들었지. ……어떻게 하오문인 배교에서 그런 자들이 나타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모두 하나의 사실은 알고 있지. 배교에 다시 그런 자 가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 강호인들이 배교를 하오문으로 취급하 면서도 은근히 두려움을 가지는 이유다. 때문에 강호인들은 배교 척 결하면 칼부터 찾지! '잊고 있었다.' 등중용은 사백조, 원상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장로, 상 장로가 위험하다!' 휙! 그는 지체없이 신형을 뽑았다. 그의 앞에는 바람 소리를 내며 달리는 또 하나의 인형이 있었다. 정 장로였다. 정 장로도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 그들이 왔다. 그들이! 아홉 마리의 용을 돛으로 삼은 배와 여덟 개의 바퀴와 여덟 필의 말이 질주하는 마차를 타고…… 열사의 땅에서 날아온 사악한 불길, 그 불길을 이어받은 나백과 탈 명의 후예, 배교! 강호는 또 한 번 구룡선, 마인거로 크게 술렁였다. 나백과 탈명의 후예로 나타난 배교는 이미 하오문인 배교가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 는 오래 전부터 강호인들이 익숙하게 불렀던 이름이 따로 있었다. 마교(魔敎)! 마왕(魔王)을 추종하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살귀들……. 바로 그들, 그들의 출현이었다. 제33장 전야(前夜) 양백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가만히 수염을 쓸었다. 며칠 동안 무 척 바빴었다. 팽해만은 사패라 이름 붙여질 만 했다. 대상련의 공세에 무척 놀랐겠지만 양백 역시 팽해만의 공세에 놀라 야 했다. 옥림장(玉林莊)의 괴멸! 한밤에 복면 괴한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흉수는 아무런 흔적도 남 겨 놓지 않았다. 그러나 옥림장을 폐허로 만든 자들이 승룡방임을 모 르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팽해만의 무지막지한 공격에 대상련의 상인들은 당황했다. 싸움을 멈추어야 한다며 아우성을 쳤다. 미친 돼지의 칼날이 다음에는 자신 에게 떨어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돈푼 뜯기는 일이 목숨을 잃 는 일 보다 나을 테니……. 그러나 양백은 대상련 상인들의 긴급한 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계속 싸울 생각이었다. 황하 대상련의 자경대인 호상련의 대부분은 양백의 영향력 안에 있 었다. 엄밀히 말해 호상련은 타랍하라는 보표장(保　長)이 이끄는 자 신의 보표들과 같았다. 때문에 상인들은 어쩔 수 없이 싸움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산발적인 공방전이 벌어졌다. 대체로 패배는 호상련의 몫이었다. 양백은 개의치 않았다. 서로의 의중을 묻는 탐색(探索)의 시기에 불 과했기 때문에……. 양백은 그 탐색전이 제법 오래 갈 줄 알았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 지 승룡방이 공세를 딱 멈춘 것이다. 또 충격적인 새로운 일을 꾸미느라 주춤한 것인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시도하기 위해 칼을 내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팽해만의 승룡방이 잠잠했기 때문에 양백도 오랜만에 망중 한(忙中閑)을 즐길 수 있었다. 원래는 위령비를 보기 위해 모산 근처의 재접봉에 내려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사태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 금적보를 비울 수 없었다 . 양백은 의자에 앉아 줄곧 팽해만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를 생각하 고 있었다. 그의 생각 역시 팽해만과 다를 바 없었다. 세상의 이목을 확 집중시킬 충격적인 일을 꾸밀 것인가, 화해를 청할 것인가. 아무래도 마음은 전자 쪽으로 기울었다. 팽해만이 뜨끔하고 강호인 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을 수 있는 일……. 생각 같아서는 승룡방의 문전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호상련의 힘 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역시 팽해만의 분신과도 같은 수룡표국을 치는 일이 가장 적당하리라. 타랍하에게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수룡표국이 무너진다면 팽해만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올 것 이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정 들었던 금적보가 불에 타는 꼴도 감수해 야 할 것이다. '감수하지.' 금적보에 특별한 미련은 없었다. 대상련의 동료 상인들은 묻는다. 너무 악착같이 승룡방을 물고 늘 어지는 것이 아니냐. 이해 득실을 항상 손금 위에 올리고 있는 그들 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양백은 자신이 악착같음을 인정했다. 타랍하가 말했다. 보주는 지난날의 원한을 아직 잊지 않고 있군요. 유향경천문에 의해 불타 버렸던 배교……. 지난날의 분노가 남아 있었던가? 양백은 타랍하의 말을 시인했다. 평화롭던 시기에 호상련의 건설에 힘을 썼던 이유도 다름 아닌 배교 부흥의 그날을 생각해서였다. 교 단이 재건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 호상련을 교의 방패로 쓸 생각 도 가지고 있었다. '성녀…….' 성녀를 떠올리는 양백의 가슴은 고황 들린 가슴처럼 아팠다. 양백은 황하에서의 일을 생각했다. 꿈 같은 일이었다. 타랍하의 증언이 없고 가슴을 결리던 통증이 깨 끗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는 정말 꿈으로 믿었을 것이다. '꿈이 아닐 것이다. 성녀의 능력이면 교룡들도 부리고 남지. 나 같 이 추악한 자의 마음도 잡아 주신 분인데…….' 전귀(錢鬼)에 불과하던 그가 대홍수 때를 비롯 수많은 사람들을 구 제하게 된 이유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또렷하게 떠오르는 성녀의 눈빛 덕이었다. 어쨌든 감사했다. 성녀께서 잊지 않고 자신을 찾아 준 데 대해……. 교를 위해 일할 날은 언제 이런가? 망중한을 즐기는 지금 주위로도 한 번 눈길을 돌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암왕이 어디쯤 왔는지……. 양백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보주!" 타랍하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이상한 자가 나타나 꼭 보주를 뵙겠다고 하더군요. 안된다고 하자 이것을 보여주면 만나 줄 것이라 하며 물건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팽해만은 워낙 음흉한 놈이라 제가 먼저 그 물건을 살폈습니다. 이 상은 없는 물건입니다." 그는 철패를 내밀었다. '명'이라 새겨진 녹슨 철패였다. 예전의 총관, 종현수는 밀실을 불태움으로써 배교의 모든 것을 가 져갔다. 그러나 눈앞의 철패와 같은 철패만은 가져가지 못했다. 홍동 에서 명옹을 보기로 했을 때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 위해 들고 갔기 때문이다. 녹슨 철패는 배교 명두들의 신물이었다. 뒷면을 자세히 보니 '섬서 '라는 글자가 나왔다. 그를 찾아온 자는 섬서 명두인 듯했다. 악에 받친 교도들이 언젠가 한 번 금적보를 찾아오리라 생각했었다 . 그러나 결국 아무도 금적보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양백은 교의 뿌 리가 완전 사라진 것이 아닌가라고도 생각했다. 십 몇 년만에 처음 보는 교도…….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함께 아이처럼 가슴이 설렜다. "서둘러 모셔라!" 양백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단아한 자였다. "섬서 명두, 유공경이 말씀으로만 듣던 양 명두를 뵙습니다." 그가 포권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초로(初老)를 바라보는 단아한 중년인은 유공경이었다. 감 명두를 제외한 명두들을 모아 놓고 명옹께서 황산 총단의 재건 을 명했다는 사실을 알린 사람은 산서 명두를 자처하는 전 명두였다. 명두들은 크게 기뻐했다. 성녀께서 돌아왔으니 당연히 성녀의 거소 는 마련되어야 했다. 적들의 침공이 걱정되었지만 구룡선, 팔륜거라 는 든든한 힘도 이제 존재하는 터였다. 당장 금적보로 찾아가기로 결 론이 났다. 유공경, 자신이 그 심부름을 맡을 자로 정해졌다. 유공경 은 감 명두를 보내는 것이 나을 것이라 말했다. 그간의 자세한 사정 도 이야기해야 하니…… 그러나 전 명두는 한시가 급하다며 억지로 자신의 등을 떠밀었다. 감 명두는 다른 맡은 일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금적보를 찾는 일은 자신에게 맡겨졌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갈패옥에서 하남의 금적보까지 한달음에 달려온 터였다. "명두라…… 그렇게 불러 주니 고맙소." 양백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진작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모두 각자의 일에 바빴 습니다." 유공경은 거듭 인사를 했다. 적의(敵意)가 없어 보일 뿐 아니라 정말 같은 교도로서 반가움을 표시하는 듯했다. 때문에 양백의 송구함은 더했다. 왜 교를 떠났느냐 고 화부터 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불쑥 찾아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어려운 부탁을 하고자 해 서……." 유공경은 양백을 잔잔히 바라보며 말에 뜸을 들였다. "지난 일에 대한 책임은 이미 질 마음이 되어 있습니다. 개의치 마 시고 말씀하십시오." "제가 어찌 책임을…… 누가 누구에게 책임을 묻겠습니까? 그 시절 의 풍파가 그랬던 것을…… 내가 양 명두를 찾은 까닭은 명옹의 말씀 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명옹?" 양백은 미간을 좁혔다. "아! 그렇지, 그렇지…… 십 몇 년이나 지난 세월, 호교신장의 자 리를 계속 비워 두시지는 않았겠지요. 나의 교에 대한 기억이 이렇소 . 항상 십 몇 년 전에만 머물러 있소이다. 그래, 새로운 명옹께서 제 게 하신 말씀이……." "새로운 명옹이 아닙니다. 양 명두께서 모시던 그 명옹이 맞습니다 . 나는 그분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왔습니다." "……." 양백은 말을 잃었다. 황하에서는 교룡을 자처하는 자들로부터 화형 을 당했다던 성녀의 전언을 받았고 금적보에서는 참수를 당했다는 명 옹의 명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세월이 뒤집혀 흐르고 있는지……. "죽은 줄 알고 계시겠지요. 참수를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장 강에 배를 띄우고 계십니다." 유공경이 말했다. "아, 아!" 양백은 깊은 탄식을 터뜨렸다. 반가움, 두려움……. 온갖 감정들이 난마처럼 얽혀 가슴을 휘젓고 다녔다. 그는 감정의 기폭(起爆)을 억 누르기 위해 머리를 숙였다. "명옹께서는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에 무척 화를 내었겠군요." 그가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말씀은 없었습니다. 단지 명옹께서는 양 명두께서 황산에 총 단을 재건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을 따름입니다. 예전 보다 더 큰 성 전(聖殿)을……." "총단의 재건?" 양백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명옹께서는…… 명옹께서는…… 이 추악한 늙은이를 잊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총단 재건이라는 중임까지 맡겨 주셨구려." 그의 노안(老眼)에 물기가 번졌다. "명옹의 청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이러다 뿐입니까!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총단을 짓는 일에 매달리겠소! 이런 영광이 죽기 전에 주어지다니…… 감읍(感泣) 할 따름입니다!" 양백은 격동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유공경은 가만히 양백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거짓 없는 마 음이 느껴졌다. '교에 대해 이토록 애착을 가지고 있는 분인데…… 진작 찾지 못한 것이 한이군.' 그는 양백을 늦게 찾은 것을 후회했다. 누구나 몇 번은 교를 등질 때가 있다. 최소한 세 번은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전대 명두의 말이 떠올랐다. "잘 좀 지어 주십시오. 성녀께서 머물 곳입니다." "성녀?" 양백은 명옹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보다 더 놀라워했다. "성녀께서도 몸을 보전(保全)하고 계십니까?" 그가 유공경의 손을 거칠게 잡으며 물었다. 얼마나 거칠게 잡았던 지 만약 양백의 손이 둘이었다면 유공경의 손뼈는 부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유공경은 웃었다. 짐작이 맞았다. 양 명두가 성녀의 출현을 모를 것 같아 일부러 그런 말을 한 터였다. "새로 오신 성녀입니다. 전대 성녀께서 천상제로 얻으신 어린 성녀 이시지요. 동관에 쭉 발이 묶여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가 모셔 왔습니다." 유공경은 특별히 '우리'를 강조했다. 성품이 물 같이 담백한 그도 성녀를 찾은 일만은 자랑을 감추지 않았다. "아, 아…… 그랬었군요." 양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성녀라는 말에 조금 맥이 빠지는 듯했으나 그는 곧 노안을 빛냈다. "성녀께서도 오시고 명옹도 오시고…… 이제 황산에 총단이 들어서 는 일만 남았습니다. 빨리 황산에 총단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 싶군요 ." "아무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겠소!" 양백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 그가 기다리던 자는 암왕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앞에 나타 난 사람은 반대로 성녀와 명옹이었다. 그는 성녀와 명옹의 출현에 흥 분하여 잠시 꽃배가 실어 나른 전대 성녀의 부탁을 잊고 있었다. * * * 짙은 물안개가 갈주패를 감쌌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감악은 혼동 속에서 침묵으로 서 있었다. 감악 일행은 갈주패에서 며칠을 머무르고 있었다. 중원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길이니 성녀의 행렬이 누추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만인촌에 서 왔다는 구루 노관, 방환의 주장이었다. 방환의 주장에 특별히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총단도 없는 이 마당 에 서둘러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방환은 십위병, 삼십육호교사라는 자들을 중심으로 강호인들을 위 압할 새로운 배를 만드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머지 자들은 각자의 생각 속에 갈주패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갈주패에 움직이는 자들은 만인촌에서 온 교도들밖에 없는 듯했다. 방환도 바빴지만 쌍혼도 바빴다. 불사혼이라는 자는 연신 성녀 주 위를 기웃거리며 도화라는 여인에게 성녀의 안부를 물었다. 불패혼이 라는 자는 갈주패에 없다. 정파를 자처하는 강호 제 세력이 의창에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동정을 염탐하러 먼저 길을 나서고 없 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발적으로 분주하게 움직이 고 있었다. 감악은 만인촌에서 온 자들의 행동이 조금 신기하게도 보였다. 그 들은 수가 많아도 명옹이나 전우삼의 기세에 질려 외톨박이처럼 구석 진 곳을 어슬렁거렸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있 으니……. 삼협을 넘으며 중원 배교나 일지국 여인들, 모두가 동색(同色)임을 느낀 듯했다. 좋은 일로 받아 들여야 할 것 같았다. 만인촌에서 온 자들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것 같고 문제는 감악, 자신이었다. 가슴이 답답했고 허리는 무거웠다. 가슴에는 전교영기가 있었고 허리에 걸린 칼은 신장도였다. 명옹과 싸운 후 홧김에 차 버린 것이 이제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풀 수 없게 되었다. 자신이 신장도를 찬 데에 대해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전우삼이 와서 '멋지군'하며 한마디 해 준 외에는……. 그날 선실에서 만난 이후 감악은 아직 명옹을 보지 못했다. 부르지 않는 것을 보니 당신의 생각에 전혀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 생 각을 하자 또 울컥 울화가 치솟았다. '황산 총단의 재건은 무슨!' 자신에게는 한마디 말도 않고 유 명두를 금적보에 보낸 전우삼에게 까지 화가 났다. 전우삼은 여전히 명옹, 명옹하며 교를 무시하는 그 배교자의 뒤를 종종 따르고 있었다. '이해를 해 주시오. 나는 조금 명옹의 기분을 알지. 주 명두가 죽 었을 때 나의 기분이 어땠을 줄 아시오? 명왕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 이지 않았소. 명왕을 찾기 보다 나백과 탈명을 먼저 찾았지. 화정이 죽은 줄 알았을 때는 더했소. 생각해 보시오. 감 명두! 명옹은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목숨으로 지켜야 할 성녀를 잃었소. 그 기분이 어떻겠소? 나는 이해를 하지. 암! 아무렴!' 분명히 교와 성녀를 짐으로 안다는 말을 듣고도 명옹을 옹호하는 데 대해 힐난을 하려 하자 전우삼이 한 말이었다. 감악은 전우삼의 말이 전혀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리고 명옹의 말을 액면(額面)으로만 받아들여 이해를 거부한 것도 아 니다.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무척 노력했다. 과거도 떠올려 보았다. 과거의 명옹은 어떠했는가? 교와 성녀에 대 해서는 끝없는 헌신을, 적들에 대해서는 무쇠 같은 용력을…… 옛 일 을 돌이키면 분명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변할 분은 아니었다. '그래 성녀를 잃은 충격이 컸겠지.'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영원히 명옹은 교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염려가 감악의 마음에는 여전히 존재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생각해 보니 명옹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은 자신뿐인 듯했다. 만인촌, 일지국의 지파들은 누구 하나 명옹의 처신에 대해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명두들도 마찬가지였다. '헤헤헤! 감 명두, 지금 다른 생각을 할 때인가? 의창에 놈들이 우 글우글 모여들고 있다는데…… 피해 갈 수 없는 싸움이다. 승기를 잡 지 못한다면 놈들은 계속 우리를 넘볼 게야. 조금 지나친 말이라 생 각은 되지만…… 명옹이 우리 교를 믿지 않으면 어떤가? 적과 싸워 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만족이야. 존경의 마음도 버리지 않을 것 이다. 우리 교도도 아닌데 우리 일에 뛰어들어 도와주고 있는데 얼마 나 고마운가. 감 명두, 편하게 생각하라. 명옹의 본 바닥이 어디 가 겠나.' 전우삼은 또한 그렇게 말했다. 감악은 부러웠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전우삼이…… 교의에 너 무 결백하다는 평을 들을지라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슴속의 심화가 풀리지 않았다. 결국 감악은 생 각의 고삐를 놓았다. 전우삼의 말이 맞는 듯했다. 우선 의창에서 벌어질 적과의 일전을 준비하는 것이 더 급선무다. 의창의 일전은 향후 배교의 운명을 결정지을 싸움이 될 것이다. 그리 고 명옹의 일은…… 답답했으나 조금 더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성 녀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더니……. 명옹이 저런 모습으로 나타날 줄 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성녀시여, 광명계에 계신 전대 성녀시여! 청 정광명세계명존의 힘을 빌어 명옹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소서!' 감악은 큰 한숨을 들이쉬며 하늘을 향해 팔을 내밀었다. 갈주패의 물안개가 감악의 손짓을 따라 흔들리며 조금씩 길을 보였 다. 예령은 눈을 떴다. "이야!" 그녀는 탄성을 터뜨렸다.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짙은 물안 개가 선창에 가득했다. 동관에서도 물안개는 제법 보았었다. 그러나 갈주패만큼 짙은 물안개는 처음이었다. "음……." 예령은 선실을 왔다갔다하며 눈빛을 빛냈다. "하하하!" 그녀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물안개 속에 숨어 있 다가 불쑥 나타나 사람을 놀래 주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예령은 신바람을 내며 선실문을 나섰다. 그녀의 좌우 선실에는 도 화와 아란하가 있다. "배 밖으로는 나가지 마십시오!" 도화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모시겠습니다." 도화의 염려에 대답하는 자는 아란하였다. "어험!" 도화는 헛기침을 했다. 아란하에 대한 그녀의 심기는 조금 불편한 편이었다. 어린 아가씨가 이제 자신 보다 이족의 여인과 같 이 있기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나이가 있으니 그 섭섭함을 밖으로 나타낼 수는 없고……. 도화는 어린 아가씨와 아란하라는 여자가 선실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아란하, 내가 보여요?" 뱃전을 뽀르르 오르며 예령이 물었다. "보이지 않습니다." 아란하가 웃으며 말했다.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발걸음 소리로 그 녀는 예령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아란하, 나를 찾아보세요." 예령이 물안개 속을 뛰었다. "조심하십시오. 잘못하면 배에서 떨어집니다." 아란하도 뱃전을 올랐다. "조심할 테니 조금 후에 찾으세요!" 예령은 손을 흔들었다. "알았습니다." 아란하는 미소를 지었다. 예령의 장난이 그녀의 기억을 유년(幼年) 으로 되돌려 놓고 있었다. 그녀는 예령이 숨을 동안 물안개로 자욱한 장강의 수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예령은 발걸음 소리를 죽이며 걸었다. 물안개의 찬 감촉이 너무도 상쾌했다. 그녀는 새끼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이물을 향해 갔다. 몇 걸음을 더 옮겼을 때였다. "어!" 예령은 흠칫 놀라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물안개 속에 돌연 한 사람의 신형이 보였다. 불쑥 나타나 사람을 놀래 주려던 것이 그 녀가 오히려 놀란 것이다. "아!" 용두(龍頭)에 표표히 서 있는 자는 바로 어머니의 호교신장 이었다. 예령은 숨을 죽인 채 그를 응시했다. 호교신장은 누가 자신을 보고 있는 줄 모르는지 용두에 서 석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저씨……." 예령은 두 손을 모으며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아저씨…….' 명강량의 귀에 예령의 목소리가 닿았다. 어린 성녀가 왔음을 모르 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을 보지 못한 척 지나가 주기를 바랬었 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은 척 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몸은 벌써 어린 성녀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명강량의 무저갱처럼 깊고 무심한 눈빛과 예령의 맑은 눈빛이 물안 개를 사이에 두고 얽혔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을 지켰다. "성녀……." 아란하가 예령의 뒤에 나타났다. 그녀도 명강량을 보았다. 성녀와 대전왕은 서로를 마주보며 침묵하고 있었다. 아란하는 이 자리가 자신이 있어서는 안될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조용 히 뒤로 물러났다. 예령은 어머니의 호교신장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때였다. 푸드득! 파다다닥! 물안개 속으로 경쾌한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아!" 예령은 탄성을 터뜨렸다. 흑백조, 채색조, 낙조! 물안개 속을 비행하는 새들은 바로 그 새들 이었다. 예령은 손을 내밀었다. 휘 - 익! 휘 - 익! 낙조가 반갑게 울며 예령의 손에 둥지를 틀었다. "어!" 낙조를 쓰다듬던 예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물안개를 채홍색으로 빛내며 채색조가 날아간 곳은 호교신장의 어 깨였다. 흑백조는 여전히 물안개 속을 비행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그 새를 아시는가 보죠?" 예령이 흥분으로 눈빛을 빛내며 명강량을 향해 다가섰다. 명강량은 손을 내밀었다. 어깨에 앉아 있던 채색조도 명강량의 손에 둥지를 틀었다. 예령은 낙조가 앉아 있는 손을 채색조 앞으로 내밀었다. 예령의 손끝이 체온이 느껴질 거리까지 가깝게 명강량의 손끝에 접 근했다. 채색조가 부리로 낙조의 깃털을 골라 주었다. 명강량의 심장은 크게 꿈틀댔다. 영원히 침묵할 것 같던 그의 입이 열렸다. "이 새는 명조라는 새입니다. 성녀의 어머니께서 키우던 새입니다. 성녀의 손에 있는 새도 성조(成鳥)가 되면 채색 빛깔을 가질 것입니 다."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 아! 그렇군요. 어머니의 새……." 예령은 다른 손으로 명조를 쓰다듬었다. 손과 손이 닿았다. 모든 피가 역류하며 명강량의 심장을 압박했다. 명조를 앉힌 손에 힘이 들어갔다. 흑백조는 두 눈을 번뜩이며 낮게 비상하고 명조는 푸드득 하늘로 치솟았다. 영문을 모르며 낙조도 따라서 비상했다. 명강량은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예령은 명강량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생각의 파편 하나를 주웠다.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지금 다른 세계에서 무척 행복해 한답니다." 그녀가 안타까움으로 말했다. 명강량은 말이 없었다. 물안개가 그의 몸을 감쌌다. 명강량의 뒷모습을 보며 예령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어머 니가 전하라는 물건을 전해 줄 때임을……. 예령은 후다닥 선실을 향해 뛰어갔다. "아란하!" 명강량은 거칠게 아란하를 불렀다. 아란하가 다급히 다가왔다. "배를 띄워라!" "방 노관이라는 분이 새로운 배를 만들고 있습니다. 진수(進水)를 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 없다!" 명강량은 아란하의 간이 오그라질 정도의 분노를 터뜨렸다. 휙! 명강량은 신형을 날렸다. 그가 돛대 끝에 섰다. 아란하는 돛대 끝에서 붉은 기운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우르르…… 쾅! 콰쾅! 방환을 비롯 만인촌의 식솔들이 애써 만들던 배는 잠깐 사이에 난 파선(難破船)으로 변했다. "무슨 일이요? 무슨 일?" 괴성에 놀란 전우삼이 허둥지둥 달려나왔고 다른 자들도 뱃전으로 뛰쳐나왔다. "대전왕께서 출전을 명했습니다." 아란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출전? 좋지! 그렇지 않아도 몸이 근질근질 했다. 어이, 어이, 어 이! 돛을 올려라!" 전우삼이 갈주패가 떠나갈 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물안개 속에서 영문도 모른 체 교도들이 움직였다. "아란하……." 돛대 끝을 바라보며 예령이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언제나 애지 중지 하는 함이 들려 있었다. "대전왕께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선실로 들어가시지요." 아란하는 예령의 어깨를 안고 선실로 향했다. "내가 그분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요?" 예령이 우울해 하며 물었다. "아닙니다. 마음이 없는 자는 화를 내지 않지요. 나는 대전왕이 마 음이 없는 분인 줄 알았답니다. 그러나 오늘 저렇게 화를 내시는군요 . 성녀께서 굳어 있던 그분의 마음에 그 무엇인가를 불러온 모양입니 다."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아란하가 말했다. * * * 파르르…… 팟! 거센 강바람에 깃발은 찢어질 듯 휘날렸다. 오색으로 펄럭이는 깃 발은 한둘이 아니었다. 투두두두두! "이랴!" "이랴!" 또 한 떼의 인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도검을 철컹이며 대를 지어 움직이는 무사들, 우렁찬 함성……. 사해오악(四海五嶽)의 모든 문파들이 모여든 듯했다. 이런 장관은 조충국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흥분으로 심하게 뛰었다 . 의창에서 제법 떨어진 넓은 습지(濕地)였다. 생사대전(生死大戰)의 결전 장소로 잡힌 곳! 의창의 성시를 끼고 싸우면 범인들이 놀랄 것 을 우려 이런 외진 장소가 정파 제 세력의 결집 장소가 된 것이다. 열을 지어 움직이는 무사들은 하나 같이 안광이 형형했고 관자놀이 가 불쑥했다. 만만히 볼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사숙 앞 에서는 먼저 머리를 숙였다. 오랜 폐관 끝에 출관한 사숙을 그들이 어찌 알랴! 그들의 경의(敬 意)는 매화 문양의 도복, 화산파에 대한 경의에 다름 아니었다. 사문 에 대한 자긍심에 가슴이 뿌듯했다. 구대문파에 대한 자부심도 가슴 을 채웠다. "사숙, 사패가 강호의 주인인 척 떠들어도 결국 우리 구대문파에는 미치지 못하군요. 사패가 일전을 선언한 장소에도 이만한 강호 동도 들이 모여들지 의문입니다." 조충국은 뿌듯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사패가 일전을 선언한 장소에는 당연히 이만한 문파들이 모여들지 는 않지. 강호의 신의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신 의를 지키기 위해 사패 보다 먼저 우리가 칼을 뽑았고……." 장문천이 말했다. "사숙, 정말 굉장합니다. 마교 놈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뼈를 묻고 말 것입니다." 조충국은 주위를 둘러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담하지 마라. 강호 제 문파들이 서둘러 사람을 보낸 이유가 무 엇 때문인지 아느냐? 구대문파에게만 일을 맡기기에는 상대가 너무 강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 "마교 놈들이 그렇게 강합니까?" "나백과 탈명! 배교도들은 삼백 년만에 그들의 이름을 걸고 나타났 다." 배교가 마교이고 마교가 배교다. 하지만 장문천은 여전히 배교라 부르고 조충국은 마교라 부르고 있었다. 대다수의 강호인들도 마교라 불렀다. 배교가 마교라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배교라는 이름에는 하오문의 냄새가 난다. 때문에 생사대전에 어울리는 이름은 배교가 아니라 마 교이어야 했다. "나백과 탈명이라는 마두들이 그렇게 강했습니까?" "강호사(江湖史)의 한 장을 혈사(血史)로 장식했지. 엄청난 힘이었 다." "그런가요?" 조충국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지금 장강을 항행하는 배교의 힘이 나백과 탈명의 힘 정도 라면 별 걱정할 일은 없겠지." "사숙! 사숙은 나백과 탈명이 출현한다고 해도 그들을 꺾을 자신이 있군요!" 조충국이 눈빛을 빛내며 소리쳤다. 장문천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백과 탈명도 결국 우리를 비롯한 구대문파의 공격에 목숨을 내 놓아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떨지……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에 오는 자들은 나백과 탈명 보다 더 힘이 강한 것 같구나. 싸워 보아야 알겠지만……." 그가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의 앞에는 휘장으로 둘러쳐진 천막이 있었다. 배교와의 일전을 위해 모여든 각 문파의 영수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긴급히 그 천막으 로 모이라 하는 것을 보니 갈주패의 배교도들이 드디어 움직임을 시 작한 모양이었다. 갈주패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하루면 충분하다. '잘하면 오늘 중으로 장강은 실컷 피를 마시겠군.' 장문천은 검을 툭툭 두드리며 눈빛을 빛내고 있는 홍안의 제자, 조 충국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제까지 네가 싸운 자들은 고작해야 파락호들 뿐이다. 지금 싸우 는 자들과 다르다." 장문천은 조충국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배교의 무리들을 상대로 쉽게 검을 뽑지 마라. 강호에서 한 번의 실수는 바로 죽음이다. 내가 너를 데려온 것은 안목을 넓혀 주기 위 해서지 싸우라고 데려온 것은 아니다. 배교도들을 처치하는 문제는 내가 맡을 것이다. 알겠느냐?" 그는 조충국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사숙, 여기까지 왔는데 가만히 있으라니……." "시끄럽다!" 장문천이 엄하게 소리쳤다. "쓴맛을 보면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강호는 쓴맛을 죽 음으로 다반사 요구하는 곳이라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알겠습니다." 조충국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기다려라." 장문천은 조충국을 남겨 두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조충국에게 한 말이 자신이 강호 초행 에서 들은 삼사형 우제준의 말과 비슷하다는 것을……. 강호의 피처럼 강호의 말도 돌고 도는 모양이었다. 장문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석에는 소림의 나한당주, 혜명이 앉아 있었다. 나이와 명성이라 는 관례에 따라 구파일방 연맹의 맹주(盟主)는 혜명대사가 맡고 있었 다. 혜명대사의 옆에는 무당의 양명자(陽明子), 양일자(陽逸子), 소림 의 혜오(慧悟), 혜철대사(慧哲大師)가 배석했다. 개방의 두 장로들도 보였다. 중간에는 군소방파의 문주들이 쭉 배석했다. 정각, 정진, 정명을 비롯한 '정' 자 배의 소림의 기라성 같은 무승 들, 명광, 명오…… 무당 '명' 자 배의 도장들도 형형한 눈빛을 빛내 고 있었다. 소림, 무당의 쟁쟁한 고수들을 바라보는 장문천의 입맛은 썼다. 그 와 동열(同列)의 속가제자 몇몇을 데려왔다면 머릿수는 비슷하게 채 울 자신은 있었다. 그러나 소림, 무당에 비교 힘의 우열은 메우지 못 했으리라. 아무래도 화산이 곽부와의 일전에서 입은 피해가 너무 큰 듯했다. 화산의 안뜰인 도림새에서 일전을 벌어졌다 하니 당연한 귀 결이겠지만……. "어서 오시오. 장 시주…… 이쪽으로 오시오." 소림의 혜명이 장문천에게 상석을 권했다. 배분으로 따지면 장문천 은 소림의 '정' 자 배 제자들이나 무당의 '명' 자 배 제자들과 함께 서야 했다. 그러나 장문천은 화산파의 이름을 건 자였기 때문에 상 석으로 불렀다. 장문천은 소림의 혜철대사 곁에 자리를 잡았다. "화산에는 더 이상 올 분은 없소?" 혜명대사가 물었다. "없습니다." 장문천이 대답했다. "자, 그럼 다 모인 듯하니…… 구룡선, 마인거를 실은 배가 갈주패 를 떠났다고 하오. 빠르면 하오(下午), 늦어도 밤까지는 이곳에 도착 할 것 같소." 역시 갈주패의 배교도들이 움직였다는 소식이었다. "중앙에는 나한진을 놓겠소. 우측에는 양의검진, 좌측에는 매화검 진, 여러 곳에서 오신 강호의 동도들 중 동에서 온 문파는 무당의 곁 에, 서에서 온 문파는 화산의 곁에 배치하려 하오. 개방은 배후를 맡 아 주셨으면 합니다. 어떻소?" 혜명대사가 좌중에게 의향을 물었다. 이것 또한 관례에 따른 진세(陣勢)였다. 이견(異見)이 있을 리 없 었다. "먼저 삼십육나한진(三十六羅漢陣)을 펼칠 테니 각기 자리를 잡아 주기 바라오." 나한진은 물론 양의검진, 매화검진도 숫자 보다 그 진법을 움직이 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위용이 결정된다. 백팔나한진(百八羅漢陣) 이 아닌 삼십육나한진이라고는 하나 나한진을 펼치는 자들이 소림의 중추를 이루고 있는 '정' 자 배 무승들이었기 때문에 그 위용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양의검진을 이루는 자도 '명' 자 배라 나한진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할 것 같았다. "각자의 자리를 잡기 전에 각별히 조심할 말을 일러주겠소. 곤륜파 도 잿더미가 되었고 맹호전 역시 마찬가지였소. 무슨 이유인가 했더 니 침입자가 배교도였기 때문이오. 배교의 화마술이 어떻다는 것은 여러분들께서도 잘 아시리라 믿소. 나백과 탈명이 사용했던 겁화분을 기억해 주기 바라오. 지세(地勢)를 잘 이용해서 마화(魔火)에 대비 해 주기 바라오. 다른 강호의 동도들에게도 필히 전해 주기 바랍니다 ." "알겠습니다!" 군웅들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자, 이제 한 가지 일이 남았는데……." 혜명대사는 말에 뜸을 들이며 천천히 천막에 모인 자의 면목을 살 폈다. 소림, 무당의 젊은 용호(龍虎)들은 물론 군소방파의 문주, 명숙들 까지 긴장했다. 연맹에서 맹주 보다 더 중요한 일을 맡을 자가 결정 되려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적의 수괴를 상대할 자가 누구냐? 선임된 자에게는 구파일방 최고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벽사검 (　邪劍)이 주어진다. 수백 년의 세월 속에서도 푸른 정기를 쉬지 않 고 뿜어내는 그 검……. 혜명대사의 뒤에 있는 검가(劍架)에 걸린 고색 창연한 그 검이 바 로 벽사검이었다. 탈명의 난 이후 소림이 쭉 보관해 온 물건이나 이 번에 벽사검주(　邪劍主)가 바뀌면 벽사검도 주인을 따라 가야 한다. 때문에 벽사검주가 된다는 것은 개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문도가 자신의 문파에 받칠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이기도 했다. 모두 긴장으로 숨을 죽였다. 장문천의 생각은 문도들을 이끄는데 바빠 벽사검에까지 미치지 못 했었다. 그러나 갑자기 벽사검이 거론되자 그 역시 마음이 동하지 않 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좋겠소?" 혜명대사가 명숙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명숙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시선을 혜명대사 다음 으로 명망이 높은 무당의 양명자에게 모았다. 양명자가 모두를 대신 해서 벽사검주를 명하라는 뜻이었다. 양명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벽사검으로 마옹을 처치할 자는 이곳에서는 화산의 장 대협밖에 없는 듯 하오." 그가 장문천을 지명했다.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장문천에게 쏠렸다. 질투와 부러움이 섞인 시선이었다. "허허허! 양명 도우(道友)의 생각은 모든 우리와 같소. 화산의 장 시주는 벽사검을 받으시오." 혜명대사가 벽사검을 장문천에게 건넸다. 장문천은 담담한 표정으 로 벽사검을 받았다. 입으로 떠들지 않아도 고인(高人)은 고인을 알아본다. 그러나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가 있다. 문제는 안목이 바닥임을 알면 침묵 하기라도 해야지 어디서나 꼭 자신의 미천함을 표시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자는 무당의 명오였다. 그는 동년배인 화산의 장문천이 명숙들까지 제치며 벽사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가져야 할 물건이라는 표정으로 벽사검을 취 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숙, 양명자가 사형, 명광을 제치 고 장문천이라는 자에게 벽사검을 내려라 한 이유는 당신의 입으로 당신의 제자에게 벽사검을 내려라 하기가 쑥스러웠기 때문이라는 생 각도 들었다. 명숙들이 보는 앞이라 함부로 경거망동은 못하고 한마디 불평은 내 던졌다. "무당에도 벽사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은 있습니다." 명숙들과 군웅들의 시선이 일제히 명오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의 사숙인 양명자, 양일자에게도 쏠렸다. 양명자, 양일자의 얼굴이 잘 익은 감처럼 붉어졌다. '오냐, 오냐 하고만 키웠더니…….' 쾅! 양일자가 탁자를 쳤다. "명오! 네놈이 장 대협의 일 합만 받아 낸다면 나는 네놈의 경거망 동을 묻지 않겠다!" 그가 소리쳤다. 양일자의 말에 소림, 무당의 제자들, 군소방파의 문주들은 물론 명 숙들의 눈빛까지 빛났다. 소림, 무당의 제자들은 명오와 마찬가지로 과연 장문천이 벽사검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를 보고 싶었고 명 숙들은 기도(氣度)로서가 아닌 직접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이 있 었다. "사숙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는 장 대협을 상대로 검을 뽑지 않 을 수 없군요." 명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표정은 그랬으나 내심 바라던 일이라 명오는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이제 모든 자들의 시선은 장문천에게 쏠렸다. 장문천은 벽사검을 오른손에 들었다. 그는 승부를 위해 천막 밖으 로 걸어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는 명오의 곁에 이르러 우뚝 발걸음 을 멈추었다. "괜찮겠습니까?" 장문천이 명오에게 물었다. "물론이오." 명오는 웃으며 대답했다. 순간, 번쩍하며 푸른 섬광이 빛났다. 그 섬광을 본 자는 많지 않았 다. 혜명, 혜오, 양명자, 양일자는 "아!" 하고 탄성을 터뜨렸다. 개방 의 이 장로와 상 장로도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좋군." 장문천은 벽사검을 툭툭 쳤다. 그가 천막 밖으로 걸어나갔다. 명오는 주먹을 불끈 쥐며 승부를 위해 장문천의 뒤를 따랐다. "어디를 가느냐?" 양일자가 분통을 터뜨렸다. "사숙, 방금 비검을 해 보라고……." "머저리 같은 놈! 눈은 어디다 두고 있는 게냐? 네놈의 소맷자락이 나 보아라!" 양일자의 노화에 명오는 급히 자신의 소매를 살폈다. 멀쩡하던 소 매 깃이 깨끗하게 잘려 발아래 떨어져 있었다. "아!" 그제야 군웅들도 탄성을 터뜨렸다. "지렁이의 꼬리도 못되는 놈이 시샘은 많아서!" 양일자의 분노가 쏟아졌다. 명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때 내가 말했었지. 삼십 년 내에는 강호에 능운공작을 능가하는 자가 나오지 못하리라고. 잘못된 말이었다. 삼십 년이 아니라 능운 공작이 살아 있는 한이라고 말하는 게 옳았었어. 하지만 이제 그 말 도 틀렸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장문천…… 화산은 걸물을 키워 냈다." 혜명대사가 중얼거렸다. "자, 자…… 벽사검주의 위용이 보신 바와 같소. 배교쯤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다! 그들이 곧 들이닥친다고 하니 맹주께서 말씀하신 대 로 서둘러 움직입시다!" 개방의 이 장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맞는 말이오. 준비를 해 주시오." 혜명대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르르…… 팟! 깃발을 세차게 펄럭이고 군웅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장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는 벌써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 * * 책으로 가득한 서재였다. 동창(東窓)에는 잘 가꾼 난(蘭)이 서너 뿌리 놓여 있었다. 예광은 찻잔을 잡았다. 그가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찻잔을 기울일 때였다. 서재의 문이 열렸다. 유건을 쓴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단심원주, 언상영! 예광은 배교의 가장 큰 적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단심원에서 한가롭게 차를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다. "나를 찾으셨습니까?" "그렇소. 내가 바로 원주를 찾았소." "돌사자를 날려 버린 분이라 해서 안면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처 음 뵙는 분이군요." 언상영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수호석(守護石)을 날려 버린 데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오. 그런 소란을 일으키지 않으면 원주를 만나기 무척 힘들 것 같았소." "돌이 있는 한 돌사자야 또 만들면 되는 일이고 먼저 존성대명을 물어 보아도 되겠습니까?" "원주께서는 사람에 대한 의심이 너무도 없군요. 지금 나의 내력( 來歷)을 물어 어쩌겠다는 것이오?" 팟! 예광은 갑자기 장영을 뿌렸다. 붉은 장영이 언상영의 안면을 향해 쾌속 하게 뻗어 갔다. 그러나 언상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예광은 언상영의 눈앞에서 장력을 멈추었다. 그가 장력을 거두었다 . "명불허전(名不虛傳)이오. 껄껄껄!" 예광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하하하! 놀랐습니다." 언상영도 따라서 웃었다. 그가 의자를 흔들었다. 순간, 핑! 핑! 하는 소리와 함께 새카맣게 암기가 예광의 전신을 덮었다. 예광은 꼼짝할 수 없었다. 타닥! 탁! 탁! 그의 주변에 온갖 암기가 꽂혔다. "다른 재미있는 것도 있지요. 새로운 세계를 구경하고 싶다면 말씀 하십시오." "됐소! 아무도 진주 언가의 기관토목 솜씨를 경험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오." 예광은 본전도 못 건진 기분이라 쓴맛을 다셨다. "존성대명을 밝히기 싫습니까?" "밝히는 것이 서로의 믿음을 위해 낫겠지. 나는 불패혼 예광이라 하오." "손바람이 매서웠습니다. 문로 또한 물어도 되겠습니까?" "방금 보시지 않았소?" "글쎄요. 어디서 많이 본 듯은 한데……." "삼양장을 빨리 펼치면 방금 그렇게 되오." "삼양장……." 언상영은 눈살을 찌푸렸다. "맞소. 나는 배교도이외다. 배교 중에서도 팔륜거를 따르던 교도였 지. 쌍혼이 바로 나의 지위외다. 위로 노관과 전왕만이 존재하니 그 렇게 낮은 신분은 아니오. 원주와 협상할 지위는 된다고 생각하오." "……." 언상영은 팔짱을 끼고 천장으로 시선을 던졌다. 조금 마음을 가다 듬을 필요가 있는 듯했다. "오기 힘든 걸음을 하셨군요. 그런데 방금 협상을 말씀하셨습니까? " 그가 예광을 바라보며 물었다. "싸우기 위해서라면 내가 이곳에 올 필요가 없지!" "배교와 협상이라…… 고금에 마교와 협상을 벌였다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는 듯 한데…… 살기 위해 목숨을 구걸했던 자를 제외하면……." "최초의 사람으로 기록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당신들에 게 해(害)가 되는 일도 아니니.……." "그럼, 어디 들어는 보겠습니다. 서로 좋은 일이 있다면 당연히 그 길을 따르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소." 언상영은 어깨를 폈다. "한 사람의 목숨을 주겠소." "누구?" "구룡선주!" "대가는?" "없소!" 거래의 전부였다. 자, 이제 이 거래가 타당한 가를 생각해야 했다. 대가라도 바랬으면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으련만 대가도 바라지 않겠 다는 데…… 이런 거래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좀더 신중해 야 한다고 언상영은 생각했다. "구룡선과 마인거의 사이가 별반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적들의 내분이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 랑이가 버티고 있는 것은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괴로운 일이다. 배 교도가 아닌 마인거의 수족임을 특별히 강조하기도 했으니……. 예광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구룡선주(九龍船主)와 당신들이 마인거주(魔人車主)라 부르는 분 중 누가 배교의 수뇌인 것 같소?" "당연히 마옹이 수괴이겠지요." "수괴라는 말은 협상을 하는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인 것 같소 . 노관께서 나를 보낼 때 특별히 성질을 죽이라고 말씀하셨소. 나의 울컥하는 성격을 아셨기 때문이오. 마인거라는 말도 마음에 걸리오. 팔륜거라 불러 주시오." "그런가요? 조심을 하겠습니다." 언상영은 사람 좋게 웃었다. "어쨌든 맞았소.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우리를 이끄는 분이오. 구룡선주가 바로 그분이오." "아! 그렇군요." 언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짐작은 어김없었다. 배교의 주 도권을 가진 구룡선주, 그 주도권을 뺏으려는 마인거주……. '그들의 알력이 눈앞의 예광이라는 자가 나를 찾아오게 된 이유겠 지.' 사파 놈들이 큰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자멸(自滅)로 어이없이 무너지 는 또 하나의 꼴을 볼 듯했다. '음……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도 문제는 있군. 구대문파와 힘을 모 아 배교를 무너뜨려야 할 이 시점에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대비 뒷짐 만 지고 있으니…… 배교도들과 같은 생각을 한다. 내가 바로 사파인 가?' 딴 생각을 할 정도로 언상영의 마음은 느긋하게 풀어지고 있었다. 배교도들의 아귀다툼을 지켜보며 필요에 따라서는 구룡선주에게도 손 짓을 하리라는 계산까지 했다. 뿐만 아니라 이 배교도들의 내분을 강 호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데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까지 생 각은 미쳤다. 그러나……. "원래 우리 배교는 당신들이 아는 것과 달리 모두 한 색깔은 아니 오. 상세한 이야기를 하자면 길고 구룡선과 팔륜거가 한 뿌리지만 각 기 가지가 다르다는 것만 아시오. 문제는 팔륜거의 전왕께서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구룡선주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받쳐 버렸다는 것이 오." '마인거주가 구룡선주의 충복(忠僕)…….' 언상영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예측이 어이없이 빗나가고 있었다 . "이제 보니 당신들은 반대파도 아닌 상전까지 거역하는 역도(逆徒) 들이었군요." 그가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말 할 수 없다고 했소! 굳이 우리 내부의 사정이 궁금하다면 원주가 직접 알아보시오! 우리 배교는 무엇을 숨기거나 하지 않으니…… 어쨌든 나는 구룡선주를 없애는 일을 상의하러 왔소 !" 예광이 냉랭하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구룡선주를 없애는 일만 상의하기로 하지요. 나에게 바 라는 일이 무엇입니까?" 배교의 복잡한 사정이야 그들의 사정이고 언상영은 그들이 주겠다 는 선물을 챙기는데 우선하기로 했다. "구룡선주를 없애 주는 것!" "농담이 심하십니다. 당연히 우리는 구룡선주를 없애려 하고 있지 요. 의창에 구대문파가 모인 것도 그 때문이 아닙니까?"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쉽게 처치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 다는 것이오. 함정을 만드시오. 원주께서는 기관토목에 조예가 있다 고 하니 구룡선주를 처치할 함정 정도는 만들 수 있을 것이오." "좋은 이야기이지만 구룡선주가 함정을 찾아다니는 자는 아니잖소. " "갈 수밖에 없을 것이오. 중원의 배교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 는 자가 누구인지 아시오?" "마옹! 아니, 호교신장!" "틀렸소. 성녀외다. 성녀…… 성녀를 당신들 손에 넘기겠소. 성녀 를 넘겨주면 구룡선주에게 성녀를 찾아가라고 전하시오. 구룡선주는 성녀를 찾기 위해 도산검림도 마다 않고 반드시 올 것이오." 예광은 안광을 빛났다. 언상영은 턱을 매만졌다. 성녀, 배교도들이 반신(半神)으로 떠받드 는 여자! 명왕 다음으로 소중히 여김도 알고 있었다. "나는 성녀의 대(代)가 피로써 이어짐으로 아오. 성녀의 대는 전대 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까?" "모르고 있었소? 어린 성녀를 키운 곳은 바로 천화원이오." "천화원?" 언상영은 예광의 실없는 농담에 눈살을 찌푸렸다.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군. 천화원에 안면 있는 사람이 있을 테니 알아보도록 하시오. 금옥이 어떤 곳이었는가를…… 이런 이야기까지 꾸밀 만큼 한가하지 않소." "알겠소. 당신의 말을 믿겠습니다." 궁금함이 많았으나 언상영은 예광의 말을 믿기로 했다. 그의 말대 로 의문점은 알아보면 되었다. 이제 예광이라는 자가 제의한 계획을 검토할 차례였다. '성녀라는 계집을 통해 구룡선주를 함정으로 유인한다. 전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겠군.' 언상영은 쉽게 예광의 계획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계획대로 진 행되지 않는다고 해서 손해 볼 일도 없을 듯했다. "배교도들은 명왕 다음으로 성녀를 중히 여기는 것으로 아는데…… 당신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군요." 협상을 매듭 짓기 전에 언상영은 또 한 번 변죽을 울렸다. "우리 교도 모두 한 색깔은 아니라고 방금 이야기했던 것으로 아오 . 팔륜거를 따르는 자들은 성녀의 존재를 크게 생각하지 않소." "죄송합니다. 잊었습니다. 그 계집, 아니 성녀를 우리 손에 넘겨줄 자신은 있습니까?" "자신이 없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소. 협상을 승낙할 것인가 만 말해 주시오." "협상의 숭낙……." 언상영은 손끝으로 탁자를 툭툭 쳤다. "거부하겠소!" 그가 눈빛을 달리하며 팔짱을 꼈다. 예광의 표정이 굳었다. "이유는?" "당신들은 구대문파나 우리 사패를 너무 얕보는 것 같소. 우리가 어린 계집을 납치해서 함정으로 적과 싸울 정도로 졸렬해 보이던가요 ?" "껄껄껄! 껄껄껄껄!" 예광은 서재가 무너질 정도로 웃었다. "의창의 일전을 지켜보시오. 원주의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이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우리가 구룡선주를 제거하려는 이유는 꼭 색 깔이 달라서 만은 아니오. 구룡선주는 사람이 아니외다. 같은 교도들 의 등골까지 오싹하게 하는 엄청난 힘! 기회가 닿으면 그 힘을 느껴 보시오. 기분이 어떤지……."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녀를 데려갈 일시와 장소는 추후 통보하겠소. 오던 말던 원주 마음대로 하시오." 그가 바람 소리를 내며 서재를 나섰다. 언상영은 생각에 잠긴 채 예광을 배웅했다. 제34장 혈류(血流) 촤악! 촤악! 배는 춘풍(春風)처럼 건들거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삼협의 험준한 지세를 빠져 나왔을 때부터 높고 낮은 구릉들은 사 라지고 강안(江岸)을 따라 끝간데 없는 넓은 수면만이 눈에 가득 했 다. 물살도 잔잔했다. 배는 의창을 지나고 있었다.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파 제 세력이 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곳이 코앞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좌, 우를 철저히 살펴라!" 전우삼은 고함을 질렀다. 뱃전에는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 가 철통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제법 모여들었다지…… 헤헤헤, 이번에는 정말 실컷 피맛을 보겠 군." 전우삼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뇌들만 처치하면 기가 꺾여 도주할 거예요. 그 이상 피를 보지 말도록 하세요." 전우삼의 뒤에는 신화정이 서 있었다. "화정, 무슨 말이야? 설마 너의 아버지와 주 명두, 산서의 우리 교 도들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잊은 것은 아니겠지? 받은 만큼 되돌려 주 겠어!" "우리는 명왕을 모시는 자들이에요. 그들과 같을 수는 없잖아요." "보라구. 지금 우리가 가진 힘이 바로 명왕의 뜻이다. 명왕께서 우 리에게 힘을 준 이유는 바로 놈들을 쓸어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 었던가?" "사람을 죽이라고 명왕께서 힘을 주셨다고요?" 신화정은 아미를 찌푸렸다. "이봐, 이봐! 잘 들어. 천년 우리 교의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죽이지 않는다면 죽는다는 것이야. 그리고 화정, 싸움을 앞두 고 있는데 나에게 시비를 걸어서 어쩌겠다는 게야! 그렇지 않아도 명 옹 때문에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명옹…… 역시 그분에게는 문제가 있군요." 신화정이라고 해서 감악이 느끼고 있는 바를 못 느낄 리 없었다. 단지 말을 꺼낼 처지가 아니라 입을 다물고 있을 뿐. "화정, 누구나 명왕으로부터 받은 각자의 생각이 있는 게야. 우리 교도들은 그 생각대로 행동한다. 나의 칼에 묻은 피, 명옹의 칼에 묻 은 피를 탓하지 마라." "그래서 전 랑은 틀렸어요. 보권과 성녀가 다른 이유 때문에 있는 줄 아세요. 명왕의 이름을 빌려 제멋대로 생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라고요. 성녀께서는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세요." "헤헤헤, 화정! 간밤에 무서리가 내렸을 게다. 어이, 춥다. 추우니 까 빨리 들어가라구. 놈들도 곧 나타날 게야." 전우삼은 딴소리를 했다. 모든 일에 신화정에게 고분고분한 그였지 만 적들을 상대로 싸우는 일에는 절대 양보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당신의 그 칼이 얼마나 많은 피를 묻히는가 지켜볼 거예요." "많은 피를 묻히겠다면……." "전 랑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되겠지요. 조심하세요. 나는 성녀 를 지키러 가야겠어요." 신화정은 예령이 있는 선실로 들어갔다. 그녀와 아란하, 아란하의 월영궁 문도들은 예령을 지킬 책임을 지고 있었다. "젠장! 이래서 모두 여자는 귀찮다고 말하는 모양이군." 전우삼은 대월로 뱃전을 쿵 찍었다. "화정, 나는 아무리 화를 삭이려 해도 삭여지지가 않아. 주 명두의 죽음 말이야. 명옹도 그렇지 않소? 성녀의 죽음이 잘 잊혀지지 않지 요?" 그가 상판(上板)에 홀로 앉아 있는 명강량을 바라보며 중얼댔다. 그의 눈에는 명강량의 모습이 팔륜거에 세워진 초대 명옹의 석상과 똑 같아 보였다. "어디 보자. 몇 놈의 머리통을 깨뜨릴 수 있겠나?" 그는 대월의 날을 살폈다. 그때였다. "전 명두!" 망루(望樓)에 있던 장 명두가 급히 그를 불렀다. "무슨 일이오?" "앞을 보시오! 놈들은 수전(水戰)을 벌이려는 모양이오!" "뭐야, 수전! 물에서 싸우는 것은 별로 재미없는데…… 구대문파 놈들도 마찬가지일 줄 알았더니." 전우삼은 급히 선수로 뛰어갔다. 장강을 거스르며 백 여척의 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이런! 좋은 방법이 없나? 아!" 전우삼은 대화룡이 생각났다. 그는 대화룡으로 선단을 쓸어버릴 생 각을 했다. 물길 위라 피할 곳도 없을 것이다. "볼만하겠군." 그가 히죽 웃었다. 배는 점점 선단과 가까워졌다. 전우삼은 이쯤에서 명옹에게 대화룡의 사용을 허가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명강량을 향해 가려 할 때였다. "전 명두, 이상하오!" 망루의 장탄이 소리쳤다. "무엇이 이상하단 말이오?" 휙! 전우삼은 망루를 향해 신형을 뽑았다. "어, 어!" 망루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전우삼의 눈빛이 이채로 번뜩 였다. 그의 눈은 장탄 보다 몇 배는 밝다. 장탄 보다 더 자세히 다가 오는 선단을 바라볼 수 있었다. "뭐야?" 선단은 독전기로 울긋불긋했다. 독전기에 적힌 글들은 전우삼 등에게 너무도 친근한 '배교일세!' ' 배교천하!' '명옹군림(明翁君臨)!' 같은 글들이었다. "장 명두, 숨겨 둔 교세가 있었소?" 전우삼이 물었다. 장탄은 고개를 저었다. "구대문파의 위계(僞計)는 아닐까요? 위계를 꾸밀 자들은 아닌데… … 행색도 이상하고……." 전우삼과 장탄이 의아해 할 때였다. 빠른 배 한 척을 내보내며 선단은 항행을 멈추었다. 쾌선은 돛을 신기로 부리며 전우삼이 탄 배로 다가왔다. "가 보시오." 장탄이 말했다. 전우삼은 선수로 신형을 뽑았다. 쾌선은 방향을 틀며 전우삼이 탄 배와 이물을 나란히 했다. "우리는 장강의 준걸(俊傑)들입니다! 배교의 높은 기치를 흠모 추 악한 위선자들을 처치하는데 조족지혈(鳥足之血)의 힘이나 될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받아 주십시오!" 쾌선의 작자가 소리쳤다. "장강의 준걸? 으헤헤헤, 헤헤헤……." 전우삼은 배를 잡고 웃었다. "네놈들은 장강의 수적들이구나?" 그가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수적은, 수적은…… 우리는 장강의…… 장강의 녹림 호걸들입니다 !" 쾌선에 탄 자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수적이든, 호걸이든 , 녹림도든…… 알았다. 가 보아라! 전우삼은 손을 저었다. 쾌선에 탄 자는 읍을 한 후 재빨리 선단으로 돌아갔다. "화정, 이것 봐! 힘이 있으니 별 놈들이 다 아부하려 들잖아. 하지 만 수적들을 한 패로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그렇긴 한데…… 얼굴을 보아하니 아무 말도 않겠고…… 고 명두에게 물어 봐야겠군. 고 명두 !" 전우삼은 명강량을 슬쩍 한 번 바라본 후 고명상을 불렀다. 고명상이 다가왔다. 감악처럼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장강 수채의 잔당들이 합류를 요구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수적들 눈에는 우리가 동색으로 보였던 모양이군요." 고명상은 쓴웃음을 흘렸다. "이번 싸움이 향후 저들의 생사를 결정할 중요한 싸움임을 알았겠 지요. 만약 우리가 패한다면 구대문파의 칼이 다음에는 저들로 향할 테니…… 그래서 합류 운운했을 겁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명왕께서 수적들과 어울리라고는 하지 않 은 듯 한데…… 도움을 준다고 해도 정말 놈들의 말대로 조족지혈의 힘뿐이오." "내버려두십시오. 물러가라고 해도 물러날 자들이 아닙니다. 어떻 게든 이번 일전을 승리로 이끌려고 하겠지요. 생사가 달린 문제이니 …… 승리로 이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대한의 피해는 입히려 할 것입니다. 정파를 자처하는 자들의 목을 베는 만큼 자신들이 받쳐야 하는 목의 수도 줄어들 테니까요." 고명상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대문파와의 일전에 달려온 사 파인들은 저들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배교의 의도와 는 상관없이 의창의 일전은 정사대전으로 이야기될 것이다. 고명상은 그 사실이 기분 나빴다. 서둘러 이 싸움이 끝나고 황산에 정착했으 면 했다. 싸움은 육신 보다 마음을 더 지치게 한다. 지옥의 화탕 속 에 있는 기분이었다. '명왕이시여!' 승리와 상관없이 싸움이 커지면서 점점 더 불안감이 더해지는 고명 상이었다. "알았소!" 전우삼은 발로 뱃전을 쿵 굴렀다. 기세등등한 자는 전우삼밖에 없는 듯했다. 감 명두는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고명상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배가 다가오자 선단은 좌, 우로 길을 열었다. "배교천하!" "명옹군림!" 어디서 들었는지 수적들은 배교의 함성을 지르며 꽃을 던졌다. 폭 죽도 펑! 펑! 터졌다. 장문천은 속가제자인 철담(鐵膽), 강순일(康純一)에게 제자들과 매 화검진을 맡겼다. "사숙……." 조충국은 벽사검을 허리에 차는 장문천을 가슴 뿌듯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절대 경거망동하지 마라. 장문 사형도 나도 네 게 거는 기대가 적지 않다." 엄하게 나무라기만 하던 제자였으나 오늘 장문천은 따뜻한 한 마디 의 말도 해 주었다. "알겠습니다. 사숙!" 조충국은 장문천의 말에 하늘을 날 것 같았다. "사형, 부탁합니다." 장문천은 속가제자 강순일에게 머리를 숙였다. "조심하십시오." 강순일이 포권했다. 장문천은 화산 제자들을 뒤로하고 혜명, 혜오, 혜철, 양명자, 양일 자, 개방의 상 장로가 서 있는 전부(前部)로 나아갔다. 파르르…… 파팟! 바람은 깃발을 찢을 듯 매서웠다. 무서리가 내렸고 만추는 종말을 고한 듯했다. 백 여척의 배가 정파의 군소방파가 포진한 좌, 우로 갈라지며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파인들과 합류를 시도했다. 구대문파를 돕기 위해 온 정파 제 세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산과 들, 강에서 모인 사파의 제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단혈철각련의 패퇴 이후 어둠 속을 횡행하던 모든 세력이 다 모인 듯했다. 생사결전(生死決戰)의 장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것 같았다. 장문천은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 척의 배가 유유히 강안으로 다가왔다. 뱃전에 위맹하게 도열한 무사들…… 구룡선, 마인거도 보였다. 배가 강안에 닿기도 전에 한 무리의 인영이 배에서 뛰어내렸다. 그 들은 강물을 첨벙이며 갈대밭에 발을 들였다. 갈대밭에 선 자들은 대월을 든 팔척 장한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칼 을 뽑으며 반원형으로 진을 구축했다. 배가 강안에 쉽게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호위하는 자세였다. 장문천을 대월을 든 팔척 대한이 누구인지 알았다. 마인거주! 점창파의 생존자가 전한 용모파기와 같았다.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호위를 자처한 것을 보면 역시 강호의 소문 대로 구룡선주의 지위가 마인거주의 지위 보다 높은 듯했다. 점창파, 아미파도 무너뜨린 마인거주! 그 마인거주를 수하로 부리는 구룡선 주의 능력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곧 확인이 되겠지.' 장문천은 긴장을 숨기지 않고 있는 명숙들 곁에 섰다. 배는 점점 다가오고 그는 배 위의 배, 구룡선에 앉은 구룡선주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장문천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의외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분하에서 무사가 가질 수 있는 온갖 굴욕스런 감정을 가르쳐 준 사내……. 구룡선주는 죽었다던 마옹이었다. 장문천을 발끝으로 흙을 몇 번 찼다. 별 놀라움도 없었다. 그 이상 의 기담괴사(奇談怪事)도 강호에는 많다.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 잘됐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그날 분하에서 겪었던 모든 수치스러운 감정을 씻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쨍! 쨍! 쨍! "으악!" "악!" 벌써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선기를 잡으려는 사파인들과 정파의 제 군소방파들이 누렇게 말라 붙은 갈대를 짓밟으며 도검을 번뜩였다. 코끝에 닿는 바람에는 벌써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타다다다닥! "으하하하! 캬캬캬!" 배는 강안에 이르고 미리 갈대밭에 대기하고 있던 전우삼은 홀로 전부로 달려왔다. 파파팟! 달리는 것만으로 길이 만들어지고 갈대는 허공으로 치솟았 다. 엄청난 기세였다. 명숙들의 안색이 변했다. 챙! 소림의 고승들은 선장(禪杖)을 들었 고 무당의 명숙들도 검을 뽑았다. "내가 맡겠소!" 소림의 혜철대사가 나섰다. 그는 누가 막을 틈도 없이 신형을 날렸다. 허공에서 찬란한 만다라화(曼茶羅華)가 피었다. "아!" 혜명, 혜오는 탄성을 터뜨렸다. 오랫동안 소림에서 보지 못 했던 무공이었다. 혜명은 혜철의 성취에 놀랐고 혜오는 자신의 무공 이 혜철 보다 못함을 깨달았다. 대윤회겁륜장(大輪廻劫輪杖)! 그 무공을 계지원(戒持院)의 원주인 사제, 혜철이 펼치고 있었다. 선장이 장엄한 기세로 전우삼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흥!" 전우삼을 코웃음을 쳤다. 그는 등천양광도법을 부법으로 전환 대윤회겁륜장에 맞섰다. 우웅! 웅! 웅! 강풍이 불며 장강의 물결이 치솟았다. 허공으로 치솟은 물줄기가 수막을 이루며 촉촉이 떨어졌다. 장문천은 미간을 좁혔다. 혜철대사의 실력도 놀라웠고 전우삼의 실력도 놀라웠다. 그러나 승 부는 곧 한쪽으로 기울 것 같았다. 무당의 양일자도 같은 생각을 했다. 전우삼이 붉은 장영을 번뜩이는 순간, 양일자의 검은 뇌전으로 전 우삼을 덮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혜철은 피를 뿌리며 물러서고 전우삼은 양일 자의 공격에 연이어 맞섰다. "헤헤헤, 돌중들! 말코 도장들! 한꺼번에 덤벼라!" 전우삼은 광소를 터뜨리며 번천양장으로 양일자를 몰아갔다. 양일 자는 혜철 보다 못했다. 현기를 자랑하는 무당의 태극혜검(太極慧劍) 이 제대로 빛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혜철대사는 기혈을 다스 릴 틈도 없이 위기에 빠진 양일자를 돕기 위해 신형을 뽑았고 혜오대 사와 양명자 역시 체면 불구하고 전우삼에 대한 협공에 나서야 했다. 대윤회겁륜장에 태극혜검, 더해서 대력금강장(大力金剛掌)에 대라 검법(大羅劍法)! 구대문파의 비전 절기들이 동시에 빛을 발했다. "하핫!" 전우삼은 물러남 없이 구대문파 명숙들의 공격을 그대로 받았다. 석양에 비친 수막이 채홍색 무지개로 그들을 덮고 찢겨진 갈대가 사납게 휘날렸다.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결이었다. 싸움은 좌, 우에서도 치열했다. 챙! 챙! 챙! "으악!" "악!" 정파의 제 군소방파와 사파인들은 아비규환으로 뒤섞여 아수라장을 이루고 있었다. 복부를 관통한 칼을 잡고 애처롭게 비명을 터뜨리는 자, 날아간 팔에 망연자실해 하는 자, 적의 수급을 움켜쥐고 득의양 양해 하는 자…… 팔, 다리가 날고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습지는 이미 피로 질퍽했고 피를 듬뿍 먹은 갈대는 부는 바람을 따라 귀기( 鬼氣)스럽게 흔들렸다. 그에 비하면 구대문파와 배교가 어우러진 중앙은 싸우는 것 같지도 않았다. 들리는 것은 도검과 권장에 바람이 세차게 갈라지는 소리와 전우삼의 광소뿐! 소림, 무당, 화산 제자들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혜오, 혜 철, 양명자, 양일자, 네 명의 명숙도 상대가 되지 않아 개방의 장로 까지 나서고 있는 판국이니 분위기가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으헤헤헤! 크하하하!" 전우삼은 연신 광소를 터뜨리며 혈장(血掌)과 대월을 난무했다. 광 소가 울릴 때마다 협공을 하는 명숙들은 쩔쩔맸고 구대문파의 제자들 은 오금을 저렸다. 마교로 불리며 다시 나타난 배교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장문천은 벽사검을 구룡선주를 향해 뻗어야 하나 마인거주를 향해 뻗어야 하나로 망설였고 혜명대사는 나한진을 발동해야 하느냐로 망 설였다. 전우삼은 여전히 개세무비(蓋世無比)의 무공으로 구대문파의 명숙들을 몰아치고……. 그때였다. "전왕!" 방환이 다급하게 전우삼을 불렀다. "뭐야?" 전우삼은 구대문파의 명숙들을 크게 휘몰아친 후 고개를 돌렸다. "저기! 빨리!" 방환은 배를 가리켰다. 훅! 훅! 훅! 짙은 유황 냄새와 함께 대화룡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 "헤헤헤, 미치겠군! 뭐 하는 거야? 피해!" 전우삼은 장강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를 비롯한 만인촌의 수족들은 장강의 수심으로 첨범첨벙 뛰어들었다. 구대문파의 명숙들은 전우삼이 갑자기 칼을 거둔 이유를 몰랐다. 조금만 더 몰아쳤으면 낭패를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훅! 훅! 훅! 이상한 소리는 점점 커졌고 유황 냄새도 짙어졌다. 혜명대사는 눈을 번쩍 떴다. "마화! 피하시오!" 그가 사자후로 소리쳤다. 장강은 혜명의 고함으로 쩌렁했다. 정사(正邪)를 불문하고 불이라는 소리에 대해서는 모두 촉각을 곤 두세우고 있었다. 곤륜, 맹호전의 참변은 강호에 이미 소문이 자자했 다. 사파인들은 조금 허둥대는 듯했다. 같은 편인 그들에게까지 마화를 분출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생각이고…… 대 화룡의 비늘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졌고 입은 불씨를 달고 있었다. 모든 자들이 살길을 찾아 뛰었다. 화르르르르……. 천지를 불태우는 불길이 강안을 휩쓸었다. 모든 것이 검었다. 어스름이 그 검은 참상들을 더해 주었다. 불길은 아직도 여기 저기 이글거리고 있었고……. 시신, 옷, 갈대, 병장기를 태운 메케한 냄새는 장강을 부는 바람을 따라 흔들리며 숨 막히는 악취를 풍겼다. "으, 으……." 잿더미 속에서 신음이 들렸다. 쨍! 쨍! "으악!" 칼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도 산발적으로 터졌다. 우선적으로 불길을 피하는데 바빠 정파인들이 파 놓은 토굴 속에 몸을 숨긴 사파인들이 정파인들의 칼날 아래 지르는 비명이었다. "으, 으……." "으……." 칼 부딪히는 소리, 비명은 곧 그치고 신음은 점점 더했다. 화마는 엄청났다. 토굴 속에 몸을 숨긴 자들도 내력이 약한 자들은 화기에 몸을 지킬 수 없었다. 잿더미 속에 하나, 둘 정파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대문파의 제 자들은 진용을 구축해 갔으나 나머지 군소방파의 문도들은 싸울 생각 을 않고 비칠비칠 물러서고 있었다. 장강에 머리만 동동 띄우고 있는 사파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불길을 뿜은 구룡선에 한소리 하려만 찍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구룡 선을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그들 역시 싸울 생 각을 않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젠장!" 첨벙! 첨벙! 전우삼은 대월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수심을 걸어나 왔다. 방환, 도예,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가 그를 뒤따랐다. 안색 이 질려 있기는 그들도 다른 자들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아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성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예령 은 입을 꽉 다물고 명강량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도화라는 여자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장면을 보여주려고 성녀를 뱃 전에 데려왔던가? 물론 성녀가 가자고 해서 왔겠지만 막을 수도 있었 을 것이다. 감악, 장탄, 고명상, 신화정……. 중원 배교의 수뇌들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지 이런 참극을 직접 보지는 못했으리라. 충격이 클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에 그녀도 무척 놀랐으니……. 아란하는 다시 한숨을 쉬며 예령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성녀, 바람이 찹니다. 선실로 들어가시지요." 그녀가 바람에 펄럭이는 예령의 옷깃을 바로 잡으며 말했다. 예령의 시선은 여전히 명강량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의 몸에 손을 대지 마세요! 나는 들어가지 않겠어요! " 예령이 날카롭게 말했다. 아란하는 놀라 예령의 몸에서 급히 손을 뗐다. 신화정이 다가왔다. "성녀, 명옹이 조금 심하기는 해도 저들도 우리에게 그 이상의 짓 을 했답니다." 명강량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증폭 되고는 있어도 그녀는 일단 명강량을 두둔했다. "비키세요!" 예령은 신화정의 말도 듣지 않았다. "비켜라!" 도화라는 여자가 따라서 소리쳤다. 아란하와 신화정은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강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전우삼이 대월을 흔들며 천천히 적들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 신화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참혹한 살육극 속에서도 전우삼은 더 이상의 피를 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건들거리는 그의 어깨와 광소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침묵이었다. 갑자기 던져진 침묵……. 마인거주도 마인거주를 상대하기 위해 다시 움직이는 명숙들도 그 무거운 침묵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장문천은 그 침묵 속에 벽사검을 빼 들었다. 팟! 그의 신형이 한줄기 연기로 화했다. "어!" 전우삼은 갑자기 불어닥치는 경기의 폭풍에 놀라 급히 대월 을 들었다. 대월과 벽사검이 바람을 일으키며 얽혔다. 쨍! 쨍! 쨍! 쨍! 쨍! 군웅들은 번쩍번쩍하는 섬광과 귀청을 찢는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 만 들을 뿐이었다. 천지를 난타(亂打)하며 찰나지간에 얽힌 장문천과 전우삼은 또한 찰나지간에 서로를 격했다. 장문천을 바라보는 전우삼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사라지고 없었다. 광소도 터뜨리지 않았다. 팔뚝에서 피가 주르르 흐르며 대월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장문천은 자신의 가슴 앞자락을 바라보았다. 멋진 바람구멍이 나 있었다. 전우삼은 부상을 입었다. 장문천은 말짱했다. 그러나 장문천의 검 이 스쳐 간 곳은 고작 팔뚝이었고 전우삼의 대월은 상처를 입히지 못 했다고는 하나 심장 부근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열을 판가름 하기는 이른 듯했다. 승부를 다시 가려야 할 것이다. 전우삼은 공력을 극성까지 끌어올렸다. 기파는 냉랭하게 흘러 구대 문파 명숙들의 심장까지 움칠하게 했고 장포는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어올랐다. 전우삼의 전신은 불덩이처럼 붉어져 갔다. 양일진력이 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장문천도 벽사검을 들었다. 은은한 자줏빛 광채가 검끝을 시작으로 전신에서 석양처럼 피어올랐다. 양일진력에 맞설 화산의 자하신공! 구대문파의 명숙들은 가슴을 쓸었다. 화산의 전대 장문인, 숭양진인도 태청강기는 익혔어도 자하신공은 익히지 못했었다. 소림의 반야대능력(般若大能力), 무당의 대라강기( 大羅　氣)에 필적한다는 자하신공이라면 능히 마인거주를 처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문제는 성취인데……. 장문천의 유유자적한 태도가 명숙들을 안심하게 했다. 사위를 압도 하는 은은한 기파가 또한 명숙들을 안심하게 했다. 승리할 것이다. 명숙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기세로 볼 때 먼저 움직일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전우삼이었다. 그 러나 의외로 장문천이 먼저 움직였다. "앗!" 전우삼과 구대문파의 명숙들은 동시에 놀란 탄성을 터뜨렸다 . 장문천은 전우삼을 내버려둔 채 구룡선, 마인거를 실은 배를 향해 섬전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크악!" "악!" 길을 막고 있던 삼십육호교사 중 몇 명이 비명을 터뜨리는 순간, 장문천은 이미 등평도수로 배를 육박하고 있었다. 장문천은 용주약랑(龍珠躍浪)으로 멋지게 배 위로 뛰어오르며 혈조 를 타고 삼십육호교사의 피가 아직도 주르르 흐르는 벽사검을 뻗었다 . 쐐액! 벽사검이 자줏빛 광채를 싣고 명강량을 쇄도했다. 쩡! 배가 암초에 부딪힌 듯 쿵 흔들리며 명강량과 장문천은 상판에 서 검을 겨룬 채 서로를 마주보며 섰다. 벽사검은 천음검에 가로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팟! 장문천은 검을 회수하며 명강량과의 거리를 이 장으로 벌렸다. "죽일 놈!" 상대를 어이없이 놓친 전우삼은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이 장 문천을 상대하기 위해 배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구대문파의 명숙 들이 그의 진로를 막았다. "마인거주는 우리들의 칼을 받아라!" 혜오, 혜철, 양명자, 양일자, 상 장로가 전우삼에게 달려들었다. 상대의 강함을 보았기 때문에 후미를 지키던 이 장로까지 가세했다. "무당, 화산의 제자들은 진을 발동하라!" 혜명대사가 소리쳤다. 양의검진, 매화검진이 발동되었다. "무당, 화산의 제자들은 저들을 쳐라!" 혜명이 방환 등을 가리켰다. 양의검진, 매화검진이 진세를 이동하 며 방환 등을 육박해 갔다. "소림의 제자들은 나를 따르라!" 혜명은 직접 나한진을 이끌고 전우삼을 취했다. 열 명의 명숙들이 달려들어도 눈앞의 마인거주를 감당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것 이다. 침묵하던 장강이 갑자기 발걸음 소리로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장문 천의 눈과 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장문천은 벽사검을 가장 뻗기에 좋은 위치로 놓았다. 명강량도 천음검을 가장 다루기 편한 길이로 조절했다. 벽사검에서 자줏빛 광채가 찬란하게 피어올랐고 천음검은 웅웅거리 며 울었다. 벽사검이 원형을 그리며 흘렀다. 꼬리를 그리며 흐르는 벽사검은 마치 유성과 같았다. 명강량은 군림보(君臨步)를 흩트리지 않았다. 천지를 휩쓰는 강풍 이 불고 격랑이 일어도 그의 자세는 요지부동일 듯했다. 자줏빛 광채가 증폭되며 벽사검에서 두 자 길이의 푸른 섬광이 치 솟았다. 검강(劍　)! 벽사검의 검끝에 맺힌 검강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의 가벼운 진 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진동은 점점 커졌다. 장문천은 움직였다. 벽사검이 광채를 뿌리며 풍랑(風浪)을 불러왔 다. 웅 - 웅 - 웅 - 천음검도 따라서 움직이며 울었다. 그 순간, 장문천의 검은 수천 개의 검영을 섬전으로 그리고 있었다 . 검영은 강풍 속에 서로 몸을 부대끼며 제멋대로 흔들리는 죽림(竹 林)을 만들었다. 쏴 - 아! 벽사검의 검영이 명강량을 덮쳤다. 명강량은 죽의 장막에 고립무원으로 갇혀 버린 듯했다. 그의 몸을 휩쓸며 날아오는 푸른 대나무 잎은 하나, 하나가 모두 벽사검의 검끝 에 맺힌 강기였다. 타탕! 탕! 천음검에서 음률이 일었다. 벽사검이 몇 번 천음검을 휘감고 지나 간 모양이었다. 타당! 탕! 타당! 벽사검은 천음검을 원래의 천음관으로 만들며 경쾌한 무곡(舞曲)을 연주하게 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듯 해도 장강의 잔물결이 한 번 이물에 부딪혀 오는 시간 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다. 명강량이 움직였다. 쐐-액! 천음검이 뇌성(雷聲)으로 벽사검의 바람 가르는 소리를 덮 었다. 그리고 한순간, 백광이 번쩍하며 하늘을 정확히 양분했다. 삭! 잘 벼린 낫으로 풀을 한 줌 베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장문천의 눈은 여전히 의지로 이글거리고 그의 벽사검은 석파천경( 石破天驚)으로 빛났다. 그러나 상판에는 싸워야 할 상대가 보이지 않았다. 명강량이 없었 다. 장문천은 상대를 찾았다. 명강량은 유령처럼 움직이며 강안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장문천의 눈빛이 흔들렸다. 퓨퓨퓨…… 심장에서 피분수가 치솟았다. 승부의 결과였다. 절대고 수들의 승부는 단 발의 승부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일초지적밖에 되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실력의 차이는 천음검을 직접 받아본 장 문천만이 알 뿐이었다. 목구멍에서 한 덩이의 피가 울컥 치솟았다. "으, 으, 으……." 장문천은 눈을 부릅뜨고 다리에 힘을 모았다. 심장에서 흐르는 피가 점점 줄어들었다. 죽음이 한순간에 찾아오고 있었다. 장문천의 고개가 서서히 꺾였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움직 이지 않았다. 철컹! 손에서 벽사검이 떨어졌다. 바람은 매서웠고 배를 흔드는 장강의 파랑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 나 그 어떤 것도 장문천의 육신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장문천이 남긴 최후의 자존심이었다. "사숙!" 조충국은 눈물을 뿌렸다. 모든 화산 제자들의 마음이 그와 같았다.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데 바빴으나 명강량과 장문천의 일전에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구대문파 제자들은 맥이 탁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구룡선주의 무공은 천외천(天外天)이었다. 사실 명강량 스스로도 자신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몰랐다. 투풍혈아표에 부상을 입은 것은 당예를 얕잡아 본 탓도 있지만 투 풍혈아표의 위용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 그 투풍혈아표도 경미한 부상밖에 입히지 못했었다. "크악!" "으악!" 무적을 자랑하던 나한진이 무너지고 있었다. 전우삼을 겨우 상대하던 그들이었다. 명강량까지 가세하자 구대문 파의 제자들은 비 맞은 흙벽처럼 허물어졌다. "사숙을 살려내라!" 조충국은 눈물을 흘리며 명강량에게 달려들었다. 장문천이 염려로 했던 많은 말들은 전혀 그의 머리 속에 없었다. 그의 하늘을 무너뜨 린 철천지 원수에 대한 분노뿐이었다. 검은 무정하고 무정하다. 명강량의 검은 그 검들 중에서도 더욱 무정하고 무정하다. 천음검 앞에 있는 소년이 화산파의 다음을 이을, 화산파를 빛낼 촉망받는 소 년임을 가리지 않았다. 눈물로 범벅된 고운 홍안 소년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조충국의 목이었다. 조충국은 자신의 감정을 수습하지 못한 그 한 번의 실수로 결국 목 숨을 잃어야 했다. 그의 죽음이 전혀 값없었던 것으로 화산에 기록되 지는 않으리라. 어린 나이에 생사를 도외시하고 싸웠던 용감한 제자로 기억은 되겠 지. 그러나 어쨌든 그는 죽었다. 예령은 보고 있었다. 그 고운 소년의 목이 떼구르르 피에 물든 진 흙밭 속으로 구르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악다물었다. "들어가요!" 그녀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녀는 휙! 선실로 들어갔다. "으악!" "악!" "헉!" 비명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장문천, 혜명을 잃은 구대문파의 제자들이 소, 돼지처럼 도축(屠畜 ) 당하며 내지르는 비명이었다. 장강의 물결은 알지 못한다. 그가 삼켰던 피를……. 그 배를 실어 나르는 장강의 물결에도 피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길 없었다. 의창에서의 대승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련만 승리를 자축하는 자는 전우삼 단 한 명 뿐이었다. 모두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때문에 홀로 좋아라 날뛰던 전우삼도 흥을 잃었다. 신화정이 머무 는 선실로 갔다. 그러나 신화정은 선실문을 굳게 잠그고 전우삼을 맞 지 않았다. 전우삼은 만인촌의 식솔들을 상대로 괜한 시비를 걸다 제풀에 지쳐 선실에 들이박혔다. 무거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날 밤 불사혼, 도예는 도화를 찾았다. "보았을 것이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은 사람이 아니오. 그는 삼 황오해를 피로 물들이고 결국 우리 교까지 없애고 말 것이오. 그를 처치해야 하오!" 그동안 도화에게 많은 바람을 넣어 왔다. 이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 "나는 보았다. 그 살인마들을! 원주들의 말이 맞았다. 배교를 좋게 생각한 내가 잘못이었어. 배교는 마교다! 나는 배가 강안에 닿는 그 순간에 어린 아가씨와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다!" 흉악무도한 자들에게 존대를 하는 자는 없다. 도화는 이제까지와 달리 도예에게 반말을 썼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오. 이미 보셨지 않소.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 을 제외하고 누가 피를 원하던가요. 싸움을 걸지 않으면 싸우지 않는 다는 것은 우리 배교의 오랜 철칙이요." "마인거주라는 자에게도 그 소리를 하라!" 도화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전왕의 잘못도 인정하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이유는 중원 배교 의 호교신장이 나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오." 전우삼의 잘못도 명강량에게 넘겼다. 물론 도화 앞이라 잘못 운운 하지만 도예는 잘못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원 배교 호교신 장의 손속이 조금 과하다는 것만 느꼈을 뿐! "나는 어린 아가씨를 데리고 떠날 것이다!" 도화는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성녀는 교를 버리지 않았소. 교를 버렸다면 벌써 이곳을 떠났을 것이오. 보지 않았습니까. 성녀의 발길을 막을 자는 이곳에 아무도 없소. 성녀가 가는 길이 그들이 따라야 할 길이기 때문이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면…… 이것도 생각해 보시오. 성녀를 데려간다고 하 셨소? 도화, 당신에게 성녀를 지킬 능력이 있는가 모르겠소. 맞소! 우리는 마교외다. 그리고 성녀는…… 구룡선주, 마인거주 다음으로 강호인들이 죽이고 싶어하는 마녀!" "망발을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도화는 노화를 터뜨렸다. "화를 낸다고 사실이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오. 지금까지 우리가 벌 인 일이 있기 때문에 성녀께서는 전대 성녀 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 야 할 것이오." "원주께서 아가씨를 지켜 주시고 저 대살성들을 없앨 것이다!" "정말 능운공작이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을 이길 것이라 생각하오?" 도예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물었다. "물론!" "좋소, 좋아. 이길 수 있다고 합시다.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지 만 지켜 주는 것은…… 천하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천화원의 원주께 서 이제껏 마녀의 씨를 키워 왔고 지금 또한 마녀를 지키려 한다. 강 호인들이 원주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소." "……." 도화는 그 말에는 말문이 막혔다. "새삼스러운 말을 또 하려 하오. 강호인들은 절대 피의 대가를 잊 지 않지. 곤륜, 종남, 맹호전, 그리고 의창…… 그들이 천화원의 문 전에 몰려와서 무엇이라고 할 것 같소?" "천하의 그 누구도 우리 원주에게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도화는 억지 소리를 했다. 도예의 말은 사실이다. 시비를 걸지 않 을 리 없었다. "나의 말대로 하시오. 도화, 중원 배교 호교신장을 더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자는 천화원의 원주라는 것을 내가 몰라서 단심원주에게 일 을 맡기려는 지 아시오? 나 역시 성녀를 위하는 마음에 내린 최대한 의 결정이오. 단심원주가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을 처치하고 나면 우 리 배교도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오. 그때가 되어야 최소한 천화 원의 원주도 성녀를 위해 한마디 할 수 있는 말이 생길 것이오. 지금 시비에 뛰어들면 그는 나중에 정말 성녀를 위해야 할 때 강호인들에 게 할 말이 없을 것이오. 능운공작도 배교도다라는 소리나 듣지 않으 려는지……." 말은 그와 같았으나 도예가 예령을 능운공작에게 맡기지 않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만인촌의 중원 활보에 최대 난관은 역시 능운공 작이다. 따라서 능운공작에 대해서는 상세한 조사가 이미 끝난 터다. 도예가 알기로 능운공작은 인질, 함정 운운으로 절대 적을 상대하지 않을 자였다. 중원 배교 호교신장을 처치하는 데 애초부터 능운공작이 계획에서 제외된 이유였다. 전왕과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 능운공작의 무공을 비교하면 어떨까 ? 중원 배교 호교신장의 상대는 아무도 없다. 그는 다른 세계의 마물 로 생각해야 옳고 문제는 전왕과 능운공작의 우열이다. 승부를 낙관하기는 솔직히 힘들다.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이 능운공작을 처치해 주면 전왕의 앞에 걸리 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예 등이 호교신장이 능운 공작을 처치하기 전에 그를 함정에 유인 처치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 었다. 역시 능운공작을 처치할 자는 전왕이 되어야 한다. 천하제일인을 쓰러뜨린 자이어야 그만한 영광도 받을 수 있다. 만인촌, 전왕의 힘 을 강호인들의 가슴에 명확히 각인 시키기 위해서 능운공작은 반드시 전왕의 몫이 되어야 했다. 그만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전왕이 능운공작을 상대하는 어느 정 도의 위험은 감수해야 하리라. 물론 위험은 위험이고 전왕이 진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가능한 생각이었다. "음……." 도화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강호인들로부터 어린 아가씨가 받을 수난, 그 어린 아가씨를 지키 기 위해 원주가 뛰어들었을 경우 천화원에 일게 될 소요가 그녀의 눈 에 선했다. 그렇게 될 가능성도 전혀 없지만 만일 어린 아가씨가 지 금 당장 배교로부터 발을 뺀다고 하더라도 강호인들의 책임을 피할 길 없을 듯했다. 동관에서 배교도를 따라 가게 했던 자신의 처사가 후회되었다. 이 전처럼 잠행(潛行)만 할 줄 알았지 배교도들이 미친개처럼 날뛸 줄을 어찌 알았으랴. "도화, 잘 생각해 주십시오. 성녀를 구하고 우리 배교를 구하고 능 운공작을 구하고 천하를 구하는 일입니다. 성녀를 인질로 삼는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단심원주는 능운공작의 수하가 아니오? 성녀를 능운공작에게 맡기는 것과 같소. 이제 나는 나의 말을 모두 했소이다. 시간이 없소. 서둘러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도예가 말했다. 그는 도화에게 포권한 후 등을 돌렸다. 도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이 난마처럼 얽혀 어떤 결정을 내려 야 할 지 그녀는 몰랐다. 울화만 치솟았다. 어린 아가씨를 이 지경으 로 빠뜨린 배교, 특히 강호인들이 구룡선주로 부르는 대살성에 대해 …… 평소의 성격으로 보건대 그렇게 이가 갈리는 자라면 당장 칼을 빼 들고 심장을 난도질 해야 옳았다. 그러나 구룡선주의 얼굴을 떠올 리면 다른 자들과 같이 먼저 머리칼이 곤두서고 몸이 얼어버리는 그 녀였다. 저런 마물을 내린 하늘이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 * * ……저기 먼 못가에 두루미 우니 그 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고 기슭에 나와서 노니는 고기 때로는 연못 깊이 숨기도 하네. 즐거울사 저기 저 동산 속에는 한 그루 박달나무 솟아 있어도 닥나무만 그 밑에 자라난다고. 다른 산의 못생긴 돌멩이라도 숫돌 삼아 구슬은 갈음직 함을! "아하!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이런 말이었구나." 팽해만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타산지석이 그런 말이 아니면 무슨 말인 줄 알았어요?" 이불 속을 뒹굴며 연옥이 물었다. "다른 산의 돌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랴! 나는 타산지석은 무용 지물(無用之物)을 말함인 줄 알았다." "훌륭하시군요." 연옥이 빈정댔다. "그런데 왜 갑자기 책을 들고 난리여요?" "고래(古來)로 무인은 무식하다는 평을 나는 깨고자 한다. 화원을 가꾸고 글을 잃고…… 앞으로 강호인들은 문무겸전하면 나의 이름을 떠올릴 것이다." 팽해만이 '어험'했다. "어디 보자. 어디…… 오!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학명(鶴鳴)이 라는 시였군. 이것은 외어 두어야겠다. 반드시 써먹을 곳이 있을 것 이다. 저기 먼 못가에 두루미 우니, 그 소리 들판 가득 울려 퍼지고 …… 그런데 연옥, 방이 왜 이리 추우냐?" 그가 책을 덮으며 안색을 찌푸렸다. "춥다니요? 등이 굽혀질 판인데." "너는 춥지 않다고? 어이, 벌써 늙었나? 춥다, 추워!" 팽해만은 몸을 으스스 떨었다. "이제 겨울의 문턱인데 벌써 춥다면 어떡해요?" "글쎄 말이다. 이거, 이거…… 책을 읽으면 원래 이렇게 추워지는 가?" 팽해만은 화로를 끌어당겼다. 그때였다. "문주!" 그를 부르는 자는 외당당주, 장목생이었다. "무슨 일이냐?" "단심원주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언상영이…… 빨리 모셔라!" 그가 소리쳤다. 그는 벌떡 일어나 후닥닥 의관을 걸쳤다. 남궁기를 맞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언상영을 눈이 빠지게 기다려 야 할 일이 있는 듯했다. 팽해만은 머리를 긁적였다. "나도 소식은 들었어." "어떻게 할 참인가?" 언상영은 빈 잔을 놓았다. "어떻게 하긴 의창의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지." 팽해만은 화과자를 아작 씹었다. "타산지석 운운 할 때가 아니야. 바로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일세. 내가 좋아서 자네를 찾은 줄 아는가?" 언상영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글쎄, 이거 정말 큰일이기는 한데……." 팽해만은 손을 비볐다. 불안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마음의 안정을 취하기 위해 책을 읽어도 뼈에 찬바람이 이는 것을 막을 길 없었다. "무당산으로 가는 모양이야. 무당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 차례는 자네 아니면 소림이 될 걸!" "남궁기가 어떻게 하지 않을까? 데리고 다니는 이상한 놈들도 제법 한 수 하게 보이던데……." "남궁기도 힘들다. 장문천이라는 자도 당했다고 하더군." "장문천?" "화산파 장문인, 이건의 사제일세. 자하신공을 익혔고 검강을 자유 자재로 구사했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도 구룡선주의 칼에 목숨을 잃 었다고 한다." "그, 그래…… 화산파는 대단한 자를 제자로 두고 있었군. 그런데 그, 그 자도 죽었단 말이지. 으, 왜 이렇게 춥지? 남궁기를 불러 와 야 하지 않을까?" "남궁기를 불러오다니? 무슨 이유로? 이제야 같이 싸울 마음이 생 긴 것은 아니겠지." "언상영, 과거를 묻지 마라. 나의 총명한 이지를 흐리게 했던 놈의 목은 이미 남궁기가 가져갔다." "남궁기는 가져가야 할 목을 잘못 골랐군. 상종 못할 자 중의 하나 는 자신의 잘못을 수하에게 덮어씌우는 자지." "과거를 묻지 말라니깐! 자네는 자신 있게 자네의 과거를 말할 수 있는가?" 팽해문은 눈을 치켜 떴다. "미안하네. 냉정을 찾으려 해도 심사가 이상하게 꼬이는군." "남궁기나 불러!" 팽해만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궁기가 부른다고 올 자인가? 그는 우리들과 달라. 의창의 일전 을 들었다면 그의 검끝은 호승지심으로 더욱 빛나고 있을 게야." "으헤헤, 나는 예전부터 그놈이 바보인 줄 알았다! 떼를 지어 싸워 도 이길까 말까 한 판인데…… 혼자 잘난 척 하기는……." "그럼 이제 이야기는 다 했군." "무슨?" "내가 자네를 찾을 이유가 따로 있었겠나. 떼를 지어 싸우자고 찾 아왔지." "으헤헤, 당연한 말씀!" 팽해만은 메기입을 씰룩댔다. "아! 연수로 놈을 상대하기 전에 원주를 한 번 찾아 뵙는 것은 어 떻겠나?" 그가 문득 생각난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염치로? 기대하지 말게. 천화원의 천위대주, 국태열이 죽었 다. 원주의 이목을 흐리게 할 자는 이제 없다. 강호의 소식을 모두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천화원의 문은 열릴 생각을 않고 있네. 화가 무척 났거나 어떤 일에도 강호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당신과의 약 속을 지키고 있는지 모르지." "그래서 간청을 해 보자는 것 아닌가. 본가의 힘까지 끌어낸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구룡선, 마인거를 상대하기가……." "왜 자신이 없는가?" "누가 자신이 없다고 하던가! 그만큼 힘든 상대라 이 이야기지!" "원주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은 버리게! 나올 마음이 있었다면 우리 가 청하기 전에 나왔을 것이다." "젠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강호가 피로 질퍽한데 그놈의 칼 한 번 빼는 일이 그렇게 어렵나? 잘난 체를 너무 심하게 하는군! " 팽해만은 미간을 좁혔다. "원주의 일은 더 이상 거론하지 말게. 어떻게 싸울 것인가에 대해 서나 생각하지." "어떻게 싸우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개떼처럼 어울려 싸워야지. 설마 구룡선주나 마인거주를 상대로 일대일 비검을 하자는 것은 아니 겠지? 그렇게 하겠다면 나는 장문천이는 자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사 양하겠다." "일전에 한 명의 배교도가 나를 찾아왔다." "뭐? 배교도! 발도 넓군." 팽해만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 자가 구룡선주를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인질을 한 명 주 겠다더군. 그들이 성녀라 부르는 여자! 그 여자를 인질로……." "잉?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한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구룡선주를 잡는 일일세. 단 한 번의 기회다. 절대 달아날 수 없는 그물을 만들어야 해. 자네도 힘 을 보태 주게." "힘을 보태는 일이야 당연한 일이고…… 배교놈들이 자중지란(自中 之亂)에 빠졌나? 성녀가 인질이라는 말은 또 뭐야?" 팽해만은 당장의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자중지란이 맞다. 인질이 성녀라는 말도 맞고…… 천화원에 확인 을 해 보았다. 어린 계집이 쭉 금옥이라는 곳에 갇혀 있었다고 하더 군. 배교도들이 얼마 전에 찾아와 그 어린 계집을 데려갔다고 한다. 화형을 당했다던 전대 성녀라는 계집이 어떻게 핏줄을 이었고 그 핏 덩이가 어떻게 해서 천화원에서 자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 어린 계집이 성녀란 말인가? 음…… 일이 그렇게 된 것이군." 팽해만은 찢어진 눈을 빛냈다. "일이 그렇게 되다니?" "모산에서의 일을 기억하나? 마옹을 잡기 위해 기진(奇陣)이 쳐진 그 작은 봉오리를 둘러싸고 있던 때의 일을……." "기억하지. 지금도 그 절진을 친 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솔직히 그 진이 절로 풀어지지 않았다면 족히 십 며칠은 고민했을 게야. 하 늘이 낳은 재능을 가진 자가 틀림없다." "진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원주께서 절진에 뛰어들고 자 네는 진을 파해할 방법을 고민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그날 새벽이었 지. 원주께서 갑자기 나타났다." "새벽에?" "새벽이 맞아. 반나절을 꼬박 멍청히 있었으니 자네는 오후에 원주 가 나타난 줄 알았겠지만……." "왜 이야기하지 않았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어. 왠지 주위를 시끄럽게 하지 말아야 한다 는 생각을 했다. 우스운 것은 그날 새벽에 원주는 어린아이처럼 한 여인의 손에 끌리다시피 왔거든……." "여인?"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 세월이 지나서가 아니라 그때도 얼굴을 보 면서도 얼굴을 그리지 못했어. 뭐랄까…… 어쨌든 이상하게 심혼을 꼼짝 못하게 하는 여자였지." "그런 여자인데 나는 왜 기억에 없을까?" "원주는 반나절을 멍하니 앉아 있은 후에야 정신을 차렸어. 잠깐 사이에 흰머리가 희끗희끗했지. 원주의 곁에는 그 여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원주는 그 여자를 바라본 후 다시 푹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팽해만 자네 거기 쭉 있었나 하며 묻더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지. 원주께서 명했다. 곁의 여자를 아무도 모르게 천화원으로 데려가라 고. 여인이 천화원의 위치를 안다고 했다. 그래서 그날 나는 서둘러 길을 떠났지." "그런 일이 있었나? 나는 자네가 다른 일로 바쁜 줄 알았지. 그래 갑자기 그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자네가 성녀라는 계집의 이야기를 끄집어냈기 때문이다. 지금 생 각하니 그 여자가 성녀였던 것 같다. 천화원으로 가는 도중에도 시시 껄렁한 농담 한 마디 던지지 못했다. 음……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어. 마력(魔力)을 가진 여자가 아니라면 나를 그렇게 얼어붙게 할 여자는 없지!" "전대 성녀는 화형에 처했지 않았는가?" "누가? 자네가? 내가? 아니면 남궁기, 당예?" "……." "우리 원주는 직접 여자를 화형에 처할 정도로 고매하시지. 그렇지 않은가?" "음……." 언상영은 수염을 쓸었다. "이제 분명해졌어. 원주께서는 성녀라는 그 여자에게 푹 빠진 게야 . 보자 마자! 충분히 그 정도로…… 아마…… 아름다웠을 거야. 그래 서 모두에게 죽였다고 해 놓고 진작 천화원에 그 여자와 살림을 차린 게다. 지금 이야기하는 어린 계집은 그렇게 태어났고……." "분명한가?" "이야기의 앞뒤가 그렇잖아!" "껄껄껄! 자네다운 생각이군. 만약 말일세. 그 어린 계집이 원주의 딸이라면 원주는 왜 가만히 있는가?" "천 일 이상 가는 사랑은 고금에 보기 드물지. 애정이 식으니 그 찌꺼기도 보기 싫어진 게다. 그리고 마녀의 딸이 아닌가." "쯔쯔…… 자네가 아들, 딸을 키우는 아비가 맞는지 의심이 가는군 . 마누라에 대한 사랑은 모르겠으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천 일 간다 는 이야기는 나는 듣지 못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감정이 헌신과 사랑밖에 없다는 것은 착각이 야. 사기(史記)를 보니 왕자(王者)를 잡아먹은 왕(王)도 많더라구." "찢어진 입을 나불거리는 것을 보니 이제 여유가 조금 생기는 모양 이군. 그만 지껄이게. 원주의 딸임을 밝혀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어 린 계집이 원주의 딸임이 밝혀지면 곤란한 일만 생길 뿐이고…… 원 주의 딸을 인질로 삼겠다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언상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으헤헤, 그렇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궁금한 점 이 너무 많아." "궁금한 점은 천천히 이야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몇 가지는 알아야지! 믿을 만한 놈인가? 놈들의 술책에 말려 드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앞뒤 없이 일을 벌일 언상영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일이 일인지라 팽해만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술책에 말려들어 잃을 것이 무엇인가?" "쓸데없는 일로 손발이 바빠지잖아." "손발은 나만 바쁘면된다. 필요할 때 자네를 부르겠다. 입이나 굳 게 닫고 있게." "배교놈이 언제 그 어린 계집을 넘겨준다고 하던가?" "곧 소식이 올 게야. 나는 천라지망을 만드는 데 바쁠 것 같고…… 자네가 데려오겠나?" "으헤헤, 좋지!" 팽해만은 오랜만에 호쾌하게 소리쳤다. * * * 무당파 장문인, 양진자의 목이 마인거주의 대월에 떨어지고 무당산 은 화염에 휩싸이던 그날……. 도화는 결심했다. 이 악마들을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어린 아가씨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세상이 조용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없었 다. 저 악마들의 눈, 강호인들의 눈으로부터 어린 아가씨를 숨기고 지킬 자신이……. 역시 마왕은 사라져야 했다. 다급한 마음으로 도예를 만났다. 도예는 그녀의 결단을 치하했다. 그리고 단심원주를 만날 장소와 일시를 가르쳐 주었다. 도예는 기회를 엿보며 기다렸다. 마군들이 우글거리는 그 배를 떠날 날을……. 제35장 초설(初雪) 등중용은 보았다. 강안에 늘려 있던 수많은 시신들…… 요행히 살아남은 자는 그에게 전했다. 우리는 마교의 상대도 되지 않았다. 동관에 이르러 등중용은 들었다. 소림과 함께 태산북두로 강호를 이끌어 오던 무당파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그 엄청난 배교의 힘 앞에 나는 왜 그토록 유유자적했는가?' 등중용은 좀더 신중하지 못했던 자신을 질책하고 질책했다. 아마 강호의 평 때문이었으리라. 하오문! 알게 모르게 쌓였던 배교에 대한 경멸이 배교를 치는데 최대한의 힘을 기울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던 것이다. 그만하면 개방은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개방에서 배교를 상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라고 말한다면 그는 지금 대답할 것이다. 나는 능운공작을 찾지 않았다. 그에게 무릎을 꿇고서라도 협조를 구해야 했는데 구하지 않았다.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은 나이나 체면 때문에 할 수 없었을 일이라도 나는 할 수 있었다. 등중용이 자신을 자책하는 이유의 전부였다. 이 장로, 상 장로, 많 은 개방 제자들의 시신이 눈앞에 어른거리자 그의 심장은 터질 듯했 다. 동관을 오르는 발걸음이 빨라졌다. 이미 지나간 일, 더 이상의 피 해만은 막아야 했다. 등중용은 취팔선과천(醉八仙過天)으로 단숨에 천화원에 이르렀다. "멈추시오!" 천화원으로 불쑥 들어서려는 그를 천위대의 무사들이 막았다. 그들 은 위압적인 표정으로 등중용을 둘러쌌다. "원주께 전해 주시오. 거지들의 방주가 원주를 뵙고자 하오!" 등중용이 조급한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아!" 천위대원들은 머리를 숙이며 황급히 물러났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개방의 방주가 구결을 매며 젊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었 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수하 한 명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잠깐이라 하더니 제법 시간이 흘렀다. 일다경이 지났을 것이다. 은 빛 복장의 자가 다가왔다. 천위대 부대주, 한고였다. "등 방주, 어서 오십시오." 한고는 겸손히 머리를 숙였다. "원주를 뵙고자 하오." "알고 있습니다. 원주께 방주가 오셨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 "그런데?" "급한 일이 있어 만나지 못함을 양해해 달라고 했습니다." "급한 일? 무슨 급한 일이 있단 말이오?" 등중용은 목소리를 높였다. "원주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저 역시 방주를 뵙 게 해 드리려고 무척 노력은 했습니다. 진정입니다. 환란 속에 놓인 강호에는 제 친척과 지인도 있습니다. 몇 명은 벌써 목숨을 잃었을지 도 모르지요." 한고는 등중용이 온 사정을 알고 있었다. 원주가 천화원의 문을 열 고 강호에 나서기를 바랬기에 꼭 개방 방주를 대면시켜 주려 했다. 그러나 원주는 한 번 내린 축객령(逐客令)을 번복하지 않았다. "원주는 무슨 일을 하고 있소?" "정자에서 연못을 바라보시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한고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연못을 보며 생각? 비키시오!" 등중용은 억지로 천화원으로 들어가려 했다. "죄송합니다." 한고가 길을 막았다. 등중용은 서너 걸음 물러나 한고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결례를 용서하시오." 그가 용두봉을 들었다. 순간, 웅! 하며 용두봉이 바람을 일으켰다. 한고는 놀라 다급히 칼을 빼 들었다. 용두봉의 그림자가 이미 코앞 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쾌도난마로 칼을 번쩍였다. 탕! 탕! 탕! 용두봉은 강철 보다 단단했다. 칼에 부딪히고도 용두봉은 흠집 하 나 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한고는 손목이 떨어져 나가는 충격을 받고 주춤 뒷걸음질을 쳐야 했다. 개방의 방주를 근래의 유일한 신성(新星)이라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등중용이 타구십팔초(打狗十八招) 중 구급도장(狗急跳墻)으로 뛰어 들며 사각난붕(四脚亂崩)을 취해 가자 한고의 손발이 어지럽게 흔들 렸다. 천위대의 수하들이 놀라 칼을 뽑을 때는 이미 한고는 용두봉의 그 늘에 가려 형체를 잃은 후였다. "핫!" 등중용은 한소리 외침과 함께 용두봉을 멈추었다. 바람 소리도 가라앉고 흙먼지도 가라앉았다. 한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용두봉이 차갑게 자신의 심장을 짓누르고 있었다. "방주, 대단하십니다. 이만한 실력을 갖추셨는데 굳이 원주를 찾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아냥거림이 아닌 진정으로 하는 말이었다. 사패와 견주어도 질 것 같지가 않았다. "천화원의 담장은 역시 높소. 구룡선주, 마인거주의 무공을 본 강 호인이라면 그런 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오. 한꺼번에 나백과 탈명이 나타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겠소. 그것도 구룡선주 보다 무공이 약하다고 알려진 마인거주가 나백 이상의 무공을 지닌 채……." 등중용은 용두봉을 회수했다. 그가 휙! 천화원으로 들어갔다. 천위대의 수하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그만 두어라!" 한고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수하들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방주, 원주로부터 좋은 결과를 얻기 바라오. 하지만 원주의 고집 을 꺾을 수 있을는지." 한고는 한숨을 쉬었다. 단원홍은 정자에 앉아 홀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등중용은 성큼성큼 정자에 올라 그를 마주보며 털썩 앉았다. "원주께서는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모양이오. 술을 준비해 둔 것 을 보면……." 그는 권하지도 않은 술을 술병째 들이켰다. "커! 좋군. 이런 술맛 때문에 강호의 일을 잊은 것인가?" 구구절절 긴말이 필요 없었다. 등중용은 자신의 의중을 바로 밝혔 다. "맛이 좋다니 다행입니다." 단원홍은 비로소 등중용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등중용은 가슴이 철렁 했다. 단원홍의 안색은 창백했고 눈빛은 공허했다. 무척 지쳐 보이는 표 정이었다. 사정도 모르고 섣불리 무례를 저지른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섰다. "나는 내기를 하고 있었소. 누가 가장 먼저 천화원으로 오르는가? 등 방주나 팽해만 둘 중 한 명이 될 것이라 생각했소. 아무래도 등 방주 쪽으로 마음이 기울더니 역시 등 방주가 가장 먼저 천화원에 올 랐군요. 내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을 보면 아직 나의 판단력은 그렇게 무딘 편은 아닌 것 같소." 단원홍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내가 올 줄 알았단 말이오?" 한바탕 실랑이를 벌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단원홍이 부드럽게 나오 자 오히려 등중용이 찔끔했다. "술을 한 잔 받으시겠습니까?" 단원홍이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등중용은 얼떨결에 잔을 받아 술잔을 비웠다. 단원홍은 등중용으로부터 잔을 받아 말없이 자작했다. 한 잔, 두 잔……. 마음이 급한 쪽은 등중용이었다. 결국 그는 급한 마음을 참지 못하 고 입을 열었다. "원주, 강호가 어떻다는 것은 원주께서도 잘 아실 것이오. 지금의 어려움을 수습할 분은 원주밖에 없소." "배교도들이 의외로 강한 모양이군요." "구파일방으로는 막기 힘드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있었다면 원주 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요." "사패는?" "그들에 대해서는 묻지 마시오! 알아서 하겠지!" 등중용은 사패에 대한 악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사패가 강호의 주인으로 행세한지가 한 십 년은 되지요? 아무래도 그들의 그릇은 강산이 한 번 바뀔 정도의 시간밖에 담을 수 없는 그 릇인가 봅니다." "꼭 사패만을 탓할 마음은 없소. 잘못은 우리에게도 있으니……." 등중용은 꿀꺽 술을 들이키고 단원홍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원홍의 시선이 다시 연못으로 향했다. 등중용은 답답했다. 말이 이어질 만 하면 끊어지고 있었다. "말씀해 주십시오. 원주! 언제 검을 뽑으시겠소?" "누구를 상대로?" 단원홍이 물었다. 등중용의 안색이 굳어졌다. "원주, 지금 나를 희롱하는 것입니까?" "아! 미안합니다. 내가 잠시 딴 생각을……." 단원홍이 연못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등중용의 속은 다시 부글부글 끓었다. 그는 입에 술병을 처박았다. "배교도들을 상대해 주시기를 바라고 계시지요. 나의 일입니다. 나 의 일이니 해결을 보아야지요." "정말입니까?" 등중용은 반색을 했다. "서둘러 주십시오! 원주의 빠른 한 걸음이 강호의 수많은 목숨을 구합니다!"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나도 있소.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 는 일이 나의 발걸음을 잡고 있군요."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일이라니?" "나는 두 여자에게 두 번을 속았소. 한 여자는 죽어 버렸기 때문에 책임을 물을 생각은 없소. 그러나 한 여자는……." 단원홍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사람들은 내가 심사숙고해서 행동하는 줄 알지만 나는 무척 즉흥 적(卽興的)인 사람이오. 미리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그때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나 자신도 알 수 없소. 죽여 버린 후 뼈저리게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아니오." "원주, 저는 원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저히……." "예령을 이야기하고 있소. 내가 그 아이를 다시 만나는 그 순간에 그 아이가 배교를 위해 또 다시 떠나겠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생각 중이오." "……." 등중용은 입을 닫았다. 느낌이 이상했다. 평상심을 가진 사람의 말 과 행동이 아니었다. "등 방주, 염려 말고 가시오. 분명 내 일이라고 했소. 조만간 강호 를 엿보리다." "원주, 나는 원주의 그 말씀을…… 원주의 그 말씀을 굳게 믿습니 다." 등중용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은 지금 황산으로 가고 있소. 황산에 그들의 총단을 다시 세 우려 하지." "정말입니까?" "하하하! 나를 너무 바보로 생각하지 마시오. 들을 것은 다 듣고 있습니다." 단원홍의 웃음이 공허하게 천화원을 울렸다. "바보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 나는 원주만 믿습니다." 등중용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갑 자기 단원홍이 자신의 말을 번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단원홍 에 읍한 후 서둘러 정자를 내려가려 했다. "등 방주……." 단원홍이 그의 바쁜 발걸음을 잡았다. 등중용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등 방주, 훌륭하오. 원상, 노선배를 쓸데없이 남의 일에나 끼여드 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사람을 보는 놀라운 안목도 있었구려. 앞으로 강호는 등 방주의 손발에 좌지우지될 것 같습니다."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듭니다. 구름 잡는 소리 같이 들리는군요. 어 쨌든 과찬의 말씀 고맙게 듣겠습니다. 그럼…… 강호에서 뵙겠습니다 ." 등중용은 총총히 정자를 걸어 내려왔다. 천화원을 나서며 그는 힐끔 단원홍에게 시선을 던졌다. 단원홍은 차가운 바람 속에 여전히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기에…….' 절세거인(絶世巨人)의 풍모(風貌)는 보이지 않았고 청승맞기까지 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고가 다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그때였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천화원 전체가 흔들렸다. 등중용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연못의 물이 천 장으로 치솟으며 장대비로 쏟아지고 있었다. "가끔 있는 일이니 놀라지 마십시오. 원주의 심기가 좋지 않은 듯 합니다." 한고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등중용은 다시 불안했다. 갑자기 오늘 그가 한 말을 기억할지도 의 심이 갔다. 그래서 그는 더욱 발걸음을 서둘렀다. 능운공작에게 모든 일을 맡겨 둘 수 없는 처지였다. 구파일방의 마지막 힘을 총집결할 생각이었다. '황산에 총단을 세운다고 했지.' 계획은 정해졌다. 그들이 각 문파를 피로 물들이고 잿더미로 만들 었듯이 그들의 황산 총단 역시 그렇게 만들리라 등중용은 다짐했다. * * * "파파, 어디로 가는 거예요?" 예령은 자신이 너무 멀리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놈들과 같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곳은 마굴(魔窟)입니다. 마 굴!" 도화가 거칠게 말했다. "그럼 우리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인가요?" "맞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우리를 기다리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파파, 나는 가면 안되요. 그분의 마음을 돌릴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걸요. 아란하도 그렇게 말했고 신 아주머니도 그렇게 말했어요." "그분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파파가 구룡선주라 부르는 사람……." 예령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화가 구룡선주에 대해서는 이름도 듣 기 싫어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구룡선주의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요? 그 여자들의 더러운 수작일 뿐입니다. 아가씨를 붙잡아 두기 위한…… 그 마인의 마음은 부처가 와도 돌리지 못합니다. 지장보살도 용서하지 않을 천하의 악인입니 다. 이제껏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다니……." 도화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험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에요. 분명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어머 니가 그분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셨을 리 없잖아요." "어머니? 큰아가씨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가씨의 마음이 착해 그런 꿈을 꾼 것뿐입니다." "아니에요!" 예령이 화를 냈다. "아가씨, 아가씨는 누구의 편입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천하에 누 가 가장 아가씨를 아끼는 가를…… 원주와 나, 천노!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아가씨가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꾸 배교도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나는 무척 섭섭해 할 것입니다." 도화는 울컥 하는 마음에 눈시울까지 붉혔다. 예령의 마음은 여리고 착하다. 도화의 말에 그녀의 마음은 약해졌 다. "미안해요. 파파……." 그녀는 도화의 손을 잡았다. "다 아가씨를 위하는 일입니다. 잠시 한 곳에 들렀다가 바로 천화 원으로 갑시다. 원주도 천노도 아가씨를 무척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 다." "단 아저씨를 만나러 가는 길이군요." 예령은 좋아했다. "그렇습니다." "단 아저씨는 만나고 싶어요. 그런데 아란하에게 잠시 어디 갔다가 올 것이라고 말하고 오면 안될까요?" "이 길은 영원히 배교와 헤어지는 길입니다. 다시 만나지 않을 자 들 작별을 고해서 어쩌겠다는 말입니까?" "파파……." 예령은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잠시 착각을 했습니다. 배교도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하 지만 나는 보았습니다. 나쁜 곳은 역시 나쁜 곳이었음을……." "누가 나빴다는 말이에요? 아란하, 신 아주머니, 감 아저씨…… 모 두 좋은 분이었잖아요." "그들이 비록 좋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마두의 수하인 이상 마졸( 魔卒)일 뿐입니다. 배교는 마교입니다!" "파파!" 예령은 고함을 질렀다. "더 이상 우리 어머니의 교,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의 교를 모독하 면 파파와 함께 가지 않겠어요!" 그녀는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냈다. 도화는 당황했다. 예령이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 했었다. "어머니의 교를 모독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배교를 지키는 자들이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허둥대며 말을 돌렸다. "약속해 주세요. 단 아저씨를 보고 나면 다시 교로 돌려보내 주겠 다고.……." 예령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가씨……." 도화는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정말 이 일만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알았습니다. 아가씨를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세상이 조용해지면 .……." 그녀가 씁쓸히 말했다. "아가씨 업히십시오." 그녀는 예령을 등에 업었다. 배교와 천화원 아가씨들의 질긴 인연 이 생각나자 배교의 추적자가 등뒤까지 따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예령을 등에 업고 신형을 날렸다. "아이고, 아이고! 누가 데려오는가 했더니 바로 도화였구려!" 팽해만이 호들갑을 떨며 도화를 맞았다. "이 어린 아가씨가 바로 그…… 그…… 성녀라는 분이시오?" 그가 도화의 등에서 내리는 예령을 가리키며 물었다. "맞소." 도화가 남자처럼 무뚝뚝하게 말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하필이 면 마중 나온 자가 승룡방주라니…… 몇 번 안면이 있었다. 그때마다 이상하게 꺼림직한 기분을 느꼈던 자였다. "자,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고…… 마차를 탑시다." 팽해만은 예령과 도화를 마차로 떠밀었다. "가자!" 그가 어자에게 출발을 명했다. 네 댓명 기마인의 호위 속에 마차가 출발했다. '원주의 딸이라면 조금 닮은 구석이 있으련만 전혀 닮은 곳이라고 는 없군. 언상영의 말이 맞는 것 같구나. 그렇지. 아무리 내친 딸이 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을 아비는 없지. 그리고 숨기고 싶은 딸이었다 면 그렇게 가까운 곳에 금옥까지 설치하며 별스럽게 두지는 않았을 게다. 누구에게 맡겼으면 맡겼지. 그나저나 참 귀엽게 생겼구나. 가 만 있자. 제 어미를 닮았나?' 어자의 곁에 앉은 팽해만은 마차 안을 힐끔거렸다. '이런 젠장! 기억할 수가 있어야지. 모르겠다. 닮은 것 같기도 하 고…… 어쨌든 원주의 딸이 아니라도 조심스럽게 대해야겠지. 도화라 는 계집이 저렇게 애지중지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천화원과 연관은 있 다.' 그는 '어험' 하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를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대부인과 무척 닮았군요." "제 어머니를 아시나요?" 예령이 반갑게 물었다. "물론입니다. 알다마다요. 먼 곳에 있던 분을 천화원까지 모신 사 람이 바로 나지요." "그래요?" 예령은 도화를 바라보았다. 도화는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않았다. 승룡방주가 큰아가씨를 데 려온 것은 사실이니……. "아주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아가씨도 대부인을 닮아서 무척 아 름답군요." "고마워요." 예령은 방긋 웃었다. "구룡선주, 마인거주 같은 악인들 틈에 고생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배교놈들은 아주 추악한 놈들이지요. 예전에 원주께서 그들에게 한 번 불벼락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워낙 잡초 같은 놈들이라… …." 팽해만도 도화와 같은 실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령은 팽해만 에게는 배교에 대해 가타부타 하지 않았다. 마음의 벽이 높은 자는 한두 마디의 말로 교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다. 단원홍에 대해서만 물었다. "단 아저씨가 우리 교에 불벼락을? 무슨 말이에요?" "으헤헤, 모르고 계셨던 모양이군요. 십 여년 전 원주는 배교도들 의 씨를 말리려 했지요. 원주의 칼에……." "팽 방주, 그만두시오!" 도화가 거칠게 소리쳤다. "무슨 숨길 일이 있다고 그렇게 고함을 치시오. 강호인들이 다 아 는 사실인데……." 팽해만은 히죽 웃었다. "어쨌든 이번에는 배교의 뿌리를 완전 뽑고 말 것이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으헤헤!" "단 아저씨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예령이 창백한 안색으로 물었다. "당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원주께서는 배교도라면 치를 떠는 분이시지요. 십 여년 전 모산에서 그 난리를 부린 것만 봐 도 알 수 있습니다." "단 아저씨가 원래 그런 분이었군요." 예령은 상심에 빠졌다. 천화원의 백발 아저씨와 적이 된다는 사실 은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터였다. '만약 단 아저씨가 감 아저씨나 아란하를 상대로 칼을 뽑는다면… ….'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 지도 몰랐다. 싸우 지 않기만을 바랄 뿐……. 팽해만은 예령의 생각을 읽고 있는 듯했다. "배교놈들의 힘이 제법입니다. 원주께서 배교도들과 싸울 때 아가 씨는 당연히 원주의 편을 드시겠지요?" "……." 예령은 대답할 수 없었다. 도화의 인상은 점점 험악해 졌다. 그녀의 눈에는 팽해만이 아가씨 와 원주를 이간질 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소리 하려 했으나 그녀는 입을 꽉 다물고 말았다. 전혀 사실무근의 말은 아니었기에 아가씨가 알 필요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주를 위하는 마음에 배교와 손을 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정말 그녀가 바라는 일 이고……. "원주의 편을 드시리라 믿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 일도 도와 야지요. 우리는 원주의 수족 같은 자들입니다. 우리를 돕는 일이 바 로 원주를 돕는 일이지요." "무슨 일을 도와라는 거예요?" 예령이 맥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교는 그녀에게 너무도 많은 난관 을 부여하고 있었다. "음…… 찾아보면 많을 겁니다. 그들은 아가씨를 성녀, 성녀하며 아가씨를 이용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의중을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지요. 으헤헤!" 팽해만은 메기입을 씰룩거렸다. 자신이 돌이켜도 기가 막힌 생각인 듯했다. 어디 처치할 자가 구룡선주 뿐인가. 마인거주, 나머지 배교 도들도 줄줄이 처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녀라면 목을 메는 자들 이 배교도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손에 배교도들이 평정되는 즐거운 꿈을 꾸고 있었다. 예령은 팽해만이 한 마지막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도화에게 시선을 돌렸다. 도화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무엇인가를 생 각하고 있었다. 도화는 불안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불안감은 점점 더했다. 칼끝에 항상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는 강호인들! 자신의 목숨이든 상대의 목숨이든 항상 목숨을 상대로 놀아야 하는 그들의 흉폭함과 비열함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고 들었다. 천화원을 벗어나 본 적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너무 쉽게 도예의 말을 듣고 사패에게 몸을 맡기려 하지 않았나 불안했다. 팽해만이라는 자의 저 느물거리는 태도, 마지막 말도 마음에 걸렸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어린 아가씨를 제멋대로 이용하려 들 것 같았다. '당연히 아가씨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겠지. 왜 나는 천화원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원주라면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가씨를 지켜 줄 수 있는 분인데…….' 도화는 자신의 경망스러움을 자책했다. 마차는 달리고 달렸다. 그리고 하룻밤 숙박을 위해 객잔에 머물렀 을 때 도화는 자신의 불안을 더 이상 참지 못했다. 팽해만을 떠나 천화원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방주!" 팽해만이 묵고 있는 객방을 두드렸다. "들어오시오." 팽해만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도화를 맞았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제법 의젓한 투로 물었다. "방주, 쭉 생각을 했습니다. 아가씨를 지금 가는 곳이 아니라 천화 원으로 데려가겠소." "잉? 그게 무슨 말이오?" 팽해만은 찢어진 눈을 치켜 떴다. "그 악마 같은 구룡선주 놈에게 질려 내 머리가 이상해졌던 모양이 오. 아가씨를 놈을 유인하는 미끼로 쓰려 하다니…… 원주께서 알았 다면 내 목이 백 개라도 남아나지 못했을 거요." 도화는 미리 단원홍을 들먹였다. "미끼라니 그 무슨 말씀을…… 구룡선주, 마인거주가 어떤 놈이요? 놈을 처치하는 일에는 집구석의 부지깽이라도 일어나야 할 판입니다 . 당연히 아가씨와 도화, 당신도 놈을 처치하는 일에 나서야지. 원주 께서도 바라는 일이오." "아닙니다! 원주께서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강호의 일은 강호인들 이 알아서 하시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강호의 험난함 속에 끌 어들일 수 없소!" "도화……." 팽해만은 도끼눈을 떴다. "으헤헤, 지금까지 배교놈들에게 죽은 강호인들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시오? 피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소. 그런데 강호의 험난함 운운이라니……." "우리 아가씨의 책임이 아니라고 했소!" "뭐? 당신 아가씨가 책임질 일이 없다고…… 강호인들에게 물어보 라구. 책임질 일이 없는가. 구룡선주, 마인거주 다음으로 찢어 죽이 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면 바로 당신의 아가씨란 말이야! 마녀!" 팽해만은 반말을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팽 방주, 방주께서도 우리 아가씨를 마녀라 생각하오? 마녀이기 때문에 작금의 환란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 오?" 도화는 눈을 부릅떴다. "으헤헤, 당신의 아가씨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자 했다면 지금 처럼 고분고분 하게 대하지도 않았지. 최선을 다해 좋은 쪽으로 보려 고 노력하는 중이라구. 도화, 당신은 그 사실을 알아야 해." "결국 아가씨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군요. 나는 가겠소!" 도화는 객방을 나서려 했다. "가만있어!" 팽해만이 거칠게 도화의 팔을 잡았다. "으헤헤! 도화, 도화…… 정말 이러면 곤란하다구. 구룡선주를 처 치할 절호의 기회잖아. 구룡선주가 어떤 놈인 줄 알아? 우리 모두를 죽음으로 몰고 갈 놈이란 말이야." 그가 숨을 씨근덕대며 말했다. 도화는 팽해만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팽해만의 생각을 확인한 이 상 더욱 이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팽해만은 도화의 팔을 놓아 주지 않았다. "도화, 자, 잘 들어. 다, 다시 말하겠다. 구, 구룡선주를 죽이지 않으면 우, 우리가 죽는다고. 깊이 생각해. 깊이……." 팽해만은 흥분으로 말을 더듬거리며 흉광을 빛냈다. "팽 방주를 위해 우리 아가씨를 험지(險地)에 두라고! 나는 그렇게 는 못하겠어요!" 도화가 쇳소리를 냈다. 팽해만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으헤헤, 헤헤헤헤……." 그가 히죽댔다. 분노가 화산(火山)처럼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고 있 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분노를 참지 못했다.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하 며 앞뒤를 생각할 수 없었다. "원주의 체면을 생각해서 오냐 오냐 했더니! 이 미천한 계집년이 감히!" 주먹이 날았다. 도화는 팽해만이 주먹까지 날릴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녀 역시 한가락의 실력은 있었다. 그녀는 팽해만의 주먹을 피하며 금 나수로 팔을 움켜쥔 팽해만의 손을 털려 했다. 간발의 차이로 주먹이 도화의 안면을 스쳐 갔다. "가랑이를 찢어 죽일 년!" 팽해만의 눈동자가 충혈 되었다. 그가 객방을 뛰쳐나가려는 도화를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도화는 등뒤에서 불어오는 싸늘한 경기에 급히 신형을 비틀며 장권 을 뻗었다. 좁은 방에 찬바람이 일며 팽해만과 도화는 평생의 원수처럼 장권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승부는 오래가지 못했다. 실력의 차이도 있었지 만 칼바람 속을 뛰어다닌 팽해만의 산타(散打) 상대로 도화는 역부족 이었다. "아!" 도화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팽해만의 주먹이 복부에 꽂히고 있었다. 도화는 비틀댔다. 팽해만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소낙비 같 은 주먹을 날렸다. 도화의 전신이 멍들어 갔다. 그녀의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내가 잘 생각하라고 했지! 으헤헤, 지금 네년과 장난을 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목숨, 우리 아이들, 내가 일군 기업은 개똥이 아니라구! 그깟 마녀의 핏줄! 만 개의 목숨과도 바꾸 지 않을 것들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까짓 일도 못하겠다고!" 팽해만은 쓰러지는 도화를 짓밟았다. "구룡선, 마인거가 나타난 후 제대로 잠 한 번 자지 못했다! 이제 서광(瑞光)이 보이나 했더니 미친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시비에 불 과한 주제에! 네년의 목숨이야말로 개똥이다!" 그는 도화를 초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팼다. 도화가 완전 축 늘어진 후에야 팽해만은 주먹질을 멈추었다. "잉?" 호흡을 가다듬던 그는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도화를 보며 딴 사 람인 듯 안색을 찌푸렸다. "아이고, 이런!" 그가 자신의 이마를 쳤다. "화초를 가꾸고 글줄이나 읽으면 그놈의 성깔이 어디 갈 줄 알았더 니…… 뿔난 돼지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아직 멀었구나. 으헤헤, 그러나 모두 나의 잘못만은 아니다. 왜 영웅의 본색을 드러내게 만 들어." 그는 쓰러져 있는 도화를 발로 툭 찼다. "그나저나 큰일인데. 이 계집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으니…… 원주 의 책망을 피하기 힘들 것 같구나." 팽해만은 비로소 자신의 앞 뒤 없는 행동을 후회했다. "어쩔 수 없군. 적당한 기회에 네년은 살인멸구(殺人滅口)다. 구룡 선주가 죽인 자가 어디 한두 명이라야 말이지. 네년 하나쯤 더 죽였 다고 해서 의심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험!" 그가 헛기침을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예령은 깊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창 밖을 부는 바람은 거세고 객방 안도 추웠다. 예령은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억지로 잠을 청하기를 포기하고 창가 에 앉았다. 소옥을 나온 후 몇 달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가슴이 답답했다. 소옥 밖의 세상은 더 많은 좋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가장 큰 걱정은 어머니의 호교신장의 마음이었다. 그 무정한 마음 을 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어머니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이상 하게 어머니는 그날 이후 한 번도 꿈속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 다. 예령은 지치고 힘들었기 때문에 꼭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오늘밤엔 꼭 꿈속에 나타나 달라고 염원했다. 단 아저씨의 일도 걱정이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는 어머니의 호교 신장과 단 아저씨가 칼을 뽑아 들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장면이 너 무도 선했다. 예령이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 단원홍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호교신장을 더 좋아하시겠지.' 그 누구도 상처받지 말았으면 했다. '싸우지 않을 거야. 내가 간절히 원한다면…….' 예령은 다시 조막손을 모았다. 그때였다. 톡! 톡! 톡! 톡톡톡톡! 무엇인가가 창을 두들겼다. 예령은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과 함께 새 한 마리가 파다닥 들어왔다. "낙조!" 예령은 기뻐하며 벌떡 일어났다. 낙조는 예령의 어깨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추위에 지쳤던지 그 녀의 품속으로 뽀르르 몸을 숨겼다. "혼자 왔니?" 예령은 창 밖으로 고개를 빼고 암천을 살폈다. 흑백조와 호교신장 이 명조라 이야기했던 채색조는 보이지 않았다. 휘 - 익! 휘 - 익! 예령은 그들의 울음 소리로 흑백조와 명조를 불렀다. 그러나 흑백 조와 명조는 한참이 지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상하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밤중에 낙조를 홀로 두고 멀리까지 다닐 어미새가 아니었다. 예령은 낙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깃털도 어수선했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음……."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아란하의 말이 떠올랐다. - 성녀,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떠나야 합니다. 떠남의 아픔을 겪지 못하면 성숙할 수 없지요. 갑자기 그런 말을 했었다. 그리고 다시 물었을 때 아란하는 자신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란하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이야기했건 예령은 맞는 말이라 생 각했다. "낙조, 너도 성조(成鳥)가 되기 위해 부모의 곁을 떠났구나." 예령은 품속에서 머리를 꾸벅이고 있는 낙조를 쓰다듬었다. "그랬었구나." 낙조를 보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기다려도 어머니가 꿈속에 나타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았 다. "어머니는 이제 내가 홀로 모든 문제를 풀어 나가기를 바라고 계신 것이야." 예령은 하늘을 우러렀다. 다시는 꿈에 어머니가 나타나지 않으리라 . 그렇게 생각하니 슬펐다. 하지만 그녀는 곧 기운을 되찾았다. 떠난 다는 것은 성숙을 위한 단계일 뿐 영원한 이별이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훈한 바람이 불었다. "어!" 예령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천공에서 하얀 꽃씨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눈이었다. 올해 처음으 로 보는 눈……. "야!"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예령의 품속을 뒤척거리 던 낙조도 눈이 신기했던지 그녀의 어깨로 폴짝 뛰어나왔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며 예령의 세계를 은백색(銀白色)으로 덮어 갔다. * * * 첫눈치고는 제법 많은 눈이었다. 벌써 며칠째 천공을 은빛으로 수 놓고 있었다. 명강량은 구룡선에 앉아 내리는 눈발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손등과 얼굴에 닿는 차가운 감촉……. 그 촉감들은 이상하게 이미 오래 전에 파묻힌 그의 기억들을 하나, 하나 되살리고 있었다. '사부…….' 사부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고작 들은 말이야 보권에 실렸던 말 이나 호교신장의 책무, 무공 수련에 꼭 필요한 말들뿐이었다. 그 외 는 '그렇지.' '그렇게 하는 게야.'라며 미소만 지었었다. 가슴이 훈훈했다. 주 명두, 여 명두도 생각났다. 자신을 염려하며 꼭 손을 잡아 주던 그들…… 그들의 체온도 떨어지는 눈의 촉감 속에 살아났다. 아, 아 ! 황 명두, 황 명두는…… 그때 이미 백 살이 넘었었는데 살아 있을 지. 사천 명두 추대괄의 호탕한 웃음도 귓가에 짜랑했고 호북 명두 노기준의 청수한 모습도 떠올랐다. 장호, 오삼립, 그리고……. 명강량은 눈을 지긋이 감았다. 그립구나. 그리워! 풍마 속에 사라진 그들……. 이제는 모두 없다. 명강량은 자신을 살폈다. 낡고 낡은 금의…… 오랜 세월이 흐른 듯했다. 비로소 명강량은 세월의 부침을 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저려 왔다. 왜 잊고 있었을까? 순간, 명강량은 불에 덴 듯 화끈한 통증을 느꼈다. 갑자기 사부의 노한 모습이 떠올랐다. '강량, 그 일도 못했단 말이냐! 그 일도! 너의 목숨으로 지켜라 했 던 그 일을!' 명강량은 얼굴을 찌푸렸다.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헉!' 그는 헛바람을 토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눈은 쉬지 않고 펄펄 날리고 있었다. 명강량의 눈빛은 침잠 되었다. 모두를 잊게 하고 자신을 잊게 한 그 아픈 기억만은 악몽처럼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근자에는 오늘처럼 가끔 옛 일이 기억나기도 했 다. 세월의 부침은 모든 것을 퇴색하게 하는가? 그 악몽 같은 기억마 저……. '예령이라 했지.' 어린 성녀의 영상이 마음속에 점점 커져 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 다. 옛 사람을 기억하는 것만큼,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린 성녀를 기억 하는 일도 가슴이 훈훈했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 다. '그래, 가 주지.' 명강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때였다. 눈발을 헤치며 서너 명의 사람들이 나루터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린 성녀를 찾아 떠났던 감악, 장탄, 고명상이었다. 그들의 어깨는 축 늘어져 있었다. 당연히 어린 성녀를 찾지 못했겠지. 명강량은 그들을 외면하며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감악과 장탄, 고명상은 지친 얼굴로 배에 올랐다. 몰골들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끼니도 잊은 채 죽을힘을 다해 찾아다녔을 것이 분명했다. 명강량은 또 다시 옛 일이 생각났다. 분하에서 악약을 잃었을 때… … 감악도 지금 같은 마음이리라. "성녀께서 돌아오셨소?" 감악이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명강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쿵! 뱃전에 발을 들이며 감악은 험악하게 명강량을 노려보았다. 당 장이라도 피를 보아야 속이 풀릴 것 같은 기세였다. "감 명두, 결국 찾지 못했군요." 아란하와 함께 선실에서 나오며 신화정은 발을 굴렀다. "전 명두는 어디에 있어요?" 아란하가 물었다. "도화라는 여자가 성녀를 천화원으로 데려가지 않았을까 해서 그 길을 막고 있소. 전 명두의 걸음이 워낙 빠르고 방 노관, 쌍혼, 사방 위, 십위병까지 동원되었으니 천화원으로 갔다면 반드시 찾을 수 있 을 것이오." 고명상이 말했다. "도화라는 여자가 성녀를 데려갔다면 천화원으로 가지 않았을 확률 이 높아요. 뻔한 추적로(追跡路)를 택했을 리 없잖아요. 명두들은 이 제 배에서 조금 쉬셔요. 신 명전과 내가 성녀를 찾아보겠어요." 아란하가 나섰다. "젠장! 어째서 이런 일이……." 쾅! 감악이 그 답지 않게 흥분하며 뱃전을 걷어찼다. "좋겠습니다! 짐 같은 성녀가 사라져서! 그래서 그렇게 편안히 앉 아 계시군요!" 감악이 갈라지는 소리를 내질렀다. 그는 휙! 신형을 뽑았다. 행여 성녀가 돌아왔을까 해서 배로 돌아왔다가 없음을 알자 다시 찾으려 나서는 모양이었다. 장탄과 고명상도 묵묵히 감악을 따라 신형을 뽑 았다. 아란하는 눈발 속에 사라지는 감악과 구룡선에 냉랭히 앉아 있는 명강량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명강량은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에는 방금 비표에 묶여 날아온 쪽지 한 장이 있었다. - 구룡선주, 그대의 성녀를 찾고 싶다면 호아산(虎牙山) 낭림(狼林 )으로 오라! 누가 보낸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비표를 날린 자를 붙잡아 알아보 려 하다가 그만 두었다. 비밀을 지키고 싶은 자라면 비밀을 아는 자 에게 일을 시킬 리 없었다. 명강량은 진력(眞力)을 일으켜 쪽지를 잿가루로 날렸다. "신 명전, 가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란하도 신화정과 함께 성녀를 찾으려 했다. "아란하……." 명강량이 그녀를 불렀다. 아란하는 조금 원망 섞인 눈빛으로 명강량을 바라보았다. 다른 일 은 몰라도 성녀의 일에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 성녀에게 무척 정이 든 아란하였다. "구룡선을 지켜라!" 휙! 명강량이 비조처럼 날았다. 명강량의 말이 아란하의 귓가에 닿 았을 때 이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명옹께서 드디어 성녀를 찾아 나서시려는 모양이군요!" 신화정이 눈빛을 빛냈다. "다행이에요. 다행……." 아란하는 괜히 눈시울을 붉혔다. "대전왕의 이목(耳目)은 그 누구도 피하지 못해요. 반드시 성녀를 찾아오실 거예요." 그녀는 염원하듯 두 손을 모았다. * * * 은세계(銀世界)가 쭉 펼쳐져 있었다. 명강량은 천천히 그 길을 걸었다. 바쁜 걸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의 풍물은 쏜살 같이 휙! 휙! 스 쳐 갔다. 그가 반나절을 걸었을 때였다. 그는 한 무리의 사람들과 마주쳤다. 명강량과 그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명강 량은 천음관을 매만졌고 그들은 각자의 병기를 매만졌다. 그들 모두는 기도로 서로를 읽고 있었다. 명강량은 귀찮은 일이 벌어지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장검을 든 호리호리한 중년 사내가 불쑥 한 걸음을 나섰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낡은 금의를 입고 오른손에 비구를 찬 자가 바로 구룡선주라고!" 그가 외쳤다. 슥! 스슥! 삭!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 서 있던 네 명의 사내가 각자의 병기 를 뽑아 들며 명강량을 압박했다. "나는 사패 중, 숭무각주 남궁기라 한다. 자검이 바로 나이고 옆으 로 축도(丑刀), 인창, 사곤, 신괴(申拐)가 이 분들의 이름이다. 나의 좋은 벗들이지." 명강량을 가로막은 자는 바로 남궁기와 그의 친구들인 십이지우들 이었다. 남궁기는 명가의 후예답게 대악인으로 알려진 명강량에게도 강호의 예법에 따라 먼저 자신들의 신분을 밝혔다. 남궁기는 구룡선, 마인거를 실은 배가 나루터에 정박해 있다는 소 식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던 탓인지 그곳까지 힘들게 가지 않고 바로 명강량을 만나게 된 것이다. 축도라 이름 불려진 자는 파풍도(破風刀)를, 인창은 차갑게 빛나는 소화창(小花槍)을, 사곤은 낭아곤, 신괴는 끝과 끝이 툭 튀어나온 철괴(鐵拐)를 들고 있었다. 명강량은 그들에게서 장문천의 냄새를 맡았다. 투기(鬪氣)로 키워 온 무사 특유의 냄새! 장문천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악착같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담백했다. 그 때문일까. 남궁기라는 자를 제외하고 장문천에 버금갈 만한 상 대는 보이지 않았다. 남궁기라는 자도 장문천을 능가하기는 어려울 듯했다. "구룡선주는 들어라! 우리는 그대의 악행이 어떻든 간에 그대가 가 진 초인적인 무공에는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무공에 대한 경의에 앞 서 우리는 그대를 꺾어 강호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의무가 있 다. 때문에 여러 명이 합공을 하는 데 대해 양해를 바란다!" 남궁기가 안광을 빛내며 소리쳤다.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느낌은 기도를 접한 순간 더 강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여유로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슥! 남궁기는 검을 빼 들었다. 사삭! 삭! 네 명의 십이지우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천 근의 힘 을 다리에 싣고도 눈에 발자국이 남지 않으니 각기 초상비(草上飛)나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는 오래 전에 넘은 듯했다. 움직임은 산 만했으나 그들은 서로의 투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 장소를 차지 하며 명강량을 에워쌌다. 오랫동안 합공술을 익힌 자들 같았다. 명강량은 자신을 에워싸고 병장기를 번뜩이는 자들을 바라보며 천 음관을 매만졌다. 그가 숨을 들이켰다. 순간, 팟! 인창이 소화창을 연이어 찔러 왔다. 달아나는 빛조차 꿰 뚫을 정도로 빨랐다. 양가창식(揚家槍式)과 함께 창법(槍法)으로는 강호 일절로 통하는 회마창법(回馬槍法)이었다. 장병기(長兵器)에는 단병(短兵)이 어울린다. 신괴가 철괴(鐵拐)로 선풍을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명강량은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팟! 그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졌다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축도의 앞에 나타났다. 축도는 자신의 절예 섬전삼도(閃電三刀)로 급히 대항했다. 이번에 는 사곤이 제미오행곤(齊眉五行棍)이라는 자신의 절예를 발휘 축도를 응원했다. 파파팟! 명강량은 진기를 주입한 소매를 깃발처럼 흔들었다. 소매 에 세찬 바람이 일었다. 쩡! 쩡! 축도의 파풍도와 사곤의 낭아곤이 명강량의 소맷자락에 부 딪혀 한천(寒天)을 울리며 퉁겨 났다. 축도와 사곤은 비틀비틀 물러났다. 파풍도를 쥔 축도의 손에서 피 가 주르르 흘렀다. 소매에 부딪혔는데도 손아귀가 찢어지는 것을 면 치 못했다. 비교적 내력이 약한 사곤은 더했다. 그는 피를 토하고 물 러나며 수치스럽게도 낭아곤을 떨구고 말았다. 남궁기의 검미가 꿈틀했다. 쐐액! 그의 검이 푸른 섬광을 일으키며 천지를 양단했다. 광풍이 일며 나무가 뿌리째 흔들리고 쌓인 눈과 흙먼지, 돌이 자욱하게 날았 다. 검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만 하더라도 웬만한 자들은 심장이 파열 될 듯했다. 명강량의 손도 남궁기 못지 않게 빠르게 움직였다. 타탕! 갑자기 광풍을 잠재우는 맑은 소리가 낮다. 천음검은 남궁기 의 검을 너무도 쉽게 가로막고 있었다. 휙! 명강량은 천음검을 회수하며 그들과 이 장여를 격했다. "나는 너희들의 무공을 모두 접해 보았다! 너희들은 나의 상대가 아니다!" 명강량의 냉랭한 목소리가 남궁기 등의 귓전을 때렸다. 남궁기를 비롯한 십이지우들의 안색이 굳어졌다. 각 방면에 일가견 (一家見)을 자랑하는 그들이었다. 이기지는 못해도 제법 강호사에 이 름을 남길 만한 명승부는 연출할 줄 알았었다. 하지만 전혀 구룡선주 의 상대가 아니었다. "껄껄껄! 껄껄껄껄!" 땅이 쩌렁 울리도록 웃는 자는 남궁기였다. "구룡선주! 아직 승부를 장담하기에는 이르다!" 그가 냉랭하게 소리쳤다. 눈에서는 살광이 번뜩였다. 오랜 수련으 로 감추어졌던 야성(野性)이 갑자기 폭발한 모양이었다. 명강량의 일갈은 남궁기에게는 견딜 수 없는 조롱이었다. 우웅! 남궁기의 검이 용음(龍吟)을 울리며 벼락처럼 번뜩였다. 쏴 - 아! 푸른 섬광이 만경멸종(萬徑滅踪)으로 떨어지며 그물로 명강량 을 덮었다. 남궁가의 무예, 단원홍으로부터 물려받은 청조각의 무예, 그간의 수련의 성과를 더해 만들어 낸 남궁기의 모든 정화(精華)가 그 한 초 식에 담겨 있었다. 작열하는 섬광은 모든 것을 없애고도 남았다. 명강량의 눈빛도 갑자기 무저갱으로 가라앉았다. 이제와는 달리 주 체 못할 살의가 폭출(爆出)되고 있었다. 살의는 그 상대의 살의를 부른다. 남궁기의 살검(殺劍)이 명강량의 살의를 불렀을까. 어쨌든 그 순간, 명강량은 사패 이전의 이름인 유향경천문을 문득 기억해 내고 있었다. 명강량은 섬광 속에 몸을 가볍게 비틀었다. 천음검이 백광으로 아래에서 위로 사선으로 치솟았다. 섬광이 교차했다. 그리고……. 촤 - 악! 고였던 빗방울이 한꺼번에 땅바닥에 털썩 떨어지는 소리 가 났다. 떨어진 것은 애검과 함께 비스듬하게 조각난 남궁기의 육신이었다. 남궁기의 더운피가 콸콸 쏟아지며 눈을 녹였다. 명강량은 또한 떠올리고 있었다. 눈밭 속에서 육신을 모두 늑대들 에게 뜯긴 주 명두의 한 서린 얼굴을……. 명강량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담겼다. 그의 시선이 축도, 인창, 사곤, 신괴에게 닿았다. 십이지우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칠했다. 남궁기의 죽음을 애도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섬전으로 쏘아 오는 천음검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명강 량의 천음검에 맞서 도, 창, 곤, 괴를 날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은 몸 뚱이의 도움 없이 머리 홀로 생각한 유일한 그 순간이었다. 목을 잃 은 십이지우의 몸뚱이가 피분수를 쏟으며 털썩털썩 쓰러졌다. '성녀여, 어린 성녀여! 나를 무정하다고 말하지 마라. 나의 검을 울게 만드는 자들은 언제나 그들이었다.' 천음검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천음관 속으로 사라졌고 명강량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를 떠났다. 우 - 우 - 우 -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늑대들만이 피냄새에 환장을 하며 모여들고 있었다. 늑대들이 알아 줄지 모를 일이다. 그들이 탐하려는 시신 중 의 한 구가 그 이름도 찬란한 숭무각주, 남궁기임을……. 명강량이 아니었다면 비록 검하의 고혼이 될 망정 제법 그럴듯한 최후를 맞았 을 그였다. 제36장 낭림(狼林) "도대체……." 양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황산에는 연화봉, 광명정, 천도봉의 세 봉우리가 있다. 총단이 들 어서는 광명정 아래는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교의 총단이 들어섬을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고마운 일 이다. 그러나 양백이 눈살을 찌푸린 것은 총단 주위에 몰려든 자들이 대부분 흑도의 무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낮에도 술을 마시고 다녔고 심심하면 저희들끼리 칼부림 으로 황산을 피로 물들였다. 신성해야 할 총단 주변은 복마전이나 다름없었다. 배교는 원래 강호인들에게 사파, 사교로 낙인찍힌 곳이다. 하지만 사파라 해도 사파인들을 가까이 한 적도 사파인들이 가까이 온 적도 없었다. 당연히 교는 사파인들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사파인들은 교에 기대 봐야 잃을 것은 있어도 얻을 것은 없었기 때문에 멀리했다. 그런데 사파인들이 총단 주변으로 우수마발(牛　馬勃)로 모여들고 있었다. "저들은 모두 되지도 않는 꿈을 꾸고 있는 자들입니다. 배교일세의 꿈을 사파천하(邪派天下)로 착각하는 자들이지요." 양백의 곁에는 유공경이 서 있었다. 그는 양백을 도와 황산 총단 건설에 매진 중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저 자들이 왜 착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요. 강호의 흉흉한 소문이 사실인가 보지요? 명옹께서 십 여년 전, 배교 척결에 나섰던 모든 자들을 죽이려 한다는…… 정파를 자처 하는 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하니 저들이 세상이 바뀌는 꿈에 부풀 어 총단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이 아니오." "명옹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한 때 천하가 우리 교를 죽이려 했다고 이제 우리 교가 천하를 죽이려 한다……." "피는 피를 찾아 돌고 돈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 권에서 피의 값을 피로 치르라고 말하지 않음도…… 하지만 그 누가 명옹의 뜻을 꺾을 수 있겠습니까? 뜻을 꺾는다고 해도 이미 늦었습니 다. 명옹께서는 너무도 많은 원한을 등에 졌습니다." "명옹께서 무척 화가 나셨던 모양이군요. 화가 나면 정말 무서운 분이기는 하지요." 양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떨어져 나간 자신의 한 쪽 팔에 시선을 던 졌다. "어쨌든 큰일입니다. 우리 교는 영원히 세상과 화해할 방법이 없는 듯합니다. 하늘이 우리를 위해 새로운 길을 열어 주지 않는 한……. " 유공경도 안색을 찌푸렸다. "찾아봅시다. 길이 없다면 만들어야지요." 양백은 등을 돌렸다. 그의 시야에 웅장한 전각들이 들어왔다. 몇 채의 전각은 마무리에 한참이었고 또 몇 채의 전각은 바쁘게 기와가 올라가고 있었다. 총단에 들어설 가장 큰 네 채의 건물 중 명왕전(明王殿), 청정원( 淸淨院), 대성전은 이미 공사가 끝났고 이제 호교전(護敎殿)과 작은 몇 채의 전각들만 건설하면 되었다. 첨탑(尖塔)으로 지어진 대화로도 웅장한 위용을 자랑했다. 앞일이 어쨌든 황산에 들어서는 총단을 보면 유공경의 마음은 더 없이 흡족했다. 저기 첨탑 끝의 대화로에 불이 활활 타오르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질 것 같았다. "성녀께서 오시기 전까지 낙성식(落成式)을 할 모든 준비를 끝내야 하는데…… 성녀께서 어디쯤 오고 있다고 합니까?" 양백이 물었다. "무당에서 소요가 있었다고 하더이다. 무당산에서 내려와 지금쯤 장강에 배를 띄우고 있겠지요.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냥 오시면 될 일을 왜 또 무당산까지 찾아가셨누." 양백은 다시 미간을 좁혔다. "양 명두, 명옹께서 오시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늦은 감은 있지 만 그분의 살행(殺行)을 막을 분은 양 명두뿐인 듯합니다." "나는 아니오. 나는……." 양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지켜보고만 있자는 말씀입니까?" 명옹의 이야기만 나오면 답답했다. "전대 성녀께서 당신의 호교신장을 저대로 두지는……." 양백은 입을 닫았다. 그는 눈살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유 명두, 지금 강호에서 이는 혈난(血亂)의 진원지(震源地)는 어 디인 듯하오?" 그가 문득 물었다. "명옹이라고 말하기 싫지만 명옹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어 쨌든 그 분의 출현으로 강호에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으니……." 유공경은 쓴맛을 다셨다. "아하! 아, 그렇군요!" 양백은 마치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 명두, 나는 잊고 있었던 일이 있소." "무슨 일을?" "전대 성녀께서 교룡을 자처하는 자들을 통해 나에게 전한 부탁을 잊고 있었단 말이오. 암왕이라 해도 괜찮고 대마두, 대살성, 구룡선 주…… 구룡선주…… 왜 내가 그 말을……." 양백은 안광을 빛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유공경이 의아해 했다. "그렇지, 그렇지! 전대 성녀가 어떤 분인데…… 당연히 길은 만들 어 놓았겠지!" 양백은 무릎을 쳤다. "……." 유공경은 멍하니 양백의 흥분한 얼굴만 바라보았다. "유 명두, 낙성식 때 대제전(大祭典)을 열어야 하지 않겠소?" "당연한 말씀입니다." "아주 큰 제전을 엽시다. 천하의 모든 자들도 초대하고……." "사파인들이야 부르면 오겠지만 다른 자들은 올까요? 설혹 그들이 온다고 하더라도 좋은 의도로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공경의 걱정은 당연했다. 명옹과 전 명두가 불태운 전각들이 한 둘인가. 그들도 총단을 잿더미로 만들기 위해 이를 갈고 있을 것임이 뻔했다. "인연의 구름이 지평선을 덮고, 알려지지 않은 운명의 그림자가 영 혼에 드리우는도다!" 양백은 보권의 한 구절을 읊었다. "걱정 마시오. 한두 가지 나쁜 일이 있을지라도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우리들은 우리들의 교에 최대한 의 경배(敬拜)만 받칩시다." 그가 성큼성큼 산문을 향해 걸어갔다. 전대 성녀에 대한 그의 믿음 은 절대적이었다. 그를 끝내 교에 붙들어 둔 것도 명왕 보다 성녀였 다. 총단 건설, 아무리 피를 뿌리고 다녀도 명옹이 암왕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잠시 교룡들로부터 들은 전대 성녀의 전언을 깜 박했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유공경이 물었다. "타랍하에게 시킬 일이 있소. 천하에 우리 배교의 재건을 기념하는 대제전에 참가해 줄 것을 요청하는 초청장(招請狀)을 띄우라 할 것 이오. 그리고 명옹께서 얼마나 강호를 분탕질했는가도 알아보아야 하 고……." 양백은 바쁘게 움직였다. * * * 호아산은 형문산(荊門山)을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름 그대로 산세는 험했다. 특히 늑대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낭림은 기암괴석과 절애로 이루어져 산을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자들 도 쉽게 오르기 힘들어하는 곳이다. 명강량은 낭림의 곡구(谷口)에 서 정상을 우러렀다. 곡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칼을 든 무사들이 쭉 도열해 있었고 산 허리는 안개로 자욱했다. 안개가 걷힌 산 정상 부근에는 장방형의 평 지가 있었고 그 위로 깎아지른 계단에 자리한 한 채의 목채가 있었다 . 그 목채 앞에는 두 명의 중년인과 도화, 어린 성녀가 있었다. 명강량의 눈이 아무리 밝다고 하나 그 먼 곳의 사람 표정까지는 읽 을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생각했다. '겁에 질려 있겠지.' 명강량은 계곡을 올랐다. 계곡의 양옆으로 포진한 무사들이 급하게 움직였다. 핑! 핑! 핑! 쇠뇌와 화살, 비표가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명강량은 단혈철수(丹血鐵袖)로 소매를 휘둘렀다. 쇠뇌와 화살, 비표가 거센 바람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명강량은 쏟아지는 암기를 소매로 날리며 그를 공격하는 무사들을 향해 점점 다가섰다. 그를 공격하는 자들은 팽해만의 승룡방 수하들 이었다. 팽해만의 수하들이 동요의 기색을 보였다. 빗발치듯 쏟아 붓는 강 전과 쇠뇌를 마치 종이 조각처럼 날려 버리고 있는 구룡선주의 무위 에 기가 질린 것이다. 명강량은 단혈철수로 암기를 날리며 천음관에서 천음검을 뽑았다. 하얗게 뻗어 나오는 연검! 팽해만의 수하들은 그 연검의 무자비함을 한두 차례 들은 것이 아 니었다. 먼저 매를 맞은 자는 공포를 느낄 틈도 없었기 때문에 나았 다. 수하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등을 돌리고 싶었으나 계곡 좌, 우 능선에는 내당당주와 외당당주가 각각 포진하여 등을 돌리는 자 의 목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죽기로 암기를 날릴 수밖에 없었다. 사삭! 삭! 천음검이 흰 선으로 날았다. "크악!" "악!" 비명이 터지며 피비린내가 확 치솟았다. 천음검을 휘두르며 명강량은 신형을 솟구쳤다. 붉은 장영이 천음검 을 따라 귀기스럽게 떠다녔다. 콰쾅! 쾅! 명강량의 검과 장은 살아 있는 물건과 살아 있지 않은 물건을 가리 지 않았다. 나무와 바위, 조각난 육편들이 천 장(千丈)으로 치솟으며 혈우(血雨)와 함께 흩날렸다. "젠장!" 목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팽해만은 침을 뱉었다. "왜 내 수하들에게 저 일을 맡긴 게야! 단심원에도 밥만 축내는 놈 은 많잖아!" 그가 눈을 부라렸다. "우리 수하들은 자네 수하들만큼 구룡선주를 즐겁게 할 비명을 지 르지 못해. 자, 자! 그렇지! 그렇게 피맛을 듬뿍 보라고. 조금 더, 조금 더……." 언상영은 안광을 빛냈다. 그가 한천을 우러렀다. 낭림의 바람은 언제나 마음에 드는 바람이 다. 때문에 구룡선주를 이곳으로 초대했었다. "그만 두세요!" 예령은 발을 굴렀다. "으헤헤! 아가씨, 정말 그만 두고 싶은 사람은 나요. 제발, 제발 구룡선주에게 말해 주시오. 이제 그만 두고 어디 깊은 동굴에서 영면 (永眠)의 잠이나 자라고…… 저, 저, 저것 좀 봐! 아이고!" 팽해만은 핏덩이로 쓰러지는 수하들을 바라보며 발을 굴렀다. 쾅! 쾅! 곡구는 명강량의 손길에 초토화되고 있었다. 쓰러지는 수 하들로 말라붙은 계곡에 핏물이 흐를 정도였다. "왔다! 팽해만, 신호를 보내!" 언상영이 소리쳤다. 명강량은 계곡을 제법 진입해 오고 있었다. "알았어!" 팽해만이 깃발을 번쩍 들었다. 능선에 선 그의 수하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우당탕탕탕! 능선으로부터 건초 더미에 불을 가득 실은 화차(火車) 가 쏟아졌다. 건조한 날씨에 마른나무, 바람은 세차게 산 위로 불고……. 화차는 삽시간에 낭림을 불길에 휩싸이게 했다. 명강량은 등뒤에서 일어나 빠른 속도로 덮쳐 오는 불길에 눈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자신을 상대할 준비는 해 두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고작해야 화공……. 불길을 피해 가기 어렵지 않았으나 어린 성녀 때문에 그는 적들의 공세를 그대로 받기로 했다. 불길을 뛰쳐나가 난극(亂劇)을 벌이면 저들이 어린 성녀를 데리고 도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추적할 거리 를 조금 더 좁혀야 했다. 그 전까지는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적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명강량은 자신을 따르는 화마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어린 성녀 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하지만 그 같은 생각은 언상영을 너무 얕본 생각이었다. 갑자기 전면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푸른 불꽃을 일으키며 타는 불길은 엄청나게 뜨거웠다. 바람을 따라 뒤를 타오르는 불길도 마찬 가지였다. 푸른 불길을 일으키며 무시무시한 불길과 함께 자욱한 연 기를 피웠다. 불길은 삽시간에 성채로 그를 에워싸며 타올랐다. 머리가 어지러웠고 숨이 막혔다. 명강량이 서 있는 사방으로 천화 분 같은 화기와 맹독이 미리 던져져 있었던 듯했다. 팟! 파팟! 명강량은 천음검을 휘두르고 소매 바람을 일으켰다. 하 지만 불길은 전혀 기세를 죽이지 않고 그를 압박했다. "으헤헤, 꼴 좋다! 세상 모르고 까불면 그런 꼴을 당하는 게야!" 팽해만은 메기입을 찢어져라 벌리며 웃었다. 활로를 찾기 위해 좌, 우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불길에 갇힌 영락없는 산짐승의 모 습이었다. "죽은 자네 수하들의 넋이 조금 위로가 되려나…… 자네 수하들로 하여금 되지도 않은 암기를 날리라 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지. 구룡선주, 오만과 방심은 언제나 금물이다!" 언상영은 여유만만한 표정으로 섭선을 흔들었다. "그런데 저건 무엇이기에 저런 지독한 불길을 일으키는 게야? 화기 (火氣)가 여기까지 느껴지잖아." "화기(火器)가 배교의 전유물일 수만은 없지. 겁화분 보다 못해도 제법 곤욕을 치를 것이야." "잘 했다! 잘 했어!" 팽해만은 손뼉을 쳤다. "아, 아……." 예령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불길과 연기가 호 교신장을 완전 에워싸 이제 모습을 찾을 길 없었다. "장목생에게 지시해서 놈에게 지옥의 유황불을 좀더 선사하라고 해 ." "알았어!" 팽해만은 다른 깃발을 들었다. 능선에 있던 승룡방의 내, 외당 무사들이 불길로 접근하며 주머니 를 던졌다. 언상영이 미리 나누어준 것들이었다. 주머니가 불길에 닿자 불길은 더욱 광화(狂火)를 피웠다. 쇠도 녹 이고 남을 열이었다. "가만, 가만! 언상영, 놈이 두더지처럼 땅 속으로 숨어 버리면 어 떻게 하지? 원래 지둔술(地遁術) 같은 잡술이 배교놈들이 자랑하던 무공이잖아!" 팽해만은 놀란 표정으로 언상영을 바라보았다. 언상영은 섭선만 살랑 흔들었다. "낭림은 구룡선주를 처치하라고 하늘이 우리에게 준 산이다. 낭림 의 지반(地盤)은 온석(溫石)으로 깔려 있어. 땅 밑으로 숨고자 하면 숨으라지…… 그을음 없이 깨끗하게 구워질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언상영, 나는 네가 존경스러워…… 오늘 엉덩이를 깨끗이 씻고 기다려 주마." 팽해만은 정말 감탄한 표정으로 언상영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훅! 훅! 후 - 훅! 더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산아래서 부는 바람이 아니라 불길 속에 서 부는 바람이었다. 불길 중심에서 소용돌이가 일며 불길이 따라서 치솟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불덩이가 휙! 휙! 날기 시작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 개의 불덩이가 유성처럼 동시에 날았다. "으악!" "악!" 불길 주위로 접근했던 팽해만의 수하들이 불길에 휩싸이며 비명을 질렀다. 명강량의 천음검이 화룡처럼 불길 속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천음검 은 불길이 기생(寄生)하는 토표(土表)를 천분(天分)하며 밖으로 퉁겨 내었다. 천음검의 움직임이 너무도 빨라 명강량의 앞을 가로막는 불길은 더 이상 진입을 못했다. 우르르르…… 명강량의 소매에서 광풍이 일었다. 광풍은 그때까지 도 저항하던 불길을 잠재우며 길을 만들었다. 파파팟! 명강량은 그 길을 걸으며 천음검을 휘둘렀다. "크악!" "악!" 근접을 시도했던 팽해만의 수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제 불길이 그들을 휩쓸고 있었다. 명강량은 불길을 뒤로하고 나오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가슴이 뜨끔 거리는 것을 보면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해도 화기가 그의 내부를 제 법 상하게 한 듯했다. 명강량은 목채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팽해만은 '앗! 뜨거!'하며 몸을 움찔했고 언상영은 이마에 주름살 을 그렸다. "사람이 아니군." 언상영의 평이었다. "괜찮을까?" 팽해만이 언상영의 소매를 당기며 물었다. "보고만 있어!" 언상영은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고심해서 준비한 화계가 실패로 돌 아간 데에 대해 조금 기분이 나쁜 듯했다. "아저씨! 돌아가세요!" 예령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순간, 명강량은 산허리의 자욱한 안개 속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 갑자기 풍물이 달라졌다. 험산절예, 웅장한 전각, 그 사이에 쭉 뻗은 길…… 그 모든 것들이 운무 속에 뿌옇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언상영이었군.' 명강량은 눈앞의 장면이 기진의 조화의 의해 만들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허상이라고 해서 모두 허상은 아닐 테고 미혼진 (迷魂陣) 속에는 당연히 목숨을 위협하는 온갖 사문(死門)이 설치되 어 있을 것이다. 이상한 냄새도 났다. 그 냄새라면 명강량에게 낯설지 않은 냄새였 다. '시독(屍毒)…….' 시독이 움직였다. 바람의 흐름을 따라서가 아니었다. 느리게, 느리 게……. 훅! 시독이 그를 덮쳐 왔다. 명강량은 반사적으로 천음검을 뻗었다 . 팍! 천음검에 느껴지는 감촉이 이상했다. 휙! 지독한 냄새와 함께 강한 힘이 그의 옆구리를 쓸어 왔다. 명강 량은 다시 천음검을 뿌리며 시선을 모았다. 쩍! 천음검이 손아귀에 이상한 감촉을 주며 자신을 육박하던 물체 를 비스듬히 쪼갰다. 안개 속에 쓰러지는 물체가 보였다. 사람이었다. 목이 없는 사람! 강시, 강시였다. 오랜 전부터 언가의 특산(特産)으로 알려진 것! 그러나 근자에는 강시를 잘 제조하지 않았다. 언가의 위신이 흐려지 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언상영은 강시를 부활시켰다. 구십구사령대! 천하제패를 위해 아끼고 아껴 두었던 것을 구룡선주를 처치하기 위 해 사용하고 있었다. 진법도 낯설고 강시도 낯설다. 진법 속에 움직이는 강시는 더욱 낯 설었다. 강시들이 지금처럼 나를 죽여 달라고 눈앞에 바로 나타나지 는 않을 것이 분명했다. 언상영의 자존심이 느껴졌다. 미혼진 안에 강시들도 있으니 잘해 보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 명강량은 미혼진의 입구에 서 망설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다른 선 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린 성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퍽! 조각난 강시의 몸이 터졌다. 지독한 냄새와 함께 육편들이 쏟 아졌다. 푸시시……. 강시의 육편이 땅을 변색시키고 녹으며 검은 연 무를 피웠다. 신기하게도 검은 연기는 곧 사람의 형체를 이루더니 미 혼진 속으로 쏜살 같이 빨려 들어갔다. 명강량도 곧 바로 미혼진 속으로 뛰어들었다. 미혼진에 몸을 담은 명강량의 선택은 다른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천음검을 세웠다. 보이는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것! 기문둔갑이 지형에 가장 크게 의존함은 악약으로부터 이미 들었었 다. 명강량은 그 지형 자체를 상전벽해로 만들 생각이었다. 예전에 단원홍이 제접봉에서 썼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어떻게 찾았어요?" 질주하며 신화정이 물었다. "화정, 나의 눈은 매처럼 영민하고 귀는 토끼처럼 재빠르다. 코는 피냄새를 찾는 늑대 보다 몇 배 민감하지. 머리는 여우 보다 더 영악 하고…… 헤헤헤! 누가 나의 이목을 속일 수 있겠어!" 전우삼이 기고만장 소리쳤다. "호아산이라고 했나요?" 초조한 안색으로 아란하가 다시 물었다. "분명합니다!" "성녀를 데려간 자들이 도화라는 여자만 아니라고 했지요?" "몇 명 더 있었다고 하는데…… 분명한 것은 단가 놈의 짓은 아닌 것 같소. 그놈의 짓이라면 천화원으로 데려갔지 왜 호아산으로 데려 갔겠소?" "능운공작이 아니라면 역시 사패……." "아마 맞을 것이오. 헤헤헤! 이놈들, 찾아가서 죽이는 수고를 해 주지 않아서 고맙다!" 전우삼은 흉광을 쏟았다. "자신들의 영채를 택하지 않고 호아산을 택했다는 것은 호아산에 함정을 만들어 두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함정! 그까짓 놈들이 함정을 설치해 봐야……." 전우삼은 '쳇!' 했다. "아니에요. 사패를 우습게 보면 안돼요. 강호의 주인 행세를 하던 자들입니다." 아란하는 아미를 찌푸렸다. "아란하의 말이 맞아요. 조심을 해야 해요." 신화정도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대전왕을 기다리는 것이 어떨까요? 구룡선도 지금 없잖아요." 아란하가 말했다. 구룡선, 팔륜거는 방환과 하라사에 의해 뱃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구룡선, 팔륜거를 움직일 만큼 가야 할 길이 한가하지 않았기 때문이 다. "명옹이 어디 있다고 명옹을 기다린단 말이오! 한시가 급하오! 놈 들이 성녀를 당장 어떻게 할지도 모르는 판인데!" 감악이 소리쳤다. 쇳소리를 내는 것을 보니 무척 마음이 조급한 모 양이었다. "성녀를 찾고 계시잖아요. 적의 종적이 호아산으로 향했다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을 거예요." "성녀를 찾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서! 뒷짐이나 지고 있던 자인데… … 어디서 사람 죽일 궁리나 하고 있을지 모르지!" 감악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감악의 말에 아란하도 울컥 했다. "대전왕께서 가만히 계신 것은 전 명두께서 충분히 성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지금 성녀를 찾았잖아요!" "흥! 어지간히 두둔을 하는군! 그런 억지 두둔까지 해 주면 당신이 대전왕, 대전왕하는 자가 일지국에 무엇을 주겠다고 하더이까?" 감악은 뒤틀린 심사를 풀지 않았다. 갑자기 배교에 불어닥친 피바 람, 너무도 변해 버린 명옹, 흔들리는 교의 진로, 그 와중에 유일한 위로였던 성녀의 실종……. 성녀를 찾는다고 식음도 전폐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아 무리 감악이라고 해도 감정이 조절될 리 없었다. 명강량이 분하에서 악약을 잃고 그랬던 것처럼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분노만이 그의 가슴 을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감 명두, 말조심하세요!" 아란하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누가 누구에게 말조심하라고 할 필요도 없어! 일지국은 일지국으 로, 만인촌은 만인촌으로, 이교도는 이교도의 자리로 가면 그만이다! 성녀는 예전처럼……." "이거, 왜 이래!" 전우삼이 황소 고함으로 감악을 말을 끊었다. "적들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꼭 이렇게 싸워야 되겠어? 우라질! 가 면 갈수록 어째 더 힘들어! 점창, 아미파의 놈들과 싸우는 것 보다… …." 그가 도끼눈을 부라렸다. "맞아요. 그만 하세요. 성녀를 구하는 일이 먼저잖아요. 그리고 아 란하, 감 명두의 말이 전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불행히도 우리는 성녀를 찾는 도중 명옹이 성녀를 찾고 있다는 흔적 또한 찾지 못했잖아요. 그리고 전 랑이 성녀가 있는 곳을 찾았는데 명옹이 찾 지 못했을 리는 없어요." "잉?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명옹은 나 보다 무공이 조금 뛰어날 뿐 머리는 나쁘다구. 내가 먼저 찾을 수 있는 일이지 뭘 그래……." 전우삼은 눈을 흘겼다. 아란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속이 쓰렸다. 신화정 마저 저 렇게 생각하다니…… 성녀를 이미 찾은 대전왕이 홀로 호아산으로 갔 을지 누가 아는가? 전 명두 역시 성녀를 구하기 위해 홀로 호아산을 가던 중이 아니었던가. 우연히 만나서 지금 같이 길을 가고 있지만… …. 대전왕에 대한 불신의 벽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떤 말을 하더라 도 대전왕을 신뢰하지 않을 듯했다. 감악의 마음은 이미 대전왕으로부터 떠났고 이제 신화정이 떠나려 하고 있었다. 사실 감악의 마음이 떠나는 순간, 중원 배교도들의 마 음도 대전왕 곁을 떠난 것인지 몰랐다. 감악! 예전에는 대전왕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가 중원 배교의 정신적 지주다.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중원 배교의 명맥을 이만큼 이 어왔다. 그런 그의 마음이 대전왕 곁을 떠난 이상 나머지 교도들의 마음이 떠나는 것도 시간 문제였다. 만인촌에서 온 교도들은 처음부터 대전왕을 저어했다. 남은 자들은 자신과 성녀, 그리고 전 명두……. 전 명두는 보기 보다 마음이 약한 사람이다. 결국 아끼는 그녀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란하는 알고 있었다. 자신은 끝까지 남아 있을 듯했다. 성녀는? 대전왕 곁에 남아 있어 주리라 믿었다.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싫 어하더라도……. '성녀, 무사하시기를…….' 아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 도대체 발걸음이 왜 그렇게 느려? 아란하, 당신은 화정을 업고 나는 감 명두를 업고 가는 게 어때?" 전우삼이 말했다. 마음이 급하기는 그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었 다. 감악과 신화정은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아란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아란하의 무공이 별 대수롭지 않은 줄 알고 있었 다. 그러나 전우삼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대단한 무공을 가지고 있음 이 확실했다. 감악과 신화정은 자신들의 안목 없음에 다시 얼굴을 붉혔다. 사실 아란하의 무공은 방환과 쌍혼이 합세해도 당하지 못했을 정도다. 무 공으로 서열을 따진다면 명강량, 전우삼 다음에 그녀였다. 강호를 통 틀어도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갈 고수…… 남궁기를 제외한 사패와 실 력을 겨눌 만 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전우삼은 감악의 체면 때문에 업지는 않았다. "어, 어! 저게 뭐야?" 선두를 달려가던 그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란하도 급히 발걸음을 멈추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호아산이야. 무슨 일이지?" "서둘러요! 불길이 움직이는 방향이 달라요. 자연 발화(發火)가 아 니에요!" 아란하는 더 이상 감악과 신화정의 발을 맞추어 주지 않았다. 그녀 가 신형을 바람처럼 뽑았다. 그녀의 신법은 전우삼의 말을 확인해 주 고 남았다. 삽시간에 그녀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나도 먼저 가겠어!" 전우삼도 급히 아란하의 뒤를 따랐다. 쿵! 쿵! 쿵! 호아산을 울리는 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게야?" 참다 못한 팽해만은 언상영에게 물었다. 안개 속이라 무슨 일이 일 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구룡선주가 안개 속으로 들어간지 한 시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지독한 자군.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보아 진법에 대해서는 문외한 인 듯한데…… 웬만한 자라도 일 각 내에 심력이 고갈되어 주저앉고 말 것을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니……." 언상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도대체 저 안에 무엇이 있어?" 팽해만이 소리쳤다. "복마삼십육미혼진(伏魔三十六迷魂陣)! 그리고 구십구사령대! 구룡 선주를 잡기 위해 서른여섯 개의 관문을 설치해 두었다. 구십구사령 대가 관문 사이에서 놈을 노리고 있고…… 생문(生門)을 찾을 생각은 않고 닥치는 대로 관문을 부수고 있는 모양이군." "진법은 원래 내 취향은 아니고…… 구십구사령대라는 것은 뭐야?" "안개가 걷히면 보게 될 것이다." "지금 말해 줘! 지금…… 궁금증을 한 시진이나 참았어! 놀라운 일 이라 생각하지 않아?" 팽해만은 아이처럼 언상영을 졸랐다. "강시! 오랜만에 우리 일문(一門)의 비법을 부활시켰지. 원래 철마 (鐵馬)와 어울리게 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산중이라 철마 대신 진 법과 어울리게 했지." "고작 강시…… 아이들 장난감 같은 그런 물건으로 구룡선주를 상 대하려 했어?" 팽해만이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찼다. 강시가 아무리 단 단해도 정강으로 만든 검도 무처럼 자르는 구룡선주의 연검을 당할 것인가, 강시가 아무리 힘이 세어도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는 구룡선 주의 힘에 비할 것인가. 팽해만이 생각하기에 강시라서 좋은 점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뿐이었다. 사실 강시는 이, 삼류고수나 간이 작은 여자에게는 그럴 듯한 무기 가 되어도 일류고수의 반열에 든 자들에게는 별다른 위협이 될 수 없 었다. 제조법(製造法)에 따라 강시의 위용이 조금 다르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물론 언상영에게는 특별한 제조법이 있었다. "연혼대법(聯魂大法)으로 강시들의 힘을 서로 연결시켜 두었다. 쓰 러진 강시의 힘이 다른 강시에게 넘어가도록 해 두었지. 아흔아홉 번 째의 강시는 원주의 상대로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놀랍군! 놀라워! 언 선생, 나는 당신에게 졌어!" 팽해만은 손을 들었다. 쿵! 쿵! 쿵! 그 사이에도 호아산을 흔드는 굉음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언상영은 조금 불안했다. 지축을 울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러나 파해법 없이 복마삼십육미혼진을 무 너뜨릴 자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언상영이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 명강량은 또 하나의 관문을 무너 뜨리고 있었다. 언상영에게는 관문이지만 미혼진에 현혹된 명강량에 는 용담호혈(龍潭虎穴)이었던 바로 그 관문이었다. 명강량은 관문을 넘으며 미혼진을 만든 자의 재주를 인정했다. 광 정을 얻어 끝 없는 내력을 자랑하는 그도 피곤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혼진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강신들의 힘도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훅! 시독이 밀려왔다. 지독했다. 호신강기로 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럼에도 살갗의 부드러운 털들이 녹아내렸다. 인광에 뒤덮힌 또 한 마리의 강시가 나타났다. '마지막 놈인가?' 명강량은 느낌으로 귀화를 뿜어내고 있는 강시가 최후의 강시임을 알아챘다. 웅! 강시가 그를 덮쳤다. 명강량은 천음검을 연이어 세 번 펼쳤다. 퍼퍽! 퍽! 강시의 몸에 천음검이 작렬했다. 강시의 몸에 굵은 검흔 이 그어졌다. 그러나 베어지지는 않았다. 앞에 상대했던 몇몇의 강시 들도 마찬가지였었다. 그는 달려드는 강시에게 장력을 뿌렸다. 명강량의 어깨는 흔들했고 강시는 우당탕!하며 무엇인가를 부수며 쓰러졌다. 강시가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뻗고 다시 달려들었다. 명강량의 두 눈에 한광이 빛났다. 그는 달려드는 강시의 주먹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강시는 명강량을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힘이라면 명강량도 만만 치 않았다. 명강량은 강시를 누르며 개천양일진력을 삼 성(三成) 더 끌어올렸 다. 그의 장심이 불덩이로 타올랐다. 강시의 몸이 흔들렸다. 츠츠츠츠…… 독무가 피어오르며 강시의 몸이 타들어갔다. 개천양 일진력이 강시의 몸을 관통 발부터 잿더미로 만들고 있었다. 결국 강 시는 지독한 시독만 남기고 형체도 없이 라졌다. 명강량은 창백한 안색으로 강시가 쓰러지며 무너뜨린 돌벽에 발을 들였다. 이마에 땀이 맺혔다. 강호에 나와 이토록 힘든 싸움은 처음이었다. 기력을 조절해야 했으나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는 마군들이 우글거 리는 허상 속으로 다시 발을 들였다. 쿵! 쿵! 쿵! 진동은 더욱 확실하게 느껴졌다. '이게 아닌데…….' 언상영의 불안은 증폭되고 있었다. "아저씨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빨리 잘못을 빌어요! 아저 씨가 더 화내기 전에……." 예령이 진정으로 한 말이었다. "입 닥쳐! 조그만 계집이 뭘 안다고!" 팽해만이 충혈된 눈으로 소리쳤다. 전신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그 도 긴장하고 있었다. 도화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오늘처럼 자신이 천박하고 비천해 보일 때가 없었다.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예령 때문에 그렇 게 할 수가 없었다. '원주께서 너희들의 죄를 응징할 것이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정말 기분이 개떡같군. 언상영, 설마 저 식인귀(食人鬼), 대살성, 대마성, 흉적, 악마, 발정(發情)난 데다 미치기까지 한 개가 너, 너 의 복마, 복마삼십육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부수고 나오지는 않겠지?" 팽해만은 혀가 탔다. 그의 시선은 언상영에 매달려 있었지만 언상 영의 시선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저들은 누구인가?" 언상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불길 앞에 발걸음을 우뚝 멈춘 자들……. 일남일녀(一男一女)였다. 그들은 무모하다시피 불길 속에 뛰어들어 좌충우돌했다. 불붙은 나무 삭정이가 날고 불씨는 하늘을 치솟았다. 놀랍게도 그 들은 손발을 맞춰 한순간에 광화를 진정시켜 갔다. 불길이 잦아들 때였다. 두 명의 인영이 더 낭림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이 합류했을 때는 불길도 잦고 시야를 가리는 검은 연기도 줄어 들었다. 예령의 시선에도 그들이 잡혔다. 보이는 것은 형체뿐이었지만 그녀 는 그들의 동작에서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예령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란하!" 그녀의 목소리가 한천을 맑게 울렸다. 전우삼, 아란하, 감악, 신화정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성녀였다. 그들은 두 말 않고 신형을 뽑았다. 질풍처럼 질주하며 아란하는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의 곁에는 전 명두, 감 명두도 있었고 신화정도 있었다. 그러나 성녀가 불러 준 사 람은 그녀였다. 이런 긴박한 순간에도 아란하는 그 사실이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전우삼, 아란하, 감악, 신화정은 정신없이 산허리를 오르고 언상영 , 팽해만은 의외의 자들에 주춤거렸다. 그때였다. 쾅! 낭림을 송두리째 흔드는 굉음과 함께 안개가 썰물처럼 사라졌 다. 그 속에 한 사람의 신형이 나타났다. 전우삼을 비롯한 언상영, 팽해만의 몸이 일제히 굳었다. 명강량……. "아저씨!" 예령은 뛸 듯이 좋아했다. 명강량은 옷깃을 여미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가 어깨를 폈다. 언상영과 팽해만은 거친 호흡을 삼켰다. "언상영! 이미 틀린 일이다! 빨리 이곳을 떠나자!" 팽해만이 고함을 지르며 예령을 붙잡았다. "후후후! 정말 사람이 아니군. 복마삼십육미혼진까지 무너뜨리다니 ……." 언상영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빨리 가자구!" 팽해만이 언상영의 소매를 끌었다. "놓아!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언상영은 소매를 털며 그의 곁에 놓아둔 철궁(鐵弓)을 들었다. 그 는 화전을 철궁에 매겼다. "이것까지 견뎌 내면 나의 목숨을 주지!" 그가 광망을 번뜩였다. 쉭! 화전이 날았다. 화전이 날아가는 곳은 명강량이 천천히 발을 들이고 있는 장방형의 분지였다. 팽해만은 언상영이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화전은 구룡선주 를 한참 비켜나 땅에 꽂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폭음(爆音)이 그의 생각을 끊었다. 쾅! 쾅! 쾅! 화전이 떨어진 곳을 시작으로 장방형의 분지에 폭음과 함께 불기둥 이 치솟았다. 매설(埋設)해 둔 폭약이 연이어 터지며 하늘과 땅을 뒤집었다. 수 천기의 기마가 달려가며 일으키는 듯한 흙먼지와 돌가루가 하늘을 가 리며 치솟고 열풍(熱風)도 휘몰아쳤다. 전우삼, 아란하, 감악, 신화정의 간은 뚝 떨어졌고 언상영, 팽해만 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낭림을 부는 바람은 여전했다. 흙먼지, 돌가루가 가라앉고 푸른 연무도 걷혔다. 분지의 물상(物像 )들이 하나, 둘 살아났다. 벌집같이 구멍이 숭숭 뚫린 그곳에는 여전히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이었고 옷은 구멍이 숭숭했다. 얼굴도 화기에 상해 엉망이었다. 피까지 줄줄 흘렀다. 한쪽 발목 아래로 있어야 할 발이 없었다. 그곳에서 흐르는 피였다. 비록 모습은 많이 변했으나 그는 여전히 명옹, 구룡선주, 명강량의 모습으로 서 있었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에 호응하듯 천음관에서 천음검이 소리 없 이 흘러 지면에 박혔다. 천음검이 휘청 휘었다. "언상영, 달아나!" 팽해만은 예령을 붙잡고 달아나기 위해 등을 돌렸다. "어딜!" 도화가 팽해만을 가로막았다. "비켜라! 늙은 계집!" 촌각이 급한 팽해만의 유엽도가 도화를 쓸어 갔다. 언상영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는 섭선을 들었다. 명강량에게 대 항하기 위해서였다. 명강량은 천음검의 반탄력으로 잘려진 한쪽 발을 대신하며 쏜살 같 이 날아오고 있었다. 파팟! 팟! 팽해만의 유엽도가 도화를 오갈 데 없이 몰아치고 있는 순간이었다. 언상영은 가슴을 폈다. 아무 한 일 없이 목숨을 꺾는다는 것은 너 무 허망했다. 구룡선주, 수족들 몇몇의 목은 가져가야 자신의 이름 값은 되리라. 그래서 한소리 외쳤다. "너희들의 성녀를 우리에게 인도한 자는 바로 도화라는 저 계집과 방환, 쌍혼……." 팟! 허공에서 천음검이 번뜩였다. 천음검이 스쳐 가며 언상영의 말 을 자르고 심장까지 잘랐다. 퓨퓨퓨…… 심장에서 쏟아지는 피분수를 보며 언상영은 미간을 좁 혔다. "악!" 예령이 비명을 질렀다. 예령의 비명과 함께 언상영은 스르르 쓰러졌다. 그리고 도화 역시 눈빛이 풀어지고 있었다. 예령의 비명은 팽해만의 칼이 도화의 심장 을 무참히 찔렀기 때문이다. "아가씨, 부디……." 도화는 입에서 울컥 피를 토하며 예령을 껴안으려는 듯 팔을 벌렸 다. 그러나 한 걸음도 걷지 못하고 쓰러졌다. "파파! 앙! 앙! 앙!" 예령은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크게 울었다. "시끄러워!" 팽해만은 고함을 지르며 거칠게 예령의 목에 팔을 감았다. 도화의 피가 주르르 흐르는 유엽도도 목에 갖다 댔다. 도화로 인해 달아날 시간을 놓쳐버린 그였다. "성녀!" 전우삼 등이 발을 구르며 달려왔다. "모두 멈춰! 멈추지 않으면…… 으헤헤헤, 이 계집을 죽여버리겠다 !" 팽해만은 고함을 지르며 예령을 거칠게 흔들었다. 전우삼 등의 몸이 석상처럼 굳었다. "구룡선주, 어디 또 덤벼 보시지. 나의 칼은 네 연검 보다 빠르지 는 못해도 최소한 이 어린 계집의 목 정도는 충분히 벨 수 있을 걸! 덤벼 보시지! 덤벼 보라구! 으헤헤헤……." 팽해만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겉으로는 여유 있는 척 해도 예 령을 잡은 그의 손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앙! 앙! 앙!" 도화의 죽음에 상심한 예령은 자신의 목숨이 타인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사실도 잊고 울기만 했다. "파파……." 예령은 도화에게 가려고 했다. 그때 예령은 자신이 팽해만의 손에 잡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놓아! 놓아 달란 말이야!" 예령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몸을 비틀었다. "으헤헤, 시끄러운 계집이군!" 팽해만은 한광을 번뜩였다. 예령의 몸이 갑자기 축 늘어졌다. 수혈 을 점한 듯했다. "구룡선주! 자, 자…… 이제 그만 물러나 주실까! 나는 정말 자네 가 싫어! 미치도록 싫다구!" 팽해만은 악을 썼다. 명강량은 고개를 들었다. 무심한 눈빛이 팽해만의 심장을 찔렀다. 팽해만의 목을 가져갈 몇 번의 기회는 있었다. 미혼진, 강시, 수 천근의 폭약…… 피도 적잖게 흘렸다. 피곤했다.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는데 호흡을…….' 명강량은 심결을 외며 들끓는 기혈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광정을 얻었다고 해도 육신의 한계를 느껴야 하는 사람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 "뭐 하는 게야? 이 계집을 죽이고 싶어!" 팽해만의 유엽도는 당장 예령의 목에서 피를 볼 듯했다. "물러나세요!" 아란하가 고함을 질렀다. "추잡한 놈이군. 일단 물러납시다. 저놈이 가 봐야 어디까지 가겠 어!" 전우삼은 퉤 침을 뱉었다. 감악과 신화정도 '명옹!'을 외쳤다. 그러나 명강량은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천음관을 들어 팽해만의 얼굴에 맞추었다. "뭐 하는 게야!" 팽해만의 얼굴이 해쓱해졌고 전우삼 등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추 잡한 짓거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사패의 하나인 승룡방 주, 팽해만이다. 예령의 목숨을 가져가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명강량은 주위의 걱정에 자신에 고집을 꺾은 듯했다. 천천히 팔을 내렸다. 팽해만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순간, 천음관에서 천음검이 빛을 발했다. 명강량의 전력이 담겼으 니 천음검의 빠르기는 말 그대로 뇌전(雷電)이었다. 삭! 잘 벼린 낫으로 풀을 베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팽해만의 찢어진 눈은 황소 눈처럼 커졌다. 천음검이 그의 미간 사이에서 하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팽해만은 몸을 움찔했다. 땡그랑! 유엽도가 떨어졌다. 명강량은 팽해만 곁으로 다가섰다. 그는 팽해만의 팔에서 예령을 뺏었다. 콰당! 기다렸다는 듯이 팽해만은 거칠게 땅바닥을 뒹굴었다. 명강량은 천음검으로 한쪽 발을 대신하며 한 손으로 예령이 편하도 록 안았다. 호흡이 느껴졌다. 이상한 감동이 물결치며 가슴이 뭉클했다. '예령이라고 했지. 예령…… 우리 교의 귀여운 딸…….' 명강량은 예령의 눈물 젖은 볼을 곱게 쓰다듬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아이고!" 전우삼이 달려왔고 아란하가 달려왔다. "미친…… 성녀께서 놈의 칼에 당했으면 어떻게 할 뻔했소?" 감악은 명강량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라도 할 듯했다. "나도 아찔했어. 하지만 성녀는 무사하잖아. 뭐 이런 개자식이 다 있어! 사패라 해서 조금 다를 줄 알았더니! 저자 거리의 파락호 보다 못한 놈이잖아!" 퍽! 전우삼이 팽해만의 시신을 걷어찼다. "이리 주세요." 아란하가 팔을 내밀었다. 명강량은 예령을 아란하의 품으로 넘겼다. 그는 머리칼을 쓰다듬었 다. 예령 주위로 우르르 몰려드는 전우삼 등을 뒤로 하며 명강량은 산 을 내려갔다. 명강량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고 한쪽 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 란하가 안 때는 그때였다.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도 제법 많은 부상을 입었음도 기억했다. 아란하는 이를 악물었다. 한마디 위로의 말도 못했었다. 지금 하고 싶었지만 쓸쓸한 그의 뒷모습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파하는 아란하의 마음과 달리 명강량은 기분이 좋았다. 산아래 이른 그는 천음검으로 너덜너덜한 자신의 발목을 깨끗이 잘랐다. 그 리고 부목(負木)을 대 그런대로 쓸만한 의족(義足)을 만들었다. 의족을 만드는 동안에도 명강량은 기분이 좋았다. 어린 성녀를 안 았던 촉감이 내내 그를 들뜨게 하고 있었다. 명강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족이 중심을 맞추었는가를 확인했다. 그는 발을 구르며 하늘을 우러렀다. "성녀여, 나는 아무래도 이 일만은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악약에게 속삭였다. 그의 세계는 파국뿐이었다. 그 세계에 아란하, 전우삼, 감악, 결정 적으로 어린 성녀가 자리 잡았다. 어떤 일이 될지 모르지만 교를 위 해서 무슨 일은 해야 할 것 같았다. 명강량은 자신을 살폈다. 몰골이 엉망이었다. 오랜만에 몸을 씻을 생각을 했다. 구룡선, 팔륜거를 실은 배는 기세 좋게 흘렀다. 명강량은 구룡선에 앉아 있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했 다. 의족과 폭약으로 인한 얼굴의 흉터를 제외하면……. 배를 타고 가며 명강량은 문득 언상영의 말을 떠올렸다. "아란하…… 우삼과 방환, 쌍혼이라는 자를 불러라." 그가 명했다. 위로해야 할 때 위로의 말을 놓쳐 아직까지 명강량에 대해 가슴 아 파 하고 있던 아란하는 선실로 걸어갔다. "무슨 일이오?" 전우삼이 갑판을 쿵쿵거리며 걸어왔다. 방환과 쌍혼도 머리를 조아리며 섰다. 지은 죄가 있었기 때문에 그 들의 안색은 창백했다. 언상영, 팽해만, 도화, 모두 죽었다. 죽은 자 는 말하지 못한다. 죽기 전에 입을 나불거리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우리를 부른 것을 보니 소림을 칠 생각이시군요? 헤헤헤, 돌중 놈 들! 나는 진작부터 놈들을 상대하고 싶었소! 까까머리에 대월을 꽂는 맛은 별다르겠지!" 전우삼은 대월을 기세 좋게 흔들었다. 명강량은 다른 말을 했다. "우삼의 입장을 생각해서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방환 등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푹 고개를 숙였다. 비밀이 지켜지기를 바란 것은 그들의 바램일 뿐이었다. "나의 입장?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니 무슨 말이오?" 전우삼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방환이 고개를 들었다. "만인촌만 앞세웠던 나의 잘못을 인정하오. 하지만 명왕과 대전왕 을 도외시했던 당신의 잘못도 인정하기 바라오. 능운공작과 소림을 제외하면 이제 중원은 평정될 만큼 평정되었소. 그들은 전왕께서도 해결할 수 있는 자들이오. 당신이 할 일은 있어도 당신이 교를 위해 할 일은 없소. 지난 옛 정을 돌이켜 교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줄 생각 을 한다면…… 사라져 주시오. 나는 그 일이 중원 배교의 호교신장께 서 우리 교를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라 생각하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전우삼을 바 라보았다. "전왕이시여. 잊지 마십시오. 우리 만인촌, 만인부의 오랜 숙원을 …… 광명계에서 뵙겠습니다." 그가 전우삼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게야?" 전우삼은 꽥 고함을 질렀다.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 튀었다. 방환이 자신의 손으로 천령개를 찍은 것이다. "전왕이시여. 잊지 마십시오. 우리 만인촌, 만인부의 오랜 숙원을! " 쌍혼이 방환과 같은 소리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퍽! 퍽! 전우삼이 제지할 틈도 없이 쌍혼도 자신들의 천령개를 찍 었다. "……." 전우삼은 말을 잃었다. 거칠게 다루었지만 세월의 정이라는 것이 있다. 마음의 움직임이 없을 리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오?" 그가 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낭림!" 명강량이 냉랭하게 말했다. '낭림…….' 전우삼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뚱해 보여도 전혀 눈치가 없지는 않 았다. "왜 그런 짓을 했어? 젠장할 늙은이들!" 그가 와락 고함을 질렀다. "물고기 밥이 되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해!" 그는 방환과 쌍혼의 시신을 물 속에 내던졌다. 쾅! 그가 거칠게 선실로 들어갔다. 마음이 편하지 않음이 분명했다 .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들이 모여들었다. 뱃전을 지키고 있 었으므로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은 방환, 쌍혼이 던져진 장강의 물결과 명강량을 번갈아 바라보며 고 개를 숙였다. 몇 명은 남아 갑판의 뇌수를 닦았고 나머지는 제 자리 로 돌아갔다. "아란하, 성녀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명강량이 물었다. 아란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기억하기로 대전왕이 성녀의 안부를 물은 적은 처음인 듯했다. "선실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도화라는 여자의 죽음에 무척 상 심이 크신 모양입니다." "그래? 아란하, 어린 성녀께서 너를 무척 좋아하더구나." "다행히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아란하는 얼굴을 붉혔다. "가서 위로해 드려라." 명강량은 시선을 멀리 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가는 길은 어디입니까?" "황산! 황산이 보고 싶다. 양 명두가 대화로는 만들었는지 모르겠 구나." 명강량은 태사의에 깊게 몸을 기댔다. 삭풍은 돛을 찢을 듯 펄럭였고 배는 쉬지 않고 흘렀다. * * * 천화원의 겨울은 쓸쓸하고 쓸쓸했다. 단원홍은 삭풍 속에 흰 머리칼을 날리고 있었다. 쓸쓸했으나 참으 로 갈 곳이 없었다. 천화원을 정적(靜寂)으로 소일(消日)하는데 예령의 역할이 제법 컸 었던 듯했다. 그때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 다. 금옥이 있었으므로……. 왜 그 사실을 몰랐느냐고 단원홍은 물었다. 그의 세월이 대답해 주 었다. "한고……." 연못가에는 한고가 서 있었다. 그가 단원홍의 부름을 받고 달려왔 다. "천노를 데려오너라." 단원홍이 명했다. 한고가 칼을 철컥이며 금옥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천노가 한고와 함께 나타났다. 천노를 인도한 한고는 연못가로 물러나려 했다. "너도 이리 오너라." 단원홍이 그를 붙잡았다. 천노와 한고는 단원홍의 등뒤에 섰다. "천노, 나는 모든 것을 옛날 그대로 돌려놓고 싶소." "원주의 뜻대로 하십시오." 천노가 말했다. "한고, 천위대를 해체하겠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천위대를 해체하겠다니요?" 한고는 펄쩍 뛰었다. "돌아가신 사부도 사매도 나와 천노도 천화원이 예전처럼 한가롭기 를 바라고 있다. 천노, 집사에게 말해 한고를 비롯한 천위대의 아이 들에게 그 동안 수고한 대가를 치러 주라 하시오. 집사, 자신의 몫도 챙기라 하시오. 그도 길을 떠나야 할 테니……." "알았습니다." 천노는 머리를 숙였다. "한고, 그 동안 수고했다. 다른 말은 말도록 해라. 가기 전에 천위 대가 머물던 곳을 깨끗이 없애라. 다음 해에 천노가 그 자리에 나무 를 심을 수 있도록…… 지금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국태열의 일은 정말 안되었다. 가는 길이 비슷하다면 그의 집에 네가 대신 조의를 표해 주기 바란다." 단원홍의 결심은 요지부동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한고는 어쩔 수 없이 명을 받았다. 그가 단원홍에게 읍을 한 후 천 위대의 숙소를 정리하기 위해 정자를 내려갔다. "어떻소?" 단원홍이 물었다. "바라던 일입니다. 천화원은 사람이 많을수록 쓸쓸해지는 이상한 곳이지요. 전대 원주와 큰아가씨가 있을 때에는 한가로워도 숲 전체 가 꽉 찼었습니다." "그랬었지. 천노, 나는 금옥도 없앴으면 하오만……." "어린 아가씨가 묵을 곳이 없습니다." 천노는 노안을 찌푸렸다. "천화원의 주인은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예령이오. 오랫동안 사 매의 방이 비어 있었지." "아가씨를 천화원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셨군요. 잘 하셨습니다. 금옥은 이제 없애야지요!" 천노가 격양된 음성으로 말했다. "문제는 내가 아니라 언제나 이곳의 아가씨들 아니었소? 천화원을 떠난 사람은 항상 그들이었소. 그래서 너무 기대는 하지 마시오. 예 령이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으니……." 단원홍은 쓸쓸한 미소를 흘렸다. "오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예령을 자신의 길로 가게 내버려두자 ! 아니다. 천화원은 자신을 배신한 여자를 더 이상 용서해서는 안된 다!" "배신이라는 말은 너무 심한 말이군요." 천노는 일전에 금옥에서 한 단원홍의 말이 자꾸 떠오르고 있었다. 예령을 죽일 수도 있다는……. "천노, 당신의 말이 맞소. 배신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이지! 하지만 나의 마음에 왜 자꾸 그런 옹졸한 생각이 들까요? 털어지지가 않습 니다." 단원홍은 한숨을 쉬었다. "이해합니다. 아가씨들은 원주의 모든 것이었으니까요. 자신에게 배신당한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하니 아가씨들의 일은 사람이 꾸민 일이 아닙니다. 설령 어린 아가씨가 돌 아오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천노도 한숨을 쉬었다. "배교! 신의 일…… 우습게도 나의 운명은 그것을 너무 우습게 느 끼고 있소." "그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악의 경우에……." 천노가 염려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랫동안 생각했소. 하지만 결국 결론을 내릴 수 없었소. 세상에 는 이지로 판단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듯하오. 그때 가서 나의 감정이 모든 것을 결정할 것이오." "좋은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이 늙은 것과 도화의 기분도 헤아려 주셔서……." 천노는 눈을 감았다. 쏴 - 아! 삭풍이 천화원의 나무들을 거칠게 휩쓸고 지나갔다. 단원홍은 며칠 동안 숫돌에 장검(長劍)만 갈았다. 사부의 손때가 묻은 검! 검신(劍身)에는 백년감일소(百年堪一笑)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한 바탕 웃음에 지나지 않는 백년 세월을 그는 갈고 갈았다. 백년감일소가 새겨진 사부의 검은 천하제일명장으로 알려진 조화옹 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다. 부탁을 받고 만든 검이 아니라 사부가 마음에 들어 혼신을 다해 만든 검이었다. 때문에 세월이 흘렀다고 해도 날이 무뎌지고 녹이 슬었을 리는 없 었다. 그러나 단원홍은 며칠 동안 숫돌에 백년감일소를 갈고 갈았다. 오랫동안 상대다운 상대를 만나지 못했었다. 이제야 비로소 상대다 운 상대가 나타났다. 구룡선주! 예령이 사라지고 배교가 부활하며 나타난 자…… 소문이 아니라도 쉬운 상대가 아닐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운명적으로 싸워야 할 상대! 예기(銳氣)를 키워야 했다. 검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숫돌이 닳도록 갈던 단원홍은 장검을 들었다. 검을 정면으로 세우 고 칼날을 눈에 맞추었다. 칼날을 타고 이어진 하얀 선만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단원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허리에 찼다. 그는 황하가 한 눈에 들어오는 위치 좋은 곳에 올랐다. 장검을 빼 들었다. 그는 황금신공으로 내력을 끌어올리며 황하의 굽이치는 물결을 향 해 천천히, 천천히 검을 휘둘렀다. 외인이 보기에는 무척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러나 단원홍의 이마에 는 땀이 주르르 흘렀다. 장검을 예닐곱 번 휘두르는 잠깐 사이에 그의 전신은 장대비를 맞 은 것처럼 흠뻑 젖었다. 땀구멍을 통해 주독을 비롯한 온갖 노폐물들이 빠져나갔다. 몸이 가벼웠다. 그리고 열 번째 검을 휘두르는 순간, 단원홍은 황하의 물결을 바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을 검집에 꽂고 허리에 찼다. 그는 여유 있게 산과 강이 어우러 진 동관의 정취를 감상하며 천화원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새 옷을 꺼내 입었다. 그는 차를 마시며 천노를 기다렸다. 흙 묻은 손을 털며 천노가 들어왔다. "오늘 아침 한고가 작별을 고하러 왔더이다. 천위대는 모두 떠났소 ?" "떠났습니다. 떠난 자리를 잠시 손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집사는?" "그도 떠났습니다. 나무를 심고 꽃이 필 때면 천화원은 옛날의 그 모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천노, 수고를 해 주시오. 나는 잠시 어디를 좀 갔다 와야 하겠소. "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한 부대주가 떠나며 원주께 특별히 전해 주라 했습니다." "조심해야지요. 그럼……." 단원홍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허리에 찼다. 참으로 오랜만의 강호행이었다. 제37장 파문(破門) 수천 길의 거봉준령들이 구름을 뚫고 서 있었다. 등선에는 눈으로 하얬다. 운해(雲海), 송해(松海), 석해(石海)……. 주사천(　砂泉)에서 마신 샘물 또한 일품이었다. 황산 광명정을 오르는 각자의 감회는 남달랐다. 전우삼, 감악 등은 말로만 듣던 성지(聖地)에 발을 들이고 있어 숙 연함으로 압도되어 있었다. 아란하는 황산의 절경에 마음을 뺏기고 있었다. 도화의 죽음 이후 내내 상심에 빠져 있던 예령 또한 황산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듯했다. 가장 감회가 특별한 사람은 명강량이리라. 길에서 떠돈 그인지라 고향이 없다. 때문에 그의 고향은 황산이었 다. 연화봉, 광명정, 천도봉……. 사부의 무공을 익히며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황산은 악약을 처음 만난 장소였다. 겉으로는 냉랭한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지만 마음은 온갖 회상에 시달리고 있었다. 길이 조금 가팔라졌다. 그들은 총단이 자리한 광명정으로 오르고 있었다. 한때, 강호에 흉명을 떨치던 구룡선과 마인거는 해체되고 없었다. 산길을 오르기에 적당하지 않아 아홉 마리의 대화룡과 초대 명옹, 타 할륜의 석상만 남기고 불태웠다. 대화룡과 석상은 삼십육호교사와 십 위병이 운반하고 있었다. 총단은 광명정 중턱의 넓은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그들이 분지를 굽어보는 곳에 이르렀을 때였다. 천 여명에 가까운 한 무리의 작자들이 왁자지껄 움직이고 있었다. 십 여명의 무사들도 칼을 철컥거리며 달려왔다. 그 무사들의 선두에 는 섬서 명두, 유공경과 타랍하가 서 있었다. "마중이 늦었습니다." 유공경은 예령과 명강량에게 차례로 머리를 숙였다. "양 명두는 성녀와 명옹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고 바빠 제가 대신 마중을 나왔습니다." 그가 말했다. "거기 나처럼 까만 작은 친구는 누구요?" 전우삼이 물었다. "타랍하라는 분입니다. 양 명두의 보표입니다. 총단을 건설할 동안 적들의 침입을 막아 준 분이시지요." "한 수 하게 생겼군. 아란하, 당신의 십초지적(十招之敵) 정도는 되겠어." 전우삼이 아란하를 보며 말했다. 타랍하는 자존심이 상했다. 당장 승부를 가려 보자고 말하고 싶었 으나 양백의 체면 때문에 참았다. "저기 저 친구들은?" 전우삼이 늑대의 출현에 놀라 멀찍이 귀를 세우고 있는 토끼처럼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천 여명의 작자들을 가리켰다. "사파인들입니다." "사파? 놈들이 왜 이곳에? 아! 그러고 보니 의창에서도 저런 놈들 이 우글거렸잖아. 명옹께서 깨끗이 태워 버렸지만……." "원래 저들이야 강자 앞에 붙어 어떻게든 떨어진 고기 한 조각을 얻어먹으려 하는 자들이지요. 근자에는 청성, 공동파가 서북으로부터 사파 척결에 나서고 있어 황산을 숨을 그늘로도 택한 모양입니다." 유공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저런 쳐죽일 놈들을 봤나!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저 따위 것들이……." 전우삼은 대월을 번뜩 들었다. "명옹도 저들이 보기 싫지요? 명옹, 먼저 올라가시오. 놈들을 깨끗 이 처리하고 올라가겠소."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내버려두시지요. 총단의 낙성(落成)을 코앞에 두었는데 피를 보는 일도 좋지 않을 일이고……." 유공경이 말렸다. "아, 아! 그렇지. 경사스러운 일을 앞두고 저따위 놈들의 피를 볼 수는 없지. 최소한 돌중이나 말코 도장의 피 정도는 되어야지…… 내 가 알아서 하겠소." 전우삼은 우보로 떼거지로 몰린 사파인들을 향해 다가갔다. 직접 얼굴을 본 자는 적어도 이제 명강량과 전우삼의 얼굴은 용모파기로 제법 알려져 있었다. 사파인들은 자신들을 향해 어슬렁거리며 걸어오는 자가 마인거주임 을 눈치챘다. 같은 사파인까지 불구덩이에 넣어버린 구룡선주, 마인거주의 잔혹 성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그래도 모인 이유는 흑산이나 녹림을 쥐처 럼 오손거리다가 정파인들의 손에 개죽음을 당하는 것 보다 대마두의 아래에서 큰소리 한 번 쳐보고 죽는 것이 나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래 사파 거두들의 인심은 그와 같아 면역도 되어 있었다. 사파의 거두들은 무공이 높을수록 잔인했다. 재수 없이 그 잔인함의 희생물 이 되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최대한 마인거주의 비위를 맞추려고 입을 모아 연호(連呼)하려 했다. 하지만 전우삼은 그들이 연호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는 순식간에 사파인들 속을 뛰어들며 굶주린 호랑이처럼 날뛰었다. "아이쿠!" "아얏!" 전우삼은 눈앞에 걸리는 자들을 닥치는 대로 두들겨 패고 팔, 다리 를 꺾었다. 사파인들이 모인 곳은 삽시간에 난장을 이루었다. 방환 등의 죽음 으로 가뜩이나 기분이 좋지 않았던 전우삼이다. 전우삼은 황산에 모인 사파인들을 상대로 실컷 분풀이를 하고 있었 다. "아이고!" "으악!" 눈두덩이를 움켜쥐는 자, 부러진 팔을 덜렁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자, 머리채를 잡힌 채 바둥거리는 자……. 전우삼의 모습은 아침에는 악귀 삼천 마리, 저녁에는 삼백 마리를 먹어 치운다는 척곽(尺郭), 탄사귀(呑邪鬼)의 모습과 같았고 마졸들 을 무참히 짓밟는 사천왕의 모습과 같았다. 전우삼의 무공을 처음 보는 타랍하로서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황산에 모인 사파인들은 전혀 무공을 모르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 럼에도 전우삼은 천 여명이나 되는 자들에게 각기 한 주먹씩은 선사 하고 있었다. 사파인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 러진 자들은 몸통으로 구르며 달아났다.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었다 . 만약 전우삼이 대월을 휘둘렀다면 살아서 돌아갈 자들은 많지 않았 을 것이다. "우리 교를 사파라 모독하는 놈들도 찢어 죽이고 싶지만 동색인 줄 착각하는 놈들도 기분 나쁘다구. 재수 좋은 줄 알아라!" 전우삼이 씩씩거리며 합류했을 때 명강량 일행은 총단에 발을 디디 고 있었다. "아!" 무생문(無生門)에 선 그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본전인 명왕전을 축으로 뒤에 산자락을 끼고 은밀하게 앉아 있는 전각이 성녀가 머무는 청정원, 좌측으로는 초대 명옹을 모시는 대성 전, 우측으로는 호교신장이 집무를 보는 호교전, 청정원 옆에는 첨탑 에 대화로가 높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전각들을 둘러싼 수십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 십 몇 년 동안 바라고 바라던 곳! 총단이었다. 그들의 총단……. 일행은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화정은 눈물까지 흘렸다. "마음에 드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금의를 입은 외팔 노인이 다가왔다. 양백이었다. 감악, 장탄 등의 양백에 대한 감정은 비교적 좋은 편은 아니다. 그 러나 그가 이룩해 놓은 공사(工事)를 본 순간 적잖게 마음이 풀리고 있었다. 양백은 명강량의 앞에 섰다. "명옹, 오랜만입니다." 그가 깊게 머리를 숙였다. 명강량은 양백의 허연 머리칼과 초췌한 얼굴을 보았다. 분하에서 북을 치고 노래를 부르던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은 어디로 갔는가. "수고하셨습니다." 그 한 마디가 십 몇 년만에 만난 인사의 전부였다. 명강량은 그를 지나쳐 진공문(眞空門)을 마주보며 섰다. 그는 한참 마무리에 분주한 전각들과 총단을 둘러싼 풍광에만 눈길을 두었다. 양백은 고개를 들었다. "성녀께서는 어디 있습니까?" "여기 계셔요." 아란하가 예령의 손을 끌었다. 예령과 눈길이 마주친 양백은 충격으로 몸을 떨었다. "꼭 닮았군요. 꼭……." 그가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어깨에 앉은 새까지 똑 같았다 . "성녀시여!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오체투지했다. 자유로운 새들아! 왼쪽으로 날고 싶거든 왼쪽으로 날고 오른쪽으로 날고 싶거든 오른쪽으로 날으렴. 높이 날고 싶거든 높이 날고 낮게 날고 싶거든 낮게 날아라. 그물에 걸려 스스로 죽음을 찾지는 말아라. 명강량은 무너진 흙벽에 몸을 기대고 예령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양백이 준비한 화려한 성찬(聖餐)을 두고 오랜만에 성회(聖會)가 열렸었다. 축사의 주문을 욌고 유공경이 노관을 자처 보권의 한 구절 도 읽은 듯했다. 그리고 지금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어울리는 시간! 예령, 양백, 전우삼, 감악, 아란하, 신화정, 유공경, 장탄, 고명상 ,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까지……. 모두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먼 서국으로부터 이어진 노래와 춤만은 중원 배교도 일지국도 만인촌도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성녀의 노래까지 더해지자 그들은 모처럼의 성회에 한 마음으로 움 직였다. 명강량은 마른 나뭇가지를 씹었다. 악약과 함께 참석했던 고현의 밀회가 생각났다. 그 발랄하던 몸짓…… 머릿속에 그려지는 악약의 춤사위가 경쾌할수록 명강량의 가슴은 애잔함으로 시달렸다. 그리고 문득…… 예령의 춤사위가 보고 싶어졌다. 흙벽을 빠져 나와 슬며시 예령의 춤을 엿보고 싶었다. 그러나 명강량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는 다시 흙벽에 길게 몸을 기댔다. 편안했다. 너무도 오랜만에 찾아온 휴식이었다. 명강량이 나뭇가지를 씹으며 겨울 은한을 살필 때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여기 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토담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양백이었다. "대화로 터였지요. 보기 흉해 없애 버릴까 하다가 그래도 옛 사람 의 손때가 생각나 그냥 두었습니다." 명강량이 몸을 기대고 있는 곳은 예전 대화로 자리였다. 그는 몸을 일으켜 좌정했다. 양백은 허물어진 토담에 자리를 잡았다. "왜 성회에는 참석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물었다. 명강량은 입가의 미소만 지었다. "어린 성녀의 춤 솜씨가 어떻던가요?" 그가 말을 돌렸다. "보면 볼수록 성녀가 생각납니다. 춤 솜씨까지…… 하마터면 북채 를 잡고 내가 저파룡이다 외칠 뻔했습니다. 허허허!" 양백이 노안에 주름살을 그리며 웃었다. 명강량도 양백도 그들만의 자리에서는 악약의 자리 앞에 전대(前代 )를 붙이지 않았다. 마음의 공감(共感)이 있었던 듯했다. "양 명두의 북 치는 실력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는가 봅니다. 있었 다면 당연히 북채를 맡겼을 텐데……." "듣고 싶습니까?" "양 명두의 북소리에 감탄할 만한 귀가 나에게는 없습니다. 어린 성녀에게 지음(知音)을 구하도록 해 보시지요. 성녀를 닮았다면 소리 를 잡아내는 귀 또한 남다를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언제 기회가 닿으면 어린 성녀를 위해 또 한 번 난장 을 부려 보지요." 양백의 노안에 미소가 번져 갔다. "낙성식에 맞추어 대제전을 열기로 했습니다. 총단의 중건을 듣고 숨어 있던 교도들도 많이 모여들리라 믿습니다. 대제전을 크게 할 생 각입니다. 여러 곳에 초대장도 보냈습니다. 구파일방까지도…… 마음 이 급해 혼자 벌인 일입니다. 괜찮겠지요?" "교의 일에 대해서는 나는 모릅니다. 감악과 이야기하십시오. 나는 이미 호교신장이 아닙니다. 낮에 보니 호교전은 완성된 듯 하더군요 . 감악이 머물도록 해 주십시오." "두 명의 호교신장이라……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지요. 그러나 전례(前例)라는 것은 원래 깨어지기 위해 있는 것……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 명두와 어린 성녀께서 승낙을 하시면……." 양백은 의외로 쉽게 명강량의 말을 수긍했다. "두 명의 호교신장이 아니라 한 명의 호교신장입니다. 나는 이미 호교신장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호교신장의 책무를 지킨 것이 없지요." 명강량은 씁쓸하게 웃었다. 양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명강량은 편안했다. 옛 사람 은 이래서 좋은가 보다. "강호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구룡선주…… 구룡선주라 부르더군요. 대제전일은 신성한 날입니다. 그 날만은 칼을 뽑지 않으리라 믿고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양백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명옹에 대한 안팎의 소문이 워낙 흉흉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결국 꺼낸 말이었다. "그들이 먼저 칼을 뽑지 않으면……." 명강량 역시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담았다. "많이 변한 줄 알았습니다. 많이 변했다고들 하고……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변하지 않은 것 같군요." "껄껄껄! 근자에 나의 혼이 두 쪽으로 갈라져 버렸습니다. 지금과 다른 한 쪽을 본다면 강호의 소문이 틀리지 않음을 알 것입니다. 천 음관도 아직 노래 보다 피를 보기를 더 원하고……." "혼이 두 쪽으로 나누어지다니…… 기이한 일이군요. 그런 기이한 일을 이룰 분은 작금에는 어린 성녀밖에 없겠지요?" 양백의 물음에 명강량은 씨익 웃었다. 양백은 그것까지 알고 있었 다. 명강량은 문득 양백의 여유로운 얼굴에서 광명신장을 떠올렸다. 본 적은 없지만 광명신장의 얼굴이 저러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양 명두, 나의 일은 끝을 맺어 가오. 그 끝 후에 나는 어떻게 해 야 할 것 같소?" "명옹의 일…… 미천한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저는 명옹께서 더 이상의 일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랄 따름입니다. 만약 명옹께서 더 일을 벌인다면 성녀께서 부탁한 일을 처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 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저는 소림 방장까지 지인(知人)으로 두고 있습 니다." "소림 방장을 지인으로…… 좋은 벗을 두셨군요. 양 명두…… 나의 일은 나의 일, 양 명두의 일은 양 명두의 일로 해 두시오." "어쩔 수 없군요. 저로서는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성녀께 서 무슨 말씀은 없으시던가요?" "……." "나에게는 말씀을 남겨 주셨습니다. 아마 명옹에게도 무슨 말씀을 남겨 주셨을 것입니다." "양 명두는 아직도 성녀의 꿈을 꾸고 계신가 보군요?" 명강량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가워졌다. "꿈? 꿈일지도 모르지요. 지금 이곳이…… 아! 총단이 마음에 들던 가요?" "좋소. 나의 대에 이런 총단을 볼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오." "허허허! 다행입니다." 양백은 기분 좋게 웃었다. "대화로가 너무 높더군요." 한마디는 보탰다. "아! 우리의 불을 멀리까지 보이게 하기 위해……." "멀리 밝히는 것은 하늘의 불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가까이 밝고 따뜻하게 비출 수 있는 불이 나는 좋습니다. 예전에 대화로의 불을 내가 지폈지요." "알고 있습니다." 양백이 정색을 했다. 현담(玄談)을 듣는 기분이었다. "꺼지지 않게 불을 지피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낮 은 대화로에서도…… 첨탑 위에 솟은 대화로에 불을 지펴야 할 자는 무척 고생을 할 것 같군요." "몰랐습니다. 이 늙은이의 생각이 어두워…… 대화로를 다시 손보 게 하겠습니다." "이왕 지은 것 내버려두십시오. 이 폐허나 없애 주십시오." 명강량은 양백에게 지금 그가 있는 예전 대화로의 유적을 없애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는 흙벽에 다시 몸을 기댔다. 없애라고 한 바로 그 대화 로였다. 폐허에 몸을 기댄 그의 시선은 한천에 고정되었고 입도 굳게 닫혔 다. 양백은 읍을 하며 물러났다. "새 것을 위해 낡은 것은 모두 사라져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소? 성녀……." 명강량은 악약에게 말했다. 문제는 어떻게 사라지느냐 하는 것이다. 양백이 부러웠다. 양백의 일은 정해 주었으면서 왜 자신의 일은 정해 주지 않았을까. 유성(流 星)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흘렀다. "아란하, 아란하, 자요?" 어둠 속에서 예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이 오지 않는군요. 항상 험한 곳에서 잠을 자다가 이런 좋은 곳 에 누워 있으니 잠이 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란하가 말했다. "나도 잠이 오지 않아요." "왜요? 성녀께서도 잠자리가 너무 편해 불편합니까?" "아니에요.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요. 우리 교는 항상 어렵고 힘든 일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재미있는 일도 있었어요." "성회가 끝나고 가무를 즐긴 일을 말씀 하시는군요." "맞아요!" 예령이 눈빛을 빛냈다. "우리 교는 언제나 어려웠지요. 그런 즐거움 마저 없었다면 모두 지쳐 쓰러지고 말았을 거예요." "아란하도 재미있었나요?" "물론입니다. 저도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으로 즐겨 잠이 잘 오지 않습니다." "그분을 왜 부르지 않으셨어요? 나는 그분과 아란하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것을 무척 보고 싶었는데……." "대전왕은 가무를 싫어하시는 모양이에요. 그리고…… 다리도 불편 하시잖아요." 아란하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나는 깜빡했어요. 나 때문에 발을 잃었다는 것을 잊고 있었어 요. 파파의 죽음 때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예령이 미안해했다. "괜찮습니다. 괜히 해 본 말이에요. 대전왕 같이 무공이 고강한 분 은 한쪽 다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불편을 느끼지 않아요." "그렇지만……." 몸을 희생하며 자신을 구해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예령은 자책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하지 않았었다 . "성녀, 괜찮아요. 나를 부른 것은 흥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 어때요? 나와 같이 조금 더 놀다 오지 않겠어요?" 아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정말?" 예령은 놀러 가자는 말에 금방 우울을 잊었다. 그녀는 은근히 아란 하가 그 말을 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잖아요. 여기는 산이고……." "여기 황산은 사시사철 유객(遊客)으로 들끓는 곳이랍니다. 주변에 몇 곳은 항상 불야성(不夜城)을 이루고 있지요. 오면서 내가 봐 둔 곳이 있습니다." "그럼 우리 빨리 가요." 예령은 벌떡 일어나 옷을 걸쳤다. 아란하도 의장을 갖추었다. "출발할까요?" 그녀는 예령을 껴안았다.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챈 낙조가 먼저 파다닥 날개를 떨었다. 아란하와 예령은 낙조를 딸리며 바람처럼 산을 내려갔다. 타 랍하의 수하들이 밤을 지키고 있었으나 아무도 아란하의 그림자를 보 지 못했다. 황산 주변의 낙빈(樂貧)이라는 불야성에 이른 그녀들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신나게 먹고 신나게 놀았다. 예령은 투호(投壺)로 몇 푼 을 잃었고 아란하는 저포(樗蒲)로 몇 푼을 땄다. 예령이 투호에 다시 도전 간신히 본전을 했다. 그러나 세 번째 도전에서는 많은 돈을 잃 었다. 던지는 화살을 중간에서 낙조가 모두 물어 왔기 때문이다. 아 란하는 예령의 권유로 쌍육을 시작했다. 그녀는 수북할 정도의 은자 를 땄다. 돈과 여자를 한꺼번에 노린 파락호들의 집적거림도 있었다. 아란하 는 그들은 한 달 동안 꼼짝 못하고 누워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예령의 부추김으로 주위의 이목을 살피며 같이 술도 한 잔 했다. 가장 취한 자는 멋모르고 부리를 갖다 댄 낙조였다. 낙조는 예령의 어깨에서 비틀거리다 결국 소매 속에서 잠들었다. 세상이 낙낙하게 지치도록 놀았을 때쯤 예령과 아란하는 황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황산으로 가며 예령은 문득 아란하의 발길을 멈추었다. 불이 꺼진 포목점(布木店) 앞이었다. "아란하, 그분의 옷은 너무 낡았어요. 이제 불에 타 구멍도 숭숭 났고……." "정말 그렇군요. 우리는 대전왕이 사람임을 잊고 사는 날들이 더 많은 것 같군요." 아란하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옷을 지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내가 만든 옷은 입지 않을 거예 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옷만 입고 있었던 걸요." "옷도 만들 줄 아십니까?" "알아요. 파파에게 배웠어요." "그럼 만들어 드리십시오. 성녀께서 만들어 주신 옷이라면 틀림없 이 기쁘게 입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아란하는 포목점의 담장을 넘었다. 그녀는 굳게 닫힌 포목점의 열쇠를 악력으로 부수고 들어가 가장 화려한 옷감을 골랐다. 그리고 은자를 놓은 후 밖으로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천천히 만들어 보셔요. 저도 곁에서 지켜보며 옷 만드는 법을 배우겠습니다." 아란하는 예령을 껴안고 다시 황산으로 신형을 날렸다. "성녀께서는 대전왕을 좋아하시나 보죠?" 산길을 질주하며 아란하가 물었다. "솔직히…… 좋아하지는 않아요. 화가 나고 두려울 때가 더 많습니 다. 하지만 좋아하려고 노력한답니다." "그렇군요." 아란하는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하는 만큼 좋아지겠죠. 나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렇게 될 거예요." 아란하가 웃었다. 예령과 아란하는 도둑고양이처럼 총단을 빠져나갔다가 도둑고양이 처럼 살며시 돌아와 기회가 닿으면 다시 놀러가기를 약속하며 침상에 누웠다. 황산 광명정에 새벽이 밝아 올 때였다. * * * "호아산에서 심장이 잘린 단심원주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곁에는 승룡방주가 미간이 뚫린 채 죽어 있었다고 하더군요. 몇 마장 떨어진 곳에서는 숭무각주가…… 숭무각주가 뼛조각만을 남긴 채 죽 었다고 합니다. 신분을 밝히는 패가 없었다면 숭무각주의 죽음은 영 원한 의혹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모두 구룡선주의 작품입니다." 등중용이 칠결전에서 읽은 내용들을 맥빠진 목소리로 보고했다. "아미타불!" 소림 방장, 혜각은 불호를 욌다. "일세를 풍미하던 사패도 결국 모두 한줌의 흙이 되고 말았구려." 공동 장문인, 현청도장은 하늘을 우러렀다. "진작 힘을 합쳤어야 하는데…… 그까짓 강호의 주인이라는 명함이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청성 장문인, 일진도장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숭무각주의 죽음은 정말 아깝군요." 화산 장문인, 이건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피력했다. 등중용을 비롯한 남은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은 제자들을 인솔 소호( 巢湖) 칠리하(七里河)에 모여 있었다. 의창의 패전 이후 구룡선, 마인거가 황산으로 향함을 보고 급히 등 중용이 집결을 요구한 것이다. 마지막 힘을 모아 사생결단을 낼 생각이었다. 소호에 모인 이유는 황산에 가깝고 행여 구룡선주가 소림을 공격할 지 모르기 때문에 길도 막아야 했다. 소림 마저 불타면 구파일방의 결속을 다질 상징이 없어지기 때문에 그것만은 어떻게든 저지해야 했 다. "저들의 초대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등중용이 각파에 전달된 배교의 초대장에 대해 물었다. "흔히 사용하는 마교의 수법입니다. 초대 운운하여 강호인들을 모 아 놓고 몰살시키려는 수작이지요. 당연히 초대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교 놈들의 제전에 왜 우리가 가야 합니까? 우리 제자들을 잘 죽였다고 축하라도 해 주어야 합니까?" 화산 장문인, 이건이 한광을 빛냈다. 아끼던 사제 장문천의 죽음… … 심장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화산 장문인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초대에 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 는 그들의 제전일을 오히려 피로 적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마교 놈들의 제전이라고 하나 우르르 몰려가 난장을 벌이면 저자 거리의 파락호들 같이 보일 터이고…… 놈들의 제전이 끝난 후 적당한 날을 골라 놈들의 총단으로 몰려갔으면 합니다!" 등중용이 소리쳤다. 두 명의 장로와 숱한 제자들을 잃은 등중용의 심정도 이건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합시다." "나도 등 방주의 의견에 동의하오." 일진도장과 현청도장이 각기 등중용의 의견에 찬성을 표했다. 의사가 집결된 듯했다. 좌중들은 소림 방장, 혜각에 시선을 돌렸다 . 이제 혜각의 한마디면 구파일방의 명운을 건 마지막 한판 승부가 광명정에서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아미타불! 한가지 들려 줄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각은 쉽게 '가(可)!'를 외치지 않았다. "지금 배교의 총단을 짓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혜각의 물음에 좌중들은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배 교의 총단을 누가 짓느니 하는 일에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나 역시 황산 광명정을 최후의 결전 장소로 생각했소이다. 그래서 몇 명의 나한들을 황산 주변에 풀어 저들의 동향을 알아보도록 했소 . 그런데 나한들로부터 의외의 소식이 전해져 왔소. 배교의 총단을 짓고 있는 자가 양 보주라 하더이다." "양 보주? 하남 금적보의 보주, 양백!" 좌중들이 이구동성으로 '양백'을 외쳤다. 그들은 모두 양백을 알고 있었다. 변경의 일진도장과 현청도장까지 양백을 아는 이유는 그만 큼 양백의 고결한 인품이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현청 도장은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따라 상단을 이끌고 가던 양백의 방문 을 받아 담소까지 나눈 적이 있었다. 개방이 양백에게 신세진 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모두 아연해 했다. "아마 배교놈들이 양 보주를 위협해서 그 같은 일을 맡겼을 것이요 !" 등중용이 소리쳤다. "위협을 당해서? 내가 아는 양 보주는 위협에 굴할 그런 사람이 아 니오. 목에 칼이 들어왔으면 들어왔지…… 근자에 승룡방의 무도한 행위를 참지 못해 칼을 들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소." 혜각이 말했다. 좌중들은 혜각의 말에 동감했다. 그럼 무엇 때문에 양백이 배교의 총단의 짓는 일에 나섰단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혜각이 그 의문에 답했다. "양 보주는 배교도외다. 그가 배교도이니 총단을 짓는 일에 나설 당연한 이유가 있지요." "양 보주가 배교도?" 좌중들은 다시 놀랐다. "나한들의 보고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의 초대장이 날 아왔소. 이번에는 소림에 온 초대장이 아니라 나에게 온 초대장이었 소. 내용은 이와 같소. 혜각, 내가 대역사(大役事)를 했는데 구경하 러 오지 않겠소? 구경할 수 있는 영광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오. 배교도를 친구로 둔 자에게만 가능하지. 혜각, 진심으로 그 대를 모시고 싶소. 이와 같이 쓰여 있었소. 아! 알려 드릴 일이 있소 . 양 보주는 나의 지기외다." "……." 좌중들은 말을 잃었다. "배교도들의 음험함은 역시 그 깊이를 알 길 없군요. 십 몇 년 동 안 철저히 선자(善者)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니…… 구룡선주, 마인거 주의 출현으로 더 이상 진면목을 숨길 필요가 없으니 이제 가면을 벗 어 던진 것이군요." 이건이 눈살을 찌푸렸다. "양 보주가 위선자(僞善者)라…… 거짓이든 어쨌든 십 몇 동안 그 가 벌인 선행은 없어지지 않겠지요?" 혜각이 물었다. "아직 그렇다고 장담하기는 이르지 않습니까? 결과를 봐야 하지요. 어떤 수작을 벌이기 위해 그 같은 일을 했는지!" 등증용의 마음도 이건과 비슷했다. "아미타불! 그래서 결과를 보기 전에 나는 양 보주를 나쁘다고 하 지 않을 참이오. 그리고 내 눈과 귀를 믿고 싶은 마음도 있소. 위선 자, 위악자(僞惡者)도 구별하지 못하고 친구로 두는 내가 무슨 염치 로 정사(正邪) 운운 할 수 있겠소. 허허허!" 혜각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음……." 이건과 등중용은 동시에 무안함으로 미간을 좁혔다. 생각하니 자신 들의 말은 혜각의 혜안(慧眼)을 철저히 무시한 말이었다. "양 보주의 일은 개인의 일이니 사정은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고… … 일단 황산 진격의 결정부터 내립시다. 모두 이견은 없으시지요?" 일진도장이 좌중에게 물었다. 이견이 나올 리 없었다. "길일(吉日)을 잡아 봅시다. 멀리 계신 현청도우께서 날짜를 잡는 것이 좋겠군요." 일진도장은 먼 곳의 제자들을 불러야 하는 현청도장의 입장을 고려 했다. 현청도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미타불! 같이 할 이야기는 끝났는가 봅니다. 그럼 내 개인적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오. 나는 대제전에 참가할 생각입니다." 혜각이 말했다. "안됩니다! 놈들이 무슨 술수를 쓸 지 어찌 알겠습니까?" 등중용이 강하게 반대했다. "친구의 초대를 받았소. 가지 않음은 예의가 아닌 것 같소." "대사, 지금은 중요한 시기입니다. 사사로운 정을 이야기할 때가 아닙니다." 이건도 말렸다. "나는 양 보주를 믿소. 특별히 나에게 초대장을 보낸 이유는 할 이 야기가 있기 때문일 것이오. 더 이상 말리지 마시오. 그리고…… 황 산에는 숱한 강호인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작금의 상황에서 배교의 눈밖에 나는 일은 바로 죽음일 테니 어쩔 수 없어서라도 황산을 오를 것이오. 그때 그들이 구파일방이 하나도 없음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겠소. 혹시 구파일방이 겁을 먹어 이곳에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는 않을지…… 보이는 것은 배교의 깃발! 이제는 배교천하가 되었구 나라고도 생각할 것이오. 강호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다면 정말 큰 일이오. 누군가는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켜야 하오. 그래야만 강호인 들의 의기가 꺾임을 막을 수 있을 것이오. 그 자리에서 피를 뿌린다 고 하더라도…… 솔직히 물어 보겠습니다. 배교와의 마지막 승부에 우리가 이길 것 같소?" "……." 혈기에 넘치는 등중용 마저 '이길 수 있소!'라고 외치지 못했다. 의창의 일전에서 승부의 명암(明暗)은 이미 갈라져 있었다. 마지막 희망은 사패와 연수(聯手)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없 다. "말하기 힘든 질문을 던져 죄송하외다. 하지만 현실을 비켜만 가려 하면 일은 점점 어려워지오.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강호에 사파천 하, 마도일세(魔道一世)는 한두 번이 아니었소. 그러나 결국 사필귀 정(事必歸正)으로 끝났지.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끝까지 의연함과 의기를 잃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소? 당장의 목숨, 당장의 승부에 연연하지 맙시다.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오. 의창의 이야기 를 들었소.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화산은 십 년만에 장문천이라는 거 인을 키웠더군요. 십 년…… 각고의 십 년이면 그 이상의 거인도 키 울 수 있을 것이오. 구룡선주를 이길 수 있는…… 아미타불!" 혜각은 염주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불호를 욌다. 좌중들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혜각의 말은 그들의 가슴 깊이 담겨 있던 불안을 어느 정도 씻겨 주고 있었다. "대사라면 구파일방을 대표할 자격도 있소. 배교의 제전에 구파일 방의 깃발을 당당히 걸어 주시오. 나도 가고 싶지만…… 만약을 대비 뒤를 챙겨야 할 자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현청도장은 결국 승인했다. 일진도장도 고개를 끄덕였고 이건은 말 이 없었다. "대사만 보낼 수 없소! 나도 가겠습니다!" 등중용이 갑자기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등 방주는 참으시오." 혜각이 만류했다. "대사는 보냈는데 젊은 내가 가만히 있다면 강호인들이 나뿐만 아 니라 개방까지 욕할 것입니다. 그리고 대사 혼자 보다 둘이 가는 것 이 강호인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등중용은 자신의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좌중들은 난감해 했다. 누구는 가고 누구는 가지 말라고 할 수 없 는 처지였다. "등 방주의 뜻이 그렇다면 막지는 않겠소. 하지만 더 이상 가겠다 고 나선다면 곤란합니다. 나 혼자 뒷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오. 허허허!" 현청도장이 수염을 쓸며 웃었다. 다분히 이건을 의식한 말이었다. "강호의 연륜으로 보건대 앞으로 강호는 등 방주의 영도력에 크게 의지할 것 같습니다. 험한 장소에서 강호인들 앞에 등 방주의 의연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도 좋겠지요." 이건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우리는 칠리하에서 도화(桃花)가 떠내려오는가를 보며 물놀 이나 하고 있겠습니다." 일진도장이 자리를 정리했다. * * * 명강량은 대화로의 폐허 속에 누워 며칠 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꼼짝하지 않았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양 명두가 한 번씩 들러 먹을 것을 가져다주고 갔을 뿐이었다. 양 명두는 당분가 폐허가 된 대화로를 없앨 뜻이 없는 듯했다. 다 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만큼 편안한 장소도 다시 구하기 힘드리라. 폐허가 된 옛 대화로 주변은 조용했지만 황산은 그렇지 않은 것 같 았다. 명강량의 밝은 귀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를 모두 듣고 있었다. 총단의 대제전에 맞추어 적지 않은 자들이 모여드는 듯했다. 오후부터 바람이 갑자기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하늘도 잿빛으로 흐 렸다. 한바탕 눈이 쏟아지려는가. 산중의 겨울, 잿빛 하늘…… 폐허가 된 대화로 주위에 일찍 어스름 이 내렸다. 명강량은 낡은 성벽의 뱀처럼 또 하루를 그렇게 보내려 하고 있었다. 양백도 왔다 갔으므로 더 이상 올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인영 하나가 그림자를 드리우며 수줍은 표정으로 명강량의 앞에 모 습을 나타냈다. '우리 교의 귀여운 딸…….' 예령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는 아란하와 신화정이 서 있었다. 명강량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그들의 시선을 외면했다. 하늘은 점점 어두워져 가고 있었다. 예령은 명강량의 냉랭한 태도에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망설 였다. "춥지 않으세요?" 간신히 꺼낸 말이었다. 그러나 명강량의 대꾸가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아란하와 신화정이 더 안타까워했다. "발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아요?" 예령이 다시 물었다. "만약 묻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발을 다쳤는가도 몰랐을 것이요. 이제야 생각나는군. 나는 발을 다쳤지." 명강량의 무심한 목소리가 폐허를 울렸다. "그곳이 좋은 모양이지요?" "……." "음…… 나, 나는……." 명강량은 도저히 말을 걸 여지를 만들어 주지 않고 있었다. 예령은 무엇인가를 들고 우물쭈물했다. "대전왕, 성녀께서 직접 옷을 만들었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이 너무 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참다 못한 아란하가 예령의 이야기를 대신했다. "이 옷인데 맞을 지 모르겠어요?" 예령은 들고 있던 옷을 펼쳤다. 화려한 금의였다. "이 옷을 만드느라 성녀께서는 며칠 밤을 고생했어요." 아란하가 말했다. 명강량의 시선이 예령과 금의를 쫓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오래 도 입었었다. 악약이 분하에서 선물해 준 옷이니…… 갑자기 심장이 울렁거리고 콧등이 찡했다. 그러나 명강량은 급히 자신의 마음을 수 습했다. "받으세요." 예령이 다가와 명강량의 곁에 옷을 놓았다. 명강량은 옷을 들었다. 푸시시…… 옷 한 벌이 재가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예령은 흠칫했고 아란하와 신화정의 안색은 하얘졌다. 충격을 더 받은 사람은 아무래도 예령일 것이다. 그러나 예령은 아 란하와 신화정 보다 빨리 충격에서 벗어났다.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다시 만들어 드리겠어요." "어린 성녀여, 마음에 없는 말로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리고 나는 이 옷이면 족하오. 내가 성녀로부터 선물을 받을 이유도 없다." 명강량은 반말을 섞어 가며 예령의 말을 깨끗이 잘랐다. "알았어요. 싫다면…… 한가지 물어 볼 말이 있어요." 예령은 입술을 깨물며 말을 돌렸다. 지금 꼭 물어 보아야 할 말 같 았다. "나는 이제 자야 할 시간이오. 긴 이야기에는 대답하지 않을 것이 오." "길게 이야기하지 않을 거예요. 단원홍이라는 분에 대해서 알아요? " "단원홍? 물론 기억하고 있소." 명강량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단 아저씨는, 단 아저씨는 나를 키워 준 분이에요. 나는 그분을 좋아해요." "단원홍이라는 놈은 예전에 무척 많은 나의 친구들의 목숨을 뺏어 간 것으로 알고 있소." "아저씨도 이제 그만큼 뺏어 갔잖아요." 예령은 잘못을 빌 듯 손을 모았다. 명강량의 전신에서 갑자기 짙은 살기가 폭사했다. 아란하와 신화정 의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살기였다. "내가 죽인 자는 내가 죽인 자이고 그가 죽인 자는 그가 죽인 자이 다! 내가 죽인 대가는 내가 받을 것이고 그가 죽인 대가는 그가 받을 것이다! 어린 성녀, 단원홍이라는 자는 그대 어머니의 목숨까지 가 져갔다. 무엇을 이야기하려 하는가?" 그가 폭풍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예령은 물러나지 않았다. "아니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은 저 때문이었어요. 난산(難産) 으로 돌아가셨다고 파파가 말했어요! 단 아저씨가 어머니를 죽였다면 내가 어떻게 천화원에서 자랄 수 있었겠어요?" "어떤 이유 때문인지 나는 묻지 않겠소. 어떤 이유라도 결과는 마 찬가지일 테니…… 나는 단원홍이라는 놈을 죽이려 합니다." 명강량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안돼요!" 이번에는 예령이 소리쳤다. "어린 성녀여! 그대는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마라. 나 역시 그대에게 나의 이야기를 강요하지 않겠다. 모두 각자의 길이 있 다. 그리고 나는 단원홍이라는 자를 조금 알지. 하늘이 정한 그의 태 생(胎生)의 비밀은 배교도들을 죽이는데 있다. 나의 태생의 비밀은 그자를 죽이는데 있고…… 어린 성녀여, 나는 마치 그대의 말이 단원 홍 앞에 나의 목을 주라는 말로 들리는 구나." "거짓말! 전 명두는 아저씨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어요!" "그렇소? 그렇다면 그는 나의 칼에 죽을 것입니다!" "결국 싸움을 하시겠다는 말이군요." 예령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명강량의 가슴에 울컥 불덩이가 치솟았다. "아란하……." 그가 거친 호흡을 삼키며 아란하를 불렀다. 가슴속이 이글이글 불 타고 있었다. 왜 어린 성녀는 단원홍이라는 자를 감싸고도는가. '어이없게도 나는 질투를 하고 있구나. 질투를…….' 필요 이상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의 이유를 알았어도 그의 분노는 더욱 타올랐다. "누가 적을 두둔하는 자를 이곳에 데려오라고 했느냐?" 명강량의 목소리가 한천을 살벌하게 울렸다. 아란하는 흠칫했다. 명강량의 두 눈에 이글거리는 광화……. "죽일 계집!" 명강량은 짧은 고함과 함께 소매를 휘둘렀다. "악!" 아란하가 비명을 질렀다. 흙벽이 우르르 날아가 아란하를 난 타했다. 아란하의 전신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이마에는 피가 주르르 흘렀다. "성녀……." 신화정이 명강량의 광기에 놀라 예령을 몸으로 감쌌다. 예령은 두려움 없이 명강량을 직시했다. "단 아저씨를 죽인다면 나는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비록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어도……. 그리고 계속 그렇게 행동한다면 누구 나 당신을 싫어할 거예요." 예령이 나이답지 않은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호칭은 이제 아저씨 가 아니라 당신이었다. "어린 성녀여.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앞에 나타나지 마라. 나는 이 제껏 나의 적을 옹호하는 자를 용서해 본 적이 없다." 명강량의 목소리 역시 삭풍처럼 차가웠다. "알았어요. 되도록 당신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도록 노력하겠어요. 아란하, 괜찮아요?" 예령은 등을 돌려 아란하를 부축했다. 아란하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신의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 간적으로 일어난 대전왕과 성녀 사이의 간극(間隙)…… 아득한 절망 감에 그녀는 머리를 푹 숙였다. 명강량은 사라져 가는 예령과 아란하, 신화정의 발걸음 소리를 들 으며 폐허에 몸을 기댔다. 어린 성녀에 대해 깊어지는 자신의 마음은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 었다. 하지만 어린 성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가장 주고받지 말아야 할 물건은 바로 정(情)이다. 다정(多情)이 한이지." 그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명옹께서 너무 심한 말을 하셨군. 혹시 그곳이 귀신이 출몰하는 흉가(凶家)가 된 것이 아닐까? 나는 귀신이 들어 머리가 돌아 버린 사람을 제법 보았다구." 전우삼은 그렇게 말했다. "문제군. 문제야. 왜 점점 심해지실까?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 양백은 뒷짐을 지며 한숨을 쉬었다. 그 외의 자들은 모두 침묵했다 . 성녀가 아란하, 신화정과 함께 명옹을 만나러 간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교도들의 눈은 항상 어린 성녀에게 쏠려 있으니… …. 폐허가 된 대화로에서 명옹을 만나고 온 성녀의 표정이 좋아 보이 지 않았다. 아란하라는 여자는 피까지 흘리고……. 그래서 전우삼과 감악, 장탄은 신화정을 닦달했다. 대화로에서 무 슨 일이 있었냐고? 원래 명옹에 대한 감정도 있었고 전우삼 등이 하도 닦달을 하기에 폐허가 된 대화로에서 일어난 일을 말하고 말았다. - 어린 성녀여. 그대는 더 이상 나의 앞에 나타나지 마라. 명옹은 성녀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예법의 문제가 아니라 성녀의 존재를 완전 무시하는 말이었다. 그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사람은 감악이었다. 감악은 의사당(議事堂)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몇 시진을 생각에 골 몰했다. 야효(夜梟)의 울음소리가 사나왔다. 삼경(三更)을 넘긴 시간이었다. 감악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에게 묻고 물었다. 혹시 감 정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래서 몇 시진을 마음을 가다 듬으려 앉아 있었던 것이다. 확신했다. 감정은 아니라고……. 오히려 오래 전에 처리해야 했을 일이었다. 감악은 의사당을 나서 천천히 걸었다. 대제전일 까지는 아직 시일 이 조금 남았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군소방파들이 총단 주위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찍 오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이 생각하는 자들이 분명했 다. "쓰레기 같은 것들!" 제일 빨리 온 자들 중에는 하토문도 있었다. 십 여년 전 형산파와 함께 지긋지긋하게 교를 공격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 또 한 이해가 되었다. 힘의 저울추를 따라 생존을 모색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군소방파의 설움! 그렇게 생각하면 명옹은 적지 않게 교를 위해 일한 듯도 했다. 반 드시 싸워야 할 적도 있었고……. '아니다!' 감악은 자신의 생각에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한 가지의 잘못도 없 고 백 가지의 좋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명왕과 성녀를 부정하는 자 는 교도가 아니다. 좋은 친구는 될 뿐……. 감악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가 발길을 머문 곳은 폐허가 된 대화 로 앞이었다. 달빛이 흙벽에 누워 죽은 듯이 있는 자의 모습을 비췄다. "감악입니다." "……." "내일 청정원에 들릴 생각입니다. 성녀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식으로 호교신장의 인준을 받을 생각입니다. 호교신장 없이 대제전 을 치를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감악의 목소리가 낮게 폐허를 울렸다. "신장도와 전교영기를 넘겨주셨으니 내가 호교신장이 되는 데 대해 다른 말씀은 없을 줄 압니다. 명옹, 호교신장이 되면 두 가지 책무 가 등에 지고 다녀야 함을 압니다. 교를 수호하고 성녀를 지키는…… 나는 성녀에게 인준을 받는대로 그 두 가지 일을 할 생각입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거칠어졌다. "우리 내부의 일부터…… 명왕과 성녀에게 무례한 자를 배교자(背 敎者)가 아니라 할 사람은 없겠지요. 명옹, 나의 첫 일은 명옹의 이 름을 우리 교의 이름에서 지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파문(破門)!" 파문……. 교도로서 죽음의 선고(宣告)였다. 하지만 명강량은 여전히 움직이 지 않았다. 정말 죽은 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대제전일에 강호인들 앞에 선포할 생각입니다. 파문을 대외에 선 포하는 일에 대해서는 양해를 바랍니다. 우리 배교에 대한 강호인들 의 오해를 조금이라도 불식할까 해서입니다.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 다." 감악의 목소리는 다시 냉정을 찾고 있었다. "파문을 당한 자는 교단 근처에 머무를 수 없음도 알 것입니다. 대 제전일 까지는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자정을 넘기기 전에 떠나 주 십시오.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내 가 할 이야기는 끝났습니다. 혹시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 명강량은 여전히 침묵했다. "다음에 만날 때는 뭐라 불러야 할 지 정말 난감합니다. 전대 명옹 이라 부르자니 파문을 당한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군요. 예전 처럼 호형호제하자니 꼭 거짓말을 하는 기분입니다. 어쨌든 그때가 되면 부를 칭호야 있겠지요. 명옹, 편히 주무십시오." 감악은 자세를 바로 하고 옷깃을 여몄다. "명옹출세! 배교일세! 명옹광휘!" 그가 오체투지 했다.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감악은 갑자기 머리가 띵했다. 마치 쇠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울컥 감정이 격해지며 눈물도 솟았다. 냉정을 잃을 일은 전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자꾸 머리가 아득하고 눈시울 이 붉어졌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그 환란 속에서도 명왕을 원망하지 않았는데 이 순간만큼은 명옹을 저렇게 만든 명왕을 원망했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아 급히 등을 돌렸다.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 나 결국 감악은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명옹, 명강량! 그 이름이 가져다주는 온갖 세월의 기억들……. 미치고 미칠 지경이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보는 사람이 없다 면 통곡이라도 했을 것이다. 밤새도록 잠을 뒤척였었다. 새벽에 잠시 눈을 붙인 듯 한데 어수선 한 꿈이라 피로가 더했다. 감악은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계곡을 찾았다. 두터운 얼음을 깨 고 그는 계곡물에 몸을 담궜다. 그리고 청정원을 찾았다. "들어오세요?" 예령이 그를 맞았다. 감악은 오체투지로 예를 올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아란하라는 여자를 보 았다. 유난히 명옹을 감쌌던 여자다. 반대라도 한다면 꺼내기 싫지만 그녀의 자격까지 문제 삼을 각오도 했다. 이상하게 지금 하나로 뭉 쳐 있지만 따지고 들면 그녀는 중원 배교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지국 출신이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예령이 물었다. "일전에 내가 호교신장이라고 하셨지요? 호교신장이 맞다면 정식으 로 인준을 바랍니다." "감 아저씨가 호교신장이 맞아요. 인준이라니요? 어떻게 하는 건가 요?" "원래 호교신장을 뽑는 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대 명옹께서 후계 자를 지정합니다. 그리고 대전을 열어 후계자의 자질이 있는가를 명 두들에게 묻지요. 명두들이 인정을 하면 당대 명옹께서 후계자를 데 리고 성녀를 뵈러 갑니다. 성녀께서 후계자를 보면 명옹이 될 수 있 는 자격이 주어지지요. 저는 이미 명옹으로부터 전교영기와 신장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명두들도 내가 호교신장이 되는 데에 대해 이견 이 없는 줄로 압니다. 이제 성녀께서 내가 호교신장임을 재확인해 주 셨으니 나는 호교신장이 맞는가 봅니다." "아하! 원래 호교신장을 뽑는 일은 그렇게 복잡하군요. 그런데 갑 자기 호교신장임을 확인하려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성녀시여. 호교신장은 교권(敎權)을 가진 자입니다. 성녀를 지키 고 교법을 지키는 자이지요. 아주 큰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성녀께서 호교신장이라 말해 주었는데도 그 동안 여러 가지 일로 책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정식으로 호교신장임을 밝혀 책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해요." 예령은 열정을 다해 호교신장의 책무를 이야기하는 감악이 이상스 럽기까지 했다. "어제 명옹을 만났습니다. 호교신장으로서 나는 그에게 파문을 명 했습니다." "파문?" 예령은 깜짝 놀라했다. 아란하는 입술을 깨물며 등을 돌렸다. 올 것이 온 것이다. "그는 우리 교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자입니다. 제 권한으로 처리 할 수 있는 일이나 굳이 성녀께 말씀드리는 것은 성녀께서 놀랄까 걱 정해서입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하나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 역시 명옹을 파문……." 감악은 더 이상 말을 못했다. 감정이 다시 복받쳤다. 그도 자신의 감정이 이 같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해해 주십시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는 급히 등을 돌렸다. 그가 청정원을 서둘러 걸어나갔다. 청정원에 침묵이 흘렀다. 예령이 창가에 서 입술만 깨물고 있는 아란하를 껴안았다. 제38장 기로(岐路) "어떻게 된 일인가?" "무엇이? 허허허! 보는 바와 같지." "왜 나에게 배교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나?" "사실 한동안 배교도가 아니었네. 배교도였다고 하더라도 이야기했 을까 자신이 없기는 하지만……." "나를 너무 옹졸한 사람으로 보았군. 아미타불! 어느 곳에도 사람 은 있고 사람은 없지." "우리 교를 사람이 많은 쪽으로 봐 주게나. 나중에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하는데……." "아미타불! 원하신다면……." 혜각은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계신 늠름한 분은 개방의 분인 모양이군." 양백이 등중용에게 눈길을 두었다. 등중용은 양백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난처했다. 양백이 이룬 그 간의 업적을 배교도이기 때문에라는 한마디 말로 모두 무시할 수 없 는 처지였다. 그렇다고 강호인들이 보는 앞에서 배교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수 없는 처지고……. 양백이 그의 곤란함을 먼저 알아챘다. "양백이라 하오." 그가 먼저 공손히 포권했다. "개방의 용두방주, 등중용이라 합니다." 등중용은 좀 거만한 자세로 양백의 인사를 받았다. "혜각, 나중에 보세. 일이 바빠서…… 곧 대제전이 시작될 것일세. " 양백은 혜각에게 손을 든 후 총총히 제단으로 걸어갔다. 배교의 총단이 있는 황산 광명정에는 천 여명의 군웅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딱딱한 표정으로 광명정에 앉아 있는 군웅들은 의아함 을 금치 못했다. 명망 높은 금적보의 보주가 배교의 교도였다는 사실 이 믿어지지 않았고 배교도를 상대로 정담을 나누는 혜각대사도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기인들은 원래 예측 못할 일을 벌여 기인들이라 그들은 곧 관심을 배교의 대제전에 쏟았다. 둥! 둥! 둥! 북소리가 길게 울렸다. 배교의 대제전을 알리는 북소리였다. 북소리는 명강량의 귀에도 선명했다. 북이 울릴 때마다 가슴이 쿵! 쿵! 울렸다. 서둘러 떠나라는 고함과도 같이 들렸다. 명강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에 묻은 흙을 털며 주위를 쭉 둘러보았다. 자신의 세계는 보고 있는 곳이 전부인 것 같았다. 그러나 이곳도 곧 떠나야 했다. '잘 하고 있구나. 감악…….' 명강량은 머리를 곱게 쓰다듬었다. 자, 이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린 성녀를 한 번 더 보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럴 기회는 없을 것 이다. 성녀는 군웅들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테니……. 감악의 당당한 모습과 대화로에 불이 오르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았다. 아란하를 한 번 만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보지 않는 것이 좋을 듯했다. 군웅들은 많았으나 총단의 재건을 축하하는 제전은 조용히 진행되 고 있었다. 노관이 보권의 한 구절을 읽고 대화로에 불을 지핀다. 그리고 찾아 온 군웅들에게 감악이 호교신장으로 인사하며 사례를 할 것이다. 그 자리에서 파문이 이야기될 듯 싶었다. 웅 - 웅 - 삭풍은 여전히 거셌고 시간은 조금씩 흘렀다. 시간이 조금 빨리 갔으면 했다. 앉아 있자니 자꾸 어린 성녀의 얼 굴이 떠올랐다. 청정원에 찾아가고 싶은 욕심이 점점 커졌다. 파문을 당한 이후는 영원히 보지 못할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숨어서 볼 수도 없고…… 찾아가서 정히 할 말도 없을 듯했다. 보아야 미련만 남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마지막으로 교를 위해 하려는 일과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구룡선주는 끝까지 구룡선주 다워야 할 것이다. 어줍잖 게 행동하면 그들의 마음에 부담만 될 뿐이다. 감악의 눈물도 보지 않았는가. '자, 이제 이곳의 일은 끝을 보자.' 명강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였다. 명강량은 발걸음을 멈추고 촉각을 세웠다. 그의 안색이 냉랭하게 굳었다. 그는 느끼고 있었다. 엄청난 기파를……. 누군가가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와 싸운 자 중에 제법 실력을 인정해 줄만한 자가 있다면 남궁기 와 장문천뿐이다. 장문천이 남궁기 보다 조금 강하긴 강했다. 전우삼 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따라서 남궁기와 장문천도 자신의 실력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다가오는 자는 달랐다. 최소한 전우삼의 상대로는 충분 할 듯했다. '왔군.' 명강량은 턱을 매만졌다. 강호에 그만한 실력을 가진 자는 단 한 명밖에 없다. 능운공작, 단원홍! 찾아가려 했는데 그가 먼저 찾아오고 있었다. 명강량은 천음관을 매만졌다. 폐허를 걸어나가며 그는 문득 떠올렸 다. 단원홍을 죽이지 말라던 어린 성녀의 말을……. 그러나 무시했다. 단원홍은 꼭 죽여야 할 자였다. 단원홍도 알 것이다. 배교를 없애 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가 없어짐을……. 대제전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특별히 군웅들의 관심을 끌만 한 일이라면 의외로 배교의 호교신장이 구룡선주나 마인거주가 아니 라는 사실이었다. 한 눈에 사람의 호감을 살만한 삼십 대 중반의 사내였다. 감악……. 자신으로 군웅들의 관심을 끈 그는 또 한 마디의 말로 군웅들의 관 심을 끌었다. 구룡선주의 파문! 듣기에 따라서는 엄청난 말일 수도 있었다. 감악이 그 같은 발언을 한 후 군웅들은 한동안 웅성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곧 군웅들은 그 말에 관심을 잃었다. 오히려 표정이 더 딱딱하게 굳었다. 배교, 마교가 어떤 수작을 부리려 하는구나 하는 것이 대다수 그들 의 생각이었다. 말의 진의(眞義)는 생각하지 않고 피냄새부터 맡았다 .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구룡선주라는 그 이름 자체가 피냄새이니 ……. 어쨌든 그 사실을 제외하고 군웅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일들은 없었 다. 대제전은 막바지로 향하고 있었다. 감악을 비롯한 배교의 명두들은 한천을 쏟아지는 빛을 모아 채화( 採火)를 하고 있었다. 겨울이라 채화가 쉽지 않았다. 일 각쯤 흘렀을 때 마른나무에 불이 확 피어올랐다. 감악을 비롯한 명두들은 불붙은 관솔을 하나씩 들었다. 첨탑에 솟 은 대화로에 불을 지피기 위해 그들은 열을 지어 첨탑을 향했다. 그때였다. 쿵! 갑자기 첨탑이 크게 흔들렸다. 군응들은 황산에 화산이라도 폭발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흔들리는 곳은 대화로가 설치된 첨탑밖에 없었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첨탑에 금이 갔다. 그리고 첨탑은 한순 간에 우르르 무너졌다. 명두들도 군웅들도 의외의 사태에 영문을 몰라 했다. "흐흥! 꼴 좋군. 당연히 하늘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등중용은 쾌재를 불렀다. 코방귀를 뀌며 고소해 하던 그가 무엇을 보았는지 벌떡 일어났다. "아미타불……." 혜각도 불호를 욌다. 흙먼지가 가라앉으며 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려한 금의, 고색창연한 장검, 이마에 영웅건(英雄巾)을 두른 자 였다. "느, 느, 능운공작!" 누군가가 소리쳤다. 첨탑을 박살내며 나타난 자는 단원홍이었다. "능운공작이다!" 군웅들은 환호를 터뜨렸다. 그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교놈들을 쳐부수자!" "마귀들의 전당(殿堂)을 불지르자!" 몇몇 군웅들은 배교와의 일전을 목소리 높였다. 능원공작의 출현! 영원히 침묵 속에 있을 줄 알았던 단원홍의 출현 으로 군웅들은 흥분으로 술렁였다. 능운공작도 나섰고 군웅들의 수도 배교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고함은 꽥꽥 질렀지만 누구 하나 먼저 칼을 빼 드는 자들은 없었다. 한치 앞을 누가 내다볼 수 있을 것인가. 마교에는 야차와 같은 구룡선주와 마인거주가 있다. 파문 때문인지 구룡선주는 쭉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섣불리 칼을 빼다가 자신은 물론 일문까지 깨끗이 몰살당할 위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웅들은 누가 먼저 칼을 빼 들지 않는가 시선을 희번덕거리며 단 원홍에게 시선을 모았다. "죽일 놈!" 전우삼의 눈이 찢어졌다. 그가 대월을 치켜들고 단원홍에게 달려들 었다. 단원홍은 칼잡이를 잡았다. 쐐액! 검신이 하얗게 빛나며 경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그의 검이 일도양단으로 전우삼을 쏘아 갔다. "허억!" 전우삼은 급히 신형을 비틀었다. 팟! 간발의 차로 그의 소 매가 동강났다. 전우삼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물러나게 할 자가 있으리라고는 생 각도 않았다. 그가 진력을 끌어올렸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진지한 자 세였다. 단원홍은 검을 길게 지면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언제 검을 뽑았 냐는 듯한 태도였다. 휙! 전우삼이 다시 쇄도해 갔다. 단원홍은 손목을 꺾어 장검을 움직였다. 뇌전으로 번뜩이던 장검이 갑자기 느리게 흘렀다. 전우삼의 대월도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갓 입문한 제자가 투로를 배우듯 천천히 대 월과 장검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군웅들은 엄청난 경기의 압박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쳐야 했 다. 내력이 약한 자는 웩! 하며 한 모금의 피를 토해 냈다. 흙먼지도 구름처럼 일었다. 눈의 착각이었다. 대월과 장검이 너무 빨리 움직이기 때문에 아예 정지해 있는 듯한……. 쨍! 쨍! 쨍! 쨍! 쨍! 급박하게 터져 나오는 칼 부딪히는 소리가 그 사실을 증명했다. 수 십, 수백 번 동시에 터져 나오는 칼 부딪히는 소리에 군웅들은 귀청 을 잡아야 했다. 흙먼지는 점점 거세게 일어 잠깐 사이에 단원홍과 전우삼의 모습을 잃게 했다. 그것 또한 눈 깜짝할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쩡! 거센 칼 부딪히는 소리에 배교의 전각들이 우르르 흔들리며 군 웅들 중 내력이 약한 자는 결국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폭풍 속에 흔들리던 흙먼지가 잠잠했다. 광명정을 부는 거센 삭풍 이 흙먼지를 날렸다. 단원홍과 전우삼은 서로를 격하고 서 있었다. 단원홍의 자세는 처음과 같았다. 검신을 지면으로 길게 늘어뜨린… … 안색은 조금 창백했으나 외관의 흐트러짐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반면에 전우삼의 모습은 보기가 좋지 않았다. 그의 옷은 너덜너덜 한 걸레와 같았다. 그리고 몇 군데 혈구(血口)도 보였다. 한 차례의 격전에서 승부의 우열은 선명하게 난 듯했다. 그러나 그 것은 군웅들의 생각……. 절세고수들의 승부에 있어 미세한 실력의 차이는 바로 죽음이다. 풀잎으로 나무를 꿰뚫고 나뭇가지로 바위를 뚫는 그들이다. 그럼에도 경미한 상처밖에 입히지 못했다는 것은 승부가 백중지세(伯仲之勢) 였다는 뜻! 하지만 보는 자들은 달랐다. "전 랑……." 신화정은 손에 땀을 쥐었다. 그녀를 비롯한 배교도들은 긴장했고 군웅들은 의기양양 기세를 올 렸다. "헤헤헤, 제법이군." 전우삼은 안광을 빛내며 대월을 잡았다. 그가 씨익 웃으며 대월에 진력을 실었다. 대월이 붉게 물들며 이내 쇳물로 뚝뚝 흘러내렸다. 대월이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역시 대월은 검 보다 현묘함에서 훨씬 떨어졌다. 요혈은 막을 수 있었으나 팔방풍우(八方風雨)로 절묘하게 파고드는 단원홍의 화려한 공세를 모두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장권이 나을 것 같아 그 는 대월을 버린 것이다. 단원홍은 칼배로 자신의 정강이를 툭툭 쳤다. "예령은 어디 있느냐?"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령? 미친 놈! 사람을 찾으려면 관아로 가라!" 전우삼의 눈동자와 장심이 동시에 붉게 물들었다. 단원홍의 무심한 눈빛도 점점 깊어졌다. 폭풍 같은 기파와 함께 살 기가 폭사하며 광명정을 삽시간에 얼음굴로 만들었다. "예령은 어디 있느냐?" 단원홍은 세상이 떠나갈 정도의 노호를 터뜨렸다. 황산이 쩌렁 울렸다. 군웅들은 놀라 화들짝 자신의 칼을 잡았다. 그들에게 단원홍의 일 갈은 너희들은 왜 칼을 뽑지 않느냐는 질책으로 들렸다. 왜 그런 생 각이 들었는지는 자신들만이 알 일이지만……. "가자!" 누군가가 고함을 지르며 칼을 뽑자 나머지 자들도 일제히 칼을 빼 들었다. 쥐떼들의 반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일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등중용은 용두봉을 들었다. 군웅들이 나서는 마당인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 다. 혜각이 가만히 그의 팔을 잡았다. "등 방주, 일이 생각한대로 돌아가고 있소이다. 광명정 초입(初入) 에 가 보시오. 우리 구파일방의 정예들이 모여 있을 것이오. 서둘러 그들을 데려오시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은 칠리하에 있지 않습니까?" "긴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소. 나는 능운공작이 오리라는 것을 알 고 그들을 그곳으로 오도록 급히 서신을 보냈소. 등 방주의 빠른 발 이 절실하게 필요하외다!" 혜각은 고승의 체면도 있고 다급하게 말했다. 등중용은 혜각의 보채는 말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혜각대사 의 혜지(慧智)를 의심하기도 그렇고……. "조심하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휙! 등중용은 바람처럼 신형을 날렸다. 광명정을 쏜살 같이 내려가는 등중용을 보며 혜각은 미간을 좁혔다 . 군웅들의 눈과 귀는 이렇게 어두운가. 혜각은 느끼고 있었다. 미증유(未曾有)의 기파를 토해 내며 대망처 럼 천천히 전각들 사이를 빠져 나오는 기물(奇物)이 있다는 것을…… . 불행히도 능운공작이 그 기물을 이길 수 있다는 장담이 서지 않았 다. 그래서 본의(本意) 아니게 등중용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 기물은 출현과 동시에 닥치는 대로 사람을 포식할 테니……. 누구의 말대로 등중용은 십 몇 년 후의 강호를 맡길만 했다. 나중의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고 살릴 수 있는 방도가 있다면 살려야 했다. 혜각은 선장을 들고 광명관(光明館)이라는 전각 뒤로 서서히 걸어 나오는 인영에 시선을 맞추었다. 군웅들과 배교도들은 난장으로 얽히려 하고 있었다. 예령은 청정원의 창에 턱을 괴고 대화로에 불이 오르기만을 기다리 고 있었다. 그러나 불은 오르지 않고 첨탑은 사상누각(砂上樓閣)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아란하가 다급히 예령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변고를 직감했다 . 밖으로 뛰쳐나가 적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성녀를 지켜야 하 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칼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소리만으로 아란하는 상상 못할 적이 나타났음을 짐작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황산을 뒤흔드는 고함은 그때 터졌다. - 예령은 어디 있느냐? 예령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단 아저씨예요! 단 아저씨가 찾아왔어요!" 그녀는 청정원을 뛰쳐나가려 했다. "위험합니다!" 아란하가 그녀를 잡았다. "아란하, 빨리 손을 놓으세요. 나는 나가야 해요." 예령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란하는 예령의 눈빛에 흠칫했다. "호교신장이 오고 있어요. 단 아저씨를 죽이려……." 예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란하는 왠지 모르게 맥이 탁 풀렸다. 예령을 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쾅! 또 한 번 우레가 광명정을 뒤흔들었다. 막 배교도들과 얽히려던 군웅들은 놀란 토끼처럼 시선을 돌렸다. 우르르……. 배교 수난의 날이었다. 광명관이라 적힌 배교의 전각 하나가 맥없 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리고 흙먼지 속에서 표표히 신형 하나가 나타났다. 감악 등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고 군웅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구룡선주가 있다는 것을…….' 군웅들은 앞 뒤 없이 칼을 빼든 자신들의 행동을 후회했다. 쥐떼들 은 흔들렸다. "후후……." 명강량은 좌우를 둘러보며 실소를 흘렸다. "핫하하! 하하하하……." 그가 광소를 터뜨렸다. "으, 으……." "아악!" "아……." 군웅들은 귀청을 잡고 고통에 찬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 력이 약한 자는 칠공에서 피를 흘리고 쓰러지며 전신을 바동거렸다. 마소(魔笑)였다. "아 - 아 - " 혜각이 사자후로 저항했다. 그러나 명강량의 광소 앞에서 혜각의 외침은 폭포수의 굉음에 저항하는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불과했다. 삽시간에 백 여명이 눈을 까뒤집었다. 휙! 찬바람이 스쳐 갔다. 비명도 없었다. 목 없이 서 있는 몇 명의 동료들을 발견하고 비로 소 군웅들은 대살성이 자신들의 곁을 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챘다. "으, 으……." 군웅들은 신음을 토하며 비틀비틀 물러났다. 몇 명은 다리가 얼어 붙은 듯 꼼짝 못한 채 오줌을 지렸다. 따라랑! 따랑! 명강량은 천음검을 가볍게 흔들며 얇은 쇠판이 울리는 소리를 냈다 . 그는 처참한 표정으로 서 있는 감악 등을 여유 있게 지나쳐 단원홍 앞으로 다가갔다. "이 놈은 나의 차지입니다!" 번천양장을 번뜩이려던 전우삼이 소리쳤다. 명강량의 눈빛이 새하얗게 빛났다. 며칠을 굶주리다가 피냄새를 맡 은 식인호(食人虎)의 눈빛 보다 더했다. 전우삼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비키지 않으면 명옹의 칼이 먼저 자신을 노리리라는 것을 알았다. 명강량은 단원홍을 마주 대하고 섰다. 단원홍은 검미를 좁혔다. 동정호의 일전 때 사매를 업고 달아나던 바로 그 자였다. 마옹, 명강량! 그러나 단원홍 역시 장문천처럼 별달리 놀라워하지 않았다. '사매가 또 재미있는 장난을 쳤군.' 그 느낌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강호의 소문 보다 마옹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정도……. 단원홍은 검을 들었다. 그러나 검을 든 순간, 그는 견딜 수 없는 살기를 느꼈다. 머리가 아득했다. 너무 흥분했기 때문에 심결까지 외어야 했다. 심 결이 그의 흥분을 천천히 가라앉혔다. 그는 살의만은 장검에 남겨 두 고 다른 것은 잊었다. 머리 속에 동관을 굽이치는 황하가 흘렀다. 황하는 크다란 이무기, 억만년 묵은 대망(大　)이다. 천화원을 나서기 전 그는 동관에서 십 합만에 그 대망을 잘랐었다. 보아하니 눈앞의 대망은 그 보다 더 크고 더 사납게 보였다. 십 합 을 허용하지도 않을 듯했다. 단 일 합……. 웅! 웅! 웅! 백년감일청이 황금빛 서리를 뿜어내며 울고 있었다. 우 - 웅! 웅 - 그 소리는 용음으로 점점 길어지고 거칠어졌다. 우르르! 전각이 흔들리고 세찬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배교의 총단을 뒤덮었다. 그러나 단원홍과 명강량이 선 자리 주변으로는 티 끌 하나 침입하지 못했다. 황금색 빛무리는 점점 농도를 더해 단원홍을 덮었다. 명강량도 개천양일진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는 붉은 빛무리 속에서 자신 외에 또 하나의 자신을 내놓고 있었 다. '양신(陽神)…….' 혜각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불가(佛家)가 천산을 넘어 중원에 들어오며 천축의 것만으로 남지 않았듯이 배교 역시 천산을 넘어오며 서국의 것으로만 남지 않았다. 특히 연기법(鍊氣法)은……. 옥심금화, 오기조원, 삼화취정, 적사귀신, 천화란주…… 그 현란한 용어들의 실현을 혜각은 이곳에서 볼 줄 몰랐었다. 그리고 혜각은 또 한 가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반선(半仙) 중에는 요기(妖氣)로 사람을 해하며 만세(萬世)를 누리 는 자가 있다고 한다. 반선에 이를 정도면 엄청난 수행을 했을 것이 다. 그런데 헛된 욕심이 남아 있다니……. 혜각은 그래서 요사스러운 반선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는 직접 보고 있었다. 구룡선주! 양신을 토해 내고 있는 자는 바로 그였다. 역시 진리는 천지간의 만물(萬物)을 관통(貫通)하기 때문에 진리인 가 보다. 깨치지 못한 자는 그 수련의 공이 아무리 높다고 하더라도 결국 깨 치지 못한 자일뿐이다! 정(正)이 높으며 마(魔)도 높다! 그래서 혜각은 언뜻 깨달았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 인가를……. 웅! 웅! 웅! 엄청난 경기의 폭풍은 계속 휘몰아치고 있었다. 군웅들은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들은 뒷걸음질을 치며 혈불(血佛)과 금불(金佛)의 개세일전(蓋世 一戰)을 눈이 빠져라 보고 있었다. 붉은 광채에 쌓여 있는 명강량은 혈불이었고 황금빛 원광(圓光)에 쌓여 있는 자는 단원홍이었다. 그들이 찾은 진리는 혜각과 조금 달랐다. 사필귀정! 단원홍이 이길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쥐떼처럼 서성거리는 그들을 위해 '정(正)'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인지. 츠츠츠츠……. 빛무리가 움직였다. 공전절후(空前絶後)의 대결이 벌어지려는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아저씨!" 날카로운 소녀의 목소리가 시간조차 정지시킨 침묵을 깼다. 예령이었다. "멈추세요! 아저씨!" 그녀는 소리쳤다. 그러나 명강량과 단원홍은 예령의 외침에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끝은 보아야 할 사이라는 것을 그들은 서로 알고 있었다. 웅 - 웅 - 웅 - 단원홍은 장검을 수직으로 그었고 명강량은 쌍장을 내밀었다. 그들 의 움직임은 단원홍이 전우삼과 싸울 때보다 더 늦었다. 너무 빨라서 느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조차 멈출만한 내력이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느렸다. 붉은 광채와 황금빛 광채는 점차 그 빛을 더해 갔다. 단원홍의 검이 명강량의 심장으로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강량 은 검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단원홍은 찰나지간에 눈을 깜박했다. 뚜둑! 후두둑……. 검에 미세한 균열이 일며 장검이 가루로 날렸다. 그리고 한순간에 붉은 광채가 황금색 광채를 압도했다. 군웅들은 빛이 너무 강해 눈을 가렸다. "아저씨!" 예령은 목이 찢어져라 다시 고함을 질렀다. 쏴 - 아! 붉은 광채가 황금색 광채를 가르며 기세 좋게 밀려갔다. 퍽! 둔중한 소리가 모든 것을 끊었다. 소리는 작았으나 흔들림은 전각을 휘청 기울게 할 정도였다. 빛무리는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 아……." 군웅들은 절망했다. "흐흐흐, 하하하하!" 터져 나오는 광소……. 능운공작은 잠을 청하는 사람처럼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핏자국도 없었고 눈도 맑게 뜬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누워 있고 대살성은 광 소를 터뜨리고 있었다. '아, 아……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는가?' 단원홍의 눈에 한천이 들어왔다. 호신강기가 잠깐의 생명은 붙여 주었으나 오래가지 못할 듯했다. 의식을 놓으면 다른 세계가 그를 맞 을 것이다. '길고 긴 세월이었다.' 그의 의식이 점점 흐려졌다. 그는 의식을 놓으려 했다. 그러나 문 득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났다. "아저씨!" 예령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지. 오, 오! 나의 귀여운 아기…….' 잊고 있었던 것은 예령이었다. 단원홍은 허공 중으로 흩어지려는 자신의 의식을 굳게 잡았다. 얼 굴은 제대로 한 번 보아야 할 것 아닌가. "아저씨……." 예령은 눈물을 흘리며 단원홍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명강량의 입가에 기인한 미소가 번졌다. "흐흐흐, 하하하하!" 그의 광소가 다시 터졌다. 휙! 명강량은 신형을 날렸다. 콰쾅! 쾅! 쾅! 폭음 같은 소리가 황산을 메아리쳤다. 일진각(一眞閣)이 박살나고 수심각(守心閣)이 박살났다. 감악과 장탄은 물론 전우삼의 눈빛에도 한광이 흘렀다. 애써 지은 총단…… 기왓장이 날 때면 살이 저미는 듯했고 기둥이 부러질 때는 뼈가 부르지는 듯했다. 감악은 신장도를 몇 번이고 들썩였고 전우삼도 주먹을 불끈 쥐었다 . "미쳐도 보통 미친 것이 아니군! 귀신이 들어도 더러운 귀신이 들 었어!" 전우삼은 결국 한 소리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차마 주먹은 들지 못했다.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전각은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 람의 마음에 한 번 금이 가면 다시 치유되기는 힘들다. 이미 금이 갔 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확인까지 하기 싫은 전우삼의 마음이었다. 배교도들은 이를 악물고 명강량의 난행(亂行)을 지켜보고 있었고 군웅들은 살기에 놀라 뒷걸음질을 치며 의아해 했다. 구룡선주는 배교도가 아니었는가, 왜 그는 미친 듯이 자신의 전당 을 부수고 있지? 궁금증은 나중에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구나. 놈은 파문을 당한 복수를 하려는구나.' 그 와중에 그 같이 생각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 역시 등을 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광마처럼 전각을 부수던 구룡선주가 뇌성 같은 고함을 지르며 달려 들고 있었다. "나를 막는 자는 누구라도 죽는다! 배교도라 하더라도! 으하하하!" 그가 비조처럼 군웅들을 덮쳤다. 혜각은 선장을 불끈 쥐었다. 당랑거철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항 마복마장(降魔伏魔杖)을 펼쳤다. 생각대로 명강량은 너무도 쉽게 그의 일장(一杖)을 비켜나며 붉은 장영을 뿌렸다. '끝이구나.' 혜각은 눈을 감았다. "크악!" "악!" 비명이 터졌다. 혜각은 눈을 번쩍 떴다. 명강량의 장은 그를 비켜나 달아나는 군웅 들의 등을 가격하고 있었다. '왜?' 혜각은 물었다. 그러나 그 역시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어쨌 든 대마두의 학살을 막아야 했다. 그는 다시 몸을 날렸다. "으악!" "악!" 비명은 계속 터졌다. 혜각은 명강량을 바쁘게 쫓았으나 명강량의 섬전 같은 움직임에 땀 만 흘리고 있었다. 달아나는 자, 쫓는 자! 배교의 총단은 아수라장이었다. 예령과 단원홍은 그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제 그들에게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너무 멀었다. "아저씨……." 예령의 눈물이 단원홍의 가슴을 적셨다. '울고 있구나. 우리 아기…….' 단원홍은 가슴이 아팠다. 머리를 쓰다듬고 껴안아 주고 싶었으나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웃음을 보이려 했으나 입술도 말을 들 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결국 눈동자로 모든 이야기를 했다. 예령을 안아 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주고……. 정말 알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귀여운 아이를 죽일 생각까지 했는 지. "아저씨…… 엉! 엉! 엉!" 예령의 눈물은 강을 이루었다. 단원홍의 가슴은 속까지 질펀하게 젖었다. '우리 아기, 우리 아기…….' 만족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울어 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자, 예령 이제 가야겠다. 내 어미가 말했지. 영원한 이별은 없다 고…… 잠깐 다른 곳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겠다.' 눈까풀이 무거웠다. 단원홍은 먼길을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순간, 단원홍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크하하하! 으하하!" 광란으로 질주하는 저 자! 어쩌면, 어쩌면 세상의 종말을 위해 태어난 저 자가 예령의 목숨까 지 가져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라! 이 피냄새……. 예령이 자신을 위해 앙증맞게 내지를 주먹도 진정 저 자는 복수의 칼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자였다. 사매를 농간했던 저 악인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았다. 맹렬한 적개심과 함께 조급함이 그의 가슴을 태웠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아!' 단원홍은 탄성을 터뜨렸다. 기억났다. 왜 그 기억을 하지 못했을까 ? 꿈에도 떠올리기 싫어 머릿속 깊이 파묻어버렸던 기억이기 때문에 잊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었지, 그랬어.' 생각하니 예령이 떠나간 사실에 대해 죽이고 싶도록 배반감에 몸을 떤 이유는 배교 때문이 아닌 듯했다. 바로 그 기억! 그 기억 때문이 었다. 그 기억 때문에 마옹을 상대로 검을 든 순간 자신까지 붕괴시 킬 듯한 살의에 시달렸다. 죽음과 함께 묻어 버리려던 치떨리는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기억을 이제 누구에게 말해야 했다. 그 기억을 가장 밝히기 싫은 자 에게…… 예령을 위해……. 단원홍은 전신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예령에게 쏟고 있던 그의 모든 힘을 모았다. 다행히 작자는 그를 향해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천음검에 묻어 있던 한 방울의 피가 뚝 떨어졌다. 명강량은 자신은 원래 어눌한 자라 연희에는 재질이 없다고 생각했 다. 그런데 의외로 그의 몸과 천음검은 썩 연희를 잘 이끌어 가고 있 었다. 지난밤 내내 생각했다. 떠나기 전에 교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 가? 감악의 소원이 제일 다급한 듯했다. 구룡선주는 배교의 이단자( 異端者)이고 살귀에 불과한 자라는 것……. 그래서 전각을 부수고 천음검에는 피를 듬뿍 묻혔다. 악약이 보았으면 자신의 연기(演技)를 칭찬하리라. 하지만 다시 생각하니 자신이 썩 연기를 잘한 이유는 연희가 아니 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단자가 아니고 살귀가 아닌가? 아무래도 맞는 듯했다. 그러나 연희든 사실이든 무엇이든 어쨌든 상관없었다. 그는 이제 어린 성녀를 위해 한 가지의 일을 더할 생각이었다. 짧 은 기간 좋지 못한 모습만 보였지만 마음 착한 어린 성녀가 어쩌면 자신을 마음에 티끌만큼이라도 담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티끌까지 없앨 생각이었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깨끗이 지우도 록……. 명강량은 천음검을 들었다. 팟! 천음검이 날아간 그 순간 명강량의 귀에도 무엇인가가 날아왔 다. 단원홍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 재접봉의 일을 생각하라! 예령은 너의……. 단원홍의 전음은 그곳에서 끊겼다. 무정한 천음검이 단원홍의 심장을 깨끗이 꿰뚫은 것이다. 천음검이 단원홍의 피를 떨구며 천음관 속으로 사라졌다. 기이하게 심장이 꿰뚫리자 비로소 단원홍은 웃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예령을 감쌌다. 잠깐! 아주 잠깐……. 단원홍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명강량은 문득 그가 부러웠다. 단원홍의 모습은 죽은 자의 모습이 아니라 좋은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자의 모습이었다. 예령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예령은 단원홍의 가슴에 귀를 대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 다. 그 울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죽은 자의 시신은 체온이 식기 전에 곱게 펴 주어야 한다. 잘못하 면 입관(入棺)을 위해 망자(亡者)의 굳어 버린 몸과 팔을 바로 하려 다가 육신을 훼손할 수도 있으니……. 예령이 그것까지 알까만은 그녀는 머리칼 한 올까지 단정히 단원홍 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령의 큰 눈동자가 명강량의 눈동자에 닿았다. "악마!" 에령은 와락 고함을 지르며 명강량에게 달려들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명강량을 난타했다. 명강량은 가만히 맞고만 있었다. '그 작자가 무슨 말을…….' 단원홍이 던진 말에 골몰했다. 어린 성녀가 어떻다는 말인가? 어감 (語感)이 심상치 않았다. "악마! 악마!" 예령은 명강량을 난타하며 다시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감악이 다가왔다. 그는 예령의 손을 잡았다. "놓으세요!" 예령이 감악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앙! 앙! 앙!"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단원홍의 시신은 미소로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엉! 엉!" 예령은 단원홍의 시신에 은빛 가루를 뿌렸다. 그리고 수인(手印)을 맺듯 손을 모으고 몇 번 단원홍의 시신 위를 쓰다듬었다. 단원홍의 시신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단원홍의 시신은 삽시간에 재로 변했다. "앙! 앙! 단 아저씨……." 예령은 팔을 벌렸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재로 남은 망자의 잔해를 사해팔황으로 흩 날렸다. "엉! 엉! 엉!" 예령이 눈물을 떨구며 광명정을 내려갔다. 감악은 충혈된 눈으로 명강량을 거세게 쏘아본 후 급히 예령의 뒤 를 따랐다. 신화정이 따랐고 장탄이 따랐고 고명상이 따랐고 유공경이 따랐다. 명강량이 떠나기로 한 총단을 그들이 하나, 둘씩 떠나고 있었다. 의외로 가장 망설이리라 생각하던 아란하는 감악에 앞서 예령을 따 라가고 있었다. 전우삼이 다가왔다. "나도 가야겠소. 다른 이유는 나중에 따져 보아야 할 것 같고…… 지금 떠나는 이유는 성녀를 지키기 위해서요. 어린 성녀를 노리는 개 떼들이 한둘이어야 말이지. 십위병은 잔일을 시키기 위해 내가 데려 가겠소. 사방위와 삼십육호교사는 총단을 지키기 위해 남겨 두겠소."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전우삼도 떠나갔다. 휘 - 잉! 휭! 모여든 군웅들은 이미 뿔뿔이 흩어졌고 사람이 줄어든 만큼 삭풍이 거세게 모여들었다. 명강량은 모두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석상처럼 서 움직 이지 않았다. * * * 떠난 자는 돌아오지 않고 떠나야 할 자는 남아 있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광명정을 지키고 있는 거대한 전각들……. 주인 없는 전각들은 으스스함을 풍겼다. 명강량은 며칠 전의 그 자리에 여전히 누워 있었다. 이 상태로 죽 는다면 틀림없이 창귀(　鬼)가 될 것이 뻔했다. 파문이란 어떤 것인가? 막상 당하고 보니 뿌리를 잃은 것과 같았다 . 모든 것이 둥둥 떠다녔다. 사박! 사박! 귀에 익은 눈 밟는 소리였다. 양백…… 무슨 이유인지 그는 떠나지 않고 있었다. 곡기(穀氣)를 끊은지 오래인데도 음식을 꼬박 날라다 주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오는 것은 이상했다. 끼니를 챙길 때가 아직 아니었다. "눈이 많이 옵니다." 양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어제 유 명두와 십위병 몇 명이 왔습니다. 어린 성녀의 부탁을 받 고 왔다는군요. 청정원에 놓아둔 물건을 찾으러 왔답니다. 화령주와 보화로 장식된 단검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명옹께는 이 물건을 전 해 주라고 하더군요." 그가 예령이 항상 들고 다니던 함을 명강량의 발치에 놓았다. "어린 성녀께서 그 물건은 원래 명옹의 물건이었다고 합니다. 성녀 께서 주라고 한 물건이라 하더군요. 줄 기회를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고 이제야 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명강량은 악약이 남긴 물건이라는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양백은 알고 있었다. 명옹의 마음이 온통 함에 가 있을 것임 을……. "어린 성녀께서는 잘 계신다고 합니다. 겨울을 보내기에 좋은 곳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걱정하지 말라고 유 명두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유 명두는 명옹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남을 죄송하다고 전하라 하더이다. 감 명두, 아니 이제 호교신장이 되었지요. 당금 호교신장 께서 절대 전대 명옹을 찾지 말라는 명을 내렸다고 합니다. 전교영기 로 내린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양백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명강량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양 명두도 떠나시오. 그대도 교도…… 전교영기를 거역한 자는 책 임을 면할 수 없소." "나는 교법 보다 성녀의 말씀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일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저는 성녀로부터 받은 명이 있습니다 ." "죽은 자를 위해 산 자의 삶의 구속하려 들지 마시오." "내가 보기에 죽은 자에 더 구속당하는 사람은 명옹 같습니다. 허 허허!" 양백이 사람 좋게 웃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에 더 영향력을 미칠 때가 있지요. 죽은 자는 항상 좋은 것만 기억하게 하니…… 아! 그리고 나는 성녀 를 죽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허리를 펴며 말했다. "양 명두의 말이 옳을 지도 모르겠소." 명강량은 눈발이 거세게 휘날리는 허공을 응시했다. 그는 양 명두 가 점점 자신이 상상하던 광명신장의 모습과 닮아 간다고 생각했다. '광명신장은 어떻게 광명신장이 될까?' 듣기에 광명신장은 이름이 없다고 했다. 그저 광명신장은 광명신장 일 뿐이다. 얼굴도 중요하지 않고 개인적인 생각도 없다. 전대 광명 신장으로부터 심득(心得)과 교의 비밀을 얻은 후 얼굴만 빼고 전대 광명신장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고 한다. 때 문에 광명신장의 생명은 영원불멸로 성녀들에게 비춰진다고 했다. 풍상에 시달린 바위처럼 묵묵한 모습…… 광명신장의 높고 높은 덕(德)을 모르지만 만약 차기 광명신장이 될 자가 있다면 그는 양백 이상의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양백은 온갖 세상의 풍파를 다 겪은 후 비로소 자신의 얼굴을 찾았으니……. "마음을 편하게 가지십시오. 나고 죽는 것이 하늘의 이치라면 그 이치만큼의 몫은 하늘에 책임을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편히 쉬십 시오." 양백은 포권을 한 후 눈발 속으로 걸어갔다. 명강량은 한동안 천공을 휘날리는 눈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격 공섭물로 어린 성녀가 보낸 함을 취했다. 명강량은 함을 가슴에 놓고 호흡을 골랐다. 느껴졌다. 어린 성녀의 체취……. 가슴이 애잔한 파도로 일렁였다. 그는 함을 열었다. 또 다른 체취가 그의 숨을 막히게 했다. 너무도 반갑게 그를 반기 는 체취였다. 목을 껴안고 매달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악약의 체취였다. 명강량은 함 속에 든 물건을 꺼냈다. 목이 꽉 메였다. 비천쌍마! 약약의 부탁을 받고 거친 손길로 자신이 다듬어 만든 그 비천쌍마였다. 악약의 독촉에 미쳐 한쪽 날개를 완성조차 하지 못하고 넘겨주었다 . 그런데 이제 한쪽 날개도 다듬어져 있었다. 악약이 손을 댄 듯했다 . 명강량은 감회에 시달리며 비천쌍마를 꽉 쥐었다. 갑자기 비천쌍마 가 그의 머릿속을 질주했다. 온갖 영상들이 뒤죽박죽 살아났다. 악약과의 날들이 스쳐 갔고 재 접봉, 재접봉에서……. '허헉!' 명강량은 헛신음을 토하며 비천쌍마에 급히 손을 뗐다. '말도 안되는…….'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십 몇 년 전 모산에서 일어난 일들을 가만히 되돌렸다. '재접봉에서.…….' 당연한 일로 기억이 없었다. 모산에서 단원홍에게 일장을 맞은 후 의식을 잃었으니…… 단원홍을 떠올리자 그는 단원홍이 죽기 전에 남 긴 말도 생각났다. - 재접봉의 일을 생각하라! 예령은 너의……. '예령, 어린 성녀는 나의 무엇이란 말인가?' 비천쌍마가 불러온 기억과 뒤섞여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더했다. 명강량은 비천쌍마를 함에 도로 넣었다. 아무래도 재접봉에는 한 번 갔다와야 할 것 같았다. 폐허에서 일어났다. 명강량의 신형이 눈발 속을 움직였다. 황산에는 눈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러나 강남에서 눈을 보기는 흔 치 않다. 명강량은 강남의 겨울을 걸어 모산에 이르렀다. 그리고 재접봉을 올랐다. 양백이 세운 악약의 위령비가 보였다. 위령비를 지나 정상으로 향했다. 정상으로 향하는 와중에 그는 작 은 동부 하나를 발견했다. 그의 발길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동부로 향했다. 동부에 발을 들인 그 순간이었다. 비천쌍마가 언뜻언뜻 보여주던 모든 영상들이 질서정연하게 되살아 나 그를 덮쳤다. 재접봉에서, 재접봉에서……. 그들만의 축제가 기억 속으로 되살아났고 어린 성녀의 탄생의 비밀 도 알았다. 명강량은 전신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 해야 할 지 몰랐다.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어야 좋았는지 없었어야 좋았는지도 몰랐다. 신성을 능욕한 자! 두려웠다. 한 편으로는 견딜 수 없는 벅찬 희열도 느꼈다. 동부에서 뜬눈으로 꼬박 하루를 묵었다. 그리고 그는 황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락국으로 걸어 갈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실혼인과 같은 모습이이 었다. 멍하니 발길을 옮겼다. 황산에 내리는 눈은 여전했다. 폐허가 된 대화로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지친 듯 털썩 몸을 눕혔 다. 며칠을 뒹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고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본 마음을 찾은 것이다. '원하던 일이었어. 잘 된 거야.' 악약과 신성으로 결합하기보다는 사람으로 결합하기를 쭉 바래 왔 었다. 비록 의식밖에 이루어진 결합이지만 악약의 마음 역시 그의 마 음과 같았다는 것을 동부에서 확인했기에 기뻤다. '촌각의 지락(至樂) 때문에 만 년을 얼음굴에 있다고 한들 어떠하 리…… 나는 만 년 동안 그 얼음굴에서 촌각의 지락을 생각하며 기뻐 할 것이다.' 신성을 모독한 죄로 도산검림에 놓여진다고 하더라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명강량은 함을 열었다. 비천쌍마가 그를 반겼다. 자신과 악약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이 난 듯했다. 그럼 남은 일은……. 양백을 불렀다. 제39장 비천(飛天) 낙조는 뚫어지게 양백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예령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성녀들에게만 내려오는 비법이지요. 다른 자는 비법 을 안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없습니다. 성녀의 신령스러운 힘과 성녀 의 성스러운 피만이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네. 나는 그런 비법이 있다는 것을 어머니로부터 듣지 못했 는데……." 예령은 고개를 갸웃했다. 낙조도 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경황이 없었을 것입니다. 비법을 전해 주기까지…… 다행스럽게 내가 옛 청정원의 터에서 그 비법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혔겠지요." 예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이 무척 재미있어 보였든지 낙조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예령은 여전히 반신반의했다. 경황이라는 말은 자신과 어머니를 이 야기하는 말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어린 성녀시여.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다면 수천 명의 목숨이 사라지게 됩니다." 양백은 지긋이 눈을 감았다. "알았어요. 믿겠어요. 양 할아버지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잖아요." 예령이 말했다. "할아버지? 껄껄껄! 고맙습니다. 이 늙은 것을 그렇게 친근하게 불 러 주시어. 어린 성녀시여. 이제 모든 것은 잘 될 것입니다. 마음을 놓고 기다리십시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양 할아버지, 그…… 그 는 어떻게 지내요?" 예령이 명강량에 대해 물었다. 조금 심술궂은 표정이었다. "옛 대화로 터에 파묻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곧 떠나 겠지요. 남은 구파일방을 시작으로 하나, 하나 강호를 멸화(滅火)에 빠뜨릴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감 아저씨에게 이야기해서 곧 조 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령은 아미를 찌푸렸다. "좋은 날 내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양백은 머리를 숙였다. 그는 예령이 머무는 목채를 빠져 나왔다. 새야, 새야, 어리석은 새야 콩밭에는 왜 내려앉았니 어리석게 굴다가 그물에 걸렸구나. 어린 성녀의 흥얼거리는 노래가 등 뒤로 들렸다. 양백의 앞에는 백설에 덮인 수십 개의 봉우리들이 우아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전대 성녀가 태어나고 전, 전대 성녀가 뼈를 묻은 곳…… 황산과 같이 안휘성에 자리잡은 구화산이었다. "무슨 말씀을 드린 거예요?" 목채를 나오는 양백에게 아란하가 다급히 물었다. 목채 밖에는 아 란하 뿐만 아니라 감악, 전우삼도 서 있었다. "허허허! 내가 어린 성녀와 나누는 말을 못 들었다고 하지는 않으 시겠지요? 들은 그대로 이외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요." "아란하라고 했지요. 아란하, 이해할 수 없다면 그냥 덮어두시오. 누구도 이 일이 꼬치꼬치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다오. 어차피 상처는 감수해야 할 일이니……." 양백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또 둘러봐야 할 곳이 있습니다. 바빠서……." 그가 휘적 구화산을 내려갔다. "이봐! 이봐! 양 명두……." 전우삼이 다급히 그를 불렀다. 그러나 양백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전우삼은 그를 붙잡기 위해 신형을 날리려 했다 감악이 그의 팔을 잡았다. "양 명두로부터 더 이상 들을 말은 없을 것이오. 조금 더 생각해 봅시다." 그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도대체 저 자는 무슨 일을 꾸리며 하는 거야?" 전우삼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감악과 아란하는 아무 말도 않았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휭하니 자신의 거소로 돌아갔다.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겠다는 거야!" 팟! 전우삼은 장도를 번뜩였다. 단원홍과의 일전 이후 병기의 중요 성을 새삼 깨닫고 마련한 장도였다. 장도는 아름드리 나무를 단숨에 잘랐다. 우르르르……. 콰쾅! 아름드리 나무가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흥! 웃기는 이야기를 다 듣겠군! 비법! 누구는 초대 명옹의 무공 을 익히지 않은 줄 알아!" 전우삼은 와락 고함을 질렀다. 생각할수록 화가 나고 울화가 치솟았다. "정말 귀신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 양 명두, 그 주책 맞은 늙은 이는 또 왜 그 난리야!" 콰쾅! 쾅! 전우삼의 장도에 애꿎은 나무들만 잇달아 쓰러졌다. 그런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껏 그 같이 행동했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롱당하는 느낌도 들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잖아! 강호의 놈들도 모두 우리에게 그 렇게 했어! 왜 우리만 죽을죄를 지은 자처럼 책임을 지려 드는 게야! 헤헹, 혼자서 잘난 척을 할 생각을 하셨구먼. 내가 내버려두는가 봐 라!" 그는 고함을 지르며 구화산의 나무들을 다 쓰러뜨릴 듯 날뛰었다. 쾅! 콰쾅! 쾅! 전우삼이 발악적으로 나무를 쓰러뜨릴 때마다 감악의 가슴은 쿵! 쿵! 뛰었다. 매질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감악은 물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는 호교 신장이다. 감정을 앞세워 일을 그르칠 수 없었다. 예정된 순서대로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양 명두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험한 일을 자처했을 것이다. 그 의 말이 맞다. 어차피 감수해야 할 상처다. 지켜보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듯했다. 미안한 일이 있다면…… 잠깐 동 안이라도 그를 의심한 것! 잘못을 빌 기회는 마련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동안 목채에 앉아 있던 감악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웃옷을 벗고 도끼를 잡았다. 잡일에 정신을 팔지 않으면 자칫 감정에 호소당해 판을 깨버릴 지 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팟! 그는 도끼를 힘차게 내리꽂았다. 쾅! 콰쾅! 아란하는 견딜 수 없었다. 귀를 막았다. 그러나 전우삼이 나무를 난도질하는 소리는 귀를 막았는데도 더 크게 들렸다. 그녀는 귀에서 손을 뗐다. 전신에 맥이 쭉 풀렸다. 모르는 자는 없었다. 대전왕이 어떤 길을 갈 것인가를……. 감악, 전우삼, 그녀까지……. 그런데 왜 아무도 성녀를 찾아가지 않는가? 이미 오래 전에 막연하게 예감을 했고 근자에 그 예감대로 일이 진 행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 침묵하고 있는 것 인가? 아마 그 말이 맞을 듯했다. 누 천 년 쌓인 배교의 한! 대전왕은 그것을 풀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이후다. 강호에 뿌린 피를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각자는 오랫동안 고심했을 것이다. 대안이 없었다. 대안이 있었다면 그 길을 갔을 것이다. 대전왕 역 시 어떤 대안도 보여주지 않았었다. 감악은 화를 냈고 교도들은 불안해했다. 해법을 찾아 주어야 할 대 전왕은 밑도 끝도 없이 오히려 더 달리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감악이 내린 선택은 '파문!'이었다. 하지만 파문이 눈 가리 고 아웅하는 이상의 것으로 강호인에게 보이지 않으리라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대전왕이 해법을 냈다. 아란하는 참으로 기막힌 발상이라 생각했다. 성녀를 끌어들이는 일 만은 마음에 걸렸지만……. 그러나 그만큼 효과도 클 것이다. 그렇게 대전왕은 자신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침묵의 동의 속에 자 신을 정리하려 하고 있었다. 누구도 말리지 못할 것이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누구도 말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교의 미래가 걸려있고 무엇 보다 성녀의 안위가 걸려 있기에……. 대전왕의 운명은 이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럼 나는?' 아란하의 괴로움은 그것이었다. 십 몇 년의 기다림이 너무도 허망 했다. 그녀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창 밖만 응시했다. 그리고 부스스 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대전왕을 만나 보고 싶었다. 만나면 십 몇 년 세월에 대해 어떻게 보상해 줄 것인가를 항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만날 생각을 억눌렀다. 대전왕의 마음에 불편한 마음을 남기기 싫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녀의 목채로 향했다. 아무 소리나 지껄여야 밤을 넘길 것 같았다. * * * "잘 왔네." 혜각은 평소와 같은 얼굴로 양백을 맞았다. "황산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겠지?" 양백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사를 걸고 싸움을 준비하는 사이 같지가 않았다. "허허허! 싸움을 말리고 싶은가? 나도 싸우기는 싫네. 구룡선주라 는 자는 너무 강하단 말일세. 나는 깨치지 못한 자라 아직 목숨에 대 한 애착이 많다네." 혜각이 웃으며 말했다. "구룡선주…… 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일세. 누 천 년 쌓 인 우리 교도들의 한이 암왕을 불렀지. 자네가 구룡선주라 부르는 그 는 바로 암왕의 현신이자 암왕의 피를 받은 자일세. 누가 그를 꺾을 수 있겠나?" "암왕이라니……." "명왕에 맞서 세상의 반인 어둠을 지배하는 자!" "양백, 나는 자네 말이 조금 공허하게 들린다네." "그럼 편한대로 생각하게. 우리 교의 이단, 암가의 후예 정도로… …." "암가의 후예라…… 배교에도 이단이 있었나 보군." "이단이 별 것이고 정사(正邪)의 차이가 별 것인가? 마음 하나의 차이로 나뉘어 지는 것인데…… 허허허!" 양백은 웃었다. "양 보주는 너무 가볍게 말하지 마시오! 마음 하나의 차이라 별 것 이 아니라니…… 그 마음 하나의 차이가 수 천명의 목숨을 뺏어 갔소 !" 등중용이 소리쳤다. 양백을 만나고 있는 자는 혜각뿐만 아니었다. 현청, 일진, 이건, 등중용도 함께 자리를 하고 있었다. "내 말이 그렇게 들렸다면 용서하시오. 등 방주. 마음 한 번 돌리 면 피안(彼岸)이라는 이 친구 개조(開祖)의 말로 대신하겠소. 허허허 !" 양백은 세존(世尊)을 들먹이며 험한 분위기가 연출되려는 것을 급 히 막았다. "그래 나를 찾은 이유는 무엇인가?" 혜각은 친구를 위해 급히 말을 본론으로 돌렸다. "싸움을 멈추고자 하네." "뭣?" 등중용을 비롯한 장문인들은 양백의 의외의 제안에 놀라 서로의 얼 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사파 척결의 함성을 높이 지르고 있기는 하지 만 칼자루를 쥔 쪽은 누가 뭐라도 배교였다. 싸움을 더 걱정하는 쪽 도 그들……. 능운공작의 죽음 이후 의기는 더욱 꺾인 상태였다. "지금까지의 일만 잊어 준다면 아무런 조건 없이 물러가겠네. 하오 문이라 불러도 괜찮고 마교라 불러도 괜찮다. 눈에 띄는 것이 보기 싫다면 황산 총단을 폐쇄하고 원래 우리에게 익숙한 자리로 돌아가겠 네." 칼자루를 쥔 자가 제시하는 조건으로서는 놀라운 조건이었다. 장문인들은 생각에 잠겼다. 군소방파들로부터 줄줄이 충성의 서약 을 받고 강호의 패자가 되기 일보직전인 배교였다. 그런데 그들이 유 리걸식(流離乞食) 운운하다니…….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소! 또한 다른 조건도…… 우리는 어떤 경우라도 배교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을 것이오!" 이건이 냉랭하게 말했다. 열세라 싸움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명분이 없었다. 이대로 싸움을 멈춘다면 강호인들은 모두 배교의 실력에 굴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배교가 건재하므로 그들이 내건 사파 척결의 기치도 건재해야 하는데 돌연 깃발을 내리게 됨으로……. 그리고 죽은 사형제들의 복수도 해야 했다. 실컷 두들겨 맞고 난 후 청하는 화해에 웃는 자만큼 바보가 또 어디 있을까. "조금 여유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양 보주, 갑자기 조건까 지 달고 화해를 청하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혜각이 물었다. "믿지 않을지 모르지만…… 원래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았네. 전 대 명옹, 아니 구룡선주라 이야기하는 것이 더 편하겠군. 전대 명옹 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달라진 게야. 암가에 대해 방금 말한 적이 있 지. 죽은 줄 알았던 구룡선주, 그가 우리 교의 전설로 남아 있던 암 가의 무공을 익히고 돌아왔다. 혜각, 십 몇 년 전의 일을 기억하나?" "유향경천문에 의해 주도되었던 배교 타파를 위한 싸움 말인가?" "알고 있군. 그 싸움이 벌어진 이유는?" "질문이라고 하시오! 십 몇 년 전에는 배교가 사파가 아닌 줄 알았 소? 물론 그때는 마교가 아니라 하오문으로 줄곧 불렸었지!" 등중용은 비아냥거렸다. "등 방주, 내가 보기에 개방은 조금 기회적(機會的)인 방파인 것 같소. 사파를 타파하는 성전에 개방은 그때 왜 나서지 않았소? 물론 우리 교도들은 그 일에 감사하지만……." "흥! 마교라면 몰라도 하오문을 상대하는 데 우리까지 나설 이유는 없었지!" 말은 그렇게 했으나 등중용은 조금 켕기는 바가 있었다. 사숙, 사 숙조 중에는 배교도와 친분을 가진 자가 적지 않음을 그는 알고 있었 다. 그가 따랐던 사백조만 하더라도 배교를 사파라 단정 짓지는 않았 었다. "허허허! 하오문을 처치하는 일에 개방은 나서지 않았는데 구대문 파는 체면 없이 나섰군요. 어쨌든 사파이니 아니니는 더 이상 이야기 하고 싶지 않소. 사파라 불러도 괜찮다고 했으니…… 나는 잠시 십 몇 년 전에 유향경천문의 주도 아래 이루어졌던 우리 교에 대한 공세 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오. 우득용이라는 자를 아시오?" 양백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미 죽은 그 미천한 늙은이 이름은 왜 꺼내는 것이오!" 등중용은 양백의 말에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고함을 질렀다 . "이 나라를 몇 십 년간 좌지우지한 자이외다. 물론 기억하시겠지요 . 그럼 풍도란 자는?" "알고 있소이다." 이건이 말했다. "조금 이상한 작자들이었지. 어느 날, 한순간에 멸문의 길을 걸었 지만…… 양 보주, 당신들이 한 일이 아니오? 왜 배교도들이 모산파 를 노렸을까 하는 궁금증은 아직도 있소." 일진도장의 말이었다. "우리가 모산파를 없애려 한 것은 사실이오. 그러나 우리는 모산파 를 없애지 못했소. 모산파를 잿더미로 만든 것은 유향경천문이오." "그런 일이……." 혜각을 비롯한 장문인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우득용, 모산파, 풍도의 이야기는 왜 꺼내시오?" 침묵을 지키고 있던 현청도장이 물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말을 믿고 믿지 않고는 전적으로 장문인들 의 몫이외다. 사실을 확인하려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오. 강호에 영 원한 비밀은 없으니…… 그때 입을 굳게 다물라고 명을 받은 자들도 세월의 흐름 속에 입을 열 수도 있을 테고 당시 모산파의 문도들 중 요행히 살아 있는 자도 찾아보면 찾을 수 있을 것이오. 그에게도 물 어 보시오." 양백은 자신의 말에 대해 제기될 의문에 미리 못을 박았다. "십 여년 전 유향경천문의 주도 아래 자행되었던, 우리가 보기에는 분명 그러하네. 자행되었던 우리 교에 대한 공격은 구전지단이라는 불사의 약을 원한 우득용과 그 약을 만들던 풍도와 모산파, 그 약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우리 교의 꺼지지 않는 불 화령주를 탈취하기 위 한 유향경천문, 유향경천문에 멋모르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한 구대문 파와 군소방파가 저지른 일일세!" 줄곧 화색(和色)으로 앉아 있던 양백의 안색이 달라졌다. 부화뇌동 이라 말할 때는 한광까지 번뜩였다. 그 기세에 눌려 부화뇌동이라는 말에 반발하려던 이건과 등중용은 입을 닫았다. "모산파의 전각을 중건할 때의 일이었지. 삼모군의 비법이 적힌 녹 각이 나왔다." 양백은 그 말을 시작으로 십 여년 전에 벌어졌던 강호의 비사(秘事 )를 쭉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양백의 입에서 숨겨진 이야기들이 하나씩 들추어질 때마다 혜각을 비롯한 장문인들의 안색은 점점 굳어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 아니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싶은 것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양백의 말이 맞다면 자신들은 무엇인가? 그 더러운 작자들의 농간 에 씻을 수 없는 희롱을 당한 꼴이었다. "……결국 그렇게 모산에서 우리 교는 전멸을 당하다시피 했다네. 유향경천문이 왜 모산파까지 없애야 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삼모군의 녹각을 둘러싼 우득용과 모산파의 갈등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것이 우리들 생각이지만……." 양백은 그 말은 끝으로 십 여년 전의 긴 이야기를 끝냈다. "아미타불!" 혜각은 탄식 섞인 불호를 욌고 다른 장문인들은 침묵했다. "혜각, 나는 자네가 나를 실없는 이야기나 지어낼 사람으로 보지 않으리라 믿네. 모두 사실일세. 그 어처구니없는 일로 우리 교는 엄 청난 고통을 겪었네. 비겁하게 그 고통을 피해 나는 장사를 구실로 천축으로 떠났을 정도였다네. 그 때문에 얼마 전까지 우리 교의 이단 은 바로 나였지." 양백은 한숨을 쉬었다. 장문인들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유야 어쨌든 결국 사파를 처치한 일이니 잘한 일이었다고 자위하기도 했고 양백의 말을 부정하려고도 애썼다. 그러나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지 는 못했다. 사파가 사파라 하더라도 풍파를 일으키지 않은 한 아직 죽일 자는 아니다. 가만히 있던 자에게 칼을 들이미는 짓은 강호의 예법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고 세상의 이치에도 합당한 일이 아니었다 . 그럼 그 일로 죽은 자들은……. 책임을 모면할 말들이 궁색했다. 양백이 그 순간, 바로 그들의 아픈 곳을 찔렀다. "명옹, 아니 자네가 구룡선주라 부르는 그분은 바로 그때의 명옹이 셨다. 우리 교의 호교신장! 기분이 어쨌을 것 같은가? 여기 계신 분 들에게 물어 보는 것이 낫겠군. 구룡선주에게 사형제와 제자를 잃은 기분이 어떠셨소?" 양백의 물음에 이건과 등중용은 본능적으로 한광을 번쩍였다. 양백 에 대한 살의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혜각, 일진, 청정도장은 각자 의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마 모두 내가 먼저 죽었다라면 하는 마음일 것이오. 우리 명옹 의 마음도 그러했다오. 가슴의 한은 커져 갔지. 그리고 그 와중에 결 국 성녀까지 죽었소. 그대들이 마녀라 부르는 우리들의 성녀…… 기 억해 주시오. 비록 그대들이 마녀라 하더라도 우리 배교도들에게 성 녀는 하늘, 땅 보다 더 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양백의 노안이 흐려졌다. 짙은 무심함이 그를 감쌌다. 혜각은 알았다. 양백이 무척 격양되어 있음을…… 양백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때 무심함으로 곧잘 자신을 치장했다. "성녀의 죽음을 들은 명옹의 기분은 명옹만이 알겠지. 명옹이야 말 로 성녀를 지킬 책임을 부여받은 자이니…… 그 즈음 강호에는 명옹 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 온 모양이오. 그러나 명옹은 죽지 않았소. 바로 그때 명옹은 성녀를 죽인, 교도들을 죽인 한을 풀고자 암왕을 찾고 있었소." 양백은 구룡선주라 부르겠다는 약속을 깨고 명강량을 명옹이라 부 르고 있었다. 누가 뭐라도 양백에게 명옹은 명옹이었지 구룡선주는 아니었다. "암왕, 암가의 무공을 얻었소. 그리고 돌아왔소. 중원으로 돌아오 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겠소? 파멸…… 모두 죽이겠다는 마음밖에 없 었소. 그는 복수를 위해 자신의 영혼은 암왕에게 바쳤던 것이오. 나 는 자신 있게 말하리다. 명옹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눈이 있는 사람은 보았을 것이오. 혜각, 능운공작이 명옹의 상대가 되었 다고 생각하나?" 양백의 물음에 장문인들의 시선은 일제히 혜각에게 쏠렸다. 구룡선주의 무위를 직접 본 사람은 혜각이 유일했다. 그들은 혜각 이 양백의 말에 고개를 젓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양 보주, 자네는 우리를 위협할 생각으로 왔는가?" 혜각의 말이었다. 장문인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금적보주의 말이 틀림없는 듯했다. 다시 걱정이 구름처럼 밀려왔다. "위협할 생각으로 오지 않았네. 그런 생각으로 왔다면 조건 운운하 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십 여년 전에 너희도 난동을 저질렀으니 이제 지금 우리가 벌인 난동도 잊어 달라 이 말인가?" 혜각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 조건에 대해서는 그도 이건과 같 은 입장이었다. 그 조건에 찬성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구파일방이 쌓 아 온 명예를 내놓는 것과 같았다. "공평한 일이지! 하지만 싸움을 멈추려 하겠나?" 혜각 못지 않게 양백도 미간을 좁히며 소리쳤다.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싸울 것이다!" 등중용이 소리쳤다. 서로 언동(言動)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듯했다. "허허허! 허허허허……." 양백이 돌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장문인들은 안색을 찌푸렸다. "등 방주, 나는 그대에게 싸움을 할 것인가를 묻지 않았소. 미안한 말이지만 여기 계신 분들이 창검을 드는 데에 대해서는 나는 전혀 걱정을 하지 않는다오. 자신 있는 분은 가서 싸우시오. 명옹의 한 합 이상을 받아 낼 사람이 있다면 나의 목을 주겠소. 다녀오시오. 내 목을 여기 두고 있을 테니…… 허허허!" 양백은 자신의 목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이건과 등중용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당장 광명정으로 달려가 려 했다. 일진과 현청이 그들을 잡았다. "싸우겠다느니 싸우지 않겠다느니 하는 말은 그대들이 할 말이 아 닌 것 같소. 허허허!" 양백의 조롱은 지독했다. 촌로와 같이 어수룩한 모습의 양백이었다 . 그러나 그가 분노로 입을 열자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따로 없었다. 이건과 등중용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이 자리가 자신들의 소굴이라도 체면만 아니라면 당장 양백의 목을 비틀어 주고 싶은 것 이 그들의 마음이었다. "양 보주, 격장지계를 쓰지 않아도 여기 모인 분들은 자네의 말을 알아들을 사람일세. 조용히 이야기함세. 아미타불! 장문인들께서도 앉아 주시오." 혜각이 평색을 찾으며 말했다. 이건과 등중용은 비로소 자신들이 양백의 화술(話術)에 말려들고 있음을 깨달았다. 상대의 마음을 뺏기 위한 첫 번째 술수는 상대의 평정심을 잃게 하는 것이다. '하긴 맨 주먹으로 천하제일거부가 된 자이니…….' 이건과 등중용은 씁쓸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결례를 용서하시오. 마음에 분노가 꽉 차 있다면 아무 이야기도 되지 않소. 그 울분을 밖으로 조금 터뜨려야 이야기가 될 것 같아 실 례되는 말을 했습니다." 양백의 표정은 조금 전과는 달리 사람 좋은 얼굴 그대로였다. 이건과 등중용은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명옹이 싸우려 한다는 것은 사실이오. 그는 끝없이 피를 원하고 있소. 마성(魔性)이 그의 이지까지 없애려 합니다. 나중에 그는 살인 병기로만 남을 것 같소. 지금도 저와 같은데…… 두려운 일이지요." "……." 이제 장문인들이 할 말은 없었다. "싸우지 않으려는 자는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라 하는 이유는 새로 선임된 명옹께서 그분을 파문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전대 명옹…… 따지고 보면 이제 우리와 상관이 없는 분입니다." 장문인들은 혜각의 말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은 듣고 있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나쁘지 않았소. 통쾌했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간 과 쓸개가 없는 것은 아니니…… 그러나 이제 우리도 지쳤소. 산과 들에 넘치는 피…… 명옹께서 더 이상 피를 뿌리지 말기를 바랬지요. 하지만 이미 마성에 혼을 반쯤 뺏겨 버린 명옹께서는 우리의 청을 듣지 않았소. 그 때문에 성녀께서는 그분을 파문에 처하고 새로운 명 옹을 임명하신 게요." 양백은 교의 내부 사정까지 이야기했다. "양 보주, 구룡선주를 파문에 처했다고 배교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없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구룡선주는 이제 당신들과 상 관없으니 당신들을 잊어 달라고 온 것입니까?" 일진도장이 물었다. "그런 말을 하실 줄 알았소. 우리는 십 몇 년 전의 누구처럼 책임 을 져야 할 일도 사파니까라는 한마디 말로 책임을 모면하려는 자들 과 다르오. 책임을 지겠소. 앞서 이야기한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 겠다고 하더라도 책임을 지겠소. 우리는 배교도이니까." 양백은 다시 한 번 구대문파에 대한 통렬한 일침을 가했다. 이번에 한 말을 정말 감정 섞인 말이었다. 왜, 왜,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는가? 저들은, 저들은 자신 들의 잘못에 대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있는데……. 양백은 울컥하는 감정에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나… … 이 길 말고 강호의 평화는 영원히 없을 듯했다. "우리들의 성녀께서는 암가의 피를 봉인할 힘을 가지고 계시오. 원 양대진력금마대법(元陽大眞力禁魔大法)! 새해가 시작되는 이번 춘절( 春節)에 성녀께서는 명옹의 마력을 봉인하실 것입니다. 명옹도 한 때 는 누구 보다 교를 아꼈던 사람…… 성녀께서 눈물로 내린 결정이오. 구경하러 오실 분은 오시오. 어차피 싸우기로 결정한 것 그날을 우 리와의 일전의 날로 택9해도 무방하지 않겠소." 양백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이만 가겠소. 그리고 혜각, 이왕이면 춘절에 보세. 나는 자 네에게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네. 앞서 말한 대로 일전의 날로 택해도 무방하고……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날 성 녀께서는 암왕의 후예를 봉인할 것일세." 그가 등을 돌렸다. 혜각을 비롯한 장문인들은 양백이 나가는 것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 참괴한 패배감이 그들을 감쌌다. 의창의 패배를 들었을 때 보다 더 지독한 패배감이었다. "아!" 객방을 나서려던 양백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백염왕! 탈명마효! 구룡선주! 다음에는 또 누구이겠소? 암가의 피는 끊이지 않을 것이오. 배교도들이 어떤 이유로 명왕을 버리고 암 왕을 찾는 한…… 암왕을 찾을 이유를 만들어 주지 않기를 바라오. 가까이 그대들이 마인거주라 부르는 자도 있소. 성녀께서 마음을 잡 았으나 언제 마성을 폭발시킬 지는 아무도 모르지. 배교를 치려 할 때는 꼭 그 사실을 기억해 주기 바라오. 또 하나…… 이번처럼 암왕 의 후예를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우리들의 성녀를 핍박이나 마시오. 성녀의 피가 끊긴다면 그 누가 암왕의 힘을 봉인할 수 있겠소. 기억 하고 기억해 주시오. 아무쪼록 검문의 평화를 바랍니다. 세상에는 이 런 자가 있으면 저런 자도 있을 수 있지 않겠소. 그리고 나에게는 생 색을 낼만한 약간의 재물이 있소. 사람의 목숨이야 어디 재물로 보상 되겠소만 그 외의 것은 최대한 신경을 쓰겠소."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한 말치고는 무척 길었다. 양백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성녀에 대한 이야기는 명강량 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고……. 양백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장문인들은 양백이 떠난 후에도 한동안 침묵했다. 침묵을 깨뜨린 자는 현청도장이었다. "대사, 어떻게 할 생각이오?" 그가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미타불! 가 봅시다. 가 봅시다. 그 친구의 말대로 일전을 벌이 든 구경을 하든……." 혜각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 * * 며칠간 눈발이 보이지 않더니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눈발을 헤치며 누군가가 다가왔다. 감악과 전우삼이었다. "팔자 좋군!" 전우삼은 오자마자 도끼눈으로 소리쳤다. 쾅! 그가 장도로 흙벽을 우르르 무너뜨렸다. "나오시오! 나는 당신과 꼭 한 판 붙어 보고 싶었소! 내가 당신을 꺾고 수괴가 된다면 모든 것이 달라지겠지!" 전우삼은 분을 참지 못하고 씩씩댔다. 명강량은 전우삼의 말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눈발을 맞으며 너른 공터에 섰다. "원양대진력금마대법? 웃기고 있군! 내가 익힌 무공은 암왕의 무공 이 아닌 줄 알아! 받아라!" 전우삼은 앞 뒤 가리지 않고 장도를 번뜩였다. 명강량의 천음검도 빛을 뿌렸다. 쩅! 쨍! 쨍! 눈발은 천공을 제멋대로 휘날리고 도검에 부딪힌 삭풍은 갈 길을 찾지 못해 허둥댔다. 명강량과 전우삼은 용호(龍虎)로 어우러지며 정말 서로를 죽일 듯 격렬하게 싸웠다. 감악은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싸움은 한 시진이나 계속되었다. 전우삼은 자신의 모든 절예를 쏟아 붓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명강량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가 갑자기 장도를 뚝 멈추었다. 숨을 씨근덕거렸다. "뭐야! 도대체 무엇을 하겠다는 거야! 모두 쓸어버리면 될 것을!" 전우삼이 꽥 고함을 질렀다. 그는 울화를 풀길 없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우삼, 찾아올 줄 알았다. 네게는 더 이상의 일, 교와 어린 성녀를 혹시 있을 놈들의 공세로부터 지켜야 하는 일이 있지만 나에게는 이 제 더 이상의 일이 없다.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야 기는 하지 마라." "시끄러워! 들리지 않는다구!" 전우삼은 신경질적으로 흙을 발로 찼다. 명강량의 시선이 감악에게로 향했다. 감악은 계속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입 밖 으로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감악, 그 동안 정말 수고 많았다. 너를 보면 나도 사람 보는 안목 은 제법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십 몇 년 전 무산에서 너에게 전교 영기와 신장도를 넘길 생각을 했으니…… 하하하!" 명강량의 웃음이 맑게 울렸다. "옛일을…… 옛일을…… 자꾸 기억나게 하지 마십시오." 감악은 푹 고개를 숙였다. "보아라. 세월의 흐름이 그와 같다. 그때는 살을 저미는 고통뿐이 었지. 그러나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이다. 지금 이 자리 도 먼 훗날 보면 마찬가지일 것이야." "전 명두도 나도 잘 찾아보면 다른 선택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꼭 그 방법을 고집해야겠습니까?" "내가 찾기가 싫다. 견딜 수 없이 지루했다. 이제야 조금 평안을 찾았어. 하하하, 그렇게 보이지 않느냐?" "……." "감악, 우리 교의 호교신장이여. 나의 파문은 아직 유효한가?" 명강량이 문득 물었다. 감악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랐다. "죄송합니다. 저는 명옹의 마음을 잠시 의심……." 명강량은 감악의 말을 잘랐다. "아니다. 너의 결정은 정당했다. 네가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는 호교신장으로써 너의 자질을 의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한 때 호교신장이었기 때문에 호교신장의 명에 대해 잘 알지. 파문을 번 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배교로부터 받은 것 배교에 돌려 주고자 한다. 개천양일진력을 돌려주겠다. 역혈대법으로 네 몸을 씻 을 것이다. 비록 전우삼이 있다고는 하나 결국 호교신장으로써의 일 은 호교신장이 해야 한다. 나처럼 성녀도 지키지 못하는 누추한 호교 신장이 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받겠느냐?" "배교의 것! 돌려 받겠습니다!" 감악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했다. "좋아, 좋아! 아주 기분이 좋군. 우삼, 어떠냐? 대화룡을 안주 삼 아 술 한 잔 하는 것이……." "미친 지랄도 골라서 하고 있군! 명옹이야 파문 당한 자이니 술 운 운해도 괜찮지만 나는 안된단 말이야! 감악이 없는 틈을 타 살짝 가 겠어. 대화룡이나 노릇노릇하게 구워 놓으라구. 으…… 정말 기분이 뭐 같아서 술 생각이 간절하군. 이해할 수 없어. 우리가 왜 그 개새 끼들 때문에 이러고 있어야 하지?" 전우삼은 충혈된 눈으로 하늘을 우러렀다. 황산에는 유난히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다. "아란하……." 예령은 자신의 머리를 땋고 있는 아란하를 불렀다. "표정이 내내 어두워 보여요. 그분의 일 때문이죠?" 아란하는 흠칫 손길을 멈추었다. "아닙니다. 근래에 몸이 좋지 않아서……." 그녀는 황급히 변명했다. "거짓말하지 말아요. 속일 수 없는 걸요. 아란하, 나는 괴로워요. 아란하가 그런 표정으로 있는 것이…… 단 아저씨를 생각하면 화가 나지만 아란하를 생각하면…… 나는 원양대진력금마대법인가 하는 것 을 시전 하지 않을 용의도 있어요. 세상의 일은 모르잖아요. 그분의 마음을 돌릴 또 다른 방법이 있을지." "안됩니다! 설혹 내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성을 봉인해야 합니다! 수 천명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이에요!" 아란하가 거세게 소리쳤다. "다른 일이 아닙니다. 마성을 봉인하는 일입니다. 마성을 봉인하면 오히려 좋지요. 앞으로 다루기도 편할 테니…… 성녀, 거친 남자는 처음에는 좋아 보여도 나중에는 짐만 될 뿐입니다." 그녀는 밝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음, 그런가요? 그런데 아란하, 근자에 기분이 이상한 사람은 정말 나예요. 내 주위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일이 무슨 일인지 도통 보이지 않아요. 이런 일은 없었는데……." "천화원을 떠나 갑자기 너무 많을 일을 겪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란하가 뜨끔한 마음을 감추며 말했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가리는 금제(禁制)를 펼쳐 놓은 것 같아요." "누가 감히 성녀의 마음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기분이 그런 것이 겠지요." "어머니……." "전대 성녀?" "그냥 그렇다는 거예요. 아! 아란하, 저녁에 놀러 가지 않겠어요? 춘절이 코앞이라 저자 거리에 구경할 것도 많을 거예요." 예령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춘절이 코앞이었다. 성녀를 비롯한 모두는 언젠가 함께 신나게 논 적이 있는 낙빈에 머 물고 있었다. 내일이면 총단에 올라야 한다. 전대 명옹의 마성을 제 압하기 위해……. 가슴이 저렸다. "그렇게 하기로 해요. 이번에는 신 명전도 함께……." 아란하는 내색을 꾹 참으며 말했다. "신 아주머니도 함께? 좋아요! 낙조, 이번에는 방해를 하면 안돼!" 예령은 좋아라 하며 낙조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화가 난 낙조가 날개를 퍼덕이며 천방지축으로 날았다. 아란하는 예령, 신화정과 함께 밤거리를 한참 배회하다가 돌아왔다 . 잠이 올 리 없었다. 대전왕에게 봉인해야 할 마성이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전왕은 원양대진력금마대법으로 봉인해야 할 마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성을 봉인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봉인한단 말인가? 대전왕이 대계 (大計)를 위해 내놓을 자신의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아란하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이 터져 나갈 듯했다. 결국 그녀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낙빈을 빠져 나와 황산 총단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그 리고 가쁜 숨을 허덕이며 발길을 멈춘 곳은 폐허……. 명강량은 그 앞에 서 있었다. 아란하가 올 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녀를 껴안으며 깊은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 이후에도 말은 필요 없었다. - 그날 명강량의 모든 마음은 아란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천 음관이 오랜만에 깊고 투박한 음률로 밤하늘을 수놓기도 했다. * * * "춘절을 지났기 때문인가? 날씨가 너무 다르군." 일진도장은 하늘을 우러렀다. 너무도 맑고 투명했다. "좋은 날이구나." 그는 광명정을 올려다 본 후 뒤로 시선을 돌렸다. 펄럭이는 깃발, 굳은 표정으로 광명정을 오르는 수백 명의 무사들 ……. 구파일방만이 아니었다. 천화원 천위대의 부대주 한고가 이끌고 온 무사들, 주인의 복수를 위해 분연히 칼을 든 사패의 수하들, 그리고 무엇 보다 눈길을 끄는 자들은 후미에서 묵묵히 걸어오는 일곱 명의 무사들이었다. 숭무각주, 남궁기의 친구들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들……. 편(鞭), 극(戟), 필(筆), 당(　)……. 각양각색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싸움을 피하기는 어렵겠군.' 일진도장은 미간을 좁혔다. 그들의 냉랭한 기도로 보건대 싸움을 포기하지 않을 듯했다. 한고 의 천위대 무사들이나 사패의 수하들도 복수심에 눈이 뒤집혀진 상태 라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숫자는 많아도 세부족을 느끼면서 올라온 자들이다. 이미 목숨은 내놓았다는 뜻……. '어떤 일이 벌어져도 구룡선주의 마성을 봉인하겠다고 했는데……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배교에서 구룡선주를 봉인했는데도 저들이 싸움을 하겠다고 하면…… 난처한 일이 벌어지겠군.' 일진도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난처함에 앞서 어쨌든 배교도들 이 구룡선주의 마성을 봉인해 주었으면 했다. 능운공작도 상대가 되지 않았던 자, 구룡선주! 지금도 마성으로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하니 이것저것 생각할 처지 도 아니었다. 무생문을 바라보고 올라가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사방위, 삼십육호교사들이 감악 일행을 맞았다. "조금 늦었군요. 구파일방을 비롯한 자들은 벌써 올라와 있습니다. " 그들 뒤에 있던 양백이 나섰다. "명옹께서는?" 전우삼이 거칠게 물었다. 그는 이 이상한 일을 계획하고 벌인 자를 양백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를 보는 눈길도 곱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판을 깨어버릴까로 망설였다. 하지만 명강량이 술자리에서 경거망동을 하지 못하도록 엄하게 한 이야기가 있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굴렸다. "아직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왔다고 이야기하지 마시오! 그곳이 그렇게 좋다면 계속 처박혀 있으라지!" 전우삼이 꽥 고함을 질렀다. 아란하가 나섰다. "나오라고 하세요. 대전왕은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를 받아 야 합니다."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하루 전과 달리 어쩐지 표정도 여유로와 보였다. "대가는 무슨 대가!" 전우삼은 분통을 터뜨렸다. "전 명두……." 아란하가 그를 불렀다. 아란하의 시선과 전우삼의 시선이 얽혔다. 전우삼은 갑자기 변한 아란하의 차가운 시선에 놀라 흠칫했다. "감정은 전 명두에게만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걸로 착각하지 마세요!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그녀는 전우삼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었다. "흐흥, 그래 잘 해 보라지." 전우삼은 조금 무안한 표정으로 시선을 휙 돌렸다. 아란하는 다시 안색을 바꾸었다. 그녀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았다. "성녀, 책임이 커요. 성녀 외에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녀가 긴장으로 서 있는 예령을 다독거렸다. 왠지 조급하고 초조해 보이던 아란하가 여유로 충만하다는 것을 느 낀 사람은 감악뿐만이 아니었다. 아란하의 여유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한 무거운 짐을 드는 데 조금의 도움은 되고 있었다. "자, 올라 갑시다." 양백이 손을 저었다. 그들은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사들 이상의 무 거운 발걸음으로 총단에 올랐다. 광명정에 투명한 햇살이 연신 쏟아졌다. 바람은 조금 거셌다. 펄럭이는 깃발, 구파일방을 비롯한 제 세력은 동편에 쭉 열을 지어 있었다. 감악을 비롯한 배교도들은 서편……. 전우삼을 선두로 사방위, 십위병, 삼십육호교사가 수백 명의 적들 을 눈앞에 두고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히 서 있었다. 해가 중 천을 지났을 때 광명정에 발을 디뎠다. 이제 해는 제법 기운 상태였 다. 침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기다렸다. 명강량의 출현을……. 옛 대화로 터에는 없었다. 대화로 터도 사라지고 없었다. 명강량이 날려 버린 것이 분명했다. 해는 연신 기울고 동편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구룡선주가 이곳에 없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었다. 눈앞의 자들을 처치하고 마지막으로 구룡선주를 처치하자는 목소리 도 커졌다. 그러나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꼼짝 않았다. 그 와중에 낙조(落照)가 내리고 그들은 소요 속에 더욱 웅성거렸다 . 그때였다. "앗!"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광명정 정상이었다. 한 인영이 기우는 해를 등지고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석양에 전 신을 붉게 물들인 자였다. "구룡선주……." 동편의 자들은 이를 깨물었고 서편의 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명 강량이었다. 그는 홀로 초제를 지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총단에 선 자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산을 내려오는 명강량의 일거 수일투족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명강량의 걸음걸이는 느려 보였어도 순식간에 총단에 발을 들이고 있었다. 그는 구파일방을 비롯한 무사들을 바라보고 섰다. 사이한 입가의 미소, 뱀의 눈처럼 차갑게 번들거리는 눈빛, 잔양( 殘陽) 속이라 괴기스러움은 더했다. 살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며 그들을 감쌌다. "너희들은 누구냐? 누가 나의 허락도 없이 나의 땅에 발을 디뎠느 냐?" 유부를 울리는 듯한 음산한 목소리가 중인들의 귀를 때렸다. '헉!' 구파일방을 비롯한 동편의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싸울 결심을 하고 올라왔으나 막상 구룡선주를 보자 공포가 앞서는 그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명강량은 쥐를 눈앞에 둔 뱀처럼 스 르르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사삭! 삭! 삭! 바람을 가르는 경미한 소리와 함께 후미에 있던 몇몇 자들이 움직 였다. 바로 숭무각주의 친구라 밝혔던 일곱 명의 무사들이었다. 팟! 그들은 각자의 병장기를 번뜩이며 명강량을 향해 경쾌하게 날 아올랐다. 찬탄이 절로 터져 나오는 멋진 동작이었다. 기파도 중인들 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엄청났다. 동편의 자들은 우리가 왜 저런 자들을 몰랐을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파파팟! 일곱 자루의 서로 다른 병기가 허공을 가르며 명강량의 전 신을 노리며 비산했다. 명강량의 장심은 어느 틈에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붉은 장영 이 허공을 번뜩였다. 퍽! 퍽! 퍽……. 둔중한 육타음이 중인들의 귓가에 울렸다. "으, 으……." 악다문 입 사이로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기세 좋게 구룡선주를 육박하던 일곱 명의 무사들은 허공에서 자신 들의 피로 찬란한 꽃을 피우며 한 줌의 핏물로 주르르 내려앉고 있었 다. 투지가 졸지에 싹 사라져 버린 자들도 태반은 가까웠다. "살아서 나의 땅을 내려가는 자는 없으리……." 스르르르……. 비구에서 하얀 물체가 석양에 비쳐 붉은 빛을 받으며 빠져 나왔다. 대망의 혓바닥 같은 연검이었다. 혜각을 비롯한 장문인들은 그 순간 일제히 양백을 향해 시선을 던 졌다. 양백의 시선은 아란하로 향했다. 아란하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별로 보고 싶은 장면이 아니었다. "성녀, 이제 나서야 할 때입니다. 금마대법으로 저주받은 마성을 봉인하고 저들의 목숨을 구해 주십시오." 그녀는 잡고 있던 예령의 어깨를 놓으며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 었다. 예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또박또박한 걸음으로 명강량을 향해 다가갔다. "멈추세요!" 그녀가 소리쳤다. 명강량은 예령을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암왕의 피를 받은 자! 당신의 힘을 봉인하겠어요!" 예령은 소매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번쩍 들었다. 묵빛 구슬, 화령주였다. 석양에 비친 화령주가 채홍색 빛을 뿜으며 찬란하게 빛났다. "핫하하! 하하하하……." 명강량은 광소를 터뜨렸다. 동편의 자들에게는 귀를 막아야 할 마소(魔笑)였지만 서편의 자들 은 아니었다. - 백년감일소(百年堪一笑)! 단원홍의 검신에 새겨진 바로 그 글 같은 웃음이었다. 아란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양백은 깊은 한숨을 쉬었고 감악은 그가 충심으로 따르던 자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눈을 부릅 떴다. 전우삼은 화산처럼 폭발하는 분노를 참기 위해 주먹을 으스러 져라 쥐었다. 명강량의 전신에서 붉은 운무가 폭풍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그 운 무는 자신을 가리고 예령을 가렸다. 붉은 운무 속에 두 사람이 있었고 군웅들은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그 둘의 일은 그 둘만이 알뿐이었다. 초조함 속에서 귀추(歸趨)를 기다릴 도리밖에 없었다. 그 기다림은 생각 보다 짧아 잠깐이었다. 명강량과 예령은 붉은 운무 속에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예령은 화령주를 두 손에 들고 원양대진력금마대법의 구결을 외었 다. 그리고 그녀는 화령주를 힘껏 던졌다. 예령의 힘은 화령주가 명강량의 가슴에 간신히 닿을 정도로 약했다 . 그러나 화령주는 유성처럼 스르르 흐르며 명강량의 심장을 향해 다 가가고 있었다. 예령은 화령주를 던진 후 명강량을 응시했다. '어!' 그녀는 이상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눈빛……. 너무도 따뜻하고 포근했다. 안고 있는 듯한 촉감이 느껴질 정도의 눈빛이었다.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까지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명강량은 예령에 대한 자신의 본 마음을 끝까지 숨길 수 없었 던 듯했다. 꼭 불러 보고 싶은 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이게 아닌데…….' 예령은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화령주가 명강량의 심장에 부드럽게 닿았다. 명강량은 자신의 눈동자에 예령을 꽉 담았다. 피가 한꺼번에 미친 듯이 거꾸로 흘렀다. 역혈대법이었다. 퍽! 하는 내부의 울림과 함께 그의 몸이 흔들렸다. "악!" 예령은 비명을 질렀다. 쫙! 명강량의 입에서 피가 구천(九天)을 찌를 듯 치솟아 오르고 있 었다. 몸 속의 피란 피는 모두 밖으로 쏟아지는 듯했다. 핏줄기가 그치고 그의 몸이 기울었다. 쿵! 그가 가지런한 자세로 누웠다. 암천(暗天)……. -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얼굴, 너무도 친숙한 체향, 귀에 익은 목소리……. "강량, 오랜만이에요." 악약이 뒷짐을 진 채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오. 그 동안 어떻게 지냈소?" 명강량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조금 바빴어요. 당신이 있을 곳을 꾸미느라……." "내가 있을 곳? 그런 곳도 있소?" "하하하! 저 세상 보다 이 세상이 훨씬 넓고 넓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군요. 사람들은 두 개의 문이나 세 개의 문밖에 없는 줄 알고 있지만……." "나도 그렇게 생각했소. 그래서 흑암(黑暗)에 누울 준비를 했지." 명강량은 씨익 웃었다. "비천쌍마는 준비했나요?" "다행히 가지고 있소." "그럼 당신과 나, 우리들의 세계로 가보실까요? 당신 때문에 늦어 졌다고 교룡들이 난리예요." 악약이 손을 내밀었다. "예령은?" "그 아이는 나 보다 몇 배 뛰어난 아이이어요. 우리가 걱정하지 않 아도 되요." "알았소." 명강량은 악약의 손을 잡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예령은 물러나고 양백과 감악, 전우삼, 아란하 등은 술 취한 자처 럼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양백 등은 명강량의 시신 주위에 쭉 둘러섰고 아란하는 예령을 껴 안았다. "성녀의 잘못이 아닙니다. 성녀의 잘못이…… 이미 그의 마성이 골 수까지 파고들어……." 아란하는 결국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했다. 어깨를 떨며 예령을 꼭 껴안고만 있을 뿐이었다. 혜각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다가왔다. 그들은 양백 등의 뒤에 쭉 섰다. 주위에 뿌려진 흥건한 피,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 배교도들의 허 탈한 표정……. 더 이상 죽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둠과 함께 무거운 정적이 그들의 어깨를 짓눌렀다. 구룡선주의 죽음! 영원히 죽지 않을 자 같았다. 그래서 죽음을 확인한 후에도 한동안 구룡선주의 죽음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아미타불! 부디 내세(來世)에는 좋은 인연을 맺기를……." 비로소 혜각은 합장(合掌)을 한 후 등을 돌렸다. 일진도장과 현청도장, 이건, 등중용도 따라서 등을 돌렸다. 그들은 실성한 사람처럼 구룡선주의 곁에 서 있는 배교도들을 뒤로 하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왔다. "죽었습니까? 혹시 귀식대법 같은 것으로 죽음을 위장하지는 않았 던가요?" 한고가 급히 달려나오며 물었다. "죽었소! 저만큼 피를 뿌렸는데 무슨 재주로 살 수 있단 말이오!" 등중용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화를 내는 이유를 몰랐다. 대악적 구룡선주가 죽었으니 춤을 추어도 모자랄 판인데…… . "죽었어. 그는 죽었어." 한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중인들의 귀를 질풍으로 강타했다. 중인들의 얼굴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 흥분은 곧 배교에 대한 맹렬한 적개심으로 이어졌다. 구룡선주의 죽음이 힘없는 자의 감정을 한순간에 힘있는 자의 감정 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죽이자!" "배교놈들을 처단하라!" "마전(魔殿)을 불태워라!" 중인들은 악을 쓰며 배교도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문인들이 막으려 했으나 그들은 광란으로 흥분하며 배교도들을 육박했다.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의 제자들이나 단속해야 했다. 중인들은 기세등등하게 몰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구룡선주의 죽음 이라는 엄청난 사건에 흥분해 잠깐 잊은 사람이 있었다. 마인거주! 그들이 그렇게 부르던 자……. 실혼인처럼 멍하니 명강량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던 전우삼은 주위 의 소란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충혈된 눈이 달려드는 자들에게 고정되었다. "헤헤헤! 으헤헤헤! 으하하하!" 전우삼은 황산이 무너질 정도의 광소를 터뜨렸다. "개새끼들! 쥐떼 보다 못한 것들이!" 그는 장도를 빼 들고 폭풍으로 달렸다. "크악!" "칵!" "으악!" 추풍낙엽이었다. 아무도 막을 자가 없었다. 잠깐 사이 잘려진 목과 팔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피가 땅을 적셨다. 감악은 무슨 생각인지 비틀거리며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고 명두 들은 여전히 멍하니 서 있었다. 양백은 허망한 눈빛으로 하늘만 쳐다 보고……. 여자들은 약하지 않다. 남자들 보다 강하다. 아란하와 신화정이 그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신 명전!" 아란하가 신화정을 불렀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인지 신화정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 명두, 고 명두, 장 명두……." 그녀는 명두들을 불렀다. "여기까지 왔는데 모든 일을 허사로 만들 수 없어요. 전 명두를 말 려야 합니다." 그녀가 전우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우삼은 연신 '개새끼들!'을 외치며 적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죽 일 자를 찾아 가만히 서 있는 구파일방에도 달려들 기세였다. 명두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정과 함께 그들은 전우삼을 말리기 위해 달려갔다. 감악이 비틀거리며 간 곳은 서북쪽 양지(陽地) 바른 곳에 자리한 등광전(騰光殿) 지붕 위였다. 그는 두 손을 모으고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강량! 강량! 강량.……." 서북쪽을 바라보며 죽은 자의 이름을 외치는 것을 초혼(招魂)이라 하는데 배교에는 없는 상례(喪禮)다. 그럼에도 감악이 명강량을 부르 고 있는 것은 그런 식으로도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나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놔! 놓으란 말이야!" 전우삼은 신화정과 명두들을 몸에서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고 감악은 목놓아 연신 명강량의 이름을 외쳤다. 예령은 어깨를 들썩이는 아란하의 품 안에서 명강량의 눈빛과 그 미소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었다. 구파일방의 장문인들과 제자들은 침묵하고 싸움을 외치며 달려들었 다가 혼쭐난 자들은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고……. 그런 때였다. 갑자기 황산에 음률이 쫙 울려 퍼졌다. 모든 자들의 동작을 일시에 멈추게 하는 장중한 음률이었다. 갈고, 강적, 필율, 나팔, 방향, 박판……. 각자의 악기를 잡은 남녀노소가 울긋불긋한 한 대의 상여를 메고 유수(流水)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양백의 눈빛이 빛났다. 황하의 꽃배에서 본 바로 그자들이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예령의 앞에 이르렀다. 갈고를 든 늙은이가 예령 앞에 섰다. "새로운 성녀시여. 우리는 전대 성녀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여기 서 저 문턱까지 저분을 데려가기 위해……." 그가 예령에게 말했다. 그 사이 나머지 자들은 이미 명강량의 시신을 상여에 싣고 있었다. 아란하가 그들의 행동을 저지하려 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몸을 움 직일 수가 없었다. "새로운 성녀시여. 우리들은 새 성녀와도 멋진 음률로 노래하며 며 칠을 즐기고 싶습니다. 그러나 워낙 바빠…… 늙은 자라가 그 연못의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할까 걱정됩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만……. " 갈고를 든 늙은이는 깊게 머리를 숙였다. "할아버지, 빨리 가요!" 박판을 든 소년도 그를 재촉했다. 갈고를 든 늙은이가 상여 앞에 섰다. 각양각색의 악기를 든 자들이 상여를 들었다. "그대들은 누구세요?" 예령이 물었다. "우리들은 사해의 교룡들입니다. 세상의 지락을 찾아 천하를 떠돌 던 중 성녀를 만났습니다. 성녀를 만나고 나니 이 놈의 세상이 너무 좁고 너무 재미없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서 서둘러 이 곳 을 떠나려는 중입니다." 갈고를 든 늙은이가 말했다. "가자!" 그가 손을 저었다. 상여를 든 자들이 때를 맞춰 일제히 음률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들 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어둠 속을 빨려 들어가듯 멀어져 갔다. 군웅 들은 그들이 한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상여도 사라지고 음률도 사라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모든 자들은 다시 아수라장으로 움직였다. 감악은 여전히 '강량!'을 외치고 전우삼은 발버둥치고 아란하는 울 고 신화정과 명두들은 매달리고 적들은 달아나고……. 조금 전의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예령뿐인 듯했다. 예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여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었다. "어!" 그녀의 눈이 커졌다. "아란하……." 예령은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아란하를 불렀다. 아란하가 눈물을 감추며 고개를 들었다. "아란하, 보이지 않으세요?" 예령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란하의 시선이 예령의 손끝을 따라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눈 물로 인해 뿌옇게 보이는 하늘뿐이었다. 아란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예령이 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늘을 질주하는 비천쌍마! 일곱 마리의 교룡들이 꿈틀대며 그 주위를 따라가고 있었다. 비천쌍마는 순식간에 예령의 머리 위로 날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를 몇 번 맴돌았다. "아!" 예령은 탄성을 터뜨렸다. 비천쌍마를 탄 자들을 본 것이다. 너무도 눈에 익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예령을 감싸듯 팔을 벌렸 다. 그리고 한줄기 빛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그 순간, 예령은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그들과 자신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예령은 돈오(頓悟)로 한순간에 모든 진리를 꿰뚫어 버린 고승처럼 모든 것을 알아 버렸다. 그들과 그들을 둘러싼 모든 자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하고자 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예령은 기쁨에 들떠 환하게 웃었다.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벅차게 치솟는 희열(喜悅)을 참지 못해 흘리는 눈물이었다. * * * 광명신장이여. 나는 알았다. 명왕을 찾아 신전을 세우던 그들의 마음을, 명왕을 찾다가 지쳐 암 왕을 부르던 그들의 마음을……. 나는 알았다. 암왕으로 남아 어머니를 향한 꿈을 지키려던 우리 아버지의 마음을 , 암왕의 꿈속에 명왕의 빛으로 남아 아버지의 영혼을 지키려던 우리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알았다. 나는 알았다. 명왕을 부르고 암왕을 부르고 명왕을 봉인하고 암왕을 봉인하는 그 높고 높은 곳에 걸린 사람들의 마음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그 모든 마음을! "우리 교의 귀여운 딸, 어린 성녀여! 그대는 우리 교의 천 년 영화 의 비밀을 알아 버렸구나. 축하한다. 축하한다." 바위처럼 묵묵하게 앉아 있던 광명신장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그는 점점 미소 띤 바위로 굳어 갔다. 예언이 필요치 않았으므로 천 년 정도의 세월은 바위로 자리를 지 켜도 무방했다. * * * 광명정에서의 그날 이후 나는 배교도들을 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 , 증발한 것처럼 그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높은 산의 밀교처럼 심심상인의 묘법으로만 그들의 교의를 전해 가 는지 아니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또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는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배교도의 출현을 들을 때는 있다. 그러나 나는 배교의 이름을 걸고 나타난 그들이 보권의 한 구절을 읊조리는 것도 들은 적이 없 다. 예전 구룡선주의 위용을 탐내 그 권위에 힘입고자 하는 자들의 수작 이상은 아니었다. 사라져 버린 그때 그 배교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끔 그들의 뒷 이야기가 궁금해질 때는 있다. 묻지 않아도 아마 언젠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뒷 이야기를 하기 위 해 강호에 나타나리라. 그때가 언제인가? 나의 대는 아니었으면 한다. 암왕의 후예가 아닌 명왕의 후예로 나타나도……. 내가 지금 서 있는 이곳을 흔들 그 어떤 것의 출현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백조의 말이 맞다. 좋은 날은 세상이 조금 따분하게 느껴지는 그 날이 가장 좋은 날이 다. - 끝